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11, 12과
녹취자: 원수연
[11과]
오늘 11과하고 12과, 두 과를 하기로 했지요? 먼저 <11과 목사란 무엇인가>입니다. 이번 공과를 하면서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목사는 이런 사람이구나. 우리 목사님은 이 책하고 좀 다른 거 같아.’ “목사가 누구인가?”라는 이 질문을 던진 것은 그렇게 생각하라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목사란 목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돌보는 목양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어떠해야하는가?”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문제 1) 목사가 누구인지에 대해 이 책을 읽기 전, 열린교회에 오기 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나누어 봅시다.
한 18년 전이었는데 교리반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솔직하게 물었습니다. “목사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랬더니 별의별 대답들이 다 나왔습니다. “교회의 어른이요.” “대표자요.” “리더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뭐냐면 아무도 목사를 진리와 연결시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조국교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변화된 생각을 이야기하면 재미없으니까 구역과 순에 돌아가서 한번 자유롭게 나누어 보십시오. 옛날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편안하게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러면 재미있는 얘기가 많이 나올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목사는 누구냐인데, 제 2번 문제에 나옵니다. 1번은 답이 없습니다. 한번 이야기를 들어보는 겁니다. 2번 문제 다함께 읽겠습니다.
문제 2) 목사의 정체성에 관한 저자의 간단명료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목사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어 간 선지자들의 후예이며, 신약 시대에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손이다.”
사실 이 글을 어디에서 따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부분적으로 청교도들은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 종합해보니까 이러한 명제가 나왔습니다. 선지자들의 사명은 율법과 율법의 적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설교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에 비해서 사도들의 사명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복음과 복음의 적용이었습니다. 그것이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했는데도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죽어갔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만. 사도들 또한 결국은 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목사는 그런 사람들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와 관계된 정신이 제일 중요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복음 사역자들의 참된 탁월함’(The true excellency of a minister of the Gospel)이란 설교를 했는데 어디선가 한 번에 설교했다고 들었지만 제가 보기에는 세 시간은 설교했던 것 같습니다. 무지하게 깁니다. 열한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대지를 가지고 설교하는데 복잡합니다. 임직식에 행한 설교인데 목사에게도 권고하고 교인들에게도 권고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말씀을 탐구해서 진리를 풍부하게 가르치는 것이고, 교인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근심과 염려 없이 목회자가 그 일에 전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참 맞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좋은 차를 사주고 좋은 음식을 먹여주는 것도 나쁠 건 없지만, 목사의 제일 큰 행복은 편안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일에 전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두 가지 유익을 얻게 됩니다. 첫째는, 목사 자신이 그렇게 함으로써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도 여러분들과 똑같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기도 안하면 곤고하고, 은혜를 받으면 생명이 충만하고, 가정이나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마음이 괴롭고, 모두 다 똑같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우리는 곤고할 때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으면 되는데 목사님은 누구 얘기를 들으세요?” 없습니다. ‘내가 오늘 곤고하니까 오늘 주일 예배는 부목사들에게 하라고 하고 나는 다른 교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와야 되겠다.’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서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지성소에서 주님을 만나고 말씀의 은혜를 받는 일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23년 동안 항상 그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여러분들을 말씀의 세계로 항상 데려갔고, 저 자신도 은혜를 받고 발전하고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 일에 전심하는 것,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언젠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회자의 마음은 샘물과 같다.” 마음이 닫히고 너무 힘겹게 되면 말씀에 전념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교회는 그 말씀의 풍성함이 말씀사역을 통해서 풍부하게 드러나야 됩니다. 목회사역 자체는 진리를 드러내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가든, 상담을 하든, 무얼 하든지 간에 결국은 모든 것이 말씀을 드러내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제 3) “어느 불자의 회심”이야기를 통해 깨닫거나 느낀 바가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이었고, 결혼을 했고, 몇 년 전에 목사가 됐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후에 목사가 됐습니다. 목사가 되기 직전에 저를 한번 만났습니다. 아주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서 예수를 믿게 된 청년이었습니다. 새가족 환영회에선가 아니면 MT를 갔었나 했는데, 거기서 자기의 기구한 인생사를 쫙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니 너무 곤고하니까 중이 되려고 절에 들어갔는데 하도 착실하게 절에 있으니까, -스님이 되는 과정이 어떤지 잘 모르지만- 중옷을 입게 되었고 출가계(出家戒)라는 것을 받았답니다. 기독교로 말하자면 정식으로 교역자가 되는 그런 과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승려가 되는 것입니다. 신도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 형제를 잘 봐서 승려가 되면 옷은 자기가 사다 주겠다고까지 했답니다. 어쨌든 중옷을 입고 거기 있었는데 어느 날 주지스님이, 교회로 말하면 담임목사 같은 분인데, 그분이 서점에 가서 책 좀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켰고, 절에서 읍내까지 내려갔습니다. 때마침 서점에서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라는 오디오북을 본 겁니다. 이것을 사서 살짝 감추어서 절에 돌아와서는 낮에는 절간을 청소하고 밤에는 법당에 조용히 앉아서 이것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묵상하는 줄 알았겠지요. 절에서는 이런 폼으로 앉아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사람이 없으니 동료 스님들 중에 한 사람이 “너 뭐해 임마.”하고 툭해서 뺏으니까 카세트 테이프가 툭 떨어지는데 ‘김남준 목사 설교’라고 보게 된 겁니다. 생명의말씀사에서 만든 거였습니다. 주지스님한테 가서 이 사실을 일렀지요. “이런 별 미친놈이 다 있습니다. 중 되겠다고 와서 목사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지스님이 “사연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 형제는 담담하게 얘기 했답니다. “진리가 불교에 있는 줄 알고 왔는데 이렇게 듣고 보니 아무래도 기독교가 진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 스님이 왈 “나도 한 때는 기독교인이었고 교회학교 교사도 했는데 네가 그 길이 맞다면 그 길로 가라.” 그러고 온 교회가 우리 교회였습니다. 말은 그냥 평범하지만 얼마나 많은 고뇌와 갈등이 있었겠습니까?
어떠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목사, 교회의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와 관련된 일입니다. 우리들은 사랑을 너무 강조하는데 사랑은 균형을 이루어야 됩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만 있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무자비한 교조주의가 되겠지요. 반면 진리에 대한 사랑은 없고 사람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온전한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중심을 잡아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두 가지가 같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 4)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이 거룩한 지혜를 가르치기 위해서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지혜의 체계입니다. 그러면 지혜는 무슨 지혜입니까? 판단이 있고 삶이 있습니다. 그러면 판단은 의미에 대한 판단입니다. 나는 누구고, 세계는 누구고, 왜 존재하고, 신은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한 판단입니다. 삶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이 사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민 아닐까요?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 자신과 세계와 인간, 그리고 나, 이 모든 것과 관련이 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지혜가 산발적이지 않고 그 지혜에 대한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모아놓은 것이 신학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지혜를 알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사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인상 깊은 말을 남깁니다. 청교도에 한참 심취했을 때인데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설교자가 나에게 희미한 하나님의 진리라도 보여주어 그 빛을 알 수 있게 한다면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용서하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떤 설교자가 진리의 빛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때, 그때 그렇게 보여주는 그 사람이 회중인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완전한 사람일 수 없지만, 또 완전한 사람일 수가 없겠지만, 어쨌든 완전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가 그렇게 설교를 통해서 어떤 진리의 빛을 사람들에게 심금을 울리도록 전해줄 수 있는 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그가 진리와 함께 살려고 애쓰면서 살아온 한 흔적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선을 행해야 된다는 것을 압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살아보니까 그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목사가 이 부족한 사람을 완전하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완전하게 해 주는 겁니까? 성령이요? 그것도 답이 되겠지요. 그러나 도구가 있잖아요. 그것은 성경이라고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한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유익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그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은 목사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시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신학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만 읽는 사람들은 성경은 안 읽는 사람과 비슷하게 위험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만 읽는 사람들은 성경은 안 읽는 사람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단에 속한 교파에서는 대부분 정통적인 신학으로 쓰인 책들을 읽는 것을 아주 금기시합니다.
울산의 한 교회에 가서 자료를 받았는데, 큰 포스터에 신천지에서 쓰는 교재 사진을 찍어서 다 올려 놓았습니다. 무엇을 해도 그 교회는 앞서가는 것 같습니다. 사경회 하기 전에 갔더니 사경회 하기 전에 벌써 홍보 동영상을 만들어서 올렸는데 진짜 잘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준비해놓고 사람을 부르더니 사경회 끝나고 2, 3일도 지나지 않아서 사경회 말씀 영상을 만들어서 올리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부흥회를 회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최근에 본 교회 중에서 가장 열정적이며 유능하게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굉장히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교회와 거의 규모도 비슷하고 아이들만 우리들보다 500명 더 나오는 교회인데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텝들을 좀 자극을 많이 했고, 교회학교 교역자들도 울산까지 내려가서 한번 구경하고 오라고 보냈습니다. 방송팀도 홍보팀도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제직들도 좀 갔다 와야 합니다.
그것을 사용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아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도구밖에 안 되니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서 은혜를 구해야 하는데, 말씀사역을 통해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목회자, 혹은 목양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고, 설교하고, 살고, 가르치는 자입니다. 이것이 목회자가 해야 할 전부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좋은 설교가가 나오기가 굉장히 어려운 환경입니다. ‘All round player’ 전천후 선수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행정, 교육, 미디어, 심지어 교회 경영까지, 그리고 모든 순서에 꼭 담임목사가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심으로 마음을 기울여서 학문을 탐구할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인간적인 관계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도 그것을 원하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좋은 설교자가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좋은 설교자가 나오려면 공부를 많이 하고, 묵상을 하고, 자기 안으로 삭혀야 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몸으로 때워야 되는 상황에서는 참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을 하고 시대에 맞게 적용해서 가르치는 것, 이것이 목회자가 해야 될 일이고, 바로 이런 목양의 기능을 여러분들이 나누어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 산 보듯이 ‘목사가 해야 될 일이구나.’라고 하지 말고, 구역장, 순장은 ‘안수 받지 않은 목사다.’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시대에 맞게 적용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놓고 설교하지는 않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가르쳐서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선 목회자의 머리, 곧 지식인데 성경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런 성경을 다룰 수 있는 기본적인 훈련을 신학교에서 열심히 배웠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언젠가 제가 이 교회를 떠나면 절대로 무식한 목사는 뽑지 마십시오. 그것은 교회의 재앙입니다. 그가 아무리 유능하고, 성격이 좋고, 여러분 모두를 울리고 웃길 수 있어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 목회자는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앙입니다. 정말 그것을 명심하십시오. 지식이 없는 신랑하고는 결혼을 해도 목사는 데려오지 마십시오. 그럼 그것만으로 족하냐? 그건 절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인격도 필요하고 평판이라든지 성품 등 모든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있어도 결혼할 사람을 찾아보면 없듯이, 목사들은 갈 데가 없을 정도로 남아도는데 교회는 부를 목사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깊이 기억해야 됩니다.
성경 뿐만 아닙니다. 신학적인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기본적으로 공부를 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아십니까? 교회가 공부 많이 하고 온 목회자를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싫어한다구요? 그러면 여러분은 저 싫으세요? 왜 이렇게 교만합니까? 여러분은 머릿속에 지식이 많은 목회자, -그건 많고 다른 건 못됐다 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신학에 대해서 풍부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서 설교를 들을 때 그 풍부함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설교자를 교회가 좋아해요, 싫어해요? 좋아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겠다는 목회자는 교회가 좋아합니까? 안 좋아합니까? 대답을 안 하세요. 목회자가 “저 공부를 좀 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에 교회는 좋아하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집에서 혼자 공부한다고 하면 싫어할 리가 없지만 유학이라도 가겠다고 하면 안 좋아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느 교회에 있던 목사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담임 목사님은 한국에서 유명한 분인데요, 공부 많이 한 사람을 되게 좋아해요.” “그래요? 그럼 학문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아니요.” “그럼요?” “공부한 사람은 좋아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싫어해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은 싫어합니다. 맺혀있는 사과나무를 좋아합니다. 달려있는 사과나무를요. 왜? 즉시 딸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소위 얘기하는, 자본회임기간이라고 하는데, 자본이 투자돼서 다시 생산결과를 내서 열매를 따먹는 기간이 가장 긴 사업 가운데 하나가 임업입니다. 나무를 심으면 그것은 십년을 내다보고는 안 됩니다. 내가 나무를 심으면 우리 자녀들 때에 그 나무에서 결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좋은 포도주는 오래됐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 해에 포도의 품질이 어땠느냐에 따라 결정되는데 어쨌든지 간에 오래된 포도주나 증류주, 샴페인이나 위스키, 이런 것들은 연수가 올라가면 가격차이가 현저합니다. 보십시오. 몰트위스키 30년산, 50년산 같은 것들이 나오잖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지금 이것을 담그는데 앞으로 50년을 살겠습니까? 그것은 아들이나 손자를 보고 담는 것입니다. 독일인가 프랑스에서 어느 신부님이 선물을 받았는데 430년 된 포도주라고 합니다. 그것은 값으로 환산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한 오크통에서 따서 몇 개의 병을 담았는데 그 몇 개의 병중에 몇 번째 병인 것까지 라벨이 찍혔있다고 합니다. 그런 술을 사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더니 왕궁에서 사 간답니다. 왕의 즉위식 같은 때 그런 포도주를 내놓는데 가격은 환산할 수 없답니다. 수천만 원 되겠지요. 임진왜란 이전에 담가서 우리에게 온 술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긴 시간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가장 좋은 투자가 무엇인가? 윈스턴 처칠은 우유를 먹이는 거라고 그랬지만 그것은 건강을 위해서 그렇겠죠. 다음 세대가 아무리 어둡고 그래도 교육이 살아있으면, 목회가 살아있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엊그제도 화성에 있는 어느 교회 집회를 가서 감동을 받은 것이 있는데, 한 2천명 모이는 교회인데 초등학교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것을 연구하다가 결국 접었습니다. 대안학교를 운영하는데 학생이 76명이 모이고 월 등록금을 56만원을 받는데 일 년에 교회에서 1억 2천만 원씩 보태줘야 운영이 된답니다. 아홉 명의 선생님들이 76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교회에서는 이 대안학교를 시작하기를 너무 잘 한 것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학교 오는 것을 그렇게 행복해한답니다. 그리고 훌륭한 교장선생님이 책임을 지고 그 학교를 이끌어 가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해맑고 밝을 수가 없으며, 등교하면 제일 먼저 기도하고 큐티한 후에 하루 수업을 시작을 하는 겁니다. 승마, 요트, 달리기, 등산 같은 것을 배운답니다. 학교 오는 걸 너무 행복해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이 있고, 선생님들은 학교와 학생들에게 진짜 헌신적이어서 아이들을 신앙으로 기르려고 합니다. 저는 용기가 없어서 못했는데 우리 교회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교회가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데다가 목사님이 너무너무 자랑을 하는 겁니다. 중학교까지 만들어달라고 해서 고등학교는 몰라도 중학교까지는 세워보려고 한답니다. 그러면 중학교까지만 하면 고등학교는 제법 좋은 미션계 학교들이 있으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거기를 들어가면 될 거라고, 의욕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갑자기 우리 교인들의 초등학생들이 너무 가엾어졌습니다. 그때 그것을 좀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 너무너무 하고 싶었는데 누가 맡아서 할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고, 제가 교장이 되어서 그것을 하자니 목회가 너무 힘들어서 불가능할 것 같고, 일 년 동안 연구하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내려놨습니다. 희생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여담이 길었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산 속에 들어가서 성경만 백독을 하고 왔다, 천독을 하고 왔다고 하는 목회자가 와서도 안 됩니다. 신학을 제대로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 사상이 정통적인지가 검증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정통적인데 너무나 간단한 것 밖에 모른다면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다른 학문들을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세계와 소통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들은 이런 것을 원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전한 다음에 적용1, 적용2, 적용3 같은 것을 말입니다. 필요 없습니다. 소통할 수 있다면 진리를 쭉 말하면 자기가 해석해서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석한 후에 적용을 하고 그러는 것은 회중들에 대한 무시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진리를 말해라.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적용할 수 있다. 그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방향을 보여주면 우리는 갈 수 있다.” 진리는 힘 있게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에 세계와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 다른 학문들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니 목사가 되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정말 힘든 일임을 알기에 우리 아들이 신학을 공부하러 갔지만 저는 끝까지 말렸습니다. “웬만하면 하지 마라.” 내 마음속으로는 ‘말려서 말을 들으면 소명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서 말려보자.’ 그렇다고 “하지 마!”라고 협박하고 그러진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권고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웬만하면 하지 마라. 다른 길도 많다. 이 길은 너무 힘들다. 보람은 있지만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니다. 내가 보니까 딴 길로 가면 잘 할 것 같다. 딴 길로 가 봐라.” 그러나 일곱 살 때부터 시작해서 군대 제대하고 스물네 살인가까지 초지일관이었습니다. 할 수 없었지요. 다른 학문도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서 너무 어려운 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공부한 사람은 좋아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공부한 사람이 좋다면, 씨앗을 뿌려서 많은 사람이 공부하게 해야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학생들을 공부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겁니다. 얼마나 중요합니까? 오바댜 설교를 했더니 장학헌금이 훨씬 더 많이 나왔습니다. 평소보다 한 40% 정도 더 나왔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신학생들을 돕는 일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 이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고 여러분들은 그 사명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직분을 간단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지식은 실천적 지식과 함께 이론과 사상으로 무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천적인 지식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될 것인가? 성경을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면서 신학적인 지식이 쌓여가기 전에는 이상하게 상담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상담을 해보면 상담을 하면서도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목사님, 양복점을 해야 할까요? 설렁탕집을 해야 할까요?” 그것을 목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점쟁이한테나 가서 물어볼 이야기들을 와서 하는 겁니다. 또 그것을 이용해서 어떤 사람들은 권위 있게 얘기를 해줍니다. 기도를 해보니까 설렁탕집이 맞는 것 같다고. 그런데 해보니까 잘 되요. 그러면 “봐라.”면서 믿음이 굳어지는 겁니다. 그러다 잘 안 되면 “그것은 시련이다.” 그런 경우 저는 솔직히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든지 아니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닌데 그쪽 동네에는 설렁탕집이 워낙 많아서 아마 안 될 거다.” 그 정도는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샤머니즘적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실천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것이 실천적인 지식입니다.
그런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론과 사상으로 무장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목회 사역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실천적인 지식은 이론적인 지식과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론에서 실천이 나오고, 실천을 통해서 이론이 검증되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재미있지요. 보십시오. 변증의 재능은 수비의 기술입니다. 요즘 변증의 기술이 굉장히 강조됩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소위 변증의 기술, ‘art’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오랫동안 유지됐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들이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공부를 안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증할 능력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것이 계몽주의 이후 18세기 말, 19세기, 20세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끼리는 핏대를 세우며 얘기를 해도, 불신자하고 같이 세워놓고 대화를 하면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원래 기독교의 전통이 아닙니다. 어쨌든 변증은 수비의 기술입니다.
경건의 능력은 승리의 정신입니다. 사상의 크기는 공격의 규모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상이 크고 포괄적이면 온갖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딱 하나밖에 모르면 자기가 아는 성경구절 하나에 대해서 시비 거는 사람만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상이 클 때 공격의 규모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전쟁을 할 때 육군만 너무 잘합니다. 그런데 비행기만 나타나면 다 숨는 겁니다. 바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전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쟁을 하면 육해공군, 심지어는 해병대 -해병대는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다니는 부대임-까지 모든 군인들의 도움을 다 함께 받으면서 포괄적으로 모든 전선에서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있고 그를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살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백성들을 먹이고 살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안보입니다. 불의의 전쟁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런 공격의 규모를 사상의 크기가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전혀 없다면 그냥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뭐라고 떠들어도 ‘네 놈들은 네 놈들하고 논쟁해라.’고 담 쌓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담 쌓으면 안 되잖습니까? 복음을 전하려면 어차피 그 담을 넘어가야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원한에 맺힌 것 같은 그런 정신만을 가지고는 넘어갈 수 없습니다.
목회의 기술은 득점의 재주입니다. 드리블은 현란한데 골을 골대에 못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에 기껏 하는 말이 내용면에서는 우리가 이겼다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내용면에서 져도 되니까 골을 넣어서 승리해야지요. 2002년도 월드컵에서 스페인전에서처럼 우리나라가 내용면에서는 졌는데 골을 넣어서 결국 스페인한테 이겼잖습니까? 지금도 유럽에 가면 그때 얘기를 하는데 좋은 이야기가 오가지 않습니다. 개최국으로서의 이득을 봤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유사한 의사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족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수술 어땠습니까?” “아, 정말 환상적인 수술이었습니다. 제 생에 최고의 수술이었습니다. 완벽한 기술이었습니다. 봉합은 예술에 가까웠습니다. 흉터 전혀 안남을 겁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환자는 죽었습니다.” 뭡니까? 봉합기술이 워낙 뛰어나서 흔적도 안 남은 상처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죽었는데 말입니다. 득점하는 사람이 최고라는 겁니다. 목회의 기술은 마지막에 골인을 시키는 겁니다. 목회의 기술이 없는 것이 마치 진실의 상징인 것처럼 그렇게 하는 건 아닙니다. 이론과 사상 뿐만 아니라 목회자에게는 전문적인 기술이 요구됩니다. 이론과 사상이 기술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성장하고 그 지식이 성장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사랑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문제 5) 이번 공과를 하면서 구역(순) 식구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문제가 있다면 서로 나누어 봅시다.
구역에서 나누어보십시오.
[12과]
<12과 신학이란 무엇인가>로 넘어가겠습니다.
문제 1) ‘신학’이라는 용어는 넓은 의미로는 ( ) 자체를, 좁은 의미로는 ( )에 관한 ( )의 체계입니다. 우리가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지고 있던 ‘신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개념과 이 책을 이제껏 공부하고 난 후에 갖게 된 개념의 차이점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신학’이라는 용어는 넓은 의미로는 ‘기독교 신앙’ 자체를, 좁은 의미로는 ‘하나님에 관한 학문의 체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학을 공부한다고 할 때 신학교에서 목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가장 좁은 의미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신학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신학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신이 없다.” 그것 자체가 신학적인 발언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아주 훌륭한 신학입니다. “주님을 내가 만났다.” 이것도 신학입니다. 그 신학을 피할 수 없는데 산발적으로 배워왔던 것들을 우리들이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문제 2) 신학이 학문일 수 없는 측면, 학문일 수 있는 측면에 대해 구역장(순장)이 비교 정리한 도표를 보면서 이해를 다집시다.
학문은 이성적으로 자명한 원리에서 출발합니다. 이성으로 생각할 때 ‘아, 그렇구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학은 신앙적으로 믿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 이것은 이성으로 이해 안 되지만 “아멘.” 하고 믿는 신앙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학문은 사물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론합니다. 그러나 신학은 이성의 원리를 따라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학문일 수가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학문의 주체가 학문의 대상을 파악합니다. 물리학을 한다고 그러면 사람이 물리보다는 훨씬 위에 있는 것입니다. 물리학에 대한 모든 것을 알지 못할 뿐이지 말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는 파리에 대해서 모두 압니까? 그렇지만 파리도 파리 자신에 대해서 모르니까 우리가 파리보다는 위대한 것이지요. 일평생 공부한다고 해도 파리에 대해서 더 이상 나는 발견할 게 없고 가르쳐줄 게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래알 하나를 놓고 연구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문의 주체는 항상 학문의 대상보다 큽니다. 그런데 신학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십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사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학문일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일 수 있는 측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질서와 체계입니다. 신학 안에는 논리적인 질서와 체계가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논리적인 연결을 하면서 이성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뜻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받아들인 것을 논리적으로 연결할 때는 이 믿음을 토대로 해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학문일 수 있다는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신학은 성경을 통해 알려주는 지식을 체계화하는 학문이고 성경적 사실의 해석과 체계화 과정에서 일반 학문의 원리를 똑같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학문을 공부해야 될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한 사람들이 탄탄한 신앙 안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래서 신학의 뜻을 가지고 있는 좋은 젊은이들을 교회에서 대학 다닐 때부터 잘 도와서 그 사람들이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습니다.
신학이 학문일 수 있는 또 다른 측면은 신학이 지닌 독특한 지식의 유(類) 때문입니다. 유(類)라고 하는 것은 유형입니다. 유, 종, 속 이렇게 나누는 것처럼 하나의 분류, 카테고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식의 성향이 아니라 믿고자 하는 성향, 즉 믿음이 신학의 독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성향이 계속 작용해서 신학을 공부해나가기 때문에, 신학은 학문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은 신적 계시로 주어진 초자연적, 이론적인 것인 동시에 실천적인 것이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신학은 진리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자 최고선이신 하나님을 향한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없는 곳에는 경배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만이 예배할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신학의 독특성이 또 있습니다. 다른 학문들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지 없이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서 탐구합니다. 우리가 파리에 대해서 공부하면 파리가 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신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을 알아가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당신을 알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계시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이 계시의 특별한 형태입니다.
(신학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두 번째는 다른 학문들은 학문의 주체인 인간에 의해 시작된 학문이지만 신학은 학문의 대상인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학문입니다. 이것을 선행하는 신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는 이러한 존재다.’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신학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신학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면서 신학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다른 학문들은 학문을 하는 주체가 학문의 결과를 따라 살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경제학자가 경제적으로 안 살고 좀 낭비를 한다고 해서 “저건 인간도 아니다.”라고 얘기를 안 합니다. 그러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동기이기 때문에,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삶이 그 신학과 성경과 배치되는 삶을 살 때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을 다니는 한 학생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자기네 학교에서 가장 비윤리적인 선생님이 있는데 규범 윤리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랍니다. 아이러니하지요. 그럴 경우에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수학하는 사람이 계산을 잘 못한다고 해도 비난을 안 받지만 규범윤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규범 없이 살 때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3)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칼빈의 인용문을 읽으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된 바를 자신의 언어로 말해봅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효과는 우리에게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것을 가르치며, 둘째로 그 지식의 안내와 지도를 받아 그분에게서 오는 모든 좋은 것을 간구하여 얻으며 그것을 받을 때 감사드리도록 설득한다.”
그 지식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들어주고,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을 간구하고 또 감사하도록, 다시말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고 그분께 감사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경배의 삶입니다.
문제 4) “지혜와 신학의 전통”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 점을 나누어 봅시다.
나누어보십시오. 요지는 이것입니다. 현대의 지식은 몰지혜화 되어갑니다. 지식은 많은데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것들은 아주 몰지혜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술을 통해 물건들을 생산하기에 적합한 방식을 인문학과 신학에 도입을 한다는 것입니다. 신문에 보니까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공부하라고 초청을 하면서 “당신의 사업의 성공은 인문학에 달렸습니다.”라는 문구를 내걸었습니다. 인문학은 그런 걸 가르쳐주는 학문이 아닙니다. 인문학은 인간자체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고, 어떻게 덕스럽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어주며, 그 길을 찾아가는 학문이지 -물론 하나님 없이 찾는 것이지만- 인문학을 열심히 배우면 돈 버는 기술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홍보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신학 안에 도입된 학제들 간의 벽은 학문적 성과들을 개별적인 지식으로 남게 만듭니다. 높은 벽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무슨 학문을 하고 있어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서로 모릅니다. 서로 소통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학문을 심화시키는 데는 도움을 주었지만 그 모두를 하나로 엮어서 그 학문이 어떤 목표를 향해 가게끔 만드는 것에는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 지식의 팽창과 지혜의 실종 현상인데, 이와 비슷한 현상이 신학 안에도 일어나게 됐습니다.
(이렇듯) 삶의 지혜를 추구하는 신학의 전통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을 공부한다해도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 훌륭한 설교자와 목회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고민을 가지고 이 세계와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학문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지 그 자체를 많이 배우고 왔다고 해서 그 자체가 우리에게 뭔가를 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대략 1725년까지임)까지 교리공부라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습득하는 중요한 것이었고, 교리를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해석을 통해서 교리가 올바른지를 배웠습니다. 교리에 대한 공부는 성경해석을 온전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의 목적은 목적 자체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의 표지에 나왔듯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하고 하나님 앞에 인간이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할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학의 임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부합하며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답하는 것입니다.
문제 5) 오늘 공과 마지막 순서는 우리 모임의 특별기도회입니다. 오늘은 각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회 담당자가 미리 지체들로부터 받은 기도제목으로 간절하고 열렬하게 기도합시다.
그렇게 기도를 하십시오. 또 이렇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습니다. 김 아무개의 가정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간절히 기도하고 난 후 오늘 이 가정을 위해서 이 아무개 자매가 기도해주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좋겠죠. 그러면 진심으로 기도해 주고, 그 다음 사람을 위해 또 기도하고 또 누군가가 그를 위해 기도해 주고.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이든지 네 사람이든지 그렇게 기도해야 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