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법이 있습니까?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잠4:3-4)
이 글을 쓴 사람은 솔로몬 임금입니다. 솔로몬 임금이 자기의 아들들에게 지혜로운 말을 들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뜸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 이미 나와 있는데 그 성경을 가르쳐 주면 되지 무슨 다른 말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성경에 보면 이것은 자기가 만든 방법이 아니라 그러니까 아마도 이 사람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방식대로 자기의 자녀들에게 지금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앙교육이 대를 이어 내려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르치면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내 집안에 자식이 있는데 만약에 성경을 가르쳐 주는 사설 학원이 있다고 칩시다. 그래서 우리가 수학 가르치고 국어 가르치고 그 다음에 발레도 가르치고 피아도도 가르치고 하는 것처럼 돈을 줘서 성경을 잘 가르치는 학원에 보내서 그 아이가 반 전체에서 1등을 하면 새 사람이 됩니까? 그렇게 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배운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도구입니다. 그렇게해서 나는 우리 아이의 교육을 끝냈다 그럴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얼마 전에도 글로 보내 왔는데 열린교회는 아이들의 교육을 철처히 잘한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고 좋은 말을 썼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만에 하나라도 우리 교육은 아이들에게 신경쓰고 열심히 교육을 시켜 그래서 성경을 늘 가르치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아줘 아! 다행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보조적인 것입니다.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교육의 올바른 신앙교육의 체계는 일차적으로 가정에 위탁된 사명입니다. 그렇게 하고 여러분들이 자녀를 교회에서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 준다는 것 때문에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에서 부담감이 덜하다고 느낀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요? 사람이 교육의 체계를 잘 세우고 열심히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모두 변화되는 것이냐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솔직히 이야기 해서 우리교회가 예배당이 좀 갑갑해서 그렇지 사실은 정말 여러분들이 무엇에 방해 받지 않고 예배드릴 수 있도록 사실 섬기는 분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개척하고 십몇년 동안은 처음 교회에 오신 분들은 한동안 일도 안 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예배만 참석하면서 은혜 받으라고 최소한 6개월 내지 일년동안 일도 안 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심지어 예배 드리다 눈물 흘리면 그 눈물 닦으라고 휴지까지 준비하고 기다리는 교회가 얼마나 됩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 모든 것들이 갖추어지고 목회자가 설교해서 올라오면 모든 성도들이 은혜를 받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생애에 주일날 가장 많이 기도하고 설교한 적이 한번 있었습니다. 그 한편의 설교를 위해서 40시간을 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가서 정말 성령의 역사가 일어 났는데 그 시간에 조는 사람이 있고 다른 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계적으로 어떤 제도를 세워놓고 방법을 강구하면 그것이 마치 우체통에 편지가 들어 가듯이 자동적으로 사람속에 신앙이 들어 간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좋은 학원 보내는 마음으로 우르를 아이들 데리고 오면 될 것 아닙니까? 사실 어린이 회심 집회를 한것이 여러해 되었습니다. 첫해를 하고 나서 정말 좋았습니다. 한 마음이 되어서 부모들이 기도하고 아이들이 회심의 열매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무엇인가 하면 주일학교를 상당부분 저의 성격도 그렇지만 일단 맡겼으면 그 교역자를 믿고 맡기는데 자꾸 이렇게 목회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 남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가 보니까 아이들이 정말 회심하지 않은 뚜렷한 흔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파서 이런식으로 맡겨 나두면 안되겠구나 해서 전부 다 아이들의 회심여부를 100% 정확하지 않지만 한번 살펴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고가 들어오는데 초등부에서 아이들 회심한 비율이 20%라는 보고가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이 너무 아파서 도대체 그대들은 무엇을 했느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렇게 아이들을 피상적으로 교육시키고... 그래서 제가 이것은 너무 무책임한 것이다 그래서 담임목사와 함께하는 회심집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해에 그 소문이 인터넷을 통헤 금방 퍼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온갖 군데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회심 집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괜챦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소문이 더 퍼져서 우르를 데리고 들어오는데 사람들은 많이 모였는데 외부에서 몇백명이 왔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은 회심이 무엇인지 아는지 몰라도 아이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온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그해 집회를 망쳤습니다. 그 아이들이 와서 예배 분위기를 다 망쳐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이것은 아니다 하고 오지 말아라 딱 잘라서 이야기 하고 정말 그렇게 참석하고 싶으면 인터넷으로 생중계 할테니까 너희 집에서 틀어 놓아 아이들 모아서 예배 드려라 라고 오죽했으면 그랬습니다. 그해에는 정말 엉망이었습니다. 그리고 데리고 온 사람들도 보면 정말 간절하게 아이들의 회심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해서 온 아이들은 안 그렇습니다. 소수이지만... 우리 아이들하고 똑같이 무릎 꿇고 앉아서 경청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나머지는 데리고 온 사람들도 별로 준비가 없고 그냥 한번 가보자 하는 그런 마음으로... 아이가 회심해서 나쁠것이 무엇이 있나 한번 가보자 이렇게 해서 온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리 했습니다. 너희 교회에 가서 목사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설교해 달라고 해라. 가라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마라. 그렇게 하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일각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가 하면 아이들이 아무리 교회에서 회심집회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기도회를 하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부모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이야기가 기도회에 부모가 나온 아이들만 와서 회심집회를 합시다. 그것은 또 너무 야박하다. 부모가 관심이 없으면 교회라도 관심을 가져서 회심집회를 하게 하고 그래서 부모를 일깨우고 하지 않아야 되냐 그렇게 어쨎든 타일러서 마무리가 되었는데 그렇게 실제적을 영적인 일들을 준비하는 마음에 있는 갈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당부하는데 물론 우리들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이 노인이 되어서 사라지고 난 다음에 열린교회를 더 많이 기대를 해 봅니다. 그때에는 지금보다 더 캄캄하고 어려운 세대가 되겠지만 아마 우리 아이들이 잘 회심을 하고 신앙적으로 아름답게 자란다면 그러면 그때에는 더 빛나는 성도들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한번 기대를 가져 보고 다음 세대의 열린교회에 대해서 더 많은 소망을 마음속에 품습니다.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우리 아이의 교육은 교회에서 알아서 해 주는구나 나는 부담이 덜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의 아이가 그런 교회의 교육속에서 변화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자녀에 대한 회심과 신앙교육에 대한 책임은 경감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가슴에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주님을 잘 믿고 선한 이웃으로 살아 가면서 한 교회를 섬기며 위로는 부모님을 잘 공경하고 옆으로는 아내와 남편이 서로 연합을 이루고 아래로는 자신들의 자녀에 대해서 예수를 믿게 만들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주면 그것으로서 여러분들이 한 인간으로서의 의무는 완수한 것입니다. 훌륭하게 완수한 것입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저는 이시간을 통해서 그런분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복음을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했더니 어머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입니다. 물론 그동안도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썻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운명하는 이때에라도 교회에서 목회자를 불러다가 예수님을 영접시켜서 구원받게 하고자 하는 그 열정은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가족들의 구원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영접을 하고 구원을 받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 정직하게 말해서 만약에 자신의 부모가 그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만약에 운명을 했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말하기 싫죠? 우리가 전도할때는 거침없이 말해도 부모에 대해서는 그런 이야기 하기 싫죠? 못하죠?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그래서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이 있다고 믿지만 사실 남아 있는 날들은 우리의 날들이 아니고 죽음은 거짓말처럼 다가 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부모들과 가족들에 대해서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부담을 깊이 느끼면서 그들의 회심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가족들에 대해서 눈길을 돌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자녀에 대해서 다시 돌아 가자면 그럼 가정에서의 일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이제 여러분들의 자녀는 약속의 가정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면 약속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자녀들은 주님을 믿을 때 결국은 약속의 가정에서 태어 났어도 회심하고 주님을 믿어야 되겠는데 그러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아이들은 자라면서 늘 성경에 대해서 듣습니다. 그리고 회심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늘 듣고 교회에 다닙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커다란 유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유익이 아니라 불리한 점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밖에 나가 복음을 전해 보면 꼬치꼬치 따지면서 끝까지 안 믿으려고 뺸질거리는 사람을 보면 대게 교회에 다녀서 성경지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불량한 전도대상자들입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들은 놀랍게 어느 한 순간에 진리가 다가 옵니다. 저도 1992년도의 경험이었는데 그때 어느 교회에서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자매 한명이 교회에 왔습니다. 그때 서너명 모이던 청년부 였는데 나중에 한 60명정도 모였는데 한 40명 모일 때인데 그 자매가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독실한 자매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친구와 만나기로 해서 교회에 억지로 끌려 왔는데 평생 절에 다니던 불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기도문을 두 번째 설교하고 있었을 때인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것을 설교하고 있을 때인데 앉아서 가까운 거리인데 설교 시작한지 10분 지난 다음부터 한 50분 정도 설교 했는데 계속 화장이 다 지워지도록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날 회심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태어나서 처음 온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계속 다니던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것들이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나는 안다 올바르게 알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익숙해져서 신앙의 깊은 정수를 못 알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부요함 때문에 오히려 말씀을 거절하고 그 말씀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런것들이 불리한 점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믿는 집안의 아이들의 회심은 그런식으로 어느 한순간에 모두 모아 놓고 강력하게 집회를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도 꼭 필요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과 함께 반드시 병행하여야 할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이들을 끊임없이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자극이 필요 합니다. 그 가장 중요한 자극이 부모의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솔로몬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내게 가르치셨다. 무엇이라고 가르치셨습니까? 성경을 똑바로 보십시요. 4절을 보십시요.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무엇이라고 가르쳤습니까?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켜라 그러면 살리라. 아버지가 죽여 버린다는 그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참 사람답게 산다는 것입니다. 무슨뜻인지 이해가 가시죠? 그런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인데 죽었다고 말하는때가 있습니다. 사대교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했죠?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자노라. 이것은 그 반대입니다. 여기 성경 구절을 보면서 어떤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까? 두글자가 무엇입니까? 읽어 보십시요. 4절을 보세요.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아니 젊쟎게 시편 119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나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가르쳤습니까?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마음에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보화처럼 꼭 싸서 마음에 간직해서 마음에 간직한 말씀이 그 마음에 온 마음과 삶에 중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무엇입니까? 내 말이다. 누구의 말? 아버지 다윗의 말.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명령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도 있는데 그것을 지켜라 그리하면 네가 참으로 살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까? 애야! 할아버지 말 들어라. 할아버지 명령을 잘 지켜라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2절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누구의 법? 솔로몬의 법입니다. 내 법에서 떠나지 말거라. 여기에 이렇게 일인칭 소유격이 붙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말씀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계시인데 이것이 체득되어서 체화 된 것입니다. 자기자신속에... 똑같은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합니다. 무엇이라 합니까? 내 복음에 이르기를 복음이 어떻게 자기것일 수 있습니까? 예수의 복음이지 그런데 자기 체화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들이 되거라. 아주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렇게 믿거라 저렇게 믿거라 일러 주는 것은 오디오입니다. 엄마 아빠가 참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은 3D입니다.
지난번에 LA에 집회를 갔는데 오후에 어디 관광을 시켜 주겠다고 하는데 나는 필요 없다고 숙소에서 책이나 보고 기도하고 쉬겠다고 그랬는데 신문을 보다가 갑자기 가보고 싶어서 전화를 해서 내가 갈데가 있으니 나를 좀 데려가라 해서 갔는데 무엇인가 하면 화면이 5층 정도 높이가 되는 스크린이 있는 아이맥스 영화관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굉장했습니다. 바다속을 찍었는데 그날이 부활절 휴가기간이었습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새카맣게 모여서 그 영화관을 가득 메운 것입니다. 어른들은 얼마 없습니다. 내 앞에 앉은 아이들이 바다속을 비취면서 해파리 물고기들이 지나 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안경을 쓰고 손을 뻗어 잡는다고... 그것이 3D입니다. 얼마나 실감이 나면 그것을 잡아 보려고 하는 것입니까? 제가 하나 예고를 하는데 앞으로는 4D가 아니라 5D, 6D 계속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고기가 지나가면 손을 뻗어서 만지면 고기가 물컹물컹 잡히는 그런 영화가 나올 것입니다. 두고 보세요 나오나 안 나오나... 그것이 말하자면 아이들의 마음속에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면 부모인 당신들의 말과 생활의 원칙이 자녀들에게 법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요. 법도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폭력과 금권, 권력을 가지고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길 수 없습니다. 법을 그렇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어기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이것이것 안하면 용돈 안줘 이것이것 안하면 등록금 네가 마련해 이것이것 안하면 너 뭐뭐 안 사줘! 권력을 휘둘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들에게 마음 깊은 동의를 얻어 낼 수 있겠습니까? 또 부모가 자신이 옳다고 정당하게 내 세울 수 있는 최종적인 근거가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부모가 이러이러한 것을 좋아 해도 자기가 낳은 아이라고 자기가 생각하는 그 취향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폭력입니다. 그런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한 우리 스스로 아이들에게 자율을 주고 접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용기 있는 부모입니다. 그대신 항구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부모가 다 체득하고 소화해서 바로 모세의 시대가 아니라 바로 솔로몬이 살고 있는 그 시대의 다른 환경속에서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법을 세운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성경의 진리를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은 자기의 자식에게 내 법을 지키라고 말할 수 있었고 내 명령을 지키라고 분부할 수 있었고 그것을 지켜서 다 체득한 이 사람은 아들에게 할아버지 말대로 해라가 아니라 그것은 배울때는 네 할아버지의 법이었지만 지금 내 마음에 있을 때는 내 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가르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남긴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자식만 있고 손자는 없다. 그래서 모두가 그분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야 합니다. 그분이 직접 태어나게 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아버지가 관계하는 것은 그 아버지를 통해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의 신앙의 법이 가정의 제도를 통해 자녀들에게 물려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한가지만 더 이야기 하고 이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잘 살아야 되겠구나! 맞습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그 길로 가야 되겠다고 하는 의지의 일관성이 없는 부모들은 너무 야박하지만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허황된 꿈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 하겠습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그 분과의 관계속에서 온전을 추구해서 그 분의 마음에 합당한 자녀로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부모가 자기 자식이 정말 복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은 허황된 꿈입니다. 엊그제 재벌가의 삼성의 3세가, 돌아가신 이병철 회장의 친 손주라고 합니다. 46살이나 된 사람이 결국은 독신으로 그렇게 혼자서 살고, 가족이 옛날에는 있었겠죠, 얼굴도 잘 생겼더라구요. 할아버지 쏙 뺏습니다. 그런데 투신자살을 해서 쿵하고 떨어져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빈소도 없습니다. 아무도 문상을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할아버지가 살았어도 저렇게 되었을까?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경쟁에서 이겨서 커다란 재산을 얻고 하는 그것이 복된 삶과 직결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몇 년전에는 XXX의 딸이 자살한 것으로 밝혀 졌습니다. 그 어린 처녀가 남겨 놓은 유산이 이천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살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복된 삶의 기준을 어디에 놓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고 본다면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앞에 살지 않으려는 사람은 사실 자녀를 위해 해줄 것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이 좋은 신앙생활을 하면 여러분들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안에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렇게 보면 교역자들이나 신앙이 경건한 우리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 권사님들 집안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어제 토요일도 보니까 토요일날 아이이들이 얼마나 놀기 좋아 합니까? 그런데 조그만 아이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가서 어디 가냐고 물으니 기도회 하러 올라가는 중등부 학생들이랍니다. 큰 아이들도 있고 작은 아이들도 있고 섞여서 올라 갔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너희들은 참 복되다 했습니다. 부모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너희들에게 그늘이 되어서 너희들을 사랑하는 선생님 이런 분들이 너희들을 에워싸고 너희의 영혼들을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니 너희들은 얼마나 복될까? 그렇게 복된 아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그냥 버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아이들에게 이것이 내 법이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그런데 부모가 그렇게 살아도 아이들이 모두 그 부모의 태도에 즉시 감동을 받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받아 들일 수 있는 변화가 이 아이에게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찬란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있어도 우리가 눈을 떠야지만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아이들에게 부모가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옳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모정의 변화가 영혼안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중생이고 회심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녀들의 회심과 중생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