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험함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다윗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있었던 고난의 생활 중 일부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고 몸과 마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다윗을 시기한 사울은 그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풀었고, 그리고 다윗은 정처 없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전국의 다윗을 잡으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래서 다윗은 가드 왕에게로까지 도망을 가게 됩니다. 도망을 가서 은신하여 사울의 추격을 피하려고 했더니 다윗이 도착하자마자 왕에게로 데려가며 이 다윗은 사울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사울은 천 천 이요, 다윗은 만 만 이로다 라고 하는 전쟁에서의 다윗의 승리를 예로 들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 다윗은 갑자기 왕 앞에서 미친 자 행세를 하며 대문에 다리를 그적거리고 수염에다가 침을 바르며 정신병자 행세를 하면서 위기에서 벗어나 광야로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그때에 다윗이 그 위기를 극복하고 지은 시가 34편이라고 표제에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큰 사랑과 그리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이 시를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은 우리가 평탄하고 우리가 원하는 좋은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 당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도 하지만, 보다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가슴 아프고 힘겨운 일이 일어났을 때, 오히려 그 같은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해서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평안할 때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과 그 성품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해서 더 많이 깨닫게 해주시는 이유와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차피 우리의 지성으로 존재의 어떠함을 파악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해서 안다는 뜻이에요. 그분의 성품은 우리 인간이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을 통해서 그분의 성품은 우리에게 알려지고, 또 우리가 그분을 앎으로써 그분의 성품이 우리 안에서 행해지는 것들을 경험함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 자신과 관계를 맺으셔야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나는 아닌데, 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도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막대 먹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입어서 구원을 얻었구나. 분명히 관계는 그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인데 그것을 보면서 나에게 깨달음이 오는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갖게 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이든지 저것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그것은 모두 한 가지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서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어떤 때는 직접적으로 어떤 때는 간접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이러한 깨달음들을 하나님께서 평탄하고 좋은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슴 아프고 괴롭고 힘든 다윗이 처한 것 같은 절망의 상황에서 더 많이 깨닫게 해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루시는 방법과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의 마음을 가지면 시련과 어려움이 많이 와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더 기울어지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믿음이 역사하지 않을 때에는 근심과 걱정, 염려스러운 모든 상황들은 우리를 분산시키고 흐트러놓아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고 신실하게 주님을 의지할 때에는 오히려 근심과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지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어요. 그래서 시편에서 수많은 경우에 시인들이 고난 중에서 주님을 알게 된 것을 찬송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고 높이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그 땅에 비가 막 쏟아지면, 물들이 한곳으로 몰려서 골을 타고 확 흐르게 되듯이 우리의 마음의 믿음의 성향이 있을 때에는, 시련과 어려움이 올 때에 하나님께 집중하게 됩니다. 집중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믿음의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안 좋은 거예요. 평탄한 환경이 주어지면, 그것 때문에 유혹을 받으면서 마음이 갈라지고, 또 걱정과 근심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마음이 찢어져서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가 없는 사람들은 맨날 환경 핑계 하면서 투덜거리다가 죽는 거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기회로 삼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참 놀라운 은혜죠.
다윗을 하나님이 그렇게 철저히 훈련을 시키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평탄한 길을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셔요. 그래서 시련과 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집중되게 하시고 그러면서 하나님은 예전에 다윗이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을 시인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선하심이에요. 선하심. 이 선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선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냐 하면, 열매와 관련이 있어요. 열매. 선하심이 열매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무슨 얘기냐. 선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하나의 상태라기보다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열매와 관련이 있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 목표가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목표가 있을 때, 목표가 있을 때에 거기에 그 목표와 관련지어서 어울리고 합치하면 그것이 선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을 선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선함이 되는 거죠.
(예화) 좀더 쉽게 이야기 하면 이런 것 아니겠어요. 자, 사람 열 명만 나와라. 그러고 사람을 뽑는데, 뭘 할 사람인지 알아야지. 예를 들자면 손님이 많이 와서 잔치를 하는데 그 사람들을 화려한 궁전 같은데서 안내할 사람이라면, 얼굴이 예쁘고 용모 단정해야겠죠. 뭐 조폭같은 사람들이 검은 머리 하고 깍두기 같이 앉아 있으면 손님들이 좋아하겠어요? 그러나 이삿짐이 잔뜩 와가지고 이 짐을 들어야 할텐데, 사람이 모자랄 때에 열 명만 하면 그때 좋은 사람은 조폭같이 어깨가 벌어지고 짐을 다섯 개, 여섯 개 얹어놔도 들고 뛸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똑같이 선하다는 것이 그러한 개념이에요.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신 자신이 선이시고 당신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도 선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의 움직이심에 있어서 인간은 인간에게 모순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모순될 수 없잖아요. 인간은 모순 될 수 있잖아요. 학생의 본분이 뭐야? 노는 거? 학생의 본분이 뭐야?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런데 안하잖아. 그렇게 모순될 수 있다 이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모순이 없으시다 이거야. 그러니까 하나님은 선이시고, 당신 자신이 정해놓은 목적도 선이고, 그 목적들을 위해서 모든 사물들을 움직이실 때 선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것을 전부다 아는 거야. 하나님이 선이시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이 선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면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모든 섭리하시는 과정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라면 선하다 그것을 굳게 믿는 것이 하나님의 선을 믿는 신앙이에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들이 원하는 것처럼 올바로 믿음 생활을 못할 때가 있어요.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시험이 오기도 하고, 유혹에 쓰러지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될 때가 있어요. 그때 두 가지 사실만을 가슴 깊이 새기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분은 선하시다는 사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죠. 때로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전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좋은 것이다’라고 하는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라는 믿음과 두 번째는 ‘그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라고 하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만을 분명하게 알고 굳게 붙든다면 모든 혼란에서 우리는 넉넉히 벗어날 수 가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동사가 함께 사용되었어요. ‘맛보다’라는 단어와 ‘알다’라고 하는 단어에요. 그러니까 문장의 구조를 보면 아는데, 그 ‘아는 방식이 맛보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맛을 본다’라고 하는 것은 경험한다는 것이죠. 그죠.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들이 오감을 통해서 경험한 그 경험의 질과 양이 100이라면 언어를 통해 그것을 묘사하는 것은 10도 안 될 때가 많은 거야.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깊은 한계를 느껴본 사람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이에요.
(예화) 제가 신학교를 졸업을 하고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언어는 너무 불완전하다. 내가 만난 그 하나님을 도저히 이 세상에 있는 알고 있는 언어로는 담아낼 수가 없는 거야. 그것을 제가 경험을 했어요. 우리들이 음식을 맛보잖아요. 그러면 음식을 딱 맛봐요. 그러면 형언할 수 없는 맛을 느껴요. 그 맛을 글로 묘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죠. 그나마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그 맛에 대한 묘사가 한국말에는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아요. 그만큼 우리 민족이 아주 감성적이고 센스티브 하다는 거예요. 시다, 시큼하다. 새콤하다. 누렇다. 신누렇다. 뇌렇다. 누리끼리하다. 노리끼리하다. 영국이나 미국에 사는 할머니들이 외국에서 사는 게 뭐가 불편하냐 하면 병원에 갔을 때가 제일 불편하대요. 찌릿찌릿하면서 시큰시큰하고 한 것을, 영어도 못하는데다가, 그리고 영어를 배워본들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거예요.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올바른 지식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하고 경험한 그 사람이 말씀을 가르칠 때 성령의 똑같은 역사로 이 사람이 말에 설득당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말이 저 사람을 설득하지 못했는데도 성령의 역사하셔서 이 사람이 느낀 것을 똑같이 맛보게 하실 때에 그러한 과정을 타고 기독교 신앙은 전수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올바르게 교리를 가르치고 그 엄마, 아빠가 가르치는 교리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아이들이 경험함으로 그 교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맛보아 알게 될 때, 그때에 그는 부모로부터 최고의 것을 받은 것이에요. 올바른 지식이 매우 중요하지만, 올바른 지식만 있고 만약에 그 지식이 가르쳐주고자 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맛보는 것이 없다면 그러면 올바른 지식은 유지될 수가 없어요. 유지될 수가 없어요. 그러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에 입각해서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일들이 사라져 가기 때문에 그러면 머리로만 신앙을 대신하는 시대가 온다고 하는 것이에요.
(예화) 일주일동안 영국에 있어서 이번만이 아니라 갈 때 마다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쩜 그렇게 한때에는 복음의 큰 영광을 나타내던 위대한 역사를 간직한 그 교회들이 지금은 꺼져가는 등불처럼 맛 잃은 소금처럼, 다 사라져 가고, 작년 한해만 성공회에서 무슨 400개 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하나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굉장히 행복합니다. 웨일즈 복음주의 장로교 교단이나 성공회가 아닌 옛날에 아주 건전한 신앙을 가진 교단들도 이제 목사가 없어요. 목사가 혹시 있다고 하더라고 교단이 이제 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분들을 생활을 해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요번도 가서 후배를 만났는데 자기가 담임 목사인데 8개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8개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니까 담임 목사를 두 달쯤 되야지 한번 교인들이 만나는 거예요. 한 교회씩 돌아가며 설교하니까. 그렇게 된 커다란 이유가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경험하는 이 은혜의 경험이 사라지면서 그러면서 신앙을 인간의 이성이 대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을 설득할 수만 있으면 무슨 이야기이든지 다 진리일수 있다라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으면 아무리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믿음이라도 그것을 우리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의 생명력은 경험에 있는 거예요. 올바른 지식 위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절실하게 경험하게 될 때, 그 때에 믿음으로 알게 된 그 하나님은 사람들이 쉽게 놓치 않아요.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온 마음을 다하여 간구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질 때 성령께서 우리의 자식들에게 우리의 동료들에게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큰 능력과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들이 하나님의 인격으로 경험되도록 기도하는 거예요. 그것이 사실 핵심이에요. 그것이 교회를 받히고 있는 기둥이요 힘입니다. 하나는 진리라는 기둥이고, 하나는 은혜라는 기둥이에요.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안에 만나서 경건의 원천이 되는 거예요.
시인은 오늘 노래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물질에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환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잘 살게 되었을 때,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그 넉넉한 삶은 우리를 급속히 불신앙으로 끌고 갑니다. 교회 마다 가득 찼던 젊은이들은 대형버스타고 축구 구경 타고 다니느라고 고속도로가 인산인해를 이루어요. 어느 목사님이 그래요. 저 젊은이들이 한때에는 교회에 헌금하던 돈을 이제는 축구 단체에 갖다가 기부한대요. 그렇게 허무하게 사는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해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정말 주님을 알기 원합니까. 우리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을 전해주는 그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자다가 일어나도 주님이 우리에게 소원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우리가 물이 바다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조국의 땅에 가득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차고 넘치기를 그리고 우리의 가정 안에 그리고 내 마음 안에 차고 넘치기를 원하나이다. 이러한 고백이 정말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굳게 붙드시고 도우십니다. 주님은 다윗이 큰 역경 중에 있을 때,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유지하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인생에 뼈저린 시련의 때에 평안한 때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장 악한 상황에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선하심을 가르치는 도구는 무궁무진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좋은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배우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때로는 나빠 보이는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희를 버려 다시는 너희가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서는 최고의 무서운 말씀이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말합니다. 너희가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너희를 버려 다시는 너희가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지식은 언약 백성인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주님의 마음에 가장 기쁜 기도는 당신을 알고 싶다는 기도에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나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모두 알려진 것 같지 나도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고난과 시련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가난하게 될 때가 있죠.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의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죠. 그 고난과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죠.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고통스러운 상황인데도 놀랍게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나면 인생의 해결이 보이는 거예요.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나면 그러면 깊이 예전에는 도저히 보이지 않던 그 길이 보이면서 내가 어느 인생길로 항해 하여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경회 때 생애 적으로 주님만나고 집에 가봐야 변한 것 아무것도 없어요. 안 믿던 남편이 수요예배 마치고 은혜 받고 돌아가니까 댓돌로 달려와 무릎을 꿇고 여보, 내가 잘못 했어. 내가 오늘서부터 당신 말 잘 듣고 교회 잘 다닐게 일어날 수도 있지만, 별로 잘 안 일어납니다. 상황은 어떤 때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나면 내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셨구나, 아, 그런 분이셨구나 . 그러한 강한 깨달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예전에 몰랐던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맛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우리의 인생을 바꾸시는 방법과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한번 바꿔보려고 하는 방식이 현저히 달라요. 우리는 맨 마지막에 날 바꾸려고 해요. 돈도 좀 벌고, 나쁜 놈들도 좀 정리를 하고, 맘에 드는 사람들도 옆에 두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환경을 좀 만들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고, 또 만들고, 또 만들고, 또 만들고, 또 만들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변해야지만 자신의 삶이 올바르게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 안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구할 때,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만지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바꾸시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지는 모르겠지만, 영국을 여러 번 가면서 참 하나님이 이 나라를 참 다시 만져 주시면 참 좋겠다. 그 그렇게 훌륭한 신앙의 유산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그렇게 순교의 피를 흘렸던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가진 나라인데, 지금은 그 조상들의 귀한 유산을 조금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놀랍게 그것도 영혼인데, 그죠. 영혼인데 어떤 사람들은 국민성의 차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청교도의 옛날 역사들을 보면 그러한 강력한 회심의 역사들이 일어났거든요. 마치 얘기를 하다보면 한국 사람들은 오버를 잘 해서 그런 회심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이거예요. 그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한 하나님의 강한 성령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일어날 때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이 살아나고 하는 은혜의 역사가 있을 텐데, 문제는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울어주어야 하는데, 자신들은 자신들을 위해 울기 위해서는 너무나 주님을 멀리 떠났어요. 그게 문제에요. 우리는 여기에서 강력한 선교의 동기를 느끼는 거예요. 교회가 평촌에 있는 이 교회만 교회가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큰 몸 중에 있는 하나의 지체에요. 이단은 아니더라도, 교파가 좀 다르고 생각이 달라도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그래서 그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면서 우리들이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회적인 상황들을 내 몸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해요. 이번에 가면서 막 아주 더 특별하게 간절히 가슴속에 밀려 왔어요. 이렇게 메마른 이 땅에 하나님 바라보시면서 여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그리고 강물 같은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 주시기를 얼마나 원하고 계실까. 사면을 둘러보아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혹은 그들 자신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주님의 은혜를, 성령의 강한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마른 뼈와 같은 우리들이 살아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매달리는 그러한 몸부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통로 삼아서 그 척박한 땅에 내려오시는 거예요. 내려오시는 거예요. 언제든지 하나님의 부흥이 있었던 때마다, 원래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그래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의 역사를 보면 강한 부흥이 있을 때 사람들은 마른 뼈와 같이 메말랐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면서 주님의 그 회심의 역사가 강물처럼 쏟아져갔던 거예요. 영국은 내 나라도 아니고 남의 나라인데, 일주일 있으면서 가슴이 그렇게 애잔해 질수가 없었어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어두워진 세상 속에
곳곳마다 상한 영에 탄식소리 들려 온다
(예화) 최근에는 영국에 있는 아주 오래된 감리교 신학교 하나가 문을 닫고 무슨 음악치료센터로 바뀌었대요. 왜 그랬냐 하니까 입학생이 없는 거예요. 한명도 없는 거예요. 그것을 이렇게 보면서 그것이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교회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보면서 막 가슴 저려 하면서 몸부림치고, 이 교만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맛보아 알기만 한다면 변화될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막 확 이러한 것들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한 것들이 그러한 몸부림의 기도들이 없는 거야. 돌아오면서 그러한 생각을 했어요. 사실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엎어놓고 생각하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선교사들이 와서 순교하면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피눈물 나게 기도하고 본국의 사람들이 울부짖을 때 우리는 언제 우리를 위해 울었습니까. 남이 울어주니까 그것이 선교가 된 거야. 그러면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우리보다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 그렇게만 말하지 말고, 지금은 어차피 다 버렸으니, 이들을 위해 기도하자. 오면서 후배 목사님들 모아놓고 그랬어요. 기도 많이 하라. 반드시 하나님이 이 땅의 교회들을 살리실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서 여러분들을 머물게 하실 것이다. 우리 기도하자. 메마른 땅에 하나님이 단비를 부어 주시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시고 위대하고 선하신 분이신지를 의심할 수 없이 맛보아 알도록, 그래서 자신들의 시대를 거슬러서 메마른 대지위에 비를 내리듯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물붓 듯 부어주시도록 기도하자. 기도하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신앙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 성장은 교회 착실하게 다니고, 수십년동안 한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신앙의 성장만은 아닙니다. 제가 심방을 가서 꼭 물어보는 것이 있죠. 은혜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한테, 당신이 은혜를 받고 일 년이 넘었는데 이년 전에 방황하던 당신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면 뭐라고 충고하시겠습니까. 대답이 불분명한 사람은 괜히 은혜 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아주 뚜렷하고 분명한 지식과 함께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아는 아주 뚜렷한 이해를 가지게 될 때, 그래서 그 지식 때문에 주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것, 이것이 바로 영적인 성장이에요. 영적인 성장이요. 그래서 목숨이 붙어있는 날 동안에 죽기 직전까지 해야 할 일은 숨 쉬는 거예요. 피가 우리의 혈관을 흐르는 거예요. 우리 코의 호흡은 우리가 죽기 직전까지 멎지 않아요. 똑같이 우리가 그렇게 똑같이 혈관의 피가 흐르고 코끝에 숨이 들락거리고, 심장의 박동이 멈추지 않는 것처럼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뭐냐 하면 주님이 누구이신지 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서 작년의 나를 만나면 가르쳐 주고 싶고, 재작년의 나를 만나면 너무 가엾고 3년 전, 4년 전 나를 만나면 얼굴이 뜨듯해 지고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지, 맨 날 신앙생활을 이야기 해보라고 저 쌍팔 년도에 수없이 써먹던 것 반복하고 있으면 신앙이 희망이 있겠느냐 이거예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은혜 안에서 성장해 가는 주님을 맛보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