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소명과 교회
특별한 비결이 있으시다면
짧은 시간에 정리하기는 힘들겠지만은 이제 그 가장 커다란 문제는 전체적인 구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목회라고 하는 일 속으로 휘몰리는 거죠. 그러면 그 누구도 처음 가지고 있었던 순수성을 지키기 어렵다 그렇게 봅니다. 그니까는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게 뭐냐면은 목회라고 하는 것을 오늘날은 너무 기능적으로 이해를 하죠. 그래서 사실 저는 목회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애매해요. 성경에도 사실은 목회라는 말이 안나오지 않습니까? 그거야 물론 번역이 달랐지만은. 목회라고 그러는데 가톨릭에서는 사목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사목이라는 말이, 맡을 사(司)자에다가 목양할 목(牧)자인데, 목회라고 할 때 오늘날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대게 뭐냐면은 조직으로서의 큰 교회를 이끌어가는 리더, 예배를 주관하는 예배 인도자, 그렇지 않으면 요즘에 많이 나오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그런 미래 지향적인 지도자, 그 다음에 대사회에서 어떤 문제인지를 알고 교회를 사회를 향해서 이렇게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조정자, 뭐 이런 쪽으로 전체적인 그림들이 그려지는데 저는 좀 목회가 가지고 있는, 목사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직무를 상당히 많이 희석시키고 있다라고 생각을 하죠. 그래서 그 기본적으로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인데 이 사람은 누구냐 하면은 두 개의 모순되어 보이는 일을 수행하면서 가야되는 사람이예요. 그게 뭐냐면은 아직까지도 도를 다 알지 못했으면서 그 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깨우쳐야 하는 사람들이예요. 나머지는 전부 다 지금 이야기 한 것 이외에 다른 것은 다 사이드에 있는 거예요. 잘 하면 좋고 못하면 어쩔 수 없는 다 가상자리에 있는. 이 사상이 결국은 누구냐면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이죠. 칼빈이 자기를 뭐라고 별명을 불렀는지 아십니까? ‘The servant of the world of God’라고 자기 이름을 불렀어요. 제가 평소에 스승으로 생각하는 존 오웬은 자기 자신을 ‘The servant of the Gospel'이라고 불렀어요. ‘복음의 종’이라고 불렀어요. 근데 그분들을 보면서 뭐 나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아니고 나 나름대로의 경험이 있지만은 결국 전부다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면은 그 걸출한 사람들이 똑같이 자기를 뭐와 관련 시켰느냐면은 ‘The Word,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시켰다라고 하는 거죠. 근데 문제는 뭐냐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죠. 잘 배워서, 잘못 가르치는 것은 칠 것도 없고, 잘 가르친다라고 할 때, 내용이 있게 뭔가 가르친다 라고 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잘 배워서 정리를 해서 그것을 전달해주는 거요. 그게 말하자면 교사 아닙니까? 그렇게 전달해주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면은 득도를 하는 사람처럼 여기저기서 배운 것들을 통해서 결국은 도를 찾아가기는 했으나 전할 때에는 누구에게 배운 그것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트랜스메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자기 속에서 다 소화해서 마치 득도한 사람처럼, 사실 신앙의 세계에서는 득도라는 것은 없잖아요? 그 도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사도 바울도 그 도를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잖아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이제 붙잡았다 함도 아니잖아요. 그니까 끊임없이 찾아가는 거죠. 그렇지만은 그 못 잡았다고 해서 못 잡은 사람들은 다 똑같은 사람이다 그렇게 얘기할 순 없어요. 그니까 마치 그 세계를 보고 온 득도의 사람처럼 --한 것들이 재료가 되어서 그 도를 찾아가서 빛을 보았지만 정할 때에는 그것을 그대로 누군가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완전히 자기화 해서 그래서 마치 자기가 처음 이야기 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방식이 있다 이거죠 목회자는 그 방식이어야 한다 이거죠. 그런 의미에서 ‘The servant of the world of God’가 ‘The servant of the Gospel'이 된거죠. 그게 아니면 ‘The servant of the theology of Calvin'이 되는 거죠. 칼빈신학의 종, 뭐 칼빈 신학의 종이 되었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중간에 그런 수식어를 집어넣지 않고 바로 'I am the servant of the world of God’, 'I am the servant of the Gospel' 이렇게 들어가는 거요. 이거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그러면 칼빈이 누구냐? 칼빈이 최근에 의미심장한 책 한권이 나왔어요. 그게 뭐냐면은 『Calvin, The student of the church of the fathers』라는 책이 나왔어요. 그게 무슨 얘기예요? 칼빈은 교부들의 충실한 학생이었다. 칼빈이 종교개혁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지만 자기가 혼자 돌아갔나? 칼빈이 돌아간 곳이 어디입니까? 신약성경으로 돌아 간 것이 아닙니까? 그니까 칼빈이 그냥 돌아갔냐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칼빈이 바로 성경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을 통해서 들어간 거죠. 이 사람이 어느 정도 어거스틴을 존경했냐면은 내가 존 오웬을 존경하는 그 이상으로, 어느 정도였냐면은 계속해서 강론을 써 내려가면서 이전에 대해서는 많은 그 위대한 사람 어거스틴이 한 말 중에 한마디도 덧붙일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정도로 이 어거스틴을 깊이 초안?했어요. 그니까 무슨 얘기냐면은 그만큼 그 사람들이 ‘The servant of the world of God’ 라고 얘기했지만은 바로 말씀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은 신학을 통해서 들어간 거요 내가 확인한 자료에 의하면 어거스틴이 약 250권 정도의 책을 썼는데 그 책을 거의 다 외웠어요. 쪽수까지 거의 다 외웠어요. 그거를 자료를 대라고 하면 얼마든지 다 될 수 있어요. 엄청난 그거를 통해서 말하자면은 참된 신앙이 이--구나 깨달았어요 존 오웬이 제가 존경하는 존 오웬이 자기를 ‘The servant of the Gospel'이라고 했는데 사도 바울이래로 복음에 대해서 그렇게 해박하게 알았던 사람은 거의 없어요. 내가 보기에는 한 5사람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바로 하나님의 ---- . 근데 그 사람이 그 바로 복음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예요. 어마어마한 학자였어요. 그 분이 쓴『Biblical Theology』라고 하는 책을 있는데 라틴어로 썻는데 한 750페이지 정도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예요. 나중에 영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거기에 보면 어마어마한 문헌들이 쏟아져 나와요. 그게 뭔지 알아요? 희랍어 문헌들이예요. 희랍문헌, 그 다음에 히브리 문헌, 그 다음에 라틴문헌. 우리가 들어보지도 못한 희랍 클래식에 나오는 그 수많은 일반 학문들에 대한 자료들이 막 쏟아져 나와요. 왜냐면은 천재였어요. 당대와 그 앞 세대의 걸출한 종교개혁에 라인에 따른 모든 사람들의 작품들을 거의 다 설렵을 했고 특별히 이 교부들의 신학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하게 통달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The servant of the theology of church fathers'가 아니라 ‘The servant of the world of God’이 된 그 의미를 한 번 곱씹어 보란 말이죠. 이 많은 신학적인 자료나 이 엄청난 책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 돌아가기 위한 재료들일 뿐이예요. 이 자체의 종이 되려 했던 것은 아니라 이거죠. 그렇게 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냐면은 득도의 길을 가는 거요.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목회자이기 이전에 구도자여야 해요. 구도자가 아닌 목회자는 모두 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예요. 구도자예요. 그러면은 누가 구도자예요? 구도자가 누구입니까? 구도 그러면 우리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일먼저 가족과 인연을 끊어야 해요. 가족과 인연을 끊고 그 다음에 자기 혼자 되는 거죠.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는 거죠. 두 번째 머리를 깍는 거죠. 나는 이제 이 세상과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거죠. 세 번째 하는 일이 뭐죠? 그렇게 해서 집을 떠나고 머리를 깍고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겁니까? 스승을 찾아가야지. 이게 전형적인 구도자의 삶이예요. 우리는 이거는 아니예요. 그러면 확실한 것 뭐냐면은 가족들하고 살고 있지만 -- 것이 뭐냐면은 세속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과 끊어야 되요. 세속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거죠.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셔요 ‘ The Priture must to be a extrodinary holy man' 비상하리 만치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거죠. 이 설교자 자신이. 그럴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어요? 기본적으로 세속에 살면서, 그니까 더 어려운 거요, 이 세속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두 번째는 이제 자기를 구별해야 되요. 그 다음에 스승을 찾아가는 거죠.자기 자신이 참으로 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리고 그분에게 자기 자신을 합치시키는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가서, 자기 자신이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아름다운 질들을 누려야 되요. 그런 삶의 질을 자기자신이 누려야 되요. 그것을 라틴어로 ‘플루이’ 할 수 있어야 되요. 그런 삶의질을 자기자신이 누리면서 그러면서 걸어가는 거요. 나의 존 오웬이 뭘 얘기 했냐면은 교회안에 서의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참된 신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신자들에게 보여주는 거요. 그니까 말로 많이 하는 데, 그것이 다 영글어서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이 되었을 때 참 하나님이 사랑하고 신실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서 매일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걸어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교회안에서의 최고의 중요한 직무이고 심지어 뭐라고 얘기했냐 하면은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해서 목회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통해서 목회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때문이라는 거요. 그러고 걸어가. 그 사람은 완전이라는 것이 어딨어? 없지. 그래 가는 거야. 가면서 자기가 걸어간 발자취를 가지고 교인들을 보는거야. 그러면 난 갔는데 교인이 저 앞에 갔다. 그럼 목회자가 아니지. 난 여기 갔는데 교인은 벌써 저기로 갔다. 그건 목회자가 아니지. 그니까 가며 뒤를 돌아보면 교인들이 이렇게 고민을 하면서 와. 근데 그것이 모두 다 자기가 경험한 것들이예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언젠가 교회가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은 공부도 많이 하고 학문적으로도 깊이가 있고 말씀에 있어서도 은혜를 많이 받고 깊이가 있는 그런 지체가 하나 있었는데, 교회에서의 설교의 다양성을 아주 다양한 서브젝트들을 다루니까 인간 내면부터 시작해서. 그러니까 하루는 그런 얘기를 해요. 목사님 꼭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그게 뭐냐고 하니까, 그때 인간의 깊은 내면, 죄에 대해서 설교를 했을 거요 아마. 목사님도 우리와 똑같이 인생을 살아왔는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인생 동안에 경험의 영역이 넓습니까? 그러면서 목사님이 그 경험을 어느 정도나 하셨습니까? 뭐 이런 식으로 물어봤어요. 그래서 나는 딱 잘라서 대답했어요. 당신과 나는 삶의 자리가 다르니까 경험이 똑같을 수가 없을 것 아니예요? 나이도 틀리도, 자라난 환경도 틀리고, 전공도 틀리니까. 그렇지만 자매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기 위해서 걸어가려고 하는 길, 그러니까 구도자로서 자매가 예수를 잘 믿으려고 걸어가는데 그 길 속에서 자매가 경험한 것 중에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딱 잘라서 말했어요. 그럼 왜 그렇게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었느냐면은 아니 뭐 그렇게 복잡한 것을 경험하겠느냐 이거요. 얼마나 단순하냐는거요, 예수 믿으면서 걸어 오는 길이. 자, 성도를 시험에 들었는데 내가 시험에 안들어 봤나? 성도들이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안되는데 내가 그래본 적이 없나? 영혼에 대해서 막 그 영혼들이 잘못되면 가슴아픈데 아까 목회의 기본적인 소명이라고 얘기했잖아요. 그런식으로 따지면 이게 뭐 어마어마 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비슷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길을 걸어가는 거요. 그래서 그거를 보여주는 거요. 칼빈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뭐냐면은 목회자에게 완전히 기대하지 마라. 목회자 자신도 한 마리의 어린 양이예요. 나는 목회를 하면서 여태까지 나의 생애를 다 걸고 최대의 목표는 교회의 성장이 아니예요. 나는 지금이라도 누구에게라도 공언할 수 있어요. 지금이라도 우리교회 부목사님이 15명이거든요. 교인들이 따라만 간다면은 15개의 교회로 나누어서 다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다시 15분의 1을 가지고 다시 목회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커져도 좋고 안커져도 좋고 아무래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그 가치가 아니라 이거죠. 목회하면서 지금까지 나의 최대의 관심사는 뭐냐면은 how to be a real Christian. 어떻게 하면 genuin Christian이 될 수 있느냐예요. 목회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에 대해서는 일장 연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도 이만큼 했으니까. 맨바닥에서. 일곱 명 데리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내가 건축을 안해봤겠오, 돈 때문에 시달려 보지를 안했겠오. 나도 할 얘기가 있다 이거죠. 그러나 사실은 how to be a genuin Christian, 어떻게 하면 참되고 순전한 그리스도인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쫘악 가는 거요. 그렇게 가는 길에서 자기가 그 길을 계속 가. 그러면 어떤 유익이 있느냐면 말이죠, 한 사람의 지성 안에서 관심이 다른 수많은 사람의 지성을 이렇게 수십년 동안 그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켜 준다는 것은 천사도 가능하지 않아요. 그것에 동의할 수 있죠? 그래서 결국은 새로운 진리의 세계를 깨달아야 되잖아? 그거는 스터디를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는 거요. 스터디를 통해서 깨닫는 것은 잘 깨달으면 잘 정리해서 그런 방식으로 전달해 줄 수 있을 뿐이지 그건 안된다 이거죠. 그래서 소위 불교에서 얘기하는 頓悟占守라고 얘기해요. 담박에 깨닫고 그 다음에 공부해 나간다. 여섯가지 유형이 나와요. 돈오점수, 돈오돈수, 점오돈수, 뭐 이렇게 다양하게 나와 . 그런데 그런 것 다 집어치워 버리고 하나 분명히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어느 한 순간에, 끊임없이 지성적으로 노력을 하지만은, 그러나 이것 정도가 아니라 이것들을 통해서 영혼을 확 비쳐주시고 진리의 세계를 보게하시는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조명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은 어쩌튼지간에 그런 하나님이 새로운 은혜를 세계를 확 보여주시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거든. 그런데 이거는 누구에게 보여주시느냐면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합일되려는 그 집요한 추구의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주시는 거요. 그러면 이제 커다란 중앙 통로는 정해졌어요. 그죠? 그래서 이제 구도자로써 끊임없이 성도를 앞서서 가고 그 피나는 ㅜ도자의 길에서 진리의 세계를 발견해요. 그러니까 그 진리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누구를 위한 거죠? 그렇지. 그니까 설교를 성도들을 위해서 준비한다는 개념으로 들어가면 안된다 이거죠. 물론 이게 자기가 깨달은 것들을 가지고 성도들을 위해서 설교를 준비해야 되는 때도 있겠지요. 그런 시간도 때론 필요하겠지요. 그렇지만은 그렇게 해서 가면 쭈욱 구도의 길을 자기가 찾아가잖아요. 그니까 뭐냐면은 피를 말리는 거요. 그게. 왜 구도의 찾기 위해서는 라틴어로 '큐리오소스'라고 하는데 호기심을 가지고는 진리를 탐구할 수 없어요. 그건 보이지 않아요. 그것은 오히려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은 육신의 정욕, 그 다음에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그 중에서도 이 큐리오소스는 안목의 정욕에 해당거요. 그렇니까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분과 합일되려고 하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본받기 까지 자기가 옛 자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도록 그래서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도 내 게 나타내게 하는 그렇게 가는 거죠. 그러면 그 길을 따라서 계속 가요. 그래서 나는 설교 준비라는 개념이 없다라고 얘기할 수 없지만은, 뭐 어떤 사람은 설교 한편을 몇시간을 준비하십니까? 이런식으로 물어보거든. 나한테는 좀 썰렁한 얘기예요. 그런식으로 해서 요번주 설교를 해야하는데 내가 무얼 해야지 그러고 막.. 나는 목회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봐요. 그게 뭐냐면은 계속해서 자기가 걸어간 그 길을 가르켜 주는 거요, 물론 그것을 가지고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원고도 쓸려고 하니까 시간도 걸리는 것은 걸리는 거죠. 그렇지만 맨 땅에서 주일날 설교를 무얼 해야되지? 그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하면서 진리의 세계를 계속 알아가잖아요? 그러면은 진리를 때달으며 그 속에서 환희가 오는 거요. 환희가. 기쁨이. 그런데 그 기쁨이 어떤 것이냐 하면은 자기가 진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기쁨이예요. 그 분과 더 하나가 되고,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과 합일되는 경험이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된 것을 살아가면 목회자도 목회 시작 할 때는 오락가락하던 사람인데 그렇게 집요하게 기도하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일되기 위해서 걸어 갈 때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되요. 그 중에 버려야 되는 것이 만약에 목회의 현장이라고 한다면은 그것은 생각할 가치도 없는 거요. 교회가 뭐 그렇게 소중하냐 이거예요? 그리스도를 향해 가고자 하는 그 신앙의 지조를 버리면서까지 그것을 붙들고 있어야 될 정도로 그렇게 가치가 있느냐 이거예요? 그렇게 가치가 있었으면 왜 사도 바울이 나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졌다 그렇게 얘기하냐고? 그 수많은 개척교회 놔두고 왜 그렇게 무책임하게 얘기하냐 말예요. 그러니까는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 얘기예요.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러고 가. 그러면서 하나하나 가는거요. 그럼 그 사람이 설교를 좀 어눌하게 해도 그 모습을 보면서 하 저거구나 고난이 올 때는 그렇게 목사님이 많이 설교를 하셨는데 고난이 올 때는 저렇게 견디면서 가는 것이구나.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그러면서 쭈욱 지나가는 거요. 그니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냥 아무 시선 의식 하지 않고 그게 자기의 본분이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는 거요. 그러고 교인들이 그걸 보는 것은 부수적인 효과지. 그것을 녹화까지 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고 신문에 광고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가는 거요.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이 보이는 모범만 가지고는 안되잖아요. 이렇게 비유를 하면 되요. 영화관을 갔는데 소리는 안 들리고 그림만 나와요, 아니면 그림은 안나오고 소리만 나와요. 둘다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림을 그렇게 보여주었어도 말이 필요해요. 돌아가서 그것을 이성적으로 잘 정리해서 그래서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거다 가르켜 주고 그 다음에 목회의 유익이 뭐냐면은 훤히 보는 거야.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보는 사람이야. 당신 그렇게 살면 안된다. 틀렸다, 이거는. 그럼 맞는 것이 뭐냐? 내가 가는 것, 이것이 맞는 것이다. 그것을 설교하고 그거를 설교만 해가지고는 모자라니까 그것을 똑바로 걸어갈 수 있도록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다양한 목회의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가지고 그 일들을 수행해 나가는데 궁극적인 목표는 4가지로 집약이 된다. 그 4가지가 뭐냐면은 성경을 주신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죠. 첫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에 이르게 하고 두 번째는 뭐냐면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게끔 그렇게 하면서 가서 그 사람을 자기와 같이 그런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거요. 그래서 나는 목회 철학이 뭐냐고 물어보면 나는 항상 서슴없이 얘기해요. "I have no" 나는 없다. 나는 그런 것 없고, 교회 개척한지 여태까지 12년 되었는데 한번도 금년도 목표 정해 본적이 없어요. 그런 것 없다 이거요.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나? 금년 목표, 내년 목표. 이게 무슨 경제개발 5개년 계획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필요가 있나? 그런 최고의 가치를 찾아가는 거요. 그래 가는데 혼자 가는 거면은 아무 것도 아닌데 이게 교인들이 자꾸 달라 붙잖아. 그 중에는 신실하게 잘 따라오는 사람도 있고 중간에 마음이 변해 고무신 거꾸로 신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은 가짜 회심자도 있고 엉터리도 있단 말이예요. 사기꾼도 있고. 별의별 사람들이 다 달라붙는다 이거죠. 그니까 하나의 커다란 조직이 되는 거요. 한번만 모이고 안 보는 것 같으면 공터에 모아놓고 다 흩어지고 다른 곳에 가서 모아서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거는 이게 아니라 그니까 뭐냐면은 조직도 필요해요. 어느정도 필요하죠. 그니까 이게 아주 사람의 피를 말리는 거야. 이 작업이요. 조직도 해야 되죠, 경영도 해야 되요. 왜 돈하고 노동력 하고 산출하는데 목표만 신령할 뿐이지 운영되는 방식은 일반적인 단체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이예요. 일반 은총적 차원에서. 그런 것들이 다 따라오게 되는 거죠. 그런 것들을 힘닿는 데까지 그 정신에 맞게끔 타협하지 말고 그 정신에 부합하게끔 정도는 하고 이렇게 해서 그냥 하나님이, 모두 다 조용기 목사님이겠어요? 모두 다 하용조 목사님이겠어요? 제자훈련을 하면 모두다 옥목사님이 되겠어요? 주신 것만큼 그냥 하다가 죽는 거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 하던 것, 무슨 타협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 대한 답이 되었으리라 봐요. 그 원리에 의해서 다 따라가는 거요. 그러니까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고 가는 거요. 근데 문제는 뭐냐면은 목회의 결과가 잘 되어야겠다, 그리고 눈에 성과가 들어나야 되겠다, 이러게 집착을 하게 되면 그러고 자기는 그렇게 예수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러면 여기서 다 분리현상이 생겨나게 되는 거요. 사랑하지 않는 예수를 사랑하라고 전해야 되요. 그리고 자기는 열심히 목회를 하는데 진짜로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못해요. 그럼 어떻게 되냐면은 목회가 다 끝나고 마지막 말년이 여태까지는 일이 있어서 보람을 느꼈는데 확 빠져나가는 거요. 탈진감이 확 밀려오는 거요. 그건 아니잖아요. 주님이 목회가 다 끝날 때, 그때에 내가 주장하는 것은 그거요. 위임식 할 때 내가 그 얘기를 하는데, 목회가 다 끝났을 때 내가 간절히 비는 소망이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내 자신을 향해서고 하나는 교인들을 향해서요. 먼저 교인들을 향한 소망은, 내가 은퇴할 때 쯤 되면은 열린교회에서 31년을 목회하게 되더라구요. 만약에 여기서 정년을 하게 된다면은. 31년을 설교를 했으면은 대개 설교가 어느 정도 된다고 보면 되냐면은 7000편 쯤 된다고 보면 되요. 한 7500편 정도. 그렇게 7500편을 설교를 해서 31년을 설교를 들은 사람이 그 마지막 은퇴하는 날 주일날 올라가서 본문을 읽었는데 무슨 설교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깊이의 면에서. 두 번째 소원은 뭐냐면은 그 은퇴하고 열린교회를 등지고 이 사람은 그 날이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성화된 날, 주님과의 합일이 최고점에 달한 날, 끊임없이 끊임없이 진전해서 주님을 향한 까리따스, 이 지순한 사랑이 내 안에 가장 가득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후의 날은, 이후의 은퇴하고 마지막 죽는 날까지 그 지점 이하로 내려오지 않는 생애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죽는 그 순간이 생애에서 가장 성화된 날, 주님이 영혼을 받으실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게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 들리워 질 수 있는 그런 --- 것이 소망이요. 나머지는 다 사소한 거요. 큰 교회냐, 작은 교회냐.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 그런 얘기는 기사에는 쓸 필요는 없지만은, 개인적으로는 off recode라고 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도 내가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가 이만큼 되었으니까 기득권이 있지 않겠어요? 나는 싫어요. 나는 지금도 교인이 허락하면 다시 개척하고 싶어요. 나는 하나님만 허락을 하면 10분도 망설이지 않겠어요. 왜? 이 세상에는 곤고한 영혼들이 너무 많아요. 그리고 진리가 외쳐져도 쳐다도 안 볼 영혼도 않고 돌맹이 들 영혼도 많지만은 진리가 들려지기만 하면은 참회할 영혼도 많아요. 오죽 했으면 난 기도한 적도 있어요. 하나님 이 지점에서 놓고 한번 다시 한번만, 너무 그렇게 좋은 동네도 말고, --- 지하실에 돈은 보태주는 사람은 없지만 통장을 털어서라도, 조그마한 한 100여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곳, 그렇게 한번만 더 그 영혼들과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얼굴도 모르고 그게 -----.
목사님 말씀 들으니까 이렇게 떠오르는 목회자가 있는데요, 그 최춘선 할아버지라고 혹시 그 영상 보셨습니까? 영상에 있던 그 할아버지 ----목사님께서---- 목사님 일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오히려 차라리 그냥 이렇게 설교를 해서 보여주고 싶으면 보여주고 이런 것은 쉽겠는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목회자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그게 사실 따른다는 게 제가 깊이 은혜를 경험 못해서 그러는지 너무 무겁게 다가오거든요.
근데 잘못될 수도 있구요,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은 즐거움을 기대하면 안되요. 그러면은 반드시 이 세상에는 이런 표현을 사용---- 사랑하다가 라틴어로 ‘아마레’, ‘아마레 데움’하면 목적격을 쓴 거요. 그러면은 '하나님을 사랑한', ‘to love God’ 이렇게 되는 거요, 영어로 말하면은. ‘to love God’, ‘하나님을 사랑한’. 그런데 이것을 ‘아마레 데오’해서 탈격을 써요. 그러면은 의미가 전혀 달라져요.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거요. 무슨 뜻이냐면은 우리들이 교인들도 사랑해요. 양떼들도 사랑하고, 목회도 사랑하고 또 설교하기도 사랑하고. 그런 일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건 모두 ‘아마레 데오’여야 되요.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도 행할 수 있는 거요. 그러면은 그것은 하나님 사랑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요. 이것은 철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만은 어쨋튼 그것은 사적인 사랑이 되는 것이예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 그런데 이제 그런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들다고 얘기 했는데, 물론 힘들죠. 그러니까 아까 얘기했듯이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이고 아무나 들어서서는 갈 수가 없다 이거죠. 그래서 진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분말고는 아무것도 나에게는 가치가 없다 그렇게 해서 그 길을 가는 거죠.. 너무 힘들겠다 하는데 그것은 힘들겠다, 고통스럽다 하는 그 기준 자체가 판단의 기준을 이 땅에 있는 것에다 많이 두면 많이 잃어버려야 되는 거요. 그죠? 뭐 편안한 삶도 없고 매일 진리 앞에서 자기가 깨뜨려져서 박살이 나서 자기심판과 자기처벌의 고통을 당하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래요?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내 몸에 짊어진다. 우리의 몸에 짊어진다. 그게 무슨 뜻이예요? 예수님이 다음에 ---주셨는데 ---항상 십자가를 보면서 저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자기가 생각을 한다는 거야. 자기 안에 자유가 없다 이거야. 왜 그렇게 했느냐면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안에 있는 부패한 옛 자아가 계속 죽임을 당하는 거요. 그러면서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기쁨이 뭐냐, 그게 문제거든요. 기쁨이 뭐냐면은 진리를 소유하는 기쁨이예요. 인간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아름다움이 아니예요. 인간 존재가 아름다운 것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느냐가 그런 아름다움이 아니고, 얼마나 지위가 높으냐 그것도 아름다움이 아니고, 얼마나 젊으냐 그것도 아니예요. 얼마나 큰 교회냐 그런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예요.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목회자든지 교인이든지 다 똑 같아요.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예요.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우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나 소유, 그 다음에 사람들이 그를 인지해 주는 정도나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가 아름다울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의 정체가 뭐냐? 그게 perfection이야. 완전성. 그 완전성을 신학에서는 ‘전일성’이라고도 이야기 하거든. ‘integritas'라고 그러는데 영어로 'integrity'지. 그 칼빈이 자기의 기독교강요에서 ‘앙테그레떼’라고 이야기 했던 그 ‘integritas'예요. 그것을 ‘전일성’이라고 그래요. 전일성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은 ‘그것이 그것으로 꽉 찬 것’, 이게 물이잖아요. 물이 물로 꽉 찼을 때 그게 전일성으로 꽉 찬 물이야. 그게 가장 좋은 물이야. 여기에 물이 아닌 것이 들어가면 못 ---그렇죠? 그리고 영혼도 똑 같아요. 영혼의 아름다움은 완전성이고 완전성의 의미는 전일성이 꽉 찬 상태예요. 전일성으로 꽉 찼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은 영혼이 영혼 자체만으로 꽉 찼다는 거요. 그럼 영혼이 아닌 것이 뭐가 들어 들어와요? 부패가 들어오는 것이예요. 그것 때문에 아름다운 거요. 그러니까 사람마다 우리 넷이 이렇게 서 있지만 아름다움이 다 틀려요. 별의 밝기가 다 틀린 것처럼 영혼이 얼마나 순수한 전일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존재가 되기도 하고 아주 누추하고 추루한 존재가 되기도 하는 거요.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생각 안해. 아, 너 키 크구나. 학위를 했대매? 아버지가 총회장님이시라고? 아구, 이제 막 목사 안수 받았는데 청년교회에서 오라 그러네. 이런 것으로 인해서 이 사람이 막 부풀려 지는 거요. 그리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들은 다 인간의 욕망과 탐욕같은 것들이 진실을 볼 수 있는 눈들을 가리워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목회자가 그런 것에서 기쁨을 찾는다면 그는 이미 망가진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가 가는 길은 계속 구도의 길이여야 해요. 그는 피나도록 노력해도 예수를 보여줄 수가 없어요. 그러면 기쁨을 어디에서 찾아야 되냐 하면 오직 진리에서 찾아야 되요. ‘veritas’에서 찾아야 되요. 진리에서. 그러면 진리는 왜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 허위라는 것이 뭐요? 거짓이라는 것이 뭐냐 이거예요. 생각으로는 진실, ‘베룸?’을 찾아가요. 생각으로는 내가 진실한 길을 가고 싶어. 그런데 이 진실한 길을 가게 만드는 것은 생각이나 목표, 방향이 아냐. 이게 ‘베룸’, 진실한 길을 계속 가려면은 진리를 붙들고 가야돼. 진리를 붙든다는 의미는 그것과 함께 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거여. 그게 희랍어 동사 ‘에코’의 의미란 말이죠. 이렇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주었는데 상황에 따라서 놓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에코한 것이 아니예요. 주었는데 이것을 죽여도 안 놓은 거야. 살면 이것과 함께 살고 죽으면 이것과 함께 죽는 거요. 그게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야. 생각으로 진실, 베룸을 찾아가는 것은 희생이 아니야. 신학생들 보고 너 뭐가 되려고 하니? 아, 나는 사이비가 한번 되보고 싶다. 그걸 누가 믿냐 말예요. 진실한 목회자가 될래, 사이비가 될래 그러면 다 진실한 목회자가 되고 싶다고 그러지 누가 사이비가 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말예요. 그런데 실지로 가보면 다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안되잖아. 차이가 뭐냐면은 생각은 다 베룸을 찾아가.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을 그 진실하게 가게 만드는 것은 생각 속에 있는 베룸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베리타스를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거예요. 베룸을 찾아가는 일은 생각만 하면 되는데 베리타스를 붙드는 것은 뭐냐면은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임을 당해야 한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면은 비용이 들지 않는 베룸은 찾고, 거기에 끊임없이 자기를 합치하도록 베리타스는 안 붙잡는 거요. 거기에서 모든 허위와 가식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거두절미하고 요약해서 말하면 진실해져 가지 않는 사람이 how to preach the truth, 어떻게 진리를 설교를 하겠느냐 말이예요. 자기가 그걸 안 붙들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를 설교할 수 있느냐 말예요. About the truth는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truth itself는 설교할 수 없어요. 그건 무슨 얘기냐면은 사도 바울같이 얘기할 수 있는 거요.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그는 ‘my gospel'이라고 얘기했어요. 예수님의 복음이라고 감히 얘길 안했어요. 내 복음이라고 그랬어요. 근데 그것이 바울의 복음이예요? 바울 복음이 있다 그러면 그것은 또 우스운 거죠. 김순영 교수 논문 전체가 gospel of Jesus Christ가 어떻게 how to force gospel이 될 수 있었는지, 그 다루는 것 아니예요. 박사논문 자체가. 그렇게 진미를 가지고 자기화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요. 그러기 위해서 그 진리를 붙들고 가야되는 거요, 그래서 내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된다』라는 책이 나왔을 때 잡지사에서 와서 “설교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 한 사발의 피다. 한 사발의 피다.” 자기가 외치는 바를 따라 살려고, 진자 그렇게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는 별개의 문제고, 살려고 몸부림 친 설교자가 그것을 통한의 마음으로 토해내는 거요. 그게 설교다. 그렇게 하면서 가는 거요.
목사님의 말씀 들어서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전도사인데도 너무 뭐랄까 기성화 되고 있는 저의 모습인 것 같아서, 목사님께서 현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저희한테 오히려 더 도전인 것 같습니다. 강단에서 이런 말씀을 제가 들었다면 이렇게 까지 많이 와 닫지 않았을 텐데 현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으니까 더 도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렇게 꿈꾸어 오셨던 목회, 그리고 목회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했던 교회가 있었을 텐데 목사님께서 꿈꾸어 오셨던 교회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그리고 지금 되돌아보시면서 열린교회가 한국 교회에서는 질적 양적으로 엄청난 부흥이 진행되고 있는 교회로 기억되고 있는데요, 목사님 보시기에는 어떠신지, 아니면 지금 열린교회를 보시면서 아, 이것만은 내가 꿈꾸었던 비전과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나는 거의 의식한 적이 없구요. 관심도 없구요. 이렇게만 얘기하면 되요. 나는 사람이 되고 싶고, 내가 목회하는 교회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첫 번째 언급한 것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어요. 나는 참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이예요. 그리고 내가 목회하는 이 이유는 교회가 정말 교회였으면 좋겠다. 이것은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신학적으로 보면 어떻게 되냐면은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고 타락하고 구속하고 회복을 하죠. 근데 처음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에 사람이기를 바라시면서 사람을 만드셨어요. 하나님의 기대와 현실이 일치가 되었어요. 타락해요.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던 그 사람에게서 멀어진거죠. 구속을 해요. 구속을 하셨는데 구속을 했더니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그것이 구원이예요. 구속이예요. 그럼 이제 구속에서부터 완성에 갈 때까지는 그가 끊임없이 사람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냥 사람이 되어 갈 수는 없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이 참으로 사람이 되는 길이예요. 이렇게 하면서 이것이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다 통하게 되는 것이예요. 그 다음에 완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어요. 교회도 똑같이 보면은 그거죠. 처음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것이 교회예요. 그 자체가 교회예요. 가정인 동시에 동시에 교회예요. 근데 타락했어요. 그니까 원래 하나님이 꿈꾸셨던 교회가 아니야. 그래서 구속하신 거야. 참으로 교회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거야. 그래서 결국은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래서 그 교회를 엮으신 거요. 불완전하죠. 여러 가지 신학적인 바탕이 있지만 불완전하죠. 그것이 이제 그 다음에 온전해 가는 거죠. 계속해서.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은 개인적으로 성화되어 가면서 그러면서 그것이 그 교회적으로 이 교회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예요.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잖아요? 그죠? 연결이 되는데 이것은 완성을 통해서 나타날 모상이야. 그래서 마지막 심판 날에 모든 심판을 끝내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예수님이 머리 되신 것을 “리 카프탈라치오”의 교회라고 그래요. 그게 에베소서 1장 10절에 나오는 “아나 카펠레오”의 교회예요. “아나”는 “다시”이고 “카펠레오”는 “캅투스” "머리"예요. 다시 머리가 되시고 우리말 성경에는 충만이 되시고 뭐 이렇게 나오는데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 그러는데 충만이 아니라 다시 머리 되심이라. 오늘날 신학에서 총괄 갱신의 교리라고 잘 못 전해져 내려오는데 총괄 갱신의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머리 되시는 교리예요. 그때까지 교회는 다시 완성을 향해서 가는 거예요. 완전한 완성이라는 것이 어디 있겠어요? 힘을 다해서 지성과 모든 애성을 다 쏟아서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의 마음으로 이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 여기고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자기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그 교회를 참 교회가 되어 가기를, 자기가 제뉴인 크리스천이 되어가기를 애쓰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죽는 거죠.
대게 소승불교 대승불교로 이야기 하면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교회관은 소승불교 쪽에 가깝다고 생각이 드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것을 기독교 신앙에서 나눈다는 것 자체가 아주 넌센스이죠. 무슨 문제이냐면은 오늘날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라고 보거든요. 그게 뭐냐면은 기본적으로 사고 자체를 근원부터 사고를 안해. 허리부터 사고를 하거든요. 자, 세상이 지금 개판이 아니냐? -- 들고 뛰어 나가자. 그리고 허리부터 나가는 거야. 뛰어 나갈 수도 있고 안뛰어 나갈 수도 있고 뭐라도 할 수 있어요. 종교개혁 자체도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하니까. 그렇지만 근원부터 사고를 해야되잖아요. 근데 근원부터 사고를 안하고 끊임없이 이 교회에 대한 생각이 현실 적응적이라 이거죠. 그렇게 하면서 움직이는 거요. 이렇게 되니까 결국은 어떻게 되냐면은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면 그것이 신앙이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근데 그것이 정말 옳은 방법인가 생각을 해보란 말이죠. 원래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사상을 그 사람에게 전해주어서 그 사람을 기독교 철학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예요. 오늘날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예요.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좀 진단해 주시고요, 이에 대한 어떤 대안을 말씀해 주시죠.
나는 근본적으로 한국사회를 일반은총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고 일반 사회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고 선교차원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잖아요, 그죠? 일반 사회상황에서 본다면은 나는 한국을 비관론으로 보지 않습니다. 발전하고 있다, 제 생각은 그래요. 근데 너무 비합리적이고 부정직하고 정이 많은 민족이기 때문에 대의적이고 정의적이야. ‘정의’라고 하는 것이 ‘justice'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 느끼는 정(情), 정의적이라는 거죠. 이런 것이 한국 사회에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된다고 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리기는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희망을 갖는데, 나는 태어나서 한번도 다른 나라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든지, 아니면 다른 나라에 가서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든지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럴 정도로 나는 한국이 좋고 이 민족을 사랑해요. 그리고 발전할 거라고 보고, 이번에도 뭐 2018년까지 한마음--- 있다고 하는 잘되기를 바래요. 그런 점에서 나는 한국사회가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을 해요. 아마 20년 후에는 우리의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사회가 발전해 있고 성숙해져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어요. 근데 선교적인 측면에서 나는 전망을 어둡게 봐요. 왜냐면은 지금 구라파의 선교의 역사를 보면은 사람들이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종교적인 무관심의 현상이 생겨나기 시작해요. 그런데 그 지점이 대게 그 사람들은 만오천에서 2만불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는 나라니까 사실은 3만불 정도의 수준이라고 봐야 하죠. 과연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정도의 교회수준, 그 다음에 우리들이 그 세대를 거스리도록 작용하고 있는 어떤 방어기제들이 그런 세계 역사의 일반적인 흐름을 거스리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나는 비난적이예요.
한국 교회에 대해서는 비관적으로 보십니까?
비관적이라기보다도 다들 열심히 하는데, 한국교회가 다음 상황이 되면 또 다음 상황에 적응하는 새로운 모델들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봐요. 근데 나는 자꾸 시대가 바꾸어지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바인데,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그 시대를 불변하게 흘러야 할 이러한 기본적인 정신,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힘, 이런 것들이 현저하게 뒷심이 떨어진다 이거죠. 최근에 내가 미국을 갔다 왔는데 거시서 설교를 했는데 그 교인 중 하나가 한 3~40년 전에 미국을 건너간 사람인데 내 얘기를 듣더니 그러더라구요. 제가 40년 전에 고신파에 있을 때 처녀 때 들었던 설교라고. 그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은 어떤 사회가 변한다는 것은 강조가 되고 있는데 텍스트는 불변하다라고 하는 것, 언제든지 하나님은 이 역사를 뒤집을 때 이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뒤집으셨다라고 하는 이런 것들에 대한 확신이 현저히 떨어지는 거죠.
그것이 어떻게 보면 지금 한국 교회의 어떤 문제로 지적...
핵심이죠. 핵심입니다. 뚜렷한 회심을 하지 않은 사람이 신학교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복음과 화해를 안했어요. 복음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들어오게 되고 그 다음에 복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정신, 이런 것들이 결국은 소명의 깊이와 비례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 있어서 현저히 떨어지게 되는 거죠.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은 내가 목사 안수 받을 때인데, 한 20년 전에 안수를 받았어요. 안수 위원들이 쭈욱 있잖아요? 완전히 도때기 시장이야. 뭐 봉투 들고 온 사람, 사진 찍으러 온 사람, 꽃다발 들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 생 난리예요. 광대상까지 사진 찍으러 온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요. 근데 내 옆에 있는 목사님이 그 기도를 해 주시는데, 자기가 안수 해 주는 사람이 한 두 사람 있어서, 등을 손으로 뻥뻥 때리는 거야. 야, 이 사람들아 울어라.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아냐? 십자가 지고 죽으러 가는 날이다. 너는 눈물도 안나냐? 눈물도 안나? 그니까 지금 앞서간 세대들이 염려하는 것 중 하나가 뭐냐면은 자기들도 부족했고 더군다나 학문적인 면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뒤졌잖아요. 그래도 자기들은 산기도 찾아 다니고 ---품으면서 사생결단이란 것을 몇 번씩 해보면서 목회를 했다 이거죠. 근데 그런 정신이 그 당시에는 일반화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거예요. 그게 물질적인 번영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거죠. 그 당시에는 신학교 간다 하면은 어쨋튼지 간에 환경 자체가 모든 것을 버리도록 요구를 했습니다. 우선 굶잖아요. 우선 굶어야 되잖아요. 우리 신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요. 내가 신학교 다닐 때 제일 부러운 것이 사발면에다 김밥 같이 먹는 얘들이었어요. 몇 번 못 먹었어요. 지금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물론 없진 않지만은 소득이라는 것이 높아지면서 교회안에도 이렇게 달라지잖아요. 그래서 목회자로 걸어가는 길에 어떤 세상적인 이익이 거의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은 진짜 소명을 받은 사람인가, 아닌 사람인가 하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거요. 그래서 누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60년대에는 여자 대학교에서 앙케이트를 조사했더니 목사 부인한테 가겠다는 것이 이발사 밑이었대요. 그니까는 결국은 그런 이치가 되는 거죠.
리더들한테 어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충고를 하신다면...
그냥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리더는 특별한 사람으로 태어날 필요는 없어요. 근데 남들처럼 똑 같이 산 사람 중에는 그런 리더가 된 사람이 없어요. 틀리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 소수야. 배우겠다고 오는데 배워지나. 자기가 살아야지. 진짜 필요한 것은 가르쳐 줄 수가 없어요. 화가가 제자에게 다 가르쳐 주었거든 . 그림 그리는 법을 다 가르쳐 주었거든. 마지막으로 못 가르쳐 준 것이 있어. 화룡정점. 용의 눈동자를 어떻게 찍어야 하는가 이거는 못 가르쳐 준다는 것이죠. 못 가르친다는 것을 이해하겠죠? 그것은 못 가르쳐 줘요. 가르쳐 주어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마지막에는 자기가 외로운 구도의 벌판에서 자기가 깨달아야 해요. 무당이 셋이 있어요. 레벨이. 맨 밑이 세습 무당이예요. 아버지가 무당이기 때문에 대를 이어서 무당이 된 사람이예요. 두 번 째는 학습무당이예요. 자기가 최초로 개척해서 공부를 해서 무당이 된 사람이예요. 마지막에 세 번째는 강심무당이예요. 이 강심무당은 자기는 무당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신이 내린 거예요. 그래서 사로잡혀 할 수 없이 무당이 된 사람이예요. 요것만 무당이고 나머지는 선무당이예요. 사람을 잡는 것은 이 두 무당이 잡는 것이예요.
-----산으로 올라가야 되겠네요.
그게 아니고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진리를 열외하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 진리를 목마르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되요. 내가 진리를 알고 그 진리의 빛 아래에서 단 열흘을 거지처럼 사는 것을 진리를 모르는 채 백년을 황제처럼 사는 것 보다 더 좋아하는 것, 이것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될 덕목이예요. 그니까 진리에 대한 사랑이예요. 살아가는 방법자체가 아주 현실적이예요.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유명한 이야기를 해요.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하고 명상함으로써가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된다. 그렇게 살아가야 되요.
귀한 시간 저희가 너무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저희들한테 이 길을 가는데 큰 도전이 될 수 잇을 것 같습니다.
어쟀튼 나는 기본적으로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는가』에서 다 이야기 했다고 생각을 하고 『설교자는 불꽃처럼 살아야 된다』에서 설교자의 삶에 대해서 다 이야기 했다고 봐요.
아까 해명대사께서 다 정리를 해서 보니까 궁금한 것이 있는데 기본적인 순수성을 배제하고 약간 목사님께서 얘기하셨던 것처럼 진리를 붙잡고 같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을 따라서 준비하는 학생이 많지 않고 조건이나 여러 가지 이렇게 만들어가는 그런 것들을 많이 보거든요. 그런 분들의 목회는 어떻게 평가를 해야 되고 그런 분들의 목회가, 중간에 포기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계속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고, 정치나 여러 가지, 그런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지금 교회처럼 되겠죠. 어렵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어요.
그런 사람의 목회는 목회가 아니겠죠? 저도 그런 부류 중의 한 사람이었고 제가 포기하지 못한 부분들이 아직 많아서 저 나름대로 고민도 많이 하고...
그러니까 교회가 서겠죠. 서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적거나 아니면 방해가 되겠죠.
그런데 그런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형제만이라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죠. 그것이 최선의 길이예요. 지금 그 많은 사람을 형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형제 하나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필요를 아주 강력하게 느껴야 해요.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그런 물줄기들을 돌려 놓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 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면은 어느 교회나 목회자를 보면서 아하 저것 이었구나. 저것이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구불변한 그리스도의 정신 위에 서 있는 교회와 목회자의 표상이었구나. 그것을 우리들이 거의 못 본채로 살아온, 그것이 없는 것이예요. 그것이 몇 개만 생겨나면 그 뒤를 계속 따라가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예요.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예요.
그런 분들 때문에 한국교회의 전망이 많이 밝지 않은 가요? 목사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문제는 기회니까 어떻게 해야겠어요? 자기 자신이라도 몸부림치면서 어떻게 하든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몸부림치면서 사는 거지. 모두가 듣겠어요?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힘을 다해서 외치듯이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거지.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영적인 싸움이죠. 교회 역사를 보면은 참된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 부흥의 불을 끄는 사람이 세상의 핍박 받는 사람이 끄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껏어요. 교회에서 물 부어서 교회에서 끈다고. 자기들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난다고. 너무나 틀리니까. 어느 교인이 그래요. 자기는 현실적으로 죄를 안 짓고 살수는 없는데 어디까지 지고 어디까지 어떻게 해야 되나. 그래서 목사님께 물어보니까 목사님이 그러시더래요. 어떻게 세상에 살면서 죄를 안 짓고 살겠냐? 그렇지만 해변에서 얘들이 물놀이 할 때 고무풍선 밖에 안 넘어가면 호루라기를 불어서 구조할 수 있듯이 너무 많이 짓지 않으면 된다, 그러시더래요. 그러니까 정리가 잘 안되어 있는 거죠. 공부를 좀 더 많이 해야 되요. 우선 공부만 많이 해도 너무 엉터리처럼 하지는 않거든.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이론적인 토대를 들으면 자기가 100% 다 동의는 안하더라도 자기가 주관적으로 아무렇게나 하지는 못하죠.
신학적으로 틀이 없이 스킬 같은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것은 너무 비철학적이예요. 그래서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답을 못해주고 다 끊어진 상태에서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만 탑을 쌓아가는 거죠. 이성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90분용 테잎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