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의 주일성수, 그 평가와 계승2
녹취자 : 오희열
주일을 엄격하게 지켰던 청교도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평가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다음을 넘겨보면, 종교개혁자들과의 차이점을 보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신학적으로 약간 미세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 다음에 성수주일과 디아스포라의 문제입니다. 루터나 칼빈은 이 제 4계명이 과거의 특정한 구약시대와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계율이고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규율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구약에서 율법을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같은 동기로 지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오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일이 주일이기 때문에 다른 날에 비해서 특별히 거룩한 날이고 그렇기 때문에 주일 성수를 주장하는 것은 율법주의적인 사고라고 보았습니다. 굉장히 루터는 파격적인 견해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칼빈은 루터와 비슷한 신학적인 입장에 있으면서도 예배에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전례의 채택, 그리고 주일성수 등은 청교도들보다 훨씬 포용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디아포라”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아디아포라”는 “아무래도 괜찮은”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씀해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것들은 우리자신의 양심의 문제에 속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를 대안학교를 보낼 것인지 공교육을 시킬 것인지, 아니면 이 아이를 홈스쿨링을 할 것인지 제도권의 학교를 보낼 것인지, 공립학교를 보낼 것인지 사립학교를 보낼 것인지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은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입니다. 폭넓게 아디아포라를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책을 보시면 제4장의 106페이지를 보시면 중간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에 관한 문제를 아디아포라와 관련지었는데 아디아포라는 말씀에 규정된 바가 없고 어떤 행동을 규제할 타당한 근거가 없는 중립적인 것이어서 때에 따라 작위, 어떤 일을 하거나, 부작위, 안 하는 것이 허용이 되는 것, 따라서 각자 양심의 가르치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사항에 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밑의 인용문을 보시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세 번째 부분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으로 어떤 사물들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사물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중립적인 것들을 어떤 때는 이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렇게 하지 않고 넘어가는 일들이 허용된다. 또한 이 문제를 그는 양심의 자유라는 가톨릭을 반대하는 종교개혁 지도자들에게 매우 민감했던 주제와 연결시킵니다. 경건을 실천하는 어떤 사항을 세워놓고 신자들이 자유로운 양심을 가지고 그것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어떤 법을 만들어서 양심의 덫에 옭아매는 것 차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칼빈의 이러한 언급은 성경이 우리게 의무지어 주지 않은 아디아포라에 대해 인간 스스로 규율을 만들어 멍에처럼 지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자의적 속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의에 빠진 것만큼이나 복음의 은혜와 자유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칼빈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디아포라의 문제를 다룰 때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과 교회의 권위 자체를 제거해 버리려는 방종주의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원식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주님만이 구원에 필요한 모든 문제를 이미 제시해 주셨다.” 그러니까 더 이상의 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 예배의 모든 국면에 대해서 정확하고 상세한 기술을 주신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규모가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시대가 완벽하게 따를 수 있는 예배의 고정된 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예배를 드라마처럼 만들고 설교도 하지 않는 이런 예배의 방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할 때는 항상 옛날 초대교회에서 부터 교부시대와 종교개혁시대와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개 복음적인 교회에 이르기까지 어떤 예배의 순서를 가지고 왔나 하는 이런 것을 알면서 오늘날 우리의 예배의 방식을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열린 예배도 마찬가지이고 그런 것들을 염두 해 두면서 예배에 대한 규범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 자기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다 엎어버리고 함부로 하는 것처럼 전통에 의한 반성이 없는 그런 목회 방식은 경솔한 것이라고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 “세 번째로 새로운 실천들을 발전시키고 오래된 실천들을 폐지하는 일에는 sensitivity, 세심함이 요구된다. 왜 그것이 생겨났는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없애버릴 때에는 좀 심사숙고해서 생각을 하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에 따르면 안식의 준수에서 안식의 실천은 신약시대 주일만이 아니라, 한 날이 아니라 일생동안 지속 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비록 구약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지만 거기서 추출되는 되는 원리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지켜야 할 것들을 발견하게 해 준다고 보았습니다.” 그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정해진 날에 성도들이 함께 말씀을 듣고 성찬을 하고 공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일 하루가 신앙을 위해서 온전히 쓰여져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칼빈이나 루터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칼빈이나 루터가 청교도들과 견해가 다르다고 생각을 해서 주일에 모든 것을 다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칼빈이나 루터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쉬는 것입니다. 노동에서 자유로워져서 하루를 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식솔들, 수하의 종, 일꾼들까지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원리는 루터나 칼빈도 견지했던 원리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인들을 지도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문제를 다룰 때 이렇게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저주가 있는 것처럼 다루는 것은 신약에서 주일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을 가지고 우리 교회에서 공부를 했는데 교회의 의사 한 사람이 이 책을 다 공부하고 너무 괴로워서 사표를 냈다고 합니다. 사표를 냈더니 원장이 왜 사표를 내느냐고 묻기에, 자기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주일에 교회를 가야 하겠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주일에 근무를 하라고 하니, 페이가 좀 적더라도 주일에 근무하지 않는 병원에 가서 일하겠노라고 했답니다. 사실 의사가 병원에서 일하느라 한 달에 한 번씩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따지면 전 국민이 복음화 되어서 그리스도인 되었다고 한다면 나라는 누가 지키고 경찰서는 누가 지키고 소방서는 누가 지키고 전철은 누가 운행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의사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간호사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은 신앙적으로 주일을 온전히 지키면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영원히 누릴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싶다고 사표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원장이 고민하더니 병원 그만두지 말고, 주일에 근무하는 것을 빼줄 테니 교회를 가라, 다른 사람을 대신 시킬 테니 너는 가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간증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그런 결정을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인들이 항상 율법죽의적인 성향에 젖어서 물어볼 때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합니다. “담배 피우면 안 돼요?”, “포도주 먹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요? 취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물어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관심사가, 어디까지 하면 하나님이 벌을 주시지 않을까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경이 쓰여질 때는 아직 담배가 나오기 전이었는데, 담배 피우는 것을 어마어마한 죄인 것처럼 다루고 금융거래를 부정하게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놔둔다거나, 제가 어떤 철학사전을 샀는데 가격을 공개하면 시험에 들 정도로 비싼 것이데, 어떤 사람이 제 방에 와서 그 책을 1/4의 가격으로 판다고 하기에, 그게 얼마나 비싼 것인데 그렇게 싸게 파느냐고 물으니까 복사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을 복사하면 안 됩니다.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산 책은 서점에도 없고 인터넷에도 없습니다. 주문을 하면 그 회사에서 그때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싼 책을 자기가 복사집에서 복사해서 만들어 1/4 가격으로 후려치면, 저는 그런 죄가 담배피우는 죄보다 심각하다고 봅니다. 담배는 솔직히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니코틴만 풍기지 않고 골방에서 피우면 그게 자기 건강에만 나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논문을 썼는데 니코틴이 얼마나 나쁜데 하나님의 성전을 연기로 태우느냐고 하는데 그것도 말이 되는 것 같지만 그렇게 따지면 커피도 먹지 말아야 하고 맵고 짠 음식을 먹는 것도 죄일 것입니다. 오늘도 제가 맵고 짠 음식을 먹었는데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그런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한 윤리입니다. 특히 컴퓨터 관련 부도덕들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13년, 14년 전에 교회의 불법 프로그램을 한 3년에 걸쳐서 다 없애버렸습니다. 그 일에 돈 많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3000만원 이상 들었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을 정품으로 바꾸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찾으면 그냥 쓸 수 있는데 250만원 주고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가슴이 쓰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훔친 프로그램을 가지고 주보를 만들고 교재를 만들어서 성도들에게 올바르고 정직하게 살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저는 주장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가이드라인을 종교개혁자들은 또렷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주일은 영혼의 장날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고 영혼이 충만한 하늘의 은혜를 누리는 날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새벽에 일찍 예배를 드리고 하루 종일 어디로 놀러가는 일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있었다면 그것을 어마어마한 죄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절대로 올바르게 주일을 지키는 방법은 아니고 권장할 사항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일은 어쨌든지 간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업이 되도록,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복락이 되도록 교인들을 교육시켜야하는데 문제는 아무리 그렇게 교육을 시켜도 실제로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그것을 자기가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감격이 있는 예배가 되는 것이 주일을 거룩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실질적인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주일에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으면 다른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주일 오후에 까지 나와서 은혜를 받고 싶어 하고, 전도하고 싶어 하고 기도하고 싶어 하고, 그러면서 주일 자체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경험했습니다. 제가 총신을 졸업하고 한 600명 모이는 교회에서 전도사를 했는데 그때 하나님이 정말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토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철야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은혜를 달라고 2년 반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체력이 있었습니다. 토요일에 철야하고 새벽까지 기도하고 새벽에 잠깐 눈 붙이고 어떤 날은 기도가 잘 되는 날은 거의 눈을 못 붙이고 아침에 세수하고 새벽예배 설교하고 아침예배 설교했습니다. 아이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주일 예배가 끝나고 나서 집에 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상당히 많은 아이들이 남아서 교회 구석구석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두 시간, 두 시간 반씩 기도 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다음에는 교회 나오지 않은 친구를 찾아가서 심방했습니다. 이러면서 아이들의 모든 관심사가 세속적인 관심사는 없어지고 오히려 주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인 우리가 주일을 잘 지켜야 한다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더 좋은 해결 방법은 주일이 정말 영혼의 행복한 날이라는 것을 감격이 있는 예배를 인도함으로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을 질러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1997년도에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라는 책을 썼습니다. 여러분 중에 읽으신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10만부이상 팔렸는데, 그 책이 나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면서 책이 승승장구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책을 만든 출판사 사장의 친구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제 책을 읽고 은혜를 많이 받고 나니 자기는 예배자로서는 꽝이었고 지난날을 회개하고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토요일에 헌금도 준비해 놓고 가족들이 기도하고 일주일 내내 예배시간에 은혜받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예배당에도 15분 전에 가서 기도하기를 6개월 동안 했답니다. 그 책에서 시키는 대로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예배의 감격에 빠졌겠는지를 물어보더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이 예배의 감격에 빠졌겠습니까, 못 빠졌겠습니까? 못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평신도가 한 얘기가 재밌습니다. 자기는 감격이 있는 예배를 드리는 게 모두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똑바로 했는데, 예배의 감격에 빠질 준비는 되었는데 자기 등을 떠밀어서 빠뜨리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여기서 사실은 모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발견한 공식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주일 한 복판에는 예배의 감격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가 있고, 감격이 없는 예배의 한 복판에는 죽은 설교단이 있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설교가 살아있는 예배에서 감격을 만나게 되고 그 감격을 경험함으로써 그날, 주일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기쁨의 날이 되고 하루를 그런 기쁨 속에서 충만한 하늘의 은혜를 공급받을 때, 일주일을 승리로 이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발견한 공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껏 목회를 해 오면서 일곱 명을 데리고 교회를 한 다음부터 지금까지 매주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은, 설교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될 때, 주일이 이런 날이라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렇게 가르쳐주고 싶은 대로 주일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생겨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의 예배가 변화되려면 목회자들이 깊이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고 설교를 잘 준비해서 살아있는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배 시간에 하나님이 회중들을 만나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때에 주일이 거룩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겠습니다. “그날”이 나옵니다. “그날”은 주일인데, 주일이 안식일을 계승한다고 할 때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그러면 토요일인 안식일은 한 주간의 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쉬십니다. 그 마지막 날입니다. 그런데 이 의미가 주일에 와서 바뀌는 것입니다. 주일은 한 주간의 첫날입니다. 첫날에 주님을 만나고 생명의 은혜를 받고 그 힘을 가지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이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은 원래의 성경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개혁신학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냥 교회가 일요일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정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 날이 주일이 된 것이고 그래서 그날이 하나님 앞에 특별히 모여서 예배를 하고 영혼의 은혜를 받는 날이 된 것이지, 토요일 다음날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얘기합니다. 안식교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 논리에 우리는 동의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논증해 보겠습니다.
한 주간에 마지막 날이냐 그냥 하루이냐 라고 하면 그냥 하루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우리를 가르쳤던 이상근 박사님이 계십니다. 제가 그분의 조교를 했습니다. 그분이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그날을 정했기 때문에 그날이 주일이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지만 우리가 그 일요일을 주일로 삼았기 때문에 된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일요일 아니라 화요일로 온 교회가 정하면 그 날이 주일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얘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인데 그것을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이것도 창조와 똑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계기적인 날이라는 것은 이렇게 이렇게 넘어가는 하루를 계산한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안식교에 대해서 이렇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토요일이 안식일이라고 얘기하는데 그 안식일이 어느 시점인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구약에서 나오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면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이렇게 나오는데 해와 달이 창조된 것이 넷째 날입니다. 그런데 해가 없었을 때에도 날이 나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다양한 설명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수적인 신학 안에서도 이 하루하루를 24시간 하루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한 시대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나누어집니다. 예를 들자면 웨스트민스터에서 가르쳤던 에드워드 제이영 박사는 24시로 보았고, 그 위의 선생님인 오스왈드는 이것을 시대로 보았고, 그 제자인 영은 날짜로 보았고, 그 밑에 제자인 글리슨 아처는 이것을 한 시대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에 대한 견해는 서로 나누어집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극지방으로 가게 되면 6개월은 밤이고 6개월은 낮입니다. 제가 직접 가서 보았습니다. 해가 지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11시가 되었는데도 대낮처럼 밝아서 모든 사물들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 1시, 2시 쯤 되면 여기의 오후 5시나 6처럼 약간 흐려지다가 다시 해가 환하게 떠오릅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의 위치가 대충은 나오지만 그 위에 있는 극지방은 그 날짜를 어떻게 계산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문제들이 계속 나옵니다. 또 이쪽을 기준으로 하면 지구 반대쪽에 있는 그 곳의 날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가 월요일이면 반대쪽의 미국은 일요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월요일에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가면 다시 월요일이 됩니다. 지구의 이런 모순들에 대한 설명을 놓고 본다면 우리가 이것을 계기적으로 몇 번째 날로 집착을 해서 주일의 개념을 생각하는 것은 적합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나 칼빈이나 이런 종교개혁자들도 주일은 교회가 결정한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주일에 모이는 것을 결정했는데 이런 것들이 바로 주일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들이 그런 주일을 개교회에서 “우리는 토요일을 주일로 한다!”고 하면 안 되겠지만, 공교회적인 합의 속에서만 이루어져야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은 공회에서 정한 날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주일이라는 설득력을 가져야합니다. 사도바울이 경고했듯이 날에 집착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충분히 경계해야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 '사바티스모스'와 '카타파오시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희랍어입니다. 두 가지 모두 안식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사바티스모스'와 '카타파오시스'라는 것은, 둘 다 안식을 나타내지만 '사바티스모스'는 안식 중에서 특히 육체적인 안식을 나타내고 '카타파오시스'는 영적인 안식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안식을 얻게 될 때에는 이 두 종류의 안식을 모두 누리게 됩니다. 여기서 노동을 하고 땀을 흘려야 겨우 식물을 먹는 이 고단한 수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이런 세미나도 없습니다. 거기가면 이런 세미나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바티스모스'입니다. 그리고 '카타파오시스'는 영적인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이 미래에 우리가 누릴 영적인 안식을 앞당겨 누리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당연히 앞당겨 누리는 주일에 두 가지 안식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쉼이 있고 두 번째로 영혼의 쉼이 있어서 이 주일 자체가 천국의 향취를 누리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일주일 동안 살면서 육체의 안식도 거의 없이 살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은퇴하셨거나 실업상태에 있는 분들은 육체적으로 편할 수도 있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은퇴하신 분들이 한편으로는 부럽습니다. 옛날에 옥한흠 목사님이 은퇴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필수였는데 은퇴하고 나니까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퇴하기 전에는 매주일 강단에서 설교를 해야 했는데, 은퇴하고 나서는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은퇴하신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별로 재미가 없다고 하십니다. 현직에 있을 때가 좋다고, 끝까지 쫓아낼 때까지 하라고 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육체적인 쉼이 없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 쉼을 주일에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막 들뜨지 말고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육체가 푹 쉼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그 쉼을 강조해서 하루 종일 잠이나 자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히려 리차드 벡스터 같은 목사님들은 몸이 아프지 않다면 주일에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토요일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까지 이야기합니다.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쉼이 있고,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사실 두 번째는 많이 동의가 됩니다. 저도 설교를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교회를 섬기면서 은혜를 많이 받는데, 어제 같은 경우도 소리를 지르면서 설교를 네 번 했는데 아침8시부터 점심 먹는 잠깐의 시간을 빼고는 3시20분까지 예배를 드렸습니다. 네 번의 설교를 하고 네 번의 성찬을 집례를 하고 제직회까지 했습니다. 이럴 때 목회자의 '사바티스모스'는 어디로 갔을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목회자가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쉼을 얻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이상근 박사에게 어떤 학생이 질문했습니다. “주일이 그렇게 안식을 하는 날인데 목사는 하루 종일 고생하면 주일 위반이 아닙니까?” 했더니 혼났습니다. “어디, 목사가 태어나서 교회를 위해서 섬기다가 죽는 것이지, 그걸 힘들다고 주일 위반이라고 하느냐!”하고 말입니다. 숙제로 남지만 이 두 가지를 주일에 맛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첫째는 노동으로부터의 쉼입니다. 주일은 영적인 깊은 은혜와 함께 육체적으로 노동으로부터 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서, 그것을 공부를 하지 말라, 뭘 하지 말라, 이렇게 하지 말고 육체로부터 쉬면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경건서적을 읽고 그러면서 주일을 은혜롭게 보내는 것들을 어려서부터 알게 했을 때에 그때에 성장해서도 이 주일을 가족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하는 날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주일에 가족들의 얼굴보기가 더 힘듭니다. 목회자의 집안 아닌 다른 집안도 마찬가집니다. 일주일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 자기가 놀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한풀이 하듯이 주일에 노는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면 피곤이 엄습하는데 평일에 근무한 것보다 더 피곤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월요병이라고 직장인들이 말하는데, 미국이나 이런 곳에서는 월요일에 생산한 자동차는 사지 말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월요일에 불량품이 가장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제일 재수 없는 피고는, 아침에 부인과 대판 다투고 온 판사, 이 사람에게는 웬만하면 징역을 판결 받습니다. 기분이 나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잔뜩 피곤해서 월요일에 왔는데 피고가 말이 많을 때, 판사가 짜증이 나지 않겠습니까? 월요일이 이런 날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일에 푹 쉬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연법적 질서의 논쟁이 나오는데, 나중에 집에 가서 차근차근 읽어보시면 아주 재밌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며, 영국에서 청교도들이 이 문제로 고민할 때는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영국이 1600년경에 잉글랜드가 410만이었고 그 위에 브리튼이 약 400만 명이었습니다. 5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여기는 530만으로 늘어났고 여기는 770만으로 늘어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지도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이쪽에 있는 사람들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수공업을 합니다. 면직물, 양털을 깎아서 만드는 섬유, 이런 것들을 수공업으로 하면서 수출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장제 노동자로 일합니다. 당시 영국 노동자의 그림이 나옵니다. 이런 마을입니다. 당시 키더민스터 마을입니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일을 합니다. 일을 하면서 이 사람들이 식물생산량에는 한계가 있는데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실업이 만연하게 됩니다. 농업이 여전히 주된 사업이었지만 농촌에서 자급자족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계절적으로 남아도는 농촌인구들이 촌락 공동체에 모여서 가내 수공업을 하게 되고 도시로 인구가 유입되는 요인이 됩니다. 이때 직물업은 서남부지역, 등등의 지역에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흩어져서 공장제 수공업의 발전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의 삶의 질이 극도로 저하되는 것입니다. 키더민스터같은 아까의 그 도시가 바로 산업혁명이전에 공장제 수공업이 있던 지역입니다. 이곳은 운하를 통해서 많은 배들이 드나들면서 무역이 이루어지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위쪽에 광산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리차드 벡스터의 표현을 빌면, 안식일에까지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에게 일을 하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직장에서 해고되기 때문입니다. 해고되어도 일할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에도 꼼짝없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교도 지도자들이 이런 조치를 내 놓습니다. “주일을 온전 휴무하라!” 주일은 자기만 쉬면 안 되고 자기에게 고용된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도 죄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쉬게 하라고 했습니다. 주일에 성도들이 시장을 통과할 수 없도록 교회에서 법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아주 웃기는 일이지만 그 당시의 역사적인 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그 당시 교회가 그것을 얼마나 심각한 것으로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시장을 통과하지 말라는 것은 물건을 사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게 되면 팔 것이고 팔게 되면 누군가가 만들어야 하고, 그러면 누군가가 또 고용이 되어서 주일에 휴일이 없이 일하게 되니까 이 고리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끊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아까 말씀드린 자연법적 질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부터 6일 일하고 하루는 쉬게 하신 것이고 이것을 지키는 것 죄가 되느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일반은총 차원에서 하나님이 이 온 우주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의 질서이고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으로 지켜야하는 것만이 아니라 국법으로라도 만들어서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이 일요일은 쉬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민주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을 그 청교도들은 실제로 자신의 도시에 얼마나 심각한 일이 일어나는 지를 실제로 본 것입니다. 리차드 벡스터같은 사람이 키더민스터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지난 2월에 여기에 가서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했는데, 이런 곳에서 이것을 강하게 주장한 것입니다. 목숨을 걸 정도로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신실하게 예수 믿는 사람인데 돈을 잘 벌어서 큰 공장을 하는데 1천명의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 나서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구나 하면서 자신의 노동자들을 쉬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그 당시 노동자들을 위한 최고의 복지효과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일에는 쉬어도 되고 사람들에게 일을 시켜도 되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제임스1세의 스포츠선언에 의해서 자극을 받은 청교도들이 더 강력하게 주일성수의 개념을 강조하고 그 주일에 온전히 하나님을 경배할 것, 그날 쉬어야 할 것에 대해서 신학적인 강조점을 특별은총에서 일반은총까지 확대해서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넘겨보시면, 결국 리차드 벡스터 같은 청교도들은 당연히 신앙교육서나 그들이 가르치는 모든 곳에서 주일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책에 보시면 그 상세한 규정들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 양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나 칼빈이 했던 제네바의 교리문답이나 그 전의 마르틴 루터의 대소요리문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상세화 되면서 많은 조항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들을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어떤 균형을 유지해야 하느냐 입니다. 하나는 방종주의입니다. 신약의 시대가 되었으니까 구약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켰는데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 것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나치게 방종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매우 세속적인 방식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방종주의로서 잘못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율법적인 바리새주의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물건을 주일에 가져오고 돈은 내일 주면 된다고 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주의 입니다. 화폐 바꾸는 사건 같은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청교도들이나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했던 방식과는 너무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부터 심성자체가 유교가 지배하고 있던 구한말에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실은 아주 강한 유교에서 오는 율법주의적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는 상태에서 십계명 중에 이 제4계명인 안식일을 이해하게 될 때 굉장히 율법주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주일에 이것을 하면 죄인지, 저것을 하면 죄인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주일에 무슨 일을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를 물어보지 않고 말입니다. 사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을 정말 사랑하게 되면 무엇을 해서 이 사람을 기쁘게 할지를 생각하지만 껄끄러운 사람에게는 ‘내가 이 정도까지 해도 가만히 있겠지? 저렇게 하면 아마 성질을 부릴거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내가 해도 하나님이 화를 내지 않으실까를 생각하기 보다는 무얼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사고방식이 너무 방종주의로 치우쳐 버리거나 바리새주의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 둘 모두를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외국의 신학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아주 좋은 모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주 정통주의 개혁주의 집안에서 자란 평신도인데, 자기는 주일에 대중교통을 타지 않지만 자기 차는 운전을 한답니다. 돈을 내고 대중교통을 타지는 않지만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기름이 떨어지면 기름은 넣는답니다. 그렇지만 자기와 똑같은 방식으로 주일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그에게 적합하게 주일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주일에 무엇을 사먹는 문제나, 뭔가를 사는 것도 종류의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주일에 집을 사러 간다고 해서 6시에 1부 예배를 드리고 나서 강남을 누비면서 밤늦게까지 아파트와 건물 상가를 보러 다니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방종주의와 바리새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제임스 패커가 남긴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고 하나의 지침이 됩니다. 이 분이 최고의 청교도 연구가로서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신 분입니다. 살아계셨으면 굉장히 할아버지가 되셨을 분입니다. “만일 우리 청교도들이 자기 시대의 표현으로 해석했던 제4계명의 적용을 우리 자신들에 엄격하게 부과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를 늘리고 영속시킬 뿐이다.” 청교도를 따르는 것은 좋지만 맹목적으로 왜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것들을 결정하게 되었는지를 문맥을 고려해서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판박이처럼 따라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최고의 청교도 연구가 가운데 한 사람이 진술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 그러한 역사를 모두 이해하면서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하고 우리가 그런 중요한 정신들을 그대로 따르면서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적용을 해서 주일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육체적인 쉼에 도움이 되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표준들을 이 주일에 관해서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기성의 적용을 물려받으려는 유혹에 저항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에 저항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오늘날 우리 자신의 상황에 현실적으로 맞도록 다시 적용하려고 한다면 이 문제를 판단하도록 우리를 인도해주는 어떤 적극적인 원리들이 청교도의 해석에서 비할 수없이 풍부하게, 그리고 시사적으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임스 패커의 말입니다.
자, 그래서 주일을 지킴에 있어서 율법적인 바리새주의를 방종주의와 함께 똑같이 경고해야합니다. 두 개의 중요한 원칙, 주일이 하늘나라를 먼저 누리는 복된 날이 되어야 한다. 노동으로부터 쉼이 있는 날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일에 크리스찬 고용자들에게는 일을 시키고 고용주는 교회에 나와서 혼자 예배드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허셀포드 목사님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있는데 수시로 교회에 늦게 오거나 빠집니다. 그날도 주일에 지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왜 예배 시간에 늦으셨습니까?” 했더니, “아,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제가 목장을 하는데 막 교회를 나오려고 성경 찬송을 들고 나오는데 송아지 하나가 도랑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하는데 제가 그 송아지를 건져내고 나와야 하겠습니까, 그냥 내버려두고 교회를 와야겠습니까? 성경에도 그걸 건지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니까, 허셀포드 목사님이 명언을 남깁니다. “잘 하셨어요, 장로님. 아무리 주일이라도 어린 송아지가 그렇게 빠져서 힘들어 하면 당연히 꺼내줘야지요. 그런데 장로님, 자꾸 그 송아지가 그렇게 빠지면 팔아버리십시오. 그리고 주일에는 교회를 오십시오.”
그 다음, 그러면 주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현실적인 제안을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중요한 것은 우리 시대의 신앙고백을 작성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자기의 신앙고백을 제대로 작성하지 않고 그냥 350년 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이 정말 신학적으로 옳은 것인지, 그 정신을 그대로 계승을 해서 그 당시의 인구폭발의 문제나 그 문제를 지나서 인구 감소의 문제, 산업의 발달, 산업이 발달하면서 예전에는 뭔지도 몰랐던 죄들이 수없이 많이 생겨나게 되는데 인터넷 범죄를 비롯해서 비윤리적인 저작권의 문제들이 수없이 생겨나는데 그게 진짜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제가 미국에서 봤는데 박사학위를 그 학교에서 주었는데 몇 년이 지나서 그 박사학위를 취소했습니다. 그 이유가 딱 한 줄을 베꼈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텐데 바로 박사학위를 취소했답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대해서 굉장히 둔합니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이 써 놓은 작품들을 베끼는 것에 대해서는 하등의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잡지가 하나 와서 읽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 기고한 적이 없는데 내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보니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을 불러서 그 이름을 가리고 읽으라고 하고 누구의 글이냐고 했더니, “이거 우리 목사님 글이네요.”합니다. “이거 봐라. 이름이 어떤 교수 이름으로 되어 있다.”했습니다. 내 책에서 따서 ‘은’, ‘는’, ‘이’, ‘가’, 이런 것만 바꿔서 쓴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 책이 딱 한 번인가 두 번 나오고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비양심적인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 책에 각주가 막 달려있어서 어려운 책처럼 보인다고 하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두꺼운 책을 사셨는데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각주를 하지 않으면 김 목사도 어디서 따다가 이용해 먹는게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철저하게, 절대로 누가 내 연구 결과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 않도록, 책을 보지 않고 내가 기억을 하는 것이면 기억을 거꾸로 더듬어서, 인터넷을 뒤지고 책을 다 찾아서 내 기억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내고야 맙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다 제시하고 각주를 달아서 정직하게 글을 쓰려고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이유가 이런 데에 있어서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해 놓은 신앙고백은, 그 사람들은 자기 시대의 고민을 가지고 자기의 신앙고백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우리가 우리 시대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환경의 문제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환경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아십니까? 저는 최근까지 몰랐는데, 제가 참치를 좋아하는데 고등어나 연어보다 참치에 중금속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고등어는 앞바다에서 노는 것인데 참치는 태평양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인데 그게 더 더럽다는 말입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 가면 우리나라의 두 배 반 내지 다섯 배 정도 되는 섬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 각국에서 떠내려 와서 모인 플라스틱들입니다. 물에 뜨지도 않고 완전히 가라앉지도 않는데 우리나라의 2.5배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게 다 분해되는데 한 200년 되어야 하는데 그게 분해되면서 그 분해된 가루들을 태평양의 물고기들이 먹고 작은 것이 먹을 것을 큰 물고기가 잡아먹고, 그것을 더 큰 물고기가 잡아먹습니다. 결국 이것들이 다 퍼져서 이제는 무공해라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심각한 사태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할 때는 없었습니다. 그 대신 그런 환경의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고민해야 할 것인지, 특히 식품에 관한 것, 중국에서는 우유를 먹고 아이들이 머리가 이만큼 커져서 그것을 만든 사람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심지어는 기자 한 사람이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 기자가 기사를 썼는데 가게에서 파는 기름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음식점 골목이 모두 모여 있는 하수도 구멍을 파서 그 기름을 파내서 깨끗하게 걸러서 포장해서 싸게 시장에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음식점에서 한 통에 5만원씩 하던 것을 1만5천원에 파니까 그것을 사서 음식을 튀기고 만든 것을 보도한 것입니다. 그 기자가 살해되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그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심각한 환경의 문제, 이런 음식의 문제, 그리고 유전자 변형된 식품인데도 표시하지도 않고 사용하는 것, 학자들도 많은 사람들이 유전자 변형된 것을 먹었을 때 자신들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20년 후에 문제가 될 수도 있고 30년 후에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아직 그것이 사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 이런 문제들은 그 당시에 없던 문제들입니다. 이런 문제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윤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 시대의 고민을 하면서 신앙고백을 작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주일이 뭔지 의미도 모르고 엄마 아빠가 교회 다니니까 다니고 엄마 아빠도 주일 개념이 없이 사는 사람들 보면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목사가 야단을 치면서 주일을 그렇게 보내지 말라고 하니까 설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 공과가 주일 성수였는데, 제가 2년 전에 그 논문을 발표하면서 총회에서 자극을 받아서 이번 주일학교의 성경학교 공과를 주일성수로 해야겠다고 저한테 와서 제가 자문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사실 그렇게 만든 요인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보니까 포스터도 붙어있고 계속 운동을 하고,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일이 무슨 의미인지 가르쳐주고 부모가 그런 모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려면서 주일이 정말 이렇게 복된 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아까 말씀드린 바리새주의를 경계하고 그 다음에 자유적인 방종을 경계해야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 신자들의 영적인 변화를 깊이 도모하고, 그래서 주일에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성도들이 기쁨이 충만해서 생활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목회를 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주일에 은혜가 많이 부어지면 이상하게 성도들이 집에 잘 가지를 않습니다. 남아서 삼삼오오 모여서 여기서 기도하고 저기서 기도합니다. 여기 모여서 교회 일을 의논하고 저기 모여서 서로 상담합니다. 그래서 주일 자체가 영혼의 진정한 치료가 있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쉼이 있고 말입니다. 그 속에서 성도들과 함께 만나는 것을 한 없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미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강림 사건이 있고 초대교회 공동체가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까 은혜를 받고 기도가 있고, 말씀과 기도가 있으니까 그 속에서 뜨겁게 사랑하는 사랑의 교제가 있고 교제가 있으니까 섬김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네 가지의 요소가 오늘날 교회에 다시 재현될 때 그때에 진정으로 주일을 잘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어떻게 주일을 잘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주일을 잘 지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자기가 싫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가 싫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남녀가 어떻게 하든지 같이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불러다 놓고 야단을 치면서 “네가 조금만 더 참으면 남편이 네 뜻을 잘 이해하고 돌아와서 좋은 가정을 이룰 것이다.” 얘기할 수 있는데, 원래부터 그 인간과 살기가 싫었는데 이번에 딱 걸린 것이라면 이번에 끝내고 싶지 참아서 다시 회복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래 살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딱 걸린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 끝낼 기회입니다. 그런데 왜 참겠습니까? 참으라고 얘기해도, “나는 싫습니다!” 할 것입니다.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모든 이야기들을 아무리 하고, 교수님들이 와서 핏대를 세우고 소리소리 질러도, 그게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해도 사람이 옳게 하고 싶지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헛물은, 두꺼운 책, 노트, 연필, 컴퓨터 이런 것을 계속 사다주는 것입니다. 컴퓨터는 게임이나 하고 놀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전쟁하기 싫은 사람에게 제일 짜증나는 것이, 최신 무기를 계속 갖다 주는 것입니다. 전쟁하기 싫은데 말입니다. 장기나 두고 막걸리나 마시면서 놀고 싶은데 왜 자꾸 사다 주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성도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하나라도 올바르게 가르쳐주어서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지방에 있는 목회자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우리 교회에 옵니다. 많이 올 때는 한 180명에서 200명씩 옵니다. 와서 3일씩 교육을 받고 여름에 우리가 아웃리치를 가 주는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노래를 하면 모두 가수처럼 노래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분량이 아닙니다. 저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럽지만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잘 가르치는 것은, 그렇게 잘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명은 은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명은 그런 재능이 많든 적든 우리 모두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분량을 아시니까 우리에게 맡겨주신 분량의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준비하고, 이 주일 성수에 대해서 배운 것도, 그냥 그런 것이구나 하면서 휙 지나가지 마시고, 가서 차분하게 읽으면서 몇 번으로 나누어서 설교를 하십시오. 주일은 이런 날이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해서 사람들이 깊이 은혜를 받고 설교를 들은 후에는 주일을 잘 지키며 사는 것이 우리 영혼의 복이라는 마음을 갖도록,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하기 위해서 연구를 잘하고, 지금 여러분들이 원서를 읽거나 하지는 않더라도 한글로 쓰인 것이라도 잘 보면서, 절대로 남의 설교를 베끼지 마십시오. 그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 꼴을 먹이라고 하셨지 남이 만들어 놓은 꼴을 가져다가 휙 뿌려주는 것은 진짜 삯군이나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망태를 메고 꼴을 베러 나가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해서 설교준비를 해야 합니다. 시골에 연세 많으신 분들은, 도시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할 설교를 10시간 준비한다면, 그 분을 위해서는 20시간을 준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내려와야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젊은 목회자가 말하기를 설교준비를 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설교준비를 안 하고 가면 졸고, 하고 가면 잔다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쉬운 말로 그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수 있게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를 해서 마치, 농사짓는 사람들이 농사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주일 설교 시간에 이 설교에 매이지 말고 아주 자유롭게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 듣고 난 다음에 ‘아, 목사님 말씀대로 살아야겠구나!’하는 감동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설교와 목회는 이렇게 다릅니다. 목회에 있어서 행정은 목회자가 열번 잘 하다가도 한 번만 교회를 꼴아 박으면 교인들이 항상 불안해합니다. ‘저 목사가 언제 한 번도 교회를 꼴아 박겠지…’하며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설교는 반대입니다. 아홉 번 못하다가도 한 번 불꽃이 튀듯이 성도들이 은혜에 깊은 감격을 하면 아홉 번 실패해도 ‘오늘은 터지겠지, 오늘은 터지겠지.’합니다. 정말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아홉 번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강력하게 그 목사님에게 은혜 받은 기억이 남아서 이번 주에는 터지려나, 다음 주에는 터지려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찰스 스펄전 목사도 열여섯 살까지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계기가 있었습니다. 스펄전은 세 살 때부터 장난감처럼 책을 가지고 놀고 읽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대학은 가지 않았지만 상당한 지적 수준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골 교회의 목사가 설교하는게 갑갑했던지 계속 잠을 잤습니다. 목사님이 하도 화가 나서, “이보게 젊은이! 자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예수를 바라보라고!” 이 말에 성령의 불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스펄전이 된 것입니다. 그 스펄전의 이름은 기억해도 스펄전에게 생애적으로 은혜를 받게 했던 그 목사님은 아무리 찾아도 누구인지 이름이 나오질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스펄전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지만 그를 깨웠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윌리엄 포사이스라는 사람이 얘기했습니다. “설교자는 성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얼마나 신실한지를 따라서 하나님께 상을 받는다.” 그래서 열매가 많든 적든 신실하게 목회를 해야 합니다. 제주도에 제 친구가 목회를 하는데, 직장다닐 때는 방황했는데 제가 다시 예수 믿게 해서 목사까지 되어서 목회를 곧잘 했습니다. 제주도에서 70여명 모이는 곳에 가서 200여명이 넘게 만들었습니다. 제주도에서 그런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교회를 물려주고 다른 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거기 있을 때 가서 세미나를 했습니다. 세미나가 끝나고 사모님과 목사님 둘이 앉아서 얘기를 하는데, 그 목사가 얘기를 했습니다. “김 목사, 여기는 비전이 없어.”, “무슨 비전?”, “여기는 부교역자도 쓸 수가 없어.”, 그도 그럴 것이, 육지에서 데려와야 하는데 비행기 값만 그 당시에 한 달에 80만원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사례금은 50만원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려면 30만원씩 자기 돈을 갖다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교회가 규모도 있으니까 장로님들과 이야기를 해서 사례금은 50만원 주더라도 비행기 값은 따로 줘야하지 않을까?” 했더니, 장로들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답니다. 그러면 자라나는 세대는 누가 교육을 시키냐고 했더니 거기에는 비전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이냐? 하나님이 거기 세워주셨으면 죽도록 충성하다가 죽어버리면 그만이지!”, “아, 여기는 젊은이도 없어.”, “아니, 시골에 없는 젊은이를 어떻게 하냐? 젊은이가 그리우면 왜 거기서 목회를 하냐? 신촌 앞에서 개척을 해야지. 이대 앞이나 연대 앞에서 개척을 해야지.”, “당신은 비전이 있어서 당신 교회도 짓고 이사 간 것 아니냐?”,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이냐?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할 수 없이 땅을 사서, 서울도 아닌 외곽으로 밀려나서 변두리에 있는 공장 사서 교회를 한 것이고, 사람들이 더 모이니까 교육관도 산 것이지. 그게 죽어라고 고생한 일이지. 아니, 없는 젊은이를 어떻게 하냐? 당신의 비전이 뭔지 가르쳐줄까? 여기서 계속 목회하다가 그 양반들이 꼬부랑 할아버지 되서 늙으면 죽을 때까지 심방하다가 죽으면 알코올 솜으로 염해다가 베옷 입혀서 묻어주고 묻어주고 묻어줘서 다 묻어주면 당신 사명 끝나는 거야.” 목사는 별로 은혜를 못 받는데 사모님이 은혜를 엄청 받았습니다. “아멘, 아멘!”했습니다. 비전은 무슨 비전입니까? 하나님의 뜻 이루다가, 무대 위에서 활동하다가 어느 날 마칠 때 되서, 혹은 그보다 일찍 하나님이 그만 돌아와라 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뉴턴 목사님은 죽을 때가 가까우니까 그의 친구가 안타까워서 편지를 썼더니,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배 밑창에서 노를 젓던 노예 하나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까짓 것이 무슨 대수겠습니까?”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모두 그렇게 하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젊은이도 없고 뭐가 어떻고 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게 그렇게 안타까우면 신촌으로 오십시오. 신촌에서 개척을 다시 하십시오. 여기 남아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목회하면서 그러면서 사명을 감당해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