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의 주일성수, 그 평가와 계승(1)
녹취자: 백지영
오늘날의 주일성수는 어떤 의미에서 교회가 거의 포기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교인들이 교회에 안 나오는 것을 교회가 용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전에 제가 1920년대의 새문안교회의 당회록을 보았습니다. 당회록이 아니라 치리록입니다. 매주일 치리가 이루어집니다. “아무개는 누구한테 돈을 꾸었는데 교회 안에서 그런 것을 하지 말아야 되는데 그런 것을 했다. 그래서 고소가 들어와서 빨리 돈을 갚으라고 그랬는데도 돈을 안 갚고 버티더라. 그래서 치리 해 가지고 징계해서 면직 등등 하고, 아무개는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았는데 계속해서 수시로 주일날 빠지기에 당회가 경고를 두 번이나 했는데 끝까지 말을 안 듣고 교회를 빠지더라. 그래서 제명.” 그렇게 했더니 거의 매주 치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치리가 결정적으로 꺾어지고 안 되기 시작한 게 언제냐 하면 친일파 문제였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친일파들이 생겨나면서 미소기바라이,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미소기바라이에 참여하고, 그 다음에 총회들이 각각 하나씩 하나씩 넘어가면서 일본 천왕에 대한 경배 그리고 신사참배 이런 것들이 국민의례이지 종교행위가 아니다 라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의결하고, 지도부들이 도덕적으로 무너지면서부터 사실상 교회에서 치리하는 전통들이 거의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한국교회 안에서도 친일파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게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리가 제대로 안되고 신사참배문제만 하더라도 정리가 안 되고 그렇게 하면서 교단이 갈라지고 하는 아픔들이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면에서 본다면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어떻습니까? 최근에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주일 안 지켰다는 이유 때문에 치리하신 적 있습니까? 장로님 경우에는 가끔 보았습니다. 장로님이 주일을 안 지키는데 어쨌든 당회 전체에 누를 끼치니까 또 괘씸죄도 좀 있고 하니까 치리를 해서 제명을 해버린다든지 그러는 것은 제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평신도들을 주일을 잘 안 지킨다는 이유 때문에 치리를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수주일의 문제는 거의 넘어갔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들이 주일을 어떻게 생각을 하고 주일 성수에 대해서 어떻게 성도들을 지도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한번쯤 짚고 넘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맨 처음에 우리시대 때 주일을 지키는 것들이 있는데 크게 네 가지입니다. 편의적 자유주의는 성수주일 그런 것은 다 케케묵은 옛날이야기고 무슨 인생을 그렇게 전투적으로 사는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또 지금 좋은 대로 살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는 전도지에 이렇게 광고를 했습니다. “일요일 날 어디 가실 분, 저희 교회는 토요일도 예배드립니다.” 주일날 어디 갈 사람을 위해서 토요일 날 저녁 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니면 토요일 오전에 예배를 드리든지. 그러면 그 사람들은 토요일 날 예배를 드렸으니까 주일날 부담 없는 가벼운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저희 교회는 주일날 일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5시에 예배드립니다.” 새벽 5시에 일부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5시부터 6시까지 예배를 드리고 나면 무슨 일정을 진행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면 그런 것도 있습니다. ktx 타고 여행을 가면서 스마트폰으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은 준비해 놓았다가 주든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교회에다가 쏴주든지, 그러면서 그래도 안 지키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이런 편의주의, 그런 것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것도 있느냐 하면 호텔 안에 예배를 드리게끔 해놓았습니다. 강원도에 오대산 호텔에 가보면 성당 미사하고 예배 두 개가 있습니다. 미사는 잘 기억이 안 나고 예배가 있습니다. 기독교계통 이랜드가 있는데, 9시인가 시골교회 목사님들 시간이 많이 나니까 돌아가면서 호텔에 와서 9시 예배를 드려주는 것입니다. 10명모이든지 15명모이든지 간에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은 노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예 믿는 사람들이 일요일 날 버스타고 가면서 버스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이 편의적 자유주의입니다. 꼭 예배를 드려야 되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치우친 일원론입니다. 무슨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 구별이 있을 수 있느냐? 그러니까 우리가 11시에 모여서 찬송 부르고 지루한 설교를 듣고 헌금내고 이러는 것만 예배가 아니라 우리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감사하는 것도 이 자체가 예배다. 그렇게 말하니까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일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고, 또 재미있는 것은 그분은 목회자이면서 선교사였는데 교묘하게 주일을 안 지켜도 되는 방법을 택하십니다. 예를 들자면, 미국에서 한국을 올 때 비행기를 타면 주일을 싹 지나면서 토요일 날 비행기를 탔는데 주일 저녁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 해서 왔다 갔다 하면 안 지켜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냐하면 지나친 일원론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좁은 의미의 공적인 예배는 여전히 성경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좀 다릅니다.
세 번째 치우친 이원론은 예배를 드리는 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우리의 일반적인 삶과 예배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사는 것은 죄지으면서 살기 싫은 것을 억지로 끌려가서 산 것이고 그리고 주일날 하나님 예배하는 것만이 거룩한 삶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나친 이원론입니다.
마지막 경험적 축복론은 주일을 그렇게 억지로라도 지켰더니 하나님이 복을 부어주시더라는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보수적이면서 이원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제일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면 진짜로 주일을 지킨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부자가 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저도 예전에는 이런 것에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평신도일 때 어떤 분이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보석상을 하는데 주일 날 문을 닫는다는 것은 장사 안한다고 맘먹은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물 같은 것을 대개 휴일 날 사러 나옵니다. 그런데 안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 주일을 잘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요일 날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출이 정확하게 30퍼센트가 줄더랍니다. 당연히 이익이 그만큼 줄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계산을 해 보니까 일요일 날 영업을 하고 돈을 벌던 때에는 엉뚱한 사고가 나서 돈이 많이 들어갔는데 주일을 지켰더니 수입은 줄었지만 사고가 안 나서 결국은 이익이더라는 간증이었습니다. 그러면 앉아있는 사람들이 아멘,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자면 에릭 리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영국의 달리기선수였습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결승전을 하는데 마침 주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나는 주일날 안 뛴다고 그랬습니다. 영국에서 미친놈이라고 발칵 뒤집혔습니다. 100m에서 우승을 할 유력한 후보인데 안한다고 하니까 영국 사람들이 다 뒤집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 뛰어서 실격이 되고 그 다음에 대회가 있는데 200m, 400m에서 휩쓸어가지고 더 유명해 졌다고 그러면 모두 아멘,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실제로 우리의 삶을 조사해 보면 어쩌다가 생겨난 그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이지 실제로 그런 일들을 지키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복을 받는 것을 한결같이 경험하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법관이 되기로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을 주일날 보기 때문에 안 봐서 법관이 안 됐고 그랬는데 가게를 차렸더니 더 잘 돼서 더 큰 부자가 되었다더라, 알오티시(ROTC)를 가려고 했는데 주일날 제식훈련한다고 해서 안했고 그랬더니 어떻게 됐다더라 이런 얘기들 영웅전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네 개 다 성경적인 주일성수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키는 것이 주일성수의 방식 인가?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먼저 말씀을 드리고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되겠는가 하는 문제를 서서히 더듬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주일성수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세 가지입니다. 일요일이 정말 주일이어도 괜찮은 것인가? 두 번째는 주일과 안식일 사이에 연속성이 있나 없나? 그리고 세 번째 그러면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될 것인가? 이 세 가지가 성수주일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만 제대로 답을 하면 이 문제는 풀렸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 일요일과 주일의 타당성 문제입니다. 주일의 규정과 성수방식인데, 주일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주님의 날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네 번 등장하는데, 세 번은 종말론적인 표현으로 네 번째는 그리스도의 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이 됩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볼 것은 주일의 타당성 문제인데 주일의 규정을 보면 안식교에서 특히 그런 주장을 많이 합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삼은 것은 기독교의 대표적인 배교의 한 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토요일을 안식일이라고 보고 여전히 그것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하면 로마제국시대 때의 일요일은 태양신 숭배의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원래의 순수성을 기독교가 잃어버리고 이교적인 종교의 혼합으로 간 대표적인 사례가 일요일을 주일로 삼은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조금 치우친 견해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당시의 로마시대 때에 월, 화, 수, 목, 금, 토 모든 날이 신하고 관계가 없는 날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름 자체가 거기서 옵니다. 그래서 월요일은 달과 관계있는 날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월(月)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화요일은 전쟁의 신 티르에서 튜스데이(Tuesday)가 옵니다. 그 다음에 수요일은 오디 혹은 우든 이라는 신에서 오고 목요일은 영화에도 나왔지만 토드라는 신의 이름에서 나오고 금요일은 오딘의 부인인 쁘레아에서 옵니다. 그래서 프라이데이(Friday)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토요일은 땅의 신 싸르티누스와 관계되기 때문에 세러데이(Saturday)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약에 구약의 안식일이 우리가 일요일을 안식일을 삼은 것이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에 굴복한 것이라면, 그러면 토요일을 안식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로마신화에서 나오는 싸르티누스 라고 하는 신들을 숭배하는 날에 굴복한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구약이 율법에 근거해서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았듯이, 신약도 뭔가 중요한 사건이 있기 때문에 성경적인 중요한 근거를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 그 날이 주일이 되었다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기독론적 전환입니다. 마태복음 12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날이고 그래서 부활 후 첫날에 초대교회가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이 이 글을 쓸 때 95년경인데 그때 이미 주의 날 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미 일요일이 기독교인들에게는 태양신 숭배하는 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새로운 영적 안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날이라고 하는 것들이 매우 분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오히려 저는 평가하기를 이렇게 태양신 숭배의 날을 주일로 지키게 된 것은 오히려 당시에 로마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 속에 있는 내용들을 기독교로 바꾸어버린 아주 중요한 선교적인 정황화의 한 성공사례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 중의 하나가 회갑예배입니다. 회갑이라고 하는 것은 주역에서 갑(甲)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육십 년 만에 돌아옵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회갑이라는 말과 예배라는 말은 그렇게 썩 어울리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굳이 표현을 한다면 60회 생신 기념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환갑이 가지고 있는 내용을 기독교적인 내용으로 바꾸어서 그래서 60평생 살아온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선교적인 정황화의 성공사례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중요한 규정이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이 연속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아주 조심스러운 이야기인데 들어보십시오.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시대의 주일이 연속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 크게 두 견해로 나뉩니다. 안식일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신약에서 주일을 지키는 것은 구약의 안식일과는 상관이 없다고 못을 박은 입장이 있고, 그렇지 않고 신약의 주일은 구약 안식일 제도와 아주 중요한 끊을 수 없는 연속성상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전자에 속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놀랍게도 마르틴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이었고, 후자의 견해를 가진 대표적인 사람들이 영국의 청교도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근대의 신학자로서는 찰스 핫지 같은 개혁신학자들이 안식일제도 연속론적인 입장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제도의 폐지론을 보겠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약 어디서든지 그날이 단순히 그날이기 때문에(즉 주일이 주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거룩하게 된다면, 또 만약 어디서든지 유대교적인 근거를 두고 그것을 준수하게 된다면 나는 그날에(주일에) 일하고 말 타고 춤추고 잔치하고 이런 것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들에 대해서 저항하며 무슨 일이라도 해도 좋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르티 루터의 주일에 관한 유명한 어록입니다. 주일에 관한 중요한 어록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될 것인가? 우선 첫째 루터가 이야기하고 싶은 중요한 대목은 이것입니다. 그 날이 그날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된다면, 그러니까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안식일기 때문에 거룩해졌을지 모르지만, 이제 신약시대의 주일은 단순히 그것이 주일이라는 이유 때문에만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절기를 정했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날 안에 무엇인가가 채워져야지 그날이 거룩한 날이 된다는 영적 사상을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유대교 사람들이 주일을 준수했던 방법으로 주일을 준수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가 아주 강조한 주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의 폭압적인 지배 아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명령하신 많은 부분들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성경의 특별한 근거도 없이, 이성으로 추론할 때 합당한 근거가 전혀 없이, 교회의 관습이나 직권에 의해서 어떤 것은 하지 말라는 식으로 강요하고 실제로 그것들이 지켜지지도 않고 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통해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자유에 대한 중요한 침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유를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마르틴 루터는 한방에 주일을 날려 버렸고, 그리고 주일은 다른 날하고 아무 차이도 없고 춤추고 노래하고 아무거나 해도 좋은 날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항상 어떤 말이나 역사적인 언급 사건들이 있을 때는 그 시대 역사의 문맥 안에서 그게 왜 그러했는지를 파악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걸출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안식일 제도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폐지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지만 폐지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일과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그것을 신약시대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속의 자유라고 하는 큰 틀 아래서 우리에게 적용을 해야 되는 문제는 남아있다고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칼빈도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 사람도 안식일제도 폐지론자입니다. 뭐냐 하면 날들의 차별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상을 위해 사는 날이고 주일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날이라는 식의 그런 것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공식은 성립이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날들이 다 거룩해져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일요일만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모든 날 동안에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정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칼빈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날들의 차별을 반대했습니다. 두 번째로 율법을 준수하는 일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에 보면 굉장히 많은 규례들이 나오는데 그런 것들을 우리가 그대로 지켜야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이 사람은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일을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날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역사가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초월적으로 완성이 되면 거기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한 기쁨과 영광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때에 우리들이 누리게 되는 그리스도와의 탁월한 행복과 기쁨 그런 것들을 그때에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것이 침투되어서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방황하다 살다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은혜를 받아서 그래서 성령을 체험하고 말씀에 큰 감화를 받으면 기쁨이 넘치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큰 평화가 옵니다. 그것은 원래는 예수님 오신 다음에 느낄 수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우리에게 맛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저주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주일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이 주일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앞당겨서 우리가 누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자녀들이 좀 잘못했어도 너그러운 용서가 주어지고, 저는 꼭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결혼하고 취직하고 해서 용돈 줄 필요가 없지만 옛날에는 항상 토요일 밤에 용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새 옷도 평일 날 사 놓았고 장롱에 넣어 두었다가 주일날 주고, 용돈도 주일 날 주고, 기쁜 소식도 말 안하고 있다가 주일날 발표를 하고 그래서 주일날이 예기치 못했던 기쁨과 축복을 받는 날이었습니다. 평시에 그랬더라면 반쯤 죽었을 텐데 주일이라서 너를 용서해 준다고 그렇게 교육을 시킨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본질적인 것은 그것보다는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래서 그날에 하늘의 기쁨 그것을 충만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날이 주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오늘 주일 빠졌다가 월요일 날 회사에서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그런 관점이 굉장히 많은데, 그러면 어쩌나 그런 비인격적인 노예적인 신앙을 떠나서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날로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옛날에 어렸을 때 그랬습니다. 주일날 돈 쓴다고 버스도 안타고 다니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철저했습니다. 아이들 공부를 주일 날 안 시켰는데 서울대 들어간 것이 간증거리였습니다. 아이가 책상 앞에 11시 30분부터 앉아있습니다. 왜냐하면 밤 12시 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때 통금해제 된 것처럼 노는 것 끝나고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서울대 들어갔다는 이런 게 간증거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전거도 안타고 다닌다고 하고, 빨래도 안 하고 바느질도 안 하고 그런 이야기를 듣는데, 그런 사람들 머릿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구약시대 안식일에 관한 규례들을 생각을 하면서 거기에 그대로 따라서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물건을 안사는 것은 물론이고, 또 약간 이상한 안식일주의자도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 때 목사님이 토요일 밤인데 탁자를 하나 사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주일날 절대 물건 사지 말라고 해서 그래서 못 사놓았더니 주일날 오후에 야단을 치시는 것입니다. 왜 탁자 사놓으라고 했는데 왜 안 가지고 왔느냐고 그래서 주일날 물건을 사면 안 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너는 그렇게 융통성이 없느냐고 주일날 아침에 물건은 갖고 오고 돈은 월요일 날 주면 되지 이 사람아 그러셨는데 뭔가 아닌 것 같습니다.
더 웃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1962년도에 화폐개혁이 있었고 환에서 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돈 바꿔주는 시한을 한국은행에서 발표했는데 일요일 밤 12시까지였습니다. 그때부터는 안 바꿔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입니다. 규정을 만든 사람들이 교회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일날 헌금이 걷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은행에 가서 새 돈으로 바꾸는 것 자체가 안식일 의무 위반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때 유명한 목사님이 김창현 목사님입니다. 후배 목사님이 전화를 드렸습니다. “김 목사님, 어떻게 합니까? 주일날 헌금을 갖고 가서 바꾸어야 되는데 당회를 해도 결론이 안 납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김창현 목사님이 “뭐 그까짓 거 갖고 당회를 합니까? 나는 당회도 안 했습니다. 나는 은행에 전화를 했습니다. 월요일 날 갈 테니까 바꿔주시오.” 법으로 12시까지 라고 했는데 바꿔주겠습니까? 안 바꿔준다고 하니까 안 바꿔주면 그 헌금을 자루에다 넣어서 교회 천정에 매달아놓고 이놈의 정권이 거지같이 제도를 만들어서 성도들이 낸 이 귀한 헌금을 안 바꿔줘서 저게 쓰레기가 됐다고 그것을 자손대대로 교회에다 걸어놓고 가르치겠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대단한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어느 정도 대단한 분이시냐 하면, 이북에서 남쪽으로 넘어오는데 이 양반이 밤새도록 남한으로 넘어온다고 돌았는데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 새벽까지 방황을 하다가 딱 섰는데 보니까 북한 초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북한군이 “너 뭐하는 놈이냐? 너 왜 여기 있어? 손들어.”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모면하고 보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가지 왔다고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거짓말은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북한에서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서 남쪽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내려가려고 밤새도록 걸었는데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서 여기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항상 죽을 각오를 하며 사셨던 분입니다. 나이 드셔서 가족사가 얽히면서 불행해 지셨지만 그분은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괴뢰군이 당장 붙잡아가지고 보위부에 넘긴 게 아니라, 내가 예수 믿는 사람 많이 만나봤지만 너는 진짜다 하면서 내려 보내주지는 않았지만 풀어 줄 테니까 다시는 여기 얼쩡거리지도 말라고 보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목숨을 부지한 것이 두 번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철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일날 그건 문제도 안됐던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어떻게 했느냐 했더니 12시까지 돈 자루를 싸놓고 당회 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12시가 딱 넘자 그때 자루를 들고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이니까. 그것도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니까 마지막으로 돈 바꾸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기 때문에 일단 온 사람은 받아준다고 그래서 돈을 바꿀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주 엄격한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더 중요한 의미를 여기에서 본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을 바라본다." 그래서 이 날이 미래에 누리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본 그런 날이 되는 것입니다. 미리 맛보여 주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위해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화) 재미있는 예화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먹을 것도 많고 잘 살지만 우리 어렸을 때는 다들 경험하셨지만 지지리 가난했습니다. 여기는 시골이니까 아마 더 그랬을 것입니다. 서울도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갈 때 보면 올라와 있는 집은 소방서 망대하고 경찰서, 학교, 이것밖에 없고 나머지는 전부 다 판잣집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려대학교 있는 데까지 아스팔트가 안 되어 있던 시대에 제가 초등학교를 다녔으니까 그때에 애들이 먹을 것도 없고 삼시세끼 먹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엿장수아저씨가 오는 것입니다. 짤랑짤랑하면서 마이크도 없고 큰 소리로 떠들면서 고물가지고 오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애들이 땅바닥에 망까기 하면서 놀다가 새카맣게 덤벼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저씨가 가위를 가지고 탕탕 쳐서 울릉도 호박엿을 아주 가느다랗게 종잇장처럼 잘라서 그것도 손에 쥐어줄 수가 없습니다. 손이 새카매가지고. 다 입을 벌리고 줄을 서면 꼭 요만큼씩 입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애들이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 아침 먹고 와서 땅바닥에 엎드려서 망까기 하면서 기어 다니다가 달콤한 게 하나 들어가고 녹아내리니까 미치는 것입니다. 아저씨가 이야기합니다. “얘들아, 여기 엿이 이만큼이 다 너희들 거다. 아무거나 가지고 와라.” 애들이 이것을 딱 맛보고 나서 거의 미치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고물로 보이는 것입니다. 가서 벗어놓고 낮잠 주무시는 할머니 고무신, 심지어 개밥그릇까지 다 가지고 가서 엿을 바꿔먹고는 하여튼 그 엿장수 오고 간 날이면 그날 저녁에 여기저기서 타작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게 미리 맛본다는 의미입니다. 하늘나라를 주일날 그렇게 맛보고 “아, 진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렇게 행복한 것이구나. 이 세상이 전부 다가 아니구나. 그러면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되겠구나.” 그것을 결심하고 맛보게 하는 날이 바로 주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가 잘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데에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혜를 충만히 받아서 나아간다면 정말 이 세상에서 충성스럽게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나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안식일 제도의 연속성에 관해서 칼빈이 이렇게 딱 잘라서 안식일제도의 폐지를 이야기했던 게 무엇이냐 하면 당시의 문맥을 이해해야 되는데, 문맥을 보면 하여튼 로마 가톨릭 아래서 수없이 많은 날들을 만든 것입니다. 어느 자료를 보니까 365일 중에서 180일이 넘는 날이 다 이름가진 날입니다. 특별한 날입니다. 누구 죽은 날, 무슨 날 무슨 날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365일 중에서 대부분이 다 특별한 날입니다. 그때마다 어느 날이라는 미명 하에 미신적인 일들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어떤 날들을 잘 지킴으로서, 어떤 날들은 금식을 하고 고행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으로 바뀌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칼빈이 당시의 문맥에서 이렇게 만약에 주일을 또 주일이기 때문에 특별한 날이라는 식으로 부각을 시켜버리고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준수해야 된다고 끌어오면 이제 주일이 그 특별한 날들 중에 하나의 날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정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율법 아래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구속하셔서 주신 자유에 부합하는 처사일까 이것을 생각을 하면서 그 당시의 문맥에서 이것을 이해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안식일 제도의 연속성을 보기 전에 잠깐 45페이지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보면 이렇게 됩니다. "당시에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그때는 로마의 가톨릭이 중세의 미신적 전통을 따라 수많은 성일과 절기를 정해놓고 이날을 준수하는 것이 행위의 공로로서 구원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가르치던 시기였습니다. 사제들은 이러한 날들을 위해 규정된 의무들을 준수하고 성인들의 이름을 숭배하면 죄의 사면과 축복이 교회와 사제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지켜야 할 성일과 절기가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많아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짐이 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1362년 영국에서 공포된 이슬랩의 율령 제 3호는 다음과 같은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저녁기도시간부터 시작되는 주일을 지켜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일, 스데반의 기념일, 인노센트 기념일, 순교자 도마, 그리스도의 할례제, 주연절, 성모마리아청정일, 3일 동안 이어지는 부활절, 성마가 기념일" 등등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이것이 전부다 특별한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것들을 그대로 다 인정하고 주의 날 그러면 주님이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싹 쓸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필요 없는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그리고 율법이 하나였던 것처럼 복음도 하나라고 하면서 이것을 싹 쓸어버리면서 사람들이 이런 미신적인 풍습에서 벗어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날만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실감이 잘 안되지만 그 당시에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칼빈은 성탄절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요즘 맥추절도 지키고 그런다는데 지키기는 뭘 지키겠습니까? 그저 헌금하게 하는 그런 용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뭐 특별히 하는 게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모두 말하자면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싹 쓸어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 경우에도 교회의 모든 절기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저 성탄절하고 부활절 정도, 저는 개인적으로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 정도.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도 구약의 무슨 추상절이나 이런 전통을 따른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이 일 년 동안 추수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절기를 지키는 정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농촌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이제는 추수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직장인들에게는 추수하는 날이 연말 보너스 나오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절기를 접근을 해야지 옛날의 가톨릭에서 했던 그런 방식을 싹 쓸어버렸던 칼빈의 고뇌를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46페이지를 보면 사진의 인물이 나오는데 장 메를 도비뉴라는 아주 유명한 교회 역사가입니다. 이 사람이 쓴 불후의 명작이 16세기 종교개혁사라고 하는 8권짜리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거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불경건한 정신이 신앙을 침범해서 믿는 자들에게 성찰과 사랑을 요청해야 할 교회의 절기들이 저속한 익살과 신성모독으로 불결해 졌다. 부활절 주흥은 교회 행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부활절은 기쁨으로 기념하는 날이었기에 청중의 웃음을 자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고 설교에도 집어넣었다. (부활절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기쁨이어야 하는데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한 설교자가 뻐꾸기 소리를 흉내 내면 다른 설교자는 거위처럼 쉭쉭 그랬다. 한 설교자가 성직자의 옷을 입은 평신도를 제단으로 끌고 가고 두 번째 설교자는 외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세 번째 설교자는 베드로의 모험을, 이를테면 그가 선술집에서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어떻게 주인을 속이고 돈을 떼어먹었는지를 이야기했다.(지어내는 것이지요.) 더 열등한 성직자들은 자기보다 좀 나은 성직자를 조롱하는 일에 이러한 순서를 이용했다. 이래서 교회는 무대로 변했고 사제들은 협잡꾼들이 되어갔다.”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빈이 이런 제도들을 인정할 수가 없고 이것은 결국은 무엇에서 나오느냐 하면 구약의 안식일 제도를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처럼 또 다른 인간의 공로를 쌓을 수 있는 율법적인 조항들을 도입하기 때문에 이런 축제일들이 수없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순절의 미신적 준수는 도처에 만연했다. 평민들은 탁월한 섬김을 수행한다고 생각했으며 사제들은 이것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본을 보이고자 금식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이다. 금식함으로 복음사역을 시작하셔서 복음이 인간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임을 입증하려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와 칼빈 같은 1, 2세대 종교개혁자들은 주일성수를 비롯해 어떤 특정행위의 의무를 율법으로 규정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으로 준수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의 빛을 흐리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의 자유를 율법의 속박으로 바꾸는 것을 경계한 나머지 안식일 제도의 폐기론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이 교부와 중세시대 때부터 지속되어온 주일성수 의무와 전통을 완전히 폐기하고 방탕한 날이 되자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주일성수에서 미신적이고 공로적인 요소를 제거해서 명실상부하게 그리스도의 구속과 인간의 자유가 기념되는 주님의 날이 되게 하고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견해가 안식일 제도의 연속론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오늘 주로 살펴보려고 하는 청교도들의 주장으로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아주 상세하게 규정을 했습니다. 이런 청교도들의 주장을 조나단 에드워즈가 받아들이고 찰스 핫지 같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안식일 제도가 연속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비록 우리는 제사 드리지 않지만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이 규정한 그런 안식일에 지켜야 할 중요한 의무들을 우리가 대체로 준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일날 매매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행위에 대한 엄격한 금지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도 역시 칼빈이 있던 제네바의 환경과 영국의 청교도들이 활동하던 영국의 시대 이것은 정황이 다릅니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거의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주일을 성수하는 문제를 가지고 영국 당국과 말하자면 왕실과 충돌을 하게 되는 일도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와는 이제 시차가 하나는 16세기이고 하나는 17세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16세기와 17세기에 중요한 변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18세기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미 17세기 때에 이미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들이 만들어집니다. 공장제 가내 수공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공장을 만들어 놓고 농촌에서 인력이 남으니까 그 농촌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공장에 모여서 싼 노동력을 제공하면 업주가 그것을 가지고 물건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그래서 식민지에 갖다 파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다가 그러다가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그 다음에 에너지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예전에는 물이 있든지 뭐가 있어야지만 쓰는데 그런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지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이런 것들이 생겨나면서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기차, 기선 이런 것들이 발명되면서 폭발적인 기술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그러면서 사실은 산업혁명이 촉발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벌써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이러면서 이제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와서 일을 하는데 쓰고자 하는 노동력보다 제공하고자 하는 노동력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우리도 아주 어렸을 때보면 장정이 밥 세끼만 먹여주면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노동력을 제공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너무 가난하니까 어디 가서 식구들이 일을 해서 밥만 먹고 와도 가정이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때를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하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너도나도 노동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밥만 먹여줘도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이 당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노동력의 착취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현실 속에서 청교도들의 이 견해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교도들이 어떻게 생각 했느냐 하면 이렇게 했기 때문에 이들은 근본적으로 상세하게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상세하게 규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바로 이 청교도들에 의해서 작성이 되는데 주일 규정이 아주 엄격하고 조항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도 바로 이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영국 사람이 아니라 뉴잉글랜드, 미국사람인데 18세기의 인물입니다. 다시 이 사람들과는 한 세기정도가 뒤집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주일을 지키는 영국 청교도들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래서 안식일 제도의 연속론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후에 찰스 핫지 같은 사람이 그런 사상을 프린스턴에 제공하게 됩니다.
그 다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책 49페이지를 보십시오. 안식일 제도의 연속론입니다. "반면에 청교도들은 주일과 안식일 사이에 신학적 연속성이 있으며 주일은 안식일 제도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견해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주일성수 도덕생활 절제 등을 강조하는 청교도의 개혁적인 성향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영국 왕 제임스1세와 찰스1세의 정치적인 박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핍박 속에서 청교도들은 주일이 단지 부활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날이 아니라 자연법에 근거를 둔 날이라는 점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좀 더 들어보십시오.) 청교도들은 주일성수에 대한 강조가 성경 뿐 아니라 자연법의 질서 속에서도 타당성을 지님을 입증하고자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주일성수의 근거를 6일 창조 후에 있었던 하나님의 안식에서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청교도들의 생각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지막에) "성경에서는 이 날을 주일이라고 부르는데 이 날은 세상 끝 날까지 안식일로 지속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날에 앞서 마음을 준비하고 정돈한 후 안식일에는 온종일 세상일과 오락에 대한 일과 말과 생각으로부터 안식을 준수해야 할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예배와 사적인 예비를 실천하며 의무와 자비의 의무로 하나님을 향해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그래서 지금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오늘 주일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예배드리고 예배시간에 받은 은혜를 집에 와서 혹은 교회의 지체들과 나누고 그 다음에 쉬고 구제를 하거나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하고 종교서적을 읽으면서 주일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일성수의 개념입니다.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이런 규정들이 여기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때에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받은 후에 주일 지킨 것이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청교도들도 그것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령님이 오시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아직 계시가 완전하게 정리되어서 신학의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로 살아왔던 부분을 상당부분 받아들여서 유대교에서 안식일 지키는 방식으로 사실 그것을 그대로 갖고 와서 주일을 지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100%. 다 그대로 계승하고 받아들여야 되는 것은 신학적으로 아니라는 것을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절대적인 모본으로 삼는 것은 아니고, 왜냐하면 거기서도 약간의 말하자면 중간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래 선지자는 구약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 선지자들이 교회에 존재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아직 모든 계시가 완전하게 종결되어서 주어지지를 않았고 교회라고 하는 것들이 완전히 정착되어서 제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로서 안식일을 지키던 방식을 주일에 그대로 가지고 와서 그대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모본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청교도들이 주일을 어떤 식으로 지켰는가? 촉발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는데 제임스1세입니다. 이 사람이 1617년에 스포츠 선언(The declaration of sports)을 발표합니다. 칙령의 내용은 오전에 예배를 드리면 오후에는 요즘 말하면 축구나 당구나 게임이나 스포츠 이런 것을 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왜 불쑥 그 이야기를 했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영국의 주류는 주일에 대해서 엄격하게 지키는 전통들이 잘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그런 엄격한 신앙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어디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일주일 내내 많이 일하는 사람은 16시간씩 그렇게 일을 했는데 왕에게 계속 진정서를 올린 것입니다. “우리는 참 죽을 지경입니다. 그렇게 일하고 쉬는 날이라고는 주일밖에 없는데 목사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조용히 쉬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공도 차고 운동도 하고 사냥도 나가고 싶고 놀이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해야지만 우리가 체력을 기를 것 아닙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그렇게 엄격하게 하나님만 찾는 청교도들이 못마땅했었는데 참 잘됐다고 생각을 하고 백성들의 투서를 받아들여서 오후에는 그런 것 해도 좋다고 왕이 공포를 해 버린 것입니다. 이 사람의 선언이 당시 청교도 목회자들에게는 교회를 향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일어나서 그런 사람들이 만약에 주일날 오후에 공놀이를 하고 그러면 치리를 하는데 그런데 왕이 나와서 괜찮다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후 예배를 드리는데 와서 북치고 꽹과리를 치면서 오후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후예배를 드리면 자신들은 오후예배를 안 드리고 놀러갔다는 것이 너무 부각이 되니까 그 오후예배 자체를 없애라고 꽹과리를 치고 난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그러면 청교도들의 입장은 어떻겠습니까? 왕이 그러는데 그렇게 해야지 청교도들이 얼마나 꼬장꼬장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제 교회의 중요한 일들을 왕이 마음대로 결정을 해서 흩으러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저항을 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청교도들이 자신의 입장을 아주 명확히 하면서 엄격했던 것을 더 엄격주의로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신학적으로 정리를 해서 안식일을 우리가 계승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이 주일에 한번 신발을 수선하는 것이 수천 명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다.” 실제로 사람들이 가톨릭에서 그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주일의무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법이고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사람을 향한 법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날 신발을 수선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고 사람을 죽인 것은 사람에게 지은 죄니까 사람에게 지은 큰 죄보다는 하나님께 지은 작은 죄가 더 큰 죄라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생각을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라스무스가 이것을 비꼰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게 중세시대 때의 견해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교부들의 해석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주일성수의 개념을 안식일 엄수주일에서 가져왔으며 이것은 당시 그들이 처한 정치적인 상황 아래서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가 특별 은총뿐만 아니라 일반은총의 질서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신앙으로 나아가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언약신학 안에 있는 한 긴장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첨예하게 정치와 교회가 대립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성수주일의 개념을 포기해버리면 거의 배교처럼 인식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청교도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교회를 핍박하기 위한 중요한 구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내세웠던 것이 쉬는 날이라고는 주일밖에 없는데 주일 오후에라도 스포츠를 하면서 우리 백성들이 체력을 길러야지만 전쟁이 날 때 이길 것이 아니냐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어쨌든 국민의 건강증진을 위해서라도 주일날은 그렇게 온종일 하나님께 예배만 하게끔 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을 왕이 치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성수를 포기하면 배교로 인식이 되던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신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언약의 편무성과 쌍무성이라고 하는데, 편무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쌍무는 양쪽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원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계약인데,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이 계약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대륙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 루터나 칼빈과 같은 사람들은 언약을 이야기하면서 그 언약 때문에 하나님이 무한한 은총을 우리에게 베푸신다고 하는 편무성을 강조해서, 언약관계에 들어감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택을 주시고 우리는 그 무한한 혜택을 입는 관계로 강조되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해석에 대한 다른 전통도 있습니다. 그것이 쌍무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우리와 대등한 관계는 아니고 높은 분이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런 언약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언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그것을 적용하면서 이 성수주일 같은 것을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과 언약을 파기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자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면서 인간의 의무에 대한 고도의 강조를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과 더불어 싸우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데서 말하자면 미묘한 틈이 루터와 칼빈의 전통과 우리들이 지금 합동측이나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조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사이에 미묘한 차이점들이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교도들이 주일에 대해서 가졌던 이런 생각들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평가를 하고 그리고 우리는 이 주일 문제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