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 방법론(2)
녹취자 : 조원정, 김명진
조지 윗필드라는 사람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심으로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는 교회의 독이다. 정말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을 하기 전에 신학을 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신앙과 학문이 항상 같이 가야 합니다. 칼빈 같은 경우에는 그것을 경건과 학문이라고 얘기합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학문은 이성을 사용해서 성경의 진리를 말합니다. 결론은 한 사람의 신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신학적인 의미를 경험하는 것이 소명의 핵심이 됩니다.
나는 만 스무살이 되던 해에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가정은 예수 믿는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같이 살던 고모가 교회를 다니셨기 때문에 갓난아기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청소년 시절까지 교회를 다녔는데 주님을 못 만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복음을 전하려는 교사를 못 만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영혼들을 돌볼 때 꼼꼼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아야 합니다.
회심하기 전에 나는 목사가 되고 싶지 않았고 문학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특별히 영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습니다. 영어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 했는데 영어가 너무 재미있어서 못 죽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될 때, 지금 나이로 만 18살 쯤 이었습니다. 그때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대입 영어 참고서를 다 봤습니다. 뉴욕타임즈, 뉴스위크지, 런던타임즈, 캐나다타임즈, 이런 것들이 한국에 이삼일 차이를 두고 들어왔습니다. 그것을 사서 자유롭게 읽을 정도로 영어 공부를 잘했습니다. 지금은 그 정도로 읽을 만큼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사전 한권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굉장히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 당시 니체의 책들, 하이데커, 실존주의 문학가들, 카프가라든지 알베르꺄뮤라든지, 그런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칸트의 책도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학교 공부는 별 취미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영어 점수만 전교 최고 점수였습니다. 나머지는 될 대로 되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책들을 읽었습니다.
매일 무서웠습니다. 죽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죽는 것은 어릴 때부터 하나도 안 무서웠습니다. 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오늘 눈 뜨면 내가 사람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2학년 겨울 되던 때에 처음으로 벌판에 논둑에 엎드려서 혼자 한없이 울었습니다. 나는 어디서부터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처음으로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교회는 그런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고 사실은 교회가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해서 그런 것에 대한 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방황을 끝내게 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때부터 그 질문이 한 번도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부터 계속 독서를 했습니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이런 고민이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런 고민을 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학 작품 속에는 답은 없습니다. 사상서로 넘어갑니다. 답을 찾았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읽어보면 그 사람한테는 답이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답이 아니었습니다. 박수를 치고 정말 저 사람이 답을 찾았구나 하지만 그것을 나에게 적용하고 살려면 나한테는 그 답이 인생에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존경할만한 선생님과 지인들에게 이런 고민들을 가끔 얘기했지만 아무도 그 질문을 받아주거나 제대로 대답해주는 분은 없었습니다.
쇼펜하워, 샤르트르, 키에르케고르, 하이데커, 이런 사람들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좋은 점은 있었습니다. 친구들하고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면 얘네들은 한창 어립니다. 애들입니다. 나 같은 고민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고민 속에서 뭘 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을 만나면서 그때 제가 열심히 읽었던 책 중의 하나가 헤르만 헷세였습니다. 헤르만 헷세의 책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내 나이 스무 살 되던 해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전 세계에서 헤르만 헷세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전 세계에서 헤르만 헷세를 잘 이해하는 다섯 사람을 꼽으라면 그 안에 내가 들어 갈 것이다. 그런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헤르만 헷세도 신학교를 다니다가 나중에 인도 가서 살고 불교 사상에 심취해서 기독교 사상과 멀어진 사람인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뭘 얘기하라고 하면 다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밤새워 공부하고 있을 때였는데 새벽마다 교회 종소리가 덩그렁 덩그렁 울렸는데 그 종소리가 그렇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새벽 네 시 한 번 치고 네 시 반에 한 번 치는 새벽 종소리였습니다.
(찬양)
깊이 스며 와 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다시 새롭게 살아나는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 아직도 답을 못 찾았습니다. 어디로부터 가는가? 내가 스스로 걸어서 교회를 갔습니다. 교회가 요만한 교회였습니다. 한 이십 명 정도 앉는, 가난한 사람들이 추운데 콘크리트 바닥에 방석을 두껍게 깔고, 거기서 풍금을 치는데 찬송가를 부르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안을 느꼈습니다. 열네 살, 열다섯 살 때 논둑에 엎드려서 울면서 시작되었던 고민에 대해서 말로는 설명을 못해도 하나님이 나를 어머니와 같이 아버지와 같이 불쌍히 여기며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포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와서 후회되는 것은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어도 나를 지도해 줄 수 있는 훌륭한 목회자나 선생님이 없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갖고 예수님을 만나면서 과거에 했던 모든 학문이나 공부 이런 것들을 다 버려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신념을 갖고 신학의 길을 들어서고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이런 생각이 잘못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거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이 모든 질문들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는 부르심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자기의 고백론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무엇이기에 나 같은 자로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나이까? 그리 아니하면 진노하시고 엄청난 비참을 내리실거라고 경고하시기까지 하시나이까? 이러한 구도의 과정을 통해서 나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창조세계와의 연관이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야말로 최고의 휴머니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사랑 받으실 부족한 것이 없으시지만 하나님은 사랑함으로서만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물 다섯 살 되던 해에 일주일쯤 금식 기도를 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한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값어치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을 내버려 두고는 아무 일도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이 임하는 방식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틴로이드 존스는 설교와 설교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소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그들의 타락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고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줘야 하겠다는 소원을 품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갖게 하는데 이것이 소명의 진수입니다.
어거스틴은 아가페와 까리따스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을 믿게 될 때 그때 우리가 하나님 사랑하고 영광 돌리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지 예수님 안 믿는 사람이 예수님 믿게 되는 것은 결국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하나님 없이 계속 행복해질 수 있는 자신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 안에는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고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믿음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집니까?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들이 받게 되면 이 사랑에 대한 반응이 생겨나는데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흔히 애덕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나는 이 단어를 지순애라고 번역을 하고 싶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순수해질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순결한 사랑 말입니다. 이런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면 그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의 의무에서 자신의 의무를 고상하게 생각을 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웃의 행복을 증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소위 말하는 라틴어로 말하면 아마레데움, 하나님을 사랑함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마레데오, 이것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 진정한 까리따스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의 지평융합이라고도 불립니다. 목회의 소명을 받은 사람의 뚜렷한 특징은 지식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학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이러한 분명한 소명의 체험과 사랑을 가지고 신학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신학을 마치고 한 교회를 목회할 때는 열렬한 신앙과 소명, 지식과 사랑, 이런 것들이 한 인격 속에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사람을 교인들이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지식과 사랑이 토대가 되면서 그 위에 신학이란 학문이 구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세에 신학자들이 자주 자주 사용하는 하나의 격언이 있었습니다.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 아닌 이 세상 사물들은 유한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유한자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무한자입니다. 무한자는 유한자인 인간에 의해 파악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신학이라는 학문의 가능성은 이성에게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본 사람보다 확실하게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건 이성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남들에게 없는 신앙이 생긴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가능성이 하나님의 은총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를 기뻐하는 선언하는 계시가 있기 때문에 신학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 두 예가 있습니다. 신학이 성립할 수 있는 첫째는 존재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신학이 가능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식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그 하나님을 인식하기 때문에 신학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인식하게 해주는 원리가 내적인 원리와 외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외적인 원리가 계시입니다. 내적인 원리가 신앙입니다. 이성은 원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성은 원리가 아니라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과 성령에 의해서 사용이 되는 가운데 이성이 신앙이라고 하는 학문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신학의 도구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믿음과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이성은 신학을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 유명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라는 사람이 자신의 책 프로슬로기온 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라틴어로 읽어보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의 높으심을 꿰뚫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나는 그것을 저의 지성과 비교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하오나 나는 내 마음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 구절이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기 위해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나이다. 내가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다른 모든 학문에서 볼 수 없는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탐구의 목적이 학문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배, 그래서 신학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탐구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한 성학들이 자신들의 서재를 성단이라고 여겼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이런 소명이 없다면 열렬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열렬할 수 있으리만치 범사에 치열하게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의 소명이 없어서 신학을 그만둔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버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목숨을 걸고 기도하여 참다운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예수님 만나고 확인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목회의 소명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주어지며 개인의 00세계 속에서 감지되는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불타는 확신, 거룩함과 경건에 대한 열렬함,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가슴 저미는 연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 같은 다급함, 그것들이 모두 목회의 소명의 뚜렷한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의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 하노니 나의 형제 골육 친척을 위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소명의 분명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지속적으로 그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목회자의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명이 아주 분명하게 우리에게 주어져도 그 소명의식을 매일매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성화의 생활, 그것이 없이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형제들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나는 도리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이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사도 바울이 믿음이 없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사도 바울이 매일 매일 자신이 받은 놀라운 소명을 순수하게 유지하면서 살기 위한 거룩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 죽임의 교리입니다.
이십 몇 년 전쯤인데 갈라디아 성경을 희랍어 성경을 읽다가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내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목 박혔나니 하는 단어가 희랍어 성경으로 쉰에스타오르마이, 마이사이타이메데스따온타이, 이렇게 나옵니다. 1인칭입니다. 쉰에스타오르마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이 시제가 현재 완료형 시제입니다. 현재 완료형 시제는 사건이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사건의 영향과 의미가 아직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래서 성경에서 사도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단어를 쓸 때에도 항상 에게게르타이라고 하는 마이사이타이, 3인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할 때 그 단어를 현재완료형으로 사용을 합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 십자가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사건의 의미가 아직도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신학교에 맨 처음에 들어 올 때는 부흥사의 믿음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2학년 때가 되면 목사의 믿음이 되고 3학년 때는 집사의 믿음이 되고 4학년 때는 평신도의 믿음이 되고 졸업할 때는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하며 졸업을 합니다. 유명한 한국 속담입니다. 신학교 때 뜨거운 감격 속에서 펑펑 눈물 흘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나중에는 변한 다는 얘깁니다. 신학교 다닐 때도 별로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은 변할 것이 없습니다. 변화된 적이 없었으니까 그대로 죽 살면 하나님 거스르며 사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에 대한 여러 권의 평전이 나왔습니다. 토니써전트라는 사람이 거룩한 기름 부으심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로이드 존스 목사의 평전을 씁니다. 이 사람은 로이드 존사 목사님을 깊이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 부목사님을 했고 수천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존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확한 평전을 쓸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자에 대한 충고를 이렇게 인용합니다. 설교자는 비상하리만치 신령함이 특징이 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이드 존스가 설교자의 자격으로 뽑았던 신령함입니다. 이것은 한순간의 영적인 체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설교자의 인격 안에 깃들여야 할 거룩하게 된 인격의 특징입니다. 그 사랑과 그리고 거룩한 교제로서 세상과 구별된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무리 여러분들이 공부를 많이 하고 또 외국에 학자들이 감동을 주어도 그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신학 공부와는 별도로 신앙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간절한 기도생활입니다. 한 사람의 열렬하고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 생활은 하나님을 그 사람이 사랑하고 있다는 최고의 표현입니다. 신학 공부를 하고 목회를 하면서 공부에 마음을 쏟는 것만큼 동일하게 쏟아야 될 것이 기도생활입니다. 기도하지 않음ㄴ 신앙이 약해지기 때문에 결국은 이성에 치우치게 됩니다. 이성은 때가 되면 신앙의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최근에 내가 만난 학자인데 반드 빌라트라고 하는 하이클라스의 좋은 대학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대학입니다. 여기로 말하자면 북경대학이나 칭화대학 그런 종류의 레벨입니다. 교수를 한 사람 만났습니다. 저희에게 너무 충격 받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 대학은 좋은 대학이긴 하지만 자유주의 대학입니다. 어떤 학생이 대학과정 석사과정까지 복음주의적인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신앙을 가졌던 학생입니다. 이 학생이 자기네 학교 박사 과정에 들어온 것입니다. 박사과정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다 자유주의자였습니다. 박사를 공부를 하고 신학교 선생이 되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던 학생이었는데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면서 자유주의에 설득이 되어 가지고 아예 기독교 신앙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석사 과정 까지 해서는 그런 일들을 종종 봤답니다. 박사 과정에는 거의 그런 학생이 없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신학을 함에 있어서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깨달았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하는 이 말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원래 탁월한 신학은 개혁신학과 같이 탁월한 신학은 눈물에 젖은 기도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이어야 합니다.
몇 해 전에, 작년에 9월에 동부에 있는, 웨스터 민스터 신학교가 동부가 본교이고 후에 서부에 분교를 세웠습니다. 작년 9월에 거기에 가서 개강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을 여기 와서도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에 대해서 특강을 했습니다. 안했습니까?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 총장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했습니다. 칼빈의 언약사상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인데 나보다 다섯 살 쯤 많은데 머리가 하얍니다. 다른 사람이 통역을 했습니다. 통역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 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원래의 강의를 못해서가 아니라 통역이 후지기 때문에 통역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 설교를 들으면서 여기저기서 흐느껴 우는 것입니다. 그 세계적인 학자가 설교를 하는데 그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설교의 정통입니다. 우리들이 잘 기억해야 할 것이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우리들이 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 복음주의라는 말을 쓰는데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는 차이가 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복음주의가 두 개의 뿌리를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배우는 개혁주의가 복음주의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18세기 이후에 미국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부터 시작해서 그 이전에도 솔로몬 스투다드 같은 사람에게서 부흥운동이 있었지만 1차 대각성 운동, 찰스 피니에 의한 2차 대각성 운동,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디엘 무디 같은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오순절 계통의 부흥운동의 한 뿌리를 오늘날의 복음주의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흥주의 쪽의 뿌리는, 로이드 존스는 탁월한 지성인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지만, 부흥주의는 지성을 무시하는 반지성주의의 뿌리가 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흥운동과 함께 극단적인 체험을 강조하면서 지성의 전통을 무시하는 경향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커다란 해악을 갖다 주었습니다. 18세기의 미국 켄터키지방의 커다란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부흥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놀라운 자유, 원더풀 프리덤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극단적인 성령의 체험과 자유를 주장하면서 성경의 질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누구나 성령을 받으면 목회자가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830년대에 이르러서 찰스피니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찰스피니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의 원죄, 성령의 역사 등을 하나도 믿지 않았습니다. 펠라기우스 주의자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싶으면 믿는 것이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리안 워린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사람이 쓴 유명한 책 『리바이벌 앤 리바이벌리즘』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어느 누구도 지역교회 목회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임명을 받았는지 묻지 않았다. 이제 도래하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에서 전통적인 직위와 직무는 훨씬 뒤떨어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을 단순하게 설교하기를 주장하면서 기독교 목회사역을 공격하는, 제대로 배우지 않았으면서도 말이 유창한 연설가들의 말을 더 쉽게 귀 기울이게 되었다고 써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의 디엘 무디의 부흥운동, 이후에는 20세기의 오순절 운동, 이런 데에서 벌써 이런 문제점이 심각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복음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런 약점들이 가진 전통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결함이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올바른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복음주의를 따르는 목회에 만족하지 말고 개혁주의 목회자가 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런 전통이 없어졌는데 1960년대 미국에서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나는 칼빈주의자입니다.”라고 하면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소명을 유지하면서 사는 길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속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사역을 통해 설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그것이 아주 아름답고 은혜로와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한 내용들을 설교나 목회를 통해서 풀어날 때 그것이 예뻐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은 사랑의 유일한 원인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비로소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별그대 선풍이 여기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황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김수현이 한국에서 인기를 끈 것은 사실인데 김수현이 중국에 오는데 10억원, 90분짜리 프로그램을 하는데 10억원, 500만 위안을 주었다고 합니다. 출연료를 250만 위안을 주고, 전세기를 하나 띄우고, 경호원이 600명이었다고 합니다. 더 황당한 것은 그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보는 티켓이 원래 50만원, 2500위안이었는데 그 표가 매진되어서 암표가 팔렸는데 25000위안이었다고 합니다. 김수현이 인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에서는 500만원씩 주고 그 표를 사서 들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한국에서는 선착순으로 무료입니다. 그런데 왜 중국 사람들은 김수현 한테 빠져서 꽥꽥 소리를 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쁘기 때문입니다. 예쁘면 사람들이 사랑하게 됩니다. 나도 그 드라마를 집사람과 같이 봤습니다. 그런데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사실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신문에서는 도민준이가 올 가능성이 있는 별이 천문학적으로 어느 별인지 신문에서 며칠 동안 났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저렇게 사람들이 감동받게 풀어내는데 우리는 왜 그 진리를 그렇게 재미없게, 지루하게, 예쁘지도 않게 풀어내는가? 그래서 성경을 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 아름다움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으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몇 해 전에 미국에서 조지 마스턴 교수를 만났습니다. 그가 쓴 책이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읽지 못했습니까? 빨리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학교에 다닐 때 하루에 200페이지는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책을 읽지 않아서 어떻게 합니까?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입니다. 제가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만나주셨습니다. 세계적인 학자를 만나야하니까 레스토랑에 먼저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골할아버지 한 분이 저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옷은 추레하고, 먹다가 무엇인가 뚝뚝 떨어져 묻어 있었습니다. 강가에 앉아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분이 미국 최고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가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대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다릅니다. 말씀은 많이 하지 않지만 세계적인 학자의 풍모가 끼쳐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학자는 같이 앉아서 몇 마디만 나눠도 책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때 제가 1시간 동안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결정론적 성격에 대해서 공격을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도 다 경청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사상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사람의 사상에 따르면 목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던 것들을 후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목회입니다. 가장 제일 좋은 교재는 목회자 자신이 그 하나님을 매일매일 알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 감격하면서 그 안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사는 삶의 행복함을 보여주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목회사역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목회는 하나님과 연애에 빠진 지성입니다. 연애해 본 적 있습니까? 연애를 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집에 가도 보고 싶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습니다. 진짜 사랑에 빠지면 여자 한 사람과 나머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한 사람만 사랑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빠졌는데 여기도 여자가 있고, 저기도 여가가 있으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열애에 빠졌는데 지성은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도 동일하게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의 목회는 너무 피상적이다. 그래서 진정한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난 다음 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아 가는데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경험한 때가 9년 전 쯤에도 그런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깊이 심취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때 금요일마다 기도원에 갔습니다. 거기에 가면서 밤중에 설교 준비하거나 공부하다가 내려와서 숲속을 거닐었습니다. 별들이 하늘에 가득 한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깊이 감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가 마지막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신학은 예쁘다는 것입니다.. 신학이 예쁜 이유는 두 가지 신학이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이기 때문에 예쁘고, 두 번째는 신학이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종종 묻습니다. “작지 않은 교회를 이끌면서 늘 바쁠 텐데 어떻게 공부를 하십니까?” 물론 바쁩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신학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첫째는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조금 읽고 책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을 잘 합니다. 작은 분량의 지식을 가지고도 확신 있는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모든 책을 읽으면서 항상 감동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무슨 책을 읽어도 이 사람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사실은 교만한 것은 아니지만 신학공부를 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사람이 천재라고 느껴 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천재라고 하지만 저는 그냥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칼빈도 마찬가지고, 존 오웬도 마찬가지고, 루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정말 천재라고 느꼈습니다. 그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그래서 몇 달 동안 그 고백록을 손에 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고 나는 누구인데 그 사람에게는 그런 천재성을 주시고 나는 이렇게 평범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까? 그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세계를 보았고, 그것을 이성의 언어로 말하고 있으며, 나는 겨우 그의 말을 알아듣고 있을 뿐이지 않습니까?” 교회마당 나무 그늘에서 이런 기도를 올리는데 너무 눈물이 났습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아우구스티누스는 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나의 종이란다.” 나는 그의 탁월한 지성의 능력을 부러워했지만 하나님의 정신의 크기만이 아니라 삶의 순결함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꾸짖는 것 같았습니다. 주일 날 5번을 설교하고 밤새도록 몸살이 났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새벽에 가방을 메고 교회로 공부하러 나가려는데 아내가 나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제발 오늘은 집에서 좀 쉬세요. 몸도 좋지 않은데 그만큼 공부했으면 이미 당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목회하고 설교할 수 있으니 그만 쉬세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여보, 아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요. 나는 매일 들통을 지고 탄광에서 저 막장 끝으로 내려가 석탄을 캐가지고 올라와 매일 불을 때서 성도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 정도의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석탄을 캐러 가야 하오. 나도 내가 정말 무엇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소.” 그 때 아내는 현관을 나오면서 내 마음에서 흐르는 눈물까지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학을 계속 공부하는 이유는 신학이 예쁘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나의 애인입니다. 그들은 모두 진리를 증거 하는 책들인데 진리가 아름다우니 그것을 전해주는 책들도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내 서재에는 현재 5만권 정도의 책이 있습니다. 황당한 것은 사람들이 와서 “목사님 그것 다 읽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것을 다 읽으려면 계산해보니까 300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제가 60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물어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수십 전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책들도 있고, 잉크 냄새를 향수처럼 풍기는 방금 나온 책도 있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이미 벌써 400〜500년 정도 흐른 책들도 있습니다. 내 서가에는 프레드릭 크로샤이데 같은 유명한 신학자의 방에 있었던 책들도 내 방에 온 것이 있습니다. 내가 서재에 들어가려고 하면 서재에 있는 수많은 책들이 내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 나도 사랑해 주세요. 내 얼굴도 봐 주세요. 목사님, 저도, 저도 요, 여기 있습니다.” 나는 한 번도 서가에서 들려오는 이런 책들의 속상임이 소란스럽거나 귀찮게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서가를 붙들고 눈물을 흘립니다. 여러분처럼 신학교에 다닐 때는 읽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책을 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주일〜2주일의 점심을 굶고 돈을 모아서 서점에 가서 영어원서 한 권 사 가져 오고는 했습니다. 지금은 책을 살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매일매일 생각하면서 그 성경을 통해서, 신학책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심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매일매일 보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성경에 가장 많이 묻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의 정수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른 학문의 세계에도 흔적이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뿐만 아니라 역사, 과학, 문학, 음악, 미술, 건축,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학을 모르는 사람은 그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인지 모릅니다. 모든 학문 속에 묻어 있는 것들을 모두 연결시키면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도록,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해 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빛으로 산다는 것』이 책을 다 읽고 왔습니까? 재미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책을 이주일 만에 썼습니다. 한 번에 확 써서 끝냈습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각주는 조금씩 시간이 걸렸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을 쓰는데 2주가 걸렸습니다. 빛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성경에서 어떻게 이야기 하는지, 뉴턴의 광학에서 어떻게 이야기 하는지, 빛의 물리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 도덕적인 의미, 그러면서 상대주의가 나오고 상대주의에서 진리가 없다고 하는, 진리의 기준을 절대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신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의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찾은 것이 아니라 평소에 건축학, 양자역학 등을 보면서 이런 것들이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하는 것을 내 나름대로 발견한 것입니다. 특히 프랑스 팡테니에 있는 라빌레떼 공원에는 내가 직접 갔었습니다. 베르나르 추미가 작품입니다. 전위를 느낄 정도로 ‘현대사상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길을 만들어 놨습니다. 그래서 길을 걸어가는데 아무데도 가지 않는 길입니다. 가다가 길이 없어져 버립니다. 왜 길이 꼭 어디로 데려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전체적으로 구현 되는 것이 심지어 수학에도 나타납니다. 그것이 직관적 수학 이론입니다. 쉔베르크의 음악은 무음주 음악입니다. 음악에는 장조, 단조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없는 무음주 음악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쉔베르크의 음악을 들어보기 바랍니다. 그런데 굉장히 괴기스러운 음악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물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포브스, 노블리제 같은 잡지를 보면 프라다, 샤넬이나 헤르메스 등의 명품을 선전하는 광고에 여자가 나오는데 예쁜 여자가 아닙니다. 시커멓게 그리고 마귀 같이 하고 나옵니다. 아주 사납게 야수 같이 하고 나옵니다. 그 광고에 나오는 여자 중에 누구도 예쁘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 자체가 그 안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나옵니다. 얼굴이 예뻐서 남자들에게 사랑이나 받는 여성상을 다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전부다 전근대적인 남성 우위론의 미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수적 아름다움이 도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현대 사상들이 하나하나 그 속에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로 보면 별그대 같은 드라마가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인기를 끄는지 금방 답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을 해석해서 사람들과 같이 덤벼들어서 빨고 즐기는 것이 목회자가 아닙니다. 저는 어떤 때는 가기 싫어도 억지로 극장에 갑니다. 가는 이유는 가서 거기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은 마음이 끌려서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는데 우리는 한 발짝 떨어져서 왜 아름답지 않은 것이 저 사람들에게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지를 탐구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 책을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잘 읽지 않습니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회 안에서 지성의 근육들이 다 사라져 버렸는지를 보면 눈물이 납니다. 이런 책들을 이해하고 이런 사상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곧 쓰려는 책이 『기독교 소금으로 산다는 것』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책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합적으로 보고, 설교하고, 그렇게 살고, 가르치라고 하나님이 목회자로 부르셨으니까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열렬하게 공부해서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을 말해주고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지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이 더 많지만 시간이 다 되어서 오늘은 여기에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목회자로서의 소명과 평신도로서의 소명은 어떻게 다릅니까?
(답변)목회자로서의 소명은 똑같이 부활사건의 의미를 깨달았는데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 그것이 너무 부담이 커서 아무리 노력해도 일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 수 없는 그 신적인 강제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1과’를 보기 바랍니다.
(질문)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에서 우러나는 것인지 신적인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제일 먼저 어떤 사람이 자신 혼자서는 살 수 없어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것은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것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을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교인들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내 안에 작용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원래 주님께서 나에게 감화를 주셔서 생겨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두 가지로 이야기 하는데 객관적으로 말할 때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롭고 호의적인 행동입니다. 주관적으로 말할 때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해야 할 것을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질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때 어떠한 가르침이 그것을 알려 줄 수 있는 것입니까?
(답변) 저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핵심이 인간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고자 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그 핵심은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 방식에 대한 앎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제가 두 시간 정도 준비 한 것 중 절반 정도를 강의 했습니다. 좀 더 어려운 신학적인 것을 공부를 해야 마음이 뿌듯해질 것 같아서 이 정도로 하고 내일은 목사가 신학공부를 할 때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