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 방법론(5)
녹취자: 김경애, 백지영
신학공부가 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학을 한 것이 어떻게 목회에 적용되고 삶으로 녹여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런 지성적인 혼란은 모두 신학이 삶의 지혜로써의 특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신학에 있어서 삶의 지혜를 추구하는 전통들이 지금은 거의 상실되었습니다. 데카르트 이후로 학문의 체계들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결국은 자연과학이나 기술발전을 위해서 적합한 형태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기술을 통해서 물건을 생산하기에 적합한 방식을 인문학과 신학에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 안에 도입된 수많은 학재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조직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 신학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학교에서 조차도 지금 그런 식으로 학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어제부터 여태까지 강의한 이 과목은 이런 내용으로는 어떤 교수들이 이런 강의를 하겠습니까? 성경 신학? 아닌 것 같습니까? 조직신학? 약간 비슷하기기는 한데 적합하지는 않습니다. 역사신학? 그것도 조금은 관계가 있는 것 같지만 딱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런 식의 강의는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배우는 것은 여러 가지 신학들을 모두 묶어주는 아주 중요한 공통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신학교육을 하면서 이런 강의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들은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수많은 고민 속에서 터득된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기에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누구 한사람에게 배운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면서 학재 간에 단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평성도가 로마서를 읽다가 모르는 구절이 나왔습니다.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이것은 너무 어려운 질문이 되어서 목회자들은 모르고 신학자를 찾아가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님에게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신학교 교수님이 대답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조직신학이 전공이기 때문에 성경은 잘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했더니 성서 신학자를 찾아가라고 해서 갔더니 성서 신학자를 찾아가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미안합니다. 나는 구약전공이라서 신약은 모릅니다.’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신약성서학자를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학자를 찾아가서 물어보았더니 이 학자가 하는 말이 ‘정말 죄송한데 나는 전공이 공관복음이라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했더니 바울신학을 공부하는 교수를 찾아가라고 해서 드디어 바울신학을 공부한 사람을 찾아서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정말 미안합니다. 나는 데살로니가 전공이라 미안합니다.’ 그러면 로마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해서 드디어 찾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정말 미안한데 나는 8장을 전공해서 9장을 모른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9장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서 물어보았습니다. 나의 박사논문은 바로 그 앞 절에서 끝난다고 했답니다. 다음 구절은 모른다고 했답니다. 여러분은 지금 웃지만 그렇게 ‘나는 8장을 전공했기 때문에 9장은 모릅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8장만 팠으면 9장을 모를까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을 볼 때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네가 전지전능하냐? 과학, 역사, 네가 사람이냐?’ 몇 백 년에 한명 나오는 천재이든지 아니면 거짓말이고 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신학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입니다. 그런 것으로 이런 시대에 교육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영어를 읽으실 수 있는 분들에게 책을 소개를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피어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Pearcy인데 그 사람이 쓴 책 가운데 ‘Total Truths’ 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지금 아마존에 들어가면 찾을 수 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책입니다. 이렇게 하고 보니까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하면 공부를 많이 한 바보가 됩니다. ‘도타 이그노란타’ 라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참된 기독교신앙은 참된 철학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어왔습니다. 그래서 피엘해덕이라는 사람이 Philosophia is way of life.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신앙을 참된 철학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오리겐의 가르침의 많은 국면들에 배어있다. 이런 전통은 가이사랴의 바질, 나이안주스의 그레고리, 니사의 그레고리 등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을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우리들의 철학’ ‘완전한 철학’ 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필로소피아라고 했는데 조상부터 전해 내려오는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신학은 철학의 대용품인가? 그러면 우리는 철학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우리의 기독교신앙을 가르쳐야한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철저하게 이성의 원리에서 시작해서 이성의 원리로 마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철학이 이런 삶의 문제에 대해서 궁극적인 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절대 사람은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의 핵심이 성경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한번 펴보십시오. 2절입니다. ‘’ 어떤 사람은 이 구절 하나를 딱 떼어놓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외에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으니까 우리의 신학도 필요 없는 것이다. 그냥 단순한 신학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한 이유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면서 그런 삶의 지혜의 핵심이 십자가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십자가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십자가 말고 다른 것들도 이해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백한 것은 십자가의 중심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2장 4절에서 5절 사이에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철학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2장 6절에서 7절에서 충격적인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읽어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그러나 라는 단어가 무슨 뜻입니까? 앞의 사실을 뒤집는 말입니다. ‘그러나’ 라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야기하면서 작은 소리로 ‘그러나’ 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온전한 사람은 누구를 말합니까? 처음 믿는 사람이 아니라 신앙이 성숙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성숙한 신자를 말합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는 지혜 즉 소피아를 말한다. 이것은 이 세상의 소피아가 아니다. 이 세상의 소피아가 무엇입니까? 오직 이것은 철학이 아니며 세상의 없어질 통치자의 철학도 아닌데 은밀한 중에 있는 하나님의 철학이다. 그것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그런 사람의 지혜를 따라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의 철학을 따라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철학의 핵심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별도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그렇게 세상철학자들이 그렇게 추구했던 그러나 도달하지 못했던 참된 지혜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혜라는 소피아의 개념은 비평적인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리스의 철학에서 빌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용어를 사용해서 구약의 지혜사상에서 온 것입니다. 구약의 지혜가 히브리말로 ‘호크마’라고 부릅니다. 호크마라는 이 단어의 근본적인 의미는 뿌리가 잘 박혀있어서 무엇인가 확고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이러한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기술적인 능숙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호크마는 삶에 있어서 성취할 기술 즉 잘 사는 삶의 기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십자가에 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와 삶의 지혜를 대척점에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서 삶의 지혜가 나오고 삶의 지혜의 핵심이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핵심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이해 없이는 복음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교회의 올바른 의미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의미의 종말 안에서 그 의미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가 파악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가장 좁은 의미로 요약하면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Jesus died for us.” 여러분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을 다 가지고 있습니까? 그 책을 5번 이상 읽은 사람 손들어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 번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 책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암기를 하고 있으면 설교를 하거나 신학을 풀어내는데 도움이 됩니다. 제가 그 책을 썼습니다. 29번 읽었습니다. 썼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외우는 것은 아닙니다. 빛으로 산다는 것은 10번 정도 읽었습니다. 지금 또 읽고 있습니다. 서너 번 읽고 나면 되게 빨리 읽게 됩니다. 지금 제가 질문을 하면 대답을 거의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인간의 구원계시의 총체입니다. 더 복음을 정의하면 그 복음을 실천하고 삶에 적용하는 모든 교리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적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계시된 복음은 신과 인간과 세계의 존재의미를 탐구하던 철학적 질문에 대한 가장 단순한 답이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래서 인간의 철학이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지혜의 금고를 여는데 실패한 가짜열쇠였다면 복음은 참된 열쇠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해볼 것이 삶의 체계로서의 경건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요구받고 있는 선한 삶은 우발적 선행의 삶이 아닙니다. 체계화된 사상으로부터 나오는 선한 삶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동방의 3인 가이사랴의 바실, 그레고리, 나지안주의, 갑바도기아의 3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신학과 철학의 연관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2세기에 테르툴리아누스라는 교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식으로 살았느냐하면 처음 예수를 믿고 회심한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이 코스모스론 입니다. 우주론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믿는데 세계관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번에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언제 기회가 있으면 내가 설교한 레카피타라치오의 교리가 기억납니까? 레카피타라치오의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1장에 보면 ‘만물을 통일되게 하심이니’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것은 헬라어로 아나카펠레오라는 단어입니다. 그중 라틴어로 레카피타라치오입니다. 그런데 ‘레’는 다시 라는 뜻이고 카피티, 이런 식이기 때문에 카피티스, 카피투스가 됩니다. 그래서 머리라는 듯입니다. ‘라치오’는 동사의 어미입니다. 다시 머리되심이라는 뜻입니다. 매우 신학적인 내용인데 그것을 6번에 걸쳐서 설교했습니다. 그것을 김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영상을 띄어놓고 동시통역으로 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들은 다음에 내가 와서 토론을 하면서 레카피타라치오의 교리를 강의하고 여러분이 이해한다면 기독교의 우주관과 세계관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할 양이 많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조금 나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를 책을 30권을 읽어도 여러분 스스로는 정리가 잘 안 되는 내용들을 정리해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무엇인가 듣기는 들었는데 명료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어디서 듣기는 다 들었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학을 공부하면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공부를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1년에 한번쯤은 병원에 실려가야합니다. 총신 신대원에 가는데 총신 신대원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학생들 2,000명 정도 모이는 개강수련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 공부를 그렇게 하면 안 되고 1년에 한번쯤은 앰뷸런스에 실려가야한다고 했는데 내 기록이 22시간동안 앉은자리에서 한 번도 안 일어나고 에세이를 썼습니다. 아래에 오강을 가져다놓고 물 한통과 빵 한 덩어리를 놓고 22시간을 쓴 기록이 있고 또 한 번의 기록은 17시간 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개강수련회를 하고 왔는데 학생들이 엄청나게 은혜를 받고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실화입니다. 학생들이 진짜로 오줌통을 책상에 놓고 빵과 물을 놓고 내 기록을 깨려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3명인가 4명이 진짜로 실험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우리 또 다시 그렇게 하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자.’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김남준 목사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분량이 아니다.’ 그렇게 끝났습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내가 그 학교의 총장으로 갈 뻔했습니다. 그쪽에서 나를 콜링했습니다. 그래서 갈까 생각을 해보았는데 가려면 열린 교회를 완전히 사표를 내야했습니다. 그래도 사표를 내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론에서 계속 대서특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가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학생들은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너무 아쉽다. 김 목사님이 와야지만 학교가 제대로 될 것인데 너무 아쉽다.’ 또 다른 학생들은 ‘김 목사님이 오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가 졸업하고 오셨으면 좋겠다.’ 왜? 김 목사님이 오시면 우리를 졸업시키지 않을 것이다. 김 목사님이 말하기를 지하에 감옥을 만들고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은 전부 거기에 집어넣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저는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존 오웬이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존 오웬은 옥스퍼드 대학에 총장 없는 부총장이었습니다. 진짜 대학이 빚더미에 있었습니다. 모금하고 실력 있는 교수들을 모아서 대학을 최고의 대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대신 공부를 하지 않고 불량하고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지하실 감옥에 넣었습니다. 공부할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김 목사님은 꼭 오셔야한다. 우리가 졸업한 다음에 꼭 오셔야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학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기독교의 지도자의 힘이 여기에 보면 소피아가 호크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머리이시고, 구속의 머리이시고, 재창조의 머리이시다. 이것이 지혜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목회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체험인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학공부를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알고 성경을 통해서 다른 모든 학문에 대한 지혜를 올바르게 이해해야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베아따디따’라는 책을 씁니다. 참된 행복이라는 책입니다. ‘디따’가 인생이니까 ‘인생도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비엔띠뜌뜨라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가리키는 말합니다. 이것이 중국어로 번역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신 분 손들어보십시오. 책 이름이 아마 ‘참된 행복’ 이라고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영어로 읽으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하고 얼마 안 되어 쓴 초창기의 책입니다. 여기서 인간을 세 가지의 인간으로 분류합니다. 참된 행복의 길을 알았지만 미끄러진 사람, 잘못된 것을 참된 행복이라고 확신하는 인간, 참된 행복의 길을 알뿐만 아니라 똑바로 그 길로 걸어가는 사람. 이런 인간은 다시 정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정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향의 삶입니다. 이 배향의 삶을 정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다르지오의 삶입니다. 이것은 콘도르지오의 삶입니다. 콘도르지오는 회심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제대로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계속 그 방향으로 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로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어거스틴이 그랬습니다. 그러면 목회자의 의무가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를 역사 속에서 교회를 보존하십니다. 그래서 지상교회는 역사적으로 불완전하지만 그리고 역사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떠오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편교회 즉 우주적 교회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 자신의 성경적 신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혹시 비블리칼 테올로지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존 오웬 전집, 에드워즈 전집을 꼭 사놓으시기 바랍니다. 두 달 안에 여러분의 도서관에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비블리칼 테올로지는 간단한 책이 아닙니다. 700페이지정도 되는 책인데 역사적으로 언약신학을 개혁신학에 도입을 한, 거기에 콕시우스의 영향도 나타납니다. 굉장한 책입니다. 존 오웬이 얼마나 박식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 여기에 드러납니다.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이 세상은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그렇게 애썼지만 그러나 결국은 기독교는 결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주후 2, 3세기의 가장 위협적인 이단 영지주의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광범위하게 확산될 때 이레네우스라는 사람이 이단논박이라는 작품을 씁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전체를 일목요연하게 반박하고 정통신학의 권위를 세웁니다. 그리고 아리우스주의를 비롯한 이단들이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도전을 하게 됩니다. 아리우스주의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에 가까운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교리를 확고하게 세웠습니다. 또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고 자유의지를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위대한 교부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파편적으로 흩어져있던 기독교사상의 지식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다양한 학문의 분과를 기독교적인 설명으로 종합하면서 재 진술했습니다. 소지쿠스의 주교였던 에모네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니우스라고도 합니다. 4세기경에 활동했던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지도자들입니다. 이 아리우스주의자들이 박해를 받고 중국까지 옵니다. 경고가 지금 현재 주후 7세기경의 기독교유적이 중국에 있습니다. 그래서 또 그 사람들이 이슬람정국으로 들어가서 이슬람의 십자가 전쟁에서 기독교가 패배합니다. 이슬람정국이 지배하게 됩니다. 이슬람이 사라센 제국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때에 거기서 그리스의 문물을 사라센제국에 소개해준 사람들이 아리우스주의자들, 네스트리우스주의자 이런 사람들이 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슬람의 철학을 꼭 공부해야하는 것을 아십니까? 한숨이 나옵니다. 그래서 신학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슬람 철학자들 아비첸나, 알 가잘리, 알 파라비, 이런 사람들을 반드시 공부하고 넘어가야합니다. 이슬람 철학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에 소개되는 것입니다. 신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이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성경사에 있어서 왜 대학교의 출현이 전부 12세기입니다. 캠브리지, 옥스퍼드, 그런데 이슬람은 대학의 출현의 왜 전부 12세기에 출현했습니까? 11세기에 비로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소개됩니다. 내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물어보는 이유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때 여러분 스스로 비참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 몇 권인지 아십니까? 52권의 작품을 썼습니다. 그중에서 유명한 작품들이 여러 권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최고의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만져보신 분 손들어보십시오. 보신 분은 있습니까? 혹시 들어본 분 있으십니까? 자연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너무너무 중요한 책입니다. 그중에서 형이상학과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은 더 이상의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책입니다. 그 다음에 영혼론이 있습니다. 보신 분 있습니까? 만져보신 분 있습니까? 들으신 분 있습니까? 이렇게 계속 여러분에게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정말 자존심 상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을 다 할 수 있느냐? 덜 놀고, 덜 쉬고, 덜 자고, 덜 먹고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24시간입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고 그러면서 뭔가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웃음이 나옵니까? 눈물이 나올 지경입니다.
그 사람 유니우스는 아이티우스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아리우스주의자라는 이단의 창시자였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본체적 하나이심을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을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에게서는 확실하게 마니교의 잔재가 남아 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성부 성자의 본체적 하나이심을 부인했습니다. 그때 이것을 공격했던 사람이 바질입니다. 나스티시즘은 이레나이우스가 비판했고, 아리우스주의는 아타나우시스가 비판했고, 어거스틴과 바질이 펠라지우스주의를 비판을 하고, 이 사람은 특별히 에르구누스주의를 비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에르구누스주의는 일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정죄를 당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르구누스가 이런 식으로 악의적인 도전을 했지만 탁월한 변증적 저술로서 당시 지성인들에게 호소를 얻고 있던 마니교의 혼합 주의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 굉장히 중요한 이단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아베로에스주의였습니다. 아베로에스주의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때에 논증이 좀 복잡했는데 13세기경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대한 아베로에스, 아베로에스는 일평생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해설한 이슬람 철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의 해석이 광범위한 호소력을 지닌 채 대학과 학자들 사이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리스철학이 바로 기독교권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이슬람 학자들을 통한 해석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해석도 같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원래 있었던 사람인데 이제야 알려졌는가? 여러분이 아리스토텔레스하고 플라톤하고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책들 특별히 폴리테이아(Politeia) 국가론, 티마이우스, 파이돈 이런 책들을 보면 기독교의 사상과 굉장히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기독교 교부들 중에서는 플라톤주의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플라톤은 보편자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개별자에 대한 관심으로 연역해서 들어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은 이해하기가 어렵고 개별자로부터 출발해서 일자(一者)를 향해서 더듬어 가야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관계이지만, 여러분은 혹시 아데네 학당이라는 라파엘로가 그린 그림 본 적 있을 것입니다. 학당을 내려오면서 플라톤의 손은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관심의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가 기독교화 되고나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독교에 대해서 약간 반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그 책을 없애버립니다. 그런데 그 책이 나중에 이슬람이 그들을 정복했을 때 (1.05). 그리고 그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아리스토텔레스의 발견은 이슬람의 세계에서도 똑같이 신앙이냐 신학이냐의 이 문제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기독교 못지않게 아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때 아베로에스의 해석이 그 유명한 지성단일성의 논의였습니다. 이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페르푸쉬케스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영혼론 한번 읽어보세요.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책상도 말하자면 영혼이기 때문에 이 형체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 영혼이 영혼론을 해석을 하는 데서 이신론(理神論)과 관련된 논쟁이 일어납니다. 아베로에스에 따르면 인간의 수동지성은 육체의 기능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와는 함께 섞일 수 없는 별개의 것으로서 우주 전체가 하나의 영혼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개체화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의 이 지성은 더 큰 하나의 지성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주체인 하나의 커다란 지성이 개개적인 사랑의 체험과 함께 관계를 맺음으로서 마치 지성이 각자 개인이 지성을 소유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기독교에서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개별적으로 창조하셔서 각자가 소유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쌍둥이는 똑같은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네가 다른 인류이기도 하고 또 내가 젊으나 늙어가나 죽기 직전이나 내가 나라는 단일성, 동질성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안 믿어서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이유도 영혼이 나에게 개별적인 데서 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의 교리에 정면적으로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이 아퀴나스는 아주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규모적인 뚱보였습니다. 귀가 어두웠습니다. 체구가 거대하며 과묵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논쟁에 대해서 지성단일성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아베로에스를 반박하는 지성 단일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쓸 때에는 너무나 분노해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베로에스의 이 사상을 비판하면서 토마스아퀴나스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이 개별적인 인간이 이해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지성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탁월한 논박을 통해서 인간을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사후 심판을 무시하는 아베로에스의 이단적인 사상을 바로 잡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소피누스라고 하는 이상한 인물이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극단적인 이성주의자였습니다. 16세기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에 모순 하는 모든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이 사람을 존 오웬이 아주 탁월하게 비판을 합니다. 존 오웬이 쓴 유명한 책 중에서 라콤 교리문답에 대한 비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라콤이라는 사람이 소피누스주의를 받아들여서 그래서 거기에 합당하게 교리문답집을 만듭니다.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존 오웬의 전집에 나옵니다.
그 다음에 그 후에 17세기에 가서 카티시아니즘(Cartesianism)이 나옵니다. 카티시아니즘, 데카르트주의를 카티시아니즘이라고 합니다. 푸치우스가 그 당시에 학자들 중에서는 가톨릭에 대해서 가장 완벽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비판한 것입니다. 비판은 계몽주의가 일어났을 때 조나단 에드워즈가이러면서 하나님이 교회를 보존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보존하시는데 있어서 전도자, 설교자 이런 사람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탁월한 지성을 사용하셔서 사단을 대적하고 이단사상을 대적해서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는 이런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준비해 가지고 온 것이 24페이지까지였는데 한 13페이지정도까지 했습니다. 최선을 다 했는데 다 못했습니다. 다음에 와서 뒷부분을 하고 그 다음에 앞에 못하고 넘어간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는 실천적인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기회를 마련해서 그 앞부분하고 이 뒷부분을 마저 마무리를 하면 제가 쓴 책 중에서 5분의 1정도를 여러분에게 전수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이것 전혀 못 들은 사람 말고 들었던 사람만 왔으면 좋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새로 오지 말고 이 강의를 들은 사람들만 참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많이 갔지만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 목사님이 쓰신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그 책 말고 조직신학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중요도에 따라서 순서를 매기면서 책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답변) 사실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뒤편에 보면 비블리오그라피(bibliography)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 개혁주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책들을 순서대로 읽어 가면 되겠습니다. 또 지금 여기서 번역된 책들이 한정돼 있을 테니까 우선 번역된 것들을 읽고 그렇지 않으면 대작들을 읽어가는 데 헤르만 바빙크의 교의학 4권짜리를 영어로 읽는다든지 그런 식으로 해 나가면 되겠습니다. 그것을 읽는다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우리들이 아는 것이고 공부해야 될 양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지요.
(질문) 한국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굉장히 존경받던 목사님들이 넘어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현재 신학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어떻게 이다음에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게끔 할 수 있는지요?
(답변) 어저께 잠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왔나니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매 순간 현재적인 신앙의 연속이지 내가 이미 예전에 이렇게 주님을 만났고 이렇게 헌신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내가 그런 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새롭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은 감격을 현재적으로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거기에 있는 것이지 무슨 그런 것들을 내가 피해갈 수 있는 묘수가 나에게 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물론 바닥에 있으면서도 교만한 사람이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 사람이 높아져 보기 전까지는 자기에게 교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돈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자기가 돈을 사랑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고 그 일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질문) 목사님 공부하시고 책 읽는 것을 보면 너무 부족한 것 같은데 어떻게 그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요?
(답변) 덜 먹고, 덜 자고, 덜 놀고, 덜 쉬고. 그래서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것이 공부합니다. 휴식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 휴식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월요일마다 많은 학생을 가르치는데 교회에 와서 가르칩니다. 요새는 (1.23)대해서 공부를 하는데 열다섯 명 정도 공부하는 데 거기 들어오기 위해서 시험을 치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들어와서 열심히 공부하면 내가 사랑을 해 주고 열심히 공부를 안 하면 별로 사랑을 안 해줍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그 사람들이 똑같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책을 읽거나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비참해 지는 기분을 받는 것입니다. 철학을 이야기하면 철학을 아는 것이 없고 신학을 이야기하면 신학을 아는 것이 없고 역사를 이야기하면 역사를 아는 것이 없고 과학을 이야기하면 과학을 얘기하면 과학을 아는 것이 없고 그러니까 계속해서 ‘후’ 한숨을 쉬면서 빨리 빨리 따라갈 수 있는 비결이 뭐냐고 묻습니다. 소위 학문의 지름길이 있다는 모든 주장은 항상 거짓이었습니다. "데얼 이즈 노우 로얄 로드."(There is no royal road.) 그러니까 자기가 매일 매일 자기의 부족을 알고 열심히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질문) 신학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신학공부는 누가 해야 되냐 할 때 모든 사람이 해야 된다 그런데 또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18세기 이후이고 (1.26) 전의 얘기다 그러셨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무슨 뜻이냐 하면 신학공부는 모든 사람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기 위한 신학공부, 전문적인 복음사역자가 되기 위한 공부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을 체험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을 주신 사람들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문적인 복음 사역자가 되기 위한 공부는 특별히 예수님 만난 사람이 해야 하고, 그리고 일반적인 신학공부는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읽었던 ‘빛으로 산다는 것’ 그 책은 열린교회 모든 교인들이 공부하는 구역공부 교재였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목차를 놓고 그 책을 보지 않고 그 책 전체를 설명하며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500명쯤 있습니다. 얼마나 똑똑합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 예를 들자면 아베로에스의 지성단일성이 나오면 컴퓨터 찾아서 정리해 가지고 와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똑똑하지요, 예수님도 만났지요, 영혼도 사랑하지요, 그 사람은 세상의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 중 한 사람이 교리반에 들어와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데 너무 좋은 구절이 나오면 내가 라틴어로 읽고 한글로 번역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문이 너무 멋있더랍니다. 그러니까 이 자매가 혼자 라틴어를 공부한 것입니다. 혼자서 히브리어, 헬라어 공부하는 사람들 서울에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한테 설교할 때 딴 소리 해보십시오. 그러면 목사님 체면이 완전히 떨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 위해서 목숨도 버리겠다면서요? 그러면 덜 자야지요, 덜 쉬고 덜 놀아야합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도 라틴어 단어 외우고 희랍어 단어 외워야 합니다. 언제 지금 그 시간에 친구들하고 노닥거리고 그럴 시간이 있습니까? 내가 신학교 다닐 때는 10미터 이상은 다 뛰어다녔습니다. 걸어 다닐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덜 자야 합니다. 새벽기도도 안 나오고 한없이 잠자고 그러면 안 됩니다. 내 나이되면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몸이 반란을 합니다. 그러니까 때가 낮일 때 그때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책을 읽지 못하면 내가 소개해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다가 거기 엎드려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취미를 위해서도 그렇게 열심히 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내 친구 하나는 한문학과를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너 왜 그랬느냐고 했더니 무협지를 원전으로 읽고 싶어서 그랬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협지를 원전으로 읽겠다는데 여러분은 왜 히브리어하고 헬라어 열심히 안 합니까? 그 사람이 무협지를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이 성경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일본어를 스스로 배웁니다. 일본어 만화 보려고. 일본 가정주부들이 계속해서 한국어를 배웁니다. 한국 드라마 보려고. 정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드라마를 여러분이 성경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창피하지 않습니까?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라는 사람 아십니까? 경영학의 대부, 빌 하이벨스(Bill Hybels)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 모르시면 인터넷에 들어가서 피터 드러커를 쳐 보십시오. 그 사람이 존경했던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슈한 키에르케고르((Soeren Kierkegaard))입니다. 그 사람을 너무 존경했기 때문에 그 사람 원전을 읽으려고 나이 들어서 덴마크어를 공부했답니다. (1.34) 원전을 읽었습니다. 그 나이에. 피터 드러커는 슈한 키에르케고르를 여러분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한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그 사랑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명심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평범한 삶을 살면서 탁월한 목회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탐욕입니다. 그러니까 탁월한 신학자가 되고 싶으면 탁월한 실천을 하려고 몸부림 쳐야 합니다. 최소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 우리에게 더 열심히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달라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