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함과 인격(새벽)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눅1:80)
녹취자: 김경애
우리가 생각해볼 때 세례 요한의 특성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흩어진 기사들을 종합해보면 그의 인격적인 성품을 알게 하는 대목들이 나옵니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 이 사람의 인격은 진리에 대한 단호함과 그리고 양보가 없는 의로운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로운 성격이 자기의 개인적인 견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광야에서 선지자로 불러주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이것은 교회 개척의 원리로 보면 썩 좋은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모였고 승리의 도취를 만드는데 그는 오히려 자기의 청중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외치며 그들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나라에 합당하게 살기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임박한 진노를 피하고자한 것임을 간파하고 메시지를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헤롯은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데 그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지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 없이 선포하는 예언자의 자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헤롯과 같은 이방사람들에 대해서도 지켰던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의 모든 삶은 그의 성품이 지나간 궤적입니다. 그리고 그 성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시는 것도 있지만 목회를 위한 성품이라는 것은 대부분 후천적인 성화의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발현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싶어 하지 그저 별 볼일 없이 사람들에게 밟히고 무시당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다가 죽고 싶다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 속세를 등지고 책이나 읽으면서 조용히 지내는 것과는 또 다른 성품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하고 더 중요한 지도자가 되면 될수록 더 많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진리의 문제가 아닌 한 그들 중 누구도 내치지 않고 함께 아우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일들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음악회를 볼 때 신기해 보이는 것은 연주자들이 아니라 지휘자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향곡 하나를 연주하려면 86,000개 정도의 음표를 외워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귀로만 그 수많은 악기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손가락과 표정으로 조정해냅니다. 그에게는 그 악기 중 어느 악기는 음이 너무 낮다고 삭제해버릴 악기도 없고 어느 악기는 음이 너무 높다고 빼버리고 싶은 악기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각각 다른 악기이지만 이 사람 손에 의해서 연주되면서 장대한 하모니를 이루며 우주의 아름다운 조화를 그 짧은 음악 속에서 헤겔의 표현에 의하면 인식경험이 아닌 감각경험 속에서 우리에게 진리의 질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탐욕으로 얻은 지위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지도자가 되어서 본인도 불행하고 그 공동체의 따라오는 모든 사람들도 매우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는 첫XX를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아버지가 돈이 많아서 일 년에 몇 만 불씩 보내주면서 아무 염려 없이 넉넉한 삶을 살면서 공부하는 친구들,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낙오자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워낙 머리가 좋아서 오자마자 두각을 나타내고 교수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나는 아직까지도 논문을 시작도 못했는데 나보다 늦게 들어온 후배가 논문을 거의 끝내가고 교수들이 최고의 논문이라고 칭찬해서 박사를 받은 친구들은 나와 비교를 해볼 때 훨씬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에서 우리들은 판단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것들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시적입니다. 왜? 지금 여러분들이 친구들과 우열을 가리는 그 내용은 여러분들이 이 학교를 다닐 때의 우열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 실제로 이 망망대해에 나아가 사역의 세계에서 펼쳐질 때에는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에스펠이라는 감리교의 지도자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기억하십니까? 휫필드가 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박사학위를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또 윌슨은 어느 학교를 졸업했습니까? 박사학위를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전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디 이것이 외국 학자들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길선주 목사님의 전공이 무엇이겠습니까?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습니까? 책은 얼마나 읽었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도서를 얼마나 소장하고 계셨습니까? 우리는 이런 것들을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키 재기 하기에는 너무 먼 영역밖에 존재합니다. 왜? 그 사람들은 도토리 키 재기처럼 논문의 질이나 어느 교수 밑에서 공부하고 어느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키 재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또 다른 점 때문에 교파를 초월하고 신학의 입장을 초월해서 존경받고 추앙받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한 사람의 존재의 크기는 정신의 크기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그리고 신앙의 크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정신의 크기는 지성과 감성의 크기입니다. 그래서 지성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인식해서 알고 감수성의 능력으로 외부의 사물들과 접하며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느끼지 못하는 그 무엇을 끊임없이 내안에 빨아들일 때 그때에 그 사람이 감성의 능력이 큰 사람이고 그렇게 큰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정신의 크기가 큰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런 것들이 더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성은 지성인데 맨 지성이 아니라 계시의 말씀을 붙들고 안셀무스적인 지성과 그리고 이성의 탐구의 합의를 이루는 그런 종류의 지성입니다. 감성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속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흔적들을 무작위로 논리 없이 막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존재와의 연관 속에서 사방에 흩어진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죄의 누추함이 얼마나 더럽고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죽했으면 피조물들이 구속의 날을 바라보며 흐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사실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극히 연약한 여자의 몸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의 영혼과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랬습니다. 우리 목사가 무엇입니까? 무슨 힘이 있습니까? 무슨 권력이 있습니까? 오늘도 한국교회에서는 수많은 목사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때로는 자식이 잘못해서 혹은 그렇지 않은 이유에서는 부당한 방법으로 쫓겨나고 고난을 당하고 교인들과 투쟁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워야할 많은 기력들을 교회에서의 갈등 속에서 지불하는데 사용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예레미아가 ‘나는 아이라 나는 말할 줄 모릅니다.’ 실제로 어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나는 어린아이입니다. 나는 무엇을 말해야할지 알지 못합니다.’ 다윗과 선지자는 자신을 찌끼와 같이 생각했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만물의 찌끼와 같고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행복한 복음사역은 없습니다. 그것은 행복이 어떤 관점의 행복이냐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변화된 행복을 갈망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메타노에오의 사건이 없다면 그리고 그것이 현재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면 누가 아골 골짝 빈들에 다니는 길이 존귀와 영광을 받는 길 보다 좋고 그리고 세상을 누리는 것을 멸시천대 십자가를 진 것만 못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느냐 하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자요, 만물의 찌기 같은 가장 연약한 인간이지만 나의 믿음, 목사의 영혼과 심장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 세상에 목회자를 세우셨습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놀랍게 초대교회 교부들로부터 시작해서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이후에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치된 견해를 보이는데 이것은 그들의 의견이 우연히 일치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발견한 목회적인 얼개를 그들이 공통적으로 착념했기 때문에 이런 결론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Incarnation의 원리입니다.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들리는 말씀과 보이는 말씀으로 나뉩니다. 들리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잘 조직화해서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의 계시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라틴어로 말하자면 ‘이그지미테미’ 혹은 ‘홀리 온’ 하나님이 이렇게 확실히 우리에게 드러나 보이도록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례입니다. 그래서 이 성례는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성례가 무엇을 보여줍니까?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성찬은 그 율법과 복음을 다 보여줍니다. 그래서 집례자의 선언에 의해 찢기는 그 떡에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찢기시는 좋으신 우리 하나님의 아들의 살을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의 죄의 심각성을 그 찢어진 떡에서 그 흘려진 피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혀 받아먹을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심으로써 거기에서 인간의 무한한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측면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례, 성찬은 아주 놀랍게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례에 대한 논쟁이 그렇게 종교개혁시대 때에 치열하게 벌어졌던 이유는 이것이 결국은 신론, 기독론, 성경론 그 무엇과도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 없는 Pivot 과 같은 매우 중요한 우리말로 신학의 지돌이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돌이를 아십니까? 문을 따라서 이렇게 밑에 힌지를 받치면 돕니다. 그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두 가지는 원천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진 들리는 말씀과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원천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파생적인 권위를 가진 말씀을 교회에 둘을 두십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목화자의 설교입니다. 물론 이 설교 속에는 그 교회가 역사적으로 이제껏 까지 전개해온 신앙고백, 신조들을 모두 포함해서 이 설교가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진리의 말씀을 설명하는 형식화의 과정을 따른다는 전제하에서 거기에서 외치는 연약한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과 같은 원천적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규칙은 규칙이기는 한데, 규범은 규범이기는 한데 라틴어로 말하면 ‘레귤라이…….’ 규범이 되는 규칙이 아니라 ‘레귤라이 노르마타’ 성경에 의해 규범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끊임없이 그 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은 설교가 될 때 성도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할 수 있는 설교가 됩니다. 그렇지 않은 설교에 대해서는 성도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 복종을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성례에 비교될 수 있는 또 다른 종속적인 권위는 보이는 말씀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의 인격과 삶입니다. 요한 크리스토스톰은 자기의 성직록에서 하나님이 성직자를 세우신 원리가 이 세상의 권세자들과는 달리 땅에 있는 것들만 매고 푸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까지 매고 풀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으신 것은 우리 목회자들에게 이 일을 맡기시기 위함이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 목회자들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조 오웬은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것은 그가 전하는 하늘의 말씀대로 살 때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 어떤 인격과 삶의 사람이 되는지를 보이지 않는 말씀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의 인격과 생활을 통해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런 사상들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아주 명백히 말했습니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누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 자신이 완전한 예수의 모본이 되기 때문에 자기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하기에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그분이기 때문에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목사님이 자기의 설교집에서 십계명의 현재적 유비성에 대하여 강의를 하면서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주인님! 날도 어두운데 어디로 모실까요?’ 항구에서 배를 탔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이 ‘저 북쪽 하늘을 보거라 북두칠성이 보이지?’ ‘네.’ ‘거기 북극성을 바라보고 계속 항해를 해라.’ 그리고 주인은 배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있다가 하인이 ‘주인님 아무래도 우리가 북극성을 지난 것 같습니다.’ 주인은 북극성을 목표로 향해 가라는 것은 배를 바다위에 띄워서 우주 공간을 날아서 한없이 먼거리에있는 북두칠성에 안착시켜달라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은 거기가 아니고 다른 지명이지만 지리학적으로 거기를 바라보고 항해를 하면 거기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옛날사람들이 별자리를 보고 운행했던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칼빈도 그런 것들을 되지 않는 방법으로 흉내 내는 것을 원숭이가……. 것이라고 조소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희미한 흔적들이 목회자들에게 나타나서 그래서 매일매일 목회자를 바라보고 예수를 바라보면서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이지만 말씀대로 살아가는 비결들을 터득하게 될 때 그때에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 목회자로 세움을 받은 그 목적과 신적인 의도를 어느 정도 달성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너무 추상적입니다. 왜 우리는 막무가내로 살면 안 됩니까? 왜 우리는 진리와 오류사이를 머리가 희도록 분별해내고 오류는 버리고 진리를 붙들어야합니까? 왜 우리들이 신학을 대충하면 안 되고 철저히 신학을 공부해야합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기의 책 ‘포맨타리온 센텐티아론’ 이라는 책에서 여기서 ‘센텐티아론’ 이라는 것은 피터롬바르스의 명제집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인텐리투스’ 즉 지성의 행복이라고 그랬습니다. 지적인 행복입니다. 그것은 진짜 행복입니다. 우리가 어제 내린 신학의 정의에서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면 그렇게 사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 안에서 바로 우리들이 가장 지성적으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성이 행복하면 감성은 어디로 가고 의지는 어느 즐거움에 참여하느냐는 복잡한 문제는 오늘 이 시간에 다룰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어쨌든 영혼에 있어서 가장 우세한 본질은 지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독백론이라는 그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성과 자기의 영혼이 대화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이성에게 ‘네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나의 알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님과 나의 영혼에 관하여 입니다.’ ‘그 이상 더 알고 싶은 것은 없느냐?’ ‘없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을 받은 우리 자신의 영혼을 아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알고 자신을 아는 비결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우리가 신학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것의 위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그 구체적인 목적에 이르는 구체적인 목표는 우리들이 지성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모든 진리의 인식이 있고 이 진리의 인식을 따라 신명을 바치며 우리들이 옳다고 하는 성경적인 신념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삶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 4, 5년 전에 ‘People’이라는 유명한 대중잡지에서 제게 인터뷰를 하겠다고 요청이 왔습니다. 나는 원래 얼굴이 나오고 알려지는 것이 싫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선교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우리 직원들이 이야기를 해서 그러면 인터뷰를 해주겠다고 그랬더니 왔습니다. 비서실에 앉아서 한 시간쯤 대화를 하면서 매월 종교인, 정치인, 경제인, 체육인 이런 사람들을 집중 인터뷰 대상으로 세워서 신자는 아니고 불신자들 세계에서 교통하는 잡지인데 지난번에는 불교를 다뤘기 때문에 이번에는 기독교를 다룬다며 인터뷰를 했습니다. 30분 동안 묻고 대답하고 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지막 끝났을 때 그 사람이 일어나서 ‘목사님!’ ‘왜?’ ‘목사님은 내가 만난 많은 개신교 목사님들과는 다릅니다.’ ‘왜 그럽니까?’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고 스님 같아요.’ ‘정확하게 말하면 고승 같습니다.’ 그때 직감적으로 내가 느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불신자의 눈에 목사는 사업가로 보이고 스님은 철학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굉장히 쇼킹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그 사람에게만 들은 것이 아니라 벨기에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님들이 와서 함께 생활했는데 그 교인들도 목사님들이 간 다음에 사업가 대회를 하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모든 관심의 대상이 비즈니스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모든 삶을 하나님이 앞에서 살아가게 하기 위한 자기의 이 현재적인 실존을 총체적으로 건의하는 그런 몸부림이 개신교에서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그런 사람이 되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에게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의 무엇을 보았다는 것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은 존재로 보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성품을 이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충분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의 인격과 삶이 진리와 화합해서 우리를 보는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를 세우신 이유이고 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상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완성하고 싶은 최고의 형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목회자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훌륭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사역이 아니라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을 섬기며 살았어야할 그런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갖추어야합니까? 오늘 밤늦게까지 한들 우리가 그것을 다 할 수 있겠으며 그것들 중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들이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강구정이라는 사람이 2004년도에 ‘나는 외과의사다.’ 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에서 외과의사의 자격을 셋을 이야기하는데 독수리의 눈, 그리고 사자의 심장, 그리고 여자의 손길을 들었습니다. 독수리의 눈은 지성입니다. 어느 의사가 나한테 이야기했습니다. ‘진찰을 받으러온 환자가 우리 의사들이 얼마나 인체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안다면 당장 병원을 떠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 제가 이렇게 어려운 인생을 사는데 제 영혼이 고장 난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영혼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는지를 알면 성도들이 기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철저하게 공부해야합니다. 이 이야기를 가볍게 듣지 마십시오. 매일 학문에 참척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고, 가르치고, 보여주기 위한 총체적인 학문들을 공부해야합니다. 두 번째는 사자의 심장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병실 밖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걱정하시 마십시오. 그냥 잠깐만 참으시면 됩니다. 복강경 수술이라 꿰매지 않아도 되고 그냥 2㎝정도만 자르면 이틀이면 아뭅니다. 너무 겁먹지 마세요.’ 문을 열고 보니까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의사를 향하여 간호사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돼서는 우리들이 목회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사숙고해서 판단이 서면 그 다음에 머리를 박박 깎이고 면도기로 민 다음에 톱을 가지고 머리 뚜껑을 열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톱으로 갈비도 뜯어내고 그 안에 있는 장기들을 잘라내고 주무를 수 있는 담력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결코 할 수 있는 담대함이 아닙니다. 그 세 번째가 목회의 기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작은 교회라도 가서 열심히 섬기면서 영혼을 섬기는 어려움이 무엇이고 어떻게 성경을 가르치고 그를 위해 기도할 때 영혼이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깊이 고민하면서 몸소 체득해야 합니다. 그 길을 가면서 공부한다는 것이 너무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좋은 일은 어렵고 힘들고 쉬운 길은 가볍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목회를 한다고 유학한다고 왔는데 설교를 시켜보면 영혼이 살아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아닙니다. 목회할 수 없는 사람이 일을 할 때 얼마나 이바지하며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할 말은 많이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 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배반해도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우리는 우리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 편을 듭니다. 그것이 합리화이고 그 합리화가 바로 사랑의 성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살아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성경의 진리의 빛 앞에 대면하여 거기서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성경 본문을 직접 대하면서 기기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러한 바울의 작용들이 일어납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작용들이 일어납니다. 매일 그럴 수는 없겠지만 며칠에 한번쯤은 성경을 읽다가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모든 목회자의 인격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아름답게 이상적으로 다듬어질 때 모든 것들을 흐르게 하는 본질적인 것은 무엇으로 회귀하는 것일까? 이 말씀을 아주 잠깐만 하고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사랑과 그 열매’라는 고린도전서 13장 각론에서 그랬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Spirituality의 최고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 안에서 스스로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그래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주셔서 그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존재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이고 당신 자신의 끊임없이 흘려보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충만한 이것은 사랑이 이 안에 갇혀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밖을 향하여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를 꺾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그때 회개하게 되었을 때 절대적인 무한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는데 그것이 결국은 사랑이 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것을 시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면서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지 아니하면 지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식은 그 무슨 지식이든지 하나님 앞에 인간을 교만하게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지식이 끊임없이 거룩한 은혜의 물에 잠겨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돈을 버는 것은 남을 주려고 돈을 버는 것이고 지금 여기에서 공부하는 것은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종노릇을 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이 지식을 통해서 내가 무엇인가 남보다 우월한 지위를 얻는다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그래서 칼빈 신학교의 문장이 그것 아닙니까? ‘꼬르네오 띠비 오페로 도미네 프로피테 스테레’ ‘나의 이 마음을 우리 주님께 진심으로 기꺼이 드리나이다.’ 세계 최고의 문장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Heart가 되지 않으면 이 배우는 모든 것들이 결국은 자기자랑을 위해서 쓰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십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