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소원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우리 모두에게는 소원이 있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의 고통은 이 소원이 좌절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의 대부분의 환희의 순간들은 이런 소망이 성취되었을 때 발생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겨난 소원들이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현실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한 생활이 될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다윗인데 이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이런 간절한 소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언제 이 시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이 시를 질 때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속에 승리를 주시는 것을 인하여 깊이 감사하였던 것 같습니다. 방금 승리했을 수도 있고 헤쳐 나온 지나온 모든 세월동안에 하나님이 위기의 때마다 자기를 이기게 하신 것을 회상하면서 올린 감사의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많이 만났을 때 그는 원수 된 행악자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달려들어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기를 마치 자신의 살을 먹으려는 맹수와 같이 날뛰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시인은 사람보기에는 이런 행악자와 맞붙어 싸울 수 있는 그런 희생적이고 육체적인 완력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러나 이 시인은 그런 모든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갖고 있는 소원을 궁극적으로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바로 고난 속에서 찾은 소원이었습니다. 이 소원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여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 저런 위기를 만나고 이런 저런 결핍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고통을 받게 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해결책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소원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건강을 잃었을 때는 건강하기만 하면 살 것 같습니다. 물질의 고통을 받을 때는 돈 문제만 해결되면 한숨 돌릴 것 같고 잃어버렸던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낼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때는 그런 관계만 개선될 수 있다면 그런 사람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굶으며 살아도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그는 그런 한가지의 소원을 아주 간절하게 품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그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가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물질로 인하여 고통을 받다가 부요하게 된 사람이 오히려 가난하게 살던 날들을 회상하면서 행복해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많이 누리고 돈도 많이 벌었던 여배우가 하나 있었는데 그 배우가 이제 인터뷰를 하면서 기자가 물어봤습니다. 언제 제일 행복합니까? 아마 현재적으로 물어봤던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이 배우가 자기가 인생을 그렇게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때는 중학교 다닐 때였는데 집이 가난해서 아빠가 택시 운전을 했는데 아빠가 들어올 시간이 되면 가족들이 골목에 나가서 기다렸는데 그때 아빠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고 그렇게 개인택시를 몰고 들어와서 이제 집으로 귀가하는 아버지를 만나는 게 자기 인생에 가장 행복하던 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일 년에 몇 십억씩 돈을 벌었고 그리고 사진 한 장 찍으면 몇 천만 원씩 몇 억씩 받는 처지에 있지만 수많은 사람이자기를 톱스타라고 치켜세우지만 그때처럼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자매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눈먼 사람을 눈뜨게 해주는 선교적 차원의 개안 수술을 해서 눈을 뜨게 해주었더니 두 달 지난 다음에 그 환자가 다시 선생님을 찾아와 아무래도 눈을 괜히 뜬 것 같다면서 눈을 감았을 때가 신앙생활을 하기가 참 좋았다며 자기의 눈을 다시 원 이치를 시켜줄 수 있는가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선배 가운데 러시아에서 사역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공산권에서 1980년대 서슬이 시퍼런 때 그 사람들을 탈출시키던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에서 그렇게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유의 품에 안겨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고 그래서 이제 그 사람을 잠입해서 탈출에 성공시켰는데 6개월이 된 다음에 그 선교사를 만났을 때 선교사를 꼭 붙들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사정하더랍니다. 나를 다시 내 고향으로 돌려보내줄 수 있는가.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대들은 이 자유국가에서 러시아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 그 사람들은 너무너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대들 자신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하십시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우리의 인생의 최대의 숙제인 것처럼 고민하는 많은 문제들, 내 마음에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원, 그것이 결국 궁극적인 소원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그런 소원이 아닌 마지막 우리에게 그 모든 것에도 채워지지 않지만 그러나 마지막에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모든 환경과 형편을 능가하여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 궁극적인 마지막 소원, 마지막 그 간절한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고난을 인생에서 많이 겪으면서 아마 물질의 결핍, 원수의 박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배신, 인생의 위기, 외로움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그때마다 적지 않은 소원들이 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 그 모든 풀무와 연단의 길을 통과하면서 그는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났을 때 그때 마음에 품었던 그 소원이 궁극적인 소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첫 번째가 바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호와의 아름다움, 그리고 바로 그 뒤에는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하면서 하나님을 계속 여호와로 표현합니다. 왜 이 대목에서 하나님이 아니고 여호와냐고 묻는 것은 사소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함은 언약백성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본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난 속에서 찾은 이 시인의 소원은 예전에 주님을 만났을 때도 가슴깊이 자기를 꽉 채우던 소원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자기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리고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이 우주와 세계의 역사와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영혼 안에서 역사하고 계획을 가지고 일하시는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것이 궁극적인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결핍 속에 있을 때는 풍부를 바라고 비참 속에 있을 때는 존귀해지기를 갈망하고 고통 중에 있을 때는 평화를 바라고 오류에 있을 때는 참됨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은 더 궁극적인 하나의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도구가 될 때 오히려 그 고통과 시련, 결핍, 고난, 위기, 핍박, 환란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앙망하고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당신께 돌아오기를 원하시는데 그렇게 당신께로 돌아오지 아니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때리시기도 하시고 치시기도 하십니다. 때리고 하나님이 치실 때 우리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간절히 매달릴 때 최초의 그 마음속에 있는 그 소원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도 속에서 그를 다루시고 회개시키시고 그의 영혼을 고치기 시작하실 때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기도했던 그것이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돈 문제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육신의 병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병이 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가족관계의 어려움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사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게 바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리 떠났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속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 신앙의 본질이 바로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만 소원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시인은 한 나라의 임금으로 부름받기 전 목동으로부터 살았을 때부터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양떼를 치고 짐승들을 이끌면서도 자신의 마음과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리고 자연과 온 우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송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그의 마음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 아무 것도 그에게 소원이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사라질 수도 있고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니 내 마음에 있는 하나님은 누구도 나에게 그것을 앗아갈 수 없으니 창칼로 무장해서 내 육체의 생명을 강탈할 수 있는 원수조차도 내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빼앗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며 사는 것이 시인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을 때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시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주 희미한 흔적만 마음에 남고 나머지는 모두 상실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찾아오셔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 없는 무감각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중생한 신자가 비중생자와 비교할 때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능력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중생과 함께 생겨나는 새로운 감각입니다. 그 감각은 천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병아리가 달걀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듯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입니다.
죽은 영혼을 하나님이 살리실 때 우리의 육신은 살아있고 살아있는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영혼은 죽은 영혼이었지만 그 죽은 영혼을 하나님이 강한 능력으로 다시 살려내실 때 하나님이 그 살아난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예전에 감촉이 없었던 사람이 감촉을 가진 사람으로, 예전에 눈을 떠서 빛과 빛의 영향을 받은 모든 사물들의 물체를 분간할 수 없었던 사람이 시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 청력을 회복하고 그리고 냄새를 맡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후각을 회복하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없었던 감각을 완전히 새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감사하는 것은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좀처럼 병에 걸린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도 열심히 일하면서도 지치는 법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모든 할 수 없는 것은 정신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저는 그때까지 제가 낸 책에 삼분의 이, 이상이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쓴 책입니다. 하루 종일 주일날 어떤 때는 7시간 반 정도, 많을 때는 계산해보니까 8시간 20분을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밤중에 들어와서 깨끗이 씻고 그리고 책상 앞에 앉으면서 오늘밤 나는 이 책을 써야 된다고 하면 힘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체력은 정신력에 달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빌하는 사람들을 항상 제가 정신력이 대단히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또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끔 일 년에 한번 정도 지독하게 앓습니다. 편도선이 막 퉁퉁 붓고 온 몸이 쑤시고 열이 어떤 때는 열이 40도가 넘어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격처럼 잘잘하게 아프지 않고 모두 모아서 일 년에 한번 정도 화끈하게 아픕니다. 생명에 지장이 없겠지만 온 몸이 쑤시면서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렇게 아픕니다. 그러면 예외 없이 변화가 일어나는데 혓바닥의 변화입니다. 그렇게 맛있던 음식이 나무껍질을 씹는 것 같고 그렇게 맛있던 그 과일이나 이런 것이 쓴맛이 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며칠 씩 푹 쉬고 병원에서 준 약을 먹고 상쾌하게 회복하고 나면 그 다음에 모든 나무껍질 같이 맛없던 것이 다시 그렇게 맛있어 살이 찌기 시작합니다. 먹기 시작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완전히 하나님을 맛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 수도 없던 사람이 정신의 눈, 귀, 입, 코 모든 것을 깨어나게 하셔서 정신의 감각을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게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오늘 많이 오셨는데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도 아마 한때는 우리 모두 왕년이 있는 사람들인데 왕년에는 이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짧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양이 차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 그렇게 은혜로워서 눈물이 쏟아지고 태입을 귀에다 꽂고 살고, 편지를 받았는데 어떤 사람은 CD가 들어있는 자동차를 뜯어내고 테입을 집어넣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다운 그레이드입니다. 그렇게 사모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능력은 중생과 함께 생겨나지만 항상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보면 여러분들 중에도 한때는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 그렇게 달콤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연약한 영혼들을 섬기는 일에 그렇게 기쁨이 있고 눈물이 있지만 그 안에 또한 행복이 있었고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당히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보면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예전에 그런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생각합니다. 처음 들어와서 그런 은혜의 감각이 새롭게 살아나서 기뻐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사람을 이렇게 보면서 겉으로는 메뚜기도 한철이지 나도 그만할 때는 다 그랬단다. 그렇게 말을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사람과 같은 상태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자신에게서 모두 사라졌다는 것 때문에 깊은 공허감과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침체에 있는 사람을 다루시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중요한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지식이 적은 사람일수록 영적인 침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고 주님을 덜 깊이 만난 사람일수록 회복이 빠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많이 발견한 사람의 영적인 침체일수록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지만 그것을 다하다가는 12시까지 해야 되니까 간략하게 여기에서 관련된 것만 가지고 말하자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공의적인 심판의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뒷면)인데 끊어진 것 같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3+4=를 풀어보라고 그랬을 때 두 살짜리가 그것을 못 풀었으면 혼날 일이 아닌데 초등학교 2학년이 그것을 틀려서 오면 매를 맞아야 됩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틀려서 오면 가족회의를 해서 정신병원에 보내든지 뭔가 이 아이의 정신 상태에 대해 검사를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다르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회복하기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제 말이 틀리는지 맞는지 조사를 해보십시오. 영적인 침체에 깊이 빠져있는 지체, 그러나 왕년에 은혜를 많이 받은 지체와 대화를 해보십시오. 그리고 옛날의 간증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굉장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몇 년이 되었습니까? 하고 물어보십시오. 굉장히 긴 세월동안 그렇게 엎드려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저 조금 와서 찬송하고 철야기도 한번 하면 회복이 되고 이랬는데 잘 안됩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조금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조금만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비록 은혜는 떨어져서 침체 상태에 있지만 들은 말씀이 어디에 가겠습니까. 귀는 높아진 것입니다. 어디 가서 뭘 들어보려고 해도 귀에 안 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고 아주 애매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불쌍합니다. 신앙의 세계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세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감각이 퇴화하는 것입니다. 감각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는 감각이 다시 살아납니다. 이런 하나님의 감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변화를 주셨으면 그러면 그 감각을 가지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당신 자신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분이시지만 당신을 사람들이 보고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해주십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계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알 수 있도록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하님은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계심을 간접적으로 인간들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자기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나무가 있는데 처음에는 씨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씨는 이것만 봐서는 저게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게 바람에 날려서 떨어집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쭉쭉 자라서 뻗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씨를 보면서는 이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 같지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것들이 자라면서 이것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펼쳐서 그래서 과연 이것이 이런 식물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살아계심, 당신 자신의 성품을 그렇게 보여주시는데 그렇게 보여주시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농도가 짙은 엑기스와 같은 것이 성경의 계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 그러니까 말씀의 미각 이것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배를 드릴 때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갈 때도 무슨 사건을 만나든지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성경의 눈부신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또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이끄시고 하나님이 이렇게 나와 이웃과 교회와 역사를 다루시는 손길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단지 나에게 잘해주신다는 것, 그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도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실 때 그때 다루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그 성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난과 역경, 순탄한 환경과 하나님의 축복, 이 모든 것들은 이쪽이든지 저쪽이든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성품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가 식은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말씀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정말 은혜를 받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자기가 뭘 원하는 것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뭘 원하시는가, 그게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원하는 것이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할 때 그때 신자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늘 행복해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한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감각들이 죽으면 그가 이전에 어떤 하나님을 아무리 크게 만났다고 할지라도 오늘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시인 다윗이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였을 때 그 이전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큰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셨고 그 영광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궁창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주님을 노래하고 주님을 흠 없이 사랑했던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이탈했습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질병에 가깝게 되는 것처럼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 그는 필연적으로 죄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속에는 이전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주던 율법에 대한 감각,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에 대한 감각, 자기와 같이 미천한 인간을 드셔서 어떻게 높이셨는지 과거에 자신의 삶에 대한 감각, 이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하는 모든 영적인 아름다움의 감각들이 모두 뭉개져버렸습니다. 그가 한때는 하나님을 사랑했으나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그는 필연적으로 정신과 영혼에 있어서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빼앗기지 못하게 되니까 육욕에 마음이 빼앗기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보기에는 심히 슬픈 광경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제 설교를 하찮게 듣지 말고 가슴에 깊이 새기십시오. 아닐 것이라고 말하지 말고 저 설교가 사실일 것이라고 믿어보십시오. 여러분, 예전에 주님을 깊이 만났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 그 영혼의 침체에서 회복 못 된 채로 죽을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도 어쩜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입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일어난 일들이지만 다 일어난 섭리의 복들입니다. 영혼의 기갈 상태에 있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지 않는데 과거에 주님이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고 그렇게 은혜를 받았던 상황이 많으면 많을수록 여러분들의 영혼의 침체는 깊은 것입니다.
자, 여러분 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죄들, 그 무수한 설교를 견뎠습니다. 수없이 참석한 그 기도의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은 죄입니다. 끊임없는 구역예배와 성경공부, 봉사활동, 해외선교, 국내아웃리치 수없는 활동 속에서도 심지어는 자기 구역식구들을 가르치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던 죄입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세월이 많이 지난 후, 주님이 물어보실 때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애야, 내가 너를 그렇게 생애적으로 만나주었고 그렇게 많은 은혜와 진리의 빛을 주었는데 너는 어찌해서 그 긴 세월동안 영혼의 침체 속에 있다가 나에게 왔느냐? 아무 것도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있다가 왔느냐? 그렇게 물으실 때 뭐라고 대답하실 것입니까? 주님은 나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으나 내 부모님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고통을 받고 그래서 나는 신앙생활을 잘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변명하시렵니까? 나는 안 가려고 했는데 교회가 제대로 도와주지 않아서 나는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시렵니까? 과연 그러면 주님이 그래, 네가 무슨 책임이 있니?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5년 6년 7년 8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가슴 떨려하던 은혜의 감격, 쏟아지는 눈물, 벅찬 마음의 정동 이런 것을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7년 전, 8년 전, 5년 전에 이렇게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갔습니다. 그러면 지나온 5, 6, 7, 8년의 세월이 가능했다면 앞으로라고 그 많은 세월이 가능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물론 여러분들은 배교하지 않았고 교회에 계속 나왔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시렵니까? 계속 껍데기만 교회에 나오시렵니까?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냥 이렇게 세월을 흘려보내면 언젠가 변화가 될까요? 아니라는 것은 이렇게 긴 세월동안 입증되었는데 또 더 시간이 필요합니까? 어떻게 되겠지. 세월이 약이라는데, 그런데 안 되잖아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의 마음은 강퍅해지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각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간의 마음은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입니다.
굳어진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동들이 많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강퍅한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교회를 향해, 사랑하는 지체들을 향해 자신을 여기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강퍅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몸은 교회에 나오고 있으나 마음은 하나님을 완고하게 대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머리이시고 은혜를 받는 모든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주셔서 영혼들을 돌보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고하고 막된 생활을 하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교회는 용납하고 사랑하고 품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교회는 이기고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교회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왜 그렇게 살아야 됩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많은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알고 깨달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티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눈, 새 귀, 새코 새 입, 새 살갗을 주셔서 주님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보드라움을 느끼고 사랑하라.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중생시키셨는데 우리는 왜 그런 감각들을 다 잃어버린 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성도의 진정한 행복이 사라져버렸는데도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든든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얼마나 그 사랑 안에서 성령님이 슬퍼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주님의 아름다움을 한번 발견하고 은혜의 세계의 맛을 보고 그리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신자의 행복에 눈뜬 사람들, 다른 곳에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돈, 많이 벌어보십시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큰 집에 살아보십시오. 집이 큰 것만큼 그 사람의 마음도 빈 곳이 많을 것입니다. 어느 것으로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물러갔던 사람들은 예전에 주님을 깊이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날마다 만나면서 그러면서 주님 앞에 변화되어갑니다. 신자가 신앙의 경륜이 쌓이면서 연륜을 더해가는 방법이 두 개 있는데 동물처럼 연륜을 더해가는 방법과 식물처럼 연륜을 더해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나무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기품이 있습니다. 뿌리가 확 뻗어나갑니다. 교회에 들어올 때마다 너무 대견합니다. 목회가 이렇게만 되어도 할 만 할 텐데, 죽은 나무는 한 두 그루밖에 안 됩니다. 처음에 나무를 심어났을 때 나무를 심은 게 아니라 꽂아놓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을씨년스럽고 저게 언제 자랄까. 나무를 심었던 한희동 집사님이 목사님 몇 년 만 기다리면 멋있게 됩니다. 그랬는데 저 막대기가 나무가 될까? 마음속에서 돈이 있으면 좀 큰 나무를 심으면 좋을 텐데. 그랬는데 7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쭉 뻗은 나무가 되어서 매년 가지치기를 해도 감당할 수가 없이 뻗어갑니다. 5, 6, 10, 20, 40년 그렇게 자라면 바닷가에 해송 같은 것은 최소한 200년은 넘어야 볼품이 있고 300년은 되어야 기품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은 그렇게 늠름하던 호랑이도 20년이 넘으면 이빨이 빠지기 시작해서 고기를 던져주어도 씹을 수가 없어 사육사가 와서 결국은 총으로 쏴서 죽여 버립니다. 가죽 한 장 남기고 죽습니다. 사람도 생각해보십시오. 젊었을 때는 그렇게 예뻤던 자매들, 젊을 때는 그렇게 고왔던 형제들이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완전함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그게 바로 신앙의 연륜을 먹는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은 동물처럼 신앙의 연륜을 먹습니다. 그래서 너무 흉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래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러면서 그렇게 감격해합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는데도 늘 깨트려집니다. 그 주님의 말씀에 자기를 비춥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많은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지만 ‘날마다 죽노라’ 하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신앙은 동물처럼의 아니라 큰 나무처럼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마음아파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교회라는 동산에 그 사람을 심으실 때는 큰 꿈을 가지고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쭉 뻗은 큰 나무가 되어서 그래서 교회라고 하는 큰 산을 에우며 거기서 수많은 열매를 맺고 가지 줄기를 뻗어서 온 산을 풍요롭게 하라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시고 그 은혜로 이끌고 인도하셔서 하나님이 세워놓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런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깊이 결단하고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일어서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