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시리즈5
찬양이란 무엇인가(출15:1)
(출애굽기14장 26절부터~31절까지 합독한 후 설교할 구절은 15장 1절입니다.)
읽어드린 이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후에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 아주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 대대적인 사건입니다. 이 후에 성경을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언제든지 바로 이 14장에서 나타났던 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언제나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통하여 언제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다시금 회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처한 모든 역경과 위기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생길 적마다 그들은 출애굽기 14장 15장에서 생긴 그 이적과 노래를 다시 회상하면서 영원히 자손들에게 읽혀 들리게 하고, 출애굽기 14장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후세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계속 노래를 해 왔던 것입니다.
오늘 출애굽기 1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바로의 강권적인 허락을 받고 그리고 광야로 돌이켜 나왔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 이들이 애굽을 떠날 때에는 사실은 제사를 드리러 삼일 길 쯤 간다고 나온 것이거든요. 그러나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제사를 드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영원한 가나안 땅을 가야 하기를 원했지요. 바로가 일단 재앙을 만나서 강권적으로 할 수 없이 역사 때문에 백성들을 놓아줄 수는 없었는데 도망친 사람들이 대개 250만에서 300만까지 본다면 그 어마어마한 인구 중에서 가용 노동력만 해도 100만 가까운 장정만 60만이 넘는다고 기록에 나와 있잖아요? 그 어마어마한 인원이 애굽에서 도망쳤으니 애굽의 경제 사회 경제에 엄청난 변화와 충격이 왔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거지요. 수많은 근로자들 그것도 가장 필요한 하층 근로자들이 일시에 일손을 놓고 광야로 나가 버렸으니 웬지 섭섭한 후회가 들어서 600승의 병거를 이끌고 기동력 있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덮치면서 덤벼들어오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바로 천당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들어갈 수 있는 표를 받았을 뿐입니다. 다만 그 표가 언제든 무효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 뿐이지요.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표를 가졌을 뿐이지 천국에 들어간 것은 아니에요. 그 표를 가지고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광야를 걸어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간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광야길이라면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길이 얼마나 험악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그러겠냐고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광야 길임에는 틀림없지만 애굽에서는 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하나님의 역사를 본다고요. 애굽의 고기 가마 옆에 주저앉아서 고기국 국물이나 먹고 사람들이 먹다 남은 뼈다귀나 먹으면서 살 때 그것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광야에 나옴으로 이전에 말로만 듣고 귀로만 듣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요.
아니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홍해를 가르시는 거예요. 바위를 터쳐서 수백만이 먹을 수 있는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배가 고프다고 그럴 때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만나, 메추라기 헤아릴 수 없는 대적들이 그들을 둘러쌀 때 그들을 파멸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용사되신 그 능력, 이 모든 것들을 광야에서 경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것이 천국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손에 쥐었을 뿐입니다. 라는 말을 저로부터 여러분들이 들었을 때 실망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비록 천국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 살아가면서 천국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그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가불해서 맛보면서 맛보기로 그러면서 가는 거예요. 맛을 보여 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거기를 계속 갈 수가 있겠냐고요.
요즘 보험은 신종이 나와요. 10년 20년 또는 죽으면 준다 그러면 너무 지루하니까 일 년에 한 번씩 조금씩 주는 거예요. 여행 한 번 갔다 오라고 40세 되면 40만원 이렇게 매년 맛보기를 보여 주면서 보험료를 야금야금 내도록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를 믿고 그 길로 들어서게 하셨지만 이 광야는 고독을 씹으며 고난을 당하며 억지로 가는 길이 아니라 광야길이 변한 것이 아니라 광야를 걸으며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거예요. 애굽에서는 볼 수 없는... 물론 애굽보다 광야가 고달플 수도 있어요. 그렇죠? 광야에서는 애굽에서는 느낄 수 없는 참다운 양식이 있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애굽에서는 고기 국물로 밥을 먹으면서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는 변하지 않는 만나가 있어요. 이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노래할 이유가 있는 거예요. 왜 그래요? 주님이 살아계신 놀라운 증거를 보여 주시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드시는 거예요.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난 이제 소망이 없어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한다 너를 위하여 아름다운 낙원을 예비하였노라 그럴 때 우리는 다시금 새로운 힘이 솟아나면서 걸어가는 거예요. 광야 길임에는 틀림없지만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다 이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을 믿고 주님과의 신실한 관계 속에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복락이 너무 크기 때문에 천국을 사모하는 것이지 세상이 지겹기 때문에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아니라 이거지요. 세상을 너무 지겨워할 필요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매일 매일 주님을 찬양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에 오게 하고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서 집으로 향하게 하시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하며 기쁨으로 우리들이 살잖아요. 열심히 집집마다 전도를 했더니 지하실에 가득 와서 은혜를 받고 여러분들의 섬김을 통해서 은혜를 받잖아요. 그렇지 않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광야와 같은 세상을 비관하면서 산다고 또 아무것도 안 하면서 주님 우리를 불러만 주십시오 속히 가고 싶나이다 그러면서 살았더라면 한 20명 모여서 예배드리면서 역시 세상은 슬퍼 이런 생각이나 할 거예요. 그거 아니에요.
참된 신앙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낙관주의예요. 천국에 대한 지나친 낙관 때문에 이 세상이 천국의 소망 앞에서 빛을 잃는 것, 다시 말씀 드릴게요. 천국에 대한 소망이 너무나 극심하고 너무나 충만한 나머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이 세상 속에서 느끼는 그 즐거움과 기쁨이 빛을 잃는 것 그래서 그 하늘을 더 사모하게 되기에 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예수를 믿고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주님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계속 보이시면서 ‘오라 오라 후회하지 말고 오라’ 그런데 뒤에서 반대로 추격을 합니다. 바로의 병거들이 추격을 하는 거예요. 예수를 믿고 광야 길을 가는 데 우리는 계속해서 죄의 추격을 받는 거예요. 옛 습관의 추격 옛 행실의 추격 옛날에 먹고 마시던 것들에 대한 추격을 받는 거지요. 계속해서 들려오는 얘기가 ‘얘야 나와 같이 즐겁게 놀던 애굽을 뒤에 두고 네가 허허벌판 광야로 달려가려 하느냐 네가 정말 외롭게 그 길을 달려갈 수 있느냐’ 그러면서 애굽의 불빛 휘황찬란한 거리를 보여주는 거예요. 신자들이 받는 두 번째 어려운 점이에요. 하나는 광야길을 갈 때에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와 기쁨을 먹어야지만 광야길이 고생길이 아니고 즐거운 순례의 길이 될 수 있는데 그걸 못하면 그 광야길이 고달프게 생각되어지고, 또 하나는 뒤에서 오는 이 추격들을 뿌리치지 않으면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 하셔셔 참되게 부르셨던 가나안을 향해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추격을 해 오는데 홍해가 -- 이걸 왜 홍해라고 했냐면 물풀 중에 붉은 풀들이 많아서 물빛이 붉은 빛을 띠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하여튼 엄청난 홍해 앞에 서게 되는 것이죠. 아프리카 대륙을 시작으로 시나이 반도 쪽으로 건너오는 거지요. 이렇게 서 있는데 애굽의 병거들이 달려오는 거예요. 그러니 수백만이 완전히 코너에 몰렸어요. 이제는 바다에 수장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모세를 향해 백성들이 원망하고 어찌하여 애굽에서는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로 인도하였단 말이냐 그럴 때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미니까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다위로 불더니 바닷물이 물러가더니 바닷물이 쫙 갈라지는 거예요. 좌우에 물이 벽이 서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가는 거예요. 바다가 갈라지고 나서 마른 땅이 드러났어요. 바짝 마른 땅이에요. 물이 갈라지고 늪이 드러났으면 못 건넜을 텐데 갈라지고 드러난 땅은 아주 건조하고 메말라서 얼마든지 발에 물이 빠지지 않고 건너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러면서 건너갈 때 병거를 이끌고 그들도 들어가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온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불기둥이 막는 거예요. 그 애굽의 병거와 사람들이 그 불기둥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할 수 없게 만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다음에 불기둥이 치워지고 그들이 드디어 이스라엘이 건넜던 그 마른 길을 달리는 것이지요.
물을 건너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추격할 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죠 ‘얘야 네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 물이 다시 흐르게 하라’ 손을 다시 내미니까 벽과 같이 서 있던 그 놀라운 물줄기가 한 번에 덮이면서 그 넓은 홍해바다에 600승의 병거에 탄 애굽의 병사들이 이리저리 밀리다가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건너고 나서 보니까 수많은 애굽의 병사들이 가랑잎처럼 파도를 타고 떠돌아다니고 육지에 시체로 와서 쓰러져 있는 놀라운 광경을 모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15장에서 놀라운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가 나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이 울려 퍼지는 거지요.
그래서 여기서 31절부터 다시 한 번 보면서 원리를 찾아보려고 해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사람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홍해 건너편 언덕에서 부른 이 찬양이야 말로 정말 장엄한 찬양이었을 거예요. 가끔 1200혹은 1500명으로 구성된 찬양대가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500명씩 되는 성가대가 얼마나 자주 모여서 연습을 했겠습니까마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경외심 어린 표정을 갖게 됩니다. 이건 200만 내지 300만의 성가대예요. 그 어마어마한 성가대가 홍해 건너편 언덕을 뒤덮으면서 수많은 무리들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이름을 노래하는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옛날에 어느 성가대에서 와서 특강을 해달라고 해서 이걸 해 준적이 있어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성가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가대는 홍해 건너편에 있었던 이스라엘 성가대였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한 마음으로 크게 노래를 했습니다.
그렇게 노래를 하기 전에 그렇게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우선 보았기 때문에 찬양이 터져 나왔다고 그랬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광야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죄의 추격을 받아요.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추격해 오는 죄를 완전히 뿌리치고 누가 이 세상에서 우리를 향하여 달려 들어오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이 신앙의 길에서 가로막고 우리를 믿음의 길에서 붙잡아 넘어뜨리기 위해서 다가오는 이 세상의 끊임없는 유혹과 끊임없는 죄의 추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분이 누구시냐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유혹과 죄의 추격을 끊임없이 받을 때 우리가 안전함을 입기 위해서는 도망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한 번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옛사람의 모든 추격으로부터 우리를 새롭게 건지시고 우리를 추격해 오는 모든 옛사람의 습관과 옛사람의 행실과 옛사람의 모든 잘못되고 그릇된 것들이 한 번 바다위에 수장되어지는 경험을 해야지만 비로소 힘차게 행진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뒤에서 계속 병거 소리를 듣는데 가는 길이 편하겠어요? 계속 병거 소리가 나면 광야길이 더 빨라질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강력한 추격을 받다가 하나님이 그들을 바다에 집에 넣으시고 그들을 수장시키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추격을 근본적으로 꺾으시는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제대로 가나안 땅으로 가는 발걸음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우리를 추격해 오는 옛사람의 습관과 모든 죄의 추격을 한 번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바다위에 수장되는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아니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말 주님을 찬양하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너무 어려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전부다 속에 계산서가 있어가지고 줄을 딱 쳐 놓고 요만큼 까지만 주님을 섬길게요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 있잖아요. 그 때문에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우리를 붙잡아 매는 그 많은 사슬들로부터 하나님께서 끊어주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해야 되는 거지요.
우선 찬양하기 전에 보았기 때문에 찬양했어요. 무엇을 보았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어요. 그 사람들에게 무슨 큰일을 베푸셨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추격하는 이 죄의 세력들을 완전히 타도해서 바닷물 속에 수장시키는 이 놀라운 역사를 보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진실한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미를 올려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찬양은 역시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영적인 삶이 우리를 추격하는 죄를, 우리를 추격하는 옛 사람의 성품을 하나님께서 한 번 수장시키시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때 그가 주의 이름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경험하게 되는 일이지만 깊은 회개 후에 완전한 자유함과 놀라운 기쁨이 주어져요. 완전한 패배 끝에는 완전한 흥함이 주어져요. 그러면서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되고 그 완전한 기쁨이 획득된 이후에는 그 기쁨을 소유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칠 수 없는 찬양이 메아리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그 찬양은 영으로 부르는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찬양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저는 몇 년 전에 집회를 갔는데 네 교회가 모여서 집회를 하는 거였어요. 온갖 악기를 다 동원 했어요. 북치고 꽹과리 치고 다 하면서 찬양을 30곡 이상을 메들리로 부르는데 인도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가사를 다 외웠어요. 아무것도 안 보고 부르는 거예요. 반주자와 연습을 무지하게 많이 한 거예요. 그런데 설교 시간이 되었는데 찬송 하나 더 하자고 그러니까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이 ‘아이씨 힘들어 죽겠는데 자꾸 하재’ ^^ 여러분 이런 일은 왜 그래요? 육으로 부르는 찬양은 그래요. 영으로 부르는 찬양은 ????이에요. 그래서 찬양소리를 들으면 --물론 찬양을 하면 성대가 가라앉아서 소리가 안 나올 수 있어요--영적으로 충만한 가운데 인도하면 이 찬양을 부르는 게 하나도 힘이 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쫙 솟아나오는 거예요.
어떤 때 이런 일이 일어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눈앞에서 봤어요.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겠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것 한 번 도 못 봤어요.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살았던 이 사람들은 한 번도 못 봤어요. 조상들도 이런 것 못 봤어요. 개인적으로 만나는 하나님이었는데 민족적으로 만난 하나님이 된 거예요. 이런 큰 일을 한 번도 상상해 본적도 없었어요. 그냥 여호와 만유의 하나님 이렇게 고백은 했지만 그러나 그 고백 가지고 충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끊임없이 눈을 비비며 의심했을 거예요.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나 물이 어떻게 갈라질 수가 아브라함도 우리에게 이런 걸 가르쳐 주지 않았고 이삭도 야곱도 이런 일을 행했다고 전해주지 않았는데 물이 갈라지다니 그 물로 된 벽을 만지며 홍해 사이를 건너고 있단 말인가 거기에서도 입이 쫙 벌어졌는데 홍해 건너고 나서 저런 저들도 우리를 쫓아오네 할 때에 큰 파도가 두들겨 쳐서 하늘 높이 솟았다가 바다 아래로 내동댕이쳐지는 600승의 병거와 애굽의 군대를 보면서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막 터져 나오는 찬양, 말릴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떨 때 ? 하나님의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았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거예요.
학교 있을 때 독일서 유학하고 온 음악 교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기도하려고 채플 실에 갔는데 괴기 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더래요. 이게 도대체 뭔 소린가 하고 쭈뼛하는데 가보니 교회 맨 앞에서 장애인이 있는데 손도 몸도 잘 안돌아가고 바닥이 침 범벅인데 얼굴은 거룩하더래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더래요.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그 크신 일들을 우리들이 분명히 목격을 하게 되면 그러면 가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노래할 이유가 있는 거지요.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가슴 속에서 쫙 터져 나오는 찬양을. 이렇게 하나님이 베푸신 일을 모두 한꺼번에 보고 한꺼번에 찬양할 때 그 찬양은 천사도 흉내 내는 게 불가능해요. 어쩜 그렇게 반주도 딱딱 맞아요. 악기도 별로 없는데도 찬양이 수많은 사람들이 기가 막히게 박자가 맞고 음정이 어우러져서 그 찬송을 눈을 감고 들으면 그 찬송이 꽃다발이 되어가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게 느껴질 정도예요. 쫙 빨려서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노래가 먼저 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먼저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행하시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 자기의 광야로 가는 그 길에 애굽 사람을 향하여 행하시는 그 놀라운 일과 당신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싸우시고 그들을 건지시는 구원자로 행하시는 그 놀라운 일들을 생생하게 목격했을 때 그들은 일찍이 이 땅에 없던 아름다운 노래로 천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찬양으로 200만 300만 되는 수많은 무리들이 지휘하는 사람 하나 없이도 아름답게 어우러져서 하나님의 보좌에 향기가 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찬양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원리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찬양을 하려는 이유는 그 때에 그 찬양을 통해가지고 가락에 취하면 안돼요.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찬송가 가사를 외우는 것이 좋아요. 찬양 부르는 것을 통해서 가사로 깊이 들어가서 가사가 말하고 증거하고 있는 그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찬양하는 거예요. 그럼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찬양을 부를 때 나를 위해 아니면 교회를 위해 아니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이전에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들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들이 찬양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느낌이 더 깊고 더 돈독해져서 주님과의 찬양이 되어져야 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보기 전까지는 홍해 구석에 밀려나 앉아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보자 하나님과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원망이 변하여 찬양이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더라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놀라운 사실을 직접 목격하니까 하나님을 향한 참된 찬양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어떤 때 이 찬양이 이루어지게 되었냐 하면 여호와를 경외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놀라운 역사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외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어요. 조금 전까지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과 낙심은 다 사라지고 그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깊고 간절한 찬양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어요.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이 가득 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대미문의 아름다운 성가대가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의 삶이 전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 아니고 죄악 가운데 살고 적당히 살고 그러면서 말씀과 거리가 먼 삶과 살다가 주일 날 교회 와서 노래하면 주님이 뭐라고 그러겠어요? 너희는 그 노래를 그칠지어다. 그 비파와 수금의 소리를 그만 둘지어다. 내가 너희의 노래를 원하지 않는다 제발 좀 가만히 잠자코 있어라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외함이 없는 노래는 하나님을 향한 모독이에요.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외함이 없는 찬양은 주님을 화나시게 하는 것이에요. 주님이 왜 그 수많은 사람이 정성껏 연습해 와서 비파를 연주하고 수금을 연주하는데 어디서는 비파야 깰지어다 수금아 깰지어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래놓고 어느 성경에서는 비파 소리도 그칠지어다 너희 노래 소리도 그칠지어다 수금아 그만 둘지어다 차라리 벽에다 걸어 두어라. 왜 그런 상반된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외심으로 가득 찬 찬양만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입술의 열매가 되는 거예요. 생각이 딴 데 가있고 몸이 딴 데 가 있고 입술로만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에요. 그러니까 찬양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만큼 아주 진지한 시간이에요. 그러니까 기도의 영으로 찬양하고 찬양의 영으로 기도하고 기도의 영으로 말씀을 전하고 찬양의 영으로 말씀을 듣고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하나님을 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놀라운 역사를 보자 마음속에 주님을 경외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게 되었어요. 이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능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 될 때 주님을 경외하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놀랍게 변화되는 것이지요. 그 때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거지요. 그 때에 마음의 열매와 입술의 열매가 하나가 되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는 ‘믿었더라’ 그랬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신 이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고나서 모세를 하나님 여호와를 깊이 믿게 되었을 때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찬양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주님을 신실하게 믿고 주님을 깊이 의지할 마음이 생겼을 때에. 이들이 믿고 신뢰하지 못할 때에는 노래가 다 사라졌어요. 마라에서 쓴 물을 먹을 때 찬양했습니까 어림도 없어요. 이들이 홍해에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가득 찼을 때 이들이 그것을 노래로 극복했습니까? 노래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 그리고 내 인생을 주께 맡기고 매일 매일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가기를 원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득 차오르는 신뢰와 신앙 이것이 우리의 삶에 동기가 되어 지지 않을 때 우리는 결코 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그 노래를 부름으로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이러한 찬양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찬양의 모든 준비는 악기의 준비나 소리의 준비가 아니라 영혼의 준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에요.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 계속 찬양을 해도 아무도 목이 아픈 느낌을 갖지 않아요. 울다가 웃다가 손을 높이 들다가 무릎을 꿇다가 엎드리다가 고개를 높이 들다가 눈물을 닦다가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드리는 거예요. 밤새도록 드리는 그 찬양은 목도 잘 안 쉬어요. 정말 은혜 받은 찬양은 목도 잘 안 쉬어요.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 하겠네
하나님을 향해서 큰 찬양을 가슴 속에 품고 그 때 비로소 그 옛 신앙의 선조들이 왜 그 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 이 찬송을 그치지 아니하였던가 그리고 그들이 순교를 당할 때도 마지막으로 찬양을 부르기를 원했고 고난의 계곡을 지나갈 때도 찬양으로 위로를 삼았는지 우리는 경험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찬양은 가사가 훌륭해야 되요. 곡도 훌륭해야 되지만 가사가 훌륭해야 되요. 가사가 우리들을 성경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개혁시대에는 시편에다 직접 곡을 붙였어요. 다른 노래 안 부르고. 무슨 찬송가 가사든지 찬송가의 탁월한 강점은 그거예요. 깊이 가사를 묵상하면서 부르면 성경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리며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 쭉 찬양을 부를 때 우리는 마태복음 27장이나 누가복음23장이나 요한복음 19장을 묵상하지 않고 이 찬송을 부를 수 없는 거예요. 우리를 자꾸 데리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뜻도 없고 의미도 없는 내용들이 반복되는 가사를 가지고 곡에 흥겨워서 부르는 것은 참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을 믿는 깊은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우리 속을 잘 들여다보세요. 찬양할 수 없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그 얽매인 것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여러분 아까 부른 그 찬송 하나를 부를 때도 얼마나 수많은 딴 생각이 오고 갔습니까? 왜 그래요? 이 찬양은 입술과 가사로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영혼으로 부르는 찬양입니다. 그러면서 그 찬양을 듣는 회중들에게는 그 찬양이 영으로 부르는 찬양인지 육체로 부르는 찬양인지 느껴져요. 성도들이 주일날 모여서 쭉 찬양을 해 보면 일주일의 삶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느낄 수 있는 거지요. 일주일의 삶이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서 우리를 향해 도전해 오는 죄악의 요소들을 하나님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거꾸러뜨리시고 우리를 향해 도전해 오는 사단의 세력들이 우리 앞에 피 흘려 쓰러지고 거꾸러지는 역사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위대하고 큰일을 보고 그것 때문에 우리 속에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아침마다 새로워지고 우리의 하나님 선하신 좋으신 우리의 주님을 향한 찬양이 매일 저녁마다 견고해졌다면 주일날 모여서 드리는 우리의 찬양은 정말 힘 있고 장엄한 찬양이 될 거예요. 얼마나 멋있겠어요? 찬양을 부르면 눈물이... 그 크신 하나님 사랑 어찌다 말로 할 수 있는지요 찬양을 하면서 우리는 이미 우리와 똑같은 고백을 하고 죽었던 신앙의 사람을 보는 거지요. 앞서간 성도들과 우리들과 미래에 태어날 우리의 후손들과 하나의 교회가 되어서 같은 감정과 느낌을 가지고 부를 때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찬송을 올려 드리는 이런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찬양을 잃어버린 교회와 찬양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공교하고 아름답게 부르는 찬양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찬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언제든지
만세 반석 열리니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우리를 그 누구도 해할 수 없는 안전한 바위에 보호하시는 십자가의 보호의 위대한 능력이 그 찬송을 부를 때 가슴에 쏟아져 감격으로 치밀어 오르는 그는 영으로 찬양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거니와 그들이 곧 이 일을 잊어버리고.. 이 일을 잊어버릴 때 찬양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잊어버릴 때 찬양도 잊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단물을 쏟아내던 우리의 입에서는 원망과 미움과 불평과 추악한 말들이 호수처럼 쏟아져 나와서 이것이 우리의 온 몸을 더럽히고 우리 지체를 더럽히고 교회를 더럽히는 이런 일들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는 애굽의 사람들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본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경험하고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굳게 믿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서 찬양하는 이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이때에 그랬습니다. 언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 그 때에 찬양이 터져 나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으로 찬양을 부르니까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정말 영으로 찬양을 부를 때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나가고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때 그 찬양이 주는 메시지, 그 메시지에 깃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거꾸러지고 자복하고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찬양을 통해서 치유하시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 상태가 되면 찬양하는 상황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그 찬양을 지배하시고 인도하시는 찬양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부를 때에 우리는 이런 일들을 수없이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 때에 바로 그런 때에 이 찬양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오늘 뭐라고 그랬냐면 이 찬양을 부른 사람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다 그랬어요. 이런 찬양이 일어날 때 성가대가 부른 것이 아니에요. 교회의 찬양의 가장 큰 기본은 모든 사람이 한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에요.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젊은 사람이나 연로한 사람이나 모두 하나가 되어서 부르는 것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하고 섞일 수 없는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백성 중 누가 모세와 같이 독특한 사명을 받았어요? 이스라엘 백성 중에 누가 모세와 같이 탁월하게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모세가 받은 사명처럼 구별되고 탁월한 사명을 받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체험에 있어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구별되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입법자요 중보자라고 하는 직분 면에 있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완전히 구별된 사람이었어요. 그는 하나님이 보낸 대리자였죠. 구별된 자이죠.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능력과 그 모든 것에 있어서 구별 되었어요. 그 모세가 오늘 그 모세가 모든 백성과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하나의 노래로 노래했던 것이지요. 찬양은 바로 우리를 이렇게 하나 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가대가 아니라 모세와 모든 이스라엘이 온 몸을 다해서 우러나오는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리게 되었던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찬양을 통해 사람을 하나로 묶으셨습니까? 노래 때문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 되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조금 아까까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완전히 고독한 자였습니다. 너 그럴 수가 있느냐 애굽에 매장지가 없느냐 왜 여기 몰고 왔어 막 대드는 것이지요. 아무도 모세편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모세여 당신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그러면서 모세와 손에 손을 맞잡고 한 음성으로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리게 되었는데 무엇이 그것을 만들었어요? 커다란 하나님을 만나는 이 놀라운 역사 이것이 사람들을 참되게 하나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참되게 만나는 신앙을 교회가 깊이 경험하는 것만이 사람들을 하나 되게 만드는 거예요. 부흥만이 하나님을 한 마음으로 만들 수 있어요. 부흥만이 모든 사람에게 참된 사랑을 심어줘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조건 없이 사랑하고 하나 되게 만들어 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베푸신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만 본 것이 아니라 모세도 보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모세와 백성에게 공히 생겼고 그리고 여호와를 믿는 마음이 모세와 이스라엘 모두에게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속에는 지도자를 향한 깊은 신뢰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지도자와 함께 한 동아리가 되어 함께 찬양을 돌리는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조금 더 보니까 뭐라 그랬냐면 1절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의 노래로 함께 불렀는데 누구께 불렸냐면 여호와께 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찬양을 하는 자세나- 말씀을 듣는 자세도 마찬가지겠지만-찬양을 할 때 언제든지 무엇을 바라보냐면, 자기의 설움과 감정에 빠지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찬양을 부르면서 우리들이 깊이 묵상하고 깊이 생각해야 될 일은 무엇이냐 하면 내 자신의 처지가 아니라 그런 처지 앞에 서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찬양을 부를 때 그 가사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깊은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거지요. 찬양은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가사 속으로 쭉 들어가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무엇이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파를 치고 수금을 켜면서 찬송을 부를 때 사람을 향해 부른 것은 아니잖아요? 쉽게 말해서 가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참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 찬양을 하는 사람, 노래를 부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이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과 주님이 행하신 그 놀라운 일과 그 구원하시는 역사와 이전에 행하신 일과 지금 행하시는 일과 앞으로 행하실 일 또 행하실 그 분 또 행하시고 계신 하나님 행하신 여호와 이러한 인격과 그분의 사역 거기에 우리의 깊은 묵상이 가 닿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 드려지는 노래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여호와를 향하여 이 기이한 일들을 본 후에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노래하니 일렀으되’ 거기에는 찬양의 두 요소가 한꺼번에 나와요. 노래=가락 일렀으되=가사. 가락이 없는 찬양은 참된 찬양이 아니에요. 또 가사가 없는 찬양도 참된 의미의 찬양이 아니에요. 분명히 이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의 찬양이지만 곡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했습니다. 그 노래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실었어요. 이것이 가락입니다. 그리고 ‘일렀으되’ 그 찬양이 곡으로만 사람을 즐겁게 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가사가 있었어요. 그 가사를 오늘 다 읽어드릴 수는 없지만 그 중에 오늘 읽은 첫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시며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면서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구원이요 노래이시도다 이것이 시편 시인들이 무수하게 써 먹잖아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참다운 영적인 가사가 어디서 우러나오는 것이었어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 빈 말을 하지 않아요. 그는 높고 영화로우시며- 이유가 있어요. 왜? 선생한테 배웠도다 그게 아니에요. 우리를 추격하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찬양을 부를 때 실지로 자기가 체험하고 목격하고 보고 생생하게 체험한 바가 찬양의 이유가 되는 것이에요. 그 때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찬양이 되는 것이에요.
찬양은 성도의 신앙의 체험에 묶이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신앙의 체험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부를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렇게 우리를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들을 이 홍해 바다에 수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해야 해요.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해요. 이전의 나의 신앙생활 30년 40년 혹은 50년을 살아오는 동안 보지 못했던 --언제 보았어요? 430년 동안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못 보았어요- -이렇게 홍해를 가르시고 그래서 우리를 추격하는 모든 죄의 세력과 우리를 억압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할 수 없게 만드는 죄와 악의 세력들을 바다에 던지시고 수장시키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유로운 영혼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만드시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신앙의 역사를 먼저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참된 변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되게 노래하기 위해서. 이렇게 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를 적마다 우리에게 부족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마음에 가득 차있지 못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 이것들을 반성하면서 선조들이 그 찬양을 통해서 충만하고 풍부하게 고백했던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체험하면서 우리들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찬양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반성을 촉구합니다. 찬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이 찬양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속에 이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해 주시도록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이에요.
여러분 그러면서 우리는 이 찬양을 통해 큰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 위대한 일들을 행하신 경험이 아직 없다면 우린 전심으로, 하나님 정말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터져 나와서 누구도 막을 수 없게 하늘을 향해 솟아 나오는 그 찬양의 진수를 우리가 경험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 때까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원리와 방식 속에서 찬양했던 그런 믿음을 본받으면서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찬양을 부르면서 주님이 선배들에게 행하신 그 큰일 그러므로 그 큰일들을 필요로 하는 나의 영혼 그리고 그 큰일들을 기대하는 우리의 믿음 끊임없이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깊이 기도하며 나아갈 때에 분명히 찬양은 여러분에게 놀라운 감화를 불러일으킬 것이에요.
그래서 찬양 부를 적마다 그 체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더욱 감격하게 되고 그 체험이 없는 사람은 그 찬양을 인하여 더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놀랍고 완전한 사랑과 그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이에요. 하늘나라에 가서도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때는 음치도 노래 잘 부르는 사람도 없는 모두 기막힌 성가대가 되어서 한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하며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는 하는 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생명수 물을 마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을 다 마칠 때 눈물에 젖은 찬송가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면서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내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 찬양이 하나님을 향한 내 인생의 반려자가 되어 주었노라 고백하며 물려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