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한 산업을 바라보자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10:32~34)
이 히브리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약적인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서를 가리켜서 신약속의 레위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쨌든 여기에는 제사, 성전, 제사장, 대제사장, 속죄, 피, 죽음, 하나님의 용서, 이런 것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 대한 배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히브리서를 읽으면 매우 답답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고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바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확실히 이 편지를 보면 유대인이 유대인들에게 말하자면 편지를 쓰는 사람들과 받아보는 사람들 사이에 이미 구약의 제사 제도에 대한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제사를 다시 설명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제사가 가지고 있는 신약적인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시고, 그가 무슨 일을 하셨고,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싶어 했던 것을 히브리서 전편을 통해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 편지는 유대인으로서 복음의 빛을 받고 그래서 주님을 영접하고 믿음을 소유하였다가 그랬다가 동족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당하게 되니까 다시 그 믿음을 포기하고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 다시 배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다시 그들에게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해서 가르쳐주어서 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로 구약을 능가하는 분이시고 또 구약의 모든 제사의 가르침들이 (속죄의 가르침들이) 한 사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믿음의 터 위에서 흔들리지 말도록 그렇게 권고하는 내용으로 이 편지를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먼저 읽어드린 24절과 25절에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더 열심히 모이자라고하는 권면으로 맺습니다. 그리고 그 이어서 나오는 26절부터 31절까지의 내용은 배교한 자가 받는 위험한 형벌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족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배교를 하게 되면 그것은 단지 배교를 하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배교를 하게 되면 그렇게 믿음을 버리고 다시 핍박을 이기지 못해서 옛날생활로 돌아가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엄중하게 심판하시고 진노하시는지를 이 히브리서 기자가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생각하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가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32절 이하에는 다시 어조를 바꿔서 그런 핍박의 위험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내용들이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32절부터 34절 사이에 나오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영구한 산업을 바라보자’라는 제목으로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기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빛을 받은 후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빛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리의 빛입니다. 어떻게 해서 한사람의 동물과 같은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이 변화되어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제일 먼저 그의 캄캄한 어두움 속에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빛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리고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고, 무엇을 믿어야하며,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고,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모든 진리가 바로 빛입니다.
그 빛이 분명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비춰야지만 비로소 참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타락한 세상의 가장 커다란 불행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비극은 인간의 타락한 성품은 그 타락한 인간 속에 있는 게으름을 자극하여 참된 진리에 대해서 더 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을 사람들에게 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진리의 빛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은 찬란하고 환하게 밝습니까? 범죄 하면 그것이 죄인 것이 즉시 말씀 앞에서 드러나고 그래서 도무지 삶에 대해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할 수 없게끔 그렇게 진리의 밝은 빛 아래서 살고 있습니까? 밝은 빛이 여러분들에게 비취고 그 빛이 여러분들의 발길을 안전하게 해주는 그 동안에만 여러분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애매하고 모호한 결정을 하거나 그리고 진리가 무엇이라고 여러분들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진리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분명히 깨닫지 못할 때 여러분들은 인생의 발걸음을 성큼성큼 떼어놓을 수 없을 만치 진리의 빛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의 그 부패함은 진리에 대한 무감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태도는 오직 둘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든가, 진리를 미워하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중간의 태도는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진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린 사람들의 삶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밖에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진리의 빛을 거부하는 동안 그는 끊임없는 형벌과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자기의 의지와 욕심을 의지하여 힘차게 달리지만 마지막에 얻는 결론은 부러진 다리와 부딪혀서 터진 이마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뛰어난 육상선수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트랙에 갖다 세워나도 캄캄한 밤중에 100미터를 11초, 15초로 질주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합니다. 영적으로는 그렇게 합니다. 진리의 빛이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버리는 것이고 진리의 빛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성이 없는 짐승처럼 살기로 각오하는 것입니다.
가끔 저한테야 직접 찾아와서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러나 가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아 요즘 성경을 봐도 말씀이 안 깨달아지고 설교도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와’ 진리의 빛을 그렇게 흘려보내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어린아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이 스쳐지나가고 빛 되어서 여러분들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애매모호하게 살아가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행동은 어두움 속에 있을 때 용기를 얻습니다. 빛 가운데 드러나면 행할 수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안식년을 받아서 미국에 가셔서 아침 일찍 일어나고 한가하시니까 낮에 책도 보고 글도 쓰시다가 9시면 딱 잔대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이에요. ‘나는 확신한다. 인류가 모두 9시 이전에 취침하면 범죄는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대부분의 범죄는 9시 이후에 벌어진대요. 만약에 훤할 때 잠자리에 들면 아마 범죄는 더 줄어들 것입니다.
어두움은 이렇게 용기를 줍니다. 조금 멀리 간 것 같습니다만 이 히브리서 기자에게 편지를 받고 있는 이 사람들은 빛을 받은 후에 깊은 진리의 빛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았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미련한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단이었을까요.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결단한 후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떤 일이었을까요? 먼저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의 빛을 받고나니까 이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인생을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온 것은 고난의 큰 싸움이었습니다. 우선 영적인 싸움이 그들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복음의 빛을 받았으나 그들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의 싸움을 싸워야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싸움은 영적인 싸움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을 박해하고 핍박하는 그 박해와 더불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참고 커다란 환란 믿음이 아니면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커다란 환난을 당하면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오래 참았습니다.
우리는 어땠습니까?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해오는 이 길이 평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싸움이 있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이 있었고, 환경과의 싸움이 있었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들과도 싸워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빛을 받은 사람들이 불경건한 이 세상에서 신앙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겪게 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로 또 복음의 빛을 받은 후에 그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되는 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비방과 환난을 당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저 봐라! 저 미친 녀석! 예수를 왜 믿어? 그 예수를 믿더니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집안에서도 쫓겨나고,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환난을 수없이 당하고, 결국은 저렇게 구경거리가 되지 않았느냐!’ 조롱도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진리의 빛을 받은 그 대가, 진리의 참 빛을 받은 그 대가가 이렇게 큰 것이었습니다. 비방을 받고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극심했기 때문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그 처참한 형편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앙의 정절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제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믿음을 고백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핍박가운데 있는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이렇게 고난의 큰 싸움을 싸우고 환난과 그리고 비방으로 말미암아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어 진 그들의 고통스러운 형편에서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에 나와서 이렇게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예배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한 피 받은 형제들이 찬송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해보신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은혜를 입고 나 같은 사람이 이러한 지체들과 함께 거룩한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함께 예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의 조건이 되어 진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사랑하는 형제들과 함께 그리스도 앞에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크게 기쁨이 되느냐 하는 것은 그가 이 세상을 얼마나 믿음의 도를 지키며 분투하는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과 관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독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이 순간에 깊은 감격과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소외받은 적이 없고, 주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핍박받은 적이 거의 없고, 세상에서 소금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설탕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경배하고 우리의 영혼이 활짝 열려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홀로 대면하는 예배시간이 성도에게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은 위로받고 싶을 만큼 하나님의 복음의 빛을 받은 사람으로서 진리와 믿음을 파수하기 위해서 고난 받으며 살아온 삶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위로받아야할 부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동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마음의 빛은 복음의 빛이 너무나 선명했기 때문에 다시 그 길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환란은 왔고 사람들은 비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에 살지만 어디서도 하나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핍박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서 주를 믿는 형제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거기에서 사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그들에게 있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신뢰하며 한번 받은 복음의 도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궁극적인 힘과 은혜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태만하게 살아가는 무지한 그리스도인이 가득 찬 교회의 특징이 지체들 간의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 투옥된 자들……. 그런 사람들을 깊이 동정하며 도왔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산업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들이 신앙을 가질 때 로마의 법에 의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직업을 박탈당했던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직업을 박탈당하고 그리고 그렇게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일평생 다니던 직장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그 직장에서 여러분들을 쫓아낸다면 기꺼이 신앙을 위해서 그 직장을 떠날 각오가 되어있습니까? 물론 되어있다고 말하시겠지요! 그러나 실제 그 일들이 이행되어져서 자신들이 그 처지에 있을 때 그들의 그 참담한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히브리서 기자의 편지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의 이유 때문에 산업을 빼앗기게 되었는데도 그들은 그 일들을 기쁨으로 당하였습니다. 빼앗기면 빼앗기리라 당하였습니다. 얼마간의 유익을 위해서 주일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신 나간 짓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업을 기쁨으로 빼앗겼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 그렇게 도대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었길래 그들은 고난의 큰 싸움을 싸우면서 참고 인내하고 그리고 비방과 환란으로 구경거리가 되면서도 기꺼이 그 일들을 당하고 그리고 또 갇힌 자된 자들을 동정하고 그리스도 안에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과 사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산업을 빼앗기는 상황에 닥쳐서도 기쁨으로 그 일을 당하게 만들었던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 이유를 간단한 두 단어로 말합니다. 영구한 산업, 영구한 산업, 영구한 기업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명예도 잃어버리고 그리고 친구도 잃어버리고 가족들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들보다도 더 사악한 사람들로 동족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배교의 유혹들이 자기들 주위에서 항상 머물고 있었습니다. 핍박의 어두움은 다가오고 있었고 그리고 배교의 손짓은 언제든지 그들 주변에 있었습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돌아가는 것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은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많은 유혹과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고, 시련을 당하고,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길로 달려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영구한 산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산업은 흥했다가 무너지고 있었다가는 없어지지만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영구한 산업- 그 하나님의 나라의 분깃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적어도 이 잠시 있다 살아가는 인생을 사는 동안에 모든 것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기업인 하나님의 나라의 영구한 기업은 잃어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들어온 진리의 빛이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잠시 있다가 살아가는 이 인생이 인생의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들어온 이후로 그들은 나그네라는 일컬음을 받기를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복음의 빛을 받는 순간 죄 많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세상은 그들을 다시 불렀지만 그러나 그들은 보다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그것을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옴과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기업을 빼앗기는 대가로 나의 영원하신 기업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들은 위에 것을 얻기 위하여 땅의 것을 버려야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신앙에 있어서 거룩해지는 것도 사랑과의 싸움이에요. 죄가 어떻게 해서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죄가 어떻게 해서 우리의 영적인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우리의 인격을 황폐하게 만들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초토화시키는 그 과정이 어떨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생각하십니까? 욕심이 왜 잉태됩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욕심을 잉태하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십자가의 군사로 불러도 주님을 위해서 군사로서의 담대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행군할 나팔은 불고 주의 호령이 났는데도 여전히 십자가의 군기아래 모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두고 온 것에 대한 미련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믿음의 위인들을 말하면서도 역시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일컬음을 받았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이방사람들이 아브라함보고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그는 언제나 대답한 말이 ‘나는 나그네라’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는 나그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디에 가서 머물던지 궁극적으로 자기가 머물러야할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평생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가나안의 약속을 붙들고 나그네라고 삶을 살았습니다. 나그네는 길에서 쉬어갈 수는 있지만 집을 짓지는 않습니다. 나그네는 잠시 머물다가 가는 곳은 있지만 그러나 그곳을 사랑하거나 그곳에서 영원히 있을 자처럼 자기의 집을 건축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 순간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비칠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뉘우칩니다. 그리고 어두움을 미워하고 빛에 속하고자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과 진리를 장성한 자처럼 분별하고 무엇을 믿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묻고 진리를 발견했을 때 우리들은 기뻐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이렇게 우리들은 진지해야 하고 그리고 집념을 가진 삶으로서 매일 매일 진리에 대해서 깨닫고 묵상하고 우리는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삶을 본받는 사람으로서 날마다 우리를 그렇게 깎고 다듬으면서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본받아가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군사로서의 모든 삶을 다 살고 우리는 마지막 얻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영구한 산업인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부르심을 따라서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평탄하고 안일한 길을 스스로 거부하고 고난과 시련으로 얼룩진 길을 기꺼이 걸어갈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고 있었으나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습니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이 인생길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었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영원히 머물 수 없는 것이 자신들의 처지라고 믿었습니다. 젊음도 지나갑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요한 것도 모두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춤추고 노래할 수 있었던 즐거운 세월은 지나가고 그리고 마지막 주님이 부르시는 그 때가 옵니다. 즐겁고 슬펐던 인생의 무대에는 막이 내리고 우리는 그분께 궁극적인 죽음으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그 때에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담대히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죽음을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성화와 은혜의 한 수단으로 생각하면서 아멘하며 우리의 죽음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을 많이 사랑하던 사람들에게는 이럴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그들은 틀림없이 이제까지 붙들고 있었던 이 세상에 대한 꿈과 미련을 버려둘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롯의 아내가 불타고 있는 성을 뒤돌아보며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매 순간 순간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가 잠시 있다 사라질 땅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썩어질 인간의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는 욕망이 그들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의 빛으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부르심을 따라서 충성스럽게 살았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만이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내가 시편23편을 강해하면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젊어서 주님을 영접하고 젊은 날에는 너무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것을 위해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 결혼을 하니까 이제는 자식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도 그랬습니다. 아이들이 커갔습니다. 교육을 시키기 위한 열망 때문에 도무지 시간을 내서 주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랐습니다. 시집, 장가를 보냈습니다. 그 밑천을 마련하느라고 중년의 세월을 다 보냈습니다. 그리고 보내놓고 이제는 좀 한가해지려니 했더니 자식새끼들을 낳아가지고 다 떠메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희생위에서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의 자식들이 번영하는 것을 봅니다.
결국은 그렇게 좋은 세월을 다 보내고 이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갈 힘이 없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마치는 인생은 바로 땅에 있는 것들에 묶여있는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죽음에 대해서 진지한 생각을 갖지 않는 사람은 항상 인생을 농담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매 순간순간 주님이 언제고 우리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부르실 수 있고 내일이라고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 나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먼 훗날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 장밋빛 계획을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나를 저 무가치한 사람들보다는 좀 낫게 보아 주시겠지요?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이라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사는 삶,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어가고 있는 매일 매일의 삶을 주님이 무엇이라고 판단하시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히브리서 기자의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들로서 고난도 당하고 환란과 비방을 당하고 그러면서도 갇힌 자들을 동정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과 사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있는 산업들을 잃어버리고 빼앗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런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인정해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미치도록 주를 위해 살고 한순간 한순간을 불태워서 주님을 위해서 바쳐지는 기회로 삼아야할 시간밖에는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인생의 날은 속히 지나가고 섬기고자하는 마음이 있어도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없는 날이 옵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는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것들에 집착하고 거기로부터 떠나지 못하는 한 영구한 산업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못 박히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시고 부활로 다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승천하심으로 다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시는 것이 유한한 세계에 살고 있고 땅의 것들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우리는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들려오는 사도의 간절한 권면을 다시 한 번 주님의 음성으로 받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욕도 지나가고, 세상도 지나가고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이 형제 자매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담대 하라’는 것입니다. 왜? 잠시 있다 사라져갈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버림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한 그 아름다운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잠시 받는 고난과 세상에서 나그네로 취급을 받는 그 모든 외로움들이 그렇게 영원한 산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 그 사람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의 영광에 비교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던 성도들은 주님의 나라에서 그 영원한 산업을 소유하게 될 때에 그들은 분명히 놀라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받았던 고난과 주를 위해서 지켜야 했던 긴장과 그리고 주를 위해서 살아야했던 그 모든 아픈 희생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영광스러운 기업의 풍성함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영구한 기업을 바라보면서 가슴 설레 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 부 하려는 욕망을 갖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세상에서 한, 두 가지쯤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안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지를 말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어서 그 꿈을 하나님의 나라에 둔 사람들은 끊임없이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쌓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이 있으면 그 물질을 주님의 나라에다 쌓으십시오. 세상에서 나의 소유를 잠깐 잃어버리고, 세상에서 인정받던 나의 명예를 조금 잃어버리는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러나 주님 앞에 쌓아둔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은 큰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어디에 살든지 또 무엇과 함께 살든지 여러분들의 인생은 단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부여받은 기회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사는 동안에 여러분들은 늘 하나님 앞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 세상나라에서 저 세상나라로 옮기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의 고향은 이 세상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도 여러분들이 믿음을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쓰면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손해를 보아야 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부르심을 따라서 크고 적은 섬김이 있어서 충성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면 그는 많은 것을 잃어야 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들이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동안에 그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인이 오실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벗들과 함께 어울리고 휴식을 취할 때에 그는 오히려 감기는 눈을 부비며 오늘 밤은 주인이 오실 것이라고 자신에게 다짐하는 신앙적인 긴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고 하찮아 보이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어찌하든지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만 있다면 자신의 최선의 것으로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나의 소중한 것을 주님께 기꺼이 드리는 삶, 이런 것들이 바로 다가올 죽음을 담대하게 맞이하게 하고 영구한 산업을 사모하며 그 나라에 소망을 품고 이 세상에서 시류에 영합하고 타협하면서 주님이 자신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진리의 빛을 잃어버리고 어두움 속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목표가 없는 사람- 무엇인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인가를 바꾸어줄 것이니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을 때에 ‘나는 일평생 이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이 부르심을 받았고 그리고 이 부르심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아왔은즉 내 생명을 드리고라도 이것을 얻을 수 있다면 주님! 이것이 내 꿈이옵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에 대한 분명한 목표, 불붙는 하나님을 위한 영광을 위한 목표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정결할 수 없습니다. 모든 순결은 초점이 있는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불결과 타협은 그 한 가지 신앙의 초점에 대한 불타는 열망을 포기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흔들리고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찬란한 진리의 빛 앞에서 드러나는 부끄러운 양심을 도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무지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바로 영원한 산업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솔직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께로 가까이 가는 길이 그리고 주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해서 가는 그 길이 평탄하고 쉬운 길이고 그리고 꽃피고 새우는 오솔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찬양)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 원치 않으며 즐겨 고난길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
값싼 위로를 양식으로 삼으면서 갈 길을 잃어버리고 주막에 주저앉아 세월을 보내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기업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애급을 떠났으나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과 같은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맨 처음 주셨던 진리의 빛 앞에서 드러난 인생의 진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죄인 된 우리의 마음에 비췄을 때 우리는 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을 위한 한 기회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잠시 있다 머룰 이 세상을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셨습니다. 어두움 속에 있을 때는 이 인생이 방탕의 기회였고 자기의 욕심껏 자기의 욕망과 그리고 자기의 모든 원하는 바를 쫓아서 살아가던 타락과 죄악과 범죄와 불화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췄을 때 우리는 보다 숭고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이 인생을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인생은 그렇게 장난처럼 살다가 갈 수 있는 그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사는가가 영원을 결정하는 단 한 번의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하시는 그 계획 앞에서 그리스도가 아니면 단지 이세상의 티끌과 같고 벌레만도 못한 인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주님 앞에 이르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길을 걸어가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이 인생의 기회가 영구한 산업을 얻는 유일한 기회인 매 순간 순간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바치면서 평생 사는 동안 내 주되신 주 만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이 계신 그 높은 곳을 사랑하며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이 편지를 쓰면서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새롭게 받을 빛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빛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빛을 받은 사람들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 앞에서 너희들이 인생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고 영원한 산업에 대해서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지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에 여러분들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자신으로 준비시킬 수 있는 수많은 시간들을 세상을 위해 소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이처럼 매 순간순간 우리의 인생이 무엇인지 그 진실을 듣고 우리의 영혼에 묻은 때를 닦아내고 우리의 마음속에 장마 뒤에 돋아난 것 같은 잡초와 같은 세상을 향한 사랑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욕망과 사악한 욕심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불로 태워서 모두 밟아버려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예배의 시간들을 아끼고 잘라내어서 얼마나 인생을 훌륭하게 살아보려고 여러분들은 시간을 아끼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무능한 사람들인지를 깨닫게 하는 여러분들의 참모습을 비춰주는 빛이 들어왔을 때에 여러분들은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여러분들이 태어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앞에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부르짖었는지 저는 거의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어디로 갔습니까? 지금은 이제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을 만큼 믿음의 위에서 훈련되었습니까? 아니면 신앙 생활하는 요령을 배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시는 매순간에 도움과 은혜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그 어떤 강한 것을 체득하는 비결을 세상에서 배우게 되었습니까?
이 모두 영원한 산업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인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서 아껴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을 얻으려고 합니까? 모두 버리고 사라져야 되는 것들입니다. 인생의 죽음의 휘장이 드리워지고 나면 남는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좌와 일평생 하나님을 향해 간직해 왔던 우리의 사랑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겉모습은 세련되어져갔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처음에 이 교회를 찾을 때보다 설교도 많이 들었고 진리도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식도 가져왔지만 교만도 가져왔습니다. 문제에 처한 사람들에게 무슨 테이프를 들으면 좋다고 처방해줄 수는 있게 되었지만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 대한 처방은 누가 내려줍니까?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모하지 않는 것을 위해서 살 수 있는가?
(찬양)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주님이 계신 보좌의 안식이 그리워질 만큼 주를 위해 분투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주님이 계신 그 보좌에서 상 받는 그 순간을 그리워하는 만큼 우리는 주를 위해 많은 것을 잃어버리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칭찬하심이 그리워질 정도로 이 세상에서 진리 때문에 박해를 받고 경건 때문에 미움을 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땅에서 먹고 마시고 누릴 것들이 그리워지는 만큼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도 당신의 나라에 이르기 위해서 분투하는 사람들을 오늘도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십니다.
믿음의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홀가분해진 사람들 그리고 영원한 산업 그것이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기 때문에 잠시 있다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많은 손해들을 기껍게 생각하며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이런 삶들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맨 처음 우리에게 비춰주셨던 그 진리가 말하는 인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를 그 처참한 죄악과 사망가운데서 살려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일평생 주님을 사랑하며 그리고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해서 그 주님을 영광가운데 뵈올 날을 기다리며 세상을 사는 동안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되고 영구한 산업을 전심으로 찾고 또 찾으며 살았던 그러한 그리스도인들로 주님의 가슴에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