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 4과
녹취: 김경애
오늘은 제4과입니다. 여기에서는 아름다움과 신학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신학이라고 할 때 이미 1, 2과에서 배운 것처럼 이것은 신학교에서 학과과목을 따라 배우는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지식들을 배워가는 과정을 신학함의 과정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하나님에 관해 배우는 지식이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우리들이 기뻐하는 과정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 과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1번 문제가 나왔습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어떤 사물을 보면 그것이 예쁘다고 생각했거나 사건을 보며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꼈던 경험이 있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느끼게 했는지 지난 주일에 예배에 출석하지 못했거나 구역모임에 못나왔던 사람들이 나누어봅시다.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구역장이 알아서 적당히 시키면 됩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면서 자유롭게 이야기 해보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예뻤을까요? 왜 그것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1번에서는 특별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게끔 경험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토대로 2번 문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 ), 혹은 성품에 관한 지식과 그것들의 그런 ( )에 관한 지식입니다. 이런 말이 무슨 뜻인지 구역장의 명쾌한 설명을 듣고 한두 지체가 자신의 의견을 보태봅시다. 정답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속성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의 시행방식입니다. 그것이 지식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 혹은 피조세계와 관계를 맺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에게 시종일관 따뜻하게 대해주고 배려를 하고 그러면 그 사람이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면 그런 많은 경험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성품, 혹은 속성을 가지신 분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고 그런 속성이나 성품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성경의 교훈이 있습니다. 성경이 있고 이 성경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속성이 어떻게 시행된다고도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식을 습득해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들이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질문을 할 때 한, 두 지체에게 열린 교회에 와서 혹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성품의 어떤 것들을 크게 경험한 적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고가 나서 고통을 받고 병원에 입원을 하고 어려울 때에 기적적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 그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그런 모든 어려운 과정들을 통해서 시행되는 방식을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런 경험들을 나누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이 속성, 혹은 성품 그리고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다음에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돌보시는지를 배워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점점 더 사람다운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속성과 그 다음에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이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과 시행방식을 가장 풍부하게 담고 있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과 시행방식에 대해 풍부한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경을 한편으로 배우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우리가 삶속에서 경험하고 이러면서 삶에 대한 경험이 성경을 살피게 만들고 또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삶을 반성하게 만들고 이렇게 한다면 지식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의견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3번입니다. 정통교회의 신학적 전통은 ‘지식과 사랑의 결합입니다.’ ‘부흥주의에 어두운 유산’을 읽으며 들었던 자신의 생각이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난날 자신의 오해들에 대해 간증을 나누어봅시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가 설명을 하겠습니다. 정통교회의 신학적 전통은 지식과 사랑을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구분은 되지만 2개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정통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전통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동반하지 않는 지식이나 지식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참된 사랑과 지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경건이라고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경건이라고 할 때 이 경건은 반드시 지식과 결합된 경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고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전통교회의 신학적 전통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개혁주의적인 목회는 지식과 사랑이 결합한 형태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교회도 역시 똑같이 학문적인 지식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사상을 배양하고 목회의 실천을 통해서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실천적으로 가르쳐서 그것들을 계승하게 하는 것 그래서 여기에서 축적된 사상과 삶을 다시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후손들은 그것을 계속 발전시키면서 기독교신앙의 토대를 굳건히 해나가는 것이 정통 기독교의 신학적인 전통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그리고 성령의 은혜 이것이 결함됨으로써 우리들이 진정한 아우라가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역사에서 지식과 그리고 사랑, 이 두 가지가 온전한 연합을 이루면서 아주 균형 있게 강조되었던 적은 많지 않습니다. 정통기독교의 역사의 흐름이 이 지식과 사랑의 결합임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어떤 때는 지식으로 치우치거나 어떤 때는 감정으로 치우치거나 이것이 또 반작용으로 지식에 치우치거나 감정으로 치우치거나 이렇게 하면서 진자운동을 계속해 온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부흥주의라는 것은 18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을 중심으로 한 운동 속에서 일어났던 하나의 경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Revivalism라고 이야기하는데 신앙에 있어서 부흥을 강조하고 그리고 어떤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어떤 사상이나 지식들이 별로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이 후에 나오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이런 균형을 잘 이루었지만 후에 와서는 이런 균형이 깨지게 됩니다. 그런 부흥주의적인 전통은 이제 18세기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에서부터 시작되어서 그것이 18세기 19세기에 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찰스 피니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어져오고 무디의 부흥운동, 오순절, 신비주의, 은사주의, 오순절운동 이런 것들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생생한 신앙에 대한 갈망, 근대 선교운동에 이바지했고 어느 정도는 사회개혁운동에도 공헌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측면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 직에 대한 반지성주의적인 전통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목사가 된다는 것은 지성인들이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지성적으로 학문적으로 잘 준비된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해서 그래서 삶에 대한 고민을 녹여내어 사람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것을 제시해주는 것이 말하자면 신학을 한 교육받은 목사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대한 중요성들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이제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서 진리를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직관주의적이고 직통주의적인 경향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신앙의 지성적인 전통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개의 그림이 나오는데 하나는 19세기 무디의 부흥운동입니다. 여기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무디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런 부흥주의적인 경향들은 이런 무디의 부훙운동을 따라서 극단적인 회심과 그리고 성령의 체험을 강조했지만 그렇지만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기독교 사상들을 수립해서 그래서 진정한 한 시대를 해석하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체계적으로 가르쳐주고 설명할 수 있는 지적인 전통들을 교회가 잃어버리게 하는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후에 은사주의로 계승되어서 오순절운동을 비롯한 많은 은사주의 운동 속에서 이런 전통들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연구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 또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체계화하는 이런 기독교의 전통들이 무너지고 그리고 ‘지금 하나님 앞에 무엇을 느꼈느냐? 무엇을 경험했느냐?’ 하는 은사체험들이 강조되면서 기독교의 지적인 전통들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조지 휘트필드는 영국의 전설적인 설교가이고 영국이 산업혁명을 겪은 이후로 나라가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했을 때에 그때에 조지 휘트필드나 요한 웨슬레나 찰스 웨슬레 이런 사람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면서 영국을 새롭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때 18세기에 아주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고 또 이 사람들이 아주 철저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 모본을 보여서 영국사회를 개혁해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조지 휘트필드는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때 주관적인 충동을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주관적인 충동은 종종 상상력의 결과라고 비판합니다. 두 사람은 18세기 미국의 대각성운동에 함께 쓰임을 받았던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고 당시에 유럽에서의 명성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사실은 조지 휘트필드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아주 신중한 철학자였고 그래서 이런 것들을 비판합니다. 그때에 조지 휘트필드는 이런 응답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3번 문제로 돌아가 보면 오늘날 우리가 지식과 사랑의 결합인데 이 사랑과 감정을 강조하고 지식을 결핍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느냐 하는 것을 18세기의 부흥운동과 그리고 그 후에 있었던 우리의 많은 문제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4번을 같이 읽어봅시다. 저자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구속사역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이라고 단언하는 이유에 대해서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핵심적인 이유를 말해봅시다. 한번 실제로 각자 이 문제가 제시하는 바에 대해서 자기 의견을 이야기해보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성경을 많이 읽었으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던 이야기와 깨달은 것들을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됩니다. 그리고 설명을 하면 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기 자신을 알려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셨는데 이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이 계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부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당신 자신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그 지식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지식들이냐? 아니면 매우 특별한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계시는 무엇이냐 하면 불신자라도 접근을 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역사, 자연, 과학, 인간의 경험, 양심 이런 것들을 통해서 뭔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런 개념까지는 들어오지 않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는 지식을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특별계시는 무엇이냐 하면 구원을 받고 믿음을 가지고 접하는 사람들만이 이 계시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한정성을 가져서 특별계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일반계시는 매개체가 자연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연계시라고 부르고 특별계시는 초자연적인 것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타나심, 꿈, 하나님의 비전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특별계시가 많이 있었지만 마지막에 기록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이 특별계시는 성경의 완성과 함께 멈춥니다. 그래서 결국은 특별계시가 훨씬 더 많았지만 마지막에 우리에게 접근 가능하도록 남겨진 것은 성경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성경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보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성경 속에 담았는데 어떤 방식으로 담았느냐하면 구속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긍휼이 여기시고, 정의로우시고, 영원하고, 무한하고,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성경 속에 담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와 사건, 그리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교훈과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이것들을 성경에 담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성경을 안다는 것은 구속사역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과 시행방식에 대해서 우리들이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책입니다. 그래서 고난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하고 힘과 용기를 얻는 과정을 통해서 ‘과연 하나님은 정의로우신분이구나!’ 하는 것을 배웁니다. 악한 사람들이 결국은 멸망을 당하고 혹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진리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보면서 결국 ‘하나님은 진리이시구나! 하나님은 참된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들이 어떤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에 우리의 시선은 모든 영화를 보면서도 항상 따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누구일까? 이 영화의 주제가 무엇일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항상 생각하면서 영화를 봅니다. 그때에 영화가 이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배울 때 하나님이 성경을 왜 주셨을까? 성경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 두 가지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의도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이신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구원사건과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들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의미들을 더 잘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의 교훈이 큰 것이라면 그 성경의 교훈 중에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산의 봉우리가 있으면 봉우리가 내려오면서 산이 넓게 퍼집니다. 그 봉우리를 복음이라고 말하면 그 봉우리에서부터 흘러 내려와서 펼쳐지는 산자락을 우리들이 성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배우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그 위에 있는 파장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입니다. 구속사역은 이미 창세기부터 인간이 타락한 즉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것을 원시복음에서 말씀하시고 그것들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쭉 전개되면서 마지막 말라기에 오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구원하시는지가 전개되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서부터 시작해서 마가복음, 누가복음으로 이어져서 계시록까지 전개되는데 여기는 예수님께서 직접 오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계시면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를 대하시는 그 모든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과 신약에서 사건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구원사건이 있을 때 그 구원사건의 밑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혹은 신약의 교회, 혹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인류를 구원하실 수밖에 없게 하는 그 어떤 하나님의 성품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다루시는 많은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신 지를 배우고 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을 보고 성경의 역사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성품이 실제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속성이라면 이것은 속성에 대한 시행방식입니다. 이 두 가지를 배우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우게 될 때에 ‘정말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정말 하나님은 아름다우신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우신 분이 인신구원의 역사가 정말 아름다운것이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깨달음이 들어오게 되고 그러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영적으로 많이 변화되었던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풍부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그리고 배웁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니까 진짜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그런 의로움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고 신약의 백성들을 다루시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사랑으로 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깨달은 성경의 지식들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이런 지식이 없었을 때는 그냥 자신의 삶을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아주 깊이 개입하시며 나의 인생에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까지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가지고 간섭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감히 이렇게 부족하게 짝이 없는 인간인데도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여 지고 있구나!’ 하는 것에 감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우리들이 볼 때도 항상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 이런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도 우리가 음식만 맛있는 것을 먹고 와도 사람들에게 실감나게 설명을 해서 그 사람도 ‘다음에 거기에 한번 꼭 가봐야지’ 이런 마음을 갖게 만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설명할 때 너무 재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싱겁습니다. 누가 믿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경험하고 그 아름다움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사랑에 벅찬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묘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다 말로 묘사할 수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랑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사람들은 ‘정말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배우게 되는 이유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인생만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제입니다. 읽어봅시다. 5번. 신학이 예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자신이 이해하는 언어로 말해봅시다. 여러분들이 경험한 지성의 개안에 대해 크고 작은 체험들을 나누어봅시다. 그런 적이 있을 것입니다. 눈이 뜨여지는 것처럼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셨구나! 내가 예전에 하나님이 이런 분이신지를 모르고 내 인생을 살았구나! 그래서 내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구나! 그래서 불행할 수밖에 없었구나!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었구나!’ 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어떤 사람은 굉장히 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을 수도 있지만 그런 크고 작은 경험들이 쌓여가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해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한번 여러분들이 볼 때에 교회에 와서 은혜를 많이 받고 뭔가 하나님의 말씀에 눈이 뜨여서 삶이 뚜렷하게 변화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간증하게 해서 잠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런 모든 자신의 삶의 변화와 은혜 그 중심에 이렇게 무지에서 깨어나는 지성의 깨달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사람 저 사람에게 들어보고 여러분들이 마무리를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신학이라는 것을 결국은 거룩한 진리를 다루는 분야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진리와 관계없는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의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가 사실은 끊임없이 신학을 하는 탐구의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떤 신학공부 또 하나님의 아름다움, 거룩한 진리라는 것도 결국은 마지막에는 그 거룩한 진리들이 많이 있다고 칩시다. 그것들이 어디서 옵니까?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결국은 진리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파생적인 아름다움이고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이 아름다우니까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이 진리들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 속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진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이 세상에 있는 것들보다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불행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마음은 처음부터 우리의 마음은 창조될 때에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의 아름다움에 감격하게 하기 위해서 마음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주신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 이외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것들을 추적해서 올라가보면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분이기 때문에 이것도 결국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아름다움이 그냥 이것 자체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인데 그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아름다움에 대한 근원을 찾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입니다. 그래서 모든 아름다운 것 심지어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아름다움이 모든 아름다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님의 존재에 비추어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을 오히려 아름다움에 현혹되었기 때문에 진짜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서 표시하는 것처럼 결국은 하나님이 아름다우시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감각이 깨어있을 때 그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진리를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영원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할 때 결국 우리는 육체를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서 결국은 참된 아름다움을 찾는 대신 거짓된 아름다움을 찾아감으로써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배향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의 고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은 참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그리고 참으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예전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있던 것과는 다른 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삶의 모든 질서들이 다 재편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니까 사람들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그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그 사람들을 사랑으로 묶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 사람들이 교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훈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게 되는데 아까 가르쳐드린 바와 같이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일까? 그리고 이 사람들이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것이 맞구나!’ 이것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기도제목이 나옵니다. 이제 우리들이 이 시간에 같이 기도할 때 세 가지 기도제목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우리들이 지난 주일부터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는 시리즈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구역장과 순장 모든 구역원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신앙에 대한 갈증이 생겨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달라고 같이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주시고 오늘도 이처럼 주님 앞에 나아와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갈망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구역장들이 먼저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주님을 사랑하기를 갈망하고 또 구역원들에게, 순원들에게 이런 주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주셔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주님 앞에 간절히 갈망하도록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을 갈망하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 앞에 간절히 주님 앞에 간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우리 구역장과 순장들이 먼저 성경공부를 한 구역모임에서 먼저 이런 갈망이 생겨나도록 더욱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가장 뚜렷한 표지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역식구들이 그리고 순원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그래서 은혜를 받도록 다시 한 번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구역식구들이, 순원들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지식에만 빠지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도록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매어 달리도록 은혜를 내려주시고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도록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 앞에 기도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메마른 심령을 가진 사람이 은혜에 넘치게 해주시고 어려운 삶의 상황 속에서 주님께 간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셔서 주님께 기도의 응답을 받도록 역사해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우리의 구역식구들이 많이 깨달으며 더욱 기도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아버지 앞에 매달리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에는 잃은 양을 찾도록 그래서 오랫동안 예수를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 구역원들, 순원들 그리고 또 우리교회에 나온 적은 없지만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 아름다움을 전해서 그래서 주님께 나아와 은혜를 받고 다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우리가 같이 전도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사오니 감사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까지도 방황하는 지체들이 많이 있고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미끄러져 교회에 나오지 않는 지체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받고 변화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이 사람들 하나하나를 구원하여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저희를 붙들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은혜를 내려주시고 붙잡아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들을 살리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주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붙들어주시고 도와주셔서 온전히 잃어버린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 계절이 되도록 복주시옵소서. 이 일을 위하여 구역식구들이, 순원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할 때 하나님 놀라운 은혜의 간증을 드러내주시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시기를 간곡히 빌고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와주시기를 빌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제가 다 다음 주일날 월요일부터 GMS선교사 태국집회가 치앙마이에서 있는데 비행기가 월요일에 없습니다. 그 비행기를 타면 집회시간까지 갈수가 없어서 주일 밤비행기로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구역장, 순장들은 영상을 통해서 강의를 듣게 되겠는데 여러분들은 오늘 실제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서 직접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번과도 은혜롭게 아주 잘 가르쳐서 구역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구역장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