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목회와 소명 I
녹취자 : 김세나
질문1) 오늘날에는 목회자로서의 소명이 지극히 개인적이며 주관적으로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내적 소명을 교회 내에서 외적 소명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또, 제도적으로 소명확인 과정을 도입하게 된다면 어떤 과정을 도입하면 좋을지에 대해 목사님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답변1) 목회자의 소명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소명이 진실하면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바깥으로 드러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이 소명을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은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겠다고 하고, 전도도 안 하고 무슨 체험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세상 살기 복잡하다는 마음에 신학이나 해 보자는 현실 도피적인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는데,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소명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소명이 있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야 합니다. 교회에서 전도도 안 하고, 기도도 별로고, 거룩한 삶을 향한 열정도 없고, 구령에 대한 몸부림도 없고…. 그러한 식으로 지내던 사람이 제도권에 들어가 코스를 밟아 강도사가 되고 결국 목사가 됩니다. 목사가 된 다음에는 어떻게 목사를 그만두겠습니까. 그것으로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소명과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 제도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하였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생각이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일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신학교 갈 때 소명이 확인이 안 되면 절대 추천서를 안 써주는 것입니다. 안 써주면 뭐 합니까. 다른 교회 가 버리는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별 이상한 사람들이 신학교에 다 들어옵니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인지 되묻고 싶은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교회의 많은 불행의 씨앗들이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제도적으로 소명 확인 과정을 도입하게 되면 여러분 중 상당수가 아마 추천서도 못 받았을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두 번째 문제 하겠습니다.
질문2) 목회자로의 부르심 외에도 신학 교수나 선교사 혹은 평신도사역자로의 부르심의 본질적인 기준은 동일할 것으로 보입니다. 보다 더 좁은 범위에서 특정 사역자로의 부르심에도 분별 할 수 있는 기준들(성향, 재능, 상황 등…)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께서 추천해 주실 만한 기준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저는 저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런 질문을 하면서 책을 읽으라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닙니다. 뒤에 가 보면 다시 나오겠지만, 목회할 수 없는 사람이 교수를 하는데 그 교수가 얼마나 유익을 주겠습니까. 가르칠 수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할 때 그 사람의 목회가 얼마나 영향을 끼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으로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 처음부터 ‘내가 신학 교수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면 나는 기도를 덜 해도 되고, 전도는 아예 안 해도 되고, 공부는 좀 잘해야 하고, 잘 가르쳐야 하고, 많이 교화적이기보다는 훨씬 비판적이어야 하는 등 처음부터 따로 가는 길을 정해 놓는 것은 이 책이 기대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은 목회자를 위한 책이 아니라, 넓게 보면 모든 성도들이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들이 신학 교수한테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또 다시 묻고 싶습니다. 신학 교수가 되려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영적이고, 지적이고 인격적이고 성품적인 자질은 필요 없고,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신학교 교수직을 일반 학문의 교수라고 보니까 그러한 식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일반 학문은 어마어마하게 세분화 되어 있어서 사실은 자기 한 분야, 작은 분야 한 분야를 공부해도 평생 해도 못 할 정도입니다. 나중에 이 책에서 그것에 대한 좋은 점과 나쁜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목회자의 부르심 외에도”의 말이 나는 한편으로는 긍정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긍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회자의 부르심”이 무엇입니까. 목회자의 부르심은 신학교 교수의 부르심과 어떠한 점이 다릅니까?
(박철웅 강도사님 : 제 생각에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부르심은 동일하고 본질적인 기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사님 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중생과 회심,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후에 특정한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능력도 필요할 것 같고, 자기의 재능이나…)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신학 교수에게는 목회자에게 있어야 하는 어떤 것들이 필요가 없습니까?
(박철웅 강도사님 : 다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목회를 못 할 사람들이 신학 교수를 하니까 학생들이 거기에서 배우는 바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껏 다 배웠는데 다 필요 없고 다시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그럴 수는 없겠지만, 언제든지 신학교에 데려다 놓으면 강의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신학교를 떠나서 교회로 들여보내면 목회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를 꿈꿔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염두하면서 이 책을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절대 목회를 못 할 사람이 신학교 교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맨 비판이나 하지, 거기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말로는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교회를 유익하게 할 수 있는 영적이고, 인격적이고, 사역적인 자질들을 함께 가지고 학문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신학의 한 전통입니다.
그래서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1900년대 초반까지는, 올드 프린스톤, 뉴 프린스톤 이렇게 찢어지던 1920년대 전까지를 기준으로 보면 대체로 훌륭한 설교자의 명단과 훌륭한 학자들의 명단이 상당히 일치하였습니다. 그러한 전통은 아직도 유럽이나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에 남아 있습니다. 절대로 목회를 못 할 사람이 신학 교수를 해야 하고, 신학 교수를 하는 사람은 절대로 목회를 못 한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학 교수 하는 사람이 목회를 해서 수천 명의 사람을 모을 수 있는가, 그것은 또 다른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신학교 교수로서 한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 설교를 들으면서 ‘아, 역시 그 삶 전체가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이구나.’ 자기 전공 분야에서 한 부분을 가지고 열심히 파고 가르쳐서 논쟁이나 하는 것으로 먹고 살면 학원 강사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은 그러한 관심사도 지나갔지만, 예전에는 한참 신학교에서 학문을 중시한다고 하는 미명 하에 일류대학교 나오고, 외국 좋은 신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이것을 1순위로 놓고 교수를 뽑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면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신학교 교수직 자체에 대해서 별로 그렇게 큰 관심들을 안 가지지만, 그랬습니다. 좋은 대학교 나와서 좋은 신학교 졸업하는 것은 곧 쉽게 신학교에 취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이 남았습니까. 그렇게 한창 열을 올리던 시절이 한 1980년대, 90년대 그랬는데 그렇게 해서 무엇이 남았습니까. 점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의 영향력들은 축소되어 가고, 학생들은 무엇인가 진지하게 교육을 통해서 유익을 얻으려 하는 생각들이 현저히 적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벌써 신학 교수, 선교사 등등으로 간다고 하면 너무 빨리 신학 교수로 특화하고 싶고, 선교사로 특화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결국 나중에 아주 유용한 신학 교수나 유용한 선교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그 훈련은 신학 교육을 위해서 너무너무 필요한 과정이고, 선교사를 위해서도 너무나도 필요한 것입니다. 선교사의 세계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목양의 경험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목양을 하다가 선교사로 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선교사 가겠다고 뜻을 세우고, 그쪽으로 준비하면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선교사 가기 위해 결심한 사람처럼 전도 안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 전도를 안 하는가 했더니 여기가 외국이 아니기 때문에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특화되는 것이 무슨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중국 선교도 마찬가지로 이제 예전에는 막 복음을 뿌리는 사람들이 필요하였는데, 지금은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을 말씀으로 세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역량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뼛속 깊이 어떤 목양의 정신이 새겨지고 하면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깊이 준비하지 않고 그렇게 처음서부터 특화되어서 특정한 사역자로서 자신은 부름을 받았고,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준비는 건너뛰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특정 사역자로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할 때,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당연히 신학교 교수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목회자의 부르심이 기본적인 공통분모이고, 그 위에 전혀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신학자로서의 수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신학자로서의 소명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공부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고, 더욱이 목회를 하지 않고도, 목회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신학교에 온다고 할 때 얼마나 큰 유익이 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목회자의 부르심이 공통분모이고, 신학교 교수가 되려면 그 위에 학문을 좋아하고, 학문을 신앙으로 연결할 수 있는 욕구,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 배울 뿐 아니라 그것을 글로 잘 표현하고 사람들에게 잘 가르칠 수 있는 능력도 아울러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가 되려면 당연히 전도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김준곤 목사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CCC에서 선교사를 엄청 많이 파송했습니다. 가면 무엇 하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전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프리카 갔다고 해서 전도한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업으로서 선교를 하는 것이지, 구령의 열정에 북받쳐 선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생생하게 육성으로 들었습니다. 우리 신학교 시절 설교하시는데, 자기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선교사 나갈 사람에게 이 사람이 선교사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시금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자기 혼자 100명을 전도해서 목양을 해보고, 그것으로 교회에 입증을 받고 선교사로 가라는 것입니다. 아니, 문화가 같고 피부가 같고, 언어가 통하는 사람의 영혼도 불쌍히 여길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언어가 통하지 않고 피부 색깔이 다르다고 갑자기 영혼에 대한 사랑이 콸콸 솟아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평생 선교사역에 자신을 바쳐온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실 때 저는 마음속에 끊임없는 실패의 감정과 경험 속에서 그 이야기를 하신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인공위성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한번 예수를 믿었는데, 한번 지구에 있었는데 발사가 되었습니다. 인공위성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안 만나고 지구 주위를 계속 도는 것처럼 주님에 의해 발사는 되었는데 그것으로 끝입니다. 일하면서 주님과는 만나지 못하고 계속 주위를 뱅글 거리고 돌면서 끝나는 것이 결국 말하자면 잘못된 방식으로 선교에 들어선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분이 대한신학교 출신이십니다.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나중에 어려운 일도 많이 당하셨지만, 훌륭한 열정을 품고 복음전도를 위해 사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정도면 답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질문3)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성령세례>를 번역한 정원태 목사님께서 <성령세례> 역자 서문에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성령세례를 ‘성령의 기본세례’와 ‘성령의 능력세례’를 구분하시면서 사역자로 부름을 받는 과정을 성령의 능력세례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에서는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개혁주의적이지 않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성령세례’를 이해하려면 먼저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부흥’에 대한 생각을 봐야 하고,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부흥은 성령세례라고 보고, 집단적인 성령세례는 부흥이라고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저 견해에 마음이 많이 끌렸었는데 나중에 신학적으로 좀 더 시간이 지나면서 중요한 결함을 가진 견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저 분의 ‘성령세례’ 이론을 이해하려면 저분이 처해 있던 영국 당시 상황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1899년생인가 그렇습니다. 돌아가신 것이 1983년, 84년인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분이 유명한 외과의사 호더 밑에서 촉망 받는 외과 의사로 탄탄대로를 걷다가 돌아서게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계기가 뭐냐 하면 그 엄청난 귀족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병원에 근무를 하면서 호더가 왕실 주치의였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밑에 있으면서 최상류층의 사람들을 보면서 젊은 로이드존스가 놀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여태까지 많은 죄들은 살아가는 환경이 너무나 열악하고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부산물이라 이해하고 있었는데, 하층민들에게서 일어나는 똑같은 죄들이 최고 귀족층들에게서 형태만 다르지 똑같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거기에서 아주 중요한 생각의 전환을 갖게 되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라고 하는데, 그 박사가 의학박사입니다. 그분은 신학교를 다닌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대해서 너무 잔인하다고 할 정도의 얄팍한 견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개혁주의의 기본적인 구원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개혁주의의 기본은 구원에 있어서 어떤 중간단계를 설정하지 않습니다. 구원받는 것과 구원받지 못하는 것 사이에 말입니다. 저것은 ‘성령세례’가 아니고 성령의 아주 놀라운 충만함이라는 구도를 가지고 책을 읽는 것이 우리 실정에 훨씬 맞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그 이성의 추론을 벗어나는 것을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비신화의 작업들, 그 다음에 이성에 대한 엄청난 신뢰, 그리고 또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성에 대해서 실망하면서도 신앙으로 돌아오기 보다는 말하자면 삶과 도덕의 절대적인 기준을 거부하는 상대주의로 가는 사도, 이러한 것들이 영국이 구라파들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저 책이 나온 것입니다. 저러한 사유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춤 춰도 제시하지 않은 수많은 신비적인 이야기들과 그러한 것을 향해 문을 여는 언급들이 나옵니다. 그러한 것들은 그 당시의 영국 상황에서 보면 이제 하도 너무나 이성적이어서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말해야 했던 안타까운 심정을 보여주지만, 전체적인 것을 보면 개혁주의노선에 서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웨슬리가 이야기 했던 세컨드 블레싱(Second Blessing)과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총신에서는 차영배 교수님 같은 분들이 예전에 저런 견해를 따라서 좀 혼란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다음.
질문4) 신학의 동기가 단순히 호기심이 되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호기심 자체를 좋아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신학공부에 있어서 이 두 가지 경우를 어떻게 분별해 낼 수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4)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결국 이 안에 알고 싶어하고자 하는 욕구가 정욕의 소산이다.”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러한 재밌는 예를 듭니다. 또렷하게 인용할 수는 없지만 이것입니다. 가령 어떠한 소가 끔찍하게 죽은 광경이 있다고 칩시다. 그 광경을 보는 것은 즐거워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서 몰려 듭니다. 그것은 왜 그러하겠습니까. 소가 사고가 나서 끔찍하게 사지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 광경이 기분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왜 그런 사고가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소가 달구지를 끌고 가는데 트럭인가 지프차가 세게 들이받았습니다. 소가 어깻죽지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쓰러졌습니다. 눈이 하늘을 향해 부릅뜨고 피를 철철 흘리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선지를 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광경이 있다고 할 때 누가 그것을 즐겁게 여기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보고 싶어 합니다. 알고 싶어 하고,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그릇되게 닮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인간도 끊임없이 무엇인가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치바나 같은 사람은 이제 그러한 인간의 호기심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일단의 원숭이들이 있었는데, 나머지 원숭이들이 계속 있었고 일부의 원숭이들은 다른 데에 뭐가 있나 가보자, 그리고 옮겨 갔는데 떨어져 간 원숭이들이 사람이 되었고 나머지 거기 있던 것들은 원숭이로 남았다고 뭐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신학공부에 있어서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분별해 낼 수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도 그러한지 모르겠습니다. 신학생들에게 유학을 가고,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이 무엇인가 우월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 때는 교수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좋은 학교에 가서 유학하고 오면 학교의 자리가 보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박사학위를 못 한 사람도 많이 와서 강의를 할 수 있었고, 저도 사실은 그러한 혜택을 본 사람 중 하나이지만, 그 당시는 그랬습니다. 그 당시는 신학교 교수하면 상당한 존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목회자보다 우월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학생들 가운데에는, 목회에 자신을 쏟아붓는 것이 자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이 신앙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잘 안 되니까 계속 자기의 어떤 소명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목회 현장에서 약간 낙심하고 실망하고 혹은 계속 전진하고 싶은 욕구가 떨어지면서 관심사가 유학을 갈까, 어디에서 공부해 볼까, 바뀌는 사람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 중에는 둘 다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확실한 인도함 속에서 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사람들도 많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공부하고 돌아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는 하도 사람이 없으니까 외국에 가서 석사만 따고 오고 영어 몇 줄 할 줄 알고 원서 읽을 줄 알면 자리가 주어졌고, 박사를 하고 오면 자리가 주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림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많이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두 가지 분별해 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것입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수단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행복하게 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것이 신학입니다. 신학은 목회자만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좁게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모두가 신학을 하는 것이고, 넓게는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신학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이 없다.” 이 자체가 훌륭한 신학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확실하게 밝힌다는 점에서 훌륭한 신학입니다. 훌륭한 신학이라기보다 고유한 신학입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신학적인 사고입니다. 왜 신이 있다, 없다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 자체가 신학적인 사유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점에서 이제 신학 공부를 할 때 중요한 것은 지식이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사랑이 지식을 욕구하게 하는 그 순환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거기에서 ‘안다’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사랑을 불러오고 사랑이 앎의 욕구를 자아내고 하는 과정이 반복될 때, 그때에 그 지식은 교만해지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학을 하든지, 선교사가 되든지, 목회자가 되든지 사람의 눈에 띄도록 큰 키가 되게 하는 것은 업적일 수 있겠지만 큰 나무가 되게 하는 것은 그러한 업적이나 재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가, 그것을 위해서 그 사랑과 지식의 일치에 의해서 사람이 되어 가는가. 지난번 공과 공부 시간에 지식과 사랑이 어떻게 분리될 수 없는지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록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정확한 견해입니다. 종교개혁자들도 그러한 지식화하는 시간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에 그치는 지식의 욕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알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게 되고,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되니 사랑과 지식이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지식은 사랑의 원인이 되고, 사랑은 더 높은 지식을 추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답이 됩니까. 끝났습니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