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 신학의 진수 2강
(제 2강) 존 오웬의 성화의 신학
그래서 이 존 오웬의 책 중에서 백미를 꼽으라면 저는 1권, 6권, 7권을 꼽고 싶어요. 물론 다른 책들도 그중에서 무엇을 뽑는다는 것 자체가 오웬 목사님께는 죄송해요. 그래도 꼽는다면 1권에서는 기독론을 다루고 있어요. 너무 재미있는 것은 이 기독론 속에서 창조론을 다뤄요. 이게 오웬의 기독론 중심적인 신학을 보여주는 것이죠. 굉장합니다. 아주 웅장한 그런 신학을 보여줘요. 그리고 6권과 7권 전체가 은혜의 통치, 죄와의 갈등과 같은 성화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거든요. 4권의 책을 모아서 6권을 만들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On Indwelling Sin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라는 제목이에요. 그 당시에는 제목이 되게 길었어요. 그래서 다 못 외워요. 한 서너 줄 되요. 그런데 이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에 관하여’ 라는 책이고 두 번째 책이 뭐냐 하면 Temptation ‘유혹에 관하여’ 라는 책이에요. 여기에서도 굉장한 논리를 펼치죠.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제가 말씀드린 Mortification 이라는 책이에요. 그리고 네 번째에 괄목할만한 글이 실려 있는데 시편 130편의 주해에요. 엄밀하게 말하면 시편 130편은 이렇게 시작되거든요. ‘내가 깊은데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나이다.’ 기억나시죠? 그리고 ‘사유하심이 주께 있사오니 이는 당신의 자비를 알게 하려함이라.’ 이렇게 나오는 구절이에요. 1절부터 6절까지를 약 350p 정도로 다루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제 4절만 250p를 다룹니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사오니’ 그 부분을 약 250p 정도 다루어요. 그런데 최고의 명품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니까 존 오웬의 성화에 관한 글이나 설교를 딱 읽고 나면 다른 성화에 관한 설교는 유치해서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좋아요. 이해가 갈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그 지식의 토양 위에서 주님을 깊이 만난 것이에요. 주님을 너무 너무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강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는 은혜의 살아있는 감동이 지성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 지성 속에서 모든 지성이 일깨어 일어나면서 도대체 자기를 만나주신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서술해나가는 것이에요. 굉장하고 어마 어마해요.
그런데 이제 성경을 내가 언제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 해줄 텐데 영국에 갔을 때 세미나를 한번 했는데 목사들이 굉장히 흥미롭게 생각했어요. ‘영원히 설교준비 안하는 길’ 이게 설교제목이었어요. 감탄을 하네요. 그런 방법이 있냐고요? 있어요. 그런 길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 사람이 이렇게 있잖아요? 이게 해석자라는 것이에요. 이 사람이 성경을 이렇게 대한다고요. 그것은 대상이 되죠. 이것은 주최가 되고요. 이렇게 대한단 말이에요. 그다음에 이것들을 해석하는 작업을 할 것 아니에요. 해석의 결과를 이렇게 내놓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대상만이 아니라 해석자에요. 사실 어떻게 보면 이 해석자가 인식하는 주체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위치를 차지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예를 들자면 이 사람이 본래적으로 속에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이 해석은 현저히 달라지는 것이죠. 물론 이 사람이 공산주의자라고해서 책이 돌멩이로 보이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같은 책이나 같은 내용이라도 이 사람 속에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은 현저하게 달라지는 것이에요. 사물을 보는 깊이나 이런 것들이 틀려져요. 총신을 이렇게 산책하면 우리는 그저 공부하다가 덜렁덜렁 쉬는 시간에 바람을 쐬고 ‘야 좋다.’ 그러고 오지만 지질학자가 산책을 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생각이 많이 달라지겠지요. 식물학자가 산책을 했다면 그 다음에 그림을 그리는 서양화가가 산책을 했다면 달라지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이 사람이 이것을 가리켜서 해석학에서 전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이 해석하는 이 사람 속에 무엇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서 이게 성경일 경우에는 이 성경의 빛이 얼마나 여기에 역사하느냐가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거의 지식이 없다고 그러면 이상하지만 아까 이야기한 것과 같은 이러한 신학의 기본을 이루는 지식이 거의 없는…….
그러니까 전제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현저하게 틀려지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잖아요? 예전에는 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 그것을 읽지요. 그런데 신학공부를 하게 되면 여기에 소위 이야기하는 Theological mind가 생겨나는데 이 Theological mind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무엇이라고 딱 잘라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8시간씩 3년 정도 책을 읽어야지만 Theological mind 가 생기는 것이에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은 Legal mind 라고 그래요. 법적 사고력이에요. 이것이 생기는 것이 8시간씩 3년 정도를 법학 서적을 읽을 때 Legal mind 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에요. 경제학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고요. 그러면 이런 Theological mind가 생긴 상태에서 성경을 읽는 것과 이런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읽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나잖아요? 그러니까 존 오웬 같은 경우도 이러한 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성경 속에서 이러한 지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발견할 수 없는 심오한 얼개들을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집어넣는 다기 보다는 발견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것들을 세우는 것이에요. 장엄하게 세우는 것이에요. 그분의 설교들의 원문들이 지금 많이 남아있는데 설교 길이로 볼 때 그저 빨리 설교를 해도 두 시간 반 정도는 했겠다. 는 정도의 길이에요. 세 시간 정도를 해야 할 정도의 설교의 분량들을 토해놓았던 것이에요. 그러면 이 사람도 그런 속에서 이것을 써내려갔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이 사람이 쓴 6권 7권 중에서 성화에 관한 것과 시편 130편은 굉장한 책입니다. 이것은 정말 감동의 도가니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한번 읽어보세요. 여러분 그래도 영어시험을 보고 들어왔는데 혀를 깨물고 바짝 덤벼들어서 한 7,8권 읽어내면 어느 정도 읽어가잖아요. 그러니까 공부를 해야 해요. 어쨌든 오웬의 책이 어려운 것이 분명한 것은 우리 교회에 영국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주었더니 못 읽더라고요. 우리로 말하자면 월인천강지곡이나 용비어천가 같은 것 하나 준 것 같지요. 그런데 우리는 읽어요. 왜냐하면 영어가 그러려니 하고 읽는데 그 사람은 우리 현대영어를 많이 하니까 못 읽어요. 그런데 어쨌든 시편 130편도 굉장해요. 이 4권이 6권의 내용이에요. 하나하나에 4권의 책을 집어넣어서 하나의 Volume으로 통합을 한 것이에요. 그중에서 죄에 관한 것 중에서 Mortification 이 주는 충격은 굉장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죄에 대한 총체적인 서술들을 해내는데 있어서는 첫 번째 나오는 ‘On Indwelling Sin’ 이라는 책이에요. Indwell 이 내주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성령에 대해서 쓸 때는 ‘내주’ 라고 하고 죄에 대해서는 ‘내재’ 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써내려갑니다. 이것은 제가 여태까지 신학을 공부하면서 만난 죄에 관한 최고의 책이에요. 말하자면 죄의 관한 Bible에요. 대단한 책입니다. 이 Indwelling Sin 은 아직 설교를 못했는데 Mortification은 설교를 했는데 25번을 설교했는데 1/4를 끝냈어요. Indwelling Sin 을 설교해보겠다고 쭉 정돈을 해서 내 나름대로 얼개를 세워보니까 100회는 설교를 해야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정말 너무 안타깝지요. 설교할 수 있는 날은 한정되어있고 일주일에 한번밖에 못하잖아요. 물론 오후예배도 하지만 또 오후예배는 그렇게 길게 못하니까 너무 안타깝지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해봐요. 사람이 노래도 잘하고 작곡도 잘하고 춤도 잘 추면 그것은 자기 것 가지고 하면 되요. 그런데 노래 잘하는 사람이 다 작곡도 잘하고 춤 잘 추는 사람이 노래를 다 잘합니까? 그러면 오웬의 반주에 맞추어서 춤을 추면 어떨까? 이런 것을 잘 소화해서 자기가 이해를 잘해서 풀어내면 되거든요. 그러면 그게 오웬의 복사판이 되느냐하면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서 토해져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창조의 아버지는 모방이에요. 모방을 통해서 창조가 나오는 것이에요.
자 그런데 이 Indwelling Sin 의 내용이 목차만 대충 정리를 해도 세세하게 정리하면 A4용지로 5장정도 나오는 목차에요. 너무 방대한 분량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내가 하나, 하나 해설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요. 그러면 여기에서 사회자가 나보고 9시 반까지 하라고 그러는데 어쨌든 그런데 나야 지금이라도 그만 하라고 그러면 좋지 나야 바쁘고 피곤한데 그런데 그래도 무엇을 알고가야하지 않아요?
그래서 설명을 하자면 모든 것들을 다 접고 도대체 존 오웬이 있어서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이 죄에 대해서 이 죄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죠. 사람들은 이런 논의 자체가 형이상학적인 논의에요. 그러면 ‘죄’ 그러면 우리들이 조직신학에서 배운 것이 뭐에요? 하나님께 불순종하거나 거역이지요. 거역하거나 순종하기에 모자라는 것이에요. 이게 죄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죄가 아니에요. 이것은 악이지요.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죠. 내적으로도 행위고 외적으로 행위잖아요. 밖으로 드러난 것이잖아요. 여기서 존 오웬이 Indwelling Sin 이라고 이야기 할 때 이 Sin은 영어에서 Sin과 Crime 으로 나눠지는 것이죠. 도스트옙스키의 죄와 벌 그럴 때 영어로 뭐라고 번역했어요? Sin and Punishment 가 아니라 Crime and Punishment 에요. 여기서 이런 구별이 우리나라 말에는 없어요. 거기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이에요. 자꾸 생각의 제한을 받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이 Sin은 뭐냐 하면 Crime은 밖으로 표출된 죄에요. 죄가 밖으로 표출된 악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완전히 그러면 훔치고, 누굴 죽이고, 때리고 이런 것만 가리키느냐? 그것은 아니에요. 마음속으로 누구를 미워하는 것도 Crime 에 속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것이 밖으로 완전히 Expose 되었던지 아니면 내면에 남아있든지 어쨌든 이것은 죄가 아니라 악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앙고백에서 인간의 죄가 무엇입니까? 그게 뭐냐 하면 그것은 행동의 죄와 미움, 살인, 시기, 정욕……. 이러한 내면의 죄입니다. 이것들이 우리들이 자범죄, 고범죄, 혹은 실행죄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여기에 속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Indwelling Sin Believers 라고 할 때에 여기에서 Indwelling 을 붙인 이유가 이런 혼선을 피하기 위함이에요. Indwelling Sin, Mortification 그 다음에 Temptation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죄 이것들이 다 Crime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Sin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이 Sin은 Crime의 뿌리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Crime 때문에 Sin이 생긴다기보다는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논리적으로 먼저는 이 뿌리자체가 Sin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히듯이 이렇게 Crime이 생겨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전적 타락의 설명이잖아요.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에요.
그러면 문제는 뭐냐 하면 이 Sin이라고 그럴 때 이것의 정체가 무엇이냐? 이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이 Sin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할 때 이것들의 설명부터 우리들이 해야 하는 것이죠. ‘도대체 죄의 정체가 무엇이냐?’ 이런 것들에 대한 담론들이 사라진 것이에요. 성화는 본성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그랬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본성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먼저 정확하게 말을 하고 이야기를 해야지요?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그런 것들이 다 제외되었어요.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식들을 칼빈은 이런 논의들을 절제합니다. 절제해야했던 시대적인 배경이 있어요. 그런데 정통주의자들이 그 논의들을 다시 살려냅니다. 그것들을 우리들은 학교에서 배울 때 그게 이성주의로 넘어가는 나쁜 조짐이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리처드 먼로 교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는 이런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을 통해서 이러한 태제들이 잘못된 테제들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150년 동안 학계를 지배했던 슈라이어 마흐의 테제에요. 그래서 지금 리처드 먼로를 비롯해서 하이거고버만이라든지 아니면 칼 트루먼이라든지 구주리안이라든지 등등의 이런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기존의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던 개혁파 정통주의의 대한 연구들을 다시 해내고 있는 것이에요. 이것은 또 다른 영역이에요. 그런데 존 오웬이 이런 것의 연결선상에 있으니까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한꺼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러면서 나가야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슈라이어 마흐 이후로 이런 태제들이 전체적으로 지배해오고 있는 속에서 이제 먼로교수가 탁월하게 연구를 해내고 있는 것이죠. 그분이 쓴 4권의 책,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파 교리학이라는 Free 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라는 책이에요. 4권으로 되어있는 책이에요. 굉장한 책입니다. 이는 5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책이에요. 이분이 내놓는 테제가 제가 보기에는 150년 안에는 절대로 안 깨질 정도의 테제에요. 굉장한 테제입니다. 이것은 여기에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요. 그냥 넘어가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이런 것들을 아주 정교하게 이렇게 논의해나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 칼빈 이후에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환경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가톨릭 안에서 거물급 신학자들이 나와서 정치적으로 개신교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신학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거기에 대응해야 될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날카로워져야 될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게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종교개혁 2세대까지 우리가 완전한 조직신학을 갖지 못해요. 츠빙글리의 참된 종교와 거짓종교라는 조직신학서도 있었고 루터도 쓰고 멜랑이톤도 썼지만 총체적이지 못해요. 총체적이지 못한 속에서 칼빈이 그나마 기독교강요를 쓰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번에 문병호 교수님이 초판을 내잖아요. 이것은 굉장한 기념비적인 작품이에요. 그것도 학생들이 나한테 과제물을 내주는 것이 내 머리에서 나왔다고 그러는데……. 보세요. 나야 학생들을 많이 읽히라고 그랬지 뭐 내가 뭐라고 그랬어요? 나를 원망하지 말아요. 자, 그래서 이렇게 되어서 써내려가잖아요?
그런데 이후의 시대가 흐르면서 이 사람들은 그러면 칭의론이나 기독론, 구원론, 예정론,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개혁신학 1세대 2세대들이 쓴 것을 하고 나머지는 가톨릭 것을 참고하자는 것은 굉장히 웃기잖아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우리도 우리의 유산을 만들자! 조직신학 전체에 대한 서술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것들이 생겨난 것이에요. 그런 속에서 이런 토대를 가지고 아까 이야기한 것과 같은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존 오웬은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Sin 하고 Crime의 구별을 이렇게 된 것이다. 죄는 뭐냐? 그냥 죄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그 사람의 수준에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면 죄의 정체가 무엇이냐?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받은 충격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에요. 죄는 죄이다. 어떤 것? 나쁜 것이다. 그럼 뭐야? 성령에 대해서 연구해도 다 못하는데 언제 죄에 대해서 연구할 틈이 있느냐? 그랬어요.
그러면서 질문들이 나눠지게 되는 것이에요. 제가 구분을 한 것이에요. 첫 번째 실체적인 의미에서 죄가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작용적인 면에서 이 Sin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모두 본질을 묻는 질문이에요. 본질을 묻는데 실체가 무엇이냐? 작용적인 면에 있어서 그러면 이것은 뭐냐? 그러면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목적적인 면에서 이 죄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그러는 것이냐? 도대체 무엇이냐? 그러면 실체적인 면에 있어서의 본질은 뭐냐 하면 이게 존재론적으로 이 Sin이 무엇이겠어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존재론적으로 죄가 무엇이겠어요?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캔디처럼 이렇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존재론적으로 무엇이냐는 것이에요. 고체? 액체? 그러면 그게 기체에요? 그럼 무엇이에요? 없는 것이에요? 죄가 있어요? 없어요? 그럼 본질이 뭐냐는 것이에요. 성향 내지는 경향성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Disposition or Tendency 그럼 작용적으로는 뭐에요? 그게 뭐냐 하면 근본적으로 이 죄는 Enmity to God 이에요. 에크스라 에이스 데온=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표현이잖아요. 에이스는 into에요. 그럼 하나님이 여기에 있는데 ‘에크스라’는 적의를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 원수 되는 것이에요. 파고들어가는 것이에요. 이게 죄의 작용적 본질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로 역사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첫째는 지금은 안 쓰는 단어인데 에버세이션이에요. Aversion이라고도 하는데 뭐냐 하면 반감이에요. 그리고 두 번째는 Opposition 맞서는 것이에요. 대적이라고도 그래요. 이게 죄의 작용적 본질이에요. 목적적은 뭐냐 하면 허무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에요.
쉽게 이야기하면 창조의 목적이 있잖아요? 창조의 목적이라는 것도 아주 큰 개념이에요. 이 창조의 목적을 개혁신학자들 모두 다 이 창조의 목적을 이야기해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조에 나오잖아요. 인간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그게 결국은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은 창조의 목적과 연결이 되는 것이죠. 세계 전체 창조의 목적과 인간의 목적이 별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창조 전체의 목적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라고 할 때는 뭐냐 하면 자기혼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끌어안고 만물도 거기에 이바지하게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을 인간과의 관계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원뿔형으로 구조를 본다면 이렇게 원뿔형으로 되어 있다고 보면 되요. 그림자는 이렇게 되어있고……. 그래서 이렇게 돼서 이렇게 된 토대위에 이 위에 인간이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죠. 나머지 것들은 이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하나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 창조의 목적이에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에 의도하셨던 그 상태가 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을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답게 설명해서 위대한 철학적 신학의 체계를 완성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란 말이에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공부할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 우리 교수님들 중에 조나단 에드워즈를 공부하고 오신 분이 계시잖아요.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존 오웬의 신학처럼 이렇게 통째로 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시들이 있어요. 그런 가시들을 발라내고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개혁파 신학적인 요소들을 잘 해서 받아들여야하는데 아주 탁월한 사람이에요. 평생 제가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에요. 덕분에 조나단 에드워즈에 깊이 심취하면서 그 사람이 쓴 책이 예일대 출판사에서 25권까지 나왔거든요. 예일대에 연락해보니까 28권까지 나온다고 그래요. 제가 25권까지 구해서 보았는데 어마어마한 책입니다. 한때는 너무너무 심취해서 제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책만 단행본으로 거의 1500권내지 2500권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20세기에 쓰인 박사논문만 160권정도 되요. 그런데 어마어마합니다. 굉장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한번 보면 다른 많은 신학자들이 자잘하게 느껴져요. 이 사람은 정말 영광의 신학자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온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러면서도 부흥의 한복판을 살면서도 그 사람은 이런 은사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이 에드워즈에게서 자신들의 뿌리를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어쨌든 그 창조의 목적을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너무 힘들어요. 우리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오면 그 창조의 목적이 있을 것이에요. 한 90분정도 강의한 것이에요.
그것을 눈여겨보고 이 창조의 목적을 공부하고나면 이것을 공부안하고 다른 것을 공부하는 것 자체가 다 허무한 것이구나!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그것을 하고 있나? 무엇을 위해서 하고 있나? 하는 이 목적자체야. 죄는 이것을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이론도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에게 빚진 것이 굉장히 크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있으면 인간이 이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잖아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인간과 함께 이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주셨던 모든 이 세계 창조의 잠재태적인 아름다움. 아마 지금 3학년들은 제 강의를 들었을 것이에요. 시간과 영원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이것은 제가 섬김의 날 때 와서 했는데 그런 하나님의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그 아름답게 창조하셨다는 이야기가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이죠. 윤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이고 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름다움이에요.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에요. 그 아름다운 기준이 잘못되니까 아름다운데도 추한 것이 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선과 미가 합치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이 아름다움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현실태 적인 아름다움과 잠재태적인 아름다움으로 나누어서 이것들이 모두 창조된 것이에요.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잠재된 것과 현실적인 것을 구분 없이 시간을 초월하시니까 한꺼번에 보실 수 있는 것이죠. 그런 현실적인 것들은 현실적으로 나타났고 잠재된 것들은 인간의 노동을 보탬으로 이것이 시간 속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 아름다움이 발현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을 하나님이 영원의 측면에서도 보고 시간안의 측면에서도 보면서 그 아름다워 하시고 기뻐하시고 마치 당신 자신을 세계 속에 투영하여 보시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자기 관조 속에서 이 세계는 아름다운 목적을 완성하는 것이에요. 이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우주관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에요. 굉장히 광대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역사의 자료들을 찾아보면 얼마나 놀라우냐하면 터튤리안 시대면 2세기잖아요? 2세기 때에 사람들이 예수를 처음 믿고 교회에 왔을 때 무엇부터 가르쳤느냐하면 cosmology부터 가르쳤어요. 우주론부터 가르쳤다고요.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가르쳤던 것이에요. 그 우주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아까 이야기한 이중지식에서 ‘너희가 희미하게 알던 하나님이 바로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 구속 주를 만난 사람들에게 다시 올라가서 창조주를 가르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모든 세계와 자연과 모든 학문과 이 모든 인간의 이 지식들이 하나님을 정점으로 해서 펼쳐지는 우산과 같은 모습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에요. 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아주 분명해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지식들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에요. 너무나 명료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산과 같은 꼴이 되는 것이죠. 여기서 하나님을 정점으로 해서 내려오는 우산과 같은 이 세계와 자연과 인간과 역사를 포괄하는 모든 지식들은 전공자가 다른 것 아니에요?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 대장간하는 사람 다 있어도 이 모든 것들을 수렴해서 마지막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이 목회사역이 고귀한 이유는 뭐냐 하면 인간들은 죽어도 이것을 알 수가 없어요. 눈이 어두워서 알 수 없는 것이에요. 세계를 봐도 이 세계만으로 알 수가 없어요. 이 계시는 오염되었기 때문이에요. 객관적인 계시의 매체도 오염되었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인 주체도 이미 죄의 영향으로 오염되어버린 것이죠. 그래서 영혼에는 어두움이 들어오고 그리고 지성에는 당연히 눈멂이 도입되게 되었던 것이죠. 의지는 굽게 되었고 정서는 불건전한 감정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에요. 그런 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주체조차도 그렇게 망가졌기 때문에 절대로 이 자연의 계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먼저 자신의 죄인 됨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만난 후에 그 다음에 다시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하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이렇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을 모르는 인간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목회사역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교회만 키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바벨론과 예루살렘의 특징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이에요. 바벨론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없는 나라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크게, 많이, 더 강하게 그게 비전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처럼 되려는 나라에요. 그러나 예루살렘의 가치는 그런데 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있는 것이에요. 조그마해도 참다운 거룩의 빛이 비치면 알 수 있는 것이죠. 어두운 밤바다에 항구로 배가 들어갈 때 조명탄을 수천 개를 쏴서 바닷가의 온 돌멩이까지 보이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에요. 등대 하나만 반짝거리고 비치면 폭풍을 피해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에요?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이에요. 무엇이 진리냐를 가지고 고민하고 가르쳐야지 영혼이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는데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외계에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데 그게 아니라 뭐냐 하면 자아를 실현시켜준다고 꼬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한 번도 이런 죄가 그들의 신학이나 설교에서 문제가 안 되는 것이에요.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에요. 그게 그리스도인이냐는 것이에요. 항상 교회에서의 문제는 ‘기독교인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관한 관점의 차이가 교회를 갈라놓았던 것이에요. 그 문제에요. 그리고는 성공하겠다고 그러는데 성공하는 것이 무엇이 좋아요? 교인이 많아 봐요. 코피나 나지요. 뭐가 그렇게 좋아요? 세끼를 먹지 네 끼를 먹어요? 뭐가 그렇게 좋아요?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죄는 뭐냐 하면 이것을 빗나가게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런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죄의 상응하는 하나님의 조치가 무엇이냐 하면 ‘Grace’ 하나님의 은혜란 말이에요. 똑같이 이런 문제가 나오겠지요? 은혜가 무엇이에요? ‘어이구, 받으면 좋은 것 은혜지요.’ ‘어휴 요새 성경도 안 읽고 채플시간도 안 나오는데 은혜가 떨어졌구나!’ 그 은혜는 은혜에요. 이 은혜는 결국은 실체에 있어서는 똑같이 성향이고 경향이에요. 작용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에요. 그리고 반감과 대적이 아니라 좋아함과 합치함으로……. 그러니까 정반대로 역사하는 것이죠. 목적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에요.
잘 들으세요. 내가 존 오웬을 읽으면서 받았던 충격이 똑같이 여러분들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냥 인간이 되는 것이에요. 존 오웬의 의하면 그냥 인간이 되는 것이에요. 인간의 목적은 인간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게 무슨 이야기냐 이 진술이 아주 하찮아 보이지만 이게 굉장한 사상을 뒤에 깔고 있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개는 개 이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해요. ‘개만도 못한 놈’ 그럴 때 그것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 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간을 제외한 모든 사물들은 자기 이하가 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자기 이상이 되는 것은 불가능해요. 인간도 인간 이상이 되는 것은 불가능해요. 인간 위에는 하나님 한분만이 계실뿐이에요. 인간 이상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런데 놀랍게 오직 피조물 중에서 인간만이 인간 이하가 될 수 있고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에요. 사실은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역설적인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것이에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이게 해명되지 않는 인간의 존재, 이것을 이 존 오웬이 6권 7권을 통해서 다 해부하는 것이에요. 다 해부하는데 오늘날과 같이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이것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심리학은 18세기 이후에 생겨나잖아요.
그런데 결국은 이 심리학이 생겨나게 된 것도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이 절대기준인 이성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했던 ‘나’라는 것이 여기에 중심이 되요. 그리고 그 다음에 신까지도 이 패러다임에 놓아요. 그래놓고 이렇게 보는 것이에요. 중요한 문제는 뭐냐 하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에요. 왜 그러느냐하면 이런 것들이 다 상대적이니까요. 이런 것들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아예 Post Modernism으로 넘어가요. Post Modernism은 ‘네가 무엇인데 거기 있느냐?’ 이 이야기에요. 그러면 거기에 누가 있는 것이에요? 아무도 없고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나는 꼭 필요한 존재냐?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실존주의 아니에요? 그래서 샤르트르 같은 사람은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자기를 잉여의 존재라고 부르잖아요. 쓸데없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뭐냐 하면 이제는 점점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에요. 인간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관계에 의해서 자기가 누구인지 파악될 수 있는 존재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정미함으로써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이런 관계를 떠나서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끔 하시지를 않았어요. 그것은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결국은 인간 자신에 대한 앎이라는 것은 영혼에 대한 지식으로 들어가는데 이 영혼은 하나님을 닮았어요. 하나님을 가장 닮은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가장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같은 일종의 단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이것은 파악이 안 되는 것이에요. 영혼이 병들었다거나 건강한 것은 파악이 되요. 그런데 이 영혼이 누구인지는 파악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알지만 하나님이 무엇이냐는 파악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두 번째 질문은 하지말자고 그런 것이에요. 칼빈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서도 다 이야기를 안 하지요. 이런 존재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설명해주는 것이 이것인데 영혼 자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이 죄는 결국 영혼의 성향, 경향성이라고 보는 것이고 작용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를 가지고 반감과 대적을 하는 것이에요. 목적은 뭐냐 하면 허무를 향해 가게 하는 것이에요. 허무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정하신 유일한 창조의 목적으로 가는데 그것으로 안가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고 보는 것이죠. 이것들은 철저하게 개혁주의적인 인간관, 종교개혁자들이 세워놓은 전적 타락의 인간관에 기초해서 말하자면 전개된 이론이에요. 그게 뭐에요? 인간이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첫 번째 인간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되잖아요. 그게 뭐에요? 죄책과 오염의 문제가 생겨나잖아요. 이 죄책은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이에요. 이것은 예수를 믿고 칭의에 의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오염(Corruption)은 계속해서 남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에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 선천성과 부패성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에요. 이 부패성이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가져오는 것이에요. 전적 타락이이에요. 이게 전적 무능, 전적 부패, 그런 것들을 도입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해서 결국은 오염의 문제는 이것은 칭의에 의해서 해결이 안 돼요. 그런데 이제 이 오염의 문제는 칭의, 즉 칭의는 논리적으로 곧 중생과 함께 일어나요. 중생은 회심과 함께 일어나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이것이 오염에 대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만 면하고 오염은 그래도 남았느냐하면 그것은 아니에요. 여기서 굉장히 중대한 일이 영혼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에요. 이게 이야기하는 ‘Regeneration’ 중생의 교리가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지금 문제는 뭐냐 하면 중생을 통해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인간 안에 여기에 로마서에서 뭐라고 표하지요?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그렇잖아요. 그러면 이 법이 뭐냐 하면 이 법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요. 규범적 의미에서의 법과 그리고 실효적 힘으로써의 법이에요. 지금 여기에서는 실효를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참새가 방앗간 곁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지.’ 그것은 형법이나 민법이나 형사소송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참새 안에 있는 낟알가루를 좋아하는 성향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렇지요? ‘그 학생이 커닝이라도 하겠지! 그냥 백지 내는 법이 없지?’ 그것은 마음속에 있는 경향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진자 부끄럽게 생각해야 해요. 이것은 누군가 피를 토하고 교문에서 죽어야 될 것이에요. 어떻게 학교 안에서 그런 커닝이 일어나느냐 이거에요. 그 이야기를 하면 통절한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학생들이 웃을 때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칼날 같은 양심을 걸어야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하느냐 이거에요. 우리 때는 말이지 커닝퇴치 위원회가 생겨서 커닝하다 걸리면 4대 일간지에 내자고 그랬어요. 결국 그 운동을 주동하던 학생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요? 4명이 뒷산에 올라가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았어요. 그리고 학생들은 자퇴서를 내고 나가고 끝냈어요. 그리고 다시 원위치 되어서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에요. 나는 그런 사람들은 학교에 고발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부끄럽게 생각해야 해요. 육군사관학교에서도 그렇게 안 해요. 그게 뭐죠? 창궐하게 역사하고 있는 죄의 성향이에요. 그게 너무나 보편화되어서 사람들의 양심을 병들게 만들어서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것이란 말이에요.
이런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할 때 이 법은 실효적인 힘이에요. 이게 꺾을 수 없는 자기 안에 있는 실효적인 힘인데 힘의 본질이 무엇이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이라는 것이에요. 마치 실험 속에서 금방 태어난 고양이새끼하고 금방 태어난 쥐새끼하고 같은 유리관 속에 넣어서 길렀어요. 나중에 어떻게 되었겠어요? 결국은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천적이에요. 경험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에요. 아예 유전자 자체를 쥐를 죽이고자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에요. 그러면 인간이 태어날 때 그런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그런 유전자를 가지고……. 그런데 예수님이 어린아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이것을 가지고는 태어나는데 이게 잠재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에요. 잠재적으로 태어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게 현실태로 발현이 되는 것이에요. 이게 아직 발현이 덜 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복음이 심겨지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주일하교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온 마음을 다 쏟아서 이 아이들이 내손을 떠나서는 절대 예수를 믿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가르쳐야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지금 어린아이들 교육을 그런 식으로 안한다는 것이에요. 그게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아이들이 이렇게 중생하고 회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거든요. 그러면 선택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이 진리의 말씀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전달해서 그 애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놓여나게 만들어야하는데 그것 없이 계속해서 기독교적인 분칠을 하는 것이에요. 어느 순간에는 마각을 드러내고 결국은 뛰쳐나가는 것이에요. 그런 어리석은 일들이 불을 보듯이 뻔히 보이는데 아직까지도 자라나는 세대들의 회심을 위해서 울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존 오웰의 생각에는 이런 생각이에요. 이 죄와 사망의 법이 있는데 중생하고 회심할 때 이것들이 중대한 손상을 입는다는 것이에요. 이게 깨뜨려져버린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림으로 보자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깨뜨려져버려서 파편으로 다 찌그러져버리는 것이에요. 여기에 강력한 새 법이 서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생명과 성령의 법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새 생명의 원리에요. 새 생명의 원리인데 이것은 성령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이에요. 원리 자체 안에서 성령의 역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자체가 성령의 내주하심이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여기서 이런 죄들이 흔적으로 남아있지요? 마치 다 망한 나라의 게릴라처럼 남아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기가 막히게 남겨두신 것이에요.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갈망과 그리고 신앙의 대의인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왜?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란 말이에요. 여기에서 이 새 생명의 원리가 세워지고 여기에서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이 은혜를 성경은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첫째가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은혜에요.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은혜가 무엇이냐 하면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호의,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고’ 할 때 그 은혜에요.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오심 자체를 은혜로 묘사해요. 세 번째 용도로 이 은혜가 사용된 것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이에요. 에드워즈는 이것을 성령 자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 안에 있는 은혜의 경험은,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고 은혜의 열매는 사랑이에요. 이것의 주인이 성령님이에요. 이 성령님이 새 생명의 원리를 주시고 심으시는데 이것은 파괴된 것이에요.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이죠. 이 원리를 따라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면서 끊임없는 계시의 빛 아래서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주님을 구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강한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거의 이 사람을 주장할 수 없을 만큼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야기하기를 죄가 너희를 주장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묘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확정된 승리의 싸움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런 인간 속에 아직까지도 타락한 본성이 남아있어서 항상 순종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하는데 안 그래요. 밖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표상들이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그리고 자기의 옛 본성대로 살고자하는데 그 성향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허무를 향해 치달으려는 것이에요. 왜 아무것도 없는데 이곳으로 치달아 가느냐? 간단해요. 자기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이에요. 목적은 없어요. 여러분 정욕이나 쾌락에 목적이 있습니까? 목적이 없어요. 그냥 내가 그게 좋으니까 하는 것이에요. 나의 유익을 위해서 좋으니까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뭐에요? 하나님도 필요 없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존 오웬이 이야기합니다. 신자가 죄를 짓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자, 이런 식으로 해서 이것들은 결국 파괴되지 않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죄가 있으면 여기에서 은혜도 주어질 것이 아니에요. 은혜도 주어진다고요.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작용을 하거든요. 작용을 할 때 이것들이 서로 상대방을 딛고 우위에 서려고 소위 이야기하는 Dominion을 다툰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죄와 사망의 법이 부서졌는데 죄가 Dominion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렇죠? Dominion을 가질 수 있지요. 왜냐하면 총체적인 토털 Government는 못 가져도 Dominion은 가질 수 있는 것이에요. 시청 앞 광장에서 데모대들이 나와서 화염병을 던지고 사람을 죽이고 공포탄을 쏘면 시청 앞 광장을 그들이 Dominion 한 것이에요. 경찰이 있어도 어찌할 수 없는 사태가 일시적으로 벌어진다는 것이에요. 그것을 다투는 것이에요. 이 다투는 것이 어떻게 해서 다투게 되고 어떻게 해서 우위가 바뀌게 되는지를 설명한 책이 내가 쓴 죄와 은혜의 지배 420쪽짜리 책이란 말이에요. 요것만 다룬 것이에요. 그것은 죄론 전체에서 한 파트에 불과한 것이에요. 만약 그런 식으로 쓴다고 하면 10,000p를 써도 존 오웬의 이것을 다 설명을 못해요. 생각을 해봐요. 10,000p 라고 그래야 25권밖에 안되는데 25권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요. 그렇게 써가지고는 택도 없지요. 6, 7권도 소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런 죄가 신자 안에 현실적으로 있다는 이야기에요. 있는 이것을 어떻게 다루면서 싸워야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후반부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에요. 이것도 일부만 나와 있고 전체적인 내용은 뒤편에 계속 나오는 이야기들이에요. 그래서 이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시간이 없어서 내가 다 전해주지 못하고 가지만 그러나 이 정도만 이야기하면 이 죄의 진지성과 심각성문제…….
마지막으로 도대체 아까 이야기할 때 가장 인간의 중요한 의무는 무엇이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의무는 인간이 되는 것이란 말이에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인간이 되는 것이에요. 무슨 인간이에요? True 인간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에는 처음부터 False 인간이에요. 그러면 신자는? 신자도 False 인간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비신자의 경우에는 Absolute False 에요. 절대적으로 잘못된 인간이고 그 다음에 신자는 상대적으로 잘못된 인간이에요. 그러면 상대적으로 잘못된 인간이라면 무슨 이야기죠? 저렇게 인간 속에 죄의 오염이 남아있어서 끊임없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가야하는 목적이 있는데 이 길에서 끊임없이 이탈하게 만든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에 이것이 인생의 본분인데 그 본분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되는 비결은 무엇이냐? True 인간이 되면, 참인간이 되면 되는데 그러면 참 인간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에요. 인간이 참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True Christian 이 되면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자가 되지 않고는 인간의 참된 것으로 돌아올 수 없어요. 못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웬 신학의 맥락에서 보면 다른 모든 개혁파 신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통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과 도덕의 고양을 통해서 인간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미친 환상이라고 보는 것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그렇게 걸어갈 수 없도록 숙명적론적으로 자기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향을 유전자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에요. 이 속에서 중대한 영혼의 변화,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 인간은 숙명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미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가다 죽는 것이란 말이에요.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이 세계 안에 전체적으로 편만한 배도의 현상이 기반을 무엇에다가 두고 있느냐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면 True Christian이 된다는 것이 결국은 무엇이냐? 이런 죄의 오염으로부터 끊임없이 제거되어 하나님을 향한 은혜로 온전히 될 때 그때에 인간은 상대적으로 온전한 인간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되어서 결국 여기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데 이게 잘 성화되면 비교적 흡사한 길을 가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이런 식으로 출렁거리게 되는 것이죠. 그런 것이죠. 이런 것들을 무엇이 결정하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 사람이 하는 모든 결정들이 우연히 아니라 사실은 그의 내면의 세계와 필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래요?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 이게 죄 가운데 나를 사로잡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게 헤르만 리들 보스나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이것을 회심 직전에 있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연인의 탄식으로 보거든요.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한결같이 전부 다 중생한 바울 자신의 고백이라고 보는 것이죠. 중생한 사람의 고백이라고 보는 것이죠. 성화의 도상에서 느끼는 깊은 좌절과 고통 속에서 경험하는 자신의 이 죄의 본질을 본 사람의 탄식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이러한 교리들이 이러한 신학의 체계들이 낯설어지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경건이 뿌리째 날아가 버린 것이에요. 공부를 해봐요.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 그 배경, 종교개혁의 후기 정통주의에 오면서 Low 오도독시로 넘어가고 청교도 운동들이 사라지고 다시 성공회로 다시 돌아가고 연합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규정 자체를 이 성경적인 기본적인 정의를 버렸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교회에 나오고 그냥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그게 그리스도인이지 무슨 본성의 변화고 영혼의 변화냐? 무슨 숙명 같은 것들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니까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도 요즘에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제임스 던이나 그리고 김세윤 교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논쟁들이 있잖아요? 유대교를 새롭게 해석했다는 샌더스로부터 시작해서 앤트라이트나 그리고 제임스 던으로 내려오는 이런 사람들이 전부 다 무엇을 포기하느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 의, 심지어는 칭의 교리 그 자체가 해괴망측한 것을 루터가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에요. 제임스 던은 그래도 좀 낫지만 그렇게 내려오면서 결국은 그러한 해괴한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으로부터 뛰쳐나온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신학적인 Device라고 보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되요?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필연적으로 죽으셔야할 이유가 현저하게 약화되는 것이죠. 최근에도 제임스 던 하고 존 파이퍼 목사하고 논쟁이 벌어진 것도 그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고전적으로 인간이 그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를 이루셨더니 믿을 때 하나님이 그 그리스도의 의를 사람에게 선물로 주심으로 구원을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보잖아요? 이런 것이 다 쓸데없는 교리라고 보는 것이에요. 믿을 때 바로 의롭게 된다고 보는 것이에요. 여전히 믿는 행위의 중요성과 말하자면 인본주의적인 주도권 즉 initiative가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인간에 대한 이런 규정들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규정들이 사라지고 나면서부터 무슨 문제가 일어나느냐하면 자유주의가 밀물처럼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리고 회개하여야할 필요, 기도해야할 필요, 이런 것들이 교회에서 싹도 없이 날아가 버린 것이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최근에 드린 예배 가운데 회개하라는 외침을 듣고 여러분이 울어본 적이 있어요? 여러분 말고 여러분 교인들이 그래본 적이 있느냐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런 것들은 경건의 비밀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다 싹도 없이 날아가 버린 것이에요. 왜? 이것은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에요. 너무 잔혹한 교리라고 보는 것이에요. 왜 존중받아야할, 만물을 판단할 중심에 있는 인간에게 이렇게 하위적인 위치를 부여하느냐는 항거란 말이에요. 그게 현대의 Post Modernism의 정신하고는 안 맞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교회에서 지각해요. 그러면 뭐냐 하면 성공하는 비결이 여기 있다고 보는 것이에요. 우리 교회에 와서 꿈의 날개를 달자는 것이에요. 이 교회가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이에요. 가고자하는 것이 결국 창조의 목적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간의 모든 것들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목적을 향해 가는 거냔 말입니다.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포기해야할 자아는 실현될 이상으로 등극하는 것이죠. 그게 뭐죠? 그게 결국 세속주의에요. 세속주의는 돈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세속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서 계셔야할 그 중심에 하나님을 치우고 사람을 놓는 것이에요. 그게 세속주의에요.
그런 상황에서 결국은 인간은 원래의 자기의 위치로 갈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갈 수 있는 방법은 뭐에요? 끊임없이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이 죄와 싸우는 것이에요. 이 길이 고달프지만 않은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큰 위로와 사랑, 그리고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 기쁨, 교제의 영광, 이런 것들이 매일 스며들어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죄와의 싸움 그 자체가 고달픈 수행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죄와의 피나는 싸움 그 속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를 느끼고 은혜를 간구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것들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시고 그 은혜가 부어질 때 인간의 심령 속에는 기쁨과 소망과 사랑이 막 넘쳐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길을 걸어가다가 마지막까지 완성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완성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단번에 완전하게 하셔서 우리를 중간상태에 들어가게 하시고 부활의 날에 Glorification 됨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이 영광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 Glorification 된 그 모습이 True 인간으로 돌아간 모습이에요. True Man이에요. 사람이 되어라. 사람이 되게 하려고 목회를 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럼 목회자는 제일 먼저 자신이 그렇게 되고자하는 절실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게 소명의 핵심이에요. 자기가 그렇게 참된 인간이 되고자하고 보니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여기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가슴이 저려서 도저히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이바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이 어둠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전해주지 않고는 내가 잘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결론을 내려서 자기도 저항할 수 없는 강제력에 이끌려서 들어서는 게 이게 소명이라는 것이에요. 큰일 나는 것이에요. 여기서 정신없이 후딱후딱 하고 그냥 바람 부는 대로 가고 목회나 배운다고 그러고 여기저기 따라다니면 충분히 삼류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러스하긴 하지만 이런 구도 속에서 존 오웬이 6권과 7권속에서 죄와의 문제를 쫙 다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내가 내일이라도 출판사에 잔고가 없지 않는 한 교회에서 사서 보내줄게요. 그러면 나누어 갖고 그리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거에요. 뭐냐 하면 열린 교회 Site로 들어오면 시편 130편도 강의가 되어있어요. 그 다음에 죄와 은혜의 지배도 18번 설교가 되어있어요. 그렇게 들어와서 여러분들이 공부를 한다면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을 때에 이해가 훨씬 빨라질 거예요. 이 설명만 듣고 내일 이 책을 펼치면 훨씬 쉽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에요.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이런 책들, 존 오웬의 책 같은 것들을 참고용으로 읽는 사람들을 나는 제일 경멸해요. 그래서 누가 나보고 그래요. ‘목사님 청교도 좋아하시죠?’ ‘얘기하지 마라. 나는 청교도는 좋아하지만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나한테 이야기하지 마라.’ ‘왜 그러세요?’ 그게 뭐죠? 그게 뭐냐 하면 겉핥기식으로 자료 찾으러 청교도에게로 가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 아예 출발을 하지 마세요.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문을 열지 않아요. 그래서 존 오웬의 책을 펼치면서 저녁때 쓸 설교를 찾아봐야 헛수고니까 아예 처음부터 하지 마세요. 누가 얘기를 하더라고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는 요약을 할 수 없다고 그래요. 바로 그거에요. 그게 바로 청교도의 설교 방식이다. 요약 못한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요약해서 설교를 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만용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먼저 깊이 변화되는 길을 가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그만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