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방황하겠느냐
구약성경 예레미야서 31장입니다. 설교하려는 성경구절은 22절입니다만은 1절부터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숫군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라 할찌어다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며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다같이.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아멘”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이 가까운 지점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31장은 실로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불러내신 이후로 어떻게 하나님께서 처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시며 마치 부부의 관계처럼 각별한 관계로 그 백성들을 하나님을 연모하고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오셨는지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마음 깊이 그들을 생각하시고 그들을 책망할 적마다 하나님의 마음이 측은하고 그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언되기에 앞서서 먼저 언제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은혜를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을 향해서 베푸시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에 수치를 진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들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겠다고 하는 마음의 결심이 생긴 그때에는 바로 이들이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그때에 그런 자비와 긍휼을 보이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이 어느 때에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풍부하게 입을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깊이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인 우리와 맺은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그리고 그 관계 위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보이신 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결단을 촉구하시는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아 내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일을 행하겠노라고 말씀하시고 여자가 남자를 안을 때가 오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읽은 이 마지막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도전들을 상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내가 어느 때까지 방황할 것이냐고 묻고 계십니다. 처녀 이스라엘을 향해서 내가 어느 때까지 방황할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의 방황이 어떤 종류의 방황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저내시고 광야의 길로 들어오게 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고 그리고 그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금보다도 더 귀한 꿈에도 그리던 땅을 얻었습니다. 심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따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사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떠나온 이래로 가나안 땅에 이를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하나님 마음처럼 한결같은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의 길에서 만나를 먹으면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밤에도 낮에도 하나님에 보호하심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시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할 자신들의 마음을 채우면서 불신앙과 신앙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셨고 거기에서 복락을 누리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그 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 올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사는 대신 그들은 가나안의 원주민과 거래하며 우상을 섬기는 이중적인 생활을 행해왔습니다. 마치 결혼을 한 후에 바람난 여자처럼 한 남자에게 있기를 거절하고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찾아서 떠돌아다니던 방탕한 여인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선지자에 의해 지적되고 있는 방황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의 방황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한분을 온전히 사랑하고 주님을 자신의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모두 방황하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주 버린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고 하나님께 제사하고 있었으며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있었고 그리고 그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는 아주 종교적인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의 눈에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럴듯한 종교 생활은 처녀 이스라엘이 약혼과 결혼의 관계를 깨뜨리고 방황하고 있는 모습으로 밖에는 하나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들이 진정한 신앙생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시각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의 생활을 지켜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참된 신자의 신앙생활, 주님으로 말미암은 진실한 신앙생활의 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의 눈과 그리고 우리의 평균적인 안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안목으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그러한 시야를 가질 때 우리들이 정확하게 우리 자신에 대해서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방황하는 처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럴 듯한 신앙생활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눈에는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말 방황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우리의 방황하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를 팽개치고 세상에 나아가서 출석도 하지 않고 목회자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타락하는 것만이 방황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백성들의 방황은 꼭 그렇게 세상으로 완전히 돌아가 버린 사람들의 방황만이 방황이 아닙니다. 여기 나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진실한 신자가 되겠다는 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함께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께로 정해지지 않은 모든 신앙생활은 바로 방황하는 신앙생활입니다. 흔들리고 방황하는 신앙생활은 정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비록 교회를 떠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던져버린 적이 없고 소문난 죄악에 빠져서 불신자처럼 살아간 날이 없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전부가 아니면 그것이 곧 방황하는 나날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주님의 그 사랑과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시는 하나님의 그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전에는 내가 제법 그럴듯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었던 그 수많은 날들이 주님의 사랑을 깊이 맛보고 나면은 그런 생활이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이 아니었고 한편으로는 세상을 대한 욕망과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미련 사이를 오고간 방황하는 날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주일날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이 산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정한 신자이고 이제 하나님 앞에 흔들리지 않는 신자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고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과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어떻게 진념어린 사랑으로 우리를 추적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하고 나면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라고 하는 이 수많은 고백과 삶들이 사실은 말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그 사랑의 찬란한 빛을 받으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신실한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경험하게 될 때에 우리 안에는 정말 우리 속에 우리가 싫어하는 또 다른 우리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 수많은 자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게 만들지 못하고 우리 인생의 꿈과 모든 보람을 하나님 한분에게 온전히 드린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주님이 처녀 이스라엘아, 너는 방황하고 있노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단지 왜관적인 방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스라엘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신부인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동일한 그런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해주도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남녀관계에 있어서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거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깊이 사랑하고 나면 이제 이 세상에는 여자도 존재하지 않고 남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절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절대라는 말은 비교될 수 있는 데를 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실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내가 저 여자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 다른 여자들은 내게 있어서 사람일 뿐이지 여자는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유혹을 느끼지 않아요. 어떤 아름다운 모습을 한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수많은 남자들이 있다고 할지라고 그들은 한 사람과 사랑에 빠진 여자인 내게 있어서는 남자가 아니라 그냥 사람일 뿐이에요. 그래서 한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이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오직 그 한 사람만 존재하는 거예요. 이게 사랑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속성이에요. 한 남자, 한 여자를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쳐다보고 있는 때에는 그 여자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그 남자 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을 보면 그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 더 많이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수많은 남녀가 눈에 들어온다면 할 것 같으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사랑은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사랑은 순결한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의 순결은 한 대상을 향한 사랑으로만 가득차있어서 다른 사람, 다른 대상에 대한 사랑이 더 이상 자리할 수 없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여러분들을 선택해서 구원하여 예수의 피로 여러분들을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후에 여러분들보다도 더 착한 세상의 백성들을 볼 때에 여러분들을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고 언제든지 여러분들을 주고 세상에 있는 백성들과 바꾸고 싶다고 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가지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만약에 그런 마음이었다면 하나님도 방황하시는 하나님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생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부모 눈에 자기 자식 밖에 없고 그 자식을 향한 사랑이 정말 뜨겁고 놀랍지만 솔직히 그 부모들도 자기 아들보다 더 잘생긴 아들을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자기 딸들보다도 더 착한 딸들이 이 세상에 없다고는 말하지 않아요. 그러나 사랑은 그런 조건에 매이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집 아이들보다 더 머리 좋고 똑똑하고 착한 아이들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랑은 나의 자녀들에게 있는 것처럼, 여러분 모두의 마음도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께도 우리가 그러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인 사랑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는 방황과 흔들림이라고 하는 것이 없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이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십자가에서 당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거예요. 우리에게 무엇인가 선한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고 마음을 먹으셨나요? 아니에요. 뭔가 우리를 구원해내시면 우리가 아주 유능하고 훌륭하게 하나님 앞에 이용가치가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를 건져내셨나요? 아니에요. 세상에는 우리보다 유능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세상에는 우리보다 훨씬 쓸모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우리는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을 섬기며 살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면서 얼마나 우리 자신의 무능을 자주 느낍니까? 저도 지난 한 주간을 살면서 정말 내안에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만한 것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왜 나같이 무능하고 정말 보잘 것 없고 그렇다고 해서 영리하지도 못한 그러한 무지한 인생인 나를 들어서 하필이면 이 자리 여기에 세워서 끊임없이 내가 여기에 있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손해를 끼칠지도 모른다고 하는 자의식을 가지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이 비천한 인간을 왜 하나님이 여기에 세워주셨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를 우리는 그런 식으로 더듬어서 파악할 수는 없어요. 그냥 하나님은 하나님이 왜 우리를 사랑하시고 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건져내셔서 우리를 주의 자녀 삼으시고 오늘 그 예수에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어 주의 자녀 삼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는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번도 후회하거나 방황한 적이 없는 사랑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 아무 쓸모없고 주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그때에 우리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어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흠뻑 입은 우리들이 그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우리가 도달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도 방황하고 흔들리는 그러한 모습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깊으신 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이 되는 것이에요. 주님의 마음에 가장 커다란 고통은 단지 이 세상 사람들이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주님을 거슬리며 방황하고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 모습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고통이요, 슬픔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주님의 마음에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미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하셨는지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전히 주님처럼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자기도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 모습 그 자체가 우리 주님에게는 가장 커다란 고통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아주 잘 나타났어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왜 예수님은 헬라인들 사이에 태어나시거나 아니면 이스라엘과 상관이 없는 나라에 혈통을 입으시고 태어나지를 않고 이스라엘 혈통을 입으시고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선교의 명령은 먼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고 하신 부탁 속에서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참다운 선교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선교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방황하고 흔들리면서 괴로워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정하고 있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심령의 변화와 부흥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래서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는 그 일도 아주 중요한 선교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됨으로써만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다운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네가 어느 때가 방황하겠느냐는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방황하는 모습이 하나님께 주는 고통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이 방황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괴로워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단지 교회에 출석하고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정말 마음이 하나님께 확정된 신앙생활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에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이 은혜 받는 곳에서는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가도 유혹이 있는 곳에서는 다시 주님만을 따라가기에는 세상에 두고 온 것들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이중적인 마음이 주님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방의 백성들을 바라보는 것도 주님께는 고통이겠으나 특별히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하고 있는 그 모습이 하나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가 방황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실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님이 방황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주님이 자기의 사랑을 충분히 여러분들에게 보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어떠한지를 충분히 보이셨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일반적으로 말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통해서 보였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밝히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여러분의 죄를 지고 어떻게 죽으셨는지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죄인이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순결하신 분임에도 불결한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셨고 스스로 하나님께 범죄 하여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린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의 십자기의 사랑을 여러분들은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한때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신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펑펑 우는 신앙의 감격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그 감격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때에 주님이 받으신 그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가책을 느끼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고난이 이제는 그 복음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신 그 형벌은 바로 주 앞에 징벌을 받아야 할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죽으셨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사랑하는 내 백성들아 이제는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너희의 영혼의 주인이신 목자 되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그 간절한 소원 말고 또 무엇이 그 분의 마음속에 있었겠습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세월이 수없이 흘러도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매일매일 삶 속에서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주님의 기분에 따라서 시시때때로 변덕스럽게 다가왔다가는 물러가는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되는 사랑이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생애의 과거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비록 일년 밖에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걸어온 신앙의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그 뒤안길이 얼마나 사연이 많은 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에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펑펑 우는 은혜의 감격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올곧은 걸음으로 한번도 넘어지거나 쓰러진 적이 없이 신앙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었지만 또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졌습니다. 때로는 뒤쳐지면서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달려온 것입니다. 때로는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심령이 곤고해져서 더 이상 이 광야의 길을 걸을 수 없는 상황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마치 하갈이 이스마엘과 함께 벌판으로 나아갔다가 물도 떨어지자 주저앉아서 내 아이의 죽는 것을 볼 수 없다고 울부짖었던 것처럼, 한 걸음도 더 옮겨놓을 수 없는 인생의 곤고한 길을 걸어온 때도 있었습니다.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알면서도 결별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자기 속에 독버섯처럼 솟아나는 죄성을 이기지 못해서 허우적거리며 쓰러지고 범죄 한 후에는 다시 통곡하고 통곡한 후에는 눈물을 씻으며 다시 범죄 하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어떠셨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버려두셨습니까?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한번도 하나님이 버려두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걸어온 우리의 인생의 길에는 항상 우리가 알던 때에도 모르던 때에도 주님과 함께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메마른 광야에 주저앉을 때에 바로 우리 앞에 생수의 샘을 터뜨리셔서 주의 말씀으로 곤고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도 사실은 우리가 주도권을 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권을 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도움이 끊어지고 이제는 살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 될 그때에 어김없이 주님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남들에게 말하기 싫은 은밀한 죄로 말미암아 방황하고 깊은 시련의 계곡에서 비통한 눈물을 흘릴 때에도 사람들은 아무도 돌아보아주지 못하고 나의 목회자도 때로는 내 마음의 깊은 아픔과 고통을 헤아려주지 못했지만 그러나 어김없이 주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고 자기의 사랑을 자기의 손길을 우리에게 뻗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넘어진 그곳에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제가 이 찬송을 참 좋아해요. 이 찬송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그 3절 가사 때문이에요.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생각하네
여러분들은 목사인 저는 그저 침체도 없고 늘 충만하게 사는 것처럼 생각하시지만, 일년에도 몇 차례씩 하나님 이제는 나의 인생이 충분합니다. 이쯤해서 저의 생명을 거둬달라고 기도할 때가 일년에도 몇 차례씩 있습니다. 정말 내가 되고 싶은 나와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나 사이에 그 어마어마한 간격,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하는 나의 기대치와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나의 자신의 처지, 그 사이에서 느끼는 고통과 견딜 수 없는 고독은 이 세상에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그런 고독이요, 고통이에요. 무엇 때문에 들풀만도 못한 인생을 여기에 살아있게 하고, 오늘 땅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내일은 발에 밟혀 죽는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을 이 세상에 두게 하시고 무엇 때문에 주님이 이렇게 욕되이 여김을 받고 이런 이렇게 하나님이 만드시는가? 그런 절망적인 생각이 가슴에 깊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확실히 그런 때에는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절망적인 자신의 모습과 절망적인 상황만이 캄캄하게 앞을 가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때 곤고함이 극에 달해서 이제는 내 힘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까치발을 띄고 주의 손을 잡을 힘조차 없을 그 때에 그 한계치에 도달할 때면 어김없이 주의 손이 내려옵니다. 말씀을 통해서든 무엇을 통해서든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시다고 하는 인침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깊이 그때 마다 깨닫게 되는 것은 정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야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그래서 욥의 고독한 고백이 생각이 나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시시때때로 우리가 주님을 버린 적은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 적은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자비하심을 입증하셨어요.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모든 은혜가 이제는 사라졌고 더 이상 소망이 없노라고 생각되는 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 느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같이 쓸모없이 무지렁이와 같은 인간들을 그래도 사람을 만들어 보시려고 자기의 이름을 빛내는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고 마시겠다는 열심으로 우리에 눈의 눈물을 씻으시고 굽어진 우리의 다리를 펴게 하시고 넘어진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오늘 여러분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입니다. 절대로 여러분들의 결단과 각오가 여러분들을 여기에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도 부족해서 우리를 성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셔서 우리를 여기에까지 데려오신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는 방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세 번째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미래에도 우리가 이제껏 산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을 뿐 아니라 미래에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관계에서 오는 사랑과 축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살아온 날들도 주님 없이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곤고하고 고통스러운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앞에 있는 미래의 날들이 어떤 날들인지 다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앞에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우리의 남은 날들을 가장 지혜롭게 사는 비결은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방황하지 않고 견고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미래의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그렇게 흔들리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방황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육신적인 방랑은 종종 즐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우리의 과거에 대한 집착, 두고 온 세상에 대한 사랑, 자기 맘대로 살고 싶은 방탕한 본성들이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는 그 일 하나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해서 우리로 늘 흔들리는 사람 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환난과 시련을 훌륭하게 장군처럼 싸워서 이겼던 그리스도인들이 평안한 때에 유혹에 넘어지고 자기에게 실패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커다란 대적은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하는 그런 부정한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그렇게 방황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 확정되지 못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만으로는 더더욱 살수 없는 그 마음이 오늘 하나님 앞에 확정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주님만을 뜨겁게 사랑하고 세상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며 하나님 한분께만 진실한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만을 섬기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종종 저는 인생이 짧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인생이 너무나 길다고 생각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믿은 후에 한 일년 정도만 살다가 죽는다면 혀를 피나게 깨물고 한번 주님만을 위해서 진실하게 살다가 콱 죽어버리겠지만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긴 인생이에요. 아무렇게나 살면서 세상 즐거움을 맛보면서 적당히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고 주님의 마음에 들게 잘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길어요.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펑펑 우는 신앙의 감격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방황하고 흔들리는 모습으로 오늘 주님께 책망을 받는 처녀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가장 커다란 고통이 있다면 자기의 사랑하는 여성이 이 남자, 저 남자 품에 안겨서 만족을 누리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거절하고 이 남자, 저 남자 품에 안기며 우상을 섬기며 신앙의 정절을 잃어버리고 그러면서도 저녁이면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는 이 창녀와 같은 이스라엘의 처지는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셨습니까? 여러분들이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그 확정된 신앙생활이 아니면 매일 교회에서 만나는 여러분들의 모습이 하나님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고 고통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온전히 주님만을 사랑하고 싶고 우리 안에 있는 못난 자아와 정리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욕심,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인간의 이념에 대한 연련 때문에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흔들리는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자의 마음을 갈대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렇게 유한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인간도 그렇게 갈대와 같이 연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내가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미워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두 가지 밖에 없어요. 그 일은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이 이렇게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깊이 미워하고 슬퍼하는 깨어진 마음과 그리고 우릴 그러한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 한편으로는 그렇게 수시로 마음이 변하는 자신의 처지를 보고 비통해 하는 회개와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주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는 이 믿음, 이 두 가지 이외에 우리들이 의지할 바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흔들릴 때마다 오늘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치료법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멀리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내가 너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너를 깊이 생각하노라. 그리고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기노라고 하는 주님의 이 아름다운 음성이 들려오는 때는 이스라엘이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고통하고 자기의 볼기를 스스로 때리면서 내가 왜 이렇게 행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고 하며 뉘우칠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게 멀어졌을 때 즉시 가슴 아파하는 뉘우침으로 회개할 줄 모르는 우리의 굳은 심령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를 더 골 깊게 만들고 우리의 영혼에 상황을 점점 더 절망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은 예배시간마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주님만을 온전히 사랑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뉘우치는 회개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한번도 우리를 용납해주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패역에 극치를 치달으며 멸망의 길을 달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도 주님이 오늘 내가 너를 측은히 여기고 너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너를 생각하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리면서도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넘어지면서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회복을 위한 회개가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방황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들이 이렇게 흔들리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는 것 이외에 우리는 특별한 지름길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매일 깨어있는 영혼의 시각을 가지고 감각을 가지고 자기의 작은 허물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등질지도 모르는 조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고 돌이키려는 그러한 말씀에 대한 깊은 감각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는 영혼들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커다란 고통이고 회심하지도 못했으면서도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염려할 줄 모르는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제게는 가장 커다란 고통입니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자신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랜 세월동안 빛 한번 들어간 적이 없는 어두운 철장과 같은 자신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의 빛을 받아서 자기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말씀에 대한 미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재미를 터득하고 그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이 새로워지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행운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길에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마지막 유혹이 많은 이 세상의 길을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싸울 싸움을 모두 싸운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피 뭍은 무릎으로 걸어간 사람들이었고 그에 얼굴에는 진리를 따라서 살기위해서 수많은 원수들에 의해서 할퀸바 된 상처투성이의 면상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디 지름길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무릎으로 걸으면서 하늘 보좌까지 나아갔고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 고난의 칼과 화살을 맞으면서 그들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며 주님 사랑 하나 붙들고 그 시련의 길을 지났습니다. 말씀대로 살기위해서 외로워지는 경험도 했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동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기도 했으며 진리를 따라 살기위해서 오히려 진리와 함께 죽는 길을 비 진리와 함께 사는 길을 버리고 오히려 그 길을 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순간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포기했던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길이 협착하고 거기를 찾는 사람이 적지만 그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령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일을 창조하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고 남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제껏 까지는 항상 하나님이 언제나 선도적인 사랑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지만 그러나 어느 때가 올 것인데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 처녀 이스라엘의 마음에 커다란 감화가 일어날 때 이제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아니라 이제는 자기도 그 하나님을 끌어안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감격스러운 사랑의 때가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이스라엘의 변화를 기대하시는 것이 어찌 이스라엘을 향해서만 거시는 기대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의 사랑은 변함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계속되고 여러분들이 충만할 때 뿐 만 아니라 곤고할 때에도 주님 앞에 있을 때 뿐 만 아니라 주님을 등진 때에도 주님의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 우리는 느낄 수 없습니다. 느끼지 못하는 사랑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감화를 받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지를 우리들이 체험해서 주님이 우리만을 사랑할 실 뿐 만아니라 그 사랑에 감격해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할 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에 행복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날에 어떤 어려움이 올지 모르고 어떤 고난이 우리 앞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순종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고난을 많이 당할 것이고 거스르고 살아가면 거스르기 때문에 곤고한 일들을 당할 것입니다.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주를 위해 살기 위해서 많은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거스르는 사람은 징벌을 받으며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많이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우리의 인생을 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 오직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바람이 부는 벌판과 같은 세상이라고 할 것 같더라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그분을 꼭 끌어안는 사랑의 관계가 지속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두렵겠으며 우리에게 무엇이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저는 교회를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 목회 시작인데 언제 하나님이 저를 데려가실지 모르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있습니다. 잔잔한 포구에 닻을 내리고 평안하게 휴식을 취하던 제 인생의 때는 열린 교회를 개척하면서 끝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함께 배를 타고 잔잔한 포구를 지나서 큰 바닷물결이 뒤웅치는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 한 가운데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어떠한 파도가 일어날지 어떠한 폭풍과 시련이 닥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것 하나는 태평양과 같은 잔잔한 바다를 일평생 항해하다가 저의 일생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직감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파도도 만나고 삼킬 듯이 밀려오는 집채만 한 시련들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뜻을 품고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시련과 고난, 파도와 아픔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깨칠 듯이 밀어 닥치는 빌딩과 같은 파도 앞에서도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우리가 그분의 품에 안겨있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관계가 계속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 풍랑을 두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잔잔하라고 명하시면 잔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이 흘러가도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영원히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이 신앙의 현장에서 사라질 수 없는 숙제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을 안으십시오. 이제 주님 혼자 여러분들을 사랑하게 버려두지 마십시오. 언제까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짝사랑이 돼야 합니까? 이제는 주님을 그렇게 버려두지 말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에 반응하며 그분을 안으십시오.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전부가 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의 모든 방황이 하나님 한분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서 마침표를 찍도록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의 최고의 숙제가 되어서 이제는 내가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여러분들이 되어서 주님이 이제 여러분들을 볼 때에 더 이상 흔들리며 방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분을 여러분들의 품안에 안은 그런 진실한 산 신자들이 되어서 주님이 누구인지를 세상에 보여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십시오. 이것이 예fp미야 선지자가 우리를 부르는 초청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