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시선을 주님께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3:5).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항상 잔디밭 같은 인생의 길을 걷게 되거나 구름 한점 하나 없는 하늘 아래 잔잔한 물 한 가운데를 지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 때문에 징계를 받아 시련을 당할때도 있지만 믿음으로 사느라 애를 쓰는데도 오히려 그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당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스릅니다. 옛날 저희들이 어렸을 때 살던 동네 뒤편에 큰 개울이 있었는데 장마철이면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사람들은 장마철에 고기가 많이 떠 내려 오니까 고기가 많을 것이라고 하는데 고기가 많아 지는 대신 물도 많아 집니다. 그러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렇게 수면 위에 보를 만들어 놓았는데 족대나 이런것을 반대편으로 댑니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면 고기들이 헤엄쳐 올라와서 족대 밑에 잔뜩 모입니다. 그러면 건져내면 한 냄비가 되고 또 한참 놀다가 와 보면 삼태기에 바글바글 모여 있습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물고기의 특성입니다. 강릉에 가면 남대천을 행해 거슬러 오르는 연어는 북태평양까지 가서 성장을 해서 돌아 옵니다. 그러면 그 물살을 헤치고 폭포수를 만나면 자기 몸을 바위덩이에 부딪히면서까지 치솟아 그 물줄기를 타고 올라 갑니다. 신앙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이 세상에서 때로는 시련과 역경이 올 수 있습니다. 시련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굳이 세상을 거스려 살려고 한 것은 아닌데 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고통과 시련 때문에 나도 애매하게 고난을 당해야 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도 없는 그런 평지와 같은 인생길을 지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경건했던 시인이 오늘 노래 하기를 주는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노래하며 자신의 영혼이 불안하였던 것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시련과 어려움이 우리 삶 주변에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이 세상속에서 발견하지만 답은 이 세상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고 그 문제들 속에서 우리들이 이런 고통을 받지만 그 문제가 나온 그 속에 사실 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어렸을 때 할머니 살아 계셨을 때 제일 하기 싫은 것이 할머니하고 실을 감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때는 실을 감아서 썼는지 모릅겠습니다. "애야 실 감자!" 하면 그것도 가게에서 실을 비싼 돈을 주고 사오면 제대로 된 실인데 이것이 팔다 엉켜 주인도 풀기 어려운 것을 싸게 팝니다. 그것을 한쪽에 실패로 감으시면서 저에게 붙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막 춤을 추어야 합니다. "할머니 확 짤라 버리고 하면 안돼!" "그렇게 하면 안된다. 이것이 원래 한올로 나왔기 때문에 다 풀리게 되어 있단다." 그리고 두손을 들고 춤을 추듯이 실패가 오고 가면 시간이 걸리지만 결국은 풀립니다. 우리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잡하고 얼킨것 같을 때 거기에는 환경도 원망 스럽고 사람도 밉고 그 다음에 그 속에서 자기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준 상황이 생각나고 해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찢어 지면서 분노가 폭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적절한 해결을 찿을 수 있느냐? 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얼킨 실을 풀 때 제일 먼저 서두르지 말고 매듭을 먼저 찿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천천히 살펴 보면 얼키게 된 마디가 있습니다. 그것을 살살 풀어 보면 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들은 매일매일 이런 문제들 속에 애워 싸여 살면서 마치 얼킨 실을 끊는것처럼 또 얼키고 또 얼키고 또 얼키는데 우리가 정식으로 풀어 본 적은 없습니다. 무엇을 조금 풀어 보려고 말씀의 은혜를 받아 가다가 잡으려 하면 또 다시 바쁜 일들이 생기고 우리의 관심사는 다시 이 세상사에 매몰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 되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매일매일 발견하면서도 시원한 해결은 보지 못한체 얼킨 실이 또 얼키고 또 얼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복잡한 문제속에 애워 싸여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원래 우리의 인생 자체가 그런것을 어떻하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사연이 많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이렇게 인간을 보면 어느 사람도 만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깔보고 그런 뜻에서가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이 다 뚜렷한 자기 생각이 있고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인간과 관계를 갖는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그 인간이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또 나와 다른 상황속에 있던지 간에 참 사람은 그런 모든 것들을 넘어 서서 하나님 안에 있는 참 사랑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잘 안 입고 다니는데 옛날 젊었을 때에는 점퍼를 좋아 했습니다. 제일 싫은 것이 넥타이 매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점퍼를 하나 사러 갔는데 너무 예쁘고 입어 보니까 정말 좋습니다. 가격도 그렇게 바가지 씌우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 큽니다. 그래서 여기에 걸려 있는 것 말고 이것보다 한 치수 작은 것을 가져 오라고 했는데 모양은 똑같은데 감이 틀립니다. 그래서 입어 본 다음에 벗어 놓고 그냥 이것을 입겠다고 하니 그것은 조금 크신데 사이즈 맞는 것을 입으셔야지 그러시면 되냐고 했습니다. 사이즈 맞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파십시요 나는 이것을 입겠습니다. 아직도 입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에게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고 때가 묻었어도 사람이 그 인간안에 있는 밑감을 보게 만드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 밑감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된 인간의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지금은 비롯 때 묻고 더럽지만 씻어 내고 고치면 하나님을 찿아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가장 악한 자라도 가볍게 생각 할 수 없는 존귀함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장점 때문에 존귀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영혼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고 앞으로도 맺게 될 그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 보실 때 그런 마음으로 바라 보시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들은 무엇인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낙심하게 되었을 때 절망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 이제 나는 끝났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을까? 하면서 자기 자신을 향하여 절망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의하면 그런 절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의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가끔 자살을 합니다. 자살하는 이유는 왜 자살을 하는 것입니까? 죽고 싶어 자살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너무너무 살고 싶어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럴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이 오후 시간에 머리 아프게... 죽고 싶어 자살을 한 것이지 어떻게 살고 싶어 자살을... 살고 싶지 않으면, 생의 의욕이 없으면 아무렇게나 살던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무 살고 싶으니까 어떻게 살고 싶은 그 양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너무 되고 싶고 살고 싶은데 그것대로 도저히 될 수 없도록 강요를 받으니까 그럴바에야 죽어 버리겠다 라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이 죽음을 택하는 것은 너무너무 살고 싶기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교의 예를 들어 보면 더 명확합니다. 믿음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죽지 진짜 죽고 싶은 사람은 순교하지 않습니다. 절대 안 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절망 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속에서도 우리는 마음을 다스리면서 절망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자살을 하는 사람의 70% 이상이 이미 깊은 정신의 병이 있는 것입니다. 충동적으로 그런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충동이 그렇게 된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인 이상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하면 절망을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을 살인하고 도둑질 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죄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낙심과 깊은 절망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도 순간순간 이런 절망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의심 그리고 의심에서 발전된 절망은 놀랍게 한 인격안에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공존하기는 어렵겠지만 한 인격안에 짧은 시차를 두고도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 속으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어떤 경우에서든지 하나님은 선 하시다 그리고 그분은 나의 피할 바위요 산성이시요 그리고 나의 피난처 이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그리고 나를 다 버려도 주님은 나의 목자 이시다. 그분께 갈 수 있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자기의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그런 경건의 기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자아와의 대화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러면 자기 안에 있는 근거 없이 불안해 하고 근거 없이 낙망하고 근거 없이 괴로워 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았기 때문에 낙심하고 무엇을 보았기 때문에 낙망하고 무엇을 보았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 당연 합니다. 우리가 이번에 성지순례를 다녀 왔습니다. 살면서 저는 광야라고 하는곳을 한번도 못 가보았습니다. 우리는 광야라고 하면 빈터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진짜 광야인데 풀 한포기 없는 광야인데 삼일길을 달려도 계속 광야입니다. 흙덩어리... 그런데 홍해가 갈라 지는 것을 보고 삼일길을 걸어 가다가 물이 없다고 이스라엘 원망하는 것 가지고 제가 설교를 여러번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죽어라 욕 했습니다. 어떻게 삼일만에 변식을 할수 있느냐 했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깨달은 것이 우리들이 똑같은 상황에 있었으면 세시간만에 변했을 것이다. 그 삼일은 정말 오래 참은 것입니다. 풀 한포기도 없이 영상 50도의 뜨거운 햇빛이 내리 쬐는 것입니다. 몇시간만 걸어 가면 일사병에 걸려 쓰러 집니다. 물론 물기둥으로 인도 하셨지만 그럼 구름기둥이 솜사탕 입니까? 먹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낙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에 낙심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보는 것은 신앙이 없어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안 읽었다고 오는 눈 뜨고 나니까 캄캄하게 눈커풀이 씌어서 안 보이고 그런 것 아닙니다. 그냥 믿음이 있어도 보이고 없어도 보이고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을 때 보이는 것이 그대로 이성을 통해 해석이 되어서 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쁜 일이 일어 나면 내가 해를 받을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들어 가면 내가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대로 직역이 되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이성은 해를 받을 것이라고 판단을 하지만 나는 해를 받을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성으로 입증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느냐? 너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러나 너는 그러면 안된다 그러면서 육적인 자아가 아닌 신앙적인 자아가 그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 보거라. 이것은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뜻입니다. 환경이 어렵고 절망과 시련과 고통이 있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거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얼굴을 돕는 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대면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정면으로 있는 대면을 하실때는 두가지 이유입니다. 준엄한 심판의 표현 두 번째는 비할 때 없는 친교의 표현 두가지입니다. 여기에서는 후자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할 것이다 하면서 노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 본다는 것일까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응시하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에드앤윌슨토져는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응시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일까? 아다시피 하나님은 물상으로 이 물체 가운데 계신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감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록 없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물상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기어이 우리 마음속에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 가셨는데도 나는 그 할머니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 모습은 더 늙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살아 계시면 99살입니다. 99살까지 만약 사셨더라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76세로 내 마음속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러니까 늙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조용히 생각하면 할머니를 응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속에서 그런 형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란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상상력을 통해서도 안되고 그리고 무엇을 통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바라 보는 영혼의 응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당신 자신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방법인 그분의 말씀을 향해 우리의 지성을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무게도 없고 부피도 없고 크기도 없는 것이지만 그 말씀에는 내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내 마음을 바꾸고 나의 삶을 변화 시키고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들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결코 눈을 감고 하나님 자신을 명상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명상하는 행동에 의해서 파악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에게 태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빛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어둠을 비치는 빛의 광선을 보면서 빛의 비춤을 알고 또 태앙을 우리가 직접 바라보지 않아도 그 빛을 머금으면서 꽃 피고 잎이 생기면서 싹이 나고 자라나는 식물들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는 태양을 알게 되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의 오감으로 보고 듣을 수 있는 이 모든 사물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간접적으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고 자기의 내면을 들어야 보는 것도 마치 우물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지성을 다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말씀에 집중하고 그 말씀을 응시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을 통해서 계시지 않으신것 같으면서도 우리속에 오시고 보이지 않으신것 같으면서도 보이도록 우리에게 말씀으로 나타나 보여 주시고 당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그 말씀에 접촉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변화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자신은 아무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으시면서 하나님은 오히려 그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려 우리를 변화 시키고 새로운 삶으로 걸어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름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나아 와야 합니다. 그리고 허우적 거리며 살아 가는 삶을 잠시 멈추고 주님 한분께 우리의 시선을 모두고 말씀 앞에 저희들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온전히 드릴 때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을 바꾸시고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움직이시는 방법입니다. 이제 여러분 수련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대해서 수련회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특별히 만나 주시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먼저 그 마음속에 주님이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길을 닦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교만으로 높아 졌던 것들은 하나님이 깍아 낮추십니다. 그래서 회계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그래서는 안되는데 낙심하고 좌절해서 주저 앉는 마음이 될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털썩 주저 앉아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좌절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추면 우리의 마음이 도두어 집니다. 그래서 참 웃기는 것이 하나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면 어떤때는 하늘 높이 교만해 지고 어떤 때는 또 말도 안되게 낙심하고 좌절해서 꺼진 웅덩이 처럼 마음이 주저 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평평해 져야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보일텐데 이 평평해 지는 일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할 때 말씀이 꼭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때는 커다란 시련을 만나면서 성경 한절 못 읽었는데도 하나님께 마음이 기울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준비입니다. 해결이 된 것이 아니라 준비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기가 살아서 펄펄 뛰면서 심방도 안 받겠다는 교인이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에 기부스하고 목에 붕대 감고 누워 있어 심방 간다고 하면 빨리 오시라고 합니다. 가서 기도를 하면 눈을 가만히 감고 그 맹수 같은 사람이 그렇게 병든 강아지 마냥 그렇게 기도를 듣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주에도 같은 설교를 하겠는데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을 영적인 안목으로 해석해 보십시요. 그리고 이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깨달으라고 그러시는 것일까? 평안해 보이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 속에서 정말 저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될 때 흩어 졌던 여러분들의 마음이 모아지면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기도하면서 기다리다가 이번 수련회에서 주님을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이틀동안이나 집도 비우고 회사도 정리를 해야 하고 또 수련회 회비도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네식구가 가려고 하면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만히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 하고 비교하면 안되고 바캉스 가는 사람들하고 비교를 해야 합니다. 그 돈 가지고 절대 바캉스 못 갑니다. 그런데 그 돈 가지면 먹여주고 재워 주고 간식 주고 성경공부 교재도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간식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말씀도 먹여 주고 은혜를 받고 내 인생이 변화되고 이렇게 되니 절대로 그런 지출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보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도 기계든 무엇이든지간에 과도히 쓴 후에는 정비를 해야 합니다. 몸도 자꾸 저에게 어디 아프시냐고 하는데 아픈것이 아니라 고단합니다. 아직도 시차가 안 풀렸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들이 많으니까 힘들겠죠? 그런데 그렇게 힘들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인생이 원래 다 그렇고 이마에 땀이 흘러야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달파다 생각을 하면 짜증이 납니다. 생각하지 말고 아직 하나님이 건강을 주셔서 섬기게 하시고 봉사할 수 있게 해 주신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정신 없이 돌다 보면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럴때는 휴식이 필요 합니다. 육체의 휴식이 꼭 필요 합니다. 제 인생에 있어 힘들었던 때는 이쪽에 와서 교회를 지었을 때입니다. 하루종일 힘들었습니다. 다시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 교회 지어야 하는것 아니냐고 하면 나 은퇴하면 지으라고...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나중에는 헛구역질이 납니다. 헛구역질을 하고 운동화 끈을 매면 머리가 핑 돌고... 그것이 열심히 노동을 해서라기 보다 생각이 수없이 많으니까 머리에서 반짝반짝하고 쥐가 납니다. 머리에서 쥐 나는것 모르시죠? 그래서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토요일 밤에 휴가를 휴가가 아니라 어디가서 좀 소리가 안들리는 곳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7일동안을 교회를 비우고 9일 만에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혼자 조용히 있으면서 새벽기도 가고 성경 읽고 남는 시간은 무조건 잠을 잤습니다. 그렇게 닷새를 하고 나니까 새살이 돋듯이 정신이 돌아 옵니다. 우리의 육체도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것처럼 영혼아 내가 얼마나 피곤 하였느냐? 이 헛된 세상속에 소요돌이 치는 생활 속에 살면서 헛되고 얼마나 고단하였느냐? 우리의 영혼이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쉼이 필요 합니다. 그 육체의 쉼은 노동을 멈추는 것이지만 영혼의 쉼은 영혼의 연인을 향하여 시선을 두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쉼의 근원이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영원히 응시할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여러분들은 A/S가 필요 합니다. 그러니까 공장에 가서 정비를 해야 합니다. 성경으로 기름칠 하고 말씀의 망치로 얻어 맞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으로 색칠을 하고 그렇게 해서 온전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우리의 준비가 갖추어 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인간이 결국은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것은 하고자 하는 욕구가 모자라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에 꼭 가서 은혜를 많이 받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주변에 이렇게 보아서 곤고한 사람들 등록 좀 시켜 주십시요. 그러면 회비까지 내 주었다고 하면 양심이 있어서라도 따라 갈 것입니다. 가서 주님을 만나고 은혜 받고 변화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그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도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낙망하며 어둠속에 울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 보도록 그래서 그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