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기쁘시게 할까
(199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이스라엘과 논쟁하시는 하나님(미6:1-3) 1997.11.9 주일오후 1
2. 애굽에서 속량하신 하나님(미6:4上) 1997.11.9 주일오후 8
3. 가르치는 자를 보내신 하나님(미6:4下) 1997.11.16 주일오후 13
4. 싯딤에서 길갈까지 (미6:5) 1997.11.23 주일오후 25
5.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미6:6-7) 1997.11.30 주일오후 36
6. 선한 것을 구하며 삽니까?(미6:8上) 1997.12.7 주일오후 49
7. 공의와 인자, 그리고 동행하는 삶(미6:8下) 1997.12.14 주일오후 63
1. 이스라엘과 논쟁하시는 하나님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일어나서 산 앞에서 쟁변하여 작은 산으로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미6:1-3)
미가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의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때는 요담, 아하스와 같은 왕의 시대였는데 주전 740년경부터 예언 사역을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는 사역하는 중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와 거의 동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쾌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남왕국은 아직 건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는 아주 영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죄악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호세아의 영적인 특성과 아모스의 공의에 찬 메시지를 동시에 소유한 사람이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깊은 연민의 정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탄핵했던 중요한 죄는 두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생활과 이웃에 대한 불의한 생활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결국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예배생활은 반드시 부패와 죄악에 가득 찬 생활을 불러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패하고 악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모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직한 예배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헛된 예배에 대해서 거듭 경고하고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를 하나님 앞에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본문을 해설해 나가기 전에 미가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양대 사상에 대해서 적용점을 찾아야합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삶도 무너집니다. 그런데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 속에 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가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배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화) 성경공부를 가르치는데 오늘은 정성껏 드리는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하자 교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습니다. 그 다음에 돌아와서 오늘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함을 말하자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갑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이 순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만나려면 우리도 성결한 삶을 살아 야 한다는 것을 말하자 또다시 그렇게 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보니 그렇게 진지하게 성경공부를 하는데 교인들의 삶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들을 때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해서 진리를 따라 살기 때문에 영적이 식욕이 생겨서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새롭다는 것과 생소하다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경험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지루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그 사랑은 날마다 새롭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이렇게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늘 느끼는 사람은 날마다 “주의 성실하심이 새롭도소이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의 감화를 받고 감화되는 사람은 날마다 새롭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받기는 받는데 날마다 생소합니다. 그리고 또 들려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또 들려달라는 것이 생소해서 또 들려달라는 것이지 새롭고 감격스러워서 또 들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 목사님이 하는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 갈 뿐이지 실천은 전혀 않는 것입니다. 실천을 하지 않으니 실천을 하고 돌아오면 말씀이 새롭게 다가오는데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똑같은 고백을 여러분에게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예배와 삶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미가의 신학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중심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예배 그것을 아버지 앞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종한 예배생활이 필연적으로 그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부패한 모습을 가져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반적인 삶이 하나님을 도망갑니다. 배교와 가까운 삶이 되어 있는 시대를 바라보면서 선지자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유명한 구절인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가며 그 크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참된 예배의 정신과 삶의 정신이 그림과 같이 통합되는 장면을 담고 있는 6장의 서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문제를 우리들이 다루어보려 합니다.
먼저 성경은 우리에게 여호와께서 선지자에게 임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너는 산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사이에 쟁변하는 것을 듣도록 증인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신 가를 보여줍니다.
성경에 보면 이것을 리브패턴이라 합니다. 리브는 히브리말로 ‘다투다’입니다. 그 다투는 패턴이 구약성경에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투는 패턴 속에는 항상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서 다투는 것입니다. “나만을 섬겨라, 너희가 나만 섬겼느냐”. “우리가 언제 섬기지 않았습니까?” “네가 언제 섬겼느냐?”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다투는 장면입니다. 어떻게 보면 창피합니다.
그런데 그 논쟁에서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마음에 맞으면 복 주시고 마음에 맞지 않으시면 쓸어버리시면 됩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 것과 섬겨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떻게 믿으면 하나님이 혼내신다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믿으면 복을 받는 다는 것도 주님이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르쳐 주셨고 경고했으며 약속도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살면 복 주시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쓸어버리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리브패턴 소위 말하는 쟁변의 패턴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솔직히 말해서 목회를 하거나 영혼들을 돌보다가 가끔 보면은 도저히 아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앉아 말하다보면 가슴이 답답한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던 시기에는 이스라엘 백성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을 때이니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답답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무엇인가 불순종의 길로 계속 걸어가려 하니, 그렇게 계속 깨닫게 하시고 권고하시며 심지어는 징계하셔도 도저히 귀 기울지 않고 고집대로 살아가며 마음이 닫혀있는 짐승과 방불한 인생들과 더불어 고결하신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인간의 말을 가지고 쟁변하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쟁변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 장면을 보며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당신의 진실하심에 있어 자신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산천초목이 증인을 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모든 태도에 일관성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로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한없는 긍휼입니다. 그런데 긍휼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입니다. 무슨 종류의 긍휼입니까? 그 긍휼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돌과 같이 막힌 백성들, 패역하고 완고한 백성들을 한번에 율법의 잣대로 재어 버리시는 대신에 찾아오시고 그와 함께 쟁변하시면서 그들을 설득하시고자 하는 그러한 사랑과 긍휼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설득 당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부패하고 죄악 가운데 살아가도 하나님께 설득 당하면 정말로 변화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부어주셔서 변화시켜주시는 놀라운 변화가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삶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패턴을 취하시면서 당신의 백성들과 쟁변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끊임없이 쟁변하시고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길과 인생의 길, 여호와를 섬기고 경외하는 도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과 정식으로 쟁변하시기 위해 주 앞에 서기만 해도 그는 결국 하나님 앞에 설득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친절한 긍휼 가운데 오셔서 쟁변하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셔도 도무지 이 백성이 아버지 앞에, 그 거룩한 논리 앞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오래 전에 속해있던 교회에 자매에게 아들 하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이를 가 졌을 때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아이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도 록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잘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아 이를 갖고 나서 신앙생활을 거의 못하고 불안에 쫓기면서 아를 가졌더니 걱정이라는 말했습니다. 그때 그 아이가 다섯 살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완전히 무대포입 니다. 부수고 차고 생떼부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 저는 아이들도 인격적으로 설득을 해 야 한다고 봅니다.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나쁜 짓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설득을 합니 다. 그런데 자기가 동의하는 데까지는 논리가 가다가 그 논리가 발목을 잡으면 집어던 집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너무 답답하셔서 쟁변하시고자 내려오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말씀하실 때 그 쟁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아이처럼 쟁변 조차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신앙 생활은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그 논리적인 사람들이 초리적인 신앙을 활용하면서 삽니다. 초리적인 믿음은 논리적인 신앙생활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인격적인 설복이 얼마나 논리적입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동의하고 쫓아갈 때까지는 ‘예’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삶이 그 논리에 모순되었을 때는 쟁변하시는 하나님조차 거절하지 않습니까? 문을 닫아 버립니다. 그때 피하는 방법이 주님이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모르겠다는 답변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결국은 쟁변하시는 하나님을 회피하시는 것입니다.
바보입니까?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는 것은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모릅니까? 자신의 양심이 증거하고 자신의 신앙이 증거하는데 말입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버티는 것이 도덕심이고 윤리에서 나오는 의식인지 정말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내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십자가와는 관계없이 나의 의지와 이념을 가지고 신앙생활 해나가는지 왜 모릅니까? 빛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서 빛으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것인지 그것을 모릅니까?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쟁변을 회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산천초목을 중인으로 불러 세우시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가지고 쟁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쟁변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쟁변하시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주님이 무엇이고 논리적으로 말씀하시든지 논리를 뛰어 넘는 거역과 불순종으로 그것에 거스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올바르지 않은 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버려야 합니다.
주님이 백성들에 쟁변을 시작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 모두 과거형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아 너희는 나에게 불순종하고 내 사랑을 거스르고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패역하게 사는구나! 왜 그런지 내게 말해보라. 그렇게 너희가 내 말을 거스르고 나를 거역해서 지속적으로 불순종하면서 살아가게 된 이유가 있다면 내게 말해보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도록 내가 너에게 어떤 일을 행한 일이 있느냐? 또 이유와 까닭없이 너희를 고난 가운데 내버려두어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돌보지 않아서 고통을 받게 한 적이 있느냐? 그것을 내게 말해라. 내가 한 번 듣고 싶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쟁변 가운데 먼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쟁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언제나 의를 향하시는 선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망을 받거나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그들이 불순종하면서 살지 않을 수 없도록 원인을 제공하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풀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맺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인자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것은 본인이 하나님 없이 살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이 끊임없이 사랑으로 추격해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의 추격과 내 멋대로 살고 싶어하는 방종이 빚어낸 갈등의 소산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풀지 못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장단에 맞추어 주시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거스르고 불순종한다마는 내가 너희와 쟁변하건데 나는 먼저 나의 의로움과 선함을 너희에게 보인다. 도대체 내가 너희에게 불의하게 행한 것이 무엇이고 너희가 그렇게 뒤로 물러가서 나를 거스르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앞에 거스르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살려고 하다가 못사는 것과 뒤로 돌아서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하다가 연약하여 넘어지며 눈물을 흘리며 일어나는 것과 돌아서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뒤를 돌아서는 자는 하나님이 버려 두지 않습니다.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마음의 곤고함과 영혼의 아픔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았던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해도 우리는 일어서서 다시 강함을 선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고 진실하게 살고 싶어하며 아버지 하나님 앞에 원하는 삶을 살아서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더러운 죄 가운데서 건져내신 은혜를 보답하면서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왜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분명히 하나님 앞에 말해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찾아보고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불순종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찾아보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이 동의해주시는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생각도 없이 그대로 없이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은 동물적인 삶입니다. 주님이 우리로 그런 삶을 살게 하려고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셨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행복도 없으며 진정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도 없으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도 없으며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 보시기에 늘 근심과 걱정을 끼쳐드리는 애물단지와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행복해질 수 없고 주님도 행복해질 수 없는 불순종의 길을 이유도 없이 단지 내 마음과 욕심이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고 하는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거룩한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입니다.
( ? ) 그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면 여러분들의 마음의 마음은 부드럽고 여린 마음이 됩니다. 그렇게 여린 마음에는 ( ? )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도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유케하시기 위해 우리를 불러내셨기에 다시는 종의 멍에를 쓴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전에 살았던 삶이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까? 왜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까? 내가 좋아했기 때문에 안 믿은 것입니다. 왜 내가 아버지 앞에서 진실한 목자이신 주님의 품에서 목양 받기를 거절하고 떠돌아다니는 영적 거지처럼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아무데나 돌아다니고, 말이나 소가 갈 데를 다니면서 스스로 받은 상처를 가슴에 움켜지고 자기가 비련의 주인공인 것처럼 아버지 앞에서 비감한 마음에 빠져서 눈물을 흘려도 진실한 회개는 경험해보지 못한 그러한 삶을 왜 살았습니까? 누가 강요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이 불러도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하고 영광스런 지위를 포기하고 방종한 길로 걸어가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체를 방종과 타락에 내어버리고 육체의 방종과 탐욕과 많은 죄악에 빠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신의 성전을 더럽히고 방종한 삶을 살았던 삶이 모두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누가 강요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 마음대로 산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대로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의지대로 내 마음대로 산 마지막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행복도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은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러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상상 할 수 없는 어둠과 죄악으로 말미암는 고통들을 경험했습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쟁변하면서까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당신 앞에 나와서 관계를 회복하여야 함을 말하심에도 불구하고 내 육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수 밖에 없고 주님이 쟁변하시든지 말든지 그것은 상관없이 나는 내 마음이 원하는 데로 살뿐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포기하고 종의 지위로 내려가서 목에 죄악의 쇠사슬을 채우고 다시 마귀에게 이끌려 다니는 더러운 삶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미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 세상에 율법과 우리의 양심이, 그리고 사단이 우리를 정죄하여도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우리를 주의 백성 삼으시고 우리의 죄악의 더러운 몸을 그 보혈의 샘에서 씻겨주셨습니다. 타락에 어울리지 않는 존귀의 면류관을 씌우시고 죄악된 나날에 어울리지 않는 승리의 면류관을 씌우셔서 주님의 자녀의 하나님의 왕국의 후손의 입을 입히셔서 우리를 거룩한 나라로 들이셨습니다. 그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그 더러운 복장으로 사슬에 매여서 돼지우리나 치우고 짐승과 같이 어깨 위에 등이 벗겨질 정도로 죄의 멍에를 지고 밭을 갈다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 노예의 삶을 택하려고 합니까? 택하십시오. 저는 빛 가운데 살면서 그리스도를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악 가운데 들어가고 영적인 침체를 만나더라도 머리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신 하나님에 대해 이유를 대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겸손히 무릎을 꿇고 쟁변하시는 하나님의 쟁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고 고치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애굽에서 속량하신 하나님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미6:4上)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거스르고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불순종하는 구나! 그렇다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대라. 내가 네게 원인을 제공한 적이 있느냐? 내가 무슨 나쁜 일을 하였으냐? 내가 너희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무엇인가 그렇게 한 적이 이 있느냐? 말해보아라”.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리기 전에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던 은총을 말씀하십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집에서 너희를 속량해 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쟁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쟁변했지만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쟁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였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종 되어 살던 이스라엘을 버려 두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조상과 맺은 언약 그 하나를 기억하고 백성들의 울부짖는 고통소리를 기도 소리로 간주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로 찾아가서 그들의 죄악과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내어 바로의 앞에서 속량해 주지 아니하였냐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어떤 것들로 인하여 원망하는 마음도 있고 투기하는 마음도, 또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인하여 깊이 마음상한 것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구속의 은혜를 잊고 있느냐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상기시키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내 마음대로 다 잘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내 뜻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고 마음먹은 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는 것이 나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좌우할 정도로 엄청나게 중요한 일들이 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잊지는 말아라
죄인 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구원해주신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 않은 포도나무의 실과를 먹고 짖지, 아니한 집에서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러나 그 모든 풍족한 은혜를 누릴 때에 너희들이 잊지 말고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너희가 의로워서 이 땅을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요, 그 땅에 사는 거민들의 패역과 죄악이 극에 달해서 그들을 멸하고 너희를 그 땅 유업으로 삼게 하였으니, 너희는 공로 없고 오직 나의 은혜로 그 땅에 들어간 것을 기억하고 죄인 된 너희를 건져주신 여호와를 잊지 말아라. 기억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좋습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쟁변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실수는 아니지만 주님이 여러분들이 하고 싶어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들이 마음먹고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으시고 여러분들의 인생에 비협조적이셨을 때도 있습니다. 다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그 죽음과 사망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주셔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우리는 정죄 아래 놓여있고 하나님의 진노의 칼 앞에 있는 사라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순간의 문제가 아니라 로마서가 우리가 말하는 대로 죄와 허물로 인해 우리는 이미 죽어 있었고, 생명을 유업으로 얻을 가능성조차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으면서 동물처럼 살다가 도륙 당하는 짐승처럼 살아가야 할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고 그 중의 한 사람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공로 없으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시고, 주님이 사랑으로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셨습니다. 우리를 맑게 씻기셔서 주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나라의 후사로서 옷 입히시고 이제는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긍휼과 연민의 대상으로서 우리를 바라보시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죄가 운데 있을 때 진노의 대상이었고, 심판의 대상이었지만, 이제 정죄함이 없는 자가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분노하시고 마음 아파하셔도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멸하시기 위한 분노가 아니라 당신의 의로우신 성품으로 벌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깨닫고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진노를 보여주시는 탁월한 관계와 사랑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고 몰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았고 우리가 그분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을 사랑을 얻으실 지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기뻐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을 알뿐입니다.
“많은 사람가운데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노니 너는 내 것이라”. 주님이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것이면 다 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면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낼 때에는 기적만 행하셨으면 됐습니다. 그리고 죄 없는 어린양들이 죽어 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량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미가서의 예언을 듣던 첫 번째 회중들과는 달리 우리는 이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구속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는 양떼들이 죽어갔고 그 흘린 피가 설주와 인방에 발리운 바 되었으나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는 양이나 황소도 아니고 비둘기도 곡식도 아닌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죽으셔야 됐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짐승의 피나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리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찢기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주님이 우리의 마음의 인방에 바르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의 피였습니다. 그 피로 우리의 몸과 마음에 바르시고 그 피로 우리를 건져내셔서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을 목격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피가 여러분의 마음의 인방에 바른바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양이 아니라 자기의 몸을 찢으시고 가르셔서 흐르는 그 피로 우리의 마음의 문에 바르시고 설주에 바르심으로 우리를 구속해내셨습니다.
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양떼들은 짐승과 가축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났습니다. 짐승의 피를 바르고 애굽의 바로의 정치적인 압제에서 벗어났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그 구속의 은혜를 반복해서 쟁변하시면서 그 구속의 위대함을 쟁변하고 계시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것을 쟁변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당신이 그 아들이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하나밖에, 당신의 온 사랑의 대상이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피 흘려 죽게 하시고, 그 피로 자의 몸에서 떨어지는 선혈로 우리들의 마음에 바르사 우리를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몇 사람으로 건져내셔서 아버지 앞에 사랑 받는 친자녀로 하나님이 삼아주셨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면서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면, 정말로 우리는 양의 피를 바르고 속죄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쟁변을 통하여 심판을 경고하셨지만 우리에게는 이 크고 놀라운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아버지 앞에 변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쟁변 앞에 마주서려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습니까?
저는 한 지체하고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들을 때 계속해서 예배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참석할 수 없 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매는 말씀을 들을 때 깨달음 은 오는데 그 깨달음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하지 않 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영혼의 큰 손해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이 야기를 몇 달 전에 들을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배 중에 설교자의 눈빛을 회피하는 것은 아주 나쁜 습관입니다. 왜 회피합니까? 제가 원고 설교를 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제가 유식하고 지식을 뽐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보고 설교하고 싶어서 입니다. 제가 5년 가까이 원고를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설교하지 않는 이유는 작성하기 싫어서가 아닙니다. 개척하던 초기에도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고 설교하고 싶어서 원고 없이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회피합니까? 그래서는 안됩니다.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합니다.
루터가 멜랑 히톤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당신은 설교해야 합니다. 회중이 당신의 설교를 듣고 자신에게 화가 나든지 설교자인 당신에게 화가 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정직하게 설교자를 직면하고 앞에 앉아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의 쟁변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나 비겁합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회피할 수 없는데, 교회를 떠나지도 못하면서 간신히 와서 고개를 숙이고 참다가 돌아가서는 예배에 참석했다는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관계에 변화가 오겠습니까? 오지 않습니다.
와서 들으십시오. 화가 나면 그 화를 표현하십시오. 설교자를 핍박하든지 아니면 자신에게 화를 내십시오. 쟁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데 왜 나는 이렇게 사는지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아니면 설교자를 죽일 사람으로 생각하든지 듣고 깨달은 자신을 죽일 사람으로 생각하든지 둘 중의 하나에 분명히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백히 말씀하시면 명백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거기서 돌이켜서는 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만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회중에게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쟁변의 패턴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쟁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종 되었던 땅에서 건져내어 속량하여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면 너희는 말하라”.
그 큰사랑은 위대했지만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 우리의 삶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주님이여 우리를 그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주시고, 생명도 없고 죽음과 사망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건져 주셨으니,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 있을 수 없는 삶입니다. 이제까지는 살아왔으나 저는 살아온 삶을 미워합니다. 오 주여 나를 도우셔서”. 이렇게 말하든지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를 어떻게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너희를 건져냈는지 내가 내 사랑을 너희에게 어떻게 보였는지 너희는 기억하라. 내가 너희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할 때 차라리 말하십시오. “누가 건져달라고 했습니까? 나는 구원이 필요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정신과 같지 않습니까?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너희 열조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겼던 신을 택하든지 이 강을 넘어와서 너희들이 택한 아모리 신을 섬기든지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들 중에 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저는 마음을 다해서 우리 주 하나님을 변호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제게 뿐만 아니라 여러분 누구에게도 나쁜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에게 죄가 있다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것밖에는 그분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이 책망 받을 일이 있다면 가치 없는 죄인을 너무나도 분에 넘치게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신 것밖에는 잘못하신 것이 없습니다.
제가 알기에 저와 여러분은 쓰레기와 같은 인간들입니다. 세상에서도 윤리적인 사람들도 아니고 세상 법정에서도 얼마든지 재판 받을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중에서 스스로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해서 주님이 용서하시는데도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잇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용납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을 주님이 용납하셨습니다. 우리도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주님이 용서하시고 이제는 과거를 잊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받으며 함께 살자고 주님이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과 도망칠 수 없었던 사단의 사슬에서 우리를 풀어주셔서 잠시 생명의 은혜로 들어오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비난받으실 일입니까? 만약 우리에게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날이 가면 갈수록 불같이 뜨겁게 사랑하시는 것이 주님이 비난받으실 죄악입니까? 우리는 이런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늘을 두루말이 삼아 써도 다 쓸 수 없는 사랑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역사는 사랑 받은 역사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가치 없는 죄인의 자리에서 건져서 당신의 거룩한 사랑의 빛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문둥이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값지고 사셔서 건져주셨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우리가 거스르고 거역하면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삶을 살 구실을 여러 곳에서 찾아 모으면서 아버지 앞에 살아가려고 하는 그 태도를 하나님이 우리를 옳게 보시겠습니까? 언제까지 그런 삶을 사시겠습니까? 저는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해 거치는 것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의 고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참다운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 피가 우리가 어떻게 구속했는지도 알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가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복음의 빛 가운데로 불러내어 생명을 이 죽은 몸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도 알았습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기대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찬란한 복음의 빛 앞에서 우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 외에 우리 인생에 무슨 대안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모든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복음의 빛 가운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교회, 행복한 삶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죄악과 하나님을 향해 은혜를 받으면서도 그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으며 아버지 앞에서 미적지근한 신앙의 생활을 집어치우지 않으려는 끊임없이 질질 끄는 생활이 죄가 들어오는 길을 열어주고 있으니 사단의 권세가 들어오는 교두보를 만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잠시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님을 바라보는 모든 신앙의 태도들이 근거 없고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당신의 사랑을 쟁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 쟁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대답하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3. 가르치는 자를 보내신 하나님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미6:4下)
지난주부터 우리는 미가서 6장을 보고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드려야할 진정한 예물, 참된 예배가 무엇이고 우리의 참된 본분이 무엇인가를 더듬어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설교가 꽤 길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쟁변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해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고 쟁변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베푸신 크신 사랑을 4절에서 두 가지로 말씀하셨다고 여러분들에게 증거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애굽의 종 되었던 집에서 저희를 구속해내신 것이고, 또 하나는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저희 가운데 보내어 앞서 행하게 하신 것이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뒷부분은 안하고 앞부분에 애굽의 종 되었던 집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신 것처럼 주님의 선하신 은혜는 우리를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져내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은 너희를 향하여 할만큼 하셨다는 말씀을 크게 종 되었던 집에서 건져내신 것, 또 하나는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낸 것을 우선 말씀하시고 5절에서 또 다른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주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신 것은 여러분들에게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들이 깊이 기도하고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의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어가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잊지 않으시고 애굽의 노역가운데서 고통하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과 고통을 들으시면서 그것을 기도로 생각하시고 구원의 계획을 여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꼭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오랫동안 부르짖다가 구원받은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로 다가옵니다. 예기치 않을 때에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셔서 우리들을 구원해주시는 은혜를 만나기 위해 교회당에 왔다가 구원받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교회당에 가면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 선물 하나라도 얻어 가질까하는 생각에 가난한 사람이 왔다가 선물보다도 더 귀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그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또 공경해야할 분이시라는 것이 인정이 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쟁변하시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 탄핵받고 있는 장면을 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면 점점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사랑을 크게 드러내면 드러낼 수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할지라도 그 사랑이 드러나면 드러날 수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그 사랑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지 못했는지 하나님이 깨닫게 하십니다.
이곳에서도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백성들을 구원해낸 이 사실을 상기시켜서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기적,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구원해내기에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치 없는 백성인가를 보여줍니다. 구원에서 나타나신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불신실 했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이제 그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낸 것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끄럽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 내가 너희들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말해보라. 내가 너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건져낸 자가 누구냐? 그곳에서 비참하게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을 때,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을 때 가서 너희들을 기적에서 건져낸 자가 누구냐? 바로 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냐?”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 주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그 사람들을 너희에게 보내어서”. 히브리 성경 본문에 보면 “내가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너희 면전에 보내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몰래 보낸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너희 앞에 가도록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너희들에게 보내주었는데 너희는 나를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이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논리대로 본다면,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향해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자비하심은 단지 그들을 노예가운데서 건져주신 것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준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큰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이 이스라엘 가운데 있으면서 기적도 행했지만 그 기적인 사실 그들이 행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실 때에는 정말로 사람들에게는 모세가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모세가 누구이관대 애굽의 하수를 전부 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애굽의 하수를 피로 만들었습니다. 강이 모두 피가 되어 흐르고 국그릇에 담겨있는 물까지도 핏빛으로 변한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한강이 모두 피로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습이 끔찍해서 뛰어와 냉장고를 열고 물을 먹으려고 하니 병에 들은 물이 피로 변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수기의 물을 마시려고 하니 피가 나오는 것입니다. 수도를 트니 피가 나오고 화장실에 가서 변을 보고 물을 내리니 시뻘겋게 피가 나옵니다. 이제는 어쩔 줄을 몰라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트니 피가 나오는 것입니다. 한번 애굽 백성이 받은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모세가 행했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런 크고 놀라운 일이 반복이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갖게 되고 애굽의 온 천하에서 참된 신 이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얼마나 큰 일입니까? 그런 일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오셔서 쟁변하시는 것입니다. “보아라. 천하에 어느 신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이런 놀라운 일을 했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누구냐?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건져내었느냐? 말해보라.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과 맞먹을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쟁변하는 가운데 크게 책망을 받고 있는 장면이 무엇인가 하면, 애굽에서 구원과 동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은 누구였습니까? 이 사람들은 선지자였습니다. 물론 아론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처음 부름 받았을 때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특별히 대언자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기능 이후에 태어나는 기능적인 제사장하고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미리암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여선지자였습니다.
결국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내가 너희를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건져낸 다음에 마른땅과 광야에 너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 두었는 줄 아느냐? 아니다. 나는 내 종들을 너희에게 보내고, 내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다. 그래서 그들을 너희의 뒤로 보낸 것도 아니고, 옆으로 보낸 것도 아니고, 너희 모두가 그들을 보고 그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너희의 면전에 너희의 사람들을 너희에게 보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낸 다음에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 진 큰 빚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적을 보고 애굽의 종 되었던 430년의 세월에서 건짐 받았습니다. 말이 430년이지 생각해 보십시오. 36년 동안 일제치하에 살고도 축구만 하면 흥분되어 우리 나라를 응원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목사인 저도 회개를 해야 합니다. 북한에게 지는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일본에게 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겨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텔레비전만 보면 발동합니다. 정말로 36년을 살고도 그런데 430년이면 스무 살에 아이를 낳고 번영을 한다고 가정할 때, 22대 입니다. 그때에 오면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질 정도의 긴 기간입니다. 그렇게 숙명적으로 종살이를 했는데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독립의 여망이라든지 구원의 여망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가 약소국이 아니라 애굽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애굽의 권세는 오늘날의 미국과 영국과 러시아를 합한 것보다 강합니다. 그런 큰 권세를 가진 왕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나라가 자신들을 밟고 있는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건져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없는 감격입니다. 이것을 가지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흔히 하나님께 빚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또 하나의 빚을 이야기하시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 같은 사람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 구속하시고, 그 피로 여러분들을 적셔서 새사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못사는 것에 대해서 원통하고 마음 아플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또 하나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를 거져 구원한 다음에 버려 둔 것이 아니라 나의 종들을 너희에게 보내서 너희를 가르치게 하였다.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들을 보내어 어떻게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하는 지를 내가 너희에게 보내어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고 계시는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한 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모세, 아론, 미리암, 이 세 사람 중에서 문제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어떠했습니까? 주님이 지금 자부심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아론을 보내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하시는데, 아론은 무엇을 한 사람이었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뛰놀도록 만든, 씻을 수 없는 범죄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미리암은 어떤 여자였습니까? 이 사람은 옛날에는 비록 모세의 생명을 물 속에서 건져서 살게 한 생명의 은인의 역할도 했지만, 결국 나중에는 모세를 비방하고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하나님이 모세와 말씀하시더냐? 우리에게는 말씀하시지 않더냐’하고 말하면서 아론과 함께 모세를 반대하는 일들을 일으켜서 하나님께 크게 책망을 받고 심지어는 문둥병까지 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도대체 이 세 사람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렇게 자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성질이 아주 나빠서 하나님의 주신 영광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두드려서 자신의 혈기를 드러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자부심을 가져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론은 어떻고 미리암은 또한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자부심을 가질만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도 오늘 하나님이 그 종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낸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쟁변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이 올바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자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이 본분을 상당히 충격 속에서 대했습니다. 정말로 동일한 무게로 다가오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이라고 하는 성질이 못되고 판단력이 없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적인 약점을 주목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들을 보내신 것을 가지고 당신의 의로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쟁변하시는 이유는 이들이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인격적으로 고매하거나 아주 높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보이시고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셔서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을 지키고 어떻게 행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자랑하고 있는 것은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 자체를 자랑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일들을 자랑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생각해 보라.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너희들에게 일평생 이 광야 길을 걸어오면서 내가 너희들을 버려 두지 아니하고 내 종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통해서 너희들이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어떻게 빛으로 나와야 되고, 나를 어떻게 믿어야 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내가 너희에게 남김없이 보여주지 아니하였느냐? 심지어는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이 부족하였지만 부족한 그들을 사용해서라도 너희들을 향해서 내 마음과 내 뜻을 보여주는 내 일에 대해서는 실패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이것을 자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왔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5절에서 싯딤과 길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바락과 발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제가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서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확신하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죄악 가운데 있었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해놓은 다음에 한사람도 고아와 같이 버려주지 아니하시고 순간 순간 누구를 여러분들에게 보내어 여러분들에게 올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올 수 있는 길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어느 기간동안 주님 없이 홀로 지낸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주님이 여러분 곁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세미한 손길로 여러분들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도망갔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죄로 말미암아 겪어야 했던 외로움이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뻔한 이야기, 당연히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서 이 미가 선지자의 책망을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쟁변하고 있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광야에서 불순종해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 부패한 경향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악된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고 살아가고 있는 그 완악한 백성들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을 지금 지적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내 앞에 살아온 삶, 사랑으로 인도하고 돌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내 종들을 통해 보여주는 내 마음과 내 뜻과 내가 가지고 있는 너희들을 향한 계명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오래 전(미가 선지자로 말하자면 약 700년 전)에 너희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통해서 인도하려 했지만 끝까지 거절하고 광야에서 죽어갔던 너희 조상들이 하는 짓을 너희가 그대로 반복하고 있지 않느냐?” 주님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주님은 왜 이런 식으로 하셨습니까? 내가 주님을 왜 떠났는지 아세요? 거기에는 주님은 모르시겠지만 주님도 제가 한번 되어보세요. 이러면서 말로 되지 않는 푸념을 늘어놓는 자들의 입을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논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정말로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는가를 오늘도 설교하러 오기 전에 잠깐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우리에게 어둠 속에서 판단도 할 수 없고 참된 길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우리 인생들에게 깨닫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완악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죄인의 마음이 온유해지고 부드러워져 어린아이와 같이 변화되는 것도 결국은 성령이 하시지만 성령도 홀로 그렇지 하지 않으십니다. 무언인가 깨닫게 하실 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백성의 유순한 마음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솔직해 말해서 이런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진정한 마음의 변화 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것을 안겨주시고 축복해주셔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자꾸만 사람들에게 감사하라고 말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 그 사랑에 충만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아내는 것은 동냥을 받아내는 것과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가를 깨닫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길에서 헤매던 사람들을 빛으로 들어오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참 길이 어디인지를 몰라 어둠 속에서 방황할 때 참된 길을 보여주신 것도 주님이셨습니다. 참 길을 알아도 그 참된 길을 따라서 걸어갈 힘이 없을 때에 그런 힘을 공급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떻게 그 공급해주시는 힘이 하나님의 손에 있던 것이 어떻게 우리의 품으로까지 돌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셔서 우리의 힘이 될 수 있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이 전해주는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해오시고 지켜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궁극적으로 이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다가가게 하는 그림자를 지니고 있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은 허물이 많고 흠이 많고 성격도 못된 과오가 많은 모세와 같이 불완전한 사람, 아론과 같이 허물이 많은 인생, 미리암과 같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을 인해서도 주님께 비난을 받는데 우리에게는 모세보다도 더 나은 교사가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율법을 전해주었지만 우리에게는 이 율법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아론은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했지만 우리에게는 아론보다도 더 완전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는 날마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 희생제물을 바쳐 제사를 드려야 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자기를 버리심으로 제물로 바쳐서 우리를 위해서 아론보다 뛰어난 중보자가 되어주셨고, 그리고 아론이 따라올 수 없는 초월적인 대제사장이 되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때로는 아론의 많은 허물과 죄악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부어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빛을 가릴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드려 단번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셔서 오늘도 우리들이 그 수많은 죄악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 주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은혜의 길을 열어 놓으신 완전하신 대제자상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과 우리의 인생을 놀라운 능력으로 인도해오신 기적은 미리암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받은 교훈이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한 것이었다면 오늘 우리가 이들이 예표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받는 교훈은 얼굴을 마주 대하며 보는 것과 같은 생생한 교훈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았지만, 우리는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법을 통해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의 자비와 하나님의 용서를 봅니다. 이 시간도 죄악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건져서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채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형상을 보면서 우리는 그 사랑을 봅니다.
여러분 이렇게 허물 많은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의 교훈을 좇지 아니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책망과 하나님 앞에서 탄핵을 받고 있다면, 보다 완전하신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비할 데 없이 탁월한 교훈을 우리에게 모두 알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도무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살았던 우리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얼마나 더 많이 탄핵하시겠습니까? 확신하건대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보다 패역함이 더 크고 그들의 불순종보다 우리의 불순종은 더 큽니다. 주님의 사랑을 하찮게 여기는 오만과 교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능가하고 있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흔히 여러 민족을 향하여 예로 드셨던 것처럼, 여러 거민을 향하여 예로 삼으셨던 것처럼 만약 이 선지자에게 완악하고 강퍅하고 하나님을 버린 죄인들이라고 쟁변하시는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받는 것 같은 그런 교훈 그런 중보의 사랑, 그런 가르침의 은혜를 받았더라면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순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을 지로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진 빚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러워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큰 기적과 은혜를 맛보았던 모든 제사상장과 선지자들과 왕들이 그리워하고 꿈꾸던 시대를 살고 있는 백성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시대의 이러한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그보다는 낫다고 말씀하신 것은 천당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신 이 성령의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한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가슴깊이 아로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는 반드시 우리에게 책임을 몰고 옵니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에게 사명을 가지고 오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여러분들 죄 가운데 건져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여러분들을 열렬히 사람 만드시기 위해 가르쳐오셨는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왕이신 그분이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만 돌아올 수 있고 주님의 자녀다운 친 백성이 될 수만 있다면 주님은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눈물로 여러분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깨닫지 못할 때에는 반복해서 가르치고 반복해서 가르치셔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 지를 경험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깨닫게 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일년 아니 예수 믿은 이후로 일평생 지속되어 온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미끄러진 때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은혜는 그치지를 않고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 때문에 우리의 많은 허물과 그리고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우리가 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금년 한해 동안도 계속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런 수많은 곡식과 열매는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위해 베풀어 주셨고, 우리의 인생을 향해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그 자비하신 사랑과 죄인을 거절하시지 아니하시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보내어서 우리를 당신 앞에 바르게 살게 하시려고 열망하셨던 주님의 사랑에 그 열매는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해야할 열매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고 있는 장면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만약에 모세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아론이나 미리암의 교훈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이런 부끄러움을 당했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후일 거기에 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 앞에서 칭찬의 제목이 되지만 깨닫고도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지 않으면 오늘 우리들이 깨닫고 감격하는 것이 후일 주님이 우리를 책망하시는 중요한 제목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 일년 동안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의 사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 만드셔서, 그 손의 손잡고 이끌어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광야에서 죽게 하심이 아니라 그 결핍과 고통의 광야에서 주님을 인하여 어떻게 만족하는지를 배우고 잠시 지나갈 광야의 길에 소망을 두는 대신 주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유업, 가나안 땅에 소망을 두게 하시려고 그들을 부르신 것처럼 또한 우리를 하나님이 소망 가운데로 인도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보고 광야에서 유리 방황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원망과 우상 숭배로 갚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에서 유리 방황하는 일이 있음은 어인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목자인 저는 죄 많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그런 모습은 제 마음에 깊은 아픔이 됩니다.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계시고 저와는 비교될 수도 없는 탁월한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건져내시고 지금도 이끌고 계신 그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나와서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기쁨이 되었을 때에는 두고 온 애굽에 대한 그리움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만나를 먹고 기적의 메추라기를 먹으면서도 그들이 두고 온 애굽 땅을 그리워한 것은 그들 속에 불길같이 일어나고 있는 죄악된 세상에 대한 사랑과 욕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은 단지 애굽에 고깃국이나 정력에 좋은 마늘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렇게 애굽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에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곳에서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나님께 참견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눈물 젖은 음성에 귀기울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면의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그런 삶을 살고 싶어하십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러분 정말로 그분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십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의 인도와 사랑이 있기에 여러분들을 책망하시고 여러분들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구원의 은혜를 헛되이 알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통해서 보여준 여러분의 인생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이 느껴지고 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 없이 사는 세계가 그립습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귀영화가 있고 하나님의 영화가 없는 애굽 땅보다는 고난의 가시밭길이라도 주님이 계신 그곳에 살고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패역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형식으로 내용을 대신하려 하고 마음은 감추어 두고 자신의 예물로 주님의 입을 뇌물처럼 막으려고 했던 교만하고 헛된 신앙의 이 모든 잘못된 행동들을 우리들이 답습하고 있다면 분명히 지옥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일어나서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 온전하신 스승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그들이 맛보지 못했던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복음을 통해서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인간의 불순종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를 보십시오. 제가 교재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전에 구멍가게에 가면 볼펜으로 써서 때에 쩔은 조그마한 장부책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죽 걸려있습니다. 무슨 회사 어떤 직원들이 밥을 먹고 외상을 하고 갑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매입하셨습니다. 사단의 권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치르시고 여러분들을 사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을 사서 그 장부에 흑자가 났겠습니까, 적자가 났겠습니까? 적자가 났다고 대답했습니다.
언제 흑자로 바뀝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베푸신 그 사랑에는 정말로 우리를 계산으로 대하지 않으심이 확실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뛰어 넘어서 당신의 피로 건져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무엇하며 하나님께 살아야겠습니까? 어떤 큰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너무 큰 꿈을 꾸지 마십시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죄 가운데 구하시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과 뜻을 끊임없이 알리시고 보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좇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 계명에 순종하는 삶으로 돌이켜야하지 않겠습니까? 아직까지도 이유를 댈 것이 남아 있습니까? 얼마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죄 가운데 우리의 남은 선한 것들이 마지막까지 모두 없어지고,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해져야지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께 손들고 순종하겠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애의 보람은 목자이신 그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날은 언제나 오는 것입니까?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배역하는 마음을 환경 속에서 적당한 구실을 찾아내서 합리와 시키면서 살아가는 이런 식의 신앙에 길을 찾아가려고 하는 한 우리의 인생에는 햇살이 깃들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이시고 당신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는 넘어지게 하셔서 당신의 엄위를 보이시는 법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얼마나 신실하게 대했는지, 내가 의로운지 생각해 보라”고 쟁변하시면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었던 과거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탁월한 종들도 아니고 아주 뛰어난 종들도 아닌 결점 투성이의 사람들을 보낸 것으로서 주님은 백성들을 향한 자신의 의로움을 변증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해주셔서 인도하셔서 깨닫게 하셔서 남들이 믿어지지 않는 십자가의 사랑을 믿어지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셔서 내가 누구이고 주님이 어떻게 나를 통해서 경배를 받으셔야 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냥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순간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셔서 무엇인가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까지도 우리에게 숨김없이 보여주셨습니다. 거절하여도 주님은 그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그치지 않으셨고, 반복되어도 그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언젠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고 마음의 강퍅함과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악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언젠가 여러분의 귀를 즐겁게 하고 여러분들의 마음에 큰 감격과 기쁨이 넘치게 했던 복음의 진리를 들은 여러분들의 신앙의 경력들은 언젠가는 여러분들이 부끄러움의 눈물을 뿌리게 할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아는 사람이 더 아버지 앞에 정결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더 순결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며, 더 그의 마음을 독점적으로 하나님 홀로 독차지하고 싶어하십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리를 깨달은 대로 하나님 앞에 더 뜨겁게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깨달았던 많은 시간들과 은혜 받았던 수많은 날은 오히려 후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뉘우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주는 중요한 정죄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 속에 보면 하나님이 특정한 민족이나 개인을 향하여 심판하고 하실 때마다 심판에 앞서 하시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변호입니다. 자기 변호는 대개 하나님이 그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신 것과 그리고 이런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끔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과 돌이켜 회개하고 당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주신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도록 수많은 길을 열어주신 것을 회고시키신 이후에야 하나님께서 이들을 악하다고 단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마음 아파하십니다. 마음의 굳은살을 제하십시오. 영혼의 묵은 땅을 기경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대로 온전히 순종하며 더 순결한 사랑과 자기를 깨우신 하나님의 더 진실한 사랑으로 주 앞에 살고 싶어하지 아니하는 여러분 속에 있는 뿌리깊은 불순종과 악한 경향들을 하나님 앞에서 제거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싸우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아직도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오늘 이 시간에도 불러주셔서 새롭게 시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제껏 까지 우리의 삶이 갈팡질팡하며 실패도 많았지만 그러나 오늘 이렇게 주 앞에 많은 열매들 드린 것을 계기로 하여 이제 정말로 오늘 이 선지자가 말하는 것과 같이 마음의 열매, 영혼의 열매, 중심에 있는 사랑의 열매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도록 주님 앞에 새롭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밭에는 곡식들이 거두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영혼의 곡식을 거두기 위해서 밭을 기경하고 모종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정말로 그런 마음의 무딘 것과 내 뜻과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어하는 자기 중심적인 완고한 고집들을 우리가 버릴 때에 하나님의 더 큰사랑이 물밀 듯이 우리의 인격과 영혼을 에워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스스로 걸어갈 때 너무나 곤비하고 고달퍼하던 우리의 인생이 무엇인가 우리를 향해서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큰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비결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금년 남은 이 기간 동안에 이런 사랑을 배워서 주 앞에 더 큰 열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됩시다.
4. 싯딤에서 길갈까지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라(미6:5)
우리는 몇 주에 걸쳐서 미가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과 지지난 시간에는 쟁변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의로움을 변호하시는 가운데 애굽의 종 되었던 속박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신 것과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을 보여주신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소하시는 장면을 우리들이 읽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그 이야기의 연장이 됩니다. 그런데 농도는 훨씬 짙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곳에서는 광야 생활에서 있었던 일과 감격 가운데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기까지의 일과 거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일 먼저, 발락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발락과 브올의 아들 바람을 여러분들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압왕 발락에게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추억”이라고 나오지 않고 “기억”이라고 나옵니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뒤편에 히브리말로 “나”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나”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호산나”할 때 뒤에 붙는 “나”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말하자면 “Please”, 즉 “제발”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는 번역이 빠졌지만 제대로 번역하자면 모압왕 발락이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행한 것과 그가 대답했던 바를 너희는 제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의 평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압의 평지에까지 이르고 모압을 지나 요단을 건너 중부지방을 뚫고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모압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모압왕 발락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왜 새파랗게 질렸는가 하면 모압땅에 들어오기 전에 아모리 족속의 왕 가운데 시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슬려서 아모리 지경이 쑥밭이 되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사적인 제의를 했습니다. 아모리 왕의 영토를 통과해야 하는데 사신을 보내어 아모리왕 시온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를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이곳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가려고 합니다. 왕의 땅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데 통과만 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민가도 해치지 않고 무엇을 먹더라도 비용을 내고 먹을 테니 큰길만 지나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이렇게 정중하게 제의를 했는데 일언지하에 묵살을 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전쟁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한가지 교훈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약함과 강함을 적절하게 구사하며 살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해야 할 때 아부하느라 정신이 없고, 겸손해져야 할 때는 괜히 싸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정중할 때는 정중하고 단호할 때는 예수 믿는 사람의 단호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물에 물 타고 술에 술탄 것처럼 흐리멍덩한 채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예배당에 와서도 게슴츠레 합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 같기도 하고 믿지 않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들어가 정중히 제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때 단호히 전쟁을 선택했습니다. 아모리 지경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모압은 아모리의 밑에 있는 족속입니다. 수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족속입니다. 종주국이 쑥밭이 되었으니 모압의 평지에 와서 진을 치고만 있는데도, 입술이 퍼래지고 오금이 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락이라는 사람은 이름도 희한하지만 별난 사람입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면 자기 생각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고 아무리 전략적으로 계산해보아도, 소문으로 듣던 애굽을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고 나와서는 지나는 곳마다 무성한 소문을 뿌리고 온 민족인데 코앞에서 아모리 족속이 쑥밭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딴에는 재주를 발휘해서 발람이라는 신통한 선지자를 찾아가서 그에게 뇌물을 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 백성들을 저주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등을 돌리면 이스라엘 백성은 혼자될 것이고 그렇다면 해볼만하다는 멍청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발람을 찾아갔는데,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발락은 뇌물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저주해주면 뇌물을 주겠다고 하자, 선지자는 자신이 누구관대 여호와의 백성을 저주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더 많은 뇌물을 싫어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움직여서 하나님 앞에 물어 보아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자 하나님은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물을 수 있는 자격이 없기에 그런 행동 자체가 하나님 앞에 모욕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기도하려고 할 때 성경이 금하고 잇는 것은 기도하는 자체가 하나님 앞에 신성 모독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때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예화) 탈세를 할까 말까를 묻는다든지, 살인을 할까 말까를 묻습니다. 이번 주일에 교회당에 예배하러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순종하기를 원한다며 기도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려한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도하기 전에 성경이 이와 같은 상황이 있을 때 명백히 나에게 말하는 바가 있는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찾아보아 있다면 기도할 필요도 없고,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도 가끔 보면 말해도 말을 듣지 않으면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제는 상종도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발람은 그것이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를 타고 가는데 나귀가 가다가 멈추어 섰습니다. 발람이 채찍질을 하자 이제는 벽에다 몸을 문지르니 발람의 발이 상합니다. 발람은 나귀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다시 채찍질을 합니다. 그러니까 나귀가 입을 열더니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발람을 태우고 다녔는데 이렇게 한 적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선지자로서 그것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열어 보여주시자 여호와의 사자가 바로 앞에 칼을 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나귀는 보았는데 미련한 선지자는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욕망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욕망이 그리스도인 속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다음에는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안목이 흐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면 영안이 흐려집니다. 그렇기에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우리가 간직해야 할 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 길에 있어 실패했습니다. 응답과 뇌물을 받아 가지고 좋아하며 떠났지만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는커녕 오히려 축복하고 맙니다. 바로 이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서 마지막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까지 대적에 휩싸여 삶을 살지 않았느냐? 어디로 가든지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괴롭히려는 원수와 악한 무리가 있었지만 너희는 너희가 모압왕 발락이 발람에게 행한 일과 그가 대답한 것을 제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너희를 수많은 대적이 쓰러뜨리려고 애를 썼고 몸부림을 쳤지만 너희들을 끝까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등불의 사위게 하지 않는 것처럼 너희 작은 민족을 보호해준 이가 누구인가 생각해 보라.” 그러면서 이곳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지난 주를 회상해 보십시오. 그 주제는 구속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가르치는 자를 보내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교훈과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호해주셨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기가 막힌 지혜로 이스라엘을 박멸하려고 악한 일을 도모하고 이스라엘을 그것을 모르고 있을 때에 그 때에 모든 것을 막아 이스라엘을 보호해준 분이 누구인가를 생각보라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너희를 보호하기 위해서 잠자리에 든 적이 있느냐? 내가 너희를 보호하기 위해서 졸은 적이 있느냐?”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눈동자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신 과거에 대해서 하나님이 호소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어찌 이스라엘 백성들만 받았겠습니까? 여러분 그것을 아십니까? 우리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즉시 우리는 표적이 됩니다. 악한 사단이 우리를 향해서 유혹의 화살을 겨눕니다. 우리를 쓰러트려서 단번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자리에서 떨어져서 불신앙에서 나뒹구는 실패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노려보고 겨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매시간 매분 초마다 보호하시기에 여러분들이 살아서 거미줄 같은 믿음이라도 붙들고 주님을 찬송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보호해주시지 않으시면 사탄의 밥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들도 모르고 자기가 잘났다고 자기 멋에 살아갔는지 모릅니다. 교만하여 하나님 앞에 쉽게 무릎꿇지 않고 패역한 고집대로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들을 우리는 성경 속에서 수없이 보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회상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가 죄에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된다는 사실을 강조할 때 히브리서 12장에서 히브리서의 기자는 우리에게 죄인들을 위해 이토록 오래 참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인내로 우리를 촉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호해주신 것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산 것이 전혀 아닙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시련을 만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양심의 송사와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불순종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생명의 불을 완전히 끄지 아니하시기에 이만큼 살아서 주님 앞에 회복하고 다시 살며, 실수하지만 다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그러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만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받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옳은가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보호하시기 위해서 밤이나 낮이나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잘못된 길로 걸어가서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위기가 있을 때에도 마음졸이시면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하신 것도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이런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입게 해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무엇을 원망할 수 있으며 어떤 불의한 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셨다고 주님을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이 보호해신 것에 대한 감사가 우리에게 넘쳐야 합니다. 그런 감사가 사라진 곳에서는 온갖 죄악과 탐욕들이 싹트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의로우신 분이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보호해서 그분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나안에까지 인도해서 심었는데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 선택된바 본분이 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공경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셨으면 이 말도 되지 않는 상식 밖의 사람들과 더불어 쟁변하자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쟁변하자. 한번 우리 이야기 해보자. 우리 한번 같이 토론을 해보자. 누가 옳은지 너희들이 그렇게 나 없이 살아가려고 애쓰고 패역과 끊임없는 불순종과 고집 속에서 나를 떠나 살려고 하는 그것이 정말로 이치에 합당한 것인지 한번 논쟁해 보자. 그래서라도 내가 너희를 설복 시킬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겠다. 한번 이야기 해보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순종이 깊어지고 죄악된 길로 걸어가면 지식에 혼란이 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데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생각이 납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과 죄의 길로 걸어 들어가면 돌이키기가 힘든 것입니다.
보십시오. 조금만 생각하면 압니다. 주님이 그러한 보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서 수많은 이 백성들을 해하려는 대적으로부터 구해주셨습니다. 바로로부터 시작해서 광야를 지났다고 했는데 광야는 서부시대에 나오는 황량한 광야가 아닙니다. 모두 자신들의 구역이 있는 곳입니다. 남의 나라 땅을 지나면서 광야를 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딪치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 이외의 문헌에 보면 히브리 민족을 지칭하는 “합비루”민족의 대이동이 나타납니다. 거지같은 수백만 명의 민족이 지나가는데 얼마나 번잡케 하고 대적의 표적이 되겠습니까?
그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졸지도 않고 주무시도 아니하시는 반석이요, 요새요,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나서 여기까지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셔서 오늘까지 온 것입니다.
여러분 한해가 저물어 가는 이 지점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뒤를 돌아다보십시오. 광야 길 열 한 달을 걸어왔습니다. 하나님이 그 열 한 달의 광야 아니면 일생 예수 믿고 나서 이제껏 까지 걸어온 길을 회상해보십시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통곡의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주셨습니다. 죄가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죄 때문에 영혼이 영원히 멸망하지는 않도록 하나님이 적적히 우리를 보호하시고, 훈련시키셔도 그 훈련 때문에 우리가 완전히 엎어져서 생명을 잃지는 않을 정도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면서 시시때때로 보호하시고 생각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키시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아침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이제껏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로 살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분 저만 그렇겠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대하소설을 써도 다 못 쓸 정도의 사연을 간직하고 주님의 사랑의 손과 보호의 장중에 붙들려서 다른 곳에 있지 아니하고 오늘 여기에 있게 하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보호에 찬송하고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을 더 잘 섬기고 경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한 다음에 오늘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은 하나님께 경배할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보호를 입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에게 가능한 삶이 무엇이냐?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보호, 어두운 골짜기에서 빛으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공격하는 수많은 정죄와 죄악의 화살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셨으니 이제는 우리에게 무한한 삶의 가능성이 펼쳐진 것이 아닙니다. 가능한 삶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의롭게 살고 연약한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삶 사는 것 이외에 또 다른 가능성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보호의 은혜를 알 때 이미 닫힌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그런 보호와 사랑 속에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고통이요 아픔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의로움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또다시 낯설지 않은 지명을 이야기하십니다. “싯딤에서부터 길갈에 이르기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여기에는 의미가 담겨있을 것입니다.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라”
자 보십시오. 싯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이 싯딤이라는 것은 아카시아 나무라는 뜻입니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과 간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지방에 우상을 섬기는 제의가 있습니다. 우상을 섬길 때에는 그 제사 속에 대부분 성적인 결합을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왜 있는가 하면, 그들에게 있어서의 신은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농경사회에서의 최고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풍년입니다. 풍년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풍년과 가장 관계 있는 것이 비입니다. 그리고 그 비와 가장 관계가 깊은 것은 비를 주관하는 신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 우상 앞에서 예배 중에 성적인 결합을 하면 그 우상의 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가 기분이 좋아 비를 잘 내려준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간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얼마나 마음 아프게 한 사건인지 모릅니다. 그 일이 있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염병을 내리셨습니다. 병이 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내버려두었으면 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비느하스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분노를 폭발합니다. 그런데 그 분노가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달려가서 남녀를 꿰뚫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염병이 그쳤습니다. 겨우 이만 사천 명이 죽고 그 죄는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싯딤을 말하는 것은 앞에서는 하나님이 보호이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백성이 도륙을 당해도 하나님 앞에 하등의 항거할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죽는다고 율법도 주시고 수많은 가르치는 자들을 통해 알려주셨는데 그런데도 범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두를 도륙하시고 심판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정도로 진노의 불을 끄시고 그 큰 죄를 없는 것처럼 덮으시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교제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즐거움을 회복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의 사랑입니다. 그런 용서하시는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경험한 것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염병이 돌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길같이 일어났을 때에 그 불길을 끈 것은 무엇이냐? 비느하스가 그 불을 끈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용서하는 사랑의 마음이 그 진노의 불을 끄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이야기 하십니다.
여러분 아마도 남김없이 여러분의 대하소설을 다 썼다면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용서라는 양식을 먹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에 그 매듭을 푸신 분이 누구입니까?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막히게 됩니다. 그 매듭을 풀어서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 이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께 나오지 않고 경배하지 않으면 우리가 잘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렇게 죄 가운데 하나님과 결정적으로 막혀서 허덕이며 도저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에 그 죄의 매듭을 용서라는 손끝으로 푸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부어주셔서 오늘날 전과가 수없이 많은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 하나님의 용서에 빚지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약 있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괜히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용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이전에 산 것도 하나님의 용서 때문에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찾았습니다. 마음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범죄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마음을 잃어버린 적은 없습니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계명을 외어보면 그 누구도 순종하며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때 크고 작은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그때에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부르짖은 사람은 우리이지만 그러나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깊은 수렁에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를 건져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에서의 모든 역사가 용서의 역사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큰 사이클이 네 가지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축복해주시면 타락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벌하십니다. 그러면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축복해주십니다. 그러면 또 타락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과 용서해주시는 인애를 입어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믿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깊은 죄와 허물 가운데서 용서해주실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다. 물론 때때로 주님은 우리가 잘 되라고 때리실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범죄했을 때에 쓸어버리지 않으시고 자신의 진노를 푸시고 다시 그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베푸셨던 것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베푸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들을 용서해주지 않은 적이 있느냐?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그렇기에 범죄한 횟수보다 용서한 횟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무한한 삶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할 수 없는 죄인을 홀로 구속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사는 것 밖에 우리 인생의 대안이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비결을 배우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길갈입니다. 이 길갈은 무슨 뜻인가 하면 “낄”, 낄은 똥입니다. 그러니까 똥을 굴려버렸다는 뜻입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여러 풍파를 겪은 다음에 요단을 건넙니다. 요단을 건널 때에 하나님이 다시 한번 놀라운 역사를 베푸십니다.
애굽을 떠날 때 홍해가 갈라지는데 이번에는 요단이 갈라집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하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은 스케일이 있고 요단이라야 좁은 데는 불과 오륙 미터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개울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갈라지는 것이 얼마나 장난 같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그 의미는 장난 같지 않습니다. 홍해는 마른땅이 나타난 것을 보고 건넜습니다. 기적이 믿음을 창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법계를 메고 믿음으로 들어갔더니 밟는 곳마다 물이 비껴서면서 요단이 물이 마릅니다. 앞에서는 기적이 믿음을 불러왔는데 이번에는 믿음이 기적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로 얼마나 성숙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홍해를 가를지 않으셔도 오랫동안 신앙의 훈련이 되면서 이제는 우리가 여기에 발을 들여놓아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요단을 마르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신비한 경험이나 기적을 찾아 쫓아다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렸을 때는 만화책도 보고 동화도 보지만 크면 제대로 된 책을 보며 세상을 배웁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는 기적을 통해서 믿음을 봅니다. 그러나 신앙이 점점 자라면 믿음을 기적을 창조해내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 이스라엘 백성들의 놀라운 변화사이에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자라 가는 신앙의 견고함들이 싸이면서 이런 성숙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요단을 말리는 일을 행했을 때 이 소문이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 요단강 건너편 가나안 땅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발을 요단에 들여놓자 물이 마르면서 신에 물을 뭍이지 않고 건넜다 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니 사람들의 간담이 서늘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듣고 믿음이 생긴 라합과 같은 이방인도 생기는 것입니다.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때에 제일 먼저 올라가서 자리를 차지했는데 감히 맞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곳에 처음 섰을 때 유월절을 지킬 때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새로운 땅에 들어가자마자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을 구원이 되는 예표가 되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다. 이제 그 땅이 자신들이 살아야할 땅이 아닙니까? 그 땅에 들어가 첫 유월절을 지키면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을 때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믿음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난 세대들은 다 죽었습니다. 애굽의 화려한 문명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죽고 이들은 신세들이었기에 가나안을 보았을 때 그 문명은 호화찬란한 문명이었습니다. 그곳은 인류문명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힛타이트 족속이 철기를 처음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나안에 사는 헷족속입니다. 그러한 문명이 가득 찬 곳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자기 땅에 왔으니 이제는 유리하는 백성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드렸던 고백이 우리는 원래 유리하는 아람족속이었다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유리하던 백성.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지만 유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리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드디어 자기 땅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왔을 때에 애굽에서 있을 때와 똑같이 정착지인데 애굽에서 정착해있을 때와 이제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하려는 때를 비교해 보십시오. 애굽에 있을 때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천한 노역에 종사하던 인생이었는데 가나안에 들어오니 애굽 못지 않게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 이 사회, 이 곳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장대한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거인과 같은 사람들이 자기네들이 들어와 진을 치는 것을 보고 덜덜 떨고 마음이 물같이 녹을 정도의 상당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무전여행을 한다고 삼일길만 다녀도 인간이 꼴 같지 않은데 무전여행이 삼일이 아니라 사십 년입니다. 그러니 그런 인생이 삼 백 만 정도 모였으니 떼거지와 같지 않겠습니까? 화려한 기나 마차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왕도 없었습니다. 정말 볼품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떼거지와 같은 자들이 무엇이관데 이 땅에서 기라성 같은 민족들이 두려워 덜덜 떨 정도의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이스라엘 과거가 생각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비참하게 살던 존재들이었는데 여기에 오셨구나? 이제는 생각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수치를 굴려 버리셨다. 이스라엘, 히브리하면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 천한 노역에 종사하는 놈들, 나라 없는 사람들, 떼거지들이라는 소리만 듣다가 이제 자기 땅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제 비로소 우리의 모든 수치를 굴려 버리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를 길갈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됐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없는 민족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변화를 통해 놀라운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갈길리가 그렇게 유명해졌습니까? 갈릴리는 아주 시골입니다. 오죽했으면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는 법이 없다고 했겠습니까? 선지자가 나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나사렛이 있는 갈리리는 시골 동네였습니다. 왜 그리 유명해졌습니다. 주님이 그곳에 사셨기 때문에 갈릴리가 훌륭한 동네가 된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태어나셔서 유명한 동네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말도 되지 않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놀라운 변화의 지위를 주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잘 믿으면 삼류인생이 일류, 이류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지부진하게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똑바로 믿고 삼류를 면하고 사는 사람이 저 아닙니까? 저는 누구에게도 확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매일 술이나 먹고 담배나 피고 말도 안되는 글을 써서 사람들 혼란시키고 있을 사람입니다. 갈길 잃을 사람을 시궁에나 넣어줄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사람입니다. 그것도 잘 되었을 경우에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불러주셔서 말씀을 전하게 해주시고 글을 쓰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자다가 생각해도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축복해주시니까 이렇게 변화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못 만났으면 계속해서 팔자타령이나 하고 한탄하면서 답답하면 가끔 점쟁이나 찾아다녔을 사람들을 하나님이 버려 두지 않으시고 어두움에 찬란한 빛을 비춰주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주셨습니다. 인도해주셔서 예수님을 믿고 변화 받고 보니 이제는 내가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맺힌 것들을 오히려 풀어주고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와 사랑을 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먹고 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 무어이겠습니까? 주님을 믿고 하나님을 정말로 잘 믿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나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놀랍게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복 주셔서 우리를 새 사람되게 만드시는지 모릅니다.
가끔가다 집회에 나가면 목사님은 신학하기 전에 무엇을 했냐고 물어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질문입니다. 대부분 이야기하면 깜짝 놀랍니다. 우체국장을 했습니다. 그전에는 떡장수를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교수로 임용될 때 책임자가 인사기록카드를 보더니 김교수님은 이력서란이 연결이 안되네요? 잘됐으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되었을 텐데 잘못했으면 지금도 어느 곳에서 떡을 팔고 있을 텐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제는 하늘의 양식 생명의 떡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한 일입니까?
결국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인가 영광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 때문에 찾아온 영광입니다.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읽었는데 하버드 다니는 학생이 “서울에서 하버드”까지라는 수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글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우리 한국에서는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자식농사를 잘 지었다고 말하는데 자기는 미국에 와서 하버드까지 들어왔는데도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는 인간쓰레기들을 수없이 많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없이 세상에서 높아진 것이 정말로 우리가 축복 받고 잘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없는 것은 모두 바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신 것은 그것이 고난이고 부끄러운 것이라도 모두 값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 중에 무엇인가 귀하고 잘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주님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고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복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라” 그것이 가져다준 축복,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을 믿기 전에 있었던 모든 수치와 부끄러운 과거를 모두 흘려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날에 비참함에 대해 자랑스럽게 간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왔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주셔서 오늘 여기에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잘못하신 것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하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없으리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길갈의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여러분 이만큼 명예를 유지하고 여러분들 인간답게 만들어서 살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인간폐인을 하나님 나라의 쓰레기로 만들지 않으시고 그래도 깎고 다듬어서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기둥으로 쓰고 하다못해 창살이라도 쓰시려고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 아닙니까? 주님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그렇기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희들이 내가 너희에게 의롭게 행한 것을 알게 되리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너희를 향한 나의 의를 알기 위하여 기억하라”. 기억하는 목표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향해 의로우셨는지를 아는 것이 기억의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이 이렇게 특별한 사랑과 보호와 용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로 이제까지 지켜오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제 무궁하게 펼쳐진 우리의 인생의 가능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주님만을 공경하고 주님만을 높이면서 살아가는 것 외에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또 있겠습니까? 다른 것에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보호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을 공경하고 마음껏 주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밖에 우리에게는 다른 인생이 있을 수 없다고 우리 자신을 타이르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 앞에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가 허물을 인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6:6-7)
지난주일 저녁에는 여러분들께 싯딤에서 길갈까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싯딤에서는 하나님의 용서, 길갈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살아온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생살이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크신 은혜 자비를 입고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경하여야할 하나님을 온전히 공경하고 경배하여야할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대신에 불순종과 죄악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선지자는 이 쟁변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쟁변하시면서 자기를 변호하시는 모습을 모두 보여 주었습니다. 애굽의 속박에서 그들을 건져내어 주시고 또 선지자와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그들에게 진리로 가르쳐 주시며, 나아가서는 그들이 끊임없는 불순종과 범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축복해 주셔서 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들려주자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이 선지자가 이스라엘백성들의 가상적인 반응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야기했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하는 사실을 쟁변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마땅히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되는 어떠한 반응을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귀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우리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제목이 아닙니까? 지난 주일에는 우리 형제들이 도와줘서 불렀습니다만 그것 다 외웠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거기에 보면 우리가 부를 때에는 정말 감사하고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며 경배할까에 대해 감정적으로 밀려오는데 성경내용은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께 경배할까’ 이런 반응을 이스라엘 백성이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주시고 또 선지자를 보내어서 깨닫게 하시며 또 싯딤에서 용서해 주시고 길갈에서 축복해 주셔서 여기까지 불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 쟁변하고 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물으면 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번쯤 할 말을 잊어본 사람, 그 사랑과 은혜 때문에 할 말을 잊어본 사람, 그 놀라운 은혜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말할 것을 잊어버려 본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주님의 사랑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가 할 말이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그 사랑! 그 앞에서 할말을 잃고 눈물을 흘려 본 사람, 그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참 사랑의 깊이를 알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쟁변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몇 번 쟁변을 하시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대들 수 있는 그 건더기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고 강포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쟁변하시는 하나님께 논리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 그들을 향해 무엇을 변론하시는지를 듣고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실로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행한 일이라고는 사랑과 은혜의 빚을 진 것밖에는 하나님 앞에 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의 길은 억압과 강요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그 분이 우리를 얼마나 축복하시고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쉼 없이 우리에게 진리를 보내시고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옳은 길을 보여 주셨는지 그 피묻은 사랑의 추적의 역사를 깨달아 알고, 그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것과 함께 진정한 신앙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수시로 신앙의 인격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시골의 어느 부흥사가 부흥회를 하러 갔는데 그 동네에 못된 깡패 하나가 있었답니다. 그 깡패가 와서 매 집회시간마다 훼방을 놓는 것입니다. 그 부흥 목사를 청빙한 그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 청년 때문에 우리 교회는 기도 제목입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면 와서 뒷문을 발로 차며 예배를 드리려면 내 배를 드려라 하고 그렇게 방해를 놓는 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갔는데 잘못 걸렸습니다. 그 부흥사가 왕년에 놀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와보라는 그의 큰 소리에 예배가 끝난 후 그를 데리고 가서 한 손으로 들어 올려 윽박지르며 교회의 진실한 성도가 되라고 했고 그도 참회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결국은 오지 않았습니다.
신앙과 목회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목회가 될 것 같으면 나는 전도사 아닌 폭력배를 쓰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변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신앙생활 하다가 어떤 때는 말도 되지 않는 질문하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교회 다니다가 어느 날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아요. 정말 하나님이 계십니까?“ 이태까지 누구 믿으려고 다녔습니까? 그때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직접 여쭤봐라 나한테 묻지 말고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곧장 직접 가서 여쭤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대답해 주실 것이요 안 계시면 대답이 안 들리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신앙생활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앙 생활 이라는 것은 억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신앙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그런 결론에 도달해야합니다. 그 결론이 흔들리면 믿음도 흔들리고 인생도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설복을 하나님께로 받으니까 아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껏 무슨 생각을 하냐하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가며 기쁘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찬송 부를 때도 얼마나 그 부분에 은혜를 받습니까? 그런데 본문을 묵상하며 깨달은 사실은 그것이 바로. 자조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경배하며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갈까’ 이후에 만약에 뒷부분이 제대로 된 고백이 나왔으면 진짜 이스라엘의 영혼 밑바닥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았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랑을 보여 주셨으니까 이제 그런 사랑을 따라서 살아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푸셔서 열방 가운데 빼어난 민족으로 택하시고 열방 가운데 특별한 백성으로 건지셔서 당신을 위한 고귀한 목적으로 부르시고 이제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여기에 세우시고 왜 우리를 여기에 부르셨는지를 알았으니 그 뜻대로 살아가야 됩니다.
이방의 등불이 되어서 살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그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줘서 거기에 그 민족을 심으셔서 심지 않은 포도나무의 실과를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로 부귀하게 하고 영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타락한 땅,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그 천지에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그 백성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으셔서 거기에 세워 주셨습니다. 그랬으면 이제 어떻게 해야됩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지내야 되었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만 사랑하고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고 공의롭게 살고 그리고 자비를 행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 보여주는 삶을 통해 백성들을 통해서 나타내 보이고 싶어하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내가 뭘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까?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내가 높으신 하나님께 어떻게 경배할까’ 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자비 앞에서 할 말을 잃어 버렸지만 사고 방식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그들이 기껏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할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그럼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갈까? 무엇을 들고 나갈까 어떻게 하나님을 좀 제사할까?’ 이런 사고 방식으로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겉 생활이 아닙니다. 껍질만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껍질만이 아니라 정말 우리 자신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서 주님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종교적인 형식이나 신앙적인 틀, 그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을 공경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마음 중심은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선지자가 이야기해주자 즉시 제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시 제사를 생각하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주님의 사랑을 다 이야기 하니까 기껏 여러분들 속에 드는 생각은 ‘주일을 잘 지켜야 되겠구나. 헌금을 떼먹지 말아야 되겠구나.’ 라는 이런 생각밖에 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비롯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가 되지 않으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당신이 얼마나 올바른지에 대해서 변론하고 변증하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깊이 깨달았지만 진정으로 옳게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지까지도 재물을 생각하고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가 아니라 어떻게 변화된 사람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것이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런 사랑이 너도 있느냐고 주님이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땅에서 너를 속박해 내어서,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날음과 같이 내가 너희를 안아서 모든 위험들과 대적들이 있는 그 광야의 길에서 너희를 보호하고 건져내어서 안전한 이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낸, 나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그 사랑을 너희 도 가지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모세 와 미리암과 아론과 같은 귀한 선지자와 말씀의 종들을 너희에게 보내어서 너희로 하여금 가르치는 자가 없고 깨닫는 진리가 없어서 짐승과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끊임없이 너희에게 진리를 보여주고 감화와 은혜, 그리고 변화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너희에게 준 것은, 너희로 하여금 짐승처럼 사는 대신 내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애 타는 마음으로 너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었는데, 내가 그런 마음으로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너희는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더러운 죄를 짓고 단칼에 쓸어버린 바 되어야할 그 싯딤에서 그 엄청난 더러운 죄악 간음의 죄를 내가 용서하고 너희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 유리하고 방황하던 거렁뱅이와 같은 무리들을 장엄한 군대로 만드셔서 요단을 기적가운데 건너게 만드시고 가나안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떠돌아다니는 무리요 영원한 종들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이름에 붙은 그 더럽고 수치스러운 딱지를 길갈에서 모두 굴려버린 것을 너희들이 기억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나는 너희를 향한 관계를 이렇게 소중히 여겼고 그리고 너희의 이름에 매달린 수치를 내가 이렇게 미워하고 너희를 존귀한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했던 내가 너희의 이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애정과 충성심을 너희는 나를 향해 가지고 있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기껏 하나님 뭘 좀 드릴 까요 뭘 좀 잡수시겠습니까? 일 년 된 수송아지 드시겠습니까? 천천의 수양 만만의 기름이면 속이 풀리시겠습니까?
여러분 목회를 하다보면, 저는 그런 것 별로 싫어하지만, 교인들에게 식사대접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식사 대접하기 전에 그 사람이 잘 믿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예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와서 짜장면 한 그릇을 사줘도 그렇게 기쁘고 먹을 때 소화가 잘 되는데 영 아닌 사람이 어디서 마음이 동해서 생선회를 드시겠냐 불고기를 드시겠냐하면 내 마음속에선 얹힙니다. 나 사주는 것 그만두고 하나님의 말씀 통해서 은혜 받고 새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저는 느낍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심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서 치욕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한 애달픈 마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용서의 마음, 차마 그 관계를 버리시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한 마음, 이스라엘의 이름이 수치로운 이름이 되고 모든 민족들에게 멸시를 받을 때에 아파하시면서 그 이름을 높이시기를 원하며, 그리고 행여나 바르게 가르치지 못해서 그릇된 길 걸어가는 짐승 같은 백성들 될까봐 진리의 종들을 보내셔서 말씀의 일꾼들을 보내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어떻게 주님을 믿고 섬겨야할지를 다 가르쳐 주셨는데 그들은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돌보심을 반역으로 갚았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원한다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개혁이 일어나고 진정한 삶의 변혁이 일어나서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갔던 수치를 자랑으로 알며 살아갔던 삶들을 청산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아가는 마음으로 주 앞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앞에서, ‘일 년 된 송아지를 드시겠습니까 천천의 기름을 드릴까요 만만의 수양을 드릴까요 만만의 기름을 드릴까요’ 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선지서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상은, 예배와 예배자가 일치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정신으로 사는 사람, 제사를 드리는 정신으로 적어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제사를 드리는 정신으로 살지 못했으면 최소한 살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아파하고 고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제사 앞으로 나아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통해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넓은 사랑과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어떤 존재로 바뀌게 되어서 어떻게 나왔는가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지난주와는 어떻게 달라진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는가 그 열매가 주님께 손에 들고 나오는 몇 푼 어치의 고기나 끌고 나오는 한 두 마리의 황소보다 하나님 앞에 훨씬 귀하고 존귀하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은 정말 자존심도 없으신 것처럼 당신의 의로움을 쟁변하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의로우심을 우리 인간들에게 이 수준도 되지 않는 인생들에게 쟁변하셔야 됩니까? 하나님은 원래 의로우신 분이시고 인생의 본분은 그것을 말씀하실 때마다 의롭다고 인정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밖에는 인생에게 다른 본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얼마나 의로우신 분인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득시키셨습니다. 깨닫게 하셨습니다.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할말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입은 있지만 아무 할말이 없는 유구무언의 사람들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주 앞에 나올 때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됩니다. 불평도 많고 사연도 많고 하나님 앞에 원망할 일도 많았지만은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이 나 같은 죄인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자기의 고결하고 순결한 몸을 모두 찢고 피 흘리셔서 우리를 속죄의 피로 구원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잠시 전 까지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던 세상에 붙은 원망과 헛된 욕심과 하나님을 향한 섭섭한 마음과 불평하고 불만한 마음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의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흘려주신 보혈의 피, 그 구속의 은혜가 크게 보일 때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한 다고 생각하던 수많은 이유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렵니까? 여러분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꼭 같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지를 가지고 고민하시렵니까? 보이는 물질이나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마음은 감추어둔 채 그렇게 바치는 것들로 주님을 높이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그런 것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오늘 선지자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을 경배할까’라고 제물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바칠 예물들을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물 자체를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예물과 제물에 합당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는 것을 오늘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선지자는 오늘 하나님 앞에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새롭게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라는 의문문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변론을 힘입었을 때에 그것을 깨닫게 되어서 할 말을 잃어버렸을 때에, 즉시 올바른 것들로 하나님 앞에 반응하지 아니하고 다시 말하면, 마음 중심에 있는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대신 일 년 된 송아지나 돈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려고 하는 자신의 시도가 확신이 없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어떻게 섬길 때에 주님도 만족하고 우리도 만족합니까?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만족함이 있습니다. 주님이 만족하실 때 우리도 만족합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에 우리는 만족합니까? 마음에 없는 많은 헌물과 마음에 없는 많은 섬김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족하게 하고 우리를 만족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중심에 가장 귀한 것이 그분 앞에 놓여질 때, 우리 속에 감추어진 그 옥합이 주님의 발 앞에 깨뜨려져서 그 분께 부어질 때, 바로 그 때 우리도 만족하고 우리의 중심을 바친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도 만족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계속해서 이제 바치고 싶은 것이 점점 정도를 더해가고 있는 점층법적인 표현을 여기에서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 년 된 황소였습니다. 일 년 된 송아지는 하나님 앞에 바치는 예물 중에서 가장 좋고 최상의 예물이었습니다. 그 것도 지금 적은 것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없는 사람들은 비둘기 같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 바칠 수도 있었습니다. 이 송아지는 개인이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예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거기부터 시작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일 년 된 송아지를 하나님 앞에 드릴까하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리 말해봐야 지금은 제사가 사라졌으니까 실감이 안 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얘기하면 실감이 나겠습니까?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까? 아! 내 아파트 팔아서 바칠까?’ 이 정도입니다. 최상의 것으로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까? 그것가지고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천의 수양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 천천이면 일 백만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 하나님 앞에 바쳤을 때에 양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 겨우 이만 이천 마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지금 그런 대규모의 제사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 대규모의 제사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일 백만 마리의 양들이 줄을 짓고 얼마나 많은 제사장이 동원이 되는 얼마나 엄청난 제사가 되겠습니까?
(예화) 지금은 사라졌으나 태릉에 돼지 갈비집이 즐비했던 시절 전 지역에 냄새를 확산 시켜 주었던 그 돼지도 하루에 이 백 마리밖에 안되었다고 함.
그런데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천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까? 요즘도 우리 이런 것을 꿈꾸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국가적인 난국을 타개할까? 백 만 명을 여의도 광장에 모아볼까? 이 백 만 명을 모아볼까? 만원씩 헌금을 하면 기뻐하실까? 별 생각을 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구약의 시대나 신약의 시대나 영적인 종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되는 것입니다. 중심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으면 그는 아무 것도 안 드린 것입니다. 마음의 진실한 사랑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 드려졌으면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인 것입니다.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이 번제단에서 타 가지고 말입니다. 연기를 내면서 타 올라가면 그 기름이 흐르잖아요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강수와 같이 그 기름이 흐르게 되는 제사가 되려니 얼마나 많은 양을 잡아서 그 기름을 태워야 그 번제단에서 떨어져서 흐르는 그 기름이 강수와 같이 되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원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내 몸의 죄, 내 몸의 허물, 내 영혼의 죄를 위해서 내 몸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까? 내 몸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식입니다. 아니 자기가 죄를 짓고 왜 자식을 드립니까? 이것은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나 하면 다 내어주면서 끝까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 안 내주려고 붙들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는 자기가 짓고 자식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예화) 옛날에 섬기던 교회에서 신앙의 열심은 있으나 조금 이상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자기 동생이 순교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한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늘 말했고 동생은 늘 쫓 아 다니며 누나 그 기도 좀 하지 말라고 사정했습니다.
이일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그 당시에 이방 종교들, 몰렉을 섬기는 우상 이런 데는 중동지방만이 아니라 어느 민족에든지 몸의 열매를 드림으로써 이방 신들에게 호감을 산다든지 재앙을 면한다고 하는 사상은 보편적이었습니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도 결국은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어떤 것들이 있냐하면은 사회가 농경사회이므로 이 농사를 짓는 신들에게 호감을 사는 방법 중에 하나가 어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치는 방법이 특히 몰렉 종교 같은 경우에는 아주 잔악 무도했습니다. 쇠로 커다란 신상을 만들어놓고 가운 데 배를 파고 거기에 쇠로 만든 뚜껑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펄펄 끓는 불에다가 달구고. 그 아이를 몰렉의 뱃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아서 불을 때니 거기서 타서 죽게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동네에 임하는 재앙을 면하고 몰렉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행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라는 것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들 낳아서 목사 시킬까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냥 죽음으로 이방신들을 위한 재물을 드리던 그 관습에서, 만약에 일 년된 송아지나 천천의 재물을 가지고도 주님이 만족하지 않으신다면 내 허물을 위해서 내 자식이라도 하나님 앞에 제사로 바칠 수 있다라고 하는 이런 사고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자식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경험인데 그것까지도 뛰어넘으면서 그 자식을 제물로 바쳐서 태워버리겠다는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자, 이제 주님을 위해서 가산을 모두 기울여서라도 제물을 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가지고 하나님이 만족하시지 않는다면 자식도 하나님 앞에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참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값비싼 돈을 주고 사 온 예물이나 그리고 수많이 끌고 온 많은 짐승들의 시체를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식을 불태우도록 내어주는 그런 제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예배드리고 아버지 앞에 이 경고의 말씀을 듣는 그 사람들 자신 속에 있는 그 마음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삶의 중심적인 목표가 주님을 높이고 선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가장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가 되고 있습니까? 그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다양한 일에 종사하며 삽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좋은 지위와 환경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을 다스리며 직장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초라하게 구멍가게 이끌어가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고 때로는 정말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양식이 어떠한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냐,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냐, 누구를 높이고 공경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며 그 사람의 인생의 중심에 무슨 목표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어떤 양상을 띠며 이 세상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러한 놀라운 구속의 사랑 이런 놀라운 말씀의 은혜, 이런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 너희가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우리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우리가 무엇으로 그 사랑을 갚아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 사랑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그 구속의 사랑과 자기를 버려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인생의 위기 때마다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갈 길을 밝혀 주셔서 짐승과 같은 삶을 면하게 하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머리를 잘라서 신을 삼으면 갚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살을 에이면 갚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뼈를 갈아도 주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어차피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주님의 사랑에 빚지면서 살다가 주 앞에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살고 그 은혜로 용서함을 받아서 그 은혜로 허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서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쉬운 것 그러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한가지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으로 너희를 사랑하고 뜻을 다해서 너희를 구원하고 온갖 사랑으로 너희들을 이제까지 인도 해온 것처럼, 너희도 나를 경외하고 나를 섬기되 너희의 온 마음으로 섬기고 경외하라고 주님이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사랑을 입고 이 부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중간지대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지근하게 신앙생활 할 바에야 용기 있게 세상으로 달려나가십시오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을 바에야 하나님을 향하여 차라리 대항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영혼들이 훨씬 더 빨리 하나님 앞에 고침을 받는 방법일 것입니다.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나아올 때에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시고 순결하신 영이시며 그리고 하나님은 흠이 없으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진실해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진실해지십시오. 그리고 정직해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드리고 싶고 내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바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곳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일 년 된 송아지나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이나 그의 잘난 자식이 하나님 앞에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드리러 나오는 그 사람들 자신이 주님에게는 가장 훌륭한 재물이요,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그 중심이 서려 있는 그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에게는 가장 값진 예물이요, 가장 값진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영혼을 다하여 온 맘을 다하여 섬기는 것,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만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거룩한 보혈의 피에 대한 깊은 감격도 여러분들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을 받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고 주님의 은혜밖에는 내가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쟁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하면 여러분들은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주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정말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앙 생활을 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여러분 자신의 마음 중심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중심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과 모든 삶의 태도에 있어서, 그 기초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가 그런 이야기 잠깐 했습니다만, 이 세상에서 인생을 가장 불우하게 사는 사람 중 하나가 돈 벌기 위해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돈벌기 위해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의사들의 모임에 가서 수련회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다 우리보다 공부도 많이 하고 미래가 보장된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부심도 강한 그들에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한국에서 내로라 하는 의사들이고 그 어렵고 힘든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친 전문의이며 많은 사람들은 박사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어디 가든지 전문적인 사람으로 존경을 받고 장래가 보장된 탄탄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여러분들은 남의 헌데나 들여다보고 밥 벌어먹고 사는 고달픈 직업에 종사하는 천한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악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황소를 끌고 나오고 송아지를 하나님 앞에 바치고 천천의 수양을 몰고 나오는 것도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보고 왜 사느냐고 물을 때에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제가 그분의 방에서 그분의 유품을 만지면서 며칠 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장길려 박사 그분입니다. 그 분이 가지고 있는 신학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유품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 방에서 한 사흘을 지내면서 몇 권의 책들과 쓰신 글들을 읽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집 한 칸 없이- 아들이 제주 의과대학 학장입니다- 자식들이 그렇게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신대학 옥탑에 있는 방 하나에서, 창문을 열면 바다가 마주 보이는 것밖에는 아무런 이점이 없는, 그 방에서 홀로 일생을 조용히 마쳤습니다. 마지막에 죽을 때에 그가 남긴 유언은 ‘내가 죽거든 내 비석에 이렇게 새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 장길려 여기에 잠들었도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잠시 머물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고 무엇을 직업으로 삼고 무엇을 누리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잠시 스쳐갈 인생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잠깐 있다 스쳐 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의 삶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게 만들었던 그 동기가 무엇이었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나 같은 죄인과 죄인 중의 괴수와 같고 걸레와 같은 인생을 주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살리셔서 죄 많은 세상에서 당신의 보혈로 우리를 건지시고, 말씀의 물로 우리를 씻기셔서, 진리의 포도주로 우리를 고치셔서 새 사람되게 만들어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구를 섬기고 이 세상에서 다양한 삶의 구간을 지나면서 시종일관 우리의 마음을 누구에게 바치고 우리의 중심에 잇는 가장 소중한 것을 누구에게만 열어 주고 살았는지, 이것이 우리가 정말 중요하게 대답해야할 질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사실 때에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히 환영을 받으시던 때도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시고 사형언도를 받으시던 때도 있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서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소유를, 소유가 없을 때는 기적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보태주셔야 되는 때도 있었는가 하면 부유한 사람을 만나실 대도 있었습니다. 좋은 대접을 받으실 때도 있었을 것이고 거친 식사로 끼니를 메워야하는 고달픈 복음전도의 길에도 나서셨습니다. 다양한 모양으로 이 세상을 사셨습니다.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 자신이셨고 떠나가신 후에는 보좌 우편에 계신 전능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셨을 때나 종의 형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나 그리고 부끄러운 종의 형체를 벗어버리시고 영광가운데 옷 입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만국을 다스리시는 권능자가 되었을 때에나 그분의 그 모든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모든 그 분의 존재와 삶을 꿰뚫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이 만천하를 다스리고 당신의 교회들을 돌보고 계십니까?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이 끝나면 아버지께 다시 돌려드릴 왕권이지만 그 때까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온전한 기쁨을 드리기 위한 성자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은 불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70년 동안 살다 지나가는 이 짧은 기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 인생의 때를 어떻게 살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변론하시는 하나님 앞에 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부인 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가 없었더라면 어둠 속에 여전히 살아가는 것을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이 유독 나를 붙드셔서 진리의 빛 앞으로 나를 데려 오셨습니다. 말씀의 감화를 주셨고 진리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보게 하셨고 지난날을 가슴 아파하게 하셨습니다. 새 삶에 대한 그리움을 주셨고 지난날에 대한 후회를 우리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 때에는 주님이 우리를 홀로 버려 두셨습니까? 아닙니다. 과오가 있을 때에는 용서해주셨습니다. 혼자 힘으로 수치를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주님이 우리를 존귀하신 주님 때문에 우리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갈릴리 땅이 알려질 이유도 없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알려졌습니다. 스불론 땅이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은혜와 은총의 역사가 없었다면 예루살렘이 도대체 무엇이고 유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므로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부인 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이 입었습니다. 특별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고달픈 인생 길을 주님을 위로로 삼으면서 이제껏 걸어오고 또 이기고 올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죄악 가운데 스스로 불러들인 고통으로 말미암아서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은 살을 찢는 것 같은 아픔 속에서 회복의 날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지만, 우린 아무 것도 우리 스스로의 회복을 위해서 한 것이 없습니다.
어느 날 주님이 피묻은 손으로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죽어 가는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차가워진 우리의 마음에 뜨거운 주님의 피를 바르시고 우리를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부인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우리의 심령 속에 십자가 주님의 사랑을 인쳐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홀로 버려 두신 적이 있었습니까? 어둠 속에 있을 때에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주신 적이 있었습니까? 결핍 속에 몸부림 쳐서 결국은 우리가 그 결핍 때문에 죽은 적이 있습니까? 죽은 자 같았으나 다시 살아났고 무명한 자 같았으나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시 유명한 자 같이 만드셨습니다. 잠시 머물면서 만물의 찌끼와 같이 쓰레기와 같이 그렇게 살다가 사라졌을 인생들을 존귀하게 만드셔서 누가 봐도 이제는 폐품과 같은 인생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주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돌멩이 같이 차갑고 강철같이 완악한 심장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이 사랑은 우리가운데 부인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주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우리가 막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중심이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의해서 우리가 인도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아서 이제껏 하나님의 사랑과 그 거역할 수 없는 은혜로 붙들린 바 되어서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충대충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저 형식으로 주님을 공경한다고 말하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으며 사는 것으로 만족해도 되는 것입니까? 순간 순간 일어나는 옛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 패역한 마음과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악한 경향들을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 이 부패한 마음들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가하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로 우리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살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특별하게 살아야 합니다.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놀랍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특별한 은혜가 특별한 은혜 되고 놀라운 사랑이 놀라운 사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을 사랑하라고 그 사랑을 알게 하시고 주님만 경외하고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께만 마음을 바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나를 독점적으로 사랑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시 머물 세상에서 오늘도 우리의 코에 호흡을 주시고 우리에게 의식을 주시고 우리의 눈에 흘릴 눈물을 주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신 것은, 이제는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받고 이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나도 너에게 유일한 사랑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주의 사랑을 입은 성도들이여 나는 오늘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거역 할 수 없는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시인하든지 시인하지 않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받은 사람이고 누린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몇 푼이나 몇 시간의 시간이나 몇 번의 섬김으로 주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대신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못 박히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위해 베푸신 이 놀라운 사랑이 주님의 중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주기를 거부한 그 중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중심을 바치는 사랑이, 우리가 먹고 입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꿈지럭거리면서 살아가는 모든 섬김과 봉사의 동기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선지자로부터 이러한 권면을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서야 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하나님 앞에 바치며 살아야 할지를 애매 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의심할 수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얼음과 같이 차가운 가슴을 가진 사람도 녹일 수 있도록 말씀하셨고 벙어리 같고 귀머거리와 같이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사람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청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분명한 음성으로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나를 경외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6. 선한 것을 구하며 삽니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미6:8上)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이라고 말하면서 미가 선지자가 하고 싶었던 진정한 속말들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상반절만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의 고민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범죄하고 허물이 있을 때에는 내 태의 열매인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면 이 죄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나아갈까, 어떻게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속죄를 받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어떻게 나아가야 되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어떻게 해야만 죄 가운데서 자신들이 깨끗한 사죄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거론해야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쓸데없는 고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선한 것일 네게 보이셨나니”.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완료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앞으로 보여주실 것이 아니라 이미 너희에게 무엇이 선한 것인 가를 하나님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몰라서 못사는 일은 매우 적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두 알려주셨는데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또 하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은 종종 목회자 탓만 하거나 환경을 탓하는데,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죽지 않고 어둠 속에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자기도 모르는 속에서 너무나 편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지 누구 한쪽으로의 잘못으로 모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가르쳐주시지 않은 것처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까?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속죄함을 받을 수 있을까?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 온 경험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역사책을 읽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떠한 때에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 민족을 정말로 기뻐하셨을까? 나라가 범죄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그들을 용서받게 해주시고 새로운 교제와 은혜의 길을 열어주셨는가? 그리고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을 때 주님을 정말로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었는가? 이것은 성경만 넘기면,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든지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마치 진공상태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홀로 알아서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신 것처럼, 교과서도 없이 그들은 처음부터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여러분 혼돈에 빠지지 마십시오. 여러분, 만약에 우리들이 이 시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말한다면 그 질문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정말로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위해서 살 것인가 하는 갈등의 문제가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를 알려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그 깨달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모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이미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면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신앙이었을 때에는 어떻게 인생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선명하고 또렷하지 않습니까? 회개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고 믿음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면 이제껏 까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갈 길이 보이지 않고 혼돈스러웠던 길이 질서 정연하게 보입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인가가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불순종과 죄, 태만, 나태, 하나님을 향한 반역, 패역, 이러한 길로 걸어온 것이 모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걸어가야 할 것인지가 명백하게 눈앞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을 지키면서 내 주되신 하나님을 참사랑하고 살아야겠다고 하는 거룩한 진지함,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간절하고 하나님을 찾는 이런 진실한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다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죄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하고 옛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가야할 길, 자신의 목표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왜 고난 속에서 나를 어디로 데려가시려고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믿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주님이 우리에게 선한 것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대로 살지 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은혜 받고 난 후의 역사를 죽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순간 순간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은 없습니다. 그 침묵이라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들을 귀를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찾고 거기에 복종하며 살려고 하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빚어준 어둠이었지, 하나님은 언제나 가장 어리석은 자도 들을 수 있는 명백하고 선명하게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라 인간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과정을 죽 살펴보면 하나님이 수시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에는 이제 그만 사람들에 대한 미움을 포기하고 그 미움이 자신을 죽이고 있으니 마음속에 묻은 미움의 칼을 버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집요하게 말씀하십니다.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고도 충성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진실하게 충성하는 너희를 내가 얼마나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지를 아느냐고 하나님이 격려와 위로를 함께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정말로 겸손한 마음으로 주 앞에 마음을 낮추면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향해서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그러한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침묵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가르쳐 주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교회라는 것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만든 단체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교회라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뛰어난 혜택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손길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는 그 손길이 말씀을 통해서 이끌어 가는 길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한번도 일년의 설교 계획을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연초에 기도원에 올라가 오십 이주의 설교 본문을 잡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월 달의 교회에가 십일월 달의 교회와 다릅니다. 그리고 이월 달에 모였던 사람들과 그 다음에 이월 달에 모이는 사람들이 다릅니다.
목회자가 개개인의 모든 사정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무엇이 지금 이 교회를 향해서 하고 싶은 말씀인지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기에 문제는 성도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이 필요한가하고 관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하나님이 하고 싶어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입니다. 우리의 필요보다도 하나님의 필요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교인들의 삶 하나 하나를 살피면서 통계를 내어서 지금은 이런 설교를 해야할 때라고 계산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 싶어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당신이 하고 싶어하시는 말씀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 출발 자체는 하나님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고 시작을 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고 싶어하는 그 필요는 그 교회가 들어야할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처음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바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 같지만 말씀이 진전되고 나면 그것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을 기도하면서 그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저는 종종 경험합니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고 사업이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사업을 일으켜 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경제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는데 기도의 영이 역사하지 않을 때는 자기가 하고 싶은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하자 그 기도는 내버려두고 가족들의 구원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게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불을 붙이시자 결혼은 간데 없고 죽어 가는 교회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경험들을 우리들은 기도 속에서 합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하나님의 성령의 깊은 인도를 받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전에는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아버지 앞에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교회와 우리 개인의 삶을 인도해주시도록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일관된 말씀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무슨 말씀을 들어야 할지 우리에게 분명히 보이십니다.
여러분 저는 매 순간마다 요즈음 우리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꼭 하시고 싶어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다라고 하는 것을 거의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상하게도 수시로 변합니다. 어떤 때는 사랑과 미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못해서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칼질하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의 아픔들을 주님께서 긍휼히 보시면서 그들을 그 어둠 가운데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에게 말씀하시고 또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요즈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라고 여러분들은 생각하십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하시는 말씀은 주께서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이 입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리고 이제 뒤로 물러가거나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대신에 패역한 자신의 경향성을 끝까지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에 부응하지 않으려는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당신이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인생 구간 구간, 우리의 교회생활 철철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당신의 마음을 보이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지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생각나게 하시고 도전 받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면서 살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른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느끼는 갈등이라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선하심과 자기가 생각하는 선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갈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소견의 옳은 대로 살고 싶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소견의 옳은 대로 우리들이 살게 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견대로 옳다고 살아가는 삶을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이라고 보십니다.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애매 모호하고 매우 뛰어난 영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이나 아니면 고도의 신학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이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진실하게 주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지를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상황에서는 특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선을 쫓아오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선지자는 오늘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히브리어 성경에는 “너를 위하여 무엇이 선인지를 하나님에 고하셨으니”라고 나옵니다. 말하자면 이 선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충돌을 일으킬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들의 생각이고 우리 인생의 진정한 선은 하나님이 선하다고 생각하고 보여주신 바 그 명령과 계명을 따라서 사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선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선지자는 하나님이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그런 고민,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무엇으로 기쁘시게 할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 죄의 허물을 면할까? 언뜻 보면 경건해 보이고 진지해 보이지만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너희들이 많이 입었느냐, 주님의 구속을 입었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너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주님이 이미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가 만약에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할까? 어떻게 살아야지 만 하나님께서 나를 귀엽게 보실까? 그리고 무엇을 행해야지만, 어떤 식으로 살아야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은혜에 부흥하는 삶이 될까?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바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준수하며 살려는 삶의 반응이 없으면, 여러분들이 주일 예배는 몇 시에 드릴까? 순서는 어떻게 할까? 헌금은 많이 할까, 조금만 할까? 십일조는 온전히 바칠까? 이런 것을 가지고 아무리 많이 고민해도 주님은 우리들 마음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삶으로써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과 우리가 형식으로 찾고 구하는 것이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표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제 눈에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자기 눈에만 좋으면 범죄도 서슴지 않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기 눈에 좋고 너무나 매혹적이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짓밟고 하나님의 율법을 불태우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마지막에 사망에 이른다 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눈에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해도 우리의 원하는 것을 부인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원한다고 고백하면서 가기 싫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선하다고 생각하신다는 확신을 붙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의 삶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인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한 것을 따라갑니다. 행복하고 기분 좋고 유쾌하고 내게 유익이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남다른 은혜를 입고 신앙을 따라 살기로 결심하면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시련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시련을 당하면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신다는 이유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것을 이미 보이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 것을 분명히 보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그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한해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까? 말씀을 개인적으로 읽고 탐구하고 말씀을 들은 것을 기억하고 가슴에 새기고 그것대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살아가는 일에 얼마나 열심을 내었습니까?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모함이 여러분가운데는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주께서 보여주신 선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살아가지 않는 삶, 삶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지식을 더 얻고 싶어하고 더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자신의 판단의 부족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더 또렷한 윤곽을 가지면 좋을까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삶의 부족이 지식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주를 위해 살 마음도 있고 주님을 위해 희생할 각오도 되어 있는데 문제는 참된 지식, 그래서 그들은 좀더 많은 지식, 좀더 분명한 인생에 대한 견해,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섬겨야 할 지에 대해서 보다 또렷하고 진실하고 단호한 견해를 원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하는 견해를 그들은 유지하고 붙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불신앙은 불신앙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고 타협은 타협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선을 겨냥하면서 아버지 앞에 단호한 견해를 가지고 살아가야겠다는 사람들은 보다 강한 설교를 원합니다. 물에 물 탄 것 같고 무엇인가 더운 것과 차가운 것이 섞인 것과 같은 것들을 싫어합니다. 어디까지가 신앙이고 어디까지가 불신앙인가를 분명하게 갈라주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면 주님의 이름을 어떻게 훼방하는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싶어합니다. 참된 회개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거짓된 신앙의 삶 속에 머물든지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은 안정감을 얻고 그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신앙의 허구와 진실의 차이를 분명히 규명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원하지 않는 애매 모호한 신앙의 태도는 곧 하나님을 향한 애매한 태도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정말로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게으르게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하거나 마음 아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 자신이 나태하고 태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삶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냥 얼버무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자신의 그러한 불분명한 신앙의 태도를 유지하기에 훨씬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빠지는 우리의 위험은 그것입니다. 살 마음은 없는데 지적인 호기심이 계속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요즈음은 교회 올 때에 수많은 교재들과 책들을 들고 오는 학원과 같은 교회의 모습으로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일권, 이권, 삼권, 사권,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를 다 뛰고 나면 삶도 그렇게 뛰어집니까?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 그리고 주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배워 가는 방식은 그러한 방식으로 학원처럼 배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러면서도 우리 속에 끊임없이 신앙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면 내가 그 뜻대로 살아가야겠다고 하는 주님을 향한 따듯한 경외심이 모든 지식을 습득하는 밭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것은 모두 사라지고 그냥 우겨 넣으면 마지막에는 머리 속에서 성경지식의 칼을 빼어 사랑하는 형제들의 목을 베는 일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것이 정말로 온전한 지식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사랑하는 그러한 진실한 사랑으로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씩 둘씩 섭취해가면서 그 뜻대로 자신이 살고 하나님의 선을 쫓아가는 그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 때 그 지식은 그 사람들 거룩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것 없이 그는 정말로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년에도 성경공부계획을 하면서도 마음에 늘 염려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말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면 그때에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보여주신 그 선하심의 음성에 부응하면서 살려고 하는가? 이것이 가장 커다란 숙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식 그 자체가 우리에게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순종이 나오고 하나님을 향해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패역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 사람들의 패역은 목사도 못 고칩니다. 바울이 와도 못 고칩니다. 말하자면 패역해 가는 방식 자체가 성경을 활용하면서 패역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너무나 가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이 배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일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 말라고 이스라엘에게 간단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까? 높으신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할까?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을 주님이 기뻐하실까? 내 자식이라도 주님께 목사 만들까? 선지자가 말합니다. 꿈 깨라고. 다 쓸데없는 소리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보여주지 않았느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느냐? 살려고 했느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에 대해 다 깨달은 네가 살지 않고 있는데 그 입술로 와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고 나아갈 가를 말하는 것은 코미디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뒤에 가난한 자의 고통받는 사회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죽 나옵니다. 너희의 삶을 현실을 보아라. 하나님의 선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지 않느냐? 보아라. 너의 손에는 불량한 저울이 들려있어 중량을 속이고 사람들의 재물을 탈취하고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그러한 삶, 너의 주변에 있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을 보아라. 그러면 네가 어떻게 살아야지만 선한 삶인가를 하나님이 보여주지 않으셨겠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인자가 없고 강포가 가득한 이때에 속이는 자들과 사기치는 자들이 그득한 이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겠는지에 대해 성경이 침묵하고 있더냐? 그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무엇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고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를 생각하느냐?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이라도 주님이 기뻐하실까? 하는 것은 신파조의 연극은 집어치우고 진실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천당에 가면 목사들의 입하고 성도들의 귀만 동동 떠다닌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에 깊이 동감합니다. 정말로 그럴 것 같습니다. 설교하는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저는 살지도 못하면서 하나님 면전에 있는 것처럼 온통 사는 것은 오 푼 어치 살고 말은 열 푼 어치 해야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도 행하지는 않으면서 저런 말씀 들으면서 자신이 무엇인가 동의하는 자체에 대해서 얼마나 높은 수준의 위치에 있는지를 스스로 대견해하고 삶의 현장에서 사탄도 대견하게 생각합니다. 연구대상이라고. 이렇게 은혜 받는 자녀가 교회당만 떠나면 즉시 자기의 자녀처럼 살아준다는 것에 대해 대견해하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런 식으로 추론하며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말이 무성한지 모릅니다. 저는 지성인들이 모인다는 교회를 돌아다보면서 정말로 들었습니다. 저는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수많은 좋은 말들을 만들어 냅니다. 섬김, 하나님의 나라, 의,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말은 모두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흔치 않습니다. 오히려 섬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말속에서 자주 떠올린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삶의 우선 순위와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고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고 아무 것도 심지 않은 땅에서 과실을 먹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유업으로 받도록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싯딤에서 죄의 용서를 받고 길갈에서 수치를 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주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이 당시의 문맥으로 보면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지서라고 하는 것은 결국 율법 즉 모세 오경을 그 시대에 적용한 것입니다. 그 고민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 선지서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야기 할 때 예수님이 지금 계시면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하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하면 모세가 이 시대에 살아있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하는 생각 속에서 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다가 하나님이 큰 부흥을 주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깊은 각성과 영적 부흥이 일어나면 거기에는 반드시 한가지 일이 따라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의 중요성이 다시금 확연히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성이 일어나는 것도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나 누군가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율법중의 하나를 캐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고 그후 참회가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깊이 참회하고 뉘우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심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율법이 그들의 신앙의 중심 속에 부각됩니다. 떠올라서 자신의 모든 삶이 그 하나님의 율법의 표준을 좇아가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과 탐구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신 선한 삶의 표준이라는 신앙이 다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 변화 받은 사람들 속에서 참다운 하나님이 말씀의 중요성이 떠오릅니다.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그 부흥 속에서 일어나는 뚜렷한 특징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모든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미 그들에게 선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충분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높아진 다는 것은 곧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권위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이것을 금하셨는데 교통경찰이 금하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해도 하나님이 금하는 것은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교통위반하고 딱지 떼이는 것을 십계명 어기는 것보다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어차피 불순종하며 살았기에 아무리 먹어도 죽 떠먹은 자리에 표도 안나지만 범칙금으로 돈이 날아가는 것은 눈앞에 훤히 보입니다. 그렇기에 더 무서워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참다운 은혜( ? )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삶을 살아가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중요성이 다시금 살아서 역사하게 됩니다.
선지자가 오늘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별명이 가난한 자의 대변인입니다. 가난한 자를 대변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대로만 살아가면 저렇게 가난한 자들이 비참할 정도로 학대받는 사회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이미 그런 장치를 다 보정해 놓고 있습니다.
안식년이 되면 노예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이 주어집니다. 땅을 빼앗겼어도 안식년이 되면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희년이면 아무런 대가 없이도 노예였던 사람이 모두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고 땅도 모두 해방됩니다. 말하자면 어떤 특권층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곡식을 심었어도 밭의 일정부분은 추수하지 않고 놓아둡니다. 왜입니까? 나그네가 먹도록 그렇게 합니다. 나무에 열매가 매달려 있어도 모두 따도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따지 않습니다. 짐승들도 와서 먹고 나그네들도 와서 먹을 수 있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를 들여다보면 강포와 포악과 압제가 지배하고 가난한 자들은 그 속에서 고난을 받고 하나님의 모든 율법이 삶으로 부정되고 있는 철저한 배반의 시기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며 선지자는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럴 수가 있는가? 그런 모든 사회적인 정화는 삶의 정화는 덮어두고 나와서 높으신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경배할 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와서 경배할까? 아니면 수많은 기름을 들고 갈까? 아니면 수양을 끌고 갈까? 내 자식을 하나님을 위해 제물로 드릴까? 이러한 공상을 하는 것이 선지자의 눈에는 역겹기 짝이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삶이 하나님의 선을 버리고 율법을 버림으로서 너희들의 삶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유린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너희들이 몇 시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무슨 찬양을 하고 무슨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아무 것이든지 너희 마음대로 하라. 어차피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 너희들 좋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들은 삶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어느 날 제가 없을 때에 누가 와서 예배의 순서를 몇 개만 바꾸어도 금방 거부감이 일 것입니다. 제가 내년에 미국 집회를 가는데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대신 한다고 오더니 밴드를 많이 데리고 와서 짧은 합 팬티를 입고 율동하며 찬송을 한다면 여러분들이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강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퍼부어도 즉시 저를 원망할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을 불렀다고. 예배가 예배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신앙의 형식에 대해 관심이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저도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것 한가지 바꾸는 것도 마음이 허락지 않습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강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플레쉬 글라스입니다. 유리로 만드는 것인데 목회자가 서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두 보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이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부반응이 듭니다.
저는 삶에 있어서도 예리한 시각이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수시로 물어보십시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삶인가? 이것이 은혜에 부합하는 태도인가? 하나님 앞에 한없는 사랑을 입고 선하심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배운 사람의 삶인가를 하나님 앞에 깊이 깊이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선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다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인도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쳐 주기만 하면 그 길을 가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기도 그런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도토리 만한 인간이 속에 무슨 재로가 들었기에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선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말씀을 깨닫고 나니 자신 속에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는 또 다른 내가 살아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죄와의 끊임없는 싸움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하게 보이신 그것에 부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 그리고 불꽃같은 삶,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특별한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만족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 삶이 정말로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이 밀어주십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한보 순종하면 두 보, 세 보 순종하며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한번 불순종하고 뒤로 물러서면 그 다음에는 두 보, 세 보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을 거슬려야 하는 무거운 짐들을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지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때문에 제가 말씀드립니다. 신앙에 있어서 중간지대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기고자하는 마음, 그렇게 사는 것 이외에는 소망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남아야 합니다. 세상이 사랑스러우면 세상에 용기를 내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과외비를 실컷 지불하고 그것이 아님을 깨닫고 손들고 오는 사람을 주님이 부르신 사람이고 그 속에서 적성에 맞는 사람은 그곳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어렵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자신이 세상에 돌아가서 다시 세상 사람처럼 살아야 되겠다는 기대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았고, 잘은 몰라도 그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견고하게 붙들면서 살라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선함을 보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선함을 따라서 그 선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쉬지 않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문제는 위로부터 공급되는 능력이 모자라서 선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능력을 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선하다고 여기시는 바를 따라서 살아야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갈곳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지 않는데 우리의 신앙이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화) 언젠가 한번은 제가 있던 교회에서 공동의회를 하는데 불꽃이 튀겼습니다. 그렇게 열 렬한 공동의회는 처음 보았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누군가가 일어나서 일장연설을 하는 데 그 연설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교회가 이렇게 큰데 구제비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왜 이렇게 적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올려야 된다고 투표까지 해 가지고 결국은 올렸습니다. 나중에 공동의회를 다 끝내고 교역자에게 뒤쳐져 목사 님이 침통한 표정으로 들어오셔서 탄식하십니다. “얘 오늘 큰소리로 말하는 사람들 다 십일조 안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구제하는데 열렬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면 자기 도 돈을 지불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자신도 한 표 있다고 손들고 완전히 연설에 불을 지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들의 말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삶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간 곳이 없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객관적으로 보여주신 선은 성경입니다만 개인적으로 보여주신 선이 저는 있고 있다고 분명히 믿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더 하나님 앞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렁찬 음성으로 너는 이런 은혜를 받았으니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나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또렷하게. 그것은 한 달에 한번이나 일주일에 수시로 주가가 바뀌듯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집요하게 “너를 내가 부를 때 내가 너를 이렇게 살라고 불렀지. 내가 너에게 이런 사명을 맡겨주었지. 그대로 사느냐? 그대로 살고 있느냐? 그대로 살 것이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말만하면 하나님께서 그것 하나를 물으십니다. “은혜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래 그렇게 해줄게. 그런데 은혜를 주면 그대로 살겠느냐?” 물어보십니다.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그래. 깨닫게 해주겠다. 깨닫게 해주면 그대로 살겠니?”. “주님 능력을 주시옵소서”. “능력 주면 뭐하겠느냐? 그렇게 살겠느냐?” 초점이 그곳으로만 모아집니다.
우리가 자녀를 길러보면 분명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식들이 비행기 태워주는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그것도 옛날 이야기입니다. 무엇입니까? 정직하고 지혜롭고,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서 유능하게 자라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 잘 믿고, 신앙생활 잘하며 성품이 괜찮은 사람으로 자라면 되지 않겠습니까? 천재도 못난 사람이 있어야지만 천재라는 말을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해주든지 그 세계의 목적에 맞는가를 생각을 해봅니다.
“무엇을 해주세요”. “가만히 생각해보고 그래 그것을 해주면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겠니?” 연필을 사줄 때뿐만 아니라 무엇을 사주더라도 물어봅니다. 컴퓨터를 사달라고 하면 “컴퓨터를 사주면 공부 열심히 할 수 있겠니?”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하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무엇이든지 달라고만 하면 그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보이신 그 선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고 이런 하나님의 대한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죄 용서함을 받았으면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끊임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되는지를 깨닫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깨닫는 그 순간 그 깨달음은 우리에게 은혜를 가져오고 은혜를 받는 그 순간 은혜는 우리에게 의무를 일깨워줍니다. 그렇기에 회개가 나올 때도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분명한데 나는 왜 그렇게 살고 있는가하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 통탄하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는데 잘못된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목표가 없는데 자신의 삶이 그릇된 삶이라고 하는 자기 부정이 가능하겠습니까?
은혜 받을 때에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속적인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사항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물으십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그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보여주신 바는 대부분 놀고먹는 신앙생활에서 성취되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고 주님 앞에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살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과 싸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주전에 제가 사랑은 전투다라고 설교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처음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어둠 속에서 다시 불러주셔서 두 번째 사랑, 세 번째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유지하고 처음 사랑을 간직하는 일이 멍청하게 가만히 있다고 해서 되는 일입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지 못하게 하는 요소와 더불어 싸우고 내 마음을 빼앗아가려고 하는 치한과 같은 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그러한 정조 있는 신앙의 절개를 지킬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조의 여인들이 가슴에 은장도를 품고 살았던 것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뜻입니까? 누가 나를 더럽히려하면 나는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지만 그 선한 것을 추구하며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자기를 추스르고 자기를 하나님 부정하며 세우는 그러한 신앙과 과정, 극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에 그 사람은 이런 시시간 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고민을 하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시시한 것이 아니라 매우 중대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보이신 선한 것이 무엇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그것에 충성해야 합니다. 거기에 여러분들의 삶을 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신실함을 입증해 보이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오늘 우리가 다룰 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은” 이렇게 말하면서 이제 뒤로 넘어 갑니다. 즉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이야기는 선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연결되는 이야기이고 그 선한 것은 뒤로 넘어가서 공의와 인자와 연결이 됩니다. 말하자면 구하는 것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냉정한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을 때에는 열매를 보자고 심으신 것입니다. 농부가 땀흘리고 이른봄에서부터 겨우 해동하는 땅을 갈기 시작하고 거름을 주고 땅을 고르고 씨앗을 뿌리는 것은 열매를 보기 위한 것입니다. 농부는 씨뿌리는 것이 취미가 아닙니다. 생업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탁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정결하게 하시고, 은혜주시고, 또 체험을 주시고 진리의 말씀까지 주셔서 당신의 특별한 날개 아래 보호하신 것은 열매를 보시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이런 생각을 안해보셨습니까?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사업하시는 영토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런 하나님의 모든 역사하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이익을 끼쳐드리는 존재입니까 손해를 입히는 존재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무엇인가 이득을 보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하나님 앞에 그 자체가 너무나 존귀하고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말씀은 주님이 자주 하셔야지 우리가 자주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아는 형제 한사람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년부를 인도하는데 어떤 돌팔 이 같은 청년하나가 나오더니 목사님보고 이야기를 하지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대화하는 이 순간만큼은 목사고 평신도이고를 접어두고 한 형제로 터놓고 이야기하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야 이 녀석아 그 이야기는 내가 해야지 왜 네가 하느냐”고 말했답니다.
하나님은 “너희 존재가 내게는 기쁨이다”. “저는 못났는데요?” “못나면 어떠니? 그래도 나는 네가 좋단다”. “하나님 저는 유능하지 못한데요?” “유능하지 못해도 괜찮다. 유능이 무슨 문제니. 네가 너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다녔고. 마지막은 내가 내 아들을 죽게 하여서 아들의 피로 내가 너를 찾았는데 네 몸의 내 아들의 피가 묻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못나면 무슨 상관이 잇느냐? 무능하면 무슨 상관이 잇느냐?” “ 하나님 저는 너무 유능한데요?” “그래도 괜찮다. 너는 너무나 귀하다. 너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기쁨이다”. “그러면 하나님 이제 우리는 마음대로 해도 되겠네요”. 이렇게 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이제 저에게 바랄 것이 없겠네요?” “그래. 너희들이 이 땅에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 얘들아! 괜찮대. 막살자!” 그것은 코미디입니다. “너희는 무능해도 괜찮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유능해지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못생겨도 괜찮다”. “아니에요. 하나님. 이대로 주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주님보시기에 더 아음다운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코를 높이고 눈을 길게 찢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못되지만 도덕적인 성품에 있어 더 온전해지고 성결해져서 주님이 바라보실 때 정말 우리의 얼굴 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보고 감당하실 수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더 하나님 앞에 살려고 결심하지 않겠습니까?
이 두 가지가 나뉘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하나님의 백성들 자체를 존귀하게 생각하시지만 그들을 행해서 너무 존귀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거기에 거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거는 하나님 당신의 목표가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제 나를 많이 닮아 가느냐?” 이제 사람들의 신앙이 무르익기 시작했는가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돌아보시면서 우리의 성숙과 충성, 우리의 삶, 우리의 신앙, 우리의 인격, 이런 것들 속에서 열매를 보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주님의 사랑으로 세워져 가는 그것, 주님의 사람으로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주님은 끊임없이 추적하시면서 우리에게 그것을 찾고 싶어하십니다. 이것이 혹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혹독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존귀하고 주님의 눈앞에 의미 있는 존재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것을 찾고 구하십니다.
주님이 무엇이 없어서 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당신이 구속해놓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당신이 구하고 있는 바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서만이 그들이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열매를 구하고 찾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작년과는 다른 올해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시고 봄에는 볼 수 있었던 그런 불신앙의 모습을 오늘은 완전히 인격적으로 승복한 가운데서 불신앙의 더러운 뿌리들이 뽑혀나간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 새롭게 보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 내년에도 교회는 얼마나 많은 헌금들을 내야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선교에 쓰고 얼마나 많은 돈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하나님 앞에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데 쓸 것인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정신이 우리의 삶이 되어지지 않으면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하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구하시는 선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독특한 은혜의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어느 자리에서 서라고 주님은 여러분들을 불러주셔서 오늘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힘이 떨어질 때에 힘을 주시고 낙심할 때에 새로운 용기를 주시고 고난 속에서 짓밟혀 쓰러질 것 같은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강하게 일으키셔서 세우시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어느 자리에 계속 서있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십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삶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답할 때입니다.
7. 공의와 인자, 그리고 동행하는 삶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下)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되 거져 주시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그곳에는 반드시 하 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에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신 처음 사랑을 간직하며 살기 싫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번 이야기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처음 사랑을 간직하며 살기 싫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늘 간직하며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너무나 모릅니다. 오늘 분명하게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주셨으면 그 사랑에 감격하고 은혜에만 감격하지 말고 왜 나같이 공로 없는 인간에게 과분한 은혜를 주셨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같이 쓸모 없는 인생에게 왜 이처럼 귀한 사랑을 부어주셨을까를 생각해보면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은혜주신 계획이 눈에 보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황홀경에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삶이 동반되지 않는 사랑타령은 센치멘탈리즘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그 순간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동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면 그 주신 계획대로 살아야 합니다. 단언하건대 우리가 아무리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주신 계획대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은혜가 아무리 적은 것 같아도 그 적은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지는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이 은혜주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기에게 은혜주신 범위 안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면 그 은혜는 나중에 적은 것이 아니라 큰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좀더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마치 하나님의 주신 은혜가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더 많이 은혜 받고 싶고 더 많은 성령을 받고 싶어하는데 사실은 그런 사람에게 성령을 주어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성령 받고 은혜 받는 순간부터 종사하는 작업은 그것을 털어먹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털어 버려야 받으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루할 정도의 삶을 되풀이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들이 생명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곤란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선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포로에서 건져내시고 싯딤에서 용서해주시고, 길갈에 수치를 굴려버리게끔 축복해주시고 권능으로 함께 해주셔서 심지 않은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하신 이 놀라운 은혜에 계획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입니다.
선한 것. 그들이 눈에 보기에 선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눈에 보기에 선한 것은 이방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우상 숭배에 젖고 방종하며 하나님이 주신 번영을 타락의 기회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들 보기에 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악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그것을 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에 나오는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모든 것은 결국 무엇에 대한 답인가 하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에 대한 틀린 답은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과 같은 이야기이고 정답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틀린 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말했고 맞는 답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정직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의” 이것이 만져집니까? 그러나 천 천의 수양은 만져집니다. 만만의 기름도 눈에 보입니다. 인자는 어떻게 생겼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겸손은 어떠하면 한번 만져볼 수 있습니까? 공의나 겸손이나 인자와 같은 것들은 만져지는 것도 아니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갈꼬,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꼬 하고 생각할 때 이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자꾸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은 고통 없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지만 공의, 인자, 겸손과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맺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고통이 뒤따른 다른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없이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지만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내면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질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동반되지 않고는 흘러나올 수 없는 열매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이와 같은 겉모습을 고치는 종교가 아니라 근본을 새롭게 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생각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 만만의 기름은 잘 모르지만 천 천의 수양은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백만 마리의 수양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싼데 사랑 없이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으로 드리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사랑 없이도 어떤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목숨도 아니고 돈도 아니면 시간도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드려졌는가는 가장 소중한 것이 하나님께 바쳐졌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명예를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생명이 끝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끝은 자신이 생명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또, 가족이나 자신의 명예와 사랑하는 사람들은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어도 돈은 죽어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돈이 자신의 사랑하는 것의 마지막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 전에 그는 다른 것들을 하나님 앞에 바친 사람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도 사실은 아무 것도 하나님 앞에 바친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미가서 뿐만 아니라 선지서 속에서 계속되는 논쟁들을 보면 선지자와 왕이나 제사장의 그룹들과 다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제사입니다. 선지자들은 제사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마당만 밟을 뿐이며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이 모두 쓸데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사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이것입니다. 제사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일치하지 않으면 그 제사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물을 하나님 앞에 끌고 나올 때에 그의 마음도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것이 아니면 그 제물은 정직한 제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흠 없는 초태생이라 할지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죽여서 제사로 드린다고 할지라도 자기 속에 있는 불결을 죽이지 아니하면 그 제물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훌륭한 제사는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질과 가지고 나온 제물의 질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정직한 제사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에서는 상한 심령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한 심령도 제물이 될까말까한데 상한 심령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비록 옳게 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주님께 구원받고 주님께로 돌아가고 싶다는 자신이 죄인임을 자복하는 깨뜨려지고 상처 난 마음,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삶을 살고 정직한 삶을 살던 사람이 정직한 제물을 가지고 나왔을 때 하나님 앞에 그것이 귀한 제물이 됩니다. 부정직하게 불법으로 얻은 제물을 놓고 십일조를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은 쓸데없는 고민입니다. 소득 자체를 하나님이 인정해주시지 않기에 하나님은 마음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도 그러한 사상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 제물 자체를 혐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드린 그 제사를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습니까? 이만 이천 마리의 소를 비롯한 엄청난 양의 예물이 하나님 앞에 드려졌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셔서 그 일 천 번제에 응답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예물을 기뻐하시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헌금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넘치게 나왔습니다. 필리핀에 있는 그 신학교를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하시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제물일까요? 요즈음처럼 살기 어렵고 한푼 두 푼 모아도 생존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으로 고통하시는 시기에 이렇게 상상했던 것보다도 배나 넘는 헌금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백성들이 선교하도록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돕는 것을 보면 만난 적도 없고 본적도 없는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예배, 좋은 헌금, 좋은 봉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한 예배에 합당한 삶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하나 하나의 덕목에 동사가 각각 다르게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뭐라고, 나한테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까? 높으신 주님께 경배할까? 천 천의 수양을 끌고 갈까?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을 가지고 갈까?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제사를 드릴까? 어떻게 제사를 드리면 율법에 어울릴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런 것 이야기하기 전에 네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지 보아라. 왜 너는 저울 눈금을 속이느냐? 왜 되를 속이고 왜 탈세하며 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신실하지 아니하고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느냐? 그것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나 참회 없이 너희들이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을 내게 가지고 나오는 것은 이것은 뇌물이지 예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 최소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을 때에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예배와 모든 헌물은 하나님 앞에 예물이 아니라 뇌물입니다. 하나님은 뇌물을 금하셨습니다. 뇌물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뇌물을 철저히 금하셨습니다. 옳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이유든지 이런 뇌물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공의로운 판단을 굽게 하고 편벽되이 재판하는데 있어 다른 사람들 두호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유행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사상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공직에 있고, 여러분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부탁을 받는 자리에 있다고 하다면 여러분들은 뇌물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도저히 그 월급으로 생활할 수 없으면 생활수준을 낮추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전업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깨끗한 제사와 정결한 마음으로 드리는 헌신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 때문에 감동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물의 규모나 집회의 수많은 규모나 행사의 엄청난 크기에 의해서 감동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진실뿐입니다. 진실과 정직,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물려받고 그 성품대로 살고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결한 삶, 이것이 하나님이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성품들을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보지 않습니까? 물론 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무릎 꿇고 우리가 가서 배워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평균적으로 병든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처음 일년은 주님의 사랑 때문에 교회 다닙니다. 그 다음 몇 년은 교회에서 일하는 재미로 다니고 그 다음은 교회에서 직분이 올라가는 재미로 다닙니다. 그 다음 몇 년은 교회에서 대접받는 재미로 다닙니다. 그 다음 몇 년은 떼어놓을 수 없는 인간에 꿰어, 끈끈한 정이 이끌려 다닙니다. 그래서 이십 년씩 신앙생활을 하여도 참다운 동기로 신앙 생활한 것이 도대체 몇 개월이 됩니까? 예배당 문을 들어서면서 마음속에 진정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내면의 동기를 가지고 교회당을 들어온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종교 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인들입니다. 다시 선교해야될 사람들입니다.
“공의를 행하며”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것을 가지고 고민할 주제가 못되었습니다.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가지고 고민할 시간이 있다면 이스라엘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사회 속에 가득 차있는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사기고 저울을 속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마땅히 통용되어야할 정직과 공의가 사라지게 되어버린 그 사회의 형편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마음을 찢고 깊이 통회하고 자복하는 변화가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경배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삶이 공의를 잃어버리고 정직과 올바른 도를 잃어 버렸는데 높으신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예배시간에 말하는 그것이 정말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나를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너희들이 어찌하여 여태껏 잘못된 저울, 속이는 도량형, 사람의 눈을 속이는 거짓 행위와 상술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 탈세를 일삼고 이웃사이에 착취하는 일들을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 과연 그러한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그 고백이 정말로 하나님이 믿어야할 고백인가 하는 것입니다. 헌신이 다 헌신이 아닙니다. 열심이 다 열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상해보려고 일에 미친 사람처럼 교회 일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생명을 줍니까?
“공의를 행하며”. 저는 이것이 우리 사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십시오. 정말 이스라엘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 동안 얼만 부유한 삶을 누렸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부유한 삶을 누렸습니다.
(예화)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초등학교 오 학년인가 육 학년 때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시절에 저희 학교 자랑이라고는 인구 많다는 것이었습 니다. 얼마나 많은가하면 초등학교 한학교가 팔 천 명이었습니다. 그때가 지금부터 몇 년 전입니까? 삼십 오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학교를 다녀보았습니까? 그 가난한 시대에 얘들은 왜 그렇게 많았는지 초등학교 때까지 이상적인 산아제한 구호는 삼남 일녀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더니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 뀌었습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자 “외동딸 외아들이 있는 집이 많습니다. 이웃끼리 형제처럼 지냅시다”. 이제는 “꼭 낳아야 됩니까?” 이런 식으로 되었습니다. 그 가난한 시절에 저희 학교가 서울 시내에 있었는데도 점심 시간에 도시락을 내놓으면 찌그러 진 새카만 것이 그 뚜껑을 열면 보리밥이 나옵니다. 그리고 계란은 한 반에 한 두 명 이고 주머니에서 소금에다 고춧가루 조금 뿌린 것를 부스럭거리며 꺼냅니다. 그런 아 이들이 태반이었고 점심시간이면 수도가로 달려가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그 때 겨울 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들어오시지 않아 아이들이 책상에 걸터앉아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얘야, 저것이 떡가루이면 얼 마나 좋을까? 저것으로 떡을 해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또, 초등학교 삼 학년쯤의 일입니다. 골목에 가면 사과궤짝 위에 양철판 하나 놓고 설 탕을 녹여 가지고 소다를 넣어 파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녁쯤이었습니다. 제가 하나 사서 먹는데 형제가 같이 장사를 했는데 하나는 이 뽑기를 하고 하나는 구두닦이였습 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를 부스럭거리며 비닐 봉지에서 꺼냅니다. 그러 더니 고기인데 고기가 아닌 기름덩어리를 잘라서 연탄불 위에 굽는데 형제들이 서로 미루면서 나누어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데 더 불쌍한 것은 그 앞에 있었던 저인데 그것을 보면서 침을 삼켰습니다. 맛있겠다.
그러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동안에 우리 나라의 여러 아픔이 있었지만 얼마나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까? 그 때가 아마 국민소득이 백불 정도일 때의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만 이 천불까지 올라갔습니다. 지금은 부도가 났지만 하나님이 얼마나 잘살게 해주셨는지 한번 보십시오. 제가 초동학교 육 학년 때에 가정 환경 조사서를 꾸미는데 한 반 학생이 육십 오명인가 되었는데 텔레비전 있는 사람이 두 사람 손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장사하는 집이었고 아버지가 군인 대령이었던 집, 그 한집이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렇게 텔레비전도 없는 가난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얼마나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까? 장정이 하루종일 일하면 밥만 먹여주면 얼마든지 일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렇게 가난하고 처절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때를 지나고 학고방의 세월을 지났습니다. 그래서 이만큼 하나님께서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 민족이 언제 한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해본 적이 있습니까? 여전히 우상이 들끓는 나라가 이 나라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반역하고 나라가 반동강이로 나서 동족끼리 원수 맺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가 아닙니까? 그런 속에서 하나님 이제껏 까지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전쟁이 일어났었습니까? 동족이 대치하고 있었지만 커다란 전투가 일어나서 몇 천명씩 죽은 적이 있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놀랍게 보호해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위태위태한 때를 다 넘기고 하나님께서 전후의 그 폐허의 당에서 이만큼 살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물론 사람들도 근면하게 일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땀흘려 일한 모든 민족이, 모든 사람들이 다 잘살게 되지는 않습니다.
망한 사람들을 보면 원래 게으르고 돈버는 일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망하지도 않습니다. 흥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수단 좋고 큰 사업에 쉽게 손대는 사람들, 성실하게 낮이나 밤이나 돈벌기에 골몰한 사람들이 완전히 망해서 알거지가 됩니다. 거지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사업가 아니었던 집안이 없고, 사업가 더듬어 올라가 보면 거지 아니었던 집안이 없다고 합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에게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게끔 보호하시고 지켜주신 것입니다. 무슨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을 누구를 존경하고 계십니까? 국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저는 한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이렇게 살게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민족을 특별히 보호하시고 지키셨기 때문에 그 은혜로 우리들이 살아온 것입니다. 지도자는 모자라고 방탕하며 포악하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 못했어도 부족한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생각하시고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주셔서 놀라운 성장을 이루면서 이만큼 안정된 신앙생활,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굶주리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는 그런 빈곤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윤택하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이북에 있는 적십자 대표단이 현대자동차공장의 운동장에 삼천 대가의 차가 줄지어 서있는 것을 보고 새차는 아닌 것 같고 무슨 차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쪽에 기름복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타고 온 것이라고 하자 씩 웃으면서 “거짓부렁이 마시오”라고 하더랍니다. 거짓말입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그렇게 잘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부유함에 비해서 우리 나라가 그렇게 정직한 나라가 되었습니까? 법이 통용되고 상식이 통용되는 공의가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잘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삶은 사회에서 점점 공의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바로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겪는 경제적인 곤궁함도 경제적인 부요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요해진 것에 대해 가난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되고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지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흔들고 계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나라를 축복해주셨으면 거기에 어울리는 정의로운 삶이 이루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부패했는지 보십시오. 왜 지금 외국에서 우리 나라를 불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국의 금융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대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사기 치고 협박하고 돈을 퍼 날라서 은행은 껍데기만 남겨놓고 속살은 다 빼먹고 마지막에는 죽이려면 죽이라고 배짱을 부리니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한국에서는 일어나고, 또 일어날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지 않는 나라가 이 나라라고 하는 생각들이 번져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외국사람이라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몇몇 사람들이 나라를 거덜 낼 정도로 엄청난 돈을 가져가고 가난한 사람들은 은행문턱을 두드려서 천만 원만 대출을 받으려해도 비굴할 정도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그렇게 문턱 높은 은행이 몇조 몇십 억의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돈들이 부정을 대출되고 그 커미션들은 정치인들이 챙기고 그것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나쁜 짓하고 사람들의 당을 만들며 살아가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얼마나 더러운 세상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결국 이 세상에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들은 그 민족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만 그 번영이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것이지 돈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신앙 없고 돈만 많아 보십시오. 나쁜 짓하고 쾌락을 좇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일들에 부와 시간을 쓰게 됩니다. 신앙 없이는 어떠한 번영과부도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경고하십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러나 지금 말씀드린 것이 우리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모든 나라가 축복 받았을 때에 더 정결하고 더 거룩하고 도덕적이며 신앙적이었습니까? 그런 나라는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혼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역사 속의 들러리입니다. 자신들이 정권을 쥐고 큰 기업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무대에 나서는 엑스트라입니다. 사극이나 전쟁영화에서 보면 주인공과 엑스트라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인공은 총알이 비오듯 쏟아져도 죽지 않고 엑스트라는 총소리만 나도 무더기로 쓰러져 죽어갑니다. 문제는 이 사회 자체가 공의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시대에 저항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고통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양심의 손을 얹고 이렇게 부패해져 가는 세상, 그리고 정말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인자가 짓밟히는 이런 세상을 살면서 마음에 손을 얹고 우리가 얼마나 고통 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항거했습니까? 생각도 없이 그저 이 나라 축복해달라고 중얼중얼 섬기는 염불과 같은 기도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공의가 짓밟히고 불법이 난무하고 그러한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갈 때에 얼마나 그 시대가 그들의 마음에 고통이 되었습니까? 거스르면서 살고 그것과 함께 항거하며 살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투쟁하면서 삶 속에서 그러한 잘못된 것과 더불어 얼마나 싸우려고 했는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띠고 화염병을 만들어 거리고 뛰어나가고 돌멩이 던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랑하셔서 은혜주신 내 백성 그리고 갈라진 내 나라를 위해서 내 민족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돈이 최고인줄 알고 세상에서 번영하는 나라가 최고인줄 알고 바보같이 그렇게 개돼지처럼 살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주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야 되는지를 배우고 안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모본을 본 우리들을 얼마나 이런 부조리하고 부패하며 공의를 잃어버린 이 세상에 사는 것을 마음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곳에 세상 나라가 설 수 없고 세상나라 서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설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그렇게 이 땅에 하나님이 주신 번영과 주님이 주신 놀라운 국가적인 기회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선용하는 대신에 타락의 기회로 삼고 방종의 기회로 삼아 나아가서는 불법과 더러운 부조리가 가득하여 공의가 땅에 짓밟히는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 사회현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것에 부역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법을 어기는 것을 떡 먹듯 하고 정도를 걸어가기보다는 요령을 부리면서 편법을 찾으려하고 기회 있는 대로 탈세를 하고 그릇된 삶을 살려고 하는 미꾸라지와 같은 삶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복 주실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39장을 보면 제가 아주 좋아하는 인물이 한사람 나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습니다. 종이었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해서 보디발의 집이 청와대라면 청와대에서 하수도 구멍 뚫는 담당자정도의 사람으로 팔려갔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요셉을 거들떠보기나 했겠습니까? 이민족이고 다른 나라에서 팔려온 하찮은 노예, 그가 그 집안에 무슨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 말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 요셉을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거기에 요셉이 없었으면 보디발의 집은 하나님의 관심도 끌 수 없는 집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믿지 않고 이방의 신을 섬기는 하나님의 약속과는 거리가 먼 이방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인 요셉이 그 집안에 들어갔습니다. 사회적인 직책으로 보면 그 집안에서 가장 천한 일에 종사하는 하찮은 노예에 불과했지만 노예인 그가 거기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신앙으로 살아가자 하나님께서 그 요셉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 요셉을 모든 사람들 가운데 드러냄으로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는 보디발의 모든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어떤 복을 내리셨습니까?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있지는 않지만 보디발의 정치의 입지도 끊임없이 올라갔을 것이고 그 집안에서 기르는 많은 짐승들이 낙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들은 점점 늘어갔을 것이며 곡식들은 풍년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요셉 한사람 때문에 이런 은혜를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십분의 일로 계산해서 백만이라고 합시다. 백만이면 누룩치고는 너무나 많은 누룩입니다. 이 정도의 세상을 바꾸어 놓기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말로 그렇게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에 그 백성들이 그 믿지 않는 사회와 역사에 끼치는 영향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의 근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불신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기독교 발전사를 연구하지 않고는 근대사를 공부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관계가 맺혀져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고 국채보상운동을 하면서 민족혼이 고취될 그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일만 이천명중에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언론, 정치, 사회, 문화, 도덕, 모든 방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면서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견인차들이 되었습니다. 순교신앙을 가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문제는 거슬려 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은혜를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셔서 그 사랑을 알게 하였으면 이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이제 그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아가 사는 것입니다. 잘 살다가 와야만 그 믿음은 유지됩니다. 잘 살아야지만 하나님께 칭찬 받는 신앙생활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특별히 복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나아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은혜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이 공의와 인자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실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이 싸움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믿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 세상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때문에 여기에 살아가는 모든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해야하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 외에 누구도 자신의 주인 노릇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는 바로 그러한 자기 사랑의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되지만 어느 시대도 단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 이유 때문에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복음의 전파도 있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파하는 복음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펼쳐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있지 아니하면 결코 선교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믿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우리에게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대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무엇이 거룩한 삶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나가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에 공의와 인자, 인자는 헷세드입니다. 헷세드는 아가페입니다. 아가페와 쩨덱, 즉 미쉬파트라고 일컬어지는 공의는 하나님의 가장 중심적인 성품입니다. 즉 불의하고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차마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또 하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바라보시면서 긍휼히 여기는 불붙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주님의 성품의 가장 중심의 자리에 있는 위대한 성품입니다. 그렇기에 이 두 가지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그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들여올 때에 그것이 참으로 진지하고 진실하다는 사실을 삶을 통해서 그들이 확인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주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비유하자면 책하고 비슷합니다. 요즈음은 뜸하지만 전에는 전집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읽게 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전을 많이 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읽는 소수의 사람들을 먼저 감동시켜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두 방법을 함께 잘 사용하면 더 상승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출판사에 있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돈을 아무리 부어도 내용은 없고 선전을 훌륭하게 하면 그렇게 선전만 해서 팔리는 책은 오 천 권이 끝입니다. 오 천 권이 팔리고 나면 입에서 입으로 소리만 있고 내용은 없는 책으로 전해지고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 생각에는 계속 대문짝 만하게 광고를 내고 돈을 쏟아 부으면 책이 공중으로 뜰 것 같지만 그것은 경영가적인 생각이고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선전을 해서 오 천부를 떼었는데 그 오 천부 속에 진실한 내용이 깃들어 있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있으면 그 다음에는 선전을 그만해서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면서 사람들이 책의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드물게 베스트 셀러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고 여러분들이 능수 능란한 말을 가지고 복음을 잘 전하면 그것을 들으면서 감동을 받고 한 두 번은 교회에 나올 수 있고 한두 사람은 예수를 믿을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돌아가서 자신이 기독교와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나면 왜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눈에 잘 들어옵니까?
엊그제는 텔레비전에서 잠깐 보니 나쁜 전화로 이웃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는데 거기에다 몇 세 남, 그리고 그 옆에 집사라고 써 놀았습니다. 그렇게 방송사에서 써주는 자체가 저는 기분이 나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실 불교에도 그런 명칭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자막에다 그렇게 쓰는 적을 한번도 못 보았습니다. 집사, 장로는 목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개인적이며 종교적인 영역에서의 직분에 불과합니다. 사회적인 직책도 아닙니다. 여러분 회사에 가면 아무개 집사라고 부르는 것 보았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신문이나 매체에 기록하는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저항감입니다. 좋게 말하면 그래도 기대는 건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세상이 원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 문제 많은 시대에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런 풍조를 거스르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그 공의로운 성품을 십자가를 통해 배웠습니다.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이라도 처참하게 죽이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았기 때문에 주님의 그 성품에 감동을 받으면서 의롭게 사는 것,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물론 고통스럽습니다. 뇌물 받으면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아야 될 뿐만 아니라 이 세대 또한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화) 제가 가르친 학생 가운데 하나가 중앙정보부에 있던 학생이 있었습니다. 지위가 꽤 높 았습니다. 진짜 그 시대에는 명함을 내밀면 나는 새도 떨어지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데도 늘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주앉아 대화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수님, 제가 20여 년 동안 각종 요직에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르겠지 만 법 앞에서는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사실 그 한마디를 고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유혹과 싸움이 있었을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세상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에 우리가 그런 각오를 가지고 살지 않으면 여러분은 일생을 살면서 단 한번도 주를 위해 핍박을 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전도하러 갔다가 한마디를 듣는 것도 물론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짝 받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지 말라는 심한 꾸중 속에 교회에 오신 분이 있습니까? 그것도 핍박입니다. 그러나 피나는 핍박은 아닙니다. 핍박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에도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상급일 것입니다. 그러나 의롭게 살아가려고 불의한 세상에서 항거하는 마음 없이 주를 위한 고난일 수 있겠습니까?
서마나 교회가 왜 고난을 당했었습니까? 예수 믿는 규칙이 너무 까다로워 고난을 당했습니까? 성경에서 하라고 하는 것이 너무 많아 힘들어서 고난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진리대로 살려고 하다보니 세상 사람들과 충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살고 싶어하는 대로 살아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원수 맺는 일도 불사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있었으며 그렇게 고난받는 그들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정말로 힘주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오늘 이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 나라가 위기를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집에 있는 달러 하나라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원화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 달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혹시라도 여러분이 장롱 속에 넣어둔 것이 있다면 그렇게 살아서는 하나님 앞에 복을 받지 못합니다. 달러가 몇 푼 오르는 것을 기대하며 묻어놓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까? 강도가 몇 집을 털자 몇 만 불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인간입니까?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오늘 여기서 선지자가 말한 강포한 민족들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고통을 받는데 그런 식으로 합니다. 도대체 물가가 오르면 경성을 하고 하나님 앞에 절약을 해야지 라면, 설탕을 일년에 먹으면 몇 포대나 먹는다고 사재기를 합니까? 정말 이 세상에 금이나 은과 함께 망할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슈퍼로 달려가는 네 사람중 한사람은 교회에 등록된 사람일 것입니다. 이러니 세상이 변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식으로 바보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 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불의와 불법을 행하면서 살아갈 때에 섬뜩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의로운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이 세상에 부패와 타락이 일반화 되어있는 것 같아도 요소 요소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정직과 공의를 따라 사는 정직한 백성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것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핍박이 싫어 어울리고 세상에 아부하고 불법을 행하며 공의를 짓밟고 인자를 멀리하는 삶을 살다가 주일날 와서 헌금이나 하나님 앞에 들고 와서 예배가 어떻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두 가증한 것입니다. 은혜 받으면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주님이 왜 우리에게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까? 그 사랑 때문에 고난도 견디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에 없는 넘치는 위로를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고통받는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하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까?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명예가 줄 수 없는 놀라운 평안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일 때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진정 사는 것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고 남들이 모르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대열에 선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교회가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성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 지경에까지 오게되었고 이제껏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좋은 기회들이 어떻게 사용하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는 많이 받았지만 도무지 소작료를 내지 않고 살았던 의와 공의와 신앙이 실종되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주님의 종들로서 살았는가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로 깊이 뉘우치고 돌이켜야 합니다.
도대체 요즈음의 세상을 보면 돈에 미친 세상입니다. 돈만 있으면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대학도 돈 가지고 들어가서 수많은 정직한 사람들의 마음에 못을 박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 가지고 정권을 잡고 돈 가지고 정치를 하고 돈 가지고 사람들을 매수해서 특혜를 받는 사람들이 버젓하게 걸어 다니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아파하지 않는다면 한통속인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의 제물이 아니라 너의 삶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한시대의 역사는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준 분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 되었다면 그 돌을 누구에게 던지겠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는 나라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깊은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스스로 회개하고 이런 때에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았던 많은 날들을 참회하고 주님이 다시 우리를 복 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거룩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의와 정직과 인자를 사랑하는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살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로운 영향력들이 이 민족과 사회에 깊이 침투하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깨어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냐” 반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교회의 가장 큰 영광은 교회의 재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이는 교인의 수도 아니고 학력 많고 돈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교회의 영광이 아닙니다. 더욱이 교회의 영광이 유명한 목회자나 학벌이 많은 목회자가 교회의 영광일 수도 없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기에 모였을 때에 잊지 않고 찾아 와주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대치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무엇을 주고도 우리는 그것을 사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아무에게나 쉽게 행해주시지 않습니다. 보이는 교회당은 돈 있으면 짓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는 돈이나 땅이나 사람들의 재능으로 지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거룩한 삶을 살고싶어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있어야하고 불의로부터 떠나고 공의롭게 살고 싶어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좇아 살고 싶어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있어야 하고 진리를 위해서 죽는 것을 거짓과 함께서 사는 것보다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정직하고 진리에 붙잡힌 성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 세상에서 칭찬 받는 것보다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더 존귀하게 생각하는 거룩한 일꾼들이 그곳에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교회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경배하더라도 그 자리에 어떤 흉악한 죄인들이 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모이는 순간마다 찾아오셔서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시고 고통에 바진 자들을 건지시고 죄 가운데 빠진 자들을 용서하시고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주셔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보여주셔서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한다면 그 교회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진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커다란 건물도 없고 일정하게 모이는 장소도 별로 없었습니다. 시장에서나 거리에서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곳에 주님이 나타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완악한 사람들의 마음에 심장을 관통하는 복음의 능력을 주셨고 강퍅한 죄인이라도 무릎을 꿇고 주님을 부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권세 있는 복음의 능력을 주셨고 선교의 열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듯대로 살고 싶어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주를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는 충성심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교회였지만 모든 것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삼만 명이 아니라 삼십만 명으로도 엎어놓을 수 없는 세상을 그들은 불과 소수의 사람들로서 세상을 뒤엎고 이 세상이 모두 두려워하는 커다란 일들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종종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을 볼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진실하다는 것과는 차원이 틀린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학교를 어디 나왔는지 무엇을 하든지 문제가 안됩니다. 많이 배웠으면 많이 배운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이고 부족하면 부족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재주가 많은 사람이면 그 많은 재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이고 재주가 별로 없으면 없는 재능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이 기도하는 것도 떠오를 것입니다. 말씀의 깊은 은혜를 받는 것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탁월한 충성심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제 판단에는 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때 가장 깊이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 그는 연약하지만 그를 붙들고 계신 너무나 위대하고 능력 있으시며 하나님이 그를 매우 특별히 돌보고 계시다는 표증을 너무나 확실하게 잘 보여주시기 때문에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그 무엇을 풍기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가 떠들고 걱정을 할 때에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입에 바른 소리가 아니라 영혼의 평안에서 우러나오는 권면으로 “너희는 담대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길이라고 말하는데 사람의 신념이나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격려하시는 음성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을 향한 저의 가장 큰 간절한 기대는 예수 믿고 성공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도 더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더니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보면 선지자에게 이런 말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시는 놀라운 증거들,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범사에 모든 여러분의 사람의 영역이 하나님의 시선 앞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에는 더러운 뒷거래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디든지 하나님의 눈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화) 어느 성도가 목사님이 심방을 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방에 그림이 있는데 눈이 하나 그려져 있더랍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생각하고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에도 있는 것입니다. 나오다 보니 거실에도 또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다가 차를 보니 차안에도 눈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묻자 “어디서나 하나님이 보신다는 뜻입니 다”. 어디서나.
그것이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이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시고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어합니다. 그의 인생의 가치는 사람들에게로부터 환호성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 그의 인생의 가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 성경은 여기에 덧붙입니다. “겸손히”라고. 이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모든 은혜도 모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도 깨닫게 하시는 모든 은혜도 우리가 낮아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하나님을 거스르고 교만한 것은 패망으로 가는 선봉입니다. 선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봉은 전쟁시 군인들이 줄지어 가면 앞사람에 가려 앞에 안보입니다. 그래서 선봉이 기를 높이 듭니다. 그것이 선봉입니다. 그래서 깃발만 보고 갑니다. 그런데 교만은 바로 우리의 모든 영역의 삶을 파멸, 패망으로 이끌어 가는 길잡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계속 쫓아가면 결국 구덩이 속에 떨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고 낮아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기도를 많이 안했습니다만 옛날에 제가 있던 교회의 목사님은 늘 “하나님 한 단계씩 올려주시옵소서”. 연초면 늘 기도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셋방 사는 사람은 전세로 올려주시고 전세를 사는 사람은 집을 사 가지고 가게 하시옵소서. 여러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실하게 의지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겸손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고 “주님 제 삶의 어느 부분을 깎으면 주님의 마음에 더 합당하겠습니까? 주님만 기뻐하시면 제 인생은 아무래도 관계없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살아야지만 제가 이 땅에서 살아있는 것이 주님에게 기쁨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묻는 겸비함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미가서 6장 앞부분을 맺으면서 다시 한번 우리들이 우리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받은 은혜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았던 삶을 비교해봅시다. 주님이 우리를 정결케하고 은혜 주시려는 노력의 큰 깊이와 넓이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맺혀 드렸던 삶의 열매, 공의의 열매, 인자의 열매, 성결의 열매가 어떻게 비교되는지 우리가 정직하게 돌아보고 이제 금년을 보내면서 금년, 그리고 새해에는 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시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어서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깨닫게되고 아직까지도 예수를 믿으면서도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 운운하면서 자시하고 있는 어리석고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공의와 인자가 사라진 것과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인 삶이 실종되어 버린 것을 깊이 경고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도 앞으로 이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으로 기쁘시게 할까 1