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목회자와 하나님의 형상
녹취자 : 김세나
질문1) 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한 초대 교부들은 ‘형상’을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으로서의 특징으로, ‘모양’을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계발되기도 하고 상실되기도 하는 자질’로 생각해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중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조금 더 자세하게 들어보고 싶습니다.
질문 요지가 무엇입니까?
‘형상’에 대한 설명에서 교부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교부 중에서도 이레네우스와 다른 여러 교부들을 묶어서 두 가지 큰 견해에 대해 말씀해 주신 바 있습니다. 교부들의 견해들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한 초대 교부들이 인간의 이성 안에서 나온 두 가지 특징으로서 ‘형상’과 ‘모양’을 설명하였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내용을 봤을 때 이성에서 두 가지가 나왔다면 이것이 어떻게 그것들이 표현되는지 궁금하였습니다.
답변1) 곧바로 어거스틴의 견해에 대해서 들어가겠습니다. 역사적 견해를 서술하기에는 그 내용이 책에 있으니까 읽으면 되겠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두 가지에 대한 견해를 거절하였습니다. ‘첼렘’과 ‘데모투’ 이 두 개가 다 동의어의 반복이라고 통일되게 해석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였던 이유는 중세신학에 대한 반발도 있었던 것입니다. ‘첼렘’과 ‘데모투’를 나누면서 ‘첼렘’을 인간의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 인간의 능력이라 보고, ‘데모투’를 파괴된 것으로 보아서, 자연신학적으로 갈 수 있는 길들을 많이 열어놓으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틸리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백색설탕의 상태로 보고 potential, 가능성 자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보고, 인간의 수많은 겪음을 통하여 학습하면서 형상을 세워가는 개념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견해가 사실은 중세시대의 견해인데, 성경계시를 떠나서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많은 길을 열어놓았다고 보았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사실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첼렘’과 ‘데무트’에 대한 구별을 거부하고 그 자체가 결국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된 것이라 보았습니다.
고대 교부들, 어거스틴부터 거꾸로 추적해서 어거스틴이나, 이레네우스나, 터툴리안은 몰라도 그 이후에 다메스쿠스 같은 사람이 올 때까지만 해도 ‘형상’에 대해서 상당히 훨씬 풍부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에 와서 ‘형상’에 대한 개념의 논의가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형상’에 관한 이론 형성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고, 이분에게서 개혁주의적인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여기에 26절이 나옵니다. 26절에서, ‘와이오메르 엘로힘 나쉐 아담 베샬메누 키데무테누’ 두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그 다음에, ‘베’는 ‘무엇 무엇 안에서’, 뒤에 나오는 ‘키’는 ‘무엇 무엇을 따라서’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을 따라서”라고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첼렘’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씁니다. 이 ‘첼렘’이라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저 단어의 유래가 어디에서 나왔는가에 대해 논쟁들이 많습니다. 당시 히브리어가 영향을 받았을 유사 단어인, 영향을 받기보다 흔적들이 남아있는데 우가리트어와 아카드어 같은 경우에 보면 similarity, 유사성입니다. ‘우리’라고 표현하는 이것도 왜 복수로 나왔는가 하는데, 처음에는 그분의 해석을 너무 싫어했습니다. 성경신학을 하면서 복수에 대한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것입니다. 내가 혼자 삽니다. 김성구 친구에게 “야, 친구야. 내가 사는 집에 가자.”할 때 강성경 전도사 혼자 사는데, 집에 가자 할 때 무엇이라 말합니까? “우리 집에 가자.” 이때 단수인데 복수로 이야기합니다. 똑같은 관습이 히브리 사람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그러한 해석들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조금씩 생각이 바뀌면서, 저 해석들이 교부들의 저러한 것들을 삼위일체의 흔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훨씬 더 동의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데무트’는 무엇인가. ‘데무트’는 ‘likeness’입니다. 그러니까 두 단어가 거의 비슷하겠지만, similarity와 likeness는 조금 다르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어거스틴은 어떻게 보는가 하면, ‘첼렘’을 영혼이 가지고 있는 지성의 특성이라 보았습니다. 지성과 연관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similarity가 되었는가 볼 때 삼위일체에서 그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처럼 지성은 지성 자체를 알고 지성 자체를 알지 않으면 지성이 생각하는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는 방식과 사유하는 방식이 하나님이 자신을 아시고, 하나님이 자신 이외의 것을 아시는 것과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과의 similarity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성적 특성이라 본다면, 모양이라고 하는 것은 유사성이 아니라 닮음입니다. 닮음.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유사성이 만약 상관없는 개체와의 유사성이라면 닮음은 동경의 개체와의 닮음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들인 내가 아버지를 닮은 것은 유사성이 아니라 likeness입니다. similarity가 아니라 likeness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비슷하게 생긴 이웃집 아저씨가 있습니다. 이것은 similarity입니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 안 됩니까? 이 정도 가지고 이해 안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 뭐라고 하는가 하면,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영혼의 도덕적 특성입니다. 둘 다 영혼에 관한 이야기인데, 형상은 영혼의 지적특성, 모양은 영혼의 도덕적 특성입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형상이 있기 때문에 모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형상과 모양이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양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아갈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고, 모양-하나님을 닮은 도덕적 특성이 함양되면 함양될수록 죄나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던 지성이 확 밝아져서 그래서 하나님을 더 잘 발견하여 도덕적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둘 사이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다음 질문하겠습니다.
질문2) 원의(Original Righteousness)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의에 대한 목사님의 명확한 정의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또, 하나님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원의를 이해할 때도 존재론적인 접근과 관계론적인 접근 모두가 필요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2) 그렇습니다. 우선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하자면, 루터파의 실수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형상을 원의와 형상을 하나로 보고, 타락과 함께 그것을 상실하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무슨 문제가 나오는가 하면, 타락한 인간과 동물이 무엇인가 다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타락한 인간의 잔망적인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서 강조하다 보니까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루터파에게서 형상론은 중요절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개념은 존재론적인 접근만을 가져서는 안 되고 관계론적인 접근도 함께 해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이것입니다. 어떤 죄를 짓는 것이 그것이 잘못된 이유는 그 자체가 잘못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그 죄를 보냈을 때에는 일정한 효과가 나타나도록 하나님이 관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들이 생겨난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 안 갑니까? 다시 설명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떤 인간의 죄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죄는 우리 자신의 부패입니다. 영혼의 부패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점에서는 존재론적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관계를 가지고 계셔서 이러한 것은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있고, 삶으로 나타날 때 기뻐하시고 이것은 싫어하시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죄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니,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뭐 쩨쩨하게 사과 한 입 베어 먹었다고 그렇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십니까. 원하시면 다시 한 번 만드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것이 관계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부부가 이야기 하는데 딱 돌아서서 혼자 중얼거리다가 남편 욕을 하였습니다. 그게 남편에게 무슨 손해를 가져옵니까? 칼로 찔렀습니까. 아니면 목을 베었습니까. 아니면 돈을 훔쳐 왔습니까. 남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 지금 뭐라고 그랬어?” 말하지 않겠습니까? 울리게 될 것입니다. 기껏 맛있는 것 차려주고 나가면서 마지막에 “저렇게 많이 먹냐.”하면 밥상을 엎어 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존재론적인 것과 관계적인 것은 함께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원의’에 대한 정의라고 하였는데, 여태까지 개혁주의자들이 이야기 하는 원의에 대한 개념은 특별히 이의가 없습니다. 원의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그대들은 아마 못 들었을 것입니다. 성화와 올곧음, 시리즈 제목이 맞습니까? <성화와 올곧음>이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사경회 때 했는데 들어보십시오. 원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원래 의로운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획득된 의입니다. 그것이 결국 의와 거룩함과 진리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의와 거룩함과 진리가 다시 목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화되어 갈 때 나타나는 것은 의와 거룩함과 진리가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 이것 한번 읽어 보십시오. 못 읽습니까? 제가 읽겠습니다. “지성이 자신에게 의를 부여하기는 불가능하니 스스로 자기를 잃어버려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을 어렵게 하였지만, 인간은 스스로 내세울 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의’는 지음 받았을 때에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상실하였습니다. 따라서 지성은 의를 받는 것이고 그 의로 말미암아 지복을 받을 자격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지성에서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의로워지는 것이 결국 지성이 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의로 말미암아 지복을 누릴 자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거 한번 읽어 보십시오. 강성경 전도사 읽어 보십시오.
(강성경 전도사님)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뜨겁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저 형상을 보다 확연하고 보다 평온하게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의의 불변하는 형상을 바라보게 되고 사람은 이 형상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나누어서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뜨겁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저 형상…” 여기에서 저 형상은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형상입니다. 그래서 이 형상을 형상과 모양 중에서 앞에 있는 그 형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통칭해서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인데, 잃어버렸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형상보다 상위에 있는 이데아가 되는 형상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참인간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형상을 보다 확연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온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죄의 상태에 있을 때 어떻게 의롭게 분투하면서 나름 정당대로 살았던 삶을 사는 사람을 보면 찔리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자신이 뜨겁게 사랑하고 있으면 찔림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평온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의의 불변하는 형상을 바라보게 되고…” 의의 불변하는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가에 대해 알면서 인간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형상을 따라서 사는 것이 땅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게 되니까,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인간으로서의 이상적인 모습과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야 할 모습을 함께 생각하게 되면서 자신의 영혼을 가슴아파하면서 남의 영혼을 보면서 함께 가슴아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내용의 요약이 되겠습니다. 다음 질문하겠습니다.
질문3) 개혁신학 안에서 내세를 묵상하는 실천적인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여기에서 감각 이야기가 나오는데, 인간이 결국 감각이 제일 민감한 기관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이러한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있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접촉하고, 맛봅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외부로부터 정보가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다섯 가지가 딱 차단되면 바깥 세계에 무엇이 있는지 일체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보들이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에 이것은 육체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들어오면 이것이 이렇게 정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이것들이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의미와 의미 사이에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지, 이러한 생각들을 하면서 정보를 이 안에서 가지런히 정돈을 합니다. 무엇이 상위이고 하위인지 정리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행동으로 옮겨갑니다. 여기에서 육체의 감각이, 그 다음에 정신의 해석과정을 거쳐서 이렇게 해서 실현하는 단계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잘 살아 있음이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정신의 해석의 작용들이 육체에 봉사하는 쪽으로 모든 기능이 전환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감각하는 것들이 정신세계 속에서 삐뚤게 해석을 해서 궁극적으로 육체의 만족을 얻게 하는 것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사유라고 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우리에게 어마어마하게 메스미디어들이 발달하고, 이렇게 변화되어 가는데 이러한 것들이 정상적인 인간의 사유를 가로 막습니다. 곧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곧바로 이렇게 해서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철학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냥 육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입니다. 이쪽 분야는 기도생활을 많이 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지 많이 작용을 하는 것인데, 여기는 성령충만하든지 안 하든지 늘 저절로 작용을 합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 기도를 안 했더니 눈이 잘 안 보인다든지 말씀을 잘 안 읽었는데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든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정신이 이렇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들을 해석할 수 있고 가치를 다시 부여하고 이럴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질 때 인간의 삶은 휘말려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이 예를 들어서 여기에 보고, 듣고 하는 것들이 들어오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가치 부여, 우선순위 부여를 하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좌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인간의 욕망에 따라서 좌우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핸드백이 너무 갖고 싶은 사람에게는 사채를 얻어서 하나 사놓고 6개월 동안 뼈 빠지게 알바를 해도 그래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욕망을 이렇게 휘지 않도록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필요한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의 빛이 있어서 진리의 빛이 이러한 것들을 부인하고 부정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이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있으려면 눈에 보이는 이 현세를, 그러니까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존재라고 하는 무상성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나옵니다. “지혜로운 자는 잔칫집보다 초상집에서 배우는 것이 많다.”고 나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찬송이나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도 우리의 정서를 관리할 수 있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들처럼 영혼과 시간을 관통하는 담론들을 보면서 깊이 감동을 받으면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영혼 불멸성」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이유에서 없는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실존하는 것,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그러한 식으로 실존한다는 의미에서는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고 영원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사실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세속적으로 살아갈수록 내세를 묵상하는 일은 매우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내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오히려 그러한 생각이 두렵기 때문에 더 타락하는 경우들도 많이 있게 됩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잔디를 들어가서 보겠습니다.
<PPT 기록된 것 외의 추가질문입니다.>
질문 1조 1번)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참된 법은 하나님의 의지에 부합하는 마음의 성향과 정신의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의 성향과 정신의 능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 1조 1번) 이것은 뭐냐 하면 여기에서 마음의 성향은 사랑의 성향입니다. 그 다음에 그 성향을 가질 때 어떤 정신의 능력이 나오는가 하면 덕을 지향하는 능력이 나옵니다. 우리들이 안다고 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의지가 일괄적인 방식으로 솟아나오는 것이 바로 성향입니다. 지연 자매 고기 맛있습니까? 성향입니다. 오늘 점심 때 이것 끝나고 나서 삼겹살 먹으러 가자고 할 때, 지연은 목사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향이 고기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이상적인 것은 뭐냐 하면, 잘 들으십시오.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렇게 행하는 것이 자신도 너무도 좋은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목회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성향의 이상입니다. 몸이 건강한 사람들은 ‘내가 살려면 할 수 없이 운동을 해야 해.’ 이러한 것이 아니라 ‘아, 내가 헬스를 가야 하는데…. 바벨을 들어 올릴 때의 쾌감!’ 이러면서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계속 건강하게 살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덕’이라고 하는 ‘비르투스(Virtus)’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부합하는 마음의 성향과 정신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성향, 덕을 지향하는 능력. 이 정도로 답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질문 3조 1번) 목회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하는 섬김이며 전도는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던 사람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신자들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 말고 그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답변 3조 1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신자들의 착한 해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 말고….” 일단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어떤 것인지는 알 것입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이 절대적인 가치기준을 거부하고 감각에 이끌려 사는 것인데, 결국 이러한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붙들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장 탁월한 선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데 마지막에 아무 것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모질게 반항하였지만 행복하지 않습니다.
「미친 사랑의 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나이스신부터 시작해서 헤밍웨이를 비롯하여 별의별 저명한 문학가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거의 광기어린 삶을 살았습니다. 절대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광기어린 삶을 살았는데 행복했는가 하면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자살하였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잠시 행복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가치의 체계 안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믿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선포입니다. 선포. 착한 삶만 의지 하지 말고 그들에게 삶으로 보여주는 것은 우회적인 것이고 진짜 우리가 믿는바가 무엇인지 간결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결국 사상과 삶이 일치가 되고 거기에서 선한 행실이 나올 때, 그 선한 행실을 보면서 ‘사람들 착하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어떤 사상의 얼개를 가지고 살아가는가?’를 궁금하게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서 거기에서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질문 4조 1번)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갈 때 드러나는 현상적으로 지성과 덕 사이에 정확한 균형을 이루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개인의 차이를 교회의 일치, 조화의 측면에서 이해하여도 괜찮을까요?
(답변 4조 1번) 뭐, 자유롭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질문의 의도가 이러한 것 같습니다. 성화되어 간다 하면서도 내가 무엇이 옳다는 것은 아는데 실제로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부조화가 있다고 하는 말 맞습니까? (질문자: 네 맞습니다.) 말이 너무 어렵습니다. 지금 이야기 한 것처럼 이야기 하면 됩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존 오웬 보고 설명하라고 하면, “그렇게 아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 항상 사변적인 신학을 내세우면서도 항상 경고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단면적으로 알고 있는 것, 삶과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일치를 이루는 것-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결국 경험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크 트웨인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경험했으나 사라졌다. 경험했으나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의미를 파고들자 그 경험이 다시 살아났다.” 결국 지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부조화를 느낄 때 의미를 철저하게 캐야 하고, 자신을 성찰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 둘 사이의 일치가 생기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질문 5조 1번) 1. 사람을 이롭게 하는 물질에 대한 기술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덕스러운 삶을 살아갈 때에만 가치가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존중하지 않고 기술의 발전만을 추구하여 왔습니다. 그렇다고 기술의 발전을 멈추게 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생각하시기에 기술의 발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덕스러운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가 궁금합니다. 또, 기술의 발전과 자연의 조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시는 지도 궁금합니다.
(답변 5조 1번) 뒤의 질문부터 보면, 기술이 발전하는 것은 자연과의 조화가 가능할 수도 있고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과학이 발달하면서 우리들이 태양광이나 혹은 지금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는 것은 어마어마한 빛이 내리쬐는 달에다가 발전시설을 만들고 그것을 무선으로 전기를 쏴서 집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구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무한한 에너지를 얻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한 것이라든지, 우리나라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플라즈마 프로젝트 같은 것입니다. 수소를 응축시켜서 작은 인공 태양을 만들어서 그것을 가지고 거의 자연에 해를 입히지 않는 방식으로 열을 방출하여 에너지로 삼는 것입니다. 핵보다 훨씬 안전하고 물론 고효율입니다. 그러한 것을 보면 사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자연을 복원하고 보호하는 측면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전기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지금 산에 나무가 남아나지 않았겠습니다. 전부다 잘라서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과학기술이 자연을 훼손한다고만 볼 수 없고 보호한다는 측면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은 엄청나게 인간에게 새로운 욕망을 갖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서 핸드폰 하나에 10억쯤 한다고 할 때 요즘 감히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몇 십 만원 내고, 할부로도 살 수 있으니까 돈 안 내고도 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욕망을 갖게 되는 것 아닙니까. 욕망을 가지니까 생산이 이루어지고 생산이 많이 이루어지니까 멀쩡하게 쓸 수 있는 것인데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사고, 그렇게 하니까 기술이 발전됩니다. 2008년에 사서 아직까지 가지고 있으면 삼성이고 뭐고 다 문 닫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긍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를 파괴할 가능성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래봐야 우리의 육체적인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은 과학기술을 통해서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 같은 것이 나와서 “그래. 네가 문학가가 되고 싶다고? 자, 머리를 돌려라.” 하며 머리에 칩을 꽂아서 셰익스피어 버금가는 글을 막 쓸 수 있게 한다든지 한다면 사람들은 문학에 관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쓰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내 글도 누가 읽어주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가 어떠한 경우일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이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덕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과학기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의 존재를 굳게 믿고 덕스러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하겠습니다.
(질문 5조 2번) 신학의 목적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지만,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다고 할 때 그 관계에 대해 목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답변 5조 1번) 두 가지 문장을 보여주겠습니다. 12권 7장 12절입니다. 질문자가 한번 읽어보십시오. “사랑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간다고 하는 말은 육체의 형상이 아니라 지성적 정신에 따라서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이해됩니까. 마지막으로 자, 김성구 목사님 읽어 보시겠습니다.
“충절하는 이 삶이 짊어진 불행을 지혜롭게 감당하고 그런 삶이 결국 끝내리라는 사실을 두고 현명하게 기꺼워하며 호강된 장래의 삶이 끝없이 간직할 행복을 충실하고 인내롭게 기다림으로써 새 사람이 생겨났다.”
중생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에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결국 우리의 옛 사람을 끊임없이 짊어지고 가야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정죄 받은 이 삶이 짊어진 불행” 이라고 할 때 여기에서 이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받았지만 아직 그 죄의 결과는 남아있고 자기 안에 죄의 영향도 남아있고 자기가 일생 싸워야 할 옛 사람입니다. 그러한 처지가 불행한 처지입니다. 그래서 늙고 죽고 병들고 고통 받고 하는 그러한 것을 결국 지혜롭게 감당하면서 소망을 갖는데,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끝내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이후에 누리게 될 행복 때문에 즐겁게 그것을 감당하면서 그래서 이러한 모든 죄로부터 해방된 장래의 삶이 영원한 행복을 보장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충실하게 살고 인내롭게 기다림으로써 새 사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새 사람이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지식에 이르기까지 새로워진다고 하는 의미가 그러한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그 속에서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을 닮아가고 하는 그러한 기쁨이 있을 때, 세상에서는 조금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사람들이 나를 속상하게 하고 괴롭히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거나 병 듦 으로써 자신이 고통 받는 모든 회신들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보리지기 아니니, 잠시 지나는 나그네로 여기고 오늘이라도 다음이라도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라고 하실 때 아무 것도 아쉬움이 없는 그러한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 그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