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하려고 태어난 사람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5~6)
녹취자: 최지애
성경적으로 볼 때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는 많은 섬김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합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이 섬기는 그 섬김의 모양들은 참 다양합니다. 이 세상에는 37,000가지의 직업이 있다는데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섬기는 일의 다양성도 직업의 다양성만큼이나 정말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섬김은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인간들을 예배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의 예배자가 아니라 참된 예배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의 됨됨이만큼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든지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 믿게 만들어서 믿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것, 이것에 이바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섬김은 허공을 치는 것처럼 목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예배의 완성입니다. 흠도 티도 없이 완전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런 나라, 그런 무리들의 연합과 모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된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조 목사님이 일본 지진난 것을 가지고 일본의 우상숭배 죄 때문이다 라고 해서 나라 안이 발칵 뒤집히고 온갖 욕설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그렇게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생각들, 그러면서 기독교의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과민하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간에 그것은 다양성에 속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데에 있어서는 생각의 차이와는 관계가 없이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들도록 매우 특별하게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왜 문서 선교부에서 열심히 테잎을 만듭니까? 그것을 사람들에게 들려 주어서 예배자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관리실에서 왜 매주 먼지를 뒤집어쓰고 청소를 하고 예배당 환경을 정돈하고 망가진 의자를 고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망가져서 앉는게 불편하면 참된 예배자가 못될까봐 그렇게 하는 겁니다. 담임 목사가 잠을 못자고 밤늦도록 글을 쓰고, 저도 쉬고 싶고 놀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좀 한적한 숲 속길을 이틀만 걸어봤으면 좋겠어요. 너무 너무 쉬고 싶어요. 그럼에도 밤늦도록 책을 쓰는 이유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읽혀서 예배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바쁜 통에 교통지옥을 뚫고 그렇게 땅 끝에 있는 식구들까지 하나하나 심방을 하면서 밤 열한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오는 고달픈 심방을 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상황과 환경은 달라도 그들이 참된 예배자가 되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에요. 밤 늦게까지 홍보실에서 주일 뉴스를 만들고 교인들을 교육할 자료를 만들고, 연구실에서 휴일에도 나와서 자료를 찾으면서 그렇게 애를 쓰는 것. 그것의 궁극적인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이에요. 참된 예배자를 만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본문을 보십시오. 뭐라고 말합니까? 시인은,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게 이 시인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여기에서 찬송이 오선지에 그려진 음악 부호들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여러분이 알고 있죠? 이것은 온 영혼이 하나님 앞에 기울어지는 헌신이에요. 그리고 주님께 대한 높임이에요.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데,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아니라면 아니, 좀 더 양보해서 지금은 참된 예배자가 아니지만 내 안에 참된 예배자가 되지 못하게 하는 요소와 더불어 싸우려고 몸부림쳐서 삶의 목표가 예배자라고 하는 것에 고정되지 않는다면 우리 하는 일은 허위이고 마음에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사면, 교역자면,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가르칩니까? 라고 말할 때 나 같은 예배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갑니까? 열린교회는 교역자 중에 오랫동안 근무를 하다가 누구 한사람이 그냥 저절로 들어와서 교역자가 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전에 교역을 하던 사람들은 여러분 못지않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고 세계적인 변화를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여러분이 미끄러졌습니다. 저는 그 미끄러지는 광경을 아주 면밀하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예배의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것으로 커다란 넘어짐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명심하셔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참된 예배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됨됨이만큼만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됨됨이는 예배 그것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예배에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자 혹은 참된 경배자로서 그런 삶을 살게하는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이 시편 전편에 흐르는 모든 경건의 핵심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입니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라고 했습니다. 경건의 요체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입니다. 보에티누스라고 하는 신학자가 경건의 핵심을 간절한 기도 속에서 찾았던 이유도 그것입니다.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지는 모든 삶 속에 베어 나타납니다. 물 컵 하나를 옮기고 교회 마당에서 빗자루 하나를 들어도 그가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모든 섬김의 영역에서 그 의존의 마음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일을 할 때 자연적인 본성을 따라서 봉사할 수 있는 일에 종사할 때 이런 마음은 덜 나타납니다. 심지어 설교할 때도 저 설교자가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인지는 그렇게 많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존 오웬 목사님이 On spirital mindedness를 쓰면서 하나님께 기울어진 영적인 사고방식이 하나님께 의존된 생각되어짐의 방식이 설교나 어떤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면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마음의 기울기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을까요? 기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간절한 마음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런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가장 훌륭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예배자는 예외 없이 열렬한 기도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종종 이렇게 이런 광경을 보았다고 내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기도시간에 열렬하게 기도하지만 예배시간에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딴 짓하는 성도들을 많이 봤습니다.” 기도가 가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도가 아닙니다.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혼의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그 열렬함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도 그것이 본성적인 열렬함인지 영혼의 깊은 울림에서 쏟아져 나오는 간절함인지를 모릅니다. 세상에 예배 태도 나쁜 사람들이 교역자들입니다. 전 세계를 다녀 봐도 거의 같아요. 그래서 낙심해요. 도대체 이 사람들에게 무얼 기대할 수 있을까? 교회의 일꾼들이 가장 나쁜 예배자에요. 열심히 경건 서적 만드는 사람들이 가장 경건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에요. 수없이 물을 흘려보내도 수원지에서 물이 끊어지면 파이프에는 물 한 방울 남지 않습니다. 파이프가 그 물을 풍성하게 전달하는 동안에는 그 물이 자기를 적시며 흘러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 사실입니다. 우리가 익숙해진다는 것은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 매우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인을 통해서 아마도 다윗의 시라고 판단되는 이 시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전체가 주님께 의존되어 있는 이 시인의 고백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밑바탕이었습니다.
어렸을 때에 이 다윗은 매우 외로운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도 거의 받지 못하던 그런 소외된 아들이었습니다. 그 어린 시절을 아마 회상하듯이 그는 주는 나의 소망이시며, 나의 어렸을 때부터 의지시라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다윗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었고 믿음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자기의 친부모도 자기를 거의 버렸고 아내를 통해 만난 아버지도 자기를 버리지 않았습니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고백이죠. 어렸을 적부터 다윗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소망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의지의 대상이었습니다. 고통을 받고 괴로운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통과 고난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주님을 의지한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자신의 존재와 인생 전체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의 길이 위탁되어졌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주님이 시인의 의지였습니다. 모태에서 주의 붙드신 바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여자가 아이를 가지면 아이가 태에 착상이 되잖아요. 그것을 마치 하늘에 달과 별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듯이 그렇게 떨어지지 않고 착상이 되어서 엄마의 배에 붙어 있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강한 힘으로 붙드시기 때문이라는 거였죠. 그래서 욥이 환난을 당하면서 자기가 태어나지 말기를 모태에서 죽어 버리기를 그렇게 바랐던 것은 바로 자기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아주 불신앙적인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시인이 의존하는 마음이 깊어지게 되니까 자신의 인생이 시작될 그날부터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그 때부터 하나님이 자기같이 불행하고 못난 인간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주님이 낙태되지 않고 굳게 붙들어 주님 앞에서 살게 하셨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그 아이가 태어날 때에는 하나님이 이번에는 당신 자신의 힘을 이 아이의 몸 밖에서 역사함으로 그 아이를 엄마의 모태에서 끌어내신다 하는 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임신과 출산에 관한 생각이었어요. 그러니 아이가 잉태될 때부터 한 사람으로 태어날 때까지 주님의 주권 속에서 잉태되고 태어난 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이라고 하는 고백이죠. 이 시인이 이렇게 자신의 기억에도 나지 않을 모태의 착상에서 부터 출산에 이르는 과정을 주님의 주권의 빛 아래서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의식도 없고 나 자신의 의지도 없을 그 때에 주님이 그렇게 주권적으로 나를 붙드셔서 나를 여기까지 이끄셨다면 그렇다면 태어나서 이제 내 의지로 내 인생을 걸어가는 이 길에 있어서는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존의 마음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되게 하셨고 예배자가 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일평생 자신의 철학함에 전범으로 삼았던 이 다윗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에게 철학함의 모범이 되었던 것입니다. 눈물이 있는 철학함, 자기 깨어짐이 있는 신학함, 그 깨어짐을 통해서 매일 새롭게 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 그것이죠. 아침에 나와서 설교할 본문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마음이 매우 약해지지만 그래서 약하기 때문에 약해지지만 어떨때는 약하기 때문에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주는 어렸을 적부터 나의 소망이요, 나의 의지가 되십니다. 라는 고백 속에서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도 변함없이 주님을 의지할 수 있고, 사람들이 자신을 실망시켜도 그것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가 방해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과의 관계가 돈독해 지지요. 31편에서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환란을 당할 때 주의 은밀한 장막에 자기를 감추시는 하나님을 바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함께 모이는 공적인 예배를 넘어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예배를 향하여 전진해 나아가고 확장되어 나아가는 것이죠.
(예화) 미국에 갔을 때 공항에 나를 마중하러 나온 어느 집사님이 테잎을 틀어주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그랬더니 자기네 교회 목사님이 예배에 대해서 특강을 한 내용이래요. 아마도 자신의 목사님의 설교와 강의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자기네 교회 목사님의 가르침을 자랑하기 위해서 틀어준 것 같아요. 한 삼십여분간 그 테잎을 듣고 가면서 아마 운전하는 그 집사님은 뒤에서 계속 고개를 흔들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에요. 그는 어설픈 이론론자 였습니다. 요지는 이랬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열한시에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것만이 여러분은 예배의 다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서 “예배시간에 여러분들이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눈물을 흘리며 설교를 듣고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정성을 모두어도 여러분들의 삶이 형편이 없다면 그 예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 입니다. 리차드 먼로 교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죽은 말이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말에다가 채찍을 하는 격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상상 속에서 있지도 않는 사실을 만들어 냅니다. 도대체 어떻게 예배 시간에 눈물을 흘리고 간절히 예배드리는 사람이 삶이 엉망인 예가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예가 있다면 그것이 예배를 그렇게 드렸기 때문에 삶이 그 모양이 된겁니까? 그렇다면 예배도 삶의 수준으로 내려가 버리면 그것이 치유책이 되겠습니까? 어설픈 이론론자였습니다. 그런 성도는 이 세상에 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 한동안 마음이 아팠고 저런 사상이 누룩처럼 교회에 번져갈 때 결국 교회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 될까 염려를 하였습니다.
보십시요.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은 그의 소망이 되었고 소외받던 어린 시절부터 그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의 시련과 고난의 고비마다 혹은 형통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에게 소망이 되고 의지가 되어주셨던 기억들을 더듬으면서 자신의 삶의 이유를 존재의 이유를 예배에서 찾았습니다. 위대한 시편 23편에서 마지막에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는 그것도 사실은 그 핵심은 예배자로서 살겠다라고 하는 시인의 각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사역을 하거나 섬기면서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 깊이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무엇을 위해 섬기든지 그것은 끊임없이 예배자들을 만들어 낼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좋은 예배자로 세워지는 것이 여러분도 그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심지어 어느 설교자가 이제는 마음의 확신으로부터 버린 설교가 악한 사람들을 회개시켜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 매 순간순간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한 분 앞에서 싸워야 하고 풀어야 할 숙제이지 이미 이루었다고 하거나 이미 도달했다고 하거나 이미 완전하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말 좋은 예배자로서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라 이겁니다. 공적인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만이 개인적인 예배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예배는 우리에게 참으로 놀라운 능력을 줍니다. 불쾌한 소식으로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식들로 심령이 흐트러지고 그리고 왠지 마음의 건조함으로 마음이 갈라지는 것 같은 그 때 우리의 마음은 땅과 같아서 메마르면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개인적은 예배는 우리를 그 메마름으로 부터 건져줍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드리는 잠시의 묵상, 그리고 찬송하나 부르고 성경을 외우는 그런 묵상 속에서 우리는 은혜의 단비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공적인 예배, 개인적인 예배, 개인적인 삶,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흐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혼들을 섬겨서 참된 예배에 이르게 하는 것이 부르심이라면, 여러분들의 모든 사역에 있어서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 속에서 여러분들이 행복해 하고, 예배 속에서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예배 속에서 주님을 새롭게 만나 쓰러질 것 같은 환경 속에서도 다시 세움을 받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성도들에게 느껴지도록 그렇게 여러분들이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예배가 영원한 숙제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래서 이 예배가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거룩한 주일에 가장 중심되는 기능은 예배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하는 것, 그 이상의 어떤 기대와 소망이 없이 주일날 발걸음을 하나님의 교회에 향하게 하는 것, 예배가 끝나고 돌아갈 때에는 주님을 만난 기쁨과 그 성품의 새로운 빛이 가져다 주는 깨달음으로 은혜의 정동으로 마음이 가득하고 벅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가 단순히 건물이나 물질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와 마음의 앙망이 집약되어서 하나님이 그렇게 영적인 축복들을 우리의 사역에 내려주는 것입니다. 예배에 실패한 교역자들은 자신의 목회 사역에 기대하는 바가 매우 낮거나 방향이 잘못된 방향으로 갑니다. 그래서 똑같은 예배의 상황을 보고도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만한 공동체도 없다고 자부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교회에 있다가 외국으로 이민을 간 가정에서 주일학교 다니는 아이가 교회에서 회심을 하고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교회에 몇번 갔다 오고나서 아이가 엄마에게 그러더래요. “엄마, 이 교회는 썩었어.” “왜?” “아이들이 예배를 드릴 줄 몰라. 예배를 안 드려” 그래서 할 수 없이 엄마가 저녁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교리를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그 시간을 그렇게 행복해 한대요. 결국은 그 사람이 어린아이든지 어른이든지 간에 자기를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예배자가 된 만큼 그 기대를 갖는 거에요. 그래서 정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거룩한 경배 속에서 얼마나 행복한지를 안 사람들은 그 이유로 만족이 안되는 거죠.
정말 오랜 세월이 지나갔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그날 밤, 그 예배가 끝났을 때 저는 지금껏 배워왔던 나의 모든 신학이 하얗게 빛이 바래는 것을 경험했어요. 내가 읽었던 그 무수한 책, 그리고 수많은 하나님에 관한 묘사들이 갑자기 찬란한 태양 빛 아래 촛불처럼 느껴졌어요. 아! 바로 이 영광을, 형언할 수 없는 이 신비를, 영광의 광채를, 사람의 언어의 그릇에 담으려 했기 때문에 그러한 묘사가 나온 것이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날이 제가 하나님 앞에 설교자로 다시 태어나던 날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예배에 대한 갈망은 주님의 영광을 본 것에 비례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배에 대한 갈망이 현저히 부족하다면 여러분들은 복음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적절한 하나님을 영광을 충분히 보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그의 설교는 항상 어린애 같고, 그의 섬김의 철학은 항상 철부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온몸을 불사르듯 내어주는 열렬함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진리의 갈망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열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한번 시인의 이 고백을 보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예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의 기쁨이 주님을 예배하는 것, 모든 사람으로 무릎을 꿇어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것, 주님의 그 주권과 통치에 굴복하며 사는 것, 그 달콤한 행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전하고, 그들도 스스로 그 행복에 돌아오도록 만들어주는 이 일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