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목회자와 성화의 삶
녹취자 : 김세나
[질문종합]
<1조 질문>
질문1) 사랑이 ‘긍휼’, ‘자비’, ‘인내’라는 성향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정의(正義)도 외부로 드러날 때, 표출되는 성향들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당연히 그 올바름에 대해서 항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정의가 무엇이 정의인가 할 때에는 쉽지 않은 담론들이 이루어집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현덕, 용덕, 절덕, 의덕, 이 네 가지를 사추덕이라 하였습니다. (지연 전도사, 추덕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추덕이란 ‘척추’할 때 그 ‘추’입니다. 추기경 할 때 그 추입니다. 이것은 골간을 이루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네 개의 골간을 이루는 덕,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하기 어려운 핵심적인 덕목 네 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현명함, 절제 있음, 용기 있음, 의로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정의가 자기 안에 있다기보다는 ‘의’라는 덕이 내 안에 있으면 당연히. 예를 들자면, 이성도 목사 안에 남이 없는 무엇이 있습니까? 특히 예민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은 그래도 괜찮은데 본인은 잘 넘어가지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특별히 없나 봅니다. 저 같은 경우는 특별히 ‘색깔’입니다. 여러분들이 색깔을 아무렇게나 옷을 입으면 폭력을 당하는 느낌입니다. 내 안에 색깔과 디자인에 대한 성향이 있으니까 그것을 거스르면 그것이 당연히 바깥으로 표출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2) 목회자에게 주어진 권한은 성도와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회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가지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지속할 경우, 동료 교역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2) 목회자에게 주어진 권한은 성도와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을 보면 아주 작은 교회는 덜하지만, 큰 교회는 목회자가 교회를 생각하는 것을 자기 회사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되는 측면은 뭐냐 하면 경영이라고 하는 측면이 들어가니까 그러한 부분에서 교회의 행정과 재정과 모든 것을 총괄하고 있으니까 사실은 CEO 같은 역할들을 실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격한 자기 성찰 속에서 목회자에게 주어진 권한을 공정하고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가지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지속할 경우, 동료 교역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우선 잘 타이르는 것이 좋고, 그래도 듣지 않고 교회의 해가 된다면 당연히 자기 위의 상급 교역자에게 보고를 해서 조치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 질문도 쉬운 이야기였습니다. 세 번째 질문하겠습니다.
<2조 질문>
질문1) 설교자는 정의(正義)를 가르쳐야 할 마지막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정의에 대해서 마이클 샌델은 벤담의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칸트의 정언 명령, 존 롤스의 실질적 평등,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정의로 분류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을 비롯한 초대교부들은 정의에 대하여 어떻게 정의(定義)내렸는지 알고 싶고,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와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에 대한 차이점을 알고 싶습니다. 더불어 목사님께서 정리하신 정의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답변2) 교부들은 지금 저런 질문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상황이 제국시대였고, 왕정이 지배하던 사회였기 때문에 저러한 질문과 같은 의미에서의 정의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된 것은 토마스 홉스, 여러분들이 리바이어던이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알려진 토마스 홉스에 의해서 사회 계약론이 이야기되고,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인데 장 자크 루소나 존 로크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저 주제가 논의에 오르기 신학교에서는 관심이 없었고, 상황 자체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왕정 하에서 누가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포괄적으로는 가르칠 수 있었겠지만, 다 근대 이후에 생겨난 개념입니다.
오히려 교부들은 이제 ‘정의’라고 하는 관점을 정의보다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관점에서 많이 탐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고전적인 논의들과 관점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면, 제가 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서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고대 그리스 철학과 초기 기독교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갖게 되고 심지어 중세에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결국 그것은 ‘선’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결국 선한 세상인데, 선은 결국 관계이고, 선이라고 하는 것이 관계 속에서 정의로 나타납니다. 선이라고 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조화로운 질서가 있는데, 그것을 깨뜨리려 하는 것이 불의이고, 그것을 깨뜨리게 하는 것이 악입니다. 그리고 깨뜨린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비참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힘을 합쳐서 이루는 정의보다는 의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 인간이 그 정의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 의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덧입어서 우리가 의로워지고 그 의로움과 사랑이 연합된다고 하는 개념 속에서 정의에 접근하였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에게서 저렇게 마이클 샌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근대적인 정의에 대한 논의를 바라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노예 해방 선언을 기대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언제든지 신학은 그 문맥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2) 용기, 겸손, 정직에 관해 보다 실천적인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용기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 시기와 방법, 용기에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의 의미, 목회자가 담대해야 할 시기, 정직과 진솔함의 차이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용기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할 시기는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한 것이 필요하지 않을 때 사용하면 오기가 됩니다. 용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은 삼겹살을 어떻게 먹는가에 대한 방법만큼 다양하지 않겠습니까? 삼겹살집에 가서 두텁 껍데기부터 시킬 것인가, 오겹살부터 시킬 것인가. 너무 다양하지 않겠습니까. 획일적으로 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용기에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용기라고 하는 것은 선을 거스르는 것을 볼 때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거스르는 어떤 악을 볼 때 저것을 막아야 되겠다, 혹은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용기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떠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교회역사를 보면 이렇게 이론이 하나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다음에 나올 때에는 항상 이렇게 이것을 이렇게 똑바로 잡아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과 부딪히면서 반대로 튀어 나갑니다. 그리고 한참의 역사를 거치면서 이것들이 균형을 잡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합니다. 가톨릭의 사제주의와 공로주의, 미신적인 것들을 보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의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그 다음 세대인 멜랑히톤이나 칼빈이 나와서 다시 그것을 보면서 칼빈의 마르틴 루터에 대한 존경심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 번도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제가 읽은 글 속에서는 칼빈이 그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분이 저를 안나라고 부르신다 할지라도 저는 그 분을 존경합니다.” 존경심이 그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정도인데도 마르틴 루터의 신학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 종교개혁이 가졌던 한계들을 다시 조정하고 극복하면서 실질적으로 종교개혁을 완성한 사람이 칼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마르틴 루터나 어떤 상황이 처음 생겼을 때에 발생하였던 반응들을 비판만 할 수 없는 것이 그 당시로 보면 그렇게 굵직하고 확실한 선을 긋지 않으면 사람들이 가톨릭과 새롭게 주창되는 종교개혁 사상의 차이점들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도 필요하였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항상 어떤 불의한 일에 대해서 자기가 용기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용기와 함께 절제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속에서 나도 대게 악이 있고 악과 사람들이 막 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물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에 있어서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떠한 잘못에 반대하고 용기를 가질 때 자신은 전적으로 옳고 저 쪽은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한 생각에 있어서 절제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에드워즈 같은 경우는 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나의 단점을 발견하기 쉽지 않은데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내가 혼자 보기 어려운 나의 단점의 진실한 면들을 보여주는 기회가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차이가 필요합니다. 정직함과 진솔함의 차이, 책에서 진솔함과 정직함의 차이에 대해 논의한 것 같지는 않은데 진솔하다고 하는 것은 내가 국어 적으로 이해하기로는 털어 놓는들 털어놓지 않는들 무슨 정의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그러한 내용들을 밝히지 않아도 되고 혹은 알려줘도 알려지지 않아도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갔다가 자기를 잘 보일 목적으로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진솔하다’고 이해를 합니다. 정직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강한 개념이라 받아들여집니다. 정직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전을 찾아보시든지 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다음 질문하겠습니다.
질문3) 오늘날 사역의 현장에서 용기 있게 올바른 것을 말하기 어려운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올바른 것을 듣기 싫어하는 현대인들과 교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현대인들이 모두 올바른 것을 듣기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입니다. 이제 올바른 것을 듣는 것을 누구는 좋겠습니까. 질문하는 전도사님도 올바른 이야기 좋겠습니까? 여러 사람이 봐서 올바른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계속 한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런데 목회라고 하는 현장에서 우리들이 올바른 것을 싫어한다, 듣고 싶어 한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놓고 지적 질을 하는 것만이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기 평소의 삶과 인격, 모든 것이 사실 그 가르침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에서 썼나? 아르투르 쇼펜하우어가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인생이 70이라면 40은 본문이고 그 후 30년은 각주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설교자의 설교가 본문이라면 설교단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 삶, 이러한 것들은 각주입니다. 그래서 각주가 없는 논문은 학문적으로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연설입니다. 그래서 이제 본문이 조금 어려워도 각주가 친절하고 잘 쓰여져 있으면 그것을 보고 이해하게 되듯이 올바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 그러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이 아주 각 지게 서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사람들을 선으로 인도할 때에는 둥글게 둥글게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윤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있었는데 할머니였습니다. 멋쟁이 할머니였고 카랑카랑하고 중학교 1, 2학년 때 가르치시고 고등학교 때까지 강의를 하였는데 키도 작으셨습니다. 학생들이 허틀게 굴면 그 할머니가 아저씨 같은 고등학생들을 불러다가 공중에 손이 지나가는 소리가 날 정도로 뺨을 때렸습니다. ‘휙. 짝.’ 그러면서도 존경 받는 분이셨는데 우리에게 맨날 가르친 것이 그것입니다. “마음은 둥글고 일은 네모지게.” 내가 교회에서 사역을 해 보니까 30년 넘는 세월 목회를 하다 보니까 그 격언은 실천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음이 둥근 사람은 일도 둥급니다. 그래서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한 것도 아니고 한 듯 안 한 듯, 그렇습니다. 그래서 직원들 사이에서도 잘 어울리고 언니, 누나 하며 어울리고 다니는 아이들은 사람만 좋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분위기에는 기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뭘 가져다 줘도 각 지게 행하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칼 같이 해 냅니다. 이 자매는 사람들과 늘 부딪힙니다. 뒷감당하기가 너무 피곤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일은 각 지게하고 조직을 피곤하게 하는 것을 내가 돌보면서 해야 하나, 이 부담을 조금 덜고 일이 좀 덜 되는 것을 원해야 하는가, 그러한 고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올바른 것을 말하면 잘 받아들여지지만, 사랑 없이 올바른 것을 말할 때에는 ‘그러면 너는?’ 그러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간에, ‘자기는 그렇게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4) 정의를 구현하는 삶과 공의를 구현하는 삶의 차이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변4) 정의와 공의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성경에 정의라는 말은 잘 안 나오지만, 아마 저 질문의 의도가 개인의 정의와 사회의 정의를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개인의 윤리가 국가 전체에 나타나는 것이 정치입니다. 개인 윤리학의 확장이 정치학입니다. 그래서 이제 개인의 정의는 이제 개인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지만 사회적인 정의는 정치를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정치권력을 어떻게 통제하고 규제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한 점에서 만약 개인이 정의롭다면 당연히 사회가 정의로워지기를 바래야 하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가 이바지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짜 정의로운 사람이지, 자신은 정의롭다고 하면서 사회는 불의하게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삶이 될 수 없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개인적으로 사랑을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지, 두 가지가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공의는 정의의 확장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3조 질문>
질문1) 목회자의 사랑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겸손과 예의바름에 대해 말씀해 주시며, 성도들은 목회자의 행동을 보면서 닮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목회를 해오시며 목사님의 목양을 통해 성도들이 닮기를 바라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나는 살면서 성도들이 나의 이런 부분을 닮으면 참 좋겠다, 이 점에 있어서 내가 모든 성도들보다 탁월하다고 생각을 해 본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목회자가 살면서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전도사님 생각에 내가 교인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눈치가 없는 것 같습니까? 눈치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까? 나는 다른 면에서도 그렇게 목회자는 뭐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것에 대해 모르겠습니다. 하나님도 생각이 다르겠고 사람들도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과도하게 눈치를 보면서 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나 다른 목회자들도 눈치를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본인들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하기를 원하는 것이지, 그래서 ‘교인들이 보면 어떻게 하나?’ 이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자유롭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것은 목회자로서 할 행동이 아닌데 저렇게 모든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대담하게 행하시는 구나. 진짜 눈치 없다.’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냥 자유롭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조희숙 전도사님: 목사님께서 목회를 해 오시면서 말씀을 전하시고 성도들을 목양해 오시면서 내가 목양하는 지체들이 이런 이런 부분에 있어서 목사님 말씀하신 부분을 따라 갔으면 좋겠다 생각하신 부분이 있으시다면 어떤 부분이겠습니까?)
그것은 뭐 모든 삶의 방면에서 다 그렇습니다. 나는 비록 다 살지 못하지만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을 이야기 하면 “모든 선한 일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어느 한 방면으로, 성도들을 어느 한 방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어머니로서 딸로서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모든 방면, 경건생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방면에 대해서 온전해 지려고 애쓰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설교자의 제일 어려운 부분은 뭐냐 하면 모든 삶에 있어서,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어느 하나, 전도면 전도, 아니면 성경읽기면 성경읽기. 어느 하나만 주특기가 있어서 그것을 강조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성경이 그리는 그리스도인의 상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모든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셨다고 할 때, 그 분에게도 자기의 관심사가 있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선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그 분이 가르치셨던 것은 삶의 모든 방면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모든 삶에 있어서 온전하셨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온전해 지기를 바라는 열망을 가지실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가 꼭 겸손해야 하나?, 가치도 없는 인간들에게 왜 겸손해야 해?’ 생각하는 이런 목회자가 교만한 성도들을 보면서 ‘아,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겸손이 없어서 저렇게 많은 분란을 일으키고 고통을 받을까?’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온전함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르고자 하는 끊임없는 열망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독촉되는 사람들만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눈물 흘리는 마음을 갖지 않겠는가 생각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어느 부분이 아니라 사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였듯이 “모든 것에 순결하고 모든 것에 온전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목회자가 가져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겸손과 예의바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중의 한 샘플입니다. 사람들에게 문화가 달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통하는 것은 겸손할 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겸손이 모든 사람과 함께 흐르는 것입니다. 겸손과 비굴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선 사람인가, 사람 앞에 선 사람인가에 의해서 달라집니다. 그래서 겸손하고 예의바른 것에 대해서 웃기는 예화도 많이 했었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2) 목회자는 영혼을 다루는 의사라고 하셨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영혼을 다루기 위해 마음을 열려면 목양의 기술도 필요함을 매번 느낍니다. 코로나 블루를 지나고 있는 성도들의 영혼과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어떻게 접근하고 목양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2) 다른 사람이 전도사님에게 코로나 블루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접근해 주었으면 마음이 열리고 좋겠습니까? Just do it! 어떨 때, 코로나 우울한 시기를 지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내게 다가옵니다. 그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접근할 때 내가 마음이 열리고,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음 질문 하겠습니다.
질문3) 예수님은 제자들과 삶을 공유하시는 ‘함께 함’의 목양을 하셨습니다. 목회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에게 지도자의 삶을 본받도록 인도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공동체는 ‘함께 함’이 쉽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은혜를 공유하는 환경도 쉽지 않은 때를 맞이하며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목양할 수 있을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여러분들이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좀 뒤에도 질문이 나오지만, 놀라운 것이 ‘어떻게 해야 되지?’ 생각하는 사람에게 지혜가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려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는 사실 내가 전혀 동의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사 처음 만났을 때 발간하지 말아야 할 책을 이야기 해 주면서 「영에 속한 사람」워치만 리의 책을 출판을 중지하라고 충고했던 기억이 나는데, 신학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런데 존경할만한 것은 그 분의 구령의 열정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젊은 나이에 서른 몇 살 밖에 안 되어 감옥에 수감되어 죽습니다. 그런데 대륙을 횡단하는 전도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한번 대륙을 관통하고 나면 수십 만 씩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배들이 물어봤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엄청나게 전도를 할 수 있었는지 물어 봤더니, “나는 아무 것도 몰랐고 그냥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어떻게 해서든지 인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니까 하나님이 놀랍게 그때마다 내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결국 창의력의 발단은 욕망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할 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정해진 상황에서 각자 아이디어를 내라고 하는데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지적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열정의 부족입니다. 열정을 가지면 나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한국에서 중동에 건설 자재들을 수출하고 있었는데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항만에서 무슨 일이 생겼습니다. 배가 빨리 빨리 하역을 못해서 하역의 순서를 한없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배에 실린 자재들이 가야지만 건설 현장에서 건설을 계속하는데 건설회사에서 그것을 납품을 받았는데, 6개월이 지나야 통관이 되고 하역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건설사에 그 제품을 납품한 회사에서 이것은 우리가 건축하는 회사에 납품을 약속하였고, 건축하는 회사는 그 나라에 건물을 짓는, 건설을 완성해서 납품하기로 약속을 한 것이라 해놓고 그 때에 납품한 것에 대해서는 손해를 감수하고 헬기를 띄웠습니다. 헬기로 자재들을 묶어서 기다리는 순서를 건너 띄고 공중으로 제품들을 이송을 하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쪽이었는데 엄청난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결국 창의력이라고 하는 것은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력할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정이 없으면 가르쳐줘도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열정을 가지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4) 맹자가 ‘무항상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을 말했던 것처럼 목회자가 살아야 할 정직한 삶에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금전적인 유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수년간 한국교회의 주된 흐름 중 하나였던 ‘청부론’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4) 청부를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지혜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서 부자가 되는 것도 말고 너무 가난한 것도 말아달라고 이야기 한 것이 어떻게 보면 정직한 자기 고백입니다. 나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부를 주셔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만한 그러한 사람이 되지도 못하고 아무리 가난하고 쓰레기처럼 버려져도 그 속에서 청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되지 못하니까 나의 연약함을 보셔서 너무 부하지도 말고 가난하지도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던 것처럼 저 ‘청부론’이라고 하는 것의 방점이 ‘청’에 찍혀 있을까, ‘부’에 찍혀 있을까에 대해서 나는 아직까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청부론을 본격적으로, 한국교회의 주된 흐름이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누가 한국교회 교인들 중에 누가 그런 청부론을 그렇게 주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리고 오히려 많이 벌어서 선한 일하면서 살자라고 할 때 ‘선한 일 하며’ 보다는 ‘많이 벌어서’에 방점이 찍혔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것 아니겠습니까? 청부 중에서도 ‘청’보다는 ‘부’에 방점이 찍힌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으로 볼 때 우리의 관심사는 사실은 청론인가, 부론인가 따지기 앞서서 우리의 소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왕국의 소명인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인데, ‘부’하면 많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고 ‘빈’하면 많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이 사는 것도 아니고, ‘부’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못 사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가루 속에 들어간 누룩과 같아서 사람들에게 전파시키는 놀라운 전파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삶을 효과적으로 살아가는가 거기에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살아야 할 정직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그런 것 같습니다. 목회자가 너무 물질에 대한 욕심이 많으면 반드시 불의를 저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가난을 칭송하는 삶도 살지 말고, 그리고 분량 이상의 욕망을 가져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젊은 나이에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쓸 때에는 가난을 숭배하기까지는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가난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 후로 30년 정도 넘었습니다. 1995년도인가 썼으니까 한 25년 지나고 나서 지금 보니까 그냥 받을 것 받고 할 도리를 하며 사는 것, 그 이상의 욕망을 품지 않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좋은 삶이겠다 생각됩니다. 사실은 그것을 가르쳐 주신 분이 김인봉 이었습니다. 그때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제 나이때 그런 가르침을 주셨는데, 아들 목사님이 있었는데 항상 아버지한테 와서 교회에서 뭐도 안 받고, 뭐도 안 받고 하는데, 아버지 목사님은 별로 썩 좋아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받을 것 받고 너의 도리를 다 하라. 그리고 교회에서 뭐도 안 받고 뭐도 안 받고 이렇게 손해 보고 저렇게 손해 보고 하는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는 것 자체가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병욱 장로님 왔을 때 같이 식사를 하는데 자기가 아내에게 얼마나 잘 해주는가에 대해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아내는 계속 옆에서 감탄하고….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장로님.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와서 잘해 준 것은 기억이 안 나는 법입니다. 저는 아내에게 뭘 잘 해 줬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서 막 달라고 달라고 그러지도 말고, 주시면 받고 자신의 의무를 최선을 다해서 수행하고 아무것도 자기의 것이라 우기지 말고 나누어주고 베풀고 그러한 사람으로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는 목회자도 많지만 주위에 보면 저런 면에서 훌륭한 동역자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러한 분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십시오. 다음 하겠습니다.
<4조 질문>
질문1) 목사님께서는 목회자가 정직하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시면서 ‘정의는 사랑으로 완성되고 사랑은 정의에 기초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의의 목적을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또한 세상에서 정의를 이루어가는 과정도 사랑의 방식으로 이루어가야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상호간 정의를 주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사랑의 방식을 찾아볼 수 없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정의를 이루려는 자가 사랑으로 그 일을 행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답변1) 맨 밑의 질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그리고 정의를 이루어가는 방식이 정말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너 그 따위로 살지 마.”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이 분이 정말 나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하는지, “제발 바르게 살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정중하게 이야기를 해도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차갑게 이야기 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정의를 이루어가는 과정도 사랑의 방식으로 이루어가야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였는데, 결국 율법과 은혜가 나옵니다. 세상은 그렇게만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것을 사랑의 방식으로 이루어가라고 말한들 말이 통하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죄인들이 있는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율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정부를 세우고 법을 만들고 정의에 대한 생각을 사람들에게 주셔서 그 합의로써 법을 이루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정의를 구현해 나가고, 악인은 벌하고 선한 사람은 유익을 얻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정의는 사랑으로 완성되고 사랑은 정의에 기초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정의를 완성하시는 방법인데 아직은 저런 방법이 세상 전체에 호소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람들은 그 사랑에서 정의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번에 「염려에 관하여」에서 그림같이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먼저 있고, 내가 그 정의를 보면서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은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의로운 삶의 이유와 목적이 선한 사회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과 정의는 나란히 간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공정하게 되기를 원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정의가 모두 이루어진다면 그 중심에는 그러한 완벽한 공정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실 것입니다.
질문2) 성경에서 충성이라는 미덕과 짝을 이루며 등장하는 덕목이 지혜라고 하셨습니다. 충성스럽게 일을 하다보니까 지혜가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지혜로운 사람이 충성스럽게 일하는 것인지 두 덕목의 구체적인 관계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답변2) 둘 다 맞겠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무엇이라 정의를 내려줬습니까? “영원한 사물에 대한 오성적 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사물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하위의 것들을 아무리 질서 있게 지혜롭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최종적인 지혜에 기여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일머리가 있어서 지혜롭게 이렇게 이렇게 잘 해서 너무 효과적으로 완성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봉사하는 사람이 조폭의 두목이라고 할 때, 그 지혜에서 미덕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입니다.
성경에서 칭찬하는 지혜로운 종이라 이야기 할 때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한정된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서 그 분을 섬기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지혜로운 삶이어야 합니다. 시간의 낭비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어떤 임무가 주어졌을 때, ‘에이, 힘들어 죽겠는데. 되면 되는 것이고 안 되면 안 되는 것이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창의적인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해 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때에 이제 아주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무기의 세계입니다. 무기의 세계에서는 자기나라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니까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창의적인 폭발력들이 생겨납니다. 무기가 바로 그러한 것들을 말해 줍니다. 나라가 생존해야겠다고 하는 의욕을 나라전체가 갖지 않을 때 그러한 것들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 한번 군사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보니까 미국의 항모전단이 11개가 있는데, 항공모함이 11척이 있고 에워싸여 있는 게 보통 항모 하나에 60척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잠수함부터 시작해서 순향함, 구축함, 이지스함부터 시작해서 함재기까지 해서 나오는데 중국과 붙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말에 중국이 다양한 방법을 생각을 한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함대를 요격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교전 룰이 있는데 항모가 공격을 받으면 공격한 그 지점을 핵으로 응사한다고 하는 교전 규칙이 있습니다. 항모를 공격할 때에는 핵 공격을 받을 각오를 하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쉽게 이야기해서 이지스함이 천 킬로미터 밖에 있는 사물을 천 개가 넘는 표적을 탐지해서 26개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다니는 핵 잠수함 같은 것들은 핵 잠수함 하나가 러시아 같은 나라 전체를 무력화 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핵탄두가 24개가 들었는데 하나가 올라가 12개로 퍼져 터뜨리는데 그 터지는 하나하나가 히로시마의 백 배 정도되는 원자탄입니다. 그러니까 강대국의 마지막 보험입니다. 그 군사 전문가는 중국이 생각하는 것은 싸구려 미사일을 수 천 발을 한꺼번에 같은 목표로 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 아마 못 막지 않겠는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미국의 굉장한 고민거리라고 합니다. 그렇게 진짜 나올 때에는 한 발만 맞는데도 침몰하니까 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할 때, 레이저 포라든지 나오는데 하나의 항공모함을 격침한다고 하면 중국 군사력의 40%를 잃어야 한다고 합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하나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여섯 개 정도의 전단을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이해도 되는 것이, 실질적인 위협을 심각하게 느끼니까 자기네는 나름대로 살아남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만든 것 그것이 국가적으로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나라는 침체되다가 침몰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하고자 할 때, 욕망이 강할 때 그러한 끊임없이 창의적인 욕구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나라 잠수함 개발사 같은 것을 보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작업을 하다가 심지어 뇌 암에도 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수없이 나오면서 국가라고 하는 것을 발전하는 것입니다. 한번 무기 전쟁에 관한 내용을 보십시오. 얼마나 사람들이 미친 듯이 새로운 지혜를 추구하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충성스럽게 일하려는 사람은 높은 목표를 갖습니다. 높은 목표는 일상적인 활동으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그 격차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새로운 방식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겠습니다.
<5조 질문>
질문1) 목회자가 지녀야 할 지도력의 핵심은 잘 빚어진 인격과 거룩한 영성이 바탕이 된 리더십이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리더십과 세상에서 요구되는 리더십의 근본적인 차이를 어떻게 구별하면 좋을지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1) 세상에서 요구하는 리더십은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 좋게 해 주는 리더십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서 요구하는 리더십은 사람들이 아주 특별한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 사실은 오늘날 세상에서 요구하는 리더십에 있어서 도덕성도 별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굉장히 많이 물 건너 갔습니다. 건재하고 계시는 트럼프 대통령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온갖 섹스 스캔들을 다 휘말렸어도 문제가 안 되었고 앞서 있었던 클린턴 같은 경우도 그렇게 많이 문제를 일으켰는데도 경제가 최고 호황을 누렸었습니다. 만일 코로나 사태가 안 터졌다면 미국 경기가 계속 좋아지고 중국을 계속 압박해서 이익을 보았다면 트럼프가 재선에 대해서 이렇게 불안해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GDP가 32% 이하로 떨어졌다고 하니까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트럼프가 만들어 놓은 일자리가 코로나를 통해서 90%가 날아갔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실직 상태에 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입니다. 사실은 세상에서는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리더십을 원합니다. 아주 고매한 사람을 원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 특별한 현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리더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리더가 되는 사람들은 성경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먼저 팔로어가 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자 하였던 사람들이 그 소명을 공유하고 그 다음에 자신이 예수를 계속해서 따라가는 제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리더가 되어가는 리더십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리더는 당연히 지혜로워야 하고, 용기 있어야 하고, 절제가 있어야 하고, 의로워져야 하는데 이러한 덕목들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리더가 되어서 어디로 데리고 가고 싶은 것입니까? 어디로 데려 가고 싶은 것입니까?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가고 싶은 것 아닙니까?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