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 3과
녹취자: 오희열
반갑습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사상 최대로 친절하게 인사를 합시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목회와 소명2, 두 번째 시간인데 오늘은 공과 문제를 비교해 보시면 다른 때보다 한 문제가 적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씩 문제를 하나 줄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기도회를 하는 시간입니다. 사실 문제가 네 개로 끝납니다. 그리고 기도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기도회를 어떻게 인도하는지를 마지막 시간에 상세하게 설명해드릴 테니까 여러분이 정기적으로 이 공동체 기도회를 구역이나 순에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은혜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도록 정기적으로 배려했습니다.
이제 0과부터 시작해서 3과에 왔습니다. 목회와 소명2를 다루겠습니다. 그럼 문제를 읽음으로 오늘 스터디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의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지에 관하여 서로의 생각을 말해 봅시다.”
이것은 정답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우리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변화되기 전의 자신이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생각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이 공과를 하기 전에 실험적으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만나서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아닌, 교회의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도는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타드 빌링스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책을 썼는데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어있으니까 여러분이 한 번씩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오늘날의 사람들이 믿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오늘날의 기독교는 하나님을 인간편의에 맞게끔 거리를 조정해서 묘사하고 있다고 아주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저자는 이것을 “도덕주의적 치유적 이신론”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도덕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인간스스로 어떤 도덕을 찾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보고 그렇게 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선한 존재로 개선되어 가고 두 번째는 “치유적인”, 하나님이 늘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지는 않지만 특별히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 힘으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부르면 그때 오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해 주시는, 그러한 치유적인 기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이신론”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하나님이라기 보다는 가까이 하기에는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져있어서 이 세상살이를 인간에게 위임하고 당신은 매우 특별한 일이 아니면 간섭하지 않으시면서 어떤 법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것이 “이신론”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신학 혹은 종교와 과학을 접목시켜서 만들어 낸 새로운 신관입니다.
자,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럼 “도덕적 치유 이신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아까 말씀드렸듯이 “도덕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해 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아주 정밀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어떤 종교의 도움 없이도 인간이 이성적으로만 돌아가고 노력을 한다면 자기 자신도 개선할 수 있고 사회도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덕주의적”입니다.
“치유적”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범사의 모든 일에 있어서 의존한다기보다는 우리에게 뭔가 부족할 때 하나님께 요구하면 하나님이 병자를 치유하듯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주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신론”은, 우리는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와 끊임없이 교통하시고 우리의 인간사에 간섭하시지 않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는데 이런 것들을 다 부정하고, 대신 하나님이 어떤 거대한 법칙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신론”이 들어오고 그 다음에 “문화주의”, 그리고 “초월주의”, 하나님은 인간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 계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천국이나 내세보다는 이 지상에서의 문화를 통해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인간이 어떤 만족을 찾으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카르트주의”, 신의 존재를 형식적으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강조점은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에 있다고 보는 그런 “인식론”중심의 사고관, 그리고 칸트의 “도덕주의”, 인간이 스스로 도덕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 이런 것들을 모두 함께 묶으면서 복잡한 생각 속에서 오늘날의 신관을 형성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이런 도덕주의적이고 치유적인 이신론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사상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막연하나마 이런 온갖 조류들이 다 뒤섞이면서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성경적인 신관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별 의식이 없이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신앙이 편리할 때도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다가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난다거나 설명할 수 없는 도덕적인 질문의 난관에 부딪힐 때 그 공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패스”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이런 신관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영적으로 변화를 받아서 성경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이런 신관에 희미하게 묻혀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독특성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 사상에 의해서 감염이 된 채로 뒤죽박죽 된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명백하게 그리면서 설교를 하거나 가르쳐주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이런 신관과 합치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전제와 가르쳐주는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으니까 버그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피곤해지고 그런 가르침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정말 성경이 그리고 있는 하나님인지 검증하지를 않습니다. “놔둬, 그냥 내가 생각하는대로 믿을게!”하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믿는 것을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성경에 말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그려내 신을 마음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엄밀하게 검증을 해서 진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 하나님에 관해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성경이 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에 관한 지식, 지난번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속성 혹은 성품과 그것이 시행되는 방식, 이것에 관한 지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성경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군지를 배우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공부하는 것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도덕적인 치유 이신론에서 이야기하는 “이신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것은 톱니바퀴입니다. 이것에든지 이것에든지 어느것에든지 돌리는 힘을 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이렇게 돌고, 저것은 이렇게 돌고, 이것은 이렇게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물리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이렇게 돌고 이것은 이렇게 될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인간의 일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어떤 원칙과 법칙을 정해 놓았고 정교한 그 법칙대로 자연 세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인간도 역시 그렇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도덕의 법칙을 따라 돌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무신론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한 사람은 행복하도록 법칙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 법칙을 따라 살면 인간이 행복해 지는 것이고 복도 받는 것이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불행해지고 자신도 고통스러워지는 그런 법칙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정교하게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질서의 톱니바퀴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가 간섭할 여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신론자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회퍼 같은 사람은 이렇게 봤습니다. 구약시대의 경우는 아직 미성숙한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나타나시고 말씀을 주시기도 하면서 당신이 원하는 뜻을 가지고 백성들을 위협하고 설득하셨지만 지금은 성숙한 시대이므로 이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고 인간에게 가능성과 능력, 재능을 주었으니까 너희 인간끼리 의논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라, 너희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맡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에 인간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기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서 정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놈들은 죽이고 제거하고 선한 사람들은 보호하고 격려하는 것이 이 세상을 온전하고 평화롭게 하는 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틀러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던 이유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가 제시했던 대표적인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운전수가 미친 놈 이어서 버스를 돌진하려고 한다면 승객을 살리기 위해서 운전수를 죽이고 운전대를 빼앗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세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 칼빈이 가르쳤던 기독교에 대한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칼빈이 본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행, 불행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어서 우리는 다 알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난 가슴 아프고 불행한 일들도 커다란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무엇인가 이바지하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 결과로 세상에서 어떤 요동치는 일이 일어나도 우리에게는 항상 그 요동치는 것은 잠시이고 그 요동치는 것 너머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일관되게 하나님의 어떤 뜻을 향해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가 우리에게 주는 힘입니다.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적 치유 이신론이 이야기하는 핵심을 지적해보자면, 인간을 절대적으로 자유로윤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자유롭습니까? 뭐가 자유입니까? 여태까지 우리가 자유를 이야기했던 방식은 항상 거기에 전치가 들어갑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핍박으로부터의 자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을 억합하던 것이 여기에 이렇게 있습니다. 그것이 가난일 수도 있고 무지일수도 있고 질병일 수 도 있고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한 번 제시해 봅시다. 이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럼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졌을 것입니다. 질병으로부터 치료되었습니다. 자유로워졌을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그러면 자유로워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이 사람이 진짜 자유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억압된 상태에서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면 자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모두 벗어났을 때 진짜 자유로운가? 자유라는 것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은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택할 뿐만 아니라 선택한 일을 자기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때, 그 한 결과가 나와 다른 사람에게 나쁜 것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자유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팔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불편함의 구속을 받은 것입니다. 의사가 다 고쳐주었습니다. 팔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팔을 가지고 불을 일으켜서 도시의 건물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게 너무 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불에 타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자기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반드시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주변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가 맺어졌을 때 그 속에서 인간은 자유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얼마나 허무합니까? 우리가 한 살부터 일곱 살까지는 부모의 보호 아래, 어떻게 보면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삽니다. 그리고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대학까지 교육을 받습니다. 12년입니다. 유치원까지 합하면 14년 정도의 교육을 받습니다. 물론 더 어린 나이에 가는 사람들까지 따지면 15년 쯤 될 것입니다. 15년을 받고 우리는 겨우 사회에 나옵니다. 고등학교까지만 졸업을 해도 12년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15년을 배우고 나왔는데 그 사람이 53세 쯤 죽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8년 빼고 45년이니까 인생의 3분의 1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우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물론 어떤 학교에서 이만큼 공부하면 월급을 이만큼 받을 수 있고 월급을 이만큼 받으면 너한테 시집올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 결혼을 하면 집을 마련할 수 있고… 그런 계산도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 15년 동안 배우는 것이, 나라는 존재를 나의 밖에 있는 세상과 연결 짓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우지 못하면 생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모든 조직에서 왕따가 됩니다.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유치원에만 들어가도 아이들이 차별대우를 하기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들어가면 당연히 어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런 세계에서 아이들은 자신과 타인을 어떻게 관계를 맺고 누구를 만났을 때 그 사람과의 관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배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만약에 터득하지 못하면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톨이가 된 채 살아가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자유로운 삶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 여기를 오기 전에 책을 읽다가 왔는데 그 사람이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자유라고 해서 그냥 아무렇게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막 하는 사람을 자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파바로티 같은 사람이 공연을 하면서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목소리로 아리아를 부를 때, 우리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연주를 보면서 자유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재밌습니다. 어떻게 그가 평범한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에서 예술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유를 보여줄까? 예술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원칙들에 굴복을 하고 거기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맞는 얘기일 것입니다. 만약 파바로티가 그렇게 음악교육을 받지 않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그렇게 자기 맘대로 술 퍼먹고 매운 것, 짠 것을 먹으며 맘대로 인생을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기회가 주어져도 과연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자유는, 인간을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고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불안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자유인데 인간이 뭘 하고 싶은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뭘 해야겠다는 충동은 있는데 무엇에 기반해서 그것을 해야겠다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와 자유의 관계입니다. 진리 위에서 자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모르면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져도 그것은 진짜 자유가 아닙니다. 뭐든지 할 수가 있다. 문제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그게 난 뭔지 모르겠다. 뭘 하고 싶어 해야지만 그것이 좋은 것이냐?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냐? 그것은 더더욱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해도 되고 어떤 것들은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이런 것들이 결국 가지고 있는 진리의 기반 없이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장려하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완전히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전적타락이나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속받을 수 없는 인간의 비참함, 이런 것들을 인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목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쓰는 말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자면, 입헌군주국의 왕같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뒷방에 계시면서 형식적으로는 왕이라고 불러주지만 입헌주의 국가에서 군주는 국가에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알아서 사회 시스템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을 부인합니다. 섭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는 어떻게 굴러가야 하겠습니까? 인간이 하는 것만큼 굴러간다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이 되려면 인간들이 더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잘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가진 세상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하고 공평한 세상을 이상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1차, 2차 세계대전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것, 만족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도덕적 이신론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 다음에 “번영”입니다. 개인적인 평화와 번영입니다. 이것에 이바지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너그럽게 용납을 하면서 수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이렇게 복음의 변질 같은 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자, 1번 문제가 좀 길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2번을 읽어보겠습니다. “목사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목회자로 부름받은 소명의 체험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에게는 기독교인으로 부름받은 체험이 있습니다. 이런 체험이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 않는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런 사실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과거의 소명체험이 아무리 확실해도 “지속적인 헌신”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또 소명체험이 뚜렷하다는 것이 “성화”를 보장해 주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더더욱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는 소명의 경험이 목회자가 받는 소명의 체험과 수준은 달라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이 세계의 존재의 목적과 인간의 창조 의도를 알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면 거기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생애적으로 예수를 만났다는 그 과거의 체험 하나가 우리의 지속적인 성화나 이런 것들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입니까? 2000년 전에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깊이 체험했는데 그 체험이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재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재현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다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이러한 매일 매일의 영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 죽임. 죄 죽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분이 배웠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은 “죄 죽임의 교리”를 들어가서 특강이라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혜 살림” 이것은 죄는 죽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계속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주일에 은혜를 많이 받고 그 은혜를 간직하는 것이 여러분이 주일에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데, 주일에 일하시면 안 됩니다. 예배드리고 가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일 보고, 아니면 하루 종일 일 보다가 2시 예배, 혹은 오후예배에 와서 한 번 예배드리고 주일을 지켰다고 하면 안 됩니다. 주일은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의 불을 받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잘 보존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온전히 비워서 나의 마음을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채우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 잠깐 드리고 자유인으로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허우적거리며 살다가 밤중에 집에 들어간다면 진짜 자유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일에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눈물 좀 흘리고 진실하게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그렇게 하고 나서 일주일은 물론이고 주일 하루를 온전히 지키지 않아서 자기 사업하면서 마구 돌아다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화로에 훨훨 타고 있는 불이 있는데 그 중에 나무 하나를 꺼내서 얼음 덩어리들 속에 던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몇 분이나 불타겠습니까? 그렇게 하는게 아닙니다. 그 불씨를 간직하고 싶으면 따뜻하게 달궈진 재 속에 잘 묻어두어서 그 불이 소멸되지 않게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꺼내서 불면 불씨가 남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면서 사랑과 지식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번을 읽겠습니다. “목회자와 신자로서 영적성장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사랑과 지식의 성장입니다. 중생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 본성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힘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면 ‘설복적인 사랑’은 어떤 것인지 구역장(순장)의 설명을 먼저 들은 후에, 말씀에 설복되어 큰 은혜를 받은 경험을 자신의 방식으로 말해 봅시다.”
구역장과 순장이 여러분입니다. 가서 잘 얘기해야 합니다. 되지도 않는 이야기로 더듬거리면 안 됩니다. 이런 것을 받아 가지고 가서 깨끗하게 다시 그림을 그리든지 프린트를 해서 파일에 끼워서 보관했다가 몇 장을 들고 설명을 하면 얼마나 성의있어 보이겠습니까? 저도 이것 하는 것이 되게 힘듭니다. 다 만들고, 만든 것 고치고 고친 것 다시 감수하고 그렇게 세 번씩 해서 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의 저자인데 내가 이것을 덮는다고 못하겠습니까? 그냥 막 썰을 풀면 한 시간이야 못 채우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피곤할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해 오면 여러분은 좋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노력을 하십시오. 왜 아멘을 하지 않습니까? 구역원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 뭐가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 반성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라도 프린트해서 파일에 싸서 감추고 가서 미리 다 보여주면 싱거우니까 하나씩 딱 보여주면서, 그러면 구역원들이 속으로 ‘오늘 우리 구역장이 왜 이러시나?’할 것 아닙니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설복적 사랑’, 이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명이기도 한데 ‘힘적인 사랑’, ‘설복적 사랑’ 두 가지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힘적인 사랑’은 불신자였던 우리의 마음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설득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중생하는 순간에 이 속에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겨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동의를 통하지 않는 일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생과 함께 우리 속에 확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랑의 성향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이것이 만약에 중생의 사랑이라면 이것은 성화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설복합니다. 설득합니다. ‘아,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것이었구나!’ 하면서 설득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성령이 우리를 감화시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존 오웬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싸워 이긴 설복”, 그래서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쫓겨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성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더 믿고 이해하려고 하는 정신의 작용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등 스위치 끄고 손에 피가 맺히도록 박수를 쳐서 뜨거워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닙니다. 뜨거워지는 거야 우리가 유튜브에 들어가서 감동적인 영상 하나만 봐도 눈물이 주륵 흐릅니다.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진리로 말미암아 뜨거워지고 변화되는 것이 참된 열정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성의 작용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공부합니다. 그리고 책을 계속 읽고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감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책을 읽고 지식으로 섭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책을 읽고 지식적으로 성장하면 저절로 은혜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감화를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지식을 접하면서 간절한 기도가 병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제가 그런 점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셔서 마음에 설복적인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방식의 사랑인데 우선 ‘힘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은 지성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중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작용이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에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심어놓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단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성화생활을 하면서 많이 느낄 때도 있고 적게 느낄 때도 있지만 항상 이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조차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신자의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서 ‘설복적인 사랑’은 지성을 통해서, 깨닫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에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지식의 추구와 함께 성령께서 나에게 그런 은혜를 불붙여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이런 것들이 초월적인 방식으로, 이것은 크기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지성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아주 초월적인 방식으로 경험되기도 합니다. 또 내재적인 방식으로 자기 안에서 죄의 영향 같은 것들이 줄어들면서 마음이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개인적인 부흥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가 공부를 하고 지식을 하고 교리를 배운다고 해서 이것이 기도를 멀리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간절히 매달릴 때, 그때 하나님이 이런 다양한 방법으로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들은 후에, 각자 자신의 경험을 말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도 공부를 예습을 잘 해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역장이나 순장들이 공과를 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문자나 카카오톡 같은 메시지를 통해서 다음 시간에 나눌 내용을 준비하도록 하십시오. 그런데 간신히 나올까 말까한 사람에게 엄청난 숙제를 해 오라고 하면 그 사람은 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치껏 봐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구역을 인도하고 순을 인도할 때 잘 협력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 사람들을 계속 격려하라는 말씀입니다. 혼자서 하는 공과공부가 되지 않고 늘 말씀드리지만 자기가 말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저 30%, 40%를 넘지 말아야 합니다. 나머지는 그 사람들의 속에 있는 생각을 이끌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읽어봅시다. 정답을 알려드려야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고 이것은 학문입니다. “영적 성장에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은 믿음과 학문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지식의 성장’을 수레에 비유한다면 이것들은 두 바퀴와 같습니다. 이 사실을 고려할 때, 거룩한 지혜에 관한 앎이 증진되기 위해서는 어떤 실제적 조건들이 있어야 할 지 생각해 봅시다. 이에 대한 자신이 경험을 부분적으로나마 진술해 봅시다.”
이것은 영적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지식의 성장과 은혜의 성장입니다. 그 중에서 여기서는 지식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식의 성장은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과 부지런히 성경과 지식들을 섭취하는 학문적인 공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믿고 성경과 다른 지식들을 공부함으로써 지식이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레바퀴의 설명을 보면 바퀴가 두 개가 있어야 수레가 잘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하나가 믿음이라면 이것은 학문, 이렇게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해 보는 것입니다.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다 이야기 한 다음에 이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의 성장, 은혜의 성장입니다. 이 두 개가 영적 성장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은 엄밀하게 말하면 지성에서 시작되고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감정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사실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인식하고 인식된 진리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 여기에서 감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동이라고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마치 돌멩이를 물에 던지면 물이 출렁거리듯이 어떤 사실을 인식하고 나면 여기에 따라서 감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배가 고픕니다. 그런데 제가 강의를 딱 끊고 화면을 쫙 보여주면서 아주 우리 동네에서 맛있게 자장면 하는 집이 있는데 그 자장면 한 그릇을 화면에 그림으로 올리고 그 자장면에 대해서 제가 막 설명을 하면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갈때 자장면을 먹고 갈 마음이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장면에 대한 그림이 들어오고 그 그림이 자기의 욕구와 만나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두 개가 마음 안에서 만나니까 지갑을 열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돈은 그렇게 해서 버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벌려면 이런 공부를 열심히 잘 해야 합니다. 가서 사 먹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제가 약속합니다. 틀림없이 이 중에 오늘 저녁에 가다가 자장면 사 먹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먹고 싶지 않습니까? 옆에 군만두까지 딱 있습니다. 노란 단무지하고 같이 먹고, 자장면을 다 먹고 마지막에 반 토막 남은 군만두로 그릇에 남은 자장을 싹 긁어서 그 만두 속을 젓가락으로 열어서 자장을 채워 넣고 먹고 나올 때 그 기분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가르치고 그것이 마음 안에서 만나서 감동을 불러 일으켜서 결국은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될 때 이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자, 읽어봅시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은 믿음과 학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재밌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습니다. 자장면을 예쁘게 사진으로 뽑아서 자장면에 대해서 실감나게 설명을 해보는 것입니다. 침이 고이고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때 그 작동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자장면에 대한 그림이 당신의 머릿속에 들어오고 그렇게 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면서 자장면의 그림만 보여줬는데도 중국집의 분위이기와 냄새, 조명까지 다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디선가 먹어본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입 안에서 침이 고이고 먹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고 주머니를 확인해서 먹을 돈이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들어오고 마음이 간절히 그렇게 되기를 원할 때, 그때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가 그 말씀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성장을 위한 조건을 이야기 합니다. 성경 계시에 대한 순전한 믿음,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잘 믿는 사람에게 지식의 성장을 주십니다. 그보다 나쁜 사람은 머리는 좋은데 잘 믿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최악의 사람은 머리도 나쁘고 믿지도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최악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가 그런 예화를 책에 쓴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책을 썼는데 지식과 감정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친척 이야기도 한 번 했습니다. 조상들의 묘를 잘 찾아가지 않는 우리 친척이 같이 갔습니다. 거기 가서 너무 오랫동안 아버지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불효자라고 막 울고 있었습니다. 거기 있던 시골 노인분이 “야, 임마! 거기 니네 아버지 산소 아니야!”했더랍니다. 정확히 확인을 하고 울어야 합니다. 온 가슴을 열고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것도 좋지만, 뭐를 정확하게 알고 그 다음에 믿어야 될 것인가? 그것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결정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멘!”하고 믿으면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경 계시를 대해야만 지식이 성장합니다. 따라해 봅시다. “지식의 성장은 믿음을 조건으로 한다.” 그렇습니다. 아멘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그럴 수 있는 분입니다.” 놀라운 기적과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도 나의 삶에 역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아멘!” 그럴 때에 지식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학문에 대한 진지한 탐구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심각하게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전에는 담임목사가 “이 책이 좋다.”고 한 번 광고를 하면 한 200권씩 팔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열린 신문에 광고를 내도 한 40권밖에 팔리지 않습니다. 더구나 더 나쁜 것은 공과공부를 하고 온갖 교재를 교회에서 공짜로 나눠주니까 책을 돈 주고 산다는 의식 자체가 아주 퇴화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지 않던 사람들도 공과를 사러 서점에 가는 길에 그래도 한 권 사서 봤습니다. 그런데 서점이 적자라는 이야기를 이번에 처음 보고 받았습니다. 열린교회 서점 설립 이후로 최초의 일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적자 난 것이 가슴 아픈 게 아니라 얼마나 책을 읽지 않는가를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오죽했으면 몇 해 전에 제직을 임명할 때는 도서관 열람기록을 보자고 했습니다. 몇 번이나 도서관을 이용했는지 말입니다. 저런 지적인 유산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와서 자기 공부나 하고 구역공과 숙제나 하지 진지하게 와서 책 한 권을 펼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에 뭐가 그렇게 바쁩니까? 정말 심각합니다. 진지하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려는 자세가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진리가 우리를 살렸고 우리를 사람 되게 만들었고 앞으로도 우리는 진리의 도움이 없이는 어둠속을 헤매는 소경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경건서적이나 책들을 열심히 읽으면서, 많이 읽지는 못한다고 해도 한 달에 한 권은 읽어야 합니다.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책이 아니라 말입니다. 1년이면 열두 권 읽고, 한 20년 예수를 믿었으면 책꽂이 다섯 칸짜리 두 개 정도는 꽉 채우든지, 둘 장소가 없으면 도서관에 기증하든지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한 주간동안에 다른 것 말고, 선데이 서울이나 이런 것 말고, 만화책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진 책을 대면하고 있었던 시간이 몇 분입니까? 그런 구역장을 보고 구역원들이 뭘 배우겠습니까? 구역장이 지적으로 진리를 계속 탐구하고 알고 싶어하는 것을 구역원들이 보면서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엄마, 아빠가 독서하지 않는 집안은 아이들이 독서 하지 않습니다. 늘 엄마아빠가 TV 앞에 앉아 있으면 아이들이 무슨 도전을 받겠습니까? 엄마는 TV보고 아이들은 컴퓨터로 게임을 합니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집에 가서 책을 읽는 척이라도 하십시오. 일정한 시간에, 아이들 들어올 시간이 되면 딱 앉아서 책을 펴고 “음, 참 좋구만. 아, 그랬구만” 하십시오. 그러면 아이들이, “엄마, 지금 읽는 책이 뭐야?”하면 그때 말문을 트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너 보라고 흉내 내고 있는 거야.” 아이들이 믿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책을 읽지 않습니까? 지금 이것도 세상의 하나의 풍조입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출판사가 문을 닫고 어마어마한 적자를 보입니다. 제가 작가입니다. 20년 전에 팔리는 책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제가 인기 있는 작가인데도 책의 팔리는 양이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제 책이니까 그 정도 팔리는 것입니다. 다른 책은 더 팔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지를 않는 것입니다. 제가 다음 시간에 또 질문할 것입니다. 여기에 적어 놓을 것입니다. “묻자. 책, 읽었수?” 책을 읽으십시오. 그래서 한 달에 한 권 정도는 읽어야 합니다. 열린신문에 소개해주는 책만 꾸준히 읽어도 너무나 좋습니다. 책을 읽으십시오. 그래야 풍부한 지식으로 갈 수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너무 잔소리가 심했습니다.
발견한 진리에 대한 숙고. 숙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익을 숙(熟)입니다. 여기서 오늘 듣고 그 다음에 “아, 기가 막히다!”하며 막 적습니다. 그리고 구역원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아주 매끈하게 잘 이야기가 될수록 구역원들은 ‘저게 아닌데..’하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금방 나오는 것과 이 속에 들어가서 숙성한 것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할머니가 만드신 고추장이 생각납니다. 고추장을 할머니가 만드실 때, 호기심에 한 번 먹어봅니다. 죽습니다. 매운 고춧가루 덩어리인데 얼마나 맵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숙성이 되고 나면 똑같이 매운 그 맛이 처음 익지 않았을 때와는 다릅니다. 설탕도 발효를 시키면 그 단맛이 품위가 있는 단맛이 납니다. 아주 상스러운 단맛이 아니라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이 들어가서 숙고를 해야 합니다. 그게 과연 그러한가? 숙고를 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것이 가슴에 내려오도록 숙고,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삶에서 치열하게 그것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때에 이 지식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네 가지 입니다. 파란 색으로 한 것만 읽어보겠습니다. 지식을 위한 성장의 조건이 첫째, 믿음, 둘째, 탐구, 셋째, 숙고, 넷째, 적용. 다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차례대로, 시작. 믿음, 탐구, 숙고, 적용.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읽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 구역(순) 모임의 마지막 순서는 특별기도회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합니다. 기도제목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의 기도제목만을 가지고 구역원 중 한 명을 시켜서 대표기도를 하게 하십시오. 미리 써 와도 상관없습니다. 짧게 길지 않게, 모든 사람을 잠재우지 말고 한 1분, 아주 길어도 2분이 넘지 않게, 2분도 깁니다. 1분 정도 하도록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기도하고 대표자가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대표자가 기도하고, 이렇게 기도하고 대표자가 기도합니다. 그래서 제목 하나를 함께 기도하는데 1분, 대표자가 기도하는데 1분 정도 하면 2분 정도 걸립니다. 그럼 다섯 가지 제목이니까 10분정도 기도회를 하고 마치면 됩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마지막으로 구역장이나 순장이 같이 간절히 기도하고 마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이 기도가 더 되게 하셨다면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좀 더 기도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구역장, 순장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구역원들에게 공과공부 한 문제가 줄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날이니까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대표기도를 누구에게 배분할 것인지를 잘 해서 하도록 하고 잘 모르는 사람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어서 써 와서 읽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구역공부가 끝나고 나서 찬송을 한 장 부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좋을 것입니다. 찬송 한 장 정도 합심해서 부르고 기도회를 하면 좋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