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시리즈 3
설교는 왜 듣는가(눅20:1-18)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할실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니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는 설교는 하기 쉬운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설교를 듣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이 죽을 때까지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설교자일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한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설교자일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과는 원하면 구역이 바뀌고 부서가 바뀌면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배룰 드리는 한 매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정말 제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빠르게 이해되고 있는가. 그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서 정말 우리가 바르게 알고 있는가. 우리는 결코 이 문제를 전통이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를 어떻게 보아왔고 또 설교자가 자기가 어떤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가. 또 성도들이 설교자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가. 하는 이런 견해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교를 통해 말하는 이야기가 쉽지 않고 또 그렇게 자기에 관한 이야기가 거론되다보면 여러 가지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함부로 정직하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아주 여러 곳에서 설교자가 누구고 그가 무엇을 위해 왔으며 오늘 왜 이렇게 이 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리고 그에게도 이와 같이 평화로운 시대에도 고난이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그 고난이 무엇이고 시대룰 향한 그의 외침과 부르짖음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자기의 신앙을 돌아보아주는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즐겨서 사용하는 용어는 “목회자”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양을 치는 목자라는 말에서 유례하였던 것입니다. 교인들의 모든 삶을 신앙의 차원에서 교훈하고 돌보는 직분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는 안수를 받은 목사일 수가 있고 혹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전도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부흥사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평신도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목회자란 말이 설교자라는 표현보다 훨씬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설교가 목회사역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에 속하는 기능정도라고 보는 것은 대단한 위험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쳐서 내 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내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역에 종사하는 성직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떼인 신자들을 목양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구인 것입니다. 설교자의 직무는 양떼로 하여금 아무에게나 맡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특별히 경험하고 그리고 당신이 특별히 부른 하나님의 일군들을 통해서 말씀을 전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하고 그 말씀으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자라고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설교를 전하는 사람, 그것은 심방이나 상담이나 사무나 봉사나 모든 목회를 돕는 다른 직분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럽고 두려운 직분인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신학적인 생각을 합니다. 설교를 제외한 모든 일들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결코 다른 여러 가지 직분들,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직분들과는 구별되는 두려운 직분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만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과 차별이 없는 동일한 죄인입니다. 동일한 죄인으로서 죄인 중에 뽑힌 받은 죄인으로서 그 죄인이 죄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죄인처럼 전하지 않고 죄가 없는 하나님처럼 순수한 말씀으로 똑같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말씀을 듣는 사람보다 뛰어난 윤리와 그리고 뛰어난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과 뛰어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윤리나 뛰어난 의식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자로 부르셨다는 분명한 신적인 부르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을 빼놓고는 도저히 자신의 존재와 삶을 생각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명, 거기에 붙잡힌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영국에 설교자 챨스 스펄젼 목사님은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설교자로 부르심을 느낍니까? 피하십시오. 도망하십시오. 그리고 달아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신의 부르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부름이 아닙니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고 도망치려해도 도망칠 수 없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어서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그 사람, 그가 바로 부름을 받은 설교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한 시대가 영적으로 타락하면 타락할수록 목회자로 부름을 받고 말씀을 전하는 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의 부름의 수준도 자꾸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하는 많은 일 가운데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이 봉사에 사역으로 내가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개인의 갸륵한 견해는 결코 하나님의 신적인 부르심과 동일시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영적인 수준이 타락하게 되면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소명의 수준도 자꾸 하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하는 사실과 내가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이 인간의 자기 판단에 선이 분명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꾸 토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명감이 분명하지 않은 목회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사명에 붙잡혔다기보다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사는 것이 자기의 인생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적인 부르심으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는 정말 특별한 하나님의 종을 원한다면 성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교인이 천명 이천 명이 되면서도 삼년, 사년이 지나도록 목회자를 구하지 못하는 교회도 많이 만났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은 무엇입니까? 결코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교회에 영적인 수준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체험하고 그리고 주 앞에 응답하는 소명 자들이 수준 높은 소명 자들이 생겨날 때 교회의 이런 요구는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라도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뛰어난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한때 평신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평범하지 않은 일들을 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명에 붙잡힌바 되어서 진리의 말씀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그 사람, 그 사명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같이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이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고난도 기꺼이 받을 수 있는 헌신의 각오가 되어있는 그 사람, 그가 하나님이 부르신 말씀을 증거 하는 설교자인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의 소명을 느끼십니까? 설교의 소명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로 하여금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로 소명을 받고 말씀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 사람을 말씀을 증거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쏟아지는 폭포수의 물줄기를 컵으로 받아내려는 것과 같습니다. 고난을 각오하고서라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며 그것을 전하면 생명을 앗아간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증거 할 것이고 그 말씀의 증거가 끝나고 나면 다시 한 번 그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붙잡히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위해 그리스도의 손에 붙잡힌 사명 자, 그리고 말씀을 외칠 수 없다면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그 사람, 그가 바로 부름 받은 설교자입니다. 그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 그것 하나인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서는 구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신앙은 참된 신앙입니다. 교회에서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많은 직분의 다양성, 계급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지혜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사람이 한 성령 안에서 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는 이런 의자도 놓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습니다. 저 아래 있는 의자를 하나 여기에 갖다 올려놓고 예배룰 드리는 교회도 있습니다.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석함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 함이 값있어서가 아니라 그 함속에 담겨있는 보석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우리는 질그릇에 담긴 보화와 같은 복음을 가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보배라면 그 복음을 담고 있는 자신들은 질그릇에 비교를 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저를 그렇게 대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혀 평신도들과 구별되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한 마리 다름없는 어린양입니다. 여러분이 실수하는 모든 실패가 설교자의 삶 가운데 이전에 실패로 경험되었고 지금도 실패하고 있고 혹은 앞으로도 실패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짓는 죄를 설교자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쉼 없이 경험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결코 인격적으로 우월해야 하지만 그러나 꼭 인격적으로 우월하지 않고 학식에 있어서 뛰어나면 좋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한 마리의 양으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축복기도를 좋아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축복기도를 좋아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저는 분명히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들고 축복기도를 하면 거역할 수 없는 하늘에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쏟아지는 것 같은 그런 착각은 버리십시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르고 정직하고 진실하다면 주의 종이 손을 들지 않아도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떠나있고 그리고 뒤틀려있고 잘못되어있다면 주의 종들의 축복과 기도가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신비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손을 높이 들고 여러분들에게 축복할 때 축복을 쏟아지게 내리는 것 같은 그런 착각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필요하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들은 특별하게 여러분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75년도 10월에 특별히 전도하는 사람도 없이 이렇게 2-30명 정도 모인 벌판에 서있는 1층 교회에서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말씀을 전해주시는 목사님이 있으셨는데 그렇게 눈물겹도록 존경하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임했을 때 그분은 비록 학식이 뛰어나지 않고 말도 어눌했지만 제가 진정한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저는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도 몰랐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위함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매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때 목소리가 듣기에 그렇게 좋은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어눌한 말투로 전해주는 그 말씀 하나 하나가 제 가슴에 보석과 같이 박혔습니다. 그분이 한없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분은 저보다 훨씬 부요하게 사셨지만 그러나 늘 저는 그분에게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은, 그것을 해드리면 무슨 복을 받을 것이라는 그것이 아니라 깊은 마음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이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저는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가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참답게 인정받는가, 못 받는가 하는 것은 결코 성도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 저 자신에게 달렸다고 믿습니다.
집회를 가보면 재미있습니다. 수없이 집회를 다니다보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이 놀랍게 축복하셔서 하늘에서 단비가 쏟아지는 집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기대에 못 미쳐서 너무 마음이 편치 않게 내려오는 집회가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집회에 놀라운 차이가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일주일 동안 전하겠다고 강단에 섰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이러저러하게 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새벽 시간에 혹은 깊은 밤의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주께서 갑자기 그 말씀에 권능을 더하시고 하늘을 여시고 놀라운 생명의 능력을 부으셔서 갑자기 제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입을 열자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흘러들어갑니다. 원고도 내던지고 본문 하나 펴놓고 설교할 때 하늘을 열고 주님이 말씀을 주실 때 입에서 기름이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구김이 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번갯불과 같이 심령들에게 다가가서 가슴을 깨트리고 그리고 심령을 녹여서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물같이 녹아지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가 진행되고 있는데 곳곳에서 자기의 죄를 인하여 흐느끼며 우는 사람들의 눈물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끝나고 기도할 때 마치 하늘을 가르고 주님의 성령이 내려오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치는 부르짖음 속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커다란 역사가 지날 때 놀랍습니다.
끝마치고 저는 성격이 묘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꾸 기억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마지막 날은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고 기도하다가 보따리를 싸들고 뒷문으로 나가는 것이 제 취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문 앞에서, 문밖에서 설교자를 향하여 인사하는 각도가 틀렸습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세상에서 명함깨나 내놓는 큰 직책에 있는 성도님들이 누구에게도 그렇게 공손하게 인사한 적이 없을 것 같은데 차렵 자세를 하고 저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고귀한지 깨닫게 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기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씀을 전하러 갔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때 성도들이 어쩜 그렇게 목이 뻣뻣합니까. 수고했습니다. 하고 말해주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것은 참 모역적인 발언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주일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성도들의 모습이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오늘날 교회 시대 속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비극들이 있지만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신앙과 교회 생활에 중심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영광스러운 부흥의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모든 모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십시오.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홀로 있을 때는 깊이 기도하시고 제자들이 모였을 때는 가르치셨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그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설교자의 모습입니다. 복음서는 바로 이 설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외치는 설교를 모아놓은 설교집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거기에서는 사도들과 헌신된 전도자들의 삶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외치며 선포하는 설교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가 지나가는 곳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한때 매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왜 예배를 드렸겠습니까? 중세에 암흑에서 깨어 나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당으로 모였습니다.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당으로 매일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가대의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웅장한 차임벨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제를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모인 것은 설교자를 통해서 주님께서 부으시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 인파가 예배당으로 줄을 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설교자 가운데 사보노롤라가 있습니다. 이태리 사람이었습니다. 1485년에 그때부터 5년 동안 플로렌스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수많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이렇게 물을 사람들에게 뿌리며 죄의 용서를 베풀어주고 떡과 잔을 나누어주고 먹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되어서 죄 사함을 받는 황당무계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대신에 공교한 예배의식이 자리 잡게 된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시대에 사보노롤라는 두어모 성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선지자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그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플로렌스의 시민들이 두어모 교회당으로 모였습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어두운 밤중부터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서 줄을 섰습니다. 예배당은 예배가 시작되기 전 1-2시간 전에 섰다를 내려야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서 발 디딜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서 서성이다가 어떤 사람은 무동을 타고 어떤 사람은 좌판에 올라서서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 쇠창살을 붙들고 턱걸이를 하면서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그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창살에 매달려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가 제아무리 수많은 수단과 방법으로 공교하게 교회를 이끌어가고 그리고 자기의 신앙의 갈급함을 채우려고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강단이 하늘로부터 열린 강단이 되어서 거기로부터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와 능력의 말씀의 물줄기가 하나님의 거룩한 강단을 통해서 강물과 같이 성도들의 가슴속에 밀려들고 교회에 쏟아지는 역사가 일어나서 그 물줄기로 말미암아 성령의 해갈함을 얻기 전까지는 교회에 잠들어있는 영혼들이 깨어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살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박수를 치고 노래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적막이 깃드는 것입니다. 부르짖음도 없고 하나님을 향한 통회의 눈물도 없고 죄인들이 그곳에 와서 가슴을 찢으며 참회하며 주 예수여 죄인 받으옵소서. 자기의 구원을 하나님 앞에 애원하는 기도의 함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부르심을 받고 목회하는 저희 교회는 하나님 앞에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저의 목회의 필사의 목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집회를 인도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예배의 시간, 그 속에서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들이 졸면서 드리는 그런 예배와 침묵의 예배의 시간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는 결코 침묵 가운데 드려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증거 되고 그 말씀에 하나님께서 전광석화와 같은 생명의 비상한 능력을 부으시고 그 말씀이 평범한 말씀이 강물과 같이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고 그리고 비수와 같이 죄인들의 가슴을 찌르고 그리고 상처받은 영혼을 포도주와 같이 싸맬 때 그들은 환호성을 질러야하고 그들은 슬픔 속에 흐느껴야하며 그들은 위로 속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예배의 현장입니다. 결코 예배는 벽돌로 찍어내는 것처럼 1시간에 끝낼 수 없고 그렇다고 2시간에 끝나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40분에 끝날 수도 있고 20분에 끝날 수도 있고 4시간에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한때 커다랗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였던 설교자 가운데 한사람은 쉬지 않고 7시간을 설교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규모와 질서와 규범이 있되 규범과 그 질서에 대한 준수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방해하지 않는 그런 예배가 드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시간에 결코 설교자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낙서를 하거나 주보를 읽거나 졸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람들을 주목할 수 없게끔 만드는 설교자의 설교의 내용과 태도도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말씀 가운데 강림해주시기를 사모하며 마음과 뜻을 다하고 심령을 기울여서 눈을 똑바로 뜨고 설교자룰 잡아먹을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로잡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들의 심령이 되어서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설교자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회중들에게 말하고 그 눈과 눈빛이 마주칠 때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룰 많이 하다보면 개인적으로 상세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듣지 않아도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80% 이상 헤아릴 수 있습니다. 200명의 사람이 모여도 한순간에 눈에 들어옵니다. 누가 지금 영적인 상태가 혼미하게 침체기로 들어가고 있는지 거의 정확하게 지적해낼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설교를 전하는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누구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성령의 교감이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을 다해서 당신의 말씀을 나는 다 받아들입니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 계셔도 여러분의 마음이 이 설교자의 말씀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설교자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은혜룰 받았다고 말해도 그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나를 주목하고 있어도 말씀이 그 심령 속에서 튀고 있다는 사실을 설교자는 즉각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도중에 저를 향한 최고의 대접은 명절날 제 생일을 기억하고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를 향한 최고의 대접은 설교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말하라. 내가 그 말씀을 받겠노라. 그런 태도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전해보십시오. 이 자리에 있을 때 가장 고통을 주는 사람은 아무런 기대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와서 저 구석에 앉아서 무관심 가운데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그 사람이야말로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수없이 설교자 앞에 웃어도 그때 상처받은 마음은 위로받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기라성같이 이름을 내놓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저는 그 예배에 1시간 참석하면 그 교회에 영적인 수준을 속속들이 점수를 매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그런 예배의 흐름이 예배의 시간 속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지 않는 기도, 사력을 다하지 않는 설교, 그리고 마치 새마을 성공담을 듣는 것 같은 그런 교육받는 태도에 설교를 청취하는 성도들 그런 교회는 참다운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결코 자기의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하지도 않고 따라서 가슴이 저미는 슬픔과 영적인 부담을 안고 주 앞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형식이 흐르는 것입니다. 찬송은 뜨겁게 기도는 짧게 설교는 간단히, 망하는 것입니다.
90년도에 서대문에서 내놓으라 하는 큰 교회에 30년 가까이 된 교회에 설교룰 하러 갔습니다. 수많은 학생과 성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사경회를 한다고 강사를 불렀는데 15분전인데 아무도 모이지 않습니다. 고요히 기도하면서 기다렸는데 10분전이 되자 교역자가 나타났고 5분전이 되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20분 정도 늦어졌습니다. 설교를 하러 올라가는데 강사인 저의 옷소매를 붙들면서 그 교회의 교역자가 말했습니다. 강사님, 설교는 몇 시 정도에 끝납니까? 어떻게 끝내드렸으면 좋겠습니까? 길게 하셔도 괜찮지만 9시가 지나면 사람들이 지루해할 것 같으니까 9시쯤 끝내시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후배였습니다. 전 전도사였고 그 사람은 강도사였습니다.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강도사님, 그런 것은 저에게 맡기시고 저 아래서 집회를 위해서 기도나 열심히 하십시오. 올라갔습니다. 10시 반에 설교가 끝났습니다. 이틀째 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성도들에게 놀라운 은혜룰 주실 때 검정 양복을 입은 이 강도사님이 콘크리트 바닥에 내려앉아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모습을 저는 보았습니다.
여러분, 설교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두려운 것인지 아셔야 합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고 성도들은 설교를 들음으로 하나님 앞에 영원히 책임을 질 것입니다.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고 알고도 행치 못한 자들은 더 많이 맞으리라.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런 식의 패배감이 교회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럼 뭐 하러 강사를 부릅니까? 자기들끼리 9시까지 때우고 말지 뭐 하러 강사를 바쁜데 불러요. 불러서 무슨 생각이 차있는 것입니까? 저 사람이 설교를 하러 올라가면 사람들이 지루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는데 뭐 하러 강사를 오라고 그러고 포스타를 내걸고 또 그 집회를 위해서 한 달씩 기도를 하고 시작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모순이 아닙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의 성도들이 이런 설교에 대한 패배감에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교회를 나와도 고요히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나에게 무슨 놀라운 변화가 오리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올 때 조금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오늘은 제직회도 있고 무슨 프로그램, 무슨 섬김, 무슨 봉사, 뭐, 뭐 가득 차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예배 하나가 하나님 앞에 놀랍게 드려지면 교회는 다한 것입니다. 주일은 끝난 것입니다. 그가 교회에서 특별한 구제활동을 안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심령이 녹아서 하나님을 만났고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눈빛에 부딪혔는데 어떻게 일주일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안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므로 수많은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소속감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손을 걷어붙이고 뭔가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성도인 여러분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고요히 교회에 와서 손을 모으고 사모하는 심령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여러분, 왜 신앙생활을 5년 10년 했는데 교회생활에는 익숙해져있는데 하나님과 영적인 생활에 깊이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더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십자가를 피상적으로 알고 십자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상식들이 신앙의 수준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의 자리에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 시간에 성가대가 아무리 훌륭한 음악을 해도 예배는 우리의 중심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일주일동안 생활하다 너무나 지치고 피곤하면 육신을 가진 인간이니까 예배 시간에 졸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졸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도 피곤하면 행로에 피곤하여 주저앉으셨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주 계속 되풀이 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육체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병들어있는 것입니다. 수없이 아무리 아름다운 성가를 하고 설교 시간에 존다면 그 성가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수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고 하더라도 그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기 위해서는 노래가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능력 있게 선포되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 4-5년 전에 아주 놀라운 현장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데 고등학생들을 모아놓고 180분 설교를 했습니다. 3시간입니다. 그런데 석고상을 깎아놓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예배입니다. 예배 시간에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1시간 일찍 나왔습니다. 8시부터 진을 치며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그들의 기도의 제목을 들어보셨습니까? 하나님 오늘도 전도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만나주시옵소서. 기도가 그렇게 수준이 높을 수가 없었습니다. 3시간 설교를 했는데 하는 말이 30분 흐른줄 알았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만 예배는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진리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 길에 헤매는 것같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지고 주를 위해 살고자 하나 살 수 있는 힘이 없어서 고통하며 흐느끼던 죄 가운데 빠져서 사하심을 받지 못해 곤고했던 심령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회당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하늘을 가르시고 쏟아지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기 죄악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됩니다. 치료의 은혜를 그에게 주십니다. 모든 근심과 염려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파해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폭포수와 같은 은혜와 그리고 물줄기와 같은 은혜가 메말랐던 우리의 심령을 적시고 사라졌던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울려 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예배당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어찌 그리 가벼운지요. 구름 위를 떠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말씀을 붙들며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그리워하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이런 마음으로 변화를 받았을 때 교회가 구역별로 전도를 시키지 않아도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의 교회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메마르고 곤고했던 내 심령이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기쁨을 맛보도다. 주님의 말씀에 생명의 물이 내 영혼을 적시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끊을 수 없었던 죄의 사슬이 나로부터 끊어져나가고 사망의 권세가 타파되고 생명의 놀라운 능력이 나를 지배하여 주를 위해 살게 만드는 놀라운 역사가 가슴속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에스골 골짜기에 죽어가는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그리스도는 예수라. 예수는 너희의 구주라. 그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었다. 말할 때 사람들은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를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 예수를 전하는 설교자를 전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함께 섬기는 교회를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특권과 같이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설교가 여러분의 예배가 중심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장 풍성한 만남을 갖게 될 것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교자가 누구며 누가 그를 위해 부르셨으며 그가 당하는 고난은 무엇이고 이 시대를 향한 외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전과 다름없이 백성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그분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떼를 지어서 다가왔습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당시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힐책하듯이 예수님께 묻는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자가 누구인지 대답하라.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한사람 나사렛 청년 예수가 와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 그것은 그 시대에 흔히 있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사들도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율법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또 예수는 그 사람들 중 한사람으로 여김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경을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사역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누가복음은 말하기를 백성들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서 그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로 하여금 이토록 비상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예수님의 설교가 틀림이 없습니다. 설교 내용이 무엇인지는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20장에 보니까 "복음을 전하실 새" 그렇게 되어있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전한 것은 복음을 설교할 때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질문의 요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 권세를 대라. 그 권세는 누가 주었는가. 그것은 질문은 했지만 그러나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을 설교할 권세를 대라. 그 권세를 누가 주었는가. 하나님이 권세를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으려는 그런 불신앙을 감추려는 것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피해가는 교묘한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참된 선지자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가 아니라고 밀어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약시대만 그런 게 아니라 신약시대도 똑같습니다. 내가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인간의 방식도 구태의연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항상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좋은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만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 버거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사람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의지할까, 바벨론을 의지할까? 하면서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때 양다리 걸친 그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끌려가라, 끌려가라 포로가 되어 끌려가라. 바벨론이 너희를 멸망시키리라. 너희는 순종하라. 바벨론을 섬기라. 버거운 말씀이 아니었겠습니까? 저놈은 어떻게 된 놈이기에 이스라엘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으면서 우리보고 이방인에게 끌려가고 노예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가. 저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낸 자가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서 어떻게 되어 집니까? 그가 말하는 버거운 하나님의 말씀과 메시지가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가 전하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개인의 견해니까 개인의 견해는 내 개인의 견해로 거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사도 바울에게 그런 태도로 하는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이 나중에 신앙이 변질되면서 그 사도 바울이 전한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는다. 그런 말이 버겁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율법도 행해야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르침을 거절한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열두 사도는 주님이 직접 부르셔서 세우셨고 유다는 제 갈 길로 갔고 맛디야는 교회에서 뽑아서 세웠으니까 사도겠지만 사도 바울을 부르시는 것을 누가 봤는가. 증인이 있나. 혼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는데 누가 믿어.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가 참 사도인가.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그가 전한 모든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견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불신앙이 깃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시대가 설교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방법도 동일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설교를 아멘! 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되지만 그러나 동시에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설교자만 책임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책임인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경고가 좋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드러낸 것과 교회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설교하는 것을 거짓되다고 드러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 하나님의 말씀일 때 그것을 거절하면 중대한 결과를 초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오늘날에 많은 교회가 많은 성도들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이렇게 물을 때 아멘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말 아닌 것들이 행해졌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설교를 전하는 그 직분이 그 거룩함과 존엄성에 있어서 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 그 선포가 복음을 외치는 것일수록 더욱 강력한 의심과 반대에 직면해왔습니다. 복음은 유대시대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도 그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받기가 일쑤였습니다. 대 부흥과 각성의 시대에도 복음의 선포와 그리고 역사적인 흐름의 극단적으로 대치하던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전할 새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살기어린 도전에 직면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많은 종교계의 실력자들 앞에 호위해주는 이 없이 외롭게 둘러 싸여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잃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아주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그래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어쩔래? 이렇게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우악스럽게 그렇게 했을 텐데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증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이 막 퍼붓던 비난을 멈추고 생각을 해봐야 알 수 있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라는 것이 결국 무엇이었습니까?
포도원에 주인이 있었는데 마음이 좋은 사람이던 것 같습니다. 포도원이 있고 그 다음에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망대를 짓고 짐승이 들어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두르고 심지어는 포도주를 짤 수 있는 즙 틀까지 다 만들어놓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세를 주고 먼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때가 아니라 포도의 수확기가 되어서 자기가 데리고 있는 일군 중 한사람을 자기의 소작인이 살고 있는 자기의 농지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소작료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소작을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소작이 떨어지면 오갈 데 없어서 죽어가던 그런 시대가 우리나라에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계급이 없어서 지주에게 매어서 노예처럼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와 유사한 시대에 소작을 준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는 아무 것이 없이 빈손 들고 와서 심어놓은 포도나무가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그것을 따서 주인이 만들어놓은 즙 틀에 즙을 짜서 그래서 그것을 주인이 만들어놓은 통에 담아서 그것을 가지고 갖다 팔아서 그리고 돈을 받아서 주인의 창고에 저장해서 그렇게 잘 먹고 잘살던 사람에게 농지를 사용한 세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심히 욕하고 쳐서 보냈습니다. 반쯤 죽게 되어서 피 흘리며 보냈던 것입니다. 또 보냈더니 또 때려서 보내고 또, 또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냈더니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이비유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가만히 내버려두시겠는가. 생각해보라 그랬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사람은유다 사람이다. 공평을 바라셨더니 포악이요, 의로움을 받으셨으니 오히려 부르짖음의 열매를 맺었노라. 포도원 그러면 그 당시에 듣는 모든 사람이 아! 저건 이스라엘인데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우선 설교자를 보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 타락하고 신앙을 버린 시대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거절하는 그 시대에 사람들을 바로 농부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 20세기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그 자료를 보는 순간에 아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20세기면 개명한 시대가 아닙니까? 3천 만 명의 순교자들이 예수를 위해 죽었습니다. 우리나라 민족 하나가 사라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기독교 때문에,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순교자들이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존경하는 요한 크리스토톰, 교회의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사보노롤라 교회의 사람들에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이 포도원의 농부들은 바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설교자를 보내시는 것은 공평과 의로움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이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공경하며 사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우리들이 돌려드려야 할 당연한 몫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시대에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종 설교자를 통해 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움은 설교자들의 모든 설교 속에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중심은 결코 사람들을 위한 위로나 사람들을 위한 위안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여드리고 그리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의무를 지고 있으며 마땅히 하나님께 어떤 의무를 돌려드리고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아야할 것인지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증거하며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영광은 결단코 세상이 자기를 영광해 주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설교자의 소망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넘쳐나고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죄와 부패로 물든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비와 같이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보내시는 목적은 바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공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때로 백성들의 삶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돌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껴안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실패해서 딛고 일어나고 상처를 싸매고 일어나서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세상으로 걸어가게 하기 위해서 그와 더불어 울고 웃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상처를 딛고 아픔을 딛고 일어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이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공의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늘 하나님 앞에 마땅히 소작료를 돌려드리지 않는 성도들의 삶을 책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은 정말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마땅한 소작료를 돌려드리며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돌아보고 그렇지 않다면 말씀을 전하는 시간을 통해서 회개하고 돌이켜 열매 맺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여러분, 자장가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장가와 같이 속삭임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지옥의 불길 속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추상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가슴을 치고 회개함으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백번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오직 심판만을 설교하는 비장한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사랑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신자들로 하여금 거룩하고 준엄하신 하나님을 잊게 하는 방종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 양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아직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능지처참을 당하신 표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모든 죄악을 하나님이 심판하신 그 심판의 자리와 그 표적이 바로 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을 전함으로 주님을 잊게 하는 오류에 빠져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는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저버릴 때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그런 고통이 설교자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저는 나이도 얼마 안 된 이제 불혹을 내일 모래 바라보는 삶을 살았지만 정말 눈물이 많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가정적으로도 그랬고 사회적으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눈물은 잠시 눈물을 흘릴 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눈을 감고 생각하면 잊혀지지 않는 슬픔이 마음속에 하염없이 흐릅니다. 지금은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2년이 흐른 동안은 기도하다가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아픔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 아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몇 년 동안 저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놀라운 일들을 보이시고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깨어났습니다. 영혼들이 정말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한쪽에서 그 설교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절하는데 고요히 고개를 숙이고 거절하는 것은 참아줄 수 있는데 예배 시간에 뚜벅뚜벅 걸어 나가면서 발길로 문을 뻥 차고 나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개인적으로 저를 불러서 당신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협박을 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이 설교가 그때 했던 설교들입니다. 뭘 잘못했습니까? 왜 그렇게 미워합니까? 용서해야지 된다는 것은 아는데 그리고 용서한 것 같았는데 가슴에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하나님, 내 가슴에 뽑힐 수 없이 박힌 이 가슴의 못을 한번만 뽑아주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완전히 상처 없는 사람으로 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던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하여튼 피어린 기도였습니다. 지금은 상당히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그런 말을 들을 때 충격을 받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교자로 보내신 목적은 결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위로하시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하고 싸매는 그 목적은 다시 성하게 나은 몸을 이끌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싸매고 다시금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피 흘려 몸 버려 죽으심으로 생명을 주셨던 아들의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며
이 세상 끝날까지 주 봉사하리니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만들게 하시기 위해서 설교자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두 번쨀 이 비유는 설교자들의 권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세 명의 종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심히 때려서 보냈고, 둘째는 심히 때리고 능욕을 해서 보냈으며, 셋째는 상하게 하고 내어 쫓았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죽음을 당하는 종과 더 많은 능욕을 받는 종들이 나옵니다. 마지막에는 죽기까지 하는 종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약에 선지자들에 대한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심히 때리기만 했는데 심히 때리고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상처를 입히고 밖으로 집어던져서 들것에 실려서 가게 만들었습니다. 급기야는 죽여 버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이 성경 본문을 읽다가 너무 너무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의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이 고난을 받고 죽은 이야기는 이해룰 하겠는데 왜 그래야했는가.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니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종입니다. 이 주인을 위해서 평생을 내 상전 위하여 평생을 바쳐서 대대로 섬겨온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힘든 것도 마다하지 않고 밤이면 졸음을 내어 쫓기 위해서 눈을 비비며 낮에는 뜨거운 햇빛도 마다하지 않고 들판에서 곡식을 거두고 혹은 목초지에서 양들을 먹이며 주를 위해 수고했습니다. 도적이 와서 주인의 창고에서 도적질하려면 생명을 걸고 칼부림을 하며 주인의 재산을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종을 보낸 것은 이해가 가는데 얻어맞고 돌아왔으면 다음에는 호위병이라도 붙여서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왔는데 그 다음 종보고 이번에는 네가 가봐라. 그 다음에는 시체가 되어서 영구차에 실려서 오는데 이번에는 네가 가라. 또 보냅니까? 무슨 주인이 그런 주인이 있습니까. 아들이 죽은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니까. 예수님에게는 좀 섭섭한 말씀인지 모르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지 않으면 우리는 어차피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미 죽기로 예정되신 것입니다. 아들이 죽는 죽음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라 계획된 죽음이었으니까 이해가 가는데 이 선지자들의 죽음은 사고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 주인에게 어떻게 충성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무정한 주인을 위해서, 이것이 내 마음을 완전히 혼미케 했습니다. 10시쯤인가 본문을 묵상하다가 새벽 6시까지 시간이 흘렀습니다. 먼동이 오를 때 아! 가슴속에 섬광과 같은 빛이 비쳐왔습니다.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전광석화 같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두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는 고난 받는 설교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전하는 설교자는 어느 시대이든 어느 시대의 사람이건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그 백성들에게 핍박과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의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백성에게 요구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할 의무를 설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설교하는 설교자에게 인기의 점수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교회 역사는 전합니다. 설교자가 고난을 두려워해야 하나님의 의로움과 백성이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공의로운 삶을 설교하지 않을 때 역사에는 흑암이 찾아왔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의 고역을 짜내면서 호화롭고 방탕한 삶을 살던 러시아의 귀족들에게 설교자들은 자장가를 부르듯 설교했습니다. 가난한 학대받는 농민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곳에 가서 말했습니다. 주인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구두에 보석을 달고 화려한 치장을 하고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모여 앉아서 다리를 꼬고 예배를 드리는 귀족의 부인과 귀족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말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을 때 동토의 땅 러시아 1917년 2월과 10월 두 번에 걸쳐서 볼시비키 혁명이 발발했을 때 귀족들과 함께 제일먼저 농민들의 도끼와 낫에 무참히 학살된 사람들이 설교자였습니다. 교회 성직자들이었습니다. 설교자가 그 시대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저버릴 때 교회는 흑암이 깃들게 되고 어두움에 사로잡힌 역사가 진리를 외치지 않는 교회룰 무참히 심판하도록 버려두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저는 아직 러시아뿐만 아니라 해외라고는 제주도밖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 러시아에 가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도시에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교회의 동그란 돔이 있는데 금으로 입힌 것이 아니라 금을 쳐서 철판을 씌워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탈린 차하에서도 그렇고 레닌 치하에서도 그렇고 결코 없어지지 않고 우뚝 서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저것을 내버려두는 이유는 공산당도 기독교를 동의한다. 그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 아마 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사회 교육체를 합니다. 공산당이 백성들을 향해서 말한답니다. 민중들이여 우리가 너희를 저 교회로부터 구출해내어서 해방을 주었다. 교회에 억압에서 너희를 살린 공산당의 은혜를 황금으로 만든 저 돔을 볼 때마다 기억하고 감사하고 공산당에게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 시대와 교회와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지도록 부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강한 사람의 편에 서서 안 되고 연약한 사람의 편에 서도 안 됩니다. 오직 그가 설수 있는 편은 하나님 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가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서 결코 다수를 따라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있는 단 한사람을 따르는 것, 그것이 다수인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그가 주는 진리의 말씀을 강철과 같은 용기로 외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죄악 된 삶을 마주쳐서 두려움 없이 외칠 수 있는 하나님의 열정으로 무장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설교자가 이와 같은 용기와 열정이 마르지 아니하고 끌어 오르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피룰 토하듯 외칠 수 있는 살아있는 설교자가 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한 3-400명 이상 대학부를 하고 있는 저의 동역자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보고 집회를 부탁하면서 사랑의 교회입니다.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설교는 신학생(?)사람이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리라. 이 뒷부분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모든 원수들을 심판하고 멸망시킬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영원히 오늘 하루뿐입니다. 다음에 이 설교를 다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때는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번 말씀이 전해지는 한 시간 한 시간마다 여러분들은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그 만남 속에서 내 인생을 뒤바꿔놓는 진리의 말씀의 역사가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설교자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죽게까지 하면서 사랑하시지만 그리고 오래 참으시지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지만 영원히 참는 분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에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려지지 않았던 의로운 삶을 하나님께로 돌려드리는 참된 인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진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결코 가벼운 시간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세상의 상식과 농담과 웃음거리로 채워질 수 있는 시간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죽고 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배척을 받아서 설교는 남아서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자의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주님은 책임을 묻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경고 없이 일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에 땅 끝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리라.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고 설교 시간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시간인 것입니다. 늘 예배 시간은 진지하고 그리고 기대와 감동으로 가득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의 말씀이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선포, 이것이야말로 설교자가 생명을 거는 영광스러운 사역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영국의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듣는 사람을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게 해줄 수 있다면 교회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사람, 그것이 설교자의 가장 영광스러운 특권인 것입니다. 설교는 무엇입니까? 제 나름대로 정의를 하자면 죄인들인 인간이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그 길로 갈수 있는 다리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 땅에 살아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의 묵은 땅과 같은 굳은 심령이 기경되고 하나님의 의의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영광스러운 날이 올 것이라는 그 부흥의 역사를 믿기 때문에 살아가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설교자는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성도들과 다름없는 한 마리의 연약한 양입니다. 그도 산을 오르다 가시에 찔리면 아파서 눈물을 흘리는 한 마리의 양이고 고달픈 고갯길을 오를 때는 주저앉아서 흐느끼는 사람입니다. 친구들이 떠나가고 아무도 없이 외로우면 고독을 느껴야하는 가장 연약한 한사람의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은 설교 단상에 오를 적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내가 오늘 이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하나님의 설교자이기 이전에 저도 이들과 똑같이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위로와 용서가 필요한 한 마리의 양일뿐입니다. 설교자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행정적으로 유능한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이 붙드심이 없으면 그 붙드심을 간구하는 여러분들의 기도가 아니면 감화력을 잃어버리고 힘없는 설교자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외칠 때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인 것 같으나 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는 두렵고 떨려서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며 하나님 제가 이 길을 가야 합니까?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주님 앞에 때를 쓰며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의 도를 선포하고 돌아서서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울 수밖에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설교자인 것입니다. 설교자이고 또 그 설교자로 완벽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주기 때문에 오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한 몸에 싸안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쳐야 하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설교자는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아래로부터 뜨겁게 올려지는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외치는 일이 가능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 지푸라기와 같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없이 총에 맞은 짐승과 같이 흐느끼던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어질 때 포유하는 호랑이가 되어서 부르짖는 사자가되어서 여러분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시대를 휘어잡았던 설교자도 주님이 그 손을 놓으시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열린 교회를 시작하기 전 수요일 날 하늘을 향해 열린 강단을 우리 집에서 설교하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렸습니다. 설교자를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되 완전한 사람으로 믿지 말라. 여러분, 위로가 필요하십니까? 상처 난 심령을 주님이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싸매시기를 원하십니까? 설교자는 여러분의 그런 싸매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덮어주는 사랑과 따뜻한 격려가 필요한 것입니다. 고통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그 말씀이 제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말할 때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성품 속에서 의로움을 구하시는 하나님과의 풍성하고 놀라운 만남을 기대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설교자가 이 땅에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