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I
1. 예배란 무엇인가 ① 1993.12.19 주일오후 1
2. 예배란 무엇인가 ② 1994.01.02 주일오후 11
3. 설교는 왜 듣는가 1993.12.26 주일오전 21
4. 찬양이란 무엇인가 1994.1.23 주일오후 38
5. 헌금이란 무엇인가 1993.12.26 주일오후 49
예배란 무엇인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3-24).
오늘은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앞에는 우리들이 잘 아는 바와같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꿨지만 지금도 자기의 남편이 아닌 소위 물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이 여인은 물을 길으러 나왔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대화가 시작되었던 여인입니다. 그렇게 쭉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주 비범하신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네 남편을 불러오라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여인이 이제껏 살아오면서 자기의 인생을 그토록 힘겹게 만들었고 그리고 인생의 알 수 없는 문제속에 둘러 쌓여서 이 여인도 역시 오전의 여인과 마찬가지로 소외당한 인생을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낮에 물을 길러오지 않는 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한낮의 시간을 이용해서 사람들과 마주침을 피해서 그래서 물을 길러 왔다가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와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받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네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넘쳐나는 하나님의 성령을 주셔서 목마른 영혼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바뀌어서 풍성한 샘물과 같은 영생을 누리며 살도록 그렇게 해주시겠다고 그럴때 여인은 그것을 날 주십시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막혔던 문제가 무엇이고 그리고 이 여인이 이러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참된 평화와 그리고 참된 영생수를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영생수를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앞에서 해결해야할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죄문제였습니다. 그런후에 예수님께서 여인과 함께 대화가 더 깊어지셨습니다. 그러다가 여인이 가만히 예수를 보니까 보통사람이 아니예요.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 같습니다. 선지자라면 내게 말을 좀 해 주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 유대인들의 말은 예루살렘에서만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어느것이 맞습니까? 이 얘기 였습니다.
사마리아는 여러분 알다시피 헬라나라가 쳐들어왔고 헬라나라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죠. 그래서 그 지방에는 말하자면 튀기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일사각오로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하는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국제화 정책에 밀려서 이방인들과 결혼을 하고 그래서 신앙이 다 혼탁해 졌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상종도 안했죠. 변절한 유대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릴수 없으니까 자기네들 끼리 형식을 만들고 성경도 자기네들끼리 만들어서 그래서 자기들이 정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그러면서 예루살렘에서는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쓸데없다라고 말하고 이들은 우리가 이 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옳다라고 말하면서 각각 자기들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거죠.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예배의 두 요소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오늘은 이 두 요소를 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들이 신령과 진정이라는 것이 무슨뜻이냐 번역이 정확하지 않은데 성령과 진리예요. 원문에는 그러니까 쉽게 번역한다면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할때가 오나니 곧 이때가 그때라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러면서 영과 진리, 그리심산이냐 예루살렘이냐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된다는 얘기예요. 구약에는 문제가 됐는데 그리스도인 자신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런 장소가 문제가 안된다는 거예요. 문제가 되는 것은 빈들이나 산이나 초막이나 어느곳에서든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모여서 세워진 그곳에서 하나님앞에 더 중요한 요소는 이제는 예루살렘이냐 그리심산이냐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진리와 성령이라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드리는 것만이 참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우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할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즉 다시 말씀드려서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할때가 온다. 예전에는 영과 진리안에서 참된 예배를 드릴수가 없었다는거죠. 왜그래요? 이렇게 사람들속에 참된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오해가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자기네들은 하나님앞에서 예배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 참된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오늘 말씀하신 것은 뭐냐하면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러니까 무슨애기예요? 이렇게가 아니면 안된다 이거예요. 이렇게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찾으시지 않는다는 거예여.매우중요한 이야기입니다.그러면 이렇게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의 첫 번째 순서에 뭐가오고 마지막에 뭐가오고 그런 이렇게가 아닙니다. 어떻게 진리와 영안에서 드려지는 예배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앞에 드려지는 참된 예배 그런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시면 사람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겠죠? 다시 말씀드리면 영과 진리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배는 결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죽으신 그것을 기념하는 장래의 애도나 아니면 기일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또 예배는 하나님앞에 주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단순히 표현하는 형식이 아닌것입니다. 예배는 무엇입니까? 예배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이해할수 있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구약의 제사를 이해하면 되요. 구약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집에서 길른 짐승을 매고 예루살렘성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짐승이 자기의 죄를 지고 손을 얹고 기도할때에 자기의 죄가 짐승에게로 옮아가고 그리고 그 성전에서 그 양이 혹은 소가 죽임을 당해요. 처참하게 피흘리고 죽어갑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원하는게 뭐예요? 우리도 주님을 꽤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의미가 아니예요. 이렇게 자기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가는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와 만나주실 것이다. 오셔서 내 죄를 사하시고 내 영혼에 하나님이 사유함을 주시고 그리고 나의 심령에 주님이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담을 허무시고 참된 회개와 진실한 참회와 하나님과 만났을때 우리 영혼에 새로운 은혜와 빛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깊이 깨닫고 그것을 간직하고 이방의 잘못된 문화에 둘러 쌓여 있는 그 시대를 오직 진리의 힘으로 살아갈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제사드리게 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예배하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지금 제 말씀은 예배를 정성껏 드려야 된다 물론 그것도 포함됨니다마는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예배는 한교회의 예배는 한교회의 영적수준을 넘어설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것을 뛰어 넘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우리들이 하나님앞에 간구한다고 할찌라도 우리들이 주님이 만나주실수 있는 방식대로 예배드리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기도가 진실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과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수많은 일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진리를 듣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진실하게 영이신 하나님과 생생한 만남이 이루어질때 죄인이 어떻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릇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의 길을 뉘우치고 돌아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었던 사람들이 사랑을 소유하게 됩니다. 어둠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진리의 참빛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었던 사람들이 참된 사랑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던 그러한 강철 같은 가슴이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질 때 그는 눈물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예배를 통해 바뀌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수준과 믿음의 성적은 무엇을 얼마큼 했느냐 거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때로는 말씀을 전하러 다니면서 교회에서 아주 귀한 중직을 맡고 장로님석이 쫙 놓여 있는데 거기서 기라성 같은 교회의 중직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조는 예배를 보게 됩니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이렇게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속에 흐르고 있는 성령의 분위기가 그 사람의 마음에 와 닿지 않고 증거 되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을 찌르지 않는데 어떻게 고개를 숙이고 졸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졸음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지 않는 예배를 탓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살아서 예배를 장악하시고 진리가 살아 역사하므로 사람들이 움직이고 부딪칠 때 그들은 고뇌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뜨겁고 흔들렸던 마음이 냉정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이런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말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감각과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감격을 소유하고 있을 때에는 정성껏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짐승을 데리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 그 짐승이 자기네 집에서 기르던 짐승이 잖아요. 제사를 드릴때 자기의 죄를 거기에 얹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제사장이 너의 죄가 이 양에게로 옮아갔다 그러는 순간에 양이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하얀 양털이 씨뻘건 피로 물듭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갑니다. 드디어 목이 잘라지고 팔다리가 잘라집니다. 그리고 각이 떠집니다. 내장이 발기발기 찢어지면서 기름이 분해되고 내장이 분해됩니다. 콩팥과 쓸개가 갈라집니다. 온통 피 천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는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져 가는 짐승의 제물. 왜 죽어갑니까? 무엇 때문에 죽어갑니까? 짐승이 뭐 했습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모습은 바로 자기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의 양심과 영적인 예민함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그 앞에서 이미 손을 얹으면서 양에게 기도할때에 전신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가 소리를 지르며 죽어가기 시작할때에 정말 피어린 통곡과 참회의 눈물로 가슴을 치는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런데 어떻해요? 신앙이 떨어지고 그리고 신앙의 감격이 사라지고 믿음이 감각을 다 잃어버리고 말하자면 무감각해지니까 어떻게 되요? 막 범죄하다 너 그렇게 범죄하고 하나님앞에 어떻게 살려고 그래? 아 그거 뭐 양한마리 갖다가 죽이면 되지 뭐.
(예) 직장에 있을 때 어떤 카톨릭 신자가 맨날 술 먹고 못된 짓 하고 다녔어요. 아니 천주님 을 믿는 다는 사람이 그러면 어떻게 그러면 괜찮아 이렇게 대충 살다가 망년에나 가서 고해성사 한번 하면 딱 끝나.
이게 카톨릭에만 있습니까? 구약에 선지자들이 탄핵했던 그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시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이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질렸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전의 문턱을 밟고 다니는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아니다. 제사 앞에 진심으로 참회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앞에 진심으로 자기의 죄를 참회하며 주님이 나를 용납해 주시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으며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 주께서 예배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얼싸 안으시면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우리의 손을 우리의 발을 임마누엘의 피의 샘에서 씻기시고 그리고 우리를 다시 마치 밖에 나가서 뒹굴고 장난을 치며 개판을 치다 온 자식을 목욕을 시키고 새로운 옷을 입혀 보내듯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배가 형식에 이르고 있다는 얘기는 신앙이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형식에 흐르고 있다는 애기는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그만큼 무감각해져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배가 형식에 흐른 시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던 것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월삭으로 모이는 것과 절기로 모이는 것과 대회로 모이는 것과 그리고 그 모든 대회와 함께 너희가 악을 행하는 것 입술로는 나를 경외하나 그러나 너희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런 백성들의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가 아닙니다. 어떻게? 영과 진리 안에서. 먼저 영입니다. 영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다른 피조물들과 유일하게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을 소유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이큐가 돌고래만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돼지만도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몇 년전에 해외 토픽에 보니까 돼지가 피아노를 치는데 기가 막히게 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뛰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무리 지능이 뛰어나도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교통할수 있는 영혼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는 그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질수 있는 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은 육체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사이에 있는 그 기능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육체와 영혼이 모두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끝임없이 네 영혼아 돌아오라 말하지 않고 네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라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배의 한 요소는 반드시 영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을 느끼며 살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그렇게 즐겁게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님을 이 육체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느끼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성령이 오시는 것이예요. 성령이. 왜 그래요? 이천년 전에 죽은 예수가 지금 나를 살린다?
웃기는 거죠.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얘기가 어느 한 순간에 믿어지는 거예요. 세뇌를 당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오늘 교회 올 때 까지 안 믿어졌었는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깊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느끼게 되는 것이예요. 그러면서 깊은 참회를 하게 되는 것이예요. 전철에서 전도를 하는데 저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거 봤어? 그러고 어떤 사람이 물어요. 뭐라고 대답해야 겠어요? 못봤다고 얘기하면 말발이 안서요. 나는 보았다. 어떻게 보았냐? 육신의 두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예요. 마찬가지죠. 양심이 어디있어요? 양심이 있는 곳에다 손을 얹어보셔요. 어디로 가야되요? 여기로 가죠? 근데 참 이상해요. 병원에 가면 심장을 다루는 곳도 있고 내장을 다루는 곳도 있고 흉부를 다루는 곳도 있는데 양심을 다루는 곳은 없어요. 양심이 없어요? 있죠. 물리학적으로는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와 같은 분이세요. 만져지지 않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그러나 보이도록 만져지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성령이 우리마음속에 오실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황당무게한 이야기 지옥이 있다는 것 하나도 안 믿어지잖아요. 과학시대에 그런 것 웃긴다 .그러면서 놀다가 제가 그랬어요. 말씀을 듣는 순간 확 다가와요. 그 믿음이 얼마나 뜨거운지 내가 뭐라고 애기했냐하면, 그말이 어패가 있는 이야기 인지는 모르지만 목사님한테 찾아가서 “목사님 저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가 전부 거짓말이라고 해도 나는 이것을 믿지 않고는 살아갈수 없습니다. 이제 내가 이 인생에 있어서 더 이상 붙들 것이 업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예배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오시는 것이예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어때요? 주일날 몸과 마음이 너무 곤고해요. 찢어지는 것 같아요. 대충 예배드리고 끝내야겠다. 그리고 예배당에 갈 때 있죠. 뒤에 앉아요. 천지에 있는 이름중 귀하고 높은 것은 나시기 전에 지으신 이름 예수. 늘 읽던 찬송가 가사인데, 반주가 나오면서 막 찬송을 부를때 마음에 막 흐느낌이 오는 거예요.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언제나 가장 귀한 그 이름. 그것이 찬송가의 가사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확 다가오는 거예요. 그 놀라운 사랑. 나시기 전에 지으신 그이름 예수. 나시기 전에 그분의 이름이 예수라고 지어짐으로 말마암아 그분이 얼마나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걸으셨는가 짐작하는 거죠.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뜻하지 않게 회개하면서 주님앞에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이죠. 무엇이 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까? 우리 마음 스스로가 그렇게 해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마음속에 느껴지지 못하는 하나님과 그 참된 진리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예요. 여러분 여기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한테 전도 받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한테 전도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자기는 대학원 나왔는데 국민학교밖에 못나온 사람한테 전도 받아서 온 사람들도 여기 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설득시키고 논리로 우리를 항복시킬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예요. 논리로 항복되면은 그러면은 전부다 예수를 믿어줍니까? 어림없어요.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싸워가지고 말이예요, 입심이 좋은 사람은 무신론자를 꼼짝못하고 굴복시켜요. 그러면 할말없다, 졌다, 그래도 그 사람이 교회 나오냐 그애기 예요. 아니예요. 주님의 성령이 예배가운데 오실 때 평범한 찬송이 우리의 가슴 속에 뜨겁게 밀려오면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감격과 참된 회개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거죠. 그러므로 찬송을 부를때는 늘 가사에 집중해야해요. 설교를 들을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그 설교 가운데 함께 해 주시면 평범한 설교인데 수 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찌르는 것이예요.
그랬다고 하잖아요. 사도 요한이 노년에 올라가서 너무나 힘이 없어서 제자들이 부축해서 올라가서 “ 애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야 하느니라 ” 온 교회가 흐느껴 울었어요. 평범한 말속에 비범한 성령이 함께 할때 비범한 역사가 나타나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죄로 말미암아 흐느끼게 되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으로 말미암아 한없는 즐거움과 기쁨속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거예요. 무엇을 통해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영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영이 없는 예배, 영안에서 드려지지 않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요? 또 하나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어떻게 영안에서 드려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두가지 질문에 먼저 답을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나중 질문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그럴수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이 결코 내용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배의 내용은 형식을 좌우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형식은 내용을 가져 올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형식이 내용을 좌우할수 있다면 수십억짜리 파이프 오르간으로 반주를 하고 수천만원짜리 피아노로 반주를 하고 고성능 앰프에다 소리를 내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요?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문제는 더 일어나는 거예요. 집회 때 마다 몇 대의 트럭으로 앰프를 싣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예요.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아요. 주님은 영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성령을 심하게 근심시켜 드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그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배가 어떻게 영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영안에서 드려지지 못하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때 율법은 집어던지고 자기들 마음대로 제사를 드렸습니까? 아닙니다. 율법의 규례를 따라서 엄격하게 그대로 드리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순서는 까다로왔고 절차는 복잡했고 그리고 예배드리는 형식은 공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과 참된 교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된 성령안에서 드려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 순서는 까다롭고 공교로와도 그 속에서 참된 감격을 받는 사람들이 적어져 간다면 그러면 그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일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데서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예배는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지 못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 ? 절차와 형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자유스러운 역사보다는 절차와 순서를 고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격하게 그 규격을 지키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예배를 정해진 절차와 순서를 따라서 엄격하게 드려진다 할 찌라도 모든 성도들이 침묵할 수는 있습니다. 침묵 가운데 고요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반드시 침묵 이상이어여 하는 것입니다. 침묵하는 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생하게 인격이신 하나님과 인격인 인간 사이에 영혼으로 만남이 이루어 질 때 그 속에서 어떻게 아무런 느낌도 없고 고요하기만 하고 아무런 인상도 받을 수 없고 그리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고 의지의 변화도 없는 그러한 만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참다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십여 년 가까이 못 만났던 친구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납니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길거리에서 손을 흔들고 얼싸 안고 난리입니다. 흥분 가운데 몇 칠을 지냅니다. 너무 반갑다. 그게 인격과 인격의 만남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영안에서 예배가 드려지지 못할 때 그런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영안에서 예배가 드려지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점차점차 예배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배의 자리에 앉아서 온통 오늘의 해야 할 일과 예배가 끝난 다음에 벌어질 자기의 스케쥴에 대한 계획들이 머리를 계속 흔들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미 내용은 사라진 형식으로 드려지는 예배인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이렇게 예배하는 자 주님이 찾으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 그들의 모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성령 안에서 드려지지 못하는 예배는 일년 오십이주 예배를 드려도 예배시간에 흐느낌도 없고 환호성도 없고 부르짖음도 없고 회개함도 없고 진실한 참회도 없고 돌이켜서는 회개의 결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영안에서 예배가 드려질 때, 성령 안에서 예배가 드려질 때 예배는 놀라운 생명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이 예배당에 들여놓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자기의 영혼을 장악하며 예배 전체를 붙들고 계신 성령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배 속에는 참된 감화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이제껏 자기가 제일이라고 붙들며 살아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분과의 참다운 만남을 소유하고 싶은 이러한 마음의 열정이 가슴속에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찬양을 부르는데 역사하셔서 한곡 부르려던 찬송이 성령이 역사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순서 지를 따라서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겠습니까? 아니면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더 불러야겠습니까? 어리석은 질문인 것입니다. 당연히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열두시 반이 재직회로 모이고 한시가 식사시간 이니까 그 안에 마쳐야겠습니까? 아닙니다. 늦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길을 내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회자가 내려와야 할 적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정말 풍성한 축복을 누릴 때의 모습인 것입니다. 말씀을 증거 하는데 사람들이 가슴이 무너지면서 여기저기서 흐느껴 울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할 때 설교를 계속해야 겠습니까? 기도를 해야겠습니까? 어리석은 질문인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순서에 없는 데요? 그래서 순서 지를 안 만듭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나아가야 할 텐데 성도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심령을 닫고 그리고 형식적인 예배로 때우고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때, 어찌하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의 형식이 아니라 참된 마음의 참회를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릴때 주님은 예배 시간을 통하여 수 많은 사람들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 하시지 않는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관해 들려줄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 하실 때 진리 안에서 선포되는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런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진노 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때 진노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앞에 떨며 회개하고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고 주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들을 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 대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을 들을 때에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때는 “ 아하, 주께서 죽으셨다는 이야기구만 ” 그러나 성령이 역사 하실 때 우리는 골고다 아래서 매일 보는 십자가지만 오늘도 이 십자가를 인하여 눈물 흘리고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후회하며 주 앞에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실 때 모든 격식은 타파되어 집니다. 깨트려 집니다. 예배가 세시간 네시간 흘러갈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예배가 오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예배를 위해서라도 일주일 동안을 성령 안에서 살다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성령을 근심케 해드리고 속을 있는 대로 썩혀 드리다가 주일날 와서 면죄부를 받으려고 올 때 우리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지 못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또 예배의 현장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슬프시게 하고 죄 가운데 살다가 예배 시간에 와서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근심시키며 살아갈 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가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릴 때 마음을 열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사람을 치료하는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 속에서 이제는 정말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싶은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서 주일을 지내게 하고 일주일 동안 세상으로 내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답게 주님이 찾으실 만한 예배를 함께 드리는 사람이 되어주시기를 원한다면은 그러면 여러분은 이 주일의 예배를 위해서 수요예배를 위해서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은 여러분들에게 무수히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에도 성령은 무수히 역사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여러분들이 그릇된 길로 행하고 육체대로 행하고 자기의 혈기를 못이기고 인간의 고집대로 나아가고 하나님을 없수이 여기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불순종 할때 주님은 슬펴하시며 마음 속에서 우시며 탄식하시는 거죠. 문제는 뭐예요? 듣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예민한 사람들이 되어야해요.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육체를 제어하며 그리고 자기를 회개하고 자기를 쓰다듬고 뉘우치며 돌이키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따라서 예민하게 한걸음 한걸음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 때 그 사람이 드리는 주일예배는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는 예배가 되어질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 속에는 진리의 요소가 있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성령과 진리 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이 자유롭게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기울여서 예배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고 가다듬고 일주일이 끝나면 다음 주일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 그리고 실수해서 죄를 지었을 때에는 주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기회를 구하면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이 역사하시되 간절히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이 아닙니까?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죠? 전 인격적인 추구인 것입니다. 그 추구가 무엇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마음을 기울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을 기울여서...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배의 시간은 관념이 없고 예배에 나올 때는 우리의 육체를 충분히 휴식 시켜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준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믿음의 성도들이 토요일을 주일 다음으로 귀하게 생각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예비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은 육체를 할 수 있으면 푹 쉬고 마음을 정리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주님과 만날 그 시간을 기대하면서 토요일과 주일을 지내면서 육체를 푹 쉬고 와서 예배 시간에 아무런 얽매임 없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문득 끊어졌던 별 빛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한적한 시골 길을 들어설 때에 다시 빛을 찬란하게 발하며 그들의 인생을 인도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바로 이런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래 바람이 부는 광야와 같은 곳, 고요한 섬, 그리고 가시나무 떨기에 붙는 불속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한 고요하고 정리 된 곳에서 주님은 그들과 만나시는 것입니다. 육일은 주일을 위해서 있고 또한 주일은 육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육일을 경건하게 삶으로 칠일의 주일이 거룩하게 되어지고 칠일에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육일의 삶을 경건하게 살수 있는 재충전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일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집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 된 세상을 이겨갈 수 있는 참된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 죄인들을 찾아오시고 오늘 주일에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의 생활 가운데 곤고할 때나 위협을 받을 때나 위기에 처했을 때나 안타까울 때나 주께서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내 것으로 삼으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이 믿음의 재충전이 주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건한 성도들이 주일날 춤추고 노래하는 것과 쓸데없는 책들을 보는 것을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을 들은 것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기도하고 그리고 성경을 읽고 그리고 경건한 서적들을 읽으며 육신을 쉬는 것이 주일이라고 신앙을 고백했던 이유가 바로 이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희는 오늘부터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면 우리는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순서가 공교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화려함과 아름다운 성가대의 음악소리와 그리고 우렁차고 직수입한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다고 할찌 라도 성령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으시면 그 모든 것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장하고 육십조원 어치의 금이 들어간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선지자들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제사를 지낼찌라도 하나님은 너희를 만나지 아니하시리라 너희가 아무리 천천의 수양 만만의 기름을 가지고 나온다고 할찌라도 하나님 앞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너희가 주 앞에 겸손히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주와 함께 동행하는 것, 이런 삶이 없는 모든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갈 뿐이라고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없고 빈들에서 초막과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린다 할찌라도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죄인을 흐느끼고 참회 하게 만듭니다. 거친 세파에 찢기서 실망하고 모두 마음이 상하고 그리고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이곳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열고 위로의 손길을 주께서 내리는 것입니다. 평화의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으시고 그리고 거기에 고약을 바르심으로 말미암에 상처받고 찢겨서 흐느끼며 교회당에 들어섰던 그 심령들이 하나님과 만남으로 말미암아 치유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하나님을 위하여 살수 있는 이러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 속에서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들을 향하여 경배했으나 이제는 아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이제는 확실하게 깨달은 하나님 앞에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았으며 일주일 동안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압박과 압제를 당하고 나에게는 참된 친구도 없고 참된 사랑도 없고 그리고 참된 위로가 없다고 자기 혼자 밖에 없다고 인생을 그렇게 외롭게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자기의 인생에 가장 친절한 동반자가 하나님이요 그리스도 예수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재물과 명예와 이 세상의 지푸라기와 같은 것들을 위해 목매어 살던 인생으로 하여금 그것은 모두 지나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하도록 거하리라 요한일서 이장 십육절 십칠절 말씀을 그의 가슴속에 새겨넣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을 찾을 때는 그의 심령이 어떠했고 마음이 어떠했던지 떠날때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래 내 인생은 바람처럼 사라져 가는 인생이지만 그러나 나는 영원을 향해 사는 인생이야 나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지음 받은 인생이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할 수없사오나 주님이 위로부터 세상을 이길 신령한 힘을 내리시사 우리로 하여금 이 한주간 동안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세상에는 없는 참된 평화와 진실한 샬롬을 우리 영혼속에 소유하고 주만이 나의 가장 소중한 전부인 것처럼 살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힘들고 버겁던 세상에 요만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커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상심한 자들이 와서 위로를 받고 하나님을 만남으로 참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용기를 잃어버린 자들이 이곳에 와서 험악한 세상을 이겨내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의 승리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특색인 것입니다. 어디서도 사로잡히지 않았던 사람이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통해서 사로잡히게 되어지는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 그 속에서 주님께 확실히 사로잡히게 될 때 그는 이전에 살았던 모든 인생의 가치와 생각들을 즐겁게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잃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발견되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때로는 그 진리의 성령은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진실로 생애적인 결단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드리고 또 드려도 그것밖에 드릴 것 없는 것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도록 완전히 변화된 사람들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모든 예배는 이렇게 영안에서 드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있으면 아멘해 보십시오. 사모합니까? 네. 기도하겠습니다.
예배란 무엇인가 ②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여러분 저의 이 질문을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십니까? 오늘도 드려진 이 모든 예배가운데 하나님이 찾아오고 계십니까? 나아가서 묻습니다. 주님이 그 예배가운데 찾아오시고 임재하시는 표적이 있습니까? 저는 지금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심각한 상처에 한 가운데를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던 것을 여러분은 영원히 잊지 말고 상기하셔야 됩니다. 예배는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의 중요한 것은 기념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그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으면 그 기념도 감사도 아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이신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우리의 인생이 생생하게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나는 곳, 그곳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에요? 급한 일이 있어서 예배에 늦는 일은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주 계속된다면 그 심령 속에 깊은 병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나 피곤하고 곤하면 예배시간에 졸 수 있습니다. 예배시간만 졸겠습니까? 베드로는 사형선고를 받고 옥 속에서도 잤습니다. 뭐 믿음이 있어서 잤겠지만 피곤하면 졸수도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매 예배시간마다 계속된다면 그것은 깊은 병이 깃들여있는 것입니다. 눈을 떠야 되요. 살아있는 생명이 생생하게 자기의 영혼 속에 하나님과 교류하고 있다면, 그런 예배라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에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서 왁자지껄 모이고 정해진 시간에 예배가 끝나고 우르르 쏟아져 나갈 때 ‘아 예배가 끝나구나!’라고 해방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까? 예배가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의무와 짐의 시간이 되고 있습니까? 이것은 깊이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병들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성도들이 병들고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결코 교회는 예배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배는 우리가 주님이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가 예배를 통해서 떠오르고 그것을 기억하게 되고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예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기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도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예배의 목표는 아닌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생생한 만남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생생한 만남이 없을 때 예배는 어떻게 됩니까? 형식은 갖춰져 있지만 그러나 차갑고 침묵가운데 드리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절차는 복잡하나 사람들의 마음은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성가대의 음악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음악이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예배 속에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설교자가 뛰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예배의 순서가 정통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장악하시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권능가운데 예배가 드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권능 가운데 하나님 앞에 예배가 드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시는 예배가 될 때에 사람은 시간관념이 사라져 버립니다. 초대교회 때에 보면 초대교회 부흥사 가운데 어떤 목사님은 주일예배 가운데 11시 예배를 드리는데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목회기도를 하는데 목회기도가 끝나니까 3시 반이에요. 4시간이 흘렀어요. 그런데 성도들은 40분이 흐른 것 같았어요. 4시간을 기도하고 나서 7시간 설교했으니까 예배가 몇 시에 끝났어요? 성령이 함께 하실 때에만 가능한 것이에요. 여러분 왜 1시간 안에 끝나는 예배가 왜 그렇게 지겹고 지긋지긋하고 엉덩이에서 좀이 쑤십니까? 뭐가 없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애인과 꿈에도 그리다가 만났는데 30분 만났는데 엉덩이에 좀이 쑤시고 몸이 비비 틀려요? 뭔가 두 사람의 인격적인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런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그 자리에 임재 해 계시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면 한 시간이 아니라 30분도 길고 20분도 긴 것이에요.
그래서 요즘에 뭐라고 그래요? 예배는 간단히, 찬양은 힘차게, 기도는 뜨겁게, 예배를 싫어하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래도 어때요? 무엇을 하든지 꼭 예배를 해야지만 된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제직회! 그것을 하면 되는 것이지……. 예배를 드렸는데 거기서 무슨 또 묵도, 찬송, 기도, 축도까지 하고 예배를 드려야 됩니까? 무슨 생각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에요? 예배를 안 드리면 하나님이 예배시간에 복을 안주시고 예배를 안 드리면 뭔가 빠진 것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예배는 진실로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 때에 모든 것은 타파되고 사라져요. 그래서 집회에 나가서도 말씀을 전할 때에 거기에 들어와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세 시간을 설교했는데 ‘벌써 이렇게 되었나!’ 그러죠. 그러나 지겨운 사람은 어때요? 지긋지긋한 것이죠. 시계가 안 가는 것이죠.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 예배는 생기 있는 예배가 되는 것이에요.
보십시오. 오늘 주님은 예배의 요소가운데 또 하나를 들고 계십니다. 진정이라는 것입니다. 진정이라는 것이 -우리의 진심-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에요. ‘알레데이아’ 진리예요. 진리…….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어떻게?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와 또 어떻게?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두 예배가 아니라 한 예배에 두 요소가 함께 들어있는 것이에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하나의 예배에요. 그러니까 예배는 하나인데 in 뒤에 나오는 것은 두 개란 말이에요. 이것이 뭐에요? 영과 진리에요. 영에 대해서는 말씀드렸고 오늘은 진리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느 정도로 이것이 중요한가하면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그러니 어때요? 만약에 이렇게 아니라 저렇게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이 안 찾으시는 것에요. 좀 냉정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따라서 예배 방식의 문제가 아니에요. 헌금을 먼저 할까? 뒤로 할까? 성경봉독을 앞에 하고 찬송을 한 장 부를까? 말까? 주기도문으로 끝날까? 축도로 끝날까? 아니면 맨 앞에 일어서서 찬송을 부를까? 앉아서 부를까? 그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찾고 안 찾으시지는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영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면 하나님이 안 찾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는 예배의 현장은 어때요? 싸늘한 적막이 감도는 에스골 골짜기와 같죠.
그럼 또 하나는 무엇이에요? 그런 순서를 가지고 안 찾지는 않는데 그것이 무엇이에요.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면 안 찾으신다는 것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 높이 눈을 떠야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구약에 호소해서는 안돼요. 이것을 먼저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와 그 의식에 호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어요. 그러니까 예배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과 사도들과 특별히 지금은 교회니까 초대 교회시대를 중심으로 해서 찾아나가야 되요.
그들 중에 말씀을 맡은 대표적인 사람들은 사도였어요. 후에 장로들이 생겨나고 목사가 생겨나고 교사가 생겨났어요. 어떻게 했습니까? 예배로 모였습니다. 예배로 모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모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것이에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었습니까? 전혀 모르는 것이었어요. 무엇을 몰라요? 구약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약을 완전히 성취하시고 그리고 하늘로 휙 가버리셨어요.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계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계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초대 교회 교인들 중에 극소수에 불과했어요. 그러니까 어때요? 만약에 사도들이 입을 다물고 아무도 설교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부활하셨으며, 죽으신 것과 부활이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에 어떻게 되며, 그분을 믿는 우리가 십자가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되며, 복음전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아무도 가르쳐줄 사람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사도들의 발 앞에 모였겠어요? 무엇을 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모였던 것이에요. 이것이 예배의 이유였어요.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그러나 그렇게 모였을 때는 진리의 말씀이 그들에게 가르쳐졌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할 적마다 ‘아! 그리스도가 그래서 죽으셨구나!’ ‘아! 그리스도가 그래서 살아나셨구나!’ ‘아! 그러므로 우리도 다시 사는구나!’ ‘아! 그러므로 우리가 그 십자가 앞에서 회개해야 되는구나!’ ‘아! 그러므로 이 복음이 전해져야 되는구나!’ 이렇게 매 순간마다 깨닫게 되었던 것이에요. 무엇 안에서? 진리 안에서…….
그런데 이게 교회의 시대가 흘러가면서 말씀의 선포가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예배의 중심자리에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 자리를 지탱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예배가 어떻게 되요? 점점 즐기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가대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같이 회중이 찬양을 부르는 것이 가장 기본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우리는 낼 수 없는 고운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 구라파시대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에요. 그러면서 생겨나는 것이 성가대가 생겨나고, 전문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 순서를 막 복잡하게 짜고 하나하나를 시간을 배정을 해가지고 쫙 짜서 그 틀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 이러면서 이제 영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니까 그것을 지키면서 예배드리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그러나 부흥이 올 때마다 여지없이 그것은 산산이 부서졌어요. 다 같이 기도합시다. 성령이 놀랍게 임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쏟아놓는데 누구도 그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어요. 무너지지요. 말씀을 선포하는데 하나님이 진리를 설교하는 설교자를 강하게 사로잡으셔서 말씀의 선포를 폭포수와 같이 쏟아 붓게 만드셨어요. 설교시간이 4시간이 넘어갔어요. 모든 순서는 무너지지요. 중요한 요소는 예배가운데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없으면 눈물도 의미가 없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코 여러분! 이 이야기는 치우친 이야기가 아닙니다. 깨닫는 것이 없으면 눈물도 의미가 없고 부르짖음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시간마다 우리는 뜨거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냉랭하고 차디찼던 우리의 마음이 예배 시간을 통해 뜨거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잃어버리고도 한없이 자신만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인생이 자기의 가는 길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 어디입니까? 어디입니까?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깨닫는 것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참다운 회개가 일어나겠습니까? 무엇인지도 모르는 진리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삶을 돌이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까? 여러분 사람을 믿으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으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와서 그릇가고 있는 여러분의 삶을 책망하고, 교훈하고, 의로 교육하고, 바르게 뜯어 고쳐야지만 우리는 비로써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인생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합니까? 진리 이외에는 그것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모든 순서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로되 그 중에 가장 중심자리에 와야 될 시간은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선포되는 설교를 갖고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의 인생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참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살아있는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눈물을 흘리고, 부르짖고, 기도하고 그리고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까? 참다운 회개는 필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참다운 회개는 필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에요……. 찬송을 부를 때도 눈에 생기가 돌고, 다 눈에 생기가 도는데 말씀을 전할 때만 눈이 불안해서 초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그 사람의 눈동자처럼 초점이 없습니다. 늘 불안하고 무언가를 하고자 하나 그러나 늘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찬송 부를 때에 막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전할 때는 계속 자고, 그러다가 또 기도 합시다! 하면 눈물을 흘리는데 무엇 때문에 우는지 본인도 몰라요……. 깨닫는 것이에요. 깨닫는 것이 예배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셔야 되요. 보십시오. 깨닫게 될 때에 우리 마음의 변화에 시작이 주어집니다. 우리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때에 어때요? 드리는 찬양이? 이전에는 입술로 불렀는데 이제는 어때요? 심령의 찬양이 되는 것이에요. 다 드려지는 것이에요.
아침의 이야기하고 접목을 시켜볼까요? 다윗이 뭐라고 그래요? ‘내 입이 붙었나이다.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목소리가 사라졌나이다. 나에게 노래를 돌려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그가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주님이 만나주셔서 다윗아 너는 비록 범죄 하였으나 내가 너를 용서하고 왕이면서도 만조백관이 보는 앞에서 왕관을 내어던지고 제위에 무릎을 꿇고 부르짖는 너의 그 상한 마음을 내가 보았고 내가 너를 치유하노라. 그 때 어떻게 되겠어요? 닫혔던 입술이 열리고 사라졌던 목소리는 돌아왔어요. 심령의 줄이 끊어졌던 화연들은 새롭게 줄이 수리되고 아름다운 곡조가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 올라와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찬양이 되는 것이죠. 믿으면 아멘! 해보세요. 믿습니까? 바로 이해를 해야 되요. 바로 이해를…….
치유된 것이 치유된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마음의 치유는, 감정의 치유는 노래를 가지고도 될 수 있고, 좋은 이야기를 들어서도 될 수 있고, 사람들이 와서 여러분의 등을 두드려줘도 마음의 치유가 될 수 있어요. 참된 심령의 치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이에요. 무엇을 통해서? 진리를 통해서 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이 전해지는 이 순간에 설교자는 진리를 순전하게 설교하지 못하면 그는 교회를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한 것이에요. 그러나 순전하게 진리를 말하고 그리고 예배 가운데 성도들이 마음속에 진리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는 다 한 것이에요. 그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요. 무엇을 바랍니까? 그 목회자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합니까?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요. 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설교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얼마나 부담을 가지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말씀을 듣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지난번에 들었으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진리 앞으로 나아옵니까?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가난한 마음으로 그 어린아이가 눈을 감은 채 어머니의 품을 더듬고 젖을 무는 것처럼 그런 사모함으로 말씀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전하는 자와 받는 모든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가져야할 태도라는 것입니다. 실로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로 이것이 없으면 그의 인생은 영원히 하나님과의 참다운 만남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파에 쓸려서 세상이 미는 대로 밀리고 끄는 대로 끌리면서 어두운 세상에서 어두운 잠을 자고 그리고 깨어난 것 같으나 자고, 자는 것 같으나 꿈을 꾸며, 그렇게 한 세상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예배가운데 생생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체험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 보셨습니까?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른 새벽서부터 예배당 문 앞에 와서 문이 열릴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열려진 문으로 들어와서 강대아래 엎드려서 오늘도 주님께서 이 강단위에 하나님의 성령의 진리의 기름과 포도주를 부으시기를 목 놓아 부르짖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여러분들은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는 주위에서 수많은 교회에 집회를 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는데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살아가는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예배가 사라진 삶입니다. 예배가 사라진 삶…….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상한심령이 되겠느냐는 것이에요. 불가능한 것이에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시간에 상한 심령이 아닌 사람들이 어디 가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상한 심령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선명한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과 그것으로 말미암는 깊은 깨달음은 한 시간의 예배가 그 사람 인생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 중에도 그런 간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몇 분이 있습니다. 생생하게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생생한 진리를 사모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들로 나아오고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그들이 생생히 하나님과 만날 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들이 다 압니다. 성경에 있는데 왜 모르겠어요. 복음을 전해야 할지를 깨닫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아도, 바라지 않아도 그들은 가슴을 치며 예배당에 나아와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과 찢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깃발을 인하여 애통하며 주께서 원수들과 더불어 싸우시고, 노도와 같이 다가오는 대적들을 꺾으시고, 주위에 승리의 깃발을 세우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만방에 높이 들려주시기를 사모하며 부르짖지 아니할 수 없는 사람들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서야할 참된 이유인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예배가 끝난 후에 모든 교인이 흩어진 이후에 휑하게 자리가 빈 예배당에 홀로 앉아서 흐느껴 울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은 이 예배로 만족했는데 주님도 만족하셨습니까?’ 위로도 없고, 평화도 없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도 없는 이 예배 이것은 죽은 영혼들이 모여서 드리는 ‘사의 찬미’인 것입니다. 그러한 살아있는 생생한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진리로써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여러분 마지막 거둬들이는 것은 그것입니다. 무엇인가 오늘도 설교를 들은 그 진리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오는가? 그리고 예배는 끝나고 성도들은 흩어졌어도 내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서 나로 하여금 ‘너는 이리로 오라, 이것을 따라 살라, 이것을 위해서 살라.’ 도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린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진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혼미한 안개 속을 거니는 것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소망도 예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육신을 푹 쉬고 주일날은 와서 완전히 유쾌한 마음과 그리고 온전히 자기를 다 기울일 수 있는 정신으로 예배에 집중하십시오.
그러니까 여러분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성도들이 기도시간마다 빼어놓아서는 안 되는 의무인 것입니다. 의무인 것입니다……. 나는 예배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여러분 왜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던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성전이 없어서입니까? 제사가 없어서입니까? 율법 책이 없어서입니까? 선지자의 음성이 없어서입니까?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무엇이 없었습니까? 신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참다운 예배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그 일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누구에게 예배를 하고 어떻게 예배를 해야 할지 이제는 우리에게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던 것이에요. 뭐에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라 나는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에요. 따라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이 예배는 단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특징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예배는 단순해야 됩니다. 그리고 소박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예배의 특징인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 다섯 번이나 남편을 바꿨으면서도 지금도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불륜의 관계에 있는 이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령을 말씀하시다가 예배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런 예배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놀라운 경험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어요. 분명해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될 때에 비로써 주일이 거룩해지는 것이에요. 주일날 다른 일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에요. 왜? 그 시간을 너무나 사모하고 그 시간이 너무나 그리워지기 때문에……. 이것의 개혁이 없고서는 다른 모든 곳의 개혁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그래요? 그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순서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누가 모일 때에 그런 예배가 그런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그런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가 되어서 주님이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은 그 설교를 통해서 이 험악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무엇을 따라서 살아가야 할지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모호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진중에서 불기둥을 모두 볼 수 있었고 어린소자라도 그 구름기둥을 똑바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고, 분명하고, 소박하고, 정직하고, 명료하고, 정확한 언어로써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요, 적게 맡은 자들에게는 적게 구하리라.’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바와 마찬 자기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깨달음을 통해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때 제법 주일학교 부흥사를 했습니다. 애들을 지하 기도실에 모아놓고 기도를 시키는데 그때는 내가 신앙부흥을 경험한 것도 아닌데……. 저는 감사하게 생각해요. 세칭 뭐 아주 유명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안 하고 자그마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튼 복음의 대해서 확신을 깊이 갖게 된 것을 감사해요. 그래 뭐 24살에 총각집사가 되어가지고 뭐 아는 것이 쥐뿔이나 있겠어요? 기도회 시간에 설교를 해야 하는데 항상 설교시간에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요. 그날도 이제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애들이 ‘다 같이 기도합시다.’하면 초등학교 1,2,3,4학년 이런 애들이 고난주간에 모였는데 말이에요. 고난주간에 자기네들이 금식을 하고 그래요. 그러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눈물 바다인거에요. 울면서 하나님 앞에 꼭 도토리만한 주먹을 가지고 가슴이 칠게 뭐가 있어요. 그런데 가슴을 쳐가면서 ‘하나님 내가 예수를 못 박았습니다.’ 놀랍지요. 그런데 옆에 있는 애가 초등학교 1학년밖에 안되었는데 막 울어요. ‘아! 1학년인데도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가 보다.’ 끝나고 나서 간식을 하면서 ‘야! 너 왜 울었니?’ ‘옆에 형도 울고, 그 옆에 언니도 울고 ,그 뒤에 친구도 우는데 나는 눈물이 안 나왔어요. 그게 억울해서 울었어요.’
참된 눈물은 참된 깨달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교묘한지 보세요. 이 지점에서……. 소위 은혜 체험을 많이 했다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져요. 돌멩이 같이 된다고요.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그게 잘못된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래요. 뭐에요? 은사를 받았다, 회개를 했다, 눈물을 흘렸다, 나도 왕년에 다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을 못 잡아 주더라. 그거지요. 그것은 왜 그래요? 눈물을 흘리고……. 언제나 말씀하지만 이 불을 끄고 15분만 지나면 여러분을 다 울릴 수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우는 것은 눈물을 닦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엇이 여기에 남아요? 눈물이 지워지면 아무것도 안 남아요. 그런 식으로 체험을 가진 것을 하나님과 만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에요.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우는 사람들을 보면 가소롭다는 것이죠. 그 영혼이 어느 순간에 어떻게 변화가 될 수 있겠어요? 정말 하나님 앞에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자고해져서 더 소망이 없는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많이 보았어요. 그러나 어때요? 깨닫는 것이 있을 때 그 진리의 말씀으로 깊이 깨닫고, 그 진리의 말씀으로 사로잡혀서 몸부림치며 회개한 사람은 그런 소리를 안 한다고요. 그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고 내 인생을 얼마나 놀랍게 바꿔 놓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이 다시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어때요? 그것이 없으면 정말 내일 넘어질 사람들이 일 년, 이년, 삼년, 사년, 혹은 일평생을 변함없이 살아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보세요. 부흥회를 하고 그러다가 열광을 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난리를 치는데 왜 그놈의 신앙이 6개월을 못가고 다 도망을 가요? 왜 그래요? 참된 진리와의 만남이 없기 때문이에요. 참된 진리와의 만남이 그에게 있을 때, 성령이 역사해주실 때, 놀라운 변화가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진리의 말씀이 영원히 나를 사로잡는 것이에요. 제가 말씀드렸죠. 성경을 읽다가 5년 6년 전에 읽다가 내 인생이 커다랗게 바뀐 그 말씀이 지금도 기도의 제목이 되고 설교의 제목이 되어요. 지금도 다시 본문을 피고 다시 설교하기 시작하면 지금도 다시금 생생하게 다 살아나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세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깨닫는 것이 없는 예배 그리고 깨달음에 집중하지 않는 성령의 역사 이 모든 것들은 전부다 허망하고 저축할 수 없는 웅덩이를 파고 물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해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일주일이 지나도 성경 10장을 못 읽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보고 냄비를 줄 테니 성경을 읽으십시오. 프라이팬을 줄 테니 성경을 읽으십시오. 밥통을 줄 테니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도 안 읽으니까 그렇게라도 읽혀야 되겠지요. 그러나 무엇이에요? 저는 분명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어느 순간에 가슴이 열리면서 진리의 빛에 비췸을 받고 ‘아! 말씀의 세계가 이렇게 즐겁고, 이렇게 놀랍고,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이 이렇게 위대하구나!’ 하고 깨달을 때에 그는 성경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어요. 불가능한 것이에요. 사모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읽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비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집중된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되든지 모든 인생의 소망이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참된 변화로 가는 길인 것이에요. 우리는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야 되는 것이에요. 원리가 잘못되면 목표가 아무리 훌륭해도 목표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끊임없이 예배 속에서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지에 대해서 깊은 기대와 소원을 가지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번째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의 시간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면 그 예배를 통해서 주어지는 진리의 말씀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시간이 아닌 것입니다. 결코 그런 시간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것들을 기대하면서 예배에 나온다면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확인도장을 찍어주는 시간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자기의 삶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나아오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주여 내 생각이 옳음을 오늘도 확인시켜 주소서’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 일평생 내가 붙들고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이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내가 그것을 돌이킬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돌이킬 수 없으면 하나님 차라리 나를 징계하셔서라도 내가 돌이킬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고쳐주시옵소서.’ 집회에 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범답안을 만들어가지고 와서……. 내가 소망이 없다고 그랬어요. 예수를 몇 년이나 믿고 하나님을 얼마나 만났다고 인생들이 그 속에 뭐 든 게 있겠어요? 모범답안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설교하면 그것 밑에다가 맞춰보고 있는 인생들……. 가소로운 것입니다. 그는 설교자를 가소롭게 보지만 하나님은 그 인생을 가소롭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을 주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모든 백성들이 땅에 죽은 자와 같이 엎드러졌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쉐마-이스라엘 백성들아 들을지어다.’ 모든 백성들은 부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여 당신의 백성이 여기에 있사오니 말씀하옵소서. 우리가 듣겠나이다. 우리가 청종하겠나이다.’ 이것이 진리를 대하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얼마나 잘못된 태도로 우리에게 붙어있는지 모릅니다. 마치 바닷가에 가면 그 울퉁불퉁한 시커먼 바위에 손으로 아무리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굴 딱지들, 조개껍질들이 달라붙어있는 것처럼 그렇게 달라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떼려고 덤벼들면 무자비하게 느껴지는 고통이 자기에게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버려야지만 성숙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언제든지 고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나오는 태도는 그 예배를 이미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무슨 말씀을 주실 때에 ‘우리가 돌이켜야 하리라.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고야 말리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복하며 ‘주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나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겠나이까? 하명 하시옵소서.’ 이런 태도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마음과 성의를 다해서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주는 도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온 자는 그 진리의 말씀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길러보셨지요.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강아지처럼 눈도 못 뜨고 그럽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어때요. 그 뜨지도 못하는 눈을 감고 엄마가 품에 안으면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도 본능적으로 젖가슴을 더듬으면서 머리를 흔듭니다. 무엇을 찾아서? 젖꼭지를 향해서……. 젖을 찾아서…….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라고 베드로사도는 우리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더욱 더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예배에 나오는 자세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할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심령이 병들면 이런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에요? 세상에 아무리 좋은 약,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입맛이 가면 소용이 없는 것이에요. 입맛이 회복되기 위해서 참회와 변화가 있어야 되요. 그것도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에요.
마지막 세 번째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이 예배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살고 죽는 진리의 말씀을 받는 시간이니까 예배시간은 어떤 이유이든지간에 가볍고 웃기는 시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언제나 심각합니다. 왜? 언제나 죽는 것과 사는 것의 그 기로에서 우리가 인도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참된 것과 거짓된 것과 오류와 진실 그 사이에서 참 길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암초가 놓여있고 오해와 그리고 여러 가지 잘못된 편견과 그릇된 견해가 있는 속에서 참 길로 인도하여 가는 과정이 진리가 말해지고 진리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예배는 진리와 참된 성령이 함께 만나 우리 가운데 장엄하게 역사하실 때에 그것이 곧 우리 속에 엄청난 회개와 하나님과의 만남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설교자는 예배가 끝나기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마음으로 설교단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예배시간마다 부흥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흥이 언제든지 예배를 통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분명한 확신과 기대 속에서 소망가운데 오르고 내려가고 여러분들은 듣고 흩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참다운 성도들의 자세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오류와 안개와 같은 것에 싸여있던 이 여인이 예수께로부터 예배드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는 어때요. 그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증거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평생토록 신령과 진정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를 사모하며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렸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루살렘이 문제가 아니고 그리심 산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산이 문제가 아니고 저 산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메마른 시대에서 이것을 기억하며 그리고 붙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에 가장 가운데 자리에 예배가 오게 하십시오. 예배가 오게 하십시오. 예배의 가장 중심자리에 하나님의 진리가 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예배가 하나님 앞에 영 안에서 드려지도록 하나님 앞에 쉼 없이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목회자와 성도의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수많은 번제와 수양을 끌고 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고 할지라도 가인의 제사와 같이 하나님이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면 끌고 간 그 소와 거기에 모여서 공교한 순서를 따라 하나님 앞에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이 예배가 드려지고 주님과 생생하게 만나는 놀라운 역사가 있을 때에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변하는 것입니다. 메말랐던 삶에 주님이 오심으로 꽃피고, 새 울고, 시냇물이 소리 내어 흐르고, 무지개가 뜨고, 새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나비와 벌이 날아다니고, 향기가 진동하고, 그 숲이 여러분의 참된 안식과 기쁨이 깃든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뭐 장로 시켜주고, 권사 시켜준다고 교회를 다 사랑하는 것……. 다 가짜에요. 주님 앞에 드려지는 이 예배가 너무 거룩하고 진실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게 하는 것이에요.
나는 여러 사람을 보았어요. 하나님이 정말 놀랍게 변화시켜주실 때에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저는요 하루에 몇 번씩 -너 교회에 나오지 마! 그러는 꿈을 꾸는데 그때마다 교회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막 눈물을 흘리며 한번만 붙여달라고 애원하는 꿈을 많이 꿨어요.’ 그렇게 될 때에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변화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한 기도제목 두 가지를 찾았지요? 무엇입니까? ‘하나님 우리의 예배가 에스골 골짜기의 죽은 자와 같은 예배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공교한 제사가 아니라, 정말 열린 하늘 아래서 열어주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시옵소서. 죄 사함을 받지 못해 곤고한 심령이 되는 사람들이 이 예배 속에서 사죄함을 얻게 하시고 그리고 시련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이 속에서 주님의 의로운 오른손에 붙잡혀 용기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참이 무엇이고 거짓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오류 가운데서 방황하는 영혼들이 하나님의 이 예배를 통해서 참이 무엇이고 거짓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되며 참된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렇게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가 되게 해주시고 그리고 참된 진리를 깨달아서 그 깨달음 속에 우리들이 그 진리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그 진리가 우리의 삶을 주장하게 되는……. 그래서 오류의 안개에서 그리고 그릇됨의 애매모호한 그러한 안개에서 숲속에서 벗어나서 진리의 대로를 보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 쏟아 붓는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성령과 진리로 예배시간마다 축복 하시옵소서.’
이것이 우리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는 왜 듣는가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할실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니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눅 20:1-18).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는 설교는 하기 쉬운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설교를 듣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이 죽을 때까지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설교자일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한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설교자일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과는 원하면 구역이 바뀌고 부서가 바뀌면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배룰 드리는 한 매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정말 제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빠르게 이해되고 있는가. 그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서 정말 우리가 바르게 알고 있는가. 우리는 결코 이 문제를 전통이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를 어떻게 보아왔고 또 설교자가 자기가 어떤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가. 또 성도들이 설교자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가. 하는 이런 견해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교를 통해 말하는 이야기가 쉽지 않고 또 그렇게 자기에 관한 이야기가 거론되다보면 여러 가지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함부로 정직하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아주 여러 곳에서 설교자가 누구고 그가 무엇을 위해 왔으며 오늘 왜 이렇게 이 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리고 그에게도 이와 같이 평화로운 시대에도 고난이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그 고난이 무엇이고 시대룰 향한 그의 외침과 부르짖음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자기의 신앙을 돌아보아주는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즐겨서 사용하는 용어는 “목회자”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양을 치는 목자라는 말에서 유례하였던 것입니다. 교인들의 모든 삶을 신앙의 차원에서 교훈하고 돌보는 직분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는 안수를 받은 목사일 수가 있고 혹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전도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부흥사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평신도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목회자란 말이 설교자라는 표현보다 훨씬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설교가 목회사역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에 속하는 기능정도라고 보는 것은 대단한 위험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쳐서 내 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내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역에 종사하는 성직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떼인 신자들을 목양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구인 것입니다. 설교자의 직무는 양떼로 하여금 아무에게나 맡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특별히 경험하고 그리고 당신이 특별히 부른 하나님의 일군들을 통해서 말씀을 전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하고 그 말씀으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자라고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설교를 전하는 사람, 그것은 심방이나 상담이나 사무나 봉사나 모든 목회를 돕는 다른 직분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럽고 두려운 직분인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신학적인 생각을 합니다. 설교를 제외한 모든 일들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결코 다른 여러 가지 직분들,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직분들과는 구별되는 두려운 직분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만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과 차별이 없는 동일한 죄인입니다. 동일한 죄인으로서 죄인 중에 뽑힌 받은 죄인으로서 그 죄인이 죄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죄인처럼 전하지 않고 죄가 없는 하나님처럼 순수한 말씀으로 똑같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말씀을 듣는 사람보다 뛰어난 윤리와 그리고 뛰어난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과 뛰어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윤리나 뛰어난 의식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자로 부르셨다는 분명한 신적인 부르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을 빼놓고는 도저히 자신의 존재와 삶을 생각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명, 거기에 붙잡힌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영국에 설교자 챨스 스펄젼 목사님은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설교자로 부르심을 느낍니까? 피하십시오. 도망하십시오. 그리고 달아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신의 부르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부름이 아닙니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고 도망치려해도 도망칠 수 없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어서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그 사람, 그가 바로 부름을 받은 설교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한 시대가 영적으로 타락하면 타락할수록 목회자로 부름을 받고 말씀을 전하는 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의 부름의 수준도 자꾸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하는 많은 일 가운데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이 봉사에 사역으로 내가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개인의 갸륵한 견해는 결코 하나님의 신적인 부르심과 동일시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영적인 수준이 타락하게 되면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소명의 수준도 자꾸 하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하는 사실과 내가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이 인간의 자기 판단에 선이 분명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꾸 토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명감이 분명하지 않은 목회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사명에 붙잡혔다기보다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사는 것이 자기의 인생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적인 부르심으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는 정말 특별한 하나님의 종을 원한다면 성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교인이 천명 이천 명이 되면서도 삼년, 사년이 지나도록 목회자를 구하지 못하는 교회도 많이 만났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은 무엇입니까? 결코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교회에 영적인 수준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체험하고 그리고 주 앞에 응답하는 소명 자들이 수준 높은 소명 자들이 생겨날 때 교회의 이런 요구는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라도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뛰어난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한때 평신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평범하지 않은 일들을 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명에 붙잡힌바 되어서 진리의 말씀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그 사람, 그 사명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같이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이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고난도 기꺼이 받을 수 있는 헌신의 각오가 되어있는 그 사람, 그가 하나님이 부르신 말씀을 증거 하는 설교자인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의 소명을 느끼십니까? 설교의 소명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로 하여금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로 소명을 받고 말씀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 사람을 말씀을 증거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쏟아지는 폭포수의 물줄기를 컵으로 받아내려는 것과 같습니다. 고난을 각오하고서라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며 그것을 전하면 생명을 앗아간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증거 할 것이고 그 말씀의 증거가 끝나고 나면 다시 한 번 그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붙잡히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위해 그리스도의 손에 붙잡힌 사명 자, 그리고 말씀을 외칠 수 없다면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그 사람, 그가 바로 부름 받은 설교자입니다. 그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 그것 하나인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서는 구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신앙은 참된 신앙입니다. 교회에서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많은 직분의 다양성, 계급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지혜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사람이 한 성령 안에서 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는 이런 의자도 놓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습니다. 저 아래 있는 의자를 하나 여기에 갖다 올려놓고 예배룰 드리는 교회도 있습니다.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석함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 함이 값있어서가 아니라 그 함속에 담겨있는 보석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우리는 질그릇에 담긴 보화와 같은 복음을 가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보배라면 그 복음을 담고 있는 자신들은 질그릇에 비교를 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저를 그렇게 대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혀 평신도들과 구별되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한 마리 다름없는 어린양입니다. 여러분이 실수하는 모든 실패가 설교자의 삶 가운데 이전에 실패로 경험되었고 지금도 실패하고 있고 혹은 앞으로도 실패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짓는 죄를 설교자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쉼 없이 경험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결코 인격적으로 우월해야 하지만 그러나 꼭 인격적으로 우월하지 않고 학식에 있어서 뛰어나면 좋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한 마리의 양으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축복기도를 좋아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축복기도를 좋아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저는 분명히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들고 축복기도를 하면 거역할 수 없는 하늘에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쏟아지는 것 같은 그런 착각은 버리십시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르고 정직하고 진실하다면 주의 종이 손을 들지 않아도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떠나있고 그리고 뒤틀려있고 잘못되어있다면 주의 종들의 축복과 기도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신비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손을 높이 들고 여러분들에게 축복할 때 축복을 쏟아지게 내리는 것 같은 그런 착각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필요하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들은 특별하게 여러분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75년도 10월에 특별히 전도하는 사람도 없이 이렇게 2-30명 정도 모인 벌판에 서있는 1층 교회에서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말씀을 전해주시는 목사님이 있으셨는데 그렇게 눈물겹도록 존경하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임했을 때 그분은 비록 학식이 뛰어나지 않고 말도 어눌했지만 제가 진정한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저는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도 몰랐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위함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매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때 목소리가 듣기에 그렇게 좋은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어눌한 말투로 전해주는 그 말씀 하나 하나가 제 가슴에 보석과 같이 박혔습니다. 그분이 한없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분은 저보다 훨씬 부요하게 사셨지만 그러나 늘 저는 그분에게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은, 그것을 해드리면 무슨 복을 받을 것이라는 그것이 아니라 깊은 마음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이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저는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가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참답게 인정받는가, 못 받는가 하는 것은 결코 성도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 저 자신에게 달렸다고 믿습니다.
집회를 가보면 재미있습니다. 수없이 집회를 다니다보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이 놀랍게 축복하셔서 하늘에서 단비가 쏟아지는 집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기대에 못 미쳐서 너무 마음이 편치 않게 내려오는 집회가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집회에 놀라운 차이가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일주일 동안 전하겠다고 강단에 섰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이러저러하게 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새벽 시간에 혹은 깊은 밤의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주께서 갑자기 그 말씀에 권능을 더하시고 하늘을 여시고 놀라운 생명의 능력을 부으셔서 갑자기 제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입을 열자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흘러들어갑니다. 원고도 내던지고 본문 하나 펴놓고 설교할 때 하늘을 열고 주님이 말씀을 주실 때 입에서 기름이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구김이 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번갯불과 같이 심령들에게 다가가서 가슴을 깨트리고 그리고 심령을 녹여서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물같이 녹아지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가 진행되고 있는데 곳곳에서 자기의 죄를 인하여 흐느끼며 우는 사람들의 눈물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끝나고 기도할 때 마치 하늘을 가르고 주님의 성령이 내려오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치는 부르짖음 속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커다란 역사가 지날 때 놀랍습니다.
끝마치고 저는 성격이 묘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꾸 기억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마지막 날은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고 기도하다가 보따리를 싸들고 뒷문으로 나가는 것이 제 취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문 앞에서, 문밖에서 설교자를 향하여 인사하는 각도가 틀렸습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세상에서 명함깨나 내놓는 큰 직책에 있는 성도님들이 누구에게도 그렇게 공손하게 인사한 적이 없을 것 같은데 차렵 자세를 하고 저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고귀한지 깨닫게 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기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씀을 전하러 갔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때 성도들이 어쩜 그렇게 목이 뻣뻣합니까. 수고했습니다. 하고 말해주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것은 참 모역적인 발언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주일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모습이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오늘날 교회 시대 속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비극들이 있지만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신앙과 교회 생활에 중심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영광스러운 부흥의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모든 모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십시오.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홀로 있을 때는 깊이 기도하시고 제자들이 모였을 때는 가르치셨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그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설교자의 모습입니다. 복음서는 바로 이 설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외치는 설교를 모아놓은 설교집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거기에서는 사도들과 헌신된 전도자들의 삶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외치며 선포하는 설교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가 지나가는 곳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한때 매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왜 예배를 드렸겠습니까? 중세에 암흑에서 깨어 나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당으로 모였습니다.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당으로 매일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가대의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웅장한 차임벨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제를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모인 것은 설교자를 통해서 주님께서 부으시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 인파가 예배당으로 줄을 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설교자 가운데 사보노롤라가 있습니다. 이태리 사람이었습니다. 1485년에 그때부터 5년 동안 플로렌스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수많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이렇게 물을 사람들에게 뿌리며 죄의 용서를 베풀어주고 떡과 잔을 나누어주고 먹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되어서 죄 사함을 받는 황당무계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대신에 공교한 예배의식이 자리 잡게 된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시대에 사보노롤라는 두어모 성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선지자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그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플로렌스의 시민들이 두어모 교회당으로 모였습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어두운 밤중부터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서 줄을 섰습니다. 예배당은 예배가 시작되기 전 1-2시간 전에 섰다를 내려야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서 발 디딜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서 서성이다가 어떤 사람은 무동을 타고 어떤 사람은 좌판에 올라서서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 쇠창살을 붙들고 턱걸이를 하면서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그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창살에 매달려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가 제아무리 수많은 수단과 방법으로 공교하게 교회를 이끌어가고 그리고 자기의 신앙의 갈급함을 채우려고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강단이 하늘로부터 열린 강단이 되어서 거기로부터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와 능력의 말씀의 물줄기가 하나님의 거룩한 강단을 통해서 강물과 같이 성도들의 가슴속에 밀려들고 교회에 쏟아지는 역사가 일어나서 그 물줄기로 말미암아 성령의 해갈함을 얻기 전까지는 교회에 잠들어있는 영혼들이 깨어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살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박수를 치고 노래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적막이 깃드는 것입니다. 부르짖음도 없고 하나님을 향한 통회의 눈물도 없고 죄인들이 그곳에 와서 가슴을 찢으며 참회하며 주 예수여 죄인 받으옵소서. 자기의 구원을 하나님 앞에 애원하는 기도의 함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부르심을 받고 목회하는 저희 교회는 하나님 앞에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저의 목회의 필사의 목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집회를 인도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예배의 시간, 그 속에서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들이 졸면서 드리는 그런 예배와 침묵의 예배의 시간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는 결코 침묵 가운데 드려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증거 되고 그 말씀에 하나님께서 전광석화와 같은 생명의 비상한 능력을 부으시고 그 말씀이 평범한 말씀이 강물과 같이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고 그리고 비수와 같이 죄인들의 가슴을 찌르고 그리고 상처받은 영혼을 포도주와 같이 싸맬 때 그들은 환호성을 질러야하고 그들은 슬픔 속에 흐느껴야하며 그들은 위로 속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예배의 현장입니다. 결코 예배는 벽돌로 찍어내는 것처럼 1시간에 끝낼 수 없고 그렇다고 2시간에 끝나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40분에 끝날 수도 있고 20분에 끝날 수도 있고 4시간에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한때 커다랗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였던 설교자 가운데 한사람은 쉬지 않고 7시간을 설교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규모와 질서와 규범이 있되 규범과 그 질서에 대한 준수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방해하지 않는 그런 예배가 드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시간에 결코 설교자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낙서를 하거나 주보를 읽거나 졸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람들을 주목할 수 없게끔 만드는 설교자의 설교의 내용과 태도도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말씀 가운데 강림해주시기를 사모하며 마음과 뜻을 다하고 심령을 기울여서 눈을 똑바로 뜨고 설교자룰 잡아먹을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로잡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들의 심령이 되어서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설교자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회중들에게 말하고 그 눈과 눈빛이 마주칠 때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룰 많이 하다보면 개인적으로 상세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듣지 않아도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80% 이상 헤아릴 수 있습니다. 200명의 사람이 모여도 한순간에 눈에 들어옵니다. 누가 지금 영적인 상태가 혼미하게 침체기로 들어가고 있는지 거의 정확하게 지적해낼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설교를 전하는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누구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성령의 교감이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을 다해서 당신의 말씀을 나는 다 받아들입니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 계셔도 여러분의 마음이 이 설교자의 말씀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설교자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은혜룰 받았다고 말해도 그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나를 주목하고 있어도 말씀이 그 심령 속에서 튀고 있다는 사실을 설교자는 즉각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도중에 저를 향한 최고의 대접은 명절날 제 생일을 기억하고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를 향한 최고의 대접은 설교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말하라. 내가 그 말씀을 받겠노라. 그런 태도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전해보십시오. 이 자리에 있을 때 가장 고통을 주는 사람은 아무런 기대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와서 저 구석에 앉아서 무관심 가운데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그 사람이야말로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수없이 설교자 앞에 웃어도 그때 상처받은 마음은 위로받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기라성같이 이름을 내놓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저는 그 예배에 1시간 참석하면 그 교회에 영적인 수준을 속속들이 점수를 매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그런 예배의 흐름이 예배의 시간 속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지 않는 기도, 사력을 다하지 않는 설교, 그리고 마치 새마을 성공담을 듣는 것 같은 그런 교육받는 태도에 설교를 청취하는 성도들 그런 교회는 참다운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결코 자기의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하지도 않고 따라서 가슴이 저미는 슬픔과 영적인 부담을 안고 주 앞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형식이 흐르는 것입니다. 찬송은 뜨겁게 기도는 짧게 설교는 간단히, 망하는 것입니다.
90년도에 서대문에서 내놓으라 하는 큰 교회에 30년 가까이 된 교회에 설교룰 하러 갔습니다. 수많은 학생과 성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사경회를 한다고 강사를 불렀는데 15분전인데 아무도 모이지 않습니다. 고요히 기도하면서 기다렸는데 10분전이 되자 교역자가 나타났고 5분전이 되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20분 정도 늦어졌습니다. 설교를 하러 올라가는데 강사인 저의 옷소매를 붙들면서 그 교회의 교역자가 말했습니다. 강사님, 설교는 몇 시 정도에 끝납니까? 어떻게 끝내드렸으면 좋겠습니까? 길게 하셔도 괜찮지만 9시가 지나면 사람들이 지루해할 것 같으니까 9시쯤 끝내시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후배였습니다. 전 전도사였고 그 사람은 강도사였습니다.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강도사님, 그런 것은 저에게 맡기시고 저 아래서 집회를 위해서 기도나 열심히 하십시오. 올라갔습니다. 10시 반에 설교가 끝났습니다. 이틀째 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성도들에게 놀라운 은혜룰 주실 때 검정 양복을 입은 이 강도사님이 콘크리트 바닥에 내려앉아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모습을 저는 보았습니다.
여러분, 설교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두려운 것인지 아셔야 합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고 성도들은 설교를 들음으로 하나님 앞에 영원히 책임을 질 것입니다.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고 알고도 행치 못한 자들은 더 많이 맞으리라.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런 식의 패배감이 교회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럼 뭐 하러 강사를 부릅니까? 자기들끼리 9시까지 때우고 말지 뭐 하러 강사를 바쁜데 불러요. 불러서 무슨 생각이 차있는 것입니까? 저 사람이 설교를 하러 올라가면 사람들이 지루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는데 뭐 하러 강사를 오라고 그러고 포스타를 내걸고 또 그 집회를 위해서 한 달씩 기도를 하고 시작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모순이 아닙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의 성도들이 이런 설교에 대한 패배감에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교회를 나와도 고요히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나에게 무슨 놀라운 변화가 오리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올 때 조금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오늘은 제직회도 있고 무슨 프로그램, 무슨 섬김, 무슨 봉사, 뭐, 뭐 가득 차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예배 하나가 하나님 앞에 놀랍게 드려지면 교회는 다한 것입니다. 주일은 끝난 것입니다. 그가 교회에서 특별한 구제활동을 안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심령이 녹아서 하나님을 만났고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눈빛에 부딪혔는데 어떻게 일주일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안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므로 수많은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소속감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손을 걷어붙이고 뭔가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성도인 여러분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고요히 교회에 와서 손을 모으고 사모하는 심령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여러분, 왜 신앙생활을 5년 10년 했는데 교회생활에는 익숙해져있는데 하나님과 영적인 생활에 깊이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더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십자가를 피상적으로 알고 십자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상식들이 신앙의 수준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의 자리에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 시간에 성가대가 아무리 훌륭한 음악을 해도 예배는 우리의 중심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일주일동안 생활하다 너무나 지치고 피곤하면 육신을 가진 인간이니까 예배 시간에 졸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졸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도 피곤하면 행로에 피곤하여 주저앉으셨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주 계속 되풀이 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육체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병들어있는 것입니다. 수없이 아무리 아름다운 성가를 하고 설교 시간에 존다면 그 성가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수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고 하더라도 그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기 위해서는 노래가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능력 있게 선포되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 4-5년 전에 아주 놀라운 현장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데 고등학생들을 모아놓고 180분 설교를 했습니다. 3시간입니다. 그런데 석고상을 깎아놓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예배입니다. 예배 시간에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1시간 일찍 나왔습니다. 8시부터 진을 치며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그들의 기도의 제목을 들어보셨습니까? 하나님 오늘도 전도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만나주시옵소서. 기도가 그렇게 수준이 높을 수가 없었습니다. 3시간 설교를 했는데 하는 말이 30분 흐른줄 알았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만 예배는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진리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 길에 헤매는 것같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지고 주를 위해 살고자 하나 살 수 있는 힘이 없어서 고통하며 흐느끼던 죄 가운데 빠져서 사하심을 받지 못해 곤고했던 심령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회당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하늘을 가르시고 쏟아지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기 죄악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됩니다. 치료의 은혜를 그에게 주십니다. 모든 근심과 염려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파해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폭포수와 같은 은혜와 그리고 물줄기와 같은 은혜가 메말랐던 우리의 심령을 적시고 사라졌던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울려 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예배당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어찌 그리 가벼운지요. 구름 위를 떠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말씀을 붙들며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그리워하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이런 마음으로 변화를 받았을 때 교회가 구역별로 전도를 시키지 않아도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의 교회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메마르고 곤고했던 내 심령이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기쁨을 맛보도다. 주님의 말씀에 생명의 물이 내 영혼을 적시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끊을 수 없었던 죄의 사슬이 나로부터 끊어져나가고 사망의 권세가 타파되고 생명의 놀라운 능력이 나를 지배하여 주를 위해 살게 만드는 놀라운 역사가 가슴속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에스골 골짜기에 죽어가는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그리스도는 예수라. 예수는 너희의 구주라. 그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었다. 말할 때 사람들은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를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 예수를 전하는 설교자를 전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함께 섬기는 교회를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특권과 같이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설교가 여러분의 예배가 중심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장 풍성한 만남을 갖게 될 것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교자가 누구며 누가 그를 위해 부르셨으며 그가 당하는 고난은 무엇이고 이 시대를 향한 외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전과 다름없이 백성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그분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떼를 지어서 다가왔습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당시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힐책하듯이 예수님께 묻는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자가 누구인지 대답하라.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한사람 나사렛 청년 예수가 와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 그것은 그 시대에 흔히 있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사들도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율법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또 예수는 그 사람들 중 한사람으로 여김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경을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사역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누가복음은 말하기를 백성들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서 그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로 하여금 이토록 비상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예수님의 설교가 틀림이 없습니다. 설교 내용이 무엇인지는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20장에 보니까 "복음을 전하실 새" 그렇게 되어있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전한 것은 복음을 설교할 때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질문의 요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 권세를 대라. 그 권세는 누가 주었는가. 그것은 질문은 했지만 그러나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을 설교할 권세를 대라. 그 권세를 누가 주었는가. 하나님이 권세를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으려는 그런 불신앙을 감추려는 것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피해가는 교묘한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참된 선지자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가 아니라고 밀어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약시대만 그런 게 아니라 신약시대도 똑같습니다. 내가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인간의 방식도 구태의연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항상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좋은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만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 버거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사람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의지할까, 바벨론을 의지할까? 하면서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때 양다리 걸친 그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끌려가라, 끌려가라 포로가 되어 끌려가라. 바벨론이 너희를 멸망시키리라. 너희는 순종하라. 바벨론을 섬기라. 버거운 말씀이 아니었겠습니까? 저놈은 어떻게 된 놈이기에 이스라엘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으면서 우리보고 이방인에게 끌려가고 노예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가. 저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낸 자가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서 어떻게 되어 집니까? 그가 말하는 버거운 하나님의 말씀과 메시지가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가 전하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개인의 견해니까 개인의 견해는 내 개인의 견해로 거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사도 바울에게 그런 태도로 하는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이 나중에 신앙이 변질되면서 그 사도 바울이 전한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는다. 그런 말이 버겁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율법도 행해야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르침을 거절한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열두 사도는 주님이 직접 부르셔서 세우셨고 유다는 제 갈 길로 갔고 맛디야는 교회에서 뽑아서 세웠으니까 사도겠지만 사도 바울을 부르시는 것을 누가 봤는가. 증인이 있나. 혼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는데 누가 믿어.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가 참 사도인가.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그가 전한 모든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견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불신앙이 깃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시대가 설교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방법도 동일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설교를 아멘! 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되지만 그러나 동시에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설교자만 책임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책임인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경고가 좋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드러낸 것과 교회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설교하는 것을 거짓되다고 드러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 하나님의 말씀일 때 그것을 거절하면 중대한 결과를 초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오늘날에 많은 교회가 많은 성도들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이렇게 물을 때 아멘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말 아닌 것들이 행해졌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설교를 전하는 그 직분이 그 거룩함과 존엄성에 있어서 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 그 선포가 복음을 외치는 것일수록 더욱 강력한 의심과 반대에 직면해왔습니다. 복음은 유대시대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도 그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받기가 일쑤였습니다. 대 부흥과 각성의 시대에도 복음의 선포와 그리고 역사적인 흐름의 극단적으로 대치하던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전할 새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살기어린 도전에 직면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많은 종교계의 실력자들 앞에 호위해주는 이 없이 외롭게 둘러 싸여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잃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아주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그래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어쩔래? 이렇게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우악스럽게 그렇게 했을 텐데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증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이 막 퍼붓던 비난을 멈추고 생각을 해봐야 알 수 있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라는 것이 결국 무엇이었습니까?
포도원에 주인이 있었는데 마음이 좋은 사람이던 것 같습니다. 포도원이 있고 그 다음에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망대를 짓고 짐승이 들어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두르고 심지어는 포도주를 짤 수 있는 즙 틀까지 다 만들어놓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세를 주고 먼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때가 아니라 포도의 수확기가 되어서 자기가 데리고 있는 일군 중 한사람을 자기의 소작인이 살고 있는 자기의 농지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소작료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소작을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소작이 떨어지면 오갈 데 없어서 죽어가던 그런 시대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계급이 없어서 지주에게 매어서 노예처럼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와 유사한 시대에 소작을 준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는 아무 것이 없이 빈손 들고 와서 심어놓은 포도나무가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그것을 따서 주인이 만들어놓은 즙 틀에 즙을 짜서 그래서 그것을 주인이 만들어놓은 통에 담아서 그것을 가지고 갖다 팔아서 그리고 돈을 받아서 주인의 창고에 저장해서 그렇게 잘 먹고 잘살던 사람에게 농지를 사용한 세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심히 욕하고 쳐서 보냈습니다. 반쯤 죽게 되어서 피 흘리며 보냈던 것입니다. 또 보냈더니 또 때려서 보내고 또, 또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냈더니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이비유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가만히 내버려두시겠는가. 생각해보라 그랬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사람은유다 사람이다. 공평을 바라셨더니 포악이요, 의로움을 받으셨으니 오히려 부르짖음의 열매를 맺었노라. 포도원 그러면 그 당시에 듣는 모든 사람이 아! 저건 이스라엘인데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우선 설교자를 보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 타락하고 신앙을 버린 시대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거절하는 그 시대에 사람들을 바로 농부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 20세기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그 자료를 보는 순간에 아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20세기면 개명한 시대가 아닙니까? 3천 만 명의 순교자들이 예수를 위해 죽었습니다. 우리나라 민족 하나가 사라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기독교 때문에,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순교자들이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존경하는 요한 크리스토톰, 교회의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사보노롤라 교회의 사람들에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이 포도원의 농부들은 바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설교자를 보내시는 것은 공평과 의로움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이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공경하며 사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우리들이 돌려드려야 할 당연한 몫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시대에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종 설교자를 통해 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움은 설교자들의 모든 설교 속에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중심은 결코 사람들을 위한 위로나 사람들을 위한 위안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여드리고 그리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의무를 지고 있으며 마땅히 하나님께 어떤 의무를 돌려드리고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아야할 것인지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증거하며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영광은 결단코 세상이 자기를 영광해 주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설교자의 소망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넘쳐나고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죄와 부패로 물든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비와 같이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보내시는 목적은 바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공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때로 백성들의 삶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돌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껴안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실패해서 딛고 일어나고 상처를 싸매고 일어나서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세상으로 걸어가게 하기 위해서 그와 더불어 울고 웃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상처를 딛고 아픔을 딛고 일어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이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공의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늘 하나님 앞에 마땅히 소작료를 돌려드리지 않는 성도들의 삶을 책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은 정말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마땅한 소작료를 돌려드리며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돌아보고 그렇지 않다면 말씀을 전하는 시간을 통해서 회개하고 돌이켜 열매 맺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여러분, 자장가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장가와 같이 속삭임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지옥의 불길 속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추상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가슴을 치고 회개함으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백번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오직 심판만을 설교하는 비장한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사랑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신자들로 하여금 거룩하고 준엄하신 하나님을 잊게 하는 방종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 양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능지처참을 당하신 표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모든 죄악을 하나님이 심판하신 그 심판의 자리와 그 표적이 바로 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을 전함으로 주님을 잊게 하는 오류에 빠져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는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저버릴 때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그런 고통이 설교자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저는 나이도 얼마 안 된 이제 불혹을 내일 모래 바라보는 삶을 살았지만 정말 눈물이 많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가정적으로도 그랬고 사회적으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눈물은 잠시 눈물을 흘릴 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눈을 감고 생각하면 잊혀지지 않는 슬픔이 마음속에 하염없이 흐릅니다. 지금은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2년이 흐른 동안은 기도하다가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아픔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 아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몇 년 동안 저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놀라운 일들을 보이시고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깨어났습니다. 영혼들이 정말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한쪽에서 그 설교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절하는데 고요히 고개를 숙이고 거절하는 것은 참아줄 수 있는데 예배 시간에 뚜벅뚜벅 걸어 나가면서 발길로 문을 뻥 차고 나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개인적으로 저를 불러서 당신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협박을 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이 설교가 그때 했던 설교들입니다. 뭘 잘못했습니까? 왜 그렇게 미워합니까? 용서해야지 된다는 것은 아는데 그리고 용서한 것 같았는데 가슴에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하나님, 내 가슴에 뽑힐 수 없이 박힌 이 가슴의 못을 한번만 뽑아주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완전히 상처 없는 사람으로 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던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하여튼 피어린 기도였습니다. 지금은 상당히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그런 말을 들을 때 충격을 받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교자로 보내신 목적은 결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위로하시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하고 싸매는 그 목적은 다시 성하게 나은 몸을 이끌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싸매고 다시금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피 흘려 몸 버려 죽으심으로 생명을 주셨던 아들의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며
이 세상 끝날까지 주 봉사하리니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만들게 하시기 위해서 설교자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두 번쨀 이 비유는 설교자들의 권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세 명의 종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심히 때려서 보냈고, 둘째는 심히 때리고 능욕을 해서 보냈으며, 셋째는 상하게 하고 내어 쫓았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죽음을 당하는 종과 더 많은 능욕을 받는 종들이 나옵니다. 마지막에는 죽기까지 하는 종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약에 선지자들에 대한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심히 때리기만 했는데 심히 때리고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상처를 입히고 밖으로 집어던져서 들것에 실려서 가게 만들었습니다. 급기야는 죽여 버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이 성경 본문을 읽다가 너무 너무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의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이 고난을 받고 죽은 이야기는 이해룰 하겠는데 왜 그래야했는가.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니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종입니다. 이 주인을 위해서 평생을 내 상전 위하여 평생을 바쳐서 대대로 섬겨온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힘든 것도 마다하지 않고 밤이면 졸음을 내어 쫓기 위해서 눈을 비비며 낮에는 뜨거운 햇빛도 마다하지 않고 들판에서 곡식을 거두고 혹은 목초지에서 양들을 먹이며 주를 위해 수고했습니다. 도적이 와서 주인의 창고에서 도적질하려면 생명을 걸고 칼부림을 하며 주인의 재산을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종을 보낸 것은 이해가 가는데 얻어맞고 돌아왔으면 다음에는 호위병이라도 붙여서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왔는데 그 다음 종보고 이번에는 네가 가봐라. 그 다음에는 시체가 되어서 영구차에 실려서 오는데 이번에는 네가 가라. 또 보냅니까? 무슨 주인이 그런 주인이 있습니까. 아들이 죽은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니까. 예수님에게는 좀 섭섭한 말씀인지 모르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지 않으면 우리는 어차피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미 죽기로 예정되신 것입니다. 아들이 죽는 죽음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라 계획된 죽음이었으니까 이해가 가는데 이 선지자들의 죽음은 사고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 주인에게 어떻게 충성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무정한 주인을 위해서, 이것이 내 마음을 완전히 혼미케 했습니다. 10시쯤인가 본문을 묵상하다가 새벽 6시까지 시간이 흘렀습니다. 먼동이 오를 때 아! 가슴속에 섬광과 같은 빛이 비쳐왔습니다.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전광석화 같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두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는 고난 받는 설교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전하는 설교자는 어느 시대이든 어느 시대의 사람이건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그 백성들에게 핍박과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의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백성에게 요구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할 의무를 설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설교하는 설교자에게 인기의 점수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교회 역사는 전합니다. 설교자가 고난을 두려워해야 하나님의 의로움과 백성이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공의로운 삶을 설교하지 않을 때 역사에는 흑암이 찾아왔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의 고역을 짜내면서 호화롭고 방탕한 삶을 살던 러시아의 귀족들에게 설교자들은 자장가를 부르듯 설교했습니다. 가난한 학대받는 농민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곳에 가서 말했습니다. 주인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구두에 보석을 달고 화려한 치장을 하고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모여 앉아서 다리를 꼬고 예배를 드리는 귀족의 부인과 귀족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말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을 때 동토의 땅 러시아 1917년 2월과 10월 두 번에 걸쳐서 볼시비키 혁명이 발발했을 때 귀족들과 함께 제일먼저 농민들의 도끼와 낫에 무참히 학살된 사람들이 설교자였습니다. 교회 성직자들이었습니다. 설교자가 그 시대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저버릴 때 교회는 흑암이 깃들게 되고 어두움에 사로잡힌 역사가 진리를 외치지 않는 교회룰 무참히 심판하도록 버려두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아직 러시아뿐만 아니라 해외라고는 제주도밖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 러시아에 가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도시에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교회의 동그란 돔이 있는데 금으로 입힌 것이 아니라 금을 쳐서 철판을 씌워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탈린 차하에서도 그렇고 레닌 치하에서도 그렇고 결코 없어지지 않고 우뚝 서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저것을 내버려두는 이유는 공산당도 기독교를 동의한다. 그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 아마 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사회 교육체를 합니다. 공산당이 백성들을 향해서 말한답니다. 민중들이여 우리가 너희를 저 교회로부터 구출해내어서 해방을 주었다. 교회에 억압에서 너희를 살린 공산당의 은혜를 황금으로 만든 저 돔을 볼 때마다 기억하고 감사하고 공산당에게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 시대와 교회와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지도록 부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강한 사람의 편에 서서 안 되고 연약한 사람의 편에 서도 안 됩니다. 오직 그가 설수 있는 편은 하나님 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가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서 결코 다수를 따라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있는 단 한사람을 따르는 것, 그것이 다수인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그가 주는 진리의 말씀을 강철과 같은 용기로 외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죄악 된 삶을 마주쳐서 두려움 없이 외칠 수 있는 하나님의 열정으로 무장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설교자가 이와 같은 용기와 열정이 마르지 아니하고 끌어 오르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피룰 토하듯 외칠 수 있는 살아있는 설교자가 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한 3-400명 이상 대학부를 하고 있는 저의 동역자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보고 집회를 부탁하면서 사랑의 교회입니다.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설교는 신학생(?)사람이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리라. 이 뒷부분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모든 원수들을 심판하고 멸망시킬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영원히 오늘 하루뿐입니다. 다음에 이 설교를 다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때는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번 말씀이 전해지는 한 시간 한 시간마다 여러분들은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그 만남 속에서 내 인생을 뒤바꿔놓는 진리의 말씀의 역사가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설교자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죽게까지 하면서 사랑하시지만 그리고 오래 참으시지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지만 영원히 참는 분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에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려지지 않았던 의로운 삶을 하나님께로 돌려드리는 참된 인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진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결코 가벼운 시간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세상의 상식과 농담과 웃음거리로 채워질 수 있는 시간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죽고 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배척을 받아서 설교는 남아서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자의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주님은 책임을 묻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경고 없이 일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에 땅 끝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리라.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고 설교 시간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시간인 것입니다. 늘 예배 시간은 진지하고 그리고 기대와 감동으로 가득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의 말씀이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선포, 이것이야말로 설교자가 생명을 거는 영광스러운 사역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영국의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듣는 사람을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게 해줄 수 있다면 교회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사람, 그것이 설교자의 가장 영광스러운 특권인 것입니다. 설교는 무엇입니까? 제 나름대로 정의를 하자면 죄인들인 인간이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그 길로 갈수 있는 다리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 땅에 살아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의 묵은 땅과 같은 굳은 심령이 기경되고 하나님의 의의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영광스러운 날이 올 것이라는 그 부흥의 역사를 믿기 때문에 살아가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설교자는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성도들과 다름없는 한 마리의 연약한 양입니다. 그도 산을 오르다 가시에 찔리면 아파서 눈물을 흘리는 한 마리의 양이고 고달픈 고갯길을 오를 때는 주저앉아서 흐느끼는 사람입니다. 친구들이 떠나가고 아무도 없이 외로우면 고독을 느껴야하는 가장 연약한 한사람의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은 설교 단상에 오를 적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내가 오늘 이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하나님의 설교자이기 이전에 저도 이들과 똑같이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위로와 용서가 필요한 한 마리의 양일뿐입니다. 설교자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행정적으로 유능한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이 붙드심이 없으면 그 붙드심을 간구하는 여러분들의 기도가 아니면 감화력을 잃어버리고 힘없는 설교자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외칠 때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인 것 같으나 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는 두렵고 떨려서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며 하나님 제가 이 길을 가야 합니까?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주님 앞에 때를 쓰며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의 도를 선포하고 돌아서서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울 수밖에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설교자인 것입니다. 설교자이고 또 그 설교자로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주기 때문에 오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한 몸에 싸안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쳐야 하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설교자는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아래로부터 뜨겁게 올려지는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외치는 일이 가능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 지푸라기와 같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없이 총에 맞은 짐승과 같이 흐느끼던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어질 때 포유하는 호랑이가 되어서 부르짖는 사자가되어서 여러분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시대를 휘어잡았던 설교자도 주님이 그 손을 놓으시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열린 교회를 시작하기 전 수요일 날 하늘을 향해 열린 강단을 우리 집에서 설교하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렸습니다. 설교자를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되 완전한 사람으로 믿지 말라. 여러분, 위로가 필요하십니까? 상처 난 심령을 주님이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싸매시기를 원하십니까? 설교자는 여러분의 그런 싸매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덮어주는 사랑과 따뜻한 격려가 필요한 것입니다. 고통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그 말씀이 제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말할 때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성품 속에서 의로움을 구하시는 하나님과의 풍성하고 놀라운 만남을 기대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설교자가 이 땅에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찬양이란 무엇인가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읽어드린 이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후에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 아주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 대대적인 사건입니다. 이 후에 성경을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언제든지 바로 이 14장에서 나타났던 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언제나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통하여 언제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다시금 회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처한 모든 역경과 위기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생길 적마다 그들은 출애굽기 14장 15장에서 생긴 그 이적과 노래를 다시 회상하면서 영원히 자손들에게 읽혀 들리게 하고, 출애굽기 14장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후세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계속 노래를 해 왔던 것입니다.
오늘 출애굽기 1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바로의 강권적인 허락을 받고 그리고 광야로 돌이켜 나왔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 이들이 애굽을 떠날 때에는 사실은 제사를 드리러 삼일 길 쯤 간다고 나온 것이거든요. 그러나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제사를 드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영원한 가나안 땅을 가야 하기를 원했지요. 바로가 일단 재앙을 만나서 강권적으로 할 수 없이 역사 때문에 백성들을 놓아줄 수는 없었는데 도망친 사람들이 대개 250만에서 300만까지 본다면 그 어마어마한 인구 중에서 가용 노동력만 해도 100만 가까운 장정만 60만이 넘는다고 기록에 나와 있잖아요? 그 어마어마한 인원이 애굽에서 도망쳤으니 애굽의 경제 사회 경제에 엄청난 변화와 충격이 왔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거지요. 수많은 근로자들 그것도 가장 필요한 하층 근로자들이 일시에 일손을 놓고 광야로 나가 버렸으니 웬지 섭섭한 후회가 들어서 600승의 병거를 이끌고 기동력 있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덮치면서 덤벼들어오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바로 천당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들어갈 수 있는 표를 받았을 뿐입니다. 다만 그 표가 언제든 무효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 뿐이지요.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표를 가졌을 뿐이지 천국에 들어간 것은 아니에요. 그 표를 가지고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광야를 걸어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간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광야길이라면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길이 얼마나 험악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그러겠냐고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광야 길임에는 틀림없지만 애굽에서는 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하나님의 역사를 본다고요. 애굽의 고기 가마 옆에 주저앉아서 고기국 국물이나 먹고 사람들이 먹다 남은 뼈다귀나 먹으면서 살 때 그것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광야에 나옴으로 이전에 말로만 듣고 귀로만 듣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요.
아니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홍해를 가르시는 거예요. 바위를 터쳐서 수백만이 먹을 수 있는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배가 고프다고 그럴 때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만나, 메추라기 헤아릴 수 없는 대적들이 그들을 둘러쌀 때 그들을 파멸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용사되신 그 능력, 이 모든 것들을 광야에서 경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것이 천국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손에 쥐었을 뿐입니다. 라는 말을 저로부터 여러분들이 들었을 때 실망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비록 천국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 살아가면서 천국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그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가불해서 맛보면서 맛보기로 그러면서 가는 거예요. 맛을 보여 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거기를 계속 갈 수가 있겠냐고요.
요즘 보험은 신종이 나와요. 10년 20년 또는 죽으면 준다 그러면 너무 지루하니까 일 년에 한 번씩 조금씩 주는 거예요. 여행 한 번 갔다 오라고 40세 되면 40만원 이렇게 매년 맛보기를 보여 주면서 보험료를 야금야금 내도록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를 믿고 그 길로 들어서게 하셨지만 이 광야는 고독을 씹으며 고난을 당하며 억지로 가는 길이 아니라 광야길이 변한 것이 아니라 광야를 걸으며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거예요. 애굽에서는 볼 수 없는... 물론 애굽보다 광야가 고달플 수도 있어요. 그렇죠? 광야에서는 애굽에서는 느낄 수 없는 참다운 양식이 있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애굽에서는 고기 국물로 밥을 먹으면서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는 변하지 않는 만나가 있어요. 이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노래할 이유가 있는 거예요. 왜 그래요? 주님이 살아계신 놀라운 증거를 보여 주시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드시는 거예요.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난 이제 소망이 없어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한다 너를 위하여 아름다운 낙원을 예비하였노라 그럴 때 우리는 다시금 새로운 힘이 솟아나면서 걸어가는 거예요. 광야 길임에는 틀림없지만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다 이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을 믿고 주님과의 신실한 관계 속에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복락이 너무 크기 때문에 천국을 사모하는 것이지 세상이 지겹기 때문에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아니라 이거지요. 세상을 너무 지겨워할 필요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매일 매일 주님을 찬양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에 오게 하고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서 집으로 향하게 하시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하며 기쁨으로 우리들이 살잖아요. 열심히 집집마다 전도를 했더니 지하실에 가득 와서 은혜를 받고 여러분들의 섬김을 통해서 은혜를 받잖아요. 그렇지 않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광야와 같은 세상을 비관하면서 산다고 또 아무것도 안 하면서 주님 우리를 불러만 주십시오 속히 가고 싶나이다 그러면서 살았더라면 한 20명 모여서 예배드리면서 역시 세상은 슬퍼 이런 생각이나 할 거예요. 그거 아니에요.
참된 신앙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낙관주의예요. 천국에 대한 지나친 낙관 때문에 이 세상이 천국의 소망 앞에서 빛을 잃는 것, 다시 말씀 드릴게요. 천국에 대한 소망이 너무나 극심하고 너무나 충만한 나머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이 세상 속에서 느끼는 그 즐거움과 기쁨이 빛을 잃는 것 그래서 그 하늘을 더 사모하게 되기에 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예수를 믿고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주님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계속 보이시면서 ‘오라 오라 후회하지 말고 오라’ 그런데 뒤에서 반대로 추격을 합니다. 바로의 병거들이 추격을 하는 거예요. 예수를 믿고 광야 길을 가는 데 우리는 계속해서 죄의 추격을 받는 거예요. 옛 습관의 추격 옛 행실의 추격 옛날에 먹고 마시던 것들에 대한 추격을 받는 거지요. 계속해서 들려오는 얘기가 ‘얘야 나와 같이 즐겁게 놀던 애굽을 뒤에 두고 네가 허허벌판 광야로 달려가려 하느냐 네가 정말 외롭게 그 길을 달려갈 수 있느냐’ 그러면서 애굽의 불빛 휘황찬란한 거리를 보여주는 거예요. 신자들이 받는 두 번째 어려운 점이에요. 하나는 광야길을 갈 때에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와 기쁨을 먹어야지만 광야길이 고생길이 아니고 즐거운 순례의 길이 될 수 있는데 그걸 못하면 그 광야길이 고달프게 생각되어지고, 또 하나는 뒤에서 오는 이 추격들을 뿌리치지 않으면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 하셔셔 참되게 부르셨던 가나안을 향해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추격을 해 오는데 홍해가 -- 이걸 왜 홍해라고 했냐면 물풀 중에 붉은 풀들이 많아서 물빛이 붉은 빛을 띠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하여튼 엄청난 홍해 앞에 서게 되는 것이죠. 아프리카 대륙을 시작으로 시나이 반도 쪽으로 건너오는 거지요. 이렇게 서 있는데 애굽의 병거들이 달려오는 거예요. 그러니 수백만이 완전히 코너에 몰렸어요. 이제는 바다에 수장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모세를 향해 백성들이 원망하고 어찌하여 애굽에서는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로 인도하였단 말이냐 그럴 때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미니까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다위로 불더니 바닷물이 물러가더니 바닷물이 쫙 갈라지는 거예요. 좌우에 물이 벽이 서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가는 거예요. 바다가 갈라지고 나서 마른 땅이 드러났어요. 바짝 마른 땅이에요. 물이 갈라지고 늪이 드러났으면 못 건넜을 텐데 갈라지고 드러난 땅은 아주 건조하고 메말라서 얼마든지 발에 물이 빠지지 않고 건너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러면서 건너갈 때 병거를 이끌고 그들도 들어가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온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불기둥이 막는 거예요. 그 애굽의 병거와 사람들이 그 불기둥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할 수 없게 만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다음에 불기둥이 치워지고 그들이 드디어 이스라엘이 건넜던 그 마른 길을 달리는 것이지요.
물을 건너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추격할 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죠 ‘얘야 네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 물이 다시 흐르게 하라’ 손을 다시 내미니까 벽과 같이 서 있던 그 놀라운 물줄기가 한 번에 덮이면서 그 넓은 홍해바다에 600승의 병거에 탄 애굽의 병사들이 이리저리 밀리다가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건너고 나서 보니까 수많은 애굽의 병사들이 가랑잎처럼 파도를 타고 떠돌아다니고 육지에 시체로 와서 쓰러져 있는 놀라운 광경을 모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15장에서 놀라운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가 나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이 울려 퍼지는 거지요.
그래서 여기서 31절부터 다시 한 번 보면서 원리를 찾아보려고 해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사람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홍해 건너편 언덕에서 부른 이 찬양이야 말로 정말 장엄한 찬양이었을 거예요. 가끔 1200혹은 1500명으로 구성된 찬양대가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500명씩 되는 성가대가 얼마나 자주 모여서 연습을 했겠습니까마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경외심 어린 표정을 갖게 됩니다. 이건 200만 내지 300만의 성가대예요. 그 어마어마한 성가대가 홍해 건너편 언덕을 뒤덮으면서 수많은 무리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이름을 노래하는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옛날에 어느 성가대에서 와서 특강을 해달라고 해서 이걸 해 준적이 있어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성가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가대는 홍해 건너편에 있었던 이스라엘 성가대였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한 마음으로 크게 노래를 했습니다.
그렇게 노래를 하기 전에 그렇게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우선 보았기 때문에 찬양이 터져 나왔다고 그랬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광야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죄의 추격을 받아요.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추격해 오는 죄를 완전히 뿌리치고 누가 이 세상에서 우리를 향하여 달려 들어오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이 신앙의 길에서 가로막고 우리를 믿음의 길에서 붙잡아 넘어뜨리기 위해서 다가오는 이 세상의 끊임없는 유혹과 끊임없는 죄의 추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분이 누구시냐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유혹과 죄의 추격을 끊임없이 받을 때 우리가 안전함을 입기 위해서는 도망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한 번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옛사람의 모든 추격으로부터 우리를 새롭게 건지시고 우리를 추격해 오는 모든 옛사람의 습관과 옛사람의 행실과 옛사람의 모든 잘못되고 그릇된 것들이 한 번 바다위에 수장되어지는 경험을 해야지만 비로소 힘차게 행진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뒤에서 계속 병거 소리를 듣는데 가는 길이 편하겠어요? 계속 병거 소리가 나면 광야길이 더 빨라질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강력한 추격을 받다가 하나님이 그들을 바다에 집에 넣으시고 그들을 수장시키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추격을 근본적으로 꺾으시는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제대로 가나안 땅으로 가는 발걸음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우리를 추격해 오는 옛사람의 습관과 모든 죄의 추격을 한 번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바다위에 수장되는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아니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말 주님을 찬양하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너무 어려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전부다 속에 계산서가 있어가지고 줄을 딱 쳐 놓고 요만큼 까지만 주님을 섬길게요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 있잖아요. 그 때문에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우리를 붙잡아 매는 그 많은 사슬들로부터 하나님께서 끊어주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해야 되는 거지요.
우선 찬양하기 전에 보았기 때문에 찬양했어요. 무엇을 보았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어요. 그 사람들에게 무슨 큰일을 베푸셨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추격하는 이 죄의 세력들을 완전히 타도해서 바닷물 속에 수장시키는 이 놀라운 역사를 보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진실한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미를 올려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찬양은 역시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영적인 삶이 우리를 추격하는 죄를, 우리를 추격하는 옛 사람의 성품을 하나님께서 한 번 수장시키시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때 그가 주의 이름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경험하게 되는 일이지만 깊은 회개 후에 완전한 자유함과 놀라운 기쁨이 주어져요. 완전한 패배 끝에는 완전한 흥함이 주어져요. 그러면서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되고 그 완전한 기쁨이 획득된 이후에는 그 기쁨을 소유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칠 수 없는 찬양이 메아리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그 찬양은 영으로 부르는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찬양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저는 몇 년 전에 집회를 갔는데 네 교회가 모여서 집회를 하는 거였어요. 온갖 악기를 다 동원 했어요. 북치고 꽹과리 치고 다 하면서 찬양을 30곡 이상을 메들리로 부르는데 인도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가사를 다 외웠어요. 아무것도 안 보고 부르는 거예요. 반주자와 연습을 무지하게 많이 한 거예요. 그런데 설교 시간이 되었는데 찬송 하나 더 하자고 그러니까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이 ‘아이씨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 하재’ ^^ 여러분 이런 일은 왜 그래요? 육으로 부르는 찬양은 그래요. 영으로 부르는 찬양은 ????이에요. 그래서 찬양소리를 들으면 --물론 찬양을 하면 성대가 가라앉아서 소리가 안 나올 수 있어요--영적으로 충만한 가운데 인도하면 이 찬양을 부르는 게 하나도 힘이 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쫙 솟아나오는 거예요.
어떤 때 이런 일이 일어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눈앞에서 봤어요.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겠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것 한 번 도 못 봤어요.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살았던 이 사람들은 한 번도 못 봤어요. 조상들도 이런 것 못 봤어요. 개인적으로 만나는 하나님이었는데 민족적으로 만난 하나님이 된 거예요. 이런 큰 일을 한 번도 상상해 본적도 없었어요. 그냥 여호와 만유의 하나님 이렇게 고백은 했지만 그러나 그 고백 가지고 충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끊임없이 눈을 비비며 의심했을 거예요.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나 물이 어떻게 갈라질 수가 아브라함도 우리에게 이런 걸 가르쳐 주지 않았고 이삭도 야곱도 이런 일을 행했다고 전해주지 않았는데 물이 갈라지다니 그 물로 된 벽을 만지며 홍해 사이를 건너고 있단 말인가 거기에서도 입이 쫙 벌어졌는데 홍해 건너고 나서 저런 저들도 우리를 쫓아오네 할 때에 큰 파도가 두들겨 쳐서 하늘 높이 솟았다가 바다 아래로 내동댕이쳐지는 600승의 병거와 애굽의 군대를 보면서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막 터져 나오는 찬양, 말릴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떨 때 ? 하나님의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았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거예요.
학교 있을 때 독일서 유학하고 온 음악 교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기도하려고 채플 실에 갔는데 괴기 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더래요. 이게 도대체 뭔 소린가 하고 쭈뼛하는데 가보니 교회 맨 앞에서 장애인이 있는데 손도 몸도 잘 안돌아가고 바닥이 침 범벅인데 얼굴은 거룩하더래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더래요.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그 크신 일들을 우리들이 분명히 목격을 하게 되면 그러면 가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노래할 이유가 있는 거지요.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가슴 속에서 쫙 터져 나오는 찬양을. 이렇게 하나님이 베푸신 일을 모두 한꺼번에 보고 한꺼번에 찬양할 때 그 찬양은 천사도 흉내 내는 게 불가능해요. 어쩜 그렇게 반주도 딱딱 맞아요. 악기도 별로 없는데도 찬양이 수많은 사람들이 기가 막히게 박자가 맞고 음정이 어우러져서 그 찬송을 눈을 감고 들으면 그 찬송이 꽃다발이 되어가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게 느껴질 정도예요. 쫙 빨려서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노래가 먼저 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먼저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행하시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 자기의 광야로 가는 그 길에 애굽 사람을 향하여 행하시는 그 놀라운 일과 당신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싸우시고 그들을 건지시는 구원자로 행하시는 그 놀라운 일들을 생생하게 목격했을 때 그들은 일찍이 이 땅에 없던 아름다운 노래로 천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찬양으로 200만 300만 되는 수많은 무리들이 지휘하는 사람 하나 없이도 아름답게 어우러져서 하나님의 보좌에 향기가 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찬양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원리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찬양을 하려는 이유는 그 때에 그 찬양을 통해가지고 가락에 취하면 안돼요.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찬송가 가사를 외우는 것이 좋아요. 찬양 부르는 것을 통해서 가사로 깊이 들어가서 가사가 말하고 증거하고 있는 그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찬양하는 거예요. 그럼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찬양을 부를 때 나를 위해 아니면 교회를 위해 아니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이전에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들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들이 찬양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느낌이 더 깊고 더 돈독해져서 주님과의 찬양이 되어져야 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보기 전까지는 홍해 구석에 밀려나 앉아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보자 하나님과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원망이 변하여 찬양이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더라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놀라운 사실을 직접 목격하니까 하나님을 향한 참된 찬양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어떤 때 이 찬양이 이루어지게 되었냐 하면 여호와를 경외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놀라운 역사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외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어요. 조금 전까지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과 낙심은 다 사라지고 그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깊고 간절한 찬양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어요.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이 가득 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대미문의 아름다운 성가대가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의 삶이 전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 아니고 죄악 가운데 살고 적당히 살고 그러면서 말씀과 거리가 먼 삶과 살다가 주일 날 교회 와서 노래하면 주님이 뭐라고 그러겠어요? 너희는 그 노래를 그칠지어다. 그 비파와 수금의 소리를 그만 둘지어다. 내가 너희의 노래를 원하지 않는다 제발 좀 가만히 잠자코 있어라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외함이 없는 노래는 하나님을 향한 모독이에요.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외함이 없는 찬양은 주님을 화나시게 하는 것이에요. 주님이 왜 그 수많은 사람이 정성껏 연습해 와서 비파를 연주하고 수금을 연주하는데 어디서는 비파야 깰지어다 수금아 깰지어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래놓고 어느 성경에서는 비파 소리도 그칠지어다 너희 노래 소리도 그칠지어다 수금아 그만 둘지어다 차라리 벽에다 걸어 두어라. 왜 그런 상반된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외심으로 가득 찬 찬양만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입술의 열매가 되는 거예요. 생각이 딴 데 가있고 몸이 딴 데 가 있고 입술로만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에요. 그러니까 찬양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만큼 아주 진지한 시간이에요. 그러니까 기도의 영으로 찬양하고 찬양의 영으로 기도하고 기도의 영으로 말씀을 전하고 찬양의 영으로 말씀을 듣고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하나님을 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놀라운 역사를 보자 마음속에 주님을 경외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게 되었어요. 이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능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 될 때 주님을 경외하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놀랍게 변화되는 것이지요. 그 때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거지요. 그 때에 마음의 열매와 입술의 열매가 하나가 되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는 ‘믿었더라’ 그랬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신 이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고나서 모세를 하나님 여호와를 깊이 믿게 되었을 때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찬양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주님을 신실하게 믿고 주님을 깊이 의지할 마음이 생겼을 때에. 이들이 믿고 신뢰하지 못할 때에는 노래가 다 사라졌어요. 마라에서 쓴 물을 먹을 때 찬양했습니까 어림도 없어요. 이들이 홍해에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가득 찼을 때 이들이 그것을 노래로 극복했습니까? 노래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 그리고 내 인생을 주께 맡기고 매일 매일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가기를 원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득 차오르는 신뢰와 신앙 이것이 우리의 삶에 동기가 되어 지지 않을 때 우리는 결코 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그 노래를 부름으로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이러한 찬양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찬양의 모든 준비는 악기의 준비나 소리의 준비가 아니라 영혼의 준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에요.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 계속 찬양을 해도 아무도 목이 아픈 느낌을 갖지 않아요. 울다가 웃다가 손을 높이 들다가 무릎을 꿇다가 엎드리다가 고개를 높이 들다가 눈물을 닦다가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드리는 거예요. 밤새도록 드리는 그 찬양은 목도 잘 안 쉬어요. 정말 은혜 받은 찬양은 목도 잘 안 쉬어요.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 하겠네
하나님을 향해서 큰 찬양을 가슴 속에 품고 그 때 비로소 그 옛 신앙의 선조들이 왜 그 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 이 찬송을 그치지 아니하였던가 그리고 그들이 순교를 당할 때도 마지막으로 찬양을 부르기를 원했고 고난의 계곡을 지나갈 때도 찬양으로 위로를 삼았는지 우리는 경험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찬양은 가사가 훌륭해야 되요. 곡도 훌륭해야 되지만 가사가 훌륭해야 되요. 가사가 우리들을 성경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개혁시대에는 시편에다 직접 곡을 붙였어요. 다른 노래 안 부르고. 무슨 찬송가 가사든지 찬송가의 탁월한 강점은 그거예요. 깊이 가사를 묵상하면서 부르면 성경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리며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 쭉 찬양을 부를 때 우리는 마태복음 27장이나 누가복음23장이나 요한복음 19장을 묵상하지 않고 이 찬송을 부를 수 없는 거예요. 우리를 자꾸 데리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뜻도 없고 의미도 없는 내용들이 반복되는 가사를 가지고 곡에 흥겨워서 부르는 것은 참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을 믿는 깊은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우리 속을 잘 들여다보세요. 찬양할 수 없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그 얽매인 것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여러분 아까 부른 그 찬송 하나를 부를 때도 얼마나 수많은 딴 생각이 오고 갔습니까? 왜 그래요? 이 찬양은 입술과 가사로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영혼으로 부르는 찬양입니다. 그러면서 그 찬양을 듣는 회중들에게는 그 찬양이 영으로 부르는 찬양인지 육체로 부르는 찬양인지 느껴져요. 성도들이 주일날 모여서 쭉 찬양을 해 보면 일주일의 삶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느낄 수 있는 거지요. 일주일의 삶이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서 우리를 향해 도전해 오는 죄악의 요소들을 하나님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거꾸러뜨리시고 우리를 향해 도전해 오는 사단의 세력들이 우리 앞에 피 흘려 쓰러지고 거꾸러지는 역사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위대하고 큰일을 보고 그것 때문에 우리 속에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아침마다 새로워지고 우리의 하나님 선하신 좋으신 우리의 주님을 향한 찬양이 매일 저녁마다 견고해졌다면 주일날 모여서 드리는 우리의 찬양은 정말 힘 있고 장엄한 찬양이 될 거예요. 얼마나 멋있겠어요? 찬양을 부르면 눈물이... 그 크신 하나님 사랑 어찌다 말로 할 수 있는지요 찬양을 하면서 우리는 이미 우리와 똑같은 고백을 하고 죽었던 신앙의 사람을 보는 거지요. 앞서간 성도들과 우리들과 미래에 태어날 우리의 후손들과 하나의 교회가 되어서 같은 감정과 느낌을 가지고 부를 때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찬송을 올려 드리는 이런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찬양을 잃어버린 교회와 찬양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공교하고 아름답게 부르는 찬양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찬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언제든지
만세 반석 열리니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우리를 그 누구도 해할 수 없는 안전한 바위에 보호하시는 십자가의 보호의 위대한 능력이 그 찬송을 부를 때 가슴에 쏟아져 감격으로 치밀어 오르는 그는 영으로 찬양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거니와 그들이 곧 이 일을 잊어버리고.. 이 일을 잊어버릴 때 찬양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잊어버릴 때 찬양도 잊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단물을 쏟아내던 우리의 입에서는 원망과 미움과 불평과 추악한 말들이 호수처럼 쏟아져 나와서 이것이 우리의 온 몸을 더럽히고 우리 지체를 더럽히고 교회를 더럽히는 이런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는 애굽의 사람들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본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경험하고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굳게 믿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서 찬양하는 이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이때에 그랬습니다. 언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 그 때에 찬양이 터져 나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으로 찬양을 부르니까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정말 영으로 찬양을 부를 때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나가고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때 그 찬양이 주는 메시지, 그 메시지에 깃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거꾸러지고 자복하고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찬양을 통해서 치유하시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 상태가 되면 찬양하는 상황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그 찬양을 지배하시고 인도하시는 찬양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부를 때에 우리는 이런 일들을 수없이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 때에 바로 그런 때에 이 찬양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오늘 뭐라고 그랬냐면 이 찬양을 부른 사람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다 그랬어요. 이런 찬양이 일어날 때 성가대가 부른 것이 아니에요. 교회의 찬양의 가장 큰 기본은 모든 사람이 한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에요.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젊은 사람이나 연로한 사람이나 모두 하나가 되어서 부르는 것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하고 섞일 수 없는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백성 중 누가 모세와 같이 독특한 사명을 받았어요? 이스라엘 백성 중에 누가 모세와 같이 탁월하게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모세가 받은 사명처럼 구별되고 탁월한 사명을 받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체험에 있어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구별되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입법자요 중보자라고 하는 직분 면에 있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완전히 구별된 사람이었어요. 그는 하나님이 보낸 대리자였죠. 구별된 자이죠.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능력과 그 모든 것에 있어서 구별 되었어요. 그 모세가 오늘 그 모세가 모든 백성과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하나의 노래로 노래했던 것이지요. 찬양은 바로 우리를 이렇게 하나 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가대가 아니라 모세와 모든 이스라엘이 온 몸을 다해서 우러나오는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리게 되었던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찬양을 통해 사람을 하나로 묶으셨습니까? 노래 때문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 되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조금 아까까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완전히 고독한 자였습니다. 너 그럴 수가 있느냐 애굽에 매장지가 없느냐 왜 여기 몰고 왔어 막 대드는 것이지요. 아무도 모세편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모세여 당신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그러면서 모세와 손에 손을 맞잡고 한 음성으로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리게 되었는데 무엇이 그것을 만들었어요? 커다란 하나님을 만나는 이 놀라운 역사 이것이 사람들을 참되게 하나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참되게 만나는 신앙을 교회가 깊이 경험하는 것만이 사람들을 하나 되게 만드는 거예요. 부흥만이 하나님을 한 마음으로 만들 수 있어요. 부흥만이 모든 사람에게 참된 사랑을 심어줘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조건 없이 사랑하고 하나 되게 만들어 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베푸신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만 본 것이 아니라 모세도 보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모세와 백성에게 공히 생겼고 그리고 여호와를 믿는 마음이 모세와 이스라엘 모두에게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속에는 지도자를 향한 깊은 신뢰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지도자와 함께 한 동아리가 되어 함께 찬양을 돌리는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조금 더 보니까 뭐라 그랬냐면 1절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의 노래로 함께 불렀는데 누구께 불렸냐면 여호와께 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찬양을 하는 자세나- 말씀을 듣는 자세도 마찬가지겠지만-찬양을 할 때 언제든지 무엇을 바라보냐면, 자기의 설움과 감정에 빠지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찬양을 부르면서 우리들이 깊이 묵상하고 깊이 생각해야 될 일은 무엇이냐 하면 내 자신의 처지가 아니라 그런 처지 앞에 서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찬양을 부를 때 그 가사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깊은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거지요. 찬양은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가사 속으로 쭉 들어가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무엇이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파를 치고 수금을 켜면서 찬송을 부를 때 사람을 향해 부른 것은 아니잖아요? 쉽게 말해서 가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참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 찬양을 하는 사람, 노래를 부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이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과 주님이 행하신 그 놀라운 일과 그 구원하시는 역사와 이전에 행하신 일과 지금 행하시는 일과 앞으로 행하실 일 또 행하실 그 분 또 행하시고 계신 하나님 행하신 여호와 이러한 인격과 그분의 사역 거기에 우리의 깊은 묵상이 가 닿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 드려지는 노래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여호와를 향하여 이 기이한 일들을 본 후에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노래하니 일렀으되’ 거기에는 찬양의 두 요소가 한꺼번에 나와요. 노래=가락 일렀으되=가사. 가락이 없는 찬양은 참된 찬양이 아니에요. 또 가사가 없는 찬양도 참된 의미의 찬양이 아니에요. 분명히 이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의 찬양이지만 곡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했습니다. 그 노래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실었어요. 이것이 가락입니다. 그리고 ‘일렀으되’ 그 찬양이 곡으로만 사람을 즐겁게 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가사가 있었어요. 그 가사를 오늘 다 읽어드릴 수는 없지만 그 중에 오늘 읽은 첫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시며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면서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구원이요 노래이시도다 이것이 시편 시인들이 무수하게 써 먹잖아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참다운 영적인 가사가 어디서 우러나오는 것이었어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 빈 말을 하지 않아요. 그는 높고 영화로우시며- 이유가 있어요. 왜? 선생한테 배웠도다 그게 아니에요. 우리를 추격하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찬양을 부를 때 실지로 자기가 체험하고 목격하고 보고 생생하게 체험한 바가 찬양의 이유가 되는 것이에요. 그 때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찬양이 되는 것이에요.
찬양은 성도의 신앙의 체험에 묶이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신앙의 체험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부를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렇게 우리를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들을 이 홍해 바다에 수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해야 해요.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해요. 이전의 나의 신앙생활 30년 40년 혹은 50년을 살아오는 동안 보지 못했던 --언제 보았어요? 430년 동안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못 보았어요- -이렇게 홍해를 가르시고 그래서 우리를 추격하는 모든 죄의 세력과 우리를 억압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할 수 없게 만드는 죄와 악의 세력들을 바다에 던지시고 수장시키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유로운 영혼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만드시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신앙의 역사를 먼저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참된 변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되게 노래하기 위해서. 이렇게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를 적마다 우리에게 부족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마음에 가득 차있지 못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 이것들을 반성하면서 선조들이 그 찬양을 통해서 충만하고 풍부하게 고백했던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체험하면서 우리들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찬양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반성을 촉구합니다. 찬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이 찬양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속에 이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해 주시도록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이에요.
여러분 그러면서 우리는 이 찬양을 통해 큰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 위대한 일들을 행하신 경험이 아직 없다면 우린 전심으로, 하나님 정말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터져 나와서 누구도 막을 수 없게 하늘을 향해 솟아 나오는 그 찬양의 진수를 우리가 경험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 때까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원리와 방식 속에서 찬양했던 그런 믿음을 본받으면서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찬양을 부르면서 주님이 선배들에게 행하신 그 큰일 그러므로 그 큰일들을 필요로 하는 나의 영혼 그리고 그 큰일들을 기대하는 우리의 믿음 끊임없이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깊이 기도하며 나아갈 때에 분명히 찬양은 여러분에게 놀라운 감화를 불러일으킬 것이에요.
그래서 찬양 부를 적마다 그 체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더욱 감격하게 되고 그 체험이 없는 사람은 그 찬양을 인하여 더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놀랍고 완전한 사랑과 그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이에요. 하늘나라에 가서도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때는 음치도 노래 잘 부르는 사람도 없는 모두 기막힌 성가대가 되어서 한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며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는 하는 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생명수 물을 마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을 다 마칠 때 눈물에 젖은 찬송가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면서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내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 찬양이 하나님을 향한 내 인생의 반려자가 되어 주었노라 고백하며 물려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헌금이란 무엇인가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매일 이 시간에는 오후에는 예배에 관련된 것들을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헌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여러분 오늘 이 고린도 후서 8장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귀한 교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충분치 않을 정도로 우리에게 귀한 복음 진리의 일면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란노에서 나온 어느 만화책을 보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풍자한 만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어느 성도가 그림에 보니까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돈을 바칩시다. 할 때 이 성도가 벌떡 일어나면서 웬 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밑에 제목이 붙어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성도들의 사장 민감한 영감대, 성감대가 아니라 영감대. 그러니까 가장 예민한 영감대가 바로 돈이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이 헌금이 우리가 왜 이 헌금을 헌금 통이 마련되어있지만 들어오면서 넣지 않고 예배 시간에 굳이 시간이 걸리는데도 일일이 손으로 헌금 주머니에 손을 넣도록 하는지 이 원리가 왜 바른지를 오늘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고린도 후서 8장 1절부터 5절까지 읽었습니다만 한 번에 설교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고린도 후서 8장이 나오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 이런 편지가 보내지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바울로부터 전파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린도가 세워진 도시는 항구도시였고 아주 부요한 지방이었습니다. 항구에서 수많은 물건들이 모여들고 있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항구 도시에서 부요한 가운데 생활하고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 후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처음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많으니까 방문을 하고 또 다시 갔다가 에베소로 다시 갔다가 또 다시 방문을 하고 짧게 두 번 방문을 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짤막하게 두 번을 심방할 바에야 차라리 한번을 가서 오래 있으면서 이 고린도에 있는 많은 잘못된 문제들을 바로 잡아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고린도 교회에서는 강한 바울을 향한 비난이 일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비난은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이 바울을 반대하며 퍼트린 그런 유언비어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정말 사도인가? 열두 사도는 예수님이 직접 세웠지만 그러나 바울이 언제 예수를 본 적이 있는가. 봤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기 얘기고 누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참으로 사도 된 것을 자기가 사도되었다고 말할 뿐이지 그 사도된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는가. 사도직에 변증, 그것뿐만 아니라 또 더 심각한 것은 두 번 온다고 해놓고 왜 다시 취소하고 한번 오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 이것은 신실성이 없다. 이렇게 신실성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을 정말 신빙성이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아무튼 그를 비난했고 마지막에는 추측하건대 어떤 문제까지 벌어졌는가 하면 예루살렘이 큰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었을 때 그때 이방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합력해서 연보를 모아서 예루살렘을 도왔는데 그것을 사도 바울이 챙긴 것 같다. 그런 소문을 낸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8장에서 헌금에 대해서 자기가 정말 깨끗한 사람이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고린도에서 거짓 선생들이 재정적으로 의혹이 있다고 사도 바울에게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고린도 후서 8장에서 지금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마게도냐 교회에게 주신 은혜룰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조금 아까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마게도냐 교회는 얼마나 행복한 교회일까? 사도가 세운 교회가 한 둘입니까? 사도가 다녀서 전도한 곳이 한 두 곳입니까?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교회를 전도했는데 고린도 교회를 바로잡기 위해서 너희들이 아무데를 본받아라 말할 때 사도의 마음에 첫 번째 떠올랐던 교회는 마게도냐 교회였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마게도냐 교회, 그러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가슴이 찡하도록 가슴에 밀려오는 커다란 감동이 있는데 그 감동이 무엇인가 하면 수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이 마게도냐 교회가 넘치는 헌금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보가 거액의 연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이 마게도냐 교회가 어떤 정도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렸는가 하면 이 마게도냐 교회는 그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많이 헌신할 수 있었던 좋은 특징들을 마게도냐 교회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를 못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부요한 교회였고 고린도 교회는 평안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항구에 인접해있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이름 있는 사람들도 아마 고린도가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또 마게도냐 교회는 그런 이야기가 없지만 고린도 교회에는 아무튼 성령을 많이 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은사를 많이 받고 방언을 받고 능력을 받고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많은 역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마게도냐 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하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환난이 닥쳐왔는데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환난이 하나 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환난이 그 교회에 불어 닥쳤습니다. 특별히 이 마게도냐가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 지방입니다. 그러니까 로마가 제국을 한손에 넣기 전에 그 이전의 지배가 바로 여기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로마의 특별한 압박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특별한 압박을 받으면서 더군다나 여기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제국 중에서도 심한 수탈이 행해지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정치적인 핍박과 경제적인 수탈과 종교적인 핍박이 함께 가해지던 그런 불미한 지방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환난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가 그 환난 가운데서 많은 시련을 당했습니다. 시련이 한 번의 시련이 아니라 파도와 같이 수없는 시련이, 그래서 사도 바울조차도 그 마게도냐에서 계속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를 기억하면 환난과 시련이 한없이 많이 받은 교회, 그 교회가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교회였습니다.
많은 환난과 그리고 시험이 그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정치적인 압박이 오는가 하면 경제적인 수탈의 시련이 오고 그러는가 하면 종교적인 핍박이 그들 가운데 불어 닥쳤습니다. 하나가 끝나면 또 하나가 오고 작은 시험을 넘고 나면 더 큰 시련이 그 교회를 압박했습니다. 마치 받아들인 그 복음의 불꽃을 시련과 환난으로 꺼버릴 것처럼 안팎에 있는 악한 원수들이 갓 태어난 교회에 시련의 바람과 환난의 폭풍을 끊임없이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던 이 순수한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이 와서 무엇을 뛰어넘고 시련이 와서 무엇을 뛰어넘고 가더라도 시련이 뿌린 것이 기름이 되고 환난이 뿌린 것이 기름이 되어서 오히려 이 마게도냐 교회의 신앙을 더 불꽃과 같이 타오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의 수많은 시련이 이 교회에 불어 닥쳤던 것입니다. 그 환난과 수많은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마게도냐 교회는 사도에게 있어서 고린도 교회를 일깨우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러니 환난이 이 신앙생활에서 많으면 물론 그 신앙이 잠시는 곤고하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시련이 한번이지 소나기와 같은 시련이 한번 와보십시오. 그런 시련 당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리 피하려고 하면 시련의 불덩어리, 저리 피하려도 시련의 불덩어리, 뒤로 돌아가려해도 시련의 폭풍우가 몰아칠 때 그때 우리는 믿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런 환난과 많은 시련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고 그분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남은 교회는 오히려 그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더 놀랍게 시련 가운데 드러내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 잘 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불꽃이 타오르면 불이 장작불 같은 것을 조그맣게 탈 때는 아무리 잘 타는 나무라도 큼직한 거 하나 갖다놓으면 연기가 나면서 꺼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공업용 화로를 보셨을 것입니다. 훅 하면서 아주 강력하게 타오릅니다. 쇠를 집어넣어도 그 쇠가 불꽃을 더 일으키는 재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소유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믿음을 지켰던 이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과 시련이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드러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소망 인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오히려 더 진한 불꽃으로 타올랐습니다. 보십시오. 어두운 세상에서 그의 인생을 마치 그리스도 예수를 밝히 보여주려는 듯이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자기의 인생을 드렸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시련과 환난을 겪지 않은 성도들은 이런 영광스러운 생애를 살았던 성도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영광, 고난과 영광은 친구입니다. 이 마게도냐 교회가 환난의 많은 시련을 당하지만 오히려 이들의 믿음이 더욱 찬란하게 타올라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이 세상이 주님의 그 은혜의 불을 끌 수 없음을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는 환난의 많은 시련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가난했는지 사도 바울이 가난한 교회, 그러면 마게도냐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교회, 마게도냐 그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이번에 집회를 가서 확실히 강남의 집회하고 틀리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헌금 봉투가 수없이 올라오는데 전부다 만원, 이 만 원, 오천 원, 삼천 원 그렇게 올라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가 바로 그렇게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얼마 안 되는 재물을 다 수탈당하고 그렇게 어렵게 연명하고 살아가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부자였습니다. 얼마나 부자였는가 하면 애찬식을 하는데 애찬식이라 하면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랑의 만찬을 하는 것인데 돈이 있는 사람, 요즘으로 말하자면 요만큼씩 자기가 만든 음식을 싸와서 같이 나누면서 사랑을 나누는 것인데 요즘으로 말하면 돈이 있으니까 그까짓 것 그렇게 해서 뭘 해. 전화를 해서 부페집에다가 한 사람 앞에 삼만 원씩 하는 음식을 해오라고 해서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먼저 먹고 없는 사람은 구석에서 손가락 빨면서 쳐져있고 이러는 일들이 일어나는 교회였습니다.
돈이 많고 항구 도시여서 돈의 흐름이 풍부한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고린도 교회는 그 예루살렘의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도 잘 돕지를 않았습니다. 부요한 사람들이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부요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극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환난이 헌금을 많이 내는데, 풍성한 연보를 냈다고 하는데 그 풍성한 연보는 내서 하나님 앞에 넘치는 헌신을 하게 하는데 환난이 도움을 주었습니까, 아니면 시련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헌신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까, 아니면 극한 가난이 이 마게도냐 교회로 하여금 풍성한 헌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기여했습니까? 다 부정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환난을 극복하고 시련을 넘어서고 극한 가난을 물리치면서도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헌금할 수 있었던 것은 딱 하나가 나오는데 기쁨입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의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느니라. 고린도 교회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 놀라운 기쁨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 기쁨이 이 속에 차고 넘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뭔가를 드리는 동기가 되어질 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 예배의 순서 중에서 가장 훌륭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하는 그 시간은 돈을 내는 그 시간이 아니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의 넘치는 기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그것이야말로 영적인 예배 순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많은 초대 교회들이 헌금함을 놓는 것은 후대에 생겼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예배 순서 속에 헌금을 드리는 것이 전통적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는 이런 순서가 얼마나 영적인 순서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심하게 얘기하면 하나님 앞에 넘치는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돈이 아니면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예배룰 드리는 요금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게도냐 교회가 하나님 앞에 이 큰 헌금을 드린 자체를 지금 사도 바울이 칭찬하는 것입니까? 너희가 이렇게 거액을 후원해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에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은 마게도냐 교회가 드린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그런 헌신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보이지 않은 마게도냐 교회 내면 속에 깃들어있는 그 무엇, 그것을 알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보면서 너희들이 영적으로 우리들이 은사를 받았다. 뭘 받았다고 떠드는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그 무엇을 결핍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깊이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를 함에 있어서나 (?)하고 있어서나 돈을 의지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보십시오. 아니 환난이 많고 시련도 많고 극도로 가난한데 그렇게 풍성한 연보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기쁨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그럼 어떻게 모든 물질이 많은 그런 고린도 교회에는 없는 기쁨이 마게도냐 교회에는 있으며 환난의 많은 시련을 받으면서도 그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곱게 간직해서 결국은 마음속에 넘치는 기쁨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이유가 바로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아니 오늘 여러분, 이런 기쁨을 소유하기를 원하시면 아멘 하십시오. 기쁨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멘! 이런 마음에 차고 넘치는 기쁨이 없는 봉사는 정말 본인도 힘들고 교회도 힘듭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이런 놀라운 기쁨이 있으면 피곤하지도 않고 주를 위해서 한없이 섬기고 봉사를 해도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아! 오늘은 뭘 하나님 앞에 갖다 바칠까? 이것이 마음속에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까? 넘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기쁨이 마게도냐 교회에 있었습니다. 기쁨이 환난을, 환난이 도전장을 내놓을 때 그것을 물리쳤습니다. 시련의 파도가 밀려올 때 기쁨이 높이 올라가면서 잠잠할 지어다. 환난이 파도와 같이 밀려올 때 마게도냐 교회가 벌벌 떨면서 겁을 내야지만 파도가 더 힘이 나서 으르렁 거리며 소리를 칠 텐데 으르렁 거리는 파도 소리보다 더 큰 웃음소리가 마게도냐 교회에 가득했습니다. 시련이 아무리 으르렁 거려봐야 말발이 서지 않습니다. 가난이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난하게 다 돈을 뺏기고 세금으로 수탈당하고 그렇게 가난하게 마귀가 한 번 더 가난하게 해보는 것입니다. 계속 가난하게 되었는데도 마음이 놀라운 기쁨이 넘치니까 그 가난으로도 그 기쁨을 소멸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직장에 다녔을 때 한 자매를 전도했는데 성경공부 시간에 예수 믿고 난 다음에 가장 큰 변화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아주 간단한 말로 답변했는데 전도사님, 저는 예수를 믿기 전에는 만원 한 장을 주머니에 안 넣고 다니면 불안해서 못 다녔습니다. 그때 만원은 꽤 컸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서는 토큰 하나만 있어도 마음이 너무나 기쁘고 평안해요.
이 교회가 바로 그런 기쁨을 소유했습니다. 어떻게 이 기쁨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까? 사도가 말합니다. 그 기쁨의 원인은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그 은혜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니까 이 교회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을 충만하게 소유한 그런 교회로 변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이 교회는 환난과 시련이 꺾을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을 성도들의 삶 속에 차고 넘치게 된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졌는데 은혜가 떨어진 사람보고 너희는 서로 관용하라. 관용이 됩니까? 조그만 것 하나만 봐도 신경질이 확 나는데 그런데 어떤가 하면 마음에 놀라운 기쁨이 넘치면 어떤 일이 생겨나는가 하면 그냥 너그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너그러운 마음, 환난의 많은 바람이 불어와도 그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 마음속에 있으니까 너무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난이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쁨,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런데 환난이 오고 시련이 와도 우리의 육신을 괴롭힐 뿐이지 우리의 영혼에 함께 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빼앗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은 요리저리 변덕을 부리지만 주님이 주신 기쁨은 견고합니다. 이 기쁨을 마게도냐 교회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은혜를 마게도냐 교회가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자.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받자.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놀라운 은혜가 아니고 무엇으로 이 교회가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까? 이 교회가 무엇으로 그 많은 시련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마게도냐에 살고 있는 마게도냐 교회의 교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틀린 사람이었습니까? 고린도시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었습니까? 다른 도시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었습니까? 똑같은 연약한 육체의 성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통이 싫고 즐거운 것이 좋고 궁핍한 것을 멀리 하고 싶고 부요한 것을 원하는 그런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게도냐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자 이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꺼이 자기에게는 없을 것 같은 그 놀라운 헌신을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헌신을, 이것이 바로 마게도냐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만이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환난이 졸지에 물러가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환난 속에 서있는 우리를 그 은혜는 바꾸어줍니다. 전에는 환난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고 낙담하고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되내었는데 환난은 그대로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우리를 바꾸어놓습니다. 그래서 그 환난 앞에서 바꾸어진 우리는 이 환난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이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더 크고 견고하고 놀라운 은혜를 사모하고 그것을 붙들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면서 오히려 이 마게도냐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교회는 이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환난 속에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왜 이 시련이 있고 환난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가 더 놀랍고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환난과 시련 속에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살고 그 믿음 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넘치도록 헌신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늘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세상이 마음대로 변해줍니까? 그리고 예수를 잘 믿으면 우리 앞에 있는 걸어가는 인생길이 갑자기 확 갈라지면서 고속도로가 나타납니까? 물론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를 믿은 즉시 그렇게만 만들어주신다면 여러분들 중에 나를 포함에서 그 누구도 사람답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갈 사람이 없습니다. 환난을 통해서도 얼마나 깨닫게 됩니까? 시련을 통해서도 얼마나 깨닫게 됩니까? 그런데 무엇입니까? 환난과 시련을 당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마게도냐 교회를 하나님이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큰 가난 속에서도 마게도냐 교회는 그 가난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아니하고 그 가난 속에서 오히려 무엇을 묵상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가난해지였을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한없는 은혜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시련과 환난을 당하면서 야, 재수 옴 붙었다. 더럽다. 금년 빨리 지나가라. 한해가 지나가는 달력에다 소금을 뿌려본들 그것이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됩니까? 마게도냐 교회는 깊은 은혜를 하나님께 받으니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놀랍게 마게도냐 교회를 바꾸어놓고 드디어는 마게도냐 교회는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진 교회도 아니었고 2차 전도여행 때 겨우 복음을 들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맨 처음 복음을 들었던 선배, 설립에 있어서는 선배들이 기라성같이 많았지만 나중에 창립된 이 교회가 모든 교회를 향해서 사도 바울이 나는 모든 교회들이 마게도냐 교회만 같으면 원이 없겠다. 이렇게 추천하는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환난을 많이 겪고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무엇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예루살렘이 흉년이 들었다. 수많은 형제들이 굶는다고 하더라. 그래도 우리는 극도로 가난해도 굶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난한 살림에서 돈을 모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돈을 일 년 동안이나 모았습니다. 그러면서 풍성한 연보가 되어서 드린 것입니다. 그 풍성한 것은 보이는 것은 돈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넘치는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마게도냐 교회에 신실한 신앙의 넘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풍족한 헌금을 예루살렘을 위하여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이런 교회로 바뀌어졌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힘대로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였고 자기를 스스로 추천했다고 그랬습니다. 뭘 위해서 추천했습니까?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우리도 끼어주십시오. 그리고 사도에게 사정을 한 것입니다. 우리를 빼놓으시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오는 구제물자를 나누어줄 때 우리를 빼놓으면 큰일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넘치도록 헌금을 하는 이 고난에 처하고 가난에 처한 예루살렘을 돕는 이 일에 우리들을 빼놓으시면 큰일납니다. 그러면서 계속 사도 바울에게 졸랐습니다. 뭐라고? 성도를 섬기는 일에 우리들도 동참시켜주십시오. 사도여 혹시 우리 교회를 보고 마게도냐 교회는 가난하니까 이 사람들은 제외시키자. 그러면 우리가 가만히 안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스스로 추천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를 위해서 이일을 수고해주시겠습니까? 목회자가 자기 회사에 와서 일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배를 (?)그래서 목회자들이 하는 흔히 이야기가 아니 꼬와서 목회를 못하겠다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교회에 대한 충성을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니까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늘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섬길 것이 없을까? 늘 고민을 하고 그 섬기는 일에 자기를 써달라고 언제든지 애원합니다.
제가 그래서 총각 때 신앙도 별로 없었을 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군목 목사님을 만났기에 목사님, 목회하시면서 어느 때가 가장 행복하셨습니까? 그러니까 교회일로 곤고해있을 때 신실해 보이는 형제나 자매가 찾아와서 목사님, 제가 이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주님을 위해서 이 교회에서 봉사하기를 원하는데 그 일이 가장 천한 일이라도 좋으니 제가 섬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할 때 가장 위로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흉내를 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오기 전에 세 번째 교회, 5년 동안 있었던 교회에 두주쯤 출석을 한 다음에 목사님께 가서 무릎을 꿇고 제가 몇 년 도에 세례를 받고 전에 있던 교회에서 무엇을 봉사를 하고 지금은 어떤 직장에 다니고 섬기고 있는데 목사님, 이 교회에서 제가 할 만한 일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성심껏 교회에 있는 동안에 목사님 목회를 돕겠습니다. 너무너무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5년 봉사를 했습니다. 힘에 진하도록 하나님 앞에 봉사할 때 주님께서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큰 은혜를 거기서 주셨습니다. 그래서 소명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까?
여러분,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봉사를 하면서 자기의 이름이 높아지겠지. 이런 것이 동기가 된 사람은 주님 앞에 끝까지 충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마게도냐 교회를 붙잡으니까 마게도냐 교회가 뭐 헌금을 해서 사도 바울이 끌고 다니는 전도대 주보에 맨 앞에 나오고 싶어서 지금 이 헌금을 한 것입니까? 세상에는 그런 이유 때문에 헌금을 하는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마게도냐 교회로 하여금 환난과 시련과 많은 가난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다 드리는 일에 자기를 빼놓지 말아달라고 자원하면서 손을 들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지만 주를 위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은혜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를 위해 죽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에 주를 위해 죽었던 위대한 성도들이 그 훌륭한 은혜의 생활이 죽기 직전에 생겼던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계속, 순교 말고 할 수 없이 죽은 사람 말고 정말 기쁨으로 순교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그 은혜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주께서 바라실 때 아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손드는 이런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마게도냐 교회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집회에 다른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많은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은혜를 받고 그렇게 주를 위해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에 특징이 마지막 또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돈을 빌렸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헌금을 드리기 전에 이 교회는 자신을 먼저 드린 교회라고 사도가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돈을 먼저 드린 교회가 아니라 자신을 먼저 드린 교회였습니다. 세상에서 기분파로 노는 사람들이 아직 제대로 거듭나지도 않았는데 교회에 와서 그 기분을 푸는 사람을 가끔 보았습니다. 옛날에 거듭나기 전에 저희 아버님이 그러셨습니다. 옛날에는 좀 넉넉히 살았으니까 온 교회 식구들을 전부다 불러놓고 윳놀이를 하고 윳도 자기가 사고 장소도 자기가 제공하고 음식도 자기가 내고 상품도 자기가 준비를 하고 그러면서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교회는 헌금을 먼저 드린 교회가 아니라 자신을 먼저 드린 교회였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법원에 제소를 했는데 십일조 반환 청구 소송을 했습니다. 고소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십일조를 내면 복 받는다고 해서 그것을 믿고 5년을 드렸는데 복은커녕 쫄딱 망하니까 교회룰 걸어서 그 십일조를 달라고 고소를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덜컥 내놓고 나서 나중에 후회하고 심지어는 목회자에게 전화해서 약속헌금 낸 것을 취소시켜 줄 수 없냐고 하는 사람들도 저는 봤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귀한 물질을 드리고 오히려 시험에 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돈을 먼저 드리니까 이런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사도가 아마 요만큼 쯤 바쳤으면 하는 그런 목표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훨씬 지나쳤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돈을 바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렸더니 거액의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큰 구제사역을 하고도 시험에 들지 않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섬김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아낌없이 드리는 사람은 자기에 속한 모든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종이 자기의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가 종이면 자기 자식도 주인의 재산이고 주머니에 있는 모든 것도 다 주인의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니까 이 교회는 먼저 자신을 주님 앞에 다 드렸습니다. 고통당하는 예루살렘을 보면서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실까? 우리가 그 고통을 나눌 수 없을까. 그리고 고민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 앞에 넘치는 헌금을 할 때 시험에 든 것이 아니라 이 헌금과 연보를 통해서 이 교회는 오히려 더 신앙이 견고해지는 놀라운 은혜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가 이 마게도냐 교회를 강하게 사로잡으니까 이 교회는 돈이 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돈이 하나님을 섬길 기회인 달란트로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쓸 수 있는 이런 교회로 변화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놓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는데 있어서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더 크고 유명한 고린도 교회였지만 지금 후배 교회로부터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잘사는데 있어서는 마게도냐 교회보다 앞지르고 성령의 은사를 받는데 있어서는 마게도냐 교회보다 뛰어난지 몰라도 마게도냐 교회가 받은 은혜를 너희가 알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간절히 바란다. 마게도냐 교회에 은혜가 임하니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리고 성도들을 섬기는데 있어서 나를 써달라고 손을 높이 들고 사도에게 자기들을 그렇게 써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이런 자원하는 헌신을 이들에게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해도 마음속에 그렇게 살고 싶은 뜨거운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해결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 뭔가 줄에 매어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 살지 못하는 구속을 받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한 해결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는 교회를 바꾸어놓고 사람을 바꾸어놓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일에 없어서는 안 될 유일한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에서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던 그런 암적인 존재를 변화시켜서 오히려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고 새롭게 고치는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지 않았을 때 사도 바울을 섬겼고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는 노예들 가운데 사고뭉치였고 그리고 노예들 가운데 말썽만 부리고 마지막에는 주인의 집에서 뭔가를 훔쳐서 도망을 가는 이 나쁜 놈이었지만 그러나 옥중에서 사도 바울이 그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이 오네시모에게 은혜를 주시니까 그 벌레 같고 쓰레기와 같고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내게는 가장 유익한 종이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해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인생이 변화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태와 자기의 상태의 비참함을 인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세상에서 버림받고 찢기고 문제가 많은 사람이 들어올수록 우리는 일어나서 환영을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들어가서 그를 변화시켜놓기만 하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던 사람이 변화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기쁨을 나누어주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밝은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변화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마게도냐 교회가 받은 은혜가 마게도냐 교회가 이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무엇을 내세울 것이 있습니까? 환난도 많아서 주님을 버리기가 십상입니다. 시련도 많아서 항복하기 십상입니다. 극히 가난해서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교회가 되었는데 은혜 그것 하나가 주어지니까 수많은 불리한 것들이 단번에 극복이 되면서 세상이 넘볼 수 없는 기쁨이 견고하게 그들에게 심겨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훌륭한 교회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번 집회를 통해서 마게도냐 교회의 후배가 한번 되어보지 않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