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행복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상).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시편 73편의 결론입니다. 시편 73편은 소위 신정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과연 이 세상에 악의 원인이실 수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73편 머리에는 아삽의 시라 쓰여져 있는데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아삽이라는 사람이 썼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윗이 쓴 시를 아삽의 가문에서 보존한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윗이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시의 문체와 모든 문학적인 특징으로 볼 때, 다윗의 80여편에 이르는 많은 시와 매우 유사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시간에 그 73편의 저작설에 대해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73편에서 시인은 고민에 빠졌었습니다. 자기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또 탐구하고 그리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반성하며 살고 있는데, 악인들은 어떻게 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경건한 시인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악인들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놀랍게도 아주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이에요. 저 사람들이 큰 고난을 당할 것이다 생각했지만 그러나 평안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죽을 때는 비명횡사할 것이다 생각했지만 마지막에 죽는 날에도 아주 평안하게 죽고 꽃사녀에 싸여 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화려한 장례식을 치루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에 이 시인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참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은 자기를 때리시고 고치시기를 원하셨는데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후회를 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나도 저 사람들처럼 막 살아 버릴 껄 하는 후회 아닌 후회를 하게 됩니다. 도저히 그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불공평하게 세상을 다루실 수 있을까 고민을 하기 시작하니까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은혜가 사라졌습니다. 의심의 능력, 회의와 의심의 능력이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래서 잘 보이던 시야가 안개가 몰려오면서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명료하던 모든 것들이 흐려지게 되었고, 그리고 이 시인은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란스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전광석화와 같이 그의 지성속에 깨닫게 해주신 사실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주님의 임재를 대면하는 것 같이 우리의 육체의 껍질을 벗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주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죽음으로서 하나님이 악인에게 불공평하게 대해 주신다고 하는 것을 불평하던 그의 모든 불평이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누렸던 사람들을 죽음 이후에 큰 심판으로 징벌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공정하신 의를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마음에 밀려왔던 안개같은 모든 의심은 사라져 버리고 이제 이 땅에 있는 자기의 현실을 죽음 이후의 현실의 빛 아래에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결코 불의하신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이 가슴깊이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시인은 자기 자신이 그 이전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한다고 하였지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지 목매한 삶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내 마음이 산란하여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처럼 우매무지하니 나는 주앞에 짐슴입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이에요. 고백을 한 것이에요. 누가 감히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칠때에 주님께 책망을 받고, 자신의 삶을 고치고자 하면서 경건하게 산 이 시인을 짐승이라 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큰 진리의 세계를 깨닫고 자기가 아직 알지 못한 하나님의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이제 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세계 안에서 하나 잘하면 하나 복주시고, 둘 잘하면 두 번 축복해 주시고, 세 번 잘못하면 세 번 벌을 주시는 그러한 기계적인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 신앙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깨닫지 못하던 그때의 삶이 짐승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죠.
(예화) 심방을 가면,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을 심방을 가면 내가 항상 물어보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하면 은혜를 받았다고 막 간증을 해요. 그리고 물어봐요. 만약 5년 전에 방황하던 그대에게 지금 은혜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회심한 그대가 그 사람을 만나서 충고를 한다면 뭐라고 충고하겠습니까. 5년전 자신에게 5년후 지금의 네가 충고를 한다면 무슨 충고를 하겠느냐. 그것을 들어보면 진짜 은혜를 받았는지 아니면 괜히 뻥하는건지 대충 압니다.
시인은 그러한 큰 충격을 경험했던 거예요.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살아있는 인생의 빛 그것만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은 죽음의 빛에 비추어 보아야지만 그 의미가 명료해지고, 죽음은 죽음의 어두운 빛으로 비추어 보아서는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생명의 빛으로 죽음을 비추어 볼 때에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이후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담대히 그 죽음을 기다렸던 이유도 생명의 빛으로 죽음을 보니까 그 죽음도 생명에 이르는 한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게 죽는 것도 유익하니 그 이유는 죽는 것이 사는 것이기 때문이라. 내안에 사는이 그리스도시니 내게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백을 했던 것이에요. 똑같이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우리가 사모하는 것인데, 죽음을 간절히 사모하는데 이것은 죽기를 바라는 것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덧입기 위하여 사모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이 시인이 무엇이 가장 큰 복인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내게 누가 있겠습니까. 왜 하늘이야기가 나옵니까. 잘 나가고 고통을 당하지 않는 악인을 볼 때에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는데,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까 이 현세에서의 악인의 형통함이 결코 불공평한 것이 아니구나. 저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큰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고, 죽음 이후에는 어떠한 생명의 행복도 누리지 못할 터인데 하는 깨달음이 밀려오게 되자, 내가 만약에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에 나는 하나님 이외에는 사모할자가 하나님 이외에는 내게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이 땅의 날 동안에는 주님 이외에 사모할 자가 어디있는가 왜냐하면 있는 것 만이 참으로 있는 것 만이 참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모든 것들은 있다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인간의 모든 불행은 사라질 것을 영원한 것처럼 사랑하는데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두 가지 문제가 나오겠죠.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모두 불완전한 것이에요. 내가 마음을 바쳐서 온전히 사랑해도 그 사랑은 언제나 동일한 메아리가 되어서 우리에게 되돌아 오지 않아요. 우리의 메아리에 대해서 우리의 소리에 대해서 다른 사람도 그렇게 메아리를 보냈고, 다른 사람의 소리에 대해서 우리도 그러한 메아리를 보내었어요. 이것이 바로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한계에요. 그래서 우리가 많이 사랑해도 그 사랑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시인이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 그것을 깊이 깨달은 거예요. 명상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번쩍하고 비추어 주시는 계시의 조명이죠. 그 빛을 번쩍 보고 깨닫는 거죠.
(예화) 우리 이러한 적 있잖아요. 캄캄한 밤이에요. 시골에 갔는데 캄캄한 밤이에요. 산속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천둥소리가 나요. 우르르르 쿵쿵쿵 하더니 계속 소리가 나요. 그러더니 이윽고 번개가 쳐요. 번쩍번쩍. 그 시간은 불과 1-2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이에요. 그 밝기는 굉장하죠. 대 낮에도 그 정도의 밝기는 아닐거예요. 그 캄캄한 속에서 번개가 비치면서 산과 모든 사물들의 모양이 또렷하게 들어와요. 심지어 어떤 때에는 빛깔까지 초록빛 빛깔까지 들어와요. 그러고 나면 다시 번개가 멎고 우르릉 거리는 소리가 나며 비까지 쏟아지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어도 우리의 머릿속에는 잠깐 동안 비친 그 번갯불빛이 우리의 가슴을 치던 인상이 선명하게 새겨져서 여기는 산, 여기는 들판, 여기는 개울, 저쪽에는 사람사는 집과 마을들 이라는 인상이 확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한번에.
그렇게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이 시인의 마음속에 확 들어오게 되었을 때 그때에 비로소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늘에서도 함께 있을 것들이 아니요,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덕입어 있는 것임을 깊이 알게 되니까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분만이 자기가 사랑해야 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시인이 성도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깨닫게 되요. 그리고 그 고백이 바로 하나님이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십니다.
II. 성도의 참된 행복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반석이 뭐죠? 큰 바위죠. 하나로 된 바위에요. 히브리말로 쭈르라는 말인데, 반석의 특징은 무엇이죠?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이에요. 그래서 그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주님이 말씀하시잖아요.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석. 그러니 하나님은 나의 내 마음의 반석이요, 무슨 뜻이에요? 아까는 자기 인생이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매일 아침마다 성경을 펼치고 하나님을 묵상한다 했지만, 얘전에 쌓아올렸던 삶은 무른 땅에 쌓아 올린 것과 같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옆에서 하나님 안믿는 사람들의 번영과 성공을 보니까 흔들리기 시작하여 우르르 무너지는 거예요.
(예화) 며칠 전에 지진이 한번 있었잖아요. 저는 아주 현격하게 느꼈거든요. 그 시간에 6층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책을 찾기 위해 일어났어요. 쿵하는 소리가 났는데, 한 2초 정도 심하게 흔들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 이렇게 튼튼한 건물이, 교육관 건물이 굉장히 튼튼하거든요. 공장으로 지었기 때문에 한층에 사방 1미터 위에 500킬로그램씩 올려놔도 자동차 2대씩 포개어 올려놔도 끄덕없는 건물이에요. 그정도로 튼튼하게 지은 건물이에요. 그게 현저하게 흔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면, 이 정도로 흔들어 놓으려면, 굉장한 힘인데, 이 주위에서 공사도 안하는데 어디에서 왔나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는데, 조금있다가 뉴스를 들으니까 지진이 진도3의 지진이 있었다 그래요. 그러고 나서 몇 시간 지나고 나서 몇 시간 지나고 나서 어느 동네 담장 기다린 것이 있었는데, 우르르르 무너져 버렸어요. 블록으로 쌓아올린게 무슨 힘이 있겠어요. 내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해주실는지 안해주실는지 모르지만, 또한 나는 안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교회를 짓는다면 그러면 다음에는 내진설계를 해서 교회를 지어야 겠다. 왜냐하면 50년이고 70년 후에라도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돈이 조금더 들더라도 내진설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견고함이예요. 반석위에 세워진 것이죠. 우리의 인생의 모든 기초가 하나님 위에 놓여있을 때, 우리의 인생은 견고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태어났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권한을 받고 하나님을 위해 늬우치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하나님을 위해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 나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내 지체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섬기고 이렇게 될 때, 이웃, 내 목표, 내 일, 내 사역, 우리 관계 이러한 것들을 수시로 바람과 같이 변할 수 있어요. 그런데 뭐예요. 반석이 하나님이신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기초는 흔들릴 수 없는 기초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분깃이십니다. 분깃이 뭐죠? 그때에 분깃은 100% 땅이에요. 땅. 땅이 없으면 노예가 되는 거예요. 빌어먹어야 되니까. 땅을 중심으로 없는 사람은 노예가 되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을 지배하는 거예요. 땅이 없다는 것은 아주 비참한 거죠. 하나님은 그러한 나의 분깃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참다운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입니다.
A. 하나님과의 친교
여기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친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입니다. 여기에서 가까이 한다는 것이 히브리말로 카라프라는 말인데, 여기에서 천사를 가르키는 구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고르반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와요. 여러분, 우리나라 사극영화를 보면, 임금이 이제 어전에서 회의할 때, 딱 용상에 앉으면 양쪽에 문무백관들이 줄지어 서게 됩니다. 그때에 그 계급의 순서는 왕 가까이 있는 순서예요. 그것이 계급이에요. 그래서 계급이 높고 왕의 총애를 받을수록 왕 가까이에 오는 거예요. 물론 그 옆에서 부채들고 있는 여자들 말고, 그 사람들은 빼놓고. 그 여자들도 전부다 신원조사 했겠죠. 안전한 사람들만 사용했겠지만요 그렇게 서있는거죠. 그것이 우리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에서 보면 어느나라에서든 모두 그러한 방식으로 왕의 친소에 의해서 가까이 두고 원근을 정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한다는 뜻은 무슨뜻인가 하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교의 관계를 의미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친교,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이에요.
(예화) 이것 뭐 옛날 얘기이지만,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스승의 날이에요. 새벽기도를 끝나고 집에 갔는데, 며칠 지났는데 성경을 뒤적이는데 봉투가 하나 나와요. 구두 티켓이 하나 들었어요. 내가 기도하는데 몰래 누가 넣어놓고 간거예요. 봉투에다 써놨어요. 목사님이 거기 계셔서 참 좋습니다. 그러고 거기에다가 봉투를 넣어놓고 갔어요. 그게 무슨 의미죠?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받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거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에요.
하나님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때문에 왜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없어야지만 맞는 거예요. 왜, 주님이 그렇게 좋습니까 할 때 내게 집을 주셔서, 사업에 성공을 주셔서, 지위를 주셔서, 좋은 아내를 주셔서, 예쁜 아들, 딸을 주셔서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랑의 기초 자체가 그러한 것들이 되는 거죠. 그것을 잃어버릴 때 사랑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죠. 대표적인 사람이 욥의 아내였잖아요.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 남편을 향해서 비난을 퍼붓지 않았어요? 그것이에요.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친교예요. 나같은 사람이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성도에게 있어서 한없는 감격의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모든 세속적인 욕망과 육체의 욕심들은 바로 이 행복을 하찮게 생각하면서부터 탁류처럼 재방을 넘어서 밀려오는 거예요.
이 시인은 극심한 영적인 침체의 과정을 거치면서 번개처럼 비춰 주시는 하나님의 이 말씀의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 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최고의 행복은,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친교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나같은 인간이 그러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을 한 없는 특권으로 알고, 그 하나님을 감사하는 것, 이게 바로 성도의 행복이에요.
(예화) 농담삼아서 그러겠지만, 가끔 부부들을 교회에서 만나거사 바깥에서 만나면 둘이 결혼하고 서로 구제해주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런 여자가 나같은 사람과 사는 것은 복으로 알아야죠 그러는가 하면, 내가 아니면 저런 남자 누가 주워 오겠습니까 그러잖아요. 농담이라도 즐겁게 들리지 않아요. 오히려 진정한 사랑은 자기같은 사람이 이런 여자를 만나서 살게 된 것이 한 없는 특권입니다. 자기 같은 사람이 이런 남자를 사랑하며 살게 된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특권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에 그 사랑이 진실성이 있어보이지 않겠어요?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한번씩 또 남편이 청심환을 줄지 모르지, 정신이 어떻게 됐나 하고 그래도 한번 서로가 남편들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그렇게 고백을 하고 그러니까 얘전에는 악인이 잘되고 벌안받고 악하게 살면서도 형통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삐쳤어요. 하나님을 향한 모든 원망과 삐침은 그분을 아는 지식의 현저한 결핍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다시 한번 이야기 할께요. 하나님을 향한 모든 원망과 삐침은 그분을 아는 지식의 현저한 결핍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그분을 바로 알고 나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만입이 내게 있으나 그 입 다 가지고
하나님의 그 큰 은총을 찬송할 수 밖에 없다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성도의 모든 불행은 이 진정한 행복을 하나님과의 친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는데에 모든 불행의 근원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그것은 하나님에게 영광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참된 행복이에요.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과 참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결코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교는 결국 우리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거든요.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해 주셔서 아침마다 깨닫게 해주시고, 올바른 사람 되라고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고쳐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끊임없이 그렇게 살도록 해주셨는데, 악인이 벌안받고 형통한 것을 보면서 믿음의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내버려뒀더라면 아마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사람이 되었겠죠. 그런데 누가, 도저히 그 자신이 스스로 볼 수 없는 이제까지 가보지 못한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셨어요.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왜 하필이면 그 순간에 성소에 수없이 드나들던 성소인데, 하필이면 그 성소에 들어가는 그 날 바로 그 시간에 인생의 삶은 어느날 꿈곁같이 끝나고 죽음 이후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이 전광석화와 같이 그의 지성속에 번뜩이며 비치도록 만들어 주신 분이 누구예요? 수없는 사람이 드나 들었어도 이 사람처럼 충격처럼 그 날 죽음이후의 세계가 있다, 거기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깨달은 사람은 그 사람이었어요. 이 시인이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람을 깨우쳐 주신 거잖아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이 사람을 특별하게 다루셨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건 결국 친교의 기초를 묻는 거예요. 그러한 하나님과의 친교의 기초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선택이예요. 선택.
B. 친교의 기초 : 선택
하나님의 선택, 외연으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고, 내포적으로는 그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참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개인적이고도 놀라운 은총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시인은 이중적으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이에요.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주님이 끝없이 의심하는 이 사람을 용서하고 이끌어 주실 만한 은혜의 약속을 주셨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선택받아서 믿음이 뿌리채 흔들리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이 사람을 새롭게 깨닫게 하셔서 이제껏 가보지 못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이 사람을 선택하시고 은혜를 주신 것이죠. 그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은 우리의 어떠한 공로나 좋은 점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다른 친교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우리는 누군가 아주 뛰어난 영적 생활속에서 경건하게 살며 하나님과 아주 탁월한 친밀함을 누리면서 살아갈 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저 사람은 나와 무엇이 다르기에 저렇게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까. 나와 어떤 점이 다르기에 저 사람은 하나님과 저렇게 친밀히 교제하는 것일까. 아, 기도를 많이 하는구나. 아,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는 구나. 아, 저가 정말 경건한 삶을 사는구나. 아, 이웃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며 살아가는 구나. 아, 겸손하구나 등등의 특징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해요.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해요. 그가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해 진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원래 겸손하던 사람이 계속 겸손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잖아요. 그러면 저 사람을 내가 본받지 않을 수 없는 탁월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생각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친교의 기초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에게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거죠.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을 때마다 동시에 자기가 하나님앞에 이러한 친교를 누리기에는 얼마나 모자란 존재인가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해요. 그 자각이 정직해 지면 사실은 절망을 하게 돼요. 나같이 더러운 죄인이 그렇게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이 하나님과 자신의 무한한 질적 차이 앞에서 절망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로 질러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불결하고 더러운 죄인을 찾아 오셔서 교제하시는 근거 자체가 우리를 선택하시는,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는 모든 사람들은 다 겸손해요. 겸손할 수 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의 친교를 가장하는 것이에요.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질서의 복종하는 것 없이는 누구도 그분과의 참다운 친교로 들어갈 수 없어요. 그리고 그러한 친교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충분히 낮추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성도의 참된 행복이 하나님과의 친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성도는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C.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지 않음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생각해 봅시다. 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게 되면, 그 안에서 우리가 가장 행복해 지는 이유가 무엇때문일까요.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의 신적인 본질이지만, 그 분이 세 인격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교통하셔요. 그 본질이 친교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세 신이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신적 본질의 측면에서 보면 한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이예요.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로부터 사랑을 받으시고, 또 성령으로부터 사랑을 받으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또 성령을 사랑하시고 양자로부터 사랑을 받으시고, 또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하시고 양자로부터 사랑을 받으시고,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인간의 사랑은 모자라는 것이 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으로는 우리가 충분하지 않아요. 자기도 변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변하는가 하면, 사랑하는 이유 자체가 어떠한 목적과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이 사라질 때, 그 사랑의 연합은 깨뜨려 질 수 있는 불완전한 것이에요. 이것은 때로 위대하고 고결한 그러한 사람들의 사랑이라도 항상 그러한 씨앗들을 내포하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한 것이 전혀 없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그 완전한 사랑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랑의 교제예요. 그러한 사랑이 행복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지복이셔요. 그 지복의 근거는 삼위 하나님이 서로가 서로를 완전하고 영원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은 최고의 행복을 누리시는 거예요. 더 이상 하나님이 행복해 질 수도 없고 불행해 질 수도 없는 완전하고 영원한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계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그분과 친교를 나눈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제에 접근한다는 것이고, 그 교제의 핵심은 행복이에요. 충만한 사랑속에서의 완전한 행복이죠. 그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 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성부와 교제하고 또 성령과 교제하고 성자와 교제해요. 그 속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를 우리 자신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친교를 이루며 사는 성도의 행복이에요. 그것들이 보이는 교회 안에서 누려질 때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되는 것이에요.
성도의 진정한 행복은 바로 행복하신 하나님 자신 안에서 그분의 행복에 동참하며 사는 것이에요. 동참하며 사는 것이에요.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바로 그 곳이 아닌 곳에서 행복을 찾는 데서 오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당신께 가까이 올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고, 아무리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도 우리를 진노의 불로 태우시거나, 혹은 죽음으로 우리를 다루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그렇게 불러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당신과의 친교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III. 결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사실은 이 교제 안에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에요.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에 감격하는 모든 선도들의 단 한 가지,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최고의 소원은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그분과의 온전하고 영원한 교제 안에서 복되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게 사는 그것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 모두가 행복하신 당신 안에서 그 행복 때문에 완전한 복을 누리며 사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나님께 가까이 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