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으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마가복음 21장 34절)”
자기의 몸을 드려서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러나 늘 깨어서 사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렇게 늘 깨어서 살기 어려운 것은 그럴듯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거든요. 겉모습은 그래도 이게 속이 하나님 앞에 정말 깨어있지 못한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단말이죠. 원래 인간은 그런 죄 된 성품을 죄악된 성품과 더불어 결별하기 어려운 그런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마는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모든 잘못된 신앙생활, 늘 깨어있지 못하는 영적인 생활의 원인을 늘 숙명적인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신앙생활은 말이죠. 매일 매일 새롭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새로운 감격, 그리고 또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의 부패한 모습을 보면서 매일매일 새롭게 결단하는 자기 결단, 이런 것들 없이는 그런 필연적으로 잠들 수밖에 없는 우리란 말이죠? 우리가 신앙적으로 잠들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될 것이 없습니다. 그냥 살면 저절로 잠듭니다. 그러나 깨어있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잠자려고 노력을 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노력한다고 해서 잠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것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제 말세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배와 그물도 버리고, 부모와 처자도 버리고, 그리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이제 예수그리스도만을 쫓아온 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섬뜩하게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둔하여지고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러니까 그렇게 헌신적이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닌 제자들이었지마는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조심하지 아니하며는 그런 헌신적인 제자의 길을 걸어온 자라 할지라도 방탕하고 그리고 술 취하고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서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하게 되는 그런 상황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을 버린 사람도 아니고, 본토와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 사람들도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러한 가능성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가능성이 얼마나 더 많겠는지, 우리는 깊이 겸손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늘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한다라고 하신 것은, 여러분 덫이 무엇인지 아시죠? 짐승을 잡으려고 처논 그런 올무, 그런 덫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번 보셨습니까? 짐승이 지나가는 길목에다가 풀로 살짝 가려서 덮어놓습니다. 먹이 같은 것을 두거나 혹은 지나가다가 발로 딱 밟으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덫이 튀어나오면서 그의 발을 채워버립니다. 그래서 움직일 수 없게끔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그날이 덫과 임하는 것입니다.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좋은 날이 아닙니다.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행한 날이요 매우 고통 받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올 줄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기쁨의 날이요, 그리고 은혜의 날이요 그리고 감격의 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우리들이 받았으면, 우리가 이렇게 마지막 때에 깨어 있다가 주님을 만나는 성도들이 되어야지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제 무엇이라고 말하냐하며는 “왜, 그 날이 그렇게 덫과 같이 임하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둔하여지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둔하여 진다고 하는 것은 감각이 무디어 진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지각하는 것은 마음을 통해서 지각되는 것 입니다. 모든 은혜도 마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예민함을 잃어버리면 그는 마치 더듬이를 잘라버린 귀뚜라미와 같은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 그리고 어떤 헌신을 하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칭찬을 받으면서 살아왔다고 할지라고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일단 마음의 예민함, 영적인 민감함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는 즉시 잠드는 생활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민감함을 잃어버리고 되면 죄에 대해서 둔감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둔감한 것이 계속되면 죄에 대해서 용납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용납하는 것이 계속 쌓이면 죄를 짓기에 담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윽고, 죄 짓는 것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인격의 특징이 되어서 이제는 패역의 깊은 뼈대들이 그의 인격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한번의 눈물이나, 두 번의 뉘우침의 회개로써는 그 자신도 그 자신의 삶을 어찌 돌이킬 수가 없는 것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주시는 “깨어있으라”고 하는 권고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간곡하게 깨어있으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신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문] 시편 23편을 설교하면서 제가 그런 예화를 든 적이 있습니다마는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요만한 접시에다가 찬물을 붙고, 개구리를 올려놓았습니다. 물론 개구리는 언제든지 뛰어나갈 수 있지요. 이렇게 놓고 램프에 데가 불을 붙였습니다. 물이 1초에 0.02도씩만 높아지도록 조절을 해서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1시간 20분 뒤에는 개구리가 푹 삶아 졌습니다. 갑자기 따듯한 물이였으며는 따뜻한 물에다 집어 넣었으며는 도망갔을 것입니다. 천천히 천천히 자기도 모르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자며는 그 개구리가 완전히 익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깨어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불해야 할 수고가 보통이 아닙니다. 굉장히 많은 대가를 지불 해야지 만 겨우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이 둔하여지면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지금 말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가 다가오는 일들을 미리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들이 영적인 감각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듯이 그렇게 마음이 둔 하여지며는 마지막 때 뿐 만 아니라, 모든 영적인 것에 대해서 그렇게 둔감한 마음이 든다는 것 입니다. 마지막 때는 주님을 몸소 뵈옵는 날입니다. 그날에 대한 기대를 갖는 것도 깨어있는 심령을 가진 사람둘이 그날에 대해서 기대를 갖는 것 입니다. 그날을 소망으로 삶고 살아가는 것도 깨어 있는 영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날이 소망이 되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가 그분은 마주 대할 것이라는 것이 위로가 되고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들만이 그런 격려와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랑이로다! 하고 소리 칠 때 “기다렸습니다. 라고 뛰어나갈 수 있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졸며 자는 사람은 그 소리가 미래에 신랑이 올 것이라는 사실은 소망이 되지마는 그러나, 지금 오셔서는 안된다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둔하여지면, 이렇게 영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서 둔감한 생활을 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인제 문제는 그 다음에 이렇게 마음이 둔하여지게 하는 요소가 무엇이냐를 들 때 방탕함, 술 취함, 생활의 염려, 이렇게 세 가지를 예수님이 제시하고 계십니다. 사실 이 말은 이 말을 듣고 있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많이 못했다던 지, 혹은 정신 차리고 살지 않아서 실수를 한다던지 하는 것이야 이해가 되겠지마는 방탕할 수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몸소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 안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방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시야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옛날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이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린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버리고 좋은 직장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이 말세의 교훈 앞에서 주님의 생애의 후기에 와서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몸소 보고 받으면서,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렇게 긴 세월을 살아온 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방탕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말씀하십니다.
“방탕하다는 것” 이것은 단지 실수로 범죄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방탕하다는 것은 그것이 죄 인줄을 알고 자기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서 기꺼이 하나님의 계명을 짓밟으면서 돌아다니는 삶과 마음의 모습을 가리켜서 방탕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치는 것 없이 그는 자기의 불붙는 욕망에 의해서 자극을 받으며 욕망이 시키는 대로 노예가 된 상태로 인생을 걸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이런 가능성이 있었다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보실 때에 이런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셨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이런 가능성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든지 우리는 이런 죄에 이 나락에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술 취함을 말합니다. 당시에 술이 일반화 되였던 사회니까 주님이 이런 위험을 지적하셨습니다. 우리들 중에 이렇게 물리적인 술에 취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술 비슷한 것들에 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익하지도 않은 어떤 취미생활에 탐닉해서 모든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것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옳은 것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자기가 좋아하는 사상과 사고방식, 그런 것들을 가르침들에 혹해서 자기의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것, 육신적인 쾌락에 자기의 마음을 빼앗기는 것, 이런 모든 것들 다 술 취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우둔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우리를 주장하고 지배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생활의 염려”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생활의 염려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분명하게 죄악에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지마는 생활의 염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무엇을 먹을까? 입을 것이 없을 때 무엇을 입을까? 마실 것이 떨어졌을 때 내일은 무엇을 마실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정서이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당연한 사고방식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생활의 염려, 생각이 아니라 염려, 이 염려는 자신의 결핍한 것들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고, 내게 없어도 하나님이 주실 것 이다라고 단순한 믿음이 있으면 결핍에 대해서 생각은 하지마는 염려는 하지 않습니다. 근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해도 하나님께로부터 내게 오지 아니하면, 그러면 기도하는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를 반성하는 기회로 삼아 자기를 고치고 또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볼 때에 올바른 자리에서 올바로 하나님 앞에 열심히 구하는데도 주님이 주시지 아니하시면, 바로 그 사람이 그것 없이 잠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훌륭한 기간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안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물질을 안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바르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데에도 오지 아니하면 그것은 물질을 우리에게 안주신 것이 아니라 물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올바른 자리에서 주님 앞에 간구하는 데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하시거나,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시면 주님이 우리에게서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만나야하는 할 사람들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들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 아닙니까? 눈에 보기에는 고통스러운 때였는데 지나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석도 잘하고 받아들이기도 잘하지만, 그러나 현재의 결핍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그것들을 견디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쉽게 염려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염려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불신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염려는 반드시 근심을 불러오고, 근심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킵니다. 그래서 인생을 점점 자기의 방식, 자기의 아집, 자기의 수단으로 스스로 해결해 볼려고 하고, 일용할 양식을 스스로 공급해 볼려고 합니다.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행동 뒤편에는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자리에서 통치하시는 분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려고 하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을 기대하면서 사는 것이 너무 답답하니까, 직접 내가 공급하면서 살겠다라고 하는 이런 사고방식이 염려에 염려를 계속 불러오고, 영성을 파괴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배워야합니다. 그러면, 염려로부터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 조금주시면 조금먹지, 쉬게 하시면 좀 쉬지, 마실 것이 없으면, 좀 나누어 먹지 하는 안분지족하는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경건의 큰 유익을 갖게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 인생의 계획보다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쓰는 그런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결국 깨어있을 때에 결국 이런 모든 일들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기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극을 받아도 결코 뜨거운 기도 생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인 태만과 무지와 더불어서 싸워야 합니다. 태만과 무지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피 흘리며 싸워야 할 우리 안에 있는 대적인 것입니다. 가끔 하나님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분명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강하게 움직이셨습니다. 말씀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은 기도하지 아니하고 배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말씀을 크게 깨달아서 감화를 받으면 그는 즉시 기도하지 아니하고 견딜 수 없는 자신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흐릿하고 기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솟구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로 말미암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깨워주셔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은혜가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게으름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극을 묻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밥을 잔뜩 먹고 살이 쪄서 잠자는 사람들은 둔합니다. 아주 뚱뚱하면서도 예민한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둔합니다. 그냥 코를 골면서 배를 불룩거리면서 잠을 잡니다. 옆에 와서 누가 툭 치면 게슴츠레 눈을 뜨고 뭐야 그러다가 다시 잠듭니다. 다시 잠드는 거죠,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기도하도록 우리를 깨워주셨는데 영적으로 게으르니까, 자극을 받으면서 뭐야 그러고, 기도해야지 그러다가 다시 이번에는 더 깊이 잠에 떨어지는 거죠. 그래서 똑같은 자극 가지고는 이제 당연하다는 듯이 이제 움직이지 않는 것이죠. 계속 깨닫게 하시고, 그래도 안 들으면 몽둥이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계서 그들의 삶을 한번 흔들어서 진짜 정말 정신 차리고 벌떡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겠금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우리는 그런 자리로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게으름과 더불어서 싸워야 됩니다. 여러분 새벽기도 나오는 것 좋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 좋은 사람 있으면 한 번 손들어 봐요. 하나님 앞에 아침시간에 기도한 것이 내게 더 큰 행복 이였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일어날 때에는 좋긴 뭐가 좋아요. 일어날 때에는 거기서 그냥 자는 것이 좋지요. 훨씬 좋지요. 그렇데요. 자매도 아주 확실히 쓸데없는 것을 잘 터득했어요. 이렇게 확실히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영적인 게으름과 더불어서 늘 싸워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또 간구하고 직장 끝나고도 집에 바로 들어가는 게 좋지, 여기 와서 기도하고 가는 게 무어가 좋아요. 여기 컴컴한 지하실에 저녁때, 누가 또 와서 뭐 이상한 사람이나 들어오지 않을까 염려하고 (tape 에 녹음이 안된 것 같음) 후자가 훨씬 좋지요. 그런데 그렇게 계속 자기 좋은 데로 살면 마지막에는 자기 싫은 대로 간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 사랑에 자극을 받고, 하나님 앞에 더 열심히 살고, 그 사랑에 감동을 받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결국은 맨 처음에는 쓰지만, 그러나 마지막에는 정말 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인내가 필요한 길을 택하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친구도 많은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치가 있고, 고독한 길을 택하는 것이죠. 이것이 신앙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은 날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우심과 그 은혜 없이는 살수 없다는 사실을 매일 매일 확인하는 것이에요. 얼마나 우리와 더불어 싸웠습니까? 저는 오늘 오후에 성경을 읽는데, 누가복음 18장에 보니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은” 그래,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기도하면서 얼마나 쉽게 낙망할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쉽게 낙망하는 우리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정확하게 예언하셨어요.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의 이 예언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밤낮 택한 자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거절하실 리가 없고 속히 들어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약속을 붙들고 살기보다는 우리의 상황을 붙들고 쉽게 낙망하는 거예요. 주님이 바로 그 시절에 오늘 우리들이 살아갈 영적인 삶을 미리 내다보시면서 그러면서 그런 약속을 내게 너희에게 준다. 택한 자들이 밤낮 부르짖을 때에 내가 어찌 그냥 두고 보겠느냐 속히 내가 응답해 주지 않겠느냐, 나는 그런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약속이고, 그러나 너희들이 정말 마지막 때가 되면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자가 몇 명이나 되겠느냐? 그러면서 주님이 한탄하시는 거예요. 한탄하시는 거예요. 안타까워하시는 거예요. 왜 마지막 때에는 이렇게 깨어 있기가 더욱더 힘들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너무나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에 땀 흘려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요새는 피 흘려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해만 떨어지면 자는 것에요. 그렇지 않아요. 불 꺼라, 불 끄고 일찍 자자, 왜 석유 아깝게 때냐, 그리고 불 끄며 는 모두 취침이에요. 시간이 어때 쯤 될 을까? 8시쯤 될까 말까에요. 그러니까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새벽기도도 가지요. 끝나면 뭐해요. 부지런히 호롱불 들고 교회당에 가는 것 밖에 더 있어요. 그러나 지금 같은 사회에는 우리 집에 8시에 잠자는 사람 있어요. 그런 사람 없어요. 전부 밤 10시, 11시가 되어도 대낮이에요. 그렇게 우리자신을 이 세상 속에서 혹사하며 산단 말이죠. 연장된 하루의 길이 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바치는 시간보다는 그만큼 우리의 마음이 세상 것들에 지배되고, 세상에 받쳐진 삶을 산다는 말이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직장을 섬겨야지 만, 요새 같은 세상에 안 쫓겨나고 밥 먹는단 말이죠. 그렇게 해도 쫓겨나더라고요. 이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데, 다 이리저리 빼앗기고 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붙들면서 살 마음이 우리에게 남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아무것도 안되는 거예요. 그러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고, 우리가 아무리 인간적으로는 불쌍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산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이치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기도하면 깨어있고, 기도안하면 잠든다 이거에요. 직장생활 때문에 잠들었는지, 돈 벌려고 잠들었는지 연애하느라고 잠들었는지, 성경은 그게 중요한 아니에요. 너희가 나를 찾는 자냐. 나를 부르는 자냐. 나를 의지하며 나에 목말라 하면서 사는 자냐?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깨어서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