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목회와 소명 Ⅱ
녹취자 : 김세나
질문1)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저서 『미셀러니』에서 말한 ‘주입된 은혜’와 칼빈주의의 교리인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의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또한, 가톨릭에서 말하는 ‘주입’과의 차이점도 알고 싶습니다.
답변1) 저것은 조금 핀트가 잘 맞지 않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야기하는 ‘주입된 은혜’의 개념은 이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 부여되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는 심적인 방법입니다. ‘physical-물리적인’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가장 좋은 번역은 ‘심적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거듭나지 않은 자연음성을 가진 인간에게 중생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도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에 의해서 없었던 생명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입된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이미 저렇게 주신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설득적인 방법이라고 존 오웬은 설명합니다. 이미 있는 은혜를, 이미 중생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이성을 설득하고 깨닫게 함으로써 성령의 역사로 그 은혜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 이것이 결국 성화를 통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이 ‘주입된 은혜’와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gratia infusar’라고 하는 것, ‘주입된 은혜’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가톨릭에서는 이제 우리는 은혜를 이야기할 때, 인간의 의식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성화의 은혜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결국, 깨닫지 않고는 성화 될 수 없습니다. 중생하는 그때에도 아주 특별할 때에는 인간의 아무런 깨달음이나 그러한 것 상관없이 인간에게 중생의 은혜를 주시지만, 일반적으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깨달음을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조건이 아니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중생의 사역을 주입된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칼빈이 이야기하는 ‘주입된 은혜’는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방성을 강조하기 위한, 일방성이라기보다는 편무적 방식, 그래서 쌍무적이 아니라 편무적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방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사제에 의해 집례 되는 미사에 참여함으로써 본인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은혜가 주입되고, 그것이 공로가 된다고 보는 것이 바로 가톨릭에서 말하는 주입입니다. 용어를 같이 사용하지만, 의미가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칼빈주의의 교리 가운데 ‘TULIP 튤립’이 있습니다. Total depravity-전적 타락부터 시작해서 무조건적인 구원,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다섯 가지가 TULIP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화란의 학회에 참석해서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Irresistible grace’라고 하는 의미가 우리가 쓰는 것과 그쪽에서 오랫동안 개혁신앙의 전통에서 사용하는 것과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우리의 의미를 그 사람이 다 알고 있다고 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면서 칼빈이 과연 그러한 식으로 ‘Irresistible grace’를 말하였겠는가에 대해서 자신은 답변을 유보한다고 하였습니다. 유럽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강한 반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처드 멀러 교수도 지난번에 와서 강의하면서 조크를 하였습니다. “Don’t plant TULIP in your Reformed-garden. 당신의 개혁주의 가든에 튤립을 심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과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TULIP. 다른 것은 칼빈이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Irresistible grace’에서 Irresistible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고려를 받고 있습니다. TULIP중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가장 많이 받는 게 바로 ‘I’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실제로 적용되는 것은 이제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구원하시고야 만다. 그러한 점에서 Irresistible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제 의지적으로 계속 저항하고 있는 인간을 계속 시종일관적으로 저항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겠는가에 대해서는 저도 대답을 유보하겠습니다.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완강하게 거부하던 인간들도 결국 구원의 때가 임하면 놀랍도록 마음이 가난해져서 지난번 공과 시간에 이야기하였던 하나님의 의존의 마음을 갖게 되고, 진심으로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이 성립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저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이 인간의 의지를 씨름선수처럼 꺾어서 구원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저렇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면 가능할 수 있겠습니다.
질문2) 많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사용했던 원형신학과 모형 신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그 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또, 순례자의 신학에서 마지막 단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전 단계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사실 원형신학과 무형신학이라는 말을 똑 부러지게 쓴 사람이 화란 신학자 유니우스였고, 유니우스 제자 계열의 아메시우스 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열에서 마스트리흐트도 나오고, 그 위에 고마루스 같은 사람도 나오는데, 어쨌든 원형신학과 무형신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면 저러한 사유들이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개혁신학자들이 이제 오히려 스콜라주의자들 속에서 원형신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개혁자들, 칼빈 같은 경우는 원형신학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원형신학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하는 신학입니다. 사변적이겠습니까, 실제적이겠습니까? 사변적입니다.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하고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을 반발로 밀쳐 버렸습니다. 그러한 것들 다 필요 없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다음에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이제 17세기 때 사람들이니까, 100년 정도 시간이 흘러나고 나서 보니까 저것을 다시 세분화해서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호랑이를 그리는 것이고, 호랑이 자체에 이데아가 있으니까, 기억이 있으니까 그것을 그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하나님 당신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신학, 하나님이 배우시는 분이 아니시니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기 지식, 그것을 원형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순례자의 신학에서 마지막 단계는… 자, 이것을 띄우십시오. 내 책을 꼼꼼하게 읽었으면 이런 질문을 안 했을 텐데, 건성으로 읽었으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압니까?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이미 내 책에서 쓴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설명하겠습니다. 원형신학. ‘theologia arctica’, 원형신학과 모형 신학으로 나누어집니다. 일단 보면, 나누어지고, 모형 신학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하는 신학이 아닌 모든 신학이 모형 신학입니다. 그래서 제일 그것을 원형신학이라 부르고,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관념입니다. ‘Idea of God’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인식과 같은 의미이지만, 하나님의 자기 지식에 충만함을 원형신학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단언된 지식의 속성으로서의 ‘scientia’-지식입니다. 혹은 인식이라고 씁니다. ‘scientia’는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님은 당신의 본질로서 만물을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에서 나오는 가장 중요한 테제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존재와 나누어지지 않는다.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은 존재가 있고 그 인간이 착하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속성이 존재 속에 포함이 됩니다. 그 안에 다른 속성들이 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속성 없이 존재를 말할 수 없고 존재가 있다면 반드시 그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여러 속성이 있지만, 파인애플 쪼가리를 내놓은 것처럼 그것들이 합쳐져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면, 3분의 1은 선하고, 3분의 1은 의롭고, 3분의 1은 거룩하시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다 거룩하시고, 다 선하시고, 다 의로우신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유와 종의 analogy(어낼러지)가 불가하니까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요약하자면, 원형신학은 뭐냐 하면 지음 받지 않은 것으로서 신적인 존재와 같은 것이며 본질적이고 가장 단순하며 영원하고 직관적이며 절대적이며 무한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가장 완전한 지식이며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하심이 동일하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원형신학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 혹은 관념인데 그것이 하나님 자신과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원형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모두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자신은 당신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평생 가면서 배웁니다. ‘아,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어?’ 이게 없으면 사실은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중보자의 모형 신학입니다. 이것은 ‘Theologia Christi’입니다.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 보면 됩니다. 이 개념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 어려운가 하면,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이것을 연합신학이라고도 합니다. ‘Federal Theology’라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에서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신성과 인성의 연합으로 갖는 신학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한 것으로 모형 신학에 있어서 최고봉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날은 인자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진짜 모르시겠습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신이신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시는가 하면, 신성으로는 모르시는 것이 있을 수 없지만, 인성으로서는 스스로 신성을 인성 아래 내려놓으셨기 때문에 스스로 모르시는 것이 있기를 인성으로서 스스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살면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하면서 살 것인가에 대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줄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 인성과 신성은 본질적인 속성들을 유지하기에 교통할 수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 혼합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교통한다는 것은 일종의 섞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적 연합 자체를 속성들의 교통이라 하지 않고,” 이렇게 본 사람들은 루터파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성만찬에 있어서 공재설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말이 애매합니다. 빵 아래 빵과 함께 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서로 ‘idiomatum(이디오마툼)’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제 속성이 교류하기 때문에 신성이 있는 모든 것에 인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정통개혁파에서는 인성이 장소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니까 빵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성 안에 있는 거라면 인성도 그 안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개혁파에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물과 신성의 관계를 설명할 때, 모든 만물이 ‘everything in God’ 이것은 말이 됩니다. 그런데 ‘God in everything’은 ‘panentheist’거나 ‘pantheist’가 됩니다. 범신론자나 내재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개혁파는 그렇게 보지 않고 두 본성의 인격적 결합에서 비롯된 서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본성이 서로 본성의 고유성을 가지고 결합되어서 한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anhypostasis’, ‘enhypostasi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격적인 존재는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사람이 되시기 위해서 인성을 취하셨을 때는 인격이 있는 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격이 없는 인성을 취하심으로 인성과 신성이 만나지만 인격은 신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제 ‘anhypostasis’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격 없이 취하신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enhypostasis’입니다. 태어나면서 인성을 갖는 동시에 한 인격을 소유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인격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이라는 것은 하나의 서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인격이 주어짐으로써 신성, 인성 각각의 본성으로 불리면서도 한 인격이기 때문에 두 개가 연합을 이루면서 전일성(integrity)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 때문에 그분이 원형적 신학을 가지고 있으나 삼위일체 모든 인격을 공통적으로 통활하고 있는 신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식은 중보자로서의 그분의 위치로 인해 필연적으로 제한된다.”
왜 그렇겠습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스스로 당신 자신이 하나님과 근본 본체시나 그의 동등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한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신학은 모형 신학의 가장 탁월한 일부분이며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모형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이 되겠습니다.
모형 신학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바로 ‘천사들의 모형 신학’입니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많이 사유하였는데, ‘theologia angelorum’이라고 하는데, 천사들의 모형 신학입니다. 오웬은 스콜라철학자들 만큼 사유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너무 사변적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그 아는 것이 인간을 능가하는가, 능가하지 못하는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제 다른 데 관심을 갖습니다. 지복자들의 신학입니다. 뒤에 나옵니다. 아까 이야기한 모형 신학이 뭐냐 하면, 이성적인 피조물들과 교통이 가능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일반적 범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계획의 중재 아래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모형 신학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여러분들이 관심을 갖는 인간들의 모형 신학이 나옵니다. 인간들의 모형 신학은 이제, 우선 순례자들의 신학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성령을 통해 은혜를 통해 이 땅에 거하는 인간과 교통 되는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하는 신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아니고, 천사가 아니고, 사람으로 태어난 인간이 하는 신학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이 땅에서 하는 신학입니다. 그 신학은 다시 둘로 나누어집니다. ‘theologia ante lapsum’(데오로기아 안테 랍숨) ‘lapsum’은 넘어지다, 타락입니다. 타락 전 신학과 타락 후 신학입니다. post lapsum. 타락 전 신학은 어떻겠습니까. 인간이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을 100% 다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놀라운 증거가 뭐냐하면,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애를 낳아 보았지만 이름 하나 붙이는 데 얼마 걸립니까? 나는 한 한 달 걸렸습니다. 이슬이 이름 붙이는데 말입니다. 영래는 담임목사님이 지어 주는 대로 해서 시간이 안 걸렸는데, 딸은 한 달 걸렸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동물들 이름을 다 붙입니다. 그 이름 붙이는 것은 아주 고도의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름이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행동 양식을 꿰뚫어 보면서, 기린, 사자, 돼지, 등등 이름을 붙이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아담이 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아주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례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타락하기 전이 무슨 순례일까 생각되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교제 속에 있는 영혼이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하는 플라톤적인 사유를 통해서 본다면, 어쨌든지 그러한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타락 후 신학은 죄의 상태에서의 순례자들의 신학을 말합니다. 요즘 우리들이 하고 있는 신학입니다. 헛된 소리도 많이 하고 갑갑한 소리도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지복자들의 신학입니다. 정착자들의 신학이라고 봅니다. ‘Theologia beatitum(데오로기아 베아티툼)’ 지복입니다. ‘베아투스’가 행복인데, 행복 중에서도 아쉐르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거기의 근원이 되심으로써 그 관계 속에서 누리는, 더는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theologia (데오로기아 퍼세수오레스)’라고 이야기하는데 ‘퍼세수오’는 천국에 정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복된 자들의 신학으로써 하늘나라에서 도달하게 될 신학인데, 천사와 구별한 인간들의 신학입니다. 타락 후 신학은 천사들의 모형 신학만 못하지만, 지복자들의 신학은 천사들의 신학보다 뛰어납니다. “영광의 빛을 통해 즉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것이며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지식에도 모두 다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층차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도. 그러나 이제 천국에 우리 모두가 다 갔는데 어떤 사람은 더 놀라운 지식을 갖고, 어떤 사람은 약간 떨어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떨어졌기 때문에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면 천국일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차이가 나고, 하나의 빛들이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 봅니다.
저 신학이 천국에 올라가서는 결국 아퀴나스도 그렇고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이고, 천국에서 인간이 누리는 행복은 하나님도 관조하는 행복이라 봅니다. 관조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무한한 당신의 존재가 있는데 그중에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너무 엄청난 것이 되어서 매 순간 말하자면 극락의 희열을 느끼는, 여러분들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이 이러한 분인가!’ 알고 감탄하였던 것이 매 순간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어떤 지식으로 말미암은 희열의 극치를 경험하는 곳이 천국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질문3) 목회 현장에서 잘못하여 많은 사람의 비난의 표적이 되는 목회자들을 만날 때, 그 자체로는 그 목회자의 소명을 판단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추행과 같이 큰 실수를 저지르고도 뉘우침이 없이 목회하는 목회자들을 볼 때 그것을 소명 의식이라고 보아야 할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소명을 받은 목회자로서 용납될 수 있는, 또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실수의 종류나 객관적 기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3) 내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한 신자가 너무나도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심지어 살인도 저질렀습니다. 이춘재 같은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사람 구원받은 것입니까?
(박재헌 목사님 : 구원받았을 수도 있고 안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항상 구원을 볼 때, 칼빈이 그것을 강조하였는데, 구원을 우리는 즉각적인 구원의 측면에서 우리는 많이 보는데, 그런데 칼빈은 그러한 의미에서의 중생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처음 중생할 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천국에 갈 때까지 모든 과정 전체를 하나의, 칼빈은 그것을 ‘new birth’-신생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그(칼빈)의 중생 개념은 우리가 쓰는 중생 개념과는 다릅니다. 제가 한참 개혁파 정통주의에 빠졌을 때 칼빈과 마스트리흐트의 중생 개념의 비교를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을 할 때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결국 도르트 회의 이후에 생겨난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과 이단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구원의 차사를 세분화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의 소명을 받았는데 저러한 성추행과 같은 실수라고 했는데, 이것은 실수라고 하면 안 됩니다. 의도적인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저보다 더한 끔찍한 상황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어느 신학교의 교수인데 도박을 해서 70억을 날렸다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소명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래서 제가 저 책에서 이야기한 것이 “소명은 소명과 그 소명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소명이 구원이라면 소명 의식을 유지하는 것은 그가 성화 생활에 비유할 수 있다.” 얼마나 성화 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소명은 계속 유지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데, 사라지고 나면 모든 죄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목회자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것들을 어디에서 봅니까?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소명을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우리아의 아내를 간통하였을 때는 소명을 받은 사람 같습니까, 안 받은 사람 같습니까? 회개했을 때는 소명을 받은 사람 같습니까, 안 받은 사람 같습니까? 답이 나옵니다. 결국, 소명을 받았을 수도 있고 안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 범죄가 소명을 안 받았다고 하는 것을 입증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 같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심지어는 그렇게 구원에 대해서 영원히 단번에 이루어지는 구원을 설파한 그 사람이 자기 교리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나는 오히려 버림을 받을까 염려하노라.” 이와 같은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소명과 소명을 유지하는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밑에 나오는 질문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소명을 받은 목회자로서 용납될 수 있는, 용납될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객관적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도 예를 들어서 이러한 것입니다. 신자가 예를 들어서 죄를 지었습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징계합니다. 그리고 심하면 출교를 합니다. 출교의 의미는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입니다. 제명은 ‘열린 교회의 교인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출교를 할 때 교회의 심정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선언하였지만, 목표는 ‘너 같은 놈은 추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목표가 아니라, ‘출교를 통해서라도 그가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선언을 들으면서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이 교회 치리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래서 소명을 받은 목회자가 용납될 수 있고, 용납될 수 없고, 그러한 객관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치리를 위해서는 기준이 있겠지만 그러나 절대적인 소명과 관련되어서는 기준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본 모습이 무엇입니까? 솔로몬 그 인간은 정체가 무엇입니까? 일천 번의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세상 영광이고 뭐고 다 밀치고 오직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 나라를 다스리게 해 달라고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던 그 모습이 솔로몬의 본 모습입니까, 아니면 이교를 섬기는 나라들과 화친하고, 나라를 번영시키기 위해서 그 나라의 여자들을 끌어들여서 그렇게 혼인 관계를 맺고 온통 이방 종교를 함께 궁궐에까지 끌고 들어오게 하고 그렇게 허랑방탕하던 그 모습이 솔로몬의 참모습입니까? 아니면 나중에 그것을 깊이 회개하고 인생이 헛되다고 말하는 그 모습이 참모습입니까.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더 쉽게 이야기해봅시다. 그렇게 눈물 흘리고 열린 교회 오게 된 것이 너무너무 감사해서 백골난망처럼 느끼면서 그냥 담임목사가, “너 그러면 쓰러진다, 무리하지 말아라.” 그래도 그냥 나와서 봉사를 하다가 마당에서 로비에서 졸도들을 했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참모습입니까? 아니면 뺀질뺀질하고 기도도 안 하고 컴퓨터에 매달려서 하루에 밤늦게까지, 나는 사역하느라고 저렇게 밤을 새우는 줄 알았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새벽 2시까지 앉아 중독에 걸려 컴퓨터를 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참모습입니까, 아니면 야단을 맞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금식기도원에 가겠다고 하는 그 모습이 참모습입니까? 그 이후에 다시 원위치로 돌아온 그것이 참모습입니까? 무엇이 여러분들이 모습입니까?
그중 아무도 내가 아닌 것이 없고 그것이 모두 자신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까 생각해야 합니다. 어제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어떤 훌륭한 한 사람을 보면서 그 훌륭한 모습이 그 사람 인생 이전의 전체, 미래의 전체인 것처럼 보지 말고. 어떤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고 부족할 때 ‘저 인간은 과거에도 저렇게 살아왔고 죽을 때도 저렇게 살다가 죽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도 말고, 잘할 때도 그 사람이 있고 못 할 때도 그 사람이 있고 그 두 가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 안에서 발견하면서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사랑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 받아서 살 수가 없습니다. 목회하다 보면 말입니다. ‘이 인간은 목회하지 말고 가서 삽질을 하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이 20명을 목회할 에너지를 막 빼앗아 가면서 결국 마지막에 교회를 떠납니다. 진작 버릴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것은 목자의 마음이 아닙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신.나. 만 읽지 말고 존 오웬의 신학도 읽어가면서. 신.나. 가 더 쉽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셔서 저희들이 매 순간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저희에게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미워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어떤 사람들이었는데 구원해 주셨는지 기억하면서 겸비해지고 낮아져서 그래서 많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긍휼히 여기며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사랑하며 그렇게 그들 속에서 주님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면서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