잠근 동산으로 오라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아 4:12-15).
구약 성경 중에서 이 책이 정말 성경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을 많이 불러일으켰던 책이 바로 이 아가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가서에는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육체적 묘사와 함께 상세히 실려 있기 때문에 진정성을 의심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은 오랜 세월 교회에서 읽혀오면서 성경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관계를 남녀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시면서 무엇인가 우리에게 신앙에 있어서 생명적으로 중요한 어떤 것을 전달하고 싶으셨기 때문에 아가서를 저희들에게 남겨두신 것입니다.
이 아가서는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 의해서 지어졌는데 이 아가서를 기록할 때에 솔로몬은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침체되었던 때가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안정되고 신앙적으로도 주님을 깊이 만난 은혜의 감격을 누리던 때에 이 작품이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솔로몬과 술라미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에 대한 그림 같은 묘사와 노래들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의 깊이를 이야기 합니다. 신앙을 가지고는 있지만 깊이가 얕은 사람보다는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더 훌륭한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깊이란 무엇일까요? 오래 교회를 다닌 것도 신앙의 깊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교회에 와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하는 직분의 상승이 곧 그것이 신앙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신앙의 깊이는 단지 성경에 관한 지식이 늘어나는 것만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의 깊이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영성의 마지막 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깊이는 곧, 사랑의 깊이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주님을 믿을 때 그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씨앗이 떨어지고 끊임없는 신앙의 성장 속에서 이 사랑이 자라가고 성숙해 갑니다. 신앙의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만한 큰 죄를 짓고 그렇게 범죄 하는 것을 타락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타락은 어제보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신앙의 모든 의무를 다 이행하되 주님을 향한 착한 사랑의 인격이 결핍된 것,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신앙적인 타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소설에서나 노래에서나 사랑과 짝을 이루며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숨 혹은 죽음입니다. 레오 톨스토이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죽음의 공포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의 감정입니다. 헤엄 못 치는 아버지가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뛰어드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 시킨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목숨을 건 사랑,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랑, 진정한 사랑의 의무를 찾기 위해서 사랑이 없는 삶보다는 차라리 사랑이 있는 죽음을 택하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 존재해야 할 사랑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바로 이 사랑의 깊이입니다.
사랑의 이유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될 때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끊임없이 깨닫게 하실 때에 당신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알 사람이 없고 진리의 깨우침을 받은 지성이 아니고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언제나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참다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 곳에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깨우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보니까 예전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자비로우신 분인 줄 몰랐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은 새로 깨닫게 된 하나님 때문에 뛰게 되고 그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신앙의 깊이를 더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입니다. 그냥 한 교회에 눌어붙어 앉아서 영혼이 비틀리도록 메말라서 죽은 자처럼 교회에 심겨져 있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신앙의 성장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그래서 사랑의 깊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신앙을 맨 처음 가질 때에는 주님 때문에 내 인생에 도움을 받아볼까 해서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들이 깊이 사랑해야 할 마지막 우리 인생의 목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며 그 사랑을 배워가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과 합일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랑을 하필이면 남녀의 관계에서의 사랑을 가지고 묘사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경험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성격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자, 보십시다. 어떤 나이든 혼기가 찬 자매가 있다고 합시다. 내 평생소원은 시집가는 것 아니겠어요? 시집가 봐야 그렇게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가려고 하지 않겠어요? 특별히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성품이 천사처럼 고운 것도 아니고 신앙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평범보다 약간 떨어집니다. 사실 자기를 눈여겨 봐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 형제 하나가 왔는데 정말 준수합니다. 얼굴이 아주 근사하게 깎아 놓은 석고상처럼 아주 수려하고 아름답게 생겼습니다. 원래 반드름한 청년들이 머리에 든 것이 별로 없는데 알고 보니 공부도 잘 했습니다. 20대에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대개 얼굴이 예쁘고 머리가 좋으면 신앙이 없는데 예배 시간마다 쳐다보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사람이 참 신앙이 진실해 보입니다. 사람이 그 정도가 되면 집안이 별 볼일이 없을 텐데 알고 보니 집안도 대단합니다. 자기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사람이 그 정도 되면 교만할 텐데 얼마나 겸손한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친절합니다. 마음이 확 열렸습니다. 저렇게 훌륭한 신랑감이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이라도 줄까나 했는데 유독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합니다. 그러니 이제 무릎을 꿇고 청원하는 날만 남았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 고백을 합니다. 아무개 자매님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합니다. 이 여자는 정말 은혜를 받았을 때도 들어가 보지 못한 황홀의 경지에 들어갔습니다. 형제가 고백을 합니다. 제 사랑에는 어떠한 거짓도 없습니다. 자매를 너무 사랑합니다. 제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합니다. 양해를 구할 것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뜨겁게 사랑하는데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는 여자가 서넛 더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은 틀립니다. 우리 아들이 부모인 우리를 공경하고 사랑합니다. 공경하고 사랑하는 길에 우리 옆집에 있는 자식도 없이 늙어가는 어떤 할아버지 할머니를 또 자기의 마음에 부모로 생각하면서 그들에게도 잘 합니다. 부모가 질투를 느끼겠습니까? 질투의 감정은 이성간의 사랑에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을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너희는 나만 섬기고 나만 사랑해야 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실까? 왜 하나님은 당신을 제일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당신만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실까?
모든 사랑은 의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 안에서 저 사람의 자원은 내 자원이 되고 나의 강함은 저 사람의 의해서 소유됩니다. 혼자였으면 부족할 사람들이 둘이 서로 사랑으로 합치되므로 말미암아 더 강하고 더 많은 자원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든지 물질적으로든지 그러면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충족되는 것입니다.
외로움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받고 싶다는 갈망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물론 좋은 것이라는 사실은 갖지만 사랑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자기 혼자 이 세상에 동떨어져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독인지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반드시 사랑에 대한 갈망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 모자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일 수 없잖아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지 않고는 그럴 수 없잖아요.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는데 왜 당신만 사랑하기를 원하시는가?
우리의 사랑은 의존적인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독립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므로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덕보고 싶어 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으로서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질투를 하실 만큼 우리가 당신만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실까?
누구든지 사랑하면 그 사랑에 의해서 모든 삶의 질서들이 재편됩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에 의해서 삶의 모든 질서들이 재편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찝쩍거리면서 사랑하는 것이 많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랑하는 것들에 의해서 자신의 삶의 질서들이 계속 영향을 받겠죠? 그러면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삶의 질서와 다른 것들도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삶의 질서들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너무 당연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이 분노하셨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지요. ‘너희는 나만 섬기는 사람들이 되라. 나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여기서 순결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순결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결은 타락할 기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깨끗한 상태로 있는 것을 가리켜서 순결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순결은 어떤 의미에서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순결은 그 배타적인 사랑으로 꽉 차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결입니다. 신자의 순결은 타락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깨끗한 상태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혹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늘 시달리며 살지만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에 꽉 차 있어서 다른 사람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순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8개의 복 중에서 최고의 복이 무엇이냐면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과 교통하는 이것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이고 하늘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복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들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입니다. 이 청결이 바로 순결입니다. 무엇인가 물 같은 것으로서 씻겨내어진 깨끗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물건들은 물 같은 것으로 씻어서 깨끗하게 되지만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차게 됨으로써 순결하고 깨끗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찬 마음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으로 충만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들과 교통하게 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에 있어서 순결입니다.
한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신자가 되었습니다. 신자가 되어도 그는 여전히 죄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고난도 시련도 괴로움도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물들, 그리고 이 세상에 들어오는 많은 현실 생활에서의 끊임없는 감각들, 우리들의 마음에 끝없이 영향을 끼칩니다. 좋은 것을 보면 갖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가고 싶고, 마음에 끊임없는 욕망과 정욕, 내 마음에 끊임없이 더러운 욕심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들을 계속 잠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도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망과 정욕에 시달렸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늘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부패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늘 이런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에겐 진실한 참회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내가 잠시 이 세상의 욕망에 흔들리고 마음의 더러운 욕심들이 일어나지만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며 이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자기를 모두 바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값없는 사랑에 대하여 깨닫게 될 때, 그때에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내가 주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면서 피곤한 영혼으로 오염된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한가? 생각하게 됩니다. 잠시 사랑했지만 참회하게 됩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깊이 참회하게 됩니다. 세상에 붙었던 욕심들이 각질이 되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내 마음이 예수의 보혈에 씻겨 집니다. 잠시까지 세상의 욕망에 더럽혔던 마음이 다시 정말 순전하게 내 마음에 다시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순례자의 삶입니다. 누가 온전히 이룬 사람이 있겠으며, 이제는 이미 붙잡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옛날의 사대부집 여인들은 가슴 속에 작은 은장도를 품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순결이 위협을 받을 때 차라리 더럽혀지기 보다는 죽음을 택한다는 각오로 은장도를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겨우 몸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런 결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우리는 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마음과 영혼의 순결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고 누가 어떤 잘못이나 죄에 빠지면 손가락질을 하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고 돌멩이를 손에 던지기 위해서 집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끊임없는 회개의 경험 속에서 다시 씻기시고 다시 깨끗케 하시고 다시 정결하게 하셔서 한때는 이 세상의 욕망에 더럽혀진 마음이 다시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찬 순결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신령한 진리의 빛은 순결한 마음에 비치고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주님께 고정된 시선으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것이 이 속에 많은 죄인인지를 참회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어주십니다. 우리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던 때는 언제였냐면 우리가 자신에게 많이 절망하고 슬퍼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내게 베풀어 주셨는데 내 마음 속에는 주님 말고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구나. 그러면서 깊이 그것이 괴로워서 눈물 흘리며 아파할 때 하나님 사랑이 계속 물 붓듯 부어주시는 겁니다. 그런 사랑!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은 너무 허접합니다. 관심사가 외적인 과신, 예수 때문에 복 받아 부자 된 이야기,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 이야기,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별로 없으면서 교회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정죄하며 살아갑니다. 다 쓰레기 같은 삶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섬기며 고난의 길을 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든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그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한 신자로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 그 사랑으로 번영 속에서도 주님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시련 속에서도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복 된 사람입니다. 마음에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사람, 주님의 사랑을 깊이 받으며 그 사랑이 내 안에 일어나는 이 은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의 삶은 죽은 삶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 언제나 행복한 일만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치고 가시밭길을 걸어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에 “아멘”이라고 대답했더니 “넌 나를 위해 죽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젊어서는 네 원하는 것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너를 사람들이 띠 띠우고 원치 아니 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미리 말씀하심 이러라.” 그랬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잠시 교회를 떨어져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는 것이 고달프게 느껴질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내가 깊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 삶이 지금의 삶보다는 훨씬 평안한 삶이었을 텐데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을 안전한 포구에 두지 않고 거친 바다로 배를 태워 보내십니다. 은혜의 깊은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을 잔디밭에서 놀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거친 광야를 걷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전해야 할 사명이 그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평안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 도전이 있는 것은 그에게 사랑받은 사람만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끊임없는 자신의 욕망을 참회의 눈물 속에 씻어내면서 약하지만 날마다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친구들이 자기를 다 버리고 외톨이 되게 할 때 그는 오히려 그 외로운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꿈꿉니다.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그래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갑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과 같은 사랑의 은혜의 경험이 계속 솟아나는 겁니다. 내 안에 솟아나는 그 하나님의 사랑, 이 더럽고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서 계속 솟아날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세상에 붙은 욕심을 버리게 됩니다. 날마다 날마다 주님 이외의 것을 사랑하려는 우리 자신을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거친 세상에 사랑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직 더 살아야 하는데 그 속에서 당하는 많은 상처와 고통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토해 놓게 됩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합니다. 주님을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사랑하시고 자기를 다 포기하셨는데 난 내 안에 있는 버리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창칼로도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을 그리스도의 뜨거운 핏빛 사랑 앞에서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나를 버리고 주님을 붙들게 됩니다. 누구도 이미 도달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도 이미 나는 붙잡았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신자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는 필요합니다. 그렇게 이 배에서 주님의 사랑이 계속 솟아나게 될 때, 그때 우리의 성품과 인격에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동산이 잠겨 있습니다. 이것은 공원이 아닙니다. 공원이 얼마나 더러운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잠긴 동산입니다. 왕의 비원입니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왕의 비원입니다. 달칵하고 왕이 정원을 여는 소리가 들릴 때 그 정원은 신랑이 자기의 세계 속에 들어오는 것을 인해서 기뻐 떨게 됩니다. 거기에 덮은 우물이 있습니다. 누구 눈에 쉽게 띠지 않도록 낙엽으로 덮여진 우물이 있고 그 뚜껑을 여니까 왕 이외에 누구도 마실 수 없는 봉한 샘이 있습니다. 봉해진 그 샘, 우물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서 온 동산을 두루 적셨을 때에 거기에서는 번홍화와 나도와 나도초와 계수와 계피와 유향목과 많은 향초, 약초, 값진 열매를 맺는 귀한 식물들이 자라서 동산의 가치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우물은 그 덮여진 상태에서 샘은 봉해진 상태에서 아무도 없는 그곳에 끊임없이 맑은 물을 흘려보냈을 뿐인데 그렇게 해서 촉촉하게 젖은 동산에는 아름다운 향초와 화초 열매 맺는 아주 진기한 약초들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변화되지 못한 우리의 조잡한 인격, 여전히 세상에 목 매이는 이 야비한 신앙생활, 한편으로는 주님을 섬기면서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사랑을 결별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마음, 주님을 사랑함이 모든 삶의 원리가 되지 못한 이 그릇된 모든 삶, 이러한 모든 것들의 원인이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속에서 솟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은혜는 곧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주님의 놀라운 세계를 깨닫게 되면 은혜의 경험이 솟아나게 되고 이 은혜의 경험이 솟아나게 될 때 이것은 끊임없는 사랑의 샘이 되어서 내 마음 속에서 흘러넘치게 됩니다. 친절하지 않던 사람이 지체를 향해서 친절하게 되고 고통 받는 지체를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없었던 사람이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독한 말을 하고 원수 맺기를 잘할 뿐 화해와 용서를 모르던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 까리따스의 사랑이 가득 흐르게 될 때 이 속에서 성품의 변화가 오면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 곁에서 예수의 향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한 번 정절을 잃어버린 사람을 모두 죄인으로 정죄하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향해 돌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한편으로는 하늘의 은혜로 구속받은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유혹과 죄로 가득 찬 세상에서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한 번 마음의 순결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불러 그들을 다시 보혈의 피로 씻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강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전하신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소생과 회복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랑에 마음이 더럽혀진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어느 한 순간 주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불결한 인간인지를 깨닫고 참회의 마음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한때 더렵혀진 사람들이라도 참회의 눈물로 보혈의 핏길을 걸어 찢어진 휘장을 지나 보좌에 계신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것은 중요한 것이고 잠시 있는 것은 사소한 것입니다. 모두 다 두고 가는 것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영혼,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 때문에 눈물이 흐르고 나 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 때문에 끝없이 눈물이 흐르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주님께 바치는 사랑이 온전하지 않지만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서 더 온전해지고 더 순전해져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의 노래가 들리고 우리의 영혼에서 사랑의 향취가 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목숨 걸지 마십시오. 주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고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