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믿는 그대에게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 7:10~14)
I.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결혼과 부부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결혼과 이혼의 불변성에 대해서 강조점을 두고 설명하고, 불신자와 부부로 살아가는 결혼생활의 실제적인 원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사변적이고 정적인 교리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매일의 삶속에서 겪고 있는 상활들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한쪽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신자가 되고, 또 다른 쪽이 불신자일 때 이러한 결혼의 상태가 개인의 믿음의 생활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II. 결혼의 원리
이 문제에 접근하기 전에 먼저 결혼의 원리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성경적으로 볼 때 결혼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한 사람이 똑같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또 다른 사람과 남자와 여자로서 결합함으로 부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한편이 불신인 상태의 부부관계에 대해 성경이 말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불신 결혼을 허락하거나 격려하기 위한 내용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 주위에는 불신자와 만나서 결혼을 했지만 비교적 행복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교회에서 우리와 만나는 사람들이고, 그런 결합에 실패한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비교적 성공적인 케이스만 눈에 띄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불신자와의 결혼도 상당히 매력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는 어려서부터 결혼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주고 믿는 자들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성경의 사상들을 확고하게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젊은 시절에 확실하게 회심해서 믿음의 형제, 자매를 짝으로 찾게 하는 것이 좋은 교육입니다.
그렇지만 뜻밖에도 불신자와 깊은 사랑에 빠져서 도저히 이 사람과는 결혼을 안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남자를 사랑하거나 그 여자를 사랑하면 기다릴 수 있을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신자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결혼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III. 불신자와의 결혼생활
오늘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부부 두 사람이 모두 불신상태로 있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하게 회개해서 믿음을 가졌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앙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배우자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 오늘의 가르침입니다. 물론 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영적인 자녀가 되었고 한 사람은 불신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불완전한 결합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서로 달라졌다는 이유 때문에 서로를 버리는 것은 성경이 지정하고 있는 혼인의 원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떤 가르침을 상세하게 줄 때는 그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이 나온 것입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이 편지를 주었을 때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크게 세 가지의 세속주의의 물결이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고린도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분파주의적인 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갈리고 나뉘었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로서 많은 무역이 이루어지고 재화가 유통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사랑의 정신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또 하나는 문란한 성문제였습니다. 희랍어에서 ‘고린디아조마이’라는 단어는 성적인 탐닉을 뜻합니다. 고린도의 타락한 양상들이 교회에 스며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이 불신자로 있다가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신자가 되었는데 불신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신앙적으로 옳은가, 믿지 않는 자와는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혼인 생활을 지속해야하는지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 대두되었습니다. 또 실제로 불신자일 때도 같이 살기 싫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신앙과 불신앙이 부딪히면서 부부관계가 더 어려워지자, 신앙을 가진 쪽의 사람이 슬그머니 혼인 관계를 종료시켜 버리고자 하는 유혹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성경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기록한 것입니다.
A. 갈라서지 않음
그러면 불신자와의 결혼생활에서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갈라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신자로서 불신자와 결혼을 한 경우이거나 둘 모두 불신 상태였다가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신앙과 불신앙의 상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경우이든 간에 신앙의 있고 없음 때문에 결혼을 해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서로 다른 영적인 세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 때문에 많은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불신자로서 살아갈 때도 성격이 안 맞고 가치관이 달라서 갈등을 했는데 남편이나 아내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런 갈등은 더 깊어지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대상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하거나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치관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전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던 사람이 이제는 신령하고 거룩한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의 정신적인 결합에 더 큰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공감하는 부분들이 더 줄어들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있던 갈등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아내 혹은 남편이 처음 회심해서 자신의 남편과 아내에게 못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무지와 영적인 미숙함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교회에서 보면 아내가 먼저 예수를 믿고 남편은 여전히 불신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남편이 먼저 예수를 믿고 거듭났는데 아내가 불신상태에 있어서 남편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저렇게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전도하는데도 안 믿는 것을 보면 그 남편이나 아내가 아주 강퍅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면 그들이 특별히 강퍅해서라기보다는 먼저 믿은 아내와 남편이 잘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런 것입니다. 아내가 먼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면서 추하고 더러운 세상과 아름답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조가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선과 악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은 영적인 피조물이라서 자기를 입술로만 사랑하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를 말하지 않아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아내가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랑을 바치면서 살 때 남편은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눈에 보이는 남자라면 질투라도 할 텐데 그 대상이 그리스도입니다.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을 해서 그분께 깊이 빠지게 됩니다. 이 세상은 모두 허무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상하게 자기가 그 세상 속에 들어있다는 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더니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기가 아내의 관심사가 아니고 모든 관심사가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월요일은 원래 교회에 가고, 화요일은 화가 나서 가고, 수요일은 수수하게 가고, 목요일은 영적으로 목마르다고 가고, 금요일은 금새 갔다 온다고 하고 가고, 토요일은 어쨌든 또 갑니다. 이러면서 일주일 내내 교회에 가서 삽니다. 그러면 남편입장에서는 당연히 불만이 생길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왜 교회에 가냐고 하지는 않지만 왜 이런 것은 안 해주고 이런 것은 잘 못하느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예수를 믿는데 남편이 시비를 거니까 어려움을 느낍니다. 이때 선과 악의 구도, 영적 전쟁의 구도, 마귀와 하나님과의 구도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이것이 모두 자기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생기는 핍박과 시련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것을 인내하고 싸워서 극복해야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 동안 자기는 상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배우자에게 인격적인 상처를 주는데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심각한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말씀을 깊이 배우고 성경을 이해하고 나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죽을 때까지 그 눈을 못 뜨고 죽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느 정도 철이 든 다음에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관계를 고쳐보려고 할 때는 이미 너무 많은 갈등으로 골이 깊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남편이나 아내의 마음에 방어기제가 되어서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는 믿고 싶지 않다.’라는 확고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라서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이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와 불신자이기 때문에 넘어설 수 없는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부부로서 할 수 있는 한, 사랑하고 화합하면서 살아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B. 다시 화합함
두 번째는 다시 합치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괄호로 되어있습니다. 앞 절에도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고 주시라”고 할 때 둥근 괄호가 나옵니다. 이것은 주석에도 잘 안 나오지만 설명을 드리자면, 희랍어 성경에서는 어떤 부호도 나오지 않는데 사도 바울이 쭉 써내려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것을 후에 번역을 하고 편집하다가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고 주시라”는 구절이 삽입구니까 문맥을 끊지 않도록 이것을 괄호에 넣은 경우입니다. 희랍어 성경 네슬알란트 28판에는 11절에 나오는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는 구절이 하이픈(-)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사도 바울이 썼다기보다 그 후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쓴 내용들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보충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본에 계속 들어가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유대인의 대표적인 기도 구절이 주기도문 뒤에 삽입되었듯이 이 부분도 괄호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괄호 속의 내용을 첨가해서 넣었다면 영감 된 말씀이냐 아니냐는 논쟁이 나올 수 있지만, 이 내용이 앞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보충하고 설명하기 때문에 글자보다 내용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혼을 했을 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하나는 독신으로 살든지 아니면 본래의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둘이 모두 불신자였다가 한쪽이 신앙을 가진 상태에서 헤어졌다면 여전히 한쪽이 불신자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합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갈등을 일으켜서 헤어졌는데 불신상태였던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형제자매가 되어 다시 만난다면 가장 이상적인 결합이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원래의 부부관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본래의 남편과 아내로서 가지고 있던 의무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속에서 부부관계의 의무를 다하여야 하는 것은 물론 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종종 남편과 아내가 헤어졌다가 그 후에 남편과 아내가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서 헤어진 남편이나 아내를 찾아가 화합하여 다시 한 가정을 이룬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면 아까 말씀드린 혼인 절차에 따라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돕고 기다린 후에 결혼을 하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부부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본성적인 단점과 결함들이 아직은 고쳐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결합을 할 때는 자신이 그 사람과 부부관계 속으로 들어가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감당하고 온전한 부부관계를 이룰 수 있는지 진지한 고려가 선행되어서 경솔한 재결합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도는 이혼을 했다면 독신으로 있든지, 다시 그와 화합하여 가정을 이루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C. 거룩하게 함
여기서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라는 구절입니다. 오늘 성경은 불신자와의 결혼 생활이 불신자를 거룩하게 성격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씀을 좁은 의미에서 그 사람이 거듭나고 중생하고 구 받고 성화되어서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거룩하게 되다”라는 말의 뜻은 남편이나 아내가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면서 불신상태인 배우자와 함께 살게 되면 그들이 남편이나 아내의 신앙 때문에 저절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결합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믿는 아내나 남편과 함께 살면 이교적인 환경과 노골적인 무신론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보호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사람이 공무원인데 그는 불신자였습니다. 예전에는 관공서를 건축할 때도 고사를 지냈습니다. 지하를 파고 관서장이 판공비에서 돈을 대고 사람들이 절을 하면서 돼지 머리에 만 원짜리를 꽂아줍니다. 터줏대감한테 고사를 지낸다고 하는데 터줏대감이 복을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심술이나 부려서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과 미신적인 습성이 결합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불신자이지만 아내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우상에게 절하고 미신을 섬기는 것을 아내가 매우 더럽게 여기는 것은 알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거룩하게 되나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불신자 남편은 신자인 아내와 살면서, 불신자 아내는 신자인 남편과 함께 살면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실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은 불신자인데 아내가 주일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대중교통을 두 번씩 갈아타면서 가니까 안쓰러워서 차로 태워다 주는 것입니다. 이사를 가고 나니까 데려다주고 오기가 너무 멀어서 차에서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제 설교가 길어지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설교가 짧으면 일찍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교회 안내위원에게 들켰습니다. 안내위원이 차에 계시지 말고 로비에 앉아 계시라고 해서 로비에 들어오고, 거기 있을 바에야 예배당 안에 들어가 계시라고 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거룩함의 효과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남편, 혹은 불신상태에 있는 아내를 진실하게 사랑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114에 전화를 하면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하는데 저는 싫습니다. 길거리에도 여기저기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써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떠벌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도 사랑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결혼과 함께 이루어지는 사랑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할 텐데 기독교인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랑을 끈끈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녀가 사랑할 때 피가 빨리 돌고 상대방을 보고 싶고 헤어져도 그립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의식과 마음을 꽉 채웁니다. 그렇게 사랑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 적절하게 정욕적인 사랑도 동반됩니다. 그렇게 사랑을 하고 받으면 기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이런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확대되는 것이라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가페테’,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 사랑은 한 사람에게 집착하고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있는 사랑이 전 인류적으로 확장된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남녀가 뜨겁게 사랑할 때 오가던 독특한 사랑의 정동을 온 인류에게 확장해서 느껴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그런 종류의 사랑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은 누군가에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서 집착하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랑의 질서들을 파괴하는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젊은이들, 이미 시집가고 장가간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종류의 극단적인 사랑을 갈망합니다. 이상적인 사람은 TV에만 나오고 남편과 아내는 이상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 격차만큼 이 사람에게는 나를 향한 사랑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기독교만큼 가르침의 원천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사랑을 이해하는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부부의 성에 대해 상당히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휴머니스트들이었다는 것을 설교시간에 두 번 정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 같은 경우, 아주 엄격하게 성경을 따르는 사람들인데도 아내나 남편이 성적인 불구 상태에 있다는 것을 교회에 호소하면 교회에서는 적절하게 심사해서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적극적인 해석으로는 부부가 되었으면 성에 대한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부부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고, 소극적으로 보면 인간은 정욕에 흔들릴 수 있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쪽이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으므로 이혼을 허락해서 교회에 악이 번성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혼인을 거룩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정욕이 불같이 일어난다면 결혼을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결혼은 인간의 가장 세속적인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인류에 있어서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결합이며 신비한 일입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어떤 사람이 어떤 목적을 지향하고 어떤 종류의 사랑을 하느냐에 기반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부부 중 한 쪽이 성적불능의 상태가 되었을 때 이혼을 허락했다는 것은 마냥 좋게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육적인 정동에 예민합니다. 사랑에 빠지면 너와 나를 분간할 수없이 일체의 관계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사랑도 전적으로 배타적이어서 교제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곁눈질도 못할 정도로 독점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한 인간이 인간성을 완성해가는 발전의 과정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렸을 때는 미숙하기 때문에 엄마를 독차지 하려고 하고, 엄마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만 해도 심통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이가 들어 늙어가면서 똑같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랑의 충만함이 아니라 인간성의 결함입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정욕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남편의 몸은 아내가, 아내의 몸은 남편이 주장하면서 서로의 영적인 요구를 채워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렇지만 한쪽이 성적인 불구 상태가 되었을 때도 그것을 초월해서 넘어설 수 있는 사랑이 진정으로 성숙한 사랑입니다. 젊었을 때는 육욕에 들떴다고 할지라도 부부가 되어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성적인 영역이 너무 결정적인 나머지 그것이 없을 때는 부부관계를 지속 할 수 없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사랑일까요?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와는 다른 여자, 남자를 만나서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끈끈이같이 달라붙어서 평생 뜨거운 사랑을 빨아먹고 사는 망각적인 사랑의 몰입이 아닙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해가는 아름다운 과정이어야 합니다. 결혼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자기 같은 사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너무 무거운 의무를 동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TV에 나오는 것 같은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집니다. 드라마에서 보면 재벌 아들이 백화점 점원이나 알바를 사랑하는데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심리의 약점만 노리고 꼬치에 꿰어 던지니까 사람들이 거기에 미치듯이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감동받는 사람은 알바나, 평사원, 비정규직으로도 회사에 들어가기 힘든 자매들이지, 진짜 재벌집 아들들은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성의 완성은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서는 알을 깨고 ‘아프락사스’로 들어간다고 나오는데 ‘아프락사스’는 선과 악의 융합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아집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깨뜨리는 것이 사상적인 회심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고 우주적이고 충만한 하나님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게 회심입니다. 달걀껍질 속에서 생각했던 사랑과 그것을 깨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펼쳐진 우주적인 질서 속에서의 사랑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은 껍질을 깨고 바깥으로 나왔으면서도 이것을 제대로 못 보니까 이기적이고 육욕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이고 끈끈이처럼 달라붙는 사랑을 생각합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누군가를 구속시키고 자유를 짓밟는 사랑을 우주 속에 투영시키고 확장시키면서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랑의 특징은 절대로 확장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생각할 때 그런 환상을 가진다면 오만해지거나 아주 낙심하게 됩니다. 일생을 지내도 나에게 그런 사랑으로 다가와 생명을 버리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은 이 사랑에서 탈락되고 소외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은 모두 시집가고 장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의 사랑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부부는 처음에 끈끈이 같은 사랑으로 시작하지만 눈을 뜨고 지식의 세계와 우주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 나타난 아가페 사랑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서 사랑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어갑니다. 마침내 부부가 함께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친구처럼 동지처럼 육욕적인 요구를 뛰어넘어 서로의 존재 때문에 기뻐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될 때 그게 진정으로 성경이 그리고 있는 사랑의 완성이고 인간성의 완성입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자기와 가치관이 전혀 다르고 영적인 세계가 다른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내의 눈높이로 낮추어서 그가 고민하는 바를 이해하고 소통하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가 자신의 헌신과 사랑에 의해서 주님의 은혜로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그 안에서 자기완성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람들이 너무 찢어지고 갈라져서 소외감을 느끼니까 사랑에 대한 강한 욕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랑은 성경에서 그리는 모든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맑은 사랑이 아닙니다. 맑지 않은 사랑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인 것처럼 둔갑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그릇되고 허황된 개념들을 만들어냅니다. 사랑의 맑음과 흐릿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돈을 느끼면서 도덕생활에도 오류가 생겨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불신자인 남편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것,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데도 내 아내가 나를 버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그의 신앙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은 우리가 신앙이 없을 때도 이해해주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스스로 자기를 낮춰야 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 사람을 영혼으로서 깊이 사랑하고 ‘내가 발견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그도 발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와 같이 육욕에 더럽혀지지 않은 맑은 사랑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면서 기꺼이 자신을 포기할 때 육욕적인 사랑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맑고 우주적인 사랑이 어떻게 다른지를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종류의 육욕적이고 끈끈한 사랑으로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랑을 펼쳐서 온 인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입니다. 누가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확장시켜서 주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사양해야 합니다. 가능하지도 않지만 가능하다고 한들 그 사랑이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한 여성이 시골에서 자라서 미국의 아이비리그를 나오고 석사까지 마쳤습니다. 잠시 한국에 와서 영어 강사로 자리를 잡았는데 연봉이 억대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참하게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학원에서 만난 어떤 수강생이 그 여성을 열렬히 좋아했는데 집착증세가 있는 남자였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헤어지자고 했더니 살해된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랑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리고 있는 결혼생활에서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게 정말 성경에서 주님이 “너희가 아내로서 남편을, 남편으로서 아내를, 신자로서 이 세상을 사랑하라.”고 하신 종류의 사랑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불행은 사랑이 부족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사랑을 오해하고 옳지 않은 사랑을 마음속에 그려내서 상실감에 빠지는 사고방식이 여러분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복음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저는 40대가 되어도 결혼하지 못한 형제들이 축 쳐져서 다니는 모습을 보면 싫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있어서 패배하거나 누구에게 진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결혼하지 못한 것 때문에 엄청난 결함이 있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 움츠러들어서 사는 것은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무언가 모자랐기 때문에 선택이 안됐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보스런 생각입니다. 그러면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런데 왜 버림을 받습니까?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로 써보니까 아니어서 끊임없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결혼을 했어도 당당하게, 안 했어도 당당하게 사십시오. 결혼은 하나의 삶의 양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양식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안 사람으로서 “괜찮아. 살만해. 혼자 사는데 충분해. 기회가 오면 생각해보고.” 하면서 누군가와 만나서 완성될 사랑을 이미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남편이 불신자이거나 아내가 불신자일 때 자기가 소외된다고 느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모든 결핍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불신자이지만 아내나 남편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예수님과 자신은 라이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내가 예수님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데 이 둘은 갈등하고 대치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아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할수록 나를 사랑하고 아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할수록 나와 연합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불신 남편과 아내 앞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삶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사람으로 완성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종종 마음속에 갈등이 생겨납니다. 은혜가 있을 때는 불신 남편을 위해 아내로서 헌신하고 잘 섬겨서 ‘이 사람을 예수 믿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견해를 가지고 집착해서 끈적끈적한 사랑에서 만족을 느끼고 싶은 생각이 충돌을 일으키고 자기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남편에게 잘해주다가 어느 순간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몇 달 있다가 회개하고 돌이켜보지만 남편은 쉽게 돌이켜지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 다시 부부로서 결속을 다지기 어려울 정도로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으로 안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주님께로부터 공급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은혜를 구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육욕적이고 집착적인 사랑이 물러나고 맑고 깨끗한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사랑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만큼의 신앙을 가지고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기까지 지금껏 하나님께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그 사랑을 안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희생으로 여러분을 섬기며 여기까지 헌신해왔는지를 생각하면 불신 남편과 아내 앞에서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가 명료해집니다. 언젠가는 불신 남편과 아내가 아름다운 신앙의 동지가 되어서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