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4)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얼마나 그 형식적인 신앙을 증오하고 괴로워하는지를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으로 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고통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삶이 하나님 앞에 거룩해지려는 갈망이 없으면서 위대한 나라를 꿈꾸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고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부흥을 사모하는 자들이 있다 길래 주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두루 살펴보니까 온통 낭만주의자들입니다. 아랫도리는 이방의 나라에 가서 살고 윗도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인생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부흥을 사모하면 그 부흥이 온 나라에서 살기에 적합한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무너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을 통해 드러났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너희는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찌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념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삶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위대한 성경구절에서 이야기하는 공법과 정의는 삶인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공법을 물같이’라고 했는데, 이 물은 히브리어로 ‘마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물은 이런 물(강대상의 컵에 있는 물)이 아닙니다. 바다를 뒤덮는, 하박국서 2장에 나오는 그런 물입니다. 그러니까 호수 같은 것들이 물이 쫙 빠져나가거나 바다에서 물이 쫙 빠져나가면 그 지저분한 것들이 갯벌에 드러나게 되고 여러 가지 버린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되죠? 밀물 때가 오게 되면 물이 꽉 찬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방 위까지 찰랑거리면서 시야가 더러운 것이 모두 사라지고 물이 가득 차게 되는 그 물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겐 이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잣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잣대, 자아와 아집의 잣대, 그 비뚤게 만들어진 그릇됨의 잣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는 이래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진짜 신앙은 이런 것이다 하는 인간의 그 어쭙잖고 교만한 잣대들. 그런 것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엇을 만들어냈습니까? 인간의 사상과 철학을 내세운 사람들마다 사람들에게 내 철학을 기대살고 내 사상에 기대어 살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말하고 꿈꾸었습니다. 합리주의의 물결이 지나가면서 구라파에서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면서 공산주의라는 이론을 만들어냈고 철학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유토피아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사상을 의지하고 살았던 그 대가로 말미암아 인류는 최악의 불행한 일들을 수많은 전쟁을 통해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아직 그 사상의 영향 때문에 사랑하는 민족이 동강난 채 원수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상과 사고를 의지해서 이 세상의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하물며 여러분들이 이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이것이 인생을 바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만들어놓은 수많은 편견과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주관이라는 미명아래 견지하고 살아가는 성령에 뿌리박지 않은 잘못된 사상들, 그것들이 여러분들에게 무슨 삶을 산출해 주었습니까? 그런 어쭙잖은 사상을 붙들고 성령 하나님의 입증도 받지 않고 자기의 가치관과 자기의 지식과 자기의 아집을 붙들고 살아간 신앙생활이 만들어낸 열매가 바로 불순종과 불의와 죄악과 하나님 앞에 진노를 당할만한 껍질밖에 없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생명은 모두 사라져가고 하나님과의 화목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자신의 삶속에서 물러가고 공법과 정의를 실천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이 되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거저 나아가서 “하나님, 전 아무것도 몰라요. 주님!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그때 훨씬 나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것은 이제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는 이력과 교회생활 속에서 익숙해온 기독교적인 에티켓, 교회생활의 틀, 주일이면 자동으로 성경 찬송 들고 일주일을 어떻게 살았든지 아무 거리낌 없이 담대히 교회당 문을 들어갈 수 있는, 그리고 교회당 문을 열고 나오면서 일주일동안도 자신의 지식과 방법대로 살아가기로 각오하고 나오는 것 이외에는 산출해 준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전히 인간의 사상이 얼마나 하찮은가?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아멘 안해요? 이 결정적인 순간에. “할렐루야”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 영광이 세상 가득하게 인정되리라.
여호와 영광이 세상 가득하게 인정되리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다 쓸고 가는 것입니다.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덮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호와여! 주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우리의 사상은, 우리가 의지했던 이 고집, 우리가 의지했던 주관은 아무것도 아니옵나이다.” 이게 바로 물이 덮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충만한 하나님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한 번도 딴 이유 때문에 울어본 적은 없습니다. 난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그건 뭐냐면 변하지 않는 지체들, 안타깝게 말해도 안변하고 기도해도 안변하고 소리를 치며 외쳐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그때마다 절망해요. 그리고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 지금 저에게 필요한 것은 말과 지혜가 아니라 폭풍과 바람과 소낙비와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입니다. 하나님! 포기할 수 없는 저 영혼의 변화가 어느 때나 오겠습니까?’ 영혼만 변한다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또 저에게 보여주세요. "봐라. 네가 작은 부흥을 경험했고, 많은 사람들이 너로부터 부흥에 대한 생각을 전수받고 꿈꾸고 기도하지만, 그러나 봐라, 저 변하지 않는 모습이 네 목회의 한계인데 그게 바로 내 앞에 서 있는 너의 한계다. 네가 정말 어느 때에나 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이 말씀 사역에 매진하겠느냐?” 그러면서 결국은 변하지 않아도 나는 그 사람들을 원망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꿈꾸는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지식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악한 악마의 세력들이 결박당하고 어디서든지 여호와의 사랑을 아는 지식이 넘쳐나고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의 교회에 충만한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은 한사람, 그리고 한 무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하게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면서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면 동일한 변화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이니까 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부흥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났던 때에는 반드시 기도가 나타나는데, 그 기도는 한마음으로 하는 기도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그들은 한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120명이 남아서, 밖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로마경찰들이 순회하고 있었고, 어쩌면 두목들을 체포한다는 지도자들에게 현상수배령이 내려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10일 동안 매달리며 기도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며 기도했겠습니까? ‘아우, 기도 빨리 끝나서 그동안 못 먹었던 밥도 먹고, 새로 사온 옷도 좀 입어보고, 며칠 전에 뽑아 놓고 온 새 차도 시동을 좀 걸어봐야 하는데······.’ 이런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내가 두고 온 그 자매는 잘 있나? 혹시 고무신 또 거꾸로 신진 않았나?’ 그런 생각 하고 있었습니까?
아니요. 그들은 하나의 목표에 고정되었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주님이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고, 물 붓듯이 부어 주신다고 약속하신 그것이 무엇이옵나이까?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 의해서 물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상을 복음이 덮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인간의 사고를 덮었습니다. 지식인도, 정치인도, 아이도, 어른도,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오늘도 그러한 공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히브리말로 ‘미슈파트’입니다. 이것은 재판 용어입니다. 재판을 할 때 정확하게 딱 잘라 주는 것, 이것이 미슈파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선지자가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공법을 물같이 흘려라. 정의를 하수같이 흘려라.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때에는 주님이 수를 보고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은 수에 있어서는 중동지방에서 아주 작은 민족이었지만, 이들이 공법을 실천하며 그들의 삶을 실천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미슈파트, 즉 공의가 드러나는 삶을 살기만 하면 그까짓 거 세상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룩이 누룩이기만 하면 가루 서 말이 변하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이 세상을 향하여 흘려보내야 할 공법의 물이 그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과 똑같이 살고, 그리고 의롭게 살아서 고난을 당하기보다는 순간의 유익을 위해서 불의를 따르고 의롭게 살기를 포기하는, 이러한 세태에 영합하는 삶을 살아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날을 꿈꾸며 그리워하며 하나님 앞에 지금 이 말씀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홍수가 대단합니다. 저는 병원 갔다 오면서 보니까 산이 파여서 큰 바위가 굴러내려 온 걸 봤습니다. 그런데 사실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까 말씀드린 그때에 왔습니다. 이 평평한 강을 흐르는 물은 한강에서 보는 것처럼 시뻘건 흙탕물이 소리 없이 도도히 흘러갑니다. 그러나 물임을 실감하는 것은 그런 데가 아니라 이런 계곡입니다. 내려가는데 정말 엄청났습니다. 그 홍수를 보면서 이야기하는데 옛날에 개천가에 봉고가 하나 서 있었는데, 한사람이 물이 확 내려오니까 큰 돌이 있었답니다. 그 돌에 물 구경 하느라고 섰습니다. 그런데 돌이 무너지면서 사람이 떠내려가는데 자기네들이 그냥 보면서 죽는 걸 봤습니다. ‘할 수가 없는걸.’ 그러더니 봉고가 굴러 떨어지는데, 그 큰 봉고가 보는 앞에서 휴지처럼 굴러가더랍니다. 평상시에 사람 50명이 들어도 못 들 것입니다. 신기하잖아요. 이런 바위가 다리 옆, 길 위에 올라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김장호 집사님이 여기 지지난 주에 홍수 질 때 여기 와 보니까 천둥치는 소리가 계속 나더랍니다. 집채만 한 바위가 나무토막처럼 물결을 타고 계속 굴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큰 돌이 물속에서 돌멩이끼리 부딪히는 것입니다. 천둥치는 소리가 나는 거죠. 집채만 한 바위가 물에 나무토막처럼 떠서 날아가면서 막 두들기면서 계속 흘러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거는 여러분들이 봤으니까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하수입니다. ‘나할에탄’ ‘나할’은 가끔 물이 마르기도 하는 골짜기를 뜻하는데, ‘에탄’은 항상 물이 흐르는 골짜기 입니다. 그러니까 폭은 있지만 깊이를 끝도 알 수 없어서 강력하게 격류로 흘러오는 모양, 그래서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가 비교적 청정지역입니다. 그런데도 보면 처음에 여기에 기도원을 지을 때보다는 많이 오염되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지난번에 와서 보니까 돌에 더러운 이끼 같은 것들이 많이 꼈습니다. 김종렬 집사님은 수석을 하나 좋은 걸 딱 골라놓고 갔는데 와보니까 어디 갔는지 없어졌습니다.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 강력한 물이 내려오면서 다 계곡을 쓸어버린 것입니다. 물이 이리로 가야 할 텐데 길을 안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로도 파괴하고 산도 부수면서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부흥입니다. 너희가 정의를 그렇게 드러내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의는 의로운 삶입니다. ‘째라카’ 내면의 의로움뿐만 아니라 외면으로 드러나는 의입니다. 그걸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살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자신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모든 걸 덮을 수 있습니까? 덮는 게 아니라 세상의 사상이 복음을 덮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인 십자가를 덮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는 그 모든 방법들을 세상에서 배우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법의 물이 세상을 뒤덮어서 하나님 밖에는 드러내주는 이가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사상이, 세상의 사고와 세상의 모든 제도와 세상의 모든 방법들과 인간의 지혜가 거룩한 복음과 역사하여야 할 하나님의 진리를 뒤덮고 있습니다. 반짝이는 사람의 지혜가 거룩한 하나님의 진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그런 시대 속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상황을 반전시킬 것이며 우리가 매일 퍼다 붓는 그 물을 가지고 언제 그 모든 사상이 물에 잠겨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되어버려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신 주 여호와 하나님 되심만을 인정하는 지식 말고는 아무것도 세상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날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을 꿈꾸기 위해서는 그날을 그리워하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단 입니다. 난 많이 만났습니다. 부흥을 이야기하고 청교도를 이야기하면 입에서 침이 튀었습니다. 마지막에 일어나면서 마음속으로 ‘그 삶에 부흥이 꽤나 오겠다.’ 청교도들을 그리워하면 뭘 합니까? 자기가 청교도처럼 안 사는데. 청교도와 부흥에 대한 모든 사상이 요긴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목마른 사람들, 그렇게 성경적인 신앙을 갖고 싶어서 그리워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보배입니다. 나는 고통스러운 날이 있다가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이 작은 손가락으로 내 영혼을 건드리고 지나가셨는데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데, 하나님이 부흥의 때에 사람들을 덮고 지나가실 때 그들은 정말 거의 성자와 같은 사람들이 된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는 이 복음 사역을 보십시오. 교회는 난감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사조는 더 강력합니다. 도저히 이제는 우리가 얘기하는 복음의 목소리는 실낱같아지고 세상이 이야기하는 사상과 철학들은 강력한 마이크를 사용해서 전파되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밖에는 기다릴 수 없는 것이지요. 적군이 한 둘 씩 넘어오면 우리가 어떻게 총이라도 쏴 보고 돌이라도 던져서, 여자들은 뜨거운 물이라도 집어던져서 한번 이겨보겠는데, 새카맣게 몰려오면 포기하고 총 놓고 주여! 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때가 그러한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면서 그 나라의 도래를 꿈꾸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교회 속에서 조그만 미움, 용납하지 못하는 쥐꼬리만 한 문제들을 가지고 옹졸해져가지고 기도도 막히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부흥 안온다고. 내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변하기 전엔 안 옵니다. 그 푼돈에 지나지 않는 물질들, 그것 붙들고 하나님 앞에 인색하게 사는 사람들,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죄악 속에 거하는 잠시의 낙을 위해서 그 삶을 끊어버리지 못하는 결단 없는 견고함이 없는 인생들, 그런 사람들을 통해 부흥 안와요. 변화된 후에 온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해 지체되고 있다는 이상한 논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몰라요.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을 진정으로 사모한다면 ‘살점을 깎고 뼈를 깎아서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친 후에 주와 온전히 사귀겠네’ 그 각오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에까지 나아가려고 하지 않아요. 부흥을 말하면서 그날을 꿈꾸면서 감격해하고 그리고 그 사상을 꿈꾸는 데는 비용이 안 들습니다. 그러나 그런 거룩한 하나님의 공법이 물같이 이 세상에 충만하길 그리워하면서 그 날의 도래를 꿈꾸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그 날을 위해서 기도하기에 합당하기에 살아가는 데에는 살을 깎고 뼈를 깎는 아픔이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교회 안에서 용납하지 못하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는 나쁜 생각과 분명히 신앙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 태만한 신앙의 태도를 부여잡고 살아가는 것은 데릴라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부흥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요부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하나님의 신령한 부흥이 온다면, 제일 먼저 부흥은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그 삼손과 같은 사람을 심판의 제물로 삼으실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선지자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정의가 물같이, 공법이 하수같이 흐르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 이런 모습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세상을 개혁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슬로건으로 내거는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물같이’ 그런 것과는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 세상이 가로막을 수 없는 하수가 흐르고 세상의 모든 잡다한 사상들이 다 묻혀 버리는 공법의 물이 우리를 뒤덮는 그런 부흥이 일어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에 창조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죄악을 도말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살을 깎고 뼈를 깎으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하나님의 거룩한 공법을 따라 살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여러분 속에 기꺼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오늘 이것을 말하기 전에 그는 왜 이것을 말했습니까? 선지자는 울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는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잘못됐다고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죄인의 마음으로 우는 사람은 제사장 아닙니까? 선지자는 증거하고 꼿꼿이 불굴의 확신과 무너질 수 없는 신념을 가지고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레와 같이, 천둥과 같이, 번개와 같이 그들의 완악한 심령에 낙뢰가 떨어질 그 날을 기대하면서 부르짖고 외쳐야 될 강한 사람. 예레미야 선지자를 선지자로 부르시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너를 놋 성벽이 되게 하리라. 내가 너를 놋 쇠기둥이 되게 하리라.” 누가 두들겨서 놋 성벽을 부술 수 있겠으며, 누가 두들겨서 쇳덩어리로 만든 그 기둥을 꺾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너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겠다.’ 이게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5장에서 이 선지자는 예언을 하다 말고 한없이 우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는 내가 지은 내 노래 너희를 위하여 부르는 나의 슬픈 노래라는 것입니다. 눈물로 작곡을 했고, 통곡으로 작사를 해서 피로 악보를 그리고 땀으로 가사를 적어 넣은 이 애가라!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이었지만,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산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목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밖에는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이 백성들은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려보내야 할 백성들인데······” 선지자는 한탄하듯이 이 말씀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절망합니다. 그리고 저도 하나님의 교회를 보면서 낙담할 때가 많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도 대견해 하지 말고 낙담할 필요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으시는 거룩한 부흥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반적으로 베푸셨던 은혜를 초월하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은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이 세상의 바위와 같은 사상, 그리고 바위와 같은 인간의 고집, 그리고 집채만 한 바위와 같이 버티고 앉아서 너무나 오랜 세월 어떤 일이 있어도 도무지 변하지 않았던 삶, 그 모든 사상, 인간의 사고와 그리고 더러운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강바닥에서 드러내고 있는 인간의 그 더러운 가치관과 인간의 모든 사고들을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덮고 격류와 같이 흘러가서 그 모든 집채와 같은 바위들을 부숴 버리고 옮겨 버릴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이야말로 우리들이 꿈꾸고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저는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전하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던 것 같이 오늘날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선 자는 나를 따르라. 마음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이 이 땅에 진정으로 나타나서 그 부흥의 물결이 우리를 삼키고, 오만한 이 세상을 삼키고, 하나님의 교회에 물같이 충만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그리워하는 백성들은 내편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혼탁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가 사라지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교회 안에 지옥 갈 백성들이 들끓는 이 시대에서 진리의 편에 서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편에 서서 진리를 위해서 부흥의 그날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부여잡고 원수가 우리를 멸하기 위하여 달려온다 할지라도 앞서가신 그리스도 예수, 부흥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걸어갈 사람들이 모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가 어두울 때 새벽이 가깝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기다립니다. 남들이 노래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택함을 받은 소수의 무리여! 우리는 울부짖자. 춤추고 노래할 때 우리는 금식하고 주리며 세상에서 멸시하는 자처럼 살자. 잠시 후 우리가 꿈꾸는 그날이 이르리니 그의 손으로 조국의 교회의 치욕을 걷어버리시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 우시고 그날을 그리워하며 흘렸던 우리의 눈의 눈물을 씻기시고 그날의 도래를 가로막는 우리 자신을 멸하기 위해서 지불했던 그 가슴 아프고 살점을 떼어내는 것과 같은 그 고통스런 날들의 수많은 갈등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희생을 각오했던 위대한 결단들을 하나님이 우리를 보상해 주시리라. 우리는 그날의 도래를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