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아끼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녹취자: 허혜숙, 구미영
오늘 사도는 사랑하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많은 권면을 하고 특별히 지혜 있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가지고 고민하며 사는지에 대해서 먼저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혜 있는 자같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지혜 없는 자같이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눈에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많은 삶이 있는데 지혜 없는 삶을 사는 것은 지혜 있는 삶을 사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그냥 떠밀리듯이 살면 되는 것입니다. 슬기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길은 슬기롭게 살아가는 길보다 더 간단하고 쉽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저 내키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살아가면 슬기 없는 삶이죠.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특별히 지혜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사람들은 항상 남이 하지 않은 고민을 했습니다. 지혜로운 종들과 미련한 종들의 비유를 여러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혜 있는 종들은 언제나 지혜 없는 종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합니다. 지혜 없는 자들이 먹고 마시고 놀고 시간을 보낼 때 그들은 생각을 합니다. 남들에게는 없는 걱정을 합니다. 어제도 안 오고 그저께도 안 오는데 오늘 오시면 어떡하나 근심을 합니다. 이것이 지혜 있는 사람의 비결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렇게 지혜 없는 자들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에게는 없는 특별한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먹고 입을 것과 그리고 많은 생업들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습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에 대한 마음에도 생업에 대한 염려와 자기의 사업에 대한 염려와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정생활과 일신상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행할 것을 주의하여 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염려와 우리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러나 지혜 있는 자는 이 인생이 하나님 앞에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자기의 방식대로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 무지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짐승과 같은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자세히 주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 앞에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길은 주의력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을 많이 하냐? 대충 살다 죽으면 됐지, 그냥 살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따지는 것이 많냐?’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삶 속에서는 거룩하고 좋은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라고 성경은 오늘 못 박고 있습니다. ‘때를 알라, 때가 악 하니라’ 그 악하다고 하는 때를 주의 깊게 살펴서 그 때를 너희들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가 뭡니까? 날들입니다. 날들이 뭡니까? 옛날 시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자기가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이 시대 안에서 ale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서기 3천 년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도 이 시대 안에서 믿고, 우리가 구원해야 할 사람들도 이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시대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대에서 고민하고 이 시대에서 아파하며 이 시대의 물을 먹고 이 시대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부딪치고 이 시대 사람들과 함께 다투며 이 시대에 속에 역사하는 악한 영들과 싸우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니는 것도 이 시대의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시대, 각 때라고 하는 것은 각 교회와 각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분깃입니다. 어떤 때는 교회가 놀라운 영광으로 충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큰 부흥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영광스러운 복음의 역사, 믿음의 승리가 이루어지던 축복 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태어났던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었겠죠. 그러나 회개하고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의 때와 같은 때에 태어나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괴악한 때에 태어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불순종하는 백성들이 온 땅에 가득해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런 때에 우리들처럼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영광의 때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드러났고 패역한 때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맡기신 사명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때에 태어났는가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가장 바보 같은 지식, 옛 시대를 회고하면서 현 시대를 한탄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가 이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시대는 이미 왔고, 그리고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시대는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때를 한탄만 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은 어차피 그렇게 흘러가는 세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그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빛으로 나타나야 할 우리의 사명이 더욱 큽니다. 시대가 악하면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기로 그 다른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모두들 믿음을 배반하고 신앙을 떠나는 시대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순교의 결단이 필요한 때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농담처럼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되는 시대, 장난하듯이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는 시대, 우리의 생각대로 멋대로 살아서는 변화되지 않은 이 시대에 우리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합니다.
진실로 시대가 악하고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편에 선 자들은 어디서든지 샛별같이 빛날 것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린 모든 시대마다 믿음의 위인들이 일어섰습니다. 모든 시대에 덕을 힘입어서 믿음의 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캄캄한 시대였습니다.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없는 때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역사의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살았던 그들의 선구자적인 믿음의 삶이 하나님 앞에 샛별처럼 빛났습니다.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칭찬을 남기신 것처럼 믿음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어둠의 세상 속에서 믿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살아가는 외로운 믿음의 사람들이 귀감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왔을 때 누가 그의 말을 들을까 생각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그 시대에 환영 받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제도로부터 보냄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어느 날 선광처럼 나타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설교는 단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뼈 사이에서 우러나와서 심장을 뚫고 들어가서 그 메시지에 피를 발리우고 살을 찢고 튀어나와서 진흙을 묻혔습니다. 입속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그 시대를 바라보면서 통곡하는 눈물로 발리워 졌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광야에서 선포되었을 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시대에 핑계를 대다가 일평생을 지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이 되고 싶습니까? ‘요즘 세상에 누가 그래?’ 어떻습니까? 마지막, 그렇게 요즘 세상, 요즘에, 요즘 교회가, 그것 쫓아가고 나서 마지막에 요즘 사람들과 함께 지옥의 아랫목에 앉아 있고 싶습니까? 어제 아침에도 아침에 잠을 깨어서 기도원의 풀밭을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정말 진리만을 시대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외치는 사람입니까?’ 모두 안 믿어도 나는 말하다가 죽으리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것이 참된 것이라면 선포하리라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때가 묻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변하지 않은 그 수많은 영혼들과 싸우면서 내 마음속에서 깊은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또 타협의 그 뿌리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올바르지 않는 것입니까?
시대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요즘 시대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요즘 시대 사람들과 함께 손잡고 지옥의 불길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은 요즘 시대 요즘 이야기 많이 하십시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저 강 건너 편에서 섬겼던 이방신이냐, 아니면 이 가나안으로 들어와 살게 된 신이냐, 아무개 신이든지 무슨 신이든지 너희는 섬길 자를 택하라, 세상이 그런 세상이 되었다’그러나 나와 내 집은 지금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 시대 속에 살면서도 그 시대가 간절했습니다. 그 시대 속에서 외로움을 받기 싫어하고 그 시대 속에서 거절당함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언제든지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고 어두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그 시대에서 이방인이었습니다. 환영하지 않은 삶을 가지고 환영하지 않던 생각을 가지고 동의해 질 수 없는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시대 여러분 많이 결정하십시오. 시대가 어떠하든지 그것은 시대이다,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믿고 살련다.
(찬양)
인간 풍조는 나날이 갈리워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 같으나
정녕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느끼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의 얼굴을 뵈오리다
시대를 따라갔던 많은 사람들은 시대와 함께 망했습니다. 그러나 한 시대를 거슬러 살던 사람들은 그 속에서 주님의 위로를 보았습니다. 주님이 힘 주셨습니다. 주님이 그를 새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문제가 많은 이 한 민족의 역사에, 이 동강난 분단의 역사에, 그리고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일어나고 있는 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형식적이고 나태한 신앙이 환영받고 있는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것을 하나님 앞에 한쪽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참 불행한 일이나 그러나 반대의 측면에서 보면 나 같은 사람 사용하시려고, 그래서 어두움의 역사에 횃불을 치켜들게 하시려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자가 거의 없는 이 어려운 시대에 주님을 믿으며 산다고 하는 그 장엄한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 사명이 있는 것이지 문제가 없는 곳에 사명이 없습니다. 원래 교회는 말이 많은 곳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을 잘못 건드리면 무섭습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그렇게 가시 박힌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니까 손들고 주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 가시를 세상에서 누가 환영 해 줍니까? 오직 주님만이 널 돌보신다, 주님만이 너를 보호하신다, 그러니까 그 말이 진짜인줄 믿고 손들고 하나님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안 그런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 부딪치다가 상하기도 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다가 안 되면 목회자 욕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뭐 그런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날 아프게 한다고 아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눈물은 안 흘릴 것입니다. 뭐 눈물 흘릴 데가 없어서 그런 일로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인데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서 사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이 잘 변합니까? 저희 재정 집사님이 돈이 없어서 목회자들이 많이들 운다고 하는데 저는 한 번도 그런 적도 없습니다. 제가 눈물 흘리는 이유는 단 하나, 여러분들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평생 제 기도제목입니다. 다 변하고 모두 완전해서 모두 불꽃처럼 산다면 목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소금창고이고 조명기구 상회 전시장이지 그곳이 어디 교회겠습니까? 그런데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해 나가야 할 이유는 한 사람이 불이 붙으면 꺼진 사람이 또 한 사람 들어오고 한 사람이 길 찾으면 목자 잃은 사람이 또 들어옵니다. 한 사람이 치료받고 나면 저 쪽에서 뒷다리 까진 사람이 또 하나 들어옵니다. 한 사람 가시 녹여놓으면 가시 두 개 가진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아직은 제가 여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라고 하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할렐루야!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돌아가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신앙도 좋고 다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딱 하나 속을 썩이는 막내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게 개고기였습니다. 교회는 오다가다 한 번씩 나오는데 가끔 가다가 오밤중에 형님 집에 와서 돈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그것도 술을 먹고 와서. 돈이 없다고 하면 골목에 다니면서 교인들 집에 유리창을 다 부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만 골목을 헤집고 지나가면 ‘그 개고기가 목사님 동생이라지?’ 소문이 교회에 파다하게 퍼지는 것입니다. 토요일 날 목사님이 교회에서 철야를 하면서 ‘주님, 겸손히 주를...’ 어디서 들었는지 술 먹고 돌아다니면서 동네사람들이 약하면 ‘까불지 마, 내가 우리 형을 겸손하게 하는 가시야 인마,’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그러면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는 사명이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그 곳에 여러분들을 두신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목사가 마음에 안 들어 보이면 그것은 사명입니다. ‘주여 우리 목사님이 하나님 마음에 들고 내 마음에 들도록 바꿔 주시옵소서’ 구역 식구들이 교회에 잘 나오면 무슨 사명이 있겠습니까? 안 나오니까 자꾸 끌고 나오려니까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삶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각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시대가 어려우니까 우리에게 빛들로 나타나야 할 사명이 더욱 절실한 것입니다. 때가 악하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야 할 그런 도전들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한 때가 도대체 무엇인가? 문제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악 하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악하다고 하는 이 관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대 자체는 하나의 커다란 힘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면 물이 졸졸 도랑을 흘러갈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르지 말라고 뭘 막아놓으면 흐르지 않습니다. 물이 조금씩 흐를 때는 손으로도 막을 수가 있고, 발로 막을 수 있고 몸으로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그 경향들이 행동과 삶으로 나타나서 풍습을 형성하고 그 거대한 풍습으로 물밀듯이 미는 것입니다. 누가 거기를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철원에서 흘러오는 물을 보았습니까? 다리를 폭격 맞은 것처럼 부러뜨려 놓는 그 놀라운 힘을 누가 감당할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중장비를 막 뒤집어엎어 버리는 그 물의 힘을 누가 막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바로 때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라는 것이 바로 악한 때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도 사도는 말하기를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너희는 빛들로 나타나고’어그러지고 이 시대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세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신앙의 깊음이 세상의 흐름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의 악을 행하는 깊음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의 풍습이 신앙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사조와 사상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이 거대한 탕녀와 같은 세상의 물결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상식을 떠나서 하나님을 버리고 살아가려고 하는 이 시대를 한 번 보라는 것입니다.
어디 조금 싼 교회 터가 있나 하고 동네방네 돌아다녀보았는데, 돈은 엄청 달라 하는데 우리가 가진 것 세 배는 가져야지만 엉덩이 붙일만한 장소를 얻어낼까 그러는데도 뻔 하게 비어있어도 ‘뭐하시려고 그럽니까?’ ‘교회하려고 합니다.’ 말도 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 주고 빌리자고 하는데 말도 안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집사들도 그럽니다. 왜 그럽니까? 이것이 바로 악한 자들의 악한 생각과 행실과 악한 사상이 주류를 이루며 흘러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악한 때는 이 세상의 흐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흐름이 강하게 흘러가는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빠져나가면 속히 그 물에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몸부림을 쳐보는데 몸부림을 쳐봐야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물이 너무나 엄청나게 세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물이 무릎이나 허리를 차야지만 어떻게 좀 빨리 움직이거나 더디 움직이면서도 자기 원하는 방향으로 가보는데 그 물이 한길 두 길을 넘고 강수와 같이 밀려오면 교회에서 배운 수영정도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동시에 이런 세상의 흐름들을 바꾸어 놓아야 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뿐만 아니라 이러한 악한 때에는 교회 안에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안에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기를 원하면 세상과 더불어서 싸우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고 이제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신앙생활의 풍조, 이 교계의 풍조, 이 경박한 교회 생활의 풍조와 더불어서 적과 같이 여기면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쟁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오늘날의 풍조를 보십시오. 이 풍조를 좇아가면 나중에 지옥에서 동창회 하고 말 그런 상황입니다. 회심이 있습니까? 거듭남이 있습니까? 진정한 참회가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까? 심령의 부흥이 있습니까? 변화가 있습니까? 죄를 미워하는 결단이 있습니까? 아니면 악으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담대한 용기가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자 하는 정신이 있습니까? 매일매일 모이는 숫자에 만족하면서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성가대의 노래 소리나 들으면서 헌금 몇 푼 내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대체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 길이 좋으면 가십시오. 어느 시대이든지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믿음을 따라서 면류관이 약속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먹고 마시던 시대에 그는 금식했습니다. 춤추고 노래하던 시대에 그는 기도원에 갔습니다. 역사의 새벽에 그리워했습니다.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나아가서 교회 속에 흐르고 있는 이 풍조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라고 하는 것이 세상의 풍조에 밀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에서 일주일을 살다가 교회에 왔습니까? 저처럼 일주일 동안 산에서 살다가 교회에 왔습니까? 그러면 좀 더 나을 것입니다. 산 속에서는 죄를 덜 지을 테니까. 그러나 회사가면 이중장부 쓰고, 생업에서는 탈세가 횡횡하고, 공갈치고 사기 쳐야지 먹고 사는 그런 세상에서 살다가 온 것 아닙니까? 여기에 들어오는 순간에 거룩해 지냐는 말입니다. 무슨 투시기를 통과한 것처럼 그렇게 거룩해져서 들어와 가지고 여기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말입니다. 그것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한 번 모이고 두 번, 세 번, 네 번, 50명이 100명 100명이 150명, 150명이 200되면 또 하나의 기독교의 탈을 쓴 작은 세상에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형식은 기독교 적인데 속에 흐르는 것은 반 신앙적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자고 나가는데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뛰어나가면 세상이 ‘어이구 동생 어서 오게’하고 끌어안고 입맞춤하기 바쁩니다. 오래간만에 맞는 내연의 관계 남녀가 끌어안고 말하자면 해후하듯이 그런 불륜의 관계를 유지하기 쉬운 것이 교회와 세상의 속성입니다. 안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고통처럼 느껴지는 사람으로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패역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깊은 괴로움이 되게끔 사람을 바꿔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거기를 떠나서 도망가는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산 속에서 만나서 중이나 되면 딱 맞는 것입니다. 그럼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살아있는 사람,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즉시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주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즉시 죽을 정신을 가지고 일평생을 사는 사람, 순교가 아니라 순 생이 필요한 시대, 그러니까 그나마도 교회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그런 사람이 만들어 지지만 변화가 안 일어나면 교회도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흥의 역사를 보면 큰 교회들, 교회라고 하는 거대한 집단들이 주님이 큰 영광을 베푸실 때 오히려 거기에 대적하는 것입니다. 뭐가 증명해 줍니까? 예수님 오셨을 때 증명해 줍니다. 기다리던 주님이 오셨는데 가장 극렬하게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거나 될 위험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었던 자리가 그런 자리였다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교회 그 자체가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여러분들이 진정한 생명의 길을 걸어가려면 다른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그것도 생명이 넘치고 말씀에 사무쳐서 걸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명이 다 떠나버리고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거기에서 뭔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힌트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풍조를 거슬러 살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주일날 한 번만 교회에 나와도 세상에서는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주일 지키고 십일조만 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교회 풍조조차도 거스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런 세상을 좇아가는 그런 풍조가 생겨나려고 할 때에 그것을 아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야 합니다. 분노하는 마음이 생겨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경멸하는 감정을 가지고 죽여 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겨나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그건 불신앙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도 떠내려가는 수많은 세상의 사람들 중에 섞였다가 사라지는 존재들입니다.
바닷가에 가보면 참 배울 것이 많습니다. 저는 산보다는 물을 훨씬 좋아합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냄새도 틀리고 바다의 빛깔도 틀립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파도가 일어납니다. 슉! 하고 부딪치면 단번에 물거품이 하얗게 일어납니다. 주먹만 한 거품도 있고 작은 구슬만한 거품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떠오를 때면 흰 이빨처럼 거품이 확 떠오릅니다. 다음 파도가 밀려올 때쯤이면 그 거품들은 다 사라지고 안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품과 같은 존재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교회에 내재하고 있는 이런 풍조를 거스르면서 신앙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많은 하나님 앞에 탁월했던 사람들은 결코 세상의 풍조만 경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안에 흐르고 있는 풍조도 똑같은 마음으로 경계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면서도 믿음의 형제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잘못된 세상적인 풍조를 세상과 똑같은 마음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믿음의 정결함, 믿음의 순결함,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면서 그렇게 보존하는 것입니다. 귀한 것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시대가 악하다고 하는 또 하나의 의미는 교회가 악하다고 하는 의미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는 악령의 역사가 가장 강한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악 뒤에는 악한 자가 있습니다. 악의 풍조 뒤에는 악을 행하는 자가 있고, 악을 행하는 자 뒤에는 유일한 그 악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악령의 역사가 가장 강한 때, 마지막 때에 더욱 강력하게 악의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고 들끓는 그 시대가 바로 이 시대라고 하는 사실 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의를 바라보십시오.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시대는 더더욱 악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합니다. 그러한 악령들의 강력한 역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굳게 하고 그리하여 굳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더 돌같이 굳어지게 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믿는 자들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키려고 하는 이 시대가 바로 교회를 바라보고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쿠오바디스에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을 몇 사람 집어 넣어놓고 며칠 동안 굶주린 사자가 철창 속에서 흥분을 해서 막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왜 그럽니까? 며칠을 굶어서 그럽니다. 기운이 없어 드러누워 있다가 먹이를 창 밖에 본 그 순간 으르렁 거리면서 빨리 문을 열어달라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말한 우는 사자입니다. 문을 열면 사자가 천천히 걸어 나오겠습니까? 아니면 당장 달려 나오겠습니까? 마지막 때에 믿는 자들을 도전하는 악의 세력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노래나 부르고 연애나 즐기고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을 인생의 꿈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악한 자의 도전 앞에 버티기가 힘듭니다. 여러분 주위에 잠자던 사자들이 으르렁 거리면서 깨어나고, 삼킬 자를 찾기 위해서 여러분들 주위를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순간에 그 창살이 하나님이 은혜로 그 마귀들을 붙잡고 계시니까 그나마 우리가 이렇게 방만한 가운데서도, 안일한 생각을 먹는 가운데서도, 이만큼이나 보호를 받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이제 저 철창을 여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교회는 동호인의 클럽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이 시대를 거스르고 이 불신앙의 풍조를 거슬러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로 매주 피의 맹세를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를 위해 피 흘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우리도 그 앞에서 그 피 찬란하심, 그 살을 떼며, 그 앞에서 피로 맹약하며,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그 살을 찢으시고 그리고 육체를 가르셔서 우리를 그의 피로 구속하셨으니 그 뜨거운 피가 우리의 마음속에 뜨겁게 치솟고 그 살이 우리를 살려서 그 십자가의 죽음의 정신으로 우리가 시대를 거스르고 교회의 풍조를 거슬러서 믿음을 지키며 살겠다고 피의 맹약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악령의 세력들은 언젠가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교회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다 털어내는 것입니다. 쭉정이와 그리고 겨와 벌레 먹은 것과 심지어는 벌레까지라도 귀히 여김을 받으며 쌀통에 고이 보관 되어 있지만, 언젠가 할머니가 키를 가져오는 날에는 다 구별됩니다. 마당에 들고 나가셔서 날 좋은 날 멍석 깔아놓고 공중으로 휙휙 집어 던지면서 키질을 하고 나면 쌀은 남고 쌀처럼 오해를 받으면서 쌀통에 고이고이 보관되어 있던 쭉정이들은 모두 더러운 것으로 분류 되어서 아궁이고 던져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렇게 강력한 악의 세력들이 역사하는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경건한 시대에 그 경건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던 신앙적인 분위기에서 살았던 사람들과는 비교되지 않은 영적인 삶으로 이 육욕의 때를 이기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믿음에서 파산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한 때는 좋은 뜻을 가지고 신앙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놨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만났던 추억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은혜 받은 그런 체험도 있습니다. 한 때는 말씀을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그리고 은혜를 받고 주님 뜻대로 살기로 결심을 한 때도 있었습니다. 거액의 헌금을 내놓기도 했고 뼈 빠지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던 추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지키는 것은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악한 시대는 단절된 시대가 아니라 도도히 흘러오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밖에는 죄악이 물결이 넘실대고 있습니다. 교회 밖을 나가면, 아니 교회 안에도 악한 세력들은 으르렁 거리며 우리 중에 누구를 삼켜서 오늘 재물로 삼고 노릿 거리로 삼을까 궁리하고 있습니다. 한 순간도 조는 일이 없고 잠자는 일이 없습니다. 맡은 구역을 지키며 여러분들을 도전하고 넘어뜨리기 위해서 이를 갈고 있는 악령의 세력들이 가득한 이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추억, 옛날에 어떠했던 것, 옛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던 것 이런 것들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지탱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가, 아니면 나의 의로운 삶인가, 나의 의인가 그리스도의 의인가, 나로 하여금 이 어둡고 갑갑한 이 시대를 거스르며 살게 하는 이 힘의 원천이 내 결심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마저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한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내적인 성향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인가, 매일매일 웃고, 매일매일 바뀌고 매일매일 새로워져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마귀의 가장 강력한 전략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을 잠들어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잠들면 소용 없습니다. 그 좋은 무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훌륭한 이론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잠자고 있는데? 그 속에서 좋은 병기가 녹슬고 있는데, 옛날에 은혜 받았는데, 그럼 뭐합니까? 이제 다 녹슬어서 마음에도 없는데? 여러분들 움직이는 말씀이 있습니까? 그 말씀의 날을 지금도 벼르고 있습니까? 거기 기름칠하고 있습니까? 언제나 마음에 시퍼런 칼날로 살아남아서 언제든지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손을 내밀어 쓰시고자 할 때에 그 마귀를 대적하고 이기고 싸우게 할 수 있는 무기로 준비되고 간수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순간은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때 은혜 받았습니다. 이 말씀에 내 인생이 바뀌었는데, 그래서 어떻습니까? 고무줄처럼 다시 돌아가 버렸는데, 한 때는 시퍼런 칼이 되어서 그 말씀이 여러분들의 양심 속에 살아있어서 그 말씀으로 여러분의 죄악을 도려냈고 여러분들을 향해 도전하는 악의 세력들을 성령이 검으로 사용하셔서 이겼습니다.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의 창고에 날카롭게 벼리어져서 3년 전에 주신 칼, 2년 전에 주신 칼이 여전히 반짝반짝 주님이 쓰실 날을 기다리며 여전히 창고에 가지런히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무지무지한 악령의 세력들을 더욱 마지막 때에 더 강력하게 역사할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악령의 역사가 강한 이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때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사면을 두루 살펴보지만 그러나 이때가 어떤 때인지를 알고 싶어 하고 이 역사의 경점이 어두운 밤을 지나며 어떤 때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찾고 싶어 하셨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자멸하였습니다. 악한 때에, 악한 날에 하나님께서는 악령들의 세력들로 준동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커다란 도전을 받게끔 만들어 주고 계십니다. 누구도 자기의 힘으로 이제는 신앙생활을 지탱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없으리만치 기울어진 시대를 마지막 자락을 우리들이 밟으면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의 세력들이 준동하는 이 악 한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는 것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찬송 할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악령의 역사가 강력한 이 마지막에는 동일하게 하나님이 성령의 역사와 은혜의 역사도 강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사람들은 시대가 거칠고, 험한 노도와 같이 밀려오고, 악한 세력들이 우는 사자와 같이 들끓으며 우리를 찾지만,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왜냐하면 이런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독특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강한 은혜의 역사가 이런 것쯤은 이기게 할 것이라는 간증을 가지며 살아가게 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령의 세력들이 우는 사자와 같이 우글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나게 하십니다. 회심과 자기의 처지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로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자기의 의를 의지하고 인간의 상식과 여태껏 배워 온 전통을 가지고 그리고 반짝반짝 머리에 떠오르는 기지를 가지고 이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의 결국은 세상에서 비참함에 패배하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지는 것을 취미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가 보면 알아야 되는데 악에게 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분한 일이지만 이겨야 하는데 악에게 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 마음은 아픕니다. 주님 앞에 나옵니다. 잘못했다고 주님한테 빕니다. 주님의 용서를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용서를 경험합니까? 자기가 지고 패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도 필요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승리하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다시 한 번 믿음으로 일어나고 싶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로도 함께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은혜의 역사로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가로막고 있는 악한 악령의 세력들을 대적하게 하십니다. 복음의 전파와 관련해서 악한 때에는 더더욱 복음의 전파의 역사가 지연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까지 들어와서 믿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흩뜨려 놓아서 안개가 끼게 만들어 버립니다.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분명히 앞에 선 사람이 뭔가 가슴속에 있는 것 같아서 소리를 지르고 피를 토하듯이 외치는데 그것이 뭔지 모르도록 잠들어 있는 자와 같이 만들어 버립니다. 애매모호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은 수없이 소중한 날들을 허비하며 흘러가는 것입니다. 사단의 마지막 목표는 무엇인지 압니까? 사단이 왜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 주기도 하고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을 빼앗아 가기도 하면서 놀리는 그 마지막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인생을 다 까먹게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어차피 천국에 갈 여러분들을 사단에 지옥으로 데려 갈 수는 없잖습니까? 하나님께서 안 물려주시니까, 마지막 목표는 인생을 다 까먹게 만들어서 껍데기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퉤 하고 뱉어버리는 것이 마지막 목표입니다. 세월을 아끼지 않고 살아가서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늘그막의 시절도 불신앙으로 인생을 마치게 해 버리는 것, 그것이 사단의 목표입니다. 인생을 다 까먹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 까먹은 다음에는 그 때에 눈물을 흘리든지 ‘아, 내가 어리석었도다.’ 그런 것 사단은 개의하지 않습니다. 후회를 하든지 가슴 아파 하든지 그것은 ‘네 마음대로 하라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하든지 그것은 네 마음대로 하라’ 그러나 소중한 날들을 곶감처럼 다 빼먹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 지 못해서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니다 보니까 중년이 갔고, 주님 뜻대로 살까 말까 망설이다 보니까 노년이 갔고, 이제 이것이 길 같은데 이것이 진짜 맞나? 돌다리도 두드려 보랬다고 몇 번 두드려 보니까 인생의 막판에 왔습니다. 돌아보니까 자기의 인생이 모두 껍데기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단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는 진지한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마귀의 밥입니다. 아주 좋아하는 밥입니다. 그것도 하류 반찬입니다. 마지막 이 악한 자의 궤계가 충만하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사단이 으르렁 거리는 이때에는 더욱 진지한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삶, 그리고 정결한 추구, 그리고 순교자적인 결심 이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새롭게 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지금 이 때가 어떤 때인지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이 악하다고 한 이 악한 때를 나도 악하다고 느끼도록 주님이 도와주시옵소서. 좌우에 충만한 그 악의 모든 세력들,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의 세력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 갈 수 있겠는지, 하나님 내가 이때를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이 악하고 그 악한 생각들이 그득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거룩한 강렬함이 있어야 합니다. 강력한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그러한 내적인 자원들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에게 세월을 아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도로 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깊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될 때 그 때 뼈저린 후회가 마음속에 있습니다. 아 헛살았구나, 그 좋은 세월 헛살았구나,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내 인생이 알고 보니까 인생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구나, 맨 처음에 회개할 때에 그것이 가슴에 뜨겁게 와 닿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찬양)
그 귀한 세월 보내고 이제 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입니다. ‘아,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 가슴을 찢습니다. 아,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왜 그렇게 살았을까 그러면서 뭐가 아깝습니까? 그 허망하게 보낸 수많은 시간들이 안타까워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흘러가 버렸는데 지금 어떻게 그 세월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안타깝습니다. 그 사람에게 그래 다시 그 시간을 줄게 다시 살아봐 할 때 적어도 그 때 그 마음에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아, 그 때 좀 더 신나게 재끼며 놀았어야 되는데, 다시 생을 주면 깊이 가슴에 두고 하나하나 아껴 쓰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 아닙니까? 예전에 우리 집안에서 10원이 모자란 줄을 모르는 사람이 후에 그 10원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날이 온다. 여러분, 낭비벽이 많은 사람들에게 절대 돈을 꾸어 주지 마십시오. 90%는 떼어 먹힙니다. 믿지 마십시오. 신앙의 인격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은 하루아침에 생길지 모르지만 신앙의 인격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루 만에 그것을 버릴 수 없습니다. 경건하게 일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 경건한 생활을 버리고 야하게 놀 수 있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뭔가 깊이 타락할 때에는 준비과정이 있었습니다.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데 정말 돈이 없다가 돈이 딱 생기면 그 다음에는 귀한 줄을 압니다. 누군가가 그랬답니다. 자기는 만원만 생기면 그 만 원짜리 파란 돈을 놓고 통성기도를 했답니다. ‘주님, 이 만 원을 주님 뜻대로 쓰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것을 잘 쓰고 나서는 ‘주님 뜻대로 쓰게 해 주시니 감사 합니다’하면서 옛날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자기를 후회하는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처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회심했을 때 정말 주님 뜻대로 살지 못했던 수많은 날들을 다시 살고 싶은 마음에 시간을 아끼고 쪼개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형제를 섬기고,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하면서 살았습니다. 궁창에서 빛이 되고, 그러다가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니까 이제는 세월 귀한 줄 모르고 막 살아갑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저는 뭐 남는 것이 시간 밖에 없어요. 필요할 때 언제나 많았어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을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신도 시한부입니다. 지폐를 시간으로 바꿔서 큰 지폐는 1년이라고 쓰여 있고 작은 지폐는 한 달이라고 쓰여 있고 동전에는 하루라고 쓰여 있습니다. 매일매일 셋돈을 안내면 세상이 우리를 살아있지 못하게 합니다. 매일 셋돈을 내며 사는 것입니다. 하루 지나면 동전 내고 1년 지나면 큰 지폐 한 장 내고, 그러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 떨어지면 끝나는 것입니다. 살아보고 싶어도 이제 인생이 없습니다. 돈이 필요하다고 할 때에는 좀 줘도 되는데 자기 인생의 시간은 살점처럼 귀한 것입니다. 결국 이 ‘아끼다’라는 말은 도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할 때 많은 세월을 허송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낭비해 버린 그 많은 인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상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그리스도 밖에서 잃어버린 세월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상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상 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없이 허송세월 하면서 보낸 것들을 보상 받을 방법은 이제 옛 생활을 버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주님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 날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이 시간도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저는 그 점에 있어서 회개할 것이 많지만 어느 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날 16세기에 훌륭했던 청교도들을 오늘날 여기에 데려다 놓는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확실한 것 하나는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 앞에서 저녁을 보내지 않을 것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찻집에 다리 꼬고 지루할 정도로 앉아서 성냥개비 부러뜨리면서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시간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잡지를 읽으면서 귀중한 시간을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그런 것은 안 했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 밖에서 그리스도를 모르고 인생을 허비한 것도 우리가 억울한데 이제는 갈 길을 알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것도 알고 어떻게 사는 것이 악한 때에 악한 것을 이기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이제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또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서 시간을 낭비하는 삶, 세월을 허비하면서 사는 삶을 살면 우리 인생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인생을 만약에 초 동강에 비유한다면, 물론 우리 인간이 만약에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죽는다면 주일학교 학생들은 이만한 동강이고,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네들은 탈 것이 별로 없는 요만한 동강이고, 젊은이들은 반쯤 타들어갔습니다. 삶으로 고백되지 않은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 쓰는 사랑의 편지의 편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많이 입은 사람들은 어느 날 하나님께 사랑의 편지를 써보라고 하니까 ‘God thank you, good by' 한 줄로 끝낼 수 있습니까? 끝낼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누구한테 그런 연애편지 받으면 믿지 마십시오. 말로 아무리 뭐라 그래도 그것은 사기입니다. 사랑하는데 얼마나 사연이 많겠습니까? 눈 감으면 떠오르고 눈을 뜨면 밟히는데, 기둥을 봐도 그 사람 같고 호떡을 봐도 그 사람 얼굴 같은데, 핫도그를 봐도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 떠오르고, 고구마를 봐도 그 사람 얼굴이 생각이 나는데, 돌을 봐도 그 사람 머리가 생각이 나는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저의 할머니가 비가 쏟아지면 ‘아이고 얘야, 비가 이렇게 오는데 애비는 어떻게 하냐?’가게에서 장사를 하는데 비가 오면 어떻습니까? ‘날이 이렇게 더운데 애비는 어떻게 하냐?’ 비가 오면 가게에 있는데 뭘 어떻게 합니까? ‘애비네 집에 선풍기도 있고 다 있어요, 걱정 마세요.’그저 뭐든지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음식이 들어오면 ‘어이구 우리 손자는 뭘 먹을까?’ 사랑하면 모든 것을 다 연관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애편지를 쓰라고 정말 실로 오랜만에 시간과 편지지를 줬어요. 그런데 ‘honey, Thank you goodbye’ 그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어찌 다 쓸 수 있으랴? 계속 써내려가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삶이라고 하는 것이 세월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 보내는 편지지와 똑같은 것입니다. 삶으로서 이제 그 한 칸 한 칸을 메꾸면서 나의 사랑이신 주님 앞에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슴속에 하나님을 향해서 보내고 싶은 사연이 수없이 많은데 편지지가 댓 장 밖에 안 되는데 ‘헤이 이것 코 풀어라, 과자나 싸 먹어라, 불쏘시개나 해라’그러고 나눠주고 마지막에 ‘넌 한 줄이면 돼’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주는 중간 결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월을 아끼나니, 주님만큼 세월을 아끼며 주님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월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기 위해서 말하자면 그 세월이 마치 주님이신 것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간을 잃어버리고 세월을 잃어버리는 것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뭡니까? 고백이 있는데 그 고백은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고백이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가 그것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고 싶은 설교 내용이 꽉 차서 한 두 시간쯤 설교해야지 하고 갔는데 ‘목사님, 30분 내에 끝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들어줄 나도 아니지만 집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어떤 아줌마가 문 밖에서 막 문을 흔들고 두드리며 난리가 났습니다. 뭔가 봤더니 밥주걱을 들고 밥 다 식는다고 큰 일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밥시간에 맞춰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 개의치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밥 다 식을 때까지 욕을 먹어도 설마 설교하는 목사한테 와서 욕하겠습니까? 욕을 하면 자기네들끼리 욕을 할 것입니다. 말하거나 말거나 우리는 가는데 까지 가자고 세 시간 설교를 하고 밥 먹으러 갔더니 입이 이만큼 나왔습니다. 밥 아줌마들이 분노 충만했습니다. 그 다음 날에 더 약 오르는 일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 듣고 하나님 은혜가 강권하시는 분은 마지막 날에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밥을 300그릇 주문해 놓고 절반도 안 내려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주방에서 분노 충만해 가지고 세상에 수련회 많이 다녀봤지만 이런 교회는 처음 본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면 그렇게 마음속에 설교가 가득 찼는데 30분 내로 끝내야 할 때, 특히 채플시간 들어가면 다음시간 전까지 설교를 끝내야 되니까 이것이 제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할 것이 없는데 두 시간 세 시간을 하라고 하는 것, 그것도 고통입니다. 위문편지 쓰라고 그럴 때 마음에도 없는데 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는데 ‘국군 아저씨께...’ 이렇게 해놓고 이제 그만 썼으면 좋겠는데 ‘엄동설한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지요?’ ‘동상은 안 걸리셨는지요? ’그런데 내 마음속에 ‘자기가 동상을 걸린 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을 두 페이지 이상을 써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역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가슴속에 역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시간을 줘도 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송세월하고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세월들을 한자 한 자 삶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사랑을 써 가는데 어떻게 이것을 아껴 쓰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슬퍼하십니다. 여러분, 하루를 엉망진창으로 살고 나서 저녁 때 ‘주님’ 그러고 기도하면 주님이 뭐라 그럽니까? ‘아이고, 오늘도 똑같이 살았구나.’ 마음속에서 벌써 주님이 뭐라고 하시기 전에 내 마음속에서 벌써 같이 흔듭니다. 속되게 살고 밤에 신령한 기도를 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낮에는 세상을 위해 살고 밤에는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삶으로 가득 찬다면 사기이며 정신병자 속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오랜만에 말하는데 연구대상입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사는 것 따라서 기도하고 기도한 것 따라서 살고, 삶은 기도 안에 묶이고 기도는 삶을 능가할 수 없고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우리의 인생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는 그리스도를 모르면서 살았던 회심치 못했던 많은 날들 동안에 낭비했던 그 인생의 낭비를 가지고도 이제는 충분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다시 사야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다시 사서 그래서 이제는 그 시간을 다시 구속하여 하나님만을 위해서 이제는 농축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신학교에서 신학교 까지 와서 정말 개차반이었습니다. 학교가 끝나도 가지 않고 기타인지 뭐인지 그것을 들고 삼삼오오 둘러앉아서 찬양이 아닌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늘에 앉아서 사다리 타기해서 돈 모아가지고 새우깡 두어 봉지하고 환타 사다 놓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도록 그것 두들기며 노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나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하루에 여섯 시간 이상 자면 회개하라. 몸이 아프면 스물 네 시간을 누워 있을 수도 있지만 건강하면서도 여섯 시간 이상 자면 회개하라.’
여러분, 더 이상 이제 인생을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매일매일 빌려서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젊음은 무엇인가? 30년 후에 모두 갚아야 할 지불 만기 어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 써버리면 인생 말년에 빚에 몰려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우리의 인생을 다 써도 모자랍니다. 그러니까 그 찰스 피니였습니까? 그 사람 자서전을 읽어보면 참 대단합니다. 약혼식을 하려 마차를 타고 가는데 가다 보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불쌍하니까 내려서서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11일 뒤에야 약혼식장에 도착을 했습니다. 결론은 약혼식이야 오늘 못하면 내일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이 불쌍한 사람은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우리 약혼녀가 약혼을 못하고 죽어도 지옥 갈 일은 없지만 이 사람들은 나와 만나서 하나님과 약혼하지 않으면 지옥 갈 사람들이다. 교리적으로는 그 사람과 동의하지 않지만 정말 존경스러운 삶을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찰스 피니를 욕하는 사람도 많지만 욕하는 사람 쳐다보면서 ‘그만큼만 살아봐라, 그만큼만 살면 세상이 바뀐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그렇게 세월을 아꼈습니다. 그리고 분투하면서 안락하게 살려고 하는 자기의 삶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어떻다구요? 그 일락이라는 것이 뭡니까? 춤추고 먹고, 마시고 타락한 그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편히 세월을 보내는 것, 그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를 위해서 그냥 편안히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자이다. 왜? 이런 악한 시대를 거스르며 싸우고 이겨 나갈 수 있을만한 그 무엇이 그들 안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고 베드로가 그런 심오한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서 분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각양 좋은 것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십니다. 그런데 능력도 없는 인생 하나가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피 묻은 인생 하나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을 치면서 주님 뜻대로 살게 해 달라고 이 세상에 흙탕물이 밀려오면 그것을 안마시겠다고 몸부림치면서 떠내려갔다가는 다시 말씀의 밧줄을 붙들고 몸부림치면서 다른 사람들은 떠내려가면서 보트타고 즐기면서 노는 그 때에 안 떠내려가겠다고 말씀의 밧줄 하나 붙들고 그 조그마한 배에 매달려서 몸부림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그 배의 이름이 ‘열린호’라나요? 그런데 주님이 내려다보시면서 능력이 없는 인생이 주님 사랑 하나 때문에 세상 풍조에 물들지 아니하고 주 뜻대로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칠 때 주님이 은혜를 안 주시면 되겠습니까? 은혜를 안 주시면 살 수 있겠습니까? 일락에 빠져서 안일한 삶을 살면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은 다시 말하거니와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신령한 은혜를 구하는 것과 같고, 아간이 훔쳐온 외투를 입고 하나님 앞에 손들고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능력 주면 뭐합니까? 주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없는데? 나태한 삶은 불 경건을 낳고 불 경건은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우리 안에서 굳어지게 만드는 게으름인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로 믿는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나태한 사람들입니다.
주님 안에서 강하고 담대한 사람들도 모두 게으른 사람은 그 중에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신앙의 토대에 대해서 염려하고 부지런히 생각하는 것도 부지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 되는 것도 부지런한 사람들이 변화 되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 시킬지 모르지만 그러나 주께서 나를 변화 시키고 충만한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까지 나를 제외해 놓아서는 안 되다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매달리는 사람, 그런 부지런한 사람들 속에 신령함이 깃드는 것 아닙니까? 부지런함이 없었더라면 불의한 재판관 앞에 어떻게 과부가 나아가서 귀찮을 정도로 몸부림치며 내 억울한 사정을 풀어달라고 애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 번 사람을 시켜서 ‘내가 억울합니다’ 말해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지런했습니다. 매달렸습니다.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게을렀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을 허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았던 사람들, 누가 있었는지 한 번 보십시오. 왜 우리가 은혜를 받으려고 애를 씁니까? 왜 그렇게 변화를 받으려고 애를 씁니까?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리고 충만한 은혜를 받고 싶어서 안타까워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이 능력 주시고, 은혜 주시고, 충만한 성령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디다 쓰실 것입니까? 성경공부의 인도자가 되고 싶으신 것입니까? 아직까지도 진리가 무엇인지도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들 앞에 가서 한 번 품 한번 잡아보시겠습니까? 한 번 뽐내보시겠습니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내게 있는 이 아름다운 지혜가 이와 같으리라,’ 한 번 장광설을 늘어놓고 싶으십니까? 문제는 삶입니다. 결국 남김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요, 세월인 것입니다. 주님을 섬길 기회들을 다 잃어버리고 마지막엔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만을 기쁘기 위해서 자기 멋대로 허비해버린 많은 시간과 세월을 다 써버리고 난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나가는 세월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우리는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그 세월 앞에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세월도 지금 우리 안에 흘러가고 있는 세월도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날마다 이 세월을 아끼면서 살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하기 전에 세월을 아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악하니라. 이제는 그렇게 살 수가 없는 시대를 너희들이 지나고 있다. 이 시대를 그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 받을 벌이 크다.” 주님 앞에 이 세월을 아끼면서 사는 사람들은 주님 앞에 받을 상급이 큰 사람들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마지막에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까 죽기 이틀 전까지 성경에 이렇게 표기 되어 있었습니다. 절명하기 이틀 전까지 꼬박고박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체크 했습니다. 조지 위필드가 어떻게 마지막에 그 전설적인 은혜 받은 사람의 삶을 마감했는지 아십니까? 설교를 하고 돔에 가서 이층 숙소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큰 교회를 만들어주고 교단을 만들어 주겠다고 해도 끝까지 담임목사를 안 하며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순수한 신앙을 간직했는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내가 53세인가 54세인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너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쫒아 다니면서 ‘목사님, 피곤하지 않으세요?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사람들이 쫓아 올라옵니다. 이층으로 이렇게 올라가면서 괜찮다고 가서 잘 자라고 이렇게 고개를 돌리는데 사람들이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은혜 받은 그 얼굴로 목자인 자기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잠시 전에 받았던 은혜의 감사를 표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이 선뜻 목자 잃은 양같이 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소명은 누구를 못 줍니다. 등불을 들고 그 계단에 서서 또 설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 제대로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이젠 그 심지의 불이 가물가물 할 때까지 거기서 또 그렇게 된 소수의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본 마지막 위필드의 모습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는 하나님 나라에 가고 없었습니다. 다 알고 있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는 어땠습니까? 그는 한 편의 설교하기 위해 이방인들에게 가야 되는데 말에 앉아 갈 힘이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는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말은 참 편하다, 자기가 갈 길을 아니까’ 그리고는 이쪽 마을에서 설교하고는 그 나귀의 위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면 그 나귀가 다음 마을로 데려다 줬습니다. 가다가 시궁창에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면 다시 죽을 각오로 일어나서 거기에 매달려서 이제 다음 마을로 갔습니다. 그리고 쓰러질 듯 그 장소에 가서는 잠시 엎드려 기도한 다음 엎드려 기도할 때에는 죽은 자와 같았었는데 본문을 펴고 설교를 시작할 때에는 사자와 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피를 토하고 쓰러졌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다시 약한 사람이 되어서 강대상 뒤에 쭈그리고 앉아서 남모르게 피를 한 사발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의식을 잃고 절명했습니다. 마지막에 그의 남아있는 일기에 ‘나의 남아있는 작은 힘을, 줄 수 있는 작은 기력을 주님께 다 쓰고 싶다’그에게 더 많은 세월을 주었더라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았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이렇게 살다가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동분서주하면서 사셨습니다. 주무실 시간까지 집 앞에 가득 몰려오는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시고 이른 새벽에는 제자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기도의 처소로 나아가서 새벽 미명의 시간에 그의 독특한 기도의 세계를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건강을 잘 보존 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건강이 파괴되었는가가 문제가 아닙니까? 자기 멋대로 살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으면서 무절제하게 살기 때문에 모두 육체의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책망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칼빈의 생애를 보면서, 위필드의 생애를 보면서 누가 감히 그에게 어찌하여 당신은 주님이 주신 건강을 낭비했느냐 책망할 사람 있으면 한 번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아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세상에는 없습니다. 칼빈은 24년인가 28년을 그 길고 지루한 대적들에게 둘러 싸여서 하루에도 열 번씩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그 치열한 종교개혁의 투쟁 속에서 한 번의 휴가도 없고 그리고 안식년도 없이 지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가 드디어 영원한 휴식으로 들어갔다,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갔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불꽃처럼 주님만을 위해서 넘치도록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월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통곡하며 기도할 시간밖에 없었고 자기 몸을 다 살라서 주님을 섬길 시간밖에 없었고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밖에는 그들에게 남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신앙의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악한 때에 이러한 인생을 살아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다가 안식에 들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