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 5과
녹취자: 원수연
5과 신앙과 신학을 얘기하겠습니다. 같이 한번 문제를 읽어봅시다.
문제 1) 인간이 지식을 획득하는 두 가지 수단은 무엇입니까?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은 무엇입니까?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고 오신 분이 있다면 그 책을 읽은 소감을 나누어 봅시다.
이런 것은 미리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숙제를 내주면 좋겠죠? 모두 다 읽을 필요는 없고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1417년에 어느 수도원에서 다 낡은 책 한 권이 발견됐는데 그게 바로 루크레티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발견을 사실은 르네상스의 시작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발견은 당시에 엄청나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책이었는데 이 책은 지금 봐도 깜짝 놀랄 정도로 자연세계가 아주 엄격한 질서와 규칙을 따르는 세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보여주어서 무슨 신비한 어떤 힘이나 신의 움직임이 아니라 예측할 수 있는 인과관계 속에서 모든 만물들이 생성되고 현존하고 소멸한다고 하는 합리주의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다행히 이것이 아카넷이라고 하는 출판사에서 고전총서로 번역이 되어 나왔습니다. 합리주의적 기계론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간이 지식을 획득하는 수단이 있는데 이성과 신앙입니다. 튜리튼 같은 사람은 여기에다 하나 덧붙이기도 하는데 그게 바로 감각입니다. 감각적인 사물들은 우리들이 감각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크기, 모양, 색깔,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보아서 알고 무르고, 딱딱하고, 차갑고, 뜨겁고 하는 것들은 만져보면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감각, 이성, 신앙, 그런데 사실 이런 감각도 마지막에 이성으로 해석을 하니까 크게 보면 이성과 신앙, 두 가지에 의해서 지식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두 가지가 온전했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이성이 서로 충돌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사물들을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이 두 가지가 훌륭하게 순합이 되면서 인간이 창조되면서부터 즉시 어마어마한 지식들을 바깥으로부터 흡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학문이나 이런 것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온 측면도 있지만 폭발하듯이 한 번에 인류가 태어나자마자 엄청난 지식을 획득하게 되고 그러면서 창세기 4장에서 건축들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건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한두 가지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미술, 기하학, 건축, 수학, 물리학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동원이 되어야지만 큰 건물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폭발하듯이 그렇게 지식이 팽창하게 되었고 그런 데 있어서 인간의 이성과 신앙이 하나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지식습득 능력을 엄청나게 증대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관해서는 합리주의와 신앙주의가 있습니다. 합리주의는 인간의 지식 범주 안에 들어와서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을 지식의 가장 중심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신앙은 얼마든지 초월적 사실들이 있을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은 우리가 인간의 맨 이성으로 알 수 없고 믿음에 의해서 순합한다는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을 신앙주의라고 우리는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리주의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데 진리 판단의 최종적인 근거가 이성의 합리성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원인과 결과 이런 것들이 이치에 맞는 합치성이 있을 때 이것들을 가능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성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얻은 지식은 거절하거나 아주 낮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기독교에 적용을 하면 성경 계시에 대한 합리주의적인 이해를, 그러니까 이성을 신앙보다 훨씬 우선시합니다. 기독교적으로 적용하면 계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일부 계시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합리주의적인 이해를 신앙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조가 바로 합리주의적인 기독교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신앙주의는 진리는 이성이 아니라 성경 계시에 대한 믿음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서, 특히 성경 계시를 통해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 구원의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초월적 사실에 대한 파악은 신앙에 의해서 알려진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의 이성을 훨씬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의 이성으로 닿지 않는 초월적인 사실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것들을 기초로 우리들이 파악할 수 있는 이성적 사실들이 탐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합리적인 근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서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이런 것들은 이미 우리 교육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무슨 뜻이냐면 어린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이성의 능력이 생겨도 엄마가 해 주는 밥 맛있게 먹습니다. 거기에 독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엄마는 나를 사랑하고 좋은 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경우에 따라서 잘못된 교육을 받아도 아이들은 그것을 사실로 알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교육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올바른 판단력,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자녀들도 올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때 필요한 것은 부모와 자식 간에 완전한 신뢰, 그것을 통해서 가르침이 흘러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사람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비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카르타고는 유명한 사상가들을 많이 배출한 도시이고 굉장히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이런 것들에 있어서 굉장히 발달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삼위일체(Trinity)’를 비롯한 많은 중요한 신학용어들을 고안해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하는 이 사람이 쓴 유명한 책이 있는데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뭐냐면 “불합리하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약점이 될 수 없다. 왜? 불합리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진리를 기독교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이런 역설적인 논리를 가지고 기독교를 변증한 사람입니다. 은혜로운 구절입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만한 것입니다. 무덤에 묻히신 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확실한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불합리한 것들이 많이 담겨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성경이 믿을만한 한 중요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만약에 인간에게 좋은 호감을 사려고 하면 인간의 이성으로 그럴싸한 이야기로 나열했어야지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아서 이것은 믿을만하다. 어떤 초월적인 사실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는 그런 초월적인 사실들과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 이해 못 하는 것이고 다 이해를 못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을 생각하고 자기를 신뢰함으로써 그 사실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그 지점이 우리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지점이다.”라고 역설적인 논리를 펴는 것입니다.
자, 2번입니다.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문제 2) ‘신앙과 이성의 관계 해석사’를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이나 인상 혹은 정리된 생각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이 주제와 관련된 교회의 역사에 대해 우리 교구의 교역자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나눠준 도표를 보면서 이해를 되다집시다.
이것은 교역자가 잘 정리해서 A4 용지 한 장에 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한번 쭉 읽고 그 표를 가지고 쭉 해서 그것을 복사해서 구역원들에게 나눠주면 됩니다. 그러니까 교역자 한 사람이 잘못 정리를 하면 구역원 전체가 고통을 받겠죠?
자, 이제 여기에 매우 중요한 표가 나오는데 잘 보이십니까? 안 보이죠? 잘 보입니까? 다행입니다. 전 잘 안 보이는데. 그러면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게 절대적으로 맞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고 어디서 베낀 것도 아니고 대충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그린 것입니다. 위에는 신앙이고 아래는 이성입니다. 위로 올라가 있으면 신앙 쪽으로 치우친 것이고 아래로 내려오면 이성 쪽으로 치우친 것입니다. 보십시오. 몬타누스주의 같은 경우는 어디로 가 있습니까? 이성으로 튕겨져 나가서 신앙 쪽으로 많이 가있죠? 그 다음에 신앙우위, 여기는 신약성경에 성령강림사건 이후에 균형을 이루다가 초대교부시대에 와서는 이렇게 신앙우위로 올라갑니다. 여기에 영지주의나 마르키온주의들이 있는데 다 설명하면 여러분이 다 기억하겠습니까? 그래서 인터넷에 들어가서 영지주의나 마르키온주의 쳐보시면 됩니다. 아니면 보다 더 믿을만한 건 브리태니커에 들어가셔서 찍어보시면 훨씬 더 이해할만 할 겁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초대하고 중세를 가르는 분깃점입니다. 그 때까지 디오니시우스, 신비주의 철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했던 인물입니다. 시벨리우스, 양태론자입니다. 아리우스, 이 사람은 이 시대 때 태어났다는 게 아니라 아리우스주의입니다. 앞선 세대의 사람입니다. 펠라기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인물입니다. 이런 것들이 운동이 일어나면서 신앙 쪽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수도원 운동은 저 위로 올라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화를 이루다가 중세 초기에 와서 신앙 쪽으로 갑니다. 그래서 수도원-교부들의 신학과 철학을 존중하고 깊이 있는 신학을 전개하지만 여전히 신앙 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다가 스콜라주의 신학의 전성기에서 이성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슬람 철학이 유입되면서 지성주의적인 경향이 아주 고조에 달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되냐면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중에 기독교가 국교화 됩니다. 그러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책들을 다 금서로 지정을 해서 모두 다 정리해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역사가 흐릅니다. 그러다가 6세기 7세기 되면서 마호메트교 이슬람들이 세력이 확장되면서 스페인을 점령하게 된 것이 7세기경의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아는 바와 같이 오스만터키 제국이 아주 커다란 사라센 제국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슬람의 세력이 떨쳐지게 되는데 그 이슬람이 엄청난 문명을 자랑하게 됩니다. 이 때 주후 10세기에 십자군전쟁이 일어나는데 십자군전쟁이 일어나서 기독교도들이 이슬람을 쳐들어가버렸습니다. 그 때는 교회에 의해서 이슬람교도들은 개, 돼지 같은 야만인들이라고 배웠는데 들어가 보니까 엄청나게 학문이 발달하고 특히 과학이 자기들보다 훨씬 앞서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유럽에서 대학의 출현을 12세기로 봅니다. 대학이 처음부터 이렇게 생긴 것이 아니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생겼다가 그것들이 나중에 대학으로 넘어오는데 그것을 아주 거슬러 올라가봐야 12세기 정도로밖에 안 봅니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10세기 중반까지도 올려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거의 2세기 차이가 나니까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면 이 사람들이 스페인에 쳐들어가서 차지했는데 거기서 엄청난 양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발견됐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서들이 발견됐습니다. 그것을 한번 해독해가지고 보니까 엄청난 지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도서관에 가서 우리 퓨리탄 도서관에는 책이 없습니다마는 도서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그 분이 50 몇 권정도의 책을 썼는데 그것을 보면 우리 인간이 지식에 관해서 탐구하고 지식을 담기 위한 기본적인 도구들을 거기다가 다 달았습니다. 철학, 형이상학부터 시작을 해서 자연학, 심지어는 의학, 시학, 미학까지 광범위하게 다룹니다. 그래서 서구라파 유럽에서의 인간의 지혜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정점으로 모이고 거기서 다시 정리가 되어가지고 확 확산되면서 서양문명의 어떤 토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게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했냐면 고전 그리스도어로 된 것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이론을 펴는 사람도 있는데 스페인에 실제로 그 당시에 지혜의 집이라고 하는 도서관을 세워서 그 때 모아놓은 책이 40만권이었다고 하니까 그 당시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어마어마한 책들을 모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희랍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서 그리스의 문헌을 양피지에다가 아랍어로 번역을 해가지고 오면 그것을 저울에 달아서 그 무게만큼 금을 주었답니다. 물론 이것도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중시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번역한 사람들이 누구냐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냐면 네스토리우스파,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이단으로 정죄되어서 쫓겨난 그 사람들이 이동을 했는데 그것이 아랍제국이 되면서 그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고 거꾸로 아랍에서 이용해서 이 사람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면서 그리스의 문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책들을 번역을 해서 아랍 학문에 기초를 놓습니다. 이 때 유명한 사람이 아베로에스, 아비체나, 이런 사람들이 이슬람 안에서 정치학에 학문을 발전시킵니다. 거기서도 똑같이 이성과 신앙 사이에 논쟁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계속 생깁니다. 그래서 알파라비, 알가자리, 아비체나, 아베로에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엄청난 논변들이 펼쳐집니다. 그러한 작품들을 통해서 기독교가 그 사람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엄청난 학문의 체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위 얘기하는 스콜라주의라는 것이 꽃피고 그것을 집대성한 사람이 기독교계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인물입니다.
그러면서 둔스 스코투스 같은 사람이 나오고 종교개혁 전야인 중세 후기에 들어가서 오컴 윌리엄, 오컴이나 쿠자누스 같은 사람이 신앙의 지위를 강조하고, 쿠자누스 같은 사람은 아주 급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이미 그 당시에 벌써 종교다원주의를 이야기할 정도로, 그리고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한 에큐메니즘, 그러니까 모든 종교와 이런 사상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성으로 치우쳤던 것들이 반동으로 튕겨져 나가면서 신앙 쪽으로 가면서 여기에 계속 내려오던 신학과 철학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사실은 그 때까지 지배했던 실제론이라고 하는, 여러분 학교 다녔을 때 다 배웠을 것입니다. 실제론, 유명론, 관념론, 이런 거 다 배웠습니다. 실제론의 사상체계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컴에서 유명한 것은 유명론입니다. “어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은 전부다가 아니라 그 후에 그것의 참 모습은 어떤 실제, 이런 것들이 있다. 우리들이 학교 다닐 때 배운 이데아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러던 것들이 옛날의 가르침이었다면, 그것으로부터 사유를 통해서 거꾸로 내려와야 된다고 배웠다면, 오컴 같은 사람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은 이름을 가지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사물들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이것을 대면하고 여기서 우리들이 사유를 출발해야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실제론은 플라톤에 가깝고 유명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가깝다고 우리들이 해석을 합니다. 이런 중세의 균열이 일어나면서 종교개혁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컴이나 쿠자누스의 의견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부분적으로 중세의 실제론을 공격하는 그러한 사상 속에서 많은 힌트를 얻고 부분적으로 그것을 차용해서 중세신학을 공격하면서 종교개혁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식과 경건의 결합을 강조하면서 모처럼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서 정통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약간 이성 쪽으로 회귀하기는 하지만 다양한 층차에서 학자들마다 입장들이 다양한 층차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루터교 내의 운동들, 네덜란드 제2 종교개혁, 오늘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얀세니우스주의나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 같은 데서는 신앙 쪽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성주의로 오고.
지금은 어떻게 됩니까? 헷갈리죠. 극단적인 신앙주의를 강조하는 오순절주의나 신비주의부터 시작을 해서 아예 기독교의 모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초월적인 진리들을 다 부인해버리는 극단적인 이성주의까지, 우리처럼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람까지,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함께 공존하고 있고 갈등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이고 이런 갈등을 일으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무신론적인 세력들이 현대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생각하면서 선교와 전도에 대한 깊은 각성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번 재미삼아서, 제가 읽고 왔는데 어렵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번쯤은 정리를 해봐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한마디 하면 거기에 혹 넘어가거나 주저앉거나 그러지 않고 그런 거거든요. 신천지 같은데서 하는 이런 것들은 사실 이런 분류에서 아주 괴상한 형태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건전한 이성으로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그러나 또 어떤 진리로 믿어야 하는 초월적인 사실들을 정직하게 제시하지 않는 그래서 믿음과 이성의 관계를 아주 자기 자의적으로 사용해서 이단 사설들을 퍼트리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토대를 가지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도서관에 가서 이성과 신앙, 그러고 찾아보면 엄청나게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성은 남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있을 때 청년부를 했는데, 청년부가 한 60명 모였습니다. 제가 간 지 얼마 안 되서 갑자기 아이들이 늘었습니다. 갈 때 맨 처음 다섯 명쯤 모였는데 일 년 정도 사역해서 60명 정도 모였습니다. 여름수련회 때 특강을 하는데 몇 사람 강사를 불러서 그룹특강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데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부흥’ 등등이 있고 그 중 ‘이성과 계시’가 있었는데 청년들이 거기로 다 몰렸습니다. 이성과 계시가 얼마나 어려운 주제인데 얘네들이 거길 그렇게 가나 그랬더니 그 이성이 남녀인 줄 알았답니다. 짜증나죠.
3번 읽어봅시다.
문제 3) 저자는 경건의 핵심을 하나님께 대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 ( )과 주관적 ( )의 결합으로서의 열매입니다. 헨리스쿠걸의 인용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헨리스쿠걸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입니다. 이게 번역이 됐나요? 번역이 됐을 수도 있을텐데. 교역자 몰라요? 번역됐죠? 이게 아마 지평서원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유명한 책이냐면 18세기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휘트필드가 이 책을 읽으면서 회심을 합니다. 사연이 굉장히 많은 책입니다. 이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조지 휘트필드, 존 웨슬리, 제임스 패커 등에게 신학적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이 책을 영어 원서로 읽었는데 굉장히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냐면 한 친구를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그것을 기초로 출간된 책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있는 많은 신앙의 오류를 바로잡으면서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설명한 것이 바로 이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 중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신앙에 대해 말할 때마다 참으로 서글픈 사실은 신앙이 있는 체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교파에 따른) 정통의 개념과 견해에 대한 이해로 보는데, 그들이 신앙에 대해 줄 수 있는 모든 설명들은 자신들이 이런 저런 신념(persuasion)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불행히도 분리된 수많은 기독교 교파들 가운데 하나에 속했다고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신앙을 외적인 의무들을 실천하는 지속적인 과정, 의무들을 수행하는 모델처럼 인간의 외적인 면에 둔다. …… ”
이것은 율법주의적인 기독교가 되겠죠. 그 앞에 있는 것은 분파주의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이 뭐냐?” 그러고 얘기하니까 “장로교회다.” 그럼 장로교가 아닌 것은 교회가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장로교가 아니고 감리교도 기독교고 그리스도안에 한 형제입니다. 그러나 장로교가 훨씬 성경적인 교회 정치제도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감독제도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침례교 사람들은 회중제도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냥 물을 뿌리면서 세례를 줘도 된다고 믿지만 저 사람들은 물속에 텀벙 담그기 전에는 세례 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어떤 견해이지 그것이 전부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뭐냐고 이야기할 때 자기 교파에서 믿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자기네 교파가 무엇을 믿는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신앙에 대한 충분한 언급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는데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사랑, 그래서 객관적인 지식은 성경과 학문을 통해서 습득하고 주관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따로따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경건이라는 것이 성립하게 되는데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과정이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 되어가면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 자라서 싹이 나고 거기서 번성하게 나무처럼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읽어봅시다.
“참된 신앙의 자리는 인간의 마음이며 신앙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 제가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연합은 존 오웬에 따르면 두 가지 연합이 있는데 하나는 원리적인 연합이고 하나는 실제적인 연합입니다. 원리적인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분에게 접붙여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충만한 생명을 우리들이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원리적인 연합이고 이것은 한번 맺어지면 결코 해지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연합이 있는데 이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그 연합은 해이애지기도 하고 단단히 결속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인데 이 실제적인 연합의 정도는 성화의 정도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매일매일 자기를 꺾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고, 은혜 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끊임없이 신학을 탐구해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가야 될지를 깨닫고, 이렇게 하면서 성장할 때 제일 큰 혜택을 보는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이런 실제적인 연합들이 증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들이 지식을 습득한다고 할 때 우리들이 보면 여기는 가지계입니다. 지성으로써 알 수 있는 세계이고 여기는 가시계, 눈에 보입니다. 그러니까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육체가 있고 영혼이 있습니다. 마음은 어떻게 보면 이런 육체와 영혼 사이에 걸쳐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지금 이렇게 이런 마음이었는데 갑자기 불이 전부다 꺼지고 캄캄한 게 되면 마음이 이상해질 겁니다. 아니면 이 색깔이 전부다 시뻘건 색깔로 변해버린다면 마음이 또 달라지겠죠. 등등 이런 물질적인 것에 의해서도 우리의 마음이 아주 시시각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건축가들이 미래의 실내장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벽지가 없어지는 시대가 온답니다. 거실이 거대한 디스플레이로 되어있고 이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현관에 번호를 누르고 딱 들어올 때 전자가 나와서 이 사람의 호흡이나 맥박 이런 모든 것을 측정하면서 감정상태가 어떤지를 판단을 해서 AI가 그 사람의 데이터베이스를 모두 정량해서 딱 들어오면 거실의 벽이 낙엽이 막 떨어지는 가을 풍경으로 변한다든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풍경으로 변한다든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마윈이 스마트카를 중국에서 내놓았습니다. 실제로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전부다 축적해서 가는 것입니다. 드라이버가 운전을 하면 드라이버를 보면서 데이터베이스가 AI로 구성이 되어서 가면서 “커피 드실래요?”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많이 입력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시간에 커피를 좋아하는지 이런 것들을 다 데이터 해놓았다가 먼저 기기에서 말을 걸어오는 것입니다. “커피 드시겠어요?” “응.” 그러면 “아메리카노 드실래요? 아니면 모카커피 드실래요?” “아메리카노.” 그러면 조금 있다가 ‘띵’ 하고 오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2km 앞 휴게소에 지금 전화로 주문해놓았고 5분 후에 도착하시면 따뜻한 커피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제가 10년 전에 예언했던 것입니다. 진짜에요. 김남근 장로님이 증인입니다. 그런 식으로 차가 발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인간의 마음이 인간의 물질세계, 정신세계에 모두 걸쳐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까 결론이 뭐죠? 결국은 객관적인 지식은 성경과 학문을 통해서 주관적인 지식은 은혜, 그래서 결국은 이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식입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했습니다. 여기 도서관 지어놓았습니다. 어제 밤 11시까지 직원들이 고생고생해서 개통을 해놓았습니다. 책을 빌려가게 하려고. 경기도에서 저런 도서관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수시로 와서 책을 빌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저것만 다 읽으려고 그래도 일주일에 한 권씩 읽어도 70년이 걸립니다. 하루에 한 권씩 읽으면 딱 10년 걸릴 책입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권 읽으면 70년 걸리는 거죠. 여러분 죽을 때까지 읽어도 다 못 읽습니다. 그런데 책 계속 들어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저런 시설을 만들어 놓았으면 계속 가서 습득을 하면서 책을 읽고, 집안이 복잡하면 조용히 나와서 아이들 학교 보내고 일주일에 두 시간씩 두 번 정도 책 읽는 시간을 만들어서 조용히 와서 거기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 지식을 습득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구역장들 중에서도 여러분 보면 구역원들 가르치다보면 이상하게 견고하게 신앙이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고 잘 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사람들입니까? 말씀을 열심히 배우는 사람들이고 설교를 잘 듣고 책을 읽는 사람들입니다. 감정을 따라서 오늘 펄펄 은혜 받았다가 내일 다 때려치우고 이러는 사람들 중에서 구역장 속 썩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옛날에 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배워나가는 것이 우리 신앙에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렇게 강조해서 가르치는 교회가 없지는 않지만 우리는 아주 예외적으로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어제 목사님들 왔을 때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 가지고 구역공과 한다고 하니까 넘어가시더라구요. 자기네도 어렵게 읽는 책인데. 우리 다 공부하잖아요.
나는 소원이 그런 책들을 중고등부에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얘네들 무시하는데 무시하지 마십시오. 14살 먹은 애가 펑펑 울면서 나는 누구인가 묻잖아요. 걔네들도 다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걔네들이 접하는 모든 지식의 체계들이 얼마나 그것에 대해서 답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실제로 걔네들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이끌어내십시오. 그게 교육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진짜 열심히 그렇게 여러분이 공부하고 습득하고 이러면서 신앙을 발전시켜나가고 이런 것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서 그들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세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4번.
문제 4) 지성과 의지의 관계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대한 구역장(순장)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어때요? 지금 여기서 나오는 것들만 정리를 해도 훌륭한 정리가 됩니다. 그러지 말고 성의가 없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차분히 앉아서 책을 잘 읽으면서 어디서 베끼지 말고 자기가 한번 깨끗이 정리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표를 만들어서 구역원들에게 주면 자기도 공부가 되고 구역원들에게도 성의 있어 보이잖아요.
그 앞에 보면 대표적인 인물 셋이 나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주지주의죠. 지성주의. 지식이 의지를 지배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반대의견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전통적인 견해였죠. 전통적이라기보다는 중세시대에 아주 우월한 견해였습니다. 둔스 스코투스는 인간은 그렇게 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지성에 의해서 의지가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불뚝불뚝 솟아나는 그런 의지가 오히려 지성을 지배하면서 움직이는 존재다. 오늘날의 현대사상하고는 굉장히 맞닿아있는 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둔스 스코투스는 아우구스티누스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양쪽의 지성을 강조할 것이냐, 의지를 강조할 것이냐는 점에 있어서 자기도 굉장히 정신적인 방황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조화점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기독교적인 설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선 뭐냐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지성에 대한 의지의 전적인 의존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아는 것을 그대로 행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더욱이 악한 것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지성이 선한 것을 다 가르쳐주어도 우리가 그렇게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안 움직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목 위에 따로 움직이고, 가슴이 따로 움직이고, 가슴 이하 다 따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우리는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그것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실제로 경험하면서 사실은 토마스 아퀴나스적인 이런 주장,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가 훨씬 후대의 사람이지만, 그런 지성 우위적인 그런 의지의 의존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떤 거냐면 이런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죄성이 있고 또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있을 때 인간의 의지가 거기에 복종한다는 것을 또한 이 사람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어떤 결론을 이루게 되는 거죠? 우리가 선을 행했을 때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에 먼저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 선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 다음에 우리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자신을 칭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악을 행했을 경우에는 반대입니다. 악을 행했을 경우에는 하나님이 악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의지 자체가 부패했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했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자기를 악을 행하게 했다고 그렇게 논리를 펼치거나 심지어는 마귀가 힘을 발휘해서 자신에게 그런 일을 했다고 하면서 책임을 면탈하는 그런 일들은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질문하십니다. “너 왜 선악과를 따 먹었냐?” 아담이 뭐라고 그럽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하게 하신 저 여자 때문에 자기가 먹었습니다.” 웃기죠. 안 먹으면 되지. 자기 의지로 한 거죠. 여자에게 물어봅니다. “왜 그랬냐?” 그러니까 “뱀 때문에 그랬습니다.” 뱀은 인격체가 아니죠. 두 사람의 대답에 대해서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하십니다. 말이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너희 인간에게 내가 준 고귀함이 바로 그렇게 자기가 지신의 삶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의 의지를 결정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떻게 보냐면 하나님과의 의지의 일치에서 오는 전인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죠? “인간이 진정한 자유로운 주체로 사는 비결은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일치는 까리따스 사랑에서 비롯되고 그래서 결국 인간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 의지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만 주님의 사람일 수 있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순종한 것이 있다면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시는 그 선행하는 은혜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사상이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입니다. 성경의 사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어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까.
그 다음 신앙의 자리가 무엇이냐?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결국 이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 안에서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 모든 것들이 함께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지성과 감성과 의지, 이렇게 나누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감성은 의지 쪽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난 에드워즈는 이것을 이렇게 셋으로 구분은 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이것은 두 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을 느낄 때 기분이 좋다, 좋다, 이 얘기는 뭐냐면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다거나 그것과 같이 있고 싶다는 의지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제가 여러 번 담배 예를 들었잖아요. 담배 끊은 지 3년이 됐는데도 그 연기가 너무 좋은 겁니다. 내가 의지적으로 담배를 끊고 있지만 어떤 한편 의지로는 사실 그 흡연에 가까이 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싫습니다. 완전히 싫습니다. 담배 냄새를 맡으면 기겁을 할 정도로 싫습니다. 토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때요? 완전히 싫어진 거죠.
존 오웬도 설명을 하기를 하나님이 어떤 사물들을 판단하게 하실 때 우리가 그 사물을 보면서 이것이 좋다, 나쁘다, 아름답다, 추하다, 이렇게 생각하게도 만들지만 또 하나는 마음이 이끌리고 안 이끌리게 만드셔서 그 사물에 대해서, 어떤 행위에 대해서 인간이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영향은 지성, 의지, 감성 모든 것에 다 나타나는 것이지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막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박수를 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성과 의지를 포기하고 감성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이고 어느 한 부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 전체가 변화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자리가 변화될 때 하나님의 교회와 이웃과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 5) 은혜 상태로부터 부패해 본 경험을 우리 모임에서 가장 최근에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 지체들부터 나누어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는 신학공부의 과정 속에서 ‘진리에 합치하는 삶’의 중요성에 관하여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나누어보시고, 세상과 현세적인 가치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초월적인 가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이 마음 사이에 걸쳐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인간의 마음은 악한 의지와 선한 의지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의 경우는 기본적인 마음 자체가 악한 것입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우리보다 더 도둑질을 많이 하고 나쁜 짓을 한다는 그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받아들인 세계관이 착하게 살고 절제하고 그런 것이라면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 믿고 옛날에 유교를 믿었던 어른들 얼마나 절제력이 뛰어납니까?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보다 절제력이 더 뛰어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교육받기 나름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이 선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할 때조차도 이 선은 항상 역사합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 이야기할 때 불신자는 악을 행할 때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짓지만 이 사람은 복합적인 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복합적인 의지라는 것이 의지가 둘이라는 게 아니라 의지의 한쪽 국면은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려고 하는데 의지 한 측면은 튕겨 나와서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보십시오. 진리가 이렇게 있습니다. 진리가 있고 그 다음에 삶이 여기에 딱 붙어있을 때도 있지만 여기서 멀리 떠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로 갈 때도 있고 여기로 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서 이탈하게 되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편하질 않습니다. 그게 뭐냐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그 진리가 여전히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가 얼마 전에 작년이었나요? 여러해 전에 사람을 살인한 살인범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공범이 암에 걸려서 마지막 죽어가면서 병상에서 경찰에 자수하고 자기가 몇 년 전에 있었던 살인사건의 공범이고 같이 죄지은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다 실토하고 죽었습니다. 몇 시간 후면 죽는데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뭡니까? 인간의 양심 속에 반영되는 진리의 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양심을 느낄 때, 그 양심이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양심이라는 것도 얼마든지 도덕사회에서 변화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 환경에 따라서 약물이나 이런 것들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그런 양심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진리의 반영이라고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시대의 국가가 아이들에게 도덕을 교육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면 건전하고 보편적인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퀴어축제라든지 동성애에 관해서 관용적인 드라마라든지 그런 소설이라든지 심지어는 여러분 아이폰이나 스마트폰에 보면 이모티콘 보잖아요. 옛날에는 남-녀 이렇게 나오는데 남자-남자, 여자-여자, 이렇게 나오는 것도 많습니다. ‘내가 너 사랑해.’ 그러면서 남자-여자만 나오는 게 아니라 남자-남자, 나오는 겁니다. 여자-여자 나오고. 벌써 그런 것들을 광범위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독교에서 차별법 같은 것들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반대를 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런 것들이 상식적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나면 양심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그림을 보면 이렇게 벗어납니다. 다시 돌아옵니다. 이렇게 진리에 이 사람의 마음 자체가 합치된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들만 쓸 수 있는 용어입니다. 도둑이 도둑의 심보를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냈다고 해서 우리는 진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쁜 놈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을 때 “저 악한 자가 드디어 진실해졌다.”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것은 선과 진리, 이것을 전제로 해서 우리들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존재의 아우라라고 하는 것은 결국 진리에 합치하는 한 신자의 진실성의 힘입니다. 그 진실한 삶을 보면서 정말 진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삶이 행복하다는 것,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