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와 연단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녹취자 : 이시내
오늘 이야기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징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징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정상적인 인격적인 대화가 될 때에는 징계가 필요가 없습니다. 말하면 알아들으니까 말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꼭 같습니다. 하나님과 대화가 통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이 통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징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같이 악한 부모라고 할지라도 아이들을 화가 나서 회초리로 매우 때리고 나서 그 다음날 아침에 곤하게 잠자는 종아리를 쳐다보고 퍼런줄이 가있으면 부모의 마음에도 회초리로 맞은것 같은 아픈 생각이 드는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완전한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아파하고 고통해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만족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멸망하거나 우리가 징벌을 받는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면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이 있는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을 깨닫고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비춤을 받아서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내가 알게 되고 하는 것이 인격적인 교통을 갖는 인격적인 대화가 오가는 관계입니다. 그런 속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되면 우리는 사실 고난은 있을지 모르지만 징계라고 하는 것은 필요 없다 이런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항상 그렇게 하나님과 열린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은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죄 가운데 접어들고 우리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령한 사랑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어도 이전에는 그렇게 한구절한구절 말씀이 가슴을 파헤치면서 나를 변화시켰는데 이제는 소리로만 들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이전에는 말씀 한구절한구절 읽을 때 하늘에서 금싸라기가 쏟아지는 것처럼 은혜롭고 내가 고민하는 삶의 문제에 대해서 매일매일 성경을 펴면 답을 얻었는데 이런 것들이 다 그쳐 버리는 것입니다. 형식은 앙상하게 남아있는데 어떠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메말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의 영혼 속에 말씀에 의한 감화가 마르기 시작하면 기도가 마르는 것은 순간의 일입니다. 제아무리 큰 산이라도 비가 안 오면 워낙 큰 산이면 비가 안아도 워낙 머금은 물이 많으니까 한참이야 물을 내지만 그러나 1년정도 비가 안 오면 제아무리 큰 산이라도 물이 다 말라버리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의한 감화가 없으니까 기도도 완전히 말라버립니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영안이 완전히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몇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이 그렇게 슬퍼하시는 길로 걸어가는데도 계속 그것이 좋다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꺼야 내가 이렇게 행하는 것은 싫어하실꺼야 그것을 알면서도 그만두거나 그것을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어저께 제가 밤늦게 청교도 헨리 스쿠갈의 책을 이렇게 읽는데 거기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이 성도들의 가슴속에 역사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성도는 그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복종시킬 수 있다 이 이야기입니다. 불붙는 사랑이 없이는 자기를 온전히 복종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간단합니다. 왜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막혀있고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예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방지축으로 막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실 것이다 라는 것을 알지만 아주 희미합니다. 깨어있을 때에는 조금만 하나님이 슬퍼하셔도 즉각적으로 가슴에 다가옵니다. 그런데 영안이 흐려지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대화가 막히게 되니까 아주 굉장히 커다란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그저 약간의 가책을 스치듯이 느낄 뿐입니다. 점점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속에서 불붙는 사랑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순종하려고 해도 순종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의사소통이 끊어지고 자기를 복종시켜서 순종할려고 해도 그런 능력이 없게 될 때 인간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죄 가운데 치닫게 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격적인 대화가 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의 징계와 같지 않습니다. 무자비한 징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견딜 수 없이 과도한 징계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적으로는 잘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신앙이 아니면 정말 견디기 힘든 그러한 방식으로 온다는 말입니다.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그 징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때의 그 징계는 신앙의 자세로 돌아가면 아주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신앙의 자세로 돌아가지 않으면 정말 인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성품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징계는 다양한 방법으로 옵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 가지고 있는 징계의 방법보다도 훨씬 다양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 가지고 있는 징계는 종아리 걷고 때리는 것, 밥 안주는 것, 용돈 안주는 것 그것이 제일 치사한 것입니다. 용돈 안주는 것 그런 방법으로 징계를 쓰는 것은 사람 못쓰게 만듭니다. 무엇을 하면 돈을 더 주고 무엇을 하면 돈을 뺏고 그렇게 해서 그 애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무엇이든지 돈으로 보일 것 아닙니까 줄 껀주고 때릴 껀 때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가지고 있는 징계의 방법이라고 하는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방법은 아주 다양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어떻습니까 딱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았을때 아 맞어 내가 이런 쪽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올 줄 알았어 그렇게 생각한 사람 있습니까 모두가 졸지에 당하게 된 끔찍한 엄청난 사건입니다. 안전하다고 생각된 그런 쪽에서 불현듯 문제가 터져서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커다란 고통을 하나님이 안겨주시는 것입니다.
시편23편을 제가 설교하면서도 이런 문제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은 그러나 거기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냐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채찍으로 때리시고 몽둥이로 우리를 때리시지만 하나님이 거기에서 원하시는 것은 노예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이 결국 우리에게 받아내고자 하시는 것은 인격적인 복종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정의하면 징계란 무엇이냐 하나님의 급격한 농축된 인격적인 인도입니다. 이전에는 서서히 인도하셨는데 이제는 강하게 몰아가시면서 그러면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징계가 모두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선행되어야 하냐면은 징계라고 하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제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징계의 크기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 징계 앞에 서있는 징계를 받는 신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무엇이라고 했냐면은 결국은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랬습니다. 의의 평강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는 죄를 버리고 의로운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죄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불쾌하게 생각하시거나 고통스러워 하실만한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죄입니다. 그러니까 그 죄악된 삶에서 돌이켜서 의롭고 정결한 삶으로 돌이켜 서고 그렇게 변화되길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러니까 징계로부터 벗어나려면 징계의 원인이 되고 있는 그 삶을 빨리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징계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속히 그 삶, 하나님의 징계를 불러온 그 삶과 결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이 자기가 죄 가운데 빠져있는 옛 삶을 청산하지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에 대한 사랑 때문이고 또 하나는 죄를 버리고 난 후에 자기의 처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두 가지 때문에 자기의 죄를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떠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서서 그가 아무리 울고 통곡하고 가슴아파할지라도 결국은 그 죄로부터 결별하지 않는 한은 그는 결코 의로운 길로 돌아설 수 없고 돌아서지 않는 한 그 징계의 고통은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셔서 결국은 그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그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그가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징계의 강도는 점점점점 깊어갑니다. 그러면서 처절한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빨리 징계를 받는 사람은 그런 징계를 불러오고 있는 그러한 습관적이고 계속되는 죄로부터 이유가 어찌되었든지 일단 결별을 해야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거룩한 용단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우유부단한 사람들은 어떤 좋은 일도 인생가운데 생길 줄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역사를 이어온 거룩한 사람들은 낮고 천한 사람들도 있었고 흉악한 죄인들도 있었고 인격적으로 다 깨뜨려진 것 같은 파탄자와 같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하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몇 번 결정적으로 용단을 내려야 할 때 믿음으로 결단하고 용단을 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저주저 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어느 시점에 믿음으로 용단을 내렸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인정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아브라함이 만약 갈대아우르를 떠나는 용단이 없었다면 그 나머지 그 흥미진진한 믿음의 위대한 역사는 기초를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친구가 바벨론으로 끌려갔을때 그 왕의 상에서 내려오는 그 음식을 먹여야할 위기에 처했을 때 뜻을 정하고 그 음식으로 자기의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용단을 내리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의 역사는 더 이상 진전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예수그리스도 그분조차도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실 때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네가 나에게 절하면 이모든 권세를 내가 너에게 주리라 이렇게 말할 때 사단아 물러가라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하라 하였느니라 이렇게 결단을 내리는 반응이 없었더라면 그 이후에 예수그리스도의 역사도 써 기록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사는데 온몸을 던져서 결단을 내려야 될 때에는 그렇게 매순간순간 그런 정신으로 살지만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 앞에 정말 외롭고 고독한 결단을 내려서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신앙을 택할 것이냐 세상을 택할 것이냐 라는 결단을 내리는 때는 인생에 몇 번이 옵니다. 그때에 용단을 내린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에 깊은 죄 가운데서 고통을 받을 때에도 결국은 제일먼저 해결해야 될 일은 무엇이냐면 거기서 용단을 내리고 거기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찾아오는 안식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찾아오는 안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부터 오는 평화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이 열매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징계는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만들어내고자 하시는 것은 책임추궁이라든지 보복성징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징계받을 수 없는 상황에 오게 될 때까지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야할 의로운 삶의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에 거기에 오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드려졌습니다. 그 두 가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특징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우리는 그런 것을 발견합니다 .콜라의 뚜껑을 열어놓으면 한참 지나고 나면 다 날라가 버리고 맹물처럼 되어버려 못 마십니다. 그렇게 모든 하나님의 성도로 하여금 성도되게 하는 그 기본적인 두 가지를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징계를 통해서 그 것을 회복하게 해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것을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에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어떻게 되냐하면 그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떠한 태도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뭐냐하면 연달한 자에게는 여기에서 연달되다 라고 하는 것은 잘 다듬어지고 닳거나 두들겨 맞아서 잘 닳아진다는 것입니다. 바닷가나 개울에 보면 돌맹이들이 깊은 산 골짜기에 가보면 돌맹이들이 전부다 칼날같이 뾰족뾰족한 돌맹이들은 없고 반들반들한 동맹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반들반들하고 동글동글 하지 않습니까 동글동글한 돌맹이들이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처음부터 그런 돌맹이만 거기 집합한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것도 하나님께 드려지고 부셔지고 혹은 화산이 터지고하면서 다 한 대 맞으면 칼날같이 서는 그런 돌맹이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물이 수없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혹은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맹이들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날 동안을 그 개울에서 이리구르고 저리 구르고 상류에서부터 아래로까지 굴러나오면서 파도가 쓸릴적마다 이리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면서 서서히 서서히 그렇게 다듬어 진것입니다. 바닷가에서 모래를 퍼가지고 이렇게 만져서 입자를 이러게 흔들면서 관찰해보면 다 다듬어진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에 그 징계를 통해서 자기의 잘못된 부분들이 잘 깍여져 나가는 사람 그래서 온전해 지는 사람에게는 그 징계가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징계받을때에 가장 하나님앞에 훌륭한 자세는 그래요 하나님 죽이세요 죽여 뭐 주님자식 죽죠 제 자식 죽습니까 이렇게 매달리는 것은 짐승과 같은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에는 우리는 즉시 어떤 죄가 이러한 징계를 불러왔는지를 생각을 하고 즉시 거기로부터 떠나고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평안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결점을 깨닫고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옛 삶을 버리는 것은 마치 모난 돌이 정 맞는 것처럼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삶은 우리 존재의 일부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제일 편하냐 하면 우리 살고 싶은대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편합니다. 동물처럼 살기위해서는 노력할 필요가 없지만 성도처럼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날마다 자기가 깍이는 고통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야 겨우됩니다.
(예화) 옛날에 저희가 장위동에 살 때 거기에 항상 도서관에 왔다갔다 하면서 한참서서 물끄러미 구경하던 곳이 있었습니다. 개 훈련소였습니다. 개 훈련소앞에는 개 맡기시면 개 만들어드립니다 라고 써있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사람맡기면 사람만들어 드립니다입니다. 그런데 그 개를 맡기고는 주인이 못찾아오게 합니다. 그 훈련받는 광경을 보면 그 주인이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들은 개들입니다. 개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골목지나가면 똥개도 와서 막짖습니다. 우습지도 않은 한발차면 나가떨어지는 개들도 막짖습니다. 성도도 못알아보고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 개는 어떤것은 세퍼트를 데려오는데 한번 물면은 넓적다리가 떨어질정도로 엄청난 개들이 훈련을 받겠다고 데리고 들어오는데 나는 야구배트같은 몽둥이 같은것들을 딱 들고 있는데 거기 딱 들어오는 그 순간 개들조차도 거기가 어디인지를 아는 모양입니다. 꼼짝도 못합니다. 들어오자 마자 짖지도 못합니다. 선배들이 새카맣게 있는데 어디 짖겠습니까 꼼짝도 못합니다. 드러누어서 등치큰 이런놈이 주인이 작별하고 가버리면 꼼짝도 못합니다. 직감적으로 저 사람이 보통 평범한 동네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딱 압니다. 선배들이 모두 그분앞에 복종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혹독하게 다룹니다. 개를 말입니다. 절대 높은곳을 무서워하는 것이 개입니다. 개는 조금만 높은곳에 올려놓아도 오줌을 질질 쌉니다. 못뛰어내립니다. 그런데 사다리를 올라가라고 합니다. 올라갑니까 사람도 못올라가는데 이층꼭대기까지 사다리를 만들어놓고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올라갑니다. 그러면 막팹니다. 인정사정없이 그것을 보고 개패듯 팬다고 합니다. 막 후려갈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독한지 이것이 넉달이나 다섯달 정도 훈련을 받으면 그것을 이렇게 계단이 아니라 밑이 훤하게 뚫린 작은 나뭇가지로 된 계단을 그냥 훌훌막 올라갑니다. 왜? 못올라가면 반 죽으니까. 개패듯 패니까. 그리고 올라가면 건빵같은 과자하나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쭉 걸어가다가 치면 포복으로 쭉 엎드립니다. 그런데 개 아이큐로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것은 안 엎드리면은 두들겨 맞고 엎드리면은 건빵을 주는게 오랫동안 익혀온 것입니다. 딱딱 소리가 나면 짝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복하면 진짜 배를 땅에다 깔고 고개를 짝 땅에다 기대고 포복을 합니다.
개를 훈련시키는 것도 개가 개 구실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거쳐도 개밖에 안되는데 인간이 그것도 그렇게 인간이 두들겨 맞고 건빵주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하십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런식으로 다루지 않고 인격적으로 다루면서 우리를 성도다운 거룩한 백성들로 만들어가시는데 어떻게 아픔 없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개 훈련시키는게 더 가슴이 답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게 더 답답하시겠습니까 각자 상상에 맞기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통 없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통을 지불해야지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성도가 되는것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는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아직 주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으셨구나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그게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마다 아 하나님이 나를 당신 가까이로 부르고 싶어하시는구나 그러니까 주님이 이렇게 나를 징계하시니까 내가 주님께로 돌아가면 주님이 엄청 기뻐하시겠구나 이런 생각을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는 한 비결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