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가르치라(1)
녹취자: 이경순
여러분이 목회 하시면서 경험해 보셨겠지만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가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일단 천주교에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개신교에 오는 경우는 없지는 않지만 드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아무리 신앙이 없어도 가톨릭에서 영세를 받으려면 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먼저 교리학교에서 교리를 배우고 그렇게 해서 영세를 받은 사람들은 일단 가톨릭에서 가르쳐준 교리들이 머릿속에 남았기 때문에 개신교에 잘 오지 않습니다. 최근에 문제가 되었던 구원파의 경우의 사람들도 똑 같습니다. 그들이 신앙이 떨어지면 교회 안 나가가기는 하지만 절대 개신교나 다른 종교에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최소한 구원론에 대해서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교리를 철저히 가르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을 놓고 보면 오늘날 우리 개신교의 경우에는 어떨까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은 굉장히 심각할 정도로 교리를 안 가르칠 뿐 아니라 교리 자체에 대해서 아주 강력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리를 가르치면 교인들이 지루해 할 것이라든지, 혹은 오늘날과 같이 다변화 되는 시대에 교리를 이야기 하는 것은 옹졸한 것이라든지 교리보다는 삶이 중요하다든지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거의 방치합니다. 비근한 일례로 예를 들어서 세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세례를 생각할 때 제가 21살 때 세례를 받았는데 교육 안 받았고요 교리 문답 집 하나를 교회에서 주고 잘 읽고 오라고 했고 그리고 갔더니 장로님하고 목사님이 그냥 교회 잘 다니겠느냐 이렇게 물어보고 그리고 문답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체 안하고 오히려 그 자리에서 그 문답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주일을 잘 지켜야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러해 전에 호주를 방문했을 때 일인데 목사님이 어느 집에 같이 점심을 대접을 받으러 갔는데 그분이 안수집사였습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 너무 훌륭하다고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데 점심을 먹은 후에 이분이 자꾸 나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목사님 질문이 있는 데요 그러면서 나를 데리고 어느 방으로 갔습니다. 소파에 앉았는데 질문이 뭐예요 그랬더니 아주 주저주저 하면서 물어봅니다. “저 만약에요. 우리는 성경이 진리인줄 알고 믿는데 만약에 나중에 이슬람교가 믿는 게 진리고 우리가 믿는 것이 가짜면 어떻게 하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 구원 못 받은 것 같다.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신앙이 있으면 성경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구원 받는 믿음이라고 하는 자체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스도이외에 우리를 구원 하실 분이 없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 이것들에 대한 믿음이 바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앙인데 그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사실은 하나의 교육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런 형편들이 사실은 아주 폭넓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친구 목사 하나가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데 교회 부임을 하니까 교회도 아주 작은데 성찬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그날 다 성찬을 나누더랍니다. 그래서 그거는 아니다 생각하고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먹지 말라고 했더니 이게 교회에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끝나고 나서 여성도 한사람이 와서 목사님한테 막 신경질을 내면서 따지더랍니다. “목사님, 우리남편이 목사님보다 못한 게 뭡니까? 공부를 목사님만 못했습니까? 사회적인 지위가 떨어집니까 아니면 돈이 목사님보다 없습니까? 그까짓 포도주 한잔하고 빵 한 개가 몇 푼이나 된다고 우리남편보고 먹지 말라고 그럽니까?” 그 사람은 세례도 안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항의하던 여성도가 그 교회 권사였습니다. 그러니 그게 무슨 교회겠습니까? 왜 이렇게 말 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목사님들이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를 거의 포기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동물과 다르기도 하지만 교육을 통해서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1930년대에 프랑스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사냥을 나간사람들이 산속에서 사람을 잡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한 일곱 살 정도 되었고 한 아니는 한 10살 정도 된 아이를 숲속에서 잡아왔습니다. 마치 정글북에서 나오는 이야기 같은데 실화였습니다. 얘네 들을 데리고 갔는데 인간이 아닙니다. 낮을 싫어하고 밤을 좋아하고 당연히 말은 못하고 짐승소리를 내면서 네발로 기어 다니는데 그 아이들을 잡아놓고 전 세계의 교육, 특히 유아교육학계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든지 이 아이들을 인간사회로 되돌려 놔야 되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주 갓 난 아기 때에 동물들에게 물려갔고 그리고 아마 짐승들의 젖을 먹으면서 자랐던 것 같습니다. 언어를 전혀 못합니다. 그래서 전 세계 유아교육학자들이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전부다 프랑스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을 해서 인간사회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를 가지고 연구를 했는데 두 아이 다 죽었습니다. 한 아이는 열아홉 살쯤 죽었고 한 아이는 열 몇 살 때 죽었습니다. 그런데 열아홉 살 된 아이가 마지막에 죽을 때 지능이 한 4세에서 5세밖에 안되었습니다. 그 때에 전 세계 유아교육학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한데 아무 때나 교육을 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기 때에 집중적으로 집어넣어주지 않으면 결코 인간사회로 돌아올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깨달으면서 유아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가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위로 올라가지 말고 의무교육이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2년 6개월 되면서부터 의무교육입니다. 2년 6개월 된 아이를 교육기관에 안보내면 부모가 처벌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이렇게 하면 안 되고 태어난 지 2년 6개월쯤 되면 의무적으로 국가에서 완전히 지원을 받아서 지금 우리로 말하자면 어린이집이나 아니면 유아원에 입학을 해서 거기서 교육이 이루어지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거기에다가 시설과 교육 교육자들 교사들 시스템 이런 것들을 구축해서 어린이집에 다가 돈이나 몇 만원씩 후원해주는 것 그런 것으로 해서는 안 되고 국가적인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해서 어린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제대로 된 중요한 방법입니다. 현재 목사님들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학교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학교가 학교가 아닙니다. 도덕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도덕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개념 선, 악, 신의존재, 인간의 위치, 그담에 공동체 이런 것들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은 유아 교육입니다. 유아에서 어린이들의 교육으로 주어지고 이것은 토론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가르치고자 하는 기본적인 토대들을 아이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도덕교육의 토대가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교리를 가르칠 때에 그것을 아주 잘 받아들이는 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 받아들이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길러보면 아이를 낳고 아이가 세 살, 네 살쯤 되면 눈을 뜨면 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물어봅니다. “엄마 이거 뭐야? 아빠 이거 뭐야?” 계속 물어봅니다. 그 때에 부모들이 그 아이의 궁금증에 대해서 답을 해주지 않아서 아이들이 질문이 딱 멎으면 지적인 성장에 엄청난 문제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것들을 가지고 오냐면 사물을 보면서 질문 할 수 있는 능력들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 보면 아이들이 팔삭둥이라고 해서 달수를 다 못 채우고 아이들이 나옵니다. 그런데다가 못 채우고 나왔는데 엄마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당시에 분유도 거의 없었던 시대이고 있었다고 해도 먹을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미음이나 먹고 이후에 그 아이가 성장한 후에 아무리 영양을 공급해줘도 그 체구나 모든 것들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마지막 막달에 형성되는 것이 폐를 비롯한 장기입니다. 이것이 미숙한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그 아이가 일정기간 한 일 년 내지 이년정도 그 때에 아이가 균형 잡힌 영양식을 제공 받으므로 서 이 아이가 성장하게 되는 게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로 영양가 없는 밥물이나 떠먹는 것입니다.
북한에 가보면 여러분이 다 아시겠지만 제가 북한에 가서 깜짝 놀란 게 군인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군인이 나타났는데 그래도 명색이 군인이고 남한에서 간 사람들을 통솔하는 사람들이니까 당성이나 이런 것도 신경 많이 썼을 것인데 초등학생이 자기 삼촌 군복을 입고 온 거 같은 것입니다. 모자도 크고 모두 다 큽니다. 웃음이 나옵니다. 알고 보니까 그 친구들이 1990년대 고난의 항군 때에 태어난 애들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못 먹고 200만 명이 굶어죽던 시대니까 영양공급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작년에 북한에 법을 바꿔서 142센티부터 군대를 가게끔 법을 바꿨답니다. 142cm면 어느 정도냐면 지금 우리나라 초등학교 4학년아이 정도고 발육이 좋은 애들은 초등학교 3학년 키 정도입니다. 걔네들이 한국 군인들과 비교해서 서면 정확하게 키가 10cm 차이 납니다. 몸무게는 10kg 차이입니다. 그렇게 심각한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우리는 죄인이다. 그리스도 피로 구속을 얻는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모든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항상 왕성하게 그런 믿음의 대상이 되는 신학적인 사실들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왕성하게 받아들일 때가 언제냐면 영적인 유아기 때입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를 믿고 복음을 듣고 뭔가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에 대해서 막 알고 싶어 하는 영적인 호기심과 지식습득의 욕구가 있을 때, 교인들이 은혜 많이 받으면 항상 예배시간에 설교가 길어도 불평 안하고 성경공부 배우러 매일 보따리 싸가지고 다녀도 지루해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때가 있는데 두 번 있습니다. 첫째는 첫 번 회심 때, 두 번째는 그 회심이 반복되는 은혜가 있을 때, 첫 번째 는 딱 한번만 나타나는 것이지만 두 번째는 여러 번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목회에서 하는 쉬운 용어로 말하자면 회심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던 처음 사랑 때 그렇게 교리를 배우고 싶어 하고 두 번째는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그 때 다시 교리를 가르쳐 주면 잘 받아들이는 때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리교육을 이렇게 안하고 있는 것은 목회자들이 그것을 잘 안하기 때문에 안 되고 있는 면도 있지만 그러나 해 봤을 때에 교인들이 그 교리적인 지식들을 쭉쭉 빨아들이면서 섭취하려고 하는 영적인 욕구가 없기 때문인데 이것은 사실은 교회의 단순한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영적인 변화 이런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은혜를 끼치고 또 은혜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려고 하는 그런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번에 한국교회가 교리를 안 가르치면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커다란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분들이 그것을 거기서 교훈을 얻고 그 대안적인 실행을 교회에서 해야 되는데 안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한창 이단문제가 되었던 과천에 있는 신천지가 있는데 순전히 사기입니다. 그 피해를 우리 동네도 심각하게 입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교회 하나는 아예 교구하나가 박살이 났습니다. 교인들이 이탈해서 나갔는데 데리고나간 주동자가 부목사하고 장로였습니다. 그 교구를 돌보는 우두머리들이 변심을 해서 데리고 나갔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어느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한500명쯤 모였는데 300명을 데리고 나갔는데 그 데리고 나간 우두머리가 사모님이었답니다. 그러니까 참 황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저희교회로 지역목회자들이 찾아오셔서 이거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면서 심각해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니까 평소에 교리를 가르쳐서 교인들이 그것을 보면 ‘아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이런 이야기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이런 것이라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두 개가 어떤 것이 맞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게 해야지 우리 것에 대한 지식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네 교회 목사님은 설교가 호소력이 없고 논리도 안 맞는데 거기에 어쩌다 참석해보니 입에 착착 붙는 것입니다. 돌아오니까 기가 막히게 논리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꿰어 맞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혹하고 빠져드는 것입니다. 여러 교회들이 피해를 받았고요 아예 교회자체가 추수군 계획에 의해서 교회 껍질만 남았는데 아예 목회자까지 다 갈아치운 교회도 우리 동네에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우리들이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우리의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 믿음의 도리라고 하는 것은 교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 이러한 것을 믿고 또 우리의 믿음은 이러이러한 성경의 진리에 기초해 있다고 하는 확고한 지식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배우고 익혀야할 교리다 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교리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데 현상적으로 이렇게 중요한데 그 교리를 교회에서 안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사실 교인들 때문 아니라 목회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냐면 목회자가 잘 모릅니다. 공부를 안 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중요한 사명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면 내용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사람의 지식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는데 아 그 사람을 모아놓고 일주일에 주일날 낮에 설교를 한번하고 오후에 한번 하고 두 번 설교를 하고 수요예배 금요예배 4번입니다. 거기에다 새벽기도 일곱 번이면 열한 번입니다. 거기다 종종 다른 일로 설교한다고 하면 어째든 일주일에 매번 열 번에서 많으면 열서너 번까지 설교를 해야 되는데 그게 50주면 일 년이면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50주면 약 500번에서 600번 설교를 하고 10년을 하면 6천 번 설교를 하는데 뭐가 그렇게 새로운 게 나오겠습니까.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그래서 어느 목사님들을 만났더니 3년마다 한 번씩 목회 지를 옮기면 신선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 같답니다. 그러니 3년마다 한참 그 교회를 다니고 나면 이제 목사님이 본문만 읽어도 저게 무슨 내용이 나올지 예화까지 다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섭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런데 나와서 배우시는 것도 물론 좋지만 매일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나와서 하시되 평소에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는 것과 심방하는 것, 설교하는 것, 새벽기도 나오는 것이 떼어놓을 수 없듯이 공부하는 것을 떼어놓을 수 없는, 말하자면 목회자의 일상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공부를 안 합니다. 그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바빠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서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리키는 진리의 대요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그 속에서 교훈들을 찾아내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꾸준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의 내용들을 습득해 가야하고 특히 공부를 한다고 하는 것이 독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독서를 한다고 하는데 책을 균형 잡히게 읽어야 합니다. 설교나 은혜가 되는 경건 서적 같은 것들을 읽으면 그담에는 좀 두껍고 묵직하고 무엇인가 지식에 있어서 좀 깊이 있는 내용들을 전달해주는 신학 책들을 읽고 그 담에 일반적인 이야기들 사회 돌아가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책도 읽고 상식에 대한 책도 읽고 이렇게 균형 있게 되어서 그래서 지식의 섭취가 계속 이루어져야 지만 그게 바로 정상적인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공부가 성경, 성경을 딱 중심에 놓고 성경과 성경에 직접 연관되어 있는 신학, 역사, 인문, 사회, 자연 이런 것들에 대한 공부가 같이 병행되어가는 가운데 성경에 대한 이해도 함께 깊어져 갈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들이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칠 때에 절대로 예배시간에 전달하는 설교만으로 교인들의 신앙생활이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과신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배, 설교 그것을 통해서 성도들이 깊이 은혜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가 예배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아주 깊이 있는 감화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영혼이 변화를 받고 하는 그러한 역사가 목회의 중심축이라면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변화 받고 은혜를 받은 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할 때 그 때에 어떻게 그들을 교육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교육에 중심이 성경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은혜를 받은 성도들을 놓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친다고 할 때 창세기서부터 시작해서 일장 일절이 무슨 뜻이고 이절이 삼절이 사절이 오절이 이렇게 하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훌륭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성경에 대한 지식들이 말하자면 구슬과 같다면 그 구슬을 쭉 꿰어서 어떤 형체를 만들어서 잘 보관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교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성경을 놓고 한쪽에서는 성경신학적인 접근 방식으로 교육을 시키고 그래서 책별로 성경을 배우게 하고 성경 그 자체로서 성경을 배우게 하고 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다 신학을 공부하셨으니까 성경 신학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 그것이 매우중요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이 이해하실 것입니다. 구약이면 구약의 개론 구약 전체가 우리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전달해 주고 있는가. 그리고 또 그 규약 안에서도 시편에 나타나는 하나님 모세오경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신약도 마찬가지로 공간복음 혹은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무엇을 우리에게 기독교에 대해서 말해주려고 하는가.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공부할 양이 굉장히 많습니다. 어차피 서두를 것은 없습니다. 일평생 계속 공부하는 거니까 가르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큰 교회들은 목회자들도 많고 오겠다는 교역자들이 많으니까 목회자들의 자질도 아주 작은 교회에 비해서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뽑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질들이 이어지는데 교회가 작을 경우에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모든 책임이 즉 그것을 교육에 대한 것을 담임목사님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예배시간에 잘 설교해서 은혜를 받게 한 다음에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성경신학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담에 필요한 것이 조직신학적인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이 창세기에 말하는 하나님, 출애굽기에서 가르치는 하나님, 레위기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 다 다릅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그런 모든 달라 보이는 진술들의 최소 공약수를 모아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라고 하는 것을 진술할 때에 그때에 통일된 언명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주제별로 모아 놓은 것이 그래서 그것을 체계를 세운 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제가 이런 비유를 가끔 성도들에게 드는데 이렇게 김밥이 있습니다. 옆에서 보면 시커먼 것입니다. 이게 잘 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딱 자르면 여기에 가장자리에 밥이 있고 속에 여러 가지 맛있는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라서 단면만 보면 아 이것이 무엇을 가지고 만든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그런데 문제는 만약에 이런 식이 아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 김밥을 이렇게 잘라 내었다고 생각해 보세요.이렇게 되어있지만 여기에 만약에 단무지가 들어있다면 여기서부터 이 끝에까지 똑같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꺼내보니까 단무지는 이런 식으로 생겼을 수고 우연히 여기를 자르니까 여기를 자르면 또 다른 모양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성분이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 이런 식으로 옆으로 잘라서 이것들을 관찰하는 것이 성경신학적인 접근이라면 이것을 이렇게 잘라서 단면을 보는 것이 조직신학적인 접근이라고 보면 됩니다. 원래의 기독교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가르친다하는 것이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신약성경을 왜냐하면 신약성경이 그때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자체가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수레씩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 가지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사도들은 기억 속에서 이끌어내어서 성경을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경에 대한 것이 구약입니다. 구약에 대한 것을 해석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강림사건이 있은 후에 전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구약성경을 해설해주는 일이 중요한 그들의 말씀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창세기로부터 차례대로 해석해주는 것이 그들이 한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 이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러면서 이 십자가와 관련된 구약성경의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해석을 해서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사도들의 관심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우리 믿음의 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본무라고 생각했고 그 본무를 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서 구현해 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했던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교리들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접근했냐면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조직신학을 가리켜서 교의학이란 말로도 배웠고 그 담에 두 번째는 조직신학이라고도 배웠을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은 유럽에서 아직도 많이 쓰고 있고요 이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자 그러면 이 두 가지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내용자체에 차이가 있다기보다도 접근방식과 사고방식이 좀 다릅니다. 무슨 뜻이냐면 교의학이라고 하는 것은 교의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교의가 있고 그 밑에 교리가 있습니다. 교의는 교회의 공적인 회의를 통해서 결정이 된 사항들입니다. 그담에 교리는 무엇이냐면 이것은 누구나 세울 수 있는 것인데 이 교리는 이 교의에 통제를 받습니다. 당연히 교의는 성경의 통제를 받습니다. 교리는 성경의 통제를 안 받는 것이 아니라 받습니다. 말하자면 교리는 교의보다도 더 하부적인 개념이고 교의는 성경보다 하부에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면 이것들은 전통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냐면 논제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로쿠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논제 예를 들자면 이런 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혹은 믿음에 대해서 이런 논제가 주어집니다. 그러면 믿음에 대해서는 이 믿음은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있다 속사도 교부들은 이 믿음을 어떻게 생각했다. 그담에 사도들은 어떻게 생각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어떻게 생각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다. 그리고 쭉 내려오는데 그런데 주류로 내려온 쪽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기에 보면 완전히 정통신앙과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믿음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단들은 이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을 했다 그래서 이것은 틀린 것이다. 이단은 아니더라도 이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등등 언급을 죽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 믿음하나에 대해서 전체적인 논의들을 이 안에 다 담는 것입니다. 그러면 1항목은 하나님의 존재 2 항목은 믿음 세부는 교회의 성례에 관한 뭐 이렇게 다루어집니다. 이게 논제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논제방식은 좀 산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칼빈이 기독교 각료를 세 번에 걸쳐서 나오는데 마지막 최종판 1556년에 삼판이 나오는데 초판의 분량은 얼마 안 되는데 3판에서 그 분량이 세배정도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된 것도 2000페이지 정도 넘을 정도로 두꺼운 책이 됩니다. 초판은 아주 단순합니다.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에 대한 해설이 중심을 이루면서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 후에 시간을 거치면서 많은 이단들이 나오고 또 하나님을 믿는 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골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야할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 칼빈이 서술해 냅니다. 그런데 칼빈도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많이 고민하다가 삼판에 와서 목차들이 쭉 정해집니다. 그리고 칼빈이 말하기를 “이제야 만족스럽다.” 이순서는 서론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그 다음에 인간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그 담에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그담에 구원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그 담에 교회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마지막에 종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이 조직신학에서 이야기하는 7개의 분과입니다. 이때에 이 기본적인 골격을 칼빈이 완성을 하는 것입니다. 이 후에 신학자들이 이 구조를 따라서 그담에 이 논제방식의 교리들을 배열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배열이 되어서 분석적인 방법으로 학문적인 방식으로 발전해 나간 것을 우리들이 조직신학이라고 부르고 그러니까 교회 학은 이 논제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조직신학은 교의학의 내용을 조직적인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면 역사적으로 보면 루터파가 있고 칼빈파가 있습니다. 루터 파에서는 루터도 대단한 신학자였지만 루터가 그린 커다란 선들을 이후에 멜란히톤이라는 사람이 아주 상세하게 그려내면서 루터파의 신학을 만들어 냅니다. 그 멜란히톤하고 이쪽에서는 칼빈이 2세대고 루터는 1세대니까 나이차이가 나지만 발전을 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논제방식을 계속합니다. 이것은 교리진술이 산만합니다. 그래서 접근해서 공부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리를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칼빈파 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명료해 지는 것입니다. 칼빈파 안에서도 조직신학이 칼빈 이후로 조직신학이 세워져서 이런 방식으로만 모두 다 일관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프란시스 튜레틴 같은 칼빈 이후에 100년 정도 흐른 후에 나타난 사람도 다시 논제방법으로 조직신학을 풀어갑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기독교 각료의 이런 목차의 구성 어떤 것들을 교리에서 다루어야 되겠는가 하는 명료한 제시는 이후에 많은 칼빈파 사람들로 하여금 교리에 대한 접근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공부할 의욕들을 많이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교리가 아주 발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조직신학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흔히 교리를 가르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문답 등을 사용하는데 예배의 모범 이런 것들을 사용하는데 사실 그것을 다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중에서 일부를 채택해서 오늘날 총회에서 만드는 학습세례문답 교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처음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겠다고 하고 세례를 받고 이렇게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사용하기에는 그런대로 적합한 교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왕에 채택이 되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잘 교육시키는 것이 좋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은 사실은 문답집이 있으면 사실은 우리가 지금 350년 정도 지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가 세워져서 초창기에는 신학자도 없고 신학교도 부족하고 하니까 남의 것을 빌려서 쓸 수 있지만 이제는 넘쳐나는 게 신학자고 유능하고 똑똑한 신학자들도 많이 한국교회가 길러냈는데 지금쯤에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작성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지 350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변화가 있고 역사적으로 많이 변했는데 좋은 것들이 있으면 잘 답습을 하고 바뀌어진 것들도 우리시대에 변화의 요구들을 수용할 수 있는 영국 산업혁명전에 작성된 신조입니다. 그 후에 계몽주의 일어났죠. 산업혁명 일어났죠. 그다음에 산업혁명 이후에 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지요. 그 이후에 후기 근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정보화 첨단사업에 우주개발, 환경문제 그담에 군사독재의문제등 가난과 불평등의 문제 정의의 문제 얼마나 많이 생겨났습니까. 그러면 그런 것들을 담아낼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술 담배 안하는 것 그것도 그 당시의 문명에서는 사실은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술의 피해가 그렇다고 해서 제가 무슨 술을 먹게 하자 그런 뜻이 아닙니다. 술 안 먹고 담배만 안 피우면 그러면 마치 최고의 그리스도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탈세도 하고 저작권 침해도 해서 그렇게 하고 금융사기도 치고 이러는 것은 큰 죄가 아니고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표징인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는 때이기 때문에 쉽게 얘기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같은 데에서 동성에 문제나 인종차별이나 이런 문제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심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주어지고 아마 몇 년 내로 아마 선거에서도 동성애 문제가 나오리라고 보는데 그 다음에 80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와서 생활을 하면서 그 사람들이 노동력을 공급을 하고 있고 거기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에 대한 다문화 차별이라든지 이런 문제들 이 웨스트민스터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문제가 전개되고 이런 것들은 매우 잘못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우리는 봐야 됩니다. 3년이고 5년이고 기한을 주고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연구를 해서 합의를 이끌어 내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지금 그렇게 해놓고 지금 영국 사람들은 다 버린 그런 신앙을 다 버린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데 영국 사람도 모르는 옛날의 신조 그것만이면 충분하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해서 거의 모두 동의하고 최고의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시대의 상황까지 모두 포괄해 내지 못하니까 그것을 해 내서 우리 그것들을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문제라든지 이런 모든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들을 그 신앙고백 안에서 찾아낼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신학자들이 이렇게 넘쳐나고 있는 시대에 그것은 잘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교리문답 집을 가지고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여러분이 교리문답 집을 보면 항목별로 질문이 나오고 대답이 나옵니다. 그럼 그것을 중요한 것은 먼저 그것을 암기하고 사람들이 기억해두기전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교인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교리를 가지고 그 교리는 아주 기본적인 진술들이니까 여러분이 이런 조직신학 책을 가지고 공부를 해서 그래서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풍부하게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그렇게 여러분이 스스로 습득하고 필요하면 교회에서 교재도 만들고 해서 사실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고사하고 우리 세례 받을 때 문답 집에 대해서만 책을 써도 500페이지를 써도 모자랄 정도로 어마어마한 내용들이 그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차분차분히 이해를 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여러분이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신조에 나오는 내용들이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지를 성경과 신학을 통해서 규명할 수 있도록 충분한 하부적인 내용을 만든 다음에 성도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을 그렇게 해서 잘 가르쳐서 그렇게 지식을 하나부터 다 전달한 다음에 그것을 이해를 시키고 그담에 그것을 암기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교회 출석하는 것만 해도 간신히 나오는데 은혜를 받고 자기가 회심을 해야 되는데 회심이 없는 상태에서 교회 나온 지 6개월이 되었으니까 “학습을 받아라. 1년 되었으니까 세례를 받으라.” 그럴 때 사람들이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을 때에는 교육자체가 매우 힘겨워 지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아이가 태어나서 막 젖을 먹고 음식물을 빨아들일 욕구가 있을 때에는 쉬운데 아이가 병들든지 문제 생겨서 그런 욕구가 거의 없습니다. 그럴 때는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제일 중요한 것이 예배를 통해서 성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가지고 있고 또 무엇인가 교육해야 될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것을 섭취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성과를 거두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 와서 사람들이 쉬고 안식을 얻고 그러고 싶어 하는데 와서 그 복잡한 교리를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닥달할 때 기쁘게 받아들일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변화, 은혜, 이런 것들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교리를 가르칠 때도 역시 똑같이 정말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그렇게 교리를 배울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동이 있고 감화가 있고 그렇게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공부가 된다는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리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이 되었는지 아마 안 되었을 것 같은데 리처드 백스터라고 하는 청교도가 17세기 때 사람인데 알미니우스주의인 청교도이긴 한데 이분이 쓴 책들이 꽤 여러 권 번역이 된 것이 있는데 『성도의 영원한 안식』, 『회심』, 그런 책들이 번역되어 있는데 원래 이 사람이 쓴 저작 전집이 4권으로 되어 있는 아주 깨알 같은 글씨로 쓴 두꺼운 책 4권이 크리스천 디렉터리라고 하는 이름으로 나와 있습니다. 지금도 아마존 같은데 치고 들어가면 여러분이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분량이 엄청납니다. 그 4권의 책속에서 보면 엄마의 교리문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200페이지 정도 될 정도의 그런 책인데 거기에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부터 시작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중요한내용을 다 다루었는데 그것을 리처드 백스터가 어떤 용도로 만들었냐면 엄마가 읽고 이해한 다음에 무르팍에 자기아이를 놓고 가르치게 할 목적으로 지은 책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교리교육을 안 시키니까 교리에 무식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식을 낳아도 자식에게 교육시켜줄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원래 교리교육에 대한 가장 첫 번째 책임은 사실은 가정에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 이게 뭐야? 아빠 이게 뭐야?” 막 물어볼 호기심이 왕성한 나이에 “하나님은 살아 계시 단다. 세계는 하나님이 지으셨단다. 인간은 죄인이란다.” 이런 것들을 가르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골격이 어린아이 적에 확고하게 세워지고 그 기반을 토대로 아이들의 지적인 성장에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의 내용들을 가르쳐서 그 위에 구축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일주일에 한번밖에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18페이지에 보면 첫 번째 줄에 ‘어머니의 교리문답’이라는 제목아래 해설적인 성격을 띤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들 자신과 성경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여기서 그들 자신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들 자신과 성경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자녀들을 교리로 가르치는 친근한 방법’, 대화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은 것이 아니라 책에 도입부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엄마가 얘야 이리 오너라 이제부터 교리문답 배워야지 그러면 아이는 묻는 겁니다. “엄마 그게 뭐에요?” 그러면 엄마가 다시 대답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네가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이란다.” 그러면 아이가 물어요. “엄마 왜 그것 을 내가 꼭 알아야 되요?” 그러면 엄마가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네가 알라고 하셨고 또 그 지식 없이는 네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을 향해 복된 사람도 될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아이가 또 대답합니다. “엄마 다른 아이들은 그런 것 안 배우고도 잘 지내는데요.” 하니까 엄마가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것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찮은 사람이고 야비하며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란다.” 우리의 어른들이 조상시대부터 늘 하던 이야기 이었습니다. 개는 아무리 못되어도 “이 개만도 못한 개새끼”라고 말을 안 합니다. 그냥 개입니다. 그런데 개만도 못한 게 될 수 있는 것은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은 개보다 훨씬 훌륭한데도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 있고 또 인간이 배우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사람 사는 도리를 배워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믿어야 될 것인가 하는 도리들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흔히 ‘금수’라는 표현을 쓰는데 짐승이라는 표현입니다. 그게 결국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에 생각이 없는 사람 그래서 자기의 충동과 욕망대로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로 불립니다. 그래서 이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도 모인 그 사람들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 새사람이 되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그것도 하나님을 떠나서 죄인으로 살던 시절에 비춰본다면 그가 새사람이 된 것이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살기위해서는 그것은 겨우 출발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앞으로 계속해서 신앙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일들이 필요한데 거기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지식의 문제와 사랑의 문제, 이것이 사실은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개가 어떻게 잘 결합이 되어서 한 사람의 인격 안에 깃들 수 있느냐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에 있는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힘, 기독교의 힘, 혹은 우리들이 신앙의 힘이라고 이야기 할 때 이것은 두 개입니다. 첫째는 사상의 힘이고 두 번째는 윤리의 힘입니다. 사상의 힘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계와 하나님과 인간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관점을 가지고 그 신앙의 토대위에서 어떤 사물을 볼 수 있는 세계관, 인생관을 구축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신앙의 힘인데 사상의 힘입니다. 사상의 힘을 가지려면 지식과 논리가 필수적입니다. 이것들을 교리, 성경, 학문 이런 것들을 채워준다면 이것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 라는 문제라면 이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윤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이렇게 사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인간 속에서 어떻게 주님이 주신 사랑을 실현하면서 살 것인가 이것이 삶인 것입니다. 이 두 개가 기독교가 가르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사상과 윤리 두 가지가 사실은 이 두 개를 하나로 묶어서 아는 것처럼 살 게하고 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기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상과 윤리를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2년 전에 책을 하나 썼는데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은 이렇게 기독교의 신앙에 있어서 원래 빛이라고 하는 것이 진리를 상징하는 하나의 비유어 인데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랬을 때 그것은 사상을 가리키는 것이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랬을 때 그것은 윤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개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썼는데 꼭 한번 여러분이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거기에서 어떻게 진리가 왜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가. 그리고 그 진리를 파괴하고자 하는 일들이 현대사회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문제들을 신학, 성경, 역사, 철학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현대사상문제를 가지고 다루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묶어서 하나가 되어서 한 인격 안에서 이 사상과 윤리를 녹여내면서 사는 그것에 깊이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 없으면 절대로 여러분이 목회다운 목회를 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상은 어쨋든 교리를 가르치므로 뼈대를 잡고 그것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거나 심지어는 순교를 할지라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 길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상과 윤리의 결합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의 기초가 결국은 이 지식과 논리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교육들이 잘하고 있는 교회도 있지만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에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크고 엄청난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나온 교인들에게 좀 올바로 가르치고 깊이 있게 가르쳐서 그래서 그 사람들이 어떻게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다운 사람들이 될 것인가 여러분이 그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