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교리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녹취자 : 조원정
내가 호주로 집회 인도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거기 담임목사님이 저를 점심 대접하겠다고 안수집사님이 인도를 했습니다. 가면서 자신의 교회 안수집사님이 얼마나 신실하고 좋은 사람인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십니다. 그런가보다 하면서 가서 점심을 대접을 받았는데 안수 집사님이 자꾸 나에게 눈짓을 하면서 자기를 좀 보자고 합니다. 식사를 끝나고 난 다음에 다과를 들다가 말고 저 구석에 한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많은 목사님들에게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 사실은 질문을 잘 못했는데 목사님은 잘 답변을 해 주실 것 같아 제가 질문을 드립니다. 그게 뭡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주 황당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몇 년 동안 고민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기독교가 진리인 줄 알고 열심히 믿는데 마지막에 가서 무슬림이 진짜고 우리가 가짜이면 어떡하느냐 하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당신은 구원 못 받은 것 같은 직격탄을 날린 것 같아 너무 잔인한 것 같았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그 사람은 구원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목사님은 그 인간 어디를 보고, 금방 장로로 세울 기세였습니다. 목사님이 굉장히 선하고 인상 좋으신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토록 칭찬을 하시는 것인지, 정말 잘못되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 보면 기독교는 새로운 철학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도 바울이 아데네에서 전도하는 것을 보면, 결국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와 고린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복음을 선포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시대 때에는 그리스도 전통을 따라서 무엇이든지 새로운 사상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특히 아고라, 시장 같은 곳에서 단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누구든지 올라가서 자유연설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 시대 때 직접 민주정치의 흔적이었습니다. 새로운 철학이 등장했나?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들어보자.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을 봅시다. 사상이 담겨있습니까? 우선 제일 심각한 것은 공부를 안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는 공부하라고 태어난 것입니다. 공부를 안 하면 사람이 아닙니다. 동양철학에서는 너무 분명합니다. 여러분 조상님들이, 부모님들이 돌아가십니다. 남자 분들이 관직이 없습니다. 군수를 지내든지, 판사를 지내든지 그러면 되는데 아무 직위가 없이 죽었습니다. 위패에다가 아무아무개 학생부군, 무슨 뜻인가 하면 평생 배우다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배우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교리반을 하는데 오늘 그것을 말씀드립니다. 교리반 때마다 외우게 하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나는 공부한다. 그리고 존재한다. 사람은 배우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배우기를 그치는 그 순간 인간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교만해지든지 아니면 뒤로 물러가게 되든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인간이 부패하면서도 동시에 존엄한지,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이 세계가 망가지기는 했지만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는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였는지를 배우는 사람들이 겸손해 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배움의 완성은 배우는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터득하는 것이 모든 배움의 목표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는 이 지식관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은 19세게 중반에 일어납니다. 산업혁명이 유럽전반에 퍼지면서 근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폭발적인 근대의 부흥의 발전 방향은 우리들이 보아서 압니다. 정말 눈부십니다. 인류역사 이래 인간이 존재한 이후로부터 여태까지 백 년 전 부터 발전한 기술하고 백 년 동안 발전한 기술하고 비교도 안 되고 백년은커녕 이십년 사이에 발전하는 것을 보아도 폭발적인 기술혁명을 가지고 발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기술의 발전과 폭발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는 데에는 새로운 사상의 출현이 있었습니다. 데카르트라고 하는 사람의 철학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인간이 무엇을 발견을 하고 깨달아도 인간 자신이 그것을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데카르트에 와서 어떤 원칙을 발견하는가 하면 진리나 이런 모든 법칙들을 하나님이 영원 전에 창조하셨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느 것이 진리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에게 달렸다고 보면서 은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중세시대 때부터 있었던 실재론을 중심으로 하는 그런 사상들을 인식론 중심으로 이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사실상 진리와 이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등장을 하면서 자연의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 뉴턴이라는 사람입니다. 뉴턴이 천재였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프린키피아라는 책을 씁니다.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상은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서 예전에 하나님이 하시던 일이라고 하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 있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에 도달하게 되면서 그 두 사람을 기초로 해서 폭발적인 과학의 발전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이 좋아졌는가 하면 좋아졌습니다. 인간의 수명도 많이 늘어나고 발전해서 며칠 만에 한국에서 왔다가 며칠 만에 돌아갈 수 있는 기술 개발도 이루어지고 했으니까 좋은 것입니다. 마이크도 발견하고, 그래서 인간이 행복해진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학문들이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관심사를 정신적이고 영적이고 종교적이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 이동을 해서 오직 물질에 관심을 갖는, 지식의 전수도 물질에 발전을 위한 것으로 확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안식을 찾지 못하는, 자신의 삶과 존재의 기반을 찾지 못하는 그런 불쌍한 인간들이 된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도 왜 사는지 진지하게 생각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세계를 봐도 이 세계가 도대체 왜 존재하고 이 세계라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어떻게 우리가 한정된 시간을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을 향하여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삶과 죽음을 추억하는 그 비결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깨우쳐 주는 사명을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만 나 스스로는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면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나는 학생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요즘 60이 넘으면 계속 학생이라고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은 들지만 제가 몇 년전 까지 강대에 올라갈 때 항상 가방을 여기에다 메고 올라갔습니다. 나는 학생이라는 뜻입니다.
플라톤을 공부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어거스틴을 공부하면서는 기독교인인 것을 감사했습니다. 루터와 칼빈을 공부하면서는 개신교도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를 공부하면서 내가 개신교 교파 중에서 개혁교회 교인인 것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기독교야말로 최고의 사상이고 이 세계와 인간의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최종적인 답을 가지고 있는 가장 정통 종교입니다. 그것을 기독교가 참 좋다고 말하지만 말고 도대체 그 기독교가 뭘 믿는지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그것을 그리스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한 목회의 사명입니다. 목회의 사명은 모든 교인들을 기독교 사상가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상가라고 해서 어마어마한 학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고 공산주의자는 노동자라도 공산주의 이념을 따라 삽니다. 그런 확고한 사상을 가지고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기독교인의 사고방식을 따라서 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 때에 그렇지 않은 잡탕 사상을 가지고 산 사람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윤리가 나오는 것이지, 윤리가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자기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상의 기반으로부터 윤리가 나온 것입니다.
교회를 윤리적으로 고양시키려면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첫 번째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상적인 토대를 구축해 주는 것입니다. 한편의 설교는 그냥 상처 받은 사람을 보듬고 다 듣고 나면 마음이 좀 시원해지는 그런 설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프라 윈프리 쇼가 훨씬 더 잘합니다. 한편의 설교를 듣고 나면 새로운 사상을 맛본 기쁨이 있습니다. 아 이렇게 인생을 봐야 되는 거구나! 아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 거구나! 아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 거구나! 지구의 환경을 무참하게 파괴하는 것이 죄짓는 일이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게 만들어 줘서 거기에 항거하고 싶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이 생기게 만들어 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계대로 인간대로 자연대로, 그렇게 굴러가지 못하게 하는 인간의 반역과 불순종과 탐욕을 보면서 분노하게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따라서 사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올바른 윤리를 따라서 살아가는데 그것이 쉽겠습니까? 압박을 받고 고통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디트리히 본훼퍼가 나는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 복음서를 정직하게 읽어보면 우리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얘들아, 이리 오너라, 우리 모두 함께 가서 죽자. 그것이 복음서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60년, 70년, 80년대 너나 할 것 없이 한국 교회에서 성공주의, 번영주의를 받아 들여서 예수 믿으면 성공한다고 부자 된다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거두어들인 열매가 무엇입니까? 한국에서 교회가 가장 윤리 의식이 없는 집단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기도를 뜨겁게 한 증거이고 하나님 앞에 응답이 많은 증거이고 가난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이 마귀의 역사에 놀아나는 것이라는 식의 그런 해석이 어디에서 성경에서 그런 해석을 찾을 수가 있습니까?
존재의 울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울림은 지위가 높기 때문에 이상하게 존경심이 가고 여자들은 얼굴이 워낙 예쁘면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안 예뻐 보셔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감히 가까이 못 갑니다. 남자들이 덜덜덜 떨면서 목소리가 떨립니다. 권력입니다. 그런 것 말고 존재의 울림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절간 툇마루에 앉아서 인생이 뭐냐고 고등학생에게 물었을 때 그 사람이 이름이 뭔지, 앞으로 한국 불교계에 유명인사가 될지, 공부를 어디에서 했는지, 학위를 어디에서 받았는지, 그게 어디에 나타나겠습니까? 회색 장삼 하나 입고 머리 빡빡 깎고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젊은 중이 앉았는데 그 학생이 쿵 하는 울림을 듣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이 사람을 향해 족탈불급이라, 발 벗고 따라가도 못 따라갈 인간이다. 그것을 깨닫는 데서 울려 나오는 것이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런 존재의 울림을 갖게 하기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존재의 울림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하고 말하면 확고한 사상입니다. 보통 사람이 가지지 않는 확고한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의 삶이 윤리적입니다. 그런 것들이 존재의 울림입니다.
제가 오늘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오늘 강의 들으려고 하는 포커스로 이동을 하자면 그 모든 존재의 울림에 첫 번째가 뭐냐고 하면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지 그 내용을 가르쳐야 됩니다. 기독교가 믿는 내용은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는데 성경에 있습니다. 그 성경의 내용들이 풍부한데 문제는 그것을 관통해서 도대체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성경 전체가 인간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성경전체가 우리보고 뭘 믿으라고 말하는지 성경전제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누구라고 말하는지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얘기하는 건지 이것들에 대한 공부가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 사상을 이해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성경을 차례대로 배우면서 그 내용을 공부하는 것과 성경을 관통하는 사상들을 주제별로 모아서 가르치는데 이 두 가지 지식이 서로 상호소통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경 전체가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또 성경을 읽을 때는 그 관점이 정말 성경적인지를 비판하고 이러면서 두 개가 성경에서 해석되어 나온 교리들이 또 교리에 의해서 해석된 성경들이 해석학적인 순환의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는 성경을 하나하나 가르치는 일도 열심히 안하고 있지만 특히 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기초가 되는 교리를 가르치는 일들을 교회에서 태만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십년 전인가 천명을 움직인 열권의 책, 그렇게 선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언론사에서 조사를 했는데 깜짝 놀란 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1001년부터 시작해서 2000년까지 해서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는 열권의 책속에 기독교 강요가 들어간 것입니다. 왜 기독교 강요가 세계를 움직이는 열권의 책이었냐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도 사실은 그 종교개혁이 뭘 믿는지를 깔끔하게 정리한 최초의 책이 기독교 강요입니다. 처음에 나왔을 때 한권으로 되어 있는 책이 판수를 거듭하며 3판까지 나왔을 때 초판이 1536년이고 최종판이 1556년에 나왔습니다. 그때 상당한 분량으로 네 배 정도 늘어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종교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줍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독트린, 혹은 교리라고 말합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쓸 때 의도는 성경을 잘 이해하게 해서 순수한 경건을 진작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알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게 되는데서 경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어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식이 제일 먼저이고 경건이 따라옵니다. 이 기독교 강요를 써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성경전체가 참된 기독교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를 이해하면서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해 쓴 책이 기독교 강요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 쓴 책이 아직 없었던 것은 아니고 많았습니다. 어마어마한 지적인 유산이 중세시대 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순수한 경건을 진작시키는, 성경과 일치하는 기독교 진리의 체계에서 너무 많이 이탈하고 필요 없이 너무나 범주적으로 흘러서 오히려 참된 기독교 경건을 진작시키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책이 엄청난 영향을 미치면서 개신교의 탄생의 교과서가 되는 것입니다.
16세기에 수많은 기라성 같은 개혁가들이 있었고 17세기에도 탁월한 천재와도 같은 사람이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신학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16세기의 칼빈은 16세기의 모든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최고의 학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대중과 신학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는 불세출의 탁월한 재능을 가진 거의 유일한 학자였습니다. 그것이 칼빈을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든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러한 역사를 볼 때 성경을 충실하게 가르치는 것과 함께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골격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면 인간이 안 됩니다. 그것이 아무 때나 습득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3세에서 6세 사이에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지적 능력의 80% 정도가 완성이 됩니다. 그 시기에 집중적으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에 필요한 아주 근본이 되는 지식, 윤리와 자연적인 삶의 지혜, 이런 것에 대한 지식들이 아이들 속에 주입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얼마나 기가 막히게 만드셨는가 하면 애들 길러보셨으니 알지만 세 살, 네 살쯤 되었을 때 엄마 아빠가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합니다. 엄마 이거 뭐야? 저녁때가 되면 한 아름 동화책을 안고 와서 아빠보고 읽어 달라 그러고 한 권 읽어주면 또 읽어줘, 또 읽어줘, 그것은 지식을 확 빨아들이는 특별한 시기입니다. 똑같이 영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이게 뭐야? 하고 물어보고 빨아들이는 시기가 있습니다. 회심하고 은혜를 받았을 때, 여러분이 쓰는 말로 첫사랑 때에 막 빨아들입니다. 뭐든지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넣어줘야 됩니다. 안한다. 그러면 애가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화) 1930년대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사냥을 나갔던 사람들이 산속에서 짐승인줄 알고 갔는데 네발로 정글북에서 나오는 모글리 소년처럼 뛰어 다니는 짐승 같은 인간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생포했습니다. 한 아이는 여섯 살 쯤 되었고 그 다음 아이는 열두 살쯤 되었는지 그랬습니다. 얘들은 전혀 언어를 모릅니다. 어떤 경우인지는 모르는데 어쨌든 짐승에게 끌려가서 그 젖을 먹고 아이들이 자란 것입니다. 낮이면 저 컴컴한 곳에 들어가서 눈에 불을 켜고 안 나오고 밤이면 나와서 짐승 울음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때 전 세계의 교육학자들의 관심이 프랑스로 쏠렸습니다. 이유는 교육학자들이 힘을 합쳐서 이 아이들을 인간사회로 되돌아가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실패했습니다. 두 아이다 죽었습니다. 한 아이는 열아홉 살 때쯤 죽고 둘째 아이도 열네 살 때쯤 죽었는데 열아홉 살 때의 아이 지능이 죽기 직전에 네 살 정도 밖에 안 올라갔습니다. 그때에 교육학자들이 충격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이다. 유아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 충격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유아교육이 실패하면 결국 인간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기를 때 세 살 그때부터 시작을 해서 어린이 시절, 아주 좁게 보면 일곱, 여덟, 다음에 지적인 것부터 감성적인 것까지 사춘기가 될 때 그때까지 무조건 사랑을 물 붓듯이 부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아이의 인간성이 완성이 됩니다. 엄마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든지 엄마가 일찍 죽든지 아니면 아이하고 헤어지고 해서 아이의 질문을 안 받아주면 인격 자체가 형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성장한 다음에 사물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줄 모릅니다.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교인들도 가만히 보면 성품이나 성격적으로 문제가 심각해서 캐 들어가면 어린 시절이 딱 나쁩니다. 그런 사람이 다행히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고 후회도 하고 좋은 사람들 만나서 사랑을 하고 인간성이 변화가 되어 가면 그나마 좀 나은 삶을 사는데 그렇지 않고 험하고 험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어서 망가진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이 나쁜 짓하고 목회자한테 그렇게 괴롭히는 사람들을 저인간은 왜 저럴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저런 망가진 인간이 얼마나 사는 것이 괴로울까?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백성들을 보시며 민망히 여기신 예수님, ‘민망히 여기다’는 말은 희랍어 성경에 ‘에스프랑크니스떼’라고 나옵니다. 창자가 흔들리기까지 감동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인간의 영혼이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창자가 흔들리도록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니까 우리말로 표현을 하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더라,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원래 그런 것 하라고 목회자 부른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위로중 하나가 빨리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고 교인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때로는 오해를 받고 말도 안 되는 악담으로 모함을 하고 그럴 때에 그냥 그렇게 살려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부르면 안 될 찬송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들어서는 안 될 찬송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성도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고 목회자는 처음부터 죽기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길이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이 산길을 걸어가시다가 큰 고목나무를 발견했는데 심방 가방을 내려놓고 고목나무 옆에 가서 어루만지면서 그랬답니다. 나무야 너는 목회도 안하는데 왜 이리 속이 뚫어졌느냐? 참으십시오. 참고 인내하고 자기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목회자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입증하려면 몇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목사가 할 일입니까?
정말 예수를 믿는 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목회에서 우리들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기 위해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 회심하지 않는 사람을 절대 세례주면 안 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주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하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은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저는 빠집니다. 장로 한사람, 부목사 한사람, 이렇게 한 팀을 만듭니다. 학습 세례 받을 사람을 다 신청을 받습니다. 한 달 동안 교육을 하는데 그때 기독교 교리를 집중적으로 가르칩니다. 참석 안하면 당연히 탈락입니다. 그 다음에 과제를 내야 합니다. 상당양의 책을 읽고 설교 테잎을 듣고 과제물을 다 내면 통과를 시켜줍니다. 마지막에 면접을 하는데 교단에서 만든 소요리 문답이 있습니다. 세례 문답지를 완벽하게 외워야 합니다. 어떻게 외우는가 하면 자다가 발로 툭 치고 일어나도 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안 외우면 안 줍니다. 자기가 세례를 받을 만하다. 자기가 확실히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간증을 지켜봅니다. 그 간증을 말로 시킬 수도 있고 쓰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읽어보면 어느 정도 판단이 나오고 정말 회심한 사람인지 질문을 해서 확인을 하고 그 다음에 교리의 내용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 등등 물어봅니다. 만족스럽게 대답을 하면 이제 세례를 줍니다. 안되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가 두려워하지 말고 쭉 가야 합니다.
(예화)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데 성찬식을 세례 안 받은 사람도 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설명을 하고 세례 받은 사람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끝나고 나서 권사가 대들더랍니다. 남편이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는데 세례를 안 받았습니다. 작년까지는 먹었는데 새로운 담임목사가 먹지 말라고 그럽니다. 권사란 사람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목사님 우리 남편이 당신보다 사회적인 지위가 떨어집니까? 학벌이 떨어집니까? 재산이 적습니까? 그까짓 거 포도주 한잔하고 빵이 얼마나 한다고 우리 남편 못 먹게 해서 상처를 줍니까? 그런 사람이 어떻게 권사로 되었을까? 아까 그 안수집사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권사가 되었는데도 성찬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주님 앞에 가면 목회자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권사로 세울 수가 있습니까? 지식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다음에 어떤 경우가 있는가 하면 우리 교회 예를 들겠습니다. 처녀, 총각이 결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세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 달 동안 결혼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번 달에 결정하고 다다음주에 결혼할 테니 주례를 써달라고 하면 저는 안하지만 교회에서 그렇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결혼 교육을 받고 최소한 6개월 전에는 신청을 해야 합니다. 다음에 두 사람이 교리 문답을 하고 통과를 하면 교회에서 장소도 빌려주고 주례도 써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다시 엄마, 아빠가 모두 나와서 세례문답을 해야 합니다. 교육을 받은 지 3년 안에 아이를 낳았으면 교육은 면제해주고 테스트만 합니다. 둘째 아이를 낳으면 또 테스트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서리집사가 될 때 다시 또 교리문답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 등록을 하면 20주 동안 교육을 받는데 그때 교리에 대해서 다시 공부를 합니다. 1년이나 2년 정도 다니면 교리반에 다닐 기회가 주어지는데 교리반에 들어오면 제가 직접 강의를 10주, 길면 14주 정도 강의를 하고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 개론을 가지고 서론부터 종말론까지 강의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말고사를 봐서 85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교사나 구역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꼭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누구를 가르치면 되겠습니까? 그 정도 되면 교리적인 지식이 상당히 세워지게 됩니다. 다음에 2년이나 3년 지나고 나면 고급 교리반에 들어오게 되면 1600페이지 정도 되는 기독교 강요 3판, 라틴어에서 직역된 것을 가지고 15주 동안 공부를 하고 매주 시험을 보고 중간고사를 봐서 90점을 받아야지만 안수집사, 권사, 장로 투표에 나올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교육을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아도 잘 안하려고 하는 교인들을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하니까 됩니다.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절대 외우지도 않고 덜렁거리며 오면 떨어트려 버립니다. 6년을 다녀도 세례를 못 받습니다. 우린 그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안 봅니다. 교리를 공부하면 그 사람들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골치 아픈 것 배우기 싫어하는 것 같지만 반대입니다. 30년을 예수 믿어도 기독교가 뭘 믿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반에 들어와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나면 한눈에 기독교가 뭘 믿는지에 대한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떠오르게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신학교 다닐 때 배웠던 조직신학부터 종말론까지 요약본입니다.
성경 읽을 때 이해가 잘되고 인생사에서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그 교리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학생들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간 어려운 신학 책도 읽을 수 있는 지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지식이 계속 축적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을 지식의 기반위에 놓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성도들에게 책을 안 읽힙니다. 여러분 가운데 매달 책을 읽으라고 광고를 하고 독려를 하는 교회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드뭅니다. 한국에서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무슨 책이 좋은지를 모릅니다. 말도 안 되는 책을 읽으면서 신앙이 이상하게 삐뚤어지는데 자기가 삐뚤어 진지도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항상 보면 지적인 면에서 쿵 하는 충격을 받으면서 야 여기는 정말 열심히 하나남과 세계와 인간, 교회, 이런 것들에 대해서 배우는 열심 있는 학생들이 있는 인간 같은 곳이구나! 그것을 깨달으면서 내가 이렇게 까막눈처럼 살아서는 되겠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하는 것도 존재의 울림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구원 받은 티켓 하나를 받아놓고 죽을 때 기다리다가 인생 살다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시고 이 세계가 왜 창조되었는지를 나는 누구이고 교회는 누구인지 이웃은 누구인지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맞지 않는 이 세상을 끊임없이 변혁시키면서 그 문화에 항거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에 맞는 문화를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분투하는 삶입니다.
전도는 그런 사회의 변혁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첫 번째 작업입니다. 그게 바로 존재의 울림이 있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백성,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보물로 이 세상을 사는 비결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들 자신이 끊임없이 이 참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구도자의 심정을 가지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인들에게 기독교의 진정한 사상이 무엇이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인간에 대해, 종교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이 사회의 악과 불의에 대해서 어떻게 말한다는 것을 확신 있게 가르쳐서 주님께 받은 은혜를 가지고 그 소명대로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역할이 교회에서 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책을 읽혀야 합니다.
제가 22년 동안 목회해오면서 일관되게 하는 것이 구역 예배를 한권 책을 가지고 공과를 합니다. 제 책을 가지고 합니다. 다른 사람 책도 한두 권 하긴 했지만 제가 워낙 책을 많이 써서 제 책을 가지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제 책을 많이 읽으신 분들도 있지만 주기도문,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신학적인 책들과 교리적인 책들, 조금 쉬운 그런 책과 신학적인 책들을 번갈아 가면서 합니다. 일 년에 많으면 다섯 권도 소화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네권 정도 소화를 합니다. 십년 동안 우리 교회 다니면 신학 책을 사십 권 정도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고급 교리반 까지 마치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에서 좀 후진 M. Div나온 학생들보다 교리적인 지식이 훨씬 뛰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점은 설교에 있어서 물렁물렁한 죽 같은 음식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딱딱하고 잘 차려진 음식을 기대합니다. 처음 온 사람에게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말씀으로 교감을 하면서 지식을 벽돌 놓듯이 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신앙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지만 지식이 올바르기만 하면 미끄러지기는 해도 막 나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없고 은혜도 떨어지게 되면, 제일 좋은 것은 지식도 있고 은혜도 충만한 것입니다. 지식이 없이 미끄러지게 되면 거의 이교도와 비슷할 정도로 미끄러집니다. 막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탄탄한 지식의 기반위에 신앙을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일생을 목회를 하면서 이런 지침을 받았습니다.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위에 모든 지식을 삶으로 나타나게, 대단합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대의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돌아가셔서, 어떤 목사님은 하이델베르크나 웨스트민스터나 이런 교리 문답서를 가지고 5분마다 설교하신다고 하는데 그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교인 전체를 가르치는 것이 힘들면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도 모아서 가르치고 또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가르치고, 가르치고, 가르치고 해서 지식의 기반을 세우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책을 손에서 놓지 말고 자신의 설교가 은혜에 넘칠 뿐만 아니라 한편의 설교를 듣고 나면 내가 정말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를 반성하게 만드는 신학적인 임펙트가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신학적인 얼개를 가지고 있을 때에 성경을 읽어도 그 성경 속에서 많은 깨달음들이 증폭되게 되는 것이지 신학의 얼개가 없으면 성경을 읽어도 항상 모든 사람이 다 생각하는 상식적인 선에서 이야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에게 감화를 줄 수가 없고 그 지식을 받은 사람들이 탄탄하게 세워져 갈 수 없습니다.
제가 22년 동안 한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저도 은퇴할 때가옵니다. 끝까지 버티면 앞으로 십년 넘었습니다. 더 빨리 올수도 있겠지만 제가 설교자로서 갖는 소원이 있습니다. 32년 설교를 한 것 중에 개척 때부터 설교를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33년을 들었다고 칩시다. 7500편정도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설교자가 올라와서 본문을 읽으면 무슨 설교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그런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현실은 우리 선배 목사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3년 마다 교회를 옮기면 늘 신선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교인들도 신선한지 그건 두고 봐야 됩니다. 그만큼 한계를 설교자들이 느낀 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깊이 만나고 자신이 깨트려지는 영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적인 변화가 계속 있어서 3년 전, 5년 전에 설교했던 자신의 설교를 보면서 정말 미숙했구나, 신학적으로 덜 영글었구나, 그래서 5년 전, 3년 전 설교를 보면 후회하지 말고 이렇게 설교하라고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분투해야 합니다.
강남 양재 천에서 연어를 풉니다. 알을 부화시켜서 새끼를 풀어 놓으면 태평양까지 가서 성어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연어에게는 모천귀소본능이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 집념이 대단합니다. 물살을 거슬리면서 올라가고 낚시꾼의 미끼의 유혹을 피하면서 모천을 향해 회귀하는데 가보니까 물이 너무 줄어들었습니다. 배로 기면서까지 얕은 물을 헤엄치며 올라옵니다. 폭포가 나타나면 거기에 몸뚱아리를 던지면서 좌우로 부딪히면서 상승을 합니다. 마지막에 모천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알을 낳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 강한 집념을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살릴까? 내가 괴로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실 수가 있다면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평화롭고 온전해 질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죽을 수 있다고 서약을 하고 목사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죽기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고린도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하고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느니라. 목회자가 끊임없이 죽으니까 그것이 생명이 되어서 사람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는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예수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며 예수의 생명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번역이 잘못 되었습니다.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날마다 짊어지며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죽는 그 곳에서 생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어제 설교한 것처럼 목사가 아포토시스의 죽음을 실현하는 세포가 되어야지 암세포가 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여러분에게 맡기셨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것은 말씀대로 살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성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목회자를 세웠다. 그래서 목사님, 목사님이 설교한 대로 살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겁니까? 그럴 때 목회자는 나처럼 된다. 나처럼 행복해지고 나처럼 하나님 앞에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되는데 현실이 그게 안 되니까 날마다 회개하고 그래야 합니다.
교회에 좀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십년 전 일이었는데 큰 어려움은 아니지만 다른 교회의 어려움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었지만 저한테는 굉장히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 마당에 앉아서 성경을 묵상하고 있는데 후배 목사님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선배님 생명력 있는 목회의 비결이 뭡니까? 내가 그랬습니다. 죽음, 목회자의 자기 죽음이다. 22년 동안 정말 게으르지 않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2년 동안 딱 한번 한 달 휴가를 갔습니다. 두 주 이상 교회를 비운 적이 수술해서 병원을 입원한 적, 수술하고 설교하지 말라고 했는데 설교해 가지고 수술한 곳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두 주를 쉰 것을 제외하고는 충실히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직원들하고 부교역자는 쉬고 나는 공부하러 나오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지금도 싫어합니다. 이해하려고 많이 애를 씁니다. 어느 날 후배 목사님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 너무 목회가 힘든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너 진짜 열심히 한다. 그런데 너 몸에 나 예수의 흔적이 있니? 처음에는 아주 작은 소리로 들렸습니다. 교회 어려운 생기면서 기도를 하기 시작하니까 웅장한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밥 먹을 때도 울고 밤중에 교회 나와서도 울고, 제가 십년 동안 교회 안에서 살았습니다. 3층에서 내려와서 예배당에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정말 열심히 했는데 예수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목회자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50대 53이었습니다. 40대 후반부터 50대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을 한번 깊이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말씀드리지 않은 비밀스러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열리면서 예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그런 위대한 신앙의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