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공부 방법론(6)
녹취자 : 김미현, 이경순
지난 시간에 했던 그 뒤를 이어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힘’이라고 하는 항목에서부터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잠깐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동안 저희들 떨어져 있었지만 다시 만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도 함께해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제 지난 시간에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은 오갔습니다. 그래서 아베리우스 ? 이야기도 나오고 프란시스 고마루스, 조나단 에드워드 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사람들을 바꾸고 고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교회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힘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사상의 힘과 그 다음 윤리의 힘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최근에 나누어 준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책에서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그 책에서는 사상의 힘에 대해서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그러면 사상의 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복음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복음주의가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지성적인 삶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적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복음주의가 두 개의 역사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제가 얘기해드린 기억이 나십니까? 어떤 뿌리였습니까? 개혁주의의 뿌리 또 하나는 꼭 찰스 피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없고 그 이전부터 있었던 부흥주의, ‘리바이벌리즘’이라고 하는 부흥주의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부흥주의의 뿌리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저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 그리고 초대교회 시대 때의 어떤 감정중심적인 신앙의 흐름과도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감정중심의 체험주의적인 것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어떤 감정과 체험 중심의 신앙의 뿌리들은 오래전에서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그 후에 미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18세기의 부흥운동에서 그런 어떤 부흥주의라고 하는 뿌리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찰스 피니나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도 부흥주의의 뿌리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우에는 어떤 체험적인 신앙과 철저한 지성들을 잘 조합시킬 수 있었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잘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초기 개신교의 전통의 맥락에서 본다면 신앙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선 어떤 신학적인 원리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그것을 지성으로 잘 이해해서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제 치열한 지성의 탐구와 열렬한 경건의 실천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지금 현재는 이러한 어떤 기독교의 주류적인 전통, 개신교의 선조들이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파편적인 사고와 지성의 빈약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기독교가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셨으니까 잘 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노장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노장사상을 따라서 세계와 인간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중용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커다란 삶의 원칙이 있고 거기에서 삶의 스타일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상의 얼개를 따라서 자기가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그 무엇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결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면 성경을 성경과 사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이제 성경이 있으면 신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은 이단에 의해서 사용되어서 자기 교리를 강화하기도 하고 정통신앙을 심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이제 어떤 신학을 가지고 성경을 보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냥 성경을 공부하면 되지 무슨 신학이 또 필요한가?’ 그러나 여러분 역사적으로 기독교에 나타난 이단 가운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정한 이단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나온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그것을 알고 성경을 읽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쓴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을 올바로 읽고 이해하는 것을 도와주려고 기독교강요를 쓴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무엇을 어떤 사상으로 말하는지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또 성경에서 이해한 내용을 가지고 자기들이 견지하고 있는 신학이 올바른지 검토하고 그런 순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지식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믿어야할 규칙과 살아야할 교훈입니다. 그래서 이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할 때에는 우리들이 성경의 용어로만 신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조직신학 시간에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에 대해서 강의를 했더니 어떤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성경에 그런 용어가 어디 있습니까?” 물론 성경에는 ‘일반계시’라는 말이 없습니다. ‘특별계시’라는 말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신학을 할 때는 성경의 사상을 따라서 신학을 하는 것이지 성경에 있는 용어만 가지고 신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런 용어들을 학문적인 용어들로서 구상을 해서 그래서 지식을 교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버스라는 용어를 여기도 씁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에게 버스라는 용어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 의미가 통합니다. 그런데 그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똑같이 전달할 수 있는 말을 만들어 낸다면 얼마나 길어질까요? ‘큰 차인데 바퀴가 달려있고 그러나 트럭은 아니고 짐을 싣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싣는 것이고 요금을 내는 것이고 일정한 구간을 운행하는 것이고’ 이것을 다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버스를 탔는데 버스에서 사람을 만났는데 그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어.” 이렇게 버스라는 말이 세 번 나왔다고 합시다. 똑같은 얘기를 그 긴 얘기를 세 번 반복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학문적인 용어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경제성과 정확성, 전달성 이런 것들이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버나드 램이라는 사람이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1916~1992년도까지 살았던 미국의 신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들을 꼭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이 사람 이름을 쳐보면 쭉 나올 것입니다. 이 사람의 성경해석학, The Evangelical Heritage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복음주의자는 계몽주의자가 세워놓은 연구와 학문의 표준을 따라야 한다. 이성과 추론은 차이가 있다. 복음주의자는 이성이 아닌 하나님을 마음의 왕좌에 올려놓는다. 복음주의자는 신학을 함에 있어서 계몽주의의 언어를 사용하여야 한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이렇게 함으로서 신학이 학문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성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진리를 전달하는 것의 목적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알아야지 믿든지 말든지 할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계몽주의의 언어를 사용해서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전달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폴 오스카 크리스텔러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특히 중세와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의 역사적인 연관성에 대해서 탁월한 학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금 제가 가르치면서 많은 학자들 이름이 나옵니다. 반드시 인터넷에 들어가서 쳐서 즉시 정리를 해두시기 바랍니다. 매우 중요한 인물만을 여러분에게 지금 제시를 하는 것입니다. 이 폴 오스카 크리스텔러의 주된 관심사는 이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중세와 르네상스가 이렇게 역사적인 단절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 때까지 사람들이 이해를 해왔었습니다. 우리들이 대게 학교 다닐 때 배운 내용이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중세는 봉건제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억압에 의해서 인간의 자유가 억눌리던 시대였다. 그리고 아주 엄격한 교회의 질서와 계급체제 속에서 사회가 신 중심의 사회로서 인간의 자율이 통제되고 있던 그런 타율적인 사회였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폭발하듯이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되고 교회의 억압으로부터 항거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부르짖는 사상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두 사상은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 신중심의 사회는 인간 중심의 사회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대게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아 오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었던 중세와 근대에 대한 이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설명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서는 얼마나 책을 많이 번역이 되어서 읽을 수 있는지 정보를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시오노 나나미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시오노 나나미의 책 중에 르네상스 인 이탤리,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찰스 나우어트라고 하는 사람도 찾아보십시오. 그래서 중세 중에서 특별히 이제 13세기 정도까지 우리가 중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12, 13세기에 이미 르네상스의 정신들이 깊이 베어있다는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역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상이 가다가 갑자기 두부 자르듯 딱 끊어지고 새로운 사상이 시작되는 그런 역사가 사실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사실 여태까지 그런 식의 역사가 가능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암시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어디까지가 중세이고 어디서부터가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는가 하는 그 시점을 정확하게 확정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14세기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시작이 됩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입니다. 그 피렌체가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던 도시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어떤 메디치가에 의한 르네상스의 부흥이 있기 전에 이미 그런 정신들이 11세기 지나고 12세기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발견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반드시 르네상스의 역사를 잘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세 말을 잘 공부해야지만 르네상스를 이해할 수 있고 르네상스를 이해해야지만 인문주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또 인문주의를 이해해야지만 기독교인문주의를 이해할 수 있고 기독교 인문주의를 이해해야지만 종교개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오스카 크리스텔러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르네상스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문주의, 휴머니즘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느냐 하면 사실 중세를 대변하는 것이 사실은 스콜라 철학이었습니다. 스콜라 철학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영어로 학교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school, 독일어로는 Schule, 이것이 모두 하나의 희랍어 단어에서 옵니다. ‘스콜레’라는 단어에서 옵니다. 신약성경에도 나옵니다. 딱 한번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런데 ‘스콜레’가 무슨 뜻이냐 하면 한가한, 그러니까 학교는 한가한 사람들이나 다니는 곳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당시에는 정치하고 돈을 벌고 하는 일에 사람들이 골몰합니다. 그런데 맛있는 음식 먹고 재미있게 귀족들이 놉니다. 그런데 너무 심심한 것입니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콜레’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이거 너무 심심하다. 우리 뭐 재미있는 얘기 좀 들어보자. 아는 것 많은 사람 없냐?”, “그래 누가 별들에 대해서 많이 안대.”, “그 자식 불러오라고 해라.” 왜냐하면 그 때에는 계급이 훨씬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귀족들은 맛있는 것 먹고 편하게 기대서 한 사람이 썰을 푸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거기서 스쿨이라는 말이 온 것입니다. 스콜라주의의 특징은 아주 정교한 논리입니다. 그것들이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초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중세를 대변하는 것은 아주 정교한 질문과 응답의 논리, 어떤 비판이 끼어들 수 없는 철저한 체계, 이런 것들로 기독교의 위용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문주의자들이 형이상학을 회피했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런 중세를 스콜라주의를 비판하면서 인문주의라고 하는 사상들이 생겨났는데 이 사람들이 많은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 냅니다. 중세에 말하자면 대항하는 개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만들어 낸 개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도움을 받으면서 순수성을 보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르네상스 시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계속 가르쳐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문주의자들이 그 당시에도 기독교철학이라는 용어를 이해하고 있었고 신학과 철학의 통합을 위해서 학문적으로 노력했던 것입니다.
에띠엔느 질송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아주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쓴 책이 아마 중국어로 번역되어 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중세철학사입니다. 번역되어 있습니까? 에띠엔느 질송의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이 History of Medieval Philosophy라는 책입니다. 중세철학사입니다. 원래 이 사람이 그 책을 불어로 썼습니다. ‘라 필라소피 오 모엥 아줴’라는 책인데 영어로는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아퀴나스를 아주 철저히 연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어쨌든 중세 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매우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에띠엔느 질송의 중세철학사는 꼭 한번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이 사람 이야기하면 굉장히 깁니다. 한 시간 이야기해도 못할 정도로 얘기가 긴데 간략하게 요약하면 에띠엔느 질송이 처음으로 여러분이 아까 얘기한 중세와 근대 사이의 단절성을 강조하던 종전의 견해를 뒤집어엎어서 연속성을 발견해낸 거의 최초의 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난 시간에 아자하우드리안 교수가 와서 데카르트에 대해서 가르쳐 드렸고 제가 와서 데카르트에 대해서 설명 드렸습니다. 기억나십니까? 그 강의를 듣고 데카르트를 공부해야겠다는 도전을 받으셨습니까?
근대 사상, 완전한 현대사상 말고 여태까지 지금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성주의적인 근대사상을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을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그것이 누구일까요? 데카르트와 칸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데카르트와 칸트의 사상 자체도 아직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미 상당히 많이 균열이 되어서 근대사회가 정확하게 데카르트와 칸트를 따라가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5월 4일 제가 주일 낮 예배에 설교를 하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데카르트와 블레이즈 파스칼의 인간 이해에 대해서 설교 속에서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 데카르트와 칸트가 가지고 있었던 인간관이 그것이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훨씬 더 많은 비판들이 가해지고 사실 오늘날 시대에는 데카르트와 칸트에서는 상당히 이탈한 인간관들이 가르쳐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띠엔느 질송이 데카르트를 전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데카르트를 연구하면서 박사를 했는데 이 사람의 사고방식이 너무 독특하고 이제까지 누구도 시도해 본적이 없는 탁월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생각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천재임에는 틀림없는데 이 사람은 어디에서 도대체 이런 것을 배웠을까?’ 그리고 그 뿌리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뿌리를 중세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세시대에 있었던 유명론, 관념론의 논쟁 기억하십니까? 아직 기억하십니까? 학교에서 배우셨죠? 슥 지나가기는 하셨을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까지는 실재론의 입장에 정확히 서있었던 것입니다. 그 금자탑이 아퀴나스가 죽은 후에 공격을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여러분이 아는 다양한 기독교 신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제와 기초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니콜라스 쿠사’라는 사람 들어보셨습니까? 윌리엄 오캄,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사고방식이 제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상들은 항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동반했습니다. 그래서 에띠엔느 질송은 이제 말하자면 중세와 근대의 연속적인 측면을 발견을 하고 그것을 강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맨 처음 그런 논문을 발표했을 때 다들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1914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후에 40년이 지나지 않아서 이 사람의 이런 주장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17세기에 유럽을 뒤흔들었던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데카르트주의입니다. 이럴 때에 이제 데카르트주의가 정통적인 신앙을 심각하게 위협을 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계시 위에다 두기 때문입니다. 사실 데카르트는 제가 보기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런 속에서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라던지 야코푸스 레비우스라던지,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 라든지 이런 신학자들이 나타나서 이들의 새로운 논리와 주장들을 반박하는 작품들을 집필함으로서 이런 사상들에 대처했던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이 여기에 번역되어 있습니까? 신앙감정만 번역되어 있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의 제8권을 도서관에서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학교 도서관에 가시면 에드워즈의 전집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예일대학에서 나온 것을 기준으로 8권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책이 아니더라도 예일대학교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조나단 에드워즈 센터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8권입니다. ‘윤리학적 저술들’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책입니다. 거기에 세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하나는 천지 창조의 목적, 두 번째는 참된 미덕의 본질, 세 번째는 사랑과 그 열매 그렇게 세 가지가 실려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지막 것은 고린도전서 13장 강해이고 앞에 나와 있는 두 편의 작은 논문이 있는데 아주 유명한 논문이고 신학공부 하는데 매우매우 필요한 논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논문을 한번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굉장히 어렵습니다. 굉장히 어려워서 읽을 때마다 ‘내가 이렇게 머리가 나쁜 사람인가?’ 고민을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사실은 철학책은 어려운 것이 쉬운 책입니다. 어려운 것이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쓸 때에 엄청난 크기의 사상이 아주 축약된 형태로 우리의 마음속에 팍하고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그런 책 한권 부피도 굉장히 얇습니다. 얼마 안 됩니다. 아주 얇습니다. 읽으면 불과 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20시간을 노력해도 이해가 잘 안됩니다. 그런데 사실 여러분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한 줄 한 줄 이해할 때까지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잘 못합니다.
작년에 제가 목회 20년 하면서 처음으로 휴가다운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래봐야 한 달 밖에 못 쉬었지만 그 때 제가 르네상스를 공부하러 이탈리아를 갔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피렌체에서 며칠 묵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도 가면 절반이 중국 사람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옵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그 사람들이 이탈리아에 와서 막 사먹고 돌아다니지만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좀 공부하려고 잘 아는 사람을 불러서 같이 다녔는데 이 사람이 저보다 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이 간절하게 났습니다. ‘이 학생들이 여기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여기서 이것을 보면서 르네상스를 설명해 줄 수 있다면 신학을 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도 돈만 있으면 갈 수 있습니다. 피렌체도 갈 수 있고 여행 모집해서 갑니다. 그런데 가서 스파게티나 먹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진 찍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건물이, 이 그림이, 이 조각이, 무슨 의미인지 역사가 어떤 나와 관계가 있는 그것을 배워 와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이 정말 간절하게 났습니다. 나는 12세기, 13세기, 그리고 르네상스를 공부하는 일에 얼마간 헌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과 개혁신학에 대한 어떤 풍부한 감동들이 르네상스를 통해서 엄청나게 다가왔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한국에도 르네상스에 대해서 쓰여 진 책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개혁주의적인 신학자 입장에서 르네상스를 해석한 책들은 없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좀 해석을 책으로 쓰고 싶다고 하는 강력한 열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르네상스를 공부하라. 그 대신 확고한 개혁신학의 입각점을 가지고 르네상스를 공부하라.’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혜와 사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은 기독교의 사상의 힘은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한 힘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우리의 기독교인의 지성적인 삶이 이런 구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 맨 끝에 보면 신앙과 학문이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잘 믿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속에서 이제 학문들이 함께 통합이 되면서 그러면서 이제 그것이 기독교의 신앙으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저에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중국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봉사도 하고 신앙생활을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같이 모여 앉아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영접했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같이 선교활동도 했으니까 당연히 이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말입니다. 그런데 전혀 안 믿는 것입니다. “세상이 원래 그냥 있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은 믿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세계관 자체가 안 바뀐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있고 이것은 범진리 사상입니다. ‘모든 것이 진리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모든 진리를 오직 기독교만 발견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도 조금씩은 발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다른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들이 잘못 해석을 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그런 잘못 해석된 진리를 올바르게 다시 해석해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범진리 사상입니다. 만약에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다고 한다면 다른 모든 학문을 하나도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만 배워야 한다.’ 심지어 ‘신학 책도 배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경만 읽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올바른 신학의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잘 가르쳐주면 거기서 칼을 만들어서 복음주의의 목에다 겨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복음주의도 잘못한 것이 있으니 그것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개혁신학의 칼이 이교도를 공격하고 이단들을 공격할 수 있고 더욱이 무신론을 공격하고 현대 사상을 공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합니다. 왜냐하면 공부를 안 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독교의 또 하나의 힘은 윤리의 힘입니다. 그 윤리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서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입니다. 어거스틴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성도는 새 사람인 동시에 옛사람입니다. 의인인 동시에 죄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올바른 삶을 사느냐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공부를 통해서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올바로 사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다음 그림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제 가시적 영역에서는 우리들이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을 이야기했습니다. 비가시적 영역에서는 은혜의 힘입니다. 여기에 보면 프린티삐아 에센디, 존재의 원리가 나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를 사실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1장에서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집에 가셔서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전체가 좋은 것이었고 또 그 안에 있는 하나하나의 사물도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 좋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선과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된 선한 것이었고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중국어에서도 피아오리앙이라는 말과 메이라는 말은 의미가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아오리앙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메이는 객관적입니다. 어떤 사람한테는 저 사람이, 저 여자가 피아오리앙일수도 있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뿌 피아오리앙일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 사람에게 메이인 것은 나에게도 메이지 저사람에게 메이인 것이 뿌메이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인간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본성의 끌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소위 얘기하는 표상의 개념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판타스마라고 부릅니다. 풀크름은 메이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정한 선, 이것은 선의 미학적 측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판타스마는 인식론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늘 드는 예입니다만 학생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겸손하게 열심히 배우는 것이 학생의 본분입니다. 그러면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아니면 PC 게임이나 하면서 노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PC게임이나 하고 노는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선하지 않은 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에 공부를 안하고 PC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판타스마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판타지라는 환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정의를 하면 판타스마라고 하는 단어는 미의 인식론적인 속임수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사람의 마음을 막 끄는 것이 사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사물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에 마음이 완전히 빼앗기지 않도록 어떤 사물 너머에 있는 진정한 가치와 어떤 이상들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그러면 판타스마에 수시로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몇 해 전에 동북쪽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사역자들이 모여서 거기는 중국인 사역자도 있었고 한국인 사역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물질적인 타락에 대해서 심각한 이야기들이 오고갔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와서 한국 교회도 상당히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돈을 뿌리고 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철저하게 관리를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그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그 당시에 식당에서 일하는 푸우엔들이 400위안, 300위안 밖에 못 받을 때였습니다. 이 사람이 한국에 와서 설교를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제 자기 어려운 이야기도 하니까 한국교회가 너무 불쌍하게 생각해서 설교를 한 번을 했는데 3000위안을 준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혼란이 생겨난 것입니다. 근로자의 8개월치 월급을 잠깐 이야기하고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신실한 사람들은 안 그랬는데 어떤 사람들은 돈에 욕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살림살이가 넉넉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사업들을 한다고 하고 한국 교회에서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잘사는 것을 보고 선교사가 목회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그 이야기를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삼자교회에 있는 지도자들이 저에게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절대 여기에 돈 좀 가져다 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뿌릴 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현상들이 왜 생겨날까요? 판타스마 때문입니다. 이것을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이런 판타스마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속적으로 책을 읽도록 하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의 개념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신플라톤주의자 가운데 플루티누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205년에서 270년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이 사람의 책 가운데 아주 유명한 책이 있는데 엔네아데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중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철학책입니다. 본적 있으십니까? 엔네아데스 보신 적 있으신 분 있으십니까? 꼭 한 번 읽어보십시오. 깜짝 놀랄 것입니다. 이방철학자가 썼는데 조직신학 책처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모두 믿지는 마십시오. 한 구절만 제가 읽어봐 드리겠습니다. ‘더욱이 아름다움은 존재하는 것들이며, 그 반대의 본성은 추함이다. 그 추함과 같은 것은 악이다. 그리하여 신에게는 선과 아름다움이 같으니 곧 선한 것은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름다움과 선, 그리고 추함과 악함을 탐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은 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 그 선으로부터 지성이 나오는데 그 또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제1의 아름다움은 선과 동일하다. 그런데 지성적인 것들과 구분하자면 형상의 자리는 지성의 아름다움이며 이와 달리 선은 그것을 초월한 것으로서 아름다움의 원천과 원리가 된다.’ 선이 있고 선이 원천이고 거기서 아름다움이 나오는데 선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읽어보세요. 무슨 뜻이냐면 애가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을 전부다 공부하면 한이 없으니까 일단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빨리 가서 엠네아데스를 펴서 다 못 읽더라도 무슨 책인가 보면서 아 이런 내용들이 다루어져 있구나. 그리고 엠네아데스는 왜 이 책을 썼구나. 이런 것들을 그때그때 이해 해 버릇하면 그런 식으로 공부하면 삼년 사년 공부 했을 때 엄청난 지식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아 좋은 책이구나, 다음에 읽어봐야지’ 하면 절대 안 읽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 다음 그림을 보면 중생과 본성의 변화에 대하여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여기에서 왜 필요할까요? 기독교의 위대한 힘의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사상의 힘, 윤리의 힘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상과 윤리를 주장하는 종교는 많습니다. 유교 같은 것도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는 인간이 제대로 알면 그대로 살 수 있다 그렇게 생각은 안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그것을 이어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어떻게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사상에 따라 살게 하느냐 그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림에 보면 자연인과 중생 자가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중생 자는 무엇인가 그 사람의 영혼 안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난 사람입니다. 그것이 중생을 통해서 사랑의 성향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존재의 변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 그 자체가 어떤 성향을 담지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어떤 사랑의 성향에 있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담에 인식의 변화가 생겨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식능력의 변화가 온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인일 경우에는 전혀 없었던 인식론적인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죄 하나님의 은혜 신령한 것 이런 것들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는 사람들끼리 이야기할 때 ‘아 나 오늘 정말 은혜 받았어. 그런 이야기 합니다. 그런 어떤 것들이 비중생자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중생과 함께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우리들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덜 사랑하던 사람이 다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감각이 무디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들에 대한 예민한 정도가 우리 마음의 상태에 따라 각각 다릅니다. 어떤 때는 그런 것들이 아주 예민하고 민감해집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둔감해집니다. 그런 것들의 변화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라는 것이 결국은 제일 먼저는 복음을 잘 전해서 성령의 역사로 자연인이 중생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중생 자가 된 사람이 계속 진리의 말씀을 사상적으로 배우면서 은혜를 받아서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러면 사실은 말이 쉽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누군지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다음에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을 혼란시키고 있는 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기독교역사에서 도대체 신앙의 본질이 지성에 있는 것인가 감정에 있는 것인가 라는 논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쪽에는 감정을 중시하는 것이고 이쪽에는 지성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시대에는 중심을 잡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적으로 로마의 핍박이 정치적 핍박에서 사상적 핍박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기독교에서 수많은 변증가 들이 일어나서 기독교가 그런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로마사상가들과 논쟁을 하면서 변증하게 됩니다. 그것이 이세기경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변증 가들의 시대라고 합니다. 당연히 지성이 중시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지식에 치우치면서 신앙의 열정들이 경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반발로 나온 것이 몬타누스주의 입니다. 몬타누스는 아주 극단적인 성령주의입니다. 그래서 감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게 4세기서부터 14세기까지 신비주의로 이어지게 되고 이게 수도원운동을 배경으로 합니다. 유럽에 갔을 때 중세 수도원을 유럽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보았습니다. 너무 재미있는 게 엄청나게 커다란 성 같은 수도원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이 없습니다. 대문이 없습니다. 너무 황당한 것입니다. 후대에 벽을 뚫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이 다닌 것입니다. 원래는 그런 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거길 들어가느냐 그랬더니 저 위에서 바케스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거기 타면 위에서 잡아 댕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못나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나갈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산꼭대기에 인간으로서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곳에 그런 산꼭대기에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 하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거기서 수도 생활하다가 거기서 죽는 것입니다. 그 죽은 수도사들의 두개골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면 그 수도원이 세속주의로부터 멀어 질수 있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인간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 ‘속리산’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속’은 세속 ‘속’자에다 떠날 ‘리’자에 산 ‘산’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리산’ 그러면 ‘이 산이 속세를 떠나서 여기에 있는 산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한답니다. 그런데 사실은 원래의 뜻은 분리 ‘속’ 속리산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세상이 없다면 수많은 사람이 모여도 세속적인 세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소위 이야기 하는 ‘데보치오 모데르나’ 라는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새로운 경건운동입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으로 오면서 중심을 잡게 됩니다. 지성과 감성의중심을 다시 잡습니다. 18세기에 후기 스콜라주의가 일어나게 되는데 말하자면 개신교의 스콜라주의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합리주의로 발전을 합니다. 그러다 오순절주의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그담에 신비주의 다원주의로 넘어가고 신번영주의 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진좌운동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그러면 신앙의 본질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되겠는가? 그것이 결국 그 다음 그림을 보면 지성과 의지의 관계에 대해서 아퀴나스는 토마스 주의적 주지주의를 주장합니다. 그것이 토마스 주의적 주지주의인데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기초로 해서 지성이 훨씬 위에 있고 그 지성에 따라서 의지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담에 의지는 수동적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코투스는 이 사람에 대해서 들어보았습니까? 둔스 스코투스에 대해서 학교 다닐 때 역사시간에 들어보았을 겁니다. 이름만 알면 안 되고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소위 이야기 하는 스코투스적인 지성주의가 아닌 주의주의입니다. 영어단어에 will은 의지입니다. 그러면 볼리션(volition)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의지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확하게 하면 의지가 아니라 의지행사입니다. will은 의지자체, volition은 의지행사, 그래서 volition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에 대한 논리가 볼륜타리즘입니다. 볼륜타리즘은 의지행사가 인간의 의지결정에 지식보다 훨씬 더 앞선다. 라는 것이 볼륜타리즘입니다. 그담에 인텔렉쇼알리즘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의지행사가 인간의 지성적인 생각에 상당부분 의존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텔렉쇼리즘입니다. 두스 스코투스는 유명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인간중심적인 신학을 구축하는데 상당한 이론적인 기반을 제시한 사람입니다. 철학파 가운데 살라만카 학파가 있는데 살라만카 학파의 프란체스코 슈아레츠 그담에 중간지식이론에 나오는 루이스 몰리나 이런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몰리나가 1535년에서 1600년경에 살았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주장한 유명한 이론이 중간지식이론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이라고 정해놓으시지는 않는다. 그렇게만 이야기를 하면 인간이 어떤 일을 행 했을 때 하나님이 ‘어 얘가 이런 행동을 하네. 난 몰랐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실 수 없잖아요? 그래서 세워 놓은 게 중간지식이론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인간이 무엇을 행할지는 정해놓지 않으셨는데 무엇을 선택해도 다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굉장히 이성주의 적이고 매력적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어거스틴적주의 주의가 있습니다. 사실은 어거스틴을 주지주의자로 볼 것이냐 주의주의자로 볼 것이냐 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이런 식으로 분류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어거스틴을 하나님을 향해 선한 일을 할 수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셨기 때문이다 이게 어거스틴의 주장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어거스틴은 확실히 주의주이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어거스틴이 다른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주의주이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지금 이야기 한 것 같은 이 모든 일들을 종합해 볼 때에 목사라고 하는 사람은 결국 참된 사상을 지식으로 가르치고 윤리적인 삶을 살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묶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힘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목회자가 신학을 정말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입니다. 그러면 요약을 하면 우선 올바른 지식을 가르치려면 성경과 신학 일반학문 이런 것들을 제대로 공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올바르게 살아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아까 얘기한 것처럼 사역자들이 세상 사랑에 젖어서 돈이나 밝히고 그런 사람이 되면 그게 목회자로서 제대로 된 목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그리스를 한번 갔습니다. 그리스를 나를 안내하던 사람이 자기 친구가 커다란 호텔을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에서 제일 좋은 방이 빌라처럼 되어있는 방인데 하룻밤을 자는데 15만 위안입니다. 숙박비입니다. 그러니까 무지하게 큰 별채로 되어있는 집이랍니다. 그 집을 얻으면 거기에서 묵을 때 불편하지 않게 도와주는 메이드가 다섯 명이랍니다. 한사람은 청소해주는 사람, 한사람은 타이프 쳐주는 사람, 한사람은 이불개고 정돈해주는 사람, 한사람은 음식해주는 사람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아니 하루에 15만 위안인데 거기에 와서 자는 사람이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리스 정교회 지도자가 거기 와서 5일을 자고 갔답니다. 그래서 내가 미쳤다고 했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안 되는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말이 안 되는 일들이 실제로 한국교회에서나 중국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목회자가 반듯한 삶을 살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 저렇게 저런 삶을 살아야 되겠다. 이런 마음의 감동과 감화나 이런 것들을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담에 그런 것들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슨 힘이 필요하다고 했습니까? 은혜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럼 목회자는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말씀과 기도와 성령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이상적인 목회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마음속에 그려질 수 있습니까? 그럼 한번 들어봅시다.
오늘의 강의를 듣고 정말 인상적인 목회자는 어떤 사람일지 종합적으로 이야기해보세요. 은혜를 묵상한 다음에 15만 위안짜리 호텔에 가서 자면 됩니까? (웃음)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다 하면서 (웃음) 내가 목회자가 안 되었으면 이런 좋은 집에서 언제 자보랴 하면서. (웃음)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누군가가 물었을 때 ‘그러면 형제님, 정말 이상적인 목회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는 이런 목사라면 참 이상적인 목사라고 생각 하겠다는 이야기 해보세요.
요약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탁월한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탁월한 윤리의 사람, 세 번째는 그렇게 살기 위해서 은혜를 많이 받는 사람 이게 여태까지 강의한 내용의 더 이상 요약할 수 없는 세 가지 결론입니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첫째, 탁월한 지식의 사람이 오늘날에 여러분 주위에 있는 목회자들이 탁월한 지식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에 대해서 본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의 최고의 재앙은 무지한 목사가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 하는 것은 부작위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법학 하신 분 손들어 보세요. 죄가 행위에 따라서 둘로 나누어지는 것 아시지요. 첫째가 작위의 죄입니다. 하지 말라고 법이 명령을 했는데 그것을 어기고 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이게 법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죽였습니다. 그러면 작위의 죄입니다. 그런데 열여덟 살 이면 군대를 가라 이렇게 법이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가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면 부작위의 죄입니다. 그 둘 다 다 처벌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생 때 공부안하는 것은 죄짓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회개 많이 해 봤지요? 친구를 때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잘못했습니다. 또 여자를 향해서 불순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합니다. 심지어는 교회 돈을 좀 슬쩍했습니다. 아까 그 나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럼 회개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공부안한 거 눈물로 회개해 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이런 이야기를, 내가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한국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개장사를 하려도 끈이 있어야지, 개장수는 개를 싣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입니다. 그럼 고릅니다. ‘이 개를 사겠습니다.’ 그건 식용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파는 개장수가 개를 죽여서 잡아서 줘야 됩니다. 개를 이렇게 죽일 수는 없잖습니까? 그럼 뭐가 있어야 됩니까? 줄이 있어야 됩니다. 최소한의 준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장수를 하려도 줄이 있어야 되듯이 목사에게 그것을 적용하려면 목사를 하려면 지식이 있어야 목사를 합니다. 뭘 물어봐도 ‘목사님 이거 종교개혁이 뭐예요? 잘 몰라, 그럼 루터가 누구입니까? 독일 사람이야, 무슨 사상을 가졌습니까?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목회자가 되는 것이 교회의 재앙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공부를 해야 합니까. 공부 안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래서 덜 놀고 덜 시간을 낭비해서 공부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됩니다. 학생은 겸손하지 않으면 학습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식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그때 선생님을 신뢰하고 선생님의 가르침이 진실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기가 학생의 시기입니다. 그 공부해야할 분야는 정말 방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이라는 책을 여러분에게 주었는데 다 읽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그 책을 쓰면서 굉장히 눈물이 났습니다.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서 세상은 아주 논리적이고 철저히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세상을 공격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공부를 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 공부의 정 중심에 성경이 있고 성경주변에 신학이 있고 신학주변에 일반학문이 있고 과학이 있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말 겸손하게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저하고 열린 교회가 CRTS를 만들었을 때 이미 중국에 있는 똑같은 신학교를 만들려고 했으면 처음부터 시작을 안했습니다. 그 의미는 무슨 뜻이냐면 정말 제대로 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정확하고 폭넓은 그리고 지식과 생각이 모두 하나의 일치를 이루는 방식으로 신학을 공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상을 가지고 이 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한국에서 조차 지금 우리가 지양하는 이런 이상을 가지고 신학교육을 하는 학교를 만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우리학교보다 높은 지식을 가진 학교는 중국에는 없을지 모르지만 세계에는 많이 있습니다. 외국에 가면 전교생이 라틴어가 능통한 학교가 많습니다. 라틴어의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주고받는 겁니다. 심지어 미국에는 히브리어로 강의하는 학교도 있습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학문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학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학교들이 모두 개혁신학을 따르는 것은, 그런 학교는 아주 희귀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공부를 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공부할 때 여러분 주위에 있는 중국의 목회자나 신학생들을 옆에 보면서 그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면서 공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한 번도 한국에 있는 내 동료 목회자들이나 선배 목사님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 얘기는 교만한 마음으로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들이 진정한 신학함과 목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를 하고 나면 겸손한 양의 공부가 다방면에 있어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지로 지금 내가 가르치는 것처럼 종합적으로 접근하면서 통합적인 지식의 체계를 가지고 신학을 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 할 수 있겠죠? 한국에서 가장 큰 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 유력한 신학교에서도 사실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생님이 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교육받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한 사람은 신약만 공부를 한 것입니다. 조직신학한 사람은 조직신학만 공부한 것입니다. 그담에 역사공부한사람은 역사만 공부한 것입니다. 중의학 한 사람들이 미국에서도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중국 의학에 대해서 미국사람도 관심을 가집니다. 그런데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중국 한의사입니다. 미국의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전공이 뭐냐고 물어보는 겁니다. 미국사람이 나는 눈이 전공이다 안과의사 이다 중국의사한테 너는 뭐가 전공이냐 하고 물으니까 우린 다 본 다 그런 것입니다 외과, 내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항문외과, 혈관과, 정신과까지 난 다 본다. 미국사람이 말도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 눈만 가지고 평생을 공부해도 다 못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너는 다 본다고 하는 거냐 하면서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인간관의 차이입니다. 동양의학에서는 인간이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의 마이크로 코스모스 우주입니다. 이 눈은 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코하고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약을 이렇게 집어넣으면 코로 나옵니다. 그래서 뱉으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눈만 따로 연구할 수 있는 것이냐? 눈하고 여기 경혈하고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를 꽉 눌러주면 피로가 풀리면서 눈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서양의사는 이해가 안가는 겁니다. 신학은 동양의학적인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지금 서양의학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외과 의사가 수술 할 때에는 내과의사가 다 들어와서 자문을 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종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지식을 다루되 성경과 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이 바로 신학입니다. 다음 두 시간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정리 합시다. 좋은 목회자는 첫째, 탁월한 지식의 사람, 특히 그 지식의 중심은 하나님과 성경, 그리고 인간과 세계, 자 그럼 두 번째 좋은 목회자란 탁월한 윤리적인 삶, 세상 법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보다 높은 하나님의 법의 규칙을 따라서 탁월하게 사는 사람, 그러니까 모든 물욕과 명예욕 이런 것을 버려야 합니다. 한국에서 대만을 많이 연구했었습니다. 싱가포르, 타이완, 인도네시아, 태국, 한국 이 다섯 나라를 그때가 1980년대이었기 때문에 중국이 아직 부상하기 전이었습니다. 이 아시아의 다섯 마리의 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중에 어느 용이 먼저 하늘에 오를 것인가 그것은 탁월한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의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만하고 한국이 대조적이었습니다. 한국은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으면서 재벌, 대기업 집단을 중심으로 경제가 아주 급속히 성장하는 방식을 취한 것입니다. 대만은 그런 기업집단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크고 작은 중소기업들이 아주 건강하게 성장하면서 국가를 떠받친 것입니다. 그런데 재벌들이 일어나면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겁니다. 대기업이 비윤리적으로 횡포를 부리고 나라의 경제가 대기업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반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만을 봐라 큰 것을 하려고 하지 않고 조그만 것을 잘해서 나라가 탄탄하지 않냐? 나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대만을 갔습니다. 대만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전혀 아니었습니다. 모두 사장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가 조금 크면 가서 자기가 회사를 만들고 해서 큰 회사를 만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10년 전에 갔을 때 대만사람들이 아주 뼈저리게 반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굉장히 회사가 발전을 하긴 했는데 작기 때문에 완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없고 다 부속품을 만드는 회사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반성이 일어나면서 다시 대기업집단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무엇을 이야기 하려다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전체적인 것들을 가지고 사상을 구축하고 그런 전체의 틀 속에서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목회자의 탁월성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목회자도 다 욕심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대만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단점은 자기가 다 대장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감투 쓰는 것을 너무 좋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젊어서부터 그런 것들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섬기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데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한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 마지막 세 번째로 좋은 목회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지식의 사람, 두 번째는 윤리의 사람 세 번째는 은혜의 사람, 자 지식도 정확하고 풍성해, 설교가 흠잡을 때가 없습니다. 두 번째 삶이 흠잡을 때가 없습니다. ‘너희 똑바로 살아라, 나 봐 나 그렇게 살지 않잖아’ 그런데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감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다 맞습니다. 지식도 정확합니다. 나보다 많이 압니다. 나보다 잘삽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너 나 만큼 못살지 이렇게 물어볼 때 내가 진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감동은 안 됩니다. ‘그래 나보다 너 똑똑해, 그래 너는 나보다 잘살아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이 사람이 지식을 이야기 하고 이 사람이 자기가 잘산다고 이야기 하면 할수록 내 마음속에서 감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발심이 생겨나는 겁니다. 결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많이 압니다. 성경도 정말 잘 가르칩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윤리적이야 정말 나하고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 사람처럼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뭐가 모자란 것입니까? 은혜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아이가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갔습니다. 엄마 나 오늘 예수님 만나고 구원 받았어, 엄마가 너무 반가워서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많은 설교를 나한테 들려주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지만 내 마음속에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밤에 기도회시간에 우리 여자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너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어,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모든 복음이 믿어졌어요, 하는 겁니다. 이 아이에게 선생님의 어떤 모습이 감동을 준 것입니까? ‘은딘 더 티엔’ 그것이 아이 에게 똑같은 진리를 믿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런 신학을 하면서 그런 은혜를 많이 받는 모습은 간절한 기도와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거기다가 한번 써 보세요. 라틴어로 “베루스 필로소푸스 에스트 아마또르 데이.”(verus philopus est amator dea.) “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게 결국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졸업생을 만났는데 지식이 많고 뺀질대는 목회자보다는 지식이 조금 적어도 열렬하게 성도들을 사랑하면서 목회하는 사람이 베스트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공부하는 과정만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진실하게 신앙생활하고 열렬하게 성도들을 섬기는 것 자체가 신학공부과정과 하나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신학공부는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육체가 올바른 지식이라면 영혼은 교회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함으로서 신학다운 신학을 배우는 영혼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를 선택한 다음에 거기에 가서 죽도록 충성해야 됩니다. 목회자가 된 다음에 그것을 시작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로서 그렇게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