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공부하고 목회할 것인가
녹취자 : 김미현
(나눔) 저는 우리 목사님이 열린교회 목회하고 있는 이런 모습들은 일반적인 한국교회의 목회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들에 대한 여러분의 감상, 느낌 이런 것들을 말씀하면서 개교회의 실제 목회에 어떤 식으로 적용될 수 있을까 그런 부분들도 훌륭한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한번 얘기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눔) 교회에 대해서 장목사님께서도 사역하셨던 교회이기도 해서 심정적인 친밀함도 있었고 나름대로 설교를 듣는다든지 열린교회에서 스터디하는 친구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면서 열린교회에서는 이런 사역들을 하는구나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는데 오늘 보면서 훨씬 큰 그리고 더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그런 인상이 있었고 마지막에 신학교 사역 같은 경우에는 사실 물론 열린교회가 어떻게 보면 큰 교회로 갈 수 있지만 한국의 유수의 대형 교회에 비하면 큰 교회가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큰 충격인 느낌을 받았고 감사하였습니다.
(나눔) 평소에 우리 목사님 뵙지 못하고 이런 내용을 알지 못할 때 막연하게 생각했었던 것들과 오늘 와서 이렇게 보는 것과 어떻게 달랐는지 이런 것들도 사실 우리가 새롭게 깨닫게 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도 얘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눔) 몇 년 전인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은데 교회에 사경회 때 오셨을 때 따로 한번 모여서 이야기를 한번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통렬한 말씀을 하신 것이 있습니다. 나름 그 자리에 모인 목회자, 사역자들이 나름대로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고 한편으로는 사명감 한편으로는 약간 교만함 같은 것들에 대해서 목사님이 지적하시면서 과연 우리가 기성교회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이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교회의 바른 대안이 될 수 있느냐 현재 까지의 모습은 부정적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보면서 목사님 단순히 그 때 그 자리에 모인 교역자들을 야단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지시고 계속 고민하시고 보면서는 목사님이 나름 어떤 방향성들을 잡고 사역하고 계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담임목사님 답변) 이제 개혁신학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하지만 실제로 개혁신학이 목회의 부흥에 도움이 되겠느냐 이런 질문도 하고 그 다음에 이제 제임스 스미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와 사랑에 빠진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나중에 못 읽어 보셨으면 서점에서 구입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임스 스미스는 지금 젊은 신학자로서 Calvin Seminary에 있고 저는 그 사람의 견해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이제 그 책에도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오는데 그 책에서 염려하는 것처럼 개혁주의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세간의 아주 곱지 않은 인상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개혁주의를 한다고 하면서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아주 비인격적이고 야비한 처사들, 최근에 누구라고는 얘기 안하겠는데 개혁주의를 가르친다는 사람이 박영선 목사님에게 폭로를 돌려서 아주 야비하게 인신공격을 했는데 박영선 목사님은 카톨릭에 대해서 조금 옹호하는 발언을 했었나봅니다. 그것을 보지는 못했는데 중대하게 오류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생각은 안하는데, 똥개새끼라고 욕을 하면서 사료를 자기가 사다 주겠다. 그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위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격적인 인상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충격 받을지 모르지만 저는 개혁신학과 청교도를 좋아하지만 개혁신학과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저는 싫어합니다. 대부분이 교제하고 싶은 마음을 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작년에 제가 동부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서 입학 예배를 설교를 했는데 그 때에도 제가 설교를 하면서 얘기를 하니 학생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는데 사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개혁신학을 잔뜩 가르쳐 주니까 개혁신학을 배운 다음에 큰 칼을 갈고 제일 먼저 찾아가는 적수가 복음주의입니다. 복음주의 목에 칼을 대는 것입니다. 복음주의도 잘못할 때가 있으니 고쳐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심각한 것이 많습니다. 이단도 있고 이교도가 있습니다. 그 다음 세속주의도 있고 무신론도 있습니다. 찍소리도 못합니다. 그 때 한번 신학자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하는데 저보고 설교를 해달라고 해서 끝나고 나서 내 설교에 대해서 좋은 평을 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더럽게 아니꼽다고 한 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막 혼났습니다. 저의 동년배도 있고 대부분이 후배이지만 신학자로서 할 일을 안 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 소위 얘기하는 관상기도 나와서 한국교회를 다 짓밟고 지나가는데도 한 권도 책이 안 나왔습니다. 제가 쓴 책이 유일한 책입니다. 그것도 정식 출판 안하고 교회에서 쓴 책만 4000권 정도 깔렸는데 조엘 오스틴이 나와서 저는 개인적으로 조엘 오스틴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의 신번영주의가 판을 치고 두란노 교회에서는 그 책을 찍어서 200만부나 팔아먹었는데 그것 때문에 사실 직원들이 특별보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책을 두란노와 출판을 안 하고 끊었던 아주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런 것들이 나오는데 당신들이 한 것이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누가 논문 하나 제대로 낸 것이 있습니까? 책 한권 낸 것이 있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신학자의 사명인데 당신이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진리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그런 식으로 침묵하는 것은 범죄행위라고 실랄하게 얘기했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한국교회의 중신 목사님이 나한테 편지를 보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설교다운 설교를 들었는데 하나님의 음성 같았다. 그리고 신학자로서 자기의 역할을 해나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회개했다.’ 그렇게 저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앞으로도 신학자들을 모아서 출판사하고 연계를 시켜주면서 우리 한국교회가 급히 변증을 해야 할 문제들 예를 들어 툼라이트, 뉴?? 조엘 오스틴에 대한 문제라든지 변산 교회, 큰 믿음 교회 문제, 관상기도 문제 등 교수들마다 다 우리 교회 교역자들을 동원해서 100만원이 넘는 돈을 들여서 자료를 구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쓴 책에 대한 책을 박스로 다 구해서 부쳐주었습니다. 그래도 안 씁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보면서 개혁신학을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나 올바른 방법으로 개혁신학을 공부를 해서 터득을 하면 사실은 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잘못된 사상들을 공격할 수 있는 역량이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오는 것입니다.
엊그제 여기에 김의현 총장님께서 두 번 다녀가시면서 은퇴하시니까 당신이 시간이 있으시니까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만나서 같이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 만나서 얘기한 것이 당신이 신학교육을 했는데 제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고 싶다. 자기는 신학교육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 우리들이 신학교육이 이런 식으로 부실하게 끝났는가 하는 문제를 얘기했습니다. 그 중에 제가 한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신학 공부는 개혁신학을 공부한다고 얘기하는데 개혁신학만 공부하는데 개혁신학도 어마어마하게 스펙트럼이 넓은데 가장 넓은 의미에서 개혁신학은 카톨릭 아닌 것 다 개혁신학입니다. 거기에는 이단까지도 들어갑니다. 그 다음 좁히면 이단이 아닌 것, 계속 줄어들어서 가장 적게 줄어들면 제네바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하는 칼빈주의를 계승하는 개혁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 소위 얘기하는 유니버설리티 universality 신학의 보편성의 측면과 그 다음 speciality 스페셜리티 특수성의 측면 이 개별성의 측면 particularity 두 가지입니다. 이것을 같이 공부해야지만 진정한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신학의 출발은 어디입니까? ‘신학 공부를 내가 해야 하겠다.’ 그 사람은 신학과 기독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제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신앙을 고백한 사람입니다. 교회 와서 신앙을 고백했으면 그 사람은 자기의 입장이 있는 것입니다. 감리교도이든지, 침례교도이든지, 침례교도중에서도 리버럴한 침례교도인지 칼빈주의적인 침례교도인지 아니면 성결교파 교인이든지 리폼드라고 하더라도 벤티 계열의 리폼드인지 아니면 칼바르트 계열의 신정통주의적인 리폼드인지, 다 이렇게 자기 입장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particularity 개별성 혹은 speciality 스페셜리티, 특수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입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은 신학 공부를 하다가 입장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 신학 공부하다가 카톨릭으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예화) 이번에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 제가 서부 웨스트민스터 초청을 받아서 학위수여식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고 이제 가운데 통로를 걸어 나오는데 저쪽에서 미국인 목사 한 사람이 옵니다. 그러더니 인사를 합니다. “설교 잘 들었습니다.” 인사를 하더니 미국 사람들이 좀처럼 안 그러는데 처음 보는 저를 끌어안습니다. 그러더니 막 웁니다. 눈물이 맺힌 정도가 아니라 눈물이 주룩 주룩 흘러내리도록 우는 것입니다. 나는 황당해서 “왜 그러십니까? 누구십니까?” 얘기했더니 자기는 은퇴한 목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카톨릭의 사제였습니다. 카톨릭의 사제였다가 복음을 발견하고 너무너무 복음이 좋아서 전하고 싶어서 개신교로 전향을 하면서 40년 동안 사역을 하고 은퇴한 목사입니다. 오늘 당신 설교를 들으니까 내가 옛날에 발견했던 그 복음에 대한 생각이 맞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냐 하면 누구나 자기 입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입장에서 신학을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부를 하다가 신학적인 입장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변하든지 입장이 있는 것이지 신학을 공부하다가 아무 입장도 없게 되는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 입장이든지 설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그것이 자기 신앙적으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개신교 신앙에 가장 가까운 원리다.’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speciality, peticularity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무엇이어야 합니까? ‘알미니우스주의가 왜 틀렸나?’, ‘칼바르트 신정통주의는 우리와 왜 다른가?’ 이런 것을 가지고 공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개혁파 정통주의를 따르니까 ‘칼빈의 사상은 무엇인가?’, ‘그 사상은 데오도로 베자에 어떻게 전수 되었나?’ 그리고 ‘그러면 칼빈신학교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가르쳤고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무엇을 가르쳤고 신학이 무엇이었는가?’ 하면서 ‘어떻게 로마 카톨릭과 싸우면서 신앙을 지켰는가?’ 이런 등등의 것들을 공부하면서 이 체계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공부를 하게 되고 그 다음에 이제 소위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런 식으로만 공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만 공부하면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러니까 알미니우스를 비판하는데 한 번도 안 읽어 보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와 다른 모든 사람의 글을 다 읽을 수 있습니까?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마어마한 양의 자료들을 우리가 평생 그것만 읽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공부할 때 자기가 신봉하는 입장에서 공부를 합니다. 자기 입각점을 확고히 세우고 이쪽에서 출발하는 공부를 또 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학의 보편성으로서의 신학입니다. 보편성으로서의 신학은 무엇이냐 하면 역사적으로는 교회가 하나였습니다. 카톨릭 교회 하나였습니다. 신학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해도 역사적으로는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에서 갈려 나온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갈려져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가 제일 먼저 갈라져 나오고 거기서 다양한 교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공부할 때 이 보편성의 신학에 대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가깝게는 어디서 시작해야 합니까? 사도들로부터 시작해서 속사도 교부들 그 다음에 초대 교회 교부들, 속사도 교부들이나 초대 교회 교부들까지 이렇게 보면 오리겐, 이레네우스를 보면 우리가 책을 읽어보면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주의자들이 자기 추종자들에게 플라톤의 사상을 가르치는 것과 너무 유사한 논증으로 가르칩니다. 오리겐의 신학의 원리라고 하는 책은 거의 플라토니즘으로 도배를 한 책입니다. 읽으면서 이것이 플라톤 책인지 기독교 서적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입니다. 플라티우스의 제자였습니다. 플라티니우스가 쓴 ?? 라는 책이 있는데 말하자면 뉴플라톤주의의 조직신학 책입니다. 보면 깜짝 놀랍니다. 순서나 전개방식에 있어서 이후에 나오는 기독교 조직신학 책과 너무 유사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뿌리를 캐들어 가면 기독교는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플라톤주의의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골격을 가지고 사실은 성경의 사상들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설명 중에 어떤 설명은 항구적으로 가치가 있는 올바른 것도 있고 전적으로 잘못된 것도 있습니다. 그러던 것들이 진폭이 아주 크다가 속사도 교부들 넘어서 초대교회 교부로 오면서 이것이 점점 더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레네우스에서 좀 더 분명해지고 테르툴리아누스를 거치면서 어거스틴에 와서 상당히 상세화됩니다. 특히 어거스틴은 종합할 수 있는 기독교 모든 사상들을 집적해 놓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세계 철학사에서 플라톤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과 동시에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구의 사상들이 산재해 있던 것들이 정리되면서 하나의 꼭짓점으로 향해 오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을 잘 정리해서 이것들을 다양한 학문의 분과의 유산들을 남겨 놓고 이 사람이 논리학, 범주학이나 소위 얘기하는 이 사고계를 중심으로 이것이 말하자면 학문이 보편적인 학문이 가능할 수 있는 터전이 만들어 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독교화 되면서 재빨리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금서로 취급해서 다 불태워 버립니다. 그것이 이제 서구 역사에서 매우 불행한 일이었고 그래서 대학의 역사가 기독교권에서는 거슬러 올라가봐야 12세기인데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슬람권에서는 9세기까지 올라갑니다. 10세기까지, 그 때 9세기, 10세기 까지 올라갑니다. 벌써 역사가 200년 300년 이상 앞서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이슬람권에서 보존되고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학문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5~6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메타피지칼을 아침 7시에 가르쳤는데 그 형이상학이나 범주학이나 이런 것들을 읽어보면 ‘이것을 모르고는 학문이 세워질 수 없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세워진 것처럼 어거스틴이 기독교 신학의 학문을 놓고 어거스틴 책 중에서 ‘83가지 질문’이라는 아주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신학자들을 향해 남겨놓은 숙제입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의 신학의 역사는 어거스틴이 남겨놓은 83가지 문제를 푼 역사입니다. 이런 것들이 기독교에 있어서 질문할 만한 것들이라는 것을 제시합니다. 이것을 푼 것입니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 여기 아우구스티누스 파크가 있는데 저에게 존 오웬 못지 않게 영향을 준 분이 사실은 어거스틴 이었고 물론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았고 28권의 책을 거의 다 완독했지만 어거스틴은 더 많은 영향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위대한 신학자라고 이름을 붙이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읽었지만 절대 교만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 사실인데 무슨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쓴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나보다 뛰어나고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그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일반 서적이든지 기독교 서적이든지 신학서적이든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딱 한 사람, 어거스틴의 책을 읽으면서 두 권을 읽으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 이 사람은 천재구나. 그리고 정말 그 지성의 크기 앞에 나라는 인간은 참 비참한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어거스틴에 의해서 통일이 되고 통일 된 것들이 다는 아닙니다. 그것을 이제 중세에 와서 치열한 논증을 통해서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아주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십자군 전쟁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두움의 미몽 속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슬람을 쳐들어가보니까 사실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발전된 문화를 누리고 있었던 문명을. 그래서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러고 보니까 그 뒤에 학문이 있었던 것인데 자신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학문이 모든 방면의 학문이 탁월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법학, 의학, 논리학, 수학, 자연과학이 그 당시에는 십자군 전쟁 때는 이슬람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슬람이 최고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보았더니 파고파고 들어가니까 위대한 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 알파라기, 알카자리, 아비첸나, 아비로에스 이런 쟁쟁한 이슬람 사상가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파들어가보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접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제 역사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되느냐하면 네스테리우스파 사람들이 무슨 얘기냐 하면 아리우스파 사람들 그리스도의 신분를 부정한 사람들이 결국은 추방을 당하고 추방을 당한 이 사람들이 시리아 쪽으로 들어가서 그래서 활동을 하는데 이슬람에서 이렇게 망명 온 기독교 사람들을 아주 굉장히 극진히 대접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또 활동했던 무대가 스페인 쪽입니다. 탁월한 학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리스의 사상서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일들을 착수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의 거대한 유산들을 이슬람 세계에 실어 나르는 역할들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학문이 번영합니다. 그것들이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 스콜라주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스콜라주의는 우리가 부정적으로만 알고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고 스콜라주의가 없었더라면 사실 서구 근대 문명이 불가능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 스콜라주의의 영향으로 학문의 금자탑을 쌓아올리게 되는데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아주 총체적인 신학적인 진술이 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우리는 거의 안 읽습니다. 그러나 이제 18세기까지만 해도 토마스 아퀴나스를 안 읽고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미친 것이 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이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이후에 아퀴나스 이후에 이제 ??를 비롯해서 유력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것이 이제 13세기에 와서 갑자기 12세기 말에 와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여러분이 아는 실재론, 유명론, ??당연론 논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이제 오늘날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칸트적인 데카르트적인 인식론적인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넘어가는 이런 사상들이 이제 균열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윌리엄 오카, 슈아레츠, 그 다음에 그런 사람들이 이제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쿠자의 니콜라스 이런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이제 일대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러한 신학의 전체적인 것들이 흘러나오면서 이제 소위 얘기하는 르네상스를 만나게 되고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그 르네상스가 북쪽으로 들어가서 피렌체에서 맨 처음 시작하지만 위로 올라가서 르네상스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르네상스에 대한 공부가 없이는 종교개혁에 대한 이해가 매우 힘들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인문주의 운동이 되고 인문주의 운동은 크게 세갈래로 나뉘어 지는데 기독교적인 인문주의 운동, 이신론적 인문주의 운동, 완전 무신론적인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한 시대가 지나면서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러면서 현대 신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쪽에서 출발하는 보편신학을 공부하고 자기 입장을 확고히 해서 공부하면서 개별성과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서 보편성의 신학을 가지고 자신이 습관적으로 믿어온 것이 정말 확고한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재확인하고 이 보편성의 신학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폭넓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먼저 코란은 어느 곳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훌륭하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위대한 선지자로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그것은 후에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원래 순수한 기독교 신앙에다가 덧칠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김용옥씨의 ?? 에도 그런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편성의 신학 측면에서 보면 분출하는 화산의 화염과 같이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 정통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 성서적인 것과 철학적인 것 이런 것들이 막 뒤범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무엇이 옥이냐 돌이냐 혹은 이것이 참된 것이냐 거짓된 것이냐 가려내려면 확고한 자기의 신학적인 입장이 있어서 그 입장에서 이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게 될 때에는 여기에서 나오는 분출하는 화염과 같은 옥석이 섞인 다양한 것들 속에서 어떤 것들이 오류이고 어떤 것들이 참된 것이라는 것을 이 사람들 보다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네 시대까지 밖에 못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이 결국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지 또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되었고 그 판단 중 어떤 것은 옳았고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둘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신학 전체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우리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부분들은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인지, 어느 부분은 절대로 우리가 용납해서는 안 되는 부분인지에 대한 신축성 있는 태도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신학을 공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17세기만 해도 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희랍어와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거의 암기하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두 번째, 동방 교회 교부들의 문집, 그 그릭으로 된 것, 라틴 교부들의 문집, 라틴어로 된 것, 서방 교회 교부들의 문집, 지금 ??에서 나오는 것으 530권 정도가 되어 있습니다. 전집이 1억 좀 넘습니다. 200권~300권 정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읽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었습니다. 그것은 신학 안에 있는 자료들입니다. 이 이외에 이제 신학 밖에 있는 자료들을 읽어야 하고 그 다음에 철학에 대한 자료들 이런 자료들을 읽으면서 그러면서 학문 전체가 어떻게 통합되는지 이해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삶이 지혜로운 삶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임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말하자면 신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이제 그렇지가 않고 공부하는 학업의 양 자체가 현저하게 적기 때문에 사실 신학의 본래의 고유한 목적들을 완수해 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들어오는 학생들이 그런 공부를 감당해 낼 수 있을 정도의 학생들이 능력이 안되는 학생들이 신학교에 들어오니까 교육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그러면서 악순환이 계속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공부해야할지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신학을 마치고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신학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은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벌써 신학을 시작했고 어마어마한 양을 소화해야 하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생각을 해야하느냐하면 신학 공부를 학교에서 한 것은 최소한의 면허증이고 그 다음에 실제로 내가 교회를 운영하고 가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을 하고 평생 공부할 마음을 가지고 지금 내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학문의 올바른 방식의 의미에서의 신학을 공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의 목회가 열린교회 세우고 나서 20년 되고 그전까지 한 것을 전부 다 계산하면 30년 정도를 교회에서 목회를 통해 고백하는 것은 한 사람의 설교자가 단상에 올라가서 자기의 독특한 사상을 가지고 성경의 진리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공부와 사색, 영적인 몸부림이 필요하고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신학 과정을 마쳤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인적으로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질문) 이제 다음 세대를 향한 소망을 두었을 때 위기라는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와 앞으로의 전망과 교사나 교역자들이 어떻게 이 일을 풀어가야 할까요?
(답변)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크게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개혁신학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자꾸 그것을 리피트하려고 합니다. 더 나쁘게 말하면 흉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참된 ??수 없습니다. 제가 존 오웬 목사님을 존경하고 훌륭하게 여기지만 난 존 오웬의 신학을 여기서 리피트하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칼빈을 존경하지만 제네바에서 그의 사역을 그대로 흉내 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 시대에 충실했던 사람들이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 시대와는 다릅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칼빈은 태어나면 호적이 교회에 있는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모두 크리스찬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시대의 문맥은 사도행전과 비슷하지 종교개혁 시대와 비슷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청교도를 흉내 낸다고 하면서 똑같이 따라하고 주일날 차도 안타고 다니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청교도들이 원한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어떻게 할 것입니까? 개혁신학을 한다는 사람이 이 시대를 너무 모릅니다. 시대를 공부를 안 합니다. 자기는 이것이 올바르다고 설교를 하는데 사람들은 ‘저 설교가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적용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안모입니다. 모인 사람도 흩어집니다. 그러니까 다른 교회에 사람들이 안 모이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없기 때문이고 자기 교회에 사람이 안 모이는 것은 워낙 말씀이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뭔가 사기를 좀 쳤을 것이다. 그리고 세속주의와 타협을 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네 교회에 교인이 모이는 것은 반대로 말씀이 워낙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런 자신들의 생각이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사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계속 그것만 합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자기는 좋아하는데 교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개혁주의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에는 은혜로운데 그런데 교회를 찾는 사람은 불신자도 있고 심지어는 이교도도 찾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본질은 훼손하지 않고, 그런데 너무 공부를 안 합니다.
작년에 제가 데이비드 웰스 박사를 만났습니다. 고든 코넬에 가서 만났는데 아는 사이이지만 가서 만나서 연구실에서 이야기하면서 그분이 하시는 얘기가 자기가 쓴 책도 어렵다고 미국 학생들이 안 읽는다고 합니다. 하도 답답해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인터넷에 들어가 보시면 프란시스쉐퍼가 70년대에 만들어 놓은 How Should We Then Live?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지금 보면 굉장히 촌스럽습니다. 그런 식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합니다. 진짜 돈이 있으면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30만 불 든다는데 제가 보기에는 30만 불 가지고 어림도 없고 100만 불은 들 텐데 정말 그런 분들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왔는데 굉장히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책을 안 읽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그 사람 책, 개혁주의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다는 놓지만 읽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데이비드 웰즈의 5부작 다 읽으신 분 손들어보십시오. 신학실종, 윤리실종, 위대하신 하나님, 탁월하신 그리스도, 용감한 기독교인 다섯 권 읽는 사람 없습니다. 안 읽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분이 연세가 너무 많으신데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한국에 모시고 싶어 하는데 건강이 안 좋으십니다. 엊그제도 편지가 왔는데 이 분을 이렇게 보면 정말 소중한 분이다. 여태까지 내가 아는 한도 내에는 프란시스 쉐퍼 이외에는 확고한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이면서 그렇게 탁월하게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선교현장에 대해서 고민을 하면서 글을 쓴 사람이 없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이후에는 없습니다. 물론 그 후에 로저 웰슨이나 낸시 피어시 같은 제자들이 나타나서 쓰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은 조직신학자가 아닙니다. 이분은 조직신학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못 잡아먹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또 개혁신학자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렇게 보면서 ‘우리는 왜 이럴까?’ 그러면서 그 분 얘기가 무엇이냐 하면 교회는 허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 속에 있다 그러니까 이 두 개의 관계성에 대한 연구가 없이는 교회에서 일어난 일도 설명할 수 없고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을 예로 들고 관찰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교회를 모르고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성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서구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똑같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20년 전에 열린교회를 개척했습니다. 20년 전의 그 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한겨레 신문을 보십시오. 많은 것을 배웁니다. 한겨레 신문을 보면 무엇을 배우느냐 하면 ‘이런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신문이 있구나.’ 그것은 좋은 의미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렇구나.’ 이런 것들을 보면서 결국은 최근에 김용옥 씨가 다섯 번에 걸쳐서 세월호 참사가 난 다음에 교육론에 대해서 기고를 한 것이 있습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글을 썼습니다. 물론 나는 그 사상에 다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도대체 우리 기독교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정도의 역사적인 식견과 철학적인 견해를 가지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강신주라는 젊은 철학자가 유학파도 아닙니다. 연대에서 학위를 받았는데 젊은이들을 휩쓸고 있습니다. 들어보셨습니까? 강신주라고 인터넷에 한번 쳐보십시오. 전혀 동의는 안 되지만 너무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교회에서 답을 못 얻던 많은 청년들이 거기에 가서 특강을 들으면 한 달에 한 번씩 하는데 회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 사랑의 열정이 있고 최소한 저 사람은 저 신념을 가지고 살겠구나하는 공감을 합니다. 감동을 받습니다. 여러분 거기 가서 펑펑 울면서 회심을 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로 회심합니다. 교회에 심지어 청년 사역을 하는 사람들도 책도 모르고 이름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 돌보는 지체들은 가서 은혜를 받고 변심을 합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생각하면 안 된다고 얘기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책을 읽고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빠서 아마 못 읽으신 분도 많을 텐데 이 책을 쓰면서 제 나름대로 이 책을 2주 만에 썼습니다. 그만큼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번에 눈감고 확 쏟아낸 것입니다. 지금 오늘날 우리들이 처한 선교적인 어려움이 전도 방법을 모르고 목회자가 기도를 안 하고 이래서 사실은 안 되는 것만이 아니라 도저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어마어마한 논리와 사상의 체계들이 기독교를 향해서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데 저쪽에서 우리를 다 꿰뚫어봤는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이 책 속에서 기독교를 대적하는 세상의 논리는 이렇게 질서정연하고 말하자면 탁월한데 기독교는 아무 준비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여러분 모여 앉아서 프란시스 쉐퍼나 네스피어스나 데이비드 웰즈나 읽으면서 그러면서 필요한 사회학에 관한 책들을 읽으십시오. 그런 것을 고민을 하는 것이 변하는 시대를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과 불변하는 신학의 내용을 공부하는 것이 같이 가야지만 그 시대에 적시성이 있는 목회를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모르지만 제가 만난 많은 목회자들이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낙심할 정도로 깜깜합니다. 자기 설교단 아래 있는 성도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한 인간들로서 최근 20-30년 동안 어떤 사상의 물을 먹고 얼마나 엄청나게 변화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전혀 정보 없이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고집하면 공허한 외침이 되고 그가 타협을 하면 내 마음을 움직일 수 까지는 있는데 움직여서 어디로 데려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하겠습니다.
화제를 돌려 봅시다. 이 책을 모두 읽으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절반쯤 읽으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3장까지만 읽으셨으면 저의 의도를 아셨을 것입니다. 읽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게 되었는지 얘기해보겠습니다.
(나눔) 목사님께도 말씀 중에서 말씀하셨지만 결국 우리가 신학함에 있어서 편협한 내 입장의 측면만 강조하고 연구하는 측면들이 있었는데 통합적으로 사고한다는 부분에 있어서 큰 도전을 받게 되었고 그런 면에서 목사님께 어떤 궁금증들이 신학은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해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해야 하는 방향성은 알겠는데 통합적 사고를 위해서 어떻게 공부할 수 있을지 방향성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나눔) 저는 이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학을 통해서 우리의 사상이 바르게 형성되고 그런 사상들이 결국 우리의 삶, 사상과 윤리와의 연결성에 있어서 너무나 괴리된 구체적인 빛으로 드러나는 삶이 없고 열매가 없는 현실적인 반성들을 해보았고 스스로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제가 어떻게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할까 하는 부분들에 있어서 도전들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눔) 제가 목회도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신대원에서 배우고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저희 교단에서 가르치는 신학은 굉장히 건강하고 성경적이고 올바르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저도 목회의 길을 들어섰지만 목회자들과 교회에 있는 성도들의 삶에서는 어떤 건강하고 바른 신학을 배운 사람으로서의 모습보다는 굉장히 세속적이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과연 교회가운데 정말로 신학과 삶이 일치하는 그런 때가 있었나를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과 스터디 모임을 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정말로 신학이 바르게 체계를 잡아 감과 동시에 교회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정말 신학을 성경을 배운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체계를 잡아가고 그런 열매들이 많이 드러났던 그런 시대임을 보면서 또 그 뒤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개혁파 경건주의를 보면서 어쩌면 17세기 그 때 시대를 지금 우리 한국에서 지표로 삼고 달려가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그래서 유럽에 있었던 그것을 단지 무조건 끌고 오기 보다는 2014년에 정말로 제시해야하고 바른 것을 제시할 수 있는 신학과 그리고 그 신학을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필요하지 않는가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도 3장 중반까지 읽었는데 앞에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빛으로 산다는 어떤 중심이 정말로 단지 우리가 신학적인 내용이 맞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무조건 터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이 신학을 알고 빛으로 살기 때문에 나타나게 되는 영향력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목회자로서 더 방금 말씀하셨던 특수성과 보편성에 의거해서 성도들에게 정말로 빛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나눔)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무지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특히 저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만을 전하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었고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 같지만 그것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는 것 같지 않고 복음과 삶과 신앙과 삶이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고 그것에 대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특별히 또 사역 현장에서 그런 것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르치지 못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나눔) 하나님께서는 빛 자체이시고 우리는 그 빛의 반사체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만 그 빛된 자녀로서의 그것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나눔) 목사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빛에 대해서 이렇게 광범위하게 설명을 하셨을까? 일반적인 학문데 대한 답으로서 신학적인 답, 성경적 답을 이야기하면서 단편적으로만 이해했던 본문들에 대해서 쉽게 설교를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과학적인 고민이라든지 빛에 대한 모든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의 모든 부분들을 다 말씀과 연결하셨고 그것 자체가 많이 도전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간단한 메시지를 고민해본 적은 사실 없었는데 그것 자체가 감탄이 되었습니다.
(답변) 오늘 아침에 우리들이 ?? 공부를 했습니다. 두 권의 책 보여드렸는데 이 사람에 대해서 1차 자료는 아니고 2차 자료를 가지고 공부하면서 시편 2편 7절과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율례를 말하노라.” 히브리말로 ‘아세펠라 호끄 아도나이’ 이렇게 나오고 그 다음에 ‘아말타 데이 아타’, “너는 내 아들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이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렇게 간단해 보이는 구절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영원한 나온바 되심 설명하는데 정말 심오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지금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분이 어떤 느낌을 받으실지 잘 모르고 독자들이 이것을 끝까지 읽어줄 인내심이 없습니다. 주기도문을 썼는데도 그 책도 어렵다고 잘 안 읽습니다. 낙심이 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책을 씁니다. 지금 쓰고 있는 책이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을 쓰고 있는데 한절을 가지고 이정도보다 약간 얇은 책을 쓰려고 합니다. 5장 1절부터 7절까지 산상수훈을 전부 다 완성하는 것이 목표인데 20권 정도 분량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신학을 제대로 교육 시키지 않고 아까 제가 얘기한 것처럼 보편성과 특수성의 신학, 신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과 관련된 학문들의 통합, 그 모든 것들의 총체로서 성경의 진리적친 특성, 이런 것들에 초점을 맞춰서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것의 댓가를 치루게 되는데 성경을 읽을 때 아주 박식한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박자는 얇을 박자입니다. 표피적인 것밖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저는 개척하면서부터 강해설교학교에 강사로 많이 다녔는데 그런데 저는 사실은 정말 동의하지 않는 설교가 강해설교입니다. 5-6절 읽고 툭툭 동태 토막 내듯이 토막 쳐서 자기 얘기 풀어내는 강해설교입니다. 그나마도 안하고 말 갈 때 소갈 때 가는 것보다 나을지 모르지만 성경 주석가로서의 입장에서 본다면 석의Exegesis가 없습니다. 석의 배우셨죠? 성경 본문을 놓고 성경 하나하나를 언어적으로 분석 하면서 그 속에서 이 의미가 무엇인가를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원래 1차적인 의미를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우리 교회 설교를 들었던 어느 교수님이 자기 누나가 얘기를 하시면서 자기 누나가 열린교회 설교를 듣고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열린교회 사이트 들어가서 설교를 들었는데 진짜 깜짝 놀랐다.”하셔서 “왜요? 누님?” 했더니, “오늘 본문은... 하고 시작을 하는데 그런 얘기를 몇 십 년 만에 처음 들어보았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설교는 성경을 언어적으로 분석을 해서 일차적인 의미가 무엇인가를 꺼내려고 하는 노력이 설교 자체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텍스트를 설교하기 전에 이미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맞는 것을 텍스트를 찾아서 우겨 넣어서 그것도 성경을 설교하는 것처럼 하면 사람들이 지루해 하니까 재미있는 예화 하나 집어넣어서 설탕에 약 이겨서 살짝 집어넣듯이 사람들에게 저항감 없이 복음이 들어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설교로서는 함량 미달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빛에 대한 모든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우리 같은 과학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보기 위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훨씬 많은 이야기가 사실 빛에 대해서 나옵니다. 뉴턴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광학적 개념, 윤리학적, 신학적 개념을 얘기했지만 사실 빛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양자역학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내가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분명한 것은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모든 지식의 근원이시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세계만물을 창조하실 때 만물이 있기 전에 만물에 대한 아이디어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아이디어대로 당신의 능력을 따라서 창조하셨고 창조되었을 때 당신 안에 있는 아이디어와 만들어진 물건 사이에 일치가 있었기 때문에 ‘참 좋구나.’ 하나님이 그러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모든 만물에 대한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거꾸로 무슨얘기냐 하면 스티븐 호킹이 얘기하듯이 스티븐 호킹의 천문학 관심사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팡 하는 빅뱅이론으로서 이 우주가 존재하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데 그런데 스티븐 호킹의 관심사는 그 반대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렇게 창조된 세계에 어떤 근거를 찾아서 더듬어가게 되면 말하자면 이렇게 폭발과 함께 팽창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은 무엇인가?’ 그런 관심사입니다. 그것은 영어로 말하면 폴딩과 언폴딩의 문제입니다. 접힘과 펼침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말하자면 모든 세계에 관한 지식들이 어거스틴이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문제는 어떤 과학적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 과학적 사실들은 도덕적 의미와 연결이 됩니다. 그것을 확고하게 믿었던 것이 동양철학이었습니다. 물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법이라는 글자를 만들고 그 법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인간이 이렇게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지카, 자연의 발견, 로기카 논리, 에티카 마지막 윤리를 거기서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고전적인 학문의 방식입니다.
지금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너무 놀란 것이 시간은 없고 공부를 해야 하니까 과외 선생님을 불러다가 공부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과외비도 상당히 주었습니다. 한때는 과외비가 하도 많이 나가서 경제가 쪼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리학, 철학, 천문학, 생물학 이런 것들을 배웠습니다. 지금 의학을 배우고 있는데 너무나 웃긴 것은 천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천문학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가슴이 막 뜁니다. ‘천체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구나.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구나.’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이냐고 하면 자기는 학문적으로 그것을 발견했지만 그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생물학을 가르치는 데 ‘생명이 무엇이냐?’ 했더니 생물학에서는 그런 것은 안 다룬다고 합니다. 당신 그리스도인이니까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생물학에서 다양한 사실들이 발견 되어도 그것은 약을 만들기 위하고 의학적 처방을 위하고 학문적인 결과물들을 내기 위한 현상일 뿐이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의미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유행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충격을 받았어야 하는 것이 상대주의입니다. 빛에 대해서 강조해야 하는 이유가 상대주의입니다. 상대주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어제도 집사람과 산책을 하는데 저는 거의 인터넷을 안 하는데 우연히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해서 얘기하니까 집사람이 “여보, 어마어마한 스와핑 그룹들이 있는데 스와핑 그룹의 주 멤버들이 현직 교수들, 부부들이라고 합니다.” 구라파에서 동성애문제가 시끄러운데 이미 진 게임입니다. 영국에서는 남자 둘이 교회 가서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목사가안 된다고 하면 현행범으로 체포가 됩니다. 현행범이 됩니다. 미국에 피터징어라고 하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이 결혼을 한다.’ 이 자체가 편견이라는 것입니다. 소와 사람도 결혼할 수 있고, 개와 인간이 부부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어느 외국 잡지에서 보니까 입에 올리기도 창피한 이야기인데 mother fucker라고 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다. 자기 어머니하고 성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모인 사이트입니다. 검증되어야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렇게 할까요? 고의적으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질서에 대해서 파괴적인 의식을 가지고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책에서도 얘기했습니다. 낸시 피어시가 그 리코나 교수가 자율 학습제를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학습의 목표로 삼고 교육을 받아야 할지를 우리 스스로 자율적으로 결정을 해보자 하고 학생들에게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가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첫 번째가 섹스입니다. 두 번째는 무단결석, 세 번째는 폭력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이 “너희는 그러면 안 돼.”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이미 벌써 실용주의 이후로 교육 안에서 보편적으로 이것이 ‘도덕은 원리다.’라고 하는 것들을 다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기껏 해서 남아있는 것이 공리주의적인 원칙 정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모든 질문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어때서? 그러면 왜 안 돼?” 이미 기초를 허물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마어마한 사상으로 도전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아무리 기독교가 어쩌고 저쩌고 얘기하고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해도 통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것이지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성경이 무엇인데 종잇장 몇 장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권위를 갖고 인간의 생사를 주관할 수 있을 정도로 ??를 갖고 있느냐? 지금 어느 시대인데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반론이 무엇입니까? 내 얘기는 매 시간에 설교가 이런 변증을 요구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아직 진리를 가르쳐주면 아멘 하는 성도들이 아직 많습니다. 그렇지만 설교자는 최소한도 그런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가장 확고한 진리다.’라고 하는 신념을 가져야 하는데 그 신념은 단순한 성령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위대한 신념은 박수치면서 성령충만으로 이어지는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신학을 통해서 이해하고 그 위에 성령의 능력으로 합하여진 종교와 이성이 일치를 이룬 이런 상태가 그것이 가장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자이언트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절이 있습니다. 청계사라고 신라시대에 세워진 절입니다. 매일 밤 산책을 합니다. 한 시간 반 걷습니다. 절 앞에 큰 플랭카드가 붙었습니다. ‘사자의 울부짖음에도 놀라지 않으며’, 살다보면 사자의 울부짖음 같은 무서운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600kg 정도 되는 사자가 나타나서 두발을 딱 들고 우왕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생 살면서 그런 삶의 사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놀라지 않을 수 있는 담대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불교에서는 어디에서 나온다고 합니까? 여러분 불교를 모르지만 한번 추론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꾸준히 향불을 켜서 바치고 108배를 하는 동안에 가슴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종교심이 그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에 인간으로 있고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내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고 나는 나의 신념을 따라 살아왔고 지금도 내가 그렇게 내가 여기 서있다고 하는 견고한 논리와 당위성, 그것이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 앞에서도 요동하지 않게 하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얘기하면 확고한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어떤 일에도 저해 받지 않는 하나님과의 ‘샬롬’, ‘에이레네’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에 메트로폴리탄 교회에서 목회할 때 지붕이 둥그런 커다란 예배당이었습니다. 그 당시 처음 보는 사람들이 항상 궁금했습니다. 저기 있는 둥그런 건물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물어보면 불신자들이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 거기는 하나님의 진리가 울려 퍼지는 곳입니다.”
교회가 이제 요즘 하도 윤리적으로 욕을 먹으니까 기를 못 펴면서 사회에 아부를 하느라고 ‘우리 교회도 사실 잘 보면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착하다.’ 그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기독교 자신에 대한 세상의 평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오직 진리를 따라서 꾸준히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적하고 어떤 사람은 감동을 받고 어떤 사람은 감격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을 하고 어떤 사람은 포악스럽게 욕을 하고 다양한 반응이 나타납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반대와 핍박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용기와 박수갈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엄정성 같은 것들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런 열정과 엄중성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진리입니다. 목회자는 행정에 능할 수도 있고 성령 충만할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술에 재능이 있을 수도 있고 설교에 재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 사람도 아닙니다. 진리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화신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50대 되신 분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공부하십시오. 덜자고 덜 먹고 덜 놀고 덜 쉬고 sacrificing희생을 해야 합니다. 공부하십시오. 치열하게 공부하십시오.
두 번째는 기도하십시오. 요즘은 기도를 잘 안합니다. 오늘 시간이 없지만 여러분 다시 언제 만날지 모르지만 왜 오늘날 기도를 안 하는지 교회가 은혜가 떨어져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런 면도 있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이제 앞으로 거의 완벽하게 기도하지 않는, 심지어는 기도하라고 거의 설교하지 않는 때가 옵니다. 중생과 회심에 대한 설교가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기도도 역시 사라지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색하십시오. 기독교인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묵상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연결성을 가지고 사색을 하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사색해야 합니다. 생각을 별로 안합니다. 눈으로 읽고 입으로 말합니다. 말을 막 쏟아내는데 그 사람의 인격과 고뇌가 안 묻어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데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안 나옵니다. 허공을 울리는 것입니다. 설교다운 설교가 안 나옵니다.
네 번째는 신실하십시오. 자신이 완벽한 삶을 살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순간순간 잘못한 것은 회개하고 순간순간 자신을 그 진리에 합치하는 삶을 살려고 해야 합니다. 진리에 합치하는 삶을 가리켜서 ‘베룸’, ‘진실’이라고 합니다.
(예화) 로마에 갔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교인 한 사람을 그렇게 칭찬합니다. 천재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엠을 이어서 프랑스에 지휘자도 했던 정트리오 정명훈 씨, 저는 음악을 좋아하긴 하지만 썩 잘 모르는데 유렵에서 평가하기는 현재 살아있는 지휘자들 중에서 라보엠을 가장 완벽하게 지휘할 수 있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 지위에 오르게 되면 그 세계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집니다. 웬만한 사람이 그 정도 지위에 오르게 되면 여자들이 줄을 선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교회에 출석을 오래도록 했었는데 이 사람을 목사님은 수도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일이 없는 날은 집에 조용히 앉아서 기도하고 독서하고 명상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 했더니 “음악은 그 효용성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 감동은 진리가 주는 감동입니다.” 사실 그것을 헤겔이 이야기합니다. ‘진리가 인간에게 경험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인식의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 철학이고 감정의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 음악이다.’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자면 미학사에서 보면 음악의 아름다움의 기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최초의 설명이 피타고라스학파입니다. 피타고라스학파에서는 그 음악이 아름다운 이유가 수의 질서에 있다고 합니다. 그 후로부터 여러 상대주의 개념이 나오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런 질서로운 진리의 세계에서 온 가락이 있고 그 질서에 대한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작곡가가 맑은 정신으로 작곡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같은 사람이 무엇이라고 했느냐하면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만들지 않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 음악이 인간의 영혼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아주 확고히 말합니다. 그럼 그렇게 해서 음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장 맑은 정신의 상태로 자기가 그 질서에 심취된 가운데 연주해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노래를 하는 사람은 바로 이 질서에 맞추어서 보컬로 하모니를 이루어서 일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그 모든 구성원들의 자격이 진리 혹은 질서에 대한 일치를 가진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지휘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더더욱 경건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목사들도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옥스퍼드에서 음악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너는 음악이 왜 아름다운지 아느냐?’ 모른다고 합니다. 좀 배우라고 어거스틴의 ‘음악에 관하여’라는 책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해도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렇게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 개똥벌레 한 마리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질서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감탄하면서 또 죄가 사라지고 나면 이루어질 영광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면서 그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자기가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자기 책속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철학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진정한 철학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진리를 사색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이다.’
그래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네 가지이고 굳이 하나 더 보탠다면 인생의 날은 유한하기 때문에 뼈 빠지게 섬기라는 것입니다. 제가 39살에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22년째입니다. 제 나이 60입니다. 말도 안 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의 시간의 감각으로는 두 세주 정도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속히 지나갑니다. 이번에 교회가 불이 났습니다. 한 층이 홀랑 다 탔습니다. 고민하다가 한쪽 헐고 150억쯤 들여서 교회를 멋있게 짓자. 거의 다 결정이 되었고 실행만 하면 되는데 제가 거부했습니다. 10년 남았는데 2년 동안 땅을 파고 그것을 쳐다보고 있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였습니다. 그 시간에 진리를 탐구하고 하나님 말씀 전하고 책을 쓰고 성도들을 심방하고 차라리 그러고 사는 것이 낫지 교인이야 덜 늘어나겠지만 교인이 2000명 더 늘어나서 7000명 된다고 해서 내가 밥을 다섯 끼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필요 없다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이런 책들을 많이 읽고 사색을 하고 아름다움 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이 안 쓰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그런 지식 나부랭이를 보고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 그래서 ‘이새의 아들 다윗을 보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라.’ 그러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 17년 있던 부목사가 청빙을 받아서 다른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어느 교회에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가고 난 다음에 여러분이 이 교회에서 하던 사역을 이야기할 때 담임 목사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담임 목사님이 아무개 전도사님이 이곳에서 사역을 하실 때... 눈물이 나는 사람, 그렇게 교회를 사랑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렇게 희생한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그만 하겠습니다.
(나눔) 김남준 목사님은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시간을 내주실 만큼 여유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가 놀란 것은 그동안 우리 모임을 위해서 여러 가지로 연구를 하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해 줄 수 있을까 여러 차례 저에게 연락을 하시면서 기대를 하시고 그렇게 해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하셨습니다. 아마 열린교회 있는 분들도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많은 시간 정성을 다해서 하셨다는 것에 대해 놀라셨을 것입니다. 한 시간 한 시간 끊어서 활동하시는 분인데 그래서 사실 저는 굉장히 미안합니다. 책도 미리 보내주시고 씨디도 미리 보내주시고 했는데 책을 다 읽지 못했다. 내용이 방대하고 등장하는 용어들과 개념들이 워낙 많고 바쁜 목회, 부교역자들이기 때문에 이해는 하는데 우리가 너무 수동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우리 모임이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말씀 들으며 깨달은 것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철학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정도의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방향은 분명히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계속 함께 노력을 했으면 좋겠고 우리 목사님하고는 오늘 만남이 끝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는 없다고 보고 주님이 인도하시면 또 모시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 우리 목사님에게 해주신 것들에 대해서 사례를 한다면 도저히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오면서 빈손으로 올 수는 없어서 자그마하게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목사님께 전달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