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예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녹취자 : 이경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여인을 만난 기사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종하지 않는 지역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주전 722년에 북왕국이 아수르에 의해서 멸망된 다음 아수르는 사민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거기에 와서 살게 해서 실질적으로 인종을 혼합시켜 버려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신앙의 정통성을 지킨다는 미명아래 이미 국제화 되어 버리고 혼합 주의로 기울어져버린 북왕국 이스라엘과의 종교적인 연결을 단절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슬픈 역사는 예수님 때까지 계속 되었고 이것이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멸시하는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신앙의 주류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자기네 방식을 따라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고 소위 얘기하는 신학의 토착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심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했고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하는 원래 모세오경의 해석적 성격이 들어간 그러한 경전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찾아오셨을 때 이 여자도 종교적인 내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꼭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예배는 예루살렘에서만 드려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타이르신 후에 말씀 하시기를 이제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그러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예배하는 자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고 말씀하시며 장소를 초월하는 예배의 시대가 올 것이고 그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장소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 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신령과 진정이라고 번역된 우리말 성경이 개정성경에서 영과 진리로 라고 올바르게 번역된 것은 매우 다행입니다. 예전성경에 의하면 예배는 물질적인 혹은 세속적인 방식이 아닌 신령하게 그리고 건성으로가 아닌 진정으로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끔 만드는 번역이었던 것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는 오늘 목회의 영광이라는 주제로 모였습니다. 복음적인 견해로 돌아가서 목회의 영광이 무엇일까요? 교회의 규모가 커지고 거대한 빌딩이 교회의 소유가 되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그것이 목회의 영광일까요? 아니면 한 목회자가 저명한 사람이 되어서 교회에 이름을 내고 일간신문에 수시로 얼굴이 등장하는 그것이 목회의 영광일까요? 돈 많은 장로들과 권사들에게 에워싸여서 온갖 대우를 누리는 그것이 목회의 영광일까요? 우리가 복음의 견해로 돌아가 보면 이런 것들은 결코 목회의 영광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에이든윌슨토저는 기독교 목회사역과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하나님을 참답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좀 더 신학적인 말로 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이 목회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꿈꾸고 그리워 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화 되었을 때 그 속에서의 인간의 모습,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것과 같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을 두루 덮는 것이 아닐까요? 그 충만한 지식 속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배하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목회 사역의 본질적인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교회성장 드라이브도 믿지 않고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것이 진실한 목회의 표본인 것처럼 생각하는 견해도 저는 따르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똑같이 지하실에서 물 나오는 예배당에서 7명의 성도들과 함께 25평 예배당에서 교회를 개척했고 그리고 꼭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나는 한 번도 올해의 교회의 성장의 목표를 정해본적이 없고 수십 명의 부교역자와 생활했지만 그가 교인들을 늘리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내 보낸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목회의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심은 너무나 수적인 성장에 신경이 가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지 열매가 생명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한다면 나무에 생명이 있으면 열매를 맺히는 것이지 나무에다 열매를 실로 매달아 놓는다고 해서 그 나무에 생명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받고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 드러내 보여주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목회사역의 영광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들이 매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예배는 우리의 목회사역을 통해서 꿈꾸고 그리워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인 체험입니다. 미래에 누리게 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예배를 통해서 우리들이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이 목회에 있어서 예배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준엄한 소명감을 너무 소홀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우리한번 귀담아 들어봅시다. 극장을 가도 11시에 극장이 시작하면 15분전에 들어가서 표를 끊고 기다립니다. 오징어도 사고 땅콩도 사고 음료수도 사면서 기다렸다 갑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보려고 그럽니다. 그리고 이제는 극장도 옛날처럼 마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까지 오지 않으면 기계자체가 발권이 안 됩니다. 그런데 예배당에는 11시에 예배가 시작되는데 15분전에 예배당에 나와서 조용히 머리를 조아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예배 속에서 구하는 성도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10분이 돼도 안모이고 5분전이 러시아워입니다. 도깨비시장처럼 밀려들어옵니다. 그리고는 예배가 시작됩니다. 이 예배시간이 한없이 짧아집니다. 저희 초등학교 다닐 때는 목사님이 가끔 설교하실 때 여러분들이 일주일에 두 시간 예배드리면 교인인줄 아십니까? 그리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러더니 중학교 때쯤에는 여러분들이 한 시간 40분 예배드리고 가면 그게 교인인줄 압니까? 그렇게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 후에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고 서울에 6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 부교역자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정확하게 11시에 예배를 시작해서 비가 오나 눈이오나 천둥이치나 번개가 치나 65분 열두시 5분에 정확하게 마칩니다. 예배시간이 잘못되어서 시간이 못 마칠 것 같으면 목사님이 찬송가 584장 일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해서라도 65분에 마치는데 예배순서를 세어보니까 23가지입니다. 이런 복잡한 예배의 순서는 한 40년 전에는 없었던 현상입니다. 아주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오늘날의 예배는 점점 예배자체가 공연화 되어서 사람들을 엔조이 하는 예배를 시도하고 심지어는 예배시간에 드라마 연극 설교가 없는 예배들이시도가 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은 좀 뜸해졌습니다만 소위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들이 주창이 되면서 한국교회의 예배의 형태를 다 바꿔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소위 구도자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학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불신자는 예배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배가 전도의 수단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과적인 효과로서 그런 것들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예배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배할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형식입니다. 이것을 주일예배 속에 들어와서 공 예배를 거대한 드라마처럼 바꾸어 놓고 그것들로 사람들을 엔터테인먼트의 분위기에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런 것들이 기독교에 있어서 공적인 예배를 대체하면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시도를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여러분 만약에 효율이 있고 신학이 있어서 둘이 충동이 일으킨다고 한다면 효율을 따라야 합니까? 신학을 따라야 합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 어떤 진지한 신학적인 검토도 없이 이 일이 이루어져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 누리 교회처럼 예배드려서 교회 성장에 좀 도움이 되었습니까? 아주 소수의 교회만 덕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한다고 그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배가 시작 됩니다.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순서들이 들어가려니까 결국 줄어드는 것은 설교시간입니다. 설교시간이 저희 어렸을 때 기억에 의하면 목사님의 설교가 1시간이 기본 이었습니다 지금 아마 한 시간을 설교하는 교회가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부교역자 생활 때 기억을 해보면 담임목사님 설교가 23분정도 이었습니다. 그런데 23분에 사람들이 견디는 태도를 보면 정말 다양합니다. 예배시간에 멍하니 생각을 놓고 있는 생각파, 그리고 이미 나온 주보 놓고 빨간 줄을 치면서 오자탈자를 고치는 교정파, 그런가 하면 예배 끝나고 있을 때 남전도회 여전도회 회의 자료를 준비하는 회의파, 심지어는 옆에 사람과 함께 필담을 나누는 필담파, 그리고 아예 예배시간에 설교시간에 성경을 읽는 실속파 에 시작해서 어디 높은데서 전화가 왔는지 핸드폰을 들고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사람, 그리고 졸다가 성경 떨어뜨리는 사람까지 총 천연입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신학자의 양심으로서 거기 하나님 안계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거기 오신다고 하면 제가 오시지 말라고 할 겁니다. 왜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는 그 자리에 꼭 오셔야 합니까? 예배시간마다 슬픔과 분노가 늘 교차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밖에 예배드릴 수 없을까? 그렇게 예배가 끝납니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일겁니다. 주님을 깊이 만났든지 못 만났든지 만났으면 그 감격 때문에 간절히 기도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것이고 주님을 못 만났으면 도대체 나에게 무슨 결함이 있어서 이 예배를 하나님이 외면했을까를 생각하며 애통해야 합니다. 그것도 예배라고 인도하고 까만 가운을 뒤집어쓰고 목사하고 장로들은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나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이 교회가 무슨 개업집입니까? 음식점입니까? 모두 행복해합니다. 예배가 진행 될 때는 우울했는데 끝나고 나면 모두 행복해 합니다. 주님만 슬프십니다. 목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려놓고 어떻게 그렇게 만면에 웃음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공동체적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 유니티의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장소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이스라엘을 하나의 유니티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은 혈통이 단일한 민족이 아닙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애급에서 탈출할 때 중다한 잡족들 히브리 성경에 에레들 레헤드 라고 하는 다양한 종족과 인종들이 함께 탈출했고 그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회중을 형성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방된 공동체였습니다. 불신앙을 통해 빠져나가고 신앙을 통해서 들어오는 선교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이스라엘이 유니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으로 유니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을 함께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 장소에서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들이 핏줄과 혈육을 넘어서 하나의 하나님 약속백성이라고 하는 현실성에 동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를 그런 식으로 교회가 드리고 나면 교인들은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예배 속에서 만나고 그 앞에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 줄을 알고 자신이 정말 티끌 같은 존재라고 하는 자기인식이 생겨나야 합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예배는 어떤 시대에 불변하는 절대적인 고정된 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궁금해서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해서 근대에 오기까지 예배의 역사를 다 찾아서 각 교파의 예배의 순서들을 조사해 본 적이 있습니다. 조금씩 다 다릅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이 예배 속에 빼 놓을 수 없는 본질적인 요소가 둘이 있습니다. 그 두요소를 오늘 예수님이 직접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그럼 이것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영이라고 하는 요소와 두 번째는 진리라고 하는 요소입니다. 이 영은 성령 그리고 그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간의 영 어느 것에서부터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예배에는 영적인 요소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주일날 왜 예배드리러 나올까요? 그리고는 당신 스스로 답하기를 얼른 끝내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게 예배시간에 졸고 딴 짓하고 그러면서 예배를 다 드리고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갑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좀 천천히 나가도 되는데 막 밀치듯이 쏟아져 나옵니다. 멀리서 보면 예배당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돌계단 사이로 알록달록한 구슬들이 쏟아져 나오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옵니다.그렇게 앞을 다투면서 나온 사람들이 가는 곳은 주차장 아니면 식당 아니면 집에 돌아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겁니다. 실제로 어느 복음주의적인 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교인들 보고 방금 목사님이 성경을 어디를 설교했냐고 물어보니까 95%가 모른다고 대답했답니다. 그 95%중의 절반은 금방 끝난 예배의 설교가 신약인지 구약인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이 예배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면서 예배당을 내려와도 세상이 변할까 말까인데 그래서 그 사람들이 설교를 기억하고 있는 다섯 명에게 다시 그 주간 안에 전화로 확인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다섯 명 중에 세 명은 일주일 안에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예배에 거의 영향을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예배에 영향을 받아서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목회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목회는 하는데 회심을 보기가 매우 드문 겁니다. 그러니까 회심이 무엇입니까? 중생은 하나님의 동역적 사역이지만 하나님이 이루신 동역적 사역인 중생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현실화된 첫 번째 움직임이 회심입니다. 그리고 이 회심은 넓은 의미의 회심은 일생동안 반복되는 경험이지만 좁은 의미의 회심은 구원에 이르는 일회적 회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진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구성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동역적 사역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협력적 사역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성인이 된 사람들 아니 어린이를 포함해서 의식이 있는 사람이 회심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신학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회심하고 있습니까?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고 그래서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기의 행복이 이 모든 가치의 최고인줄알던 사람들이 생각이 바뀌어서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시고 자신은 티끌과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인식이 생겨나는 경험이 우리에게 언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우리들이 예배를 매주 인도하는데 이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해서 온 교회가 눈물로 예배를 드려 본적이 언제입니까? 어느 청교도는 말하기를 회심 하지 않은 성도는 길들여진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목양할 수 있겠습니까?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목양이 불가능합니다. 목양은 양을 키우는 것을 목양이라고 말하지 맹수를 돌보는 것을 목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오늘날 조국교회에서 회심의 은혜가 사라지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이 예배의 현저한 약화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매주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단상에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때 과연 우리에게 기대가 있습니까? 세계적인 가수 조수미는 인터뷰에서 자기는 무대에 오를 적마다 자신의 노래로 모든 사람들을 쓰러뜨리겠다는 마음으로 무대에 오른답니다. 실제로 음악의 역사에 보면 뮤지컬 오르가즘이라고 해서 음악을 듣다가 사람들이 실신하는 사람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정말 우리 목회자들에게 예배에 올라가면서 이번 예배에 하나님 우리의 예배를 이렇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절체절명의기대가 우리에게 있을까요? 그리고 예배를 드리고 나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내려올 때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목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찬양)
우리의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일본 바둑의 역사에 보면 토혈국이라는 기보가 전해 내려옵니다. 도쿠까와 이에아스 시대에 양 정치파가 바둑기사들을 두어 대국을 하게 하였습니다. 한쪽이 불계승으로 졌습니다. 자신이 진 것이 확인되자 이 기사는 피를 토하고 바둑판에 엎어져서 절명해 버렸습니다. 한 판의 오락을 두다가도 지니까 피를 토하고 절명해 죽는데 열정이 없다는 것은 죄입니다. 개성이나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명의 엄중함, 그리고 이 예배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기 위해 부름 받은 성직자로서의 소명에 대한 기대감이 열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예배를 인도할 때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 적어도 저 목사님은 이 예배에 목숨을 걸고 있다 그리고 이 예배 속에서 무엇인가 하늘이 열리고 어둠속에 있는 이 모든 인간들에게 진리가 선포되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이 떨리는 기대를 갖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는 의미는 신학적으로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높아지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서 홀로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학적으로 이 하나님의 영광은 세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가 본질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종종 성경은 발산적 영광을 말합니다. 특정한 장소에 하나님의 쉐퀴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효과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존 귀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바로 예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 속에 그분의 이름을 존귀하게 높여 드리기 위해서 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목표가 필요합니다. 그 목표가 바로 예배를 통해서 모든 회중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목표에 실패한 예배는 교인이 적게 모인 예배가 아니고 성공한 예배는 많은 사람이 행복해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각자 자신의 실존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예배의 목표가 성취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나니 라고 했으니 만약에 저렇게 예배한다면 하나님은 안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라고 하는 예배의 방식이 바로 진리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깊은 감격도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도 아닌데 왜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예배의 기쁨도 없고 그리고 그 예배시간을 견디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 하면서 그러면서 주일이면 꾸역꾸역 교회에 나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목회자는 이것을 신앙으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역사에 보면 특히 선지서에 소위 리브패턴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리브’는 히브리말로 ‘다투다, 언쟁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와 다투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논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월삭도 드리고 제사도 드리고 희생도 바쳤습니다. 너희는 마음이 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에 그 모든 재물들로 나를 모욕을 했다 이런 식으로 논쟁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리브패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가슴 아프셨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요구에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고대 근동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뇌물개념의 예배였습니다. 고대 근동에 잡다한 신들에 대한 견해는 거룩하신 여호와의 종교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신관과는 현저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하나님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예배하는 자는 홀로 예배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러 나오기 전까지 살았던 모든 삶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책임 의식적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합당하지 못하면 그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받고 예배에 합당하도록 다시 자신을 데디케이트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근당의 신관에서는 이런 것들이 아무문제가 안되었습니다. 그 신들은 늘 먹지 못해서 걸신거리는 신들이고 파리 때같이 몰려다니면서 뜯어먹는 신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신들에게 공경하는 도덕적인 종교심 이라기보다는 신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진정시켜서 자신의 삶의 질서를 흩트려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 고대 근동의 예배의 제사의 기본적인 정신이었습니다. 실지로 성도들에게 그렇게 예배자답게 예배드리는 마음도 없으면서 꾸준히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에게 왜 주일날 예배드리러 나오는지 물어보세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왠지 찝찝해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이야기 하는 그 예배가 그 예배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올바르게 가르쳐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주 깔보는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정말 온전하게 성도들을 가르쳐서 한사람이 정말 진정한 예배자가 되면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들이 이 예배 속에서 신자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이 예배는 엄중한 사건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배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렇게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몇 해 전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오월이면 가정의 달 설교를 합니다. 저도 오월이면 늘 가정 설교를 합니다. 우리 교인하나가 친구가 하도 곤고하게 사니까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억지로 교회를 데리고 왔는데 이 여자는 중년인데 너무 곤고합니다. 남편과 이혼하기로 이혼서류를 쓰고 남편이 도장찍어주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친구에 이끌려 생전처음 교회에 왔습니다. 그날 설교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이었습니다. 주일날 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었습니다. 이 여성이 그날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을 불러서 ‘여보’ 이혼서류를 계속 도장을 찍어 달라고 하니까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원만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누라가 또 뭘 들볶으려고 또 나를 오라고 하나 하고 방에 들어갔더니 내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정말 알고 보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된 인생을 살아서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했어, 그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발길로 뻥 차면서 ‘야 이년아 그걸 이제 알았냐? 그랬겠습니까? 남편도 무릎을 꿇고 ’아니야 여보 내가 당신을 너무 괴롭혔어‘ 그리고 한 가정으로 화합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상담, 어른들의 충고, 몇 권의 책을 읽으면 그렇게 마음이 돌이켜 설수 있을까요? 인생을 바꿔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예배는 목회자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중요한 목회자 최고의 의무입니다. 나는 한 목회자가 예배시간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줄 수 있다면 물론 그가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도구로 충실하게 쓰일 수 있다면 그는 거의 모든 것을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설교자가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 희미한 작은 빛이라도 내게 보여줄 수 있다면 나는 그 설교자의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지적해야 될 것은 지금 조국교회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이 뇌물 개념의 예배입니다. 이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가 성도의 얼마나 중요한 의무이고 이 예배가 우리의 모든 삶의 중심에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도들에게 피를 토하듯이 가르쳐야 합니다.
(찬양)
주 앞에 나아와 경배 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배드림이 기쁨 됩니다.
우리 중 주일 예배를 위해 금식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될까요? 예배시간에 각별한 회심의 은혜를 부어주시기 위해서 밤을 새우며 매달리는 목회자가 얼마나 될까? 저의 목회의 경험에 의하면 성경공부로 만들어진 교인과 장엄한 예배에 대한 경험 없이 성경공부로 만들어진 교인, 예배의 엄숙함에 대한 경험이 없이 제자훈련으로 만들어진 교인, 예배에 대한 깊은 체험 없이 교회에서 계속 일을 시켜서 교인이 된 이런 교인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교인들과는 수준이 다릅니다. 종자가 다릅니다. 어디서 차이가 나냐면 항상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교인들은 주님의 거룩하고 위대하심, 그리고 어느 예배든지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오실 것이라고 하는 개인적인 부흥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이일을 위해서 필요한 본질적인 요소를 성경은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첫째가 진리입니다. ‘알레데이아’라고 하는 이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가깝게는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좀 더 풍성하게 설명하자면 복음을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총체적인 계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배시간이 이 진리를 전달하고 전달받는 시간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배시간은 인간의 지성이 고도로 움직이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지성의 스위치를 끄는 것 같습니다. 특히 설교가 시작되면 눈을 감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치 설교를 마치 연설이나 중 고등학교 때 대머리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정신훈화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민방위교육 가면 제일 불쌍한 사람이 강사입니다.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신문 뒤집어쓰고 잡니다. 그것을 또 개의치 않고 설교를 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의 그러한 태도 그러한 태도를 용납하는 목회자의 태도가 합력해서 악을 이루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누구입니까? 나는 설교자 목회자가 누구냐 라고 할 때 나는 그 사람을 이렇게 자리매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위대한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던 그리고 순교한 선지자들의 후예라 사도들의 후예라고 말합니다. 한 목회자의 목회사역의 가치는 일의 성과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피를 토하듯이 외친 진리의 진실성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설교를 할 때에 어떤 사람이 내 설교를 싫어한다. 잘 듣지 않는다. 그럴 때 기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아 드디어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구나, 왜냐하면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년 전 교회를 개척하고 이변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의 강단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매년 4번씩 사경회를 했고 모두 64회를 사경회를 하였습니다.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이 강사로 온 적이 없습니다. 20년 동안에 5126번의 공식적인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저는 원고 없이 이렇게 설교를 했는데 모두 녹취해서 풀었습니다. 원고지 40만장의 분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디서든지 이 진리를 어둠속에서 외치면 파리한 손으로 그 진리를 붙드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다. 그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붙여주신 양떼들이다 생각하고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면 아마 안 믿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7명을 데리고 교회를 개척했고 저희교회 장로님 10명이 모두 우리교회에 와서 회심을 제2의 회심을 하고 장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누가 저를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저는 20년 동안에 두 번 어쩌면 이 설교 시리즈가 끝나기 전에 교인들이 나를 나가라 그러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그런다면 나는 주님의 뜻인 줄 알고 기쁘게 떠나겠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설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목회사역의 최대의 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교의 탈 신학화 현상입니다. 설교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안 되는 시대입니다. 왜? 장로교 목사님은 장로교 목사로서의 설교의 신학적인 틀이 있어야 하고 감리교 목사는 감리교 목사로서 알미니우스주의에 대한 특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충돌이 있고 논쟁이 있어야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설교 속에 신학을 담으려는 노력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주전에 미국에 방문할 일이 있어서 갔다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데이비드 웰즈박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참 몇 시간 달콤한 교제를 작년에 이어서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안의 형제입니다. 그분이 저에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최근에 쓴 어떤 책에 추천서를 써달라고 책을 원고를 보냈답니다. 다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 책의 내용은 복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자 라는 내용이었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복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자 그 얘기는 잡다한 인간의 사상으로 하지 말고 순수한 복음으로 하자 이런 뜻입니다. 그러나 웰즈 교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나는 그런 캐치프레이즈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분의 책을 거의모두 읽었기 때문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금방 서로 공감을 했습니다. 신학은 필요 없고 복음으로 승부한다고 할 때 한 사람 개인의 삶을 바꿔놓고 변화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러나 시대의 정신과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거대하고 정교한 논리적인 틀을 가지고 이 세대를 엄습하고 있는데 복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캐치프레이즈가 가능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말랑말랑한 복음은 아주 굳건하고 틀이 갖추어진 건전한 신학 속에 내장되어 있을 때에 그때에 복음으로서의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힘이 플라톤주의를 쫒아가는 하나의 유치한 설명을 가진 종교라고 여겨지던 기독교가 유대교의 일파라고 생각되던 기독교가 장엄한 사상을 가지고 로마의 세계를 지배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뜨거운 복음의 체험과 함께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틀들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에 시대의 사상과 맞서서 그것을 극복하고 싸워서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처럼 ‘기도합시다, 노숙자 도웁시다, 착하게 삽시다. 이웃과 평화 합시다. 무소유의 삶을 삽시다. 이런 설교는 생명을 주는 설교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전도를 시작할 때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여러분들은 기억하십니까? 고린도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 그가 방문하고든 아테네 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에피큐리어스 학파 사람과 스토아학파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도 역시 헬레니즘과 로마니즘으로 무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과 충분히 철학적인 토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매우 적었고 그래서 그는 고린도에 들어갈 때에 심히 두렵고 떨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거기서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생애적인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라고 말하면서 고린도 전서 이장에서 말하면서 소위 말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철학의 완성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아주 조직적으로 철학적으로 진술해 갑니다. 그래서 이것을 그냥 따끈따끈한 복음의 체험이 아니라 이것들을 사상화해서 당시에 로마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의 정신과 더불어 맞서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그 안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설교하러 올라 갈 때에는 마치 수정같이 투명한 진리 고래힘줄같이 무엇으로도 끊어지지 않고 양보할 수 없는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진리를 가지고 단상에 올라가야 됩니다. 그 신학적인 진리를 가지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에 기초하고 해석을 통해 파악되고 파악된 그것이 사상의 옷을 입고 그것을 자신의 마음속에 불붙여서 이것으로서 이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진리에 대한 불타는 신념을 가지고 단상에 올라가서 그래서 피를 토하듯이 그 설교를 쏟아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일 가슴을 치는 일은 설교하러 올라가는 목회자 자신에게 도저히 이 강단에서 그것을 외치기 전까지는 내려올 수 없다고 하는 양보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다급함 그게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올라가서 시사이야기나 하고 옛날이야기나 하고 예화나 하고 그리고 그담에 우스갯소리나 하고 해서 교인들하고 껄껄 거리고 웃고 그렇게 해서 이 예배의 거룩함이 성도들의 가슴속에 새겨지겠습니까?
박은선 목사님이 50이 넘으셔서 교회를 개척하셨답니다. 매주설교를 하시는데 거기에 이단에 속하는 어느 교파에 다니는 여교수 한사람이 매주 저녁예배에 참석했습니다. 6개월쯤 그 교수가 참석하자 부목사님이 물어보셨습니다. 교수님, 우리 박 목사님 설교 들으시니까 이제 좀 신앙이 생기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 여교수가 하는 말이 6개월을 들어봤지만 난 아직까지도 우리 문 선생님 말이 맞는지 우리 박 목사님 말이 맞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분이 외치는 저 설교가 진리가 아니라면 저 나이 드신 분이 저렇게 피를 토할 것처럼 저렇게 애절하게 그리고 그렇게 치열하게 울부짖듯이 외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다른 교회의 예배인도를 가면 예배 태도가 제일 나쁜 사람이 세 종류의 그룹이 있습니다. 첫째가 장로님들입니다. 두 번째가 사모님들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가 목회자들입니다. 사실 이 세 그룹의 사람들만 예배를 잘 드리면 교회는 됩니다. 그 가장 커다란 원인이 외쳐야할 진리가 예배 속에서 더 뚜렷하게 설교를 통해서 관통해 나가야 합니다. 수정처럼 맑고 투명하고 고래힘줄처럼 끊어지지 않는 양보할 수없는 어떤 진리를 그 설교 한편 속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성령입니다. 이 예배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목표라면 이것은 세 가지의 요소의 결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자, 그 다음에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는 상한 심령을 가진 예배자, 두 사람의 만남을 축복하는 성령의 은혜 이것을 주어질 때 그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목표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은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 말고 넓은 의미의 예배만 몇 해 전 미국으로 집회를 갔습니다. 열 몇 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가니 정신이 어질어질 한데 마중 나온 어느 집사님이 봉고를 태워서 데리고 가면서 목사님 하고 둘이 가면서 카세트를 탁 틉니다. 그래서 제가 끄고 좀 조용히 가면 안 될까요 그랬더니 아닙니다. 이거 우리 목사님 설교인데 한번 들어 보세요 하면서 크게 틉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목사님이 카세트에서 말씀하시길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일날 11시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만 예배인줄 아시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예배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고 이러는 것 이 예배가 진짜 진정한 의미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원론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원론은 기독교의 신학이 아닙니다. 이 집사님은 굉장히 엄청난 감동을 그 강의에 받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듣고 가면서 마음이 매우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목회자들이 빠지고 있는 신학적인 오류에 또 빠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원론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플라톤 철학에서 가지계와 가시계로 나누고 위로 올라갈수록 영적인 세계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물질적인 세계인데 영적인 것들이 결핍 될수록 물질적인 것들로 귀속이 되고 영적인 것들을 잃어버린 만큼 선이 결핍되고 악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층부 구조는 신령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내려올수록 악하고 물질적이고 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원론은 사실은 기독교에 많은 나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이게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들이라고 타파하면서 일원론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될 신학적인 난제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를 함께 말합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모여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려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넓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예배가 아무 차이가 없다거나 아니면 허물어버려야 된다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제사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신학적인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헌제자가 문제가 됩니다. 헌제자 자신이 그 제사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삶과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를 생각해 보면 넓은 의미의 예배, 삶의 모든 방면에서 그분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이 예배의 행위가 풍성해 지는 것은 좁은 의미의 예배가 성공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넓은 예배의 의미를 잘 드린 사람들은 좁은 의미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올 때에 상한 마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 잘 섬기고 싶은데 주님의 나라가 온 땅에 이르게 하는데 이바지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나의 추한 자아가 못난 자신이 이러한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때 자기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느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부족을 인식하고 주의 거룩하심을 생각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 때 상한 심령이 되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예배에 가난한 마음으로 나와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60년대 웨스트민스터에서 후학들을 잘 가르치셨던 탁월한 구약학자가 계시는데 메리디트 크라이 라고 하는 분인데 이분은 자신의 킹덤프로로그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잘 다루었습니다. 성경은 일원론을 말하고 있지만 분명히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제이적인 사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소위 이야기 하는 이원론에 대한 대안이 수평적인 일원론이 아니라 원뿔형 일원론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사이에 혹은 신령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 담장은 없지만 높낮이는 존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식 으로든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이런 신학을 극단화해서 청년들이 주일날 예배시간에 빈민가에 가서 봉사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예배라고 본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 결과 인간은 아주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 좁은 의미의 예배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모든 것들이 그런 식의 논리로 자동적으로 축적되고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저는 이십 년 동안 목회를 해 오면서 이렇게 미력이나마 미끄러지지 않고 예배당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비결은 예배였다고 말합니다. 목회자도 곤고할 때도 있고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예배드리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합니다. 한 번도 교인들을 위해서 예배를 드려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거기서 함께 주님을 만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결단 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그러한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당에 나올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정말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의 예배에 언제 성령님이 어떻게 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것을 우리가 어떻게 구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성령이 기뻐하지 않는 일의 모든 것을 버리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낮아져서 비천한 우리들이 드리는 이 예배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 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마른땅과 같은 이 교회위에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시도록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씨를 뿌리고 치열하게 전도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교회를 조직화하고 그리고 이상적인 올가니제이션을 하고 우리들이 경영의 기법들을 동원해서 교회의 운영을 합리화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은 인간이 만든 제도나 방법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나는 목회가 재미있다고 하는 선배목사님들을 보면 한없이 존경스럽습니다. 설교는 영원한 이국의 언어이고 그렇게 오천 번을 넘게 설교했어도 설교는 영원한 이국의 언어이고 목회는 지금도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우리의 예배 속에 하나님이 충만히 임해주시도록 그래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셔서 모든 백성들이 그 엄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은 다만 지나가는 바람이요 티끌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도록 겸비해지도록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진흙탕을 구르는 것처럼 몸부림치며 그 예배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것 말고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예배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이 나타날 때 교만한 사람들은 낮아지고 좌절했던 사람들은 일어나고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혜가 생기고 죄 가운데 있던 사람들은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가장 그리운 것은 예배의 영광입니다. 그 예배 속에서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만나고 죄 때문에 곤고한 자들이 회개하고 어둠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진리를 발견하고 사랑할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때 그래서 그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 앞에 자신은 티끌뿐이라고 고백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통해 우리의 목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