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 제10과
녹취자 : 오희열
자, 오늘은 10과입니다. 드디어 우리가 3분의 2를 넘어왔습니다. 15과까지 하면 다 되는데 10과를 왔고, 11장은 전에 우리가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5, 6주 정도 하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이 10과는 앞에서 공부한 모든 과중에서 제일 쉬운 과일 것입니다. 그냥 이야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술술 읽으면 되는 내용들입니다. 이 부분을 쓰면서 저는 옛날 생각을 많이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10과에서는, 오늘 오전에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가고자 하실 때에 많은 연단을 사용하셔서 그 사람을 빚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원래의 자연적인 태생으로서 성품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신앙의 과정 속에서 변화되어서 어떤 성숙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많은 연단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연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거룩한 인격을 갖게 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연단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고난이 그 사람 안에서 신앙화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런 신앙의 반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고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인간적으로 성숙을 하고 지혜롭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는데, 그렇게 끊임없이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서 자기를 끊임없이 돌아보며 반성하고 자기를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연단을 통해서 성숙해지는 것이지, 고생만 해서 그렇게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생을 많이 하고 자기 성숙의 발전이 없으면 사람이 아주 폭력적이고 거칠어지거나 아니면 사람들에게 찌그러져서 기를 펴지 못하는 자신이 없는 사람이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위치에서든지 당당하게 진리를 붙들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진리를 빙자하는 것이 아닌 그런 사람들은 오랫동안 연단을 통해서 그런 삶의 태도들이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1번 문제를 큰소리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이야기를 읽으면 서 느낀 소감을 나누어 봅시다. 특히 자신 이 연단을 받아 신앙이 성장했던 경험을 회상하며 말해 봅시다.”
아마 참 많을 것입니다. 장년들은 더더욱 결혼과 사회생활이라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을 것이고, 청년들의 경우에도 연세가 좀 많이 드신 청년들은 아마 연단을 많이 받았을 것이고, 연세가 많이 들고 청년으로 있다는 존재 자체가 연단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꼭 나이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이가 어려도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작은 일을 통해서 많은 교훈을 받는데 호세아서에 나오는 것처럼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혹은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사람은 악기를 제조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이올린만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만든 악기 중에서 바이올린이 특히 명품으로 꼽히는데 왜 그렇게 명품이 되었는지, 우리 교회에도 어느 자매가 그것을 하나 가지고 왔었는데 시가 45억이라고 했습니다. 유럽 같은 곳에서는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하면 그것을 단체에서 한 2년씩 계약제로 빌려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여를 받으면 자기가 책임지고 2년 동안 잘 쓰고 반납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 비행기를 타도 1등석을 타야 한다고 하고, 어떤 바이올린 연주가 한 사람은 비행기를 탈 때마다 두 자리를 끊어서 바이올린을 놓을 비즈니스석, 자기가 앉을 비즈니스석을 탔는데 그 두 개의 마일리지를 합산해줘야 하는데 안 해준다고 해서 소송까지 한 적이 있답니다. 어쨌든 간에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이 악기의 가치는 좀 더 높아질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 말고 다른 것을 높이 쳐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다른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도 이런 악기의 제조에 대해서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자료를 읽으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 비밀은 엄청난 장인으로서의 기술에도 있지만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한 목재가 결정적으로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아무 재료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변형이 되지 않는 찰지고 옹진 나무를 택해서 그것들을 켜서 그늘에서 말리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변형되지 않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한 후에 이 악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나 빛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아무렇게나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연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보면 스트라디바리 라는 사람이 나오고, 17세기와 18세기를 걸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꽤 오래 살았습니다. 당시에 90세 정도 살았으니 대단합니다. 이런 악기를 쓰다가 혹시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해야 할 때는 수리비도 어마어마하고 수리하는 기간도 짧아야 1년씩 걸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사람들만 이런 악기를 수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악기도 재료가 그렇게 중요한 것처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일을 하다가 죽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사람이 정말 사람답게 준비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쓰시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가장 큰 보람과 가치는 이 세상의 환경에 의해서 휘둘리고 행복이 좌우되는 인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품성으로 자기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가치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끊임없이 무지를 몰아내기 위해서 진리를 아는 지식을 탐구하고 알아도 그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사랑을 받고 그렇게 해서 우리 자신이 그 진리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 주에는 구역원들이나 순원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십시오. 그래서 자신의 연단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도록 말입니다.
2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가난으로 연단을 받을 때”를 읽으며 궁핍 속에서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신학생들을 물질로 돕는 일의 선교적인 의미 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해 봅시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신학교 시절에 고생하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을 얘기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궁핍과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궁핍하게 하시고 혹은 시련을 당하게 하실 때에, 그 사람의 인생에서 그것을 사용해서 뭔가 그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물질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 혹은 시련을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너의 고통에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대. 내가 너를 돕는 것은 주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이야. 그러니까 계속 고생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 보아라.” 이런 것은 맞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지하철에서 “한 푼만 주세요. 아이들이 배고파요.” 하는데, 돈 많은 한 사람이, ‘내가 이 사람을 돈 만원이라도 도와주면 이게 계속 습관이 되어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될 거야.’하며 도와주지 않는 것은 한 10%정도는 맞지만 나머지 90%는 틀린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을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그 사람이 당하는 고난 같은 것들은, ‘저 사람이 돈이 없어서 저러는구나. 돈만 주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경박한 자본주의적인 태도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인정하면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를 신앙적으로 돕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도와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밥이 없어서 배고프다고 하는 사람을 얼마나 사랑을 많이 했는지, ‘저 사람이 이런 습성이 굳어져서 계속 가난하게 살면 어떻게 하나?’하는 염려는 너무 과다한 염려입니다. 그것은 도와주고 나서 생각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생각하기에 “지금 세상에 가난한 학생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겠지만 많습니다. 신학생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반 대학의 학생들 중에도 자가용을 몰고 사치스럽게 사는 학생들도 있지만 정말 고통을 받으며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고통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학생들을 돕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제가 신학생일 때 역사를 가르치던 교수님이 계셨는데 영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셨답니다. 그때는 돈을 가지고 나갈 수도 없고 돈을 한국에서 보내줄 수도 없어서 장학금을 받는 사람이 아니면 출국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갔는데 너무 어려워서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는데 집에 와서 교과서를 열어보니까 돈 봉투가 들어 있더랍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누가 넣었는지를 모른답니다. 그 클래스에 있는 학생들이, 동양에서 가난한 학생이 와서 그렇게 힘겹게 고학하듯이 공부를 하니까 슬그머니 쉬는 시간에 책갈피에 넣고 지나간 것입니다. 그 교수님이 자기는 그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도 졸업하기 전에 한 번 그렇게 해 주고 졸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뿌린 것들은 헛되이 낭비된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가슴에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신학교 섬기의 날을 최근 2년 동안에는 많이 하지 못했지만 한창 많이 할때는 열 개의 학교 정도까지 했었는데 제가 가서 말씀 한 번 전하고 책 한 권 주고 점심을 잘 대접하고 장학금을 줍니다. 장학금 줘 봐야 한 200만원이나 300만원 주고 옵니다. 한 1천만 원씩 주고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쨌든 형편이 그랬습니다. 꾸준히 했습니다. 총신만 거의 10년을 했고 고신도 8,9년 했고, 여러 학교를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요즘에 궁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러느냐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몇 해 전에 제가 들은 가슴 아픈 이야기는, 점심시간에 2500원인가 5000원인가 하는 비싸지도 않은 밥을 사먹지를 못해서 점심시간이면 100명에서 150명 정도의 학생이 산으로 올라가서 물을 마시며 기도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지나면 내려온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같은 풍요한 시대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너무 눈물이 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1년 동안 몇 장의 식권이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느냐고 하니까 학교에서 금액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는 책도 많이 팔려서 그 1년 치 식권을 사서 학교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진짜 어려운 학생들은 그 식권을 달라고 교무과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같은 곳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어려운 학생들의 집으로 통보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엄마 아빠가 학교에 방문해서 상담을 하고 한 달이나 석 달 치 식권을 받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식권을 엄마 아빠가 학생에게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것으로 사먹으면서도 엄마 아빠가 식권을 사 왔다고 생각하지 집이 가난해서 학교에서 받아왔다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참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제가 1986년도의 일이었습니다. 신대원 2학년 때였습니다. 오전 내내 공부를 하고 무슨 일 이 있었는지 오후에 수업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집이 너무 멀어서 밥을 안 먹고는 못 갈 것 같아서 식당에 들렀습니다. 500원을 받고 밥을 주는데 불그스름하게 볶은 삼겹살과 상추를 주는데 시커멓게끔 듬뿍 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주머니, 이게 뭡니까?” 하고 깜짝 놀라며 물었더니, “학교를 졸업한지 20년 만에 선배들이 와서 여러분에게 주는 식사입니다.”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돈은 받았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고기와 담쌓고 살던 시기에,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결심을 했습니다. 너무 고마왔습니다. 그분들은 지금 이미 팔순이 넘으셨을 것이고 대부분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내가 이 다음에 교회를 해서 능력이 되면 꼭 한 번 와서 이렇게 나 같은 후배들에게 봉사를 해야지.’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움을 받아보고 고마움을 안 사람들이 남에게도 베풀 줄 알지, 안 해본 사람들은 못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신학교를 열심히 돕는 교회도 있지만 대부분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목회자 자신이 모두 어려운 시절을 지냈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혜택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만 장학금은 받아봤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기회 있을 때마다 많이 도우십시오.
지난번에도 학생들이 이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책을 한 권씩 받고 얼마나 좋아하는 모릅니다. 우리가 뭔가 하나님 앞에 헌신을 하면 이렇게 귀한 일이 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돈 벌어서 어디에 쓸까? 이렇게 보람 있는 데가 있는데..” 그리고 해외에 있는 신학교들, 외국에 있는 학생들도 엄청나게 가난하게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고 아프리카나 제3세계에서 온 사람들, 정말 고통 받으면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돈만 주지 말고, 마음 깊이, 다음 시대의 한국 교회를 위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그렇게 돕기를 바랍니다.
3번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인간의 의무는 자신의 삶을 대면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자살이 왜 신앙 적으로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 봅시다.
요즘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롯데그룹 부회장이 검찰조사를 앞두고 자살을 했습니다. 장로교 교단에 속한 유수한 교회의 장로님이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심지어 목사들도 자살을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할 것인가?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논들이 나올 수 있겠지만, 정신병이나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고, 그 다음에 정신병이나 우울증 없이는 자살하기가 어렵습니다. 대개 80~90% 이상은 우울증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울증 증상 같은 것들이 평소에 없었던 사람들이 불현듯 자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같은 분들도 자살을 했습니다. 이번 경우나 몇몇 경우들을 보면 평생을 자기 소신을 따라서 반듯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뭔가 자기의 자존심과 이런 모든 것들이 확 구겨지는 것을 경험할 때, 그런 자신의 자존감과 수치 사이에서의 갈등을 이기지 못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니체가 이야기 했듯이 “굴복하느니 차라리 파멸을 원한다.” 이런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이 이 자살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에도 이 자살이 굉장히 유행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스토아 철학 같은 데서는 이런 자살을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고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선비들도 이 자살 자체를 세상을 향한 침묵의 발언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아주 높이 평가를 했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 전통에서도 그렇고 조선시대 이전에 이미 삼국시대부터도 선비나 무인들 가운데서도 이 자살은 굉장히 고결한 것으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또 여자들이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자살을 하는 것들도 말입니다. 굉장히 왜곡된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 같은 사람은 이런 자살을 인생에 있어서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 같은 것으로 보았고 그것은 인간의 고귀한 특권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저 다다이즘(dadaism)같은 퇴폐주의부터 시작을 해서 고고한 유학자와 사무라이에 이르기까지 이런 죽음을 미화하는 풍조들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자살을 구원문제와 연관시켜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보면 자살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자살을 구원과 연관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자살 같은 것을 예로 들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구원은 자살 여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를 믿었는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칼빈 같은 사람은 이것을 교만의 극치라고 보았습니다. 왜 교만이라고 보았느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어떤 상황에 두셨습니다. 그게 나의 어떤 죄 때문에 당한 상황일 수도 있고 혹은 나는 죄가 없는데 악한 사람들 때문에 내가 그런 곤경에 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불완전한 것 때문에 그런 위치에 처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죽일 수는 없지만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상황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나의 생사화복이, 그리고 내가 직면하는 모든 상황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핍박을 받아서 죽거나 타살을 당하거나 병에 걸려서 죽거나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동안에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다는 가장 중요한 표는 내가 하나님 앞에 피조물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게 일어나고 있는 생로병사, 희로애락, 모든 난관들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의무이고 살고 죽는 것을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보기에 자살은 결국 “하나님, 당신이 나를 여기에 살려두셔서 이런 사태를 당하게 하시는 것은 굉장히 잘못하고 계시는 것입니다.”그런 교만의 표현이 자기의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목회자로서 자살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지만 솔직히 이런 적은 있습니다. ‘아, 차라리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셨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얘기합니다. 그것을 찰스 스펄전 같은 사람은 굉장히 심각한 신앙의 패역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굉장한 경건으로 묘사합니다. “나는 이만큼 세상에 대한 애착이 없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성경말씀은 오히려 우리에게 애착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라고 합니다. 숨을 쉬는 동안에는 간절히 기도해서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있고, “이것이 이렇게 저렇게 되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 없나이다!”라는 몸부림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그런 모습은 신앙이 뛰어나다기 보다는 신앙을 가장한 현실도피주의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라는 말이 의미하는바 중의 하나는 강연히 자신의 인생에 맞서고 나는 내 인생에서 어떠한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든지 간에 나는 나의 삶을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당당히 그 모든 것에 맞서서 이 세상 64억의 인구가 모두 일어나서 나에게 돌을 던져도 상관없을 정도로 나는 내 인생에 대한 나의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나에게 나쁜 말을 합니다. 그것을 잘 듣고 어떤 것은 흘려버리고, 또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 속에는 때로는 진실이 담겨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귀담아 듣고, 그가 말했기 때문에 내가 무릎을 꿇어서는 주체성 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하나님 앞에 물어보도록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자기 앞에 짓밟아서 무릎을 꿇게 하려고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이 세상 누구도 여러분을 모두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도 태어나서 그렇게 다수의 사람에게 만족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꿈꾸고 기대하는 것은 아주 추잡한 인생입니다. 의미 있는 길을 걸어가면 언제나 욕하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받는 수치가 나의 과오와 하나님 앞에서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인지, 아니면 피할 수 없는 것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생각하며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는 정도가 깊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거의 반성하지 않으면서 그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생김대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 살아간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질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하면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그래서 유산이 그 집안에서 상속되지 않도록 법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개인주의적 정의의 개념에서 보면 칼빈의 조치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역사적인 문맥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그러한 교만,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앞에서 자기의 판단이 옳음을 내세우는 자의적인 죽음의 병폐들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칼빈이 노력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문맥에서는 우리가 신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살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자살만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난해지고 역경을 만나고 심지어 여러분이 죄를 지어서 그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의 의미를 물어가야 하는데 그런 삶 자체를 아예 부인하면서 현실에서 탈출하고자하는 그런 죽음에 대한 선망을 갖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무는 자신의 삶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대면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직면하는, 내 앞에서 전개되는 삶의 사태들이 내 인생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당당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할 일은 그런 모든 고난을 통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용서해주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다가 어느 한 순간에 “고단한 인생을 끝내고 너는 내게로 오라.” 하실 때 하나님이 불러 가시는 것입니다. 칼빈은 서른한 가지의 질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대적자들이 놀렸습니다. “저렇게 나쁜 짓을 하니까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셨다!” 하며 감당할 수없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동성애자로까지 몰려서 그의 작품이 매장되다시피 하도록 불우한 시간들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이러한 신앙으로 그런 것들을 견디고 이겨나갔던 역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주석이나 설교나 글을 읽을 때 고통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할 이야기들이 많은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쭉 풀어냅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을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음 4번을 읽어보겠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신의 생각 을 말해 봅시다.
참 오래되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읽었으니 말입니다. 그 사진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18세기에 아메리칸 인디언 선교사입니다. 스물아홉 살에 죽습니다. 스물한 살에 회심하고 스물네 살에 선교사가 되고 스물아홉 살에 죽습니다. 원인은 폐결핵이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과로 때문에 결국은 죽습니다. 사실 눈물 없이는 이 사람의 일기를 읽을 수 없습니다. 요즘 기도도 안 되고 가슴이 답답한 사람들은 한 권씩 사서 읽어보십시오. 저는 여섯 권, 원서를 두세 권 사고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여섯 권정도 샀는데 정말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정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다소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89년도쯤엔가 학생들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는데 이 책을 숙제로 내 주었더니 읽고 나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고 기도를 하는지 한동안 학교 신학부 캠퍼스에서 울음소리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커다란 감명을 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에 나옵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순수한 영혼으로 하나님 향해서 사는지가 나옵니다. 한번 쭉 읽으시면서, 아예 한 권을 읽고 구역원들과 순원들 앞에 나타나면 훨씬 권위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 주에 한 번 읽고 나타나보십시오.
그 다음 넘어갑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 문제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치열한 연단을, 결연한 의지로써 감당할 때 더욱 영혼을 잘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또 온전한 신자가 되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해 봅시다.
사람은 가르칠 때 자기가 경험한 것보다 못 가르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실하게 인생을 일평생 살아온 사람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사람이 좀 성실하게 살아야지.” 한 마디만 해도 듣는 사람에게 울림이 있습니다. 그게 결국 그 사람의 체득된 지식과 신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서 배운 것은 아니지만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아주 짧은 연설로 듣는 사람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기까지는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친 흔적이 있을 때 그러한 감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감화로 받아주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치열한 연단을 잘 감당해 나간 사람들은 그런 연단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을 줍니다. 그래서 저도 부족하지만 고생하는 후배들을 보면 많이 힘들어합니다. 그때 내가 고생한 이야기를 해주면 위로를 받습니다. 사람이 위를 바라보면 자기가 항상 혼자 고통 받는 것 같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래도 나는 참 순탄한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치열한 연단을 감당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생이 연단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생이 상처가 됩니다. 그리고 패역을 만듭니다.
여러분, 재밌지 않습니까? 음식이 있는데 똑같이 썩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발효가 됩니다. 늘 밥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변비도 오고 어떤 때는 화장실에 다녀오면 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해결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구르트를 먹으면 좋다고 해서 많이 먹었는데 살만 찌고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가루로 먹는 것을 사서 항상 밥을 먹고 나서 먹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요구르트 가루는 공복에 먹어야 한답니다. 밥을 먹을 때는 산이 쏟아져 나와서 그 산에 요구르트의 유산균이 다 죽어버린답니다. 그래서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효소를 발견해서 몇 년째 먹고 있습니다. 효소를 먹으니까 너무 편안했습니다. 힘들던 것이 많이 해소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어디 출장을 가도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속에서 발효를 시켜주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효소액 같은 것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젊을 때는 괜찮은데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균인데 어떤 것은 발효가 되어서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김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소금과 매운 고춧가루를 넣어서 시뻘겋게 되어있을 때는 못 먹을 거 같은데 맛있게 익었을 때 따끈따끈한 밥과 가져다 놓아 보십시오. 너무 군침이 돌도록 맛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썩는 것인데 어떤 것은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나쁜 물질들이 그 속에서 나와서 그 썩은 것을 먹으면 몸에 문제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똑같은 고생을 하는데 이게 어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망가뜨려서 그 사람을 패역하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그런 고생들을 통해서 정말 아름다운 인격으로, 기도의 사람으로, 인간을 더 많이 이해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더 받은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고생 자체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음식물이 있을 때 거기에 떨어진 균이 무슨 균인가에 따라서 하나는 썩어서 나쁜 화학물질을 내기도 하고 어떤 것은 그것이 인간의 몸에 아주 이로운 발효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좋은 발효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런 모든 시련과 역경들을 견디면서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완벽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누가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그러나 중심은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분께 있다고 굳게 믿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