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끊어지도록 슬프게
인자야 너는 탄식하되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겔 21:6)
한 아이가 태어나서 그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장성한 한 사람이 되기까지의 그 모든 과정은 실로 눈물겨운 과정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어린 자녀들이 시집을 가서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그 고생하는 장면은 우리들에게 더더욱 자식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입덧을 하고 고생을 해서 끼니를 제대로 못 잇는가 하면, 가고 싶은데 가지도 못하고 살갗이 터지고 몸이 붓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이 아이를 낳을 때 온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이 아이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그런 도구가 되지요.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그 자매의 어느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지체들이 온갖 고생을 다하고 그리고 고통을 모두 함께 겪으면서 배만 아픈 것이 아니라 온 몸이 다 아파서 그래서 아이를 낳게 되는 것이죠.
제가 얼마 전에 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웠는데 저는 사실 남들이면 그거 뭐 별거 아니겠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내가 실제로 수술을 하고 나니까 얼마나 아픈지 하여튼 말도 하기 싫고 눈도 뜨기 싫어요. 그래서 수면제만 먹고 잠만 자고 싶을 정도로, 저는 태어나서 그렇게 아파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한 40년 50년 가까이 달고 다니던 이 편도가 얼마나 큰지 어느 의사는 자기가 의사된 지 20년 되었는데, 이렇게 편도가 큰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왜 커야 될 것은 안 크고 그 쓸데없는 건 큰지. 그래서 그것을 도려내는데 얼마나 아픈지 하여간 밥을 먹어야 된다고 염려하는 우리 집사람이 아주 원망스러울 정도로, 이렇게 먹을 수가 없다고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아픈데 남이 보면 꾀병 같지만 그게 오래도록 갑디다. 얼마나 오래도록 가는지 아주 견디기 힘들어요. 그래서 우스워도 웃지도 못하고 뭐 웃을 일도 별로 없었지만, 그랬더니 문병을 온 어떤 자매가 그래요. “목사님 얼마나 아프시겠어요.” 그러는 게 아니라, “목사님이 아무리 아파도 나 애 낳을 때보다는 안 아플 거예요, 아마. 걱정하지 마세요.” 그걸 내가 아니라고 부인을 하려면, 내가 낳아보았어야 하는데, 그건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이니, 자기가 그렇다는데.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어요.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죠. 이 에스겔 선지자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범죄 했고,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해서 결국은 이들을 크게 심판하셔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사랑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시기 위해서 선지자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시는데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아가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그렇게 슬피 울어라. 왜? 이제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셨지만, 너희들이 끝까지 불순종하니 이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하였으니 내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구나. 그리고 그들 앞에서 많이 울어라,”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에스겔 선지자를 부르시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는 하나님이 이 에스겔보고 불손한 자기 백성들보고 기도하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이렇게 허리가 끊어질 듯이 슬피 울면, 혹시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초청이요, 기대였습니다. 사실 이 교회는 바로 이 어머니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교회여야 합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세상은 넓고 갈 데도 많지만, 이 넓은 세상 어느 곳에서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울어 주는 곳이 있겠으며, 이 세상 끝 어느 나라 어느 도시, 어느 단체에 가면, 곤고한 내 영혼을 위해서 허리가 끊어질 듯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며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수풀이 우거지고 경치가 좋은 곳은 돈을 주면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무릉도원과 같은 낙원에 간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도달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을 위해 가슴을 쥐어뜯으며 슬피 울면서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는 곳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아름다운 산천초목이 없고, 비록 공해가 가득한 도시 한 복판에 쓰러져가는 건물의 지하실에 물 나오는 곳에 자리를 잡은 교회라고 할지라도 십자가가 있는 그 교회가 바로 낙원입니다. 거기에는 그런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곤고한 영혼들을 위해서 울어주는 그런 사람이 있는 곳,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없기 때문에 눈물 흘릴 수조차 없는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고 어미의 심정으로 울어 주는 목회자가 있고 그리고 성도들이 있는 곳, 그래서 어머니의 품과 같은 교회,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교회도 사람 사는 곳이니,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고, 부딪히는 일들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갈등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살아있으면,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교회가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울어 주고, 또 회심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늘 에스겔 선지자가 허리가 끊어질 듯이 슬피 울도록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주님을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그런 영혼들을 위해서 대신 가슴 아파 해 주고 그들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해 주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의 나라에요.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큰 빌딩과 넓은 주차장은 돈이 있으면 내일이라도 살 수 있지만 교회에 왔을 때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이 사랑을 받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가슴을 찢으며 흐느끼는 성도들의 기도가 있고 허리가 끊어질 듯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마치 자신의 영혼의 운명이 지옥의 벼랑에 선 것처럼 하나님이 저희를 용서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는 눈물의 기도가 있는 그 곳은 교회 이외에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왜 많은 사람들이 위선적인 삶을 삽니까? 교회 와서는 신령하게 예배드리고, 집에 가서는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아내를 패고,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직장에 가서는 부정부패를 하고, 손가락질을 받고 이런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교회가 단지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이런 사람들을 바꾸어 놓을 수가 없어요.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교회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이 많이 무디어질 수 있어요.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좋은 말씀을 듣는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삶은 훨씬 더 이중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드러내 놓고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지만 형식적인 신앙의 껍질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형식적인 신앙의 껍질 속에서 바리새인과 같은 삶을 살면서 속으로는 바쳐질만한 삶이 하나도 없는 위선과 거짓투성이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곳이 또 교회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병원이 깨끗한 곳입니까? 온갖 병자들이 다 모이는 곳이 병원 아닙니까? 병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병원에 모였던 것처럼 죄인이기 때문에 교회에 모였습니다. 깨끗해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죄인이었던 사람, 아직도 죄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병원이 아무리 더러운 불결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할지라도 이 지상에서 병원이 병을 나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주는 곳이듯이 죄인들이 많이 모여 있어도, 그 죄인들이 새로운 사람들이 되리라고 하는 기대를 안겨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교회야, 교회 밖에 없어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오랜 인생을 살아도 바뀌지 않는 게 사람이잖아요. 주님의 은혜를 받은 여러분들조차도, 사람이 얼마나 바뀌지 않는지는 여러분 너무나 잘 알잖아요. 나는 뼈 속 깊이 박혀있고 스며들어 있는 나예요. 나는 내 속에 뼈 속 깊이 베어있고 스며들어 있어요. 내가 내 속에 그렇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내가 보통의 은혜를 받지 아니하고는 객관적으로 내 안에 있는 있어서는 안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너무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올바른 말을 해 주어도 그 사람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자기를 보여주어도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지 않는 거예요.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그것을 수긍하지 않는 거예요. 많이 가르쳐주면, 마음속에서 “너나 잘해라, 이 자식아.”그런 생각이 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 안에 뭐가 있는지 보여주어도 혹시 잘못 된 것을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죄인이 얼마나 교묘하게 피하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나만 그런가 뭐, 다 그러지, 다른 사람은 내버려두고 왜 나한테만 그래, 뭐 어때!’ '그래, 다들 잘 났다, 난 이대로 살 거야.‘ 이게 바로 우리 인간의 마음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많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의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이 그 교회에 모일 때마다 자기 깨어짐과 회심의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오늘 다른 교회에서 온 전도사님이 오셨어요. 그래서 같이 신학적이 대화를 하다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 목사님은 어떻게 원고도 안 보고 설교가 그렇게 줄줄줄줄 나와요?” 그러면서 자기는 설교를 하는데 너무 힘들고 하루 종일 원고를 작성해서 설교단에 올라가면 앞이 캄캄해진대,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곧 밝아 질 거다. 곧 밝아지는데 어떻게 해야 밝아지냐 하면, 설교를 잘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착한 신자가 되려고 노력을 하면 저절로 깨달아진다.” 그러나 좋은 신자가 저절로 되는 줄 아냐. 여러분 좋은 신자가 저절로 되는 것 같아요? 돌맹이가 산에서 떠 오면 그냥 돌이지 그게 뭐예요. 개울에 던져서 발로 밟고 지나가는 그런 돌에 지나지 않잖아요. 그것이 진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끄는 정말 가치 있는 작품으로서의 돌이 되기 위해서는 장인의 손마디에 무수히 피가 나고 정으로 맞으면서 피가 나고 손톱이 몇 번 빠지고 그러면서 그 돌들이 다듬어져야 해요. 그 때에 가치 있는 작품이 되는 거예요.
똑같죠.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 최고의 영광,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그 속에서 자기 깨어짐과 성실한 참회가 있는 것, 그렇게 될 때에 우리 모두가 부족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렇지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잖아요. 그래서 우리들이 나 중심적인 삶을 살고 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았던 것을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이제 붙들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붙들기로 다짐해요. 어거스틴의 고백과 같이 인간은 어디에서 쓰러졌든지 쓰러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해요. 어디서 넘어졌든지 간에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데 그렇게 일어서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자신의 죄에 대한 진실한 참회에요. 그러니 비록 그 사람이 좀 부족하고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인간성의 바탕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잘못되고 악한 사람이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깨뜨려져 자기가 변화되고 새로워져서 그래서 깨어질 때마다 예수 죽인 것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는 사람이 더 훌륭하겠어요? 바탕이 좋은 사람이 절대로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는 일이 없이 완고하게 자기사랑과 고집 속에서 그럴싸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은혜를 받은 많은 성도들에게는 이런 자기 깨어짐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성령님으로 살아계셔서, 그들 가운데 계신 성령님이 기회 닿을 때마다 그들을 하나님이 깨뜨리셔요. 그래서 인생의 고비 고비 마다 모진 자가 깨뜨려지고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하나님께서 그 굽이에서 자기의 잘못을 생각나게 만드셔요.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게 하심으로 자기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시고 때로는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을 통해서 혹은 가지고 있던 소유를 잃어버리는 것을 통해서 때로는 그 지위를 낮추심으로서 이 세상의 잠세적인 모든 사물들이 지나가는 것이고, 영원히 붙들고 의존해야할 영속 하시는 하나님 이외에는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참회의 눈물을 통해서 씻기셔서 그래서 그 모든 눈물 속에서 이 세상의 헛된 기대들이 모두 사라지게 하시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깨뜨려지면서 자기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조금 시험에 들거나 혹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해도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시간이 좀 흐르면 하나님이 언젠가 그들을 깨뜨리셔요. 그러면 하나님이 내 마음 아프게 한 것도 후회하게 하셔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앞에 올바른 사람들을 높여 주셔요. 걱정할 것 없어요. 교회에서도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이 뒤로 물러나고 마음이 좀 꺽어지고 그래도 그렇게 큰 걱정은 안 해요. 왜냐하면 완전히 꺽어질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하나님이 깨뜨리셔요. 그렇게 야단을 쳐도, 혹은 논리적으로 따져도, 혹은 사랑으로 권면을 해도 깨뜨려지지 않던 사람들이 주님이 오셔서 어루만지셔요. 그러면서 마음을 녹이시지요. 그 때에 깨뜨려져요. 정말 깨뜨려져요. 그렇게 해서 깨뜨려지고 나면 자기의 모든 죄를 깨달아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파하지요. 그러면 변화되고 새 사람 되잖아요.
누가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나겠어요? 주님 감격적으로 만나고 이제껏 1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안 깨뜨려진 사람 있으면 나와 보세요. 특히 우리가 이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 우리를 자주 깨뜨리시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문제는 이 깨뜨려지는 것이 드물면 드물수록 깨뜨려진 다음부터 그 다음 깨뜨려질 때까지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살기에는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때가 있는데 그 사이가 너무 길어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그 양쪽 때에 밝은 빛이 환하게 들어왔다면 이런 때가 많으면 이 사람의 인생길은 환한 길인데 이 두개의 길이가 너무 멀어. 그러면 중간에는 어두움이 가득한 거예요. 거기가 바로 우리가 길 잃어버리고 산 시간들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에 모였을 때에는 사실 일주일에 한 번도 너무 멀어요. 그보다 훨씬 자주 모일 때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는 거예요. 사람 앞에 높아지고 교회 밖에 있을 때 강퍅해졌던 마음, 혼자 있을 때 염려와 근심으로 인해 무너지던 마음들이 예배 중에 모였을 때 지체들과 함께 모여서 찬양할 때, 형제들과 함께 모여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성도들이 모두 모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분을 경배할 때에 그 때에 주님이 임하셔서 죄인들의 마음을 두드려 낮추시고 좌절하고 쓰러진 마음을 가진 불쌍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셔서 모든 성도들이 자기는 상한 갈대와 같았는데 주님이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데도 자기를 끄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누구의 강요도 없이 진실하게 참회할 수 있어요. 깨어질 수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이기고 슬픔도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강함과 약함은 백지장 한 장 차이에요. 인간은 한 없이 강한 존재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너무나 연약한 존재가 돼요. 어떻게 그렇게 강한 사람으로 시종일관 살 수 있겠어요. 그렇게 주님께서 깨뜨리실 때,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해. 그래서 내가 예수의 손에 붙잡혀 살고, 비록 내가 잘못한 일도 있고, 그리고 내 안에 많은 근심이 있고, 다른 사람 아무도 알지 못하는 무거운 십자가 있고, 오늘이라도 이 날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 주님과 함께 안식할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를 감당하게 하는 이 모든 힘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붙들고 있는 주님에게서 나와요. 주님이 나를 붙들고 그리고 이 폭풍우 같은 세상의 한 복판을 지나갈 때, 그 때 이길 수 있어요. 정말 이길 수 있어요.
교회를 하면서 때로는 견디기 힘들게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사연을 주님만이 아시겠지요. 그 때마다 생각합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그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도 하나님의 나라를 앙모했구나.’ 그것을 깨닫게 돼요. 지금도 항상 힘들고 너무나 괴로울 때 그 때 항상 어김없이 이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찬송이 있어요.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그러면서 성도들이 매번 모일 때마다 하나님 앞에 깨뜨려져요. 그 때에 우리 안에 주님 없이 살려고 하고 예수 밖에 어떤 행복이 있는지 까치발을 들고 넘보려고 했던 세상을 향한 마음들이 잘려나가게 되지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없이 때문에 주님을 깊이 의지하게 됩니다. 그 때 깨뜨려져요. 깨뜨려지면서 ‘하나님 나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예수의 손에 붙잡힐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애통해하며 오늘 이 선지가의 표현과 같이 허리가 끊어질 듯이 슬피 울 때, 그에게 자부심이 있습니까, 그에게 자존심이 있습니까? 그가 하나님 말고 의지할 곳이 있습니까? 하나님 말고 어디 딴 데서 오는 기쁨이나 달콤한 행복 같은 것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까? 신앙 팔아서 이런 것들을 얻어 보려고 하는 무모한 마음이 그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없잖아요. 이게 교회의 영광이에요. 그래서 누가 그래요. “목사님은 왜 우리를 그렇게 예배시간마다 눈물나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우울하게 하냐고 그러는데 그렇지 않아요. 눈물이 걷히고 나면 환희의 순간이 찾아와요.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울고나면 주님이 당신의 품에 안아주시는 희열을 경험하게 되요. 슬피 울면 노래할 때가 와요.
그래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늘 일어나요.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해요. 그곳이 초막이면 어때요? 궁궐이면 어떻고 천막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노천이면 뭔 상관이 있어요? 그렇게 주님 때문에 아파하고 흐느낄 수 있는 그래서 자기가 깨뜨려질 수 있는 이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이 불순종하면 당하게 될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를 피할 수 있어요. 오히려 하나님의 큰 사랑이 주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나면 평안이 와도 그 뒤에 위험함이 있지만, 이렇게 깨뜨려져서 주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그러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봐요. 며칠 전에도 새벽기도 시간에 보니까, 몇 사람이 그렇게 아파하면서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요. 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 난 들을 욕망도 없지만, 나도 함께 회개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믿어져요. 저가 아무리 많은 잘못을 하고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예수의 못 박히신 팔에 다시 한 번 못질을 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허리가 끊어질 듯이 하나님 앞에 흐느끼고 통곡하며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찢어짐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데 저런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정한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다, 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교회는 항상 새롭게 시작되는 곳이에요.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곳. 그래서 모든 무거운 죄와 얽매인 모든 실패들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는 오네시모와 같이 무익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주님 앞에 그렇게 뉘우치고 새로워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도 나는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의지해서 그대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용서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 용서의 은혜를 깊이 간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해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서 그 분의 품에 안기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러한 은혜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은혜 생활을 하면 돼. 그런데 이런 은혜의 세계가 처음부터 없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예수께 접붙여지지 못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세계가 없어요.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기도하다가 깊이 깨뜨려지고, 그리고 주님 거스르면서 살았던 것을 뉘우치면서 그럴 수가 없어요. 그들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어요.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나님이 못하게 하시기 때문에 일정한 겉모습으로는 교회에 나와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마음의 움직임이나 영혼의 취향, 판단, 의지, 정서, 선택하는 모든 것, 그리고 실제로 살아가는 실천적인 모든 삶이 근본정신이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상태에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원수 되나니,’ 그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그 때에 그 사람들을 교회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잉태하고 있는 태아인 것처럼 생각을 해야 한단 말이죠. 아직 낳지는 못했지만 잉태하고 있는 태아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들이 아파하지 못하는 그것을 교회가 엄마의 마음으로 대신 아파해줄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교회가 아파해준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그러한 은혜의 마음을 주셔서 그렇게 자기 스스로 아파할 수 없는 지체의 회심하지 못한 상태를 인해서 깊이 아파하는 거예요.
오늘 이 에스겔 선지자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 에스겔 선지자를 얼마나 사랑하셨어요. 선지자로 불러주시고 주님이 수시로 나타나셔서 계시의 말씀을 주셨어요. 하나님의 심판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요절내실 때에 그렇게 사랑하시던 에스겔의 목에 칼을 겨누시겠어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는 마치 자기가 함께 심판을 받고 죽을 것처럼 허리가 끊어질 듯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슬피 울어야 했어요. 하나님이 명령하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 마음 그 심정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죽고 자기는 살고 하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하나가 되어서 그렇게 아파하며 슬피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이미 믿은 성도가 깊이 깨뜨려지고 신앙과 삶이 다른 외식을 철저히 청산하는 자기 혁신이 있을 때에 그 사람이 비로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울어줄 수 있는 것이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원수 같은 짓을 하면서 살아가는 부패한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불쌍한 영혼을 위해 통곡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다른 사람의 불쌍한 또 다른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려 줄 수 있는 거라 이거에요. 그래서 나는 감히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어요. 한 사람의 영혼의 건강한 상태는 남의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 흘릴 수 있는 지에 달려 있다 이거에요. 그 눈에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한 눈물이 그쳤다면,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의 영혼 때문에 가슴아파하고 회심하지 못한 비중생자의 영혼 때문에 아파할 수 없다면, 그는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 있는 부패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눈물 흘릴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진 사람이다 이거에요.
예수님이 바로 꼭 이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면서 늘 일생을 사셨어요. 그래서 그 분의 생애는 눈물과 통곡의 생이었어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뜨려졌기 때문에 참회하기 위해서 흘리는 그런 통곡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완벽한 평화 속에서 사셨고. 심지어는 십자가에서도 그러셨어요. 주님이 그렇게 가슴아파하며 눈물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은 바로 범죄 한 우리들, 회개치 않는 우리들, 아직도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우리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서, 그야말로 허리가 끊어질 듯이 슬피 우는 생애를 33년 동안 이 세상에서 사셨던 거예요. 특별히 공생애 3년 동안 그렇게 모본을 보이시면서 사셨던 거예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예수의 마음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렇지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교회에는 예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주님의 마음을 품고 교회 안에 있는 비 회심자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다보면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보게 돼요. 그리고 우리의 영혼먼저 고쳐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 때에 강한 은혜를 주는 소망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하늘을 가르시고, 부으시는 성령의 거룩한 능력, 인간의 말에 불을 질러 죄인들의 가슴을 태워버리시는 성령의 부흥의 강력한 역사, 이것 없이는 결코 하나님과 원수 된 비 회심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닳고 닳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고, 그들의 영혼은 어두움에 꽉 차 있고, 생각은 허탄한 것에 굴복되어 있고, 정서는 이 세상의 욕심으로 타오르고 있고 총명은 가려져 있습니다. 돌아오지 않습니다. 정말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런 일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정말 심령이 가난해지고, 그리고 정말, 눈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 바라볼 수밖에 없는, 배가 바다 위에 떠 있지만, 바닷물을 마실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많은 방법과 계획들이 옆에 있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 모든 것을 사용해도 도저히 못하는 것이 있어요. 거듭나지 않은 완고한 죄인들의 심령을 깨뜨려 하나님 앞에 그 뼈가 어그러지게 하고 그 마음이 물같이 쏟아져 내리게 하고 그래서 돌같이 굳어진 그 뺨에 회개의 눈물이 흐르게 하고,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거스르며 살아왔던 많은 죄들을 회개하고 우리와 함께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참된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되고 성령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 하셔야 합니다. 그것도 보통 은혜가 아니고 하늘을 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같은 은혜를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슬비 같은 은혜를 어떤 사람들에게는 폭풍우와 같이 방망이와 같이 그들에게 임하여야 합니다.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부으시고, 심령 한사람 한사람도 어김없이 그들에게 참회의 불을 붙이시고, 그래서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산산이 깨뜨려 그 속에 속살처럼 담겨져 있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주님께서 새롭게 창조해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완고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예수 죽인 것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깊이 회개한 뒤에 힘없는 사람들이 되어서 우리의 팔에 기대어 우리로부터 들려지는 달콤한 하나님의 나라의 말씀을 듣게 될 때에 우리의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많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야하고, 주님의 그 은혜를 전해주고 나눠주는 그런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교회에 이런 복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적, 거의 없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이번 주일에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회심의 은혜가 금요일에 여러분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것 그것 때문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최근에 여러분들이 언제 모여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 보셨습니까? 오늘도 우리들이 그렇게 간절히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번 주일에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않고 우리가 그렇게 할 사람처럼 주님께 생각조차도 되어지지도 않는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허리가 끊어질 듯이 그렇게 슬피 울며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셨겠습니까? 할만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신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최근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한동안 내 마음 속에서 잊혀졌던 그런 갈망들이 간절히 다시 살아나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일에 온통 힘을 기울이면서 설교를 해 왔는데 요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간절한 갈망은 다시 부흥이에요. 빈들에 메마른 풀같이 아무 힘이 없는 영혼들, 마른 뼈와 같이 아무런 기력이 없고 생기도 없이 느껴지는 수많은 영혼들, 눈물을 흘리며 설교하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수많은 교재들을 만들어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권면하고 그래도 결국은 하나님의 부흥이 없이는 안돼요. 하늘을 가르시고 임하시는 거룩한 부흥, 크고 놀라운 부흥의 놀라운 역사가 임할 때, 그 때에 영혼들이 도저히 회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호도 믿어지지 않던 강퍅한 영혼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편이 안 죽으면, 아내인 여러분이 두 번 죽어야 해요. 그러면 되잖아요. 한 번은 그대들 자신을 위해 죽고, 한 번은 남편을 위해 죽고. 아내가 죽지 않으면 남편인 그대들이 두 번 죽어야 해요. 한 번은 자기를 위해 죽고, 한 번은 아내를 위해 죽고. 자식들이 안 죽으면, 두 번 죽어요. 자식들을 위해서 두 번 죽고, 부모님이 죽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두 번 죽고. 그러면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게 하십니다. 믿습니까? 사랑하게 하십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