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목회자의 고난과 자기죽음
녹취자 : 김세나
[선별 질문]
질문1) 오래 참음과 자비와 긍휼은 사랑의 세 가지 국면을 나타낸다고 하시면서, “오래 참음”이 “사랑의 크기”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래 참음이 사랑의 크기라는 데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2) 성경 고린도후서 12장 12절을 읽어 보십시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무슨 뜻입니까? 고린도교인들이 사도직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 무슨 사도인가?’ 그랬는데, 자기가 사도인 증거가 있다고 하면서 말한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모든 참음, 두 번째는 표적, 세 번째 기사, 네 번째 능력을 행한 것이라 나옵니다. 능력을 행한 것은 알다시피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고친다든지, 초자연적인 역사를 한 것입니다. 다음 표적. 기사 앞에 표적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기사와 표적, 두 개가 항상 같이 나타나는데 신학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하면, 기사는 사람들의 감각적으로 본 측면이고, 표적은 의미입니다. ‘세메이온’이라고 하는데, 의미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어떤 기적을 행하였을 때, 예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는데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면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을 의미적인 측면에서 관찰한 것은 표적이고,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 눈에 보기에 기적적으로 보인 것은 기사입니다. 그래서 표적과 기사가 항상 성경에 보면 거의 똑같이 두 단어가 같이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 요약해 보면 표적, 기사, 마지막에 능력 행한 것, 이 세 가지는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제일 앞에 이야기하는 것이 ‘모든 참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19절을 보겠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9) 사도바울이 아마도 자기 생각에 거기에서 죽을 것이라 생각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해서 밀레도, 밀레토스라고 하는 곳인데 철학자 탈레스의 고향으로 물이 많은 곳입니다. 거기에 불러서 유언과 같은 설교를 남기는 중에 자기 3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아시아에서 한 사역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때에 자신이 어떠한 태도로 일했는가 회상하는 가운데, 첫 번째 등장하는 것이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같은 것을 보여줍니다. 눈물이라고 하는 것도 얼마나 오래 참았는가 보여주며 겸손도 그러합니다.
그러면 왜 ‘오래 참음’이 사랑의 크기인가 말씀드리면 이러한 것입니다. 사랑을 뭐라고 정의를 하였습니까? 지연 전도사, 사랑을 뭐라고 말합니까?
(이지연 전도사님: 좋아하는 것입니다.)
물론 좋아하는 것인데, 좋아하는 것은 현상적인 것이고 형이상학적인 설명이 무엇입니까?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어떤 한 사물에 고착하여 끊임없이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경향,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없는 관계는 맺고자 하고, 있는 관계는 더욱 심화시키고자 하는 좋아함의 성향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는 것은 결국 어떤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참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것이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 할 때, 그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하고 싶고 심화시키고 싶기 때문에 참지 않으면 관계가 깨지니까 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 하나님 때문에 참습니다. 내가 이것을 참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여기에서 참지 못하고 이것을 그르칠 때 그 때에 하나님은 변함없이 거기에 계시지만, 내가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훼손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다들 집중해서 회의를 하고 있는데 여러분 중 한 사람이 나한테 신경질을 확 내고 나가면, 그럴 리도 없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다시 생전 보지 말자고 하지는 않겠지만,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대한 상처를 입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남한테 뭔가 이야기를 할 때, ‘그것으로 너와의 관계를 끝장내자.’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부부간에 관계에서도 오늘 말다툼을 했다고 해서 완전히 헤어지는 것입니까? 이혼하려고 마지막 통보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한데도 끊임없이 자기가 참지 못할 때 관계를 손상 시킵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뭐 그러면 어때. 안 보지.’하는 사람은 사랑이 적거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큰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사랑이 많은 사람은 약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최고의 약자이셨습니다. 결국 사랑의 크기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2) 육체의 혈기는 버려야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향한 거룩한 분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말씀에 불순종하며 악의적으로 공동체를 아프게 하는 지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마음에 생기는 분노가 거룩한 분노인지 혈기인지 어떻게 구분 할 수 있을까요?
답변2)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성질나는 모든 것을 거룩한 분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어느 하나가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 상대방의 결점 하나를 보면서 자신의 모든 끓어오르는 분노를 정당화해 버리고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그렇게 잘못하였기 때문에 자기는 어떠한 분노를 쏟아붓고 폭언을 퍼붓고 심지어 더 열렬하게 악의적으로 분노를 낸다고 할지라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정당하냐, 정당하지 않으냐, 다른 사람들의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러한 분노를 혈기로 쏟아내고 나면 기도의 은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불순종하며 악의적으로 공동체를 아프게 하는 지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인간성 자체가 굽어서 그렇게밖에 못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어?”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했는데 인간 이해가 너무 좁았다고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 중에서도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안 하거나, 방법이 잘못되어서 못하는 경우가 있고, 아니면 죽을 때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로서 애정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내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가면서 배워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우리 아들, 김영래 목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나라의 교육에 너무 안 맞았습니다. 끝까지 공부를 못 하고 내가 공부를 싫어하였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는데, 지금 내가 공부를 좋아하고 공부를 열심히, 잘하고 있기 때문에 교육이 너무 안 맞았습니다.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우리 아들이 저렇게 행복하게 공부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거의 안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 잠깐 너무너무 잘해서 정말 수재인 줄 알았습니다. 수재가 아니라, 물난리 수재. 지금 저렇게 행복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기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뭐냐 하면 시스템이 너무 안 많았던 것입니다. 나는 늘 이야기하지만, 12년 동안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야간 신학교 가니까 행복하던 때가 조금 있었고, Mdv 신대원에서 더 그랬고, Thm.때 더 그러했습니다. 학교 교육 다 끝나고 나 혼자 공부하니까 너무 행복하였습니다. 아내가 공부 좀 하지 말라고 계속 말리는데, 마치 자매들이 다이어트 하기 위해서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맛있는 간식을 못 끊듯이 나에게도 공부가 그러했습니다. 그렇듯 사람이 생긴 게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애들이 공부를 대개 못합니다. 그러면 공부를 못 한다는 것에만 부모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안 되는 애들은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보고 무슨 도저히 할 수 없는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것을 해 보라고 하면 못 한다고 하든지 사고가 나서 큰 변이 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애들은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서 공부만 잘해야만 잘 사는가? 얼마든지 이 세상에는 그가 잘 할 수 있는 어디엔가 있습니다. 그것을 애정을 가지고 찾아주는 것이 곧 부모의 할 일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못해도 자꾸 괜찮다고 타일러야 합니다. 스트레스받고 싸우고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갑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성격이나 모든 것이 그렇게 태어났거나 혹은 그렇게 굽어져 갔기 때문에 그렇게 불순종하면서 악의적으로 공동체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밖에 못 삽니다. 하나님이 어마어마한 은혜로 그를 붙들어 줄 때는 잠시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잠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눈에는 악의적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어떤 의미에서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러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을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서 개인의 원한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회자의 자기 심성을 관리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기에서 두 번째 생각할 것은 저런 사람을 교회에 계속 해를 끼치게 놓아서는 안 됩니다. 감정이 없을 수 없겠지만,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사랑과 정의의 원칙에 의해서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줄을 그을 수 있는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으로 인해서 분노하면 안 됩니다.
수영로 교회 정필두 목사님, 그 목사님이 저를 참 좋아했습니다. 여러 번 불러서 그 교회에서 강의도 하고 제 책을 교인들에게 많이 읽히시고 그러셨는데,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기는 꼭 토요일에 힘들게 설교 준비하는데 교인이 전화가 와서 꼭 뒤집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목사님 아무개 그 장로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개 권사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미칠 뻔했습니다. 목사님을 막 씹습니다. 제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나는 평생 그런 전화 안 받아 봤는데, 이분은 토요일마다 왜 그렇게, 이게 막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터득한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 이름을 끌어안고 그 사람이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도한다고 합니다. 확실히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게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야지만 자신이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그래서 어쨌든 분노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거룩한 분노를 느끼는 적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예 없을 수는 없는데 아주 희귀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음 문제 하겠습니다.
질문3) 목회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 다름’이 신앙의 본질에 관련된 문제인지 그렇지 않은 문제인지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326p). 목사님께서 그러한 판단을 내리실 때에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3) 교회의 역사에 보면 라틴어는 잊어버렸는데, 이런 조항이 있습니다. ‘근본 조항’이라고 합니다. ‘fundamental article’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라틴어로 할 때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이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근본을 흔들어 놓는 기준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신앙의 본질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은 그것이 신앙의 본질과, 여기 이 문맥에서 뭘 이야기하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어쨌든 신앙에서는 근본적인 조항이 있고, 비근본적인 조항이 있습니다. ‘non-fundamental article’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조항은 무엇이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삼위일체라든지 그리스도의 속죄라든지 등등 조항들인데, 비근본적인 조항은 굉장히 폭이 넓습니다. 그래서 칼빈조차도 책을 읽어 보니까, 우리로 말하면 알미니우스 주장 같은 것들을 잘못되었다고 혹독하게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비근본조항으로 분류를 한 것입니다. 비근본조항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당연히 비근본적인 조항에도 성경과 가까운 것이 있고, 성경과 먼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견해를 분명히 해야 하는데 그 정도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형제라고 부르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형식인가, 침례의 형식인가, 유아세례를 주는가, 안 주는가, 장로를 세우는가, 아니면 감독을 세우는가. 그 다음에 구원론에 있어서 알미니우스 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칼빈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것들은 서로 다른 것에 동의는 할 수 없고, 설득은 안 되지만 형제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 신학대학교에 인연이 닿아서, 가까이 지내는 교수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를 좋아해서 자주 불러 줍니다. 벌써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거의 2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말씀을 전하고 심지어 부흥회도 하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 보기에 너무 이상한 것입니다. 칼빈주의 목사가 알미니우스 주의 학교에 가서 말씀 전하고, 거기에다가 장학금도 주고, 밥도 사주고. 그러한 것은 이상하게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더 많이, 얼마나 좋습니까. 신학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와서 봉사하고 섬긴다고 할 때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렇지 않겠나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기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다툼인데 그게 이제 신앙의 본질에 관한 문제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한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행정의 문제인지, 이것이 훼손되면 신앙의 문제가 훼손되는 것인지 그러한 것을 명확하게 해야지만 권위를 드러내되, 권위주의에 흐르는 위험을 막을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행정에 관한 문제라면 왜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가에 대해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만약에 그것이 자기가 설득될 수 없다면 설득당할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야 합니다. 저는 누구에게 설득당해서 내 의견을 내려놓게 될 때 기분이 좋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설득이 됨으로써 내가 업그레이드되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효율성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면 됩니다.
리더십에서 이제, 지난번에 여러분 중에 기억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릴백 총장이 와서 여기에 와서 리더십에 대해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파토스, 에토스, 로고스입니다. 그게 사실은 릴백 총장의 말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입니다. 웅변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파토스는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파도스, pathos. 이것은 열정입니다. 반드시 좋은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reasonable한 passion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passion without reason, 이성이 없는 열정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중립적인 이야기인데, 파도스가 이러한 것입니다.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어떨 때는 확 이렇게 해야 하겠다, 뭐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 이제 중요한 것이 에토스(ethos)는 ‘풍토’ 그런 뜻으로 해석됩니다. 공감입니다, 공감. 파도스(pahos)가 passion이라면, 에토스(ethos)는 empathy입니다. 파도스를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게 하고, 마지막에 로고스(logos)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로 정리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리더십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그렇게 양보하고 설득되고 토론하고, 자기의 의견을 설득할 수 있는 아주 날카로운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굵직한 논리, 날카로운 논리를 가지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렇게 해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악의를 가지고 끝까지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방법으로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4) 맹목적 비난과 악의적 모함을 받을 경우가 있을 때, 사랑으로 견뎌야 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 목회자를 향한 비난과 모함이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피해가 갈 경우에도 참고 견뎌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4)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저는 교회에도 법이 있고, 사회에도 법이 있고, 신앙에도 법이 있기 때문에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악의적으로 모함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것을 자기가 입증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변명을 해도 안 믿어 주는 경우도 나옵니다.
여러분, 혹시 그 얘기 기억하십니까?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목사님이 계시다가 상처를 하셔서 혼자 계시니까 어느 자매가 와서 빨래도 해 주고, 밥도 해 주고, 그렇게 해 놓고 가면 목사님이 먹으면서 버티면서 사셨는데, 어느 날 자매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매에게 “도대체 누구 애입니까?” 그랬더니 자매가 “목사님 애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강변을 하였는데 이미 벌써 기정사실로 되어서 교회에서도 내쫓기고 노회에서도 치리를 받아서 결국 목사도 면직되어서 쫓아냈는데, 너무 기가 막힌 것은 아이까지 안겨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아이를 데리고 저기 사북에 있는 탄광에 가서 탄광 일을 하며 그 아이를 키웠습니다. 5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이 자매가 나중에 부흥회 때 공적인 회개를 하게 되는데 목사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어느 집사의 아이였습니다. 그것을 뒤집어씌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목사님이 다시 돌아와서 돌아가실 때까지 성자처럼 대우를 받으면서 목회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것이 풀리는 경우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그 모함을 해소하지 못하고 죽기도 하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둘기 같은 순결함과 뱀 같은 지혜가 함께 필요한 것입니다.
당연히 목회자를 향한 비난과 모함이 목회자에게만 한정되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에도 당연히 피해가 갑니다. “전요셉 강도사가 잘 못 한다더라.” 다니면 당연히 소년부에 피해가 가지 않겠습니까? 개인에 관한 것은 오래 참음으로 잘 견디고, 그리고 모함을 받을 때 섣부르게 변명을 하고 하면서 결국 더 많은 교회의 문제들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있으니까 잘 분별해서 해야 하겠습니다. 그 정도까지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질문종합]
<1조 질문>
질문1)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한 ‘중생의 표’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1) 「돌이킴」책을 찾아보면 상세히 나옵니다.
질문2)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것과 오래 참음 사이의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것은 두려워서, 혹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자기는 하기 싫은데 그것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정신의 병이 됩니다. 오래 참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으로 그것을 소화해 내 것입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2조 질문>
질문1) 마르틴 루터는 기도(Oratio)와 묵상(Meditatio)과 시련(Tentatio)을 신학을 공부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소개하였는데, 목사님께서 지정하신 신학 공부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답변2) 저것은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이 있는데,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가 기도와 묵상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간다고 한 것, 그것을 신학 공부를 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내가 지정한 신학 공부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루터는 저렇게 이야기하였는데 나는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것은 그 당시의 문맥에서의 루터의 생각입니다. 마지막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기도와 묵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세시대 때부터 이미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해가는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 같은 전통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강영안 교수가 쓰신 「읽는다는 것」책이 아주 잘 되었습니다. 읽어 보십시오. 예전에 제가 렉치오 디비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너무 중세적인 전통 아닌가 비판하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강영안 교수님 책이 내 의견과 같은 방향에서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 들어가면 원고도 하나 있을 것입니다. 「신학적 성경읽기」도서관에도 자료가 아마 있을 것입니다. 내 책 전체에서 하는 것은 결국 지성으로 하나님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 다음에 그 지성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삶이 그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그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이 성장해간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질문2) 오래 참음과 자비와 긍휼은 사랑의 세 가지 국면을 나타낸다고 하시면서, “오래 참음”이 “사랑의 크기”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래 참음이 사랑의 크기라는 데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선별질문 1번에 답변되었음
<3조 질문>
질문1) 목회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 다름’이 신앙의 본질에 관련된 문제인지 그렇지 않은 문제인지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326p). 목사님께서 그러한 판단을 내리실 때에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선별질문 3번에 답변되었음
질문2) 육체의 혈기는 버려야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향한 거룩한 분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말씀에 불순종하며 악의적으로 공동체를 아프게 하는 지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마음에 생기는 분노가 거룩한 분노인지 혈기인지 어떻게 구분 할 수 있을까요?
선별질문 2번에 답변되었음
<4조 질문>
질문1) 최근 ‘손절’이란 단어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사용되곤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른 지체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고난을 피하고자 공동체 자체를 거부하는 모습들도 보게 됩니다. 그야말로 자기중심성에 매몰된 세대의 본성이 다시금 하나님께로 향하는 각성이 일어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답변1) 원래 ‘손절’이라는 단어는 산업 용어인데, ‘손’은 손해가 난다고 할 때의 손이고, ‘절’은 끊어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식 같은 것을 하다가 예를 들어서 만 원에 샀는데 이만 원쯤 오를 줄 알고 샀는데, 계속해서 떨어져 7천 원까지 떨어졌습니다. 더 기회를 보면서 반등할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계속 가지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3천 원 손해 보고 팔아서 더 이상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인가. 그것을 결정함에 있어서 ‘손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손절하면 7천 원에 팔아서 3천 원 손해 보고 손 털고 끝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재화나 용역을 공급하고, 더 이상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이미 손해를 본 것으로 인정하고 거래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을 손절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은 점점 사람과 함께 관계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힘든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사상들이 팽배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었다.” 점점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합니다. 사회적인 문제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누군가와 관계를 가지면서 사랑, 절제, 겸손, 희생, 양보, 이러한 것을 배워 가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고 손해나는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의 교육과도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그렇게 관계를 나무 가꾸듯이 가꾸면서 즐겁고 기쁨을 누려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하다 보면 인간관계를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특히 청년들 중에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 보면 10명 중 3명은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사람들과 일생 동안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뇌 구조나 마음의 구조가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아주 신앙이 훌륭한 남편을 만나서, 물론 신앙이 그렇게 훌륭한 남자가 거기로 장가를 갈지는 모르겠지만, 워낙 미모가 출중하다든지 하면 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만나서 끊임없이 누군가가 희생을 해 주면 관계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 앞으로 독신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블루오션입니다. 수요가 계속해서 늘어날 것입니다. 이미 통계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구는 주는데 세대수는 계속해서 늘어납니다. 그래서 공동체 자체를 거부하는 모습도 결국 그러한 것입니다.
저것에 대한 해결책은 저는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각자가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면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바로 그렇게 자기가 함께 하고 있는 공동체가 얼마나 소중한가,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가 어떻게 빛나는가,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동체를 떠나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 자체가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신앙생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혼자 그렇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가에 대해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간은 워낙 외로운 존재이니까, 굉장히 많은 외로움들을 느끼지 않습니까. 외로움은 어쨌든 의미 있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고서는 외로움이 없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인격적인 사물들과의 관계에서는 외로움을 잊을 수는 있지만, 해소될 수 없습니다. 해소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만 해소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외로운데, 외로우니까 나는 피리나 불어야겠다고 한다면 외로움을 달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외로워서 집이나 지어야겠다 하면,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대면하는 것이지, 사실은 그 외로움이 진정으로 해소될 수 있는 인격적인 결합 같은 것들은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자연인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 순순히 취재에 응하는 사람도 있지만 산속에 사는데 사람들이 취재한다고 하면 병 집어 던지고, 돌멩이 집어 던지고 오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취재진은 그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결국 취재에 성공합니다. 성공한 것만 나올 것입니다. 결국 모두 똑같습니다. 하루나 이틀, 심지어 삼일 그 사람을 추적하고 인터뷰하다가 보면 그 사람이 나중에는 마음을 열고, 그 쓰러져 가는 집에서 무엇인가 먹을 것을 내놓으면서 헤어지는 것을 굉장히 섭섭해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누군가를 심하게 미워하고 관계를 깨뜨리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그 관계를 너무 갖고 싶어 하는데 뜻대로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부정의 심리가 그 안에, 반대의 심리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모질게 대적하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진리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이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도바울도 그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하나님이 나를 충성되이 여겨…” 일꾼으로 삼으셨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외롭게 사는 것 보다 얼마나 행복한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loving people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역자들도 수없이 있다 보면, 기도도 꽤 하는 편입니다. 설교의 은사도 있고, 그리고 일도 꽤 잘하고, 뭔가 지식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loving people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끊임없이 논쟁을 만들고 부딪히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성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자기가 끊임없는 눈물과 자기 부정 속에서, 자기 부인 속에서 이 사람이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면 그는 loving people이 되어 갑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loving people이라고 하면 금방 가슴에 와 닿습니까? 가슴에 와 닿습니까? 사랑스러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중에서 한번 대 보십시오. 이해관계가 없어도 누구 생각하면 기분이 좋고 만나고 싶고, 그립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으로 남아야 합니다.
질문2) 맹목적 비난과 악의적 모함을 받을 경우가 있을 때, 사랑으로 견뎌야 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 목회자를 향한 비난과 모함이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피해가 갈 경우에도 참고 견뎌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선별질문 4번에 답변되었음
<5조 질문>
질문1) 최근 하나님을 위해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회의 길에서 때로는 비난을 견뎌야 하지만 그 전에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어떻게 조언 할 수 있을지 목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답변1) 보십시오. 목회를 한다는 것은 내가 전에도 이야기하였듯이 「자기깨어짐」이라는 책을 쓰면서 작가로서 커다란 방향 선회를 하였었는데, 제가 거기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은 다르게 이야기하지만, 저는 “설교는 나에게 영원한 이국의 언어이고, 목회는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다.” 목회하면서 왜 즐거움이 없고 보람이 없겠습니까. 한 번도 이 자리가 나에게 너무 자연스럽고 굉장히 많은 달란트를 가지고 있어도 나에게는 딱 맞춰진 자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늘 그렇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목회하고 싶든지 간에 여러분에게 딱 맞는 환경은 없습니다. 그런 데가 있다면 여러분들이 부패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상황이 딱 부패한 상황일 것입니다.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부패하거나, 여러분들이 필요가 없는 목회지 이거나 말입니다. 그래서 어디든지 가면 불편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옛날에 어느 비서가 나와 같이 있었는데, 와서 그랬습니다. “목사님, 우아하게 사시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사세요?” 그러는 것입니다. 백조가 물 위를 헤엄칩니다. 그러면 위를 보면 우아하게, 오리계통의 조류는 물을 바가지로 확 부어도 물이 구슬처럼 굴러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리는 물이 빠진 오리나 떠 있는 오리나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과장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떠 있습니다. 그런데 물밑에서는 발이 아프도록 움직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활동하였던 발레리나 강수진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발레를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한번 발을 보여주는데 인간의 발이 아니었습니다. 다 변형되고 망가졌습니다. 그 아름다운 동작을 연기하기 위해서 그 발이 혹사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나 ‘이 목회자는 내가 너무 좋기만 하고 행복하기만 하다.’고 하는 데는 없고, 혹시 그런 곳이 있으면 잠시 자기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금방 괴로운 날이 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다 잊혀지신 분들이지만 저의 은사이신데, 김인보 교수님이 1960년대 칼빈에서 구약공부를 하고 총신에서 강의를 하셨는데, 교수로 계시다가 성도교회 담임목사로 가셨습니다. 성도교회는 서울역 앞에 있는 꽤 오래된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가셔서 기록을 보니까 목사님이 그 교회에 가실 때 교인이 한 300명쯤 되었는데, 한 6년 계시는 동안 성도들이 한 900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막 소리치고 그러시는 스타일이 아니셨습니다. 천천히 성경을 손에 들고 그렇게 강의하시듯 설교하였는데 인품이 워낙 훌륭하셨습니다. 그분 별명이 자갈밭이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체구도 그렇게 크신 분이 아니었는데 항상 그렇게 온화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갈밭이 무슨 뜻인가 하면, 길가에 물을 대야에 확 부어버리면 금방 질척거리는 밭이 됩니다. 그런데 위에 자갈이 살짝 깔려 있습니다. 그곳에 물을 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금은 스며들겠지만 금방 그 물이 질척질척해서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없게 됩니다. 자갈을 1미터씩 넣어서 깔아 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밑에는 흙입니다. 물을 확 부으면 어떻게 됩니까? 모두 스며들어 가서 아무것도 안 남습니다. 그분이 직접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목회자의 마음은 자갈밭이어야 합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너무 기쁜 척하지 말고 슬픈 일이 있어도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깊이입니다.
아까 ‘오래 참음’에 대해 이야기하였듯이, 내가 하나님을 조금 사랑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조금 사랑합니다. 그러면 비난이나 어려움이라는 양동이의 물이 확 쏟아지면 금방 물이 질척거리며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없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목회하기 싫은 것입니다. 다른 데 가면 좋은 일이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거기 가면 쓰레기차를 피하였더니 똥차를 만난다고, 멧돼지 피하려다 사자 만난 격이고, 거기 가면 거기에 또 무거운 십자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자기가 인격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다 체화해낸 깊이가 바로 그 자갈밭의 깊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우나 괴로우나 즐거우나 기뻐도 너무 그렇게 기뻐하지 않고 슬퍼도 너무 슬퍼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을 이겨내 나가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사랑의 사람이 행하는 길입니다.
제가 종종 드는 비유 중 하나는 뷔페에 가면 무순이 나오는데, 생김새가 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꼭꼭 씹어 먹어 보면 무를 깎았을 때 맛보게 되는 아릿한 맛이 그대로 납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은 여러분들은 묘목이고 또 조금 더 자라신 분들도 있겠습니다. 결국 나무의 종류까지는 바꾸지 못합니다. 가시나무는 커도 가시나무입니다. 그리고 금강송은 작을 때도 금강송이고 커서도 금강송입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덜 자란 것과 잘못 자란 것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전도사 때, 부목사 때 저런 것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소화해 내면서 그것을 끊임없이 자신의 모든 고난을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는 자기 부족을 발견하는 기회로 활용한다면 여러분들은 이제 미숙하지만, 미숙한 금강송이고, 그러지 못하고 폭발하고 끊임없이 이리저리 목회지를 옮겨 다니고 보아 더 나은 환경을 찾아서 유리하고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이 가시나무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것을 정확하게 보셔서 그에게 갚을 대로 갚아 주십니다.
질문2) 미래에 소망을 두고 인내한다는 것은 고난이 지나간 미래에 관한 소망인 것인지 고난을 통해 성장할 미래에 관한 소망인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2) 미래에 소망을 두고 인내한다는 것은 현재가 곧 지나가는 것이고, 현재보다 더 놀라운 의미와 기쁨이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안에 고난을 통해 성장하게 될 자신의 미래의 모습에 대한 소망도 없을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성경이 미래에 소망을 둔다고 할 때 대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는 종말을 내다보고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바라보고 또한 지금 이렇게, 미래에 소망을 두고 인내하는 것 자체가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과의 미래에 대해서 무엇이 궁금하겠습니까. 사랑해서 소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갈 길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면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께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을 해 드리면서 살면 됩니다. 그러면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어디론가 가게 될 것이고, 거기는 가장 좋은 곳입니다. 그렇게 평생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여러분들은 눈물이 있는 기도생활을 해야 합니다. 고생을 많이 하는데 하나님 사랑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목회를 하면서 사람이 인간성이 망가지고 파괴가 됩니다. 아주 괴상한, 괴물과 같은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많은 어려움들을 눈물로 이겨내고 하나님 사랑으로 그것을 승화시켜 나갈 때, 그때 그 고난은 그를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다 사람이 봐도 압니다. 저 사람이 어떤 사람으로 앞으로 자라갈지 알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아주 하나님 앞에 단정한 생각을 품고 하나님 사랑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장하게 모든 괴로움과 슬픔과 아픔, 이러한 것들을 녹여내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사람과 소통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을 기뻐하면서 자기를 죽이면서 살아가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다 됐습니까? 수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