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하나님의 선물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사 38:17)
시골에서 자라신 분들은 제 이야기가 좀 쉽게 이해될 것 같이 생각이 되는데, 밭이나 혹은 논을 개간하다가 커다란 바위가 아주 크진 않지만 그래도 혼자서 들기 어려울 정도의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발견될 때, 그것을 그 밭에서 꺼내는 방법이 있지요. 물론 시간이 있고 연장이 있으면 바위 주위를 다 흙을 파서 그 바위 뿌리까지 다 드러내서, 그래서 그것을 줄로 묶든지 어떡하든지 아니면 소에다 걸든지 해서 끌어내면 제일 좋죠. 그러나 그 정도로 크지는 않고, 혼자 힘이나 혹은 둘의 힘으로 꺼낼 것 같기는 한데 잘 안 빠지는 것 같을 때 그 바위를 꺼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그 바위를 흔드는 게 아니라 커다란 햄머나 아니면 또 다른 커다란 바위를 가지고 와서 그 땅에 꽉 박혀있는 바위를 여러 번 두드리죠. 바위를 쿵쿵쿵 여러 번 두드리면 오랫동안 땅에 딱 박혀서 붙어있던 바위가 흙하고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바위를 붙잡고 있는 흙의 집착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쉽게 그 바위를 꺼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종종 우리를 눌러 붙은 신앙생활에서 떼어내실 때에 종종 우리에게 하나님이 고통을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유대나라 역사에 길이 빛나는 신앙의 임금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사형선고를 받고 한번만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가운데 나오는 기도의 한 토막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큰 고통을 주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는 것이죠. 이 38장 앞에는 이 히스기야의 삶에서 잊을 수 없는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을 하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앗수르라고 하는, 여러분이 역사,속에서 배운 앗시리아 라고 하는 나라가 신흥국가로서 등장하게 되는데 그 나라가 유대에 쳐들어 온 것입니다. 많은 18만 5천명이나 되는 그러한 문명 군사들이 에워쌌고 그리고 이제 이 유다나라는 그 엄청난 군인들에게 에워싸인 가운데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습니다. 무엇으로 해도 이 침략을 물리칠 수 없었을 때에 히스기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특공대를 조직하거나 외교사절을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찾아서 하나님 앞에 굴욕적인 외교문서를 내다 놓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왕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히 나라의 위기를 맞아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큰 역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와서 다 밤중에 쳐서 18만 5천명의 앗수르 군사들이 시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왕 그 쳐들어 왔던 나라 안에는 내분이 일어나서 그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결국은 그 나라도 큰 위기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죠. 작은 나라 유다로서는 너무나 놀라운 경험을 한 것이죠. 그랬으니, 그 때에 히스기야의 심령이 얼마나 깊이 고호되었을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38장에 그즈음이라고 나오는데 사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후에 상당한 시간이 흐르면서 아마도 히스기야의 마음에는 그런 기적적인 승리로 인해서 마음이 많이 교만해져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큰 계시의 빛을 받았을 때 시험에 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큰 환난을 극복한 다음에 시험에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맛 본 다음에 시험에 떨어지는 예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렇게 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나면, 그 당시에는 심령이 매우 신령하게 고양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으로 그 마음이 가득차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게 교만해지기 쉽게 됩니다. 이렇게 큰 승리를 쟁취하거나 큰 계시의 빛을 보거나 혹은 놀랍게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나면 대부분의 많은 신자들이 방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만해지게 될 때에 마음은 방심하게 되고, 방심하게 될 때에 사람의 마음은 부패하고 굳어지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존 칼빈 선생은 회개의 열매 중에 가장 첫 번째 열매가 뭐라고 꼽혔는지 아십니까? 뜻밖에도 그 뛰어난 사람, 요한 칼빈 선생은 회개의 열매의 가장 첫 번째 열매는 ‘주의 깊음’ 이라는 거예요. 즉, 깊이 회개하게 되면 마음에 맺히는 첫 번째 열매가 ‘주의 깊음’ 이라는 거예요. 예전에는 경솔하게 생각했었는데 자기가 그 죄에 빠져서 고통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나면 ‘주의 깊음’ 이라는 열매가 맺혀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가 깊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려 깊고 분별력이 있는 주의 깊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에요. ‘내가 이 일을 행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내가 이렇게 이런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등등도 주의 깊은 마음이 회개 후에 생겨난다, 라고 하는 것이죠.
히스기야도 이러한 큰 승리를 맛보고 난 다음에 그 마음이 굳어지고 교만해 졌던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마지막에 그의 영혼이 마치 논이나 밭 가운데 깊이 박힌 돌처럼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이 큰 바위로 한번 히스기야를 때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제 너는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라고 하는 죽음의 예고였습니다. 즉시 죽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고가 선지자를 통해 떨어졌습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는 즉시 면벽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내가 일생을 살아 온 것을 아시는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아온 것을 아시는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 기도 속에서 그는 자신이 당한 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 목적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합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는데 그것이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저녁에 이 밤에 여기에 나온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에게 고통이 있겠지요. 고통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르고 그 깊이는 사람마다 같지 않아도 아마 견디기 힘든 고통이, 여러분만 아는 고통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없는 것이 아니고 못 느끼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성령 충만하게 잘 살았기 때문에 제게는 그런 고통 같은 것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은혜가 떨어지셨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가슴에 끌어안고 사셨을까요? 아니죠. 오히려 순결한 영혼은 더 많은 고통을 얻게 돼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어요. 그 ‘모든 것’ 속에는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포함돼요. 예수님 안에는 행복과 기쁨, 사랑과 소망, 구원과 은총, 이런 것들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 안에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고난과 시련, 핍박과 고통, 견디기 힘든 환난, 그것도 예수 안에 있는 거예요. 그것을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할 때, 사실은 그것이 모두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러한 사실을 아주 훌륭하게 표현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서 그 분안에 있는 고난과 시련, 고통과 괴로움까지 받으면서 우리가 비로소 그 분의 사랑과 자유, 기쁨과 은덕들을 알아간단 말이죠. 그러니 우리 중 누구도 고통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성도의 놀라운 특권이에요. 개인적으로 환난을 만난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것을 느끼고 개인적으로 나에게 핍박과 환난과 고통 같은 것이 직접적으로 내게 없어도 그리스도의 한 지체인 우리들 속에 있는 고통들을 보면서 그것이 내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성령에 깊이 사로잡히게 되면, 지체들 속에 있는 놀라운 영적인 연결들이 살아나. 그래서 그 지체들의 고통이 내 마음에 깊이 고통이 되고, 그 지체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내 마음에 큰 기쁨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 교회에서 들려오는 좋은 신앙의 소식을 들으면서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는 거예요. 또 ‘누가 실족했다더라.’ 하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아파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요.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너무 무디어져서 주님의 마음을 나누어 갖는 일이 불가능 할 정도로 우리의 심령이 무디어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걸어가는 그 길이 우리에게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굳어있을 때 또는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보여주시는데도 우리로 가려는 선한 의지가 발동하지 않을 때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전체를 논이나 밭에 박힌 바위처럼 여기시고 그것을 큰 바위로 때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고통을 가하셔요. 이 고통을 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시기 위해서 고통을 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 모든 우리의 영혼을 오히려 파괴하기 위해서 에워싸고 있는 그러한 죄와 영적인 악한 것들을 떨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고통으로 꽝꽝 때리시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마 여러분들에게 이런 종류의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깊이 깨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고통이 있고 또 영적으로 깊이 깨어있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신령한 고통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현실적이고 아주 육신적인 고통이 여러분에게 밀려올 수 있습니다. 오늘 그러나 소망을 가지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고통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루만지시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큰 고통을 주실까요? 때로는 이 고통이 너무 크면 성경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밤에 누워 자면서 차라리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깊은 고통이 밀려올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인생을 살다가 이런 깊은 고통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더더욱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워지지요. 죄와 슬픔, 견디기 힘든 고통과 눈물이 모두 사라지는 나라, 그립죠. 그리워할 뿐이지 눈을 뜨고 나면 고통을 주는 현실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런 고통이 얼마나 아프고 괴로운지 고난의 골짜기를 넘어 본 사람들은 모두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교만이나 태만함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눌어붙어 있을 때에 특별히 우리를 깨우시기 위해서 보내는 고통은 전 방위적으로 다가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웬만큼 궁핍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탕자를 보십시오. 흉년이 들었는데도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었는데도 아버지 집 돌아가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웬만하면 아버지 집을 떠나서 살고 싶어 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가 아마 그날 쥐엄 열매만 발견할 수 있었어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려고 하는 악한 본성들이 가득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면 모두 회개하고 주께 돌아온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 아버지께 저절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고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이 찢어지도록 맞고 터져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독한 원망으로 가득 차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죽어버릴지언정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강퍅한 마음에 대해서 왜 기록을 하였겠습니까? 인간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런 큰 고통을 당할 때, 그렇게 괴로워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면서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런 큰 고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그들을 일반적으로 인도하시는 방식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한 섭리로 그들에게 작용하셔서 고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서 인격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그리고 찬양을 부를 때에도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일깨움을 주십니다. 그러나 심령이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굳어져 버리고 나면 이 사람이 좀처럼 그러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법에 의해서 인도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버텨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큰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강력한 고통을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을 버리고 그 대신 자신이 붙잡으려고 하는, 그리고 지금 붙잡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고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돈 많이 벌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인색해 하면서 자기만의 아성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환난과 큰 고통이 닥칩니다. 환경이 뒤흔들릴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심령이 말할 수 없이 괴롭고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고통을 하게 될 때에 물질과 명예, 좋은 환경, 하나님 밖에서 얻은 모든 이 땅의 자원들이 자기를 지켜줄 수 없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고, 정말 찾아야 할 자원이 이 땅의 자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강력하게 고통을 주어서 흔들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큰 고통을 주어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십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먹고 마시는 것이 모자라면 이 땅의 자원으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도 육신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더 많은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도 이 땅의 자원이 이바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잃어버린 평안을 되찾는 그 일에 이 땅의 자원이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뼈마디가 삭고 그리고 뼈마디마디가 깨뜨려지면서 그러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시달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데서 오는 말할 수 없는 좌절감에서 고통 받고 있을 때에 이 땅의 돈이나 명예나 지위가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도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로 피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거기에서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 그 때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자신을 이 상황에까지 데리고 온 장본인이 사실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그 때에 영혼은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신자는 그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주님이 많이 축복해 주셨을 때, 탄탄가도를 달리게 하셨을 때, 하나님이 많은 은덕을 베풀어 주시고 물질에 축복을 주셨을 때,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는 거죠. 왜냐하면 사랑하시니까. 사랑하시니까. 우리 아이들이 밖에 내 놓으면 막 돌아다니면서 온통 얼굴이고 뭐고 새까맣게 더러운 것을 묻혀서 집에 들어오죠. 그러면 윗도리를 벗기고 따뜻한 물을 대야에 받아 놓고 거기다 이 놈을 집어넣고 닦아줍니다. 죽는다고 소리를 치죠. 매운 비누칠을 해서 머리까지 감길라치면, 눈을 부비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죠. 엄마가 왜 그렇게 괴롭힙니까? 사랑해서 괴롭히죠. 깨끗이 씻겨서 그래서 이제 침대에 누이고, 크고 하얀 타올로 감싸서 다 닦아주고 파우더까지 발라주고 나면, 평안하게 잠이 들죠. 하나님 사랑하셔서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때로는 고통을 주셔요.
뭘 주시기 위해서 그런 고통을 주시느냐 하면,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그런 고통을 주시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샬롬’인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통해서 오게 되는 그런 종류의 평안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안 그런 평안도 많아요. 어리석은 부자가 자기의 영혼에게 이야기했던 ‘내 영혼아 이제 평안히 먹고 마시자.’ 이렇게 타일렀던 영혼의 이 평화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이 오는 평안이에요. 그런 평안은 오래 가지도 못하고 그런 평안을 신자가 느끼면 느낄수록 신자는 방종하고 죄 가운데 빠지기 쉬운 거예요. 오히려 신령한 초조함, 거룩한 긴장감이 있을 때, 그가 더 신실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에서 히스기야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큰 고통을 주시는 것은 나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다.’ 할 때의 이 평안은 그렇게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잠시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 마취시키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평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평안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한 가운데에 그 결과로서 내려오는 심령과 삶 전체의 평안함이에요. 이 평안 속에는 그 사람과 삶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라고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과의 평화의 핵심중의 또 하나는 나와 나 자신의 온 삶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불순종하고 죄에 빠지면 이러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디에 가도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신 것 같고, 내가 열심히 섬겨도 나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 않는 그런 소외감과 거리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나면 나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인정해주신다, 라고 하는 마음이 깊이 찾아오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평화가 회복되는 곳에는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들겠죠. ‘그가 오랫동안 불순종하고, 히스기야처럼 마음이 굳어지고 옛날에 받은바 은혜에 교만해져서 주님 앞에 미끄러졌는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 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바로 이것이에요. 전에는 그러한 부족함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고, 허물만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 용납될 수 없었지만, 이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나면, 이 많은 죄와 허물들을 통해서는 자기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전에는 그리스도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에 많았는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 커다란 환난을 통해서 깨닫고 나니까 히스기야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시대가 오직 주의 손에 있나이다.’ 라는 고백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나는 사람이 아니요, 벌레라.’,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주께서 나를 주의 장막에 감추시옵소서.’ 표현은 다르지만 모든 언어들이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언어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분께 깊이 아주 깊이 매달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 때에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녹아내리게 하는 것은 ‘네가 이런 죄를 지었고, 이런 나쁜 일을 했구나.’, ‘너는 악한 놈이구나,’ 이런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에 의해서는 마음이 녹지 않아요. 두려움과 공포는 생길지 모르지만 마음은 녹아내리지 않아요. 녹아내리게 만드는 것은 뭐냐 하면, ‘보라, 하나님이 나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셔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게 하시고 나를 또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이제껏 까지 받아온 남다른 하나님의 사랑, 고난 가운데서도 나를 지켜주신 아버지의 큰 사랑이 가슴에 밀려올 때.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사랑해주시고, 우리가 고무신 거꾸로 신고 주님을 도망칠 때에도 사랑해주시고 어두움 속에서 방황할 때에도 사랑해주시고, 다시 참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도 사랑해주시니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셔요. 그것을 깨닫게 될 때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거예요.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항상 혼내주기 위해서 바위로 그들을 때리시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의 즙을 짜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큰 고통을 주시는 거예요. 감람에서 기름을 짜는데 껍데기가 깨뜨려지지 않고, 감람열매가 찧어질 수가 있겠어요? 찧어진 감람열매가 깨뜨려지지 않고, 압착기 넣어 눌러 짜서 부스어지는 일 없이 기름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깨뜨려지지 않는 옥합에서 향유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쾅하고 큰 바위로 때려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 마음 속 썩였던 것, 복수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 녹아내리는 마음을 받으시기 위해서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빨리 녹아내리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고통이 빨리 끝나죠. 하나님이 더 이상 흔들 필요가 없어요. 그렇지 않으니까 고통이 오래도록 가는 거예요. 거기서 막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녹아내릴 때 그 속에서 그동안 멀리 떠나서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하며 우리로 살아가게 했던 ‘교만’, ‘아집’, ‘자기 사랑’, ‘위선’ 이러한 모든 찌꺼기들이 함께 녹아내리는 마음을 타고, 같이 쏟아져 내리는 거예요.
우리 중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난 하나님 막보고 살고 싶다.’ 그런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겠어요?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 앞에 그 분과의 관계가 아름답게 회복이 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녹아내리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자녀이신데도 고통을 주시는 거예요. 그 고통을 보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껴야 돼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짐승 같은 나를 사랑하시나.’, ‘만물의 찌끼와 같이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사랑하시나.’ 그것을 고통 속에서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흔들어 놓으셔요. 어느 한 순간에 마음이 쏟아져 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랑 앞에서 녹아서 쏟아져 내려요. 맑은 눈물이 뜨겁게 쏟아져 내리지만, 오늘 히스기야처럼 이전에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은 것 때문에 교만해하던 마음, 물질적인 축복 때문에 하나님 덜 의지하던 세상적인 마음, 환난과 고통이 없이 평탄한 길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 의지하지 않는 마음, 사명에 충실하지 않았던 나태한 마음들이 그 속에서 시커먼 물이 되어서 마음속에서 함께 흘러내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참으로 당신의 자녀 되길 원하셔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계시는데 이 성령님이 거하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 우리 안에 많이 있을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너무나 마음이 아프신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면서 성령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 우리에게 그 구정물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내려오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녹아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고통이 다 나쁜 것이 아니에요.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이 설교를 들으면서, 많이 괴로울 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여러분만 아는 큰 고통이 여러분을 짓누를 때, 환난과 어려움이 와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환난이 극에 달할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 미워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하셔서 평안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그릇된 여러분들을 흔들어 놓으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아니면 하나님이 그렇게 흔들어 놓지 않으셔요. 그러면 이제 답은 모두 나왔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흔드실 때에 속히 그 분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오히려 ‘이 큰 고통이 불순물이 섞여있는 금과 같은 나를 연단하고 재련해서 그래서 나를 더 순결한 신자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흥의 은혜가 내게 가까이 왔구나. 이제는 내가 더 이상 도망가지 말아야지. 이제 그 분의 손에 나를 맡겨야지.’ 그런 마음을 가지세요. 욥이 말했던 것 같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그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일생동안을 성자처럼 살았던 진실한 신자들이 이 땅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뛰어난 순결의 사람, 뛰어난 헌신의 사람, 뛰어난 충성의 사람이었다는 것이 공통점이 아니라 많이 깨뜨려진 사람이었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깨뜨리실 때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피했지만,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 속에서 성자처럼 일생을 살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분이 깨뜨리실 때에 깨뜨려졌던 사람들입니다. 그 분이 흔들어 놓으실 때에 흔들렸던 사람들, 그 분이 치실 때에 맞았던 사람들, 그 분이 깨뜨리실 때에 깨어졌던 사람들, 그 분이 누르실 때에 마음이 녹아내렸던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질 때에 그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주님을 덜 의지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다 녹아내리고 다 부수어져요. 그 때 우리에게 어떤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어찌하오리까. 주여 어찌하오리까. 내가 무엇을 행하리이까.’ 라는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세울 수가 없어요. 다 부수어져요. 그 때 주님이 우리를 빚으시는 거예요.
이천이나 저 아래쪽을 내려가 보면, 질그릇을 빚는 공장들이 있지요. 그래서 다 빚어서 말렸는데 잘못된 것은 깨뜨려버리고 다 구웠는데 잘못된 것은 깨뜨려버리는데 녹로에 돌리다가 망가진 것은 연못 같은 데에 던져 버려요. 그러면, 형체가 그대로 연못 속으로 들어가잖아요. 거기에는 같은 처지에 있는 진흙들이 많이 있어요. 그것을 장화를 신고 들어가서 다 밟아요. 그래서 형체를 없애버려서 다시 보드라운 진흙으로 만들어서 새 것을 빚어요. 결론이 하나가 있어요. 주님 없이 나 혼자 빚은 것 중에 좋은 것이 하나도 없고, 나 없이 주님 혼자 빚으신 것 중에 나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왜 이런 길로 인도하실까?’ 하며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원망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자기가 다 녹아내리고 나니까 주님의 손길이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녹아내릴 때에 자아가 형체를 잃어버릴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셔요. 그래서 주님과의 막힌 담이 모두 무너지는 거예요.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요. 하나가 된 평화를 누리는 거예요. 그것을 주시기 위해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이 히스기야를 큰 바위로 고통을 주어서 흔들어 놓으셔서 말년에 히스기야의 심령을 쇄신시키시는 놀라운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님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그 분의 손길을 다 받아들이세요. 지금 여러분들이 느끼는 그 고통은 생명에 이르는 고통, 하나님과 평화에 이르는 고통, 사랑하고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섬김으로서의 고통이에요. 감사하며 우리 안에 녹아내릴 때까지 주님이 그 고통을 사용하시도록 기도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