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인으로의 성숙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리라” (눅 1:80)
녹취자 : 장미연
81년도에 신학교에 처음 입학해서 저는 성경에서 닮고 싶은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만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한때는 바울을 좋아했는데 또 다윗이 위대해 보이고 시간이 흐르니까 바울보다는 바나바에 그리고 다윗보다는 요나단에 매력을 느끼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한 27-8년 전에 혼자 성경을 읽다가 진짜 본받고 싶은 위대한 인물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리만치 그렇게 탁월했던 사람이었고,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선구자로서 그리스도만을 가르치는 손가락 같은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몇 편의 설교 밖에는 남긴 것이 없지만 그러나 그의 울림은 예수 그리스도 오시는 앞길을 사람들의 마음에 예비했고 구약성경이 이 사람의 출현에 대한 예언으로 끝나고 신약 성경이 이 사람의 출현에 대한 보도로 시작했으니 이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바로 이 사람을 구속사의 마디와 같은 기간에 부르셔서 유감없이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일을 이루게 하시고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후로 이 사람이 저의 인생에, 설교에 한 전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복음 1장 80절을 가지고 한 권의 책을 써서 많은 학생들에게 목회자의 길을 보여주었는데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하는 지금은 많이 읽는 사람들이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됐습니다.
짧은 시간에 이 한절에 담긴 뜻을 모두 설교할 수는 없겠지만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세례 요한이 광야에 보내진 것입니다. 왜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이 사람이 제도권에서 성장을 하지 않고 광야로 보내졌을 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뭐라고 한 마디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보내어진 공동체가 ‘에스네파 공동체일 것이다.’라고 추측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에스네파에서는 어린 아이들의 유골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어린아이가 보내어졌고 아버지가 이 아이를 보내었다면 무엇인가 당시 제도권 아래서는 이 아이가 온전한 교육을 받을 수 없을 것 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어떤 경건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길러졌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파이디온’이라고 나오는 ‘아이’라고 하는 단어는 일상적으로는 4-5세 어린이를 가리키지만 그러나 또 여러 성경의 여러 곳에서 ‘파이디온’이 ‘베이비(baby)’를 의미함도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굳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보내어졌던 나이를 추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자 그대로 그냥 어린 아주 애기였던 시절에 광야에 보내졌고 거기서 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하고 선포할 때까지 출생만 나오고 성장의 과정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며…”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아이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까지 성장의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육체의 성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는 아마 그 광야에서 탄탄하게 육체적으로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 사역을 하는 우리에게도 역시 성장이 필요합니다. 육체의 성장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은 이미 성장의 한계점을 다 지난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늙어가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저는 20대 초반에 젊은 학생들에게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항상 강조하는 게 “내 말을 새겨들어라. 너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육체의 준비가 필요하다. 운동을 해라. 운동을 반드시 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해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그것도 워킹이나 줄넘기 같은 거 하지 말고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하라. 온몸을 사용하는 운동을 하고 그 위에 격투기를 반드시 해서 특수 부대 출신 같은 사람들이야 그럴 수 없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바람직하면 1:3 정도로 제압할 수 있고 그게 안 되면 1:2 정도를 한 번에 제압 할 수 있을 정도의 무술을 단련하라. 왜? 한 번도 그런 무술을 쓰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그렇게 수련하는 과정을 통해서 육체의 건강을 도모하고 절제를 배워라. 이게 내 일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 가운데 하나다.” 여러분도 지금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해보니까 돈 없으면 은행에서 빌리면 되고 재능이 모자라면 평신도 재능 있는 사람들을 쓰면 됩니다. 그러나 건강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한 달을 아프면 교회가 곰국을 끓여 오고 한약을 끓여 오고 그러지만 6개월쯤 아프면 ‘언제쯤 사임을 할까? 주위에 좋은 후임자가 없나?’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교회에 동정심에 의지하지 말고 헌신적으로 육체를 단련하는 사람들이 저는 목회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체력을 요구하는 직업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예전에 절 보셨던 분은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18킬로그램을 잃어버렸습니다. 의지적으로 뺀 게 아니라 그렇게 빠졌습니다. 부지런히 여러분들은 운동하셔야 합니다. 육체의 준비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일단 이러한 성적인 것에 더럽혀지고 나면 그는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순결한 삶을 살도록 힘쓰고 그렇게 여러분 자신의 육체를 준비하십시오.
두 번째는 지성적인 준비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작가에게 요구되는 그 일에 헌신하는 것이다.” 카미트먼트(commitment)입니다. 그러면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목회자로서 요구되는 자격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자격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입니다.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성경과 학문으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라고 하는 것이 두 가지 형태로 우리의 손에 들어오게 되는데 성경과 학문입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성경만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그런 걸 가르치는 교파도 있습니다. 매우 불건전 합니다. 성경만 읽는 사람들은 성경은 안 읽는 사람들하고 비슷합니다. 그래서 항상 성경이 중심에 오고, 그 성경은 ‘더 북(the book)’입니다. ‘the one book’을 중심으로 수많은 책들이 함께 거미줄처럼 연결되면서 무엇을 공부하든지 성경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어느 성경을 읽든지 그것이 학문의 형식으로 표현이 될 수 있도록 자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제 가슴에 항상 멍처럼 들어있는 것은 신학생들이 공부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면 꼭 사람들이 물어보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생깁니다. “목사님은 얼마나 공부를 했습니까?” 물론 저는 학위도 없고 저는 외국에 나가서 한 달 이상 생활해본적도 없고 여러 신학교에 외국에 다니면서 외국인들에게 강의를 하고 설교는 했지만 거기서 공부해 본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공부했습니다. “어느 정도 했습니까?” 목숨을 걸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다시 한 번 7년 동안에 신학 공부 시절을 되돌려 주셔도 그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자신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책을 읽기 싫으십니까? 목회자의 소명이 아닙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오늘날 총신이라든지, 우리나라 신학교 학생들이 잡고 있는 공부의 수준이 너무 낮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들을 보면서 하지 말고 세계에 눈을 떠서 세계의 신학생들이 그 신학교를 들어오기 전에 대학에서 어느 정도 공부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치열하게 몸부림 쳐야 됩니다. 그런데 너무 열의가 없습니다. 여러분 냉면 한 그릇을 만들어도 명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냉면 국물에 생명을 받힙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한 번 신학을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화) 젊은 시절 제가 교수로 부임했을 때 학생들에게 책 읽기를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한 2년 세월이 흐르고 한 학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교수님 제가 교수님한테 2년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읽으라고 추천해주시는 책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읽었는데 한 학기에 항상 제 한 키였습니다.” 책을 이렇게 세워놓아서 한 키가 아니라 눕혀 놓고 한 키입니다. 그 학생은 훌륭한 학생입니다. 한 학기에 한 키씩 읽었으니 4년이면 8키를 읽었을 것이고 그 자세를 잃지 않고 신대원까지 가서 읽었다면 아마 14키를 읽었겠지요. 그거 이 광범위한 지성의 바다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티끌같이 작은 분량인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한글로 된 신학 책, 인문학 책, 특히 철학책 철학은 여러분들이 죽을 때까지 신학의 부전공이라 생각하고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철학 속에서 내 복음을 들어야할 이 세상 사람들의 사상이 집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아는 사람만 그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모르는 사람도 그 철학에 영향을 받으면서 시대의 정신을 형성해 가고 있기 때문에 적을 알기 위해서라도 그걸 읽어야 합니다. 한글은 물론이고 그 다음에 영어를 공부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에 있어서 한글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고 결국은 신학은 그 긴 세월 동안 역사적인 발자취를 가지고 2천여 년의 세월 동안 축적되어 온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당연히 영어를 공부해서 더 넓은 지식의 세계의 바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띄엄띄엄 읽는 게 아니라 아주 능숙하게 영어 원서를 읽어내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저의 경험을 미루어 보니까 한 2년 정도만 집중적으로 헌신하면 할 수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당연히 성경을 연구하려면 원어를 해야 합니다. 원어를 하지 않고 성경의 전문가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의학 용어를 모른 채 의술에 있어서 명의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허망한 것입니다. 당연히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아랍어도 빼놓지 않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당한 헌신을 요합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구약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히브리어가 필수적입니다. 신대원 다닐 때 치열하게 했습니다. 구약 성경 전권의 3분의 1을 혼자 읽었습니다. 파싱 하면서. 그래서 얼마나 좋습니까? 지금은 강대 옆에 히브리어 성경을 놓고 설교하기 전에 펼쳐서 읽으면서 도움을 받습니다. 일정 기간만 자기를 쏟아 부으면 평생을 고급 도구를 가지고 말씀을 준비하고 설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이 어느 부분은 얼토당토않게 번역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는 원어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희랍어를 공부한 후 아랍어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됩니다. 그리고 여력이 닿는다면 오가리더를 비롯해서 또 다른 언어에 도전해서 구약 세모의 세계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여러분들의 선택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아람어를 공부해야한다는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지 피할 수 없는 변명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 성경의 해석의 역사, 교리의 역사는 그것이 영어로 쓰인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18세기 까지 서구의 신학 언어는 라틴어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서방 교구들의 전집을 읽어내려면 어차피 라틴어를 공부해야하고 그 위에 욕심내서 동방 교구들을 읽으려면 여러분들이 아티카 헬라어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우리가 모두 전문가처럼 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 신학이 요구하는 헌신의 범위가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미친 듯이 공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한 학기 공부하고 나면 기숙사에서 한, 두 명쯤은 병원에 실려 가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하다가 쓰러져야합니다.
(예화) 또 묻고 싶겠지요? “당신은 공부하다가 쓰러져봤냐?” 네. 여러분, 쓰러져 봤습니다. 이런 얘기 하는 게 쑥스러울지 모르지만 제 기록은 22시간 동안 앉아서 안 일어나고 에세이를 완성한 것입니다. 어떻게? 책상위에 빵 한 덩어리 물 한 병 그리고 책상 밑에 요강. 17시간 동안을 히브리어 성경을 쉬지 않고 읽었습니다. 똑같이 요강, 빵, 물 세 가지가 친구입니다.
무엇인가 집중을 하면서 거기 매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읽어야할 책들이 얼마나 많고 이 지성의 세계가 얼마나 끝이 없는지를 생각하며 우리는 기독교 사상을 수호하고 전파하고 성도들을 오류에서 건져내고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버나드 램(Bernard L. Ramm)이라고 하는 학자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목회자는 그 시대의 정신을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 시대에 흐름을 그보다 더 높은 위치에 보면서 문화를 비평하고 철학의 사조를 비평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 인간을 완성해가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들은 깊이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기도할 뿐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제가 쉽게 가르쳐 주지 않는 중요한 조언을 오늘 할 터이니 여러분들이 저의 조언을 따르면 20년 후에 머리를 숙이며 저에게 감사를 표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중심에 한 사람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일 필요는 없고 죽은 사람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반드시 깊은 신학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람의 전집을 일 권 일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통째로 모두 소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그 사람의 견해를 가지고 세상을, 학문을, 신앙을, 성경을, 교회를 통일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충고를 해줘도 도전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화) 어느 한 신학생이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첫 시간에 교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이 책, 저책 집적, 집적 읽으면 얕은 물에서 첨벙대지 말고 깊이 있는 한 사상가를 택하여 처음부터 끝가지 읽으면서 목회와 신학에 자양분을 삼도록 해라.” 교수님의 그 말씀에 깊이 감명을 받은 학생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선택해서 그렇게 40년 동안을 깊이 읽으며 목회를 하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 사람이 존 파이퍼입니다. 약 1만 8천 페이지 정도 되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모두 읽는데 저의 경우는 최소한 10년 정도 걸린 거 같습니다. 그 중에서 몇 권은 못 읽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집 같은 거 대부분 모두 읽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공부하고 낼 아침 설교에 써먹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땜에다 물을 붓는 마음으로 꾸준히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가 철학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세상 사상, 교회 역사, 세계사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달으면서 보충해 나가며 헌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네 분의 위대한 스승을 독파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존 칼빈,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그게 저를 세워 주었습니다. 깊이 헌신하셔야 합니다. 모든 근면함은 게으름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모든 용기는 자기 연민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신앙에 대한 열렬함은 태만함에 대한 아주 부들부들 떨릴 정도의 미움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짧은 나의 인생을 이렇게 헛되게 보낼 수 있을까?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몸이 아파서 1부 예배를 설교를 하고 집에 와서 쓰러져도 월요일 날은 공부하러 나왔습니다. 미친 듯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가 싫으면 목회의 길이 아닙니다.
세 번째 인격적 준비입니다. 지성적인 준비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강의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존재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목회자가 학문에 뛰어난 사람일 수도 있고 행정의 달인일수도 있고 정치에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은 nothing.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을 닮은 아름다운 인격은 꽃길만 걷는 신학에서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소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 중 아무도 꽃길만 걸어가는 신학을 하도록 목회를 하도록 그렇게 내버려 두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목회가 참 재미있다고 설교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저는 안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번도 ‘내가 이 목회라는 직업에 안성맞춤인 사람이다.’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늘 남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설교는 영원한 이국의 언어이고 목회는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다.” 하나님이 저에게는 목회의 복을 많이 주셨던 것 같습니다. 7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지하실 물 나오는 곳 교회가 2번이나 하고 문 닫은 곳에서 목회를 해서 24년 흐르는 동안 5천명 가까운 교인이 모였으니까 평균으로 보면 나쁜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한 번도 ‘나는 정말 목회를 잘한다. 나에게 딱 어울리는 일이다.’ 이런 생각이든 적이 없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너무 착한 교인들을 주셔서 저는 행복하게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하루도 아프지 않은 적이 없고 단 하루도 하늘의 안식을 꿈꾸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아무리 건강해도 하나님이 당해야 할 모든 시련과 역경을 지나게 하시면서 내적인 성숙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을 경험하면서 목회자 비슷한 사람이 일평생 되어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런 일로 가슴이 에이는 것 같고 때로는 저런 일로 시름이 그치지 않습니다. 환경은 요동하지 않는데 마음이 요동치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제대로 된 목회를 할 수 없다고 하는 무력감이 밀려옵니다. 수많은 시련들을 겪습니다. 그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경제적인 어려움, 가정의 핍박 혹은 교회에서의 고통스러운 일 많은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돈을 벌고 공부를 하는 괴로움,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안타까움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고통 때문에 여러분들이 정말 신학다운 신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관건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그 고난을 통해 죄에 대해 못 박히고 그리스도 의에 대해서 다시 살아나는 자신의 인생에서 목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지식은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지식이든지 간에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건 신학적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여성들의 심리를 아직 모르시지요?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고 목회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니까 안 그렇겠지만 세상에서는 미모가 뛰어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여자들을 어느 정도 멸시합니다. 돈 많이 번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어느 정도 멸시합니다. 지식이 탁월한 사람은 무지한 사람들을 저 아래로 내려다봅니다. 그것은 어김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은 이렇게 한 클래스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한 15년이나 20년쯤 지나면 자기들 끼리 모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교만하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쌓아올린 많은 지식들을 은혜의 물에 담가야 합니다. 그게 인격적인 성숙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샤돌레토(Jacopo Sadoleto)를 기억합니다.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 교회에 개혁 신앙에 오류에 대해 공개적인 질의서를 보낸 카톨릭의 사제입니다. 결국은 그 편지를 받고 제네바 교회가 답을 못합니다. 결국 칼빈이 옵니다. 그리고 2차 사역을 시작하면서 샤돌레토의 질문에 답을 합니다. 답을 했을 때 그 답을 샤돌레토로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교회의 역사에 의하면 한 번은 그 쪽 사람들이 칼빈을 만나러 왔답니다. 칼빈의 주택을 찾아와서 똑똑 두드리니까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여기가 칼빈 선생의 집입니까?” “그렇습니다.” “칼빈 선생을 좀 보고 싶으니 나오시라고 하십시오.” 이 사람들 눈에는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칼빈의 집에 시종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때에 시종처럼 보이는 사람이 “죄송합니다만, 제가 칼빈입니다.” 그 겸손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주님 앞에 깊이 연단을 받고 예수를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버트 머린 맥체인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축복은 예수를 많이 닮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그런 인격적인 성숙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준비입니다. 오늘 성경에 “…심령이 강하여지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설교가로 당시의 사회에 임팩트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는 영적으로 강해져가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화) 어느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맹인 목사님이 그 교회에 설교를 하러 오셨습니다. 부목사님이 사회를 봤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목사님은 뒷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듣기만 했습니다. 오늘 목사님이 설교하실 말씀은 성경 몇 장 몇 절부터 몇 절까지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내려가서 맹인 목사님이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그 부목사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야단을 쳤습니다. 부목사님은 황당했지요. 잘못한 게 없는데 야단을 치니까. 야단을 치는 내용일 이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목회를 하려고 합니까? 안 하려고 합니까?” “제가 왜요?” “당신의 기도와 당신이 읽는 성경 봉독 속에 하나님의 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 일은 영적인 일입니다.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얼어붙은 사람의 마음을 무엇으로 녹일까요? 아집에 아성처럼 굳은 마음이 무엇에 의해 깨뜨려질까요? 철저하게 어두움에 가려졌던 그 영혼에 하늘을 찢고 찬란한 빛을 비추어 깨닫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말재주? 훤칠한 키? 아름다운 외모? 늘어놓는 사변들?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영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너무나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한 암시를 줍니다.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이 ‘빈들’은 희랍어로 ‘에레모스’이고, 히브리어로 ‘미드바르’ 즉, ‘광야’입니다. 아무도 없는 외로운 곳에서 하나님을 처절하게 찾는 몸부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신학생들은 현저하게 기도를 안 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깊이가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의 마음 깊은 심령을 때리는 우렁찬 울림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기가 매우 드뭅니다. 그냥 컴퓨터 잘 만지고 보고서 잘 쓰고 요약 잘하고 그것도 똑똑한 사람들만 그렇게 합니다. 예의 바르고. 그러나 목회는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사람을 압도하는 그 무엇. 두려워 떨게 하는 그 무엇. 그것이 뿜어져 나와야 되는데 그것을 라틴어로 ‘아우라’(Aura)라고 말하고 영어로는 ‘오러’ [ˈɔːrə] 로 발음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건 그 사람의 영적인 깊이만큼 나오는 것입니다. 한 학기가 끝나면 금식하십시오. 우리 때에는 그게 그냥 일상이었습니다. 특별한 죄가 없어도 여름 한 공부하면 일주일 기도원에 들어가서 조용히 금식하면서 한 학기 동안에 때를 씻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복을 구하고 가을 학기 끝나고는 겨울에. 그렇게 하면서 기도의 힘을 얻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서 지금은 묘목 같지만 20년 후에 큰 나무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