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무엇으로 지어지는가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출24:11-12) 2001.7.29 주일오후 1
2. 자원하는 성도의 헌신(출35:21) 2001.8.5 주일오후 11
3. 주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출36:1) 2001.8.19 주일오후 25
4. 하나님의 축복(출39:43-40:1) 2001.8.26 주일오후 37
5. 화평과 쉼으로 지어지는 성전①(대상22:8) 2001.9.9 주일오후 54
6. 화평과 쉼으로 지어지는 성전②(대상22:9) 2001.9.23 주일오후 69
7. 지어진 성전의 준공검사: 영광의 나타남(출40:34) 2001.9.2 주일오후 84
1.하나님의 영광과 말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 판을 네게 주리라”(출24:11-12)
상황이 상황인지라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은 무엇으로 지어지는가’ 그것을 테마로 잡아서 이제 우리가 오늘 읽은 구절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해서 한 대여섯 시간정도 가지 않겠나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교회당이 지어 가는 그 과정에서 우리들이 영적으로 보다 더 잘 준비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예배당을 짓는 이 일은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에 그까짓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게 말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우리가 입고 다니는 옷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거하는 집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인데 그러나 사실 신경이 써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무슨 말이 있는가 하면 ‘집 지어놓으면 죽는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한 분은 돈이 없이 집을 지은 사람이 아니고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노년에 그래도 좋은 집에서 한번 편안하게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자기 살던 삼 백 평의 집을 다 헐고 정원을 하는 데만 한 이 억이 들어갔다고 하니까 뭐 그저 집을 소박하게 지은 집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한 15년 전에 이 억 이었으니까 굉장한 거액을 들여서 지었고 결론은 죽었습니다. 딱 지어놓고 새집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를 짓다가 죽으면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돈이 없이 시작을 하니까 빚을 얻으랴, 오죽했으면 제가 9월 달에 일주일동안 속청 한 박스를 먹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돈도 다 있는데 왜 그런가 하면 돈이 있다고 신경을 안 써지겠습니까? 기술자들이 지으면 아 그렇게 말고 저 유리는 외제 유리를 끼고 기둥은, 기둥은 빨간색으로 하지 말고 초록색으로 하고 나무는, 그 나무로 하지 말고 더 좋은 나무를 심어. 이렇게 하다가 기운을 다 빼고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집을 지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일군은 절대로 안 죽습니다. 피곤하면 가서 쉬면 되니까. 그런데 그 집을 짓는 주인이 신경을 쓰다가, 쓰다가 다 지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 탈진이 되어서 안도의 숨을 푹 내쉬는데 그것이 마지막 숨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주위에 선배 목사님들 중에서 보면 교회당은 경험이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이 늘 바닥에서 시작을 하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아마 돈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런데 아닙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팔 억 짜리 교회를 짓는데 십억을 준비해놓고 짓다가 교회 전체가 시험이 들었습니다. 벽돌 가게에 가서 교회에서 왔는데 일억에 벽돌을 사러 왔다고 그랬는데 쳐다 도 안 보았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냉대를 하는가 했더니 보나마나 외상을 하자고 하는데 벽돌을 잔뜩 가지고 가서 월부로 하자고 하니까 교회에 신경 쓰기 싫다고 하면서 안 팔려고 했습니다. 그 교회 장로님이 안주머니에서 백 만원 짜리 백장을 옆에 깔았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하는 말인가. 여기 돈이 있다. 그 돈을 보이면서 우리 교회 우습게 보지 말아라. 그렇게 해도 결국은 어려움을 당한 교회는 당했습니다. 돈이 하나도 없이 시작을 해도 하는 곳은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저의 선배 목사님들을 보면 교회를 짓다가 완전히 폭삭 늙으신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겉이 늙는 것은 그것도 신경을 많이 쓰고 하니까 흰머리가 나고 어쩔 수 없는데 영적으로도 많은 손해를 보시는 것입니다. 말씀 준비를 하고 기도하는 일이 방해를 안 받는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새벽에도 뭐 전화가 오고 돈이 부족해서 막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재직들이 막 콩튀듯 팥튀듯 하는데 궁극적으로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가 그렇게 하거나 말거나 신경을 안 쓰면 그것이 말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경이 안 써진다면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손해를 보시는 분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벌써 교회를 짓는다고 하니까 이 메일로 격려의 편지도 오고 하는데 묻는 말들이 요새 목사님 엄청 바쁘시지요? 사실 바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말속에는 상당히 많이 그런 것들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목회자들에 대한 본 것들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짓는 것이 처음이지만 그러나 하여튼 처음 짓는 사람치고는 그런 간접 경험들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그런 피해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쓰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관리해나가려고 애를 너무 많이 쓰고 있으니까 너무 그렇게 근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고 기도나 열심히 하십시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해서 교회당이 지어지는데 이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뭘 그렇게 무리를 하는가. 그냥 있는 데로 하지. 그런데 자기는 집살 때 그렇게 무리를 했어요. 친정에 가서 돈 꿔오고 하다못해 안 되니까 친정에 애를 맡기고 안 다니는 직장에 다니면서 직업전선에까지 가서 왜 그렇게 갑자기 집안이 난리인가 하면 집 살 때 빚진 돈 갚아야 된다고 하고 직업전선에 나서기도 하고 사채를 얻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 하는데 어떻게 무리를 안 하고 큰 역사가 일어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저하고 오래 생활하셨으니까 제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바는 진짜 이 교회당을 몇 년 빌려주면 두들겨 부수어서 강대 저쪽 구석에다가 한 반 평정도 만들고 여기 더 모이라고 하고 안 되면 온돌처럼 만들어서 A석은 전부다 방석 깔고 앉아서 예배드리게 하고 그렇게 해서 더 지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영혼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잘 대책을 세우고 영혼들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신앙생활하고 주님 만나고 자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다른 사람 누군가가 대신 책임져줄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냥 어떤 때는 심정적으로 참 괴롭습니다. 이렇게 큰 교회당을 지어야 하나. 진짜 그 교회당이 무슨 큰 영광이 있습니까.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교회당을 이렇게 짓게 됩니다. 사람들은 교회당을 짓는 것을 무슨 커다란 세속적인 일들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것은 또 한쪽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당을 지음으로서 교회가 성장할 것이라든지 우리는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관심은 무엇인가 하면 주님이 이미 보내주신 영혼들이 손해보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보내주신 그 영혼들이 1.2......7부 예배를 드리면서 그냥 그 공간이 없어서 예배 끝나고 나서 말씀에 은혜 받고 흐느끼면서 기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등 떠밀면서 4부 예배를 드릴 사람들이 있으니 빨리 나가라고 그렇게 해서 교인들을 닦아 세워서 그렇게 해서 교인들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고 이렇게 하는 이런 어려움을 우리들이 그대로 초래하게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쪽으로 갔을 때에 예배당 상황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저는 그런 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양떼들, 그리고 정상적인 성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이 보내주시라고 믿어지는 아직은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영혼들을 위해서 그들이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도록 준비해놓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고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을 하고, 여러분들도 교회당에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 섬기게 된 것도 누군가가 희생을 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상상도 못하는 희생을 했습니다. 청년들이 한 달씩 두 달씩 교회당에서 쭈그리고 자면서 칠하고 짐 나르고 벽돌 쌓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는 그 희생에 대가를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많은 양떼들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또 그 다음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것이고 그렇게 하면서 교회가 세워져가고 그렇게 수고하고 애쓴 것들은 하나님께 다 기록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 이미 이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 정확하게 거의 1년 전입니다. 그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교회가 교회 건축을 위해서 열렬하게 기도하지 않는가.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도 뭔가를 이렇게 위해서 막 담임목사가 제시하고 사람들을 휘몰고 그리고 철야 당번도 정해서 철야를 시키고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하는데 잘 보십시오. 이것은 계곡을 보트를 타고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제일 처음에 출발할 때 폭포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어느 바보가 폭포에서 보트를 세워놓고 사람들에게 야, 처박힌다 그러면서 출발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리프팅을 해보셨습니까? 출발할 때는 전부다 구명조끼를 입고 보트를 타고 잔잔한 강가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래서 잔잔한 강을 흘러갈 때는 서로 이야기도 하고 그리고 가면 어떤 길이 나오고 어떤 것이 나오는데 하면서 인도자의 설명도 듣고 노래도 부르면서 갑니다. 그러다가 계곡에 들어서서 빠른 물살이 확 돌기 시작할 때 지도자가 꽉 잡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꽉 잡아야지. 그런데 평평한 강에서부터 꽉 잡아 그러면 뭔가 나오지 않는 곳에서 꽉 잡다가 정작 급류를 타고 움직일 때는 사람들이 긴장에 다 풀어지는데 기술적인 문제로 다 조정이 되는 문제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여기까지 왔는가 하면 아닙니다.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많이 했고 그리고 또 성전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한 지체들도 성전 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교회의 영적인 변화와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지도를 위해서 교역자들과 열심히 기도하면서 이제껏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은 꽉 잡아야 할 상황입니다. 이제 계곡을 이제는 3개월 동안 급류를 타고 가다가 어느 날 눈을 뜨고 나면 교회당이 지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한번도 이야기를 안 했는데 지금부터 급류입니다. 그러니까 꽉 잡아야 합니다. 꽉 잡지 않으면 뒤로 넘어집니다. 그래서 급류를 타고 확 지나는데 야! 어떻게 이렇게 빠른가. 정신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한 계곡을 휘돌면 또 다른 산이 나오고 산을 휘돌고 나면 절벽이 나오고 절벽을 확 휘돌고 나오면 몇 미터 떨어질 낭떠러지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꽉 잡으면서 가야지 됩니다. 꽉 잡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 의지하고 또 헌금하고 그렇게 하면서 이제 격동의 시기를 헤치고 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지도하는 담임목사로서 이제부터 예배당 건축에 있어서 급류 타기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러분은 손을 꽉 잡고 그리고 이제는 갈 길은 하나밖에 없구나 하고 그리고 이제는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최선을 다해서 헌금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예배당 건축 때문에 교회의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들이 묻혀지지 않도록 그렇게 조심해야지 됩니다. 우리들이 여태까지 보아온 예배당 건축 그것이 딱 떨어지고 나면 교역자도 줄이고 선교 헌금도 끊고 개척 교회의 지원도 줄이고 그 다음에 교회 경상비도 모두 줄이고 해서 말하자면 긴축재정으로 가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큰일을 하려면 뭔가 아끼고 절약을 해야지 된다는 면에서는 일리가 있는데 그러나 그것도 또 한 면에서 보면 긴축하고 뭐하고 하는 것도 성도들이 그렇게 함으로서 교회당보다도 더 중요한 목양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나아가는데 필요한 비용들을 무작정 교회 벽돌을 쌓기 위해서 교역자도 줄이고 직원도 줄이고 모든 것을 줄이고 해서 그렇게 손해를 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보이는 교회보다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나가야지 되는데, 그러면 교회는 무엇으로 지어져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보면 24장과 25장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25장에는 시내 산에서 이루어지는 광경입니다. 모세에게 시내 산에서 지어야 할 하나님의 집, 이동식 성전입니다. 성막,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아주 상세한 설계를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설계도를 받아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25장에서 그렇게 이동식 성전, 하나님이 계실 집을 지을 식양들을 하나님이 설계도로서 제시하시고 구체적인 계획이 25장에서 시작되기 전에 24장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 두 가지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첫째 사건이 무엇인가 하면 모세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70인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십계명을 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이 있고 나서 그 두 사건을 기초로 25장에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진심으로 경배할 수 있는가. 즉 한 사람이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을 그 이름과 존재에 합당하게 경배하는 일들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가 하면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과 경배의 욕구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일 민족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말하면 전 세계에 단일 민족은 어떻게 보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 피가 섞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온갖 중다한 잡족들이 들어와서 잡동사니들이 모여서 그래서 이스라엘을 이루게 되는데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연합된 공동체로서 공동체적인 정신적인 통일성, 삶에 있어서 통일성, 그리고 믿는바 신앙의 내용에 있어서 통일성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한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함께 경험함으로서 거룩한 공동체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성도들이 모여서 아무리 칼라가 다양하고 성질이 다 각색인 사람들이 모였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모여서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에 그때 그들은 그런 인간적인 구분과 벽을 넘어서서 비로소 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초대 교회 시대 때도 나타났습니다.
헬라인과 유대인의 차이는 오늘날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의 차이를 수 백 배 보탠 것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심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외국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캐나다 같은 데서 몇 년 전에도 들고일어나서 퀴벡이라는 주가 있는데 거기에서 독립하겠다고 난리였습니다. 그래서 캐나다에 가보면 실제로 인구 2500만 명인데 그 중에서 불어를 쓰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소수의 사람을 위해서 모두 불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불어를 쓰는 사람이 전혀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거리에, 항공기 아나운서 먼트, 대합실에 안내 방송 나오는 것까지 전부다 불어로 같이 나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람들을 달래는데 그 사람들이 독립하겠다고 하는데 왜 그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영국 계통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정도에 비하면 우리 나라는 전라도 경상도의 갈등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헬라인과 유대인들의 그 격차는 그런 궤벡 사람과 나머지 캐나다 사람하고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함께 한 형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경험하니까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상전이 종을 형제처럼 생각하고 종과 자유인이 하나가 되는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험이 공동체에 가져다 준 효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모세에게 하나님이 계실 집을 지으라고 명하시기 전에 특별히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은 다 내버려두고 너 나와라. 그리고 모세를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부르십니다. 그때 거기에 있던 70인의 장로들이 함께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거기에서 함께 거룩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손대지 아니하셨더라” 이게 무엇인가 하면 엄격하게 말하면 전부 다 죽었을 사람들인데 왜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죄인들이 있는데 진짜 하나님의 은혜로 산 것입니다. 그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속으로 들어올 만한 사람들이 못 되었는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한 은총으로 손대지 않고 살려두시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임재를 경험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왜 그것이 성막이 지어지는 사건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관계가 있었을까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경사회에서 정착을 하고많은 재산을 모으고 산 사람들도 아닌데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이제 그 성막이 지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물건들이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귀한 물건들이 필요했고 많은 헌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때에 그것을 끝까지 성취하고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 주부터 계속 살펴보겠지만 여러 가지 요소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데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 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인데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70인의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영광스러운 임재 사건을 경험함으로서 깊이 이것을 느끼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럼 무엇인가.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그 사건이 70인의 장로들에게 굉장히 생애 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애굽에서 하나님이 이적을 행하시고 애굽 사람들을 징벌하시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모두 경험하였지만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 경험하는 그 사건은 무슨 이적이나 기적, 악한 나라에 군대들이 도멸을 당하는 그런 광경을 보여주는 그런 간섭하심이 아니라 그냥 찬란한 영광 가운데 임하신 그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그 임재의 영광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거룩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을 깊이 경험하게 하신 것은 이들로 하여금 아주 순도 높은 그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정신 속에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잘 지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있는 교인들이 주님을 진심으로 경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잘 지어진 호화주택에 식인종이 사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당신이 거하실 집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당신이 거하실 그 집이 자기를 진심으로 경배하는 사람들의 경배의 정신 속에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곳이 없으시겠습니까?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성전을 다 지어놓고 기도하는 제목이 그것이 아닙니까? “하늘의 하늘이라도 당신을 용납할 수 없거늘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전이겠습니까” 이것이 솔로몬의 초기 신앙이 얼마나 영적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벌써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한 것입니다.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거늘 하물며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이 어떻게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충분한 장소가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기도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그 경배의 정신이 교회를 세운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헌금을 해도 이 헌금을 하면 내가 앞으로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하면서 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헌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짐승같이 살다가 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새 사람이 되었는데 이 교회가 없었더라면 아마 내가 더 많은 인생을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 교회당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아마 이것보다도 훨씬 더 교회 생활하기 너무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냄새나고 지저분했더라면 내 믿음으로 그 교회를 내 교회라고 생각하면서 다니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 울려 퍼졌다고 할지라도 음향시설이 너무나 조잡해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면 내 믿음으로는 인내하면서 그것을 이해하면서 그 속에 숨겨진 메시지를 깊이 깨달으려고 그럴 정도의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주님을 위해서 받은 은혜를 감사하면서 헌물을 하나님께 드리면 이것을 통해서 나 같은 사람이 여기에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새 삶을 살면 나의 희생이 큰 것이 아니리라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고 섬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모든 신앙적인 행동, 섬김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의 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만 하나님의 집인 이 예배당이 정말 주님께 은혜 받은 성도들, 그러니까 주님께 은혜 받지 못한 성도들이 다른 동기에서 억지로 내는 헌금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께 은혜 받은 성도들의 넘치는 헌신, 주님의 영광과 그 은혜의 임재를 경험하고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마음속에 있는 성도들의 아낌없는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나는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도들이 수천 명이 모여도 교회당을 지을 때는 몇 명밖에 참석하지 않더라 그렇게 말하는데 그것이 항상 있는 일입니다.
제가 지난번 우리 안수집사 임직식 때 오셔서 설교하신 부 총회 목사님이 선배님이시니까 교회를 어떻게 지으셨는지 좀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6-700명이 모일 때 그 교회당을 지었는데 예배당을 짓겠다고 하니까 정확하게 1년 동안 300명이 교회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300명이 지금 거기에 15-600명이 모이는 교회당을 지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당을 지었는데 교회당을 다 빚을 얻어 지어놓으니까 한달 동안에 교인들의 헌금을 다 거두어서 모아보니까 이자보다 약간 적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례금이고 뭐고 다 상상도 못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을 지내셨습니까. 그 난관을 헤치면서 목회를 해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은 그렇습니다. 아니 700명의 교인들이 모이는데 짐을 좀 나누어서 지면 되지 왜 그 300명이 죽을 고생을 하는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지 항상 그렇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있어서 각자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것을 헤아리며 그 은혜 받은 분량만큼 자기 자신이 깊은 책임감을 느껴야하는 것입니다. 얼마를 들어갈 것이니까 전체 교인 나누기 얼마는 얼마씩 하면 되겠구나 이것은 물리적인 방법이지 교회는 어느 교회든지 회비를 내서 교회를 짓는 교회는 없습니다. 교인들이 각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분량대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집을 지을 때 많은 희생과 많은 백성들의 헌신이 필요할 것을 아셨으나 특별히 자기가 당신이 직접 하나님의 교회의 특별한 일군들로 세운 이 70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영광을 보여주심으로 그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의 정신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첫 번째 기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마지막으로 모세를 하나님께서 이제 계명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와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 판을 주리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를 지어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예배당을 짓는 것을 아주 세속적인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 깔려있는 그 정신들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이 이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많고 비참한 선교지도 많은데 자기네들이 편안하게 지내기 위해서 좋은 교회당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사고 자체가.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잘하는 사역은 아니지만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이 교회당에서 사역하지 않고 저 양재동 시민의 공원에 커다란 텐트를 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주일날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에 김 목사가 있을 것이라면 거기에서 하는 목회의 질이 이렇게 깨끗하게 정돈된 예배당에서 하는 목회의 질보다 못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래도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에어컨이 들어오고 시원한 예배당에서는 오후 예배를 나올 수 있지만 천막을 쳐서 더운 곳이 되면 주일 오후 예배는 다시 생각해보겠다 그렇게 반응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당 그 자체가 사람들이 즐기고 누리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거기에 와서 사람들이 담기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을 지으면서 우리들이 항상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목표가 무엇인가. 거기서 교회당을 지어서 담임 목사는 더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할 수 있고 그리고 거기서 지체들은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집중된 예배를 드려서 영혼의 변화의 때를 놓치지 않을 수 있고 방황하는 영혼들이 그곳에 와서 쉼을 얻을 수 있고 그리고 어디서든지 자기를 의탁할 곳이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 그 교회에 와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곳으로서 교회당을 우리들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 일들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이 결국은 교회당을 통해서 우리들이 기대하는 바는 무엇이어야 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성을 드려서 당신이 거하시고 당신이 백성들과 만날 집들을 준비하셨는지 보십시오. 그 설계도면 중에 모세가 아무렇게나 그린 설계도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주 상세한 시공 설계도가 하나님께로부터 그대로 주어졌고 단지 모세는 그것을 기록을 하고 그렸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설계도에서 지시하신 대로 그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지성소를 꾸미는 일부터 시작해서 성소, 그리고 성막 등을 만드는 일, 거기에 각종 도구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아주 정교한 방식들, 하나 하나 누구도 자의로 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법칙을 정하시면서 상세하게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당신이 거하실 집이었을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깃들었던 지성소는 겨우 6평 짜리 방이었습니다. 그것도 텐트였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 거기가 하나님께 만족스러운 집이 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존하신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는 그런 초라한 성막을 만드시는데 왜 그렇게 정성을 기울였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장소는 단순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 아니라 그 예배하는 장소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가르치시는 모든 율법이 한꺼번에 농축되어서 그 정신이 표현되는 곳이 바로 그 성막입니다. 거기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갑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 보면 하나님의 율법이 시온에서 말미암는다. 예루살렘에서 말미암는다. 그 예언이 나옵니다.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그 성전이 단순한 의식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의 전체 양식을 농축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예배 장소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배입니다. 그것이 좁은 의미에서 예배이고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넓은 의미의 삶의 예배로 확장될 때에 우리의 삶 전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경배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참다운 영광은 교회의 건물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참다운 영광은 교회의 건물이기보다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들입니다. 그 변화된 사람들 한가운데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계신 그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거기가 어디든지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성전을 짓는 일이 있기 전에 모세를 불러서 먼저 하나님이 아주 심각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십계명인데 이 십계명은 대부분이 무엇에 대한 계명입니까? 'how to live'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삶의 지침입니다. 삶의 지침을 돌 판에 새겨주시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거하실 집,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지어지는 또 다른 기초가 무엇인가 하면 말씀에 의해서 성도들이 진실한 변화를 받으며 새 삶을 살아가는 그 신앙 위에서 교회당이 지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집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당이 지어지든지 이사를 가든지 말든지 헌금은 몇 푼 했을지 모르지만 어째든 자기의 삶은 조금도 변화지 않고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반복하면서 그 사람이 옮겨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관계는 어디를 가든지 동일한 것입니다. 허름한 성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허름했던 사람이 새 성전에 들어간다고 해서 갑자기 새 것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까만 외제 가운을 입었다고 해서 갑자기 설교가 잘 되겠습니까? 그것은 다 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가 지어지는 과정이 있는데 그때 여러분의 거룩한 삶도 새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이제 B동 건물 허무는 날 여러분 많이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 되면 비디오라도 찍어서 보아야 합니다. 그 B동 건물 잘 쓰려고 했는데 못쓰겠다고 그래서 허물어버리는데 이제 커다란 굴착기가 와서 해머로 부스면 와르르 부서질 것입니다. 그렇게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잘못 쌓여졌던 삶도 그 소리와 함께 부서져야 합니다. 기초를 놓는 과정에서 여러분들의 믿음의 기초도 다시 다져지고 해서 보이는 성전이 올라가는 것과 함께 여러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집도 새롭게 지어져 가야 합니다. 설계가 8월말에 완성된다고 하는데 여름 수련회 가서 설계도를 받아서 그래서 9,10,11,12 무지하게 때려부수고 새지을 지어서 그래서 깨끗하게 지어질 때에 그 과정에 철저히 헌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삶으로 돌이키는 영혼에 참된 변화를 경험하고 진짜 옛사람은 여기 다 묻어두고 그리고 이제 거기에 가서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새로운 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변화된 사람, 그런 변화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이 만드는 경험들을 하고 나서 비로소 여러분들이 그 아름답게 지어지는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경배할만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배당의 겉모습보다는 그 속에 담겨진 사람들의 그 아름다운 신앙, 그리고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의 말씀에 의해서 변화된 성도들의 그 새로워진 삶, 이것을 보면서 주님이 그 교회당보다도 그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기뻐하실 수 있는 그런 변화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교회당이 지어지는 이 시기에는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에 흥왕한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깨트려져서 건축 업자들은 보이는 교회당을 짓고 그리고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교회당을 지어가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새로운 사람들로 바뀌어갈 때 우리들이 짓는 이 예배당의 건축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남은 넉 달 동안에 이런 충분한 변화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2.자원하는 성도의 헌신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출35:21)
지난주부터 무엇으로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는가. 그래서 지난 첫 시간으로서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고 주님의 진리에 대해서 교회가 서는 기초가 마련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의 이동식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그렇게 온갖 설계를 모세에게 지시해주시고 그리고 오늘 두 번째로는 이제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두 번째 요소가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원하는 헌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성경에 보면 무엇으로 표현되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 곧 가슴의 핀과 귀고리 가락지 목걸이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 왔으며.....” 쭉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마음이 감동된 자, 무릇 자원하는 자” 이렇게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 보니까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마음에 감동된 자는 하나님에게 마음을 드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사람, 이 사람들을 여기서 번역하기를 감동된 사람들,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하나 깨닫게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당신이 예배를 받으시기 위한 성막을 지으시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서 하시는데 모든 사람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받은 사람, 하나님에 의해서 마음에 자극을 받은 사람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 일들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옛말에 ‘십시일반’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숟가락씩 밥을 뜨면 한 10사람이 밥을 모으면 그까짓 것 한 숟가락 안 먹어도 되지만 그러나 모으고 나면 그것이 한 사람이 한끼 배를 불릴 수 있는 밥이 된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모아서 뭔가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말할 때 우리들이 그런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교회당이 지어지는 것은 결코 그렇게 해서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는 것은 결국은 우리들이 가장 마음에 그리는 이상적인 스타일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참여해서 하나님의 집을 지었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사실 실제 있어서 보면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주 소수는 아니더라도 모두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당은 지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저는 목회를 하고 나서 처음에야 이제 개척할 때니까 그저 그냥 그렇게 교회당을 만들어놓고 교인들이 왔습니다만 그후에 세 번을 건축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교육시설을 조그만 것을 하나 세를 얻기 위해서 한번 헌금을 하고, 그 다음에 여기에 오기 위해서 한번 헌금을 하고, 그 다음에 여기에서 이제 인덕원 예배당으로 가기 위해서 한번 헌금을 하고 이렇게 해서 세 번을 우리들이 헌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다 헌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거기에는 헌금을 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어서 헌금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많은 고통과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여기 이 예배당으로 올 때 그때 상황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국가적인 경제로 고통을 받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고려하고라도 하여튼 어떻든 하나님께서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일들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그 중심을 보시면서 각자 갚아주시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성경에 보니까 마음에 감동된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의해서 마음이 흔들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막을 짓기 위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오는 소박한 장면들을 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지어 가시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하시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면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게 느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적어도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제 이 성막을 계시하셨을 때 하나님 앞에 크게 각성하고 난 후였기 때문에 아마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분부를 받으면서 모세에 의해서 주님이 이동식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다 라고 하는 당부를 들었을 때에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이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던 성막을 지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모세의 마음이 되고 또 모세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자 모세의 마음은 또한 그들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면서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이 무엇으로든지 허물어지고 깨트려지고 부서지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 이것이 가장 바람직하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교회 생활의 경험, 목회의 경험이 사실 그렇게 완벽하게 무슨 교회의 일을 하든지 완벽하게 한 마음이 되어서 평화스럽게 가는 것이 아주 예외적인 것이 되고 그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일을 밀고 나가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추진되는 과정에서 지켜보고 있거나 아니면 반대하는 사람들을 밀치면서 그런 일들이 사람을 치우면서 굴러가는 그런 식의 사례들을 우리들이 너무나 많이 보아왔고 또 우리들도 부분적으로 경험하면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오늘 이 모습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감동된 사람들, 그 감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결국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감동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여지는 이런 것들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늠름한 웅변이나 변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감동시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감동을 시키셔서 이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를 주시고 그리고 모세가 그것을 받고 모세 자신이 그 일에 대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말했을 때 백성들의 마음에도 같은 소망이 생겨서 하나님의 마음이 모세를 통해서 관처럼 흘러 백성들의 마음에 부어졌고 그래서 모두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들이 인위적인 자극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가장 교회가 지어지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들 보면 흔히 그런 것들이 저에게도 많이 날라 오는데 장기를 기증하라는 것들이 많이 날라 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심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죽은 다음에 사람들에 의해서 자기 시신을 내어주고 그래서 화장하고 하는 것은 나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땅도 좁은 처지에 화장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할 때 다 태워버리면 어떻게 하나님이 부활시키시는가 하는데 걱정도 팔자입니다. 다 태워도 어디에나 다 있고 또 없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무슨 주님 생각해서 화장 안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참에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그 화장도 썩 마음에는 안 내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제 이야기를 사람들이 어느 정도 들으려는지 모르지만 -한 사람을 매장을 할 때 20년 정도만 땅을 사용하게 하고 20년이 지나면 본인의 동의도 구할 필요도 없이 다 파서 화장시켜서 버리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너희 할아버지 산소다. 아버지가 왜 이렇게 너희들에게 이런 뜻을 남기시고 죽었다 그럴 때 그래도 좀 몇 년 동안에 뭐가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성경은 아니지만 그저 제 마음에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벌써 죽는 이야기를 해서 좀 이상하지만 죽는다면 화장을 하는 것은 원칙으로 하되 그 대신 한 20년 정도만 땅에 있다가 그 다음에 20년이 지나면 전국적으로 누구의 의사도 물을 필요 없이 딱딱 묘지 앞에 명찰을 박아서 20년이 지나면 그냥 다 걷어서 태워서 그래서 납골당에 집어 넣어버리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삼천 포로 왔지. 아 장기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괜찮다고 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도 어떤 신문인가 잡지인가 보니까 아주 신실한 의사인데 장기 기증에 대해서 심각하게 충고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어느 날 교회에 와서 장기 기증을 한다고 하면서 콩밥이라도 하나 떼지 않으면 사랑이 전혀 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막 한순간에 연설을 하고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죽어 가는 이웃을 당신이 버려 두려고 하는가 그렇게 해서 저요, 저요 하고 다 도장 찍어서 떼어냈는데 그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수술의 부작용, 혹은 수술을 하고 나서 1년도 못 넘겨서 뭔가 합병증이 와서 죽어가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이 안 믿는 가족들입니다. 그러니까 막 난리가 난 것입니다. 교회에 갔더니 교회에서 마치 장기를 적출해서 누구를 주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교회가 그것을 빼어서 무슨 돈을 받았나. 누가 그것을 하라고 그랬나. 자기가 그냥 연설을 듣고 나서 감동을 받아서 한 것입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사람의 감동과 하나님의 감동을 혼돈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가슴아픈 사연이 있는데 교회를 지어놓고 교회가 빚에 몰린 것입니다. 빚에 몰리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지 그러니까 장로님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사람 집을 팔아서 한달 이자를 갚고 저 사람의 집을 팔아서 한달 이자를 갚고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온 교회가 전부다 난리였습니다. 집을 안 판 사람은 완전히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형제 하나가 자기 집도 또 저당을 잡혀서 빚을 얻어서 교회에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도저히 갚을 능력이 안 되니까 파산했습니다. 그러니까 집달리가 들어와서 차압을 했는데 부인을 비롯해서 온 집안이 하나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헌금을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감동과 사람의 감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가정이 다 부서지고 부부가 이혼을 하고 그렇게 하는데도 여전히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고난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왠지 우리의 가슴에 성큼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적당한 헌신을 해야지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좀 이렇게 사정을 봐가면서 헌신을 해야지 된다 그 이야기를 하고자 교회에 좀 작작 바쳐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마음을 번쩍 드신 사람, 하나님이 그 마음을 막 흔들어놓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막이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그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빙자해서 무슨 오늘날에 이루어지는 교회 건축에 대한 이야기들을 변증하고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이 우리 각자 각자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래서 감동된 대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노후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의 미래의 생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바치는 사람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감동의 분량만큼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지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짓고자 하실 때, 그때 더더욱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당을 바꿀 수 있는가 하고 물을 때는 우리는 결단코 아니라고 대답을 해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각 사람 각 사람을 하나님이 움직이셔서 그 마음에 감동을 받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그런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극되고 그렇게 촉발된 마음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그런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정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감동된 사람들만 헌금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량만큼만 넘어서지 말고 아무도 돌을 던지는 사람이 없고 여러분을 흉보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나조차도 누가 헌금을 얼마 했는지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흔들어놓은 사람들의 헌신은 꼭 필요합니다. 그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막이 지어지는 것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당 지어지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여러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정말 눈물로 쓴 편지들도 여러 통 있었습니다. 어떤 편지는 읽으면서 제가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헌금하지 못한 그런 지체를 위로해주어야 하는 그런 편지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너무너무 고통받고 정말 여러분들이 지금은 잘 모르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부끄럽고 어려운 사정들은 늘 감추어져있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근심걱정 없이 살아가지만 차비가 없어서 교회에 못 나오는 교인들도 실제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때는 그런 교인들을 청년 교구에서 찾아내서 버스 토큰하고 전철 표를 사주는 그렇게 고정적으로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 멀끔한 젊은이가 버스 값 오 백원이 없어서 교회에 못 오는 아니 그때는 사 백원인가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 우리도 그렇게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세월들을 지내봤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를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정말 부탁드리는데 주위를 이렇게 좀 돌아보십시오. 내가 배부르면 모두 배부른 것도 아니고 내가 건강하다고 해서 모두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웃고 가족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가운데서도 고통받는 지체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는데 여러분들은 비록 남편이 돈을 잘 벌고 아내가 돈을 벌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몇 십 만원 짜리 과외하고 심지어 백 만원씩 그렇게 과외를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은 범죄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어떤 유익을 위해서 절약할 줄 모르고 자기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는 얼마든지 써도 좋다고 생각을 하고 규모 없는 가정생활을 하거나 낭비하는 생활을 하는 그것은 정말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눈을 들어서 돌아보면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워하고 고통 하는 지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몸이 아파서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너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돌아보는 삶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세워진 예산을 가지고 그냥 사람들에게 막 나누어주는 그것만 구제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교회도 그 일을 합니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여러분 자신이 주위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얼마씩 내는 주정헌금으로 그 모든 의무가 면제된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내 구역, 내 식구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고통하고 끼니가 없는 이웃들, 아이들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그런 지체들, 광주리라도 이고 가판이라도 하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게 된 그런 지체들 그런 모습들을 여러분 자신들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히 집사들이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입니다. 그래서 ‘디아코니아’ 라는 말이 거기서 온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법적으로 보면 집사들은 그런 어려운 일들을 다 돌아보고 돕고 장로는 그 사람이 신령한 은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이러는 것이 성경 적으로 볼 때에 교회의 도리이고 교회의 할 일입니다. 정말 그것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이렇게 보면 수련회가 다가왔는데 괴로워하는 지체들이 눈에 보입니다. 어떻게, 가기는 해야지 되겠고 회비는 없고 그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교역자들과 직원들이 월요일 날 모여서 헌금하라고 그랬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먼데는 못 봅니다. 우리가 어떻게 먼데까지 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부분들은 모르는 부분입니다. 그것을 갖고 누가 우리를 정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위는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구역, 우리 교사들, 내가 돌보고 있는 영혼들, 우리 지체들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들을 생각하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보탬이 되려고 하는 그런 나눔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는 정말 빈부의 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신분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 그래서 결국은 정말 복음이 모든 사람이 세워놓은 것들을 뛰어넘는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이 세워놓은 구분들을, 구획들을 뛰어넘어서 흐르는 이 위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과도한 지출을 할 때는 항상 자신의 여유 있는 경제 생활을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이 돈이 없어서 고통 하는 지체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고 좋은 식탁에서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그 기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그리고 그렇게 자녀들에게 과도한 교육비를 투자해서 (?)교육을 시키고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절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십자가의 참된 사랑을 알려주셨을 때우리 모두는 그분의 제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로 살아가는 그 사람의 삶의 물질에 대한 생각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달란트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많으면 시간에 있어서 달란트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재능이 많으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달란트를 주신 것입니다. 물질이 많은 것도 그런 많은 것들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돌아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도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번쩍 들었다 놓고 그 심령을 흔들어놓기 전에는 절대로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제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구제해야지 된다는 이야기들을 입버릇처럼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마음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뒤흔들리는 변화 없이는 사람의 삶의 현장에 대한 깊은 사랑이 솟아날 수 없고 그런 사랑이 솟아나지 않으면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준다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들이 시루에 물들지 말고 그렇게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렇게 펼치는 그런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한 구제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를 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통해서 헌신을 받고자 하실 때 하나님이 그 마음을 흔들어놓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교회는 지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학개서 에서 짓다가 만 성전에 대한 기록을 1장에서 읽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보내었고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다가 그 다음에 많은 박해와 어려움이 있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도저히 교회를 계속 지을 수 있도록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타의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전 지어지는 것이 멈추어졌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하나님의 교회에 짓던 그 터에는 황무한 풀들이 돋아나게 되었고 교회의 황무한 풀들이 돋아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서 감동되어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해서 그 예루살렘까지 달려왔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풀들이 돋아나기 시작했으니 그 풀들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 풀들이었습니다.
그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사람, 학개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학개 선지자가 장탄식을(?) 하면서 그들에게 일격을 가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집을 지을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 이때는 하나님의 집을 지을 때가 아니다 라고 너희들이 말하면서 하나님의 집은 짓다가 말아서 황무하게 풀 포기가 돋아나는 황무지가 되고 너희들은 그 동안에 하나님 앞에 바칠 돈들을 모아서 판벽한 집에서 살지 않는가. 이러고도 너희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느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기하게 하나님이 그 말씀을 도구로 하여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으십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감동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들이 당장 일상생활을 팽개치고 그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황무한 여호와의 전에 풀 포기가 뽑혀지고 하나님의 망가진 것처럼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집이 다시 지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옛 신앙의 집들도 다시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 중에서 제일 행복했던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학개라고 생각합니다. 왜 행복한가 하면 다른 선지자들은 그냥 설교만 하다가 이루어지는 것을 못 보고 죽었습니다. 물론 예레미야 같은 사람은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는 보았지만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이 학개 선지자는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도 마찬가지고 설교자도 마찬가지지만 가장 큰 행복은 자기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해서 흔들림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놀라운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들이 깊이 기억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없어서 가난해서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을 벌써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건축헌금을 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건축하려고 모아놓은 돈에서 오히려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오늘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흔들려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1년 전에 교회당을 짓겠다고 그리고 작정을 하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이제 교회가 가야할 방향을 정하고 그리고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일주일 후에 담임목사는 두 번 헌금도 없고 세 번째 헌금도 없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때 헌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을 것 같습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당시 800명이 교회에 출석했는데 4분의 1이 약간 안 되는 사람이 그 헌금에 참여했습니다. 남은 600명의 모든 사람들이 끼니가 없기 때문에 헌금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인격적이고 그리고 그 사람의 신앙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깊이 움직이시고 그래서 그 다음 일주일 뒤에 제가 자유로운 마음으로 10분 동안 여러분들에게 연설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깊이 움직이시고 아무런 작정도 하지 않는데 스스로 확인하겠습니다만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작정을 해서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금액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거기서 제가 다시 확인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결국은 이것은 하나님의 의한 감동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는 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는 것은 주님께 은혜를 받고 신앙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알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라는 것을 알아서 우리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야되겠다 라고 하는 인격적이고 진실한 신앙의 소원이 생겨나는 것이 감동이지 ‘돈’ 그리고 그냥 가슴에 날라 가지고 ‘그것’ 그리고 반응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일부에서도 다시 건축헌금을 해야된다라는 말이 있었지만 저는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최근에는 어떤 지체가 편지를 써서 목사님이 그냥 교회당에 들어갈 생각하지 말고 의자라도 하나씩 사서 들어갈 생각을 하라는 그 말에 상처를 입었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상처를 오늘 풀어주겠으니 좀 잘 들어보십시오.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헌금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은 반듯하게 지어집니다. 왜냐하면 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그것으로 이야기를 마치고 싶습니다. 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짓고자 하는 소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냥 거기서 더 이상 논쟁을 하지 마십시오. 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안 짓고 대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 (?)그래도 지어집니다.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헌금이 들어오지 않아도 교회는 지어집니다. 조금 불편할 뿐이지 지어집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교회당을 짓는데 그러니까 제가 지금 정확하게 몇 명인지 눈여겨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당시로 미루어볼 때 반정도의 사람들밖에 참여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들어보십시오. 헌금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신앙이 없어도 고의로 헌금을 안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저히 자신의 형편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건축헌금을 결제하다가 보니까 12.000원을 낸 사람이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12.000원을 내겠습니까. 귀한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당이 지어졌습니다. 들어가 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마음에 자유함이 없겠는가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교회당이 지어져갈 때 교회 안에서 쓸 물건을 헌신을 하자. 적게는 18.000원 짜리 의자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한 100만원 짜리 에어컨이 있다고 치자. 거기다가 표를 해서 그러면 하나님 앞에 바치자.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모아지는 돈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이것이 건축을 하는데 도움이 안 됩니다. 그것을 해봐야 2-3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는 것은 목양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말 만원이 다른 사람의 백 만원 같은 지체들, 그 지체들의 마음을 다 풀어주고 그리고 가야지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에 보면 그 성벽이 쌓여있는데 성을 쌓을 때 이쪽 벽은 귀족들이 돈을 내고 이쪽은 평민이 내고 해서 성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다 무너졌습니다. 그것도 공교로운 역사지, 마지막에 한 벽이 안 무너졌는데 그것이 통곡의 벽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귀족들과 그리고 모든 백성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함께 모아서 바친 헌금으로 쌓여진 그 벽만 공교롭게 이제껏 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거기에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곡의 벽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갑니까?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이 감동을 시켜서 하나님이 흔들어놓았는데 무엇을 바쳤다고 했습니까? 핀을 바쳤다고 했습니다. 뒤에 나옵니다. 핀, 안 보았습니까. 보십시오. 다음 장 보십시오. 22절에,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가슴에 핀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왔으며 사람마다 여호와께 예물을 드렸으니”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농사를 짓고 편안하게 경작생활을 해야지 재산이 모이는 것이지 아니 애굽에서 도망 나오다시피 쫓겨난 사람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종살이를 한 사람들이 패물이 어디서 났을까요? 궁금합니다. 그곳을 떠날 때에 애굽 사람들이 하도 재앙을 받아서 질리니까 뭐든지 줄게 빨리 가라. 그래서 준 것, 그것을 갖다가 쌓아서 어디다 깊이 묻어놓았던 것입니다. 어디 광야에서 그것을 끼고 폼잡을 일이 있습니까? 뭐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밥도 제 돈이 없어서 사먹을 돈이 없어서 하나님이 하늘 식당에서 내려주는 만나 한 그릇씩 받아먹고 산 사람들이 무슨 돈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노동을 해, 아니면 농사를 짓습니까. 무슨 돈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감동을 시켜놓으니까 핀을 들고 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바치는 것입니다. 귀고리 끼고 다니던 것, 가지고 온 것입니다. 반지 끼고 다니던 것, 갖고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큽니까. 이 기록이 감동적입니까? 감동된다면 집을 팔았다든지 빌딩을 팔았다든지 또 뭐가 있습니까? 그렇지 장기라도 갖다가 팔았다든지. 장기 이렇게 장이야 뭐야 하는 그런 것 말고. 그런데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만히 보면 굉장히 영적인 의미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말하자면 이 땅에 최초의 자기 집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동식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사실 하나님에게 합합니까? 그것이 6평 짜리 방이 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소와 지성소가 18평이고 12평이 성소이고 6평이 지성소인데 그것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가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뭐 금색 은색 자색으로 꼬고 뭐 했다는데 다 걷어서 가봐야 고물상에 가면 얼마나 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시는 자기의 집을 지을 때 하시는 방법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세야 내 집을 위해서 내가 예비하였느니, 지팡이로 저 왼쪽 계곡에 가서 땅을 두드려라. 그러면 그 바위가 불쑥 올라올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반석에서 생수를 내신 하나님이 왜 못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복잡하게 하셔, 자고 일어나면 지어져 있니라. 그렇게 해도 되잖아요. 뭐 복잡하게 그것을 모세에게 받아 적어라. 위에는 무슨 덮개를 덮고 무슨 말뚝을 세워라. 이렇게 복잡하게 합니까. 내가 지어놓을 테니 예배는 잘 드려라.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것을 다 모세에게 불러주시고 그리고 모세에게 다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 하나 적게 하시고 그리고 그것이 완성되자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핀을 들고 왔습니다. 귀고리를 들고 왔습니다. 그런 작은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집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깊이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상상을 자극시켜볼까요? 묵상을 자극시켜드리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애굽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노예가 금반지를 끼고 있다면 주인이 용납을 할까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노예는 가축과 거의 다름이 없는 신분입니다. 그리고 그 노예는 노예 자신도 주인의 소유이고 노예가 일해서 무엇인가 거둔 성과도 주인의 것이고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것이고 노예의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도 다 주인의 것입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늘같이 여기던 그 상전처럼 모시고 살던 사람들이 보석단지를 열어서 다 가져가라고 하나씩 다 나누어주었을 때 그 손에 쥐었을 때 이 사람들이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430년 동안 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며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나온 사람이 수십 만 명인데 모두 다 가졌겠어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겠습니까. 여기다 달고 다니고 광야의 길을 걸어오면서도 목에다 걸치고 오면서 그러면서 애지중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크기는 작지만 애지중지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을 바치면서 하나님이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야, 나 여호와 하나님이 너에게 애굽에서 생전 처음 보고 얻은 너의 그 목걸이보다 귀하지. 너의 그 핀보다 내가 더 귀하지, 사실 그것이 얼마나 유치합니까. 하나님이 그 핀보다 내가 더 귀하지. 그런데 그것은 우리들이 오늘 보기에 유치하지만 사실 오늘도 우리에게 그런 유치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의 물건을 훔치고 도둑질을 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서 살아온 어느 지체가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되었는데 도벽도 꼭 무엇과 똑같은가 하면 술에 중독 되거나 아니면 담배에 중독 되거나 노름에 중독 된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보니까 그것이 나오는데 중류층 이상의 부인들 중에서 상습적인 도벽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난 실제로 봤습니다. 백화점에 갔는데 굉장히 잘 차려입은 아줌마였습니다. 그런데 검은 옷을 입은 어느 직원이 무전기를 들고 다가와서 아줌마 나 좀 봅시다. 그러니까 아줌마가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아줌마 그 가방에 무엇이 있습니까? 잠깐 봅시다 그러니까 여자 가방을 왜 보려고 그래요. 아줌마 CC TV에 잡혔어요.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끌려가는데 아니 그렇게 좋은 무스탕 코트를 걸치고 그렇게 고급 화장품을 바른 그런 사람이 거기서 무엇을 훔쳤는지 난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주위가 비싼 것을 파는 데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핀이나 팔고 스카프나 팔고 그런 곳인데, 훔칠 것도 별로 없는 곳인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가난해서가 아니라 도벽입니다. 그런 도벽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도벽을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도둑질을 하는데 물건을 보는 그 순간 확 마음이 동하고 그것을 훔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훔치는 것이 겨우 좀 값비싼 만년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딱 훔쳐야겠다고 생각하면 꼭 마약 중독에 걸린 사람이 마약을 보면 미친 듯이 매달리듯이 그냥 도덕적인 판단이 ‘스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이 거기로 가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이 거기에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참 심리학적으로 묘한 것입니다. 그런데 훔치려고 가까이 다가가는데 아주 선명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애야, 주님의 음성입니다. 네가 나를 저 만년필 보다 더 사랑하느냐? 유치합니까, 안 유치합니까? 유치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는 그 음성을 듣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백화점을 걸어나왔다고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가 자기를 위해서 사는가 하는 그 갈림길은 유치합니다. 맨 정신으로 생각할 때는 유치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항상 맨 정신으로 안 사니까 그런 유치한 질문을 받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설교할 때마다 심각해지는 요한 복음 21장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그것이 사실 이 사람인지 물고기인지 모릅니다. ‘이것들 보다’ 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사람들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사실 그 질문보다는 “이것들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질문이 사실 문맥상 맞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뜻이 아니라 목적으로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을 더 하는가” 하는 그런 질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문맥상으로 보면 그런 질문을 주님이 하실 문맥은 아닙니다. 이 베드로가 무슨 자기의 친구나 제자들을 너무 사랑해서 주님 앞에 문제가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학자들은 그것을 “이 물고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가” 하고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유치한 질문입니까? 아니 지금 부활하셔서 영광 가운데 그것도 세 번째 나타나셨는데 조금 있으면 예루살렘 교회를 맡겨주실 분인데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물어보시는데 베드로야, ‘예’ 너 물고기를 더 사랑하니? 물고기라고 해도 말이 안 되고 ‘생선’입니다. 이 생선이 더 좋니, 내가 더 좋니? 그리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유치한 질문입니까? 그런데 그 유치한 질문으로 시작을 해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내 어린양을 먹이라” 우리가 그렇게 유치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유치한 질문을 하나님 앞에 계속 받습니다. 주님이 안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내가 이것 보다 주님을 사랑하는가. 여러분 스스로 반문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 여러분 유치하십니까? 남이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옆에서 보면 유치한데 자기가 질문할 때는 유치하지 않고 심각한 질문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의 집을 짓는데 그런 사람들의 헌신, 하나 하나를 통해서 지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구차하게 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집을 짓는 것치고는 너무나 구차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복 받아서 얻은 것이 아니라 애굽 사람 집에서 억지로 얻어서 온 것, 남에게서 주어온 것, 그것을 가지고 당신이 거하실 집을 짓는다. 여러분 논리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까? 굉장히 이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목회자 한 사람이 있는데 교회를 시작하고 모든지 자기가 돈을 내어서 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렇게 해가야 한다. 핀도 내고 귀고리도 내고 금가락지도 내고 이렇게 하면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가 헌신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유치한 질문을 받게끔 해야지 된다. 정말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모두 직면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래서 주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교회에 이제껏 까지 양육을 받고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서 자랐으니까 이제는 내게 있는 작은 핀은 무엇인가, 내게 있는 가장 작은 목걸이는 무엇인가, 내게 있는 가장 작은 장신구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나님 앞에 받게 하면서 그러면서도 사실은 내가 이 핀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내가 이 귀고리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주식보다는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시고 그리고 나를 향해 해주신 주님의 그 넓은 사랑과 은혜를 생각할 때 주님이 내 자신의 전부입니다. 이런 고백 속에서 하나님을 직면하게 끔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의 속 사람을 클 로즈 시키는 것입니다. 한번 씻어내시면서 그러면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기업이시고 주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영광이라고 하는 그런 사모함과 소망을 우리들이 가져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를 지으면서도 건축가와 같은 심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고 여러분들의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 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투덜대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언젠가 교회당이 지어지기 시작하면 이제 의자라든지 뭐든지 하나씩 여러분들 써서 다 내십시오. 그것도 없어서 못 내는 사람은 괜찮습니다. 그러면 노가다의 기회가 남아 있으니까 마지막 교회를 짓고 청소할 때 가서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바닥도 닦고 청소도 하고 기쁨으로 페인트칠도 하고 쓰레기도 치우고 이렇게 하고 그것도 힘이 없어서 못하는 사람은 주방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의 밥이라도 하고 그것도 힘이 들어서 못하는 사람은 설거지라도 하고 그것도 힘든 사람은 설거지하는 사람들 도와주려고 호수라도 붙잡고 있고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한마음이 되어서 그래서 그 예배당에서 12월에 입당할 때 다른 사람이 거기에서 하나님,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감사할 때 누구도 한사람도 소외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의 목표가 인덕원에 예배당을 짓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겨우 시작이고 여러분들이 거기에서 더 하나님을 잘 알아가고 여러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더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그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에 기쁨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나는 내 속에 주신 이 마음이 나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처음부터 굳게 생각하고 이제껏 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마음을 이해하면 이 문제와 관련된 하나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거의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하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거의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깊이 전해져서 목회자가 무엇을 결정하면 한번 그 배경을 깊이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에 가서 정말 아무 것도 없어서 수련회비도 없어서 다른 지체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수련회에 갔던 그런 형제 자매들 조차도 거기서 전혀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고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누구 돈 많은 사람 한 두 사람 통해서 교회가 지어지지 않고 이렇게 우리의 눈물의 헌신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우리의 눈에 보이는 교회가 이렇게 아름답게 선 것처럼 이제 옛 모습은 옛 교회당에다 묻어두고 새 예배당에서 이 예배당처럼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주님의 성전이 우리 각자의 가슴 속에 그렇게 지어져 가야지 되겠다 그렇게 결심하면서 펑펑 우는 감격 속에 그렇게 우리들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나를 포함해서 여러분 가운데 예배당을 주님 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여러분도 주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예배당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그 예배당이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그 예배당이 지어지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처음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잘 되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남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정말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서 그 유치한 질문을 받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온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그래서 그 유치한 질문 앞에서 아닙니다. ‘하나님, 내가 이 세상에서 주밖에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만이 나의 사랑이십니다. 내 비록 가진 것 없고 배운 것은 많지 않고 그리고 남보다 많은 기술이 없어도 그러나 내 마음은 주님에 의해서 점령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자기 분량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며 그렇게 해서 눈물을 흘리고 헌신하는 몇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그 새 예배당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들을 기뻐하고 이루실 일들에 대해서 더 큰 소망을 가지며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주의 은혜와 영광을 구하는 그런 감격스러운 기도의 응답들이 있으리라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주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
“브사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여호와의 무릇 명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출36:1)
하나님께서 자기의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성도의 자원하는 헌신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세워 가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 자신의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을 아는 지식과 사랑, 감화와 은혜 이런 것들을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결정적인 시기에 주님께 감사하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는 일에 합당한 사람들로 빚어져가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되겠습니다만 또 하나님의 교회는 무엇으로 지어지는가 하면 사람을 통해서 지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오늘 읽은 본문 전체의 문맥에 보면 아주 중요한 일이 나옵니다. 백성들이 많은 헌물을 드렸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져온 많은 물질로 이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하나님의 집을 세워야 했는데 그 중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신 사람들이 있었는데 ‘브사렐’과 ‘오홀리압’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명한 어떤 영적 지도자나 설교자나 이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인류 최초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집의 건축을 위해서 매우 요긴하게 쓰임 바 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물질만 있으면 저절로 지어지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지방에 내려가서 집회를 하는 가운데 아주 신실한 건축가 한 분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때 교회를 질 계획이 없었으니까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분과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의 일을 하기가 굉장히 힘드시지요 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부분 교회들이 돈이 없이 큰일을 믿음으로 시작하니까 그 가운데 고통받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그 믿음에 아멘 하고 건축에 참여했던 시공업자들이 고통을 받는 경우를 많이 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으면 당연히 말도 마십시오. 목사님, 교회 때문에 죽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 교회를 많이 시공한 그 사람의 이야기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다. 목사님, 아니 왜 그렇습니까? 그랬더니 하는 말이 최근에 교회 하나를 지었는데 교회를 지으면서 자기가 너무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은 아니지만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까? 그랬더니 모든 교회와 마찬가지로 10억밖에 없는데 50억 짜리 교회를 짓겠다고 대들어서 염려를 하고 시작을 했는데 마지막에 성전이 지어져 가는 과정까지 성도들이 얼마나 연합하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진짜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우시는 광경을 일년 반 넘게 그 일에 관여하면서 모두 지켜보면서 한 공정이 진행되고 나면 간증이 나오고 한 공정이 진행되고 나면 간증이 나오고 그러면서 세워져갔는데 사실 목사님 저는 교회당을 지은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아주 전혀 새로운 이야기였습니다. 자기는 이제까지 수많은 교회들을 지어오면서 돈이 없는 교회도 지어봤고 돈이 많이 있는 교회도 지어봤고 작은 교회도 지어봤고 큰 교회도 지어봤는데 어떤 교회는 돈을 계획을 세워서 10년 전부터 돈을 모은다고 하는데 그런 교회는 이제 성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이 늘어나는 교회이기보다는 아주 오래되어서 기본적인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그런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일 수가 있습니다.
역사가 오래되어서 그 교회에서 태어나면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따라서 그 교회에 나오고 하는 늘어나지는 않아도 안정적인 교인이 있고 그런 교회인데 그런 교회들은 아예 5-10년 전서부터 돈을 저축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교회를 질 때에 교회를 지어야 할 돈을 충분히 통장에 현금을 가지고 교회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돈이 있으니까 교회가 시험들 리가 뭐가 있겠습니까. 시공업자 돈주고 원하는 대로 지어라. 그러면 되잖아요. 그런데도 안 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렇게 모든 돈을 가지고 시작을 했는데도 불화가 생기고 당 회가 싸우고 제직회가 찢어지고 하면서 교인들이 상처를 입고 결국은 돈을 다 가지고 있는데도 완공을 하기 힘든 교회들을 봤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목사인 저에게 충고는 아니었겠지만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습니다. 기분이 좀 이상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목사님, 교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 충고가 저에게는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후에도 동업자들을 만나서 교회를 지은 간증들을 들어보면 확실히 그분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보다는 훨씬 더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어려움이 생겨나는 그 모든 과정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물론 돈이 없으니까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고, 또 여러 가지의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어려움 한복판에는 사람이 없는 어려움은 없습니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니까 어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성취하실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셔서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기하게 여기 건축위원장이 모세가 아닙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설계도를 받았을 뿐이고 그리고 설계도를 전달해주고 그리고 브사렐과 오홀리압이라는 사람이 주동이 되어서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이제 믿음으로 건축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보면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집을 지으시는데 사람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무슨 하나님의 일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정해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이일은 커다란 대 역사였습니다. 일에 규모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서 수십 만 명이 달려들어서 협동작전으로 할 수 있는 토목공사는 아니었습니다. 이동식 성전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 일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성막을 짓는 식양들, 성막을 짓도록 말씀하신 그 설계도를 쭉 보면 아주 정교함이 요구되었습니다. 길이, 높이, 너비, 그 다음에 색깔, 그 다음에 수놓는 문제, 조각하는 문제, 금 은 같은 것을 끓여 부어서 만드는 문제, 깎는 문제 이런 것들이 아주 정교함을 요구하는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흙을 퍼담듯이 토목공사처럼 해치울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핀을 뽑아서 내고 금가락지를 내고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을 내어놓고 그리고 그들은 그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할 뿐이었고 소수의 사람들이 이 일을 해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가르쳐주신 그 제도를 따라서 이 사람들이 성실하게 자기의 일들을 이루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기의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라는 요소입니다. 정말 꼭 필요한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것은 주님께서 이 교회당을 마지막에 세우실 때까지 심지어는 세워진 다음에 마지막에 이 교회를 운영하는데 있어서까지 하나님이 특별히 좋아하시는 사람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서 당신 자신이 일해 가시도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 여러 가지의 요소가 많이 있겠습니다만 어째든 주님의 쓰심에 합당한 사람들이 택함을 받아서 그 사람들이 각자 각자가 자신의 모든 사심과 사사로운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고 주님 자신과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지를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책을 하나 다 쓰고 나면 외부의 디자이너들에게 디자인을 시켜서 한 여섯 개쯤 표지를 만들어놓고 본당 앞에 붙여놓고 성도들에게 인기투표를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표가 제일 많이 붙은 것을 채택해서 했는데 제가 그렇게 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어떤 사람이 저에게 뜨끔한 충고를 하나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디자인을 알지 못하는 사람 천명이 좋다고 하는 것보다 디자인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한 사람이 좋다고 한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여기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어차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 나름대로 다 취향이 있는데 분별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자인을 아는 사람이 내리는 평가는 보편적인 평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게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아닌게 아니라 어떤 때는 다 표를 찍어서 이것이 1등을 했는데 내가 보니까 저 3등 짜리 가 훨씬 좋은데, 그래서 아! 이것도 역시 좋은 방법이 아니구나 하고 이제는 그 방법을 거두었습니다.
사람이 일이라는 것이 모두 그런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생각이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이런 종류의 일들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단순히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서 꼭 쓰실 수 있는 그런 전문가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바로 이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첫째는 하나님이 사람을 쓰신다고 했고, 두 번째는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첫째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면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총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혜와 총명은 구분됩니다. 지혜는 공부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많이 하면 지혜가 생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혜는 모든 지식들을 사용하는 원리입니다. 그 원리에 뛰어난 사람이 지식이 부족해도 좀 그 원리를 아는데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지식이 구슬이라면 지혜는 그 구슬을 꿰는 실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만히 보면 인간의 삶의 질을 지식이 결정하는가, 지혜가 결정하는가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지식보다는 지혜에 의해서 많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식도 삶의 질은 어느 정도 좌우합니다. 그런데 내면적인 질을 좌우하는 것은 지식보다는 지혜입니다.
자,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일본을 제가 갔다가 왔는데 너무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 나라가 살기가 좋다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나 비쌉니다. 밥을 한번 먹으려고 그랬더니 지갑을 열면 강탈을 당하는 것 같은 그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이 충격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만원이면 먹을 수 있는 식사가 거기서는 오만 원입니다. 보통 두 배쯤 되는데 심하면 한 내배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그런데 참 사는 게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식이 짧으면 그 사람이 사회에서 효용가치가 적어집니다. 일반적으로, 그래서 지식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에 종사를 합니다. 힘으로 해서 처리할 수 있는 그런 일에 종사를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공부를 많이 해서 전문가가 된다고 하면 대접을 받지 않겠어요. 그렇게 하면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굉장히 달라질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와서 한번에 취직을 했는데 초봉을 한 5백 만원쯤 받는 사람과 한달 내내 일했더니 55만원밖에 안 주는 사람의 삶의 질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은 그냥 그것을 받아서 쪽 방 같은 곳에서 살며 라면이나 끓여먹고 살고, 한 사람은 입사하자마자 좋은 차를 사서 큰집에서 그러고 사는데 삶의 질이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삶의 질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집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의 수준에 의해서 사회적인 대우를 받음으로 사회적으로 받는 대우에 다과를 통해서 결정되는 삶의 질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삶의 질입니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는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혜의 유무에 있어서는 물리적인 질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질들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이 훨씬 큰 것입니다.
보십시오. 거의 공부를 배우지 못했는데, 세상 말로 하자면 학벌이 별로 없는데, 가방 끈이 짧아서 학벌이 별로 없는데 이 사람이 자라면서 신앙이 없을지라도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와 자라면서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배워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가, 사람 앞에서 참된 이웃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신의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기본적인 덕목들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참 재미있는 게 아들딸이 과년해서 시집장가를 보낼 때는 자기는 엄격하게 안 길렀으면서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애들을 찾습니다. 그런데 참 썰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는 막 놓아 길렀으면서 자기의 며느리를 맞으면서 는 애는 엄격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자기 딸은 막 놓아서 길렀으면서 사위는 어려서부터 너무 엄격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그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자기 딸은 엄격하게 길렀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도 굉장히 썰렁한 이야기입니다. 춥지요.
그런데 그런 사회적으로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는데 부모로부터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런데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인간의 삶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깊이 배우고 자기가 예전에 잘못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뉘우치면서 바꾸는 것입니다. 그때 지식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해도 A, B, C, D 입력이 안 된 것은 출력이 안 됩니다. 그런데 조금은 도와주십니다. 제가 외국에 가보니까 하도 다급해서 열렬히 기도하면 조금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지식이 생기는 것은 아닌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삶의 도리를 새롭게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식은 짧지만 그것이 변화되지는 않지만 굵직굵직한 삶의 지혜가 새롭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질이 놀랍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우리 교회도 청년들이 많은데 다 상담해보고 이야기를 해보면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고 그런 문제들을 보면 문제 있는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물려준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부모들이 지혜가 없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면서 그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더 깊이 주님을 만나서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지 됩니다. 그러면서 환경에 의해서 그냥 이입되고 환경에 의해서 그냥 주저된 그런 어떤 것 때문에 여러분들의 인생이 그렇게 결정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고 자기 속에 이렇게 잘못 심겨진 인생에 대한 견해, 삶의 태도들,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이러면서 건강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캐릭터 자체가 건강하고 좋은 사람으로 바탕이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리고 잘못 살아온 사람들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갈아엎는 그런 격렬한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전혀 못했는데도 공부를 많이 한 아들은 자기 자식들을 통제를 못하는데 공부 못한 아버지는 통제를 합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못 나왔는데 아들은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가졌습니다. ‘네 이놈 사람이 그렇게 살면 되겠느냐’ 그럼 그것은 지식을 가지고 서로 경쟁할 소지가 아닙니다. 너무 살아가는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너는 지식이 나보다 많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도리는 그것이 아니다. 방식을 가지고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통제가 되는 것입니다. 품위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보다 공부를 많이 못했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도 여러분만큼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권위는 지식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지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지혜에서 슬기로운 삶이 나오고 그것을 통해서 입증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 아버지 어머니로서의 이 삶, 그것이 올바르면 자녀들이 거기에 대해서 반기를 들 수 없는 것입니다. 반기를 들면 가만 내버려둡니까, 혼을 내주지. 때려줘야 합니다. 그런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신앙 생활을 잘해서 성경이 가르쳐주는 믿음의 도리, 삶의 도리, 섬김의 도리 이런 것들을 깊이 깨닫고 나면 아주 놀랍게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지혜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커다란 흐름, 원리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제가 있던 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교회에서 유치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유치원을 세울 때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세웁니다. 그런데 그 유치원이 역사가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40년이 넘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역사와 전통 때문이라도 교회에서 유치원을 없이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신앙적인 선생님이 오셔서 학생들을 잘 가르치면 좋을 텐데 좀 이상한 것이 어느 날 크리스마스 발표회를 하는데 유치원도 찬조 출현을 한다고 해서 갔는데 교회의 휘장이 붉은 색인데 거기에 데코레이션이 하나 있는데 사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나오는 것도 사실 나는 이해가 좀 안 됩니다. 그 할아버지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아니고 이상한 사람이 하나 나왔습니다. 알아볼 수가 없어서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았더니 빗자루 타고 날아가는 마녀입니다. 아니 그것이 크리스마스날 왜 나옵니까? 그런데 마녀를 아주 예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예뻐도 마녀지, 빗자루를 탔는데. 까만 모자를 쓰고 망토를 걸치고 그리고 날아가고 여기서 예수님 찬양을 하는데 뭐가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학원을 나왔다는 사람입니다. 뭐가 부족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적인 지혜가 모자라니까 일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무엇을 갖추고 있었는지 이제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지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의 거할 처소를 만드시는데 사용하신 사람이 갖춘 첫 번째 요소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굉장한 영적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건축을 전문으로 하고 수를 전문으로 놓는 꾼일 뿐 아니 것도 아닌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신앙적인 지혜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 사람들이 깊은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영적인 분위기, 영성이 없이는 이런 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말씀의 은혜 속에서 부단히 자기가 깨트려지고 변화된 사람들은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왔어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런 것이 아닙니까?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것을 갖추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총명입니다. 이 총명은 영적 총명이기보다는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한 총명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35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나옵니다. 밑에까지 내려가면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충만케 하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그러니까 이 총명과 지식으로 어떤 일들을 하게 하셨는데 그 다음에 나온 것을 보십시오.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아주 전문적인 기술과 기능이 요구되는 섬세한 일입니다. 그것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 보석을 깎아서 부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공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또 그와 단 지파 댕댕댕 해서 쫙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총명은 단순히 신약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영적 총명이라기보다는 자기 일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잘 하는 전문가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지요. 하루아침에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연구, 그리고 꾸준한 자기 발전을 통하여 갖추어져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기술들을 갖추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배웠을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단언하는가 하면 광야에서 이 사람들이 이것을 해서 먹고산다고 해도 고객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따리를 싸서 죽어라 이동을 하는데 뭘 어디에 수를 놓고 어디를 꿰매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기본적인 생존만 하면 되지. 그러니까 발달한 애굽에서 살 때에, 그때 사람들이 고도의 문화적인 수준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진짜 대단합니다. 그들의 그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류의 영향을 많이 끼친 법전이 로마법전이 아닙니까? 그런데 근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법전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폴레옹 법전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는 물론이고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쪽까지 법을 다 만들어서 이것으로 하라고 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로마법이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 법전이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것이 주전 17-8세기경입니다. 그들이 누렸던 문화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오 천 년 전에 미이라가 나왔는데 아직까지도 손상이 안 된 채 나옵니다. 현대 과학으로 흉내를 내지 못합니다. 그런 정도의 문화를 누리고 있었던 사람들이니까 거기에 많은 기술자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많은 일들을 노예들이 담당했을 것입니다. 거기서 이 사람들이 배운 일입니다. 굉장히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사실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들이 애굽을 다 버리고 그리고 이제 “가자” 그럴 때 “아멘” 하고 따라나서 광야로 들어섰을 때 이제 다 버렸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내가 애굽 사람을 섬기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노라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수놓은 바늘, 이런 것을 다 버리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기하게 세상에서 세상을 섬기던 기술을 하나님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게 하신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참 신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그런 일에 종사하게 하여서 그런 기술을 잘 습득하게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 말고 설명이 안 됩니다. 그리고 와서 이제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 영성도 고려가 되었지만 또 하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도 고려가 된 것입니다. ‘넌 내 마음에 합하니 이제 바느질부터 배워라.’ 그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그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딱 하나님이 지명하셔서 그들을 세우셨을 때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모세가 전달해주었을 것입니다. 브사렐과 오홀리압아 하나님이 너희를 지명하셨느니라. 너는 이제 주의 전을 위해서 남들이 아무나 할 수 없는 전문적인 일들을 너희가 할지니라. 그랬을 때 브사렐과 오홀리압의 태도가 어땠을까요? ‘아이시 나도 벌어먹고 살아야지 되는데 왜 이렇게 성가시게 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인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인 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아마 가르쳐주었다면 이 찬송을 부르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아, 이것은 다 세상에 속한 기술이다. 다 버려 두었는데 하나님이 브사렐과 오홀리압아 너희가 그 애굽에서 배운 기술로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다른 사람이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을 섬기게 하셨느니라. 할 때에 뽑힌 기쁨이 어떠했을까요? 놀라울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든 이 사람들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하나님의 집을 짓는 훌륭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이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도 놀랍지만 이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이 이렇게 그가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기술을 쓰시겠다고 픽업하실 때 그때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브사렐과 오홀리압의 태도입니다. 정말 얼마나 놀랍습니까? 세상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 아십니까? 뭘 하다가. 제가 직장에 다닐 때도 그랬는데 하여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부려먹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 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뭐가 있다고 합니다. 일본말로 뭐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호락호락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브사렐과 오홀리압은 기술자 중에 기술자입니다. 전문가중에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시겠다 하니까 기쁨으로 자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에스더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애굽에서 다른 사람들이 다 똥 푸고 벽돌을 만들 때 이렇게 공교한 일들로 애굽 사람들에게서 이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게 하신 것이 이때를 위함인 줄 누가 알리요 이런 마음으로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놀랍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전문적인 기술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모으시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의 일들을 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해서 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브사렐과 오홀리압의 그 하나님의 쓰심에 마치 스탠바이하고 있다가 주께서 딱 쓰시겠다고 하니까 픽업되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수종 드는 이 광경을 보면서 참 놀라운 신앙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 성막 이렇게 생각할 때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 그리고 시내 산에서 신령한 계시로 설계도를 받은 모세, 그리고 거기에 드나들면서 신령한 하나님께 죄인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이런 사람들만 주인공으로 생각하지 진짜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우리가 이름이나 기억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해서 자기의 거할 거처를 지어 가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전문가적인 기능, 재능, 그리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사용해서 이 일들을 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지어가면서 여러분들의 많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끝없이 여러분들이 이제 부름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하십시오. 내가 이 세상에서 내가 좋아서 배운 이런 저런 기술이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 하다가, 하다가 기술이 없으면 마지막에 내가 세상에서 굵어진 이 팔뚝, 노가다를 위함이 아니냐. 그렇게 하고 부름에 응해야 합니다.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힘없는 장면에만 아멘을 안 합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이번에도 일본 여행 공짜로 안 하고 아직 카메라가 없어서 일회용 사진기를 세 개나 사 가지고 가서 교회를 짓는 일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다 찍어서 왔습니다. 인천공항부터 시작을 해서 나리타공항까지 다 찍어왔습니다. 그런데 역시 그런 것을 다 촬영하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진짜 재주꾼들이 많아야지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저런 것을 다 돈을 들여서 하려고 하면 돈 덩어리겠다. 야 일군들이 필요하다. 디자인을 배운 사람은 디자인을 배운 사람대로, 철물 하는 것을 배운 사람은 철물 하는 사람대로, 목공을 배운 사람은 목공을, 인테리어는 인테리어대로, 전기는 전기대로, 방송은 방송대로, 주방은 주방대로 수많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쓰시겠다고 하실 때 돈으로 건축헌금을 해야지 만 그것이 꼭 헌금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비록 많은 재산이 없어서 거액의 연보는 못했지만 주님께서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해서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쓰실 이 날을 위해서 나에게 남다른 기술을 소유하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하면서 기쁨으로 하나님의 그 일에 수종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수종들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기 그 일을 기도하면서 해나가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워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손때 묻은 예배당 하나 하나를 보면서, 옛날에 이 교회당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안 산다고 결렬되었을 때 어느 집사님이 와서 나를 위로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합니까. 구석구석 손길이 다 닿았는데 이 곳을 어떻게 두고 돌아서서 발길이 떨어지시겠습니까? 참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뒤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를 안 하시는데, 하나 하나 우리의 손길이 다 닿았습니다. 그 사람도 자기의 손길이 닿았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너무나 추억이 있습니다. 지하에 내려가면 밤새도록 페인트를 칠하던 생각, 옥상에 올라가면 밤 12시에 삽으로 흙을 파던 생각, 돌을 나르던 생각, 3층에 내려오면 바닥을 도끼다시 하던 생각, 그 다음에 마당에 내려가면 페인트칠을 해서 주차 줄을 긋던 생각 이런 생각들이 다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을 그렇게 수종을 들면서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왜 못하시겠습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불만 비치시고 왜 햇볕만 가리십니까? 성막 있어라 하면 탁 생겨날 것인데, 뭐 그렇게 복잡하게 제도를 가르쳐주고 시키는 대로 똑바로 하라고 또 재차 다짐을 하시고 또 너희들 핀이라도 바치라고 해서 그것을 또 바치고 녹이고 그것을 또 실을 만들어서 또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택해서 하라고 그러고 또 잘했나 못했나 점검을 하고,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므로 그들의 모든 마음을 그렇게 하나님의 집을 지어가면서 이렇게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우리 주님 되신다고 하는 깊은 감동을 각자 각자가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꼈던 감격이 얼마나 놀라웠겠는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에스라서에 보면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고 제 이 성전이 지어질 때 겨우 기초 공사가 놓인 것을 보면서 막 젊은이들이 그렇게 열광하면서 환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 이것이 완성되었을 때 이들이 이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아주 확실한 증표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사인이 없었습니다. 성막을 보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시는 백성이다. 성막이 어디에 가든지 먼저 진을 치고 그 주위에 진을 치면서 12 지파의 백성들이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감격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보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텐트를 쳐놓고 그렇게 울고불고 감격하니까 웃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네들 수준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중요한 것은 지금 텐트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 장소에 언제나 오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언약하시는 하나님., 그것을 볼 때에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지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에 그까짓 것 많은 헌금을 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것 못지 않게 훌륭한 헌신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전문가적인 지식, 재능 자기 이외에 할 수 없는 그 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수종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의 집이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나와서 그 교회를 내가 지어서 바치겠습니다. 끝이 좋은 교회를 거의 못 봤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탁 나타나서 그저 되는대로 헌금하십시오. 나머지는 다 내가 내겠습니다. 그리고 버튼하나만 누르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런데 그 약속이 실행되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항상 후유증이 남습니다. 그냥 제일 좋은 것은 많이 한 사람 적게 한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그 사람의 헌금 하나를 가지고 교회가 지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모두가 통합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헌금을 많이 못했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가 하면 봉사를 하십시오. 섬기십시오. 정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 주께 바치는 마음으로 그리고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브사렐과 오홀리압처럼 나를 하나님 앞에 은혜 입은 자로 여기시고 그리고 나에게 남다른 지식의 기회를 주셔서 그것을 습득하게 하시고 그것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셨고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예배당을 세우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저에게는 큰 영광입니다. 그런 은혜, 이런 고백 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이제 두 개를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을 사용해서 일하신다. 두 번째는 그럼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 중에서 첫째는 영성이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두 번째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자원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왜 그러면 그들이 그렇게 지혜와 총명으로 특별히 부름 바 되었을까 입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똑같은 일들을 기계 벽돌을 찍어내듯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 보십시오. 김 목사가 설교를 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집에 돌아가서 그것도 설교라고 하고 와서 저녁밥을 먹고 앉아있냐. 이 등신아!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은 진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구나 할 때도 있습니다. 드물지만, 그렇습니다. 아니 내 생각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대충 하고 싶은 적이 있겠습니까? 항상 잘 하고 싶고 항상 성도들을 잘 섬기고 싶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고 싶지 대충 하고 싶은 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언제든지 잘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안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뭘 하면 똑같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송편을 빗는다고 해도 어떻게 어제오늘이 똑같이 빗겠습니까?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항상 똑같은 품질에 기술발휘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원래 기술이 있었던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실수 없이, 성막을 만들다가 잘못 만들어서 다 뜯어버리고 태워버리고 다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루에 착오도 없이 진행되어간 것입니다. 털끝하나도 착오 없이 착착 설계도대로 진행되어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놀라운 숙련된 전문가적인 기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 전문적인 숙련된 기술로서 할 수 있는 보통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하나님이 놀랍게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의 작품이 나온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하나님을 의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까, 자기 전문적인 기술을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또 아무 것도 없이 하나님만 의지해도 하나님도 참 입장이 난처하실 것입니다. 내가 제일 듣기 싫은 것이 신학교 선생을 할 때, 시험 볼 때 기도하는 애들이 제일 보기 싫었습니다. 뭘 그렇게 기도를 하는지. 시간도 없는데 빨리 풀고 나가지, 그래서 제가 항상 기도했습니다. 항상 똑같은 기도였습니다. 여기 증인들도 여럿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학생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합니다. 혹은 밤에는 사역하고 낮에는 공부합니다. 남보다 힘들게 이 신학의 수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부 훌쩍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들의 시험에 축복해주시옵소서. 아멘 합니다. 하나님 이들이 실수하지 않고 잘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러면 감동 충만합니다. 아멘 합니다. 그러다가 항상 그 기도에 뒤를 덧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들 중에 어떤 사람도 공부를 별로 안 했는데 요행으로 점수를 많이 맞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면 아무도 아멘을 안 합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자기네끼리 쳐다보면서 막 웃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세상에 신학교 6년이나 다녔지만 감독이 들어와서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합니다. 뭘 거기서 주님을 부르고 있는지, 진작 부르면서 공부를 해야지. 그러니 참 공부는 하나도 안 하고 믿음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 정말 곤란합니다.
그런데 전문가적인 기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나 브사렐 오홀리압이 자기 전문가적인 기술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와 그 전문가적인 지식을 가지고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그것이 가능했는가. 크게 세 번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을 그들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그들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집회 같은 곳에 가면 설교자가 항상 신경 쓰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반주자입니다. 반주자가 자꾸 박자가 안 맞거나 헛방이 나면 굉장히 힘듭니다. 빨리 빨리 불러야 하는데 천천히 하고, 좀 천천히 은혜롭게 불러야 하는데 막 뛰는 것입니다. 아 너무나 짜증납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그렇게 하는데 막 행진곡 같은 것을 치는 것입니다.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이제 놀라워요. 은혜가 충만하게 내려서 반주자가 은혜를 받으면 이 친구가 막 반주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 악보가 보이겠어요. 안 보입니다. 그러면 손이 막 날라 다닙니다. 그렇게 잘 치는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손이 막 날라 다니는데 기가 막히게 설교자의 의도와 회중들의 찬양과 이런 것들이 정확하게 어우러지면서 하나님을 향한 아주 놀라운 심포니처럼 그렇게 찬양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주님의 신이 충만하게 임하셨기 때문에, 설교자에게, 말씀을 듣는 회중에게, 그 다음에 섬기는 사람에게 이렇게 함께 임하니까 한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교통하면서 완벽한 하나의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있고 기술이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성령의 사람,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겨진 사람, 여러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교회를 다 짓고 나서 목사가 탈진해서 뻗어버리는 이야기, 고혈압에 쓰러지고 중풍이 오고 한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먼저 간 선배들 많이 있습니다. 많고 얼마나 그런 일이 많은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일도 열심히 해야지 만 우선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무슨 회의를 하든지 간에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의를 끝마치고 나오면 막 열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물론 열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악한 인간의 기질에 의해서 열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벌개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서, 아! 정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을 행하시는구나. 이런 감화와 은혜 속에서 그렇게 나올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예배당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싸움하고 찢고 갈라지고 그냥 당 회가 쪼개져서 막 일부가 뛰쳐나가서 교회를 새로 짓고, 건축헌금을 낸 것을 돌려달라고 난리를 치고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께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브사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게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을 지으면서 그는 말하자면 충만한 지도자 모세, 그리고 하나님 앞에 충만한 은혜를 입어서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섬기려고 하는 자원하는 백성들, 그리고 그 위에 성신의 충만함을 입어서 영적인 지혜와 그리고 전문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자기의 일을 감당해서 생애에 두 번 다시없을 최대의 걸작품들을 만들어내는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중심으로 한 장인들, 그런 사람들이 첫 번째 하나님의 집을 놀랍게 만들어낸 것입니다.
어떤 다툼이나 분쟁은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로 놀랍게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아름다운 제사를 거기서 봉헌할 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비록 나그네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길거리에 우거 하는 객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주님이 계심을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집을 통해서 보여주셨다 하면서 그 백성들이 한없이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 감격하는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집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로 세워지기를, 세워진 사람들이 또 그렇게 섬기기를 기도하고 또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아서 쓰임을 받을 때 이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수종들 수 있는 열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하나님의 축복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출39:43-40:1)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으로 지어지는가에 대해서 살피는 가운데 지난 시간에는 무엇으로 지어진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신 사람들, 그들을 주의 신으로 충만케 하셔서 일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다 끝난 것은 아닌데 이제 성막을 지으면서 거의 완성되어 가는 단계입니다. 성막을 짓고 이제 아직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가장 자리에 이곳도 안 치고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모세가 보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신 그것이 있는데 설계자로서, 도면을 그린 사람으로 말하자면 가서 실제 하나님의 성막을 짓는 곳에 가서 보니까 진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시키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것이 참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디자인을 하셔서 모세에게 가르쳐주셨는데 그래서 모세가 그 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도를 주고 하라고 그랬더니 했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하게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축복은 모세가 개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했다기보다는 이루어진 성막의 공사를 보면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오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사람도 필요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도 필요하고, 그 다음에 감화를 받아서 물질로 헌신하는 성도들도 필요하고 다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이 지어질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성막 공사에 대한 설계도를 받았을 때에 그것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주고 모세가 성막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서 보면 하나님이 명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마음속에 이 백성들을 진심으로 축복할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모세의 개인적인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는 그런 축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라크”라는 말인데 축복을 빌었다가 아닙니다. 그냥 축복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 사람들을 축복해주셔야 합니다. 대신 기도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 복을 빌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 문제가 좀 있습니다. “축”자가 빌 “축”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어느 장로회 어느 교단에서는 그 말을 없애기로 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축복이라는 말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셨다 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빌겠습니까? 그러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축복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 복을 빌 때에는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신다 이런 말은 안 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복을 비는 것은 축복이고, 하나님 복을 주시는 것은 “강복”이라고 해야지 맞습니다. 복을 내리신다. 혹은 아니면 그냥 복을 주신다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하도 쓰다가 보니까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 동료 중에 누가 ‘내가 널 축복하지’ 그러면 얼마나 건방져 보이겠습니까. 자기가 뭔데 나를 축복해. 그런데 사실 그 말의 뜻을 캐들어가 보면 내가 너를 위해서 복을 빌어주지. 그 뜻이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마.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연초에 청년들이 인사를 합니다. 목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니 그러면 그래 고맙다. 그러면 되는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러면 복을 네가 주냐. 항상 그러셨습니다. 건방지게 복을 네가 주냐. 하나님이 주시지. 그런데 사실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용어상으로는 그런데 그래도 이렇게 익숙해져있습니다. 그런데 언어에 있어서는 규칙도 문제지만 사람이 쓰면 그냥 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 캠퍼스에 보면 잔디밭이 있습니다. 그러면 항상 길 따라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제 돌아가기가 싫으니까 질러가는 것입니다. 처음 지나갈 때는 학교에서 수위가 와서 뭐라고 그러면서 거기에 줄을 매어놓습니다. 그런데 줄을 무시하고 줄을 넘어서 또 가는 것입니다. 거기다 말뚝을 박습니다. ‘잔디를 밟지 마시오.’ 그런데 며칠 지나니까 또 그것도 부러트리고 계속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그리로 길을 내는 것입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쓰다가 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과민반응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리고 그저 적당히 가면 되는 것입니다.
어째든 여기서 “모세가 축복했다”고 그럴 때 그것은 “하나님, 이스라엘을 복 주세요” 하고 빌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문에는 “바라크”입니다. 그냥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세가 복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뭔데. 모세일 뿐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축복은 하나님을 대신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집을 지어 가시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서 아주 흡족하게 여기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쫓아서 그렇게 하나 하나 엮어져 갔구나 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시면서 만족스러워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교회당은 짓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라 마지막에 지어놓은 교회당, 그 결과물 말고 지어져 가는 과정, 이 전체가 하나님이 받으신 직한 그런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그런 것을 조심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토지를 구입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차근차근 쭉 지어져서 하나님의 이 교회가 마지막 완성되는 그 단계까지, 어째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만 짓기만 하면 된다라고 하는 사업가 적인 기질을 가지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집을 짓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기집도 그렇게 지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잘 해나가야 합니다. 하나 하나 어느 과정 하나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과정들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잘 해서 그래서 마지막에 교회가 완공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교회에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결과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고 지어져 가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렇게 좋아야 합니다.
하나 하나 하나님께서 아주 구체적으로 성막을 어떻게 짓도록 구체적으로 명령을 하셨고 그 설계도에 식양을 따라서 이제 잘 숙련된 사람들이 헌신된 백성들과 함께 이것을 이끌어나갔습니다. 그것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을 보면서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축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이들에게 어떤 복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보면 그 앞부분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축복이 나오는데 어디에 있는가 하면 출애굽기 36장입니다. 지난주에 본 다음절입니다. (2절서부터 7절까지)
그러니까 제일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막을 지으면서 받았던 축복이 무엇인가 하면 넘치는 헌신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재정적으로 넘쳤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계속 사람들이 바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제 그만 바쳐라.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바치겠다고 하는데 자기가 뭔데 그만 바쳐라. 더 바쳐라 하는지, 더 바치라고 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그만 바쳐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바치는데 그만 바치라고 하니까 이것이 얼마나 지도자로서 멋있고 합리적입니까? 막 바치려고 하니까 그만. 됐다. 참 멋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았으면 아마 그렇게 못 했을 것입니다.
교회를 짓는데 100만원이 필요한데 120-150십 만원이 들어오면 다 받아 났다가 나중에 무슨 선교비로 쓰든지 아니면 교회 기구를 더 산다든지 아니면 정 안되면 모아 났다가 경상비로 쓴다든지 쓰지, 그것 뭐 늘 바치는 것도 아닌데 한번 바치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뭐 말리겠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멋있습니까? 새로운 통찰을 여기서 봅니다. 정말 멋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오늘날에 한국에 와서 목회를 했어도 참 멋있는 목사였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막 바치려고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그만, 아니 이것을 바쳐야 하는데. 됐다니까. 그렇게 합니다. 바치려면 진작 바치지. 아직 저는 그런 교회를 못 보았습니다. 건축 헌금을 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안 받습니다. 그런 교회를 못 보았습니다. 그 정도로 성도들의 넘치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움직여서 그래서 그들이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막을 짓는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깊은 감화를 받게 만드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베풀어주신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축복하시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움직여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놀랍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봅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목회자 하나를 만났는데 속이 상해서 속이 숯같이 시커멓게 탔다고 해서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교회를 짓다가 중단을 했는데 헌금을 하라고 하는데 안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교회 중직들을 불러놓고 그렇게 헌금을 하지 않고 무슨 교회를 짓는가 하고 야단을 쳤더니 또 몇 사람이 상처를 받아서 교회를 나온다 만다 하고 발칵 뒤집히고 난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그러면서 자기 가슴이 숯처럼 시커멓게 탄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웃으면서 천천히 하십시오. 헌금 안 하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헌금하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진짜 하나님의 감동 없이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거기에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세의 어떤 강요나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막 쓰고도 남을 정도로 바쳐진 이 물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쁨으로 드린 물질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재정적인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헌신을 통해서 성도들의 헌신을 통해서 이 일들을 해나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축복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번째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이 공사에서는 그런 놀라운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이렇게 돌아봐도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드리고 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놀랍게 친밀해집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누군가의 강요, 비인격적인 요구 이런 것에 의해서 물질을 드렸을 때는 그렇지가 않은데 자기가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감동을 받아서 주님께 바치고 나면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소중할 수가 없고 그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에게 정말 자기가 그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감사하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고 사는 삶이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갖다가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제도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도 구제가 꼭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우리들의 구제의 경우를 보면 어느 지체가 곤고하고 참 힘들다고 그러더라 그럴 때 우리들이 그가 알게 할 수도 있고 모르게 할 수도 있지만 어째든 우리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물질 가운데 일부를 그렇게 해서 지체에게 건네주어서 그가 그것을 통해서 도움을 받게 되었을 때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가 그를 향해서 가지고 있던 아주 추상적인 사랑이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 희생해 보고 헌신해 보는 것을 통해서 그가 정말 자기에게 소중한 존재이고 그가 사랑스럽고 그리고 진정으로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기를 바라는 그런 사모하는 마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바치는 헌신을 통해서 얻게되는 영적인 깊은 유익입니다.
그러니까 세월이 많이 흐르고 자신이 넉넉히 살면서도 가난한 지체들을 챙길 줄 모르고 그렇게 섬길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입니다.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희생을 하고 헌신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밖에 모르는가 하면 자기밖에 모릅니다. 가장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그것을 가장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러니까 이기심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자기만 알고 자기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 사도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또 요한 사도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행위로 드러나고 우리가 말로만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는, 그렇게 해서 무엇인가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도와줄 때 그때 그를 더 사랑하게 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막이 지어지는데 있어서 베풀어주셨던 이 넘치는 헌신의 축복은 재정적인 넉넉함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막이 지어지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가장 좋은 재료들로 이렇게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지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재정적인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이제 두 번째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셨는가 하면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성막을 짓는 것이 한 두 사람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희생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핀을 내놓고 패물을 내놓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헌물을 드리고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또 그 위에 재주로 헌신을 해서 그리고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도록 자신이 잘 희생해서 그것들을 가지고 실도 만들고 성막에 쓰이 여러 가지 자재들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해진 일군들이 하나님의 집을 설계도에 맞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는데 그런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헌신한 가운데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주 놀라운 신앙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지으면서 마음이 전체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최고조로 달하게 됩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그 성막 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들을 얼마나 기뻐하셨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그 성전을 짓는 가운데 마음이 전부가 하나가 되면서 물질로 성막이 지어지기는 했는데 물질을 바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주님이 주신 두 번째 주신 축복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하나님의 교회가 서는데 있어서 간절한 기도로, 혹은 물질로, 혹은 물질도 없고 기도할 많은 시간도 없어서 이제 자기가 가진 재능으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섬기면서 무엇인가 자기를 희생했던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집이 완성되었을 때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신앙의 집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막이 모두 지어졌을 때 많은 물질들이 필요했지만 물질을 바치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신앙을 놀랍게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한 가지 일을 향해서 온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 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위대한 역사에 한복판에 하나님 자신이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모두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그 성막 위에 찬란한 영광을 두르심으로서 하나님이 그 공동체를 매우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받았던 두 번째 축복이 바로 이런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어떻게 보면 천하에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집을 짓게 하시는 이 광경이 어떻게 보면 사실 유치하게 보입니다. 뭐 얼마나 하나님이 기적을 놀랍게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인데 이 세상에 있는 어느 왕궁보다 뛰어난 여호와의 집을 기적적으로 하나님께서 건설해놓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십니다. 한번도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경건한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집을 지어가도록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개서에 보면 나무를 하러 올라갑니다. 나무를 잘라 와서 하나님의 집을 다시 재건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그 눈에 보이는 교회를 짓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면서 성도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자기의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이렇게 헌신하면서 사는 그 전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지어질 성도들 자신 속에 있는 교회의 건축을 더 많이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첫 번째 재정적인 넘치는 축복,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저는 교회는 짓지 않았지만 이것이 어째든 두 번째입니다. 이리로 한번 올 때 참 혹독하게 하나님께서 불에 달구셨습니다. 고생이라고는 할 것이 없지만 하여튼 그랬습니다. 지금은 별로 안 떨립니다. 천 평이 아니라 만평을 주어도 지금은 안 떨립니다. 그런데 맨 처음 여기로 올 때 하여튼 정말 그랬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보면 다른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은 교회 생활을 하는 가운데 사실 저보다도 더 오래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입니다. 산전수전 화생방전까지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점잖게 충고를 하십니다. 교인 중에 한 30%가 교회를 떠난다 생각을 하고 그리고 하셔야 합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렇게만 하고 되면 그래도 성공적인 케이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부 교육자로 몸담고 있던 교회에서는 교회를 진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냥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먼발치에서라도 사실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지면서 30%가 떠난다고 하는 것은 말로만 들었습니다. 말로만 듣고 뭐 천명이 모였는데 교회를 지으려고 하니까 삼 백 명이 남았더라. 나중에 다시 채워지더라. 또 갔다가 다 짓고 나니까 그 다음에 다시 오더라. 뭐 별의별 이야기를 말로만 들었지 제가 직접 경험해본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진짜 그렇기는 싫은데 교회당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옮겨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렇게 30%로 하고 교회당하고 바꿀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교회를 다루실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지금보다도 훨씬 성도들이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 진짜 지금도 절박하지만 더 절박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 그래도 몇 사람은 떠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떠난 사람도 있고 또 교회당을 그렇게 화려하게 하는가 하면서 떠난 사람도 있고 몇 사람이 있지만 하여튼 어째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말할 수 없이 가슴아픈 일이었습니다. 불과 몇 사람 안 되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지만 제게는 참 가슴아픈 사건이었고 그런데 사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30%는 아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그 역사는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회를 지어져 가는 과정을 통해서 성도들의 신앙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 주위에서는 그런 간증을 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물론 케이스가 없지는 않은데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그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아름다운 성막을 짓게 하심에 있어서 그것을 지어 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넘치는 헌신 끝에 신앙의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성막을 지으면서 각양 각색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깊은 감화를 얻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너무나 기쁘게 생각하고 그들의 공동체적인 연합을 하나님이 좋아하신다 라고 하는 아주 분명한 증거를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찬란한 영광의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지어져 가는 과정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 각 사람들에게 신앙에 놀라운 부흥과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해주셨으면 참 좋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여러분들과 교회당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 질문 자체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그러면서 누가 그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교회당을 짓지 말고 그냥 이사가서 맨바닥에서 살다가 막 성도들이 도저히 못살겠다 대책을 세워라. 함성을 지를 때까지 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가 하는데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막 사람들이 꽉 차서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앉을 자리가 없어서 가장 자리에 서서 예배를 드리고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나중에 오는 사람들은 결국은 털래, 털래 돌아가도록 하기까지,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다. 대책을 세워라. 담임목사는 각성하라. 이렇게 그럴 때까지 버려 두자는 데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냥 상상으로는 가능한 일이지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 사실 뭐가 필요해요. 아니 여러분들도 시집 장가가서 애를 낳으면 애는 아직도 석 달이나 있어야 나오는데 아가 방에 가서 옷을 사다가 놓습니다. 애가 태어나서 옷 줘 옷 줘 할 때까지 놔두지. 부모는 각성하라. 팬티를 돌려다오. 그럴 때까지 놔두지. 그러니까 그것도 그냥 이야기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들 모두가 이 교회에 몸담고 있는 동안에 우리가 책임입니다. 우리들이 낳은 자녀들이 제대로 된 장소에서 교육을 받고 거기에서 그들이 신앙적으로 자라게 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될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건물에 안전에 있어서 문제가 있으면 우리 책임입니다. 우리가 안전을 확보하고 우리가 헌신해서 우리 돈으로 아이들의 교육에 시설을 확충하고 그리고 지역에 정서장애 아동들이나, 그런 계획을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거기 도저히 어떻게 의탁할 때가 없는 그런 사람들을 교회가 껴안아야 된다고 그러면 그것이 누구 책임인가 하면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고 무엇인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도움을 받고 보살핌을 받는 그런 것들을 말해주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해야될 일입니다. 필요가 소리치고 그렇기 전까지 해야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그렇게 다루십니까? 여러분들의 인생을 인도하실 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하나님 도저히 살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소리칠 때까지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십니까? 필요한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도 주시고 여러분들의 자녀가 자라면 그들을 위해서도 환경을 배려하시고 그러면서 시시때때로 여러분들을 인도하시면서 그렇게 공급해주시면서 여러분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섬기셨는데 왜 여러분들은 데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저는 8월 달만 지나가고 나면 9월 달부터 이제 시작입니다. 거의 한 두 달 동안을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서 제가 이렇게 밤잠을 잘 못 이룰 정도로 고민을 합니다. 뭘 고민하는지 아십니까? 내년 일을 가지고 고민을 합니다. 내년 1월에 교회가 어느 정도로 성장할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교육자들을 포진하고 직원들을 배치하고 교회 구도를 짜서 그래서 그 후에 들어오는 교인들이 편안하게 신앙적으로 양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인가를 9월부터 고민을 합니다. 9, 10월 두 달을 고민하고 11월에 결단을 내리고 그래서 본인들과 상의해서 12월초에 발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 하러 그렇게 합니까?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너무나 많이 모여서 사람들이 우리는 도저히 어쩔 수 없다고 그럴 때 그럼 어떻게 하나 생각하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개인적인 삶을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들 자신도 보면 전세를 살면서 3년 후에는 집을 사야지 되겠다고 적금을 붓습니다. 하도 급하면 대출을 얻어서 집을 사고 5년에 나누어서 갚아야지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소리칠 때까지 기다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 소리를 안 칠지도 모릅니다. 무슨 뜻인지 이미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그런 이기심도 있습니다. 절대 소리를 안 지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성도 없는 예배당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 제대로 성도처럼 자라지 않고 짐승처럼 자라면 그것이 동물원이지 그것이 어떻게 교회입니까? 그러니까 그런 식의 질문은 너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집이 지어져 가는 가운데 주님의 축복이 물질뿐만 아니라 각자, 각자 사람의 마음속에 신앙에 그런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주님이 너무 소중하고 고마운 것입니다.
(예화: 옛날에 처음 은혜를 받고 섬기던 교회에서 총각집사로 여러 가지의 일을 섬기는 데 교사 실이 없어서 교회 작은 자투리 공간을 수리해서 교사들이 모여 목사님을 모시고 처음 예배를 드릴 때 모인 교사들이 그 공간에서 감격하며 예배를 드렸다 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에 건축물을 성도와 바꿀 수가 있는가 하면 그것은 질문 자체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집이 지어지는 동안에 성도들이 놀랍게 신앙에 은혜를 받고 그렇게 변화를 받아서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속에서 기뻐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로 그런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년 10개월 전에 우리가 이리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사올 때 사람들의 그런 비난도 저는 받았습니다. 아니 도대체 다 모이니까 딱 한 줄이 되었습니다. 한 줄밖에 안 되는데 왜 이렇게 큰 교회당을 얻어서 그런가, 첫 달에 제가 기절할 뻔한 것이 전기 요금이 150만원, 수도 요금이 70만원, 가스비가 150만원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졸도할 정도입니다. 난 이렇게 큰 것을 원한 것이 아닌데. 어디 그렇게 입맛대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해보니까 하나님이 이리로 가라고 그래서 갔는데, 그러니까 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것은 너무 허영이다. 교인 200명이 모이는데 뭘 이렇게 -큰 교회당에 저 위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다 이리로 모여 앉으라고 해서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하는가 말하는데 나도 참 답답했습니다. 나도 참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뭐 하러 200명이 한 달에 공과금을 400만원씩 쓰고 사는가. 나도 불합리한 것은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성격이 그렇습니다. 불합리한 것은 싫어합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인도해보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신 대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가지고 사실은 말싸움이 안 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까 지금은 3년이 안 되었습니다. 지금 다들 좁다고 난리입니다. 그때 만약에 이것 한 반 만한 것, 요정도면 우리 형편에 맞다 고 그러고 갔으면 또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그럼 중간에 한번 2년 지나기 전에 한번 또 홍역을 치러야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내가 전문가적인 놀라운 식견을 가지고 미리 선견지명을 가지고 이리로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주님의 손에 떠밀려서 진짜 발로 찬 돌맹이가 개구리가 맞듯이 그렇게 어쩌다가 한번 맞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보면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서 200명 그 후에 들어온 어린아이까지 포함해서 한 12-300여명의 교인들이 여기에서 우리가 그렇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는 참 교회가 선견지명이 있다. 선견지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시간이 점점 지남에 따라서 그때 왜 이리로 왔을까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이제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는 꽤 있었습니다.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몇 명이 있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편지도 받고 그랬습니다. 목사님, 굉장히 진실하신 줄 알았는데 허영심이 가득 하시군요. 이런 것입니다. 아주 실화입니다. 제가 세월이 다 지났으니까 내 마음에 아무런 상처도 안 되니까 내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속이 상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기도해보니까 이리로 가라고 하시는데 나는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 그런 것을 내가 또 변론할 수가 있습니까? 가만히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나라도 만약에 나같이 행동했더라면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하실에서 했던 설교를 들어보시면 알지만 결코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엄청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도하는데 자꾸 이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증인이 그대로 있습니다. 제가 건축헌금을 하지 말자고 건축위원들 앞에서 내가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임대료 헌금을 하자.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해놓고 시간이 점점 지나는데 하나님이 임대료로 갈 수 없도록 길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런 저의 발언을 굉장히 사랑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어가 있었는데 끊겨서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깊은 책망을 느꼈습니다. 그 증인들이 지금 여기에 여럿이 있습니다. 하지 말고 한 사람 앞에서 4만원씩만 내자. 그래서 한 달에 한 700만원씩 걷히면 임대료 되니까 하자.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이 교회지.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 위에 제일은행 빌딩인데 그런데 못 가게 자꾸 막으시는 것입니다. 계약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리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도 참 상황이 어떨 때는 기쁘면서도 괴로웠습니다. 더군다나 첫째 달 공과금 400만원이 나왔을 때는 졸도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막 집에만 들어 누워있으면 환청이 들리는 것입니다. 무슨 환청이 들리는 지 아십니까? 졸졸졸 물 내려가는 소리, 그러면 밤중에 내려와서 다 돌아다니면 진짜 물이 새고 있습니다. 망가지고 이런 것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도 사람이 좀스럽고 그릇이 코딱지만 하니까 하나님이 하도 답답하시니까 저 머리에서 무엇이 나오랴 그리고 하나님이 밀어서 여기에 온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과정 3년을 통해서 제가 많이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처음에는 황당했습니다. 와서 전 교인이 모여서 기도회를 하는데 여기 요만큼 모여서 기도회를 했습니다. 교인들이 쳐다보면서 기쁘면서도 한숨을 쉬는 것입니다. 목사님, 여기 언제 사람이 찰까요? 저 위에는 의자를 사놓지 말지요. 실화입니다. 그래서 진짜 참 그랬습니다. 정말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면서 아! 왜 이리로 인도하셨는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1년 반이 지나니까 여기 저기서 좁다고 난리였습니다. 지금은 아예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안 합니다. 곧 간다고 하니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예비하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에 그런 것들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했다고는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하도 지도자가 그릇이 좀탱이만 하고 뭔가 이렇게 판단이나 사고나 이런 것들이 콩알만해서 그릇이 안 되니까 하나님이 확 밀어 넣으셔서 정신이 번쩍 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고도 또 그것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도 그 습관이 있어서- 화장실 불 좀 켜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면서 매일 끕니다. 습관이 되어서 어느 날 밤중에 확 끄는데 여자 화장실에서 누가 ‘으악!’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습관이 되어서. 하도 불을 키는 것만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아주 죽을 지경입니다. 수없이 끕니다. 스위치 반은 내 손에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이 다 깨트리셨습니다. 공과금이 정신없이 나오니까 겁나는 것입니다. 전화 요금이 100-120만원이 나오고, 그래서 고민하고 그랬더니 하나님이 제 마음속에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닌데. 기도하는데 어느 날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고 기도하는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확 와서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야! 좀탱아, 하나님의 교회가 네가 불하나 끄는 것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가 운영이 되냐. 물론 낭비를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왜 그런가. 내 교회는 내가 이끌어간다. 네가 물소리 하나에 그렇게 잠을 못 이루고 환청이 들릴 정도면 성도들의 마음에 흐르는 눈물의 소리나 들어라. 그리고 목회 잘해라. 그럼 내가 책임진다. 어느 한순간에 딱 한번 그것이 확 밀려왔습니다. 그때 제가 깊이 회개했습니다. 정말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이 아니구나.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유로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후로 뭐 변한 것은 없는데 자유로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미리미리 그렇게 준비하면서 가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제 여러분께 내가 미리 이야기를 하는데 교회당을 다 지어놓고 가면 야! 세상에 요만한 사람들을 위해서 어째 이렇게 큰 것을 했대, 그럴지도 모릅니다.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예전에 저 같은 사람이 여러분 속에 또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도 있을 수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크니까 칸을 막아서 세를 좀 주자는 사람도 있었고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면서 우리가 그 동안 그렇게 3년 전에 그렇게 희생을 하고 고생을 해서 그렇게 했더니 그 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교회 건축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마음이 갈리지 않고 신앙생활에 전심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 받으면서 이제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 남아 있고 소수의 사람들은 또 우리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가든지 간에 자기를 새롭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생각합니다. 올라오면서도 또 그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당 유치원이 나가고 그곳을 수리하는데 한 500만원이 들어갔습니다. 집기를 사놓는 것까지 한 700만원이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놓고도 어느 지체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에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처음에 목사님이 거기에 돈을 쓸 때 내가 너무 미웠다고 했습니다. 왜 이사를 간다고 하면서 왜 또 거기에 돈을 들이나. 그렇게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십시오. 지금 벌써 작년 11월인가 해서 벌써 지금 9개월인가 되었는데 1년 이상 쓰게끔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거기서 받은 성도들의 은혜와 어린아이들이 거기서 교육을 받고 성도들이 거기에서 지내고 평일 날도 오면 방이 환하게 불이 켜져서 밤 11시까지 성경을 배우고 상담을 하고 그렇게 하면서 성도들이 목양을 받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벌써 거기서 은혜 받고 성도들이 바친 그 헌금은 본전을 뽑고도 남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만, 그런 것하고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가 억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아십니다. 억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쓸모 없는 것 같은 교회 시설에 돈을 들이고 막 이렇게 한 것이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영혼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시켰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입니다. 그런 모든 일들이 결국은 우리의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신앙의 변화를 가져와서 그래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함께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되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나도 합리적인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 논리를 넘어설 수 있는 그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나온 김에 내가 하나 더 하겠습니다. 다 지나간 이야기니까 마음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내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부분적으로는 목양에 구조를 회복해야 된다라고 하는 그 문제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언젠가 한번 세상의 교회에서 전도사에게 차를 한 대씩 주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실제로 제가 받았던 항의입니다. 사실입니다. 없습니다. 부 목사님들에게 안 된 이야기지만 부 목사님들도 차를 안 주는 교회 여럿이 있습니다. 봉고 큰 것 하나 사놓고, 아니 그 예가 지난번 우리 교회에 계셨던 장 목사님입니다. 그분이 계셨던 교회가 1000여명이 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에 올 때 폭격 맞은 것 같은 봉고를 끌고 매일 오셨습니다. 부 목사인데. 그렇게 크고 돈이 많은 교회들도 그렇게 알뜰하게 절약을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전도사에게 좋은 차는 아니지만 빨간 우편 차, 그것도 목사가 한꺼번에 네 대나 뽑았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키를 다 나누어줬더니 몇몇 사람들이 굉장히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도 전에게 들려왔습니다. 그런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자가용이 없는 교인들이 많은데, 사실 속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어디에 대고 그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방송에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대자보를 붙이겠습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식의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다른 교회가 어떻게 하든지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전도사들이 놀러 다닙니까? 그 차를 가지고 부인 태우고 무슨 드라이브를 합니까? 빨간 차를 타고 무슨 드라이브입니까? 그 차를 가지고 길이 멀다하고 심방하고 그 차를 가지고 지체들을 만나고 그 차를 가지고 전도하러 나가고 그렇게 하면서 사역을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밤늦게 11시 12시에도 대학교 캠퍼스 가서 만나고 골목골목 다니면서 그렇게 하면서 지체들을 권면하고 도망간 놈들 잡아오고 그렇게 해서 목양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럼 교인들이 자가용이 없는데, 그렇지 맞지. 그렇지만 그것은 개인 자가용으로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의 논리를 가지고 말을 하면 그것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제가 마음이 상했습니다. 설교를 하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상했습니다. 어떻게 생각이 그 정도인지. 그 이야기를 하려면 강의를 해야지 되는데 어떻게 사소로운 것 한 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특강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을 단순한 하나의 어떤 물질주의적인 그 태도, 가치 이런 식으로의 해석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기름 어떻게 하냐고 해서 마음대로 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2-3년 내에 하도 심방을 다녀서 거덜을 내서 차를 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런 식의 사고가 안 나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성도들에게 보편적인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신앙의 놀라운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있어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이 자기의 성막을 지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그 축복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재정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신앙의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신앙이 좋아지면 교회가 하나가 됩니다. 언제든지 양떼들이 풍부한 꼴을 먹고 은혜를 받으면서 진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변화되면 둘이 서로 사랑하지 말라고 그래도 너무 사랑합니다. 예배가 끝나도 사람들이 안 갑니다. 왜 성도의 교제가 너무 아름다우니까. 지하실에 있을 때 오죽했으면 내가 한참 있다가 안 가면 성도들이 가야지 내가 가니까 등을 떠밀었습니다. 가라 이제 좀 가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으면 성도들이 사랑스럽고 하나가 됩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말씀에 더 이상 감화를 못 받고 교회가 차갑게 식어지면 성도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마음이 막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마음에 안식과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소중한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참된 변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제 분명하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저에게 그런 식의 질문을 하지 마십시오. 성도가 귀한가, 교회당이 귀한가. 교회당 하나도 안 귀합니다. 내가 무슨 잘 지어진 교회당에서 설교를 못 해서 무슨 한이 맺힌 사람입니까? 우리 할아버지 중에서 무슨 천막 교회에서 설교하다가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교인이 모이지 않으면 저는 여기에 만족합니다. 얼마나 좋은데. 구석구석 우리의 손때가 다 묻은 곳인데. 정말 저의 마음은 그냥 여기서 딱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오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번호표를 나누어줘서 한 사람이 나가면 한 사람이 데리고 오고 싶습니다. 진짜, 그런데 어떻게 목사가 오지 마시오. 그럴 수가 있습니까? 만 천하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그랬더니 교회를 못 들어오게 한다. 말이 됩니까? 열린 교회인데. 누가 그랬습니다. 밤11시에 기도를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문이 열려서 굉장히 감동을 하면서 목사님, 진짜 열린 교회입니다. 그래서 제가 12시에는 닫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교회가 더 커질수록 더 많은 희생을 해야 합니다.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냥 생각 없이 교회에 와서 등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믿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더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에 생각 없이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헌신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여러분들의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가 커지면서 이제 기틀이 잡히는구나. 무슨 놈의 기틀이 잡힙니까? 아무 생각이 없이 와서 교회당 크니까 어디 숨어서 신앙생활 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등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는데 그것이 기틀이 잡히는 것입니까? 안수집사가 세워지고 장로들이 세워지면 그것이 기틀이 잡히는 것입니까? 그런 기틀은 대부분 안 좋은 의미에서의 기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런 현실들을 우리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더 많이 희생해야지 됩니다. 모릅니다. 가서 지금 짓는 예배당이 2년 뒤에 사람들이 꽉 차서 그러기를 열렬하게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그런 소원은 제게 없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뭐 누가 가끔 개인적으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개척 교회를 할 때는 고생스러웠는데 지금은 많이 편해졌다고 하는데 하나도 안 편합니다. 짓고 인덕원으로 이사를 가보십시오. 십자가 짐 같은 고생입니다. 여기도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데 거기에 가서 교회 하얗게 예쁘게 지어놓으면 여기는 빨간 지붕을 보고 왔다는 사람이 있지만 거기에는 벽보고 왔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종 탑보고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신문보고 왔다는 사람, 무슨 전도대원들을 보고 왔다는 사람, 소문 듣고 왔다는 사람 수없이 올 것인데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지 그게 무슨 영광이고 그게 무슨 편한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목회가 뭔지를 알고 있습니까? 지금도 진실한 저의 소원은 순회 설교자로 살고 싶은 것이 제 소망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2년 뒤에라도 사람들이 곽 차서 그렇게 해서 도저히 꿈적일 수 없다. 그러면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뭐 해야지 됩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질적인 것을 담는 그릇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할까요?
어떤 교회에서는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전도를 하라는 설교를 하라는 말을 전혀 안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왜 안 하는가 물었더니 지금 오는 사람도 감당할 수 없는데 전도하라고 하면 그 결과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하고, 사실 그것도 말이 됩니까? 말이 안됩니다. 전도는 전도고 교회당이 좁은 것은 좁은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계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교회라고 하는 그릇의 담긴 사람이 신앙의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집도 지어지고 교회도 성장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의 신앙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데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가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슴이 철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철의 동산을 이룬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돌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돌의 동산을 이룬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것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온 세상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게 할 때 댐을 쌓아서 그물이 못 들어오게 막는 역할을 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교회 역사를 보면 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런 위험한 속성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머리가 거꾸로 솟습니다. 정말 이렇게 가도 되는 건가 하는 두려움과 오그라드는 듯한 그런 것이 일주일에도 몇 번씩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고대해야 할 것은 목마르게 고대해야 할 것은 신앙의 축복입니다. 교회가 고난을 받으면 고난도 성도들의 신앙에 복 주시는 도구가 되고, 교회가 건축을 하면 그 건축이 성도들에게 신앙의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계기가 되고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 그 핍박 때문에 계기가 되어서 성도들의 신앙에 축복을 받고 그런 계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우면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재정위원의 집사들이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어려운 일이 생기고 곤고한 지체들을 돌보다가 수고하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그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신앙이 좋아지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신앙이 좀 부족해도 직분을 맡겨주면 힘들게 그것을 감당하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새사람이 되고 그래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루어지리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님이 하나님의 집을 지으시는 과정을 통해서 그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물질을 바치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와중에서 하나님이 오히려 위로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그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일에 있어서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보태는 것은 자신의 신앙에 갱신을 위해서도 너무나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신앙의 축복이 넘쳐 나서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에 역사들을 한번 회고해보십시오. 진짜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에 축복을 해주실 때에는 이상하게 고난도 도구가 되었고 시련도 도구가 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것도 진짜 하나님과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부유했을 때 하나님을 모르고 그렇게 까불고 살다가 다 졸딱 망하고 가난해지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으면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더 많이 깨닫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시작하는데 막 전부다 굉장한 사람들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옛날에 굉장했던 사람들,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했던 사람들,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다녔던 사람들, 지금은 백수 그래서 언젠가 누가 그랬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도 현직을 보내주십시오. 그래서 요즘은 현직도 많이 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것도 우리에게 너무나 감사한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사방을 돌아보아도 제가 제일 부자였습니다. 목사가 제일 부자입니다. 그러니까 그럴 정도로 다 곤고하고 어려운 세월을 보냈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전해주시는 귀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사업에 망하고 시련을 당하고 막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것이 주님을 만나는 계기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회사가, 직장이 막 어려움 속에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그런 위기를 만나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 모두 죽는다고 난리 칠 때 그때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회사가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면서 여건이 바뀌고 정말 마음이 타는 것 같았을 때 주님을 의지하면서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평안한 가운데는 도저히 그런 것을 생각도 못했던 사람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매달리면서 주님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그런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각 사람 각 사람에게 신앙의 놀라운 부흥을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가 지어지는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어렵게 하나님을 의지해서 신앙의 축복을 받고 넉넉할 때는 넉넉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축복을 받고 하나님 앞에 목표를 세워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자기의 모습을 보고 자기의 모습을 보고 기도하다가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변화 받고 새로워지는 이런 놀라운 간증들이 생겨나서 정말 신앙의 축복이 우리에게 풍성해진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저는 요즘 진짜 편안합니다. 진짜 염려가 없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이것이 배짱인지 믿음인지 아직도 판단이 안 되지만 그래도 하여튼 마음이 편안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재정적으로 어렵다고 하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려나보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해 가시는 것이니까 어째든 바라는 것은 넉넉하든지 부족하든지 어려움을 만나든지 그런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기만 한다면 그러면 비록 우리의 기대대로 우리의 계획대로 그렇게 화려하게 아름답게 지어진 성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얼마나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축복이 무엇인가 하면 40장 1절을 주목해보십시오.“여호와께서 일러 가라사대”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성막을 짓기 전에 모세가 어떤 상태였습니까?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서 내려올 때 하나님을 대면하고 와서 얼굴에 광채가 찬란하게 빛날 때에 그렇게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건축이 거의 끝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모세와 생생하게 교통하는 지도자로서의 영적인 신령함에 손상을 안 입은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위의 동료들이 염려를 많이 합니다. 당신 잘못하다가 죽는다. 그 죽는다는 의미는 힘들어서 벽돌에 깔려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고갈된다는 뜻입니다. 돈 때문에 막 고민하고 그 다음에 심지어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교회에서 성도들의 마음이 갈라져서 대판거리 싸우고 그런 동안에 기도고 설교 준비고 뭐고 다 물 건너가고 막 그냥 온갖 마음이 빼앗겨서 오그라들다가 나중에는 쉽게 이야기를 하면 설교자로서의 신령함을 다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진짜 사실입니다. 그런 부담감이나 중압감이 굉장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주에도 결심을 했는데 나는 끝까지 웃으면서 간다. 아주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그리고 나는 웃으면서 간다. 그리고 내 영혼과 교회당을 바꾸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오면 난 언제든지 교회당을 버리고 내 영혼을 택한다. 내가 살아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좀 섭섭하지요.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모세가 처음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모두 알고 있는 이 모세가 얼마나 많은 신경을 여기 썼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현대의 건축물이나 발달한 문명에서 보면 성막을 보면서 웃긴다고 그럴지 모르지만 그 벌판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그렇게 바치는 것을 가지고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술을 동원해서 어째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일호에 착착도 없이 정확하게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실을 꼴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금붙이를 녹일 수 있겠어요. 그것을 두들겨서 장신구를 만들 줄 알겠습니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워낙 유능하니까. 그렇지만 아마 왕궁에 살면서 그런 험한 일을 할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다 맡겼는데 이것이 재대로 될 것인가, 얼마나 노심초사했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경험해본 사람만 이 성경이 가슴에 다가옵니다. 그랬는데 그는 일에 마음을 뺏기는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에 넘쳤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의 세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는 들을 수 있는 신령한 영적 교통에 관계를 그 바쁜 와중 속에서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집의 일을 아무렇게나 팽개쳤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목사가 아니면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교회당을 짓다가 빚에 몰리면 감옥에 가는 사람은 장로님도 아니고 건축위원장도 아니고 집사님들도 아닙니다. 목사가 가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도 감옥에 갔습니다. 그리고 막 사기꾼이라고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이빨이 두 대나 부러졌다고 하니까 그것이 가능합니다. 신경을 안 쓰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경을 쓰는데 신경을 쓰고 그 일이 잘되기를 지혜롭게 감독하고 돌보면서도 영혼의 손상을 입지 않은 것입니다. 심령에,
처음 설계도를 받아서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나 완공되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그 성막 위를 두를 때나 시종일관 모세는 모세일 뿐이었습니다. 변한 것이 아닙니다. 성막을 아름답게 만들어놓고 모세가 아 이제 이 정도면 내가 할 일을 했지.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저 한 과정에 불과했고 주님이 시키시는 일이니까 수종드는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대로 되었는가를 감독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령한 세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예언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할 대목입니다.
그래서 교회당을 덩그렇게 지어놓고 그 사이에 목사는 일에 치이고 막 죽도록 고생해서 다 머리고 가슴이고 다 빨려나가서 에너지고 뭐고 다 나가서 그리고 마지막에 그냥 껍데기만 남아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되고 그렇게 해서 나중에 즉시 느끼는 것입니다. 옛날 그 사람이 아니다. 변했다. 교회가 커져서 그런가. 교회가 커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를 짓다가 하도 고생을 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진실하다, 정직하다, 용기 있다, 뭐 이런 좋은 이야기들은 자기가 자기일 때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가 실제로 말씀에 감화나 은혜 이런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 다 메마른 사람이 되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되고 나면 그러면 뭐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조심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집회를 안 나가고 이런 것에 대해서 가책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증인들도 있지만 초창기에는 제가 여름 내내 거의 집에 안 붙어있을 정도로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집회를 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섬긴다고 그러면서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거절을 할 때는 항상 죄책감이 드는 것입니다. 못 갑니다. 그 동안에 너 뭐 할건데. 내가 양심에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에서 식구들과 밥 먹고 책 좀 보고 그리고 왔다갔다하고 그렇지. 그것이 뭐냐. 그래도 말씀을 듣겠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그 시간보다 보람 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 때문에 거절을 못했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많아도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들이 불러다가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한국 교회 안에서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너무 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몇몇이 누가 잘한다더라. 목회를 잘한다더라. 말씀이 은혜롭다고 하더라. 그러면 집중적으로 달려들어서 그 사람을 써먹으려고 그런 것입니다. 말로는 좋은 이야기를 하면서 불러가지만 결국은 그런 것입니다. 누가 뭐 좋다고 하더라 하면 빨대들고 모두 모여서 꽂아서 막 빠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 빨고 나서 탈진하고 나서 이제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으면 발로 탁 차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도 다시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상품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작품과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97년도에 아주 중대한 마음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뜻을 세우고 안 나갔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잘했다고 칭찬만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뭔가 아직까지도 내 마음에 정리되지 않은 미숙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제 판단에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정말 사람들이 무엇을 내게 원하든지 그런 것을 초연하게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의 평가나 그 다음에 명성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초연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교회를 그렇게 힘들여서 다 지어놓고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할 때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세계를 고갈되지 않고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 유지하는 그런 축복을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신 그 축복은 또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축복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마르지 않는 감화력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어버이로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나가고 마지막에 자신의 임무를 모두 완수하고 그리고 자기의 남은 지도권을 이제 여호수아에게 넘겨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이런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정말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저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관리하면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교회당을 덩그러니 지어놓고 마지막에는 껍데기만 남아서 성도들에게도 버림을 받는 그런 목회자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교회당과 내 자신의 영혼에 어떤 것과 바꿀래 하면 언제든지 교회를 버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기도를 많이 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여기에 보면 칭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지혜로웠던 사람들, 브사렐과 오홀리압 곧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신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정말 모세가 신경을 안 써도 되리만큼 탁월하게 자기의 일들을 잘 해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신령해도 결국은 사람에 불과한데 그런 가운데서 이 큰 역사를 이루면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잘 유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그런 도움을 끼쳐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것을 저의 개인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몇 달 후에 입당을 할 것입니다. 어째든 갈 것입니다. 입당을 할 때 어느 한사람도 교회를 짓는다는 이유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심령에 상처를 받아서 교회를 떠난 사람이 없고 오히려 교회가 지어지는 가운데 신앙의 놀라운 축복을 받고 지금은 재정적으로 모자라고 어려운 것 같아서 실무자들이 노심초사하지만 마지막에 결산을 하고 나면 하나님의 축복이 정말 놀라웠다고 말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경제적으로도 복을 주시고, 예배당을 지을 때는 목사님이 피죽도 못 먹은 사람 같더니 이상하게 그렇게 힘들게 교회를 다 짓고 나더니 영적으로 펄펄 나른다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될 때에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교회 건축이 아니겠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그런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5.화평과 쉼으로 지어지는 성전①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22:8)
사실은 출애굽기에서 무엇으로 교회가 지어지는가 다 마쳤습니다만 다음 주일에 제가 주일을 비우고 그리고 보니까 한 주가 떠서 마침 역대기를 읽는 가운데 아주 정말 출애굽기에 있는 말씀은 아니지만 너무나 귀한 말씀이 여기에 있어서 오늘 이것을 설교함으로서 지난번에 무엇으로 성전이 지어지는가, 예배당이 지어지는가를 한번 더 보태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평소에 아마 여러분들도 이 구절에 대해서 적절한 해석을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아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은 다윗의 어떤 유언 적인 권고라고 그럴까 이런 내용들로 이루어져있는 장면입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관심이 있는 것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 비슷하게 남기는 가운데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내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다. 왜 나는 백향목으로 잘 지은 집에 거하고 하나님의 궤가 그런 누추한 곳에 계신 것이 안타까워서 성전을 지으려고 했는데, 맨 처음에는 나단 선지자도 참 좋은 일이라고 그렇게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이 직접 그에게 알려주시는데 하지 말아라. 그것을 여기서 회상을 하는 것입니다. 회고를 하면서 예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넌 피를 많이 흘렸다. 전쟁을 많이 했고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너는 하나님 앞에 성전을 지어서 바칠 수가 없다. 네 아들에게서 내가 성전을 받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참 하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용납하고 받아들이기가 쉬웠을까요, 힘들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왜냐하면 다윗이 군인이라 전쟁을 하면 반드시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 사람이 안 죽고 어떻게 전쟁이 완성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다윗이 이 전쟁을 사실 누구의 이름을 위해서 전쟁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윗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해야지 되겠다든지 뭐 이런 식민지를 만들어야지 되겠다는 이런 정복의 야욕에 불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전쟁에서 사람을 많이 죽여서 이겼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그 이김을 누가 주셨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고 그리고 이제 와서 성전을 지어서 바치겠다고 했더니 피를 많이 흘렸다, 너는 전쟁을 많이 했다. 하나님은 여기서 한마디로 애만 사람을 네가 많이 죽였다. 무고한 사람을 많이 학살했기 때문에 너는 전을 지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피를 많이 흘렸다. 전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사실 무슨 다윗의 취미가 전쟁인가, 특기가 살인인가. 그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를 군인으로, 국가의 지도자로 불러주셔서 끊임없는 전쟁에 나가게 하셨고 그것을 승리로 이끌어주시는 과정에서 많은 이방 백성들을 죽게 하고 승리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일생을 살아왔는데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다윗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는 그럼 무엇인가 분명히 여기에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을 해보고 또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말씀을 받았고 다윗이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이렇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피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을 우리야의 피라고 봅니다. 그래서 밧세바가 범죄하고 그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피 때문에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하셨을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보듯이 전쟁도 ‘복수’입니다. 많은 전쟁입니다. 이것은 그런 특수한 정황에서 우리야를 죽인 특정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한 범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사람들을 죽인 그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전쟁은 하나님이 주신 전쟁이고 주님이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하시고 대적을 꺾어서 이기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전쟁을 했는데 왜 안 된다고 하는 것인가. 이것이 오늘 궁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이 이제 그 다음에 나옵니다. 무엇인가 하면 너는 못 짓는다. 그런데 네 아들이 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솔로몬은 우리가 다 압니다. 무슨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평강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평강’은 하도 설교를 했으니까 평강이 히브리말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기서는 샬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번 성경을 보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 아들이 내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이라”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어디가 틀린가. “보라” 이렇게 나옵니다. 이렇게 장엄한 사건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보라 한 아들이 너로부터 나올 것인데 그 사람은 될 것이다” 뭐가 되는가 하면 여기에는 평강의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메누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쉰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노아의 방주가 바다에 떠다니다가 뭍에 딱 다서 멈춥니다. 그런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쉰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보라 한 아들이 너로부터 태어날 것인데 그는 쉼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를 위하여 그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를 위하여 쉼이 있게 하리라” 어디로부터 ‘미샤비뷰’ 모든 사면으로부터 그렇게 쉬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샬로모’ 솔로몬이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샬롬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무엇이라고 번역을 했는가 하면 ‘평안’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런 것은 사람을 좀 헷갈리게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것을 바꾸었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거기 평안에 동그라미를 쳐놓으십시오. 그것이 샬롬입니다. 그 다음에 '안정'입니다. ‘쉐케트’라는 단어인데 안정입니다. 흔들림이 없는 것, 그런 것입니다. 그 샬롬과 그리고 쉐케트, 곧 평강과 안정을 내가 주리라. 누구에게, 이스라엘에게 줄 것이다. 언제, ‘베야마우’ ‘그의 해’ ‘그의 모든 연수들 안에’ ‘그의 생전에’ 그렇게 됩니다. ‘그의 살아 있는 동안에’ 혹은 ‘그가 제위 하는 동안에 이스라엘 위에 내가 샬롬과 쉐케트, 평강과 안정을 내가 주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럼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됩니다. 그럼 논리가 무엇입니까? 너는 안 된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된다. 왜 그 사람은 쉼의 사람이기 때문에, 평화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어서 이렇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복잡한 말씀을 하시면서 명확하지 않게 다윗을 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헌신된 이 사람을 밀고 그리고 솔로몬에게서 굳이 성전을 받고 싶어하시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한 구절 더 찾아보면 좀더 명확해지리라 봅니다. 수고스럽지만, 열왕기상 6장 7절입니다. 읽겠습니다. “이 전을 건축할 때에 돌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음으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그러니까 이제 우선 지금 읽은 것을 해석을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성전을 짓는데 돌이 들어갔습니다. 돌이 들어갔는데 이 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의 이야기니까 사실 과학이 발달이 되었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을 것인데 그러면 돌을 갖다가 공사장에 갖다가 놓고 그것을 필요한 대로 잘라서 두들겨서 써서 이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사일텐데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정확하게 치수를 재서 돌 뜨는 곳에서 돌을 필요한 모양대로 완벽하게 만들어서 그것을 갖다가 성전에 와서 쌓고 붙이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쌓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 성전을 짓는 가운데 돌을 깎는 소리나 그 다음에 철 연장이 부딪히는 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성전을 건축을 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면 이쪽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에게서 성전을 안 받으시고 솔로몬에게 성전을 받을텐데 그 사람은 쉼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이 성전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제일먼저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실 때 그 성막을 치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을 칠 때가 언제인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한 나라를 이룰 때입니다. 한 국가, 신정국가를 이룰 때입니다. 그러면 옛날에 애굽 시절에는 어떤가, 그것은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민족이 그냥 노예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애굽을 탈출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거기서 노예 생활을 하던 다른 족속들까지 묻어서 쫓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홍해를 건넌 다음에 시내반도로 들어가게 되고 그 시나위 반도가 있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고 그리고 그 율법을 전수 받는 가운데 거기 성막의 모형이 나옵니다. 그 율법을 받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정식으로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삼 요소가 무엇입니까? 영토, 국민, 주권입니다. 국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은 백성들이고, 그 다음에 주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는 신정국가입니다. 왕이 없이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고, 그 다음에 영토는 어디에 있습니까? 가나안 사람이 들으면 기가 막히지만 하여튼 그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영토로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형성이 되면서 그 나라 전체가 국가 교회입니다. 국가+교회입니다. 국가는 곧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국가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진을 친 한복판에 그때와 때를 맞추어서 똑같이 시작이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막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하신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렇게 모여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의 고백 속에 모여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둘러서 모임으로서 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큰 우주적인 교회의 백성들이 구성되는 것처럼 이렇게 성막으로 모여지게 된 이것이 바로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대한 하나의 상징, 예표입니다. 그 성전과 함께 역사가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끝나면서 성전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성전이 재건이 있고 역사가 되풀이되면서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오시는 것입니다. 오셔서 그 다음에 이제 옛날에 이 성막, 그리고 나중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모이던 이것이 이제 의미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새로운 성막이 되시는데 그 성전, 혹은 성막으로 오셔서 사람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성막 주위에 진을 치면서 한 백성들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막에서 일어나는 일,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회막’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미팅 플레이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불렀습니다.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렇게 오셔서 이 세상에 계시는데 그 그리스도께로 들어오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라고 하는,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살아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 예수님 시대 때 그 유대인들이 크게 혼동하고 오해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구약의 제도와 그리고 성막의 이런 모든 제도들이 결국은 이 세상에 오시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바라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분이 오시고 나면 이제 그 성막이 가지고 있던 희미한 의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고 실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붙들고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잡고 그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전에는 성전과 성막을 중심으로 모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성전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면서 진정한 신자의 길을 걸어가는 이것이 참된 신앙인데 그것을 사람들이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가 그 다음에 부활 승천하십니다. 그때를 기점으로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가 생겨나게 되는데 예수님은 안 계시지만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자체가 예수님은 아니지만 이전에 예수님이 자신의 인격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모으시고 그리고 영적으로 그 교회 한복판에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인격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만남에서 승복된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이 모이면서 교회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은 개 교회이기도 하고 영적으로 보면 그런 모든 교회들이 모여서 우주적으로 커다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한복판에는 예수님께서 계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오셔서 그들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이 교회 시대도 모두 끝나고 주님이 이 세상을 모두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데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 가운데 계셨다는 그 부분을 희랍어 동사에 보면 ‘에스케노센’이라는 단어인데 ‘장막을 친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텐트 치는 사람으로서 아주 잘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후에 거기에서도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함께 계신 것으로 표현을 합니다. 이처럼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실 것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이 교회 성장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지향하고 있는 예수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분은 특징이 무엇인가, 평화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메시아는 이런 식의 평화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에 압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낼 수 잇는 아주 초인적인 사람으로서 뭔가 신비의 능력을 가지고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을 모두 자기 안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할 성전의 궁극적인 성취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사시면서도 모함과 논쟁, 그리고 죽음의 위협을 모두 당하셨지만 단 한번도 무력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단지 예수님은 평화를 사랑하시는 평화주의자였다 라고 해석을 하는 것은 곤란한 것입니다. 메시아는 바로 그렇게 평화를 이룰 사람으로 이 세상에 와야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 여기에서 나타나는 이것,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어서 바치는데 다윗은 비록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전쟁에 나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승리를 쟁취했지만 그러나 이렇게 피가 많이 흘린 사람의 그 손으로 짓는 성전이 그렇게 평화의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구세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우리의 완전한 그 평화를 위해서 이 세상에 평화의 사람으로 올 것이니까 그를 예표 할 이 성전도 평화의 사람에 의해서 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다윗이 성공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시니라” 그랬는데, 어디든지 갔을 것 아닙니까, 전쟁을 하기 위해, 그러니까 이김은 하나님께서 주셨지만 사실 진정한 태평성대는 다윗의 시대 때 누렸다기보다는 전쟁이 없었던 솔로몬의 시대에 다윗이 일구어놓은 정복과 그 전쟁에서의 승리의 열매를 누린 세대는 솔로몬의 세대가 누렸습니다. 그 솔로몬이 히브리말로 ‘솔로모’인데 그것도 ‘샬롬’이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뭔가 분명하게 이런 일들을 이미 계획하셨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비록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전쟁에 참여해서 그래서 승리했지만 그러나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지 않고 솔로몬을 사용하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깊이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따라서 다윗이 피를 흘렸다고 하는 전쟁의 경력이 다윗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하게 살았던 모든 삶을 무효로 만드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고 이 전쟁이 어떤 야욕에 불타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전쟁이었다 라는 점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충성되게 싸웠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진실한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탁월한 헌신을 입증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러면서 다윗의 어떤 결함이 있기보다는 다윗의 문제가 있고 결격 사유가 있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다기보다는 이제 최초로 지어지는 이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평화이기 때문에 이 성전을 짓는 사람은 물론 짓는 과정도 평화여야 한다라고 하는 것에 하나님께서 집착하신 것은 아주 자연스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을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택하셔서 이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솔로몬보다는 사실은 성전을 지을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윗이 거의 완벽하게 해놓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저는 직접 조사를 안 해봤습니다만 어느 목사님이 한번 자기가 계산해봤다면서 쭉 풀어서 말씀하시는데 금이 2.5톤 트럭으로 80대라고 했습니다. 한 대씩 가지고 있으니까 전혀 놀랍지 않은가 봅니다. 교회 질 때 그것 좀 내십시오. 2.5톤 트럭으로 80대를 돈으로 환산하면 90조원 정도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은이 2.5톤 트럭으로 300대 정도, 그것은 가격이 얼마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동, 철 이런 것은 계산해보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금이 90조원 정도 들어갔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쳐들어오면 제일먼저 노리는 것이 어디였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거기는 금 덩어리입니다. 가서 그것을 뜯어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전쟁이 나서 뭔가 적군을 달래고 화해를 할라치면 예루살렘의 성전의 금을 뜯어다가 뇌물로 바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어마어마한 헌신으로 준비를 다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솔로몬이 그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몇 가지 아주 배우게 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교회를 짓는 사람들, 일군들이 평화의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지도력이 모자랐겠습니까, 아니면 모아둔 재물이 모자랐겠습니까, 아니면 기술자를 동원할 수가 없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많이 흘린 다윗이 그 성전을 짓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이런 선교 적인 효과하고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전쟁을 하고 난국을 치르면서 쉼이 없는 역사적 상황을 이끌고 갔던 사람들은 항상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 누구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우리 나라의 일제시대로부터 시작해서 근대의 역사를 보더라도 한 인물에 대해서 완전히 엇갈린 평가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푼 나와 같은 삶을 살았는데 한쪽에서는 그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그 사람이 죄 없는 사람을 수없이 죽였다고 그렇게 나옵니다. 항상 이렇게 쉼이 없는 역사적인 상황을 이끌어가던 지도자는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정확하게 한 몸에 존경을 받기는 힘든 것입니다. 그것은 평화로울 때 나타나는 것이지 난국에서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든다면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다윗을 보면 다윗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의 안 나옵니다. 다윗은 아침에도 우리가 봤지만 그렇게 목자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정권을 쟁취하겠다고 일어섰을 때 그 소외되고 버림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그 신앙의 인격 안에서 쉼을 얻으면서 그 품으로 들어와서 다윗을 도우면서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다윗의 어떤 문제가 있어서 대적들이 많았고 그런 이야기들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거기에 다윗의 수하에 있던 장수나 군인들이 배신하는 그런 이야기는 정략적이니까 그것은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면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도망을 갈 때 시므온 같은 사람들이 다윗을 모욕하면서 욕하면서 장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무슨 철천지한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울의 집안을 저 친구가 말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다윗이 언제 왕이 되겠다고 그랬어, 아니면 무슨 사울을 보면서 다윗은 평생 라이벌 의식을 느낀 사람이 아닙니다. 사울이 혼자 느꼈지. 그러다가 죽었지. 다윗은 그런 것을 보면서 무슨 스트레스를 받거나 경쟁의식을 느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를 갈고 다윗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20장에 보면 나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족속들과 전쟁을 하면서 수많은 나라를 복속시키고 노예로 만들거나 식민지로 만들어서 나아가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윗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그 사람에게 짓밟혀서 남편과 임금을 잃어버린 나라의 백성들이 다윗의 통치권에 대해서 복종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피를 흘린 사람인데, 그가 성전을 지을 때 사람들이 그 성전을 보면서 그 피 흘린 다윗을 생각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다윗이 이 사람도 만족시키고 하나님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 말고 솔로몬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외를 지어야 한다라는 특수한 상황이 특수 윤리를 만들어내서는 안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예화: 선배 목사님이 시무 하시는 교회에 건축을 하기 위해 시작하니까 700명이 모이던 교인들 이 줄어서 300명이 남게 되었는데 시작한 교회 건축인지라 그만둘 수가 없어 진행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런 상황들이 우리 모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짓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많이 희생해야 하는 것처럼, 그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 보통 때의 가치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 버려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아주 뭐 저희 교회에 계시던 분이었습니다만 저에게 그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목사님, 교회는 교인들이 30% 정도는 사라진다고 각오를 하고 시작을 해야지 교회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잘 축복하시면 10%로도 줄어들 수가 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는 교인이 가치가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만큼 희생이 많이 따른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하든지 교회는 이것을 지으려고 애를 쓰는 일군들이 평화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평화가 무엇인가 하면 쉼을 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솔로몬이 쉼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성전을 받을 것이고 또 그를 통해서 내가 그가 다스리는 때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쉼을 줄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쉼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는데서 오는 편안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쉼은 평화가 깨트려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는 막 고단하게 교회를 위해서 일하고 애를 쓸지라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집에서도 가만히 보면 평화롭게 깔깔거리다가 잘 살다가 돈이 몰리면 대판거리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울 때는 누가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고 이럴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잘되어갈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긴장이 계속되고 뭔가 어려운 것들이 막 쌓이게 되면 사람들이 이 평화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쉼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도 쉼을 잃어버리고 행동 속에서도 쉼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따위로 하니까 그렇게 밖에 안 되지. 누가 누구를 비난하기 시작하면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이런 메아리처럼 막 울려 퍼지면서 평화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짓는데 깊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저돌적이라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육적으로 저돌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일을 해내기는 해내는데 하여튼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야 해냅니다. ‘돌격 앞으로’ 하니까, 그러나 이제 신앙적으로 저돌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인가 하면 끈기를 가지고 꾸준히 그 평화를 유지하면서도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목표 의식이 흔들리지 않는 끈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저돌적인 힘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물을 가만히 보면 물이 흐르다가 물이 막히면 물이 돌아갑니다. 돌아가지도 못하게 막아버리면 꽉 찰 때까지 기다리다가 넘어갑니다. 늦게 가는 것 같아도 계속해서 결국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흘러서 그래서 낮은 곳에 있는 물과 높은 곳에 있는 물이 만나고야 맙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저돌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오래도록 자기의 목표 의식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혈기가 많은 사람들의 약점이 무엇인가 하면 평화와 거리가 먼 사람, 쉼과 거리가 먼 사람들의 약점이 무엇인가 하면 열정이 순간적으로는 불붙는데 그 열정이 오래도록 지속되지 않습니다. 신앙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않으니까 육적인 열정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열정은 항상 변덕이 심합니다. 확 끓어오르는가 하면 사라지고 사라지는가 하면 다시 솟아납니다. 영적인 열정은 오랫동안 자신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되는 열정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불붙어지고 그분과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영적인 교제 속에서 그 불이 유지되는 그런 종류의 삶입니다. 평화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 사람들이 이 교회당을 지을 때 관여하게 될 것입니다. 두고보십시오. 지금은 비록 소수가 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제 실행으로 옮겨지고 나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게 되고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 일에 관여하게 될텐데 이때 유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쉼, 평화입니다. 평화의 사람, 그래서 피를 많이 흘린 사람들은 안 됩니다. 다윗은 전쟁을 통해서 실제 칼로 사람들을 죽였지만 쉽게 사람들을 미워하고 가슴속에 피묻은 칼과 같은 악감을 품고 있는 이런 사람들은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렇게 지어져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교회를 지으면서 사실 하나의 어마어마한 커다란 일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면서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여튼 평화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다 지어질 때에 교인들도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벽돌과 벽돌이 이렇게 맞물리면서 성전이 지어가듯이 성전이 지어지면서 성도들의 영적인 연합과 인격적인 사랑의 결합들도 함께 지어져가야지 교회는 아름답게 지어졌는데 속에는 교회가 지어진 것을 놀고 벌어진 수많은 상처와 갈라진 마음들로 가득 찬 사람들이 거기에 가득 모여있다고 할 것 같으면 누가 그것을 기뻐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 사실을 오늘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교회가 지어지면서도 속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쉼을 얻을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이 평화의 아들로서, 쉼의 아들로서 일을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아까 열왕기상 6장에 나와 있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지을 때 흔히 하는 건축처럼 그렇게 하지 않고 완벽하게 제단을 해 가지고 와서 쌓기만 하는 것입니다. 소리가 나지 않게, 말하자면 무소(?) 의 공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거기서 철과 철이 맞부딪치고 돌과 돌이 부딪치면서 막 부서지면서 그래서 소음을 내고 하는 그런 과정 없이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 그런 식으로 지어지는 건물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 하나 공사를 할 때는 소리도 나고 땅도 파고 그렇게 되어 있는데 뭐 하나만 하려고 해도 어마어마한 공사비가 듭니다.
(예화: 지하철 본부에 있는 어느 분의 이야기-남태령 공사를 할 때 나틈 공법을 이용해 공사를 했는데 그 공사는 위에 차가 다니는 것과는 상관없이 밑으로 파서 하는 공법인데 위험하 지는 않지만 힘이 들고 공사비가 많이 든다고 해서 국민이 낸 세금을 그렇게 낭비해도 되 는가 했더니 그분의 이야기가 그것이 계산을 하면 더 싼 데 그 이유는 땅을 파서 공사를 할 때 가끔 사람이 떨어져 죽거나 사고가 나고, 또 장사가 안 된다고 민원이 들어오고, 집 이 무너진다고 소송이 들어오고, 차가 제대로 못 다녀 도로 정체로 인해 서울시에 민원이 들어가고 하는 그 일들을 해결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낫다고 해서 가만히 생각해보 니까 그럴 것 같다는 이야기)
그런데 보십시오. 그 당시에 모두가 짓는 건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성전이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곳에서 공사중이라고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없도록 그렇게 아주 평온한 가운데 살금살금 성전이 건축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쉼이 있는 가운데 예배당이 지어져야 합니다. 교회당은 지어졌는데 사람들이 다 바닥이 고갈되어서 교회를 짓고 나니까 다 떠나가 버리더라. 이게 얼마나 썰렁한 이야기입니까? 이런 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쉼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이 쉼은 하나님 앞에 마땅히 해야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데서 오는 그런 육적인 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애씁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고 애쓰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을 하면서도 항상 영혼 속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어서 그래서 행복을 느끼는 그런 과정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받들어 이행해드려야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교회당이 모두 지어질 때까지 한번 기록을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크고 작은 건축과 관련된 어떤 회의에서도 혈기를 부리는 사람도 없었고 그리고 누가 누구를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모든 회의 하나 하나가 정말 은혜롭고 그리고 끝나고 나면 우리 모두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공통된 부르심에 종사한다라고 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이렇게 이어져서 마지막에 예배당을 지어 가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진짜 영적인 희열을 느끼고 그 속에서 진짜 쉼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쉼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쉼이 영혼의 쉼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쉼의 근원 자체가 다릅니다. 영적인 쉼은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오는 쉼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쉼이 반드시 영적인 쉼과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적인 쉼이 반드시 영적인 쉼을 저절로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또 다르게 우리들이 성화의 방면에서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워가고 하면서 스스로 터득하면서 나아가야 할 또 다른 과제들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바로 이렇게 쉼이 있는 교회의 건축의 과정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영적으로 여러분들이 건강한 삶을 이어가는데 여러분들의 골수를 뽑아서 교회를 짓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은혜를 아는 성도들이 기쁨으로 헌신하고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교회가 건축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한없이 하나님 앞에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그러면서 교회가 지어졌을 때 한 사람도 남김없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감격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지 그것이 정말 보이지 않는 교회도 잘 짓고 보이는 교회도 지은 것이지 교회를 지은 것을 놓고 막 갈라지고 마음이 상하고 이렇게 해서 싸움이나 하고 이런 것들은 옳지 않습니다. 교회당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보셨을 것입니다. 거의 사람들이 이제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여기도 여러분들이 똑같구나 그렇겠지만 지난주에 80석을 늘렸습니다. 그런데도 표시도 안 납니다. 지금 이렇게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교회당을 지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의무 태만입니다. 해야지 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성도들을 잘 기를 수가 있는데 그것이 참 중요하고, 그리고 아주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누구 몇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백한 뜻입니다. 그러면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의 영혼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골수를 뽑아서 교회를 지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성도들이 잘 양육을 받고 하는 그런 속에서 교회를 진다고 할 때 마치 전쟁이 쳐들어오는 것처럼 비상시국처럼 가는 것은 그것은 옳지 않은 면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진다고 선교비도 딱 끊고 그래서 선교사들은 자기가 지원 받는 교회에서 교회만 짓는다면 벌벌 떱니다. 왜냐하면 무조건 끊으니까. 시골 교회 후원하던 것도 끊어지고 모두 끊어집니다. 교인들이 많이 와도 교역자도 보충하지 않고 하면서 무조건 교회 하나를 짓는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완전히 비상체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짓는다는 큰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뭐 그런 정신을 갖는 것은 우리들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니 쉼이 있는 가운데 이 교회가 쭉 지어져 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고갈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물론이거니와, 그래서 우리 출애굽기를 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성막을 짓는 사역을 하면서 여전히 모세는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그렇게 성막을 지었던 것처럼 저는 물론이거니와 여러분들도 모두가 이 일을 인해서 고갈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하나님의 은혜에 넘치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고 기뻐하고 그러면서 그 누구도 상황으로 인해서 눌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주님이 나에게 어떤 헌신을 원하실까, 나에게 무엇을 받으실까. 그런 것을 느껴야지 또 안 느끼면 그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누구도 상황을 가지고 사람들을 그렇게 부자유하게 하고 막 억압을 해서 사람들을 고통받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인격적으로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가야지 됩니다. 저보다 더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일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쉼을 누리고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일년동안 얼마나 변화가 많았습니까? 일년동안에 그 많은 돈들을 끌어들이고 땅을 사고 설계를 하고 하면서 얼마나 드라마틱한 이 과정을 많이 넘겼습니까? 오죽했으면 제가 일주일에 속청 한 박스를 먹었습니다. 지금이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만 하여튼 그렇게 지났습니다. 그래도 어때요. 작년 이맘때에 비해서 지금 교인이 40%정도 늘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심코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그렇게 격변하면서 이 교회 건축의 상황이 움직여지는 데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눌리거나 고통받지 않고 오히려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회심을 경험하고 진실한 신자로 자라가고 있습니다. 물론 제대로 섬기지 못해서 교회 한구석에서 가슴아파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고 혹은 소수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더 좋은 교회를 향해서 떠나간 사람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95%가까운 정착률을 보이면서 그 동안에 35-40%로 이상의 교인이 정착을 하면서 이제까지 하나님이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성도들의 마음속에 정말 소중한 것이 영혼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과 쉼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세워져 가는 기쁨을 느낄 때 그때에 우리는 다 기억할 수 없고 누구라고 손들지 않았어도 그렇게 이 교회에서 이름 모를 성도들의 헌신으로 마련된 이 교회당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디선가는 새로 지어지는 교회당을 위해서 기도하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하는 그런 헌신된 마음들로 주님을 섬기게 되리라고, 또 섬기고 있다고 우리가 확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의 집을 이끌어 가시고 그리고 당신의 교회들을 세워 가십니다. 우리들이 항상 이런 믿음을 가지고 정말 교회를 세우는 일군들만 평화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가 지어져 가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성도들이 영혼의 진정한 쉼, 영혼의 참된 만족을 얻으면서 그러면서 주님을 만난 만큼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교회를 위해 염려하고, 물질이 있는 사람은 물질을 드리지만 힘없는 사람들은 재능을 드리고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품이라도 섬겨서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완성되게 하는데 반드시 헌신하리라고 나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 되는 비결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당을 짓는 이 일은 공사이기는 하지만 노가다 정신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시종일관 목양의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성화의 정신으로 이 일을 감당해나갈 때 그때 모든 성도들이 지어진 건물을 보고 이것이 우리 돈으로 지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어졌다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수고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지체가 자기는 정말 하나님 앞에 많이 바치고 싶은데 정말 가진 것이 너무나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위로했습니다. 그러면 조금 기다려라. 조금만 기다리면 또 질 때가 올 것이니까 그때 네가 주역이 되면 되지 않겠니 라고 했습니다. 2년 반전에 여기 왔을 때 이렇게 금방 그렇게 큰 교회당을 짓고 가리라고 아무도 생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처럼 인도하시면 3-4년 버틸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한 4년 있다가 이 교회당을 사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날이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 올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번 교회당을 짓는 거기서 배운 지혜를 가지고 똑같이 우리들이 하면서 잃어버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주님 앞에 드렸다 하면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것이고 바친 것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터이니 잃어버린 것이 아니오, 또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재능을 드리고 시간을 드렸다면 겉으로 손해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브사렐과 오홀리압처럼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이 의욕이 있어도 할 수 없는 일들로 수종들게 만들어주셨으니 그 또한 하나님 앞에 바친 무형의 헌신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그리고 사랑하면서 지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런 불 신앙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너무 힘들다. 도대체 내가 목사가 된 게 무슨 건축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신학과 나왔는데 매일 설계도를 펴놓고 업자들이나 만나고 그리고 돈걱정이나 하고 은행에서 부르면 가서 도장이나 찍고 내가 이런 것을 하려고 내가 목사가 되었는가. 성경에도 보면 목사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 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교회당을 짓는 일을 하면서 내가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하나님이 계속해서 우리의 목회에 복을 주시면 어떻게 될까.
어떤 사람이 그랬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3200석을 만들지만 아마 금방 찰 것입니다. 그분은 저를 격려하느라고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속으로 아! 끔찍하다. 또 이것을 해야지 되는데.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번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야!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다.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은 하여튼 교인들이 모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니까 조금 왔네, 많이 왔네 하고 알지 숫자는 모릅니다. 식당에 가면 몇 명이 모였는지 압니다. 목사님이 밥을 잘 드시면 한 600명 모인 날입니다. 그리고 그저 그렇게 드시면 한 550명이 모이고 목사님이 자꾸 밥알을 한참씩 씹으시면서 물을 많이 삼키면 470명 이하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어디에 가서 바지를 벗고 곤장을 한 대 맞아서 교인이 한사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면 자신은 일주일에 곤장만 맞으러 다니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어스릇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분이 얼굴을 벌벌 떨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마음이고 그리고 양떼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이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보내주셔서 우리에게 이런 고민도 하게 하시고 이런 무거운 짐도 지게 하시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 때문에 하는 고민입니다. 이것이 사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행복이지 않겠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지으라고 명령하실 때 어떻게 하든지 이 교회가 지어지는 것과 평화, 이 교회가 지어지는 것과 쉼, 이것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영혼의 쉼과 그리고 진정한 평화를 주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지 되겠는가. 우선 두 가지만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는데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든 성도 각 사람 각 사람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큰사랑과 은혜를 알고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잘 신앙생활을 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영적인 교회의 벽돌 한 장이 되고 주춧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잘 지키면서 정말 하나님 앞에 좋은 믿음생활을 여러분들이 해나가야지 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고 목회자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가 있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 교회를 지으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고자 하실 때 기쁨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많이 흘러간 뒤에도 여러분들이 인덕원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애쓰면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할 때 그때에 하나님과 나누었던 은혜의 밀어들,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찼던 신앙의 아름다운 고백들이 오래오래 생각나는 그런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많이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안 기뻐하시는 부분들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서 버리고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면서 그러면서 늘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고 성찰하면서 믿음의 길을 따라서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하시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교회당이 지어져 가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견고해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건축의 일을 돕고 건축위원을 하다가 핵심적으로 일하다가 교회도 못 짓고 그리고 신앙도 잃어버리는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그 평화를 지켜나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이제 사람들과의 평화를 잘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니 화합과 화목,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도들을 하나되게 하신 이 정신들을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가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일인 백 번은 불 여 백인 일보라’고 그랬습니다. 한 사람이 백 발자국을 뛰어가는 것과 백 명의 사람이 손을 한 발자국 걸어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전자는 한 사람의 열심이면 됐는데 후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맞아야지 만 움직일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정신을 잘 유지하면서 잠시 돌아가는 것 같고, 잠시 더디 가는 것 같아도 이렇게 인격적으로 서로 설득하고 격려하고 이렇게 하면서 누구 한 사람도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식어지지 않고 오히려 함께 격려하고 사랑하면서 이 길을 걸어가서 이 교회가 지어지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잃어버렸던 성도들을 다시 찾을지언정 성도들이 뒤로 물러가게 되는 일들이 우리들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겠다 라고 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화목을 잘 지켜야 하겠지만 교회를 짓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데 있어서도 항상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삼가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많이 헌신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헌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책하는 마음을 염두에 두면서 행동하는 소심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교회당을 지는데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있어도 무엇으로 도울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의 부담들을 느끼면서 겸손하게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많이 헌신한 사람들은 오히려 적게 헌신한 성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함께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그러면서 함께 손잡고 하나님의 교회가 지어지는 이 대열에 동참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교회가 한 두 사람의 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여기에 참여해서 그래서 주님의 교회가 완성되었을 때 모든 성도들이 이 속에 나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고 고백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커다란 헌신을 한 사람들만 그렇게 느끼고 다른 사람들이 구경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쓰임 받았다 라고 하는 성취감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그런 결말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화합하는 마음이 되고 해서 걸어가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화: 남쪽 지방에 여러 교회의 일군들이 모인 집회에 가셨는데 어느 장로님이 저녁식사를 대접 하시는데 그 장로님과 어느 분이 대화를 하시는데 교회의 일을 하시는데 자기가 이야기를 해도 안 되니까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다면서 자신이 마치 그렇게 처신함으로서 교회를 거 두는 것처럼 말하는 내용에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마음이 아팠다는 이야기)
그렇게 해서 교회가 다 지어졌을 때 사람들이 막 흐느끼면서 예배를 드릴 때 뭐라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얼마나 그 사람은 썰렁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하고 의견이 안 맞는다고 해서 그래서 자기네끼리 하라고 하고 자기는 아무 헌신도 하지 않을 때, 예배당이 지어졌을 때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거기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는 사람이 얼마나 이방인 같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도움이 안됩니다. 그리고는 일평생 그 교회당에 살텐데 기둥 만지면서 누가 기둥을 이렇게 멋대가리도 없이 만들었어. 화장실에 물이 새면, 그럼 그렇지. 전기가 나가면, 싼 것으로 해서 그럼 그렇지 하고, 차를 댈 때가 없으면 거봐, 내가 그렇게 지하실을 파라고 하니까 파지도 않고 말이지. 그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정말 하나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짓는 동안에 사람들과의 평화가 연합을 이루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고 그리고 일군들은 그것을 최대한 정직하게 진실하게 지혜롭게 일들을 처리해나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모두 화평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함께 끌어안고 신앙으로 믿음으로 서로 격려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교회당에 지어질 때우리 모두가 정말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그런 복된 역사가 일어나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들이 이렇게 다윗도 수종들 수 없었던 이 일에 우리들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윗과 성결하고 진실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제외시키셨던 그 성전을 건축하는 그 일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고 우리를 쓰시고 우리의 손으로 그 일을 이루시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평화의 사람들이 모두 되어서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성도들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든든히 세워서 우리 모두 하나의 아름다운 벽돌이 되어서 교회 구석구석에 쌓여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화평과 쉼으로 지어지는 성전②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대상22:9)
다윗이 비록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전쟁에 참여했고 전쟁은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행한 많은 전쟁들은 사실 하나님의 대적들을 무찔러서 주님의 명예를 드높이는 전쟁이기는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는 이 다윗의 헌신을 마다하고 다윗 보다 여러 면에서 못한 솔로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받으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예고하시는 것은 한 사람이 날텐데 그는 평강의 사람이라. 그래서 히브리 단어 하나를 놓고 한글이 이렇게도 번역을 하면 이렇게도 번역을 하고 해서 사실은 좀 정확하지 않은 면이 있는데 사실 다른 곳에서는 이 ‘평강’이라는 말이 대부분 ‘샬롬’을 번역한 단어인데 거기에서는 마누하를 번역한 것입니다. 누하는 멈추다, 쉬다, 이런 단어가 쓰인 곳이 어딘가 하면 노아 홍수가 났을 때 배가 멎게 된 것을 표현할 때 노후라는 단어를 썼는데 거기에 명사형입니다. 마누하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메뉴하, 혹은 마누휴, 메노아인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샬롬과 같이 그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 평강의 사람이라고 기록된 것은 저는 쉼의 사람이라. 그래서 그 쉼은 무엇에 반대인가 하면 전쟁의 반대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와 있는 쉼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솔로몬의 인격 속에 깃들여 있는 어떤 쉼이나 평화, 이런 것들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솔로몬의 때에 모든 대적을 굴복시키셔서 더 이상 전쟁이 없게끔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쉼을 얻은 가운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전이 건축되도록 하겠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성경이 사실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왜 다윗이 아니고 솔로몬이어야 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사실 이 정도의 성경의 설명만으로는 잘 만족이 안 됩니다. 그런데도 더 이상 이야기는 안 합니다. 그리고 다윗도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수긍을 하고 그것을 자신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이 건축될 것을 바라보면서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성전을 직접 짓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이 지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건축할 모든 준비를 갖추어놓는 그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역시 이 성전 건축 그 동기 자체가 다윗에게 있어서 자기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계획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그런 것이었음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받을만한 어떤 그의 신앙의 인격이 배어있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성경은 멈추고 있는데 그런데 사실 저도 이 문제에 대해서 사실 궁금증이 많지만 그러나 성경이 더 이상 설명을 안 하니까 우리들이 할 수 없는데 우리 지난주에 성경 읽기 표에 보면 바로 이 장면을 우리가 읽어갔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하에서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고 그리고 다윗이 울면서 재를 무릅쓰고 감람산으로 도망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장면들이 쭉 나오는 가운데 두 가지 사건을 우리가 보면서 야, 역시 한 인물에 대한 평가나 생각이 그 시대의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서 보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차이점이 있을 수가 있구나 하는 것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두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는 시므이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사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보면 사실은 압살롬이 죽일 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름부터가 벌써 불길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선 자기 형제를 때려죽인 것부터 시작을 해서 다말의 간음 사건 때문에 결국은 자기 형제를 때려죽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도망을 갑니다. 도망간 상황에서 그를 그리워하고 잊지 못하는 것은 역시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부하가 왕의 심경을 조용히 살펴보니까 왕이 늘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어느 때가 무르익으니까 그 다음에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시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과거를 용서해줍니다.
사실 이것이 평범한 모든 아버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다윗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역시 다윗의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관용일 것이다 이렇게 믿어집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벌써 이미 압살롬은 그렇게 귀향 살이 비슷하게 도망을 갔다가 다시 아버지에게로 와서 아버지와 입맞추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면 이 늙은이를 죽이고 내가 왕이 되어야 되겠다 벌써 딱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벌써 3,4년에 걸쳐서 면밀한 계획을 짜는 것입니다. 성문 앞에 딱 기다리고 있다가 재판을 받으러 가는 사람이 있으면 불쌍한 백성에게 왜 그런가. 내가 뭐 도와줄 일이 없는가 하면 왕자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니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러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벌써 사무엘 기록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선행이라든지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기보다는 그 마음을 도둑질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기를 준비하고 병사들을 다 만들어서 그 다음에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도망간 것입니다. 도망가니까 시므이가 나타나서 막 돌을 던지면서 욕을 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집안에 그렇게 행하더니 네가 보응을 받는구나. 너희들도 똑같이 되기를 바란다 하면서 막 욕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펼친 그 정치나 그리고 다윗이 백성들을 향해서 품었던 그 사랑의 마음, 온역에 걸려서 그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갈 때 괴로워하던 다윗의 모습을 우리가 지지난 주에 읽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정말 성군입니다. 그리고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시므이는 한 맺힌 사람입니다. 다윗에게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한이 맺힌 사람이고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에는 그 다윗을 박해하는 마음이 즉석에서 생겨난 마음이 아니라 일평생 한처럼 가지고 있다가 그 다윗이 망하게 되었을 때 막 쾌재를 부르면서 돌맹이를 던지면서 욕을 하는데 부하들이 저 놈의 목을 당장 날려버립시다. 그러니까 다윗이 말립니다. 그런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돌을 던진 것은 생명을 걸고 한 일입니다.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식들아 하면서 욕설을 퍼부으면서 욕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사건이 무엇인가 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든, 인간의 양심에 비추어보든, 도덕률에 비추어보든 하여튼 무엇에 비추어보든지 간에 압살롬이 명백하게 잘못을 했는데, 우선 다윗이 아무리 잘못되었다고 할지라도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칼을 들었으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십계명을 어긴 것이고, 그렇게 아버지를 향해서 자기 부모를 향해서 칼을 들고 그렇게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자는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죽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백성들이 많이 압살롬에게 가는 것입니다.
이런 장면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해석을 해야지 되겠는가. 쉽게 이야기를 하면 그런 모든 백성들의 배반하는 현상, 이런 것들이 넓게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징계하고 훈련시키시는 과정이지만 좁게 본다고 할 것 같으면 다윗의 시대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 거기에서 승리를 쟁취했고 그랬지만 사실은 다윗의 통치하에서 백성들은 너무 많이 지치고 사실 시달렸던 것입니다. 그 큰 나라를 정복해나가고 주위에 있는 백성들에게 자기의 주재 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다윗은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거기에 수많은 대적들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이 항상 기적적으로 승리한 전쟁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수많은 군인들의 생명을 앗아갔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미국이 공격을 하겠노라고, 수일 내로 공격을 하겠노라고 뜸을 들이는데 캐나다와 미국 쪽의 상황은 여기서 보는 것보다 훨씬 긴장감이 팽배합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아침에도 우리들이 모여서 그런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진퇴양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쪽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제 여러 해 동안 가뭄이 들어서 사람들이 다 풀뿌리도 못 먹고 죽어 가는 사람인데 미사일을 쏜다고 하니까 미사일만큼 값이 나갈 것이 우리 나라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깝지 않는가 하면서 자기들이 염려를 해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까운데 그것을 쏟아 붓는가. 만약에 완전히 뿌리를 뽑으려면 지상군을 투입해야 되는데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다. WTC에서 죽은 사람하고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전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 나라에 직접 관계된 일은 아니지만 하여튼 우리는 참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캐나다에서도 신문을 보니까 여성 의원 한 사람이 전쟁을 유일하게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전쟁을 반대한 것이 아니고 정확하게 말하면 대통령 혼자서 언제 누구와 전쟁을 한다는 것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있답니다. 사람들이 너무 흥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호텔에서 잠깐 텔레비전을 틀어보니까 어느 목사님하고 CNN의 대담 자와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는 영어가 짧으니까 완벽하게는 이해를 못해도 눈치로 듣고 보니까 그 목사님은 얼굴부터 은혜롭게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그렇게 호소를 많이 하는데 이쪽에서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피해에 대해서 복수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면서 이제 논쟁을 하는 장면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볼 때에는 다 남의 나라이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겠지, 하지만 이번 전쟁을 하는데 무슨 52조를 쏟아 붓는다고 하는데 사실 그 돈이면 그 사람들의 굶주리는 문제가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몇몇 사람들의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문제이지 그 사람들의 생활상을 CNN에서 쭉 소개를 해주는데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폭탄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폭탄을 쏟아 붓는 것만큼 진짜 식량을 쏟아 부어도 그 사람들이 살지, 말지 하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불쌍하게 몇 사람의 정권에 시달려서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그렇게 유리 하는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얼토당토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사실 그 사람들도 애도하는 미국 시민 못지 않게 너무 불쌍했습니다. 폭탄이 아니라 폭탄같이 이렇게 곡식을 싸서 던져주어도 아! 진짜 시원치 않을텐데 그 사람들 속에 있는 증오와 이런 것들이 어우러지면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뭐 도덕적인 판단을 지금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쉼이 없습니다. 전쟁은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상식적인 안식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이 택할 수 잇는 가장 짐승 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어째든 대의명분이 어떻든지 간에 다윗은 일평생 진짜 자기 갑옷에 피를 닦을 날이 없이 전쟁을 하면서 일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 동안에 물론 오늘날 우리들이 이렇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읽어보니까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다윗을 승리하게 하셨다고 하니까 그렇게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과 이긴 다윗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지 않는 수많은 전쟁 속에 죽어간 많은 사람들, 이것을 생각해볼 때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셔서 그렇게 역사 속에서 위대한 사람으로 사용해 가시는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커다란 하나님의 섭리 한 과정이라고 하는 생각을 그것을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야 그것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윗과 마음속에 원수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사실은 잠재적으로 많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런 일을 자기의 명예나 영달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시므이로부터 받은 그런 모욕이나 자기를 배신하는 수많은 아비아달과 같은 사람이나 얼마나 아꼈습니까? 다윗이 아낀 사람들입니다. 다 배신하고 도망가고 하는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다윗이 더 하나님을 바라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영역의 문제이고 현실에 있어서는 하여튼 그렇게 마음에 상처를 받고 그 전쟁 속에서 말하자면 잠재적으로 다윗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때에 다윗의 손에 의해서 성전이 지어졌을 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아마 피로 세워진 성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모든 전쟁은 하여튼 다윗 시대 때 모두 종치고 막 내리게 만들고 그리고 그 다음에 솔로몬의 시대에는 쉼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대적을 굴복시키고 대드는 나라가 없게끔 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전쟁이 기억들도 잊혀지고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제 그 솔로몬을 신앙적으로 뛰어나다, 안 뛰어나다 그것보다도 어째든 그 솔로몬에 대해서 한 맺힌 사람이 없게끔 그렇게 만들면서 하나님께서 이제 평강을, 쉼을 하나님께서 먼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나라가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애국심에 넘치는 90%로의 애국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나라에 대해서 한이 맺힌 사람들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그 나라가 완전한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좌경사상 때문에 막 시달리고 학생들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그러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주사파가 어떻고 그랬습니다. 전체 학생의 5%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 의해서 대학 전체가 좌지우지되고 하는 그런 상황들을 겪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째든 가슴속에 한 맺힌 사람들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북에 있는 동포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째든 한 맺힌 사람들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것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이 그 나라에 쉼을 주신 것입니다. 그 쉼을 주시는 그때에 하나님이 특별히 택해서 세우신 그 왕이 바로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의 절대적인 신앙이나 영성이 다윗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을 안 쓰고 더 우월한 솔로몬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집을 지으시려고 했다는 것보다는 이것은 하나님의 한 섭리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째든 솔로몬은 쉼의 사람으로 온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쟁이 없는 상태를 하나님이 만들어주셔서 쉼을 갖게 하는 그런 임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솔로몬은 자신의 이름 속에 깃들여 있는 계시적인 이름이었습니다. 히브리말로 ‘솔로모’ 는 ‘셀렘; 살렘에서 온 말입니다. 그런 자기 자신이 평강의 사람으로, 자기 자신이 평화의 사람, 혹은 쉼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으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그가 하나님 앞에 신앙이 있는 동안에는 늘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고 전쟁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지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제일 잘 지어지는 쉬운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성도들이 교회가 지어지는 것 때문에 막 좌불안석이 되고 막 한없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쉼을 잃어버리고 하는 그런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게끔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쉼을 누리는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집이 제대로 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우리들이 큰일을 앞두고 그렇게 쉼도 없고 하나님의 집도 지어지고 그럴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우리들이 두 가지 면을 함께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히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우리들의 영혼에 쉼이 옵니다. 안식이 옵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평안합니다 하는 쉼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장 안달복달하던 때가 언제인가 하면 다시 또 쉼을 얻었을 때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무엇을 위한 쉼이고 또 무엇을 위한 안달복달 인가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이 은혜를 주시면 우리가 세상 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쉼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생활이 좀 어려워도 그리고 고통이 와도 핍박을 받아도 우리의 영혼에 이 쉼을 앗아가지 못합니다. 그런 쉼이 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우리는 마음에 항상 조급하게 됩니다. 주님이 내게 베푸시는 은혜가 이렇게 큰데 내가 이런 정도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도 되겠는가. 이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내가 굉장히 열심히 살면서도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한 일이 뭐가 있는가. 금년 한해도 지나갔는데 열심히 주를 위해서 봉사를 해놓고도 금년 한해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가까운데 일년동안에 내가 도대체 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본인 자신은 하나님 앞에 한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것이 좀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자기가 한 것을 대차대조표로 작성을 하면 부채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는 백만쯤 된다고 하면 내가 값은 은혜는 한 십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아! 올해도 사랑의 빚을 졌구나. 내가 어떻게 살까. 하는 그런 마음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쉼의 마음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영적 경험 속에서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쉼을 주었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내면적이고 이런데 있어서 방해받지 않은 안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새벽에 나와서 자기의 부족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막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내가 이렇게 게으르게 삽니다. 주님을 위해서 바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없습니다 하면서 막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끝내고 교회당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나는 도대체 그렇게 괴로운 사람이고 가슴이 아픈 사람인데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확 나를 감싸는 것입니다. 직장에 어려운 일이 있고 사업에 시달리고 뭐 경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이런 저런 소리가 다 들려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송하고 평안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성경을 의지해서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평안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 멀리 떠나 캐나다까지 가 있어도 아침이면 늘, 제가 또 외국에 떨어지기만 하면 향수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가고 싶은 마음에 벤쿠버에서 도루 오려고 했습니다. 5시간 동안 표를 안 끊어주니까. 왜 주일날 설교도 못하게 생겼으니까. 그래서 집에 도로 갔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교회 생각만 하면 허가도 받아야지, 그리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서 지어져야 할텐데, 그리고 돈은 어떻게 하나, 또 뭐 잘못해서 안전에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하나. 늘 마음이 어떻게 평안이 있겠습니까? 평안하면 인간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큰일을 앞에 두고 어떻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노심초사하는 마음입니다. 큰일을 앞에 놓고 노심초사해야지 됩니다.
여러분, 옛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집을 지어놓고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도 집을 몇십 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다 허물고 지었습니다. 15년 전에 조경공사만 3억을 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은 얼마나 들였겠습니까? 알 필요도 없지만, 하여튼 잘 지어 났는데 조경공사가 끝나고 장롱까지 새로 들여놓고 얼마 있다가 죽었습니다. 집을 짓는데 너무 신경을 쓰고 마지막에는 잘 지어지니까 너무 좋아서 신경 쓰다가 죽었습니다.
집을 하나 지어도 그런데 작은 집도 아니고 3500명이 들어갈 집을 짓는데 그것이 어떻게 근심이 안 되겠습니까? 근심이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아니라 영적인 무감각입니다. 얼마나 노심초사하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왜 기도하겠습니까? 사람이 경건한 불안이 마음속에 없으면 그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경건한 근심이 없으면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있어야 합니다. 노심초사하고 늘 잘되기를 원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런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간직하고 있어야지 만 기본적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주님을 만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대면하고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틀을 무너트릴 정도로 커다란 불안이 함께 엄습해와서 이 메누하가 깨트려지는 그런 쉼이 깨트려지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교회를 지으면 사실 비상체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냥 평상체제로 가십시오. 그래서 교회를 지으면 모든 것을 엄청난 충격이 와 닿는 것처럼 선교비도 다 끊고 교회 정상적인 것들이 전부다 영향을 받으면서 심지어는 그렇게 하면서 교회 구조가 엄청나게 뒤틀리는 것입니다. 교역자도 나쁘게 말하면 막 자르고 내보냅니다. 두 사람, 세 사람이 하던 일을 한 사람에게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조조정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한 분을 만났는데 사역지가 없어서 그러니 좀 소개를 해달라고 그래서 왜 그런가 했더니 구조조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니 무슨 목사가 구조조정이 있는가. 너 무슨 유휴 인력인가 내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니 실제로 그런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어느 한 면에 있어서는 일리가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인 면에서 보면 저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교회당을 짓는 그 일이 급한 일이고 중차대한의 일이고 우리들이 힘을 집결해야하는 일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사실 교회당을 짓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급한 일이지만 그것이 최상의 가치 있는 일이라고는 소중한 일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사람들의 생각이 입체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도 계속 하고 교회에 일군들이 필요하면 더 쓰고 해서 하나님의 성도들이 이곳에 와서 정상적으로 교회를 지을 때나 어마어마한 선교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을 때나 또 뭐 아니면 교육관을 지을 때나 그런 것을 거의 느낄 수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 은혜를 받고 살려는 성도들이 언제든지 같은 양질의 섬김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큰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가셨는데 주보를 보니 옛날에 만들던 가리방으로 주보를 만들어서 이렇게 큰 교회에서 어떻게 이렇게 하는가 했더니 그 돈을 아껴 서 성전 건축에 보태기로 했다는 이야기)
그렇게 아끼는 것은 좋은데 입체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아무리 큰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가 목양적인 구조 속에서 정상적인 기능을 하면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는 이 구조를 부수고 뭉개트리면서 교회가 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 때문에 교회가 지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런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쉼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들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인해서 노심초사하고 그래서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이렇게 살아가고 하나님 위해서 사는 것을 위해서 마음 아파하고 노심초사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이러면서 주님 앞에서 사는 것, 그것을 우리들이 계속해서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경건한 불안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평안해야지 됩니다. 쉼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와서 건축을 위해 헌금하지 못한 사람들은 정죄 의식을 느끼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야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샀는데 교회는 아직 짓지 못했는데 자기가 집을 사서 너무 죄송하고 그래서 제가 마음을 푹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잘했다, 잘못했다는 도덕적인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집도 지어지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집을 살수가 있겠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사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공존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지 넌 집을 샀냐. 나는 아직 안 샀다. 나는 무엇을 팔아서 냈다. 넌 쥐뿔도 판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서로 다투고 말하자면 사람을 서로 정죄 하는 그런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런 면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쉼을 줄 수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건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각자 사람들의 믿음의 분량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해서 재산상에 큰 변동을 하면서 거액의 헌금을 한 사람도 처음 옮겼을 때는 믿음이 없어서 안 했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지금 돈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바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음에 하나님의 집을 새롭게 짓는다고 할 때, 그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더 깊이 만나고 또 하나님의 참 사랑을 많이 깨달아서 지금 우리들이 한 헌신 못지 않게 주님을 위해서 헌신을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각 사람의 신앙의 인격적인 성숙의 정도를 깊이 인정해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이루어져 가야지, 그렇게 보면 그렇게 하기 때문에 사실 뭐 더 헌금도 안 나오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러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 대신 하나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평화를 깨트리지 않는 쉼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 보십시오. 한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그리고 정말 주님을 위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물질로 봉사해야지 되겠다 라고 하는 그 믿음이 매우 적은데 그런 적은 믿음을 내버려둔 채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헌금을 받아낼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받아내고 나면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만약에 잘못된 동기에 의해서 헌금을 하고 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신앙에 아주 결정적인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드라마와 다름없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옛날에 하나님 앞에 건축헌금을 많이 한 것 그것을 하나 신앙생활에 자랑으로 삼는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도 너무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마음입니다. 신앙이 좀 부족한 사람이 많은 헌금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움직이셨으니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헌금의 액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결정이 누구에 의해서 조작되거나 충동된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에 인격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그런 것들을 뛰어넘어서 더군다나 일정한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 속에 마땅히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유지하여 할 교회와 평화와 쉼을 깨트리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집이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이제 이런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문제인가 하면 다윗의 경우를 우리들이 한번 보십시오. 다윗의 경우를 보면 그 많은 전쟁들을 치릅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었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전쟁으로 갑옷에 피 마를 날이 없는 전쟁에 끊임없는 연속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실 마음속에서 다윗의 가문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던 다윗의 가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오히려 하나님이 버린 사람 사울의 통치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나라에 있어서 참된 쉼,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온전히 풀어진 가운데 그런 속에서 화평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신앙이나 영성, 이런 면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때 솔로몬이 통치를 잘해서 된 것만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째든 정복에 관한 역사를 다윗 때 마무리하고 솔로몬에 의해서는 온전히 전쟁이 없는 평화의 상태가 오게 해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게 끔 하나님이 섭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가 이렇게 큰 일을 앞두고 주님을 섬기면서 일할 때 우리는 한쪽으로는 매우 불안하고 근심합니다. 그렇게 마음속에 늘 가책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많이 섬기고 봉사하고 하려고 애를 쓰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 지체가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항상 다윗이 고민한 것도 그것입니다. 자기는 백향목으로 지은 좋은 집에서 살고 하나님의 교회는 아직까지도 천막에 있는 것을 인해서 가슴아파한 것이 성전을 짓겠다고 한 것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위해서 마음이 움직여서 헌금한 사람들, 우리들이 이름은 알 수가 없지만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축복하는 마음을 서로 서로가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이 평화를 깨트리지 않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유지하는 것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쉼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새 가족 환영회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열린 교회 등록을 하면서 처음에 교회를 옮긴다고 건축헌금을 한다고 해서 너무 마음에 깊이 눌림을 갖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리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이 열린 교회에 등록했을 때 제일먼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정말 참되고 좋은 신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다. 그것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시면 그러면 섬길 수 없는 사람들은 섬길 마음이 있어도 사실 섬길 수가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째든 좋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앙적으로 이렇게 잘 세워지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정말 주님의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답게 길러주는 그런 교회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속으로 주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 속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일하실 것들에 대해서 노심초사하고 늘 가슴을 끓어 안고 기도하면서도 교회는 쉼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화: 김진홍 목사님의 간증 -그분이 철학 교수로 계실 때 어느 학생이 진리가 무엇인가 물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해서 자기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학생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공격적인 질문 하나에 가슴에 깊이 들어와 그러면서 하 나님 앞에 종이 될 사람이 있 는데 주인이 될 사람이 아직 없다고 하며 방황을 했는데 기도를 하면서 한번만 교회에 나 가겠으니 그때 자신의 고민의 해답을 들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동네 작은 교회에 갔는 데 계속해서 성전을 지을 것이라는 설교만 계속 하기에 응답치고는 너무 썰렁해서 자기가 그것 때문에 2년 동안 더 방황을 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구도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온통 교회밖에는 마음이 없다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서는 늘 노심초사해야 합니다. 지금 기도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안타까워하고 기도하고 하는데 그런데 구도자가 교회에 왔을 때 무슨 건축회사 조회에 들어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도 우리 40여명 정도 새 가족 환영회를 하는 것을 보니까 생전 처음에 나와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감사하게도 5-6분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복음을 알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그것이 자신들이 찾고자 하는 것들이 이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관심에 주제가 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같이 느낄 수 있을 때 구도의 길을 여기서 걸어갈 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쉼의 사람들이 되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오히려 풀어주고 싸매고 그럴 수 있는 그런 메누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솔로몬 시대에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기 전에 조성하셨던 환경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뒤에 보면 그 ‘평안’이라는 말이 또 나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이니라” 그런데 이 평안이 샬롬입니다. 그러니까 참 신기합니다. 평안과 안정의 두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안정은 샬롬한 상태에서 누리는 외관적이고 육신 적인 평정입니다. 질서 있는 평정의 상태이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샬롬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말미암아 오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재미있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솔로몬 너로 인해서 성전이 지어질 것이다. 너는 피를 많이 흐렸는데 너 말고 솔로몬을 내가 메누하 즉 쉼의 사람으로 내가 만들어줄 것이다. 그래서 쉼이 있게 해주겠다. 그런데 그 쉼이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은 평안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진리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는 교회가 싸우고 편을 가르고 난리를 치고 소송을 하는 가운데서도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저도 또 그런 것을 경험해봤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특별하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영혼의 깊은 변화가 일어나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 안정과 평안을 얻게 되는 놀라운 영적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삶의 평안은 분쟁하고 깨트려지는 갈등이 있는 교회들 속에서는 그런 일들은 일상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교회가 어떤 일에 대해서 마음이 아주 강렬하게 확 찢어질 듯이 갈라지고 나면 뚜렷하게 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배의 감격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아주 강력하고 예리한 갈등이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에서 지도자를 불신하고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 사람들과 계속해서 다투고 논쟁하고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꽉 차있는데 예배를 통해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는다 그래서 한마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케이스가 아니면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걸어오면서 조국교회는 정말 비상식적인 교회의 모습들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제가 직접 목격한 교회는 반이 갈라져서 같이 예배를 드리는데 여기 찬송을 부를 때 설교하고 여기서 설교할 때 여기서 통성 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사람이 올라와서 서로, 그러다가 교회가 찢어지고 나뉘어지고 막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화해로 말미암는 놀라운 샬롬의 평화를 가져다주시는데 결국 기초가 무엇인가 하면 전쟁이 없는 쉼이 있는 상태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봅시다. 이런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마음이 갈리는 일이 없어야지 만 자기 영적 변화를 위해서 전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크게 갈라지는 것들이 대게 두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는데 세상에 대한 사랑이나 정욕 같은 것들이 깃들면 외부적으로 자기를 어떻게 자극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마음이 갈려져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 신앙의 변화를 위해서 진지하게 노력하고 하는 것들이 희석됩니다. 이것은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외부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런 것에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이 확 갈라지고 교회에 어떤 결점이 있어서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이렇게 되면 그러면 안 됩니다. 항상 기도해도 그 사람들을 대적처럼 여기면서 기도하고 자기와 생각이 달리하는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기도하고 이렇게 되는 가운데 되면 결코 그렇게 끝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누하의 쉼이 하나님의 샬롬을 가져오시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다툼이 없이 평화한 가운데 교회 건축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이제 새롭게 열린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쉼이 있는 교회의 환경이 되어야 하고 그런 속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고 새로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진리들을 깊이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육체적이고 나태함에서 오는 게으르고 무책임함에서 오는 쉼,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런 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노심초사하고 아파하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러나 교회가 우울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우리가 뭔가 굉장한 비상시국에 접한 것처럼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새 가족 환영회를 하면서 생전 처음 이 교회가 처음이라는 사람이 여럿이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르쳐주는 것이 신앙인 줄을 압니다. 그 사람들이, 그런데 강단에서 되어지는 설교를 통해서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어도 그리스도인이 그 설교를 듣고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를 목사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옆에 있는 동료들을 통해서 훨씬 더 많이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인 모습과 이치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목사를 통해서 더 많이 배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본을 통해서 더 많이 배웠습니까? 신앙의 초기에 말입니다. 교회에 가면 언제 기도하는 시간인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쳐다보니까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면 자기도 숙였습니다. 언제 헌금하는 시간인지 모르는데 사람들이 주머니를 뒤지면 자기도 주머니를 뒤지고 찬송 부르면 찬송 부르고 사람들이 일어나면 따라 일어나고 그러면서 신앙을 배워왔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교회가 이런 쉼을 성도들에게 줄 수 있고 그리고 이런 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교회에 밀려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없는 쉼은 하나님이 전쟁이 안 일어나게 하시면 바로 쉼에 들어가는데 이 샬롬의 평안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영적인 변화를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지어놓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다 드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교회에 가득 차는 광경을 여러분 제가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 찰 때’라는 시리즈로 설교한 적도 있습니다. 박석한 땅에서 사람들이 다 엎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성전 준공식과 함께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이게 어디서 본 것과 똑같습니까?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과 똑같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메누하의 쉼은 전쟁만 안 나게 하시면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쉼이지만 그런 참된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그 쉼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가 지어지고 아무리 빚에 눌리고 그래도 여전히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가장 큰 중요한 초점은 성도들의 참된 영혼의 변화입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그 교회에 목양의 목표는 포기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변화되는 것, 그것을 주고도 바꿀 수 있을만한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 구도가 늘 유지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지 결국은 메누하의 평강이 결국은 그런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샬롬의 평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참 평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참된 기쁨과 평안 이런 것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산에 있는 모든 나무가 거목이겠습니까? 어제 심은 나무는 묘목이고, 이년 전에 심어서 잘 자란 나무는 중간 크기이고, 그리고 심은지 십 년이 된 나무는 그래서 잘 물을 주어서 자란 나무는 거목이 되었을 것입니다. 산에는 거목도 있고, 몽둥이로 쓸만한 나무도 있고, 빨래방망이로 쓸만한 나무도 있고, 쪼개서 땔감도 있고, 방금 심은 묘목과 같은 나무도 있고, 매일매일 가서 들여다보고 물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나무도 있고 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큰 나무가 작은 나무보고 왜 창피하게 우리 동산에 괜히 와서 심겨서 조그만 게 저리가. 다 커서 오지. 더 커서 어떻게 옵니까. 다 크면 거기서 자라지. 그런 것입니다. 그런 다양성들을 그대로 인정해주면서 그러면서 그 영혼들의 참된 변화를 기대하고 어떻게 하든지 먼저 믿은 우리가 더 헌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가슴앓이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이 희생을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이 눈물을 흘려서라도 이렇게 해서 자라가야 할 사람들에게 쉼의 환경을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여기서 하나님을 경건하게 찾고 영적인 변화를 받아서 그래서 메누하의 평안을 통해서 샬롬의 평화를 누리게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언젠가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거목과 같이 훌륭한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들이 미처 맬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게 되도록 그렇게 배려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건설하고 짓는 그런 것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교회가 모두 지어졌을 때 단 한 사람도 부끄러운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구나. 남이 지어놓은 집에 들어왔구나 하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누구 한 사람도 교회가 지어졌을 때 ‘내 피를 요구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이 교회가 지어지는 것을 통해서 ‘내 신앙이 깨트려졌고 교회를 향한 나의 신뢰,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 이런 것들이 깨졌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십시오. 솔로몬에 의해서 지어졌는데 얼마나 영광 가운데 지어졌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그 여호와의 전에 가득해서 수많은 만조백관과 백성들이 박식한 땅에 엎드려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이 성전이 지어지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심령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뜨겁고 진실한 사랑을 나라 전체가 경건하고 신앙적인 분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솔로몬의 이후에 실패와는 상관없이 사실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다양성들을 다 인정해주면서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 더 많이 가슴앓이를 해야지 됩니다. 입이 좀 부르터도 괜찮습니다. 밤에 잠을 못 자고 괴로워해도 괜찮습니다. 금식을 해도 괜찮습니다. 왜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으니까 주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주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또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노심초사하고 어려워하고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해도 자기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을 비난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서 헌신하지 않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노심초사하고 괴로워하면서 평안한 사람들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각자 각자는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분량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에 하나님께 넘치도록 헌신한 사람들 중에 지난번에 교회를 옮길 때 10원도 안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믿음은 그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 교회에 내가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떠도는 구름과 같이 정함이 없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주시고 나니까 하나님 앞에 넘치게 헌신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각자의 인격을 움직이셔서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을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시기에 하나님이 적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의 참된 변화, 그래서 그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고 새로워지고 변화되는 것, 그런 것들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든지 큰일을 앞에 두고 있지만 교회의 이 평안을 깨트리지 않고, 쉼을 깨트리지 않아서 그래서 언제 어느 때 오든지 교회가 큰일을 앞에 두었어도 교회에 찾아오는 모든 성도들이 교회에 관심의 초점은 정말 하나님을 추구하고 주님 앞에 진실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일에 전념하고 있구나.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변화 받게 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도록 만들어주는 그 일을 해야지 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많이 수고해야지 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조금 섬기면 안 됩니다. 많이 섬겨야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많이 받은 만큼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노심초사하고 마치 자기 혼자 교회를 짓는 것처럼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어가고 마치 태어날 자식들을 위해서 둥지를 준비하는 새들처럼 마치 태어날 자식들을 위해서 그들의 안식할 곳을 준비하는 그 어버이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잘 준비하면서 사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어린 시절 개를 키우셨는데 개가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가마니를 긁어서 부드럽게 만들어 서 태어날 준비를 한다는 이야기)
하물며 우리들이 하나님을 먼저 믿은 사람으로서 영혼을 위해서 일하고 그 하나님 앞에 받은 바 구원의 은혜를 영혼을 위한 섬김으로 갚겠노라고 다짐한 사람들이 그것을 준비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린 신자들이 잘 자라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좋은 믿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짜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냥 가마니 떼기를 치고 천막을 치고 예수, 예수 받은 증거 많도다 하고 구정물이 나오는 그런 교회당에서 가마니를 깔고도 양복바지 버릴 생각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거기에서 예배드릴 사람으로 가득 찬 교회를 나는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중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교회당을 해도 여기서 반수 이상 남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많이 만나주시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새로워지니까 그런 것을 초월할 수 잇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교회를 짓는 것을 무슨 커다란 세속적인 영광을 구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참 할말이 많습니다. 왜 생각이 바보 같고 단순할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그것을 원합니다. 정말입니다. 호롱불하나 걸어놓고 사과궤짝 두 개 겹쳐서 놓고 거기 성경 놓고 주저앉아서 손뼉치면서 무릎 위해서 물이 나와도 게이지 않고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하면서 이 세상에는 우리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은데 하면서 예배드릴 수 있는 그런 교회에서 제가 설교할 수 없을 것 같습니까?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해도 여러분들 중에 다수는 거기에 남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처음에는 안 그랬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많이 받으니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안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장하고 자랐습니다.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사랑이 노심초사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했고, 가지 않아도 되는 심방에 가야지 됐고, 엉뚱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도 엉뚱하다고 이야기를 못하고 그것도 일리가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면서 더 좋은 이야기도 들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랬으면 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처음 예수를 믿고 결단했을 때 순교자의 마음으로 교회에 등록을 하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그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서 주님을 섬기듯이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덩그러니 지어지고 빚만 산더미처럼 있고 사람들의 마음은 산산이 갈라지고 교회는 지어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여호와의 집은 산산이 다 부서져서 폐허가 된 상황이라고 할 것 같으면 거기에 어떻게 영혼들이 와서 정착을 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지체들이 없고 자신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실제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없는 그 아름답게 지어진 교회당에서 그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을 가지면 집을 짓는구나. 이 사실 하나밖에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이 메뉴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메뉴하가 결국은 샬롬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교회가 지어지는데 이처럼 평강의 사람들로 남을 수 있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쁨을 드리는 성도들이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7.지어진 성전의 준공검사: 영광의 나타남
“그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출40:34)
여기에 이 장면은 이제 여호와의 성막이 모두 지어지고 마지막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는 요소라고 보기에는 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마지막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 사건을 통해서 이제까지 많은 재료들을 가지고 지은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의 진정한 집이오 또 그 집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인쳤다는 점에서 볼 때 앞에 여러 가지 요소들을 사용해서 짓는 것을 건축이라고 한다면 여기서는 준공검사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게 이것이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럼 그 사건이 무엇인가 하면 완전히 성막이 지어지고 위에 포장도 치어지고 주위에까지 모두 다 이렇게 완전히 끝났는데 끝났을 때 그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다 지어진 하나님의 집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구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에 충만해서 모세 자신도 들어가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구름이 나타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광야에 들어설 때부터 이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고 이미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이 구름이 나타나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단순히 햇볕을 가리우기 위한 하나님의 어떤 조치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육체적인 평안을 위해서 베풀어주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이 구름이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다라고 하는 것으로서 여기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그런 구름입니다.
성경에서 이 구름이 이런 하나님의 어떤 그 심오한 영광과 관련지어서 나타나는 것이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러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광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모든 죄인들이 볼 때에 그때 그 영광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암시적으로 보여주신 그런 사건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째든 간에 그 구름이 여기서 단순히 햇볕을 피하는 그런 도구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특별한 구름으로 등장을 하고 또 그 영광 이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한 표징,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한 도구로서 이 구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구름을 주목하면서 그 구름이 멈추어서면 그러면 멈추고 그 구름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제 우리가 발행하자. 여기를 떠나서 이제 우리가 길을 떠나자 할 정도로 그 구름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움직이는 광경을 보이는데 따라서 이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과 함께 연관지어서 이제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장면이 나타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교회가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아주 최초로 보여주신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눈으로서 보이는 하나님의 집이 이동식 성막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이 지시하신 제도에 따라서 지어진 최초의 하나님의 집이었다는 점에서 여기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충만한 영광은 이제 이후에 하나님의 집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광야 시대가 모두 끝나고 나서 그래서 가나안 정복 시대가 끝나고 나서 이제 성막이 정착이 됩니다. 몇 번 장소를 옮기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여튼 성막이 정착이 되고 그러다가 다윗의 때에 와서 준비를 해서 솔로몬의 때에 성전이 건축되게 됩니다. 역대 하에 보면 이제 성전이 건축되고 낙성식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성전이 완공이 되어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이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다 기도를 하고 빌기를 마치매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에 가득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을 가지고 몇 년 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가득할 때 한번 시리즈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 여러분들이 연구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거기에 임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박석으로 깐 그 땅에 엎드려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광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 건축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라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확연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한 장소를 분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그 성전이 파괴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지어진 성전이 스룹바벨의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서지고 나서 그 다음에 헬라시대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로마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헤롯 시대대 다시 유대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으로 성전이 지어지는데 굉장히 화려하게 지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 때 본 성전이 바로 그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성전은 신앙으로 지어진 성전이 아니고 정치적인 흥정 가운데서 지어진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역사가 다시 흘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성전의 개념들은 모두다 성취되고 이제 궁극적으로 영적인 교회의 모습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찬란한 영광이 어디서 한번 더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모인 사랑하는 제자들, 사도들이 모인 그 기도회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여기에서 보여주신 성령의 충만한 임재와 그 영광이 바로 이 모세의 성막,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에서 나타내 보여주셨던 그 충만한 영광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인데 그들이 모두 기도한 것이 솔로몬의 성전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닌 그런 그저 평범한 민가에서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거기에 하나님이 충만한 영광을 보여주셨다고 하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큰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교회 되는 것은 이제는 고전적인 성전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기에 모인 그 모임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열납 하실만한 모임이 되었을 때 얼마든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 모세의 성막,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에 보여주셨던 그 찬란한 영적 영광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하는 한 예표를 주님이 던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신약시대에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지어진 ‘센타 템플’ 그러니까 모든 신앙을 가진 사람에 있어서 중앙에 어떤 성전이 있다는 개념이 이제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라지고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진실한 신자의 무리들이 모인 그곳이 이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찬란한 영광을 하나님이 어디든지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원하는 마음과 신실한 마음을 가지고 진리에 입각해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헌신된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 그곳에는 어디든지 하나님이 주권 적으로 찾아오셔서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보여주셔서 그래서 거기가 비록 초막이나 궁궐 같아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 알게 하시며 그 사람들의 작은 무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지 만 주님께로 다가갈 수가 있는가 하는 것들을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시대가 지나다가 이제 마지막에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새 예루살렘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는 다시 하나의 성전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거기에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이제 교회라고 하는 것들이 이제 성경 적으로 이렇게 역사를 타고 흘러가면서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식간 동안 우리가 출애굽기부터 계시록까지 간 것입니다. 다시 이제 출애굽기로 왔습니다.
여기에 돌아와 보니까 이제 하나님의 구름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늘 쓰는 말인데 그 영광이 무엇인가. 사실 히브리어 원어로도 잘 추적이 안 됩니다. 영광스럽다. ‘카베드’인데 ‘무겁다’는 뜻입니다. 뭐 가슴이 시원하리만큼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주 펑 뚫린 만큼 사람에게 시원한 느낌을 주는 그런 설명을 어디서 들었으면 나 좀 가르쳐주십시오. 나는 아무리 찾아도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부지런히 찾은 결과 그래도 근접한 설명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탁월하게 설명하는 것이 없는데 영광의 효과는 설명이 됩니다. 마치 빛이 무엇인가 라고 하면 빛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빛이 있으면 어떻더냐. 그러면 막 빛 없을 때 하나도 안 보이던 것이 보이더라. 이런 식을 설명을 하면 그 빛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듯이 그런 식의 설명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존재가 미치는 영향력인데 그 영광이 나타나게 되면 하나님 밖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썰렁하지요?
주님의 영광 나타나셨네 권능으로 임하시네
죽음에서 날 살리신 주 성령 놀라우신 하나님
주님의 놀라운 영광이 나타났다. 그것이 무엇인가, 주님밖에는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하는 그런 광경을 한번 목격하면서 주위에 있는 동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많이 하지도 못했습니다만 여태까지 내가 하나님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려고 무지 애를 쓰면서 탐구해온 신학지식, 성경의 지식,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 배운 모든 지식, 그리고 수십 년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체득한 나름대로의 신앙의 모든 지식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이 딱 나타나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성경보다도 더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신앙과 신학을 세우는 위대한 작품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씀마 쎄올로키아’입니다. 그래서 신학 대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회 시간에 배우셨습니다. 그 책은 굉장히 방대합니다. 그런데 그 책의 노력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철학을 가지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설명해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틀 자체를 희랍 철학 속에다가 성경의 놀라운 진리들을 담아서 그 철학 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 이렇게 스며들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비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 신학 대전이 결국 완성이 안 되었습니다. 완성이 안 되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주 경건한 수도사였습니다. 신학적인 입장은 우리와 좀 다르지만 아주 경건한 수도사였습니다. 그런데 비하인드 스토리에 의하면 이 사람이 인생의 말년에 하나님을 아주 깊이 만났답니다. 만나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세계를 영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제 필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친구가 쓴 어떤 편지 속에서 그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무엇인가 하면 ‘내가 하나님의 그 찬란한 영광을 본 이후에는 내가 알고 지식과 이 세상에 있는 언어들이 너무나 하찮아서 내가 이미 쓴 모든 신학 대전의 놀라운 내용들이 너무나 지푸라기와 같아서 그 뒤 후속 편을 계속 쓸 수가 없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비슷한 이야기를 누구도 하는가 하면 조지 윗필드라고 하는 전설적인 설교자도 합니다. 무엇인가 하면 요즘은 뜸해졌습니다. 한때는 한국 교회에서도 설교 집을 내는 것이 굉장히 유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들해졌습니다. 그 당시도 조금만 설교를 잘하면 출판업자들이 따라다니면서 이제 설교 집을 내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는가 하면 그 당시에는 녹음기도 없었고 컴퓨터도 없었으니까 이제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속기를 개발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 전속 속기사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막 베껴서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리해서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판업자가 당신의 설교 집으로 출판하고 싶다. 그랬더니 윗필드가 하는 이야기가 당신이 내 설교 집을 낸다고 하셨는데 설교 시간에 번뜩이는 번개와 하늘을 부슬 듯이 땅에 내려꽂히는 낙뢰와 그리고 으르렁거리는 천둥소리까지 찍어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연필로 설교를 베껴서 옮겨 적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예배 시간에 함께 하던 독특한 영적인 권위,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던- 그분은 설교하는 가운데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셨다는 이야기를 가끔 했습니다. 그런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임하는 임재의 광경을 경험한 것입니다. 몇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그런 설교가 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그런 현장들을 당신이 다 인쇄할 수가 있는가. 못하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그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한마디로 영광, 그 자체를 정의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것 같습니다. 아주 적절한 말을 몇 년 동안 연구했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그 순간에는 모든 우리의 예전의 관심이었던 것들이 지푸라기처럼 여겨지고 주님만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제 하나님이 성막이 모두 지어졌을 때 하나님이 거기에 당신의 그런 영광을 충만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이루어진 성막을 얼마나 기뻐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저도 그 성막을 직접 만들어놓은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러나 사진에서 이렇게 많이 봤는데 여러분 만약에 그것을 만들어놓으면 대게 실망할 것입니다. 그 성지순례를 갔다가 온 사람들은 대게 실망을 합니다. 무슨 산, 그래서 어마어마한 줄 알았는데 요만한 동산입니다.
골고다 언덕, 그래서 가봤더니 집들이 다 들어서 있고 그래서 머리 속에 있는 아름다운 상상을 안 깨려고 성지순례를 안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획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든 성막을 지어놓은 실물을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면 오늘날과 같이 화려한 것을 많이 보면서 산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장난 같을 것입니다. 진짜. 하얀 천으로 빙 들러서 여기저기 금이 붙어있다고 하지만 요즘 흔한 게 금인데, 그리고 그 다음에 해달의 가죽으로 이렇게 덮고 그리고 무슨 텐트 같은 것이 하나 있고 그리고 물두멍이 있고 그 다음에 번제단이 있고 그런 것이 뭐 그렇게 놀랍겠습니까? 그것을 다 어떻게 해서 지은 것입니까? 여자들이 핀도 빼오고 장신구도 빼오고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사실 어떻게 보면 조잡해 보이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인데.
중국 자금성에 한번 가보니까 입이 짝 벌어졌습니다. 우리 나라의 궁은 완전히 애들 장난이구나. 한참을 거기 서서 왜 사람들을 중국을 ‘대국’이라고 하는지 거기서 실감을 했습니다. 큰 대자가 아닙니까? 큰 대자. 모든지 다 크구나. 야! 진짜 가보신 분이 여럿이 있을 텐데 상상이 안 갑니다. 그런데 높이가 한 20미터는 되는 성벽이 있는데 과장을 하면 경복궁을 뜯어서 그 문을 집어넣을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대문으로, 그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의 설명을 들으니까 하는 이야기가 한국에서 사신이 오면 저기라고 보여주는데 우리로 말하자면 옛날에 말죽거리쯤 되는 모양입니다. 거기에서 텐트를 치고, 아니면 여인숙에서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언제까지인가 하면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두 달이 될 수도 있고 칠 개월이 될 수도 있고 황제가 영영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황제를 만나러 오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면 그 사람들을 그냥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요만큼 선물을 가지고 오면 황제가 이만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주위에 있는 작은 나라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저기 바다 건너에 있는 일본 사람들까지 황제를 만나지 못해서 안달을 했다고 합니다. 왜 황제에게 가기만 하면 뭘 주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쭉 죽치고 있으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구 들어와. 그러면 눈썹이 휘날리도록 들어가서 만나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축구장 만한 것이 그 당시에 전부다 벽돌을 깔아서, 큰 대리석 같은 것을 깔아서 문을 여는데 저 끝에 문이 보이지 않은데 거기를 한참 가서 문을 열면 똑같은 것이 또 나옵니다. 또 한참 가서 문을 열면 또 나옵니다. 가다가, 가다가 포기했습니다. 돌아갔습니다. 4만 명이 손으로 들고 왔다는 돌맹이에 용을 새겨 났는데 그것을 어디에서 들고 왔는지 모릅니다. 성을 지어놓고 그 성에 외적이 침입하면 막기 위해서 앞에 연못을 팠는데 연못을 판 흙을 갖다가 버린 것이 큰산이 되었습니다. 그런 정도의 궁궐에서 산 자가 중국 황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인데 그런 것이라도 하나 지어놓고 영광이 임하였다면 이해가 가는데 이것 뭐 다 합해봐야 건축비 몇억도 안 들었을 그런 것을 가지고 지어놓고 텐트 그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에게도 체면이 안 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기에 임하신 것은 성전의 크기, 모양을 보시고 임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화려하게 지은 헤롯 성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여호와의 찬란한 영광이 들판에 지어진 이동식 천막식 성소,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에 나타나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은 지어진 성과의 크기라기보다는 그것을 위해서 자기를 드렸던 성도의 아름다운 마음과 그리고 모세를 비롯한 지도자들을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큰 교회당을 지어놓은 사람은 크게 감사하고 작은 교회당을 지어놓은 사람은 조금 감사합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목회자 한사람은 시골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교회당이라고 하기에 좀 그렇습니다. 들어와서 앉으면 한 50명만 앉아도 빡빡한 교회입니다. 부록으로 해서 하얀 칠을 자기 손으로 그렇게 했으니 그것이 대단하겠어요. 그런데 한없이 감격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습니다. 지금은 뭐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말발도 안 서지만 옛날에 우리 지하실에 있을 때 제가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큰 교회를 한번도 부러워해 본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는 지하실이라 냄새도 나고 그랬습니다. 집회를 하러 많이 다녔으니까 큰 교회도 서보았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아주 중심으로 부러워해 본적이 없습니다. 정말 한번도. 나하고 별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힘들게 희생해서 한 것이 아니고 다 조국교회 한 모퉁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우리가 다 소중하지만 그러나 지하실에 퀴퀴하고 축축한 공간이라도 사랑스러웠습니다. 왜 거기서 나의 양떼들이 주님을 만나고 내가 주님을 만나고 우리가 거기서 주님의 말씀에 영광을 보고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니 거기가 소중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교회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손때 묻은 것을 두고 가야지 된다고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쏴합니다. 저기 저곳도 땜질한 것인데, 저것을 색칠하느라고 그때 청년들 데리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저것은 누가 헌금해서 누가 헌신해서 사놓은 것인데, 저것 물 나와서 고생 많이 했는데 저것을 고쳐놓기를 잘했지, 다 하나 하나 사연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소중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 그냥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지 않고 그냥 속만 썩이고 그리고 하나님께 반항만 열심히 하고 엉뚱한 일이나 해서 여기서 지긋지긋하게 고생만 하고 아무 것도 하나님 앞에 열매가 맺은 것이 없다고 하면 아주 지겨워서라도 빨리 옮기고 싶을 것입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목회를 하다가, 하다가 안 된다고 타령을 하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는데 거기 말고 명당자리로 한번 옮겨봐, 그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 지어지는 예배당에 대한 아름다움, 그것보다도 여기 얼마나 좋습니까? 참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 영광이 가져다주는 효과입니다. 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효과 때문입니다. 효과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힘이 하나님의 영광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큰 왕궁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크기에 교회를 지은 것도 아닌데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해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작은 성막을 짓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친 그 아름다운 헌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지도하에서 지어진 아름다운 교회당, 이 모든 것들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너무 기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할 집 자체가 아름답고 귀하기보다는 그것을 짓기 위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모두 모아진 마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이후로 최초로 하나님께 바친 헌신입니다.
그 동안 무엇을 바친 것이 있습니까? 애굽에서 고생해서 살다가 하나님이 능력으로 건져내셨는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래도 광야의 길을 걸어왔는데, 광야의 길을 걸어오면서 그냥 걸어왔습니까? 기적을 보면서도 불평하고 그러면서 걸어왔습니다. 홍해를 누가 갈랐습니까? 그들을 누가 인도했습니까? 그들이 홍해를 건너는 삼일 길을 지나다가 마라에서 쓴 물밖에 없어서 불평하고 투덜거릴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물을 주신 것이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이셨습니까?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친 최초의 헌신이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반응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을 지으실 때 그 당시의 수준으로 볼 때 검소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집이었습니다. 외간에서 보면 검소했지만 그러나 성막 내부로 들어가면 화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람들의 수준에 딱 맞게끔 하나님이 제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그 광야에 내가 애굽의 바로 보다 높지 아니하냐.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나가 자빠졌을 것입니다. 그 광야에 어떻게 바로의 궁 보다 큰 것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도와주셔도 그렇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말을 했더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잖아요. 대답해라. 바로가 높은가, 내가 높은가. 그러면 주님이 바로 보다 높으십니다. 그래. 그럼 바로 궁 보다 조금만 더 크게 지어라.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기다 성전을 지어놓으시고 모이라고 하시고 애들아, 떠나자. 이것은 어떻게 합니까? 애들아 내가 떠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다음에 가서 다시 짓자. 그랬다면 아마 그들의 역사는 성전 짓다가 아마 광야에서 다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합리적이십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합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이동식입니다. '가자' 그러면 걷으면 되는 것입니다. 탁탁 걷어서 메고 앞서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이 딱 멈추면 여기서 쉬라고 하신다. 그리고 펼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막을 중심에 놓고 12지파가 진을 치면서 하나님을 호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왕이시라는 사실을 항상 밤이나 낮이나 보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멋진 하나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보이신 것은 하나의 절대적인 규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백성들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해서 지은 것입니다. 도망 나온 사람들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애굽 사람들이 빨리 가라고 그럴 때 야, 너희들이 더 있어봐야 골치 덩어리다. 빨리 가라고 하면서 챙겨준 것, 그것을 가지고 지금 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아름답게 지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심심지 않은 걱정거리가 무엇인가 하면 3200명 정도 들어가는 예배당에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말씀을 중심으로 교회가 되려면 설교에 잘 집중해서 은혜를 받아야 되는데 거리가 45미터입니다. 축구장 반입니다. 끝에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조그만 교회당에서도- 뒤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있다고 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 집중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곳의 두 배가되고 넓이가 네 배정도 될 때에 저 구석에서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나올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잘 집중하게 해야지 되는데 어떻게 해야지 되겠는가. 막 온갖 생각을 다합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전문가들을 불러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요구를 만족시키게끔 한번 해보라고 하면 장난이 아닙니다. 여기에 이것을 6배정도 크게 해야지 만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잘 보이게끔 이렇게 해보라고 하니까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걱정이 앞섭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마음을 가진 대로 그렇게 완벽한 교회당은 지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못 지을 것입니다.
건축위원들이 모여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이게 우리가 지을 수 있는 가용금액인데 이렇게 해서 빚까지 얻어서 교회를 다 지어놓고 그러면 아마 몇 년 뒤에는 우리보고 그럴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따위로 날림으로 지은 거야. 그럴 것입니다. 아마 그럴걸.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뭔가 날림으로 지은 것 같으면 ‘돈이 워낙 없었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난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상상도 안 가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구하는 그런 요구를 제시하면 얼마나 제가 제시하는 수준이 높은지 세계의 기술이 아직 쫓아오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 말 한마디에 제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상상이 안 갑니다.
정말 그 예배당에서 우리들이 놀려고 가는 것이 아니니까 거기서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정말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하나인데 성도들이 많아지면 그런 환경들이 완벽에 가까워서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이 이것을 헌신하셔서 해놓으셨는데 처음에 할 때는 ‘글쎄’ 그러셨을 것입니다. 이게 없었으면 저 이층에서는 굉장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들 공통된 고백입니다. 특히 이층에 올라가서 보면 시원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만한 데서 이것을 보고 감격을 하는 것이지 이게 만약에 네 배정도 됐다고 하면 저쪽 끝에서는 이게 거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 요구들을 다 참작하면 너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건물 그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킨다고 하는 것은 우리 영향에도 안 되는 것이고 그리고 또 무엇을 갖다가 해놓은들 하나님보다 더 높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개미들이 우리 앞에서 집을 진다고 해서 우리가 감탄할 리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도저히 나도 지을 수 없는 집을 너희들이 지을 수가 있는가 이럴 수가 있습니까? 개미가 집을 지은 것을 보고 개미 녀석들이 이렇게 집을 짓고 사는 구나 생각을 할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어떻게 나도 못 지은 집을 이렇게 크게 지었는가 하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이 바로 그것을 알았습니다. 하늘에 하늘이라도 주님을 용납할 수 없거늘 우리가 지은 이 성전이 어떻게 주님이 계시기에 적합하시겠습니까. 이 사람이 얼마나 탁월한 영적인 인물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이런 곳에 계시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죄송합니다. 하나님은 여기 장소에 묶여있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 건물을 보지 마시고 여기에서 선택한 백성들이 자기를 선택해주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기억해주시옵소서. 야!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그냥 자신의 힘을 다 해서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 자신도 여러분 자신을 만족을 시켜드리지 못하십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그 건물을 통해서 만족을 하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바쳐진 성도들의 헌신, 그리고 그것을 지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고정되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름다운 헌신, 특별히 생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건축이라고 하는 교회에 참여하신 그분들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사한 처지입니다. 하나님께 한없이 받기만 받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매우 특별히 기억나는 헌신을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입니다. 주님께로부터 그 기적적인 은혜,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 만나를 먹이시는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하면서 왔는데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유치하게 핀을 팔고 장신구를 팔아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하나님의 집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으로 보면 갓난아이입니다. 그 갓난아이와 같은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렇게 대견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거기에 대한 응답으로서 보여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로는 주님을 감동시켜드릴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크기나 화려함으로서는 우리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감동시켜드리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분에게는 큰 것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무엇을 보고 어유! 나도 이런 것을 잘 못 만드는데, 크다. 그러실 것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릴 것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아름다운 헌신, 마음을 드리는 진심, 그래서 무엇이든 유형의 것이든지 무형의 것이든지 하나님 앞에 많은 기도, 눈물로 그리고 많은 하나님 앞에 헌신으로 그렇게 정말 각자 각자가 자기에게 소중한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 드리면서 그렇게 섬길 때, 그 교회당이 완성되면 촌스러울 것입니다. 지어놓으면 그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왜 저렇게 시시할까. 그런데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렇게 여러분의 신앙의 수준에서 그렇게 진심을 드린 것을 보고 주님이 당신의 찬란한 영광과 기쁨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무엇인가 하면 영광이 가져다주는 효력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 돌린다는 표현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어지면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고 계속 거스르면 죽는 것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어떤 강제력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제 설명을 하겠으니 들어보십시오. 누가 어려움을 당했데. 왜. 교회 건축하다가 교회가 쪼개졌데. 그리고 목회자를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었데. 그런 이야기가 많이 들립니다.
(예화: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 교육관이 좁아서 헌금을 하게 되었는데 600명 정도의 성도가 모인 상태에 한번에 45억의 헌금이 나오니까 목사님이 욕심이 생겨서 교회당을 헐고 다시 짓고 싶으셨는데 그 문제로 사람들이 마음이 갈라졌다는 이야기)
결국 그 후로 관심이 없어 소식을 안 들었는데 그렇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결국 다 부수고 헌금을 더 해서 아름답게 지었다고 칩시다. 교회당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그럴 것입니다. 저것 때문에 누구도 나가고, 누구도 나가고 그랬다. 저것 때문에 누구, 누구 가 이쪽 파 가 갈리고 저쪽 파가 갈려서 싸웠다. 그래서 교인이 삼분의 일이 나갔다. 20%가 나갔다. 그런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건축이 아닙니다. 교회는 지어졌는데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분쟁하던 인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는 것입니다. 건축 회사에 영광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가 다 지어졌을 때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당을 보면서 술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교회당을 지으면서 누구도 변화 받게 되었고 누구도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누구도 헌신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누가 이 건축을 위해서 애를 쓰고 수종을 들다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하더라. 누가 이 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진짜 하나님의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더라. 누가 이 교회당에 벽돌을 쌓을 때에 질통을 지고 어깨가 벗어지도록 수고하다가 그때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깨트려졌다고 하더라. 그런 이야기는 하나님의 영광의 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교회당을 짓는 가운데뿐만 아니라 교회당을 다 지은 후에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간증들이 계속 나오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건축 후에 준공검사처럼 깃들여져서 그 영향력이 계속해서 미쳐야 하는 것입니다. 건물을 보기만 하면 지긋지긋해서 생각해도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런 것 있습니다.
(예화: 아는 분이 집을 짓는데 처음부터 일이 꼬였는데 땅을 샀는데 사기꾼이고 재판을해서 간신 히 찾아서 집을 고쳐서 쓰려고 다시 측량을 해보니까 옆집 땅과 문제가 있어 헐어버려야 했고 헐고 건축업자를 구했는데 사기꾼을 만나 짓다가 어려움을 만나 수배를 해서 찾았는 데 모르겠다면서 배짱을 부려서 다른 사람을 구해서 지었는데 그 사람이 또 속을 썩여서 바꾸려고 하니까 돈을 많이 달라고 해서 짓기는 지었는데 바가지를 쓰고 나중에 들어가 살 다가 보니까 전부 가짜로 날림공사를 한 사실을 알고 속이 상해 결국 집을 팔고 이사를 갔 다는 이야기)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지어놓은 것보다 잃어버린 것이 더 많다. 상상도 하기 싫다. 다시 교회를 짓는다고 하면 내가 도망간다. 그런 소리가 나온다면 하나님을 인정하게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집이 지어질 때에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영광이 여기에 나타났고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이 일들을 이루신 하나님 홀로 찬송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이들이 확 솟아날 때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해주는 교회 건축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게 하자. 그리고 진짜 빨리 가야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꽉 찹니다. 어물 추물 하다가는 안 됩니다. 빨리 가야지 됩니다. 그런데 바빠도 기쁘게 감사하게 그래서 우리가 이 교회당을 지으면서 영상 설교를 해달라고 설명서를 해 가지고 오라고 하니까 논문을 써왔습니다. 브리핑하는 데만 설명을 다 들으면 5시간이 걸릴 것 같았습니다. 빨리 하라고 해서 2시간 반에 끝났습니다. 머리가 아팠습니다. 세상에 난 1억이면 충분히 끝날 줄 알았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그렇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에게 이런 고민을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이런 고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어져서 그래서 교회당이 다 지어졌을 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 일들을 하셨구나. 우리들이 주님 앞에 드린 것은 매우 작지만 주님의 우리의 헌신을 정말 기쁘게 생각하셨구나. 나는 많은 물질과 재산이 없어서 아버지 앞에 아무 것도 드리지 못하고 늘 눈물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 집을 지으셨구나. 그러면서 참 신실하신 하나님 정말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구나. 그리고 다 지어져서 거기에 영혼들이 가득 차서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운 성도들로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늦게나마 라도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이곳으로 왔구나. 성도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할 수 있는 그런 교회 건축이 될 때 그런 준공검사가 떨어져야지 만 그것이 진짜 제대로 지어진 교회 건축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회가 이렇게 되기를 이제 여러분들이 간절히 기도해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지어지는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