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구역공과 6강의
교회와 사랑의 확장
사실 지난 시간에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이라는 제목 이였는데 끝까지 설교를 못하고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가서 아무데서나 끝나지 않았고 끊어도 좋은데서 끝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제 그 남은 부분을 하면서 계속이어서 교회와 사랑의 확장이라는 이런 교리를 가지고 우리들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인제 그런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 교회가 함께 연함을 이루면서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참된 예수의 몸으로써 이게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야 되겠는데,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교회는 불완전한 혼합이다. 교회 자체가 불안전한 혼합이기 때문에 사실 이일이 굉장히 어렵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고 우리가 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성령 안에서 한 아버지께 경배한다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우리들이 진리를 중심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러나 인제 교회 안에는 모두 참 신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크게 세 종류의 신자가 포함되어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이사람 모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에요. 신앙고백자들이 이제 모여서 교회를 이루는데 그 고백자들이 크게 세 종류의 사람이라는 거죠. 우선 첫째는 뭐냐면, 크게 분류하면 참 신자와 그다음에 부패한 신자와 그 다음에 거짓 신자. 이렇게 세 종류의 신자가 모여서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둘로 나눈다며는 참 신자와 거짓 신자로 나누게 되는데 참 신자는 다시 둘로 나뉘어지겠는데 상태가 좋은 신자, 맛이 간 신자, 이렇게 나누겠어?? 이렇게 되는 사람이 누구나 그러면 이런거죠, 참 신자는 아주 분명하게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이에요. 접붙여진 사람은 어떻게든 간에 참 신자에요. 참 신잔데, 참신자라고 해서 모두 진실한 신자가 아니에요. 열심히 죄를 죽이고 은혜생활을 잘하면 이게 건강한 신자가 되어서 진실성이 많은 신자가 되요. 근데 요즘 무슨 망령이 드렀는지 기도 도 않하고 뜻을 세웠어요. 안하기로, 그리고 말씀의 은혜도 안 받고 예배시간에 맨날 늦게 오고 그리고 끝나고 가다가 주차장에서 대판 싸우고, 이런식으로 교회다녀요. 그사람은 분명히 거듭났는데도 상태가 않좋아, 여러분 몸이 항상 똑같은 상태 안니잖아요. 뾰두루지라도 하나 생기며는 그 주위가 다 곪으면서 인제 그 부분이 몸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잖아요. 엉덩이에 뾰두루지가 나면, 앉을때도 엉거주춤하게 앉고, 하여튼 많은 고통을 주잖아요. 그게 상태가 않좋은 신자야 그래도 그 사람은 넓은 의미에서 참 신자야. 왜, 그래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졌으니깐 근데 인제 거짓신자는 아에 교회 나오기는 하는데 접붙혀지지는 않았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신자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워낙 교양이 있고 품위가 있어서 교회 점잖케 다닐수 있고 참신자이긴 하지만, 워낙 교양이 덜되있어요. 교양 떨어진 사람은 은혜가 덮고 있을 때에 진짜 겨우 버티지 은혜가 뚜껑을 딱 벚어 버리면, 그담에 본래의 모습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 쭉 보며는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는 옛날 모습이 어땠는지 잘 연상이 안돼요. 지금 늘 그냥 천진 난만한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듣고 뭐 그냥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하니깐, 근데 인제 은혜가 떨어지면 연상이 다 되요. 아 그랬겠구나, 옛날에, 그리고 인제 목회하는데 참고가 되죠. 어 정말, 두고두고 참고가 됩니다. 아 그렇겠구나, 그래서 한번씩 은혜가 떨어져 보는 것도 목회에 참 도움이 되요. 아 저사람이 옛날에 그런사람 이였구나, 아 인제 그 속에 저런 기질들이 있었구나, 근데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속에 덮혀서 살아왔구나. 은혜의 뚜껑이 열리니깐, 아 인제 저렇게 되는 구나, 그걸 인제 깨닫는거죠. 그럼 인제 아, 저사람, 인제 저런 면에 있어서 많이 돌봐줘야지만, 사람이 고쳐 지겠구나 이런생각을 인제 하게되는 거죠. 물론인제 그런생각을 하게될때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지마는 그렇게 되면서 사람이 성장을 하게되는 거에요. 근데, 이렇게 세종류의 사람들이 섞여서 신앙생활을 하거든요. 근데 이게 그러며는 이제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들은 거짓 신자고 그담에 또 참신자이긴 하지만, 상태가 안좋은 신자는 교회에 고통을 주는데 요 상태 않좋은 신자들이 고정되었으면, 고정되었으면, 방이라도 따로 만들어서 분리를 하겠는데, 근데 돌아가면서 상태가 안좋아 지거든요. 돌아가면서,^^ 그러면서 인제 그러거든요. 근데 모든사람이 이렇게 규칙적으로 돌아가면서 그러는 거는 아니죠. 그래서 인제 신앙이 좀 부족해도 워낙 사람이 침착하고 주님께 붙혀 있으려고 하는 꾸밈이 없는 성격이고 이렇게 열심을 내고 하며는 덜한데, 그렇지 않으면, 인제 이사람이 좀 낳아졌나, 그러면, 또 저사람이 뚜껑열리고, 저사람이 좀 뚜껑 닫혔냐 하며는 또 저사람이 열리고, 하면서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그렇게 가는거에요. 세상끝날까지 이제 바로 종말까지 교회의 특성이에요. 근데 특별이 인제, 이중에서 참신자와 거짓신자가 함께 섞여있는 것은 교회에 더 많은 고통을 주는거죠. 더많은 고통을 주는거죠. 그니깐, 회심하지 않고 예수께 접붙혀지지 않는 사람은 실상 정말 그 교회에 회원이 아니거든요. 근데 인제 그렇게 회심하지않는 그런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있게 될 때에 문제가 없을 때는 그냥 가만이 있지마는 그러나 인제 문제가 생기게되며는 인제 괭장이 많은 문제를 일으 키면서 고통을 받게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깐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예수의 몸에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그 분량이 없어요. 분량이라는 건 뭐냐며는 왜 이렇게 사람도 살다보며는 기본적인 인간성을 갖추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륜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억울하거나 잘못된 상황을 맞이 해도 넘을 수 없는 어떤 선을 가지고 있잖아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영적으로 예수의 몸에 접붙혀 지고 하나님의 사랑속에 깊이 들어간 사람들은 순간 적으로 많이 약해지는 적도 있지마는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기가 넘어야 될 선과 넘지 말아야 될 선을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어요. 근데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들은 한번도 그사랑에 녹아 보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깐 이 선이 없다구요. 뚜껑이 잘못 열리면, 이선이 없이 넘나 드는 거에요. 그런데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자연적인 본성에 있어서 이사람이 교양이 있고 인품자체가 아주 뛰어나고 절제나 이런것들이 쭉 있어서 사회생활을 할때도 막가는 사람이 아닌경우에는 그런거를 어느정도 지켜요. 그런거 조차도 없어요. 사람을 향해서도 그런게 현저히 교양이 떨어져서 부족하고 그리고
또, 하나님을 향해서는 거듭나서 예수께 접붙여 진적이 없으니깐. 하나님 앞에 경계선이 없는 거죠. 이런사람들이 인제 하게될 때, 교회는 말할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오늘 우리가 어저깨부터 우리가 배우는 교리가 소위 예기하는 토투스 크리투스 라고 그래서 이건 라틴언대 모두를 그리스도예수의 몸으로 여김 그런 뜻이거든요. 좀 길어요. 그러며는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이 예수의 몸일 수 있어요? 거듭나지도 않았죠, 때로는 교회를 막 아프게 하죠, 아까 애기 했듯이 사람을 향해서도 경계가 없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경계가 없어서 지멋되로 넘나드는 이런 사람을 예수의 몸이라고 생각할 수 있냐 이거죠. 그죠! 왜 예수의 몸으로 생각해야 되는 지는 좀 있다가 하고 이렇게 참신자와 거짓 신자가 넓게 분류를 해서 참신자와 거짓신자가 섞여져 있는 것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교회의 모습이에요. 어쩔수가 없어요. 그래서 완전 구별이 불가하다 이거에요. 우리는 그런것들을 구별하려고 노력은 하죠 노력을 해서 어떻하죠. 그런 사람들에게는 세례 주면 안돼죠. 그리고 그런사람들에게 교회에 큰 직분을 주고 이렇게 되며는 교회가 언젠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돈많은 사람을 장로시키고 뭐 이렇게 하고 그담에 회심의 여부 잘 확인도 안하고 억지로 권하다시피해서 세례를 주고 이렇게 되며는 결국은 나중에 교회가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거에요. 그런면에서 구별은 하지마는 완전히 나뉘어 지는 것이 불가능 한데 종말까지의 교회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어디에 또 나타나냐하며는 말이죠 예수님의 비유에 보며는 한 밭에서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자라는 거죠. 주인이 그거를 만약에 가라지를 뽑아야되겠다고 밭으로 뛰어들어 가며는 그러며는 심어놓은 작물이 망가지는 거죠. 또 그물을 하나의 또 비유로(?) 어부가 나가서 그물을 쳤는데, 그물을 쳐서 일단은 그물을 친 것을 다 고기를 가지고 와서 인제 먹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고기들을 갈라내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이게 그물 그 자체가 교회라면 보이는 교회라면 마지막에 그걸 분류하는 작업은 다 낚은 다음에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다 라는 것이죠. 이러한건 특별이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는데, 노아가 방주를 짖고 거기에 이제 사람들이 들어 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육축들을 보존고 싶으셔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짐승들을 집어 넣으라고 그러셨어요. 근데 참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은 정결한 짐승 근데,이미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있잖아요.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쌍씩 집어넣고 부정한 짐승은 두쌍씩 집어 넣라 이게요. 부정한 짐승은 두고 두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피해야 하는 물건이거든요! 근데 그걸 이상하게 부정한 짐승을 거기다 집어 넣어라고 그러신다고, 구원의 방주 속에 집어 넣으셔요. 나중에 인제 이게 두고두고 문제가 되죠. 그래서 너희는 나한테 제사 지낼 때 이런 부정한 짐승은 제사드리지 말거라, 또 이런 부정한 짐승들을 먹으면 안된다. 이런 부정한 짐승들을 만져도 안된다. 그러면 결국은 상종을 안할 부정한 짐승인데 홍수로 다 쓸어버리시며는 야! 뛰어다니는 건 뭐든 잡아서 먹어도 되고 나한데,제사드리면 된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건만 남겨 뒀거든, 왜 그렇게 안하시고 왜 손도 되면 안되고 먹으면 안되고, 제사진도 지낼 수 없고, 늘 피해다니면서 조심해야 하는 그런 부정한 짐승을 살려 두시니냐 이거에요. 왜그랬을 거 같해요? 하나님의 섬리에요. 그래서 어떻게 됬냐하면, 이 부정한 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는 진짜 그들이 정결해 지고하 하는 노력을 하게 하시는거죠. 부정한 짐승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진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때에도 내게 순종하면서 제사를 드리나 하나님이 확인하실수 있는 거죠. 그냥 뛰어다니는 거 아무거나 잡아와! 그러지 않고 가서 하나하나 살펴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주님께서 보실 수 있고 시험하실수 있는 거죠. 부정한 것이 있으니깐, 상대적으로 번성을 막 해나갈 거 아니에요. 상대적으로 부정한 짐승들을 보면서 저건 하나님께서 금하신 부정한 짐승이다 보면서 정결함에 대한 말하자며는 개념들이 분명하게 생겨나잖아요. 이게 하나님께서 교회에 거짓신자들을 두게하시는 이유에요.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좋은 감정을 안가지고 있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 않으면 교회 안나오면 되잖아요! 근데, 정말 잘나와요. 꾸준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며, 꾸준히, 그렇게 교회 나와 요. 그렇게 교회나오다가 지옥으로 가는거에요. 그게 얼마나 가슴아픈 일이에요. 그죠! 근데 하나님께서 세상끝날까지 그런 사람들을 교회안에 남겨 두셔요. 왜냐하면, 그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정결해지게 되는 거죠. 교회도 마찬가지로 참된 신자들를 그러한 거짓신자를 교회에 남겨두심으로서 참된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에 고통도 당하게하시지만, 참으로 하나님편에 서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참과 거짓 두 개가 교회안에 보이는 교회안에 함께 있는 것을 보면서 참된 것에 대한 더욱더 사모하는 동경을 갖게하시는 거죠. 그러니깐 우리가 은혜가 떨어지며는 죄짖고 이러는 사람들을 보며는 아고 나도 한번좀 한다리 껴볼까? 나도 옛날에 한가닥씩 했는데, 이런 맘이 들지만, 상태가 좋으면 그런걸 이렇게 볼때에 아 정말 내가 진짜 정신 차리고 살아야 되겠구나. 진짜 신앙생활 제데로 신앙생활 안하면 저꼴이 되겠구나. 하고 각성하면서 마음생기잖아요. 하나님이 그런 죄를 통해서 우리를 오히려 성결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이래서 하나님께서서 교회에는 이 거짓신자들을 하나님께서 항상 있게 하셔요. 그런데 인제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럼 그런사람들이 보이는 교회안에 있으면 그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거룩함이 손상되는 거 아님니까? 그런생각 하게 되죠 그죠. 교회를 순결하게 해야되는 데. 거기에 신앙은 고백하지만 사실상 예수께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서 온갖 부도덕한 일을 하고 교회를 아프게 하고 또 죄를 짖고 이렇게 하게 되며는 그러면 교회의 거룩함이 더럽혀지지 않습니까? 그러는데, 더렵혀 지지않아요. 왜 더렵혀지지 않습니까? 그사람 어짜피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더렵혀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예수의 몸에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이 교회안에 와서 많은 악을 행하고 그럴 때 교회는 고통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참된 교회의 거룩함은 손상되지 않아요. 물론 사람들은 보면서 저인간도 교회에 소속해 있으니깐, 아이고 저 교회 형편없구나. 이렇게 말하자며는 사람들의 평가는 떨어트릴 위험은 있지만, 성결한 의미에서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공동체적인 실제적 연합을 파괴하거나, 실제적 연합 어저깨 말씀드렸잖아요. 공동체적인 실제적연합 말씀드렸죠. 원리적으론 예수께 접붙혀 있지만, 교회의 몸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사랑과 순종으로 예수께 잘 붙어있으면, 그러며는 이 실제적인데서 연합이 이루어져서 그 통로를 통하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전해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런데 아무런 문제를 주지 않는 다 이거죠. 아무런 문제를 주지 않는 겁니다. 절대로 교회의 거룩함이 손상되지 않는다 이거죠.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궁금한게 남겠죠. 뭐가 남느냐며는 그러면 아까 애기한 제삼의 사람 맛이간 교인들 참신자이긴 하지만, 맛이간 상태가 안좋은 교인들이 부패할 경우에는 그래서 악을 행할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이럴경우에는 인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거룩성이 손상을 입게되느 거에요. 그리고 실제적인 연합이 이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사람에 의에서 악이 행해지니깐, 그리스도교회에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 흠집이 가기 시작하고 교회의 거룩함에 말하자며는 파괴가 오기시작한 거에요. 그러니깐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어떤 결론에 도달할수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의 매우 커다란 악도 참된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 손해를 끼칠 수 없지만, 그리스도예수께 접붙혀진 신자의 부패한 신앙은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에도달하게 되는 죠. 그러니깐 교회의 참된일치나 건강을 위해서 거듭나지 않은 거짓신자들은 책임이 적지만, 그러나 참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예수께 접붙혀진 사람들은 책임이 아주 많은 거에요.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러면, 성령의 이름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러면, 그사람이 세례를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속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교제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게 거듭남이요 구원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죠. 우린 생각할 때, 야, 신난다 예전엔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그리고 아, 정말 그 죄에 져서 멍에를 지고 무겁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데, 예수님이 날 위해 돌아가시고, 나를 이제 이렇게 믿기만 하니깐 하나님이 세례주셔서, 예수께 접붙히게 하시고 그예수를 통해서 삼위하나님과 교통을 이루게 하셨으니 야 이제 진짜 고생끝 행복시작이구나, 그게 아니라이거예요. 그렇게 접붙혀진 것은 물론 이제 옛날에 그 고통스러운 죄의 멍애 에서는 벗어나게 되지마는 이렇게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서 한몸이 되고 그 한몸이 된상태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면 그다음에 이제 그분만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이 명하신 모든 지혜와 사랑을 따라서 살겠노라고 다짐 하는 거에요. 이게 약속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속으로 딱!세례를 받고나면, 죄의 짐은 하나님이 다 벚겨주셨는데 성경을 한권 주시는 거에요. 이제 죄의 짐은 벚었으니 이제,이건 죄의 짐보다 훨씬 가벼운 멍애인데, 니가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걸 딱 짊어 지는 거에요. 그리서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다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놀게하리라, 쉬게 하리라 놀게하리라 먹게하리라, 퍼지게 하리라 그러지 아니하시고 내가 주는 멍애는 그 이제까지 니가 지고온 멍애보다 훨씬 가볍다. 나와 함께 그 멍애를 지고 멍애를 진다는 말이 예수님 시대때 맹락에 의하며는 선생과 스승이 된다는 뜻이에요. 기술자가 같은데, 그래서 같이 기술을 배워가는 거죠. 그렇게 멍애를 지자 그렇게 예수그리스도께 묶이는 거죠. 근데 그걸 안해 구원에 대한 이해가 아주 매우 잘못되어 있는 거죠. 예수님 믿고 나며는 그다음에는 뭐, 아주 모든 것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는 고생끝 행복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의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안해, 그럼 뭐냐 내가 기쁨이 있을 동안에 예수께 봉사하고, 사라지면, 할 수 없는 거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공경이 적선적인 공경이 되는 거야. 내가 아라서 조금 보태드리면, 주님이 영광받으시는 거고 이런 식으로 사니깐, 교회 접붙혀 졌는데, 계속 곪은 신자로 남는 거야. 십년째 계속 곪아, 이십년째 계속 곪고, 좀 아무는 가 하더니 물집 진물 질질 나고 그러는가 하더니 곪는 기운이 뿌리를 내려가지고, 저 밑에까지 파고들어가서 가끔 위에다 고약을 발라도, 위만 아무는 듯하지 또 저 밑에서는 계속해서 그러는 거죠. 은혜를 좀 받으면, 겉은 아물어서 좀 정신차리고 다니나 그러는데, 저속이 이미 썩었어. 저속이 너무나 오래됬어. 그러니깐, 인제 그속에서 계속해서 고름이 올라오는 거야. 겉엔 그냥 멀정해도, 속에서 계속 욱신욱신 쑤시고, 이러는 상태로 계속 사는거야, 그런시각을 가지고 한번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한번보세요. 교회가 이렇게 있는데, 교회마다 다 작게 보면, 하나 하나의 몸이잖아. 그리스도의 몸을 이렇게 보세요. 그렇게 교회가 모습이 다양할거라 말이죠. 어떤교회는 건강하게 잘 돼서, 군살 하나없이 잘 되가지고, 정말 아름다운 청년의 몸과 같이 무엇이든지 시키시며는 달려가서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탄탄하게 근육질로 말이지 근육질로 잘 되어있는 그런몸인데, 어떤 몸은 말이지, 배가 잔뜬 나와가지고, 그냥 배가 땅에 끌릴정도로 되가지고 그러고 관절염이 걸려서 설설 기면서 다니는 그런 교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교회는 몸은 그래도 배도 안나오고 제법 볼만한데, 세상에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잔뜩 나가지고, 도대체 어디가 눈인지 콘지, 구별이 안갈정도로 그러고 골름 냄새를 풍기면서 살아. 여러분들이 속한 교회는 어떤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번 생각해 보신적 있어요? 그래서 인제 참신자가 부패하게 될 때에 교회의 거룩함에 손상을 주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인제 교회에 많은 아픔을 주는 거에요.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로 통치하시고, 또 은혜로 안되면, 징계로 통치하고 이렇게 하시면서 고치시기는 하지만, 그러니깐, 인제 자신에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에요. 마음에 평안이 있겠어요. 그렇게 힘들고 그담에 교회에도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는 거죠. 그게 한번 여러분들의 모습은 어떤지 한번 진지 하게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교회가 거짓신자들이 악을 행함으로 고통을 당하고 참신자들이 악을 행하므로 교회가 말할 수 없이 아픔을 겪고 이러면서 교회 온몸이 상쳐 투성이가 되고 그러 잖아요. 그런데 참 놀라운게 말이죠 교회가 죽는 법은 없어요. 우리의 인간의 목숨도 말이죠 어떻게 보면 파리 목숨같지 마는 참 질기거든요. 다리 같은거 톱으로 수술하는 톱으로 뚝 잘라도 꺼내도 살고, 머리도 이렇게 해가지고 뚜껑을 다 열었는데도, 뇌를 막 파내고 이랬는데도 또 살고, 괭장해요. 괭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거에요. 그런 생명력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셨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교회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거에요.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거에요. 사람들은 다 버리고 떠나가도 주님은 홀로 그 교회에 계셔요. 그래서 그 사람들로 연합을 이루게 하시고 그래서 다시 그들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셔요. 많이 사랑하셔요. 그러니깐, 인간들이 내가 아니면, 이교회를 어떻게 하랴, 그런생각도 하지 말아야되. 누가하겠지 이건 더 나쁘지마는, 누가하겠지! 제가 옛날에 교회건축할 때, 깊이 깨달은 교훈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나는 맨처음엔 감동 받았거든요. 아 목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다해 주시죠. 다해주시죠. 그러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두종류인데, 믿음이 너무 좋아서 자기를 다 헌신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게 진짜 참말이에요. 목사님 우리가 많이 해도 결국은 주님이 이루시죠. 이런 뜻이고, 자기가 안바치고 그런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 게 무슨 뜻이냐고 하며는 하나님이 모두 하십니다. 딴사람이 모두 합니다. 그애기야 그게 똑같드라고, 감동이 달라요. 누가 애기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지켜주셔요. 그걸 여러분들이 이제, 볼 수 있으면, 제법 성숙한 사람이에요. 눈이 뜬사람이에요. 마치 여러분들이 그 고등학교에 다닐때까지 대학다녀도 용돈 조끔주면, 집에서 나올 때 발길로 문차고 오고 그리고 막 엄마한테 심술부리고, 나 학교 안다녀 버릴꺼야! 챙피해, 안다니면, 뭐!누가 손핸데. 이런식으로 협박하고 저도 참 많이 그랬거든요. 근데, 나중에 그러든애가 언째쯤되며는 우리엄마가 우리 길으느라고 얼마나 많이 고생하셨을까. 그리고 그 엄마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아릴때가 있어 지가 시집가가지고 저보다 못된 자식 낳아가지고 고생을 좀 해봐야되. 그러면 인제 엄마 마음을 깨닫게 되. 그때에 인제 비로서 인간으로서 철이 드는 것처럼, 성도도 교회의 몸에 접붙혀 지기는 했는데, 이게 뭐가 뭔지 모르고 까불고 다녀. 그러다가 인제 어느때쯤 말씀을 많이 먹고 성숙해 져서, 그래서 인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에요. 그리스도인 몸인 이교회가 얼마나 아플까? 그러니 몸이 이렇게 아프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실까? 내가 그 아픔의 원이 되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비류한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되요. 그때에 그사람이 깊이 이제 성숙하게 되는 거죠. 철이 들게 되는 거에요.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진짜 그리스도의 예수의 몸의 일부로써 지각이 있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근데 제경험에 의하면, 그때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하구요 그리고 참다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잘 가르쳐 주어야지만, 성도들이 겨우 깨달을 수 있는 성숙한 경견이 바로 이 교회를 어머니의 품처럼 여기게 되는 그것이 바로 성숙한 신자의 표증 중에 하나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 그런 것들을 많이 생각을 해야지, 생각을 안하고 살면 머리 허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도 결국은 자기 몸하나 둘 교회하나없이 그리고 이리저리 유리방황하면서 인생을 살아요.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얼마나 고통을 주고 부끄러운 것 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그리고 떠돌이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이거죠. 그것은 정말 실패한 인생을 사는 지름길이에요. 정말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그럼 왜 이렇게 그 교회안에 거짓 신자들은 속히 회심시켜서 돌아오게 하시고, 정신못차리는 신자들은 빨리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잘 못받으며는 한차례 때려서 그리고 가로열고 나는 빼고 그리고 가로 닫고 그렇게 해주시지. 왜 하나님이 그렇게 두고만 보시고 그래서 거짓신자들이 계속 교회 찔르고 다니고 부패한 신자들이 계속 곪은데로 그 붙어있게 만드시고 떨어지지도 않고 몸에 붙어있어서 그래서 그냥 옆에 사람도 아프게 하고 고름냄새 풍겨서 결국은 전체적으로 교회의 품격이 떨어지게하고 예수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서도 멀어지게만들고 왜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실까? 왜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실까? 이런생각 들때가 있거든요. 자기가 잘 못살 때에는 그런 생각이 잘 안들죠. 하나님 이렇게 좀 신앙생활 잘 안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차례씩 한번 정신차리게 맞아야 정신차리는데, 좀 때려주시지. 그런생각은 잘 안하죠. 자기가 또 신앙생활을 잘 할때도 그런 생각 잘 안해. 그건 왜냐하면, 은혜가 너무 충만하니깐, 그러니깐 어떤때 그런 생각을 하냐면, 상태가 안좋은데, 자신은 좋다고 착각 할 때 그때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시거든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그러면서, 교회의 몸에 보이는 교회에 가짜 신자와 곪은 산자가 섞여 있게 하셔요. 섞여있게, 그 왜그러실까 하나님이 왜 그러실까 여기에 하나님의 아주 깊은 그 경륜이 담겨 있어요. 지혜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며는, 하나님이 교회의 이러한 모습 가짜 신자가 섞여서 보이는 교회가 찔림을 당하고 참된 신자중에 부패한 자가 있어서 곪은 상처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 아파하고 이런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참된신자들에게 자기 안에 있는 거짓과 불의를 보게 하시는 거에요. 거짓과 불의를 보게 하시는 거에요. 잘보세요. 교회안에 교회가 순전하게 하나님을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구원받았잖아요. 교회가 순전하게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람을 향해 그 사랑을 향해 나타내고 그런 까리따스 곧 지순의 사랑속에서 살아야 될 존재잖아요. 근데 그렇게 안살아. 그러면서 교회가 그속에 온갖 더러운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냄새나는 거죠. 교회는 성결에 지기를 바라지만, 실체에 있어서는 병원하고 비슷한곳이에요. 사람을 고치기는 하지만, 그런 죄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병균이 많은 병원과 같이 그런 곳이 바로 교회에요. 그런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거를 자기가 신앙심이 없이 그걸 들여다 보게되며는 짜증이 나는 집단이에요.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냐며는 아이씨 골치아픈데, 한번 옴겨? 두 번 옴겼는 데, 세 번 못 옴기겠어? 그리고 옴길 생각을 한다 이거야, 물론 이제 하나님이 때가 되면 이사를 간다든지 직장을 옴긴다든지, 뭐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하나님이 목사도 교회를 옴기는 데, 신자들이 왜 교회를 못옴기겠어요.그죠. 근데 이제 문제는 교회에 상처를 내지 않고 첫째는 그리고 일체의 온유함과 진지함으로 주님앞에 인도를 구하며 그러면서 교회를 옴기는 경우에는 문제가 덜되는데, 아이씨 골치아퍼 갈아보자, 그리고 이교회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뭔가 생각하는 거에요. 곪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구나, 안 곪은 교회 어디 있나? 그리고 한번 뒤지는데 그눈에 그런게 보이겠어요? 이미벌써 이렇게 상태가 안좋아서 상한 눈이기 때문에 분별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것들을 구별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보암직 하고 먹음직 한 교회 가는 거에요. 그 교회에 접붙혀 지는 순간에 그 교회는 고통이죠. 기도제목이죠. 왜냐면 이사람은 다른 사람보고 썩었다그러고 떠났지마는 다른 사람보고 썩었다그러고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그사람 자신이 이미 거기에 간염되서 같이 썩은 사람이에요. 썩은 거의 종류는 틀릴 수 있어요. 그래도 같이 썩은 사람이에요. 그사람이 가서 저교회가서 털썩 붙었어요. 그교회는 그 순간부터 아파하기 시작하는 거에요. 본인 그렇게 생각 안하죠.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한테 어느 교인이 찾아와서 그랬대요. 목사님 요즘 교회 정말 썩었습니다. 저 정말 순결한 신앙생활 하고 싶은데 그런 좋은 교회있으면 소개시켜 주십시오. 스펄전 목사님이 그런교회는 없는데, 혹시 발견하거든 그 교회는 절대 가지 마십시오. 왜요 그러니깐 당신이 가는 즉시 안그렇게 될겁니다. 그러니깐, 결국은 그런식의 사고방식을 캐들어가보면, 어떻게 되냐면, 자기 사랑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아픔을 당하고 있는 거보다 자기가 아픔을 당하는 것을 훨씬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죠. 보세요.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거든요. 왜냐며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만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도 잘못할 수 있고 또,목회자만이 아니라 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한덩어리가 되어 잘못할 수도있어요. 그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체적으로 자기 빼놓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어요. 몰론 그렇죠. 그때에 신자는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죠. 처음부터 그 사람이 그런 상황에 대해서 열받고 뭐 이렇게 복수심에 불타고 다 때려치고 떠나고 싶다 이런생각을 갖지는 않았겠죠. 그렇지만, 그런점에서는 그사람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가죠 왜냐하면, 정말 교회답지 않은 교회도 많고 신자들 답지 않은 신자도 많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받는 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인정이 되는 거죠 문제가 뭐냐하며는 그런 현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이사람의 마음속에 뭐가 있어야 되야하며는 잘못하는 그 교회에 일꾼들 신자들 목회자들 이렇게 개별적인 존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이사람의 그 고민이 까리따스 안에서 일어나는 고민이 아니라고 하는 거에요. 교회는 그런식으로 다루어 질 수 가 없는 거라는 거죠. 뭐냐면, 그렇게 다가오면 안되고 그속에 잘못된사람들이 섞여 있어도. 결국은 그 사람들과 자신 때문에 예수의 몸 전체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몸의 고통이 전해와야 되거든요. 몸의 고통이 전해질 때 그것이 몸전체의 고통으로 전해지면서 몸을 위하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게 아니라 그 몸을 아프게한 어느 지체에 대한 이글거리는 복수심과 분노에 불타는 것은 이것은 카리따스의 사랑이 아니에요. 혈기에요. 여러분 한번 보세요. 아주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기가막힌 비유가 떠올랐어요. 여러분이 교회에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잖아요. 처음에는 교회를 염려해요. 근데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면서 사람들의 잘못과 부패들이 보이는 거에요. 그때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보통 올바르게 사유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사과하고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교회를 향한 염려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교회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에 불타게 되는 거죠. 그때에는 몸을 향한 사랑이 사라진 뒤에요. 다시한번 반복할께요. 맨처음에는 교회를 염려하는데, 교회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여요.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이미 그들을 미워하게 된때에는 몸전체를 향한 사랑은 사라진 때에요. 왜그러냐하면, 예수의 몸인 교회의 사랑은 카리따스의 사랑이에요. 이사랑은 교통적인 성격이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게 하는 사랑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을 이미 미워하고 분노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했던지 간에 그 순간에는 이미 카리따스 사랑은 없는 거에요. 이부분이 아주 미묘한 부분이에요. 이지점에서 굉장히 교회를 사랑하던 많은 성도들이 넘어져요. 그리고 결국에는 사단의 도구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거에요. 근데 이제 옳지 않다라고 하는 것을 비유로 통해 들려 줄께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요. 여러분도 몸이고 교회도 몸이잖아요. 근데 여러분들의 몸의 여러분들의 몸이잖아요. 그런데 하다가 상처를 입는다든지 해가지고 막 곪고 상하고 문제가 막 생겨고 심지어는 몸이 이상해가지고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암이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때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만약에 간암이 걸려서 지금 생명에 위독하다고 그러면 간에대한 막 미움이 생겨요? 이놈의 간 다 후벼파버려? 짤러버려? 나쁜자식! 이런생각이 드느냐 이거에요. 가다가 탈까닥하고 다리가 삐였어 골절이 되가지고 부러져가지고 몸을 못움직이겠는 거에요. 그때에 여러분 어떤생각이 들어요. 이 병신같은 다리 저거 왜 똑바로 걸어! 너 때문에 나까지 고생하잖아 이러면서 몽둥이를 들고 부러진 다리를 두둘겨 패느냐구요. 자기몸은 그렇게 안하잖아. 그 부러지면 어떻게되 어! 큰일났지! 그러고 분명히 머리는 직장에 가있고, 지금 손으로는 글을 써야 되는되, 다 쉬면서 온 몸의 기관이 다리에 집중하는 거에요. 그리고 이 다리를 끌고 데려다 주는 사람이 없으면, 자기가 목발을 짊고라도 병원에 가는 거에요. 돈없으면 꿔서라도 갖고가 가지고 치료를 하는 거에요. 언제까지! 다 날대까지. 그래서 처음에 동기는 교회를 사랑한 것일 수 있는데, 이게 사단의 계교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을 미워하고 물고 뜯게 만드는 거에요, 그래서 시작은 참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며서 성령으로 시작한 일이 육체로 번지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인간을 향한 독한 미움, 그런것들이 이속에 생겨나게 되는 거요. 결국은 까리따스의 사랑이 사라지는 거에요. 그리고 복수심이 남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말할 수 없이 상처을 받게 되는 거에요. 쉽게 이야기 하며는 처음에 곪은 상처가 문제가 되는게 아니라 그걸 짜본다고 까불다가 오염이 되가지고 거의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깐 그거는 몸을 다루듯이 교회를 다뤄야 되는데 푸줏간에 고기를 다루는 것처럼 교회의 몸을 다루는 거죠. 그렇게 다루면 안되는 거죠.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다루면 안되는 거에요. 이부분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냥 이정도로 하고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어쨌든 그런식으로 다루면 안된다 라고 하는 거죠. 절대로 까리따스사랑이 아이에요. 그리고 뭐냐며는 마지막까지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될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며는 모든 사람이 잘못해도 주님은 교회를 지키신다는 거에요. 반듯이 필요하면 하나님이 그사람을 데려가셔, 정말 정말 안되겠으면, 하나님이 생명을 거둬가셔요. 그래서라도하나님이 이일을 해나가게 하시는 거죠. 그전에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있는데, 참 신실하신 분이데, 청빙을 받아서 교회를 가시는데, 너무너무 힘들어 하셨어요. 장로님들이 여러분 계시는데, 그중에 한 장로님이 늘 선두에 서서 교회를 힘들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목사님이 안식년이 돼서 육개월인가 얼마를 쉬고 오셨는데, 늘 목회하면서 그 장로님 때문에 힘들어하고 몇 번을 교회를 그만 두려고 맘을 먹으셨고 목사님만 그러는게 아니라 많은 힘없는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는데 육개월만에 돌아왔는데, 이 장로님이 완전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났나 하며는 육개월 목사님이 안식년 가시는 동안에 하나님이 이 장로님을 지옥문앞에 데려갔다 나오신거에요. 죽음 끝에까지 데려갔다 나오신거에요. 그래서 이분이 완전히 생각이 달라진거에요. 아! 내가 악하게 살았구나. 내가 꼭 교회에서 잘못했다기 보다도 내가 악하게 살았구나, 나의 목숨은 주님 손 끝에 있구나. 이제 내가 남은 생애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하나님이 일일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교회를 지켜주셔요. 그점에 있어서 우리가 모든 힘을 다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그 선을 넘지 않고, 나머지를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되요. 그리고 깊이 기도하고 그 그리스도의 몸의 아픔이 진짜 처음처럼 몸의 아픔으로 느껴지고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아픔에 교회를 그렇게 아프게 했던 내가 바로 그 상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 교회에 있는 아픔들을 자기의 몸에 난 아픔처럼 객관화 수 없어야 되요.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이건 객간화야! 자기 간암 걸린 거 보고 에이씨! 딴기관은 다 멀쩡한데, 넌 바보같이 뭘 처먹어서 암에걸려서 확짤려버릴꺼야! 그렇게 안그러잖아. 그 드러운 놈의 간! 괜히 붙어가지고! 말이지! 안 그러잖아, 객관화 못하잖아 결국은 간과 함께 아파하다가 그 간과 함께 죽는거에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에요. 이게 그리스도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의 말하자며는 성화의 모습이에요. 우리가 늘 부족하잖아요. 그죠. 그니깐 주님께서 우리모두를 바르게 해주시도록 늘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그래서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이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교회와 아파하고 이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거에요. 그렇게 해서 말이죠. 뭘 배우게 되냐면, 그렇게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모든일이 자기안에서 일어나는 일하고 너무 비슷한거에요. 교회안에는 아무리 썩었어도 그 교회가 하나님이 자기를 세워주신 자리라고 생각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하나도 없는 교회는 없어요. 정말놀라워요 어쩜 그런지 몰라요. 심지어는 어느정도냐면 예배라고 할 수 없는 예배를 드려요. 나 진짜 목격했어요. 온 교인이 다 자. 정말로요. 그런데 교회가 필요하다고 그러면 말씀을 듣고 눈이 초롱초롱 살아있는 교회 교인들보다 더 많이 헌신해.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그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아닐꺼야. 그러는데 그렇지 않아요. 진리의 말씀 쪼금 밖에 못깨닫고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 많아도 그 속에는 진짜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진리는 많이 몰르지많은 조끔 알고 진리에 자기를 철저히 자기를 합치시키기 위해서 아파하며 기도하는 교인들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예배시간에 많은 교인들이 조는 것이 정당화 되지는 않지마는 그러나 그렇게 함부로 생각하면 안된다 이거죠. 그래서 결국은 뭐냐면, 그속에서 그 교회에 병든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게되요. 그래서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해 지며는 교회의 그런 병든 모습을 볼때에 그 마음이 마치 에스라 같이 되는 거에요.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타락했다 그랬을 때 칼빼들고 나온게 아니라 성전으로 달려가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기 문턱에 엎드려서 하나님앞에 한 없이 울었어요. 그래 왜그랬냐면 하나님 너무 죄송합니다. 자기의 죄악인 것처럼 토설하고 아파하는 거야. 카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차되면 교회가 부패하고 지체가 막 잘못하고 그리고 올치않은 일이 일어나서 막 사람들이 힘들어 할 때 그것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을하는 거에요. 이거는 저인간 때문이다 저 자식 때문이다. 이런생각 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에서 상처가 났을 때 그렇게 생각을 안하는 것처럼. 이걸 어떻게 하난 나도 너무 아프다 이몸이 아프지 말아야 할텐데, 아픔은 내가 당하고 지체들은 지켜주고 자기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지체들의 명애는 보존하고 자기가 쓰라린 고난의 아픔을 당해도 지체들은 아프지 않도록 보호하고 자기가 상처를 많이 받고 짖이겨지는 한이 있더라고 교회는 상하지 않도록 자기를 다 던져서 보호하는 거에요. 왜 왜그래야 되요? 왜그래야돼? 예수의 몸이잖아 우리는 우리 몸이고 예수의 몸이잖아요 우리가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이 평안하고 안녕을 누리는 그것이 이 교회의 모습이잖아요. 그렇게 할때에 신자의 삶은 견디기 힘들게 고통스럽죠. 그 뭐 이루 말 할 수도 없죠. 그런 속에서 아파하는 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혹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중보자가 된 것 같이 중보해보신적 있어요. 그건마치 깊이 들어가면 어느정도냐며는 나는 그냥 껍데기 일 뿐이고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오셔서 기도하시고 그냥 가신다고 기도가 끝나고 나면, 탈진하는 거에요. 저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내가 용서를 비는 거에요.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저사람이 빌어야할 기도를 나를 통해서 다 토설하게 하는 거에요. 그때에는 그 기도를 받는 사람받는 사람을 향한 어떠한 미움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렇게하면서 그게 중보기도의 정수에요. 그렇게 뼈져리게 깊이 기도하게 하세요. 사실을 그런걸 가끔 경험하지마는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그마음으로 교회 모든 지체들 지금 상태가 않좋아서 헛튼짓 하며 교회 계속 고통을 주는 막나니와 같은부패한 신자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세요. 그것을 바로 지혜를 가지고 그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에 의해서 행사가 된다그랬어요? 그렇지 사랑에 의해서 그게 바로 예수의모습을 본받은 사람의 신앙생활의 모습이고 그런속에서 자기는 많은 고통을 당하죠.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백을 했어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나의 육체에 채우노라. 나의 육체에 채우는 많은 고난이 교회때문이고 그리고 그 고난은 바로 예수님이 이땅에 계셨더라면, 당하셨을 그 남은 고난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공동체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을 애기하는 거에요. 어려운 말로 하면 성례전 적으로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께 자기자신을 봉헌하는 거에요. 그래서 사회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서 하던 방식과 같은 똑같은 방식을 가지고 교회에서 하게되는 거에요. 여기는 전혀 다른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란 말이죠. 이 사람들을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고 사랑하여야 할 이유가 둘있는데, 하나는 뭐냐하면, 상태가 안좋은 신자는 비록 상태가 안좋지만, 예수의 몸이기 때문에 또 예수의 몸에 접붙히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택하신 양 일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그러며는 내게는 우리안에 들지 아니한 또다른 양들이 내가 있어서 그들도 인도하여야 터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시죠. 우리안에 아직 안들어 왔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양이라고 이미 부르시는 거죠. 근데 그 사람이 세상에 있어도 우리가 가서 선교할텐데. 그사람이 오게 되었으니깐. 사실을 그 자체가 말 할 수 없는 선물이죠. 우리들이 선교를 나갈때에 그사람들에게 좋은 대접 기독교에 대한 예의 바른 태도 교회의 질서에 대한 업격한 존중 목회자의 대한 겸허함 성도에대한 예의 우리가 그거 기대하면서 전도나가요? 그럼 아파트 전도하다가 아파트 전도갔는데, 잡상인 출입금지인데 여기 왜 들어가요? 그럼 가만히 있어. 머기 끄덩이를 잡아 당겨가지고 땅에다가 한번 매치고 오지! 우린 그건거 기대하지 않는다 이거죠. 그려며는 당연한 일이 일어났구나. 근데 어떤사람이 오~ 전 예수는 안 믿지만, 들어오세요. 이추운날에 그러면서 손을 문을 열고 두손을 잡으면서 아이구 이 손봐 이렇게 추워서 어떻게 난 예수는 안믿지만, 어째든 들어요세요. 내가 하여튼 믿을 마음 있으니깐. 들어와 보세요. 뭐 제대로 된 인간이 있었구만, 우린 그렇게 생가하냐 이거에요? 우째 이런일이!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깐 안믿는 사람이 교회와서 불신자고 거짓 신자라고 하더라도 가끔 곤조부리고 그러며는 아이고 당연한 일이 일어났구만, 이러고 얌전하게 교회다니면, 아이고 왠일이셔? 이렇게 하면서 사랑해 줘야지 선교지가 교회속으로 들어온거거든요. 사랑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가 진정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질 날을 기대하는 거죠. 그때는 인제 다 와서 미안하다고 그런다고 그때는 정말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깨닫는 거죠. 그런게에요. 그러다가 보니깐 신자의 영혼과 마음이 이제 강조가 되는 거에요. 왜그러냐며는 아 죄송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깐, 이렇게 해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토투스크리스투스 교회의 보이는 교회 전체를 예수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그런거란 말이죠. 그러다보면 인제 그담에 우리가 뭐를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냐 하면, 교회가 확장된다는 게 뭐냐. 쉽게 애기하면, 교회가 성장 한데는게 뭐냐 우리가 교회가 성장한다 그러면 대게 몇가지 이런걸 뽑잖아요. 애를 들자며는 우선 교인이 많이 모이는 것. 교인이 계속 줄어드는데, 성장한다고 그렇게 애기 하는 사람은 없단 말이죠. 교인이 계속 늘어나는 것 성장이죠. 학고방 같이 쬐끔한데 복닥거리고 오부 육부 예배드리다가 큼지막한 예배당을 지어서 가는 것도 우리가 성장이라고 이야기 하죠. 또 뿐만아니라 성도들은 조끔밖에 안되는데, 헌금이 계속 늘어나서 그것도 성장이라고 애기하죠. 또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정신차리지 않고 했는데. 정신차리고 신앙생활을 해서 또 뭐 어쩠튼 가정도 평안하고 이렇게 다 된다. 근데 우리가 이런것들을 성장이라고 그러는 거죠. 전자의 세가지는 양적성장이라고 그러고 후자는 우리들이 질적성장이라고 그러잖아요. 근데 사실 이런 구분 자체가 뭐 별 특별한 의미가 없죠. 왜냐하며는 교회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수가 영향을 행사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좋은 신자라는 전제 조건이에요. 거짓신자나 상태가 안좋은 신자가 많이 섞여있게 되면, 이게 늘어날수록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선교의 걸림 돌이 되는 거죠. 무슨애긴지 알죠. 여러분들 이렇게 보다가 저사람은 진짜 예수 믿는다고 말을 안하고 다녔으면 굉장이 좋겠다. 말로는 우리가 못하지마는 사실 그런생각 우리도 하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아 여러분 자신을 포함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게요.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성장, 교회의 확장이라는게 뭐냐. 교회의 진정한 확장은 참된 의미의 선교에요. 그 선교를 통해서 그 복음화 되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확장인데 교회의 확장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확장이에요. 하나님이 이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을 제창조 하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택하셔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태어나게 하시잖아요. 종자씨로 택하신거죠. 이씨를 사방에 퍼트려서 그래서 이제 이세상을 회복된 세상으로 만들고 싶어하시는 거에요.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시는데, 문제는 종자씨가 이게 신통칠 않아 갔다 뿌려놓며는 이게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야 할텐데 그게 안되는 거죠. 그러니깐 씨가 문제가 되는거죠. 근데 이제 만약에 씨가 좋아진다며는 교회가 모판이 되어서 모를 다 찢어서 그래서 인제 모네기를 다 하게되며는 몇 달 지나고 나면 막 그 벼로 가득한 논 밭이 되고 가을이 되면, 막 누렇게 벼가 익어서 황금 물결이 출렁거리는 그런 밭이 되어져요. 모판은 요만한거 하나였는데, 그걸가지고 다찢어서 모를 내니깐 그냥 들판 전체가 누렁 곡식이 출렁거리는 그런 황금물결에 논이 된거에요. 그런것처럼 세상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시는 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된 세상이 도대체 뭐냐. 결국은 뭐냐하며는 하나님 안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사랑의 질서를 따라서 일이 이루어 져있거든요.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건 거의 천편일류적인 유사해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냐면, 사람이 각각 조금씩 틀리지만 자기의 사랑에 말둑을 박고 원을 치면서 살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사는 거에요. 예수믿는 사람들은 틀리거든요. 하나님의 사랑의 중심에 말뚝을 박고 사는거죠. 그러니깐 신자가 부패하거나 거짓 신자여서 그렇지 참되고 진실한 신자는 데게 생각하는 것이 비슷한거죠. 여분 뭐 얼마나 비슷해요! 여러분들중에 어떤사람은 돈 많이 벌어서 떵떵 거리면서 살아봐야되겠다. 아니면, 지금은 성화되는 시간이니깐, 좀 참았다가 성화가 어느정도 완성되면, 내가 가서 한번 타락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다 이거죠.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를하면서 원을 그리면서 어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문제는 뭐냐며는 보이는 교회는 독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보이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지상에 있는 교회에요. 나눌수 있는 데, 사도들의 경우와 우리들의 경우로 나눌수 있어요. 사도들의 경우에는 교회가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이는 거죠. 예수님은 알아계시니깐. 예수님은 눈으로 보고 교회는 믿음으로 봤어요. 그렇니까 사도들도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다음에 이제 성령이 임하셔서 세워질 그 교회의 맛을 예수님을 통해서 본거죠.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이 교회를 어떻게 교회되게 이끌어 가야될것인가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원천이 된거죠. 왜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때에 택하신 의도가 일하게 하실려고 먼저 부르신 것이 아니라 먼저 부르신 것은 함께 있게 하기위해서 부르신 거에요. 그래서 그들을 불러서 함께 있게하고 복음도 전하게 하고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제자들을 부르신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항상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니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앞에는 종종 나타나셨지마는 항상 열두제자와 함께 따로 다니셨어요. 그런이유는 뭐냐하면, 그 열두제자 안에 예수님이 계시므로 그 속에서 이미 교회의 모형을 이루면서 어떻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고 그 가르침을 따라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나누고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을 몸소 체험하도록 예수님께서 시범을 보여주신 거죠. 그런 정신을 성령오신 다음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대로 구연해 간거에요. 사도들이 그러니깐 예수그리스도는 보이고 그담에 교회는 어떻하죠. 안보여요. 그러니깐 어떻하죠. 예수그리스도는 보고 그담에 교회는 믿어야 됬어요. 믿음으로 볼수 있었다 이거죠. 근데 우리의 경우는 틀려 이제 예수님이 안계셔요. 부활승천하시고 그리고 영적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어요. 어디 예수님이 여기 계셔요? 사람들 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믿음있는 사람 모두 이렇게 진리를 깨닫고 새해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보면서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우리모두 봐요. 그러니깐 이건 어떻게 되는 거죠? 눈으로 교회를 보고 예수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깐 이게 중요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도들에게 자기를 보여주실때는 흠이 없고완전한 모습이였어요. 그러니깐 사도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지성의 한 개는 있지만, 어쩧든 성령 오신다음에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실때에 그 교회의 모습을 성령오신다음에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실때에 그 교회의 모습을 성령오신다음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함께 동행하면서 그런 교회를 만들고 싶어 했던 거죠. 그런데 우린 그렇게 안되고 이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의식을 못해. 근데 요걸 보고 아는거에요. 근데 문제는 요 무리를 보고 예수님을 알게 됬는데, 이런 무리들인 교회를 보여분 예수님은 완벽하신 분이셨는데, 완벽한 예수님을 보여줄 이 교회는 현실적으로 불완전한 교회에요. 그러니깐 인제 거기서 뭐가 나타나냐면, 이사람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똑바로 살면, 사람들이 이 교회를 보면서 빨리 예수님을 생각하는거에요. 빨리! 빨리생각하고 제대로 똑바로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근데 이게 상태가 않좋은 신자들이 많고 거짓신자들이 많이 섞여 있어서 눈에 보이는 교회가 이게 자꾸 부패하고 곪고 냄새나고 상하고 절뚝거리고 뭐 이러는 그 담에 뭐 이렇게 장애가 일어나가 지고 뭐 괜히 손이 머리를 쥐어 박고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발이 괜히 등을 차서 말이지 차서 등뼈를 부러트리고 이렇게 하면서 인제 마치 망가진 로버트처럼 이러는 거를 보며는 사람들이 인제 예수님이 생각이 안되는 거죠. 몸이 정상적으로 일치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 뭐를 생각하겠어요? 뇌의 기능이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든지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니에요! 그 생각없이 막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사람보고 우리 가끔 그러잔아요. 너 뇌가 없냐! 이렇게 애기 하잖아요. 그러니깐, 심지어는 그렇게 엉터리 같은 교회를 이렇게 보면서 없네~ 예수님 없네~ 예수님 믿고 예수님께 접붙혀서 되는 사람들이 사는데 일관성도 없고 지들끼리 대방 거리 물고 뜯고 싸우고 법정에 고소하고 말이지 치받아 가지고 막 그냥하고 어 그렇게 하면서 욕 짖거리하고 심지어는 주먹이 오가고 말이지 그러고 말이야 돌아다니면서 막 비방 하고 이러는데 없네~ 뭐 이사람들 모인데가 우리모인데하고 뭐가 틀 리가 없네~ 없어~ 애이 없어! 있는데 막 떠드는 거에요. 없어! 아주 확신을 갔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전도하다 보며는 어려운 사람들이 불교신자 다른 종교 믿는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게 예수믿다가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 그사람들 전도하기 너무 힘들어요. 그사람들은 없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에요. 심지어는 어떤사람은 그래 계셔도 안믿겠다고, 그?? 그럼 굉장히 선교가 어려워지는 거죠. 예수님은 안보이고 교회는 보이는 거죠.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서 예수님을 보여주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삼위하나님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삼위하나님을 보고 와서 그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그 삼위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게 인간의 본분이거든. 이게 첫 번 단추서부터 이게 안뀌어지는 거죠. 그러면 인제 그 교회가 하나님이 자기들을 부르신 그 교회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거기에 접붙혀져 있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자기를 구원해 낸 하나님의 뜻대로 못살게 되는 거죠. 그러니 그 하나님의 자기를 구원하신 뜻대로 살아야지만, 영혼에 안식이있고 인간의 행복이 있고 거기에 인간이 태어난 보람이 있는데 그렇게 살지를 않으니깐 내적으로는 수많은 갈등과 죄에서 벚어날 수 없고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고백을 하면서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불의 저지르고 악하게 살아가게 되는거요. 그래서 결국은 예수를 믿은 보람이 거의 없는 핍절의 삶을 살게 되는 거죠. 그러니 이 모든 것이 교회의 상태와 맞물려있다고 생각하니깐.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숙제 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면 교회가 보여주어야할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 때 그 교회를 통해서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그리스도가 살아게심을 믿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을 까?그거 였거든요 첫째는 뭐냐하며는 까리따스로 충만한 자기 자신을 보여주어야 하는 거죠 까리따스는 지순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이 뭐든지 하실수 있는 분이니깐, 자기 아들을 구지 사람의 몸을 입어 이세상에 내려보내시지 않으시고도 우리를 구원하실려고 맘을 먹으셨다면 구원하셨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런데 하나님이 친히 자기의 외 아들을 이세상에 내려 보내셨어요. 또 한번 양보해서 그게 아니라 예수님이 반드시 사람의 몸을 입고 죽으셔야 했다고 결론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내려오시자마자 말구유로 가지 마시고 바로 십자가로 가시면 되잖아요. 근데 그렇게 안하시고 33년이라는 긴생에동안에 멸시와 욕을 당하면서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시면서, 33년을 살게 하셨어요. 솔직히 33년 예수님이 사시는 동안에 예수님이 한번이나 당신 자신의 존재에 어울리는 대접을 받아 본적 있어요? 그런 보람있는 생애를 사신적 있어요?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하면 반역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픽박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생명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죽일 궁리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잖아요. 그런데도 사람의 몸을 입으셔서 이세상에 내려보내신 이유가 뭐 때문이지 알아요? 그게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몸을 입은 예수님으로 실제 우리와 똑같은 세상에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사시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이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 지를 주님이 본보기가 되도록 우리에게 보여주신거에요. 그거를 이책속에 길이 담으시고 그걸를 몸소본 사람들이 교회의 터를 놓게 하신거에요. 사도들이에요. 그 터를 놓게 하신 거에요. 그래서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어야 됬어요. 그렇게 하게 하신거에요. 그리고 우리에게 ?? 떠오르는 거죠. 만약에 예수님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그런식으로 보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린 그런생각 못하는 거죠. 우리가 상태가 좀 않좋을 때에도 우리가 정신이 들게되며는 그런생각하죠. 아 지금 내자리에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이렇게 않하셨을 텐데.. 또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하나님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너무 힘들어요. 고통이 자기를 너무나 찔러 그럴 때,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 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런 고백 못할 거 아니에요. 그속에서 우리들이 얻는 통찰과 위로가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도 고난을 당하셨는데, 멸시와 욕을 당하셨는데, 시련과 아픔을 당하셨는데, 그 은혜로 구원받은 내가 아무리 나를 소진하며 사라도 예수님 발 끝이라고 따라 갈 수 있을까? 주님도 그러셨는데, 이 할 수 없었을 거 아니에요. 보여주신거에요. 그렇게 해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찬 자신을 이세상에 보여줄 때,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 안보이는 예수님이 믿어지는 거에요. 그 까리따스가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예수사랑 예수사랑 가지고 나타내 보여줄 때 되는 거죠. 그 어떤 불신자가 있었데요. 전도 대상잔데,아마 그 사람이 믿는 사람집에 초대가 됐든모양이죠 아이들을 둘인가 셋을 데리고 갔는데, 안믿는 사람도 마음이 너무 답답하면 누구에게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애기 저애기 털어놓는데 둘이서 이야기에 폭빠져서 애내들이 돌아다니면서 온집안을 개판으로 만들어 논거에요. 심지어는 변기에다 뭘 집어넣어 가지고 도기를 들어내지 않으면 알될 정도로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막 이렇게 굉장히 난리를 처 놓거요. 그러니깐 그래도 다 교육받은 사람들이니깐 이치를 알잖아 애기에 정신이 빠져서 이야기를 했지만, 그집에 너무 많은 손해를 입힌거야 그래서 미안해가지고 몰라하는 데, 구김이 하나없는 얼굴고 그집 부인만 그런게 아니라 그짐에 있는 딸까지, 나중에 온 딸까지 다 위로 하면서 아무 상관없다고, 그 불신자가 그것을 보면서 나라며는 이 상황에서 저럴 수 있을까? 자기하고 비교를 하는 겨죠, 나라며는 이상황에서 저럴 수 있을까? 오늘의 결론 예수 계시네, 그사람들은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는거죠. 나는 그렇게 못한다. 어 예수있네, 어디? 저사람 안에 있네. 그러니깐 보이는 사람을 통해서 믿어지는 거죠. 제가 언제도 한번 어떤 형제가 부동산을 감정하고 하는 그런사람인데, 하러 갔더니, 업자가 천오백만원을 다 낡은 돈으로 가방에서 꺼내 놓으면서, 탁 주더래요. 우리 한번만 봐주십시오. 이사람 싸인하나만, 잘해주며는 돈을 몇십억씩 더 대출을 받을 수 있으니깐, 어 그럼요. 잘해 드려야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뭐가 어려워서요. 제가 있는 힘을 다해서 잘해드릴께요. 그대신 이건 예수 믿는 사람이거든요. 그순간 그사람들은 예수있네, 이렇게 생각하는거요. 어 있네! 왜? 지금 있잖아! 저렇게 젋은 사람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돈을 그걸 밀어놓으면서, 잘해드릴께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해드릴께요. 돈받은 것 보다 더 잘해드릴께요. 근데 받을 수 없어요. 왜? 나도 받고 싶은데 내안에 예수가 계시거든요. 있네!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있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찬송들고 교회와서 눈물흘리는 모습을 보면서는 있네, 이렇게 애길 않하는 거죠. 왜냐면, 그거는 자기도 시어머니 하고 싸우고 속상하면, 부엌에 가서 우니깐, 왜 그런 생각은 안하는 거죠. 있네! 그렇게 이야기 하려면, 뭔가 자기안에 있는 그 놀라운 평안, 그게 바로 그런 충만한 카리따스로 충만한 자신을 교화가 보여주는 것이 이 사랑의 질서를 확장시키는 선교의 대의에요. 그니깐 잘해야돼, 그러니깐 뭐냐면, 여기서 뭐 그렇게 하나님의 막 선포하는 데, 아이구 제일 촌스러운게 그거에요. 우리교회 가서 우리목사님 설교 한번 들어보라고, 이 얼마나 시시한 전도에요! 그게 뭐에요. 그게 그렇게 하는게 아니고, 자기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보여 줄수 있어야지. 그걸 보여줄수 있어야지.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에게 그걸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때 예수의 사랑이 확장되어 가는 거거든요. 또하나 보여 줄것이 뭐냐며는 일치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줘야돼요. 그게뭐냐며는 존재의 목적이 통일 되게 나타나게 되는 거죠. 예를 들자면, 이러잖아요. 설교하다가 목이 말라요. 잘보세요. 목이 말라요 그래서 물을 마셔야 되겠잖아요. 근데 온 기관이 움직이는 거죠. 먼저 눈이 어여기 물있구나 봐요. 그담에 손이 이렇게 나가죠 그죠. 손이 이렇게 탁 들어요. 그러니깐 여기서 컵의 차가운 기운이 온몸에 짝 느껴지면서 전달하는거에요. 이게 뜨거운 물이 아니고 찬물이다. 이애기를 해주는 거에요. 그러니깐, 후루룩 후루룩 마실 준비를 입 하는게 아니라 쫙 마실 준비를 하는 거죠. 불어서 마셔도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리는 거에요. 그리고 이제 목이 물을 기다리는 거죠. 들어요. 이렇게 올라가는 거죠. 그리고 고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쭉~ 그리고 들어오면, 벌려요. 쫙~ 벌려요. 이러는데, 물 갔잖아 이사람아 입벌려 그렇게 안하고 이렇게 이거는 슬로우 비디오로 일어나는 거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 이렇게 ^^ 슬로우 비디오고, 이거는 일치에요. 온몸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쫙 해서 움직여서 하나도 손가! 입벌려! 고개내밀고! 자라처럼 빼! 그렇게 안하고 그냥 이렇게 움직이는 거죠. 그걸통해서 뭐냐면, 이사람이 정상적인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이는 거죠. 그러니깐, 교회도 보는 데, 사람들이 볼 때 그렇게 움직일때에 비로서 아 이게 뭐가 일치하게 움직이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거죠. 그런생각을 하게 되지, 이게 중구난방으로 막 움직여서 일치된 목적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될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 없네! 그렇게 딱 결론을 내리게 되는 거죠. 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그냥 그져 축구좋아하는 사람이 조기 축구 하듯이 예수좋아하는 사람들이 예수 동호회라고 이렇게 모여서 이렇게 그냥 이렇게 취미생활 하듯이 그렇게 하는 구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실제로 제가 목회를 하면서, 재미있는게 뭐냐며는 한집안에 회심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날 때, 여러 가지 경우가 있는데, 인제 어떤경우에는 이래요. 한 집에 예를 들자며는 네 식구가 사는 거야 근데 제일 먼저 남편이 가서 말씀을 듣고 그 몇 달 교회를 다니면서, 완전 변해서 새사람이 되는 거야. 그러면 온가족들이 야! 니네아빠, 요세 좀 변하지 않았냐? 매일저녁 일찍 들어오시지않냐! 허긴 그렇네요. 맨날 술먹더니 요세 술도 안먹고, 둘째가 있다는거야, 그건만이 아니야! 아빠요세, 매주 교회가잖아~ 요세는 빠지는 때가 거의 없어. 옛날에는 갈때가 거의 없었는데, 어! 진짜! 그렇네~. 이런거죠. 사람이 아주 신중해지고, 기도하고 성경읽고, 이게 그모습이 쪽~ 보이는거죠. 그때는 인제, 식구들이 아빠를 이렇게 원숭이 보듯이 보는거죠. 아이고 그리고 인제, 다들 그러죠. 부인도 몇일니나? 그러다가 이 남편이 은혜를 받아서 점점 깊어져, 그러더니 둘째애가 가가지고 변화받고 와가지고 눈물을 펑펑흘리면서 엄마 나 예수님 만났거든. 그런거죠. 엄마 인제 불안해 지기 시작한거야. 그래서 첫째까지 가가지고 뒤집어지고 수련회와가지고, 엄마, 엄마, 정신차려, 엄마 이렇게 살면 클라~ 엄마, 정말 정신차려, 그리고 여보 우리 예배드립시다~ 이러니깐, 예배는 뭐, 지금 텔레비전하는 시간인데, 텔레비전에 벌렁누워가지고, 침대에 벌렁 누워서 팅! 하고 리모컨 키고 한참 연속극 커져가는데, 읽어가는데, 거실에서 말이지 셋이서, 울면서 기도를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때부터 인제, 이게 두렵기 시작하는 거죠. 두려움이에요. 어디에서 오는 두려움일까요. 살아계시네! 거기서 오는 두려움이에요. 하나님 진짜 있구나! 하나님이 없다면, 식구들이 어떻게 순식간에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그게 생기는 거죠. 당신 예수믿어! 예수 안믿으면 큰일나! 예수믿어서 성공한사람 다섯사람 안믿어서 망한사람 내가 애기해줄까? 그런애기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부인이 물어보는 거야. 여보 진짜 예수님 계셔? 당신 진짜변화되니깐, 어떻게 돼? 마음이 어때? 이렇게 물어보는 거에요. 이게 가장 훌륭한 선교에요. 정말 훌륭한 선교에요. 여러분들이 집에가서 저는요. 잘 모르지만요. 우리 남편보니깐, 확실히 하나님 살아계셔요. 그러면, 그게 진짜 예수믿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런 일치를 보여주도록 되는데, 이 일치라른게 뭐냐면, 기계적이니 일치가 아니에요. 기계적인 일치가 뭐죠? 획일화 하는거요. 이북사람들이 데게 획일화 잖아요. 방송할 때, 자꾸 바뀌는데 목소리는 똑같애. 왜 그렇게 하는지 나는 이해가 안가요. 똑같애. 그런것들이 획일화에요. 그래서 교회에는 그런 교회의 일치는 그런 일치가 아니에요. 근데 우리는 교회에서도 이렇게 볼 때, 일치를 생각할 때, 기계적이고 비인격적인 일치를 생각하는 거죠. 뭐 예수믿는 사람들은 어때야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되고 이렇게 딱, 규격을 갖춰서 생각을 하잖아요. 근데 그런 일치가 아니라 이 일치는 그런 일치가 아니라 하모니의 일치에요. 하모니의 일치라는게 뭐냐며는 악기가 여기에 수십개가 있는데 악기를 연주할 때에는 그 악기가 다른 악기하나를 정해놓고 그 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지 않아요. 피리는 피리소리내고, 컨트라베이스는 컨트라베이스 소리를 내고, 바이올린은 바이올린 소리를 내고 그것도 펄스트 바이올린 쎄컨발이올린 소리를 가각 다른 소리를 내, 심지어는 작곡자가 작곡 할때에도 똑같이 안가고 다 틀리게해. 그러면 각자 자기 가는 거야. 근데 그거를 다 엮어가지고 하모니를 연출하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만약에 그렇게 연주가지고 똑같이 연주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럼 뭐 군대에서 들리는 군가처럼 들리겠죠. 그렇게 아름다운 하모니가 나는 게 아니라.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음악중에 하나가 뭐냐면, 남자들이 한 여덟명내지 한 이십명이 명에서 부르는 복사 중창이요. 나는 그걸 굉장히 좋아합니다. 아주 신비할 정도로 빨려들어갈 정도로 인간의 목소리가 최상의 악기에요. 그니깐 바로 하모니에요. 같은소리를 내가지고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행진하면서 부르는 군가 밖에 안나와요. 근데 하모니가 울려퍼지면서 그렇게 오랬동안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거죠. 교회에는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니깐, 왜 너는 왜 나처럼 기도할 때, 경건한 사람이면,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위로 들고 얼굴을 땅에 대고 그렇게 기도를 해야지, 그러고 너는 기도할 때, 나처럼 말이지 성경에 보면 부르짖으라, 이렇게 되었는데, 소리도 그렇게 못내고, 혼자서 그렇게 기도하냐, 너는 기도할 때, 분명히 마음을 토해놓으라 했는데,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기도를해야지 너는 왜 그렇게 글짖기 하듯이 예쁜 글 읽듯이 그렇게 기도를 하느냐 사람들이 자꾸 그러거든요. 근데, 그 다양성을 다 인정을 하는거에요. 그러면서 하모니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깐, 내게 부족한 것을 그사람들이 체워주면서, 교회전체적으로 하모니가 되어서, 온사람들을 꺽지않고, 온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은사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와주고, 단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까리따스를 가지고 그것들을 구연하게 하고 저사람이 나와 다른 뭐가 있으며는 항상 저사람 때문에 내가 도움을 받겠구나, 우리교회가 부족한 것을 저사람 때문에 보탤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해야지, 우리교회 너같이 튀는 사람 필요없어. 그러면 안되죠. 좀 튀면 어때, 천장이 좀 낮아서 좀 걱정이지만, 튀어도 괜찮아. 그렇게 해서 얼마나 좋아, 그러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교회가 만들어 가는 거죠. 이런 일치를 교회가 보여줄 때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믿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인제. 결국은 신자의 영혼과 마음이 강조가 되는 거에요. 교회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아름다움이 문제가 되는 거죠.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이 에베레스트 산이라는건 동의를 하지만, 그게 제일 예쁜 산이라고 하면,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죠.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아도 그산보다 참 많구요. 오히려 작은 산들중에 아름다운 산들이 참 많이 있잖아요. 그러니깐 마찬가지죠, 생각해보세요. 그런 웅장한 강이 제일 아름다운 강이다. 그렇게 말할 수 없구요. 큰 것이 아릅답다구 말할 수 없어요. 오히려 독일 속담에는 작은 것이 아릅답니다.라는 속담이 있어요. 작은건 뭐든지 아릅답잖아요. 예를 들면, 팔뚝만한 쥐! 느낌이 어때요? 오 뷰티플 그래요? 느낌이 어때요? 팔뚝만한 쥐, 두러 누워 낮잠자는데, 내 배 밟고 지나가다. 어때요. 우리 옛날에 어렸을때는 쥐가 천장에 늘 많았거든요. 이렇게 어느날 친구네 집에 가서 자는 데, 자는데 뭐가 툭 떨어졌어요. 봤는데, 금방 태어난 빨갛고 예쁜쥐 한 다섯 마리가 떨어졌어요. 다달렸어요. 발도달리고, 눈도달리고, 귀도달리고 다달렸어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막 꼼지락 꼼지락 거려요. 그러더니 우리가 자고 일어나니깐, 그 집에 동생이 그걸 실 묶어서 논다고 또 목에다 다 실 묶어가지고 자기가 키운다고 말이죠. 얼마나 귀여워요. 배 발고 지나가는 팔뚝만한 쥐 보다 훨씬 났잖아요. 얼마나 귀여워요. 그러니깐, 작은게 오히려 아릅답잖아요. 뭐 크고 작은건 우리 맘대로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교회의 가치는 큰거 아니에요. 그래서 뭐 크다적다 라는 거 획일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며는 그사람들을 잘 돌봐야 하니깐, 교회도 넓히고 의자 석수도 크게 만들고 이렇게 해야 되겠죠. 교회가 그렇게 커져서 건강하기만 하면, 큰 몸이 되니깐, 그죠.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교회가 이렇게 해낼 수 있잖아요. 그런면에서 나름대로의 유익이 있죠. 그건뭐 우리가 결정할 건 아니지마는 그러너 인제 기본적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자체가 아름다움에 두어야 되요. 아름다운 교회인가? 추로하고 큰교회를 원하느냐,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를 원하느냐, 일초라도 망설일 필요가 없는 거죠. 작더라고 아름다운 교회가 참 좋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에게 영적인 스승이 되시는 죤오웬 목사님이 자기의 책속에서 교회의 규모를 애기하면서, 그져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할 수 만 있다면, 교회는 이백명에서 오백명정도의 싸이즈며는 가장 좋겠다 그렇게 썼어요. 근데 저는 그것도 많은 것 같아요. 오백명도, 그러고 싶어요. 저는 정말, 그래서 정말 그러고 싶어요. 그래서 어떤때는 교회가 너무 힘들고 어려울때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아이 ?? 근데 문제는 뭐냐하며는 중요한 것은 뭐냐하며는 이 아름다운 것이 중요한거에요. 교회의 아름다운 이라는 게 뭐냐? 건물의 아름다움이나, 이런게 아니라, 거기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의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그 이룬 연합의 아름다움이에요.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그러니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어떻게 되야 되겠어요? 영혼이 끊임없이 세가지 삼위일체적 삶을 이야기 했죠!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고, 그담에 쇠신되고 세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영혼이 영혼됨으로 꽉 찬 변화가 한사람 한사람에게 일어나서 이것이 공동체 적으로 모두 새로워 지는 거에요.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고 함께 모여서 드리는 기도회가 이런것들이 중요한게 뭐냐하며는 이 한 몸으로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함께 영혼의 찌꺼기들이 빠져나가면서 순전해 지는 거에요. 그때에 이제 교회전체적인 예배를 잘드리고 나며는 영혼이 아주 맑고 깨끗한 영혼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잖아요. 그렇게 쇠신되어 가야되요. 그래서 끊음없이 밖에서 안에서 밖에서 유혹하고 안에서 부패성이 역사해서 우리가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하는거죠. 사단의 유혹도 있어. 끊임없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면, 교회전체적인 영혼이 아름답지 않는데, 까리따스의 사랑이 깃들 수가 없어요. 까리따스의 사랑이 깃들기 않는데, 성도들을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고 섬긴다고요! 어느 정신나간 사람이 그렇게 하냐 이거죠. 안한다 이거죠. 자기사랑이 꽉 차 있는데, 누가 그러겠어요.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죠! 교회 전체적으로 이게 병들고 추루해 지게 되는 거죠. 그러면 교회전체적으로 실제적인 연합이 끊어지는 거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 공동체가 모여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요, 그리고 신자의 삶이 각기 병들기 시작하는 거에요. 교회가 시험에 들어봐요 거기에 매달린 성도들이 다 시험에 들기 시작해요. 시험에 들기 시작한다고. 그리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영혼의 아름다움 이에요. 그거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면서 자신의 추루함이 교회의 아름다움을 해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그게 진짜 예수의 몸에 접붙혀진 사람이 가져야 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움이 나타나면, 그 교회가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은 신자의 마음을 통해서 그걸 보여주는 거에요. 신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이노력은 아주 중요한 거죠. 마음 지킴이라는 교리 책 속에서 이미 제가 다 밝혔어요. 그런 마음을 자기가 끊임없이 지키면서, 그러면서 분투하고 싸워서 그 마음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언제든지 사용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것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거죠. 그런 사랑안에서 성도들이 계속 자라가야 하는 거죠. 그런 사랑안에서 성도들이 계속해서 잘라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성장이에요. 하나는 정화 됨이에요. 무슨 뜻이냐하면, 영혼안에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과 경향성들이 이런것들이 자꾸 흐트러지고 이질적인 경향성들이 생겨나는 데, 이런것들이 다 빠져나가고 온영혼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꽉 차는 것이 정화 되는 거죠. 풍성해 진다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이런사랑이 아주 충만하게되어서 그래서 하나님 자신만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찬 상태가 되는 거야.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이외의 다른 것들에대한 사랑은 점점점점 시아에서 멀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또렷하게 하나님만 사랑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교회를 섬기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에게만 관심이 있어서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데로 자기자신을 봉헌 하려고 하는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점점점점 더 집중될 때 그것을 사랑의 풍성함이라고 하는 거에요. 분산이 많이 됬을 경우에는 즐거울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데, 고난이 오면 때려쳐요. 때려친다고요. 근데 주님을 많이 사랑하면, 고난이 와도 그것을 참고 견뎌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자신의 안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이 없는 삶을 자기가 생각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깐 어떻게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 하는 거죠. 그렇게 하며서 하나님 한분을 향한 사랑으로 점점더 집중 되는 거에요. 그때 그 사랑을 풍성해 진다고 이야기 하는 거죠. 그렇게 될 때에 이제 이 교회는 점점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인제 마지막으로 생각해 봐야 될 것은 뭐냐하며는, 이러한 신자의 영혼과 마음이 강조가 되지만는 인제 신자의 영혼과 마음이 그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차있어야 되지만, 또한 동시에 공동체로 한 몸을 이루는 교회가 어느 시점에서 같은 생각과 마음을 품어야 된다는 것을 어제 장시간에 걸쳐서 여러분들에게 논증해 보여줬어요. 그죠. 그래서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뭐 이것저것 모두 해야 되지만, 어느 시점에서 우리 개인에게 너 요즘 왜 기도 않하냐? 또 시간이 지나가면, 너 요즘 왜이렇게 정직하지 못하냐, 또시간이 지나가면, 너 요즘 왜이렇게 게으르냐? 이렇게 때에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메시지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이 교회를 향해서도 그런게 있다 이거죠. 그러니깐, 너희들은 같이 모이기만 했지만, 사는 건 그냥 니네 아라서 각자 살아라. 그러시지 않고 교회가 한 몸으로서 느끼는 거죠. 이런것들을 전달 해주는 것이 바로 강단의 사명이에요. 거러니깐, 자꾸 요구하면, 안된다라고 하는 애기가 바로 그거에요. 기도하면서 항상 그런 분별력을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주시도록 하면서 그러면서 기도하는 거에요. 듣고 싶은 설교 주제가 있으며는 기도를 많이 하세요. 그럼 제 마음을 움직여서 글로 갈꺼에요. 왜? 그 메시지가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그러니깐,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느시점에서는 교회를 향해서 그냥 순졀해 지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시는 거죠. 그때에 모두 자기가 분결하다라고 하는 것을 회개해요.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는데, 깨달음도 별로 없이 어떻게 회개가 되기는 됐는데, 이사람은 뭐 직장 떨어져서 서러워 울고, 저사람은 뭐 성경 안 읽는 다고 울고, 저사람은 자식이 속쎄긴다고 울고, 뭐 이런식으로 되면, 아무리 울고나도 이데 일치가 안돼 근데 어느 순간에 순결하라! 그러고 막 이것 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메시지가 준엄하게 주어지고, 순결하게 살기 위해서 고난받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막 위로 하시는 거에요. 그때 사람들이 다른거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자신의 문제로 떠오르는 거야. 맞아! 내가 지금 이런문제 저런문제 다있지만, 이건 결국 내가 순결하지 않아서 생긴문제야! 그러고 떠오르는 거야. 이제 수면위로 다! 사람은 각각 처한 상황은 틀린데, 그것을 중심으로 다 떠오르는 거야. 그래서 회개를 하는 거죠. 하나님 내가 순결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뭐 어떤 사람은 성적 순결을 회개하고 어떤사람은 직장에서 부정한 것에대해서 순결하지 못했다고 회개하고, 어떤사람은 가정에서 말이지 잘못한것에 대해서 순결을 회개하고, 학생들은 학교가서 컨닝한거를 회개하면서 순결을 기도하고, 이렇게하면서, 결국 각자에게는 다르게 적용이 되는 거죠. 근데 점차적으로는 같은 메시지가 주어지는 거에요. 그때 어떻게 되냐며는 교회전체적으로 불결을 털어버리고 예수의 몸인 전체의 교회가 순결하게 다시 거듭나게 되는 거죠. 이제 이해가 가죠! 그러니깐, 절대로 강단에서 선포하는 이 메세시는 너무나 보편적이기 때문에 나같이 아주 특수한 상황에 있는 사람의 삶은 다룰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상담이나 통해서 다루어질 문제지, 이렇게 수천명을 놓고 선포하는 이런 메시지 속에 내가 보편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내가 너무 유별란 상황에 있기 때문에 그건 안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비 성경적인 생각이라 이거죠. 절대로 그렇게 되는게 아니라 이거죠. 절대로 그렇게 되는게 아니라 이거죠. 심지어는 어떤 일이 있었냐며는, 제가 헌금 설교를 딱 두을 번했어요. 헌금 설교할 때 회심한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깐, 그러죠 하나님이 하나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또 어떤때에는 지금같이 너! 예수의 몸이 이게 몸이다. 그렇게 설교하는 거에요. 그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어! 지금 나에게는 교회가 문제가 아니고 사업이 문젠데, 어떤사람은 사업도 문제가 아니고 교회도 문제가 아니고, 지금 우리애가 문젠데, 아, 우리애도 문제가 아니고, 남편이 문젠데, 뭐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난 몸이 아파 죽겠는데, 이런 식으로 다양한 상황을 가지고 왔는데, 하나로 보는 거야, 관계를 보는 거야, 아! 그렇구나, 내가 사업이 계속 어려움이 오고 이랬는데, 아~ 이게 교회와의 관계가 잘못됬구나. 회개하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면, 어느쪽으로 들어가느냐만 차이가 있는 거지 그 쪽으로 말씀이 들어가서 그를 전체적으로 고치는 거에요. 어느 한부분을 고치는게 아니에요. 그러니깐, 어떤사람은 고칠 때 약바르기도 하고 어떤사람은 근육주사도 놓고 어떤사람은 혈관주사 놓고, 어떤사람은 입벌리라 그래가지고 속에다가 물약 쑥 집어 넣기도 하고, 별 다있잖아요. 그러니깐 다른 방식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렇게해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몸인 하나의 사람 하나의 교회가 하나의 사람이잖아요. 예수님 머리로 하는, 그 하나의 사람으로 다루시기도 하고 그걸 또 각자로 다루시기도 하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바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개인이 그렇게 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에서의 진실한 참회가 있어야 된다는 이거죠. 각자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예수님의 뜻에 자기를 부합시킬 때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듯이 공동체 적인 깊은 자기깨어짐을 통해서 일치가 촉진이 되는 거죠. 여기에서 참된 까리따스가 이제,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가지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그렇게 진실하게 참회하게 될 때, 그때에 교회의 몸을 더럽히고 힘들게 했던, 모든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게 되는 거죠. 동시에 함께 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개개인의 삶이 정결해 지고 동시에 같은 메세기를 듣고 같이 버리게 되니깐, 교회몸 전체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거죠. 그걸 버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깐 몸전체가 사랑을 받게 되는 거죠. 그러니깐, 신자 개개인이 받는 사랑은 몸전체가 받는 사랑안에 있는 거라 이거에요. 왜냐하며, 내가 회개 하기 전에 이미 예수의 몸에 접붙혀 지니깐. 접붙혀지니깐. 그 몸안에서 이루어 지는 거죠. 오늘 날 사람들이 많이 잘못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이지점이에요. 그게 뭐냐하면,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그렇게 함께 뭐가 되는 것 그거는 나에게 있어서 관심사가 아니에요. 문제는 뭐냐면, 나! 내문제 어려운데, 나! 나! 나! 계속해서 그러고 가는 거에요. 해결이 안되는 거죠. 필요한 만큼 교회를 이용하다가 힘들며는 사요나라! 떠나는 거죠. 떠날때는 이미 까리따스를 다 털어먹은 상태에서 떠나기가 십상이에요.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상처주고 이러면서, 그래서 교회의 몸을 아프게하고 떠나. 떠났어도, 그는 장소를 떠난거지 몸은 붙어있는거 아니에요! 전체적으로 우주적인 교회에 붙어 있는거 아니에요! 그러니깐 그 속에서 예수의 몸을 계속 찌르면서 자기는 복을 달라 그러는 거죠. 자기몸을 찌르면서 복을 달라 그러는 거죠. 그러니깐, 안되는 거죠. 근데 그가 공동체 적으로 깊이 함께 회개 하고 나면, 그러니깐, 개개인이 하나님앞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것보다 백배는 더 중요한게, 공동체가 모두 모였을 때 한마음으로 회개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거에요. 이거는 백배나 더 중요한 거에요. 이거는 백배나 더 중요한 거에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 공동체적으로 함께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모두 함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한 형제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거에요. 이런까리따리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그때에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서 두가지를 배푸는데 있어서 충만한 자원을 소유하게 되는 거죠. 하나가 뭐냐하며는 용서! 두 번째가 뭐냐하며는 나눔! 이에요. 나눔. 용서와 나눔이 생겨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 까리따스의 핵심이 뭐냐하며는 용서를 통한 까리따스의 경험이에요. 용서를 통한 아가페의 경험이에요. 그래서 까리따스가생겨난거죠. 그러니깐 항상 예수님께서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은혜에대한 깊은 감격이 있는 거죠. 그러니간, 나에게 죄짖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들을 용서해 줄수 있는 거에요. 용서하는 과정이 아프긴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깨달음과 진리에 부합시키는 진실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사람이 계속해서 변화되고 그 변화가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지게 되는 거죠. 또 마지막 하나가 뭐냐하면, 나눔이에요. 이거는 뭐냐하면, 이기심이 사라진데서 오는 나눔의 정신이에요. 이기심이 사라진 데서 오는 나눔의 정신이에요. 그래서 신자가 탐욕을 버리고 이기심을 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지체들의 죄가 나의 죄처럼 느껴 졌듯이 지체들의 자원의 부족으로 말미암는 고통이 내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들을 균등하게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거에요. 그렇게 살아서 몸전체가 골고루 누리면서 몸으로써 건강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을 하고 그 몸과 함께 즐거워 하는 거에요. 큰돈없고 많은 재산 없고, 부자 아니어도 그것 때문에 행복해 하고 그 때문에 예수의 한 몸이 되어서 기쁘게 살아가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사랑이에요. 이런 사랑의 질서를 확장해 나아가는 것이 선교에요. 그래서 결국은 결론을 내지자면 결국은 하사람의 신자의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처다보고 감격을 하거나 혼자 조용히 좋은 책을 읽으면서 어쩜 이사람 내 생각하고 이렇게 똑같을까. 위인들의 간증집을 읽으면서 어~ 정말 멋있게 살았어. 나도 이런 순교의 순간이 오며는 이렇게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것을 통하여 영혼의 아름다움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에요. 영혼의 아름다움은 그런 개인적인 차원에서 나타날 수 는 있어요. 여러분 자신을 너무 신뢰하지 마요. 미안해요. 너무 실망을 줘서. 별을 처다보면서 아~ 끝없는 우주.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에 대한 찬양이 가슴에 복받혀 오른다고 해서 그대들 안에 까리따스가 꽉 차있다고 나는 하나님 밖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그렇게 남들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이야기 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지 말라 이거죠.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인 까리따스는 개인의 차원에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차원에서 입증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 공동체의 차원에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고 한번 사랑하기 위해서 한번 죽는 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죽여서사랑하고 자기의 소유를 털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지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자기스스로 가난해 지고 스스로 고통받는 자리에 내려가고 좋은 것은 지체들에게 더 좋은 것은 우리 주님께 안좋은 것은 자신이 짊어지고 교회의 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깊이 끌어안고 그렇게 살아가요.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해 해야되냐면, 진리가 그를 계속 비춰주고 있어야 되요. 그래서 인간이 이렇게 진리를 생각하는 것은 비용이 안들어가요. 근데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것은 피흘리는 고난을 통해서 합치 되는 거죠. 합치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 일생동안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 드려본적이 있어요? 하나님 이제는 저이거 사랑 안합니다. 드려보신 적 있어요? 일생동안 못고치던 태도였고, 아직도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태도인데, 예수님이 아파하시니깐, 전 이제 그것을 그만 두겠습니다. 해보셨나고요. 그것이 바로 진리를 합치 시키는 거야. 별을 보고 명상하고 간증집을 읽으면서 눈물 흘리는 것은 까리따스 사랑이 충만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근데 고난을 받고 피를 흘리면서, 예수의 형상 닮지 않은 자기를 진리 때문에 깍아 버리는 것은 진짜 예수 죽음에 고통에 동참하려는 예수의 환란과 오래참음에 동참하려는 지순의 사랑없이는 할 수 없는 거에요. 할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중요한 숙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에요. 많은 진리를 아는 것이 삶을 질을 보장해 주지 않아요. 제가 일평생 설교자로 부름을 받아서 죽는 순간까지 진리를 연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외치기를 여러분도 고대하고 있죠! 그러나 내가 그렇게 소명을 따라 살아도 그대들의 삶의 질을 보장해 주지 않아요. 추어도 보장해 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설교자가 보장하거나, 하나님이 보장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진리를 깨닫고 자기를 그 진리에 합치시키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는 여러분만의 눈물의 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자기 죽음의 길을 가야하는 거에요. 거긴 아무도 없어요. 외로운 구도의 길이에요. 그게 바로 구도의 길이에요. 예수님만 합께 하셔요. 그렇게 걸어가는 거에요. 그래서 끊임 없이 깨뜨려지고 끊임 없이 새로워 지고 끊임없이 진리를 발견하고 그러면서 자기를 그 진리에 계속 합치시켜 가는 거에요. 가끔 선배 목사님들이 이세상의 목회처럼 행복한게 없고 자기는 목회하는 순간이 신이나고 행복하다는 애기만 들으면, 저는 항상 준욱이 들어요. 나는 아직도 이 목회하는게 남의 옷 입은 것 같고 그래서 목회는 항상 내가 원하지 않은 가슴아리이고, 그리고 설교는 이국의 언어에요. 그러나 자기가 죽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에요. 너무 너무 어려워요.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똑같은거에요. 그길을 우리 각자각자 걸어가는 거에요. 어디까지는 우리가 함께 가지만, 어느시점에서는 각자가 예수님 앞에서 걸어갈 수 밖에 없는 단독자의 삶을 살게 되는 거에요. 그 구도의 길 있는 사람들에게는 날이 갈수록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거에요. 물론 약할 때 있죠. 그리고 그러면 안되지만, 미끄러질 때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낙심이 되어서, 이젠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고난의 때도 있어요. 근데, 그런 구도의 길을 가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걸어가요. 때로는 넘어져도,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엎드려져 외로운 벌판에서 홀로 가슴아프게 가슴아리를 해도 그렇게 걸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은 반듯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사람들은 욕하고 손가락질 해도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 예수의 몸의 사랑스런 지체가 되어가요. 처음에는 불완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리안에서 지혜를 배우고 그 사랑안에서 까리따스를 배우면서 그래서 살아요. 그래서 온전히 예수오셔서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몸을 다 찢어 성찬으로 나누워 주신 것처럼, 그 유사한 삶을 살아갈 수 가 있게 되는 거죠. 왜냐하면,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그리고 그 피로 나를 건지셔서 자기 생명을 통해 삼위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신 그 예수 때문에, 그 예수님이 교회와 계시기 때문에 그 예수안에서 내가 한몸 되어서, 이 추하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 이 교회 안에서 삼위의 교통의 모상을 이루는 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에 걸어 갈 수 있는 것이죠. 잠시 지나는 인생길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나를 위해 너희들이 당하는 고난는 장차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을 믿으면서,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으며 그렇게 걸어가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하사람이 그렇게 걸어가요. 매순가 쓰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고, 미끄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 내가 예수의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지체들에게 사랑을 받는 다는 사실 때문에 격려와 위로를 받으면서 일어나요. 오늘은 내가 아파서 사랑하는 지체의 위로를 받지만, 내일은 저 지체가 아파서 내가 위로하고, 그래서 정말 사슴처럼 함께 기대어 살게 하시기 위해서, 어린 양들처럼 함께 목을 부비고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한 교회 불러 그렇게 놀라운 예수의 사랑에 접붙혀 주시는 거에요. 내가 지극한 예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목자된 마음으로 내가 말 할 수 없는 내안에 있는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