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 방법론(4)
녹취자: 김명진
여러분이 혹시 유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를 아십니까? 그 사람은 AD 37∼100년경에 살았던 인물인데 그 사람이 쓴 유명한 책 가운데 『유대전쟁사』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있어서 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전투이며 전투는 피 흘리는 훈련이었다.”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훈련은 전쟁처럼 했고 전쟁을 훈련하던 그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차이는 전쟁에서는 피를 흘렸고 훈련에서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하지 않은 목사는 나쁜 목사입니다. 선한 목사일 수 없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배가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여러분을 안고 수술대 위에 눕혔습니다. 옷을 다 벗기고 이제 배를 갈라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지었습니다. 손에는 부엌칼이 쥐어져 있습니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딸아 걱정마라. 이 세상의 어떤 의사보다도 아빠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러면서 배를 부엌칼로 가른다면 여러분 아버지에게 여러분의 몸을 맡기겠습니까? 아버지보다도 덜 사랑하는 의사를 찾아가겠습니까? 사랑하나면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경종을 울립니다. 지식과 사랑은 언제나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시대에 전쟁할 때 보면 전차가 있습니다. 전차의 바퀴가 몇 개입니까? 두 개입니다. 하나는 지식이고 하나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항상 바퀴를 하나만 가지고 하려고 합니다.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기도를 뜨겁게 하고 하나님 사랑 하고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은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는 사람은 전도를 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교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심방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 서로 무시합니다. “너는 지식만 있지 사랑이 없잖아.”, “너는 뜨겁기만 하지 지식이 없잖아.”, “지식이 사랑보다 낫지.” “무슨 소리야. 그래도 뜨거운 것이 지식보다 낫지.” 양쪽 다 틀렸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 그것은 진정한 지식이 아닙니다. 중요한 성경 구절이 하나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사랑이 지식에 의해서 반대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무엇이라고 했냐면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말미암아 너희 사랑이 더욱더 풍성하게 한다. 지식이 사랑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지식은 언제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사랑이 불길이라면 지식은 장작입니다. 장작을 계속 집어서 던져 집어넣으면 사랑의 불길이 계속 타오릅니다. 많이 배우면서 사랑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식의 내용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지식이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어서 신학은 학문인가라는 내용으로 공부를 하겠습니다. (학생 기도)
신학은 무엇일까요? 좁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에 관한 학문적인 체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신학은 기독교 신앙 자체를 가리킵니다. 신학은 세상의 모든 학문에 비교할 때에 아주 탁월한 학문입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성격은 객관적으로 신학은 탐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신학이라고 보고 이 앞에 각각 학문의 대상이 옵니다. 예를 들어 물리 현상에 대해 배우는 것은 물리학이 됩니다. 그것이 의료일 경우에는 의학이 되고 정치가 될 경우에는 정치학이 됩니다. 이것은 학문을 하는 주체를 이야기 합니다. 모든 학문의 대상이 됩니다. 모든 학문이 배우는 사람이 학문의 대상보다는 큽니다. 물론 물리학을 볼 때 인간이 물리현상을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물리학에서 관찰과 학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간보다 위대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은 신이 인간보다 더 큽니다.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 하면 이 학문은 인간의 이성만으로 하는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통해서 성경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학문입니다. 신학이 학문이냐 아니냐고 논쟁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학은 학문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이 이성적으로 자명한 원리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그렇지만 신학은 그렇게 자명한 원리에서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살아계신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사람이 인식할 수 있도록 이성 안에서 자명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희라는 사람을 기억합니까? 주희는 서양 철학사에서 아퀴나스 같은 사람입니다. 주희의 주자학, 성리학의 책을 읽어보면 놀랍게도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경건과 학문이 그들 주자학과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주자학과 성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그것은 지금 공부하는 것처럼 파편적으로 잘라진 지식을 추구하는 그런 식의 공부가 아닙니다. 학문은 하늘에 있는 것들로부터 땅에 있는 것,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결합해서 통합된 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그런 종류의 지식입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그렇게 공부하면 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경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뜻 입니까? 아시다시피 이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경건은 무엇입니까? 알 수 없는 비인격적인 절대자에 대한 경건입니다.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원천과 원리, 그것이 타원 아닙니까? 타원은 의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타원은 스스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인식할 수 없는 타원을 향한 경건함입니다. 그 타원에 대한 믿음이 모든 지식들이 파편적으로 있지 않고 그것을 모두 묶어서 하나의 가치와 의미를 설정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신학은 학문일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학문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성만으로 자명한 원리에서 출발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어서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며 구원하는 믿음을 낳고 그것을 강하게 하는 진식을 전달해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성만으로 알 수 있는 자명한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일들에 관한 지식으로서 오직 참된 행복으로 우리를 인도해주고 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신학은 믿음을 필요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진정한 학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자기의 신학대전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학문은 첫째로 자연이성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한 학문이 있고, 두 번째는 그것보다 더 상위에 있는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한 학문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전자가 아닌 후자에 속한 학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중요하기 때문에 원문을 신학대전에서 인용을 하겠습니다. “신학은 학문이다. 그러나 학문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라. 첫째로 어떤 학문은 지성의 자연적인 빛으로 인식한 원리로부터 시작한다. 산수학, 기하학 같은 종류의 학문이다. 둘째로 상위의 학문을 빛으로 인식하게 된 원리들로부터 출발한 학문이 있다. 광학이나 음악 같은 것이다. 광학은 기하학에서 세워진 원리에서 시작한다. 음악은 산수학이 지시하는 원리로부터 시작한다.” 이해하십니까? 이 음악은 찰스프란시스 구노의 아베마레입니다. 이것은 원래 바하의 평균율과 합쳐진 것입니다. 바하는 작품을 평균율 작품을 450여개 씁니다. 그 중에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6〜7개 되는데 이것이 제일 유명한 것입니다. 이 음악이 사람들에게 굉장한 감동을 주어 왔습니다. 그것은 아주 엄격한 수열을 따르고 있습니다. 결국 음악의 아름다움은 수학의 아름다움입니다. 음악은 수학이라는 상위의 학문에서 나온 어떤 결과를 받아들여서 음악이 성립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은 신학에서 획득된 원리들을 기초로 해서 하위의 학문이 이루어지는 그런 원리에서의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합니다. 신학은 상위의 학문의 빛, 이른바 하나님과 지복자들(천국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지식을 알게 된 원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일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신학은 학문이다. 즉, 신학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성경 진리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발견된 성경의 진리들은 논리적인 연결을 이루면서 하나님을 이해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모든 지식들을 체계화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고 체계화함에 있어서 일반 학문의 원리를 상당 부분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앎은 시련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속에서 획득한 지식을 체계화하고 전수화 하는 데에는 개인주의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신학은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두 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 체계와 형식, 질서를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좋지 않은 결과를 맺게 되는 예가 중세 스콜라주의입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것을 너무 무시해서 잘못된 경우가 일부 개혁신학자들과 재세례파, 열광파, 광신론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철학에 대한 무지와 적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 체계, 형식, 질서를 따르는 어떠한 방법론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라고 하는 굉장히 중요한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의 책은 영어로도 거의 번역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 사람 것을 보려면 라틴어나 화란어를 공부해야 합니다. 이 사람의 대단한 작품 중 얇은 책 한 권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마존에 들어가면 살 수 있습니다. 『중생』이라고 하는 얇은 책입니다. 이이 사람이 쓴 PTP『이론실천 신학』이라는 유명한 조직신학 책이 있습니다. 두 권으로 되어있는 책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뛰어난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 책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책을 제가 2년 동안 찾아서 주문한지 2년 만에 구하지 못했습니다. 가격과 상관없이 그 책을 구하면 사겠다고 했는데 유럽에 있는 서점 관계자가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화란에 가서 직접 찾아냈습니다. 두 권의 가격이 2만 위안 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아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책이 정말 청사에 길이 빛나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신학을 정의하기를 “이성적인 경건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사랑하고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설명할 수 있는 이성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 합니다. “너희 안에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이 항상 있도록 준비하라.” 성령충만 하고 너무 기쁘고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너는 뭐가 그리 행복하니, 왜 그렇게 기쁘니?”하고 물으면 그 때에 “아, 몰라. 그냥 좋아.” 그러면 안 됩니다. 내가 기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때는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신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은 직관적 지성이 아닙니다. 직관, 통찰로서 논리와 상관없이 오선으로서 어떤 것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동오’, 탁하고 깨닫는 것, 신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신학은 단순한 삶의 지혜가 아닙니다. 학문적인 지식, 원인결과, 원인결과로 이어지는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삶의 기술, 이런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적인 지식, 그리스 철학에서 프루덴시아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은 객관적으로는 학문이 분명하지만 주관적으로는 지성 안에 내재하는 성향인데 이것은 곧 믿음의 성향입니다. 이성이 아닌 신적 계시로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성향이고 이론이 아닌 실천적인 것이다. 이 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예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두 가지로 가르쳐준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것, 둘째는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야 말로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삶 전체를 포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빛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 그렇게 모든 신학 아닌 다른 학문의 지식들을 신학적으로 연결하는 그 일도 신학이라는 학문입니다. 모든 학문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학문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신학은 철학을 묶으면서 철학에 대해서 최종적인 답을 주는 것이 신학입니다. 그래서 신학 연구가 가지고 있는 단일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생이 습득해야했던 다양한 학문과 지식들을 성령의 경관과 실천이라는 목표아래서 하나로 통일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18세기의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계시의 권위보다는 이성의 권위를 앞세웁니다. 모든 학문을 아우르며 철학을 판단하고 지식의 기초를 제공하던 신학을 그 높은 왕좌에서 끌어내립니다. 내가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은 권위를 가질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지점에 있어서 우리가 데카르트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가 무엇입니까? “꼬기또 에르고 숨.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꼬기또’라는 것은 비판적으로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양쪽에다 부정어를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논 꼬기또 논 에르고숨. 나는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작가 라깡을 아십니까? 프랑스의 심리학자 자크 라깡입니다. 이 사람은 “나는 생각하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존재하는 그 곳에서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데카르트와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비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더 이상 비판할 수 없을 그 때에 드러난 사실을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받아들이라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입니다. 그렇게 비판적으로 도달한 결론이 성경이나 하나님의 존재를 대치해 버립니다.
옛날에는 동그란 것을 사람이라고 보면 사람들이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돕니다. 그 가운데에 하나님이 존재합니다. 사물들이 돌아가고 나도 이 안에 속해있습니다. 마지막에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이 할 수 있고 그 판단만이 정확합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거기에 들어갑니다. 하나님도 나의 이성으로 의심할 때까지 다 의심하고 마지막에 진짜 하나님이 있는지를 판단하자는 것입니다. 그 비판의 원리를 좌우하는 것은 이성의 원리입니다. 이성의 원리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적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하나님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때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까? 없게 되는 것입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없다고 그러면 너무 혼란스러우니까 그것은 종교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고 줄을 그어버립니다. 그래서 신학이 학문의 영역에서 축출되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신학의 진리가 완전히 붕괴되어 버립니다. 데카르트는 철저하게 이원론자입니다. 육체와 정신, 육체와 정신은 별로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사유할 때 거기에 자신의 존재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의심한다고해도 의심하는 내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자명성을 자기 존재의 자명성으로 대치합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의 거대한 출발점입니다.
이런 사고가 데카르트에서 처음 출발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세까지는 하나님만 참된 실제로 보는 실재론의 철학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고 나서 그 유명한 실재론, 관념론, 유명론의 논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중세의 철학의 틀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신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로켈리우스, 쿠자의 니콜라스, 윌리암 오캄 등이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실재론 중심의 철학들을 다 파괴합니다. 그런 중세 철학의 균형기의 유산들을 데카르트가 정리해서 꼬기또 에르고숨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만듭니다. 그런데 이러한 명제도 데카르트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이와 비슷한 것을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습니다. 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한다. 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어도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아는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어떤 것을 생각할 때 죽어라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해서 의심할 수 없는 이치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항상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냐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유하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면서 일생동안에 몇 시간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파스칼 하면 팡세만 생각하는데 ...하다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파스칼이 팡세를 쓴 이유는 팡세 같은 것을 많이 모아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변증하고 싶었습니다. 데카르트의 생각에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사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의심할 때까지 의심하면서 무언가를 비판하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의 부대낌 속에서 말하자면 사물들을 향해서 가지는 느낌이나 정서, 감정,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 두 사람이 결혼했는데 내가 질문합니다. 둘이 결혼을 했는데 저 사람이 누구인지를 계속 비판적으로 생각하다가 결혼했습니까? 좋으니까. 왜 좋은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하기 힘듭니다.)우리의 삶은 대부분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파스칼이 보기에 데카르트는 아직 어린 것입니다. 파스칼의 사상이 스피노자에 의해서 구체화 됩니다. 스피노자에 와서 개념은 명증한 사고, 비판이 아니라 기분입니다. 여러분이 스피노자의 『에티카』라는 책을 읽지는 못했어도 보기는 했습니까? 『에티카』라는 윤리 안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선악의 개념을 깡그리 부수어 버립니다. 절대적인 선과 악의 개념은 나의 기분의 좋고 나쁨으로 환치됩니다. 그리고 거대한 상대주의가 도입됩니다. 철학계는 스피노자의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함에 있어서 스피노자가 엄청 매력적인 구도를 그들에게 제공해 줍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은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지나가면 절대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보지 못합니다. 내일 아침에 도서관에서 스피노자의『에티카』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한권을 꼼꼼하게 읽지는 못해도 만져라도 보는 것입니다. 목차라도 보고 조금 읽어보는 것입니다. 그냥 넘어가면 이름만 들었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거대한 생각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신학이 학문의 범주에서 완전히 축출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이 잘못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신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신학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신학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것이다.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좋은 신학의 정의를 내가 내렸습니다.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활동이다. 이것은 삼위일체가 모두 들어있는 저의 정의입니다. 독창성은 떨어지지만 저의 정의가 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한 활동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신학은 구원을 위한 활동이고 구원받은 자를 위한 활동입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 안에서의 활동이어야 합니다. 사람, 성령 안에서 탐구하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한다. 그래서 신학은 성령 충만할 때 제일 잘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지혜로서의 신학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집요하게 찾았던 학문이 철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공부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어서 지혜롭고 행복하게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신학의 임무입니다. 그러면 신학은 목회자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신학공부는 목회자만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18세기 이후에 생겨난 것이었고 원래 기독교의 전통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