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러 테제와 개혁 신학의 미래
녹취자: 백지영
멀러테제가 무엇이냐 하면, 멀러(Richard A. Muller)는 사람이름입니다. 칼빈 신학교에 교수로 계셨고 작년에 은퇴하셨습니다. 옆에 있는 네 권의 책이 바로 '포스트 리포메이션 리폼드 도그메틱스'(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라고 하는 ‘P.R.R.D.’라고 약자로 불리는 굉장히 기념비적인 책입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최근 개혁주의권내에서 저술된 책 가운데 한 30년 내로는 이 책의 무게에 버금갈 정도의 책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중량감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물론 여러분들 중에 이 책을 읽으신 분은 아마 거의 없으실 것입니다. 전공하시는 분들 이외에. 매우 어려운 책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을 지금으로부터 한 7, 8년 전에 아주 우연한 기회에 손에 넣게 되었고 1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죽 읽어나갔는데 엄청난 지적인 충격을 받았고, 예전에 저에게 커다란 감화를 끼쳤던 존 오웬이나 칼빈이나 이런 사람들이 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저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충격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개혁신학의 족보를 발견하게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분이 도대체 누군가 만나러 가자고 생각했는데 마침 화란에 와 계시다고 해서 화란까지 갔습니다. 간 길에 만난 게 아니라 그분을 만나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갔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이분은 참 황당해 하셨습니다. 학자도 아니고 교수도 아닌 사람이, 서울도 아니고 서울 변두리에 있는 교회의 목사가, 자기 미국의 대학원생들도 안 읽는 책을 읽고 그것도 은혜를 받았다고 왔다고 하니까 황당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나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개혁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공유하면서 제가 아주 깊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순수한 학자고 티쳐입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설교를 하시라고 해도 결코 설교를 안 하시는 분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리처드 멀러교수와 이제까지 교분을 가지고 학교도 갔고, 그분을 한국에도 여러 번 초청했다가 결국은 실패했는데 제가 가서 성사시켜서 한 5년 전에 한국에 오셔서 세미나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기에, 이 멀러 테제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느냐? 여기에 멀러 데시스(Thesis)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것은 원래 테제(These)라 그래야 맞는 것입니다. 이분 자신이 아주 겸손하게 테제라고 부르지 말고 데시스라고 불러 달라 그래서 제가 그분의 뜻을 따라서 데시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멀러 테제입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이 멀러 테제의 연구방식을 따르는 많은 멀러리언들이 전 세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도 도르트레이 학회에 직접 참석해서 하루 종일 논문발표를 들었는데, 오늘날 개혁파 권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멀러세즈라고 결론을 내릴 정도로 그렇게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분입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하버드에서 두 번 인바이팅(inviting)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거부하고 칼빈 신학교에서 마지막까지 봉직을 하셨습니다. 이 내용을 제가 다 강의를 하려면 두 시간 반 정도 강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런 인내심이 없으실 것 같습니다. 뒤에 프로그램도 있고 그래서 제가 그냥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학교에 다닐 때 이런 식으로 개혁신학을 이해를 했고 여러분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의 시조는 마르틴 루터였지만 그는 주관주의에 빠져서 한쪽으로 치우쳤고 그 중심을 다음 세대인 칼빈이 나와서 잡아주었다. 그리고 칼빈 이후에 테오도르 베자, 루터 이후에 필립 멜랑히톤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스승들의 순수한 개혁정신에서 이탈하여 합리주의 혹은 이성주의 신학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래서 소위 16세기 이후 17세기 개혁파정통주의라는 신학의 풍조가 생겨나지만 그것은 모두 루터파는 구원론을 중심으로, 칼빈파는 예정론을 중심으로 중심교의를 삼아서 이루어진 이성주의적인 교의의 체계로서, 본래의 종교개혁이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신앙의 정신을 유실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는 종교개혁이 아니기 때문에 읽을 필요는 없고, 물론 이렇게 명시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제가 다니던 학교 분위기는 그랬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중에서 마르틴 루터는 주관주의에 치우쳤기 때문에 가치가 적고, 칼빈 이외에 츠빙글리는 우리와 약간 신학적인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 밑에는 이성주의로 흘렀기 때문에, 그래서 칼빈을 잘 이해하면 그것이 곧 개혁주의다.”
그런데 칼빈이 남겨놓은 책은 50여권입니다. 방대합니다. 설교집, 주석, 논문과 서신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칼빈의 저작물들이 대부분이 아직 번역이 안 되어 있습니다. 말로만 칼빈을 그렇게 크게 외치지 칼빈이 쓴 50여권의 책조차도 다 번역을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우리에게 있는 것은 논문이나 서신 같은 것도 번역이 안 됐고 주석하고 마지막 남은 것이 기독교강요입니다. 주석은 너무 길으니까 제쳐놓고 기독교강요 딱 한권, 그것도 삼판이나 수정을 거쳐서 최종판까지 오게 되는데 1판, 2판은 다 건너 띠고 마지막 최종 삼판 하나를 놓고 그것이 개혁신학 전체의 역사에서 마치 표준적인 주춧돌이 되는 것처럼 이해를 하고,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 그것과 다르면 개혁신학이 아니고 그것과 같으면 개혁신학이고, 결국은 개혁주의의 그 유장(悠長)한 역사 속에 외로운 섬처럼 하나 기독교강요가 '탁' 떠있고 이것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개혁주의고 이것과 의견을 좀 달리하면 개혁주의가 아닌 것으로,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칼빈 자신의 의도도 아니라는 것을 후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멀러 테제의 핵심은 네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채택한 그 스콜라주의 신학은 방법론의 문제이지 이성주의로서의 변질이 아니다.” 이것이 첫 번째 주장입니다. 스콜라주의는 질문과 대답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아주 번쇄(煩瑣)한, 중세신학을 형성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나 이런 사람들이 형성했던 그 신학의 체계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에는 어떻게 이해를 했느냐? 전에는 반대로 이해를 했습니다. 두 번째는 종교개혁자들과 17세기 개혁파정통주의자들 사이에는 여태까지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안티데시스(antithesis), 반립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연속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두 번째 데시스입니다. 세 번째는 개혁파정통주의자들은 그동안에 성경 신학을 무시한 사람이었다는 혐의를 받아왔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 네 번째는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이 철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라고 하는 이 비난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멀러 테제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이전에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이전에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도 기독교강요를 쓸 때에 순수한 경건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그 책을 썼습니다. 그랬는데 그러한 순수한 정신을 버리고 이성주의에 흐르게 되었고, 그 속에서 수많은 논쟁들에 스콜라주의를 사용을 하면서 신학이 아주 번쇄(煩瑣)하게 되어갔다고, 저도 그런 것으로 세뇌 되어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통주의’, ‘오도독시’(ortho·doxy)라고 하는 말은 ‘똑바른’, ‘올바른’을 의미하는 ‘오르도스’와 ‘의견’을 의미하는 ‘독사’ 이 두 개가 합쳐져서 ‘똑바른 의견’, 그래서 오도독시, 정통주의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정통주의는 기독교신학에서 역사적으로 정통교리를 따르는 신앙, 혹은 신학의 내용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7세기에 속한 것을 개혁파정통주의라고 부른다면, 보다 더 넓은 맥락에서는 개신교정통주의라고 부르고, 또 보편교회 전체를 관통하면서 정통신학의 흔적을 연결해서는 정통주의 혹은 정통신앙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개신교 정통주의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편교회의 정통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성부에 대한 성자 종속설, 서보드네이셔니즘(Subordinatianismus, 聖子從屬說)을 주장한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호모우시우스를 확립한 니케아공의회부터 시작을 해서 성령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한 제 일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네스토리우스파의 주장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립한 칼케톤 공의회에 이르는 이 중요한 줄거리들을 따라서 형성되어온, 기독교의 정통신앙을 지지하는 그러한 신학적인 노선을 정통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개신교정통주의의 발전은 크게 세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첫 번째 단계는 종교개혁 1, 2세대입니다. 그래서 이때 개신교 신학의 전제들이 제시되고 설명되었고, 주요한 학자들이 멜랑히톤, 칼빈, 불링거, 무스쿨루스, 버미글리, 파렐, 비레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제2단계로 넘어가서 초기 정통주의 시대가 도래 하게 됩니다. 이때는 1565년 하이델베르그 캐터키즘부터 시작해서 1618년 도르트 총회까지입니다. 이때에는 정통주의의 뼈대를 굳게 세우고 형식화(포뮬레이셔니즘formalizationism), 자신들이 두루뭉술하게 믿었던 내용들을 훨씬 더 세부적으로 고백하는 작업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알미니우스가 문제였습니다. 알미니우스가 등장을 해서 칼빈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처럼 하면서 다른 의견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여태까지 칼빈이 언급했던 내용들을 보다 세밀하게 나누어서 설명하지 않고는 알미니우스파의 주장들을 반박하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상세화의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그런 상세화가 신앙고백이나 신조의 작성, 신학적인 저술의 작업등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때에 주요 국가 신앙고백서들이 출간되게 되는데,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벨직 고백서, 제 2 스위스신앙고백, 도르트 신조 등입니다. 이때 활동했던 학자들이 우르누스, 유니우스, 퍼킨스, 테오도르 베자, 케커만, 폴라누스, 윌리엄 에임즈, 고마루스, 왈레우스, 마커비우스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3 전성기 전통주의시대가 열립니다. 1640년에서 1725년인데, 1725년 볼피우스를 기점으로 해서 개신교에 전해 내려오는 정통주의에 대한 전통들은 끊어지게 되어서 결국은 이성주의 신학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아주 눈부시게 정통주의신학이 발전하던 시대였고 이후에 새롭게 등장하는 수많은 논적(論敵)들에 대해서 대항하면서 신학의 정교화의 작업과 종합화의 작업이 일어나게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신학에서 보면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대부분의 많은 교리들이 가톨릭과 거의 같았습니다. 그래서 칼빈도 삼위일체에 대해서 안 씁니다. 삼위일체, 기독론 등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커다란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나서 처음에는 이견이 없는 것들은 그냥 내버려둡니다. 그리고 이견이 있는 것부터 작업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톨릭신학에 대해서 ‘그것은 아니다.’ 라고만 이 야기를 했지 ‘우리는 무엇을 믿는다.’라고 하는 자기의 유산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때에 가톨릭과는 별도로 개신교만의 정확한 교리체계를 총체적으로 구성하고 싶은 욕구를 갖게 됩니다. 그것이 종합화의 작업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신학자들이 이야기를 한 것들을 가지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이견들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을 종교개혁자들이 한 내용을 가지고 비판하기에는 설명이나 논리적인 구성들이 탄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교리를 진술할 때 항상 그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후발적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참된 교리가 나오면 거기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그러면 그것을 이단이라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 교리가 진짜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다시 재구성하면서 이 의견이 '잘됐다', '잘못됐다'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단은 정통교리의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이야기가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그런 점에서 기독론이나 신론의 교리, 삼위일체의 교리를 발전시키는 아주 중요한 추동력을 제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세부적인 설명들이 정교화의 작업입니다. 신앙고백의 형태를 띤 신학을 논쟁적, 스콜라적, 적극적, 설교적, 교리 문답적 형식으로 정교화 시켰고, 이때의 유명한 학자들이 포케이우스, 이 사람이 언약신학을 도입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마레시우스, 푸치우스, 스테판 챠녹, 존 오웬, 튜레틴, 마스트리히트, 브라켈, 피테트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화려한 정통주의에 전성기를 이루게 됩니다.
문헌이 얼마나 많으냐 하면, 리차드 멀러교수가 가지고 있는 개혁파정통주의 문헌이 9만 타이틀이라고 합니다. 제가 6만 타이틀정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텍스트로, 대부분은 텍스트 화일로 가지고 있는데, 어쨌든 제가 지금까지 모은 것이 6만 타이틀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계속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저작들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드리면 청교도 공부하는 사람들한테는 좀 섭섭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청교도들이 쏟아낸 문헌은 개혁파정통주의 대륙에서 쏟아낸 문헌에 비하면 어립니다. 물론 청교도들 중에서도 존 오웬, 윌리암 퍼킨스, 에드워드 레이, 스테판 챠녹, 토마스 굳윈 이런 사람들은 어깨를 겨룹니다. 저는 솔직히 존 오웬을 만난 다음에 청교도문학에 대한 매력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오웬에 심취해서 읽고 나니까 나머지 것들은 너무 설교집 수준인 책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앤드류 그레이라든지 크리스토퍼 러브라든지 청교도들, 작품 쓴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설교집 수준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놀라운 통찰이 있고 은혜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감히 함부로 수준이 낮다, 우리는 그것 이상 쓴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있었던 대륙의 아카데미즘에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군계일학(群鷄一鶴)같이, 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깊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영국의 청교도들 중에서도 워낙 학문이 뛰어나서 대륙의 쏟아져 나오는 아카데미즘에 합류하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고 기여도 하고 했던, 말하자면 국제적인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청교도 문학 중에서 탁월한 수준의 저술들을 낸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저술들을 낸 것입니다. 특히 존 오웬, 윌리엄 퍼킨스, 스테판 챠녹 같은 사람들은 대륙의 정통주의 신학에서도 최상위층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존 오웬의 '인디카이 에반젤리카이'는 아홉 권인가로 되어 있는데 개혁파 정통주의 역사 속에 생산된 수만 권의 책들 가운데서도 아주 탑 클라스에 속한 책입니다. 지금도 화란에 가면 머리 하얀 할아버지들 중에서 존 오웬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벌써 그 시대에 존 오웬과 그 다음 세기 시대 때에 존 오웬의 책의 대부분이 화란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청교도들의 층차(層差)들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마어마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몇 사람만 이야기하자면, 푸치우스 같은 경우는 이 사람은 우트레히트의 교수였고, 그 다음에 챠녹, 오웬은 아시는 분이고, 튜레틴은 변증신학강요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우리 개혁신학에서 교과서처럼 쓰여 졌던 책이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입니다. 그 찰스 하지가 이 사람의 책을 정리해서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보면서 웃었던 것이 자가당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배운 신학이. 우리는 17세기 신학은 이성주의에 흘렀기 때문에 거부하고 우리의 라인은 찰스하지 그 다음에 누구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찰스 핫지의 원본이 튜레틴의 책입니다. 이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유명한 책이 '인스티튜트', '엘렌티카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변증신학강요라는 말로 라틴어가 번역이 되어 있기는 합니다. '엘렝띠띠아러지'라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영어번역이 라틴어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스트리히트, 이 사람은 개혁파 정통주의 역사에서 빛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푸치우스의 제자입니다. 푸치우스의 스승은 고마루스이고 고마루스와 푸치우스 사이에 아르미니우스가 끼어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스트리히트가 쓴 책 중에 유명한 책이 실천신학이라는 책입니다. P.T.T, 프랙티컬 씨얼로지 씨얼로기아이(Practical Theology Theologia)라고 되어 있는 그 책입니다.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한권이 한 4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홉킨즈에게 편지 쓸 때 자기가 만난 책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탁월한 책이었다고 감탄한 바로 그 책입니다. 그 책이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책입니다. 굉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집을 보면 대개 맨 처음에 성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닥트린 그 다음에 유즈(use) 이렇게 나오는데, 그게 사실은 마스트리히트에게 배운 것입니다. 마스트리히트는 네 개로 나눕니다. 제일 먼저 이그제티카, 주석 주해를 먼저 하고 두 번째 독트리나, 교리를 찾아내고 세 번째 엘렌티카이, 그 다음에 그 교리를 지지하지 않는 이단과 이교에 대해서 비판하고 마지막에 프락티카, 실제로 그 교리를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정통주의였고 그 다음에 후기 정통주의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이때는 벌써 정통주의가 막을 내려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종교개혁과 스콜라주의가 어떤 차이가 있었느냐?'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계시를 개인적인 사건으로 이해했는데,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이것을 명제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이해가 아니라 기존의 이해입니다. “종교개혁은 역동적이었는데, 스콜라주의는 정적이고 이성적이 됐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은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랬는데 스콜라주의자들이 이것을 바꾸어서 하나님에 의해 언어적으로 지시된 말씀이라고 전제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온유한 인문주의 정신을 가졌는데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와 형이상학의 엄격함을 적용했다.” 이렇게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스콜라주의라고 하는 말입니다. ‘스콜라'라는 말은 희랍어 '스콜래'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스콜래'는 놀랍게도 '스쿨'이라는 말의 어원이 됩니다. 그런데 그 '스콜래'는 '한가한'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공부는 한가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한가해서 여기 와 있는 것입니다. 할 일 없고 그저 무료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콜라주의라고 하는 이 방법이 전래된 것을 추적을 해 보면 재미있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슬람으로부터 들어오게 됩니다. 10세기 십자군전쟁이 일어나면서 사라센제국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서 이슬람이 기독교권을 잠식하면서 세력을 계속 확장시킵니다. 그러면서 지중해에서 기반을 넓히고 그 다음에 남유럽 스페인까지 진출을 합니다. 그것이 6세기 말 7세기의 일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문화를 형성하면서 거기에서 나중에 기독교와 전쟁을 하게 되는데, 그때에 기독교권에서는 전부 다 이슬람을 어둠에 있는 무지한 자들이고 우리가 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깨워야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쳐들어가서는 엄청난 문화적인 충격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건축, 과학, 기술, 모든 면에 있어서 학문이 기독교세계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권에서는 대학의 역사적인 기원을 추적해 가봐야 12세기를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 세워졌던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 이런 것들이 전부 다 11, 2세기에 세워집니다. 1100년대에. 그런데 이슬람에는 약간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9세기 중엽에 대학들이 생겨나기 시작해서 10세기 때에는 확실하게 대학이 세워집니다. 학문의 세계에서 대학이 100년, 200년 앞서서 세워졌다고 하는 것은 족탈불급(足脫不及)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건축과 모든 방면에서 너무 탁월하고 학문도 탁월하게 질서가 잘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뭔가 하고 들어가 봤더니, 놀랍게도 오래전 기독교에서 로마시대 때에 금서 취급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이었습니다. 거기서는 이미 이슬람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을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 번역을 해 준 사람들이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핍박을 피해서 도망을 갔는데, 이 아랍 사람들을 시켜서 희랍어로 된 문헌을 번역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바이링귀어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도 주고 생활도 보장해 주고 하면서 공생관계를 가집니다. 그래서 이슬람의 역사를 보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기독교를 포용하고 공존한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존 메클로크라고 하는 영국의 교회사학자에 의해서 새롭게 조명이 되고 있습니다. 한번 사서 읽어보십시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랍어로 번역을 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이슬람 문명을 재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과 이성의 논쟁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이미 기독교에서 중세시대 때에 화려하게 논쟁을 했다고 치지만, 그런 논쟁하고는 비교되지도 않는 깊이 있는 논쟁들이 이슬람세계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비첸나, 아베로에즈, 알 파라비, 알 가잘리 이런 아주 유명한 이슬람의 사상가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슬람의 철학들이 기독교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 근원이 알고 보니까 아리스토텔레스였던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의 사명은 복음만 전하면 되는 게 아니라 이단들과 맞서고 심지어는 이교도들과 맞서면서 그러면서 이교도대전 같은 것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나왔던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종교를 꾸짖으면서 기독교의 진리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방대한 학문의 지식이 필요하고 논리가 필요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고 논쟁을 하는 데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아주 유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짜 신학을 공부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공부를 꼭 해야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유수한 개혁 신학자들을 세계에 다니면서 만나보았지만 동일한 대답이었습니다. “철학이 없이 신학을 하는 것이 한국의 실정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답변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신학의 임무가 철학을 꾸짖는 것인데 모르는 것을 어떻게 꾸짖을 있겠느냐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신학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이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50여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스펙트럼이 어마어마합니다. 의학부터 시작해서 윤리학, 정치학, 자연과학에 대한 책까지 다 썼습니다. 그때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지고 있었던 장서가 80만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서구 역사에서 어마어마한 지식들이 전부 다 아리스토텔레스 한 사람에게 모여서 다시 분출해서 정리가 되어 가지고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토대로 해서 어떤 방법으로 이 지식을 쌓아올리면 되겠구나 하는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식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과학이 그렇게 엄청나게 발달해서 그 당시의 이슬람의 과학은 기독교권하고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그렇게 정교한 발전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콜라주의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이냐? 스콜라주의 정의에 대해서 네 가지 범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본래적 의미는 학교에서 교육을 위해서 사용하는 훈련의 형태입니다. 내용적인 의미는 방법론의 문제만이 아닌 중세시대에 대항에서 가르치는 독트린,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전횡적, 권위적 방법론 혹은 고루하고 상상력이 결여된 견해를 뜻하기도 하는데, 이는 스콜라주의가 변질되었을 때 나타난 전형적인 특징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네 번째 스콜라주의의 정의는 개신교 교리의 제도화의 과정에서 고도의 기술적이며 논리적인 접근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의 책을 읽으신 분들은 아마 읽기에 굉장히 짜증나던 대목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존 오웬이 이야기하면서 기독교 교리를 진술합니다. 그래서 '오브젝션'Objection),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그리고 오브젝션을 합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다시 '디 앤셜'(The answer), 다시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전형적인 스콜라주의 방식입니다. 묻고 대답하고 이성의 퇴로를 차단해서 마지막에 자기의 논리를 강화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끔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고도의 정교한 논리학과 수학 그리고 언어에 대한 진술의 기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면 학문을 하는 게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교육을 보면 마르틴 루터나 칼빈이 교육받을 때도 그랬습니다. 신학공부 수업시간에 제일 어려운 시간이 있었는데, 논쟁학 시간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가 배운 내용의 신학내용을 정리해서 발표를 하면 무수한 반론을 받습니다. 그 반론에서 어떻게 자기가 세워놓은 이론들을 고수하느냐 하는 것들을 아주 가혹할 정도로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성의 근육을 강화하는 아주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스콜라철학에 이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11세기경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것을 흠뻑 마셔서 고도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지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아주 상세한 논리적인 구조로 풀어낸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완성을 다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렇지만 '대전'(大全)이라고 부르는 것을 쓰는 것이 그 당시에는 유행이었습니다. 너도 나도 '쑴마 쎄오로기카'(Summa Theologiae)라고 이름이 지어진 책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얇게 어떤 사람은 두껍게 어떤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썼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그런 것을 쓰기 위해서는 철저한 논리훈련이 되어 있어야 했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논쟁이 무엇이냐 하면, 이 스콜라주의라고 할 때 그것이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냐, 아니면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이냐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스콜라주의를 다시 택하게 됩니다. 17세기에. 17세기뿐만 아니라 칼빈도 이미 택하고, 칼빈 이후에 테오도르 베자나 멜랑히톤에 의해서는 적극적으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벌써 그 사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칼빈이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와 마지막에 사역을 마칠 때의 사이에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러가고 그리고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을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기독교의 초창기에 아주 간단한 개혁신학의 요지만을 가지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던 시대가 지나서 이제는 보다 더 철저한 교육과 논리를 요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칼빈 같은 사람도 자기 자신이 이미 자기 시대에 만들어 놓은 제네바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을 합니다. 그래서 테오도르 베자가 칼빈의 허락 없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이성주의로 변질시켰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화란에 갔을 때 아주 귀한 책을 구했습니다. ‘히스토리 오브 제네바 아카데미’라는 불어로 쓰여진 책입니다. 1905년에 나온 책인데 제네바 아카데미의 모든 역사를 다 기록하고 심지어 졸업생 숫자까지 다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불어가 능숙하지 못하니까 사전을 찾아가면서 부분적으로 읽어보는데 정말 놀라웠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 제네바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에 칼빈이 참여해서 테오도르 베자와 함께 그것들을 만듭니다. 제네바아카데미가 당대에는 개혁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갈 수 있는 유럽 최고의 학교였고, 그 제네바아카데미의 커리큘럼과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실력의 수준이 어느 학교에 내다놓아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레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랑베르다노라는 프랑스출신의 개혁파정통주의 신학자가 있었는데 간증을 썼습니다. “프랑스에 갈만한 학교가 없어서 여기를 온 것이 아니다. 이 학교는 유럽 최고의 학교다.” 그러면서 자기가 그 학교를 졸업한 것에 대해서 엄청나게 감탄을 하는 간증을 씁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돈을 들여서 그 학교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참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네바 아카데미 학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면 7살에 입학을 하는 코스가 있었고, 그 다음에 대학에 들어갈 나이 정도에 입학하는 코스가 또 있었습니다. 그래서 7살에 들어가서 6년 정도 배우고, 13살 정도에 들어가서 다시 6년 정도 배우는 그러한 코스입니다. 하나는 뿌불리카 뿌라이비따라고 하고 또 하나는 뿌불리카라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초등학교과정 내지는 중학교 초급과정이고, 그 다음서부터는 중학교 넘어서서 신학대학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게 우리로 말하면 신학원 과정에서 의학과 법학까지 가르쳤습니다. 목사가 될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그 학문의 세계가 얼마나 광범위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60퍼센트 넘는 과목이 전부 다 문학, 역사, 철학 등 인문학 과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원어에 대한 습득을 요구했습니다. 그 다음에 교리학을 배우고 이렇게 하면서 인재들을 배출해 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내용으로서의 스콜라주의를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중세에서 가져 온 게 아니라, 내용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받고, 그것을 세부적으로 상세화 하는 데 있어서 스콜라주의라는 방법론을 채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학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당시 모든 학문에서 이미 르네상스 이후에 보편적으로 일어나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게 무엇이냐 하면, 멀러 테제라고 하는 것이 예전의 종교개혁과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 사이에 ‘심각한 불연속성이 있다.’ 그것을 강조한 데서 ‘아니다. 긍정적인 연속성이 있었다.’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위에 또 다른 아카데미즘의 업적들이 있었습니다. ‘과연 중세와 종교개혁이 그렇게 완전히 단절된 것인가?’라고 할 때 이미 벌써 ‘그렇다.’라고 하는 것이 19세기 필립 야콥 부르크하르트 같은 대가에 의해서 이미 형성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의 테제들이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다 깨뜨려지기 시작합니다. 폴 오스카 텔러, 요한 하이징거 이런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부르크하르트의 이론이 깨지면서, 사실은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에 단절성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에는 엄청난 긍정적인 연속성이 있었다고 보는, 그래서 요한 하이징거 같은 사람은 '중세의 추수기(harvest time)가 르네상스였다. 그래서 결국은 중세가 없었다면 르네상스가 있을 수 없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띠엔느 질송이라는 인물이 등장을 하고,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중세철학과 근대 계몽주의 철학 사이에 어떤 연속성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전체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학계에서 이미 역사의 연속성과 단절성에 대한 중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만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 지각변동을 타고 그런 연구의 방법들이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에 적용되면서 이런 것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흔히 가지고 있는 선입견들은 150년 전에 주장했던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테제에 의해서 강조되었던 그런 것들을 물려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이미 벌써 역사적으로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고 있고, 이러면서 1970년대 중반에 멀러교수가 박사 논문을 쓰는데, 이분이 논문을 쓰고 나서 40년 세월 정도가 흘러오면서 이제는 거의 이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이제는 개혁주의를 하는 신학교에서는 조직신학 패큐리티(45.57)를 구성을 할 때 17세기 정통주의자를 한 두 사람씩을 꼭 집어넣어야지만 패큐리티가 완성이 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바람들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스콜라주의는 중세시대 때에 굉장히 발전하게 되는데, 방법론의 크게 네 가지정도의 핵심이 무엇이냐? 꾸바이스티오, 제일 먼저 질문 혹은 논제를 제시합니다. 그 다음에 스타투스꾸바이치오니스, 질문의 상태 혹은 질문의 위치. 지위가 되는 것입니다. 제기된 질문 안에서 논의해야 할 주제들을 명확히 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굉장히 커다란 주제를 제시하고, 그리고 이 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슨 논의들을 해야 될 것인지를 세부적으로 2번에서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브젝션네스, 채택된 교리와 상반되는 주장들을 모두 수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하나 논파하면서 왜 그것이 옳지 않은가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레스판지오, 광범위한 신학의 원천들을 고찰하면서 제시된 반론들, 오브젝션네스에 대해서 레스판지오를 하는 것으로, 이렇게 해서 결국은 일번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이끌어내는 것이 스콜라주의였습니다. 새로울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무슨 학문을 하든지 이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개혁파정통주의자들이 처음부터 A부터 Z까지 모두 스콜라주의에서 배워가지고 왔느냐 하면 그게 아니라, 자신들이 지향하고 있는 논리적인 사고의 방식들이 이런 것을 지향하고 있었는데 이런 실제적인 활용의 예들이 중세에 풍부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특히 중세도 초창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입니다. 그리고 잠깐 화려하게 12세기, 13세기 꽃피다가 13세기에 와서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의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가톨릭의 타락이 극도에 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톨릭 안에서의 자체적인 정화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역사적으로 13세기의 종교개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합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그때에 만약에 종교개혁이 성공했더라면 과연 개신교가 출현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때에 나온 사람들이 수많은 수도회들 그리고 청빈을 부르짖던 아시시의 프란시스를 비롯해서 수많은 탁발교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 지긋지긋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하고 똑같이 탈신학적인 풍조들이 번지게 됩니다. “기독교신앙의 본질은 이런 방대한 신학의 체계나 지식에 있는 게 아니다. 이까짓 게 해 준 게 뭐가 있냐? 이렇게 신학은 세워놓고 삶은 개판인데, 그러니까 우리는 산상수훈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 가르침만이 정말 유일한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다. 그리고 청빈의 삶을 살자.” 그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대중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지지를 얻게 됩니다. 이러면서 기독교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장중한 사상의 체계 속에서 실재론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조직화하던 것들이 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윌리암 오캄, 쿠사의 니콜라스 이런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이때 그 유명한 유명론(唯名論) 논쟁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론적인 사고들을 종교개혁자들이 상당 부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윌리암 오캄의 면도날이라든지 이런 개념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재론(實在論), 관념론((觀念論), 유명론(唯名論)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유명론의 사고방식하고 오늘날의 실존주의 방식하고 사실 매우 유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오캄의 면도날 같은 것, 이번에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신학방법론 1200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책이 나왔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번역을 했는데, 면도날 그것을 절약의 원리라고 변론을 폈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어떤 사물들, 예를 들어서 컵이 있습니다. 플라톤 철학에서 보면 이 컵이 컵인 이유는 컵에 이데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데아는 개별적으로도 있지만, 컵은 이 컵 한 종류가 아닙니다. 수백 종류의 컵이 있습니다. 여러 명이 먹는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술 먹는 것도 있고, 물 먹는 것도 있고, 샴페인 마시는 것도 있고, 목이 긴 것도 있고 별것 다 있습니다. 유형별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면 사실은 우리들이 어떤 신학적인, 철학적인 개념을 이야기할 때, 실제로 있는 어떤 것과 저 위에 것을 이야기할 때 중간에 수많은 그룹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을 계속 만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여기에 존재하는 이것은 사실은 아주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에 있는 더 많은 수많은 유아속(51.45?)들에 속하는 그 중에 어느 한 형태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면서도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가 훨씬 중요하고 이것은 허깨비같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윌리암 오캄 같은 사람들이 단박에 깨고 들면서 사물을 그런 식으로 보면 안 된다 하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개별자와 보편자 논쟁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편자에 대한 초월적인 인식을 통해서 개별자에게 접근할 것이냐, 개별자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그것이 기초가 되어서 보편자를 추적해 갈 것이냐, 아니면 보편자나 그런 것은 없는 것이고 단지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냐에 따라서 유명론, 실재론, 관념론 이렇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뭐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는데 여기서부터 사고가 출발해야지,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딱 맞는 것입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데나 학당을 보면 철학자들이 걸어 나오는데 플라톤의 손은 하늘을, 그 옆에 있는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은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실재를 먼저 봐라. 이것은 다 허깨비다. 그것을 봐야지만 이것이 뭔지 알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봐라. 여기에 보이는 이 개별자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된다. 이게 무언지를 규명해 가는 것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우리들이 접근해 갈 수 있는냐?”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는, 여러분은 플라톤을 먼저 선택한 사람이겠지요. 오늘날의 진보 보수 논쟁이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 아십니까?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진짜 순수한 진보는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이 사물 뒤에 어떤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진정한 진보가 아닙니다.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보수는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보수는 사상도 없습니다. 그냥 우기면 보수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삶에 대해서 욕을 먹는 것입니다. 저는 진보에 속하겠습니까? 보수에 속하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쨌든 그런 것들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13세기에 가서 무너져 버립니다. 후사의 니콜라스, 윌리암 오캄 다 사제들이었습니다. 다 이단으로 단죄되고 쫓겨납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 사람들은 철학적인 확신을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보니까 오캄의 면도날 같은 개념은 써먹기 너무 좋은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에 드는 사람은 갖다 썼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존 오웬은 오캄주의자구나.” 오캄주의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존 오웬이 오캄의 책을 모두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의심이 갑니다. 저는 그분의 마지막 옥션목록에서 오캄에 관한 저술을 못 찾았습니다. 그냥 개혁신학 주장하고 싶은 바가 있는데 마음에 드는 것 이야기하면 꺼내서 쓰고, 좀 더 공부를 해서 거기에 좋은 방법론들을 사용해서 필요하면 그때그때 차용해서 쓰는 에클레티시즘(eclecticism), 절충주의에 의해서 편의에 맞게끔 사용한 것뿐입니다. 제가 오늘 성철스님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존재적 울림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성철주의자입니까? 아니면 부디즘(Buddhism)에 대해서 깊은 호의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게 설명하는데 적합하니까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용을 한 것인데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철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올바르게 그것을 사용하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사실은 거기에서 사상의 균형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세기의 개혁파정통주의를 연구함에 있어서 17세기에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얻던 메타피직스(metaphysics), 형이상학이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 하는 것들은 아주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형이상학이 어떤 것입니까? “있음, 없음 그게 뭐냐?”, “영원, 시간 그게 뭐냐?”, “무와 유 그것 뭐냐?”, “선과 악 그게 뭐냐?”, “길이와 넓이 그게 뭐냐?” 이런 것들이 형이상학적인 논쟁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어떤 구도를 가지고 있느냐가 신학을 진술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4분의 1도 못했습니다만 마지막에 한 줄 정도만 요약을 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0페이지를 보시면 연속성이론과 불연속성이 있는데, 여기서 불연속성이론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종교개혁으로부터 17세기의 정통주의는 이탈한 것이다.”라는 것이고, 부정적 연속성이론은 “연속성이 있는데 부정적이다. 이미 17세기 정통주의자들이 그렇게 이성주의로 흘러갔는데 이미 그런 잘못된 씨앗들이 루터나 칼빈 속에 이미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있는 안 좋은 것들을 발전시켜서 17세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정적 연속성이론은 그게 아니라, “종교개혁과 17세기 개혁파정통주의 사이에는 서로 다른 불연속성과 함께 긍정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풍부한 체험적인 신학을 질료를 삼아서 개혁파정통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스콜라주의에 있어서 이것들이 구체적으로 형태가 지어지면서 종교개혁자들이 모호하게 남겨 놓았던 기독교의 진리의 체계들을 구체화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의 경건에 이바지했다.”라고 하는 것이 긍정적 연속성입니다. 연속성 이론의 선구적인 업적자들이 13페이지에 나오는데, 첫 번째가 에띠엔느 질송, 그 다음에 자끄 나리뗑 같은 사람들이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이것들이 계속 전해 내려옵니다. 에띠엔느 질송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 이분의 책이 몇 권 번역된 것들이 있습니다. 프랑스 학자인데 영어로 번역된 것은 아주 많습니다. 읽어보십시오. 이분은 중세철학사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업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원래는 이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중세엔 철학이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세의 신학이 정말 엄청난 철학이었고 그리고 그런 철학들이 13세기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쏟아져 나옴으로써 중세를 지나서 근대 데카르트에 의해서 계몽주의가 열리는데 어마어마한 기여를 했고, 만약에 중세철학이 없었더라면 데카르트의 철학, 근대 철학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그런 주장을 하면서 이분이 나오는 것입니다. 폴 오스카 텔러, 하이퍼 로만 등등이 나옵니다.
마지막 14페이지의 결론을 읽는 것으로 끝내겠습니다. “오늘날 신학은 개혁신학이 가지고 있었던 통합적이고 우주적 포괄성을 상실하고 파편화되어 버렸다.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참인간이 되고 인간다운 삶을 사는데 기여하기 보다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학문적인 지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지식은 하나님 안에 근거를 가지며 결국은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드러낸다는 확신도 사라졌다. 도덕과 가치에 대한 상대주의가 팽배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면서 기독교신학은 그것을 꾸짖고 기준을 제시하는 일에 유능하지 못한데 이는 마땅히 신학이 요구하는 사상적 체계가 확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체계화된 사상을 통해 성숙한 경건을 함양하던 기품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신학의 왜소화와 파편화, 적실성의 결핍을 보면서 우리는 종교개혁자들과 개혁파정통주의 신학의 신앙적이고 학문적인 유산들을 재발견하고 사랑하여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개별적인 신학의 내용들만이 아니라 보편신학의 내용들도 함께 공부해서 사상적 체계와 함께 적응성을 갖출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파편화되고 주관화된 오늘날의 신학을 쇄신하는 일에 이바지하여야 할 것이다.
(질문)
우리가 지금 목사님을 통해서 신학의 내용과 방법론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갖게 된 것에 대해 너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도바울이 그 당시 철학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말한 가운데 철학을 세상의 초등학문이라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면서 이교(異敎) 속에서 여러 가지 반론이나 그런 가운데서 복음을 제시할 때 그런 문제를 말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 텐데 그것에 대한 이해를 사도바울이 어떻게 했을까 그것을 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고린도전서 2장을 좀 심각하게 봅니다. 2장에서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의 아이티너리(itinerary)를 보면 어디를 거쳤다가 그리로 가게 되느냐 하면 고린도 가기 직전에 아데네로 가게 됩니다. 아데네에서 에피쿠리우스 학파, 스토이구학파들과 논쟁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컨텍스쳐라이제이션(contextualization)의 성공사례로 묘사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저는 견해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는 많은 선교적인 성과를 이루어냈는데, 아데네에서 그렇게 열심히 변증을 했지만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의 선교적인 경험 가운데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방으로 들어갈 때 두렵고 심히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간다고 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럼 당신이 한 이야기하고 반대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니냐? 좀 더 들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그러고 갔는데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다룹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십자가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 아데네에서 한 논쟁들을 읽어보면, 사실은 풍부한 내용이 안 나오지만 결정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것이 담대한 십자가로 그것을 설명하는 대신 그들과 함께 철학적으로 논쟁하는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나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대한 선명한 선포, 물론 했겠지요. 그런데 기록에 빠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거기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센트럴리티 오브 크리스챤 티칭'(The Centrality of Christian teaching),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있어서 중심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그의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아데네에서 그렇게 커다란 충격을 받고 고린도로 가면서 어마어마한 영적인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2장의 내용인데 하나님의 지혜, 사람의 지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나오는 소피아라는 단어가 의심할 여지없이 철학입니다. 당시에 있었던. 에지에(?1.05)에 나오는 철학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느냐 하면 이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구원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교회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고, 모든 좋은 것들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 모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설명했던 사람이 칼빈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지요. 그게 하나님을 직접 섬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순수한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겨도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너무 결함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잘 설명하고 논문을 잘 쓴 사람이 기독교 생활원리에 대해서 쓴 로날드 월레스입니다.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거기서도 칼빈 사상을 간명하게 잘 정리합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이 신학의 전체적인 중심이 하나의 점으로 집약이 되는데,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크리스토 크리스토스는 크리스토스 앗사르코스, 크리스토스 싸르코스 크리스토스 아나바토스로 나뉩니다. 성육신하시기 전의 그리스도,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승천하신 그리스도. 그런데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은 크리스토스 앗사르코스를 통해서 이미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말씀이시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볼 수 있도록 현시(顯示)된 것이 크리스토스 싸르코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의 사건이 완성되고, 그 그리스도가 크리스토스 아나바토스, 승천하셔서 여전히 하나님과 이 세계를 향한 중보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당신의 보좌에서의 통치를 통해서 그것들을 구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올리는 모든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올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받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것은, 결국은 신학의 비밀은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지요. 특히 앗사르코스 크리스토스 혹은 크리스토스 아나바토스보다도 크리스토스 싸르코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학의 장엄한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열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했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책을 나누어드리려고 교회의 교역자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20명밖에 안 모였다고 지금 나누어주면 안 되겠다고 해서 도로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내일 온다고 합니다. 내일 나누어드리는 책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의도와 관련된 책이니까 어렵더라도 꾸준히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2장에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충격적인 반론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그러면서 그 뒤에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를 대조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철학이 인간의 철학과는 비교될 수 없는 철학이다.” 그래서 결국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신학자는 어떤 철학자를 좋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어떤 철학자를 따르는 팔로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플라톤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저를 플라톤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반대합니다. 저는 그의 일자의 개념 이런 것들을 거부합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비인격적으로 보는 것들. 또 저는 어거스틴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트니안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을 그렇게 존경하지만 저는 오웨니안이 아닙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존경하지만 에드워즈니안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은 저에게는 기쁜 일이 아닙니다. 나는 나일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는 존 오웬 목사님에게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이 여럿 있고,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도 상당부분 있습니다. 그렇게 존경하는 칼빈에게도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지요. 바울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사람의 철학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의 세계를 이해하겠다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 말라. 나도 한번 해 보았는데 잘 안되더라. 그래서 내가 고린도에 올 때 심히 두렵고 떨었다. 그래서 내가 결심했다.” 결심이 무엇입니까? 결단입니다. 그렇게 하겠다는 의미심장한 각오입니다.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겠노라.” 그것은 이것만 하고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을 신학의 중추로 삼겠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나온다.” 이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