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현대 사상
녹취자: 김세나
오늘은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최소한 3장까지 읽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3장에서 논의하는 것은 빛에는 성경이 논리적인 빛과 윤리적인 빛, 신학적인 빛으로 이야기 하는데,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처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익숙해져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널리 이해하고 알고 있는 아주 흔하게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 빛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그 빛은 진리입니다. 시편에 “빛이신 여호와, 빛으로 인도하소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하는 구절은 모두 구약적인 전통과 유대교적인 전통을 모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도 유대인 가운데 태어나신 한 분으로서 빛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함과 책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1차적 청중에 의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1차적 청중에게 1차적인 의미가 무엇인가를 먼저 규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빛이라.” 할 때 빛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고 그 하나님의 진리를 보이는 사람의 형태를 가지고 오셔서 구현해 주심으로써 한편으로는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참 사람이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세상의 그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그것은 “너희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도구들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우리들이 ‘진리’라는 말을 꼭 하지 않아도 사람 혹은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가 있는데, “그것이 말이 되는가.” 다시 말해서 신앙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공통된 도덕 원칙, 칸트가 이야기 하는 정한적명법의 논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무너져 버린 것을 3장에서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학을 하는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여러분이 학문을 할 때, 학문 자체가 이렇게 쌓아 올릴 때, 학문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툭 치면 젓가락은 무너져 버립니다. 학문은 처음에 쌓아올 때부터 피라미드와 같이 넓은 토대를 쌓아 올라가면서 그 중에서 어떤 사람은 수학, 어떤 사람은 윤리학, 어떤 사람은 신학을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재미있는 것은 수학을 공부해도 박사학위는 PhD입니다. 물리학을 공부해도 박사학위는 PhD입니다. 사회학을 공부해도 박사학위는 PhD입니다. 그 다음에 신학을 공부해도 학위는 PhD입니다. PhD가 무엇입니까? 철학박사입니다. 수학을 공부했는데, 신학을 공부했는데 왜 철학박사입니까?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지금도 졸업할 때 사각 모자를 씁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학문 가운데 모든 근본이 되는 네 가지 학문을 이야기 하는데, 신학, 의학, 철학, 과학입니다. 그것을 4각이 형상화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진리라는 산이 있습니다. 윤리학은 동쪽 능선에서 출발하고, 수학은 서쪽 능선에서, 사회학은 북쪽 능선에서, 신학은 남쪽 능선에서 출발합니다. 다루고 있는 학문은 서로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산이 크기 때문에 수학을 하는 사람은 신학을 이해할 수 없고 사회학을 하는 사람은 수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해서 마지막에 올라가면 마지막에 얻게 되는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어느 능선에서 올라왔든지 그 능선에서 산 전체를 볼 수 있는 관점이 생기는데 신학이나 뭐나 뭐도 마찬가지라는 것, 결국 하나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을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불교, 유교, 개신교, 가톨릭교, 이슬람교 올라가는 능선을 다르지만 마지막 똑같이 만난다고 보는 시각과 같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PhD를 줍니다. 수학을 공부하였으면 방정식을 잘 푸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그 학문을 모두 통달하고 학위를 받은 후에는 수학으로 시작하였지만 마지막에는 ‘아, 그렇구나. 결국은 세계는 이러한 곳이고 인간은 이러한 존재이고, 이 세계의 존재의 의미는 이러한 것이고, 그것을 수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하였구나.’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 진정으로 수학박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전적인 의미에서 보면 신학은 그 모든 것들이 각각 올라가기 때문에 수학과 윤리학, 사회학은 각각 하나의 분야를 공부하면 됩니다. 그런데 철학은 이 모든 분야를 한꺼번에 공부해서 산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 자체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문학을 하는 사람은 죽음을 설명할 때 문학에서 죽음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만 알면 됩니다. 생물학 하는 사람은 생물학에서 죽음을 무엇이라 말하는가 알면 됩니다. 미술하는 사람은 미술에서 죽음을 어떻게 그리는가 알면 됩니다. 또한 의학을 하는 사람은 의학의 죽음이 무엇인가 알면 됩니다. 그런데 철학은 이 모든 죽음에 대한 학문적인 지평이 이야기하는 죽음을 모두 종합하여, 그러면 어느 학문에서든지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그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 철학에서 합니다. 그리고 신학은 그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성경으로 판정하고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토대로 이 죽음을 이렇게 생각하고 이것이 모든 학문을 하는 사람과 인류에 도움을 주는 지식이어야 한다, 이것을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학문이 신학입니다.
18세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신학은 지금 현제 사회에서 의학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보다 조금 더 높은 지성을 가진 사람들만이 도전할 수 있는 학문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 읽어야 되는, 그러면 “왜 신학자 이야기를 하십니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와 신학자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 18세기 이후입니다. 예전에는 <신학자=목회자>이었습니다. <신학자=설교자>이었습니다. 강의실에서 강의만 하는 신학자 없었습니다. 그러면 신학자로 소명을 받아서, 신학을 공부하는데 기본적인 조건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기본적으로 자연과학, 천문학, 철학, 소위 이야기 하는 짐나지움에서 배우던 3학4과, 논리학, 철학, 음악, 수학, 수사학, 논증학까지 다 공부하고, 이것은 우리로 이야기 하면 대학나온 사람들이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 교양이었습니다. 그 교양 위에 그리스 교부와 라틴 교부의 문집이 지금 현재 터널티에서 나온 것만 530권 정도 됩니다. 그것을 모두 읽는 것이 신학공부의 기본이었습니다. 폴리캅부터 시작해서 중세 신학자들의 일기까지 모든 서적, 라틴어와 희랍어로 된 원전을 읽어야 했습니다. 칼빈 같은 경우 읽은 것이 아니라 500권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습니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책을 읽은 기억 날 것입니다. 거기에서 스티걸 베리걸을 인용하면서 로잔에서 있었던 가톨릭파 사람들과 논쟁하던 장면을 기술한 것 기억하십니까? 어떠한 메모지도 없이 기억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복음 설교 제 19번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베르도 집사의 신앙에 관한 권고의 중간 쯤 나오는 부분입니다.” 모두 암기하여 서술해 냈으니까, 파리 로얄 꼴레주에서 칼빈이 공부할 때 외우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녁 시간에 외우고 아침에 암기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학교에서 시킨 것이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22살 때 이미 이러한 과업들을 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학, 천문학, 지리학, 그래서 여러분이 신학자를 보면 이상하게 신학자이면서 철학자이면서 생물학자이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학문이 그렇게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목사의 입무은 지혜자입니다. 폴라루스라는 사람은 신학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일의 학문”이라 하였습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입무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누구이고, 우주가 무엇이고, 우리는 우주를 공부를 하여도 그 의미가 나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배우지 않습니다. 천문학을 아무리 많이 연구하고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다 듣고 나도 우리 마음속에 반발심이 듭니다. ‘그래서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건데?’ 혹시 그 사람이 연구하는 별에서 도민준이라도 왔다면 의미가 발견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드라마이고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별에서 오고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무슨 빅뱅의 증거를 발견하였다고 합시다. 그래서 자외선의 흔적, 띠를 발견하였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학문이 아닙니다. 이틀 전 한겨레신문에 경희대 교수인 도정일 씨(유명한 인문학자)가 쓴 칼럼이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찾아서 한번 읽으십시오. 그리고 제발 책 좀 읽으십시오. 인문학적인 소양들이 필요합니다. 다시 돌아와 목사의 임무는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 태어나서 하나님을 몰랐는데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세계의 의미가 하나님 때문에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연결이 무엇인지 알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가치망을 형성합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우주선에서 부품 하나를 빼 놓으면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우주선에 끼고 작동하는 것을 보면 이 부속이 무엇인지도 알고 의미를 알게 되는 것처럼, 인간을 딱 하나 떼어 놓아서는 이것이 왜 만들어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서 던져졌는가. 왜 던져졌는가. 무슨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익명의 존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인데 우연히 생겨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예전까지는 사상이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이 ‘조형진’이라는 사람이 33살에 있습니다. 지금은 젊고 건장한 젊은이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30년 지나면 나처럼 됩니다. 변합니다. 이러한 것이 변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형진의 본질이 무엇인가?’입니다. 이것은 계속 변합니다. 여러분은 석 달전의 ‘강성구'가 아닙니다. 몸속에 석달전의 세포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강성구라고 부르고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버려도 강성구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그것을 일체성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본질입니다. 본질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본질에 첨착 한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본질은 무슨 본질이냐 중요한 것은 ‘existence', 이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양상을 가지고 시간 속에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그게 본질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예전의 본질에 대한 담론을 발로 차서 뒤집어엎은 것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실존은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순간 새로운 상태를 만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이 니체가 원천이었습니다. 그의 철학을 가리켜서 “의지의 철학”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초인, 극복인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자기가 만나는 수많은 사태, 의미를 묻지 마라. 그러나 살아있으니까 살아야 한다. 그것을 극복하면서 사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결국 인간이 여기에 실존하는 단 하나의 이유일 뿐이다.” 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봅시다. 이미 본질 자체를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절대적인 가치나 규범은 뭉개져 버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세대입니다. 지난번 읽은 책 『세계화 사회에서 진리의 전달자로서의 신자의 역할』과 연결을 시켜 보십시오.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에 대하여 이야기 했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가 알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모더니즘은 현대주의가 아니라 근대주의로 번역해야 합니다. 이것은 계몽주의를 가리킵니다. 계몽주의는 어둠 속에 있었던 중세에 빛이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그 빛이 인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의 빛입니다. 그 자각의 핵심 내용이 판단하는 인간이 인간의 판단 밖에 있는 신보다 우선하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논제를 종합시킨 사람이 데카르트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렇게 회의적으로 생각하면서 의심하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든 것을 신뢰할 수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병이 왜 날까?’ 신이 진노해서 인간이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병원체가 우리 속에 있어서 그 병이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전에 가졌던 생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 졌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예전에 알았던 지식과 사실이 최종적인 결론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의심한다고 해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의심하는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Ergo sum."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제가 잘 사용하는 비유인데, 예전에는 하나님이 이 가운데 있고 우리 모두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천사, 동물, 다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중심에 있는데 하나님께 딱 걸리면 술래가 됩니다. 데카르트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우리 속에 같이 손잡게 만들고 ‘나’라는 가상존재를 가운데 집어넣습니다. 그러면서 돌고, 내가 지적한 사람이 술래가 됩니다. 하나님도 같이 패러다임 속에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내가 판단해서 있다고 해야지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더니즘’입니다. 그 ‘모더니즘’은 뿌리를 거슬러 가보면 르네상스로 올라갑니다. 르네상스는 ‘재탄생’을 의미합니다. 이 책은 인류역사를 뒤흔들어 놓은 몇 권 안 되는 책입니다. 처음 보는 책일 것입니다. 루크레티우스의 『De rerum natura,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입니다. 이 책이 어떻게 세계역사에 영향을 끼쳤는가 하면, 이 책은 르네상스를 사상적으로 정리해 준책입니다. 1417년에 폼폴라치니라는 학자가 수도원에서 이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고 깜짝 놀라서 이 책을 복간하였습니다.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3개의 카테고리를 가지고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이 투철한 가운데 르네상스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인정을 안 하지만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과 상식이 말하자면 “common law-상식(보편)적 법칙"이 있다고 보고 그것이 인류 전체를 규율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선과 악에 관한 공통 관념(common sense)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다 부수고 그러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인간만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사상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의 책을 재발견하면서 사상을 체계화 하는데 박차를 가합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을 물려받았습니다. 당시 로마의 두 기둥과 같이 영향을 끼치던 사상이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였습니다. 스토아학파는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설명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 ‘데미우르고스-세상을 창조한 조물주’, 이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에이도스-형상’ ‘필레-질료’ 세 가지입니다. 형상이 있고, 형상을 질료에 부여하는 역할을 데미우르고스가 함으로써 수많은 사물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물들은 태어났지만 결국 그것은 에이도스와 필레의 결합이고, 그것을 한 저자는 데미우르고스입니다. 이 삼각형의 설명을 서양철학이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계승합니다. 그래서 화이트 헤드가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철학의 각주이다.”라고 이야기 한 것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칸트는 플라톤과는 달랐지만 역시 사물을 설명할 때 세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심지어 라깡 같은 사람은 상징적인 것, 이미지적인 것, 현실적인 것, 용어는 다르지만 항상 데미우르고스(만든 자), 형상, 질료, 이 세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을 계승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무엇인가 하면 다 때려 부수었습니다. 그러한 것 없다. 그러면 세계는 무엇인가? 우연이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이라는 책에서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이 사람이 이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받아들입니다. 이 사람이 굉장한 것은 에피쿠로스사상을 추종하면서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라 당시 희랍과 로마의 방대한 문헌을 모두 알았던 이였습니다. 호메로스의 흔적부터 시작하여 아넥시메네스, 데모크리토스, 수많은 사람들의 사상의 흔적들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이 모든 세계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물이 생겨나는 것은 원자의 서로 다른 충돌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한 사상이 르네상스에서 재현된 것입니다. 르네상스 자체가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시간적으로 1500년대 떨어져 있었는데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 이 사상을 흡수하여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맨 위에 있는 철저한 기독교신앙을 가진 인문주의는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두 번째 것들은 계몽주의를 일으키고, 세 번째 것들은 계몽주의의 갈래를 형성하며 가다가 계몽주의가 한계가 도달하게 되자 포스트모더니즘을 일으킨 것입니다. 수많은 기독교의 해를 끼치는 위대한 철학자들, 많은 사람들이 세 번째 전통을 계승하며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도킨스 같은 사람이 세 번째 전통을 계승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체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동성애? 그것은 하면 안 돼. 왜? 왜? 내가 내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밥 먹고 사는데 너한테 손해 끼친 것이 있니? 어떤 손해를 끼쳤니?” “그것은 안 돼.” “그것은 너의 오래된 편견이고 그 편견의 폭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학적인 고통을 받고 있어.” 신학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성경은 동성애를 금하지 않고 있다는 성경 신학에서 논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3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진리의 관점을 상실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상대적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건축, 수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모든 것에서 어떻게 그러한 것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물리학의 예를 들면서 아인슈타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 전에는 무엇입니까? ‘뉴턴이즘’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변화하고 운동하는 모든 세계의 산물은 수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법칙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는 물건은 질량×가속도에 의해서 9.8T2에 의해서 설명이 됩니다. 사람들 머릿속에는 무거운 물건은 빨리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 수식을 대입하니까 큰 구슬이나 작은 구슬이나 똑같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발견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을 야심차게 뉴턴이 전 세계에 다 설명하였습니다. 뉴턴은 그 당시로 보면 천재라고 말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되고, 완전히 예전과 다른 뉴턴 전 혹은 후 세계관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놓았습니다. “천둥은 왜 치는가? 토르 신이 화가 났나 보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나 보다.” 그랬는데, “천둥은 전기와 증기가 만난 충돌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 안에 하나님은 없다. 없다고 하기에는 신학이 말이 안 되니까 하나님을 저 멀리 추방시켜 버린 사람이 보르스티우스 주의자들, 소키니우스 주의자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 둔, 이신론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브라우어르(Brouwer, Luitxen) 같은 수학 직관론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1, 2, 3, 4 숫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수의 실재론적 성격을 믿지 않습니다. 브라우어르가 박사논문을 써서 독일에 제출하였을 때 교수가 그 자리에서 이것이 무슨 철학논문이지 박사논문이냐고 하면서 집어 던졌습니다. 지금은 브라우어르의 수학 직관주의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빌딩이 있으면 49층 다음에 50층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에 의하면 49층 때문에 50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명증성이 분명하다는 수학분야에서도 회의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신물리학이라는 이야기 들어봤습니까? 물리학을 하는 고도의 훈련을 받은 학자들인데 물질과 물질 사이에 개입하는 신들을 믿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많은 것을 언급하였는데.. 프랑스 파리에 갈 기회가 생기면 꼭 한번 가보십시오. 빵데 라는 지역이 있고 라 빌레뜨 공원(Parc de la Villette)이 있습니다. 베르나르 추미(Bernard Tschumi)가 야심적으로 만든 넓이가 17km2정도 되니까 꽤 큽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보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썰렁하다는 생각을 하고 옵니다. 뭐냐 하면 공원이 풀밭으로 되어 있는 넓은 공원인데 38개 정도의 폴리(Follies)가 서 있습니다. 폴리가 무엇입니까? 폴리는 영어로 ‘어리석음, 바보짓’입니다. 38개의 폴리, 바보 같은 것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깡통과 철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없습니다. 38개가 무슨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것을 단절하는 것이 만든 이의 목표였습니다. 아무 상관없이 만든 것입니다. 길이 나 있습니다.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아무 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 길이 너를 어디론가 인도해야 하는가? 그 자체가 편견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라 빌레뜨 공원 정원에 넣은 것입니다. 미스 반 데 로에 (Mies van der Rohe)라는 건축가가 나오는데 여러분 눈여겨서 건축을 보면 ‘아, 그런 어마어마한 코드가 들어있구나.’를 생각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고전적으로 콘크리트 덩어리를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콘크리트를 한 다음에 거기에 시멘트를 바르거나 색칠하거나 타일을 붙여서 예쁘게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의 건축방식이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지어지는 것 가운데 노출 콘크리트라고 하는 건축방식이 있습니다. 콘크리트 거푸집을 아주 정교하게 조각하듯이 만듭니다. 양직의 콘크리트를 아주 정성껏 붓습니다. 마지막에 판을 딱 떼어 놓으면 그게 건물의 끝입니다. 그 공사비가 건물을 짓고 타일을 붙이는 것보다 훨씬 비쌉니다. 잘 만드려면 엄청난 돈이 들어갑니다. 미스 반 데 로에가 지은 일리노이 공대 건물을 같은 경우 너무 예쁘지 않고 유리는 유리끼리 모아놓고 돌은 돌끼리 모아놓고 콘크리트는 콘크리트끼리 모아 놓은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것을 왜 조화를 시켜서 예쁘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쁘다는 것은 편견과 절대주의적 사고에 의해서 세뇌된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왜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것은 단지 물질일 뿐이다. 그러므로 콘크리트를 보면서는 가장 콘크리트적인 것을 느끼고 유리를 보면서는 ‘아, 이게 유리이구나.’를 느끼면 됩니다.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예전에는 ‘미(美)’하면 색깔과 크기와 모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있는 것 아닙니까? ‘파란 바다’ ‘하얀 모래’ ‘초록색 소나무’ ‘에메랄드 빛 하늘’ 이러한 표현을 통해 ‘아, 예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것들이 색과 크기, 모양의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눈, 코, 귀, 입 위치가 어디에 있고 모양이 어떠냐에 따라서 사람이 이성이 몰리기도 하고 ‘안 생겨요’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결국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어린이 대공원에서 전시회가 열렸는데 ‘세계 똥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밑에 “똥이 더럽다는 너의 생각에 똥 침을 박아준다.”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만나는 사회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 얼개가 안 생기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고 전파 받는 사람들은 정교한 방식으로 ‘절대 가치는 없다.’ ‘신은 없다.’ ‘절대 규범은 폭력이다.’ ‘인간의 행복이 이 세계의 이유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야기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가운데 특별히 개신교가 가장 반감을 얻고 있습니다. 잘못 진단합니다. 한쪽에서는 순수한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경건주의 쪽입니다. 두 번째는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만 타락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뉴스에 났는데 “Can the Catholic Saved Itself?"라는 타이틀이 나옵니다. 지금도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가톨릭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1906년도에 들어왔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에는 성당이 없었습니다. 1906년은 1차 이민법이 통과된 해였습니다. 그래서 다 받아들였습니다. 기독교 계통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각종 이단들과 가톨릭, 유대교가 들어왔습니다. 그 신문이 나왔을 때 사회 문제가 되었는데, 가톨릭 사제들의 성추행 때문에 미국 가톨릭교회가 지불한 배상금이 5천억 이었습니다. 한 교구의 모든 가톨릭교회가 차압되어서 모두 매각되었습니다. 성추행 배상금이 없었기 때문에 한 교구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왜 개신교만 따라 붙겠습니까? 개신교는 보호해주는 장치가 없어서 유리 속에 들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기도 합니다. 다 까발리게 됩니다. 가톨릭 사람들은 자기 성당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도 입을 딱 다뭅니다. 그것이 어려서부터 받는 훈련입니다. 개신교 사람들은 수틀리면 다 까발립니다. 있는 이야기 뿐 아니라 없는 이야기까지 퍼뜨립니다. 그러면 개신교가 왜 그렇게 거절을 받습니까? 사고 코드가 안 맞습니다. 1962년 바티칸 2차 공의회에서 이러한 시대가 올 줄 알고 이미 칼 라너 같은 신학자가 주동이 되어서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석가탄신일에 가서 서로 왕래하는 것을 60년대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개신교는 제대로 하면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고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오직 은혜),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라오스 데오’(Laus Deo-하나님을 찬양하라), ‘코람 데오’(Coram Deo-하나님 앞에서)를 이야기 합니다. 결국 그것은 절대 기준을 우리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다고 내세웁니다. 그런데 세상은 코드가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박원순, 정몽준, 김황식은 기독교인이고, 그 다음에 이혜훈이 나왔는데 세 사람 다 “동성애는 문제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김황식만 “이해를 많이 해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이러한 식으로 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절대적으로 ‘솔루스'(solus), ‘솔라’(sola) 이러한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현대인의 코드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살아남으려면 강력하게 외쳐서 사람이 확 뒤집혀야 합니다. 제가 그래서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지성에 벼락을 맞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기독교에서 ‘회개하다’라고 번역하는데 원래는 그것이 아니라 ‘생각이 바뀌다’입니다. ‘노에오’(νοέω)가 ‘생각하다’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생각이 벼락을 받는 변화가 일어나야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면 됩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듣는데 그것 밖에 모릅니다. 그러니까 변화된 사람들이 모이면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은혜 받은 이야기, 간증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이 딱 들어오면 분위기가 썰렁해 집니다. 강영안 교수님과 자주 교류를 하는데 그 분이 어느 날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대학원에서 수업을 했답니다. 두 그룹, 유신론 그룹과 무신론 그룹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서로 논증하게 하였습니다. 당신이 누구 편도 들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그것을 계속해서 수업을 한 학기 하면서 지켜보았습니다. 어느 학생이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아주 예수를 잘 믿는 학생이었습니다. 착실하게 교회 다니고 있었던 학생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 학생이, “교수님, 저는 교회에서 청년 회장으로 섬기며 성경을 누구보다도 많이 읽었고 신학 책도 조금 읽었고 교회에서 누구 앞에서 이야기 하라고 하면 제가 토론을 주름 잡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마디도 못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고 유신론을 신봉하지만 그것을 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재료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세상과 담을 쌓고 믿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됩니다. 주일 예배 끝나고 집에 갈 때에는 어깨가 축 늘어뜨려 지면서 ‘빌어먹을 세상, 곧 망할 텐데. 주일이나 기다리며 살자.’ 그러면서 갑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울면서, ‘하나님,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시지요? 오늘을 바라보면서 6일을 참았습니다.’ 그리고 소위 은혜를 받고 갑니다. 그리고 ‘복음. 복음. 복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개신교의 근본정신이 아닙니다.
초창기의 저의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이 있으면, 20년 전의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복음에 대해서 나만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아주 강력하게 글을 쓴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서로 교류도 하고 목사님과 사이가 좋았지만, 초창기에는 옥한흠 목사님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1984년부터 쓴 각종 잡지에 보면 제자훈련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 신념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클라이더 라이더가 이야기 하는 군중 속에 있는 인간의 외로움들을 끌어내어 사회 속에서 무엇인가 사람들을 충족시켜 주면서 심리적인 요법으로 사람들을 규합하고 말하자면 종교적인 심성을 갖게 하는 방식이 제자훈련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은 목회를 하면서 조금은 수정이 되었지만 근간은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동의 안할지 모르겠지만 저같이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보기에는 거기에서 사용하는 성경공부라는 것도 ‘교재를 위한 소제’이지 그것 자체를 공부하기 위해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1권, 2권, 3권, 4권……10권을 공부해도 현실적으로 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올바른 판단, 집에 가다가 스마트폰으로 어제 주일 설교(2014.03.30)를 들어보십시오. 꼭 들어보십시오. 그러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하였고 그렇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를, 인간이 완성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 나라가 우리 힘으로 올 수 있는 나라인 것처럼 헌신하며 살아야 할 소명의 당위성, 이러한 것들을 제자훈련을 통해 공급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랑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보면서 어느 교역자 한분이 “제자훈련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인간에 대해 너무 순진한 생각을 가진 생각입니다. 요즘에 나온 『가상칠언』도 25년 전에 쓴 책인데 내용을 그대로 하고 복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그리고 동시대의 사람들의 설교나 글들을 보면서 누가 도대체 나보다 더 진하게 복음에 대해 목숨을 걸 정도로 강조하였나 보십시오. 그리고 나의 지적인 여력이 20년이 지났습니다. 근간은 하나도 안 흔들렸고, 청교도에 대한 생각이 약간 변하였지만 기본적인 애정은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고려하면서 이야기 하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 후에 위대한 스승들을 수없이 만나면서 내 기독교 사상을 섭렵해 온 결과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복음만’ 이야기 하는 것은 ‘복음은’ 이야기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오직 복음으로서’하는 구호는 그 중심은 충분히 이해하는데, 그것이 그의 신학활동에 모두 적용이 되어버리면, 잘못 적용되어 버리면 매우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책은 성경 3구절을 가지고 400페이지를 할 일 없이 떠들고 있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강영안 교수님이 이야기 하셨듯이 이 책은 시간이 남아서 할 일 없이 떠드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학문과 사회의 세계를 조금 더 위에서 보고 전체적으로 조망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존 오웬은 이 이해에 대해서 도움을 줄만한 발언을 합니다. “복음이란 복음 자체와 복음 교리로 이루어진다.” 무슨 뜻입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성경신학에 서 ‘복음’이라고 이야기 할 때 김세윤 박사가 잘 이야기 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잘 이야기 합니다. 그 책이 완전한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분이 꼭 읽고 정리를 하십시오. 그 후에 저의 책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그 분은 복음을 세 단어로 정리합니다. “Jesus died for us.” 그것이 복음입니다.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마지막 요약이 “Jesus died for us.”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위하여’라는 의미가 세 가지 의미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의 대표자로서’ 이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존 오웬의 이야기는 학문적으로 복음이 무엇인가 이야기 할 때에는 복음 그 자체와 복음에 의해서 세워진 지식의 체계, 이 두 가지 합쳐서 복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복음을 이야기 한다면 ‘오직 복음으로서’를 수없이 이야기 할수록 그 신학은 건전한 신학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개념이 무시된 가운데 “Jesus died for us.”를 외치면서 ‘오직 복음으로서’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사도가 이야기 했거나, 종교개혁자들이 이야기 한 ‘오직 복음으로서’라고 한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인 것입니다. 똑같은 것이 ‘성경으로서’입니다. 인터넷에서 ‘존 볼트’라고 하는 칼빈 신학교에서 ‘오직 성경으로서’라고 하는 의미에 대해서 논문을 쓴 것을 검색해서 보십시오. 혹시 못 찾으면 부흥과 개혁사에서 나온 어느 책속에 한 꼭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아마 칼빈 신학교에 들어가면 영문으로 나올 것입니다. 이분 이야기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오직 성경)가 개신교 신학에서 ‘솔라 피데’(sola Fide-오직 믿음)매우 중요한 원리가 되는데, 긴 논문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오직 성경으로서’의 그 말이 모든 신학에 대한 판단의 최종적인 기준이라면 맞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을 할 때 ‘오직 성경만으로’ 한다고 한다면 종교개혁자들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독교 강요』를 읽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읽으면 가장 많이 나오는 이교도 사상가 가운데 하나는 세네카입니다. 세네카의 관용론의 주석을 쓰는 것으로서 칼빈이 입문학자로서 데뷔를 합니다.
결국 3장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그렇게 이미 가치가 붕괴되어 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 한 것과 같이 그러한 속에서 그러한 진리를 다 부정할 때 인간이 정말 행복한가 할 때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현대인의 삶 속에서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오렌지 카운티라는 곳에서 세계 많은 사람들이 충격 받았던 일이 벌어집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입니다. 너무 부요하고 풍요로운 마을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부부 동반으로 모여서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루씩 부부를 돌려 가면서 자는 것입니다. 스와핑의 원조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미국과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충격도 받지 않습니다. 저도 확인은 못하였지만 이야기 들으니까 스와핑을 치면 우리나라에도 스와핑 할 수 있는 사이트가 수없이 떠 있다고 합니다. 장소, 회비까지 나오고 등본까지 떼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진짜 아내 데리고 오는데 다른 사람은 어느 창녀 하나 사 가지고 가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가서 혼인관계를 입증해야 합니다. 접수를 받아주고 추첨해서, 아니면 같이 앉아 차를 마시면서 “나는 이 남자. 나는 이 남자.” 같이 자고 그 다음날 아침에 원래 남편과 집에 돌아간답니다. 나는 인터넷을 거의 안 보지만 인터넷에 들어가 찾아보십시오. 자료 보면 수없이 있을 것입니다. 갔다 온 이야기, 갔다 와서 부부 싸움 한 이야기, 갔다 와서 오히려 부부 관계가 좋아진 이야기 등등 완전히 보편적인 도덕의 가치가 무시된 것입니다. 사르트르가 하이데거를 이어 해온 일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진리를 허무는 일에 헌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일평생 그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도덕의 근거와 정당성들을 부인하고 나면 인간은 완전한 자유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다. 끝없는 어두운 힘이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불안.”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근거를 불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상황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강신주’에 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강신주에게 상담 받는 애들의 털어 놓는 고민을 들어보십시오. 가관입니다. 누가 물어봐도 금방 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못 내리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선명하게 진리가 이것이라는 것을 보여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과 전도만이 아니라 그러한 절대적인 도덕의 원리와 가치,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우리 교회에 공학박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미국에서 공학을 하다가 전자공학을 하고 박사를 받았는데 예수를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하면 전도를 한 것이 아니라 캠퍼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 안 믿은 집안에서 자라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물었는데 대답이 간단하였습니다. “목사님, 미국 대학에 가 보면 걔네들은 달라요.” 뭐가 다른가 물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릅니다.” 가장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평안하고 행복해 보여요.”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아까 동준 형제가 아브라함 카이퍼와 이러한 사람들의 계열은 연속성을 강조하고, 호크마는 단절성을 강조하였다고 하였는데 무슨 의미로 송 교수님이 그러한 이야기를 하였는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절성’은 이야기 하면 길지만,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적인 성격을 어느 정도로 보느냐에 따라 ‘단절성’ 혹은 ‘연속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느 쪽에서든지 초월적인 성격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헤르멘 도에베르드의 사상을 참고하면서 이 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사이의 구별 문제, 일반은총의 범주를 너무 넓게 보는 것들이 신학적으로 비판의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의 영역 주권에 관한 사상은 그것을 빼놓고는 칼빈주의가 안 되고, 칼빈주의라는 것 자체가 칼빈 그 하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회의 정통적인 주류사상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 했듯이 어제 설교에서 한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직장을 다니고 있다. 직장이 아주 구조적인 악을 가지고 이중장부를 쓰게 하고 괴롭힌다고 할 때 때려 치고 나오는 것도 신앙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반드시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보고 자꾸, “당신이 유력한 총장 후보에 올라갔는데 왜 중간에 그만 두었어?” 친구들의 전화가 빗발치듯 하였습니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야기 안 합니다. 영원히 침묵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자기의 신앙의 정체성을 잠식당하면서까지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한 식으로 이야기 하면 보다 큰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악을 용납해야 된다고 하면 제일 병신 같은 사람들이 바로 순교한 사람일 것입니다. 살아서 복음을 전해야지 죽어서 무슨 소용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의 정조고 뭐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의 회사가 있다고 생각되면 나오는 것도 신앙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와서 새 직장을 찾아라. 그러나 최선은 아닙니다. 거기에 남아서 다른 사람은 목 잘릴 까봐 거기에 붙어 있지만 나는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박원순이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나는 죽은 다음에 지옥을 개혁할 것이다.” 불신자도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사고방식은 가지면 안 됩니다.
기본적으로 팔복을 보면 팔복에서 10절 핍박받는 자에 관한 설명이 제일 길게 나옵니다. 10-12절까지 나옵니다. 저는 견해가 다릅니다. 10절로 팔복이 끝난다고 봅니다. 11, 12절은 팔복 사람 전체가 받는 고난으로 봅니다. 순수하게 팔복의 사람이 되면 그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거기 그 사람이 있는 그 자체 때문에 그 사람이 싫어합니다. 저는 그것을 가리켜 ‘존재론적인 박해’라 이야기 합니다. 무엇을 해서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서 설교 시간에 한 이야기가 소크라테스에게 같은 동시대 사람으로서 아주 명석하였지만 방탕하였던 친구 알키비아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주 변론에 능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무지하게 싫어하였습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싸가지가 없어서 사형당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알키비아데스가 이야기 합니다. “나는 네가 나에게 무슨 나쁜 일을 해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내 앞에만 있으면 나는 나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네가 싫다.” 이것이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미워한 이유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은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삶입니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회퍼가 자기 책속에서, “복음서를 정직하게 보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이리 오너라. 나와 함께 가서 죽자.” 그게 바로 복음서의 정직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세상의 눈치를 보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너무 욕합니다. 저는 창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창피했습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러면 아들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정말 창피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저의 지론은 무엇인가 하면 세상의 평가에 관해서 무관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신문에 났다더라.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세상이 보라고 선행한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진리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상대주의가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이젠베르그와 아인슈타인의 논쟁 다룬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시공간이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도입하면서 뉴턴이즘을 깼습니다. 그런데 양자역학 논쟁에서는 뉴턴이즘의 틀을 고집하다가 결국 닐스보아와 하이젠베르그에게 1927년에 솔베이지 학회에서 무참하게 패배합니다. 사진을 보면 닐스보아와 하이젠베르그는 활짝 웃고 있고 아인슈타인은 거의 죽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닐스보아의 이론이 현대 양자역학의 근간을 구성하고, 컴퓨터 밥코드, 자기부상열차 모든 혜택을 닐스보아 때문에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성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가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또 보여줍니다. 그래서 제가 과학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수많은 시사점들을 주는 것입니다. 학문으로는 모든 것을 통합하여 설교시간에 40분 내지 70분 되는 시간에 사상을 설교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벼락을 받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나서 ‘세상을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구나.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살아가면 안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이 설교자입니다. 그래서 신앙 속에는 역사성과 초월성이라는 두 개의 요소가 병존해 가는 것입니다. 초월성은 믿어지지 않은 복음이 성령으로 믿어지고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기도할 때 눈물이 나고 빛을 보고 하나님이 내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그러한 찬송 많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들이 신앙의 초월성입니다. 그러한 세계는 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우리들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면 이게 자기만족을 위한 경건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부패해 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건을 주신 목적과 다릅니다. 마치 군인에게 총과 칼을 줬는데 칼 가지고 밤 까먹고 노는 군인과 같은 것입니다. 적을 찌르고 나라를 지키라고 준 것인데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역사성입니다. 우리가 100년 전도 아니고 100년 후도 아니고 지금 여기에 태어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제가 조국교회라고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국교회라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러면 대한제국 시대는 어떻게 됩니까? 그 때 예수 믿던 사람들의 개념은 어떤 것이 됩니까? 조선 시대 때 예수 믿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다 배제 되지 않습니까? 조국은 모든 것을 통합합니다. 그것을 널리 퍼뜨린 장본인이 저입니다. 25년 동안 퍼뜨렸습니다. 화종부 목사가 조국교회를 막 설교했더니 어느 청년이 갈 때 물어보더랍니다. “목사님, 그 교회가 어느 동네에 있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담임 합니까?”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되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서 헌신하면서 살다가 죽음으로써 입증하는 것입니다. 어제 내가 광주지방 법원장, 검사, 변호사, 대주그룹 회장, 삼성 반도체, 북한 인권, 중국의 인권 유린 등 제가 발로 밟았습니다. 어제는 70분씩 네 번을 설교하였습니다. 가면서 꼭 들어보십시오. 그렇게 살다가 칼 맞고 죽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사성입니다. 오늘도 총신학생들 모아놓고 이야기 하는데 너무 개탄이 되는 것입니다. 총신 뿐 아니라 모든 학교들이 마찬가지입니다. 기개가 없었습니다. 기개가. 우리 시대에 총회장이 전두환 대통령 조찬 기도회에 가서 사랑하는 아들을 축복해달라고 총회장이 기도했다고 학생들이 학교 와서 다 때려 부수었습니다. 학생들이 총회장 차에 드러누웠습니다. 기도 취소하라고 말입니다. 유급하는 것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교계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결정을 할 때에는 어른들이 제일 신경 쓰는 것이 학생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들고 일어설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영혼이 없는 학생들입니다. 내가 교계 잘못하고 있는 어른들 여럿 만났습니다. 학생들의 존재를 티끌만큼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다고 봅니다. 학교에서 지출한 항목 가운데 ‘흑조’라고 하는 룸싸롱에서 지출된 200만원 영수증을 발견하였습니다. 학교 다 때려 부수었습니다. 원우회 실이고 총장실이고 어느 것 할 것 없이 다 때려 부수었습니다. 어느 교계 인사의 차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뒤집어엎어서 폐차 시켰습니다. 그것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옳은 것을 향한 기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 사랑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다 그것은 감상입니다. 감상. 젊은 자매들, 중국 자매들도 도민준 보면서 눈물 흘립니다. 감상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계림이라는 곳에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하얀 호랑이를 보았습니다. 정말 하얗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멸종의 위기에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 사이에서 너무 잘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타나면 다 도망갑니다. 먹이를 못 구해서 그런데 500kg이 넘습니다. 한번 소리를 콱 지르면 체육관이 저렁저렁 울립니다. 그런데 이 바보들이 조련사가 나와서 “자, 딸랑 딸랑 딸랑.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우로 굴러 좌로 굴러.” 그것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 하나씩 던져집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과연 예수를 위해서 죽겠다. 그 죽음이라는 것을 공산치하에서 주기철 목사님처럼 작렬하게 죽는 것을 생각합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종교자유가 있는 시대인데 그러한 상황이 오겠습니까? 아무리 세종로에서 난리를 쳐도 아무도 와서 총을 안 쏩니다. 그리고 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인두 불로 가슴을 지지는 일 하지 않습니다. 순교할 각오가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오늘 직장에서 쫓겨나고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것입니다. 옳은 이야기를 하다가 오늘 교회에서 쫓겨나고 오늘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정학을 맞고 경찰서에 구르며 살고 그리고 교단에서 찍혀서 목사안수를 못 받는 그러한 일들 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왜. 왜. 왜. 왜. 왜 행복한 것이 모든 인간의 도리인데 그렇게 미친 듯이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이 설명을 들었으므로 『주기도문』을 읽으면 빨려 들어가듯이 읽혀질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매일 아침마다 엎드려 울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기도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한 각도에서 3장을 읽었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여러분이 돌아갈 때 이 책을 읽고 지금 이 설명을 듣고 비참한 마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내가 경험하였던 것을 여러분에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도대체 아는 것이 무엇이고 이렇게 살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과연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해서 그들의 영원한 생명을 책임 있게 말할 수 있는 지식과 사상, 용기와 결단,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에 대해서 비참한 마음을 가지고, 수많은 선배들이 이 과정에서 그것을 경험하였고 어떠한 사람들은 무감각하게 왔다가 ‘아, 이런 것도 있구나.’ 간 사람도 있습니다. 상당수 사람들은 아주 비참한 충격을 받으면서 이 코스를 마치고 사역을 그만둔 사람들이 꽤 여러 명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아예 안 된 사람들도 옛날에 있었습니다. 교회를 옮겨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국 지금 이야기 해 준 내용은 클래스에서 가르치면 어느 교수가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성경신학입니까? 아니면 실천신학입니까? 예배학입니까? 조직신학입니까? 역사신학입니까? 모두에게 해당되고 어떻게 보면 아무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강의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통합이 없이는 여러분의 신앙적인 지식이라는 것이 nothing,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눈물로 말합니다. 신학교 다니고 있는 학생들 중 2/3는 별로 쓸모없습니다.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분 시대에 펼쳐지는 선교적인 상황에서 어느 한구석에서 아마 하나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게 큰 기대를 꼭 받아야 합니까? 한 영혼이라도 끝까지 인도하다가 죽으면 되지 않습니까?” 지금이 무슨 고등학생이 수필 씁니까? 무슨 고등학생이 연애소설 쓰느냐는 말입니다. 그러한 가치를 몰라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해도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답니다. 어떻게 살라는 것에 대해서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설교 듣고 회심 안 하던 아이들이 강신주에게 펑펑 울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되어 버립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문제들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책을 2주 만에 썼습니다. 그런데 고민은 20년 한 것입니다. 아닙니다. 회심하기 이전까지 이야기 하면 거의 40년간의 고민한 것을 쓴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만큼도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과연 가능하겠는가.” 그러한 깊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기개가 없습니다. 기개가 없으니까 역사성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를 위안처와 놀이터로서 이용하도록 만듭니다. 상처받았다고 들어와서 위로하고 나갑니다. 성경은 그러한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식의 유약한 기독교 신앙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