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드려야 할 제사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레7:15)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거제로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들이 어떻게 소비되어야 할지를 가르치는 규례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은 희생제물로써 하나씩 들어 올려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드려졌던 거제의 제물들은 제사장에게로 돌려졌습니다. 제사장은 그렇게 자신에게 돌려진 그 고기를 소비함에 있어서 바로 그날에 그것을 소비하여야 했습니다. 바쳐진 제물이 많을 때는 아마도 그 제물들을 본인들이 소비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과 나누었을 것입니다.
Ⅱ. 화목제의 본질
A. 하나님과의 평화
화목제의 본질이 바로 그것입니다. 화목제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하는 것은 시련과 고통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있습니다. 죄와 불순종의 완고한 고집이 하나님과 불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하나님께 스스로 돌아갈 능력은 없기 때문에 완고하고 굽어진 그 의지를 하나님이 새롭게 하여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어루만져주시기 전까지는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의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자신의 의지로 멀리 떠났던 인간들이 당신을 떠나서 고통 하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다시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품으로 부르실 때에는 먼저 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감화시키셔서 이 세상에서 자기가 탐닉하던 것들이 얼마나 부끄럽고 추한 것인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주님의 진리와 교회의 아름다운 제도들이 얼마나 복되고 신비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마음과 뜻을 돌이켜 좋으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금요일 날은 인천, 일산, 강화, 이렇게 아주 먼 곳에서 열린 교회를 나오고 있는 성도들을 함께 만나서 심방하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교회 가까이 편리한 곳에 사는 성도들은 은혜가 떨어져도 편리하니까 교회에 나오지만 그렇게 교회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인천, 영종도 이런데서 오는 교인들은 은혜가 떨어지고 신앙의 간증이 없으면 교회를 지속적으로 출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게 오시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도 참 특별합니다. 우리 모두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리고 각자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어느 성도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무지 속에서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열린 교회로 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진리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세계를 깨닫기 전까지 저는 방황했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는 가운데 이전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세계는 정말 아름답고 신기한 세계였습니다. 열린 교회는 신천지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신천지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B. 사람과의 평화
그렇게 새롭게 깨닫게 될 때에 인간은 사랑을 세상과 자기를 사랑하던 그 마음을 옮겨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충만하게 느끼게 되는 그 종교의 경험이 있을 때 그때에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사람과 평화를 누리며 살 놀라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사이에 평화가 깨뜨려지는 것은 모두 대부분 인간의 자기 사랑과 그리고 자기 이익에 대한 집착 때문에 평화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 간에도 누군가가 희생하는 사람이 가족들을 평화롭게 하려고 하기 위해서 자기를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이 한사람만 있어도 가정은 와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자할 때 그때 거기에는 매우 커다란 고통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약 60조개 정도의 세포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포는 3개월 정도만 되면 우리 몸의 세포는 모두 죽고 새로운 세포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뇌세포는 한번 죽으면 다시 생성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세포들은 죽으면 다시 살아나는 계속 죽고 살아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니 우리의 몸은 약 60조개의 작은 꼬마전구를 덩어리처럼 모아놓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깜박깜박 하면서 죽어가는 것이 있는가하면 다시 반짝반짝 하면서 태어나는 것이 있음으로써 생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래서 생명이라는 그 자체는 죽는 것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죽음과 생명은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거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그곳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보십시오. 아름답게 피어났던 풀꽃들이 모두 시들고 검불처럼 죽어갑니다. 그것은 바로 추운 겨울날에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양분을 보전하려고 잎사귀를 다 떨어뜨리는 나무와 풀의 작용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별은 어떻습니까? 별들은 폭발과 함께 생겨나는데 별들이 폭발과 함께 생겨나는 이유는 죽으면서 폭발하는 별들이 남겨놓은 별 먼지들이 그 에너지에 의해서 함께 모이면서 모인 것들이 물리적인 작용을 하면서 핵반응을 일으켜서 별들은 죽을 때도 폭발하면서 죽고 태어날 때도 폭발하면서 별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죽는 별이 없다면 다시 태어나는 별들이 없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의 몸을 생각해보십시오. 현대 과학으로도 밝혀지지 않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의 세포들이 죽는 것입니다. 이 세포들이 죽는 것은 괴사와 자살로 나뉩니다. 전문적으로 말하면 Necrosis의 죽음과 Apoptosis의 죽음입니다. 생물학적으로 Necrosis의 죽음은 세포가 수명을 다하거나 외부의 힘에 의해서 뭉개져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이해가 되는 자연적인 죽음입니다. 죽는데 또 하나의 죽음은 아직도 세포가 성성하게 살아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데 스스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죽는 과정을 통해서 ATPT라는 화학에너지를 발산하면 이것이 세포라는 공장을 돌리는 전기가 되어서 옆에 있는 세포가 그 에너지를 가지고 성장하고 분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의 몸에는 어떤 세포도 죽지않겠다고 주위의 양분을 빨아들이면서 죽음에 저항하는 세포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세포는 옆에 있는 세포가 살아남기 위해서 또 같은 성질을 물려받아 또 안 죽으려고 하고 또 안 죽으려고 하면서 세포의 덩어리가 되고 그것은 엄청난 양의 몸의 양분을 죽지 않고 존속하기 위해서 빨아들이는데 이것을 의학적으로 암 덩어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깨뜨려져 하나님과의 평화를 교회 속에 이루기 위해 스스로 죽으려는 사람들이 남아있으면 개념이 없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아주 불결한 행실로 교회에 손해를 끼쳐도 교회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아무도 죽지않겠다고 몸부림치고 이기심에 넘치게 될 때 급기야 교회는 암 덩어리로 변하게 되고 온갖 세속적인 분열과 파탄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있어서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쓰는 편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말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To die is to gain.’ 이라고 그랬습니다. 죽는 것이 곧 얻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죽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이고 잃어버리는 것인데 그것이 얻는 것이 된다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어느 부분은 죽는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 정신과 영혼의 또 다른 부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그것이 곧 유익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평화는 인간의 이기심과 죽지 않으려고 하는 이익에 대한 집착 때문에 깨뜨려지고 불화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과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는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평화는 사람 사이의 평화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자기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고 뉘우칠 때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자신에게는 없었던 하늘의 자원이 신앙을 통해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이제 그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고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평화 때문에 서로 화해하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고 하나님을 사랑해본 성도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경험입니다만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자기는 주님 없이 세상과 구별되게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잃어버린 세상과 영혼들 사이에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무엇을 내가 누리고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취한 어떤 것들을 내가 움켜쥠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나를 버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큰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주님이 주신 자원들을 그리스도와 이 땅에 있는 교회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흘려보내는 통로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고 그 사람들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우주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회귀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화목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들에게는 성도가 아닌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말할 수 없이 크신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접붙여져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을 이룹니다.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에게 부어졌고 그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신부에게 흘러들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신부의 한 몸을 이루는 한 지체들로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사랑의 성향을 갖게 되는데 이 사랑의 성향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올바르게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에 사람들을 참여하게 하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사랑은 끊임없이 좋은 관계를 맺고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행복을 전달해주고 싶어 하는 성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화목제는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입어 평화를 누리게 된 그 기쁨을 자신이 올린 제물을 제사장과 이웃들에게 주어 누리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그 놀라운 화목에서 오는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누리며 살게 해주는 것이 이 화목제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 죄인들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질 때 어떤 일들이 보이는 이 세상 속에 일어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Ⅲ. 화목제물로 바쳐진 고기
A. 그날로 먹음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화목제물로 바쳐진 고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날에 먹을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바쳐진 그 제물은 말리거나, 혹은 삶거나, 차갑게 보관하거나, 소금을 뿌려 부패를 방지하거나, 하는 형태로 저장함으로써 미래의 양식으로 쓸 수 없도록 하나님이 엄격하게 율법으로 규제하셨습니다. 그러면 많이 생겨나게 된 그 거제의 제물들을 제사장이 다 먹고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이웃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함께 그 제물을 즐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소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즐거워하고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제물을 들어 하나님 앞에 거제를 올린 사람은 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제물은 사랑하는 제사장과 이웃들에게 베풀어져서 그들이 그것들을 누리며 이익을 받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특별히 종교 개혁자들이 우리에게 물려주었던 아주 값지고 소중한 유산들을 왜곡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직 은혜의 교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모든 쓰레기 같은 인간의 공로로 능히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쳤던 중세의 거짓된 기독교의 타락한 가르침에 훌륭한 치료제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이 교리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이 커다란 존재론적인 격차, 타락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거룩함의 격차 때문에 인간이 자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죄인들의 마음을 돌이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줌으로써 자신의 모든 일체의 구원의 은덕이 사람이나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만 온 것임을 가르쳐줌으로 오직 그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훌륭한 타락한 교회의 양약이 되었던 교리를 매우 잘못된 방법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인간이 그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만을 의지해야한다는 뜻이지 구원받은 인간이 아무렇게나 살든지 모두 죄인일 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짐승처럼 살아가는 성도와 고결하게 살아가는 성도의 차이는 빛과 어두움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욕설과 찬송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사야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의는 모두 넝마와 같고’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쓰레기 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인간의 의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믿었지만 아직도 죄가 남아있으니 너희는 빛이-나마나 모두 똑같은 인간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오늘 우리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기독교가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감당해야하는 시대에 나는 이 말씀에 기초해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들의 가족과 이웃들이 이익을 누리고 있습니까? 거제의 제물들을 먹고 배불러하고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이 믿었기 때문에 여러분의 가족이 손해를 보거나 이웃들이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탈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부패와 추문들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엊그제 신학교를 방문했을 때 교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화제는 도가니라는 영화로 옮겨갔습니다. 그중의 한 교수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끔찍한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구원을 받았다는 것, 그들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들인지는 우리가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교회의 장로까지 된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다고 하니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히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고 난 다음에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자유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가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로 속박된 노예로서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 속박되기를 원하는 종이 된 자유인입니다. 그러면 삶의 아주 분명한 윤리적인 기준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누려야할 덕목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매주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직분을 맡고 존경을 받는다는 사람이 집에 가서 아내나 폭행하고 폭언이나 퍼붓고 쓰레기 같은 성질을 쏟아내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신에게 베풀어준 평화를 하나님에게 욕으로 갚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자신은 그것을 연약함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그것을 배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사실을 매 순간마다 엄숙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매 순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입은 사람이라고 자신에게 스스로 말해야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야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매순간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매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감당할 수 없는 구속의 은혜에 어울리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말아달라고 매순간 우리에게 밝은 지식의 빛과 뜨거운 사랑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하고 선한 의지를 우리에게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당신에게로 직접 부르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어두운 세상에 우리를 두시고자하는 소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살아있을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교회를 위해 자기를 버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주님이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거기에 나의 인생의 참된 보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누구에게나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이 땅에 서른 세 해 동안 사시면서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세상이나 아니면 이웃들을 바라보는 대신 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묵묵히 자신의 고난을 감당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이 어떻게 보이는 아들을 통해 나타났는지를 생각하며 묵상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능히 이길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의 은혜 소망 없이 살다가 고집대로 영 죽을 이 비참한 인생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십니다. 고난도 이기게 하시고 역경도 견디게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죽음을 향해 치닫는 목적이 없는 인생이었지만 이 모든 삶의 허무를 딛고 땅에 살아도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게 하셨고 유한한 이 세상에서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을 앙망하며 영원을 잇대어 사는 사람들로 우리를 재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날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이틀에 한 번도 너무 더디고 일주일에 한번은 위험합니다. 매순간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큰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피 묻은 십자가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가슴을 치며 ‘예수 큰 고난 나 때문에 당하셨도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우리의 거제를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것을 그리스도와 교회와 이웃에게 돌려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유익을 누리도록 희생할 수 있는 그런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성심으로 도웁시다. 나보다 더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서 나의 편함을 양보하고 그들의 고통에 참예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관계를 맺고 있고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은혜의 감격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는데 나 자신을 헌신하여야 된다는 소명에 불타야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받은바 그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아름다운 빛이요, 하나님의 커다란 축복인지를 그리스도와 교회와 이웃들안에 보여줄 것입니다.
B. 제물을 남기지 말 것
제물을 남기지 말도록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율법에 명시하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라는 부사를 붙이셨습니다. 티끌만큼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고 그것을 모두 소비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먹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이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서 굶주리고 허기진 사람이 없이 그 고기를 먹는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모두 베풀게 하셨습니다. 다음날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사장은 그 다음날에도 누군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이 그치지 않을 사실을 믿어야했습니다. 날마다 드려야할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그리고 글피는 또 다른 사람이 드릴지라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한사람이 드리는 이 감사의 제사는 성례전적으로 모든 공동체가 그 안에 함께 참예하며 드리는 제사이니 이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헌제의 감격을 누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헌제의 유익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며 복되고 행복한 은혜를 그들이 경험하여야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의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입니다. 입술로 전파하는 지식과 교리의 선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다 드려진 제물로 여기며 우리 자신을 이웃들이 먹고 그리스도께서 잡수시고 교회가 우리를 사용함으로써 충분히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성도들과 이웃들이 낙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허비하고 바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날마다 우리에게 이 구속의 은혜를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렇게 소망 없는 죄인이 감히 그리스도께서 뿌리신 핏길을 걸어 휘장을 지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의 많은 죄를 고백할 때 마치 기다리셨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만나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릴 때에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때문에 우리는 감격하고 그리고 우리 같은 죄인을 향한 그 큰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화목제물 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까지 미친 것을 확인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고 우리 같은 죄인을 용납해주신 은혜로 가득합니다. 그때 우리는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쁘고 좋을 때마다 우리는 입술을 깨물어야합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Ⅳ. 결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 큰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그것이 바로 나를 구원하셔서 새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 앞에 바쳐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물론이고 우리의 마음은 물론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와 생명까지 그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순간 그렇게 주님을 위해 흘리기를 거절하는 우리의 피와 그리스도를 위해 찢어지기 싫어하는 우리의 살과 더불어 싸우는 일들이 계속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가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매 예배시간마다 이미 주님이 베풀어주신 구속의 은혜 때문에 입을 다물 수 없는 감격이 우리의 마음에 해일처럼 밀려와야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주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나의 영광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랑하셔서 죽으셨던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고 이웃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치며 살아야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무신론에 대한 강한 확신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본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은 악하게 기독교를 비난하고 교회를 욕하고 언론들은 아주 집단적으로 기독교를 부도덕한 종교로 매도합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신문이나 어느 매체의 불매운동을 펼치거나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서 기독교의 권익을 신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런 치열한 비난을 받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복수는 손을 높이 들어 우리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충동하고 있는 불신앙과 죄는 미워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그들을 우리들을 비난한다는 이유 때문에 저주하고 그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복수의 감정을 갖는 것은 성령이 지극히 슬퍼하시는 일이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는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주리면 먹여야하고 그리고 그들이 고단하면 우리는 그들을 섬기고 상처받았으면 위로해야합니다. 말할 수 없는 온유함과 흔들리지 않는 인내로써 그들을 축복하고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추호도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고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로 나의 몸같이 사랑하며 복을 빌 때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우리를 비난하고 기독교와 하나님을 욕보이는 모든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인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우리는 비록 고난을 받지만 사랑을 통해 우리 안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이 세상이 많이 부패했어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여줄 수 있고 그것은 거칠게 살아가는 모든 배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별이 빛나는 것처럼 이 세상이 이렇게 개념이 없고 무법한 시대이기 때문에 이 어두움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기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유익을 그리스도와 그리고 고통 받는 교회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으나 학대받는 모든 가난한 이웃들이 누릴 수 있게끔 살아가는 것 그래서 우리의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남을 위해 내어주나 우리의 영혼은 주님을 더 충만히 누리게 되는 사람들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감사의 화목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