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찰 때
(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교회(대하7:1下) 1999.1.3 주일오후 1
2. 누가 그 영광을 위한 제물이 될까(대하7:1中) 1999.1.10 주일오후 18
3. 교회의 영광과 기도(대하7:1上) 1999.1.17 주일오후 32
4. 교회의 영광과 두려움(대하7:2) 1999.1.24 주일오후 39
5. 교회의 영광과 경배(대하7:3上) 1999.1.31 주일오후 51
6. 교회의 영광과 감사(대하7:3下) 1999.2.7 주일오후 66
7. 교회의 영광과 찬양(대하7:3下) 1999.2.14 주일오후 77
8. 교회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때(대하7:3下) 1999.2.21 주일오후 86
9.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대하7:3下) 1999.2.28 주일오후 97
1.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교회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대하7:1下)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은 솔로몬이 그 숙원이던 여호와의 성전을 완전히 지어서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그 전에서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나타났던 찬란한 축복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솔로몬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내립니다마는 물론 솔로몬의 삶 속에는 그런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은 이 솔로몬은 대단히 영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깊이 기억해야하고 특별히 그가 초창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졌던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에 대한 체험은 아마 어떤 식으로든지 그가 완전히 뒤로 미끄러지기 전까지 엄청난 영향을 이 솔로몬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쳤다고 우리들은 그렇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솔로몬이 보았던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성전을 다 지어놓고 나서 여호와의 영광이 이 여호와의 전에 충만한 것을 이 솔로몬이 보았고 또 경험을 했습니다. 사실 이미 이 성전은 이미 오랫동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 성전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가졌던 사람은 아버지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그는 자기는 백향목으로 만든 궁에 거하고, 여호와의 법궤가 초라한 성막에 거하는 것을 보면서 가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해서 이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은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였더라 그랬습니다. 가득하였다는 말은 우리들이 쉽게 이해하겠는데 영광이라는 말은 우리들이 이해하기가 쉽지를 않습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면서도 가장 우리들이 적은 부분밖에 이해하고 있지 못한 단어 중에 하나가 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도대체 이 영광을 선배의 걸출한 설교자들이 무어라고 말했는지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 영광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고, 그 설명을 들을 때에 무릎을 칠 정도로 아주 명쾌하게 이 영광을 해설한 설교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커다란 이유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영광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너무나 여러 가지 의미로 쓰여지고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 영광이라는 것이 결국은 체험과 많이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말로 설명해서 사람들에게 손에 쥐어줄 수 있는 그러한 보통명사와 같은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크게 영광에 대해서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가장 흔한 것 중에 하나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이야기하는 영광은 인정과 같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내가 당신을 찬미합니다.’ 혹은 ‘내가 당신에게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그 말은 ‘내가 당신을 인정합니다’라는 말하고 꼭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흔히 뭔가 큰 성공을 거두고 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네가 그렇게 좋은 학교에 들어간 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얼굴도 못 생긴 네가 그렇게 좋은 집에 시집간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너처럼 못돼먹은 아이가 그렇게 훌륭한 자매를 만난 것도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된다’ 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힘들고 어렵던 생활에서 벗어나서 풍요롭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고 또 우리가 교회당을 옮기고 나서도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싶다’ 그랬습니다. 뭔 뜻입니까? 그것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자격이 없지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 당신 때문이옵나이다. 그리고 나의 성공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이 착하게 살면 사람들이 ‘야, 그 하나님이 확실히 계시긴 계신가 봐’ ‘왜’ ‘저 성질 못돼먹고 쌈박질하던 저 친구가 저렇게 변해서 저렇게 친절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었으니 저 성질을 누구도 못 바꾸어 놓았을 텐데 지 아버지가 매일 개 패듯 패도 안 바뀌던 성질인데 교회에 갔더니 매도 안 맞고 사람이 됐데’ ‘왜 그럴까’ ‘하나님 때문이래’ ‘아,. 그렇구나! 역시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보구나!’ 이런 것이 전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영광의 용례 중에 하나입니다.
두 번째 영광은 어떤 의미로 쓰였냐 하면은 하나님이 얼마나 권세 있는 분인지를 똑바로 알게 보여주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영광이라 이렇게 성경에서는 부릅니다. 선지서나 혹은 시편 같은데 보면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그러면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이방나라들과 민족을 징벌해 달라는 탄원, 혹은 징벌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경고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것은 그 징벌을 통해서 그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목적 자체는 다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애굽에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베푸셔서 열 가지의 재앙을 통해서 애굽을 쑥밭으로 만드셨습니다. 물론 그러한 하나님의 징벌과 재앙을 보면서 애굽 사람이 아니었던 많은 사람들, 히브리 사람들과 함께 노예로 있던 많은 종족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구나 하는 거를 깨닫고, 선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에 좇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런 선교적인 의도를 가지고 역사 하셨지만, 주님의 마음에 있었던 강한 의지는 그 일을 통해서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이 무너지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시켜서 애굽 백성들을 모두 구원해서 가나안으로 데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런 계획이 부분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계획이 성취되었고, 또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하나님이 애굽을 향해 베푸시는 그 큰 능력, 심판을 보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갖게 된 거는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보다 더 커다란 목적은 교만한 애굽의 백성들을 징벌하심으로 그들이 믿고, 안 믿고 구원과는 상관이 없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신 것을 만천하에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오히려 구약 전체를 보면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그 이방민족들이 야훼를 믿는 신앙으로 돌아오는 커다란 회심의 역사는 오히려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합니다. 오히려 성경 선지서를 보면 에돔 족속이나, 모압이나 암몬이나 혹은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이런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심판, 그 땅이 패괴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정도가 지나칠 때 어느 분량까지 꽉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 인내를 그치시고 그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셔서 멸망시키시는 그러한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과연 참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 심판하시는 광경을 통해서 모두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수긍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이 영광이라고 많이 표현합니다.
그래서 시편 같은데 보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인이 원수들을 향해서 아주 무자비한 복수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거는 기도하는 시인이 성화되지 못했거나 자비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인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애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많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경건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그 삶, 그런 불신앙적인 태도, 반 하나님적인 도전 이런 것들이 너무나 확연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하나님 등뒤에서 몰래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면전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모욕을 하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 선지자의 마음속에 혹은 시인의 마음속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정도와 배치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잠잠히 계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은 이상한 기도, ‘여호와여 깨소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그런데 사실 시편에 보면은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시인들은 깨소서, 일어나소서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하나님이 주무신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수들이 저렇게 교만해저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잠자코 계시는 것은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여호와는 잔다, 여호와는 죽었다, 여호와는 안 계시다’ 이런 말을 하게끔 만들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매일매일 체험하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나로서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이 고통을 기억하셔서라도 이들에게 하나님이 주무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무슨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의 불붙는 마음으로 영혼을 구원해야 되겠다든지 하는 그러한 열망과는 차원이 다른 열망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영광이 오늘 여기에 해당되는 영광입니다. 세 번째 영광은 첫 번째도 아니고,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 영광은 어떤 경우냐 하면, 영이신 하나님이 그 자리에게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지각할 수 있도록 특별한 임재를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식탁에서 하는 기도도 들으시지만 화장실에서도 하는 기도도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언제나 똑같은 정도로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낮은 수준에서 얘기하면 개개인의 영적인 수준에 따라서 다르고, 또 상태에 따라서 다릅니다. 수준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 성경에 보면은 사무엘이 엘리 밑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린 사무엘은 선생님이 불렀는지 알고, 엘리 제사장을 찾아가서 ‘저를 부르셨습니까’라고 말하죠, 안 부른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사무엘의 어린 신앙으로서는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자기를 불러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없는 것입니다. 수준의 문제입니다. 또 반대로 엘리는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무엘이 와서 이야기 하니까 즉각 알아차린 것이 ‘아, 이거는 이 아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수준이 사무엘 보다는 엘리가 높은 영적인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준이 낮은 사무엘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엘리에게는 그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문제냐 하면 상태의 문제입니다. 엘리는 이미 심령이 모두 폐기 직전에 가버렸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서 완전히 생명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한지가 너무나 오래 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친히 임재하셔서 거기서 불으시는데도 그 임재를 지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상태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무엘이 하나님을 뵈옵는 장면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물론 수준과 상태는 이렇게 무 가르듯이 이렇게 탁 자르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수준이 저급할 때에는 수준이 낮을 때에는 상태도 기복이 심합니다. 혼자서는 다 때려부술 것처럼 난리 치다가는 또 교회도 안 나오고, 눈물 펑펑 흘리고, 대굴대굴 구르다가는 그 다음에는 세상으로 뛰쳐 나가버립니다. 그러나 수준이 높아질수록 상태에 따른 급격한 굴곡이 적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길은 수준의 영적인 수준을 유지하면서 상태조차도 아주 훌륭해서 민감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광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 모든 곳에서 또 모든 때에 항상 같은 정도로 지각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말씀을 듣는 귀는 어느 정도 열리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이력이 붙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은 어제까지 잘 들어오던 설교가 오늘부터 갑자기 거의 설교가 안 들어 와서 설교를 놓치거나 어제까지 성경을 읽다가 말씀의 한없는 은혜를 받았는데 오늘부터 성경을 읽을 때에 은혜가 두절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기도 같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아침까지 폭포수처럼 잘 되다가도 무슨 어떤 이유 때문이든지 오후 그 순간서부터 전혀 안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감각은 단번에 퇴보하지는 않지만, 예를 들자면 수년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이 깨달은 사람이 지금 말씀이 안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몇 년 동안 들은 것들이 커다란 신앙의 집을 어느 정도 지어놨기 때문에 그 테두리와 수준을 안 벗어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들이 귀가 열리는 것도 하나의 개발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지만 그러나 기도는 안 그렇습니다. 기도는 오래된 사람이기 때문에 저절로 잘 된다든지, 습관적으로 해 왔기 때문에 항상 영안으로 들어가는 기도를 할 수 있다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기도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야지만 항상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유지할 수가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얘기가 영광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 영광은 영이신 하나님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매우 특별하게 현존해 계시는 것, 임재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저도 적절한 언어를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면 그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모습을 즉각적으로 보도록 만들어 주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이사야서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였을 때 이사야 선지자가 철저하게 회개하고 있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그 시간에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스케쥴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걸 가능하게 해주었느냐 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게 되자 그 영광은 이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자기가 얼마나 비참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이렇게 뵈옵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재앙스러운 일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냐 하면 이 영광은 거룩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우리와 하나님이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나면 이사야 선지자의 경우와 같이 주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자기가 그 하나님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슨 죄를 지었지, 무슨 죄를 지었지’라고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가서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아도 그들은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둘, 하나둘 이런 식으로 죄가 생각이 난다기보다는 자기의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아야 마땅한 끔찍한 죄악의 덩어리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길거리를 걸어다닐 때에는 모릅니다. 옷이 이런 것도 묻고, 저런 것도 묻고, 넥타이에 먹다가 김치 국물도 떨어지고 이럽니다. 컴컴한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컴컴한 방에서 기도하거나 그럴 때는 모릅니다. 그런데 조명이 아주 강렬하게 내리쬐는 그런 예식장에 같은데 서서 거울을 드려다 보면은 자기가 얼마나 자기 옷차림이 남루하고 더러운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광의 빛은 거룩을 보여주고, 그 거룩의 빛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영광이 또 하나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앞에 것과 연관이 됩니다마는 또 하나 이 영광이 충만히 임재하고 그 앞에 우리들이 있게되면 그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에 우리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불결한 존재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것과 같은 그러한 교재를 같기를 원하는 마음을 주고, 그러한 마음은 즉시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과 교재를 나누기에는 도덕적으로 매우 불결하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목사님, 그때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건 맞는데 지금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의 공로를 못 믿거나 불신하기 때문에 자기의 도덕적인 불결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용납되어 지고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다 받아주신다고 하더라도 내가 주님의 용납해 주시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내가 내 자신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두 번째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목사님, 그렇다면 그런 감정이 올바른 감정일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받아주시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 면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또 하나 불순종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그렇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거지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주님이 나를 이 죄에도 불구하고 용납해 주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슬프고 가슴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갑니까?
그러니까 이거는 단지 내가 이신칭의의 교리로 적용이 되느냐 안 되느냐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영광 속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이 영광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찬란한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영광스러운 주님과 두려워하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외면하고, 그 자리를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을 뛰어 넘어서 그 영광을 견디면서 그 두려움을 이기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싶은 소망을 불러 일으켜 넣어주는데 그때에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가책으로 다가오는 것이 뭐냐하면 주님은 거룩하시고, 우리들은 도덕적으로 불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영적인 생명의 기반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온전에 가깝도록 산 사람들, 제가 왜 이렇게 단서를 많이 붙이느냐 하면은 도덕적으로 온전한 삶을 산다고 할 때 그것은 두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뭐냐하면은 영적인 생명의 기반이 없이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가난한 사람 구제하지 않고, 탈세해서 되겠습니까? 그게 인간입니까?’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몰아 붙여서 이 속에 세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뭐하지 말아야 된다’ 이게 딱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작용과는 관계가 없이 그것이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옛날에 공산주의자들로 젊은이들을 전향시킬 때 그 때에 기독교에서 회심과 방불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기록에 보면은 중국에서 공산화 되어갈 때 사상적으로 공산화 되어갈 때, 의사 같은 것하고 부르조와로서 돈 많이 가지고 살고 그러던 사람들, 그런 젊은이들이 자본주의의 악랄함을 보면서 수많은 군중 집회에 나와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동안 가진 자로서 형제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철저히 자복하는 것입니다. 통회 자복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세뇌된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무슨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이전에 안일하게 살던 삶을 회개하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 속에서 아주 선명하게 영적인 생명과는 상관없이 이념에 사무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표현이 나왔습니다. 왜, 어떤 생각이 사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예를 들자면 언젠가 누가 그랬습니다. 저축상을 타면서 소감이 어떠냐 그러니까 ‘저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쌀독에서 바가지 닿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사실 젊은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도 모릅니다. 쌀독에다 쌀 담아먹어 본적이 없습니다. 쌀 기계에다가 넣어 가지고 눌러 가지고 먹거나 아니면 쌀부대 사다 먹지, 독에 다 넣고 바가지 긁는 소리가 뭔지 무슨 소 뒷다리 긁는 소리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겠습니까. 그 사람이 언젠가 어렸을 때에 죽어 라고 엄마가 가난해 가지고 그래서 그 한 톨이라도 끌어 내가지고, 자식들 밥을 먹이려고 항아리 바닥을 긁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드륵’하고 긁는 소리가 나면 ‘아, 내일은 굶겠구나!’ 그러니까 그게 사무친 것입니다. 무슨 도덕적으로 이렇게 절약을 하고 돈을 아끼면은 이것이 은행에 들어가고 그러면 산업자금이 형성되고, 중소기업을 살리고, 나라 경제가 살고, IMF를 이기고 이런 구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딱 단편적인 그림 하나가 가슴속에 사무친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쌀 긁는 소리 제일 무서운 소리, 돈 떨어지면 굶는다’ 이게 뇌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하는 이야기들은 이 사무친 것을 가지고 짜 맞춥니다. 그러면서 그 구도를 가지고 보니까 ‘돈 많이 쓰고 그런 사람들, 결국 그런 사람들 때문에 IMF 터졌드라 그러니까 나같이 살아야 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짜 맞추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신앙하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라는 책에서 웃기는 내핍 생활이라는 챕터를 썼습니다. 요지는 뭐냐하면 그가 과도히 아껴 쓰고 절약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아끼는 재물을 어떻게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나누어주는 것을 보아야지만 그것이 정말 주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겁니다. 보십시오. 가슴에 사무치는 그 짤막한 사무침이 뭔가 우리로 하여금 인연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자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구원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이 난무하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손가락질 당합니다. ‘그러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냐’ ‘그러고도 너가 예수 믿는 사람이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어느 형제 하나는 한끼에 삼천 원 짜리 이상은 점심을 안 먹는다고 원칙을 세웠습니다. 더 웃기는 거는 주위의 많은 지체들이 그 형제를 존경합니다. 대학교 선생이었습니다. 전부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오 천 원 짜리를 먹자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런 선을 그어놓고 나면 또 하나의 물질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항상 메뉴를 보면서 그 돈 생각을 하는 거 아닙니다. 그것이 물질주의지 무엇입니까. 그리고 오바 되면은 가책을 느끼고 그 밑에 돌면은 자부심을 느끼고 그러는 것이 뭐냐 이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복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분수없이 그렇게 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자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경건의 도움이 된다고 그랬습니다. 생명의 원리가 심겨지지 않고도 이렇게 무엇인가 가슴에 잠깐동안 사무친 것이 삶의 어떤 원칙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도덕이라고 불가능해지겠느냐 이겁니다.
제가 알고 있는 교수 가운데 한 사람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인간으로 생각도 안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가용 몰고 다니는 사람들, 그때는 자가용이 조금 드물기는 한 때이기도 했지만 하여간 그 사람은 여유가 있는데도 안 몰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름도 안 나는 나라에서 뭐 그런 것을 몰고 다니느냐 이것입니다. 대중교통 이용하면 되지’ 그래서 나는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연이 있었습니다. 왜, 두 형이 모두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고 그러고 나서는 아버지가 그 자식들의 가슴속에 사무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탈것은 패가망신하는 거다, 자전거든 오토바이든 차든’ 그렇게 사무 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대중교통 옹호론 자가 되어 버린 거예요. 이런 것들은 영적인 생명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관계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수입이 넉넉했고 그래서 제가 차를 조금 큰 거를 탔었습니다. 수입이 넉넉해지니까 그때는 개척교회 하는 것도 아니고, 프린스를 샀습니다. 그래서 육 개월쯤인가를 탔는데 어느 날 기도하는데 성령님이 내가 그런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얼마나 슬퍼하시는지가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그래서 그 다음주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까만 르망, 박전도사가 폐차한 그 차, 그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럼 뭐 그걸 유지할 능력이 없냐,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 들어 갈 것은 다 들어가고, 아주 충분히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그걸 슬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주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시했습니다. 한번, 두 번, 동료 교수들도 다 소나타 타고 다니는데 내가 프린스 새 것을 좀 타기로 서니 누가 나보고 뭐라 그렇겠는가, 누가 욕하겠습니까. 어떤 동료 교수는 그랜저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는데 프린스 타고 다닌다고 누가 욕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욕하고 안 하고는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6개월쯤 되는 어느 순간에 성령께서 강하게 슬퍼하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팔겠다고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이 맨 처음에는 반대했는데 나중에는 ‘돈 다 주고 이제는 타기만 하면 되는데 왜 바보같이 그것을 그렇게 하려고 그러느냐’ 처음에는 반대했습니다. 내가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래 결국은 우리 집사람도 동의해서 즉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편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뭔가 도덕적인 삶을 만들어 가시는 방법이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하나님의 생명과는 관계가 없이 가슴에 사무치게 하셔서 내가 무슨 굶주리는 사람을 보고 가슴에 사무쳐서 그 차를 팔거나, 아니면 목사님이 프라이드 타고 다니니까 너무 불쌍해서 전도사가 어떻게 프린스를 타고 다닐까, 그러고 판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논리를 거두절미하고 어느 날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가슴에 막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그 사실을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내 생각에는 이거는 하나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내가 이것에 집착하고 있었다고 하나님께서는 느끼셨구나 하는 것을 내가 아주 절실하게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면 나는 영원히 프린스를 안탈 것인가,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때 탄다고 하면 그때는 다를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가지고 계신 말씀이 어떤 말씀인고 하니, 미국이나 캐나다를 가보니까 제일 작은 차가 프린스보다 약간 큰 자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공항에서 택시를 부르면 약 5천cc 되는 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요, 10달러면 가는 차들입니다. 리무진도 불과 20달러만 주면 공항까지 왔다갔다합니다. 만약에 그런 사회가 될 것 같으면 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뭔가 도덕적인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그 요인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광은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가 하는 말씀을 드리다 이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사무치게 만들어서 단편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 이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세 번째로 이런 의문이 들것입니다. ‘아니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지 목사님, 뭘 그렇게 따집니까?’ 그런데 이거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뭔가 어떤 사건에 사무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이 성령의 역사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깨닫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어떤 도덕적인 결심을 하고, 그것을 실행하게 되면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루어 놓은 도덕적인 성취가 눈에 대견하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의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은 이러한 영혼의 변화가 없이 도덕주의로 내몰린 실천적인 도덕 실천가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거는 강력한 교만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을 향한 끝없는 정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가운데 주님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심겨지면서 일어나는 도덕적인 변화는 죄를 죽이는 것과 함께 도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이러한 경우에는 죄는 그대로 살려두면서 도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속에는 탐욕이 가득하고 겉으로는 좋게 회칠한 무덤과 같은 그런 사람들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깊은 참회를 경험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기반은 반석은 그리스도 예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영광은 그런 일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만히 이러한 솔로몬이 체험한 것과 같은 영광은 아니었지만 무엇인가 깊이 하나님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와 계시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내 인생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두려움과 사랑이 한꺼번에 느껴진다라고 하는 그러한 경험 속에서 우리들이 회개했을 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의 죄가 알기 때문에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회개해야 할 죄가 생각하는 것은 나중문제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얀 옷을 입혀서 여름에 이놈들을 밖에서 놀라고 내 보냈더니 왈칵 뒤집어쓰고 막 흑탕물, 똥칠 해 가지고 진탕, 타이어 자국 잔뜩 해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들어오는데 거울을 탁 보니까 자기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엄마를 만났습니다. ‘이 자식, 너 엄마가 그렇게 애써서 예쁘게 입혔더니 이게 뭐야?’ 그때에 자기가 엄마가 해 입힌 그 옷이 얼마나 꼬까옷이었는데 자기가 이렇게 더럽혔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기 얼룩은 주차장에서 묻은 거고, 여기 똥은 소 지나가는데 엎드러져서 묻은 거고, 여기 진창은 뒷골목에서 넘어진 거라는 것은 그거는 나중에 들여다보고 생각을 하면서 하나씩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탁 떠오르는 것은 그림과 같이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현 상태가 그림과 같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무슨 죄부터 회개하기 시작했을까요. 어렸을 적부터 거꾸로 올라왔을까요, 아니면 최근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을까요. 예루살렘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서 지은 죄를 생각했을까요 반대로 올라오면서 지은 죄를 생각했을까요. 성적인 죄로부터 시작을 해서 심리적인 죄로 나아갔을까요, 반대편으로 들어왔을까요. 이런 것을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이사야는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림처럼 찢긴 자신의 때묻고 오염된 상태를 한번에 봐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됐는지는 나중문제고 내가 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결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처절하게 애통하게 회개하는 장면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두려우리 만치 그렇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재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현실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하는 이 엄청난 격차, 이것 때문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또한 영광이 그 자리에 임했을 때 우리에게 어떠한 효과를 가져다 주냐 하면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죤 웨슬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되면은 그 영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이제껏 자기가 사랑하고, 집착하고, 매달리고, 붙잡았던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들이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한 분이 자신의 온 삶과 존재의 관심사가 되는 것입니다. 가득 메우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간단합니다. 그 이유는 이제껏 까지 관심을 집중하고 살았던 많은 것들이 알고 보면 이 세상에서 모두 끝나는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삶의 장막이 내려지고 나면 즉시 영혼의 세계의 직면해야 되는데 그때에 영원하도록 존재하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럼 보십시오.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죽음 너머에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살아있을 동안에는 착각이라도 좋으니까 이렇게 저렇게 현혹됩니다. 현혹이 되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집중하며 살아야 할 관심사가 분산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속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세계에 딱 직면했을 때 그때에 우리가 대면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한 우리의 운명이 결정이 되는데 그 운명을 좌우하는 유일한 관건은 무엇이냐 하면 ‘그 하나님과 화해했는가, 그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시는가’ 그 문제입니다. 싫어하시면 지옥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강한 영광이 나타나고 그 하나님의 임재를 사람들이 느낄 때에는 즉각적으로 그러한 영원을 향한 지대한 관심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경과민증상 적인 현상이 아니라 성경이 바라보고 있는 인생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생관이 무엇이냐 하면 세상은 잠깐 동안에 사라지는 것이고, 이 세상은 영원을 향한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은 그 짧은 기회로서 사는 인생에 대해서 거의 모두 말합니다.
이 성경은 현재 삶에 대해서 대부분 할애하고 있지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해서는 적은 부분밖에 할애 안합니다. 이 책은 죽은 자를 위한 책이 아니라 여기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입니다. 태어나지 않은 자를 위한 책이 아니라 태어나서 여기 지금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이 책입니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죽을 때 사람들 관속에 성경을 넣어주는 거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만족을 위한 것이지 죽은 사람은 그 성경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그 모순은 뭐냐 간단한 것입니다. 뭐냐하면 영원을 향해서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영원에 대한 관심사를 빼버리고 나면은 이 책도 하나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과 어떤 종교의 원칙을 가르쳐주는 아주 차가운 규범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의 중간 결론을 얻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이 짧은 성경이 그렇게 덧없다고 말하고 있는 이 현세의 일에만 매달리고, 오늘 살아가는 삶을 어떻게 영원을 향해 의미를 가진 삶으로 연결짓지 못하는가,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그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봐 보십시오. 잘 알 것입니다. 열린교회에 왔습니다.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혼기 찬 처녀들은 시집보내달라고 늘 기도합니다. 작년에도 응답이 안됐지만 그래도 올해 또 기도합니다. 공생애는 끝나 가는데 하나님 도와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게 뭐하겠다는 것입니까? 시집, 장가가겠지요. 엄마 되는 것이 목표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이 낳고, 늙어가고, 그러다 어떻게 됩니까. 부부싸움하고, 그러고는 그냥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은 그런 식으로 그때그때 기회주의 적으로 때우고 남들이 하는 방식대로 뒤쫓아가면서 급한 일을 때우면서 살아가는 것은 그거는 성경이 영원을 향하여 살아가는 삶이라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이 짧은 죽음 너머의 세계 속에 정면으로 대면해야 할 지존하신 하나님 아버지, 영원 너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 홀로 계셔서 우리가 그분과 화목한지를 물으시고, 우리의 인생을 영원을 향해서 혹은 이곳에, 혹은 저곳에 보내실 수 있는 그 하나님에 대한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은 짐승과 똑같은 삶입니다. 다만 그가 인간의 모습을 살아간다는 차이뿐이고, 동물들은 아무거나 먹지만 가려서 먹고, 가려서 입다가, 가려서 죽는다는 것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을 향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보십시오. 신비주의 같은데 빠져서, 무슨 신앙을 어디서 이상한 신앙을 받아드린 다음에 언제 주님이 오신다 그리고 세상의 삶을 다 팽개친 사람들은 모두 이단들이었습니다. ‘곳 주님이 오신다’ 주님이 오시는데 왜 헌금을 하라고 그럽니까. 교회당을 지어야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곳 오실 텐데 무슨 성전을 짓습니까.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여호와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래서 그 영광의 효력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삶과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그 죽음 이편, 죽음 뒤편에 존재하고 계신 영광스런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사람들은 이 세상을 그렇게 장난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정말 역설적으로 영원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았습니다. ‘내가 곳 갈 세상이기 때문에 내 삶이 아무려면 어떠하리’ 그런 식의 삶은 이단들이 경험한 삶이지, 영원에 눈뜬 성도들이 경험한 삶이 아닙니다. 왜,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미래를 향해서 영원이후에 하나님을 뵈면 어떻게 그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운명짓고, 결정짓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에 눈뜨면 눈뜰수록 삶에 대해서 철저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의 경험을 보면 두 가지 체험이 아주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체험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죠나단 에드워즈가 1773년에 연도는 책마다 약간 차이가 납니다마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들판에서 경험하고 거기에서 거꾸러지는 영광의 체험을 한 다음에 그는 예전의 모든 삶을 버리고, 예전의 신학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엄격한 칼빈주의자로 돌아섰습니다.
변화 받기 전까지 그는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칼빈주의 교리는 사람을 짐승의 노예로 만드는 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대의 모든 지성인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그 당시에 유행하고 있는 인본주의 적인 교리인 아르미니안 주의자였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그는 두 가지 사실을 확연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고, 자기가 소망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죄악의 덩어리라는 사실이 하나고, 또 하나는 그 거룩한 하나님과 형벌 받아 마땅한 자기의 비참한 죄인 된 상태에 유일한 소망이 되고 있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기 지금 성전에 가득 찬 영광은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세 번째의 영광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솔로몬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여호와의 임재하심이 그 성전에 솔로몬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타나고, 현존해 계셨기 때문에 거기에 있었던 그 솔로몬이 강력하게 그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장소적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는 강력한 영적인 효과를 동반하고, 어느 정도 그것은 국지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겁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솔로몬은 엎드려 졌습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함과 엄위하심에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깨닫고 엎드려졌던 이사야와 유사한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전 밖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물론 거기에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영광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없지만 현저히 달랐을 것이고, 거기서 수 백리 떨어진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는 이처럼 국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에게 뭘 보여주느냐 하면 두 가지 교훈을 던져주는 것입니다.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효과가 국지적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첫째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하면, 솔로몬의 성전에 그러한 국지적인 여호와의 찬란한 영광이 가득 차서 솔로몬에게 압도하는 그러한 영혼의 자극을 주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두 번째로는 우리가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사모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령의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통한 이러한 영적인 효과,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하는 것도 결국은 성령이십니다. 그러한 효과와 또 하나 성령의 운동을 통해서 수많은 은사들을 불러일으키는 이 일 사이에서 굉장히 많이 혼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이 분명하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인본주의 적인 방법이나, 아니면 운동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성령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고, 은사를 받게 하는 그것이 교회의 모습을 진정으로 회복한다고는 믿을 수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고린도교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풍부한 교회였지만 교회는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순결을 지향한 교회인데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청교도들은 아주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꿈꾸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이 기도할 때 사사로 나아감에 있어서 양털을 놓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양털만 젖게 혹은 양털주위만 젖게 이렇게 자연 법칙에 위배한 어떤 기도를 드림으로서 하나님 앞에 응답을 구합니다. 또 성경에 보면은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더 많은 경우는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해라, 어떻게 해라 이렇게 알려주시는 경우도 성경에 보면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 청교도들이 가졌던 생각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거는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우리를 가르치실 수 있는 말씀이 아주 희귀하거나 거의 없을 때,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모세오경도 없었습니다. 모세가 후손인데 어디 모세오경이 있겠습니까. 단 한 장의 성경도 없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방법이 그런 식으로 우림과 둠림으로 점을 치듯이 분별을 하고 이적과 기사를 보고,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지시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면은 어디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뜻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어떠한 계시도 없는 때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유사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들을 인도하신 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지만은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들이 주로 매달리면서 인도 받아야 할 방법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나타났던 이러한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은 말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꿈꾸되 어떤 식으로 꿈꾸었냐 하면은 요즘 우리들이 하듯이 막 박수를 치고 북 치다가, 듬뿍 불을 받아 가지고 어떤 사람은 병 고치고, 영을 보고하는 그러한 방언을 하고, 어떤 사람은 미래에 대해서 점쳐주는 그러한 식의 성령의 역사를 꿈꾼 것이 아니라, 말씀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서 그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서 그 자리에 하나님이 친히 임하시는 것과 같은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 하면 효과는 아주 유사한 효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경험한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스케쥴과는 상관이 없이 자기가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드리는 선교의 사명에 그 부르심에 대해서 헌신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영광을 통해서 죄인들이 그 말씀의 영광 앞에 거꾸러지고, 그리고 영적인 그 강력한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 앞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한심할 정도로 무지한 죄인들이 ‘여기가 바로 내가 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로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때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던 삶이 그 삶을 인정하게 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서 뿐만 아니라 온 땅 끝까지 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는 열망에 불타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점에 있어서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교회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많은 은사를 맛본 사람들 가운데서도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눈에 보일 때에 살아있는 것 같은 교회의 모습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사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산 교회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함께 역사 하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진실한 참회와 관계가 있고, 무지한 사람들의 영적인 각성과 관계가 있고, 죄악 된 삶을 살던 사람들의 도덕적인 부도덕한 삶에 대한 깊은 회개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한심한 수준이었던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통해서 하나님이 바로 자신 앞에 계신 분이시며 그리고 이곳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가장 강렬하게 경험하고 엎드러질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고백을 받아내는 영광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광 이외에 다른 것들을 통해서는 교회가 영광으로 가득 찰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셔서 영으로서 우리에게 장난하시는 하나님, 수많은 사람을 혼미케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시내산아래 있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 졌던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하시는 그 현존하심을 통해서 그 장소가 구별된 장소이며, 그 말씀을 듣고 거기에 앞도 된 사람들이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그의 영광 때문에 그의 거룩한 성품을 깨닫게 되고, 그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그 하나님의 영광, 그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영국에서는 ‘알파 코스 무브 먼트’라고 하는 독특한 운동이 일어나서 수많은 건전한 교회들을 파멸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몇 해 전에 한참 풍미했던 토론토의 성령운동, 빈여드 운동 여러분 들어보셨습니까. 기도해 주면은 졸도한다는 그 운동 말입니다. 그 운동이 새로운 방식을 갖춘 그러한 운동입니다.
제가 94년도인가 95년도에 갔을 때에 사람들이 넘어지고 그랬습니다. 그러고 막 깔깔거리고 웃고, 거룩한 폭소라 그러는데 그리고 뎅굴뎅굴 구르고 그랬는데 저는 직감적으로 ‘영의 역사는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은 없구나’라고 하는 것이 제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저건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돌아왔습니다. 내가 꿈꾸는 부흥이 아니다. 그런데 달랐습니다. 제가 갔다오고 나서 한 2년 뒤서부터는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기도 받으면서 짐승우는 소리는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자기네들은 기이한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벌써 뭘 보여주는지 분위기가 벌써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 사자울음소리, 이상한 짐승의 울음소리들 무아지경에서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짐승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국에서 최근에 온 소식을 보면은 그게 더 정교한 형태를 갖추어서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을 다 잘라내고, 그리고 치장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훌륭한 사람들, 존경받는 사람들이 그 운동을 성경적이고, 복음주의 적인 운동으로 추천을 했습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몇 달 전에 저에게 어느 출판사에서 이렇게 두툼한 원고 뭉치가 날라 왔습니다. 출판사 책임자가 저의 열렬한 독자라는 사실을 먼저 고백한 다음에 이 훌륭한 책이 번역되는데 김남준 목사님의 추천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고를 보내라고 그랬는데 읽어보지 않고 내가 어떻게 추천해 주느냐 그랬습니다. 그 바쁜 지경에 길기는 또 우지게 길었습니다. 350페이지나 되는데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앞장을 볼 때에는 추천서 써줄라고 그랬는데 뭐 미국의 누구, 한국의 누구누구, 여러분들이 이름대면 다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까맣게 나오는데 전세계에서 열 여섯 명도 되는 걸출한 지도자들이 추천서를 썼습니다. 열린교회의 김목사가 무엇입니까. 거기 세워주는 것만 해도 할렐루야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그래서 편지를 썼습니다. 저에게 이러한 추천서를 써 달라고 하는 것은 제가 말할 수 없는 영광이지만은 몇 가지 점에서 중대한 신학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 책이 널리 유포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못한다고 사인해서 팩스로 보냈습니다.
그런 운동이 영국에서 번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그런 운동이 확 번져가고 나면은 수많은 교회들이 미치는 것입니다. 왜, 탈출구를 찾고 있던 교회들, 아 얘기를 하면 무엇을 합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목회 하던 그 교회에서 빈야드 팀 불러다가 거기서 푸닥거리 했습니다. 천국에 계시겠지만 죤스 목사님이 보시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리고 짐승 울음소리 내는 사람들 불러다가 했습니다. 거기서, 그 목회자가 청교도 연구해 가지고 박사학위 받은 사람입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이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나타난다라는 사실의 기본적인 입각점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교회의 영광이라고 말할 때 그 교회의 영광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 차거나 헌금을 억수로 많이 하거나 아니면 교회의 건물이 멋있어 지거나 아니면 은사 받은 사람들이 길길이 뛰고 다니는 교회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이 교회 한 가운데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에 모든 사람들이 그 음성을 들으면서 말씀하는 자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그러나 그를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지금 당신 인간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말씀하고 계시며, 우리는 이 자리에 있는 동안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시다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이 다른 곳과 구별되는 거룩한 곳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런 고백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 앞에 봉헌했을 때에 그 성전에 이러한 하나님의 영적인 영광이 충만했던 것은 이후에 이 성전에 실체가 되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신약의 교회의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영광이 그 교회 안에 충만하게 가득 차서 그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을 때, 뜰 안에 있을 때까지도 ‘하나님이 정말 계실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나!’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교회당에 들어와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시는데 이제껏 까지 내가 그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지만 오늘 내가 여기서 그 하나님, 내게 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광이 압도되니 나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정신 팔려 살던 사람들이 영원을 향해 눈뜨게 되고, 자기를 위해 살던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향해 눈뜨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 없이 넉넉히 살수 있다고 믿던 사람들이 인간이 얼마나 지푸라기와 같고, 주님께 의존하고 있는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현존하시는 임재가 가져오는 영광의 효과라 이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교회당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이 이 곳이 다른 곳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통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그곳이 바로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따금, 우리들이 드리는 이 예배, 이 교회 일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의 현장에서 무서웠다는 고백을 가끔 듣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오래 이 땅을 밟았으면서도 아직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로우신 분이 신지를 모르는 채 안하무인격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두려움에 대한 자각도 없이, 실낱같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데에 소망을 걸고 무서워하는 마음, 두려운 마음도 없이 겁 없이 여기를 드나들고 있는 한, 우리는 이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참된 부흥은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은 성령 운동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저는 시간이 흘러 갈수록 제가 가지고 있는 이 견해가 가장 성서적이며, 제가 가지고 있는 이런 견해가 교회사 속에 나타났던 수많은 교회의 이탈들을 막아주는 성경적인 견해라고 하는 확신이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자리가 하나님의 현존하시는 영광으로 가득 차서 말로 형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영혼을 압도하고, 우리가 그 예배당 속으로 들어올 때에 무엇인가 하늘위로부터 깊이 누르고 있는 도피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고 그리고 거절할 수 없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권세 위에 누른 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그런 자각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현존하고 있다고 하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영광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교회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조국의 교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영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통해서 거역할 수 없도록 지각되는 영적인 임재의 역사를 모르는 채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예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성도들이 낸 돈으로 운영되는 사회단체나 자선단체나 심지어는 사교단체나 친목단체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주님을 섬기도록 하나님 앞에 봉헌되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실이며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주 나타나시고 임재하시기를 기뻐하시며 따라서 그곳이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장소와 어떻게 놀랍도록 구별되는 지에 대한 이해가 없이 사람들은 다분히 세속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대하고 있고, 이러한 교회에 대한 생각들은 형식적이고, 거칠기 짝이 없는 무례한 교회 생활을 부채질하고 있다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참된 영광의 회복 없이는 이 땅을 고치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단 한 톨도 완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일합니다. 주님이 큰 권능을 부어 주셨을 때만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일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장엄하고 찬란한 영광이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섬기면서도 이거는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서 섬기지만 그러나 교회에는 이 이상의 무엇이 약속되어 있다라고 하는 소망과 전망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다해 수고하고 애를 쓰면서도 우리는 만족할 수 없는 갈증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당에 가득 찼을 때 수많은 거리를 방황하며 자신의 인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도무지 바뀔 수 없던 그 사람이 교회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현존해 계시는 하나님의 압도하시는 영광 앞에 거꾸러지고 거기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거룩한 성도들과 한 무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를 한없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받아드리게 되는 그런 교회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영광으로 교회가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사무치는 은혜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고쳐진 것만큼만 세상을 고쳐질 수 있도록 경륜된 것입니다.
병들어 있는 교회가 병든 세상을 고치는 것은 나병환자가 짓물러 가는 손가락 사이에 칼을 들고 또 다른 나병환자를 수술하겠다고 하는 것과 꼭 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치료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가치를 버리고 세상적인 가치로 매몰되어 가는 교회의 위기를 어떻게 건질 수 있겠으며, 하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 받은 성도들이 땅엣 것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지극히 세속적인 삶에 안주해서 떠나지 않으려고 할 때에 어떻게 그 연줄을 끊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서 사는 백성들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순종하지 않고, 주님의 계명을 보고도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기쁨을 모르는 성도들로 교회가 가득 찼을 때 어떻게 그 교회가 거듭나고, 새로워지고, 변화되고, 역사가 일어나서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교회로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교회를 떠나서 살던 죄인들은 그 많은 죄 가운데 살 때에 느낄 수 없었던 두렵고 엄위로우신 하나님을 그 교회당에 나왔을 때 두려움과 떨림으로 무릎꿇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교회, 주님의 도움이 없거나 멀어진 것처럼 절망스럽게 세상과 더불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당신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백성들의 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도 교회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함으로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광을 꿈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보여줄 수 없다면 온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지진이 일어나서 땅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누가 그 영광을 위한 제물이 될까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대하7:1中)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며, 그 영광은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영혼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앞에서 살게 묶어주시는 권세가 바로 그 권세의 나타남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씀을 드렸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얼마나 부패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 앞에 그러한 놀라운 영광이 나타나게 될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고, 순결하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가장 잘 반사할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교회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옛날 속담에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지를 모른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속담이 있습니다. 뭐가 뭔지 모를 때에는 아무렇게나 교회 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막보는 행동을 교회 와서 제멋대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가 얼마나 거룩한 곳이고,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곳인지를 모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의 배후에서 교회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그 거룩한 운영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시가 몇 푼 짜리의 건물, 그리고 얼마씩 주고 산 물품들만이 눈에 보이고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에 굴러 들어온 사람들만이 눈에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권세와 그리고 그를 통해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을 체험하고, 그 하나님의 거룩의 빛 앞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게될 때 그는 야곱이 벧엘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거기가 바로 구별된 장소임을 깨닫게 됩니다. 모세가 호렙산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뵈옵자 거기가 발의 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서 서야할 두려운 곳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사실은 그 두려움 속에 자기를 두는 것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본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곳인가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사실 만약에 교회 안에 이러한 영광이 나타남이 있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에 굴복하는 그러한 자기복종, 그 영광의 빛 앞에 눈이 멀도록 엎드러지는 인간의 속속들이 그 내면의 세계가 파헤쳐져서 새롭게 갱신되는 그 영광이 역사하는 힘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교회는 짐승들이 모인 돼지우리지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이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명령하시는지, 우리가 그 뜻대로 사는 건 뭘 의미하고, 안 사는 것은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예배드리는 형식은 기독교 적이고, 그들이 기도 시간에 부르는 이름은 하나님일지 모르지만 그건 성경이 가르쳐준 기독교가 아닙니다. 꼭 이상한 옷 입고 돌아다니는 교주를 좇아 다녀야 지만 이단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정통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이단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영광이 교회에 가득 차는 것 없이는 교회는 교회다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은 각각 다르겠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그 여호와의 전에 들어선 사람, 누구든지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충만한 영광이었습니다. 솔로몬이 기도 드렸지만 솔로몬 혼자 그 영광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있더라도 바로 그 순간에 이 성전에서 이전에 일어나지 않았던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들이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내려오고 계심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분명한 임재 속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당신의 뜻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한 날이 그러한 충만한 영광의 날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사모되어지지 아니하면 그러면 여러분들이 진정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할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 싶다라고 하는 희망과 진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 열망을 가지고 있느냐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대한다는 말과, 열망한다는 말이 다르다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어째든 이러한 놀라운 영광이 여기에 찼고, 우리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이 때보다 훨씬 풍성한 진리의 계시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 풍성한 복음의 진리를 이런 엄위로우신 방식으로, 이런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나타내 보여 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그곳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며, 그 어디서보다도 그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맞이할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러한 분명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그러한 열망을 간직하고 주님이 그렇게 임하셔서 특별한 영광을 드러내 보여 주심으로 그 영광의 권세 앞에 철판과 같이 두꺼운 심장을 가진 죄인들이라도 그것이 꿰뚫어져서 그 앞에 엎드려지는 그러한 승복과 감화의 역사가 계속되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소망하며 나의 어떤 것들이 이런 하나님의 영광에 나타남의 약속들을 가로막고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지만 그 사람이 비로소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전을 가득 채운 이 놀라운 역사는 마지막에 일어난 일 이었습니다. 그 앞에 보면은 먼저 두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러한 주님의 나타나심이 솔로몬이 기도를 마친 후에야 이루어 졌다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번제물과 제물이 준비되고 그 위에 하나님이 보내신 불이 그 번제물과 제물을 모두 사르는 것과 함께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두 가지 요소 중에 뒷부분에 나오는 이 번제물과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번제물, 제물 두 가지가 나오는데 제물은 넓은 의미의 제물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번제물은 태워서 바치는 제물 중에서 특별히 태워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 이예요. 그래서 이 번제물은 특별히 제사 중에서 하나님을 향한 강한 자신을 헌신을 표상하는 제사로 하나님 앞에 바치던 제물입니다. 그리고 이 번제물은 반드시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뭐를 발견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주님 자신의 거룩한 말씀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셔서 그 교회에 들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의식하기 어렵고, 혹은 의식한다고 하더라도 매우 희미하거나 애매모호하게 의식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주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애매모호 할까요? 왜 물에 물 탄 것 같고, 술에 술탄 것 같고 그렇게 변화가 없는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라고 하는 신자의 가슴속에 인쳐주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라고 인쳐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애매모호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놀라운 역사가 하나님 혼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어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기도응답 받고 나서 뭐라고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야’ 그렇게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는데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하는 사실은 하나님에게는 어떤 의무가 있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면 본전입니다. 들어주시면 은혜지요.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뭔가를 받을 때 그때에 우리는 당연히 주실 것을 믿고 간절히 기도했으면서도 ‘하나님이 이런 것까지 다 주시냐고’ 그렇게 감격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주셔도 그건 하나님의 의무가 아닙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기도한 사람들에는 투자한 게 있습니다. 간절히 매달리니까 무릎이라도 아팠을 거고 금식기도 했으면 밥이라도 굶었을 거 아닙니다. 밥도 안 굶고, 철야도 안 했고 무릎도 안 꿇었으면 시간이라도 투자했을 거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한 거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 것도 안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그것은 당연히 ‘도대체 하나님 하시는 일이 뭐야, 당신 자식 먹여 살리는 거지 그런 태도를 갖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고 투자를 많이 한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눈물이 앞을 가리는 감사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기도 안 하는 사람 치고 감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꽃밭에 누워서도 불평합니다. 꽃향기가 너무 진하대나, 그렇게 살아가면 안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교회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시는 것은 그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입니다.
제가 한번 설교시간에 한 것도 같은데 신학교 강의 나가는데 어떤 학생이 와서 점심 사 주겠다고, 매일 좇아 다니면서 점심 사주겠다고 나이 많은 목사님인데 그 사람 얼굴을 보니까 밥 얻어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칼 자국이 얼굴에 쫙 나있었습니다. 분명히 밥 사주고 내 점수 왜 이렇게 주었느냐고 따질 것 같았습니다. ‘나도 혼자 밥 사먹을 돈 있는데, 내가 왜 너 밥을 먹으랴’ 바쁘다고 싫다고 내가 학생하고는 점심 잘 안 먹는다고 그러고 자꾸 뿌리쳤습니다. 그런데 한 달 내내 좇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가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하고 싶지 않고 하나만 얘기하는데 뭐냐하면 그 사람은 정말 바울 같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뭐라 그러냐 하면 자기가 목포에서 깡패였었답니다. 그래서 김태촌이가 자기 밑에서 놀던 아이이고 그러니까 갑자기 밥을 먹다가 체한 거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하는 얘기가 난 그때부터 빠찡꼬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벌써 알았고 그거 돈 뜯으러 다니는 사람이었답니다. 자기가, 그래 가지고 그날도 술을 잔뜩 먹고 돈을 뜯으러 갔대나, 갔다 오는 길이었나 하는데 고래가 되도록 술을 마셨는데, 교회가 가고 싶더랍니다. 가끔 그랬답니다. 그래서 술 취한 사람 교회 올 때 박대하면 안됩니다. 술 취한 사람 와 가가지 예수 믿는 거 저는 여러 번 봤습니다. 그래서 왔는데 다행히 그 교회가 은혜 받은 교회인지 열려 있어서 술을 먹고 골목에다 오줌을 싸면서 교회까지 왔는데 교회당 문을 탁 여는데 강한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더니 뜨거운 바람 같은 것들이 확 불어오더니 그 자리에서 확 거꾸러졌는데 입, 코 뭐 그냥 정신없이 피가 쏟아졌습니다. 뭐 어디 부딪혀서 쏟아진 게 아니라 그냥 그 순간에 확 하고 거꾸러지면서 피가 정신없이 쏟아지더랍니다. 거기서 술 먹은 사람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나를 용서해 달라고 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조직 폭력배의 세계에서 손 씻고 신학의 길을 걸어가서 목사가 됐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간증 들어보는 거 처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르게 간증을 합니다. 그런 것은 누구의 수준이겠습니까. 나는 그 교회, 그 양반이 찾아간 교회가 매주일 마다 사람들이 가서 피 흘리면서 거꾸러진다고는 생각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서워서 오겠습니까. 대한 예수교 장로회 피바다 교회, 그래서 교회 직원들이 바게스 들고 다니면 겁나서 오겠습니까. 교회정문에는 ‘피 토하고 쓰러질 각오가 되 있습니까?’ 그러고 교회 정문에 게시판이 붙어있습니다.
평소에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만 그런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골목도 아니고, 나이트 클럽도 아니고, 자동차 속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그 교회, 그리고 그 교회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도 아니고, 지나가다가 들른 그 교회에서 하나님이 피를 쏟고 거꾸러지게 만드시느냐, 그걸 무슨 공식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번 흉내 내 볼까요 똑같이, 자기가 안 변해서 하도 미운 사람, 한번 술 실컷 먹고 객기부리면서 오줌누면서 골목을 누비다가 아무 교회나 한번 문열어 볼까요. 그러면은 자기도 그렇게 불을 받고 피 토하면서 쓰러지겠어요. 해봐요 소용없습니다. 그게 무슨 공식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누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죽고, 자기 자신이 드려진 그러한 완전히 자기 죽임, 이것이 없는 사람들은 일생을 살면서 한번도 가슴속에서 뼈저린 슬픔이 우러나오면서 교회에 참된 부흥을 위해 기도해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기도에 있어서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지속적으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뼈저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할 수 있다면 그는 살아 있는 기도의 영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불순종하고 개판같이 사는 사람들은 교회의 부흥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게 있으니까 말은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주기도문의 순서를 따라서 기도 못합니다. 아무리 주기도문을 배워도 그 기도가 가슴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 물론 하나는 와 닿겠지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런데 그것도 가슴에 안 와 닿아요 왜냐하면 일용한 양식 같은 것은 관심도 없습니다. 평생 먹을 재산을 주시옵소서 그런 것에 관심이 더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인데 일반적으로 그 사람같이 아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데 경우도 제외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외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게 그 어머니가 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오랜 세월 기도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오시게끔 이렇게 붉은 양탄자를 펴는 일이 있습니다. 펴나도 물론 하나님이 안 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펴진 길을 따라서 주님이 오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하면은 제물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바치는 전폭적인 헌신이 없는 그러한 사람들이 교회의 부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가득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보면은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자기만족입니다. 내가 적어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고 하는 자기긍지,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에 대해서 말을 잘 하는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의 육체를 쪼개어서 주님이 오실 길로 내어드리는 헌신을 가진 사람,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는 죽어서 주님이 오시는 도구가 되고, 길이 되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자기를 드리는 사람,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나 발견하게 되느냐 하면 그 하나님의 전이 영광으로 가득 차는 것과 함께 시발이 뭐로부터 이루어지느냐 하면 불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불이 우선 첫째는 뭐냐하면 불이 온 근원이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시는 부흥의 역사는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그런 불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는 열심히 노력합니다. 목회자들도 이렇게 보면은 게으른 사람들의 교회는 좀 헐렁합니다. 꼭 뜯어진 밀가루 봉지모양 헐렁합니다. 뭐가 자꾸 빠져나갑니다. 진짜 부지런한 사람들의 교회는 좀 단단합니다. 그런 교회에 한번 등록하면은 안 나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사생 결단하고 물고 안 놓으니까 말입니다. 그런 것들에 의해서 어느 정도 교회가 차이 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은 그런 찬란한 영광으로 교회를 채워서, 그 자리가 지극히 영광된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놀라운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우리는 매우 심각할 정도로 중요한 교훈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뭐냐하면 교회에 그러한 부흥의 영광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면 누구를 감동시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면 이제 그 다음 질문이 나오는데 뭘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씀 드리면 여러분들은 좀 막막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지’ 맞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뭘 얘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주의 전에 충만하게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무엇에 대한 응답이었습니까? 헌신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물론 앞에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와 헌신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뭐가 있었냐 하면 실제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이 있는 그러한 아주 성대한 제물을 하나님 앞에 바친, 제가 지금 숫자를 다 기억을 못하겠는데 엄청난 량의 번제물을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그런 엄청난 제물을 하나님 앞에 바친 그 헌신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불을 내리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신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열심히 주를 위해서 산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실은 주를 위해서 산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수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도 나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좇고, 주의 일을 하였고’ 쭉 자기들의 살아온 삶이 주를 위한 삶이었음을 이야기하는데 주님께서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그럴 수 있다 이 얘기입니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은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 헌신한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은 헌신을 한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했다는 그 말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하나님을 향한 고정된 목표의식과 그분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과 누리고 있는 것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서 그분께 바쳐져야 된다 라고 하는 신령한 각오와 신령한 간절한 사모함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였다 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발견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을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주권이지만은 주님이 그런 영광을 보내시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헌신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제물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주일날 하나님 앞에 헌금하려고 돈을 미리 떼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월요일쯤 떼어 놀 수도 있고, 아니면은 토요일쯤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뭐 성경이 어떻게 우리에게 명쾌하게 주일날 헌금하는 돈은 이런 것이다 딱 잘라서 얘기하지는 않지만 제 신앙적인 판단으로는 일단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해야 되겠다’ 그러고 봉투에 넣으면 그건 건드리면 안됩니다. 그건 벌써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데드케이트 된 것입니다. 헌신 된 것입니다. 주정헌금도 봉투에 넣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 앞에 바쳐진 것입니다.
제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물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 바쳐졌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바쳐졌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에게만 하나님에게만 독점적으로 바쳐진 것이 제물입니다. 무슨 목적으로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목적으로 하나님께만 하나님만을 위하여 최선의 것으로 다 바쳐진 것, 그것이 제물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뭐라고 부릅니까? 거룩한 것입니다. 소를 바쳤고 걸어 다니는 저 소는 거룩하지 않은 한우입니다. 그런데 잡아서 각을 떠서 제단에 헌물 한 그 순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돌아다니는 소는 잡아서 이렇게 먹어도 되고, 저렇게 먹어도 되고, 이렇게 잘라도 되고, 저렇게 잘라도 되고, 이건 먹어도 되고, 저건 안 먹어도 되는데 일단 하나님께 바쳐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것은 엄격하게 율법의 규례를 따라서 제사를 드려져야 하고 바쳐진 제물들의 용도가 성경에서 규정하는 데로 쓰려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번제물과 제물이 갖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은 한번 보십시오. 그런데 이 제물을 얘기하기 전에 하늘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불이 나옵니다. 이 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주 궁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거 하나는 아주 매우 신령한 의미의 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불도 두 종류입니다. 뭐냐하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날 때에 제물을 쪼개놓고 그 사이를 지나간 불이나 열왕기상 18장에 그 바알 선지자 앞에서 엘리야가 장작을 쌓아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그 번제물을 태운 그 불과 여기의 이 불은 같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 임하신 그 불은 다릅니다. 그 불은 이 불과 같이 신령한 불인데 물리적으로 뭔가를 태우는 그런 힘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타지 않는 그런 불꽃이었단 말입니다. 이 것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겠지만 하늘로부터 물리적인 불이 불덩어리가 계속 떨어져 내려왔다 그러면은 사실 말이 좀 안됩니다. 하늘에서 불꽃놀이 하는 것도 아닌데, 불을 던져서 그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면 이상합니다. 신령한 불이 쭉 내려오면서 이제 헌신하기 위해서 바쳐진 제물이 있는 그곳에 임하면서 그 신령한 불이 물리적인 불탐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불이 그러한 신령한 불이 타지 않는 것으로 끝난 것은 제물이 없었던 때였고, 출애굽기에서처럼, 그리고 그 신령한 불이 물리적으로 불타는 효과를 가져와서 제물을 모두 태워 버린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바친 헌신의 제물이 있는 그곳에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추측일지는 모르지만 만약에 호렙산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서도 만약에 이 모세가 보다 성숙한 자세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출애굽을 위해서 모든 희생하는 마음으로 그러면서 뭔가 제물을 바쳤더라면 하나님께서 타지 않는 불로만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보여주시는 것 같이 타는 불길로서 그 제물을 흠향하시므로써 당신이 그 헌신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을 지도 모릅니다. 어째든 그거는 우리의 추측 범위 밖이지만은 그러나 여기서도 열왕기상에서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 공통적인 것이 뭐냐하면 이 불이 임해서 제물을 확 태우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냐 하면은 하나님이 그들의 헌신을 받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은 당연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고, 임재의 현현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하심은 누군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버리는 희생 속에서 그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다 그 하나님이 내리시는 그 불에 자신이 바친 모든 것이 자기의 존재까지라도 그 불길에 삼킨바 되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께만 자기를 다 구별해서 바친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성경에서 지루할 정도로 많이 보게 됩니다. 대표적인 경우를 구약에서 하나, 신약에서 하나 듣는 것으로 우리가 이런 입증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선 호세아 선지자를 한번 보면은 호세아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당신의 살아 계신 말씀의 영광을 그 시대에 보여 주십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호세아 선지자의 말 앞에 엎드려지는 그러한 놀라운 부흥의 권세가 나타난 것은 아니였지만 그러나 돌이킬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호세아 선지자의 마음 안에 불타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가장 찬란하고, 권세 있는 사람과 그 예언의 방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진리를 하나님 자신의 타오르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그 시대를 향해 그대로 전해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온전한 영광을 드러내었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도구가 되었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 호세아 선지자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개혁시키시고,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인생뿐만 아니라 자기의 생명,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가정생활, 자기의 결혼 이 모든 것까지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선지자로 부르셔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게 하시는 철저한 도구로 쓰여지도록 하나님 앞에 다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에는 이런 사실을 더 잘 보여줍니다. 그는 독주와 포도주와 술을 마시지 않기로 소주를 마시지 않기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미리 작정된 나실인이었습니다. 구별된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나실인은 민수기에 보면은 포도주나 이런 술을 마실 수 없게끔 되어 있었고, 부모가 죽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새로운 윤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그러는데 그들은 부모가 죽어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 부모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워낙 바쳐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철저한 자기 복종, 그 속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 자기의 소유도 없고, 안락하게 자랄 수 있는 모든 환경도 모두다 버린 상태에서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바쳤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목도 하나님 앞에 바쳐졌습니다.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사야 40장에 약속된 육체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는 놀라운 구원의 계시는 알리는 나팔수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교회에 가득 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영광의 날이 있기 전에 그 영광의 날이 있기까지 남이 알지는 못하는 곳에서 자기를 온전히 부수어서 하나님 앞에 바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람이 그 교회의 목회자 일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목회자가 아닌 예상을 뒤엎은 다른 이름 없는 평신도 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교회들이 모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줄 수 있는 영광으로 교회가 가득 차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열렬한 소망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렇게 그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헌신하고,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헌신을 타고 하나님의 교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누가 그 사람이 될 것인가, 누가 그 사람이 될 것인가.
1907년 평양에 대 부흥이 일어나기 직전에 장대현 교회에서 말이죠 장로였습니다. 길선주 장로였습니다.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도사라고도 불리우고, 또 어디서는 장로라고도 불리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외국인 선교사였던 걸로 기억이 되는데, 중국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다 말해주면서 ‘조선 교회에 이러한 영광스러운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제단 앞에 자기를 다 죽기까지 제물로 바칠 사람이 누구뇨?’할 때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섰습니다. 길선주 전도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여러분 새벽기도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러분 해보면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옷도 따뜻한 옷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교회 건물도 있으니까, 우리 교회는 워낙 넓어서 춥기는 하지만은 그래도 아직 얼어죽은 사람 없습니다. 시간도 느지막하고 그때는 길선주 전도사가 어느 장로 한 사람하고 자기가 그런 결심을 하고 나서 이제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해야 되겠다, 새벽에 계속해서 교회에 나오니까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내 사실은 아무한테도 얘기 안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내가 이런 의도를 가지고 기도한다’고 그러니까 ‘그럼 나도 붙여달라’고 그리고 장로님하고 둘이 나와 가지고 매일 새벽마다 4시에 열심히 기도한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농촌 사회니까 가로등도 없고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 가난하던 시절에 나와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나오라고, 나오라고 한번 일어나 보라고 하루만 나와도 괜찮다고 이래도 안 나오는데 그 시대에 400명이 새벽에 모였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600명, 700명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그거는 하나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의하면은 새벽기도에 모여서 얼마나 뜨겁게 눈물로 기도하는지 그 어두운 새벽하늘을 신령한 성도들의 울부짖음이 가득 메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가 무슨 기발한 것도 아닙니다.
어떤 교수가 ‘새벽기도 없어져야 된다’고 왜 그러느냐 하니까 ‘이게 옛날에 할머니들이 새벽이 되면은 잠 안 오고 무릎퍅에 바람 나와 가지고 정한수 떠놓고 빌던 게 무속신앙하고 만나 가지고 이게 이렇게 된 거다’라고, 아니 새벽기도 한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면은 이해가 좀 가시지 않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무슨 지금 길선주 장로가 천지 신명에게 빌라고 지금 나온 것이 아닙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니까 새벽시간이라는 것이 성경 속에서 떠올랐고, 그래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가 어떻게 하면 이 조선 교회에 부흥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 자기가 바치고 생각한 게 그 새벽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도, 나도 나도 할래 그러고 모인 게 6, 7백 명이 모인 것입니다. 4백 명쯤 모이니까 더 이상 비공식적으로 하면 안되겠다 해 가지고 그러면 4시에 종 칠 테니까 나오고 싶은 사람, 나오라고 그래서 4시에 종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새벽 기도의 효시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를 바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일 하십니다. 물론 자기를 다 바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이용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서 저 사람에게 변화를 주시는데 저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과 그런 변화에 도움이 되는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외국 잡지에서 보니까 빌딩을 오목 거울처럼 만들어 가지고 엄청나게 큰 빌딩을 태양 빛을 받아 가지고 초점을 맞춰 가지고 절로 내려보내니까 이런 쇠가 녹습니다. 구멍이 뚫어지면서, 그러면 가 가지고 그 건물의 거울을 만져보면은 불덩어리 같겠지요? 아닙니다. 차갑습니다. 그 열을 반사해서 전해주기는 했는데 자기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한 사람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역사입니다. 내가 만약에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에 대해서 전한다 그럴 때에 그 사랑이 내 가슴에 저며야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때 그 사람이 녹아진 것이 나하고 상관 있는 거지, ‘봐라 저 사람이 저렇게 녹아 졌으니까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는 구나!’ 왜 어떤 때 그런 논리가 성립됩니까? 하나님이 나를 관통해서 사용하실 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말하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하나도 안 두려워하고 농담하는 친구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동화 얘기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어떤 변화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는 도구가 되고, 이 이용 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는 하나님께는 죄송한 얘기지만 하나님이 그냥 도구로 이용하시는 것뿐입니다. 그걸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정말 이런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 차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런 하나님의 가득 찬 영광을 소망하면서 그 일을 하나의 자신이 모든 삶의 목표를 고정시키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를 다 버린 사람들, 그 희생을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바친 사람들, 그래서 그 사람의 그 헌신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 차기 전에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났느냐 하면 제물을 모두 태우는 일이 먼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러한 부흥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때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그런 일들을 위해서 자기를 다 바친 사람들, 그 사람들 속에서 먼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작가가 그랬어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부흥을 위해서 열렬하게 자기를 바쳐 기도할 수 있다면 이미 그 사람 마음속에는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는 그렇게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경험된 것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할 뿐이지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 생각에 그치는 것이지 실제로는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가 무엇이고, 그 화해를 토대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지를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 눈에 ‘아, 저 사람 하나님과 불화하구나! 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다 잃어버렸나봐! 예전에는 그렇게 사랑으로 가득 차더니 변했잖아’ 이게 눈에 보이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목이 뭔지, 왜 저렇게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지 운 좋은 날은 일찍 끝나는데 왜 어떤 날은 늦게 끝나는지’ 이러고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화목을 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용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그들의 마음속에 부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해도 괜히 남들이 하니까 따라하는 것입니다. 따라하는 거지 아무 것도 아니라 이 얘기입니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누가 이렇게 다 자기를 드려서 헌신의 도구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 세상에 돌팔이 그리스도인이 참 많습니다. 옛날에 제가 고등부 때 지도한 아인데 지금은 다 시집갈 나이가 훨씬 넘었습니다. 얘는 맨 날 기도하는데 ‘내 동생 훈이가 주님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맨 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얘는 옆에서 질색을 하는 것입니다. ‘누나, 나 죽기 싫어, 나 살래’ 아니 순교하려면 지가 하지 왜 믿음도 없는 동생 순교하게 해 달라고 그래서 아이고, 참 한심하다. ‘누가 나를 위해 갈꼬’ 할 때에 자기 안 가겠으면 가만히 있었습니다. ‘얘요, 얘’ ‘제요 제, 제 백수거든요 제요’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겠습니까? 지가 안 갈려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삼등은 합니다. ‘오늘날 누가 나를 위해 자기를 다 드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을 위해 너희 중에 누가 이 거룩한 제단에 생명까지 모두 내 놓겠느냐’ ‘나를 보내시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이 만나 주시고 큰사랑을 베풀어주신 제가 여기 있습니다’ ‘아무도 안 가고 너밖에 가는 사람이 없는데 괜찮겠느냐?' ‘주님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참 다운 내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나를 이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한 영광, 그 거룩한 교회의 부흥을 위한 불쏘시개로 저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시골에서 불 댕기는 일이 생각이 납니다. 솥을 걸어놓고 그 이상하게 밥도 장작불에다 하면 맛있습니다. 그래서 불을 이렇게 할 때, 저쪽에서 꼬챙이 하나에다 불을 댕겨 가지고 옵니다.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합니까. 이렇게 불면 꺼질새라, 이렇게 가리면서 불을 붙입니다. 아궁이에다 붙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밖으로 휙 버리거나 아니면 아궁이 속에 넣어 가지고 다 태워버립니다. 붙여지는 순간만큼은 얼마나 고귀하고, 귀합니까? 누구냐 이것입니다. 제발 그런 것은 하지 마십시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누가 주의 제단에 나를 위해서 자기를 다 바칠꼬’ ‘하나님 제예요, 제 놀거든요, 제 은혜 많이 받았어요, 제 특별한 사랑 받았거든요.’ 그런 것은 좀 하지 말라 이 예기입니다.
성경이 그런 식으로 얘기하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뒤집어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애들아 너희들이 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대도 내가 너희에게 부흥을 안 주는지 아느냐?’ 가만히 있다가 ‘제 때문이래요, 젠 십일조도 안하고, 기도도 안해요’ 정말 가슴깊이 마음을 열고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그런 식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런 사람 때문에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위해 갈꼬’ 그럴 때 ‘나를 보내소서,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게 잘난 척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나를 보내소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 앞에 다 드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눈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걸 이미 요한복음 21장에서도 가르켜 주셨습니다. 베드로를 향해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네’ 세 번을 얘기한 다음에 ‘젊어서는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사람들이 너를 띠를 띠어 너가 원치 아니한 곳으로 너를 끌고 가리라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임을 가리키심이러라’ 베드로가 뭐가 그럽니까? ‘예수님 제는 어떻게 되요?’ ‘제가 누군데?’ ‘요한 이잖아요, 주님이 품에 앉아서 맨 날 까불던 애 제 어떻게 할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셔요. ‘알 것 없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 아이를 살려두든지 말든지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 너는 너 길가라’ 이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자기를 온전히 다 드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처럼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다는 사실 때문에 실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 아니 그 사람보고 지금 일하는 거 아닙니다. 누구,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금 사는 것인데. 그리고 어차피 놀라운 역사는 우리 힘을 합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이런 영광스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기도를 하면은 우리가 얼마나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헌신을 하면은 얼마나 하겠느냐 이겁니다. 물질로 하나님 앞에 바치면 얼마나 바치겠습니까. 전 재산 하나님 앞에 바친 사람 있습니까?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일주일씩 사십 일씩 금식기도한 사람이 이 중에 있습니까? 한번 거짓말 같을지 모르지만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가슴 저미는 슬픔을 안고 ‘하나님, 나를 죽이셔서 내 쪼개진 육체 사이로 주님의 열린 교회에 오실 수 있다면 하나님 내 몸을 동강 내시옵소서’라고 기도해 본 사람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저에게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답을 원해서 지금 묻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모두 각자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진정으로 영광스러워 지는 것이 무엇이고, 그런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 차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네가 내 앞에서 무엇이냐?’라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물이 바쳐졌던 것처럼 자기를 온전히 다 드려서 주님이 밟고 오실만한 번제물로써 자신을 다 드린 사람들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 가득 차는 것은 오직 ‘자신의 죄,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나 때문에 방해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나에게 그렇게 수많은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이 만약에 당신의 의지를 좇아서 우리에게 충만한 영광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채우고자 하시는데 내가 혹시라도 주의 그 거룩한 계획에 방해가 되면 어쩔 것인가’ 하는 뼈저린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세상에 못난 사람들이 구역장 되가지고 구역 식구들 욕하고 다니는 사람들하고, 목회를 하면서 자기 교회 교인들 흉보고 다니는 사람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구역이 그 모양 된 것은 자기 때문이지, 자기가 안 죽으니까 구역식구들이 안 변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어디에서 무슨 이유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가 이 교회에서 뭔가 조금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 만한 부분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고, 뭔가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부분이 있으면 나 때문이지, 이렇게 얘기하니까 ‘주님이 마음 아파하는 거는 다 우리 김목사 때문이래’ 그리고 도망가서 되겠느냐 이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뼈저리게 ‘내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이 소원함이 정말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고라도 그런 하나님의 영광으로 교회를 가득 채우시는 그 하나님의 거룩을 보기 원하는 사모함, 마치 값비싼 진주를 만난 진주 장사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소유를 진주를 사고 싶어하는 것,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의 모든 가산을 다 팔아서 그것 하나를 사고 싶어서 자기를 모두 바치는 그러한 사람의 마음과 같이 내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리고 있는가’ 그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람들과 사귀되 거룩한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힘쓰고, 신령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힘써야 됩니다. 19세기에 스코틀랜드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상 유래 없이 자신들의 죄를 깊이 회개하면서 그 중에 한 가지가 회개가 수많은 제목이 나오는데 그 중에 눈길을 끄는 하나가 뭐냐하면 거룩한 친구들과 교제하기를 게을리 했던 죄를 뼈저리게 회개했습니다. 속된 친구들을 좋아한 죄를 회개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이 함께 모여서 대화를 하고, 하면은 뼈저리게 ‘맞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거룩한 교회에 주의 신령한 영광으로 가득 채우시는 그러한 복된 역사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쓰여질 수 있을까’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게 하고,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거룩한 목적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활화산같이 타오르지 못하게 만드는지 그거를 서로 살피면서 격려하고 그 속에서 주님의 영광의 도구가 되고 싶은 거룩한 소원함 들이 공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렇게 보면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고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될 도리는 알기 때문에 이 기본적인 것들은 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 같은 경우는 진짜 칭찬 많이 해주고 싶습니다. 요새는 주일학교 늦게 시작하는데 옛날에 주일학교 8시까지 추운 겨울에 나오고, 7시 40분, 어떤 때는 7시까지 나오라 그럴 때 있었습니다. 내가 시킨 것은 아닙니다. 전도사님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 같이 나옵니다. 그 추운 겨울에 그런 교회가 흔치 않습니다. 결석 안 하는 교사들 연말에 상주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하는 것입니까? 기본적으로 신앙이 들어가 있고, 말씀에 대한 은혜가 있으니까 기본적인 도리들을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도리 가지고는 부흥이 안 옵니다. 그걸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자기를 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거기에서 아주 고루한 얘기인지를 모르지만 지사충성의 맹약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죽어서 그 죽음 때문에 나의 사망이 꽃 필수 있다면 내가 기꺼이 이 일을 위해서 생명을 다 드리겠다’ 말로는 떠벌리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속으로 하십시오. 너절하게 사는 사람들이 맨 날 생명 버린다고 그럽니다. 죽었으면 수 십 번도 더 죽었을 것입니다. 떠버리지 말고, say amen by your life 너의 삶을 통해서 아멘을 말해보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이 그렇게 기본적인 의무만 하고 자기 것을 다 드리지 않으니까 항상 복선을 깔아놓고 자기 삶이 있는데 줄을 쳐놓고 ‘이만큼은 줄 수 있고, 나머지는 안 된다’ 그게 땅 팔아 감춘 아나니아와 삽비라하고 똑같은 심보지 뭡니까. 아니 언제 바치라고 그랬습니까. 줄 그어놓고 ‘내가 주일학교를 위해서는 요만큼만 헌신할 수 있고, 내가 청년부를 위해서는 요만큼만 헌신할 수 있고, 내 구역을 위해서는 요만큼만 까지는 내가 바칠 용의가 있다’ 언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치라고 그랬습니까. 아니 안 바친다고 그러면 누가 뭐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땅을 팔기 전에도 자기 거고 판 다음에도 자기 건데 누가 뭐라고 그럽니까. 하나님이 구원 베풀어주시면서 ‘너 이거 구원해 주니까 너 나 뭐 줄래?’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원 시켜놓고 ‘너 갈대로 가라’ 그런데도 그 사랑에 감격해서 ‘내가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고 싶습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갈라놓으라고 그랬습니까? 아니 자기 다 가지십시오. 베드로 사도가 그랬습니다. '땅을 팔기 전에 너 땅이 아니고 팔고 난 다음에 너 것이 아니냐?' 그런데 마음보가 잘못됐다 이것입니다. 교회가 강력한 부흥이 있을 때 그런 마음이 하나님의 눈에는 거짓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불의로 보이는 것입니다. 태워버리시는 것입니다. 죽어야 됩니다.
한참 운동권이 극성을 부릴 때 거기 감옥소에 있다 나온 어느 형제가 얘기하는데 충격 받았습니다. 쭉 모여 앉았는데 ‘야 아무 아무개가 사형언도 받았다는 소식이 들여오더라’ 그러니까 ‘영광입니다’ 우리 동료들 가운데 민주주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나왔으니까 우리의 영광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헛된 인간들이 자기의 사상에 헌신하는 것만큼도 헌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런 영광으로 교회가 가득 차기를 꿈꾸고,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모두 신앙적인 허영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은 이 솔로몬의 성전을 가득 채운 영광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드리고 있는가, 우리 안에 부흥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주님이 교회를 그런 권세로 가득 채우시는 것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면을 해부해 보면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런 일들이 오면은 나는 박수를 치겠다는 거지 ‘나를 쪼개소서 나를 떠서 주의 제단에 불 위에 드리소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희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 한 사람만 만나면은 아주 놀랍도록 기뻐하시면서 그를 통해서 당신이 하고 싶어하시는 일들을 미리 보여주시고, 다 이루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그 시대의 앞뒤로 제사제도가 있었고, 수많은 짐승들이 주의 제단에서 각 떠서 혹은 죽임을 당해서 태워서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솔로몬이 드리는 제사의 바쳐진 이 제물들은 얼마나 복된 제물들입니까, 다른 제물들은 하나님 앞에 흠향 되지 못하거나 혹은 하나님께 받아드려 졌다고 하더라도 그냥 일반적으로 불태워 지고 죽어 갔는데, 이 제물은 사람이 지른 불이 아니라 하늘부터 내려온 거룩한 불, 신령한 불, 하늘의 불로 자신들이 다 태워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을 모두 삼킨 후에 주의 전이 영광으로 충만해 지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누가 오늘 우리를 위하여 갈꼬’ 누가 하나님의 교회의 이러한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태울 그 불길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남김없이 자신을 하나님의 전에 바칠 것인가 대답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3. 교회의 영광과 기도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대하7:1上)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 찼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는 이 주전에 들었고, 하나님의 전이 이러한 주의 영광으로 가득 찬 그것은 오늘날 말씀의 영광에 의해서 재현되야 한다는 사실도 그때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 차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하나님 앞에 헌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제물과 번제물이 바쳐진 그 때에 여호와의 불러오시는 그 임재 가운데서 그 바쳐진 헌물들을 사르시고, 급기야 주의 영광을 주의 전에 가득 채우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줍지 않는 하나님 주권 사상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나태를 부채질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이시며,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분의 통지를 벗어날 수 없고, 공중의 나는 새 한 마리도 주님의 그 주권적인 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선조들이 이해하던 하나님 주권 사상과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주권 사상은 얼마나 많이 탈색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분들은 전심으로 주를 위하여 살면서 주님의 뜻이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 주권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지지 않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온전히 드리는 번제와 같은 헌신이 부족한 이기적인 신앙이 유행하는 시대에는 주께서 하시리라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안 해도 괜찮으리라 하는 이야기와 동의어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은 안 되는 것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영적인 부흥의 기사를 편집한 호로시우스 포너는 청교도들의 삶의 특징을 묘사하는 가운데 그분들은 넘치도록 수고한 사람들이었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넘치도록 수고한 삶이었습니다. 기력이 진하도록 수고한 삶이었고, 자기를 온전히 짜서 하나님 앞에 바친 그러한 생애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자기 자신을 주목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주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찬란한 영광을 새롭게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어떻게 말하든지 그것은 죄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제 다른 주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번제물을 모두 올려놓고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불이 그 모든 제물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 찬, 영광의 전이 되게 하기 이전에 제물이 바쳐져서 불태워지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 전에 그 앞에는 긴 솔로몬의 기도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을 지어놓고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봉헌을 하면서 이 솔로몬이 감격의 찬 마음과 고양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읽으면서 즉각적으로 느낌을 받았겠지만 이거는 성경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은 대단히 영적인 사람이었고, 한 때 하나님의 손에 강력하게 사로잡힌 선지자와 방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히 이해했고, 그 시대에 자기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 전을 지어서 바칠 때에 그 헌신을 보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이 무엇이고, 그 백성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봉헌된 성전이 지어진 그 때에 이제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그분을 섬기며 살아야할 지에 대한 탁월한 전망을 이 솔로몬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주의 전에 가득하기 전에 먼저 솔로몬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 기도는 여러분들이 어떤 기도였는지 이미 우리들이 읽은 앞의 6장의 본문을 보면 우리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몇 가지로 나누어서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라는 이 말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이 솔로몬의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진 기도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또 믿음으로 간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인간의 고통하는 숨소리 하나에도 관심을 표명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성도들의 기도하는 그 기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는 하나님을 많이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있고, 조금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기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갖고 계시는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가고자 자기의 의지적인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꺾으려고 몸부림치는 기도는 분명히 기도이지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아니요, 또 기도의 내용을 아무리 우리들이 확실하게 믿는다고 할 지라도 그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아니며 그들의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믿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을 조금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우선적인 기도의 제목들은 모두 제해두고, 하나님에게는 덜 중요한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생사를 거는 사람들의 기도는 일단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구하니까 그 믿음의 사실 자체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지만 주님의 마음에 다급한 기도의 제목들을 제해놓고,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기도라는 은혜의 방편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주님을 조금밖에는 기쁘시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에 뜨거운 갈망이 되고 있는 그 일들이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는 기도, 이 기도는 곧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뜻을 이룬 도구로서 자신을 드리고 싶다는 기도이기 때문에 이 기도는 하나님을 많이 기쁘시게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선지자들 속에서 이러한 기도의 모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설교를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거나 자기의 시국에 관한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커다란 무리를 이루며 자기를 추종하는 것이 그들의 비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을 자신들이 알았고, 그래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지를 알았으며, 또 그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알고 드렸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살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고백이었고, 또 자신의 외침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마음에 미친 사람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가 바로 그런 기도였습니다. 이 솔로몬의 기도 속에는 왕국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나 왕가의 번영을 구하는 기도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왕자들의 생명이나 혹은 왕위의 화려한 영광이나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는 전쟁의 관한 기도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운 후에 그 성전을 봉헌하며 주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그 사람이 왕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를 목회 하는 목사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기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국가의 제왕으로서 하나님 앞에 성전을 바쳐 드린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엄한 이방 선교의 장을 꿈꾸는 선교사와 같은 마음으로, 선지자와 같은 시각으로, 제사장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오늘 우리 앞에 그 영광스러운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백성들에게 하시고 싶으셨던 말씀이셨고, 그 백성들이 솔로몬이 하는 이 기도를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였기 때문에 솔로몬의 이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쌓였던 그러한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은바 된 기도였으며, 그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핵심을 찌르는 기도였기 때문에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얼마나 기뻐하시는 지를 보여 주시는 징표로서 하나님의 성전에 영광을 가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기도 생활에 있어서 진전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그분께 구하고 또 우리가 구할 때에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그분께 구하는 것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면 이런 기도응답의 관계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일생동안에 오만 번의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죠지 뮬러는 자기의 책에서 고백하기를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참된 변화를 받은 후 ?0년 동안 한번도 이것은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데 하는 일을 해 본적이 없다’ 그랬습니다. 그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자기가 의롭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그가 모든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이것, 저것 잡다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또 신앙이 성숙했을 때에도 우리는 범사에 작은 일까지라도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리거나 우리 멋대로 불순종하지 않기 위해서 주님의 응답과 지혜를 구하는 신중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우리의 신앙 생활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 달라고 하는 나 중심의 기도에서 깊은 기도의 경지를 들어가서 그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파악하는 그러한 영적인 생활을 우리들이 가꾸어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거나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말씀이 그 마음이 전수되어 오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듣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보다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 갈수록 내가 하고 싶은 기도는 사라지고, 오히려 주님이 나를 그 무엇을 위해서 붙드시는 강권적인 하나님의 붙드시는 기도시키시는 역사를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솔로몬이 왕국의 영광도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천신만고 끝에 이 성전을 짓게된 그 수고한 자기의 의도 나열하지 않고, 오로지 그 찬란한 성전을 지어놓고도 ‘하나님을 어떻게 이 전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하늘들이라도 주 여호와를 용납할 수 없거든 우리가 지은 이 아름다운 성전은 이 땅의 제물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돈과 그리고 보물들이 들어간 성전이지만 하나님을 여기 모시기에는 이 전은 너무나 초라하고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십니다’ 라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놓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성전과 더불어서 그 백성들을 축복하시고, 그 백성들이 이 성전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를 기도 속에서 고백하고 있는 이 솔로몬의 하나님 영광 중심적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 복된 사람들로서 우리는 은혜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서 주님의 마음이 기도 속에서 우리에게 전수되고 그래서 주님이 슬퍼하시는 곳에서 우리도 울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곳에서 우리도 환호성을 지르며, 주께서 분노하시는 곳에서 우리도 분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작은 예수그리스도들이 되어야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를 두루 살피시며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에 부어주시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는 둔하지만 인간들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는 훨씬 더 민감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는 둔감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는 감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죄가 깊어지고 불순종이 쌓이고 마음이 강퍅해지면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들여오는 하나님의 마음도 거절합니다마는 그러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들어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으로 교회를 가득 채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새같이 날아갔으며, 주의 영광스러운 유업이 어떻게 부끄럽게 되었고, 그래서 그렇게 황무하게 되어 버린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할 때에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가지고, 주님 자신의 영광을 하나님의 교회에 채우도록 기도할 것이며, 그러한 영광이 가득 차지 못하도록 거침돌로 살았던 자신의 삶들을 참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는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시대가 소망이 있기 위해서는 한 두 사람 몇 사람만 하나님 앞에 깨어 있어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그 시대가 전혀 소망이 없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교회가 소망이 있기 위해서는 몇 사람이라도 깨어 있어서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 있게 그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줄 수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 음성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도 직접 하나님의 그 뜻에 그 음성에 음성 듣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온 천하를 두루 살피시면서 ‘이 시대를 향한 나의 마음을 아는 자가 누구이며, 내가 그들에게 이 시대를 향한 내 마음을 알려줄 때에 그 마음에 민감한 자들이 누군가’ 하나님께서는 찾으시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람이 많이 배운 훌륭한 학자일 수도 있고, 거의 배우지 못한 무식하고 그런 미천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용사와 같이 용맹스러운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예레미야와 같이 어린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의 마음이 부은바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시대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기를 간절히 절박하게 소망하고 부르짖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솔로몬의 이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고정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온 시선이 하나님의 그 지극한 영광과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빼냄 바 된 그의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노예의 삶에서 구속해 주신 그 출애굽하게 하신 거룩한 구속 주, 여호와 하나님 그분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삶을 살 의무가 있고, 이방에게 등불이 되고 불빛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을 인하여 이방인들조차도 이 성전에 와서 이 전을 향하여 손을 들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게 될 영광스러운 그러한 선교의 날을 이 솔로몬 왕은 전망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관심은 자신의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으며, 자기의 땅덩어리가 아니라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높아져야 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고정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 그 분이 가지고 계신 교회를 향한 사랑과 눈물과 아픔과 거슬리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와 거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시는 심판과 돌이키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그 크고 온유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자기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하늘의 가득해 예비하신 그 찬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업과 그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을 기억하며 아버지 앞에 나아와 주님의 영광을 향해 집중된 마음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영광 중심의 기도자, 이런 사람들을 오늘도 찾으시고 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는 언제나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나, 기발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가 움직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물거품처럼 나타났다가는 상품처럼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며 주 뜻 이뤄지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구경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그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며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시대는 자기 시대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데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도 성도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예배하고, 하나님도 만나지 못한 채 돌아 가버린 그 외로운 성전에 홀로 남으셔서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효도는 보모 공경을 돈으로 쳐 바르는 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효도는 말로만 하는 것도 효도가 아닙니다. 효도의 첫걸음은 그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첫걸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나누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면 우리의 기도도 별 의미 없고, 우리의 은혜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에 세계에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의 대변자가 됩니다. 그래서 근거 없이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우리는 슬퍼하며 애통하라고 권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근거 없이 낙망하고 엎드려진 사람들에게 ‘너희는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있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 중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에 사무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울부짖는 당신의 자녀들의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매우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로몬의 성전에 여호와의 임재의 영광이 가득 찼던 것은 그 교회당이 금과 은으로 치장했기 때문이 아니었고, 많은 화려한 장식들로 가득 찼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영광을 거기에 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초라한 성막이던 시대에도 여호와의 영광이 교회 안에 가득했던 일들은 우리들이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 찰 수 있었던 것은 이 솔로몬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전을 지으면서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했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면서 우리와 그리고 이 온 땅과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 세상의 숨쉬는 모든 호흡이 있는 자들은 주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서 살고, 숨쉬어야 한다는 그러한 절박하고 절실한 신앙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인식이 그들로 하여금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온전히 영광을 받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이름과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슬림으로 말미암아 도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가슴 저미는 마음을 가지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세상이 되게 하는 데에 이 하나님의 전이 씌어지기를 간절히 간구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에 여호와의 영광을 가득 채우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러한 영광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런 영광은 재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하기 때문에 그 전에 발을 들여놓은 그 날이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엎드려지는 날이 되며,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그 어떤 증언을 듣는 그 날이 이 세상에서 쌓아올린 하나님 없는 인간 사상의 체계를 허물어뜨리지 않을 수 없는 날이 되는 그날, 하나님의 전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마다 권세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에 엎드려지고 그래서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 얼마나 커다란 불행이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도록 돌이키는 충만한 말씀의 영광은 오늘날도 재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홀로 임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가슴깊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집중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 세상의 주의 충만한 영광이 임하게 하시는 도구로 쓰시기를 사모하며, 자기를 온전히 그 기도에 초점에 맞추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그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의 교회에 영광을 오늘도 가져오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솔로몬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이 교회에 가득할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버려 주의 영광을 사무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대답은 우리가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차례입니다.
4. 교회의 영광과 두려움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대하7:2)
3주간에 걸쳐서 1절을 살펴보았습니다. 요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하기 전에 두 가지가 있었는데, 기도와 그리고 자기를 온전히 바친 헌신이 있었다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함께 결판을 내었을 때 엘리야는 나무들을 쪼개어서 벌려놓았고 그리고 물을 붓고, 또 번제물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는 나무를 쪼갰고 그리고 그 위에 물을 부었을 때 하나님의 불이 그 위에 임하므로 비로소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혁혁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필요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듣는 것만으로는 믿으려고 하지 않고 그리고 또 아는 것만으로는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눈으로 들어 나는 하나님자신의 영광의 나타남, 그래서 모두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로우신 분이시고 그리고 사랑스러운 분이시며, 거룩하신 분이 신지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의 모습은 마치 쪼갠 나무도 있고 올려놓은 번제물도 있지만 물만 부어진 것 같은 그런 상태가 아닙니까? 위로부터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불, 그 불이 임해서 타오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장작과 번제물들을 불태우는 놀라운 영광을 보면서 이제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의 나타나심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복하게 되는 그러한 놀라운 영광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의 입장에서 우리의 삶을 본다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 차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고 그리고 그런 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신지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제멋에 겨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겨워서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깨어있다, 그의 영성이 깊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물과 자기자신의 인생과 교회와 역사와 이웃을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깨어있다, 깊다, 영성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쪼갠 나무와 쌓아올려진 번제물 위에 물을 부었지만 우리는 둘 중의 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기쁨을 누리던가, 아니면 하나님이 그러한 영광을 당신의 교회에 가득 채워주시기를 갈망하며 슬퍼하던가,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지만 정상적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도대체 눈을 들어서 사방을 살펴보십시오. 누가 하나님의 교회에 말씀의 영광이 가득 차서 그 말씀의 영광의 위엄 때문에 죄인들이 도무지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기뻐 뛰놀며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을 누리는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또 그러한 현실이 없기 때문에 가슴아파하는 교인들을 어디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갈망하고 이 세상의 안일한 생활이나 혹은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다 두고 가야 하는 세상의 축복을 연연해하는 대신에 이렇게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그 하나님이 모든 사람 가운데 나타나셔서 영광을 보이시기를 사모하는 갈망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두셨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을 하나도 두시지 않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시대든지 있습니다. 뭘 보면 알 수 있느냐 하면 아무리 힘든 요구라도 할지라도 성경이 그리고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을 선포할 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힘든 신앙의 길을 갈 수 있겠는가! 꼭 저렇게 예수를 믿어야 되겠는가!' 하고 따르지 않지만 그러나 감격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결단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교회에서 자신들을 얼러주고, 직분을 높여주고, 그리고 사례금을 주고, 칭찬해 주고, 사람들 가운데 영광을 받게 하고, 이렇게 하는 것으로서는 만족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많지는 않지만 그러나 절망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은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갈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지금 이 설교자처럼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은 없지만 그러나 그런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에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갈망이 없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만나야할 필요도 못 느끼고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 차야 할 필요도 못 느끼지만 동시에 신앙을 버려야할 이유도 별로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부흥을 위해서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흥이 왜 일어나지 않는지에 대해서 많은 핑계거리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헌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치는 헌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삶들이 합력 하여서 악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형편을 점점 비참하게 만듭니다. 수준 낮은 설교자는 회중들을 자기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교인들은 강단을 끌어내려서 자신들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요구합니다. 양자사이에 적당한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제 신속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도전은 교회에서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진취적인 기상은 사라지고 교회는 무엇인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뭔가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을 위해 매진하기보다는 현상을 유지하고 그리고 주어진 체제들을 관리하는 데 과도한 힘을 쏟게 됩니다. 매주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 속에서 그들의 모든 관심은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고 현상을 좀더 낮게 개선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오셔서 영광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깨닫고, 그의 어울리는 합당한 삶을 삶으로 교회자체가 이 세상을 향한 빛이 된다든지 하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말만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으면서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위대한 희생을 읽거나 간증을 듣는 것은 즐거움을 주지만 그러나 자신은 그러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흥을 많이 말하는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단순합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자기의 강연가운데 청교도나 부흥에 대해서 즐겁게 이야기만 하고 그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경계했습니다. 그거는 자기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방위도 못 갔다 온 사람이 역전의 용사들의 무용담을 읽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거나 람보를 보면서 파자마 바람으로 빗자루 잡고 뒹구는 것 같은 그러한 심리적인 모방이라는 겁입니다. 거기서 얻게되는 만족이라는 겁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 차기까지 그것은 국력을 모두 쏟아 붓는 대 역사를 이룬 후에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온 힘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온힘일 쏟아 부어서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하고 건축을 위해서 부역을 하고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위대한 성전을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라면 다윗 때에 그런 것들을 보아야 되지 않았겠습니까? 왜냐하면 건축을 위한 모든 준비가 다윗 때에 거의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이냐, 어떻게 하면 요즘말로 어떤 프로그램이면 하나님을 불러 올 수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어떤 조건이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에 가득 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 차기 전에 그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모두 하나님을 향해 모아졌고 모아 진 그 마음은 성전의 건축이라는 대 역사를 위해서 아낌없이 쏟아 부어 졌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이 지어졌을 때에 거기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장엄한 그 긴 기도를 우리가 몇 주전에 읽어보지 않았습니까? 6장으로부터 이어지는 그 긴 기도를 드릴 때, 솔로몬은 자기가 왕이라는 사실도 잊었고, 그 큰 성전을 완공한 시공자였다고 하는 사실도 잊었고,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사랑하신 위대한 성왕, 다윗의 아들 이였다는 사실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오직 그가 기도할 때에 그는 자신조차도 잃어버리고 오로지 그 위대하신 하나님, 하늘과 하늘의 하늘이라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신 그 하나님, 그분만을 우러러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하나님의 성전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 차는 전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2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실제로 하나님의 전에 가득하게 됐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성전에 가득하게 되었을 때 제사장들 조차도 그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늘 성전에 드나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기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당연하게 드나들던 그 성전을 어느 한 순간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가득한 임재의 영광 때문에 그들은 도저히 늘 드나들던 태도로 성전을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비교적 하나님과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고 믿어졌던 당연히 오늘도 그 성전을 들어가서 수종들어야 한다고 믿어지던 그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얼마나 악한 사람들이었는지를 보여 준다기보다는 당시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 찬 영광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가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가지고 있었던 죄가 매우 특별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기보다는 그 죄를 비추는 빛이 워낙 찬란한 영광의 빛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한 20대 초반에는 식당에는 들어가도 컴컴한 곳을 좋아했습니다. 종로에 가면 지금은 없어졌는데 레스토랑이 기다랗게 직사각형으로 생긴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환하면서 들어갈수록 컴컴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아주 순서대로 컴컴한데서부터 앉으면서 젊은이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도 앞을 캄캄하게 해 놓으면 사람들이 좀 몰릴까요?
그런데 이제는 싫습니다. 음식이 웬 만큼 맛있어도 이제는 컴컴한 곳을 싫어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집은 햇빛이 잘 드는 그런 식당입니다. 환하고 깨끗한 집, 화려하지는 않아도 햇빛이 많이 들든지, 햇빛이 안 들면은 전기라도 환하게 켜놓든지, 언제 한번 예식장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많이 들어간 예식장 말고 조금 소수의 사람이, 한 삼 사십 명이 들어가는 가는 그런 작은 예식장이 있었는데 특이한 것이 뭐냐하면 식이 끝나고 나서 쭉 서서 사진을 찍는데 그때 나는 사진을 안 찍고 저쪽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진사가 벽에 가서 스위치를 탁 올리니까 난 아직 태어나서 그렇게 밝은 빛은 처음 보았습니다. 환하게 비취는데 세상에!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걸 사진 찍어서 저걸 무엇에다 쓰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티 하나까지 다 들어납니다. 점하나 까지 다 들어납니다. 물론 사진 찍어서 다 지운다고 하지만 빛이 환하게 비추는데 이런 것은 비교도 안됩니다. 환하게 비추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티 하나까지 옷에 붙은 먼지까지 모두 드러납니다. 그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예식장에 온 사람들이니까 저처럼 깨끗한 옷에 정장 차림을 하고 그리고 얼굴에다가 포장도하고 그리고 온 사람들 아닙니까? 그렇지만 빛이 환하게 비취니까 그들이 더러워서라기보다는 빛이 비취니까 그 빛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티까지도 모두 드러나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희미할 때에는 사람들이 겁 없이 교회를 드나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드나들면서 아무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교회에 나올 때부터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습니다. 오늘도 가서 도장찍고 와야지 그런 정도입니다. 그리고 와서 찬송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예배자라고 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게끔 그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아주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다리를 꼬고 팔장을 끼고 졸든지, 시계나 들려다 보든지, 우리교회에는 그런 사람 거의 없습니다 마는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막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막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막볼 수 있는 이유는 용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용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들이 무식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것도 없고, 말로 얘기를 안 들으면 본때라도 보여줘 가지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막보면 일나겠구나 하는 두려움이라도 예배 중에 느낄 수 있어야 되는데 기쁨도, 두려움도, 깨달음도, 자극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태도를 계속하는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렇게 사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들어오고, 아무렇게나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시대에 교회의 형편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그곳에서 그곳의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하는 떨림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기도하는 그곳에서 지존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기도할 때 흐르는 눈물을 천사들이 주께 드릴 병에 우리의 눈물을 담는다고 하는 감격을 볼 수 있느냐 이겁니다. 그렇게 드린 수많은 예배와 기도, 그런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떨림이 없는 판에 박힌 것 같은 일상적인 모든 봉사와 분주한 삶, 주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모두 불타 없어질 지푸라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주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 교회 와서 상담하면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제가 전에 다른데 다닐 때는 사실 목사님, 주의 일은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으면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착각을 해도 많이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주의 일입니까? 자기 만족을 따라서 일한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고, 경배하는 마음이 없는데, 그것도 순간의 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런 마음이 없이 살아가는 그 사람이 교회에서 집사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 권사이기 때문에 저런 의무를 감당을 하고, 장로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위해 희생하고, 목사이기 때문에 당연한 의무를 이렇게 저렇게 행하는 것이 그게 어떻게 주의 일입니까? 에어로빅 배우러 다니는 사람이 그 에어로빅 배우는 반의 반장이 되어서 회원들에게 연락하고, 전화하고, 회비 걷는 것과 구역장이 되어서 구역장이기 때문에 이 사람, 저사람에게 전화하고 연락하고, 교회를 섬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하는 마음이 없고, 주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여러분 다 가고 이 의자, 이거 모두 내버려두고 강대 치우고 여기다 가라오케 걸어놓으면 공연장이 되는 겁니다. 가운데 통로 넓게 만들어 놓고 결혼식을 하면 웨딩홀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사람들이 누구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누구를 영화롭게 하고, 누구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누가 그 백성들 가운데 오시느냐, 그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강력한 영광이 있는 곳에서 방자한 죄인들의 교만한 발걸음들은 오늘 이 제사장들이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두려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르고 그리고 내가 이렇게 예배하고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을 하실지 가늠하지 못하고, 우리고 무엇을 행하면 왜 행하는지도 하나님 앞에서 설명할 자신이 없고, 우리가 무엇을 안 행하면 왜 그것을 안 하는지도 하나님 앞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안개 속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이 계속되는 거,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의 발자국입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 갔을 때 우리는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안하는 것을 왜 안했는지 해명하기보다는 우리들이 이제껏 일생을 살아 온 것에 대해서 왜 그렇게 살았는지를 해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의 어머니요 그리고 몸이라고 할 것 같으면 지체인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교회에 일부로서 이렇게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고, 또 그런 것들을 약속하셨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갈망이 있는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을 대답해야 된다 이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항상 침잠, 잠잠히 침묵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명상 속에서 잠기는 침잠, 이러한 세계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운동하듯이 교회를 어느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하는 이러한 모든 프로그램 적인 그 시도들, 교회를 정신없이 바쁘게 만들어 가지고 눈, 코 뜰 새 없이 만들고 하나가 끝나면 다음 폭탄이 터지고 하는 이런 식의 내몰기 식의 강포하게 휘 모으는 것,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점점 더 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영광으로부터는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와 개인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삶의 실천들, 하나님을 향한 경배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마음, 그 영광을 누리를 마음으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정말 우리들이 얼마나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갈까!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일을 하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면은 대단한 아이러니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하나님의 교회에 참된 영광을 갈망했던 사람들은 모두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것을 가로막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넘치도록 자신을 헌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안 한다고 해서 모두 그 남은 에너지가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모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쏟아 붓는 사람들이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을 안 찾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또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을 거의 못 만난 사람들은 못 만날수록 만나야 할 필요를 거의 못 느끼고,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만날 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야할 필요를 절박하게 느낍니다.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더 목마른 사람이고, 은혜가 모두 사라지고 죄로 가득 찬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더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갈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날마다 체험한 사람들은 이상하게 목마른 사람에게 설탕물을 먹이는 것처럼, 더 깊은 사랑을 갈망하고 몸부림칩니다. 예전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의 표현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받는 표현 방식도 사랑을 하는 표현 방식도 진보하기는 하지만 퇴보하는 것으로서는 사랑 받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늘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그런 이야기가 되지만 교회적으로 적용하면 이제는 이것이 나 하나가 아니라 그 교회의 속한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가끔이라도 맛보는 사람들은 이번 예배에도 하나님이 찾아와 주시기를 바라는 소원함이 있습니다. 늘 예배의 감격에 깊이 잠기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언제나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어느 미국 가수가 노래하는 가운데 제목도 다 잊어버렸지만 어린 시절에 듣던 이야기지만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당신의 체취를 더 깊이 느낄 수 있도록 제발 제 옆으로 다가와 주십시오’ 이것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람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이며, 그분이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지난주와 똑같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을 원합니다. 지난해에는 하나님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이제는 그분께 입맛추고 싶어하고 그리고 그분의 품안에 으스러지도록 안기기를 원하고 그분의 숨결을 귓가에 느끼고 가슴으로 그 분의 품에서 둘려오는 심장의 박동소리를 듣고 그분의 체험을 온 몸으로 느끼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 없는 갈망이 있다 이것입니다. 그럴 갈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가득 차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저는 첫 시간에 그것은 곧 간단하게 말해서 다양한 신비의 체험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교회당에 갈멜산의 엘리야나 혹은 이 솔로몬 성전에 떨어진 불이 다시 오기를 기도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태울 제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불내시고 소방차가 동원되는 이상한 일들을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런 불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신약성경도 없고 구약성경도 완성되지 않았던 시대에 하나님을 찾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영광을 구하지만 그것은 이렇게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하고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이전에는 겁 없이 드나들던 그 교회당을 어느 한 순간에 말씀을 통해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자신이 말씀가운에 좌정하고 계시다고 하는 주님의 불꽃같은 시선을 죄인들이 의식하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바꾸고 마음을 고치기 전에는 그 교회당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고, 들여놓았다면 그가 하나님 앞에 거꾸러져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진리의 영광이 가득 찬 교회를 꿈꾸고 우리는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방만한 삶, 그리고 예배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삶의 현장에서 보여주는 실제적인 삶에 좁힐 수 없는 엄청난 격차, 모든 것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제대로 된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격차 나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한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겁 없이 교회당을 드나들게 될 것이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교회에 영광이 가득 차지 않는 것이 다행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이 나타나는 그날에 그들은 뼈도 못 추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이든지 신약성경이든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찰 때 주님을 갈망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고, 도덕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이 살았던, 삶의 동기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되지 못했던 사람들 모두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 자신이 당신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그 찬란한 영광의 의해서 압도된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증거가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쇼핑 센터에 회원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교회에 나와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주일 낮 예배에 달랑 나오고 더 이상은 하나님을 향한 아무의미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철면피하고 뻔뻔한 사람들, 우리는 계속해서 신앙생활 할 수 없도록 무엇인가 자신의 양심에 깊은 찔림을 받고, 그리고 사실은 자신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정직한 고백을 하나님 앞에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 차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탄원하기를 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여호와의 편에 선 사람이라면 그는 정말 여호와의 편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편에 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속에서 사라져 가면서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오만하게 대하고, 방자하게 대하고, 막보며 안하무인격으로 신앙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아파할 것이며, 그런 가슴 아픔은 자신을 쏟아 는 기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가 느끼는 것은 단지 인간적인 슬픈 감정일 뿐이지 하나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광경을 보면서 교회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권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권위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분들은 누구에게 무릎을 꿇으십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인정하는 권위는 어떤 것입니까? 세상의 법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여러분들은 법치주의자들이 될 것이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나라사랑에 무릎을 꿇으면 애국자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릎을 꿇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과 그리고 모든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권위를 보이시지 않습니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권위를 인정하는 그것, 그것을 보면서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뭘 보고 알고 있습니까? 나라가 있다. 정부다 있고, 그리고 이 나라는 진짜 나라라는 사실을 뭘 보고 압니까?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서 드넓은 땅덩어리와 수많은 집들을 보면서 '여기 나라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제시대의 나라가 없었던 때도 집은 있었고, 길도 있었고, 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을 들고 설치는 강도들이 경찰이 부르는 호루라기 앞에 수갑을 차고 반항하는 사람들이 군인이 쏜 소총에 맞아죽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아, 나라는 존재하는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저는 영국을 가본 적은 없습니다마는 영국에 대해서 자세히 써놓은 어느 잡지에 보니까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경찰이 어디 경찰이라고 여러분 배웠습니까? 배우진 않았더라도 어디서 들었습니까? 어디 경찰입니까? 영국경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월급을 많이 받는 경찰? 영국경찰입니다. 아니 부수입 빼고, 진짜로. 그래서 그들은 말 타고 다닙니다. 얼마나 친절한지 관광객이 가서 내려오라고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그러면은 얼른 내려와서 정중하게 경례를 하고 말을 세워놓고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어줄 정도로 셧타 좀 눌러달라 그러면 눌러줄 정도로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영국 경찰들입니다. 그런 것만 들었지 그 이상은 보았습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그렇게 친절한데 공권력이 도전을 받는다 생각되면은 90센티 정도 되는 몽둥이로 골통을 막 두들겨 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못합니다.
미국에 갔을 때 연세대에서 난리 났었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비아냥거리면서 이 세상에서 한국 같은 민주주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소리냐고 독재타도 한다고 학생들이 저 난리인데, 미국은 만약에 저 정도 됐으면 기관총 들고 들어와서 갈겼다 이것입니다. 실제로 70년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냥 사격한다고, 그것을 보면서 뭘 배우냐 하면은 ‘나이가 있구나!’ 그걸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늘 말하기는 하는데 하나님 앞에 복종하며 살면은 자기와는 다른 삶이 될텐데 쉽게 얘기하면 종교는 있는데 뭔가 그 종교가 그들의 삶에 권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농담처럼 대하고 교회를 장난처럼 드나드는 하나님의 일을 사무 보는 것처럼 행하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곳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갖겠느냐는 것입니다.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권위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게 되니까 이제는 제사장들조차도 평상시 하던 방식대로는 하나님을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할 때 대할 수도 없거니와 만약에 대한다면 자신들에게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더라 그랬는데 만약에 그 중에 객기 부리는 제사장이 있어서 다들 못 들어 갈 때 ‘뭐 어때 나는 들어 갈꺼야’ 그리고 만약에 뛰어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었을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무엇입니까? 직분을 준다고 사탕발림을 하면서 교회에 충성심, 경쟁을 시키는 그것이 교회의 권위입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오늘 이 시간에 여기다 묻고 가라고, 교회의 권위는 뭡니까? 오래온 사람들이 텃세부리는 것이 교회의 권위입니까? 아니면은 목회자이기 때문에 군대식으로 복종하는 것이 교회의 권위입니까? 이런 것은 모두다 권위주의이지 진정한 권위가 아닙니다. 권위주의는 사실 없는 데도 그것을 강요받는 것이 권위주의입니다. 참된 권위는 하나님께로 비롯된 권위이고 하나님이 그 제도 안에 그 사람 안에, 그 말씀 안에, 그 교회 안에 계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권위 그리고 그것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굴복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데도 복종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큰일날 사람들입니다. 용감하지만 무식하기 때문이지 그 무식의 휘장이 벗겨지고 나면 그는 자신이 얼마나 벌거벗은 채로 망신스럽게 교회 생활했는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슨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 하면은 교회가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는 것이 없다면 그러면 교회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럴싸한 권위를 가지고 그럴싸한 견해를 가지고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 보려고 애를 써도 그 교회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주위에는 올바른 성경적인 가르침 위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된 교회가 되지 못한 교회들도 이런 시대에는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무수한 이단들과 그리고 기독교인 것처럼 가장하고 교회 속에 들어와서 나중에는 결국은 인간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열중이고 심지어는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되게 생각하는 망발을 일삼는 그런 수많은 그릇된 교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어울려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경적이고 정통적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직한 가르침을 받고 있으면서도 참된 교회가 되기를 포기한 그런 교회들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세뇌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세뇌된 사람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그걸 알고 그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의 인생 속에 받아 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쁨으로 경배할 수 있는 그런 예배자들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백성들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들어냅니다.
아이디 토마스라고 하는 유명한 작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기독교 작가입니다. 그가 부흥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아주 간단한 말로 설명했습니다. 부흥이 무엇인가 질문에 대해서 그는 다른 사람은 부흥이란 한편씩 설명을 하는데 이 사람은 간단하게 ‘부흥이란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으로 가득 차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 부흥이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되지 않습니까? 나는 교회에 그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람으로 가득 차고 가득 찬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 하나님에게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신령 안에 사로잡힌 그러한 거룩한 사람, 주님 자신으로 가득 찬, 세상에 속했으나, 하늘의 사람이며, 이 땅에서 다양한 세상직업에 종사하며 살지만 그러나 성자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 그런 교회에서는 분명히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이 놀랍게 권위를 보여줄 것입니다.
어제 교리 공부하는데 어느 형제가 그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어느 교회 기도 많이 하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은사도 많이 받고 그랬는데 목사님이 뭐라고 가르쳐주면 기도 많이 하고 와서 하는 말이 ‘성경엔 그렇게 쓰여 있지만은 내가 기도해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두란노에서 나온 그림책에 보니까 교회가 중요한 정책을 결정을 하기 위해서 모두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막 잘못된 방향으로 갈려고 하는데 예수님이 ‘애들아, 애들아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아이, 좀 가만히 있어요 손들면 되잖아요, 한 표인데 예수님도 한 표이고, 우리도 한 표인데 표로 해요, 표로’ 그게 나오더랍니다.
모두 하나님의 참된 권위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통해서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오만하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선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도 할 수 없는 그 일이 교회에 위탁되었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부르심은 이 세상에서 수많은 이단들을 만들어 내는 선한 기관이 되는 것도 교회의 목표가 아닙니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며 사람들의 입바른 칭찬을 받는 것도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일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거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진심으로 경배하는 사람들로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한 교회는 자기가 만한 그 하나님 그 이상을 이웃들에게 가르쳐줄 수가 없으며 자신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성품 그 이상의 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진리로 말미암는 자유를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자유를 맛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교는 항상 교회가 지니고 있는 영적인 수준보다 낮을 수는 있지만, 교회가 유지하고 있는 신앙의 수준보다 뛰어난 선교를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교회가 오만하고 방만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두려운 줄 모르는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교회당에 들어섰을 때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통해서 그 앞에 깊이 엎드러지고 거기서 산 속을 헤매던 짐승이 포수가 쏜 총에 맞고 계곡 사이에 엎드러져서 신음을 하는 것 같은 그러한 놀라운 자기 굴복의 역사가 나타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없으면 교회는 하나의 이 세상의 기관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즐겁게 하기보다는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열중할 것이며 교회를 통해 신령한 하늘의 만족을 누리기를 사모하기보다는 세상에서 채워지지 못한 만족들을 교회에 와서 채우고 싶어서 애를 쓸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이 아니란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리고 나서도 그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았기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 삶, 그 불행의 뿌리까지도 고쳐져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나의 인생은 근본적으로 고쳐졌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었다면 이런 인생은 없었을 것이라고 간증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되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약 3천년 전에 있었던 이 솔로몬의 전에 가득 찼던 하나님의 영광의 기록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심히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직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 복음의 찬란한 계시조차 없었던 그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이 이러한 영광을 당신의 성전에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그 백성들에게 알리심으로 그들로 경배자가 되게 만드셨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이 찬란한 은혜의 계시, 그리스도예수의 찬란한 십자가의 복음, 그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이런 이적을 통해야만 겨우 알 수 있었고 정신 차렸지만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독생하신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당신의 성품을 충분히 계시해 주시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찾는 자들이 어떻게 어느 지점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던 이 솔로몬의 영광과 같은 성전의 영광과 같은 것, 그 정도가 아니라 그것보다도 더 찬란한 영광이 우리에게 가득 차기를 구해야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던지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무지 무각하게 살았고 그냥 평균적으로 믿었습니다. 남들이 가기 때문에 교회에 가고, 들려오기 때문에 듣고, 그럭저럭 하면서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언제가 거품처럼 살다간 수많은 잠자는 다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던 솔로몬과 같은 소수의 사람들을 세워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이 택하신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더 순수해지고 더 정결해지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그 갈망이 더 예리해 져서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갈망에서 우러나오는 주의 영광을 구하는 탄원이 더 뜨겁고 열렬해져서 마치 예리하게 화살촉끝을 갈고 가슴깊이 시위를 당기며 화살을 놓을 때 그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과녁에 뽑히지 않으리 만치 깊이 박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참된 영광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마다 이러한 갈망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이며, 우리는 종교적으로 매우 복잡한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을 추구하는 단순한 삶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우리는 기대해야하고, 쓸모 없는 일에 우리 인생을 낭비하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는 그런 삶을 과감하게 정리해서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그 거룩한 영광을 약속을 향하여 날아가는 잘 닦아진 하나의 화살촉 끝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그런 애끓는 수많은 탄원들을 모아서 무관심하고 무덤덤한 수많은 다수의 무관심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역이 방해받지 않고 주님의 살아 계심을 그 기도를 통해서 보여주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엘리야는 나무를 쪼개었지만 그 쪼개어진 나무를 제단 위에 벌려놓았지만 이제는 우리의 마음을 쪼개야할 때입니다. 그는 짐승들을 각떠서 장작 위에 올려놓았지만 하나님이 이러한 교회의 영광의 재현을 위해서 요구하시는 것은 소나 짐승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위에 물을 부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눈물을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5. 교회의 영광과 예배
이스라엘 모든 자손을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있는 것을 보고(대하7:3上)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교회에 영광이 가득할 때 그때에 두려움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드나들지만 한번도 단 한번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인해서 가책을 받거나, 만약 내가 가는 이 삶을 돌이키지 않으면 나에게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못하는 커다란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죄인의 심령이 워낙 강퍅하기 때문이고, 하나는 교회에 권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인들의 마음이 강퍅한 것도 도무지 그런 길을 돌이키지 않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인은 언제나 있고 또 죄인들의 마음은 언제나 강퍅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온유하고 부드러움으로 녹여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오락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술과 이세상의 향락이나 더 많은 범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짐승처럼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한가지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죄인들은 언제나 강퍅하다.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교회가 그 죄인들의 강퍅함을 능가하는 거룩한 성령의 권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말씀의 권세가 있어서 그 교만하고 사악하고 강퍅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그 교회당에 들어설 때에 자신들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권세를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 몫입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이런 영광으로 가득 차는 것이 여러분들은 누구의 몫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몫이 오로지 목회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설교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믿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몫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기도를 얼마나 열렬하게 하는 지를 보면 그의 영적인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상태가 아무리 좋고 성령 충만해도 매일 운수대통이나 부르짖는 사람들은 그 수준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령 충만해도 하나님의 나라에 별로 도움이 안돼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펼치려고 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그 가치관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이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고, 그리고 이것이 진정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이며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담대하게 죽음의 휘장 너머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삶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너무나 무겁고, 너무나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당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깊은 것입니다. 우리 옛날 교회 다닐 때 집에서 ‘매일 교회에 가서 엎드려 있다고’ 사실, 엎드려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앉아있는데 말입니다. ‘교회가면 밥을 주냐, 떡을 주냐?’ 추수감사절 때는 밥도 주고, 떡도 줍니다.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미쳐도 어느 정도 미쳐라”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가치관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갈등의 연속일 뿐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행복해 진 사람보다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우울해 지는 사람을 압도적으로 많이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몰랐을 때에는 막 살았는데 무식하면 용감하고 미련하면 행복합니다. 그랬는데 뭔가를 좀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전에는 담대하게 즐겁게 행하던 일을 이제는 가책을 받으면서 행하게 되고. 자유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자유가 없다고, 담배를 피워도 숨어서 피워야 되고, 술을 먹어도 안 마신척해야 되고, 그러니까 뭐든지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적당히 그리스도인이 되고 최대한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복을 맛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없습니다. 다음서부터 포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오냐 하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앙을 적당히 이렇게 비스듬하게 왜곡시키지 않고는 그런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단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진리를 어떻게 믿느냐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단 잘못된 진리의 체계를 받아드리고 나면은 그러면은 거기에는 성경이 얘기하는 참된 평안, 진정한 행복,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단에서는 부흥이 안 일어납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거룩한 의도가 무엇이냐, ‘결국은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면서 이 세상을 향해 가지고 있는 그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내가 살아야 할 삶이며, 그 계획에 내가 피할 수 없이 동참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깊은 의지와 행복을 가져야 된다 이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그것은 아침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우리의 인생가운데 어떤 일부의 시간을 떼어서 종교인의 행세를 하고 또 일부의 노력을 떼어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데 이렇게 투자하고, 그런 식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우선 중요한 것은 뭘 하며 사느냐 이전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가치체계를 그대로 받아드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궁극적으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전파 받은 그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영광이 가득하기를 구하고, 그 영광을 통해서 세상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세상이 되기를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그게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오늘날의 가장 비참한 상황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주 단순한데도 아주 복잡하게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마땅한 삶을 아주 특수계층의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수 있으며 또 그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생각하는 그런 이원적인 사고방식에 있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이 한번 해본 소리고 현실은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 현실과 하나님의 명령 사이에 있는 차이를 인정하시는 데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펼치거나 설교를 듣는 순간부터 아예 처음서부터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말씀은 말씀이고 나의 삶은 삶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순종 할 사전의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좋은 얘기 듣다가 신앙생활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지난 시간에는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과 두려움에 대해서, 오늘은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과 경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제 어떤 이야기가 3절에 나오느냐 하면, 백성들이 그냥 엎드려 진 것입니다. 땅 바닥에 그 순간에 엎드려 진 것입니다. 그런데 엎드려진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두 가지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불이 훅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불이 제단의 번제물을 사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불은 상징적인 불이 아니라 진짜 불이었습니다. 손을 데면은 우리의 몸도 태울 수 있는 그런 불이었단 말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벌써 이때가 주전 10세기경인데 그때 벌써 이미 이 사람들은 구약의 역사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가 이러한 불길로 나타난 것들에 대한 상식정도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틀림없이 기록되지 않은 어떤 전승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며,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이 강림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아주 변명할 수 없는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엎드려졌습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불이 내린 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기 때문에 그 영광을 인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거룩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영광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우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뛰어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느낄 때에 우리는 그 앞에서 우리가 정말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비천하게 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할 때에는 뭐를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나면은 '우리가 뭔가 사랑이 있고, 사람들에게 의로운 행위를 했다, 의로운 삶을 살았다'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크게 느껴졌는데 거룩을 체험하고 나면은 우리의 사랑이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성품을 그 거룩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투영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그분의 사랑에 비하면 얼마나 결함 투성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순수하자 않은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을 때에는 우리가 의롭다라고 하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저놈들은 저렇게 다 탐욕스럽게 하는데, 나는 넘치도록 물질로 남을 구제하며 살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 분인지를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자신의 의가 그 하나님의 완전에 비하면 얼마나 형편없고 자기 중심적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하게 될 때 인간은 또한 뭐를 느끼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이며 불완전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느끼는 느낌은 두려움과 긍휼을 구하는 겸비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깊이가 그가 경험한 영광의 경험과 비례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 신앙과 은혜체험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은사를 경험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희한한 은사, 이런 것들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성을 진정으로 깊게 만들어 주고 그래서 죄에 대해서 예민하게 만들어주고, 하나님의 성품을 더 깊이 깨달아 알기 때문에 그 완전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거룩한 삶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체험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룩이 우리에게 체험될 때 그 때에 동시에 체험되는 것이 뭐냐하면 영광입니다. 영광을 뭐라고 한 마디로 간단하게 표현 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그런 영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 같은 사람은 영광이 뭐냐 이렇게 질문을 해놓고 ‘영광이란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인데 그 영광이 비취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만 보이게 된다. 그런 것이 영광이다’ 말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은 확실한 것은 하나, 영광자체가 무엇이라고 우리는 쉽게 이야기 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께 고유한 것이며, 그 영광의 빛이 우리에게 경험되거나 비춰질 때 우리는 하나님밖에는 보이는 분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전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할 필요도 없고, 기도 응답을 받을 필요도 없고, 여러분들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불이 하늘에서 내려서 꽃을 불태우는 일은 열린교회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모든 신약교회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 지금은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기다 고기를 올려놓고 아무리 기도해도 불이 그렇게 내려오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러면 이제 훨훨 불타는 그런 불을 가지고 사람들이 겁먹는 일은 신약의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마지막에 남은 것은 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엎드러진 이유가 둘 이였는데 하나는 실제로 하늘로부터 내리는 그 불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전자는 다시 반복되지 않겠지만 그러나 후자는 우리에게 얼마든지 반복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통해서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위대한 진리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강림하신 것 같은 그래서 실제로 그들 가운데 내려와 계신 것 같은 그런 매우 특이한 강력한 말씀의 부흥을 주시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권세가 나타날 때 생겨나는 부산물들입니다.
정도는 틀리겠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성령의 강력한 찔림을 받을 때 그래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 앞에서 우리의 영혼이 거꾸러지는 일들이 일어날 때, 그때에 우리들은 즉각적으로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우리의 사고가 굉장히 단순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엄청나게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들은 사고가 단순합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생각이 많아지고 기도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머리 굴리는 시간은 많아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굴려봐야 돌 소리 밖에 안 나는데, 달그락 달그락 그러면서 계속 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깊이 받고 말씀의 권세 앞에 우리가 콱 쓰러지는 역사가 일어날 때 그때에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 앞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아니면 희망이 없는 자신의 비참한 존재, 딱 그 두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보자 예수그리스도. ‘목회를 잘해야 될텐데, 교인들이 많이 모여야 될 텐데, 내가 뭘 어쨌는데 사업이 잘되어야 될텐데’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영광의 빛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자신, 불순종과 죄악가운데 살아온 자신, 그리고 정결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형편없는 자신의 그 불완전한 모습을 보면서 흐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광의 체험이 워낙 엄청나서 그래서 기절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졸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것입니다. 평범한 인간의 상식적인 체험을 능가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나님 자신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찾아오실 때에 주시면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 한 분과 보좌에 계신 어린양과 그리고 그 앞에 있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이 필요한 나, 그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가만히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들의 생각은 너무나 물질의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거의 장악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이 만약에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도무지 신령한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엄청난 체험은 그만두고라도 단 한번이라도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일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영혼이 깊이 찔림을 받고 압도당해 본적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신앙생활 자체가 어떤 종교적인 틀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니까 그 사람은 교회 나와도 하나님을 만날 의욕도 없고, 기도를 해도 뼈 속 깊이 사무치는 기도 제목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런 기도제목이 없으니까 인생의 목표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보고 ‘하나님이 너 어떻게 해주시면 행복하겠냐?’ 그러고 물어봐도 그런 사람들은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니까 그런 식의 삶은 무신론에 가까운 삶입니다. 그런 삶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아무희망이 없다고, 세상 나가서 재미보는 게 낫지 그게 뭐냐 이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너무나 사라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라진 나무지 아예 그런 것들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경험되어 지지 않은 것을 계속해서 갈망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거의 불가능 한 것입니다. 경험될 때에 조금씩이라도 경험될 때에 그것을 향한 갈망이 있는 것이지 경험자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은 갈망하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이반 바플로프라고 하는 러시아의 생물학자가 유명한 조건 반사 실험을 했습니다. 개에게 먹이를 던져주면서 공교롭게 종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가 먹을 때마다 종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이를 안주고 종만 치니까 침을 질질 흘리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계속 속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종을 쳐도 침을 안 흘립니다.
여러분 서커스단 같은데서 보면은 무대 위에 올라와서 개가 춤추는 것을 어떻게 훈련시켰을까요? 그런데 간단합니다. 여러분도 훈련시키실 수 있습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밑에다가 철판을 놓고 밑에서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를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악을 틀어줍니다. 똑같은 음악을 개는 죽을 맛이지, 이게 펄펄 끓으면은 로스가 되니까 안되고, 뜨끈뜨끈하게 하는 것입니다. 네발이니까 한발씩 교대로 들면서 뜨거워 가지고 어쩔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연습을 하면 철판 위에다 올려놓고 음악만 틀면은 이제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전 인생이 낙뢰에 커다란 거목이 허리를 맞고 분질러지는 것과 같은 그러한 체험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뭔가 교회에 나와 가지고 '억'하고 가끔씩은 이렇게 자기가 거꾸러지는 것 같은 그러한 은혜의 체험이 조금씩이라도 있어야지만 더 큰 은혜, ‘하나님 맞습니다. 저는 더 깨져야 됩니다’ 그런데 한번도 깨뜨려져 본적이 없고 그리고 그럴 가능성조차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말씀의 깊은 깨뜨려짐 앞에서 자신이 완전히 녹아지고 열렬하게 기도한다는 것은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뻣뻣이 고개 들고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난 너무 슬픕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는 사람들 모두다 어디 갔습니까? 그런데 이 정도면 한국교회에서는 수준급입니다. 주일 오전 예배와 오후예배에 참석비율이 수준급이라 이것입니다. 저녁예배 드리는 교회들, 이제는 어느 교회에 갔더니 2천명이 모이는 데 저녁예배 100명 모이더랍니다. 새벽예배는 없고, 어디 가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어디 가서 배 깔고, TV보든가, 어디 가서 맛있게 외식을 하던가, 애들 데리고 공원이나 돌아다니는 맨 쓸데없는 세상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고도 양심의 가책이 없이 그냥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정말 영혼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면에 있어서는 정말 단호해져야 됩니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가지고 아무리 사랑을 표현을 해도 그들의 영혼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회개와 신앙의 고백이 없는 사람들에게 세례주지 말고, 은혜를 못 받은 사람, 소명도 없이 신학교 간다는 거 절대로 도장찍어주지 말고, 믿음이 없는 사람 교회의 높은 중직에 올려놓는 일, 세 가지만 안 해도 교회는 최악의 참사는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여러분과 목회하면서 제가 저항이 느껴진다고 그러니 정말 성경이 뭐라고 쓰여 있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막보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그 힘은 저돌적이고 무섭습니다.
저가 주장하는 거는 그것입니다. 최소한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이나 저 중에 누구 하나가 그런 영광스러운 능력이 교회당에 가득 차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누구입니까? 원하지 않은 사람 누구입니까? 아무도 그런 사람 없습니다. 정말그러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실제는 안 그렇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깨뜨려지기를 원한다고 늘 고백을 합니다. 안 깨뜨려지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입술로는 그래도 깨뜨려지기를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입만 깨졌습니다. 그런 고백을 합니다. 아무도 그걸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러한 놀라운 말씀의 영광이 기이하게 교회에 가득 차서 교회당에 발길을 들여놓는 사람들이 황급히 신발을 벗으면서 ‘내가 아직 여호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분이 확실히 여기계시구나!’ 하게끔 만들어주는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은 주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또 한가지는 그러나 주권타령만 하고 있어서는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날들을 주시고 그런 역사를 주시는 것은 주님의 주권이지만 그러나 기도하고 간구하며, 그런 것들에 대한 깊은 사모함을 가지고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할 사람들은 우리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토요 강단 기도 모임에 나오다가 집어치우고 안나오고 그러는 사람들, 나는 심리를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뭘 좀 하나 한다고 그러면은 2년이고 3년이고 꾸준히 해야 되지 않습니까? 요즘 다 얼굴이 바뀌었습니다. 역사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초창기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마음을 쏟아 붓고 간절히 하나님과 매달린다 그러면은 자신이 삶 자체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목표되어 있지 않으니까 자기는 자기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서 겨냥되어 있지 않은데 기도시간만 와서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혀진 사람처럼 그렇게 기도하려니까 자기의 삶과 기도제목 자체가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괴리를 가졌을 때 그 사람은 그런 종류의 기도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고문이라고 고문, 그러니까 왜 그 무거운 부담을 지겠습니까. 치워버립니다. 청년들만 모여서 기도하라는 법이 어디에 나와있습니까. 그것은 또 저녁때 하니까 아무나 나와도 괜찮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이제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까까머리 중학생, 언니, 오빠, 아줌마 할 것 없이 신분도 다르고 사회적인 수준도 다르고, 교육수준도 다른 사람들이 오직 하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가득 차기를 원한다는 공통된 소망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서 이 교회당에 그런 거룩한 말씀의 영광을 주시기를 혼신을 다해서 기도하는 그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한 말씀의 부흥을 주실 때에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입니다. 정말 사모합니까? 우리들이, 말로 이랬으면 좋겠는데, 저랬으면 좋겠는데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정말 사모합니까?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러한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 차야 될 필연적인 이유는 뭐냐 그것은 기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엔조이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 찬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가상현실로 데려가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글쎄, 제 생각이 아직 짧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될 수 있으면 우리는 공식적인 예배시간 외에 꼭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교회에서 안 모이는 것이 나는 좋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열심히 살아야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직장에서 직장 일하는데 교회만 가고 싶어지고 직장은 우울하게 출근하고 교회 나올 때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 온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사람들은 소위 얘기하는 은혜의 세계라고 하는 가상현실로 모이는 거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엔조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그런 식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부다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회사로 다 모이고, 그리고 은혜 받은 사람들은 전부다 선교단체 같은데서나 일을 하려고 하고 물론,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 차기를 구하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희한한 영적인 체험을 하면서 소위 얘기하는 하나님의 영적인 놀라운 세계를 엔조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신비체험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몰려 다니는 사람들이 솔직히 말해서 계모임에 몰려다니는 사람보다 나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술 먹고 외도하지 않는다 것 이외에 나은 것이 뭐가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전부다 쓸데없는 행동들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하거나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말씀의 역사가운데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영광을 엔조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참다운 영광의 체험이고, 거룩의 체험일 경우에는 그런 일들 자체가 가능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그런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게 됐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는데 즉각적으로 성전의 바닥에 엎드려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그러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토록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으로 가득 차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경배하는 사람들을 만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당에 그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기를 그토록 열렬히 간절히 심지어는 생명을 걸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서 경배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들어서 복음을 전파하시려고 합니다. 오늘 오전에도 여러분들이 열심히 가서 열린 교회에 신문 돌렸더니 드디어 그 신문을 받아보고 교회에 나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방송을 내보내니까 오늘도 방송을 듣고 네 분이나 저희 교회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물질을 드리고 때로는, 여러분 우리 봉사위원회에서 그렇게 힘들게 바쁜 시간 쪼개서 연세도 드신 분들이 김치하고 밥하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여러분 왜 먹었습니까? 그분들은 복음을 위해서 김치를 담그고, 복음을 위해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들이 마지막에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뭐냐하면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해 봐야 된다 이것입니다. 이제껏 까지 삶을, 그게 뭐냐하면 이상하게 복음은 전해지는데 경배하는 사람들이 안 생겨나는 것입니다. 구원 받아놓고 세상에 가서 막가는 삶을 살면서 기껏 질문한다는 게 ‘목사님, 아멘하고 주님을 영접했는데 개판 치는 삶을 살다 죽어도 천국 갑니까? 못 갑니까?’ 이런 질문이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숫자적으로 월등하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답이 무엇입니까. 그럼 왜 그렇게 복음이 전해지고 영접을 하고, 훈련도 시키고, 난리를 치는데 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데, 자기가 고백하고 확신한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것도 아니지만은 그러나 어찌하였든 간에 자기네들 말로는 자칭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경배자들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사랑해요 나 주 앞에 엎드려 경배와 찬양 왕께 드리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
이렇게 주님을 생각할 때 ‘정말 그분은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다. 나같이 이 쓸데없는 미물이 어떻게 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타락하기 전에 창조세계에서 누렸던 인간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본분을 따라서 하나님을 경배할 있게 하셨을까!’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경배하는 것 자체에서 한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목적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이고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목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서 놀다 가자는 거 아닙니다. 만난 다음에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이 그랬듯이 여러분 만약에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어이구, 오래간 만이군요’ 그럴 수 있습니까? 만나고 나면은 우리는 죄 있는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게 되고, 고난받은 사람들은 위로를 받게 되고, 시련에 처한 사람들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그러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정말 시련에 빠진 사람들은 시련에서 자기를 건져주시는 능력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사죄의 은총을 경험하면서 자기를 죄 가운데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경배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나면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 앞에 경배가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흐르는 눈물을 감격의 눈물을 훔치고, 고사리 같은 손을 불끈 쥐고, 이 세상의 파도가 너무나 크고 우리는 너무너무 약하지만은 그러나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 약속을 믿고 이 어두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아멘하고 영접했다는 사람들은 생겨나는데 경배자가 생겨나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출석은 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고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덜렁덜렁 교회에 나오고, 안 나오면은 그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고 하고, 그런 껍데기의 삶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것이 헬스클럽의 회원이 되어서 가방 들고 덜렁거리고 일주일에 몇 번씩 가는 것과 교회에 나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만들려고 복음의 도를 온 땅에 펼치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영접했다고 수없이 고백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안됩니다. 다 뒤에 가서는 간첩노릇하고 그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정부 상태로 휘몰아가고 말입니다. 되질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소명을 얘기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중에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것으로 부름 받은 자니라’ 무슨 뜻입니까? 선교의 목적이 기독교 선전이 아닙니다. 기독교 피알이 선교의 목적이 아니라 이것입니다. 상품 선전하는 것처럼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런 것이 기독교라는 것을 알리는 피알이 선교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진정한 선교, 진정한 복음화는 무엇이냐 하면 짐승처럼 살던 이방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만들고, 복음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게 선교의 목적이고, 목표입니다.
필리핀에 가면은 민다나오라는 큰 섬이 있습니다. 법상으로는 필리핀 영토입니다. 필리핀 영토인데, 거기 가면 아주 기가 막히게 좋은 휴양지가 있다고 한번 오라고 그래서 나는 절대 안 간다고 그랬습니다. 왜, 반란군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땅은 필리핀 땅인데 반란군들이 자기들끼리 세금 거둬 가지고 가지들끼리 살림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못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나라 법이 통하지 않은데, 무법천지입니다. 자 구원받았다고 자칭 말하는 사람들이 혹시 민다나오 섬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날 예수 믿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그 땅에 포고문이 붙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 그러니까 ‘웃기네’ 그러고 자기네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거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법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겠지만 무정부 상태입니다. 통하지를 않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래도 ‘웃기네’ 그러고 마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말하기를’ 그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큰 궁극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입니다. 그들이 경배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이것입니다.
그러면 왜 경배자들이 안 생깁니까? 그것은 결국 여기서 대답이 나오는데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 차지 않기 때문에 경배자들이 안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의 역사나 인물들을 읽으면서 아주 특별하게 정말 사심이 없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았던 그러한 순교자들이나 혹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았던 인물들의 역사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거기서 그렇게 뒤집으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 사람이 어느 교파에 소속된 사람이건 선교를 했건, 평신도를 했건, 사회 사업가로 살았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슴 저미는 삶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이면에는 열심도 있고, 경건 생활도 있고, 모두 있었지만 그러나 반드시 뭐가 있냐 하면은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깊이 엎드러지면서 자기가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될 사람이라고 하는 깊은 인식을 갖게 되는 영적인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게 십자가의 체험일수도 있어요. 그것과 동떨어지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다고, 웨슬레도 마찬가지고, 윗필드나 에드워드, 죠지 뮬러 걸출한 사람들이 다 그런 경험들을 했습니다. 물론 경험한 사람들이 모두 그런 삶을 사는 건 아니지만은 그러나 그렇게 산 사람들은 하나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날의 하나님의 사역이 비지니스처럼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도 결국은 이러한 영광에 대한 깊은 체험을 통해서 한사람의 경배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초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마지막입니다. 자 우리는 속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거룩해 지는 것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과 관련된 일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우리를 경배자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찬양을 부를 때에 경배하는 마음이 들게 만드는 찬양을 만드는 그 사람이 곧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경배하며 살라고 외치는 그 설교자가 얼마든지 자기는 경배하는 삶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일수가 있다 이 얘기입니다.
이 경배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진실한 삶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영광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 찰 때 뭘 느끼게 되느냐 하면, 비로소 자기는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하나의 피조물 따름이며, 피조물로서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영광이며 특권인가 하는 것을 깊이 자각하는 일들을 가져온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부흥이 없이는 경배자들이 안 생깁니다. 머리들만 커져 가지고 머리 굴리는 사람들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수없이 신문, 잡지 어떻게 알고 우리교회로 날라옵니다. 읽어보면 굉장히 많은 부분들은 쓸데도 없는 이야기 거리들, 막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그 영광 앞에서 자신이 앞도 되어 본적이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말 한 마디하고 찬양을 한 곡을 부르고, 전도를 한 마디 하고, 기도를 한 마디 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이라고 하는 영광 앞에서 엎드려 져서 진정한 행복한 경배자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그 사실 자체를 숨길수가 없습니다.
청교도 가운데 질레스 피라고 하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17세기쯤으로 생각되는데, 지금 17세기인지 18세기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납니다만 영국분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경건한 목사님들이 모두 모여서 신앙고백을 작성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이제 신앙고백을 작성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기 전에 기도하고 시작합시다. 질레스 피 목사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겠다고 그러니까 이 목사님이 워낙 거룩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석한 목사님들과 함께 손을 모으고 간절히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문을 읽지는 못했습니다마는 분명히 그 기도 속에서 거룩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인자가 한이 없으시며, 이런 식으로 형용사를 쭉 붙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그런데 그 기도가 정말 거기 모인 사람들을 압도하는 감동적인 기도였습니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여태까지 살아왔지만 지금 이 질레스 피 목사의 기도만큼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말하는 고백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 다른 것은 필요 없고 이 목사님이 한 그 기도를 그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의 신조로 삼기를 원합니다.’ 그랬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문헌들을 이렇게 찾아보면 부흥이 일어났던 시대에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말들이 길고 많고 복잡합니다. 저는 철나서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제일 역겨운 것이 뭐였냐 하면 기도시간에 왜 공기도에 올라가셔 가지고, 저도 머리가 벗어졌습니다만 머리가 벗어지고, 그러신 분들이 올라가서 목소리 근엄하게 하면서 ‘거룩하시며, 자비로우시고’ 뭐 그러면서 평소에 그 사람하고 상관없어 보이는 형용사를 막 늘어놓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고 또 합당하옵시며’제일 힘들었습니다. 그런 점들이. 뭐냐하면 자신은 그 하나님의 성품에 깊이 감동 받은 것이 느껴지지 않은데 그런 문구만 외우고 전수되어 내려오면서 다듬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거를 기원을 더듬어 가보면은 진짜 부흥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가 깊이 경험하게 될 때에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 아니면 '좋으신 하나님' 이런 정도로는 표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가슴에 와서 부딪치는 게 많아지니까, 연애하면 다 시인이 됩니다. 시를 쓸 줄 알아서 시인이 되는 게 아니라 자꾸 딴 소리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문기사 쓰듯이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그 얘기는 너무 많이 나오는 얘기니까 그거 가지고는 자 기를 다 표현을 못해 앞에다 뭘 붙여보는 것입니다. ‘죽도록’, ‘죽기까지’, ‘살아있는 동안’ 어쩌구, 저쩌구 붙여보는데 다 남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새로운 것이 없을까! 그러고 막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영광의 경험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자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체험은 그 사람을 경배자로 만듭니다. 경배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말하자면 수사적인 표현들입니다. 그런 시대에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한없는 기쁨이었습니다. 두 시간만 넘으면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하는 요즘의 예배자들 하고는 차원이 틀립니다. ‘길기는 우라지게 길다’ 그러는 사람들하고 차원이 거리가 많은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고 경배하는 즐거움, 아무 말도 없이 그 분 앞에 서서 그분의 이름을 마음으로 깊이 높여드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기리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셔서 이 더러운 입술, 이 때묻은 마음, 죄로 얼룩진 이 심령이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거론하고, 그 하나님을 영원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배로 높여드릴 때에 그분의 이름이 진짜 우리의 경배를 통해서 높아질 수 있다는 이 감격, 그리고 나같이 하나님 앞에 쓸모 없고 비참하리 만치 더러운 국물이 흐르는 쓰레기와 같이 비참한 이 인생이 그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높여 드릴 때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실 뿐 아니라 그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나의 경배와 찬송과 기도를 받으신다 라고 하는 깊은 감격, 그것이 없으면 그는 경배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일 수가 없습니다.
요번에 제가 열린 신문에 에이든 윌슨 토저라는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지난 호에도 제가 죠셉 얼라인을 소개했습니다. 그분들의 책은 뭐든지 사서 보십시오. 돈이 없으면 딴 책 팔아서 사십시오. 성경하고 제 책만 빼놓고, 내 책이 아니지만 팔아서 사라고,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분이 그 책에서 얘기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함, The pursuit of God 그게 뭐냐하면 우리의 목표는 유능한 일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의 가슴이 붕 뜬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경배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원 깊은 곳에서 경배하고 그분의 이름을 전 삶, 전 행동, 온 찬양 모든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그분의 이름을 높여드리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분의 책을 세 번째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번 가슴 깊이 찔렸습니다. 그 분이 뭐라고 말씀하셨냐하면 오늘날의 쉴새없이 ‘이거하자, 이거하자, 일로 밀어 부치자, 저리로 돌격하자’라는 식으로 계획을 내밀고 끊임없이 교인들을 몰아가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광포한 인간들이라 그랬습니다. 그분의 견해는 참된 기독교의 신앙은 그렇게 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그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깊은 경배가 우러나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약간은 널널하게 운영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바쁜 교회가 아니라 정말 이렇게 예배하고 있는 이것이 내 영혼에서 깊이 우러나오는 경배인가! 그러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일하는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즐거움에 잠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헌금, 우리의 수고, 우리의 선교, 우리의 구제, 우리의 교인들을 돌아보는 모든 것들이 이러한 경배함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고백이 될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것이지 그런 마음이 없이 행한 모든 섬김과 수고와 봉사와 심지어는 고난까지라도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에는 불타 없어지고 말 지푸라기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문득 그 책에 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면서 내가 그 광포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분이십니다.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분이 지금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삶은 단순합니다. 그런데 뭐가 복잡하냐 하면 그런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너무 복잡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에 대한 설교가 간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 성령충만 해, 무조건 믿으면 이기는 거야’ 그게 우리의 인생의 진짜 도움을 줍니까?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삶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보실 때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복잡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것입니까? 사랑을 하고 나서 배워서 사랑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둘이 마음 맞으면 안 가르쳐줘도 정말 열심히 사랑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학습하는 것을 성경도 그렇게 하면 놀라운 발전을 볼 것입니다. 사랑은 학습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가 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가 되는 삶이 얼마나 단순합니까. 그런 주님,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의한 길을 버리고 의로운 길을 걸어가고, 그리고 안일하게 걸어가면서 세상의 버림받지 않는 세상의 설탕이나 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바른 길을 걸어가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이세상의 수많은 친구들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경배자의 마음, 단순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 너무나 복잡합니다. 그러니까 성화에 관한 설교가 아주 간단해 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단순한 공식 하나가 있어서 이리 오면 이것만 배우면은 당장 성도가 된다고 가르쳐주는 것은 전부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배자들이 되어야 되는데 그때 비로소 다른 많은 말씀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자기가 말씀으로 말미암는 깊은 부흥을 경험하고 개인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그러한 것들을 깊이 경험한 다음에 정말 주님을 경배하는 즐거움을 알 때 주님을 경배하는 즐거움을 알고 정말 뼈에 사무치도록 그렇게 주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고 싶을 때, 그때 사람들은 정말 베드로사도가 말했듯이 어머니의 젖가슴을 파고드는 어린아이와 같이, 갓난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굉장히 사모합니다.
성경 읽기 버겁습니까? 더군다나 읽는 거는 덜 버거운데 실천하며 사는 거는 더 버겁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그 자체가 굉장히 힘겹습니까? 그런 이유는 간단한 것입니다. 뭐냐하면 삶 자체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서의 삶으로 나아가면은 더 많은 경배하기 위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삶을 살지는 않으면서 그런 지식들을 계속 습득하려고 하니까 마치 입대해서 전선으로 투입되다가 컴컴한 밤중 어느 길목에서 도망갈 궁리를 하는 사람에게 적진에 어떻게 침투해서 어떻게 적을 사살하고 잡히면 어떻게 하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교육시간이 한없이 지겨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없이는 이런 경배자들이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관한 생각, 이런 것들은 계속 전수 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런 많은 것들이 그 사람의 무릎을 꿇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무릎을 꿇게 만들어서 영혼 깊은 곳에서 스며 나오는 자신의 체액으로서, 영혼 속에서 깊이 흘러나오는 자기 자신 속에서 흘러나오는 그 거룩한 감화의 자신이 온전히 젖으면서 주님을 경배하는 그 일에 행복을 느끼게끔 만들어 주는 것은 영광을 통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체험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런 영광들이 교회에 가득 차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무얼 해야되나, 앞에서는 두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기도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또 하나 여기서 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그런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배자가 되어야 됩니다. 경배자는 그 경배하는 모습을 통해서 경배하지 않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이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그런 경배하는 은혜의 세계로 들어오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껍데기만 가지고 교회에 들랑날랑 하는 사람들에게 충격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통해서 참된 경배자가 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경배자의 예배의 모습이 무엇이며, 진정한 경배자가 이 어두운 세상,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때, 좀처럼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때에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아가는 지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모습자체가 그 사람들에게 생각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일 때에 그가 자기처럼 경배하지 않는 사람을 인해서 애통해 하며 기도하는 것이 의미가 있고, 그가 하나님을 향해서 헌신 할 때에 그것이 여호와의 불의 부를만한 번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고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살아있는 동안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 이런 것들은 임시로 입고 있는 외투와 같은 것입니다. 수 백 만원 짜리 옷 입고 다니는 사람, 잘 때는 그것 벗어놓고 메리야스 입고 잔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다 하고 나서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는 ‘뭔 일을 했냐?’ 아침에 설교했듯이 ‘별 몇 개 달았냐? 사장이었냐? 너가 상무였냐, 전무였냐? 목사였냐, 전도사였냐?’ 그것이 아니라 뭐에 의해서 판단 받느냐 하면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고, 경배자, 한사람의 경배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좋은 경배자였는가, 신통치 않은 경배자였는가, 전혀 경배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는가 그런 것들을 예수님 앞에 판단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정말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런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배자체에서 한없는 행복과 그리고 보람과 즐거움을 느꼈던 사람들은 이 세상의 무거운 짐을 모두 벗고 주님 앞에 설 그때에 그게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슴에 사무칠정도로 그리워하던 시간입니다. 왜, 지금은 보지 못하는 예수님을 경배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을 돌이고 있지만 그때는 얼굴을 마주보며 그분의 이름을 경배할 것이고, 지금은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격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나 이 세상 속에서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죄와 사망의 공포, 두려움, 이 세상의 고통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마땅히 올려드려야 할 우리들의 경배는 마치 바람 부는 날, 골골이 흩어져 가는 메아리소리가 그 바람 때문에 간간이 끝이는 것 같은 그럴 경험을 하면서 일생을 삽니다. 영어로 말하면 언 체인드 멜로디, 사슬처럼 쭉 이어져서 끊이지 않는 그러한 경배의 삶을 살고 싶었는데 그런 삶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가서 그분 앞에 서 있을 때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러한 경배를 아무런 방해도 없이 한없이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솟아 나오는 그 경배를 천사와 함께, 신구약의 거룩한 성도들과 함께 아름다운 음성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다면, 그래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그의 일기 속에서 ‘내가 천국에 가기를 원하는 것은 거기서 편안하게 쉬고 싶어서가 아니라 거기에 가면 좀더 주님 가까이에서 그분을 찬송할 수 있기 때문에 찬송으로 섬기러 하는 그 천국에 간다’ 라고 말했던 것도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철저한 경배자였던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던 것, 믿던 것, 의지하고 있는 것, 사고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눈에 보이는 물질, 환경, 이런 모든 사랑 이런 것들이 모두 떠났을 때 그때에도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한 경배자가 될 수 있는가?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무엇을 통해서 가능해 지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교회당에 가득하게 될 때 그 영광에 영혼들이 압도당하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날 때 그때에 그들이 바로 그러한 경배자로서 주님을 높여드리고, 그러한 경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깨닫게 되고, 실제 그런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수많은 제물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면서 사는 삶을 이 세상의 면류관을 쓴 제왕의 삶보다 더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경배자들로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이 그런 경배자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고, 우리 말고 또 그러한 경배자들을 만들어 내고 우리를 더 온전한 경배자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교회당에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가득하게 하셔서 우리를 바꾸어 주셔야 한다는 필요를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여러분 언젠가는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을, 우리 모두 한사람, 한사람이 그렇게 하나님밖에는 없는 진정한 경배자가 될 때에 그 찬양의 이 지상의 어떤 악기로도 흉내낼 수 없는 찬양입니다. 정말 이스라엘의 찬양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신다’라고 하는 그 말은 찬양이 아름다워서 하나님이 오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자들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왜 아니 가시겠느냐 하는 약속입니다.
6. 교회의 영광과 감사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 하니라(대하7:3下)
지난 시간에 기독교 선교, 나아가서는 기독교 모든 사역에 최종적인 관심사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왜 그토록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 도무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마음,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하고자 하는 부복하는 마음, 그것이 인간의 본분인데도 그런 삶이 매우 희박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를 말씀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 해야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패역한 죄인들이 강한 권능과 함께 말씀으로 역사 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체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의 영광을 체험한 후에 신자들이 그렇게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사는 신실한 믿음의 생활, 이두가지가 함께 고려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항상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의 영광을 체험한 사람들, 먼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 하나님의 진리를 많이 안 사람들을 향해서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저는 사역을 하면서 의심할 여지없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체험한 사람, 어떤 각도에서 보든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이 그 영혼을 만지고 지나간 것이 확실한 그러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예전에는 하나님을 경배했는지는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짐승처럼 막 살아가는 사람,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하거나 뭔가 심각한 잘못에 빠졌을 때 깜짝 놀랍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깜짝 놀라는 것이 오히려 놀랄만한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이두가지가 같이 고려돼요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영광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와 영광에 의해서 주님의 거룩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그 놀라운 은혜,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알게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들며 살려고 몸부림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실한 삶, 이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질 때에 진실한 성도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우리의 삶 자체가 너무나 내 팽개쳐져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 사람이 신앙에 있어서 참 하나님 앞에 승리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놓은 것이 승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하고 뒹글거리고 논 것도 승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그렇게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험, 훈련의 과정, 교회생활, 개인의 경건 생활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일생을 살아오면서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 마음좋은 사람, 힘 좋은 사람,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배자가 되는가!
어떻습니까? 처음 와서 은혜 받고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면서 회개할 때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주님의 이름만 높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더 많이 은혜 받고 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또 이것저것 훈련도 받으면서 교회를 섬기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졌고 또 구역장도 해보고, 집사도 해보고, 또 교사도 해보고 이것저것 다 해 봤겠죠 그리고 여기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자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말 성공한 신앙생활이었는지를 무엇으로 재겠습니까? 그 알량한 성실성, 그걸로 재겠습니까?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건 여러분, 알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 성실함 위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부어주시는 은혜와 성장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으로 재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 각자 자신을 더듬어 보면 됩니다. 내가 그때 처음 은혜 받을 때와 지금, 하나님 앞에 서있는 모든 것을 벗고 목사도 벗고, 집사도 벗고 다른 사람이 우리를 뭐라고 하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발가벗은 한 사람의,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지으신 일개의 인간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향해 경배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의 비천함을 알고 자기의 죄인됨을 알고 또 그러한 소망 없는 자기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어떻게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그 하나님께 정말 경배하고자 하는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그거를 재보면 된다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까 말씀드린 벗어버릴 것 같은 그런 모든 일, 모든 직분, 또 모든 기능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업적을 이루거나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한사람 앞에 서 있는 하나의 피조물로서 주님을 향한 좋은 경배자로 발전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성공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게 성경의 관점입니다.
그 사람이 그러한 경배자일 때에만 그가 이루어 놓은 삶의 모든 업적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은 믿음의 사람 에녹 말고 에녹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가인의 후손으로 높은 성을 쌓아서 그리고 그 성을 에녹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바벨탑도 쌓았습니다. 어마어마한 높이의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배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경배하는 자로서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삶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실한 삶, 믿음의 반응에 달렸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한 사람, 하나님을 향해서 고개를 숙일지 모르고 오만하기 짝이 없고 범사에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묻는 불악 무식한 인간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만들어 주는 그것은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그가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전에 가득 찬 영광 앞에 직면할 때 그는 이때까지 인생을 살아오게 만들었던 쌓아올린 자기의 아집과 이 더러운 자아들을 부숴 버리고 그 앞에 부복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 찬 말씀의 영광과 경배는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모르고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벗겨지는 부끄러움,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깊이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인해서 좌절하는 무너짐이 없는 교회에서 진정한 예배를 찾아본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엄격한 학교의 무서운 생활지도 선생님이 계신 학교의 엄격한 조회 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 침묵할 수는 있고 예절은 지킬 수 있지만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한없는 사랑과 그리고 마음속에 애틋한 경배의 정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의무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지는 금방 드러나게 마련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한 예배를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배는 설교가 설교자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똑같이 예배도 예배자의 수준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아주 훌륭한 경배자, 순수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정결한 경배자, 환경과 그리고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의 깊이 뿌리박은 하나님의 진리의 영광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경배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의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사람이 한해를 지나고 새해를 맞으면서 나의 신앙이 어떻게 자랐나 심방 하다가 물어보면은 자기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무엇을 모릅니까? 금방 압니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 얼마나 경배하는가 작년에는 ‘나도 하나님을 경배했으면’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남의 일처럼 올해 한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성장하고 나니까 내가 정말 높일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 밖에 없고 그리고 주님의 영광과 그 은혜가 정말 수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 세상에 내가 살면 얼마나 좋을까!
누가 제 생일날 어떻게 기억을 하고 카드를 하나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니까 그런 얘기를 썼습니다. 몇 자 썼는데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런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되기를 원하고 자기가 그런 세상이 이 땅이 오게 하는데 그 한 몫을 거둘 수 있는 그런 인생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소원이 바로 경배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눈감고 키타 치고 찬송만 부르는 것이 경배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예배시간에 성가대가 없는 것이 좋다고 했더니 어떤 사람이 수업시간에 ‘목사님 이사야서에 보면 내 백성은 나로 하여금 찬송 부르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는데요’ ‘그 찬송이 성가대 찬송이냐’ 내가 그랬습니다. 경배입니다. 경배, 그렇게 경배의 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부른 찬송, 그런 사람들은 찬송가 387장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합니다.
그것이 없으면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마음이 없이 여기 와서 설교하면 여러분 그 설교를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도 하나도 없이 나와서 하나님 지난주에 저희 집안에 축복해 주셔서 집도 주시고 차도 주시고 그거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겠느냐고 자기 자랑하려고 대예배 공기도 시간에 무슨 자기 집안에 가산 늘린 거 자랑하는 시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정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모든 걸 해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가득 찬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것입니다. 깊은 관계가 아니라 떼어놓을 수 없는 원인과 결과다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숨질 때까지,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 돌같이 긴하게 하소서
주 구원하신 능력을 주 구원하신 능력을 만백성 듣게 하소서
얼마나 멋있는 찬송인지 모릅니다. 자손을 위해서 간절히 원해요 하나님, 우리의 자손들이 이 교회에서 마음껏 주님을 기리고 경배하고, 옛날에 믿음으로 살다 아버지 앞에 갔던 그 거룩한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성전의 매우 귀중한 기둥들이 되게 하시고 그리고 또 어떻게 주 구원하신 이 위대한 구원의 복음을 언제든지 이 교회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후손들의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여기 가스펠송 부르면 나는 이걸 탁 보면은 거의 80퍼센트는 알아 맞춥니다. 저 사람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다 혹은 노래쟁이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집어냅니다. “이런 노래 부르지 마라. 간사스럽다.” 그게 벌써 다릅니다.
우리 관점에서 숨질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진정으로 우리들이 갈망한다면 우리들이 기도해야할 바는 숨질 때까지 우리의 혈관의 피가 멎고 우리의 입 속의 혀가 굳을 때까지 간절히 기도해야 될 제목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됩니다. 이게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방법입니다. 그것 말고는 대부분이 의미가 없거나 매우 적은 의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바꾸어 놓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로 만듭니다. 주님을 향한 경배의 정신에 사무친 사람이 정치를 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정신이 깊이 사무친 사람이 선생님들이 되어서 교육을 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높이지 아니하고는 살수 없고 자신의 몸을 다 불태워서라도 아버지의 이름이 온 땅에 높아지기를 원하는 경배의 영을 가진 사람이 장사를 하고 경제 활동을 한다고 생각을 해보라고, 그런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말 주님을 향한 경배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쓰레기를 치우고 똥을 퍼도 세상은 달라집니다. 교회가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도하고 계십니까? 교회를 24시간 열어놨습니다. 언제든지 와서 문을 두드리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그렇게 개방한 교회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각오를 하고 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다시 사놓는다 그런 정신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갈 때에 정말 주님 앞에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사랑해온 그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는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분깃을 어떻게 누리면서 살았는가 하는 거 아닙니다. 교회가 변한 것만큼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교회에 있어서 얼마나 철저하게 얼마나 뼈저리도록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았으면 우리모두 살을 에이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사랑을 그러한 하나님의 교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어서 우리들이 전심으로 기도해야 되요, 적어도 이 속에서 이러한 기도의 제목을 끌어안고 하나님과 함께 씨름하다 죽겠다 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된다 이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설교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왜 그런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진리를 통해서 진리의 말씀으로 예배 중에 임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그런 말씀에 의해서 깊이 역사하고 있을 때 정말 내 가슴에서 우러나오던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되고 있구나 그렇게 말할 수 있게끔 하나님 앞에 그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말씀이 부실한 주일이면 ‘저 설교자 농땡이 치면서 한 주 보냈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국에 가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스펄젼 목사가 목회하던 그 태버네클 교회입니다. 한때 만 이천 명 심지어는 이만 명 가까이 까지 교회당에 모였고 너무나 많은 교인이 모였기 때문에 이층이 무너져 내린 적이 있을 정도로 그렇게 사람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그리고 각양각층의 사람들이 한 교회 속에 모여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시인도 있었지만 노동자도 있었고 또 실업자도 있었지만 정치인도 있었고 철학자도 있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 만나고 놀랍게 새사람이 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때의 일화입니다. 스펄젼의 생각이 저하고 비슷한지 당시에 유행하던 고딕양식의 건물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고딕양식으로 지은 것 보면 높이 올라가는 것, 사람도 안들어 가는데 그거 짓는데 돈 다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체육관 식으로 지붕이 평평한, 그러한 교회당을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지었습니다. 건물이 전통적인 교회당하고 너무 다르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동네사람들에게 저 이상하게 생긴 저 건물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이 그 동네 안 믿는 사람한데 물어 봤는데 그 안 믿는 사람이 그 안 믿는 사람한테 대답하는 말이 재미있었습니다. ‘예, 선생님 거기는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올시다’
한 교회가 불신자들에 그렇게 알려 지기까지 수많은 밴드나 혹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거리거리를 누비는 그러한 피알이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자기의 이웃들이 그곳에 가서 교회당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말씀의 영광 앞에서 새 사람이 되는 변화를 보면서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과 자신들의 이웃이 그 진리에 의해서 영향받았다는 간증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게 교회가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영광입니다. 그 은혜 받은 수많은 성도들이 스펄젼을 위해서 정말 열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정말 열렬히, 스펄젼 자신은 그의 전기를 보니까 하루에 평균 한시간 이십 분 정도 기도하면서 목회 사역을 훌륭하게 이끌어갔어요 물론, 기도의 수준에 차이가 있겠지만 이끌어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은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몇 년 전에 갔다 오신 분에 의하면 오십 여명 정도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모인데요 영광은 사라지고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여서 그것도 주일날 놀러가기 전에 잠깐 들르는 교회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사라지고 나면 교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다시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운 권세가 누군가에 의해서 베풀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광 앞에서 거룩한 경배자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날 때 그 영광은 잠깐 사이에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금요일 날 로마서 강해를 할 때면은 천 이 백 명이 넘는 회중들이 가득 운집했습니다. 그 나라 상황에서, 지금 우리 나라에서의 천 이 백 명은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지만 그러나 그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득 에워서 진짜 성도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심오한 로마서 강해에 귀를 기울이면서 깊은 진리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알아 가는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존스 목사님이 돌아 가신지 18년인가 지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빈여드, 쓰러뜨리면서 기도하는 사람들 데려다가 집회하는 교회로 변했습니다. 인원도 삼 백 명도 채 모이지 않는 교회로 변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사라지고 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올라가서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 스피커의 소리를 듣고 계단을 걸어 올라오던 방금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이 거꾸러지면서 뒤집어 지는 역사가 일어나던 그 계단이 지금도 있지만 여전히 교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이것입니다. 경배자로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은 그래도 말씀의 감각이 있는 분들이니까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금방 감을 잡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교회 생활을 성도의 삶 속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면 성도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지은 가장 뼈아픈 범죄 중 하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는 성도로서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섬김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영광과 권세가 가득 차고 여호와의 전에 모인 수많은 교만한 백성들을 향한 거룩한 경배자로 뒤바꿔 놓은 놀라운 사건이 기도를 마쳤을 때 벌어졌습니다. 기도를 모두 마쳤을 때 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깊이 마치 이 어떻게 보면 약간은 허황 되어 보이는 것 같은 이 기도의 제목이 살 깊이 파고 들어와서 내 마음속에 한이 되고 내 마음에 뼈저린 그리움이 되기까지 부여잡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그러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이 무신론에 가까운 기독교의 복음이 유행하는 이 뒤틀린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생명의 길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죄를 대속 하신 예수 의에 심판하시는 날
곧 가까이 임하는데 믿는 자여 어이할꼬
그 두려운 심판의 날에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주님만 경배하고 높이며 살고 싶어했던 그 마음, 그리고 그 마음으로 고백하면서 살아온 사람들만이 그날에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당에 가득 찰 필요를 느낀다 이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늘 성경에 보니까 감사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가득하게 되면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은혜가 생깁니다. 자연스럽게 거기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적으로 사람이 충만해 지게 되면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항상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두운 것들을 항상 밝게 보고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그것을 항상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은혜를 받고 거기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는 일들이 그치게 되면은 옛날에 무슨 은혜를 받았든지 말씀의 깊이가 있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마음속에서 모든 감사가 다 메말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영광을 통해서 사람들이 깊이 하나님을 만나면 영혼의 부흥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교회는 예배드리는 데 이질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왜 그런 이질감을 느꼈느냐? 사람들이 전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자기는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는데 너무 강요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고 합니다. 아니 누가 강요를 하냐 내가 강요하더냐 왜 그렇게 슬퍼서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돌아보면은 경건한 슬픔의 깊이와 거룩한 기쁨의 깊이는 항상 비례합니다. 하나님 앞에 늘 자기의 부족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슬퍼하는 경건한 슬픔이 있는 사람들의 기쁨은 거룩한 기쁨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눈물 한 방울커녕 콧물 한 방울도 못 흘리면서 그냥 예배 끝나기만 기다리는 사람이 매일 눈가에 주름이 생기도록 웃고 돌아다니는 것은 다 세속적인 데서 오는 기쁨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니 인생살이에서 뭐 그렇게 그냥 가슴이 저릴 정도로 기쁜 일이 있습니까? 난 없습니다. 조금 좋은 일이야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조금 좋은 일, 뭐가 있을까 전기세 조금 나온 날, 딱지 띨 뻔하다 간신히 구제 받은 날, 애들이 가서 시험지를 다른 애들도 다 맞았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다 맞았다고 올 때, 조금 기쁘지만 그게 그렇게 그냥 가슴이 저미도록 그렇게 기쁜 일이 있습니까? 난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그런 기쁨을 주실만한 일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속 빈 사람들이 낄낄거리면서 다니면서 좋아하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은 반푼이 비슷합니다. 아니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하나도 별로 그렇게 좋아 보이지도 않은 거 물론 좋기는 좋겠지만 그래도 저 정도로까지 좋을 일은 없는데, 뭐 은행에서 돈을 받았는데 만원 짜리가 하나 더 왔다고, 그러니까 사실 이상으로 괜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다 가슴이 허한 사람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옛말에도 흥진비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흥이 지나고 나면 슬픔이 온다 열흘 가는 기쁨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슴이 시리도록 그렇게 기쁘고 즐거운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해 질려면 예수 잘 믿으십시오. 다른 것은 끝났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행복을 찾아도 그 행복이 옛날의 놀던 그 행복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감화 그리고 장엄한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 앞에서 내가 얼마나 지푸라기와 갚은 인간인지를 깊고 뼈저리게 깨닫게 될 때 처음에는 슬픕니다. 왜 자기가 부서지니까 그렇습니다.
정말 이제껏 살아온 것이 짐승과 같이 살아왔고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자기가 깨달으면서 그 말씀의 영광 앞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몰랐던 성품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픕니다. 그리고 슬픕니다. 그리고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왜 내가 나인 것이 고통스럽습니까? 내가 나인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슬퍼 보입니다. 그래서 어느 영적인 인물에 일긴가 자서전에서 너무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비참하고 소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까 들의 핀 꽃 한 송이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고 풀 포기 하나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랍니다. 내가 저렇게 느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한 포기의 풀이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은 잠깐입니다.
잘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아니 기쁠 이유가 없는 사람들한테 기뻐하라고 자꾸 요구를 하는 거는 사람 놀리는 것입니다. ‘기뻐하라 웃어봐 좀 웃어’ 아니 웃을 일이 없는데 무엇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감화를 받고 그 영광을 통해서 자신의 그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그런 아픔을 경험할 때 그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 즉 신령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신령한 기쁨, 속된 기쁨이 있고, 신령한 기쁨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교회가 정말 신령한 기쁨에 가득 찬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가득 찬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통해서 사람들이 깨어지는 아픔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오늘 죽도록 깨어지면서 아파하고 흐느끼던 사람들이 다음주일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용납되어지는 진실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생명, 그리스도 예수의 진실한 은혜의 세계로부터 흘러들어 오는 참된 기쁨의 샘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속된 이유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참 신령한 이유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 기쁨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모두 원망할 수밖에 없고 좌절할 수 밖에 없고, 불만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남이 알지 못하는 기쁨의 원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황을 뛰어 넘는 즐거움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 우리는 흔히 그런 얘기를 합니다. 고난 속에서 감사하라 그것은 억지입니다. 아니 고난 속에서 괴로워 죽겠는데 어떻게 감사가 나옵니까?
옛날에 내가 다니던 교회의 권사님은 심방을 가면서 걸어가다가 고무신으로 돌부리는 뻥 찼는데 나둥그러졌습니다. 놀래 가지고 일으켜 세우니까 ‘주님 감사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게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말이 됩니다. 어떻게 말이 되느냐 하면은 고난 중에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라는 말은 고난 그 자체에서 오는 쓰디쓴 고통 때문에 감사하는 게 아니라 그 고난자체는 매우 쓰고 고통스러운데 신령한 은혜를 받으니까 고통은 환경에서부터 들어오면서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데 신령한 은혜를 받으니까 이 속에서 근원도 없이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진짜 한번 인생의 막다른 골목까지 가보셨어요 정말 하루 저녁에 눈을 감고 잠이 들면 이튿날 뜨고 싶지 않는 그런 인생, 한번 그런 막바지까지 가보셨냐고 안 가봤으면 얘기를 하지 말아야지, 아무도 모르게 흘리는 혼자 우는 눈물 젖은 밤을 세워보지 않은 분은 인생을 얘기하지 마십시오. 절망의 밤을 지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런 속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 못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 해 준다고 어떻게 하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우리 속 사람을 변화 시켜서 신령한 기쁨의 원천을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신령한 기쁨은 참 이상합니다. 세상에서 오는 기쁨은 눈에 뵈는 게 있어야지 기쁜데 아니 괜히 갑자기 기분이 즐거워 졌다가 갑자가 막 죽고 싶다가 그것은 정신병 증세입니다.
이번 사경회 때도 누가 그런 얘기했습니다. 진짜 자기가 창세기 34장에 있는 사람인데, 그런데 왜 창세기 34장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난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있으라고 그랬지 내가 말릴 재간이 있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였습니다. 일주일동안 은혜를 받고 보니까 기쁨이 솟아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주일 동안 부흥회 참석하는 동안에 그 사람의 삶의 상황이 그렇게 열심히 집회 참석하는 동안에 놀랍게 바꼈느냐, 바뀌긴 뭘 바뀝니까.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은혜 받아도 가보니까 문제는 문제 그대로 그냥 남아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는 문제를 통해서 자꾸 쓴 물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쓴 물이 한번 들어와서 먹물처럼 탁 풍기면 머리는 혼돈해지고 갈피를 잡을 수 없고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면서 ‘아이씨 다 때려 치자. 너 죽고 나 살자 인생이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자포자기하고 다 때려 치고 싶은 생각이 들고 심지어는 가엾은 어머니 왜 날 나셨나요, 거기까지 가는 것입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끔찍이 저주했다고 ‘왜 우리엄마가 낙태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게 사실은 장난이 아니라 진짜 너무 인생의 쓴 물을 먹으면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환경을 하나님이 새롭게 바꾸어 놓으신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근원도 알 수 없고, 은혜 받고 매우 기쁜 사람에게 가 가지고 ‘너 왜 그렇게 기뻐하느냐?’ 그러고 물어보십시오. 대답할 말을 못 찾을 것입니다. ‘아니 왜 그렇게 기뻐 내가 보기에는 다 실패한 인생이고 막판까지 몰린 인생인데 아니 뭐가 그렇게 기뻐 막판까지 몰리다가 돌았나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왜 그렇게 기뻐? 자기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기쁨, 기쁨, 기쁨을 너에게 주노라
속에서 그냥 솟아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염려와 근심이 밀려오면은 확 흙탕물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으면 속에서 들립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해하느냐
속에서 퐁퐁 솟아나는 것 같은 기쁨이 우리를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이유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모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왜 솟아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느껴지고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일들을 어떻게 가져다주는가 하나님의 교회의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충만할 때 이렇게 완전히 절망 속에서 주님께 감사할 수 없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없는 기쁨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하나님 앞에 그 생명의 말씀의 놀라운 영광을 통해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한 사람들의 영혼 속에 주님이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쁨의 샘을 터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정말 못살겠다고 괴로워 죽겠다고 그럴 때 예수 믿는 사람도 옆에서 ‘주여’ 가만히 보면은 ‘주여’ 부르는 거 같지만 사실은 ‘죽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세상사람들이 사업이나 잘 되어서 돈이나 몇 푼 만진다고 깔딱깔딱하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 눈에 뭐가 좀 되는 것 같으니까 깔딱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 뭐가 조금 안 되는 것 같으면 ‘죽어’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면 그들의 삶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환경을 능가하는 거룩한 기쁨이 그들로 하여금 감사하여야 하게 하고 그리고 상황을 넘어서는 참되고 거룩한 기쁨이 그들로 하여금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높이고 경배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 하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할 때 그 교회당에 들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가 이런 것들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까?
나는 정말 인간세상 사는 구석구석을 들추어 볼 때마다 세상에 살고 싶은 맛이 없습니다. 왜 정말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 없이 행복한 사람 발견하면은 저한테 데리고 오십시오. 저가 뭐든지 드리겠습니다. 혹시 만약에 있다면 그 사람이 중대한 영혼의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감각이 마비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없이는 정말 행복이 없다고 그런 비참한 그게 결국은 이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서 고통과 벗하면서 살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한 인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도처에 인간을 좌절하게 만들고 엎드러지게 만들고 주저앉게 만드는 그런 함정 내지는 덫이 얼마나 많은 길을 지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속에 안 믿는 사람들만 걸어가는 게 아니라 믿는 사람들도 똑같이 걸어갑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기쁨의 원천이 있어서 예수를 믿고 나니까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되었고 전날의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기쁨의 원천,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많이 생겨나는 놀라운 역사가 있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으로 가득 차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교회당에 왔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 그때에 그곳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가득 찬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누가 IMF에서 교회가 살아남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IMF 성경을 읽어야 되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의 대답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지나는 현실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힘겹고 지금 그렇습니까? 그런데 간단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능가하는 그런 놀라운 기쁨, 그것들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 찬 여호와의 말씀의 영광이 역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사하게 할 때, 그때에 넘치도록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드리며 사는 삶이 가능해지고 그러한 성도들의 헌신된 감사의 삶 위에 하나님이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7. 교회의 영광과 찬양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 하니라(대하7:3下)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가득할 때 경배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지난 주에는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가득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로소 경배자들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감사의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 합니다. 찬송합니다. 가로되 주는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러면서 찬양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이 삼절 마지막 절에 와서는 이제 일 이 절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 이 절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고 하나님의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번제물을 사르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놀람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감격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고 그래서 그 두려움 때문에 제사장조차도 늘 드나들 수 있어야 하던 그 성전에 드나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하나님의 영광이 경배자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경배하게 되자 감사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한 찬양이 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조직적인 지위가 없었어도 모든 백성이 한 마음으로 ‘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런 찬양이 성전에 가득 울려 퍼지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볼 때마다 언제 찬양을 생각하게 되었냐 하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홍해를 건너고 난 후에 능히 이 백 오십 만 명 내지 삼 백 만 명 가까이 되었을 그 어마어마한 인류 최대의 성가대가 조직적인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없었지만 그러나 미리암의 소고에 맞추어서 그 이스라엘의 방금 본 위대한 구원과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서 홍해로 뛰어들었던 그 위용을 자랑하던 애국 왕궁의 친위병들이 마치 가랑잎처럼 출렁거리는 홍해에 수장되는 광경을 보면서 장엄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의미의 찬양입니다. 그러니까 찬양이 찬양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경험 그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직한 견해입니다.
제가 아래쪽에 있는 유력한 신학교의 대학원에 개강 세미나의 강사로 초빙되어 강사로 갔습니다. 한시간 강연을 하고 한시간 설교를 한 후에 교수님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나믄명 모여있는 교수님들 가운데 한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다 신학 파트에 계신 분들 이셨는데 그 중에서 한 세분정도가 제 책의 독자였습니다. 제 책을 다 읽은 한 교수님이 식사시간에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책을 읽어보니까 참 좋은 데, 예배와 설교에 대한 견해를 자기가 읽고 나서 하나 의문이 든 게 있었답니다. 그게 뭡니까? 하고 물었더니 목사님이 얘기하고 있는 예배와 설교는 너무 심각하고 진지해서 어떤 축제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답니다. 굉장히 예리한 지적입니다. 그러면서 성경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는 반드시 축제적인 성격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할 수 없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할 뿐만 아니라 또 그 자리차체가 커다란 축제와 기쁨이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의 절기를 영어로 페스티벌이라 그럽니다. 축제의 그 말은 맞습니까? 틀립니까? 가만히 있다가 이등하는 것이 났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목사님이 예배도 너무 심각하고 설교도 너무 심각한 나머지 이 기쁨의 축제적인 요소가 너무나 제외된 것이 아니냐는 자기의 의견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식탁에서 밥풀 튀면서 논쟁을 벌일 생각은 없었고 그냥 빙긋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거기서 간단하게 한 대답을 오늘 이 시간에 좀 길게 하려고 합니다.
뭐냐? 그 하나님 앞에 경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을 때 그때에 기쁨이 넘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기쁨이 넘쳤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너무나 획일화해서 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에스라서에 나오는 수문 앞 광장에서의 예배 율법을 쭉 낭독할 때 굉장히 침울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기들의 죄가 다 드러나니까.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분이 말씀하신 것은 상당히 정확한 견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문제를 우리들이 풀어볼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를 풀어나가기 전에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모이는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백성들을 소집하는 것은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건축헌금을 위해서 부흥회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흥회를 하거나 집회를 하거나 예배를 계획하면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은 옳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제 청년들 같은 경우에는 그런 생각도 할 것 같습니다. 어씨 우리 이사할 때는 교회 수리하라고 매일 모았는데 그것도 하나님 높이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청년들이 그랬답니다. 한 스물 댓 명 모이는 청년부에서 목사님께 목사님 우리 이번 가을에 설악산으로 이박 삼일로 놀러갔다 오겠다니까 목사님이 안 된다고 그랬답니다. 근데 갔다 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펄펄 뛰셨습니다. 담임 목사가 안 된다고 그랬는데 에이 이놈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청년들이 재미있습니다. 교회서 안 된다고 해서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모여서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것은 오직 하나의 목적,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기 위한 그러한 의도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임 속에 축제적인 성격이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것은 모인 사람들이 축제의 분위기로 만들자 그래서 축제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불이 떨어져서 제단의 번제물이 타오르고 아마 무슨 소리가 안 났겠습니까? 불이 내려오는 데 뭔가 장엄한 소리까지 났을 겁니다. 그러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게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엎드려 졌을 때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아마 거기에는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까불면서 살아왔던 지난날들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정주영 회장이 자기 자서전에서 얘기하기를 한창때는 자기도 무서운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직원을 야단을 쳤더니 이 친구가 혼비백산이 되어 나가는 데 캐비닛 문을 열면서 나가려고 하더랍니다. 캐비닛 문이 출입문인줄 알고. 돈 좀 가지고 있는 일개 재산가의 명예와 영광도 평범한 인간을 굴복시키는 힘이 있거늘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였을 때 정신 못 차렸을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어디서 까불어 까불긴. 그렇게 살아왔던 날들을 진짜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 두려움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 하나님 앞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 분의 이름을 높여야 하는 정말 미천한 피조물이라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경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무엇인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 삼으시고 자기의 일을 우리 손으로 이루어 가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기업을 주시고 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운 특권, 하나님 자신이 소유한 민족이 되게 하시는 가. 그러니까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가슴 깊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답이 다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흥을 돋구기 위해서 찬양을 한다든지 아니면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예배시간에 풍선을 터트리고 한다든지 폭죽을 터트리고 한다든지 뭐 춤을 춘다든지 그런다고 해서 그게 축제의 분위기가 되는가, 그리고 그런 축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의 즐거움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거기에 계시면 즐겁지 말라고 그래도 즐겁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거기에 안 계신데 계신 흉내를 막 내면서 춤을 추고 난리를 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느 해 겨울에 집회에 갔는데 제자들이라고 해서 전화가 왔는데 여러 교회에서 모아 놨으니까 와서 집회를 해달라 그래서 추운 겨울에 북쪽 어디에 갔는데 한 사 백 명 중 고등 학생들이 모였는데 찬양 인도자 참 대단했습니다. 부흥사 스타일의 찬양 인도자인데 쉼 없이 찬양인도를 두 시간 정도 하는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메들리로 레퍼토리를 참 쉼 없이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전부다 무릎 꿇게 하고, 손바닥에 피가 날 정도로 손뼉치게 하는 데 그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이 막 박수를 쳤습니다. 나중에 잠깐 쉬고 나서 기도를 하고 그리고 나는 설교하라고 그런 줄 알았더니 또 찬송을 했습니다. 뒤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는데 애들이 “에이씨 또 찬송해. 에이씨 힘들어 죽겠는데”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자 그래서 축제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항상 하나님의 장엄한 만남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 간절한 백성들의 탄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물 젖은 애원의 목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 영광의 위엄 앞에 엎드려 지는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고 그 거룩한 성품의 빛 앞에 드러난 자신의 그 까불면서 살아온 옛날들을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과 자신은 단지 그의 손으로 지으신 피조물일 뿐인데 그가 한없는 사랑으로 자신들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데 대한 놀라운 기쁨 경배. 그것이 그를 하나님 앞에 온 몸으로 춤추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온 목소리를 다해서 여호와의 아름다운 성품을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분위기는 축제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자 이번 집회는 우리 흐느끼는 집회로 만듭시다. 이번 집회는 원 없이 소리질러 봅시다. 이번 집회에는 우리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어 봅시다. 그런다고 해서 그 분위기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는 것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여러분 실제로 찬양할 때는 살아 있습니다. 진짜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을 찬찬히 풀어 나가면은 분위기가 착 식습니다. 진리는 어떤 힘이 있느냐 하면은 진리가 아닌 것들로 말미암아 세워진 기쁨을 지워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들로 말미암아 생긴 슬픔을 없애 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질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뜨거운 것이 다 뜨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큰 영광이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는 축제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결과만 보지 말고 뭘 보느냐 하면은 그 앞에 나와 있는 기도와 그 다음에 하늘로부터 내리는 불과 놀라운 역사. 이런 것들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 앞에는 아주 두려울 정도를 심각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이 자신의 본분과 위치를 깨닫게 되는 각성이 있고 그 자리에서 부복하여 하나님을 향한 경배자로 바뀌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감사와 찬양 경배를 통한 축제의 분위기가 이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분들은 그것은 구약에서는 맞는데 신약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증거를 봅시다. 사도행전 2장. 1장에서부터 제가 필요한 부분만 몇 구절 골라 보겠습니다. 1장입니다. 13절부터 보겠습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에 대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렇게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 졌더니 하나님의 전에 영광이 가득 찼던 것처럼 이번에는 다락방에 영광이 가득 찼습니다. 2장 1절 보십시오. ‘오순절 날에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모였더니’ 모인 것도 비슷합니다. 한 곳에 모인 것이 또 재미있는 데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개인적으로도 경험되지만 성경의 중요한 관심사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공동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뜻을 같이 한 사람들끼리 의기 투합해서 잘해 보자고 손바닥 치면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동시에 공통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서 참된 영적인 공동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 또 불이 나옵니다.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 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였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리고 이제 쭉 넘어 갑니다. 이제 2장의 뒤편으로 넘어갑니다. 그랬더니 이제 비슷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데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은 46절을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그렇습니다. 똑같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날마다’ 진짜 축제의 분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심각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어디냐 하면은 3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게 말하자면은 말씀의 강력한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냐 하면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큰 두려움과 자극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이게 박석 깐 땅에서 엎드린 상태와 유사한 것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그러니까 40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은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드디어 이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한 사람의 경배자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기쁨이 넘치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어떤 설교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초대교회 성공의 비결 그렇게 말하고는 기사와 표적이 많았다, 다 같이 모였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재산을 팔았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 했다, 성전에 모였다, 그리고 떡을 같이 뗐다, 음식을 먹었다, 찬송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전도를 많이 했다, 그랬더니 초대 교회가 성공을 많이 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하자.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완전히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공의 비결이 아니라 부흥이 일어난 결과입니다. 결과는 부흥이 일어나야지만 이러한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 어떻게 기적을 일으키자고 힘쓴다고 해서 기적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면 논리가 거꾸로 올라가서 우리도 다 재산 팔아 가지고 모여서 텐트 치고 같이 먹고 서로 팔아서 서로 필요한 사람 다 나눠주고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보고 우리 좀 칭찬해 달라고 그러고 그렇게 하면 죄인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느냐?
초등학생이라도 뻔한 논리를 그렇게 성경을 거꾸로 봐 가지고 그렇게 하면 그 성전 안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보세요. 이런 놀라운 일들이 신약에서도 일어났는데 적용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흐름을 타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은 심각하고 고통이 있는 그 예배 속에 사실은 기쁨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말씀을 들으면서 흐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그럴 때 그 흐느끼는 의미는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세상에 저런 사랑을 내가 받았다는 데 내가 지금 이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년이지.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막 마음 아파서 흘리는 눈물도 있지만, 또 이미 그런 하나님 앞에서 깊은 깨어짐을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랑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맞아. 하나님은 정말 나는 공로 없는데 그런 사랑을 나에게 물 붓듯 부어 주셨구나.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사람은 눈물 흘리고 있지만 앞에 말한 사람은 마음 아파서 흘리고 있는 눈물이지만 뒤에 사람은 감격에 차서 흐리는 눈물입니다. 앞에 사람은 지금 참회와 회개의 눈물이지만 뒤에 사람은 축제의 눈물입니다. 너무 신나도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의 관심은 축제의 분위기가 우리들의 관심일 순 없습니다. 그 결과입니다. 성경이 항상 기뻐하라. 아니 기쁠 이유가 있어야지 기뻐하지. 기뻐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그럽니다. 명령은 사실입니다. 그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할 것이 참 많습니다. 공장에서 갓 꺼내온 차를 부산까지 끌고 가. 그러면 그 끌고 가라는 말이 진짜 줄로 묶어 가지고 끌고 가라는 것입니까. 차를 시동 걸어 가지고 가라는 것이지 이 사이에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면 명령 내리는 사람이 빨리 끌고 가라고 하지 그거 끌고 가고 가스 충전소 가지 말고 주유소 가서 기름 넣고 시동 걸어서 그리고 안전 장치를 풀고 그리고 도로로 들어서 차선 따라서 신호 지키면서 가라고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끌고 가라 그러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성경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우리 주님이 기뻐하라고 명령하셨어. 야 그러면 모두 웃자. 히히덕 거리는 것입니다. 그게 모두 정신병자들이지 무슨 기쁨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그런 것을 느낍니다. 처음에는 조금 감격을 했습니다. 야, 스튜어디스들이 -한국은 잘 안 웃습니다. 외국은 스튜어디스들이 하도 웃어서 힘살이 생깁니다. 그냥 이렇게 자동으로 벌어집니다. 처음에는 황홀했습니다. 그러나 다 가짜입니다. 입만 웃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뭡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에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누가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슬픈 일들이 가득 우리를 에워싸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쏟아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사실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정말 절망하고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때에는 교회에서 희망을 주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말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입니다.
IMF와 같은 혹독한 위기, 그리고 실직을 당하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한 7개월 가까이 교회에서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한 교회는 우리 교회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는 인공적인 미소를 나누어준다든지 심정을 자극해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사람의 정신을 빼놔서 뭔가 그 정신 빼놔서 코미디 보다가 빚진 것도 잊어버리고, 어디 수배 당한 것도 잊어버리고 낄낄 웃습니다. 그런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 기쁨의 근원. 지금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고 죄와 불순종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이제 스스로 기쁨이 솟아나게 할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린 그 망가진 영혼.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을 완전히 고쳐서 그래서 정말 세상이 알 수 없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진정한 기쁨이 이 속에서 솟아나게끔 그 망가진 영혼을 고쳐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눈물이 많이 나오는 것도 걱정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 있는 데 눈물이 많이 나오는 것도 걱정입니다. 더 큰 병중에 하나가 뭐냐하면은 눈물이 안나오는 병입니다. 그 심각하다고 그럽니다. 눈이 아파서 어쩔 줄을 모른 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술을 해야 합니다. 기쁨의 근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떻게 기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교회에 와서 이 저 크리스마스 때 했던 것처럼 발표회 한번 더 할까요. 그러면 아마 김희철 집사님 고깔모자 쓰고 올라가서 춤 한번 추시면 모두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밖에 나가면 금방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라지는 기쁨입니다. 이 축제적인 찬양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성품을 깊이 경험한 데서 우러나온 억누를 수 없는 찬양입니다. 이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된 것에 대한 프라이드는 제국의 넓이나 제국의 강성함이나 제국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의 수에 있는 프라이드가 아닙니다. 나 비록 가진 재물이 없고, 나 비록 아무런 권세 없는 신령한 세계, 거기에서 솟아 나오는 세상의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 경배와 기쁨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축제적인 마음.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처음에는 한없이 두려워했는데 나중에는 하나님을 인해서 말할 수 없이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은 그렇게 참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행복과 그 다음에 신령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데서 오는 영적인 프라이드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쳐지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이런 장엄한 하나님의 체험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 흔히 설교시간에 얘기하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모임 가운데 임한다. 뭐 그러한 말로 표현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즐거워지는 축제의 분위기와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행복을 누리는 것은 너무 원하는 데 그 이전에 밟아야 하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쁨을 주시겠다고 하는 데 ‘내가 네게 기쁨을 주리라’ 하시는 데 아, 나 좀 생각 좀 해보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아프리카오지로 선교사로 보낼 텐데 괜찮겠느냐’고 그러면 생각해 보겠다는 사람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기쁨을 주리라’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아멘 하지만 ‘너 나하고 한번 만날래’ 할 때 ‘글쎄요’ 하는 사람 많을 것입니다. 좀 있다가, 준비를 좀 합시다, 쉼 호흡을 좀 하고 요새는 기도도 못하고 형편없이 바닥을 기는 데 왜 하필이면 이때 만나자고 그러십니까. 은혜도 받고 기도원에도 다니고 그럴 때 자신 있을 때는 안 나타나시고 왜 지금 만나자 그러십니까. 그런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그런 것들을 회피해 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뭐 하나님의 영광 없이 못삽니까? 살면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영광의 영광을 보고 그 말씀을 영광 가운데서 그 장엄한 하나님의 인품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때도 그랬고 특히 요즘은 지극히 소수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못 삽니까? 다 잘 삽니다. 밥 세끼 먹고. 다 잘 삽니다. 약간 짐승 비슷하게 살아서 그렇지요 살긴 다 삽니다.
그런데 딴 사람들 다들 살아가는 데 ‘이건 아니야. 우린 이렇게 살 수 없어.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짐승과 방불한 것이야.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어떻게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 이건 배교에 가까운 삶이야’ 하면서 아직 실현된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장엄함을 붙들고 그것이 현실에 이루어지기를 솔로몬처럼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도하기를 다 마치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하기를 그리워하면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 하나님 우리의 교회 속에 오시옵소서. 오시기 위해서 길이 필요 하시다면 내 육체를 가르시고 그 쪼갠 나의 육체 사이로 길을 삼으셔서 내려 오시옵소서. 그렇게 자기를 다 바치는 그런 헌신이 쉬우냐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 바친 후에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이 가득하게 될 때 거기에 모두 엎드려서 인간의 파렴치한 것에 대한 견해와 까불면서 살았던 지난 삶들에 대한 깊은 참회와 그리고 어줍지 않은 인생관으로 하나님의 성경을 먹칠했던 그런 교만한 삶에 대한 견해를 모두 다 불사르고 완전히 땅바닥에 엎드려진 진토와 같이 된 그 엎드려진 상태에서 손을 높이고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경배자가 되는 것이 쉬우냐 이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서 비로소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참된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쁘다면서 살아가는 데 대부분은 신령한 세계에서 도착한 기쁨이 아니라 낄낄대면서 살아가는 그것은 짐승 같은 것입니다. 정신병원에 갔을 때 섬뜩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괜히 웃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한번만 해 보십시오. 진짜 무섭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봤을 때 도저히 기뻐해야 할 이유가 없는 데 낄낄거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동물입니다. 짐승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기뻐해야 할 이유가 없는 데 그냥 살아가는 것도 불순종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그러면서 기뻐하라는 그 명령을 받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없고 기뻐하라는 이유는 너희 안에 기쁨이 있느냐 없다면 그 원천이 왜 무너졌느냐 그것을 생각해 보고 근원적으로 고쳐나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 기쁨이 사라진 삶을 살고 있다면 기뻐하라는 명령에 여러분들은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것은 하겠지만 그걸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그러면 그 기쁨을 왜 잃어버렸는지 원천을 찾아 들어가고 나면 이런 공식이 성립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인한 그 신령한 즐거움으로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그 깊이는 하나님의 영광, 말씀의 영광을 경험한 깊이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 기쁨은 신령한 세계에 뿌리를 둔 기쁨이고 거기서부터 우러나온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환경에 의해서 흔들리거나 환경에 의해서 좌우되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더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에게 그런 기쁨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가득하게 되는 그러한 놀라운 축복이 결국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뿐만 아니라 그 앞에 경배자가 서 있는 우리를 한없이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누를 수 없는 환희와 거룩한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것이 이 세상에 가장 잘 전해지는 비결은 말을 잘 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세상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신령한 세계 속에 뿌리를 둔 그러한 기쁨과 평안을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아갈 때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우리의 그 기쁨의 근원 자체가 자신의 기쁨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에 장엄한 영광이 있고,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사악한 죄와 그리고 잘못된 인생에 대한 견해와 편견 같은 것들이 모두 타오르는 불길 앞에 지푸라기처럼 살라지고, 그리고 인생에 대한 정직한 견해가 드러나서 그래서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흙덩어리에 불가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고 그 분의 진정한 행복이 완전히 엎드려져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이름을 경배하는 경배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본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그때 기쁨이 충만해 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정으로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오락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진정으로 기쁨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 잃어버린 행복의 근원,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됨으로 말미암아 상실해 버린 그 진정한 신령한 기쁨의 그 근원, 그것이 무엇인지를 들을 수 있고 그것을 새롭게 고치기 위해서 자신이 결단할 수 있는 장엄한 진리가 언제든지 타협 없이 진정하게 울려 퍼지고 거기서 정직하게 그 말씀을 향해서 반응하게 하는 권세 있는 영광이 가득할 때 거기에서 먼저 경배자가 만들어지고 그 경배자가 그 본분으로 돌아갈 때 한없는 찬양과 그리고 축제가 이들의 영혼 속에 아롱지게 되는 것입니다.
8. 교회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때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 하니라(대하7:3下)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할 때에 비로소 그 공동체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에 진리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될 때에 그때에 찬양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오늘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확실히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찬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그러한 주님과의 만남의 축복이 없이는 모든 것은 다 관념에 그치는 것입니다. 예배도, 찬양도, 기도도, 예배를 통해서 장엄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한 적이 있는 공동체는 항상 예배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또 그렇게 우리의 온 영혼을 압도할 것 같은 그러한 찬란한 영광이 아니더라도 예배를 통해서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과의 참다운 만남을 경험한 공동체가 예배를 드리는 것과 그게 뭔지도 모르는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는 다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거의 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한심한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렇게 살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 안 해도 살수 있으니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산 것이 다 산 것이 아니다 사람이 다 사람이 아니듯이 산 게 다 산 게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참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고 그리고 주의 영이 자신에게 임할 때에 자신이 어떻게 그 하나님의 성품을 놀랍게 경험하게 되는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항상 기도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해도 항상 자기가 기도하는 수준이 예전에 경험했던 그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만족을 못하는 것입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도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경험하고 말씀의 영광으로 하나님이 교회당을 에우실 때 그때에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거기서 맛보는 참다운 하나님 경험이 있는 백성들은 찬양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는다고 그리고 공동체가 축제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찾아낸 기쁨과 위로들을 가지고 스스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흥분시키고 기뻐하게 만드시는 것이 무엇인지 감동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기독교 교회라고 하는 이 이 공동체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되는 게 누가 깃발 세워서 개척한다고 해서 교회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교회 속에서 사라지고 나면 그거는 형식만 교회일 뿐이지 거기에 있는 사람도 교인이 아니고 서있는 그것도 교회가 아니라고 형식이 유지될 뿐이지 사고방식이 전혀 교회적이 아니고 기독교 적이 아니라고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교회의 가장 커다란 영광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좋은 교회당에서 예배드리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생각해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더 하나님 앞에 갈망하는 바는 교회의 참다운 영광은 하나님이 거기 계심으로서 영광이고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말은 그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이 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꼭 큰 건물을 지으시면 하나님이 그거 가져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동산 장사하시는 분도 아니고 문제는 사람입니다. 그 속에 있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일까 그것입니다. 90평으로 고급 빌라는 지어놓고 수입제 대리석으로 치장을 하고 첨단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갖춘 평당 2-3천 만원을 넘어가는 그런 훌륭한 주택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 사는 사람들이 식인종이면 우리는 그걸 문화주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자신이 세상으로 나가서 장엄한 영광을 드러내심으로 내가 여기 있다 이렇게 하시지를 않으신다고 그래서 부흥은 언제나 안 믿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납니다. 부흥이라는 말 자체가 revival “다시 살린다” 그러니까 다시 살린다는 얘기가 무슨 뜻입니까? 옛날에 살았다가 죽은 그 사람을 다시 살린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그 전에 가득하게 하시므로 당신의 백성들이 그 영광에 영향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과 마찬가지고 본질적인 변화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향내를 발하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보내시느냐 하면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서 그들이 만났던 당신 자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를 생각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기도하러 올라갔을 때 돌아왔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찬란한 영광의 빛이 얼굴에서 빛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별로 넓지도 않은 모세의 얼굴에다가 당신의 영광을 바르셔서 그 영광을 통해서 당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를 알게 하실까요? 당신 자신이 탁 나타나셔서 ‘봤지’ 왜 이렇게 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신다고 이게 말하자면 묘미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가득하면 찬양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때에 그 찬양의 내용이 뭐냐 그게 뭐냐하면 두 가지가 오늘 나오는데 그는 선하시도다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편에서 이 구절은 너무나 많이 반복됩니다. 주여호와는 선하시며 그는 인자하시도다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시도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선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대표적인 찬송제목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님을 향한 모든 찬송은 사실 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해석에 불과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하나님의 이 선과 인자하심은 아주 놀라운 이스라엘 백성의 찬송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너무나 자주 후렴구처럼 성경에서 반복되기 때문에 이거는 뜻이 별로 없는 거려니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거는 뜻이 별로 없는 걸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그렇게 뜻 없이 반복되는 어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선과 인자하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성품이 많이 있습니다. 의로우시기도 하시고 완전하시기도 하시고 또 공의로우시기도 하시고 많이 있습니다. 성품이 무소부재 하기도 하시고 전능하시기도 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나 많이 있는데도 그 중에서 유독 이 두 가지 선과 인자하심,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절실한 찬송제목이 되고 있는 거기에는 아주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내용을 시간 되는데 까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의 영광으로 가득 찰 때에 그때에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가만히 보면 말이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게 될 때에 솔로몬 성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느꼈던 감정은 어떤 감정이었습니까? 커다란 두려움의 감정이었습니다. 두려움의 감정, 그것을 먼저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하다 라고 하는 것은 두려움은 가까이 다가가는데 있어서 공포를 느끼게 하는 감정이지만은 선하다 라고 이 느낌과 감정은 서슴없이 다가가게 만드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왜 똑같은 하나님의 대한 경험이 바로 앞에서는 그렇게 가까이 제사장조차도 늘 성전을 드나드는 것이 일이었던 제사장조차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던 바로 그 자리가 어떻게 이렇게 선하시다 하나님이 선하시다 라는 사실을 찬송하는 자리가 될 수 있었느냐 이것입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인간이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다가 죄 가운데 들어갈 때하고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거룩의 빛 가운데로 나아올 때 동일한 경험을 하나씩 하게 됩니다. 잘 들으십시오. 무슨 경험을 하게 되느냐 하면 경건하게 살다가 죄 가운데 깊이 확 들어가게 될 때 그때에 순간적으로 강력한 이질감을 죄인들을 느끼게 됩니다. 또 반대로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거룩의 빛 앞으로 나아올 때도 순간적으로 이질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경건한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로 나아갈 때나 또 죄 가운데 살다가 거룩의 빛 앞으로 나아올 때나 동일하게 느끼는 첫 느낌은 뭐냐하면 공포예요 공포,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또 공통점이 하나있는데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아가던지 저쪽에서 이쪽으로 나아가던지 첫 번째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곧 그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고 빛 혹은 어두움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이 얘기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좀더 진전해 보겠습니다.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하는 가운데 제가 아주 중요한 한 토막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에 그때에 죄 가운데 오래 있는 것과 죄 가운데 빠졌다가 얼른 나오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비유를 들었느냐 하면은 초에다가 불을 켜서 촛불이 탑니다. 그러다가 훅 하고 끈단 말입니다. 끈 초가 있고 여기에는 초가 하나 있는데 생락입니다. 생락이라고 하는 거는 한번도 불을 안 붙인 것입니다. 두 개를 이렇게 동시에 놓고 성냥에 불을 붙여서 불을 붙이면 이게 빨리 붙을까요? 이것이 빨리 붙을까요? 이게 빨리 붙습니다. 왜냐하면 여기가 열을 받아 가지고 가스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가까이 갖다 대도 푹하고 붙어서 그런데 이거는 심지에다 대고 성냥에다 대고 문질러야 됩니다. 그래야지 겨우 붙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들이 경건하게 살다가 죄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그때에 즉시 그 죄를 돌이키면은 그 죄가 영향을 안 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 앞에 회복되는데 적게 밖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처음 어떤 죄로 들어갈 때 처음에 느끼는 거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익숙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 옛날 얘기입니다. 옛날 얘기인데 직장에 다닐 때인데 소위 얘기하는 좋은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보고 오라고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도 담이 크지 못해서 취미가 없으니까 나는 안 간다고 그랬습니다. 굉장히 많이 싸웠습니다. 그래서 어느 여직원이 갔습니다. 여직원이 갔는데 막 펑펑 우는 것입니다. 자기 못한다고 가서 하루 일해보니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고민하는 것입니다. 웬 걸 두 달 지나고 나니까 빵긋빵긋 웃으면서 실컷 해 먹는 것입니다. 너무 잘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다가 그런 죄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지막에 남아 있었던 모든 은혜가 서서히 고갈되면서 이제는 그 속에 패역을 형성하면서 죄 가운데 살아가기 적합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어둠의 일을 하고 어둠의 일속에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깨닫고 이제는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탁 나가는데 첫 번째 느끼는 감정은 뭐냐하면 찬란한 진리의 빛 앞에서 한없는 두려움과 비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둠 속에서는 좋다 그러고 살았는데 빛 가운데로 나와보니까 팬티 바람입니다. ‘아 내가 껍데기만 살았구나 내가 인간도 아니었구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405장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그 찬송 지은 사람이 노예상인에다 팔아먹는 악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고 나서 보니까 옛날에는 그렇게 떳떳하게 행하던 그 일이 얼마나 비천하고 더러운 죄인의 일이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처음에 느끼는 감정이 깊은 두려움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못 잡았습니다. 다시 한번 던져봐라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히는 것입니다. 그걸 발견하게 됐을 때 오늘 땡잡았다 오늘 고기 많이 낚았구나 그랬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거기서 잔뼈가 굵을 정도로 어부생활을 했는데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말씀을 의지해서 한번 던져 봤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기가 잡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버러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기를 끌어올리면서 베드로는 입이 이렇게 찢어진 게 아니라 가슴이 막 뛰기 시작했습니다. 저분은 도대체 뉘기에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는가 그러더니 고기를 끌어올린 다음에 털썩 주저앉아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것은 겸손의 고백이 아닙니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제 뭐냐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갔을 때 죄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런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에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밀려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행복과 감사와 찬양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처음에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때에는 찬란한 영광의 빛 앞에서 너무 두려워서 떨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영광의 빛 아래 있는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기를 소망했던 믿음의 사람들의 간구입니다.
나를 멀리하지 마옵시며 주의 성신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것이 바로 그 행복을 안 사람의 기도입니다. 왕국을 가져가시고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져가셔도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시고 구원의 기쁨을 내게서 사라지게 마옵소서 그것이 바로 성도의 그런 기도였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지금 하나님은 선하시도다 이렇게 찬송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그분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리고 그분께 더 가까이 다가가서 안길 수 있는 그러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드는 그 선한 성품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 앞에서 두려워서 성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그것과 따라서 충돌을 일으키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서대로 오는 감정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한번도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시고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존재이며 그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완전하신 분이며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쓸모 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느끼면서 두려움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경박하게 찬송하는 그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정말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그 선하심에 대한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함으로서 이루어지고 그 영광을 경험할 때에 첫 번째 느끼게 되는 감정은 하나님께 매우 가까이 와 있다는 감정이전에 두려움을 먼저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가 가득하고 부흥이 그 위에 부어질 때에 그곳에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울부짖는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을 인해서 너무나 행복을 느끼면서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고 또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한없는 두려움 때문에 울부짖는 사람이 동시에 같이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은 어느 때에 주어졌어도 그 영광과 대면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그 영광을 경험하고 들어간 사람들은 이제 두려움의 때를 지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가슴 벅차는 감격을 누리고 그 빛 앞에서 행복을 느끼는가 하면 이제 첫 대면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두려움과 말하자면 찔림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뒤에 일어난 기사가 전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국 찬송제목이 선하시도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선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선은 뭐냐하면 내게 좋은 것은 선입니다. 그러니까 뭐냐하면 우리의 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다 다르고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마는 다 다릅니다. 입맛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는 선하시도다 이렇게 찬송할 때 이 선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두 가지와 관련이 되어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선하다는 느낌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선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궁극적으로 깊이 캐 들어가면 우리를 향한 호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관련되어 있는 선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증거가 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받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 그 하나를 딱 띠어놓고 보면은 이게 선 일수 없는데 그런데 그것이 서로 놀랍게 연결이 되어서 지금은 고통스럽게 보이는 그 아픔이 결국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호의 우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한 수단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이루면서 결국은 한 토막 한 토막은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거나 납득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많이 있지만은 그러나 결국은 전부다 경험하고 나면 결국은 그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선이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끔 그렇게 만들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선하시도다 라고 찬송할 수 있었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런 선하심을 아주 높이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미 드러난 뜻이 있고 그리고 또 하나는 감추어진 뜻이 있었습니다. 감추어진 뜻은 인생을 살아보아야지 그 뜻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섭리라고 부른다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심히 험악한 세월들을 많이 보냈습니다. 고난의 때를 많이 지냈습니다. 그랬는데도 그런 고난의 때를 많이 지냈는데도 결국은 세월을 다 지내고 보면은 고통스럽고 아픈 수많은 세월들이 이스라엘을 궁극적으로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런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은 더 영원하신 목적을 만들어 가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 보기에 선이었다 이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의 깊이는 결국은 이러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인내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하나님은 당신을 진실하게 바라는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그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깊이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많이 하고 열심이 있으면서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열정은 있을지 모르지만 깊이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일 하면서 혈기부리는 사람들은 다 때려 엎을 것처럼 하는 사람들, 짐승입니다. 짐승, 회의하고 이럴 때 소리지르는 사람, 인간도 아닙니다. 여기가 어딘데 그런 행동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할 때 백성들에게 그런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불만족스러운 현실은 사실 둘 중의 하나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는 여러분들이 잘못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물론 기계적으로 이렇게 나누는 것이 무리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굳이 나누어 보자면 여러분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에 잘못의 결과로 뿌린 씨로 여러분들에게 고통스러운 상황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은 어떻게 생겨났던지 간에 그 고통스러운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뭔가 일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선하시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진정한 경배자로서 인생을 살아가야지 그 고통스러운 상황이 어떻게 결국은 선이 될 수밖에 없는 가 하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럽니다. 그 합력한다는 말이 희랍어로 쉬 엘가조마 입니다. 쉬는 함께이고 엘가조 마에서 에네르기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함께 엘가조 마이 작동한다는 말입니다.
시계 같은 것을 뜯어보면은 수많은 부속 있는데 시계는 일로 돌아가는데 이쪽에 있는 톱니바퀴는 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톱니바퀴가 두 개 세 개가 맞물려서 결국은 하나는 이렇게 돌아가고 하나는 이렇게 돌아가는 데 결국은 이렇게 돌아가고 이렇게 돌아가서 결국은 이렇게 돌아가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게끔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다 해명할 수 없지만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품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래서 함께 작동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자동차를 뜯어 가지고 수리를 하는 공장에 가서 자꾸 들여다보라고 그랬습니다. 요즘은 들여다보지도 않지만 그래야지 배운다고 그래서 자꾸 들여다보았습니다. 하나 이상한 것이 뭐냐하면 조그만 나사하나를 푸는데 손을 못 집어 넣어 가지고 말입니다. 씩씩거리면서 비지땀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여보시오. 기술자 양반 왜 그러네 아 나는 잘 모르지만 자동차를 왜 이따위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이것을 좀 널찍하게 뭐 그렇게 다 몰려 있을 필요가 뭐 있습니까. 뒤에도 좀 놓고 가운데도 놓고 이렇게 부속을 좀 흩어 놨으면 이게 쉬울 것이 아니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 대답이 아주 간단합니다. 뭐냐하면은 아저씨 이게 다 동력을 필요로 하는 건데 바퀴 앞으로 모여야지만 좀 얻어 쓸것이 아닙니다. 엔진이 이 앞에 있으니까 일로 다 모여야지 조금이라도 얻어 쓰지 저 뒤에 가 있으면 어떤 것이 얻어서 쓰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고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열심히 합니다.
그것이 바로 쉬 엘가조 마이의 뜻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하나님의 교회에 진리의 영광이 가득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의 진리의 영광이 가득하고 그 거룩한 감화가 충만할 때 불평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다 그리고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조차도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결국은 “이것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이 고통스러운 과정도 정말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 그때에 나의 것이 이런 과정을 주신 것 이 나라에 이런 아픔을 주셨던 것 우리교회에 이런 통증을 주셨던 것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그럴 때가 반드시 오리라고 하는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어떤 것이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앞날을 내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다본다고 해도 그렇지 어떤 것이 그걸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이라고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모든 이 견고함이 없는 신앙생활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각양 좋은 것들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그 문제라고 견고해야지 하나님 축복해 주시옵소서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한참 하나님이 그래 너 좀더 기도해라 너는 기도하면서 너도 좀 깨어져야지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됐다, 그래 그럼 내가 줘야지, 그리고 가서 보면 없어 어디 갔는지 주여 주시옵소서. 그래 그리고 천사 시켜서 가보니까 갔다와서 하나님 없습니다. 어디 갔데 다른 곳에 꿰매지도 않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수술했는데 꿰매지도 않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완전하신 분이 우리를 내려다 볼 때 참 철딱서니 없어 보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도 이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은 철이 든 사람입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 요동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너무 요동합니다. 은혜 받고 목사님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은혜, 나는 속으로 감사합니다. 겉으로 감사하면서도 그것도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감사하면서도 몇 달이나 한번 가나 보자 아니나 달러 몇 달 지나면은 축 늘어져 가지고 오뉴월의 처마 끝에 졸고있는 병아리 모양으로 그런 것이 견고함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뭔가 고통스러운 상황 뭔가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상황이 다가오면 뿌리 채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누구를 의지한다고 그랬죠 자기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의지합니까? 그것은 가장 손쉬운 것은 재물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있는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다시 하나님께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석과 같은 믿음, 그것은 하나님은 어떠하든지 선하신 분이시다 내가 그를 진심으로 사모하고 바라면 그분은 나를 배반하지 않으신다 라고 하는 적극적인 신뢰, 그것 없이는 반석과 같은 믿음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아무리 불때봐야 불땐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그런 믿음이 거의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은지가 상당히 오래된 것 같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걱정하시고 나는 내 일을 염려하고 그리고 각자 살아갑니다. 견우직녀 만나듯이 일주일에 한번씩 칠일 째 되는 날 와서 한번 얼굴 내보이고 견우직녀는 그래도 만나서 흐느껴 울기라도 했지 만나서 병든 병아리 모양 이런 것이 졸다가 일찍 끝나면은 할렐루야, 교회에 온 보람을 느끼는 날입니다. 그런 것이 해서 무슨 선한 결과가 주어지겠습니까.
인간이 그런 것이 요동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너무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요동하는 것을 보면서 요동하기만 하면은 그가 뭘 깨닫든지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요동하는 데 뭘 깨닫든지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아니 나무를 심어 가지고 뿌리를 못 내리고 돌아다니는데 비가 오면 뭐하고 햇빛을 쬐면 뭐하고 비료가 쏟아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뿌리를 못 내리는 데 뭐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뭐가 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나의 것이 그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는가 정말 나는 내 영혼이 진심으로 내 안에서 주 하나님은 선하시도다 이렇게 외칠 수 있는가 살아온 지난날들 뼈아픈 실패와 고통,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죽음의 공포, 가난의 고통, 이런 모든 풀무불과 같이 치열한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살아왔지만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나를 이런 것이 정말 진실한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갈망하는 사람으로 나를 세워 주셨구나 혼자 내버려 두셨더라면 정말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을 텐데 주님이 그렇게 붙들어 주셔서 나를 이렇게 세워주셨구나 하나님은 참 선하시구나 그런 고백이 우리의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정말 하나님의 교회에 주님의 진리의 영광이 가득 찬 가운데 그것에 의해서 깊은 감화를 받고 주님을 뵈올 때에 이러한 믿음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 여호와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 하나님은 선하시도다 라고 할 때에 이 선은 하나님의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선하시도다 할 때에 이거는 뽐내는 그 심정이 많이 들어있는데 누구한테 뽐내느냐 하면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뽐내는 것입니다. 왜 뽐내느냐 하면은 뽐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의 신에 대해서 도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터줏대감 자비롭습니까? 대답을 안합니다. 터줏대감이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분이라 그러니까 이상하네 터줏대감이 신실합니까? 신실하긴 뭐가 신실합니까. 잊어먹고 제사한번 안 지내고 고사한번 안 지내면은 기둥뿌리를 뽑고 난리를 친다고 그럽니다. 진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 당시의 모든 신들에 대한 생각은 잡다하고 껄렁껄렁하고 꼭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뜯어먹는 그런 신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늘 배고파서 걸근걸근 거리고 어디 가서 사건 한번 칠까 하는 작당하는 그런 아주 수준 이하의 비행청소년 같은 그러한 신들입니다. 진짜이고 사실입니다.
신실하도다 선하도다 그런 개념이 없어요 그러니까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 자체도 하나의 뇌물입니다. 달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돈을 느꼈던 것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을 이방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섬기려고 할 때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 다른 신들은 이렇게 요구 안합니다. 그냥 갖다 바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뇌물을 먹을 때 뇌물 주는 사람한테 이 뇌물 속에 너의 마음과 뜻과 성품이 들어 있느냐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준 다음에 돌아가면서 욕을 하든지 말든지 일단 많이만 주면은 입 마이 포켓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뽐내는 것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선하시도다 그럴 때에 수많은 이방민족을 향해 뽐내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 자랑하는 것입니다. “야 너네 아버지 어느 교회에서 골목에서 부목사, 목사, 강도사, 전도사 교역자들이 같이 살았데” 매일 나와서 “야 자식아 너네 아버지 뭐야 우리아버지 목사다 그 까짓 거 가지고 뭘 그래 우리 아버지는 강도인데...” 이렇게 이제 자기 아버지 자랑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런데 그러한 선한 결국은 자기의 백성들에게 변함없이 선을 베푸시는 일관된 신실하신 태도를 가지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이런 특성을 이방신들에게 있어서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뽐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프라이드를 가진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런 프라이드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내가 왜 감격이 없냐 그렇지만 사실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보다도 더 신나는 것은 시험에 합격해서 좋은 학교 들어간 것이 더 감격이거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의 신분의 변화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생각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정말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본 것이 되고 그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깊이 승복하면 그런 역사가 일어날 때 그때에 그 하나님이 내가 섬기는 그 하나님이 이렇게 신실하시고 도덕적이고 선하신 분이시다 라고 하는 사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사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대해서 프라이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말씀의 영광이 가득할 때 성도들은 따라서 그들이 실제로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뛰어 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사업 좀 하다가 조금 안됐다고 그래가지고 다 죽어 버릴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거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조금 돈 벌었다고 해서 목에 기부스하고 가우 잡는 거 그거 세상사람들도 하는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껄렁껄렁 거리면서 아랫사람들 무시하는 거 그거는 세상사람들도 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뭔가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부하고 아첨해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 세상사람들이 다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로서 무엇인가 자존심이 있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거룩한 자존심으로 뭉쳐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존심이 없고 세상에서는 자존심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너도 인간이냐 이렇게 말씀하시면 아닙니다. 저는 벌레이옵나이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스로보니게의 여인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 그러니까 맞습니다. 주님 저는 갭니다. 개면 어떻습니까. 그것 좀 주십시오. 부스러기 먹지 않습니까. 그것이 자존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하여튼 자존심 세우는 것을 보면 대단합니다. 하나님이 “너 죄인이다”, “으씨 내가 왜 죄인이야 너 왜 이렇게 사느냐 으씨 나만 갖고 자꾸 그래 나만 미워해” 세상에 가서는 이것이 뭐야 그러면 아 예예예 배엘도 없습니다. 절대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그렇게 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진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합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러거나 말거나 전에 하는 대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 앞에 정치적인 생명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갈 때에만 정치적인 생명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신앙의 생명이 끊어졌는데 정치적인 생명은 정치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뭐가 본질적인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아무 신경 쓰지 않고 그러거나 말거나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건히 믿는 신앙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굳센 믿음이 교회의 부흥이 일어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망해야될 그런 상황인데도 굳건히 확신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이 고통스러운 상황이 반드시 후일에는 말할 수 없이 내 인생에 하나님이 선을 베푸시는 한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굳건히 믿는 것입니다. 진짜 우리의 것이 그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일날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필요하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교회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한 주일동안 살았던 잘못된 삶들과 실패들을 뼈아픈 것이 깊이 뉘우치고 그리고 들려오는 하나님의 진리의 충만한 영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아 그래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일 수밖에 없고 내 인생에서 내가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거나 나의 죄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나의 것이 선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나의 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결국은 나를 축복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그런 믿음을 굳건히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당 문을 열고 이제껏 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고 살았던 그 자신의 불신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는 그 슬픔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으면서 이 어두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은혜 받고 하나님의 진리의 깊은 은혜와 영광을 누렸으면서도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 환경 속으로 돌아가면서도 이제는 우리가 지난주의 우리가 아닙니다.
아! 그렇구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정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면 주님께서는 정말 나의 인생을 바꿔놓으실 것이다 이전에 지루할 정도로 긴 세월을 실패를 숙명처럼 여기면서 살아왔지만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누구이신 지를 몰랐을 옛날의 일이고 이제는 주님께서 나의 것이 당신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시고 그리고 당신의 자비한 마음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의 그 거룩한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충만히 알게 하셨은즉 이제는 내가 정말 주님의 그 선하심을 굳건히 믿고 그리고 그 약속을 굳건히 붙들고 이전처럼 요동치는 삶이 아니라 정말 변함없이 주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야겠다. 그런 소원을 갖고 돌아가는 것이 이 교회가 성도들에게 베풀 수 있는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영광이 이 교회당에 가득한 것이 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많은 성품 중에서 특별히 그 선하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면서 살아왔던 정처 없이 요동치면서 살아왔던 방황의 날들에 대해서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진실로 그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삶을 살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9.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 하니라(대하7:3下)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할 때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중의 한 변화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말씀의 영광이 가득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들이 자신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거기에 엎드러지는 일이 일어날 때 그때에 결국은 그 교회당 안에 하나님의 인자하심, 즉 여호와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찬송이 울려 퍼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이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한 인식이 말씀의 영광과 함께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을 통해서 이러한 진리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하고도 연관이 됩니다만,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뜨겁게 마음에 와 닿고 인쳐지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밖에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이 그를 그렇게 시킵니다.
사랑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하는 대상에 매이게 만들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 대상이 우리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가 세상을 사랑하면 똑같은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과 세상이 하는 요구가 다른데, 기꺼이 하나님이 하시는 요구를 버리고 세상의 요구를 따라갑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솔로몬의 제사와 기도가 끝난 다음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었을 그때에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잠시 있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찬양이 울려 퍼지는데 그 울려 퍼지는 찬양의 제목이 선하심에 대한 찬송과 인자하심에 대한 찬송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 “헷세드”라고 되어있는 인자하심은 가치 없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하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헷세드”는 모든 피조 세계에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이지만 특별히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베푸시는 아주 특별한 은혜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특별한 애정이 이곳에서 오늘 인자하심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사랑에 대해서 조금도 감동이 없는 냉랭하기 이를 데 없는 신자가 어떻게 변화되어서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고 또 주님이 자기를 향해 베푸신 그 뜨거운 사랑에 대해서 사랑으로 화답하게되는지 한번 그 과정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냉랭하고 돌멩이와 같았던 사람이 정말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자신이 체험하고 자신도 또한 주님이 자기를 향해 베푸신 뜨거운 사랑에 부합하는 뜨거운 사랑을 하나님께 베푸는, 하나님을 향해서 쏟아 붓는 그러한 놀라운 일들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사랑을 되찾고자하는 그 노력하나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교회에 말씀의 영광이 충만해져서 그 앞에서 마치 야곱이 디나의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는 존재인가를 뼈저리게 깊이 깨닫게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가하는 것을 깨닫는 말씀에 의한 영혼의 각성이 없이는 그러한 사랑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그 택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찬송하고 있는 이 백성들이 불과 잠깐 전에는 박석 깐 땅에 엎드러져서 혹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는데 지금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자신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그 크고 놀라운 사랑, 그것에 온전히 감동 받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래 인간이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던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감정을 회복하고 창조 시에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시려고 했던 그 관계로 돌아가는 때에는 반드시 과정이 있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솟아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한발 더 나아가 살아 계신 분이시지만 자신이 그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살았던 날들에 대한 깊은 회개 그리고 영혼의 각성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자신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이런 것들을 먼저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게 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을 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깨닫게 하시는 충만한 진리의 영광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나아가서 그 하나님의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깨달아질 때에 단순히 사람의 입에서 귀에 들리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 말씀에 증거 되는 현장에 충만하게 임하시므로 모든 사람이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권세 속에서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복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때, 그 예배의 현장은 뒤덮는 어떤 권세 아래로 들어가는 예배가 될 것이고, 그러한 속에서 사람들은 가장 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말씀의 빚을 받아서 알게 됩니다. 그것을 깊이 깨닫고 알게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잘못된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굽어진 것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고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예전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졌을 때의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처럼 또한 자신도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게 됩니다.
엄밀한 의미로 말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 앞에서 자신이 완전히 벗겨지고 자신의 티끌과 같은 죄악이라도 주님의 그 말씀의 빛 앞에서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거룩의 체험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혼 깊은 곳까지 스며든 그러한 사랑의 확신이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사랑의 감정이 있지만 그 사랑의 감정은 하나일지 모르지만 사랑의 감정의 정도는 모두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느끼기는 느끼지만 사랑의 정도는 모두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감성적인 마음에서 출발하는 사랑의 감정도 있을 수 있고, 잠깐 있다가는 곧 사라지는 잠정적인 사랑의 감정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생애가 다하여도 잊혀지고 않고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감정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품어야할 사랑의 감정은 연애 감정적인 그러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단지 자신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동안에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서 깊은 사랑을 느꼈다는 사실을 고백하긴 하지만 그러나 지나간 것은 늘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사랑이 그렇게 대수로운 사랑의 감정이 아니었는데도 후일 너무나 척박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이전에 느꼈던 그러한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 향수를 갖게되는 면도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랑의 감정은 어떤 감정입니까? 잠시 있다가 스쳐 가는 그러한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을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배웠습니다. 원래 이 사랑의 감정은 하나님에게 고유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그 사랑의 성품을 우리에게 심어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우리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가능성이 인간 속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배우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특별한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야말로 어떤 시인의 고백처럼 그 사랑은 뼛속까지 파고 들어가는 그러한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불길과 같아서 많은 물과 홍수로도 그 불을 끌 수 없고 많은 보물과 재산을 주고 그 사랑을 사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오히려 멸시를 당한다고 아가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한 사랑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나 예레미야나, 이사야, 에스겔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직접적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그러나 주님의 사랑이 그러한 선지자의 인격 속에 담겨질 때에 그들이 얼마나 놀랍도록 다른 삶을 사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그들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질 때에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갖기를 원하는 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랑은 이런 사랑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 것을 배우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배우는 그러한 관계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주님을 향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모든 뜻을 다 드리면서 살아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사랑의 고백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의 삶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 가장 귀한 분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분, 혹은 첫 번째로 가장 높으신 분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모든 것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러한 사랑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 그리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그 거역할 수 없는 불길 같은 사랑이 시키지 아니하였더라면 여기 서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삶. 주님의 그 뜨거운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면 도무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갔을 이유가 없는 그러한 사랑의 삶,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심지어는 그러한 뜨거운 사랑을 부어주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한 남편의 아내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 혹은 한 아이의 어머니, 아버지로서 살아갈 아무 이유가 없을 정도의 절대적인 사랑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당신의 생애를 통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이미 웅변적으로 증거해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무엇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도 사실은 주님 자신의 선택이었다기보다는 주님 내면에 있는 그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시도록 몰아간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 안에 담겨있는 어떠한 강력한 힘이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속에도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주님 당신 안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참사람이셨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잡히시던 날 밤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예수님 안에조차도 이 십자가를 지게 하는 요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조차도 마지막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드리는데 있어 정말로 자신을 짜서 드리는 그러한 헌신적인 투쟁이 있어야 했습니다. 기도의 씨름을 싸우셨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많은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부수신 것은 무엇인가 주님의 내면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주님을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오 날 사랑하나
죄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실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거짓된 신자로 살아가는데는 비용이 들지 않지만 진실한 신자로 살아가는데는 많은 비용이 듭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속에 있는 순종하게 하는 사랑의 힘, 정결하게 살아가는 사랑의 힘,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세상을 버릴 수 있는 힘,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용기,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소유하고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랑을 우리가 소유하고 그러한 사랑을 원동력으로 삼아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깊은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님을 쉽게 사랑한다 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데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면 손해가 많습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면 어떤 일이 있습니까? 진리대로 살지 않을 때 돌아올 수 있는 수많은 이익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고난을 받을 때 자신도 그 진리와 더불어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손해볼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교회의 어려움이 올 때 모든 사람들은 도망가더라도 사랑하는 그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교회를 위해서 육체의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면 그들에게는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 복음을 듣지 못한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데, 아직까지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받을 수록 그러한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나는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감격하면 감격할 수록 아직까지도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내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복음에 빚진 자로다”. 그 사람이 누구한테 빌렸습니까? 누구한테 차용증서를 써준 적이 있습니까? 헬라인을 만나서 주님의 사랑을 배웠습니까, 유대인을 만나서 주의 사랑을 배웠습니까? 그 돌같이 강퍅한 젊은이의 가슴속에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해주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알려주셨습니다. 빚을 졌으면 그분에게 빚졌지 왜 헬라인과 유대인에게 빚을 졌다고 말합니까?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알고 이 복음이 무엇인지 알면 알수록 그의 눈에는 이 복음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이 바울 처럼 사랑하신다는 생각을 듭니다. 영혼들을 사랑하니까 계속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부채의식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의식 때문에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도 바울을 불러주실 때 무엇으로 불러주셨습니까? 분명히 사도행전에서는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에 사환과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일꾼이요, 그리고 주님의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가 나타난 것은 내가 네가 나타난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들에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그는 편지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적합한 번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여러분들은 노예라고 하면 가슴에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노예라고 하면 이가 갈리는 끔찍한 신분이었습니다. 생명도 자기 것이 아니고, 자식을 낳아도 자기 자식이 아니며, 돈을 벌어도 자신의 돈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부인을 얻어도 자신의 부인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자신의 소유라고는 없고 생명과 모든 권한이 단지 주인 한사람에게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예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는 것이 노예가 되는 것보다도 낫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노예를 자처한 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그를 노예 삼으셨습니까? 주님이 그를 종으로 삼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당신의 일꾼으로, 당당한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를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도록 만들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이, 그 놀라운 사랑이 그들 주님 앞에 종이요, 그리스도 앞에 노예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수많은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빚진 자로서 부채의식을 안고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말로 우리들이 부어지는 사랑 없이는 올려보내는 사랑이 있을 수 없고 또한 주님을 향한 사랑 없이는 부어지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이 있는 곳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진실한 고백이 있고,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삶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그 현장에 주님의 사랑이 다시 부은바 됩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라고 삶으로서 찬양하며 살아가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가 그러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것 중에서도 싫어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싫어하는 것이 사명 아닙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이 어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왜 나에게만 사명을 주는가에 대해 불평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직분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하나 주려면 씨름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을 집사도 시키지 않고 권찰도 시키지 않으며, 교사도 시키지 않고 아무 것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 성경적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개 줄로 목매어서 끌어오시지는 않았습니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면 따라왔습니다. 싫어하는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예화) 지금은 보이지 않는 지체인데 기도의 은혜도 싫어합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누구도 위해 기도하고, 누구도 위해 기도하라고 하더랍 니다. 그래서 그가 말했답니다. 총 맞았냐고. 자신의 기도도 얼마나 많은데 그런 기도를 하겠냐고 했답니다.
그런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때로는 연단으로 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남이 연단을 받는 현장에서는 말도 잘합니다. 남에게 가서는 얘기도 잘하지만 자신은 그 연단을 못 견딥니다. 그것도 진정한 연단이라면 보아줄 수 있는데 자신이 잘못해서 뒷감당하는데도 그것을 연단이라고 말합니다. 대가를 치르는데도 싫어합니다. 말씀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입에 단 말씀만 사랑하지 진정으로 찌르는 말씀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너무 소심하고 담대하지 못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담대함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이상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도 되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말도 되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 제압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뻐기고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논쟁이나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정말로 그리워집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말씀을 받는다, 말씀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입맛에 맞을 때만 할렐루야, 아멘이지 무엇인가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고개를 푹 숙이고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인이든 의인이든 잘사는 사람이든, 못사는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다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싫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좋다는 것을 누구든지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의 돌아보면 오늘 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그분의 사랑 그분의 인자하심에 감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너무나 소수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격, 그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뜨거운 감동과 같은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우리가 그 안에서 알게 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이 성전을 지어놓고 하나님 앞에 봉헌하며 주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그 뜨거운 감격을 누리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더욱이 그들이 고백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찬송하며 그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 인자하심을 지금 하나님 앞에 성전을 봉헌하는 이때에만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할 것이라는 그러한 기대를 하지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그 시점에서 감동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 넓이와 깊이와 위대한 크기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우리들이 확신을 갖게 됩니다. 미래의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 이것은 미래에 딸린 문제가 아니라 오늘 현재적인 문제입니다. 오늘 내가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주님의 그 깊고 놀라운 사랑을 내가 체험하면서 살아가면 미래의 불안은 사라집니다. 미래의 불안이 계속 남아있는 것은 오늘 내가 맛보고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로 온전하고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아보지 않은 미래를 향해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그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라고 하는 그 찬송은 지금 이 솔로몬의 성전에서 맛본 그 하나님의 사랑의 체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놀라운 사랑의 체험을 하고 주님의 그 자비하심에 대해서 한없는 경배와 찬송을 올리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그 위대한 성품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앞에서 엎드려지는 부복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결례를 받으러 성전에 올라갔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주어졌던 한 예언을 생각나도록 만듭니다. 그 예언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아이는 장차 많은 사람들의 패함과 흥함을 위한 표적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자라서 이 세상의 구세주로 등장하게되실 때 제일 먼저 사람들을 패하게 하는 표적이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이 먼저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패배하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흥황케 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부서지는 깊은 자기 부서짐이 있는 그 곳에 하나님이 그를 세우시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주님의 위엄을 깨닫고 주님의 그 위엄 앞에서 자기가 이제껏 까지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제멋대로 살아왔는지를 깊이 깨닫고 자기를 허물어뜨리는 자기 무너짐이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솟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강력한 자기 무너짐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자신이 말씀으로 교회당에 충만하게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인할 수 없도록 자기 자신이 철저히 깨뜨려지고 자기가 이제껏 까지 붙들고 살아왔던 인생관, 그리고 자기가 지금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놓지 못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집착과, 쓸데없는 것들에 대한 애착,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그 곳에 주님이 참다운 사랑을 아는 감격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 자체가 그러한 우리의 개인적인 영적인 삶의 원리를 그래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싶어하는 간절한 갈망을 가진 주체도 우리 자신의 내면 속에 있고, 또 한편으로 그러한 사랑을 느낄 수 없도록 아주 완고하고 강퍅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그 대적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원수와 우군이 우리 안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교회는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쉬운 방법으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반드시 천박한 감정놀음이 되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정상적이고 성경적인 방법은 모여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서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을 만들어야겠다는 시도보다는 먼저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정확하게 깨닫게 해야 합니다. 인생의 모든 곤궁함과 비참함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는데서 기인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여러 성품중의 한가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위대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죤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 뛰어난 설교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고 그분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희미하게 나마 가르쳐주어서 나를 감동시킬 수 있다면 나는 그 설교자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말로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싶은 성도의 정상적인 고백입니다. “주님 나로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텅 빈 머리에서 무슨 사랑이 나오겠습니까?
(예화) 2년 전의 일입니다. 충무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내려가는데 유람선이었습니다. 그런데 배 안에서는 니나노밖에 모릅니다. 그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어디에선가 심오한 유행가가 들려왔습니다. 어떤 자매가 나와 노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머리에 든 것이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 사랑이 밀려오는 통로가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의 가슴속에 주님의 사랑의 감동을 받게 만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홀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통로를 따라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그 통로는 먼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철저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기를 다 드리는 번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솔로몬의 자신을 짜서 바치는 간절한 기도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위엄이 홀연히 주님의 성령이 오순절에 오신 것처럼 졸지에 주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라에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이 지금의 장소가 조금 전의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영적인 강력한 힘이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누군가가 계시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느껴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예배를 사모합니다만, 토나 사전트라는 사람이 로이드 죤스 목사님에 대한 전기를 썼습니다. 그 책이 결정판일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불신자들이 많이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회개한 사람들 가운데는 무당도 있고 광포하기 짝이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빵을 발라먹으려는 토스트를 개가 먹었다고 빵 자르는 칼로 그 자리에서 개의 목을 찔러 죽여버린 사람과 같은 사람들이 와서 회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이 무엇인가 하면 예배당에 들어서는 그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 거역할 수 없는 어떠한 권세가 자신들을 뒤덮고 있는 것이 자신들에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화려한 악기나 아름다운 샹제리아나 거창하게 설교자를 파묻어 버리는 수입제 강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말씀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이 좌정하시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 사람들이 그 권세 앞에 깊이 엎드려지지 않았습니까? 늘 드나들어야 하던 제사장조차도 두려워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박석 깐 땅에 모두 엎드러졌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그들 자신도 맞이하기 싫은 순간이었을지 모릅니다. 아무도 말하는 설교자는 없었지만 성전에 가득 찬 여호와의 영광이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거룩한 여호와로라. 너희는 거룩하냐?” 그 음성 앞에서 이스라엘 가운데 누가 자유로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모두 주 여호와 두려우신 하나님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하나님 앞에서 그 충만한 영광의 힘으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정결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이후에 밀려오게 된 현상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무리 은혜를 받고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서 나가서 걸어가는 길이 불순종의 길이라면 항상 뒤통수가 당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순간적인 주님의 엄위로우심 앞에 대면할 때 자신들에게는 그것을 감당할 힘이 없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냥 엎드러진 것입니다. 엎드린 것은 겸비의 상징인 동시에 긍휼을 구하고 혹시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로부터 올지도 모르는 재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감정을 가지고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분 앞에서 철저히 자신이 부서질 때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들의 엎드린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일어날 때에 그들에게 확실하게 인식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나니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말로 주님을 소망으로 삶고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로 주님의 이름이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졸도할 것처럼 엎드러지더니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감당할 수 없겠는데 빨리 사라졌으면 하고 생각했겠습니까? 그 영광 앞에서 한편으로는 두려워 떨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순간을 외면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그릇된 관계를 고칠 때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 것이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행복이며 주님이 거기에 계시지 아니하시면 이 성전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까지 발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커다란 죄는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없이 감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인식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당신의 전에 가득 채울 때에 자신들 모두가 죽은 자처럼 엎드러졌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진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그릇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거룩의 빛 앞에서 자신을 모두 비운 사람, 하나님처럼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그러나 늘 거룩의 빛 앞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속히 오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요한이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은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에 대해서 견딜 수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감격한 때에는 항상 어떤 후였었는가 하면 공동체가 자기의 죄를 끔찍하게 회개하고 난 다음에 사랑의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회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을 맛볼 수 없습니다. 진실한 회개 없이 뜨거운 사랑을 맛본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주님의 엄위하심과 그 말씀의 영광 앞에서 자기를 부복하는 깊은 참회가 있고 그 참회를 통해서 자신을 되돌아 본 후에 하나님이 그의 대한 보상으로서 뜨거운 사랑의 감격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 주에 걸쳐서, 아마도 두 달이 넘게 1절로부터 삼절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증거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이 말씀을 마무리지으면서 이 마지막 시간에 어떤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남이 모르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복된 성도라 일컬음을 받고 이 교회에 여러분들을 남겨두신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무엇하게 하려고 남겨두셨습니까?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많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많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이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발길을 들여놓는 사람들마다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고 그래서 그 권세 아래서 충만한 영광의 임재하심 속에서 이전의 사악한 삶을 참회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력한 성령의 깨뜨리심이 있는 교회, 바로 그 교회가 되게 하려고 우리를 도구로 쓰시려고 먼저 은혜 받게 하셔서 우리를 여기에 세워두신 것이 아닙니까? 교회는 고작해야 성도들에게 헌금을 거두어서 교회나 유지하려고 하는 사고 방식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모인 교인을 어떻게 하면 떨어뜨리지 않고 보험회사, 판매회사원 관리하듯이 잘 관리해서 묶어놓는 식의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이 이 교회당에서 주님의 은혜아래 살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보다 원대하신 뜻을 깨닫게 말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이 교회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소원을 그들도 갖게 하셔서 당신이 하고 싶으신 그 일을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교회의 참된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최고의 섬김입니다.
그래서 꿈을 꿉니다. 꿈을 한 번 꾸어 보십시오. 정말로 수십 년 동안을 망가진 채로 신앙 생활을 해오던, 사실상의 불신자와 다름없는 너무나 긴 세월을 죄악된 세상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해보려고 몸부림 쳤지만 결국은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인간들 그리고 자기만 피투성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움과 원수 맺은 감정으로 피묻은 칼을 양손에 붙들고 헤매는 소망 없는 인생들이 이 교회당으로 몰려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런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당에 가득하지 않다면 그들은 왔다가 도로 가버리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며, 온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피투성이가 된 채 그렇게 망가진 채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에 슬픔과 고통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든지 그러한 인생들이 이 교회당에 생애의 벼랑 끝까지 내몰린 인생들이 구름과 이곳에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긴 날도 아니고,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 무엇인가 자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그러한 어머 어마한 권세의 지배 아래로 자신이 들어간다고 하는 느낌을 받는 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이 자리에 앉아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셔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실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정직하게 선포되는 진리에 대한 교훈과 인생에 대한 올바른 견해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진실된 증언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수 십 년 동안 혈우병 자와 같이 소망이 없던 인생들이 혈우병의 근원이 마르고 피묻은 칼을 이 교회당 아래 내려놓고 사람과 원수 맺고 미워했던 죄를 참회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치유 받은 사람들이 망가진 수많은 삶들에게 나아가서 평화의 사자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망가진 수많은 사람을 다시 치료하는 이 사회의 의사가 된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감격 속에서 자신들에게 승리를 쥐게 하신 위대한 성도들이 이곳에 구름과 같이 가득하게 모여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을 고쳐달라는 피 어린 탄원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고통하는 역사가 뒤집히고 병든 교회들이 새롭게 일어나는 그래서 척박하기 그지없는 이 메마른 이 시대의 땅위에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하게 되는 복된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죽음보다는 삶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찰 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